2. 성령사역의 목적 성령 사역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성령론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구현해 나가는 것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모든 구원행위를 관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 때문이라는 관점을 잊어서는 않된다. 예를들면,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말하는 성경구절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사도행전 7장 55절~56절에서‘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라고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이 스데반의 그 순교의 웅장한 모습을 소개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그 사건을 통하여 전달하려고 하는 것에 그 의도가 있다. 그런니까, 스데반의 인생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셨다면, 그의 인생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두 이루어진 인생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어떠한 자리에 서 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고자 하는 영광을 이루어 가시느냐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의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성령의 목적이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성령을‘영광의 영’이라고 불렸다.1) 사도들은 성령이 이땅에서 무엇을 위하여 사역을 하시는 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성령의 사역 하시는 일차적인 목적은 성도의 구원에 있었고 그러나 그것은 구원 받고 천국가는 것에만 일차적으로 전체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돌아가야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날 수 없는 것이 성도의 구원이다. 구원 받고난 이후의 삶을 말해야 하는 필연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과 영화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다만, 성화는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성화를 우리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하는 이유는 그 성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영광이 돌아가는 바로 그것이 내 구원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였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아니하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삶에 닮아 가도록 징계하고 갱신시키고 연단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들의 삶 위에는 아픔과 좌절이 있고 고난을 수반하는 것이다. 죄인라는 육체적인 원리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돌아가는 것에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광을 구하는 데에 가장 큰 원수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육체적인 원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 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끊임없이 성화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고 우리들 자신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하기 위해서 사역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아담이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은 인간이 그 하나님의 형상을 대변하는 자로 창조되어 진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2)에 보면, 에덴을 넘어서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주시는 것이다. 온 땅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내도록 세우신 자가 아담인데, 고전 11장 7절3)에서도 사도 바울 역시 인간을 하나님의 현시로 간주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떠한가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볼려면,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바로 그 사람을 보면 된다는 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속에서‘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다’이라는 의미는 그 여자가 남편이 어떠한 가를 보여준다는 것으로써 성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시가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는 사람을 통하여 계시되고, 남자가 어떤 분인가는 그 여자를 통하여 나타난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땅위에서 지으셨는데 사람이 타락해서 하나님의 의도가 좌절되었는데, 결국 그것은 깨진 거울과 같은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데, 즉 사람이 하나님을 현시하지 못하므로 그 결과로 구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원형적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실천적으로 말하면 왜 성령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적용시키고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성화와 영화에로 이끌게 하는가 하면, 그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해서 지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반영하는 완전한 거울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광의 영을 부어 주신 까닭은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위에 온전히 잘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 라는 사실이다. 구원받고 천국 가는 그것으로만, 그렇게 이기적인 관점으로만 구원을 이해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곧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성령은 우리를 통하여 어째든 하님의 영광이 있는 굴절되지 아니하고 그대로 드러나게 하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르려고 하는 상태가 신학적으로 말하면, 바로‘영화’인 것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그대로 나타내 주는 상태가 영화로운 상태, 영광에 이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에 이를때 까지의 상태라는 말은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 면류관을 쓰고 의기양양한 상태가 아니라, 나를 통하여 나의 상처받은 고난에 동참한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어 지는 그 날, 그 시간까지 성령이 역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 말하는 복된 날을 누리는‘웰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과 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품울 갖추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겠다. 바로 이것이 성령충만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부귀 또는 명예 등과 관련된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될지언정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 처해지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는 것에 우리의 분별력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한국교회의 기도내용과 다른 부분 한 예를 소개하자면, 중국에서 조선족교회의 대표기도 내용에서는, 그들은 대표기도 중에 절대‘복을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에 보듯이 설교후의 기도내용은 언제나‘말과 행실을 통하여 저희들이 간절히 원하는 바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 어렵더라도 뒤로 물려서지 아니하고 신앙을 지키게 해 주시옵소서!’‘복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한다. 한국교회에서의 대표기도와는 다른 차원의 기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금도 주시고 은도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건강도 주시고 권세도 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자에게 선물로, 은사로 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주실 때에는 어떤 특별한 목적과 용도를 가지고 주시기 때문에 받은 자의 안위를 위해서 결코 주시는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잘 사용하면, 더욱 더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영광을 받지만은 그걸 받은 가운데 욕심으로 탐욕가운데 받아 혼자 누리고자 하면, 그것은 결국 자신에게 슬픔이 되고 사슬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원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가치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원전부터 나를 예정할 때에 나를 통하여 받고자했던 하나님께서 품고 있던 그 영광을 나의 생애를 통하여 그 영광을 거두시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영광과 기쁨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를 영원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갖고 있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목적이 있고 자기의 영광을 온전히 거두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영광의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구속의 사역에 적용 하게 하시고 적용한 바대로 구원받게 하고 성화되게 하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성령이 사역은 영광을 위한 사역인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에 돌리는 일에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돌리는 일에 수고스럽게 하였던 일에 동참한 기록인 것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로마서 1장 23절4)에 보면, 어떤 특정한 하나님의 법을 어길 경우의 죄인된 관점은 율법적인 것이다. 그러나 죄인의 영적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반역이다.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돌릴 의식도 없고 돌릴 마음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을 알지도 못하는 상태가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로마서 3장 23절5)에 보면, 이 죄는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고자 하는 그 구원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상태, 영적인 심적인 상태 전부다 죄인 것이다. 타락의 더 큰 비극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부터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면, 박애주의자들 조차도 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아무리 그들이 선한 일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 죄인됨의 상태를 더욱 분명히 말하고자는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준이다. 어떤 일에 있어서 성도가 해야 될 지의 여부는, 사도 바울이 행한 바와 같은 사랑의 원리하에서 실족에 대한 행동 기준은 이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6절6)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도록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것이다. 결국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성경의 구절에 이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 에 따라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선악간의 기준이 말씀의 원리를 쫓아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담배 피우지 말라’라는 것을 오히려 반문하는 사람은 그 묻는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언제나 구체적인 행동에 성경의 기록여부를 묻는 것이다. 그런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의식이 없이 사닌까 언제나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살아갈 궁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기도하며, 기다려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언제나 그릇됨이 없는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자에게 바른 지식을 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는 아버지의 뜻을 알리라 라는 말에서 보듯이 주님의 방식은 순종의 의지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이 나중에 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지를 보여 달라는 가증스러운 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억지로 떼쓰는 기도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처럼의 기도는 응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전혀 못 들은 체, 주무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필요를 외면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 하지 않으셔도 우리속에서의 성령께서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컨텍스(Context)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삼으시고 자신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상태, 바로 이것이 성령사역을 이해하는 바로 기본적인 출발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후에 그분의 육신이 하늘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 있고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것이고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과도 함께 있을 수 있는 육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드러내신 상태인 것이다. 이 부활은 우리가 장차 어떤 영광에 이를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모델이다. 이처럼 우리의 몸도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도 굴절되지 않은 그대로 계시하시는 데에 까지 나아가는 사건이 바로 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인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신학적인 의미이다, 생물학적인 의미에서는 몸은 다시 사는 리바이블 한 것이지만, 다시 산 것은 원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해 가는 것이다. 더 나은 상태라 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이제 더 드러낼 수 있는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다 갖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에서 18절7)까지 보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들로 하여금 바라보도록 지시하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영광을 바라보도록 지시한 성경 말씀이다. 주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인데, 그 성령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영광의 상태를 하나님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 영광의 상태에 도달하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 성령 사역의 목표인 것이다. 로마서 8장 11절8)에서는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6장 4절9)에 이미 암시가 되어있다. 하나님의 영광은 새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회복한 것을 의미한다. 새 생명을 입고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 영광가운데로 우리가 이끌려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의 상태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령의 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의 성령의 사역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 성령론 강의를 할 때 이제 주목해 보는 것은 각 단계인 적용하는 것, 성례전, 종말론, 교회론 등 다룰 때 모든 긍극적인 지향점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전개가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어떻게 성령께서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우리를 동원해 가시는 가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성령의 사역을 관통하여 아는 것이 성령 이해의 가장 직접적인 목표인 것이다. 이 처럼의 이해가 바른 성령이해의 바른 관점이고 요지이다. 따라서 성령사역의 초점은 포괄적인 의미로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위에서 완전히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이를 때에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마땅히 부활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야 되며, 완전한 상태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여기에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나의 구원이 마지막 날까지 성령의 인도아래서 이룰 줄 확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여기에서 출발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나의 영광을 다른 신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자기의 영광이 우리안에서 구현될 때까지 우리를 절대 놓으시지 않으신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이다. 그래서 구원확신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돛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 사랑은 자기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 확신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동기를 가져온다. 성도들의 마음속에 구원에 관한 아무런 체험이나, 감정변화나, 특별한 경험과 이상이 없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자라면, 나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구하시는 성령의 손 안에서 확고하게 붙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성화의 주체가 성령이고 영화에 이르게 하실 자가 성령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구원은 곧 하나님 자신의 일이요 나의 구원은 곧 하나님 자기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은 반제(antithesis)가 아니다. 즉 인간의 구원과 언제나 동시적이다.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간의 구원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구원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반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내가 고통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려면 인간이 최고의 행복으로 누릴 수 있어여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자기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은 언제나 동시적이며, 함께 한다. 한 죄인의 완전한 구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자신의 최고의 영광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개는 서로 반제, 양립되는 것이 아니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구원과 동시적인 것이다. (1강 마무리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온전히 거두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목적에 주님 나 자신을 받쳐지길 원하오니 주께서 원하시는대로 빚으시고 또한 원하시는대로 사용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게 하시고 매 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우리들 머리위에 태양같이 빛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또 말을 통하여 나의 마음과 생각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곧이어 3부. COMING SO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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