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콥 조직신학(구원론) 요약 및 평가
Ⅰ. 구원론 개요
구원론은 구원의 축복을 죄인들에게 전달하는 것과 또한 죄인이 신적인 은혜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의 생활에로 회복되는 것을 취급하고 있다. 즉 회복과 구속 그리고 갱신을 다룬다.
성경은 구원의 순서에 대하여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있어서 상이한 의견이 많이 있다. 개혁파의 구원론은 그 출발점을 그리스도와 성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사이의 “구속의 언약”에서 성립된 신비적 연합에 두고 있는데, 그 효능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백성에게 영원히 전가되는 것이다. 다수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구원의 순서를 중생이나 소명으로 시작하고 다음으로 회개와 신앙을 포함하는 회심을 그리고 칭의와 성화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견인과 최종적인 영화를 논의한다. 루터파에서는 소명, 조명, 회개, 중생은 준비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으로 갱신과 성화(즉 순종의 생활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를 말한다. 로마 카토릭에서는 충족한 은혜(gratia sufficiens)와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가 구원에 관계된다. 알미니안파의 견해는 구원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지만 실제적으로는 사람의 태도와 행위에 따라 변하는 것이 된다. 즉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되어 있지만 하나님에게 열납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 즉 복음적 순종에 의거된다고 한다.
Ⅱ.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
삼위적 구별이 구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을 독자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성령은 단순히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시고 다양한 직무와 관련하여 재능을 부여하시고 계시의 영으로 예언자 안에 역사하셨다. 성령의 일반 사역은 자연의 창조의 생활과 관련하여 유지, 발전, 지도하시며 사람들이나 사회의 생활에서 타락과 파멸로부터 보호하시고 어떤 규칙이나 예법을 유지케 하시고 선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신적 은혜의 시여자(施輿者)로서 사역하신다. 은혜는 구약에서 “총애”나 “호의”를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신약에서는 사람의 마음에 시행된 하나님의 무상한 사역을 의미한다. 구속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이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이룩한 준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값없이 주어진 용서에 적용된다. 구원사역의 축복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지고 사람들의 예상된 공로들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교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펠라기우스 주의와 어거스틴 주의적 은혜의 교리는 대립하였고 종교개혁자들은 어거스틴의 무상적(無償的)이고 불가항력적 은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알미니안파는 이점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은 사람의 의지의 동의에 의한 것이지 불가항력적 은혜란 없다고 했다.
Ⅲ. 보통 은혜
보통은혜(gratia communis)는 특별은혜(gratia particularis)와 대조되는 일반은혜로 알려졌다. 통상적으로 이 은혜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확대되고 인류 혹은 인류의 각 개인에게 적용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은혜이다. 보통은혜로는 죄의 허물을 제거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속죄적 사역으로부터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간접적으로 은혜가 미친다. 그러므로 저주와 죽음 이외에 자연인이 받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간접적 결과이다.
보통은혜가 나타나는 수단들(방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안에서 역사하고 통치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외면적으로 일치되는 공적인 여론에 의해서 또 신적인 형벌들과 보상에 의해서 역사한다. 보통은혜의 열매로는 형벌의 집행이 유예되고 죄가 억제되며 진리, 도덕, 종교의 어떤 감각이 보존되고 외면적으로 선과 세속적인 의가 수행되고 많은 자연적 축복들이 나타난다.
Ⅳ. 신비적 연합
칼빈은 죄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하면 그의 속죄 사역의 구원적 혜택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은 신비적 연합으로 불리우는데 그것은 언약적 연합이고 구속의 논의에서 관념적으로 설정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실현된 생명의 연합이다. 또한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실현된 연합이다. 그러나 신비적 연합은 그리스도를 자연이나 모든 인적 영들 안에 하나님의 내재와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신자와 그리스도를 구별하지 않는(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함) 극단주의나 단순히 선생과 제자사이의 도덕적인 연합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로마 카토릭교회에서처럼 성례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된다.
신비적 연합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것을 기초로 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요들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그리스도의 의가 값없이 우리들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은 죄인이라는 의식의 반영과 연합을 통해서 영혼뿐만 아니라 신체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계속적인 변화가 있음을 확고히 하게 된다. 또한 이 연합의 효능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지며 그리스도와 동일한 목표를 가지게 된다.
Ⅴ. 소명개론과 외적 소명
소명을 중생에 앞서서 논의하는 것은 성경적 표현(겔 37:1-14, 행 16:14, 롬 4:17, 약 1:8, 벧전 1:23)에서 소명이 먼저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개혁파 신학자들도 소명을 중생 앞에 배치한다.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 성령의 다른 모든 활동은 단지 선택받은 자에게 국한되지만 복음에 의한 외적 소명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모든 사람, 죄인들에게 나타내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외적 소명은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제시하며 사죄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는 진지한 권고이다. 따라서 그 속에는 복음의 사실과 구속의 교리에 대한 제시와 회개와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는 초청이 있고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 들어 있다.
Ⅵ.중생과 유효적 소명
중생이란 새 생명의 원리를 사람 안에 심고 영혼의 지배적인 성향을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성향의 거룩한 수행이 최초로 확고하게 되는 것이다. 17세기 신학에서 유효적 소명(내적 소명)과 중생은 동일시되거나 중생이 소명에 포함되어 간주되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은 소명과 다르다. 중생 즉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잠재의식적 생활에서 생기는 반면 소명은 의식적 생활의 어떤 성향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중생이 내부로부터 역사하지만 소명은 외부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소명과 관련하여 중생의 순서를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말씀 전파에서의 외적 소명이 사람의 영혼에서 새 생명을 산출하는 성령의 사역보다 선행하거나 그와 동시에 일어난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창조적인 말씀으로 새 생명을 발생하시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시고 감정을 일으키시고 의지를 새롭게 하신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말씀을 받아들인 죄인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말씀의 권고적 영향력에 굴복한다. 마지막으로 새 생명은 그 자체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또한 심겨진 생명은 새로운 탄생을 결과한다.
비록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중생이 부정되지만 그 필요성은 사람의 본래 상태를 알게 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성경에 의해서 두드러지게 표현되고 있다(요 3:3, 고전 2:14, 갈 6:15 등).
Ⅶ. 회심
성경에는 회심에 대하여 국가적(욘 3:10), 일시적(마 13:20,21, 딤후 4:10 등), 반복적 (누구22:32, 계 2:5,16,21,22 등) 회심을 말하고 있으나 진정한 회심은 능동적으로는 하나님이 중생한 죄인으로 하여금 그의 의식적인 생활에서 회개와 신앙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그의 행위이고 수동적으로는 중생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회개와 신앙으로 하나님에게로 돌이키는 그의 결과적인 의식적 행위를 말한다.
회심은 회개와 신앙을 포함한다. 회개는 지적, 감정적, 의도적인 변화를 말한다. 하나님은 회심의 창시자이시고 사람은 회심에 협력한다. 회심은 중생과 혼동되기도 하는데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은 잠재의식적 생활에 초래된 변화이고 회심은 의식적 생활의 변화이다. 그렇지만 진장한 회심은 단 한번 뿐이다. 또 회심은 내적 소명의 결과이다. 신앙은 실제적으로 회심의 일부분이다. 참된 신앙에는 하나님의 구속 계시에 대한 인식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구원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Ⅷ. 신앙
신앙은 믿음, 신뢰, 그리고 신실성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신앙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비유된다. 어거스틴은 신앙을 지성적 동의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복음적 또는 칭의적 신앙이 자기 굴복과 사랑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 신앙은 사랑에서 완성되고 선한 행위들의 원리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신앙은 컬빈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의 진리위에 기초되고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정에 인쳐진 우리를 향한 신적 은총의 견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다”는 차원을 넘어서 신뢰가 포함되어야 한다. 개혁자들의 칭의적 신앙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이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사람의 활동이다.
한편 구약의 족장시대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율법시대는 메시야의 구원을 바라는 구원론적 신앙이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행함으로 신앙을 보이는 것(야고보서), 고난 중에 인내하는 신앙 등이 강조되었다.
종교적 의미에서 신앙은 역사적 신앙 곧 도덕적 또는 영적인 목적이 없이 순전히 지성적인 진리의 인식으로, 이적적 신앙, 일시적 신앙, 참된 구원적 신앙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신앙의 요소에는 지성적 요소(notitia, 지식), 감정적 요소(assensus, 찬동), 의도적 요소(fiducia, 신뢰)가 있다.
신앙의 확신에 대하여 로마 카토릭 교회는 개인적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신앙의 열매라는 사실도 부인한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확신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다.
Ⅸ. 칭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에 관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이 만족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재판적 행위이다. 칭의는 죄의 허물을 제거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한자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내포된 모든 권리를 갖게 한다. 그러므로 소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근거로 하여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다.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다.
칭의가 영원부터 있는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 전부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칭의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롬 3:25,28,30, 5:1, 갈 2:16, 빌 3:9).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미덕이나 선행에 의해서 칭의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칭의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서만 발견될 수 잇다는 것을 의미한다.
Ⅹ. 성화
종교개혁 이전에는 칭의와 성화의 개념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여, 전자를 사람의 법정적 신분에 영향을 주는 신적 은혜의 법적인 행동으로 간주하고 후자를 사람의 내면적 성질을 변화시키는 도덕적 또는 재창조적 사역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주의와 메소디스트 주의에서는 그리스도와의 끊임없는 교제가 성화의 튼 방편으로 강조되었다. 웨슬레는 칭의와 성화를 실질적으로 분리하고 모든 성화를 칭의 다음에 오는 두 번째 은사라고 하였다.
성결과 성화의 성경적 개념에는 성결을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품성으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를 성령께서 칭의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구출하여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새롭게 하며 그로 하여금 선행들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스럽고 계속적인 사역이라고 말한다.(이점에서 성기호 박사는 뻘콥의 성결을 거룩으로, 성화를 성결이라고 구분하고 있는 것 같다.)
성화(성결)의 수단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하나님의 섭리가 방편이 된다. 현세에 있어서 성화가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발전되지 못한 새 사람으로서 완전한 크기까지 성장해야 한다는 점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성화와 선행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중생에서 기원되고 성화에서 촉진되고 강화되는 새 생활은 자연히 그 자체가 선행에서 나타난다. 이것을 성화(성결)의 열매라고 부를 수 있다.
Ⅺ. 성도의 견인
이 교리의 요지는 하나님이 중생시키시고 은혜로 회개시켜 확실하게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두 번 다시 전적으로 혹은 영원히 멸망 받을 수 없으며, 분명히 은혜의 상태를 끝까지 견인하여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견인에 대한 성경의 직접적인 진술은 요한복음 10:27-29절이다. 로마서 11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빌 1:6, 딤후 1:12, 4:1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몇 가지 반대들이 있다.
먼저, 견인의 교리는 사람의 자유와 모순이 된다는 점에 대하여, 참된 자유는 성결(거룩)의 방향으로의 자기 결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방향으로 움직일 때, 참으로 자유하다. 둘째, 견인의 교리는 태만과 부도덕에로 인도한다는 점에 대하여,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치지만 사람 편에서의 주의와 열심, 기도 없이 보호하신다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고 반박한다. 셋째, 견인의 교리가 성경에 모순된다고 하는데, 이의 증거로 배교에 대한 경고들과 성화에 대한 권면들 그리고 배교에 대한 실례가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는 견인하지 않는다는 입증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덕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사용하셨다는 점과 배교한 자가 참으로 구원적 신앙을 소유한 진정한 신자들이었는가를 입증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반박하고 있다.
결 론
뻘콥의 구원론은 개혁주의자의 전통에서 구원의 순서를 따라 설명해갔다. 그는 먼저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언급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구원을 시작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중생은 하나님의 유효적 소명과 관계된다. 하나니므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편에서 반응은 회심의 장에서 다루어진다. 회심 속에는 회개와 신앙을 포함하고 있고 하나님의 칭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의 믿음에 의하여 주어진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의 과정을 밟게 되는데 이 점에서 뻘콥의 성화와 성결의 교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결과 거룩의 개념과 혼동하게 한다. 그러나 그의 성화를 성결로, 성결을 거룩으로 바꾸어보는 생각하는 것이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견인에 대하여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하나님의 견인하시는 은혜가 구원받는 성도에게 끝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구원론에 대한 이해는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어떤 경우에는 구원의 순서와 관계없이 중생이나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일반적으로 구원에 있어서 순서가 있음을 이해함으로 성도들의 구원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게 한다. 자신의 구원의 상태를 발견하고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성결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구속사 !!! 구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개혁주의 구원론 (0) | 2014.03.24 |
---|---|
[스크랩] 구원론 요약 (0) | 2014.03.24 |
[스크랩] 개혁주의 구원론 (안토니 호쿠마 저) (0) | 2014.03.24 |
[스크랩] 구속사적 성경 이해의 핵심 (0) | 2014.03.24 |
[스크랩] 속죄론연구 (0) | 2014.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