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믿음과 회개2.
행 16장31절에서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상황이며, 복음을 전하는 결과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찬송하다가 지진으로 옥문이 열리는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옥문을 지키는 간수는 죄수가 도망한 줄 알고 칼로 자살하려고 했다. 당시 로마의 감옥의 간수의 책임은 죄수를 놓치게 되면 자신이 죽음으로 그 책임을 대신해야만 한다. 바울은 그 간수를 강하게 만류하면서 자신들이 도주하지 않고 여전히 옥에 있음을 확인시켜주면서 그런 순간에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는 때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리고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간수에게 외친다. 한사람이 자살하려고 할 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전 신약성경에 복음을 가장 간결하고 명료하게 요약한 한 마디의 설교이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요청했던 요구는 “믿으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복음이 약속한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서 향유하게 하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요구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복음이 있는 곳마다 우리에게 믿으라는 요구이다.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믿음이 복음에 능력을 수요하는 가장 중요한 요구이다. 믿음이 없으면 복음의 능력을 받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음을 무엇으로 정의하는가? 첫째, 성경신학적으로 믿음이란 용어로 ① 피델리리- 충성, 충실 ② 피이스메스- 신실 이라고 한다. 첫째로 로마서 3장 3절“ 어떤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킹제임스 번역 고전적 성경번역서는 저에“ 하나님의 미쁘심”이란 말을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번역 뉴 킹제임스 번역 즉, 현대인에 성경에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음이란 언제나 한사람의 대한 신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사람의 인격적인 자질과 특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충실하다 신실하다 라는 뜻을 가진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을 사용할 때 언제나 똑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롬3장 3절 ) 여기에서 믿음이란 말이 충실, 신실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항상 같은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원래 하이파이 라는 말이 있듯이 - 녹음할 당시 원음에 가깝도록 그대로 재생하는 만큼 성능이 좋은 기계 - 원음 극것과 지금 재상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라는 것이다. 질적인 차이가 없이 완벽하다는 것이다. 즉 한사람의 인품에 적용할 때 그 사람의 내적인 성품과 외적인 성향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과 행위가 차이가 없고 말과 실행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언행 일치한다 라는 것이다. 그러닌까, 롬3장3절에서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을 미쁘시게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때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을 철저하게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이다. 그 언약을 지키시는데 절대로 변치 않으시고 처음 약속 그대로 지키시는 인격적인 분이시임을 충실 신뢰도를 언약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신약성경은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워져 있다.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믿음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약속인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것인데 그 근거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신실하심은 우리가 눈으로 보고 느끼고 만지고 있는 그 어떠한 실체적인 감각과 감각으로 인한 경험의 지식보다 더 확고하다. 우리의 눈을 속이기도 하고 우리의 감정은 우리를 배반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은 어제나 오늘이나 일정하신 일정하신 성품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롬3장 3절을,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르키는 것이고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불순종이나 역사적인 사건과 상관없이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뢰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민수기 23장 19절과 성경구절 롬4장 21절, 민수기 23장 19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인생이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로 기독교의 객관적인 진리를 복음의 진리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갈 1장 23절 “다만 우리를 피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믿음을 .......”잔해란 말은 파괴(destroy)한다는 말이다. 박살낸다 라는말이다. 전에 잔해하던 믿음을 지금 전한다. "믿음“이란 권면하는 그러한 뜻이 아니고 기독교의 진리를 말한다. 복음적 진리를 전했다는 말을 믿음이란 말로 표현했다. 유다서 3절을 보면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단번 믿음의 도”, 번역하면 “믿음의 도”는 믿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으로서의 진리를 가리킨다. 그래서 믿음의 도 라고 우리나라 번역은 그렇게 되어 있다. 복음을 가르키는 말로 대신하기도 했다.
셋째로는 그 믿음이 믿는 행위를 가르킬수도 있다. 한 사람의 마음의 신앙 행위를 가르키는 말로 믿음을 가르키기도 한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예로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믿음이다. 그가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 여기서 믿는 다는 것은 바로 믿는 그 행위를 말한다. 이렇듯 성경에서 사용되는 많은 여타의 구절들이 있다.
넷째로 의로움에 이르게 하지 못하게 하는 믿음이 있다. 하나님이 정죄하시는 행위로서의 믿음 곧 사탄적인 믿음이있다. 약2장19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은 한 분 이신줄 믿느냐..”“믿는다는”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위선적이고 가시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정죄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4가지 용례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첫째 구원하는 믿음이다. 이것은 임종에 이르러 구원케 하는 믿음의 일종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임종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또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데, 그러나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실을 가르치고 그 사실을 믿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데, 단순히 머릿속에만 있는 믿음만을 가지면 안되고 마음에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마음으로 믿어져야 한다고 한다. 즉 산 사람도 죽어가는 사람 사이에 좀 더 다르게 구원에 이르렀다고 정의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머릿속에 들어 있는 믿음만을 가지면 안되고 그 머리속에 들어 있는 믿음이 어디까지 와야면 하는가면 심장까지 와야 한다고 가르친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은 충분한 믿음이 되지 못하고 마음으로 뜨겁게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확인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에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면,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에서 구원받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라고 하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문제는 즉 인격적인 관계란 말이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한 개인의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인격적인 관계라고 정의한다면 성경적인 것을 이탈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인데, 한 개인의 경험괴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심각한 오류인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지식이 꼭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소는?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인 체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격적인 관계에 가장 구원에 이르는 것은 바로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다. 반드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계시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해야 비로소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관계의 의미를 성경적인 이해에서부터 떨어지도록 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이 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인격적인 관계란 의미를 실존적인 결단 혹은 실존적인 체험으로 말했다. 인격적인 관계란 (관계의 근거해서) 어는 한 사람이 실존적인 체험이나 결단을 바탕으로 하는 주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실존적인 결단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것을 대개는 인격적인 관계라고 이해한다. 크게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의 정의를 하나의 범주로 묶자면 체험적인 경험이란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 지성적인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인격적인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체험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어떤 경험적 범주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말할 때 는 지성적인 어떤 사실을 아는 것 지성적인 범주에 속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우선은 가장 먼저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불트만은 실존주의철학자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다. 역사계, 인간계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역사 이해라는 것은 어떤 시간의 연속이 아니고 역사는 언제나 한 인간의 결단의 연속이다 라고 이해하였다. 불트만의 인간은 무엇인가? 내가 누구냐? 한 사람의 이이덴티티(Identity))를 이해할 때, 자신의 정체성을 얘기할 때, 언제나 과거로 갈 수 없는 걸이다. 주어진 삶의 환경과 조건하에서 어떻게 결단하느냐 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할 때, 마태나 마가에서 그분의 족보로부터 시작한다. 족보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불트만은 이런식으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냐? 는 것은 그 사람의 주어진 삶의 조건 속에서 어떻게 결단하느냐 것이 그 사람에 대한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 사람이 누구의 자손이냐? 어디서 공부하였느냐? 어느 지역출신이냐? 등의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는 다고 본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서 어떻게 하기로 결단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라고 본다. 다시말하면, 매순간 결단하기를 요구받는 것이다. 결단 요구하는 역사적인 조건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즉 잘 사는 사람이나, 못 사는 사람이나 삶속의 여건속에서 매 순간마다 결단을 요구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이처럼의 결단을 요구받은 사람의 존재를 에스더스 세상을 결단을 요구하는 장(場)으로 세상으로 본다. 이 세상은 결단을 요구하는 삶의 장이다. 사람은 결단을 요구하는 장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어떻게 결단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기에는 없다. 어떻게 하든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죽어가는 인간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은 그냥죽든지 살든지 어떻게 살 건인가? 단순히 결단해야 하고 쉬지 않고 계속해서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람이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이 결단을 요구하는 장에 들어 설 때에는 가장 기본적으로 그냥 죽든지 살던지 이다. 라는 것이다. 살기로 결단하였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살것인가? 이다 라고 결정해야 한다. 또 결정하였으면,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라고 물으면 또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라고 또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말하자면 사람이 쉬지 못하고 계속하여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정의 연속이다. 그런데 이것은 인격적인 것이 아니고 대단히 기능적이다. 마치 컨베이에 실려 오는 접시에서 내가 선택한 음식을 먹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결단을 이런 식으로 죽는 날까지 기계적으로 기능적으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불트만이 말하기를 사람이 무엇이냐? 하면, 현재는 결단을 요구받은 그 순간이 언제나 현재이다. 인간에게는 과거는 없고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공간이다 라고 한다. 이것이 불트만의 인간이해이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결단하도록 요구한다. 결단을 요청한다는 이 사실은 더 중요하고 엄숙한 삶의 명령은 없다 라고 한다. 그러면서 유일하게 역사 이해에서 인간의 결단이다. 이 결단의 핵심은 한 인간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결단이다. 결단할 때 중요한 것은 결정을 내릴 때, 실존적인 입장에서 그 근거를 타당하게 옳은 것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의적으로 결단해야 한다. 그 사람의 결단 속에는 역사적인 사실에 따른 결정이 아니라 그 주어진 환경속에서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믿기로 하던지 부정하던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의 믿음은 인간의 주체성이 모든 것을 이끌어내야 한다. 실존주의에서는 역사적인 사실의 확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말하라는 것이다. 실존주의에게 강조하는 것은 결단해야만 하는 인간의 주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실존주의에서 믿음과 역사사이에 일정한 상관성이 없다. 실존주의에서 역사는 무대의 장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존재 위치가 하와이의 풍경 또는 알래스카에 서 있는 배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 믿음이란 한 사람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결단이다. 실존주의가 영향을 미치는 결과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구원의 지식을 강조하지 않고 한 인간의 독립적인 결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믿는다는 것은 능동적인 것이 최고이다. 실존주의는 성경이 가르키는 것과 전혀 다르다.
믿음이 역사적인 지식, 즉 우리 구원을 위해서 근거하지 않는 지식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도 같다. 믿는다는 것은 지식이다. 어떤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요한것은 실존주의에서는 그 어떤 사실을 아는 것에 받아들이는 것에 강조점을 두는 것이 아니고 그것보다는 한 개인으로 하여금 결단하는 행위에 믿음과 동일시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서 소개한 믿음이라는 말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것과도 같은 해석이다. 그런데 구원받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한 사람의 결단의 행위가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구원의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는 그러한 객관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것, 배우는 것을 믿는 행위로 보지 않고 그러한 것들은 없애 버리고 오히려 한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사실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고, 그러한 사실을 불구하고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첫 번째 지식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사도들의 복음의 내용이 믿음의 대상이 즉 지식의 제일 중요한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다. 이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믿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알아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볼트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심은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결단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결단하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예수님의 부르심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결단의 순간인 것을 알고 나도 그 가치에 부응하여 그 영원한 가치에 순응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인 것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 지식인 계시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성경이 기록한 사실을 통해서 독립적으로 어떤 고상한 가치를 가졌다고 결단하면 믿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실존주의에서는 내가 무엇을 믿는 다고 할 때, 그 믿음의 내용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 전에 신앙고백인 사도신경 처럼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일치되도록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을 하는 것은 하나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도 하나요 믿음을 주신 성령도 하나고 그 성령이 구원하시는 목적이 하나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이유는 매우 의미가 깊은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내용이 중요한데, 특별히 믿음의 지식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그리고 그가 죽어다가 다시 사신 것,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 등 등,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이 믿음이 있기 위한 증거는 그것이 참되고 옳다고 하는 것으로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신자들을 가르칠 때, 절대 못 받아 들인다. 들어도 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돠고 옳다고 생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닌까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요한일서에 나오듯이 “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행동보다 훨씬 못하다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쓸 모 없다고, 행동으로 몸으로 보여주는 신앙이 정말 신앙이다. 라고 이렇게 우리느 세뇌되어 왔다. 오늘 이 시간부터 이러한 잘못된 것을 버려야 할 것이다. 성경이 요구하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아보다 휠씬 중요한 것이 있는데, 구원받은 믿음의 첫 번째 조건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양심으로 진실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 한 마디가 믿음으로 구원 받는 첫 번째 조건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어떤 결단을 요구한다거나 또는 고백을 하찮게 여기도록 만드는 가르침은 상당부분 자유주의신학이다. 고백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식으로 이런 식으로 가르켜서는 안된다. 언제나 고백할 때는 내 온몸과 마음을 다해서 진실되게 고백해야 한다. 특별히 예배드릴 때 그냥 눈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것이다. 오므 마음과 진실되게 말이다.
요17장3절을 보면,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것이다”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받은 믿음은 첫번째는 지식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특징은 이성주의적이 아니고 이성적이다. 이성이 개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바른 지식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설교하는 사람의 가르침의 제일 목적은 교인들에게 지식을 바르게 가르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가르침을 가르치는 자가 누구냐? 바로 그가 교회안에 교사요, 목사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오늘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이다. 만약에 가르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의 능력을 이르 길이 없는 것이다. 매우 잘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 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우게 하시고 특별히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배워 알아야 한다. 요17장 3절에 보면,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지속적인 앎이다. “앎”이란 실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머릿속의 아이디어,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내 몸으로 겪고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앎이란 같이 살아가는 것으로서 오는 지식이다. 요17장3절 영생은....“안다는 것”은 사귄다는 것, 삶을 같이 동거한다는 것, 동행한다는 것, 경배한다는 것 이 삶을 같이 공유한다는 것, 지식을 공유한다는 것,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결과를 말한다.
곧 영생이란 하나님과 동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무는 것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지는 것이다. 고대의 영지주의(Gnosis)에서‘안다’라는 것은 고상한 지식(초월적인 지식)이다. 고상한 지식은 부패한 육체 안에 거할수 없는 것이므로 육체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고상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와 멀리 떨어져야 하는 데 육체와 멀리 떨어지기 위해서는 금욕이다. 그래서 육체적인 일에 개입한다. 요한일서에서 혼인을 귀하게 여기라 했다. 그런데 영지주의가 결혼을 더러운 것으로 속된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녀간에 성적 결합을 속된 것으로 본 것이다. 예수님도 영원한 지식을 가진 자로서 이땅에 오셨지만 육체로 오셨다고 보지 않는다. 에수님의 이 땅의 오심을 환영으로 보고 있다. 영지주의는 고상한 지식은 육체와 자꾸 멀어져야만 가능하고 고상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육체를 부정해야만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고 있는 지식이라는 이러한 의미로 지식을 생각하면 안된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지식과 구원받는 믿음의 지식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첫째로 영지주의가 말하는 지식은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지식은 역사적인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다시사심) 통해서 우리 에게 주어진 것이다. 요한 일서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사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인 지식이다. 구원받은 믿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이 땅에 오심과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고난받고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고 있지만 영지주의는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바른 믿음의 증거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역사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믿음의 행위로 얼마나 구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은 믿음의 진위여부를 확인하는 최종적인 수단이 아니다. 그 사람이 고백한데로 사느냐 못사느냐는 것이 그 사람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최종적인 기준이 아니다. 하나의 기준이다. 그 기준이 언제나 맞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하지만 드러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누구처럼 믿음의 외현이 행위로 드러나야만 한다고 소위 야고보식으로만 가르친다면 고린도 교회원들은 전부 다 진노의 화를 피하지 못하고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절대로 사도 바울이 그들을 향해 성도라 부르면 않되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부르면 않되고, 성령의 전이라고 말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보낸 그의 서신을 보면, 이 세가지 용어를 모두 사용하는데, 나의 형제들아! 성령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아! 성령의 전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행위로 그들의 믿음을 증거한 것은 없다. 믿음은 바드시 행위로 드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역으로 행위로 드러나지 않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믿음이 참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목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지주의 지식의 차이는 초월적인 지식만을 강조한다. 역사적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두 번째 차이는 이 구원받은 믿음에서의 지식은 사람이 이땅에 살아 있을때 사람을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지식이다. 실제적으로 효과적인 지식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에서는 육체를 벗고 사람이 죽은 사후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사후세계의 관념적 세계가 지식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믿음에서의 지식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그것은 실제적이다. 이 지식이 죄에서 자유롭게 하는 효과가 있다. 존 오웬의 '죄 죽이기' 라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요지는? 우리 속에 죄의 소멸이 효과적으로 성취되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이 죄와 싸운다는 사실, 곧 성령이 주도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내속에서 성화를 이루어가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내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사의 맞대어 있지 않으면 그로부터 어떤 은사도 공급받을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어찌하든지 나의 싸움을 나의 작은 죄들을 일일이 두더지 잡기 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고 큰 해머로 올라오는 기계 자체를 폭삭 내려 앉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의 소멸을 위해 기도할 때 죄와 싸워 나갈 것은 효과가 없는 것이고, 즉 싸워나갈 것을 다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존 오웬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정으로 죄의 소멸이 효과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 날마다 사모해야 되는 지식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안에 머물기를 소원하는 바른 지식가운데서 성령이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성공적으로 효과적으로 일으키신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머물기를 원하는 마음 그 간절한 소망을 갖는 순간에 죄의 욕망이 다 사라진다. 이상한 능력이 생긴다. 이것은 실천적이다. 지식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을 것을 정밀하고 정교하고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그리고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준 정밀한 구원의 지식을 따라 믿고 따라 구해야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Ver Vercum) 그 말씀은 지식이다.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지식을 내 믿음의 내용으로 삼을 때 비로소 구원능력이 성령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복음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진리를 바르게 가르친다는 것은 오랜 시간 공부하지 않고는 어려운 것이다. 공부하지 않고 쉽게 설교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항상 인본주의로 간다. ‘순종하라’강요하는 식의 명령조로 설교가 대부분이다. 오늘날 범람하고 있는 신앙의 특색이 성령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고 인본주의적 설교가 대부분이다. 성령은 작은 차이, 즉 미묘한 차이를 사실은 성경의 진위 여부를 결정지는 것이다. 오랜 시간,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며, 오랜 선배들로부터 전해주는 신앙 지식을 내기 받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바른 구원의 지식이다. 이 지식은 이 지식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를 담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메시야가 오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라고 한다. 렘 24장 7절과 렘 31절 33절~34절, 합 2장 14절에서 결국에는 메시야가 오시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마음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지식의 변화다. 종말론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 세계다. 누구도 가르칠 필요가 없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면 나타나는 현상이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인간의 행복이다 라고 가르친다. 고전 8장 12절을 보시면, “이 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앙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눅 10장 22절을 보시면,“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하나님의 관해서 아는 지식이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자에게 주시는 특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아는 지식이다.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이 바른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예를들면, 가롯 유다는 경험적인 카타고리에서는 그가 믿었던 사람이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경험적 의미에서 인격적인 관계라고 정의하면 가롯 유다는 그가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등을 돌렸다. 왜냐하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인격적인 관계라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것을 예수님이 구주라는 사실을 가롯 유다가 믿었더라면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던 지식이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졌더라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롯 유다는 지식이 없었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다. 그러닌까 우리가 얼마나 인격적인 관게를 잘못 정의하고 있는 가를 재차 확인해야 한다. 인격적인 관계를 경험에 속해 있는 지식으로 보아서도 안되고 체험으로 보아서도 안 되며, 더욱 내 마음의 감정으로 보아서도 안된다. 마치 찬송할 때의 카타르시스적 요소를 갖는 것과 같은 것이다. 원래 찬송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행복으로서의 반응으로 나와지는 고백인 인 것이다. 이러한 찬송이 진정 하나님께서 받는 기뻐하시는 찬송인 것이다. 그래서 인격적인 관계라는 말을 경험이란 영역에 속해 있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논할때 다루어야 하는 대목이다. 인격적인 관계를 구원에 이르는 바른 지식을 갖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잘 가르쳐야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세주시오 영원한 심판주 라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른 지식이 아이들 속에 잘 들어가면, 아이들은 바로 믿게 되는 것이다. 전도란 그리스도의 지식을 전하는 것이다. 그 구원의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전도의 제일 좋은 설교와 도구는 교육이고, 교육기관 중에 효과적인 기관은 유치원, 유아원이다.
그래서 카톨릭 로마교회에서는 만8세까지를 자기들에게 맡겨주면, 평생을 신앙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로마교회가 유치원 짓고 하는 것에 대하여 그 사람들이 삶의 고상한 목적을 갖고 짓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육받고 나가면, 언제가는 다시 로마교회로 돌아 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유치부 유아원 사역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유치부와 유아원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들로서는 효과적으로 전문적인 사역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우리 엄마보다 선생님이 더 좋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으로, 교회는 성장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면, 그 감동속에 바른 지식이 들어가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는 이처럼 바른 심각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선생님의 말 하마디가 아이들의 일생을 바꾸게 된다, 심각한 책임을 지고 고민해야 하여야 한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누가 선교사, 목사 등 하나님께 어떻게 쓰이게 될 지 모르일이다.
닥터 클락, 그의 책에서“믿음 그리고 구원받는 믿음” 믿음이란 어떤 명제적 사실에 대한 동의다 라고 한다. 첫 번째는 지식이고 두 번째의 특징은 동의이다. 그것은 옳다 성경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구원에 관한 바른 지식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듣고 알고 그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아는 것에서부터 더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신념을 거기에 두는 것이다. 가치체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가치체계의 변화가 와야 한다.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 고귀한 것과 천한 것, 영원한 것과 찰라적인 것, 거룩한 것과 천한 것, 선한것과 악한 것, 참된 신과 거짓 신, 우상과 그 사이에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지식체계의 변화다. 히11장 6절을 보면,“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아무런 생각없는 어떤 믿음의 결단, 실존적인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분명한 지식을 전제로 하고 그 지식에 따르는 어떤 가치체계의 변화가 와야 한다. 실제로 성경의 바른 지식이 우리 마음인 지성(mind)에 들어오면 그 지식으로 인해서 그 근본적인 그 이성이 관장하고 있는 그 모든 지식의 체계의 변화가 온다. 가치의 변화가 온다. 여기서의 믿음은 그 지식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거기에 동의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하여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에 끝나지 않고 가치의 변화가 오는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다는 바른 지식을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을 찾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 계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반드시 그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지속적인 삶의 변화로 움직이며 나가는 것이다. 연속된 하나의 과정이다. 그래서 믿음은 언제나 말씀을 듣는 것으로부터 오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한국교회안에는 반지성주의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을 바르게 아는것과 아는 지식으로부터 행동의 변화, 삶의 체계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만남, 체험을 강조한다. 예를들면, 대표기도하는 사람이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인가 이것의 내용속에는 반지성주의가 깔려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따르기 위해서는 내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나는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기록된 성경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약속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하나님을 만난다는 행위를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생각하지 않고 어떤 신비적인 경험이나 체험을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리의 문제이다.
그레이샴 메이쳔 이라는 사람이 웨스트민스터를 세우신 분이고 과거에 구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고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총각으로 살았는데, 그의“무엇이 믿음인가?”라는 조직신학의 책속에 오늘날 교회는 반지성주의가 범람하고 있다 라고 말했다. 과거에 예수님을 앞세우고 빌라도가 물었던 질문에 무엇이 진리냐?는 것에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에 진리냐? 라는 질문도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정의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점이다. 그래서 두 번째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인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동의하기만 하면 내적인 변화는 따라온다. 사람의 행동변화는 반드시 지적인 변화가 먼저 온다. 행동의 변화가 오기전에 바른 지식의 변화가 온다. 어떤 바른지식에 대한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 후에 행동의 변화가 온다. 목회의 가장 좋은 도구는 열심히 가르치는 것이다.
세번 째 요소는 신뢰(trust)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믿음은 어떤 지식 복음적인 지식, 객관적인 진리로 시작한다. 구원받은 믿음은 객관적인 복음 진리를 알고 시인하는 것 그것 이상이다. 구원받은 믿음은 지성적인 이상이다. 알고 있는 그것에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이다. 지식을 알고 동의하고 동의한 지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운명을 던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풍랑을 잠잠케 하신 사건에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하신 것은 믿음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믿고 시인하고 따랐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믿고 시인하고 따랐지만, 그것을 자기들의 삶에 옮기지를 못한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할 때, 그 믿음을 그 생활에서 활용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이였다. 그것이 사실 신뢰라는 것이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내가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구원에 지식대로 행동하고 실천 하는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지식, 동의, 신뢰 세가지이다. 그런데, 우리의 성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우리의 성화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지식을 요구하고 그 지식의 동의와 신뢰함이다. 우리 실생활에서 신뢰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만큼 지식에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고 기대하는 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신뢰의 문제는 지식에 문제이고, 지식의 문제는 신뢰의 문제이다. 신앙의 성숙은 지식을 알고 그 지식에 대해 동의하고 신뢰하는 순환적인 것이 계속 발전, 진보되어야 하는 것이다. 순환고리와 같은 순환 관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지식이 필요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지식에 대한 깊은 동의 그것이 인생의 경륜과 보태지고 계속하여 실천되고 실천된 더 깊은 지식을 낳고 이렇게 순환관계로 계속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말씀을 계속하여 들어야 하는 이유는 그 지식과 신앙생활이 같이 함께 가기 때문이다. 믿음의 대상은 함께 믿음의 속성인 지식, 동의, 신뢰이다.
구원받는 믿음의 대상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을 믿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믿어야 될 것이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2항에서“믿어야 될 것은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다” 라는 것이다. 항상 요구하는 것이 성경이 하나님이 말씀이라고 이처럼 시인하는 사람은 신자이다. 하나님의 바른 지식은 즉 복음의 진리는 언제나 성경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바른 지식의 믿음이라는 것에 문제가 생기면, 바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불가능하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시인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시인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불신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다.
둘째로 믿음의 대상은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고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우리의 의식세계와 지식으로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 헬라의 철학에서는 신이 인간의 성품을 가지면 완전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헬라의 신관이다. 인간의 성품은 유한하고 불완전하고 모순이 있고 타락했다. 이러한 인간의 성품을 가지셨다. 이러한 인간의 성품을 가진 순간에 하나님은 완전한 신성 가운데서 떠난 것으로 보는 것이 헬라의 신관이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인격에 대한 깊은 동의가 오늘날 많이 규례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대 철학에서는 둘중에 하나를 양자택일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완전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지만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의 인격이다. 그 예수님의 인격은 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 사역은 우리 구원을 위한 구속적인 사역이다. 그래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3중직인 왕직, 제사장, 선지자 직분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 이중 하나라도 예수님의 삼중직이 빠진다면, 우리의 구원은 절대 불가능하다. 예수님의 3중직을 놓고 미국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왕직 만을 지극히 강조한다. 세속적 그리스도인의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주권 구원이다. 예수님을 나의 삶의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소위 주권 구원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왕이 되신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권 구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이 왕 되심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지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바른 지식을 주시는 자이시기도 하다. 가르치시는 선생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지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바른 구원의 지식을 주시고 가르치시는 최고의 교사이시고 또한 우리의 삶의 허물과 죄를 사해 주시는 제사장이다. 이러한 되심을 가르치지 않고 왕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세가지가 다 균형있게 가르쳐져아 한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백성의 죄를 친히 사하시는 자 그가 구원의 지식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는 선지자, 그가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군형있게 가르쳐야 한다. 그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자로서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직분을 히브리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 백성의 죄를 친히 오늘도 이미 사하시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원의 지식을 성령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로서 그가 또한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승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믿음은 단순한 하나의 행동 인간적인 신뢰하는 행위만을 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의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속성은 세가지이다. 성경 말씀이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딤후 3장 16절에서 “성령으로 감동되었다”는 것은 영감을 부려 넣었다 소위 말하면, 사람들이 쓰고 있는 저자의 글을 하나님께서 서명 해 주셨다가 아니고 또한 그 기록된 성경에 초자연적인 계시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다는 신비적인 것도 아니고 더불어, 신정통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성경말씀은 읽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계시해 주었다는 그런 뜻도 아니다. 말하자면, 성경말씀이 특이한 능력이 있어서 성경말씀을 볼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가능케하는 효과가 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하여 딤후 3장 16절에서 “성령으로 감동되었다”는 것은 그 성경 말씀이 성경 전부가 하나님 감동 그 자체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다. 이차적으로 영감된 결과물이 아니고 성경은 하나님 입에서 나온 영감 그 자체이다. 소위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대하는 것과 똑같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 정말 두려워하고 떨고 경외하는 말씀으로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에 말이다. 영감 그 자체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다양한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우리의 삶이 허락되고 있는 이유는 그 풍부한 믿음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의 행동이 아니고 지성적이고 실천적이고 기능적이다. 믿음의 대상은 성경 전체에 기록되어 있는 다양한 구원에 대한 지식들이다. 구원받는 믿음은 믿음 자체가 영생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자체로서의 영생이다. 구원의 삶의 완성이다. 믿음이 곧 구원의 삶의 자체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에서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을 받음이라고 한 것이다. 믿음은 중생의 조건이다 라고 한다. 성경에서 믿음을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믿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지식을 우리에게 주시고 거기에 깊은 동의하게 하시고 신뢰를 갖게 하게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깊은 신앙으로서 동의하는 것이다. 믿음을 주시는 것은 구원이다. 믿음 속성은 지식과 동의와 신뢰이다.
(8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날마다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게 하시고 제 마음으로 그 지식을 받아 들이게 하시고 입으로 시인하게 하시며, 주님 제가 고백한 것 또한 신뢰하며, 그 믿음에 따라 살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 날마다 저의 믿음의 도가 더해지게 하시고 믿음의 경지가 높아지게 해 주시옵소서. 과거에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더욱 깊이 있게 성경을 통하여 깨달아 알게 하시고 주님 그 지식 속에서 이 세상 속에서 참 생수와 같은 기쁨을 날마다 맛보며 찬송하며 살아가는 복된 백성들이 되게 촉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잠깐 쉬었다가 ..............
1주일후에 다시 "믿음과 회개"를 마무리 정리글을 게제 등록하고 계속하여
아주 중요한 "칭의" 가 이어서 올라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