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3부. 구원의 계획 / 박혜근 교수

하나님아들 2014. 5. 30. 22:06

 

3부. 구원의 계획|다시읽고싶은글
keeper77 | 조회 85 |추천 0 |2006.07.20. 17:09 http://cafe.daum.net/keeper77/17Ia/5 

 

 

 

3. 구원의 계획


  후크마의‘개혁주의 구원론’은 그의 생전에 칼빈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한 책이다. 벌코프의 조직신학이 철학적이며, 학문적인 요소가 많은 반면에, 이 책은 쉽게 저술되어 성령론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된다. 구원의 계획이 있느냐? 는 질문에 대한 답은‘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구원의 계획’이라는 말을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 이 말을 사용하는 당위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모든 일에 의지와 계획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격의 특징이다. 우리가 집을 설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세상을 지으시고, 지으신 세상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 세계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들과 특별히 그 가운데 인간들을 위한 계획이 있다. 오늘 이 구원의 계획을 다룰때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우리를 향하신 자기의 계획을 갖고 있었고, 그 영원전의 계획을‘예정’또는‘작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으신가 하는 문제는 사람의 철학적인 추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1장 26절1)에 보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계획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즉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겠다는 의미는 즉 하나님의 자기 형상을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계획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구원의 계획 속에 이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는 것과는 일정한 연관이 있고, 하나님께 우리에게 자기의 형상을 주시는 이유는 그 분이 우리를 구원계획 하실 때 가지고 있던 구원의 목적과도 일정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창세전’에 라고 하는 구절이 계속 나오는데, 사도행전 2장 23절2), 4장 28절3)의 성경적인 근거 구절을 확인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바 되었다는 구절이다.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예수님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과정을 겪고 죽으시는지에 관한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 또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속에 정하신 바가 된, 그 계획의 결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죄가 십자가의 역사적인 원인이다. 십자가의 있었던 원인은 우리의 죄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인과관계의 역사적인 원인은 사람이 제공하였는데, 인과관계 전체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계획에 이다.‘십자가의 원인은 죄다’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우리의 죄가 원인이 아니고 본래적으로 십자가는 세워져야만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의 죄가 아니라도 십자가는 세워져야만 한다는 주장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은 원래적으로‘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하나님이다’라고 말한다. 삶이 죄를 짓지 안했더라도‘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오셔서 죽으셔야만 했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몰트만이다. 십자가의 사건은‘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한다’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강조하건데, 이 말에 현혹되면 결코 아니될 것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어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성품의 결과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이단이다. 분명코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은 인간의 죄 때문에, 바로 그 죄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이고 결정적인 근본 이유이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짓지 안했더라면, 십자가는 이 땅위에서 세월 질 필요가 없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가 세워진 것이고 다른 어떠한 이유도 아니다. 이 공식을 넘어가면 전부 이단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확실한 기준이다.

 

  그런데 성경의 에베소서 1장 말씀에서 ‘하나님의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또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에서 하나님의 그 정하심과 예정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죄가 십자가의 원인이 아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죄가 십자가의 원인을 말하고 있는데, 이 구절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과 그것 때문에 십자가의 세워짐을 포함한 전체는 하나님의 정하신 바에 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신학적으로 인간이 죄를 지고 타락하심도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 말은 그렇게 말했다고 하여서 죄를 방관한 것이 아니고 이 모든 전체가 하나님의 계획아래 정하신 바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죄의 원인자 또는 조성자는 절대 아니다. 이것을 인간의 이해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죄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어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지을실 것을 아셨지만, 그리고 그 죄를 짓고 난 뒤에, 미리 예정하신 사람들을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속하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죄를 조성하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결단에 따른 죄의 허용은 하시지만, 그러나 죄의 원인자는 아니시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의 말씀은 말하자면, 우리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담의 타락이고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속죄의 사건인 십자가이다. 그 두가지 중요한 사건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도, 십자가의 사건인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이 모두가 성경이 역사 전체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예정하심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만한 어떠한 우발적인 사건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일이 한번이라도 일어난다면, 하나님은 전능, 전재하신 분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어떠한 사건이든 하나님의 전능하심, 전재하심을 방해할 만한 우발적인 사건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이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사건의 저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 하심속에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도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은 매우 포괄적이다. 이 하나님의 계획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방식의 양식까지와 그 죽음이 가져올 결과, 죽음 이후의 사건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할 때의 성경의 말씀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써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그들이 서로 공모하여 한 것은 그것도 미리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으며, 심지어 가롯 유다가 배신한 것도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둘러싼 모든 사건과 구체적인 내용이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떠한 사건도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벗어나지 않는다. 루터가 말하기를 사단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탄이라고 말했다. 사단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 경륜, 하나님의 작정을 성경은 단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예정 이라고 부르지 아니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영원한 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영원한 작정, 영원한 예정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그 경륜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경륜속에 벗어나 있지 않다. 하나님의 작정은 영원하다. 왜 영원한 것이냐면, 영원 이라는 말은 과거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작정은 영원한 과거에 있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성경을 읽을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베드로전서 1장19절부터 20절까지 보면,‘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이‘창세전부터’란, 헬라어는‘프로기노스코’라는 말로‘프로’라는 말은‘앞에’라는 의미로 겐나우는‘낳다’라는 말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도 겐나우로 쓰이고, 어떤 일을 새로 만들어 시작하는 것도 겐나우 로 사용한다.어떤 일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세계인 물리학적인 천체적인 모든 것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알리신 바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것 또한 그 때 이미 작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의‘프로기노스코’는 영원한 과거에서부터라는 말이다. 즉 이말은 오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있기도 전에 온 우주의 피조물들이 있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혼자 계실때에, 모든 만물이 있기도 전에 라는 말이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하나님의 작정하심속에 있었다. 그래서 이 구원의 계획은 사실은 죄인의 구원 계획이다. 결코 사람의 구원 계획이 아니다. 영원전에 사람들이 범죄하기도 전에 그런데 죄인의 구원이 되는냐는 것은 성경에서의 만물이 있기 전에 의인도 악인도 있기 전에 사람들이 있기도 전에 그 때 이미 하나님이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을 작정하셨다는 것이다, 이때의 어린양은 제사장적 용어이다. 이 용어는 속죄의 양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것이 언제 작정되었느냐면, 창세전에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물이 태어나기도전에 하나님께서 속죄의 양을 준비하신 것이다. 이 말씀구절의 능동적인 주어는 하나님이고 이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나, 의인도 죄인도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것이다. 참으로 구원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계시로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계시를 특별계시라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우리의 구원을 땅에 기는 구더기에게 교육하는 것과 같이 마치 구더기에게 수학적 미분, 적분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일이다. 성경에서 야곱과 에서에서의 선택교리는 롬8장 28절4)의 여기서 하나님의 뜻대로의 성경 전체구절이 그 다음 구절인‘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미리 정하신 이 말은 어떤 사람이 태어나기도 전에, 선과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있다는 것이다. 프로기노스코 라는 말과 미리 정하신 것 과는 같은 의미인 것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하신 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서 누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구원의 계획은 이 땅이 지움받기도 전에, 창세전에 미리 작정하심의 하나님의 예정속에 계획되어 있는 것이다. 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건은 과거의 하나님의 과거의 작정속에 있던 것이 오늘 나의 믿음으로 구현된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구원 받은 것이다. 누구도 우연히 믿은 것이 아니고 누가 믿은 것도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는데 억지로 떼를 씀으로써 믿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데로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안전하다.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구원이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작정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과거부터 영원전부터 영생을 누리기로 작정된 데로 믿고 영원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영생을 누리는 이 특권은 어느 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만물도 짓기 전에 우리에게 영생하기로 원하던 뜻대로 믿고 영생의 약속을 받은 것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실체적이며 초월적인 드라마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절5)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것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구원의 초월적인 드라마인 것이다. 이 말씀의 구절은 예수님의 제사장적 기도의 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기도의 한 부분중,‘때가 이르렀사오니’에서의 그 때는 시간으로 도량할 수 있는 물리학적인 시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때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말하면, 하나님께서 작정하셨던 시간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이 때라고 인격적이고 계획하신 바로 그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 작정의 시간이 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때가 되었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당신 스스로가 죽으실 때를 알고 있는 것인데,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만 하는 사실도 하나님의 경륜속에 있음을 하나님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비겨가게 해달라고 하는 간절한 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은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 죽어야만 한, 그 때를 이미 알고 있으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인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아셨고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만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내가 사흘 뒤에 부활하신다고 한 말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의 작정을 세울 때에 예수님이 거기에 계셨고,“Pactum Saltis”를 수립할 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분이 함께 계셨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때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고 동시에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사건이 바로 그 유일한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이 어떻게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는가 하면, 자신이 십자가 상에 높이 들리움으로써 십자가를 아들이 영화롭게 되는 사건으로 알고 있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사건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자기 이해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들은 자기가 영화롭게 되는 사건으로 비록 고난과 수치의 죽음이지만, 구약의 모세의 장대의 놋뱀 사건과 같이 높이 매달리는 하나님의 작정하시는 뜻이 그대로 완전히 이루워진 십자가 사건의 최고조의 이르렀다는 영화로운 그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그 최고조의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 것이고 영화로운 사건인 것이다. 아들은 집행자로 아버지는 계획하시는 분으로 그 작정하심이 완성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의 절정이며, 최고조의 경륜이다. 요한복음 17장 8절, 21절, 23절, 25절에 아버지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5절에 보면, 아버지여 창세전에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영광이라는 주제가 창세전에 라는 말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 24절6)에 보면, 창세전으로 거슬려 올라가는데, 영광이라는 말이 이 본문에서 십자가를 의미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께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죄인의 구원 계획은 죄인이 만들어지기 이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를 돕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기능론적)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나를 도울 수 있습니까?(본질론적) 라는 질문에 본질론적인 기독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능론적 기독론이다. 전자는 기능론적 기독론이고 후자는 본질론적 기독론이다. 본질론적 기독론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나를 도우실 수 있고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기능론적 기독론은 나는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나는 모른다. 그분이 어디서 오셨는지 그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나는 모르지만, 다만, 내가 한가지 아는 것은 그분이 나로 하로금 눈을 뜨게 하고, 나로 일어나 걷게 하고, 나로 하여금 구원의 빛을 보게 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이다....과연 어느 것 인가?


  둘 모두 맞는 말이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 때문에 나를 돕는 다는 고백과 가르침이 있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잘은 모르지만, 그분이 나를 돕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둘 다 포함하고 있다. 한쪽만 가지면 않된다.사실은 성경에서는 본질론적인 기독론은 30%정도 밖에는 않되고, 기능론적인 기독론은 70% 정도를 차지한다, 기능론적인 기독론이 휠씬 많은 부분을 할당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 것인가 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 예수님이 이미 영원전에 작정하신대로 오셔서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정체에 관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문제인 것이다.


  기능적인 기독론의 철학적인 구조는 이원론적인 인식론이다. 이것은 좀 어려운 말인데, 순수하게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나는 그분을 나는 잘 모르는데, 그분이 어떻하든지 도와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의 정체성을 단순히 받아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도 성경이 인정하고는 있지만, 기능론적인 인식론인 기독론만 가지고는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는 없다. 계시로 드러난 본질론적인 기독론이 필요하다. 이것을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기능으로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본질과 효과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효과 때문에 예수의 본질로 가는, 실제적으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경우가 많다. 믿는 사람의 체험적인 신앙으로 믿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 때문에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이것 말고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이 본질로부터 효과로 가는, 이 본질에서 출발는 본질론적인 가르침은 꼭 필요하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이 병들기 쉬어진다. 왜냐하면, 구속론적인 효과에서부터 언제나 그리스도 에게로 항상 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성경에 병나는 기사가 있을 때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은 병 나음을 체험해도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경우가 있다. 10명의 문둥이가 병나음이 있었지만, 9명은 각기 자기 갈 길을 가고 단 1명만이 돌아온 것과 같은 이치이다. 돌아온 그 사람은 효과 때문에 돌아왔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그가 얻었던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돌아 온 것이다. 사실은 그는 효과 때문에 돌아 온 것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해서 항상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저지른 잘못된 것 중의 하나가 기도함으로써 병났고 방언하고, 신유은사 받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기본적인 은사의 체험인 효과적 현상이 항상 바른 본질적인 믿음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는 근거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본질에 관한 질문은 즉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께서‘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예수님의 본질에 관한 질문은, 절대로 효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본질에 관한 지식은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효과를 통해서 본질로 도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이 효과가‘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바른 본질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계시가 필요하다. 즉,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이것 없이는 하나님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유인즉 사실은 예수님의 본질에 관한 지식은 우리의 모든 존재의 이성적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의 이해는 창세전에 이루어진 것으로써 계시되지 않는다면 절대로 우리의 이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즉 성령의 감동, 감화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도저히 알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어떤 사실을 분석하고 분석한 결과로 결론에 예수님 누구신가를 이룰수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은 기적중에 기적이다. 이것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전 과거에 사람이 죄도 짓기도 전에 의를 행하기도 전에 만물도 지움 받기 전에, 하나님께서 죄인의 구원을 세우는데, 그 죄인의 구원을 세울 때에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그 작정하신 사람이 바로 우리였다는 사실이고, 그 작정의 결과에 따라 오늘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전에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영원전에 가졌던 그 인격적인 언약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구속언약이라고 하는데, 은혜언약, 행위언약과는 또 다른 개념이다. 구속언약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우리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각자의 무엇을 하실 것인지 역할을 분담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아버지가 누구다' 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역사를 보지 않고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는 누구냐 하면, 영원전에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고 작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인간이 되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실 수 있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성자이다. 아들은 영원히 아들만이 죽으실 수 있는 분이다. 아버지도 죽으실 수도 없는 영이고, 성령도 죽으실 수도 없다. 아버지도 성령도 사람으로 오실 수 없다. 오직 아들만이 사람으로 오실 수 있다. 영원히 이러한 것이다. 아들은 사람의 몸으로 가지고 태어나실 수 있고 지금도 이러한 몸을 가지고 있다. 또한 그가 영으로 계신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원자라고 표현한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루기 위하여 믿는 자들 가운데 교통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영원히 이러한 것이다. 그분도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인 기능이 각기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축도를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 아버지 사랑, 성령의 교통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삼위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구속사적인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가 작정하시고 아들이 그것을 이루시고 성령이 그것을 적용시키는  이 삼위 하나님의 협력하시는 사역의 결과가 아니면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사람이 구원에 이른 것은 삼위 하나님의 수고스러운 사역의 결과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구속언약 가운데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작정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는 성령의 이름이 여러 가지로 쓰어져 있는데, 그리스도의 영 이라는 것은 잘 이해하여야 한다. 즉 이 말은 그리스도의 사역하시는 것을 각자에게 증거하시고 적용하시는 것 때문에 그 분을 그리스도의 영 이라고 부르는 것 뿐이지 그리스도나 성령을 같은 분이라고 하면 않되고 서로 다른 분이다. 그러나, 본질상 같은 분(Oneness)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아니고 아들이 성령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양태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양태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역사에 나타날 때면, 가면을 바꾸어 쓰는 것이다. 한 분이 1인 3역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단지 역사상에서 아버지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들로 나타나기도 하며, 성령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은 세 분으로 구분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이 아닌 것은 아들이 성령이 아니다. 분명히 세 분은 구분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보면,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에‘하늘에서 음성이 있어 가라사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한 것은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물속에서 세레 받고 있는 분은 아들이며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성령이 따로 계시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보혜사 성령이 너희들에게 오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주님께서 가서 얼른 성령으로 변화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양태론적 표현은 예수님을 거짓말쟁이(pretending)로 만드는 무지함의 극치에서 나오는 것과 같다. 사실이 아닌데, 예수님의 가장된 1인 3역의 연극을 행하는 것과 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성경이 언제나 강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언제나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세례를 줄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라고 세례를 주는 것이다. 세분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러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라고 말씀 하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Oneness)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제일 치열하게 논쟁되었던 것이 바로 삼위일체 논쟁인데, 바로 니케아 공의가 최초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논쟁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다. 세 분이냐 아니면 한 분이냐 라는 양단간에 결정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니케아 공의이다. 그런데 이 논쟁의 대표는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이다. 오늘날, 총회장급의 지위가 높은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아타나시우스는 시골교회 목사정도의 지위 이었다. 아리우스는 주장은 성자는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신(God)은 신(God)인데, 아버지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동일한 본질이 아니고 차별된 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자는 권위나 영광이 하나님보다는 낮다고 보고 있다. 아리우스는 유사본질을 강조 하고 있다. 이것은 아나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아들은 같은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에, 아리우스는 유사본질(homousios)을 말하는데, 7) 아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신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그와 유사한 신성을 가지고 있는 열등한 신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유사본질을 인정하나, oneness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세분으로 계신다는 것만 인정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결국 그 하나님 되심의 본질에서는 하나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시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러한 자기 뜻을 굽히지 않는 주장 때문에 자신의 망명을 5번에 걸쳐 시행하였다. 그러나, 처음에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결국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의 논쟁은 아타나시우스의 승리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그러나, 세 분으로 구분된다는 아타나시우스의 사실적 본질로 마감되었다. 신학의 본질적인 삼위일체의 논쟁은, 즉 하나님은 한 분으로 계시느냐, 아니면 세 분으로 계시느냐는 것은 그 논쟁의 핵심은 구원론 논쟁에 있었다.


  그들의 논쟁의 감추어진 입장은 사람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이해차이 이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이해하는 그것도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아야 하는가 하는 구원의 방법하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은 추상적으로 사변적으로 관념적으로 대답할 수 없다. 예를 들면,‘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나는 구원받을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성경책을 어느 것이 맞는 지를 답을 구한다면, 그 사람은 답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신가? Who God Is? 이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 받야야만 되는가? 하는 구원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사람이 죄를 범하면 범하는 그 순간부터 몸과 영혼이 썩는 과정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이 너는 죽는다 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 라는 의미도 있지만, 죄를 범하는 순간부터 죽어가는 의미가 있다. 그 과정이 겉으로 드러나는 사건이 육체적 죽음이다. 사람이 육적적인 죽음이 죽고난 후에도 그 썩음의 과정이 멎추지 아니하고 사람이 영혼이 썩어가는 과정에 계속해서 굴복하여 결국 영적사망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영적 사망을 영혼이 썩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 영혼이 썩어지면 사람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타나시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썩어가는 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오늘 이 시간 구원 받아라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려면, 우리의 썩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걷어내고 완전하고 흠이 없는 절대 무결한 본성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체인지(change)를 하는 것이다. 이 말을 아타나시우스는 '행복한 교환(happy exchange)' 이라고 하였다. 행복한 교환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다. 그런데, 행복한 교환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똑같은 사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죄에 오염되지 않은 어느 누구도 아담으로부터 오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그래서 아타나시우스는 왜 예수님이 동정녀 탄생으로 되어야만 하는가? 아담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동정녀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잉태되어여만 하는데, 왜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야만 하느냐? 는 것은 하나님으로서는 사람의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더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 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그 하나님이 자기의 본성을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 우리의 썩어질 인간의 본성을 가져 가셔서 대신 죽어 주셔서 구원받는다, 라는 이것이 교부들이 갖고 있던 구원론이다. 그러니까, 아타나시우스가 이 구원론을 바르게 전개했느냐, 아니냐는 이 문제는 놓아두고 이 논쟁의 핵심은 구원론이다. 아타나시우슨 사람이 구원 받으려면, 그렇게 완전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완전하신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 아니면, 사람을 구원 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인데, 만일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사람의 본성도 완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는 믿었던 것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3분으로 계시는데, 니케아공회에서 싸웠던 논쟁은 하나님이 3분으로 계시느냐? 않계시느냐? 라는 논쟁이라기 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분으로 계시느냐? 라는 oneness 논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oneness 논쟁을 하였느냐 하면, 만약에 아들이 하나님이 homo-ousios(호모-우시우스/동일본질)이 아니면, 아타나시우스 자신의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호모(homo)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 라는 의미로 아들의 본성이 사람으로 오시기 전이나 오신 후나 아들이 본래적으로 가져던 신성은 아버지의 신성과 그대로 똑같다 라는 말이다. 만약 똑같지 않는다면, 자신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니까 아타나시우스가 5번씩 추방되어 망명생활하면서도 자기의 삼위일체론을 포기하지 않은 절대이유는 자신의 구원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교부들이 모여서 이 교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만약에 아들이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 아니면, 우리의 구원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속죄도 완전하지 않음에 따라, 이 구원을 절대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때부터 완전히 하나님이요,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God-Man)를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하나님이 누구인가?( Who is The God?) 라는 것은 드러 누워서 건빵을 먹으면서 하나님이 누굴일까? 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태도이며, 이런식의 질문은 절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신학자들이 행한 하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하나님께 무릎을 끓고 겸손한 자세로 간절히 묻는 것은 곧, 내가 어떻게 구원받는냐라는 질문과 똑같은 것이다.


  정리하면, 이것은 각 시대별 형상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본질로 한 분이시고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지금도 세 분으로 계시는 것이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고 성령이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들이 될 수 없고 아버지가 성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들은 영원히 사람이 되실 수 있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는 도저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서술적으로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샤벨리우스 이단8)도 마찬가지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논쟁의 혼란의 제일 큰 핵심은 "Oneness" 에 있는데, 양태론도 사실은 "Oneness" 즉,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하나님이 세 분으로 계신다고 믿었던 이단은 극히 드물다. 문제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원래의 기독교는 유일신인데, 신약시대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여호와는 하나다’라는 유일신론의 이 개념에 큰 변화가 생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유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여호와 신앙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유일한 여호와 신앙은 모세에게 나타났던 불꽃가운데 만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야훼’라고 불려던 것인데, 그들은 언제나 야훼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코끼가 새끼를 낳은 것이다. 코끼리가 새끼 낳으면 코끼리고 사람이 새끼를 낳으면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종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할때 모세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은 누구인가?. 영원 전부터 있던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일정한 단절이 있다. 어떤 단절이 있는가? 유대교는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고 우리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지식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계신다는 것은 아들이 비로소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비로소 자기 비밀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것이 큰 비밀이다. 아버지는 작정하시고 아들을 이루시고 성령님은 적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이 가르쳐준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논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세분이시다 믿는 것은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세분이 하나일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하나를 설명할 수 없어서 양태론이 나오고 다른 이단들이 나온 것이다. 이것을 다루는 이유는 구원론이 결국에는 하나님이 누구냐는 지식과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원론의 핵심중에 핵심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저주가 달려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스스로 나신다. 아들의 나심을 우리의 어떠한 비유로도 하나님 아들이 나심을 나타낼수가 없다. 오직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이해할 수밖에 있다. 칼빈선생의 탁월한 점은 신학적으로 가야될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누구보다 잘 아셨던 분이다. 칼빈 선생의 글을 너무 절묘하다.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알기 원치 않는 부분을 아시고 열심히 조직해서 설명해야 할 부분을 설명한다 그러면 이런 부분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이것은 그분의 경건에서 온 것이다. 기도하는 경건에서 온다. 칼빈은 신학할 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이해되는 만큼 인간론, 신론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해놓았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식을 잘 정리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렇지 않다. 칼빈을 공부하면 칼빈주의를 이해할 수 있고 칼빈주의 공부하면 칼빈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근본적으로 인문학을 공부해서 하나님의 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탁월한 소양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누구라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요목요목 나누어서 잘 설명하는 탁월한 천재이다. 그냥 천재가 아니다. 자기 신앙이 가리키고 있는 바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천재다. 내속에 있는 진실한 신앙을 언어로 체계적인 순서를 갖추어서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천재이다. 그러므로 뒤에 오는 사람이 그걸 가지고 다시 연구하면 더 깊이 더 풍성하게 더 광대하게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더 깊이 파야 하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칼빈은 진실하고 순수한 신앙이다. 늘 기도하면서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어디에서 멈추어야 되는가를 알려준다. 설명은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개혁파에서 가르쳐 왔던 교리가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최선을 다해서 설명해야 한다. 삼위일체는 신비다. 삼위일체는 인간에게 허락된 신비이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를 가르쳐 주신 의도했던 그만큼은 가르쳐야 한다.

 

이어서 4부 구원의 서정(순서) 편입니다.  Coming  Soon......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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