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핵심

하나님아들 2014. 3. 24. 00:14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핵심
유해무 교수, 고신대학원


성경 권위와 그릇된 입장들



로마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를 지배하기 전, 교회사에서는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무시하던 조류가 교회 전체를 위협했었다. 이 운동은 역사적인 것은 가변적이요, 따라서 영원할 수 없다는 통속적인 철학에 영향을 받아서, 역사적으로 계시되었고 형성된 성경의 여자적 본문 뒤에서 영원한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를 했었다.
이를 우리는 '풍유적 성경 이해'로 구정하고 있다. 결국 진리는 이미 계시되어 지금 내 앞에 주어져 있는 바가 아니라 내 평생의 끝에나, 순례 길 뒤에나 얻을 수 있는 비밀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수도생활이 강조될 수 있고 아니면 맹종에 의한 성경 권위가 주장된다.
이에 반하여 중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성례'에다 감금하였다. 성령의 사역을 세례시에 주어지는 은혜의 주입으로 국한시키고 구체적으로는 사죄와 영의 갱신으로 보았다. 이것의 큰 오류는 성령을 하나님 곧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고 어떤 식의 은사로 못박은 데에 있다.
위에 언급된 풍유적 접근 방식과 성례전적 성령 이해는 결국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개괄적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성경의 권위가 결코 확립될 수 없고 성경이 내적 성찰의 도구이거나(동방교회) 아니면 제도적 교회의 도구로 전락한다(서방교회).
교회사를 볼 때, 종교개혁의 의의는 성령론의 확장에 있다. 성경 이해에서 성령이 도외시되거나 은사로만 파악될 경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상상조차도 못하게 된다. 물론 그들도 성령을 삼위일체의 고백에서는 언급하나 사변적 차원을 떠나기 힘든 형편에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령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하심을 고백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셨던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계시의 말씀을 듣고 읽을 때에 믿음을 주신다는 고백이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고백이 설교와 성경 이해에 직접적인 안목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내적 성찰을 한다해도 또한 맹목적인 성례집행을 한다해도 성령의 사역이 아니면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없으니, 믿음은 바로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성령의 권위와 관련시켜서 확립했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도입된 기계적 영감론은 성령 사역을 제한하는 인간적 착상에 근거한 그야말로 '이론'이었다. 아울러 계시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에서 찾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전달로 봄으로 계시의 역사적 배경을 완전히 무시했었다. 이는 우연한 역사적 사건은 영원한 계시의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계몽주의자 레씽의 입장과 너무나도 묘하게 연결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동방교회든 서방교회든, 종교개혁 이후의 성경 영감론이든 계몽주의든 성경의 역사적 배경은 거의 완전하게 무시하고 있음을 보면서 개혁주의 입장만이 이 배경을 존중할 수 있음을 환기시키고 싶다.



구속사적 성경 이해



성경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적 배경을 언급할 때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특히 중세기에 들어와서 계시와 성경의 역사적 성격을 크게 부각시켰으나 역사비평 방법에 확신을 가진 그들은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가장 초보적인 원칙을 무시하고 있다. 즉, 성경의 기록자가 성령이시라는 신앙고백적 원칙을 그들은 비전제성을 전제한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전제'로 본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게 하는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상기할 때, 이러한 신학자들의 입장은 칼빈이나 우리의 신앙고백서와는 배치되며 종교개혁이 회복한 성경 권위와 성령 권위의 관계를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령 구약의 폰 라드, 신약의 쿨만, 그리고 교의학의 판넨베르그이며, 이런 입장엔 상호 차이가 있겠으나 세계교회협의회 등 현대교회의 큰 움직임은 이런 류의 구속사 이해가 주도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신앙고백서에 입각하여 성령의 영감 사역과 말씀 이해에 나타나는 믿음을 성령이 직접 주관하심을 고백하므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역사성을 믿는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백성과 사랑의 관례로 함께 하시려는 작정을 실현시키시는 역사적 사실 전부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으며 그리고 구약을 직접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믿으며 그 후에 일어난 성령강림과 전도여행 및 종말에 관한 예언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있음을 믿는 것이 구속사적 이해이다.
이처럼 구속사에는 진전도 있고 아울러 매순간마다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교제도 있다. 그럴 경우 성경 전체에 기록된 사실은 진전되는 역사의 방향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한 사건을 이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분리시켜서 너무 부각시킬 때엔 성경 이해와 그 부분 이해에 의도하지 않았던 무리가 오게 된다. 우리는 어떤 부분이 특히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으나 그 부분은 일차적으로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곧 계시역사의 맥락 속에 있었던 사실임을 유념하면서 그 사건을 통하여 지금 우리를 강화시키시는 성령의 역사를 감사하며 영광돌려야 한다.
우리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즉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를 크게 염두에 두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가령 갈라디아서 3:23, 25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라는 본문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전과 후는 바로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는 파악하기 힘든다.
성경 기록의 목적은 우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함"(요20:31)에 있는 고로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요17: 3)를 말한다. 그러나 믿음이 성령의 선물로 고백되어진다면 이 본문 말씀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는 것이 올바른 성경 이해의 핵심이다. 이처럼 구속사적 성경 이해란 삼위일체론적인 성경 이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속사는 그분의 영이 우리를 살릴 때―설교를 듣고 말씀을 읽을 때―그분의 아버지의 사랑이 나를, 우리를 향함을 알도록 한다. 그런고로 갖가지 풍성함을 지닌 구속사는 이 사랑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서 하나님, 삼위 하나님과 교제토록 한다.
이처럼 교제가 없이 진전만을 강조하는 구속사도 그릇되며, 구속사적 맥락을 도외시하는 교제 위주의 성경 이해 또한 잘못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찬양할 때 구속사적 성경 이해는 충분하다.
{교회와 교육(1996. 10.), pp. 44-46}



출처 : 알프스의 눈동자. 데보라의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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