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십자가의 개념에 대한 연구
정 봉 창
목 차
Ⅰ. 서 론 ................................................................................ 1
A. 문제제기와 목적 .............................................................. 1
B. 연구범위와 방법 .............................................................. 2
Ⅱ. 본 론 ................................................................................ 4
A. 바울의 환경과 사상적 배경 ............................................ 4
1. 바울의 환경 ................................................................... 4
1) 바울의 가문과 출생 .................................................. 4
2) 바울의 성장과 교육 .................................................. 5
2. 바울의 사상적 배경 ...................................................... 6
1) 헬라주의 .................................................................... 6
2) 유대주의 .................................................................... 6
3. 바울의 회심 ................................................................... 7
1) 핍박자 바울 ............................................................... 8
2) 바울의 회심 ............................................................. 10
4. 사도로서의 바울 .......................................................... 11
B. 바울의 예수관 ................................................................ 12
C. 바울의 십자가의 개념 ................................................... 15
1. 죽음의 십자가 ............................................................. 16
1) 희생적 죽음 ............................................................ 18
2) 대리적 죽음 ............................................................ 19
3) 대속적 죽음 ............................................................ 20
2. 화해의 십자가 ............................................................. 21
1) 화해의 주체와 객체 ............................................... 22
2) 화해의 사건 ............................................................ 23
3) 화해의 성격 ............................................................ 23
4) 화해의 결과 ............................................................ 24
3. 구속의 십자가 ............................................................ 26
1) 죄에서의 구속 ........................................................ 28
2) 율법의 저주로 부터 구속 ...................................... 30
3) 옛 사람에서의 구속 ............................................... 31
4. 승리의 십자가 ............................................................ 33
5. 사랑의 십자가 ............................................................ 36
D. 십자가와 칭의의 관계 .................................................. 38
1.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 40
2. 그 피를 인하여 .......................................................... 40
3. 믿음으로 ..................................................................... 41
Ⅲ. 결 론 ............................................................................ 43
Ⅳ. 참고도서 .......................................................................... 46
Ⅰ. 서론
A.문제제기와 목적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다"
이 말은 맞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럼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건으로 십자가는 기독교 안에서 사랑과 용서와 자기희생의 표상이 되었다. 나아가 십자가는 사단의 세력과 율법의 정죄에 대한 승리,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가는 상징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으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옳바른 길을 제시한다.
바울의 십자가의 개념에 대한 연구로 제목을 설정한 이유는 첫째,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십자가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으며, 둘째, 더러는 십자가를 단순히 기독교의 상징으로 보고있기 때문에 옳바른 십자가의 의미를 밝히고 그 위치를 확립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은 바울의 십자가의 개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죽으심, 부활의 의미를 살펴보고,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일이다. 특히 예수의 지상생활에서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의 사건은 간단히 조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아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달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보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이 본 논문의 주된 목적이다.
B.연구범위와 방법
바울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개념을 가장 자세히 밝힌 사람이다. 특히 그는 율법관, 죄관, 하나님의 진노, 구속, 화해, 칭의 등 십자가의 참 뜻과 속죄의 용어를 명백하게 밝힘을 볼 수 있다. 그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이었고(고전1:18), 전도의 핵심이었고(고전1:23), 결정(結晶)이었고(고전2:2), 부활의 차서(次序)였고(고전15:3), 십자가의 원수가 바로 기독교의 원수였고(빌3:18), 십자가만을 자랑했고(갈6:14), 십자가로 승전가를 불렀다(골2:15). 또한 그는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람이었으며, 십자가의 권능을 믿고 산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의미을 제대로 규명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문제이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구원론적, 속죄의 개념으로 보지 않고, 점점 기독교의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본 논문은 바울신학에 중점을 두고 기독론적으로 접근하여 십자가 신학을 토대로 하여 우리가 가져야할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장의 본론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바울의 출생과 자라온 배경,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핍박과 회심과정, 그의 사상 및 예수관를 살펴보고, 특히 왜 바울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으며, 그 토록 핍박하던 바울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그것도 예수님의 증인(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으로 소개했다.)이 되었는가를 자세히 살펴보고, 두번째는 바울이 이해한 십자가의 개념을 ①죽음의 십자가, ②화해의 십자가, ③구속의 십자가, ④승리의 십자가, ⑤사랑의 십자가로 나누어 살펴보며, 끝으로 십자가와 칭의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장의 결론에서는 십자가의 개념을 다시금 살펴보고, 십자가의 신학에 비추어 결론을 맺고자 한다.
주된 자료로는 Leon Morris의 『신약의 십자가』와 John R.W.Stott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George Ladd A Theology of the N.T.(Grand Rapids:Eerdmans, 1955)의 논문, 신성종목사의 『신약총론』,을 주로 사용하였다.
Ⅱ.본론
A.바울의 환경과 사상적 배경
1.바울의 환경
1)바울의 가문과 출생
바울은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세 가지를 자랑했다. 첫째는 유대인이라는 것, 둘째는 다소시민인 것, 세째는 나면서 부터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자랑한 것이다. 교부 "히에르니무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바울의 부모들은 갈릴리의 "기샬라"(Gischala)에 살았는데 이 도시가 정복되어졌기 때문에 다소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3:5)이라고 자칭한 고백은 바울의 가족이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고는 헬라적이 아니고 철저하게 디아스포라 유대교적이었다.
또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울이 취득한 시민권이 아니라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가정에 태어남으로써 자동적으로 로마 시민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의 가정은 당시 상당한 재물과 사회적 지위 및 특권을 가지고 있는 가정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의 로마 시민권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하나는 상업권만 부여하는 시민권이며, 다른 하나는 결혼의 권리까지 부여하는 완전한 시민권인데, 바울이 가지고 있던 시민권은 완전한 시민권이다. 당시 로마 시민권을 얻는 방법에는 몇가지가 있었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돈으로 사는 것이었다. 둘째는 24년 동안 군에 복무한 군인에게 주어졌고, 세째는 로마에 충성을 다한 시민이나 마을 전체에 특별 혜택의 표시로 로마 시민권이 수여되었다. 아마 바울의 가문이 시민권을 받게 된 것은 세번째 일로 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2)바울의 성장과 교육
바울은 추측컨대 A.D. 1세기 초에 베냐민지파의 자손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한 듯하다. 다소는 중요한 도시였으며 그 상업상의 중요성은 안디옥이나 고린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상당한 수준에 이른 중요한 학문의 도시였다. 바울은 이 학문의 도시 다소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바울은 제대로 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대학에서 스토아 철학(금욕주의)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헬라의 대학 도시인 다소에서의 출생과 로마시민권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실은 바울을 이방세계와 연결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부모로부터 엄격한 유대교적 유산을 물려받았으며, 예루살렘에서 그당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율법의 대가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로 바울은 훈련받은 랍비적 교사였으며,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유대인이요 바리새파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바울이 성장한 다소는 산양털로 된 모전(Felt)의 제조로 유명한 곳이었다. 여기서 자기의 자립생활을 위해 수공업을 배운 것 같다. 이것이 후에 자급자족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행18:3).
2.바울의 사상적 배경
1)헬라주의
바울의 헬라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종교사학파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바울의 성장과정이 주로 이방 헬라적인 환경 가운데서 자라왔기 때문이며 이러한 착상과 더불어 바울사상에 나타난 요소들 가운데 헬라의 신비적 관념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향 다소는 길리기아 평원의 교통이 빈번한 중심지며 소아시아 동쪽의 항구도시로서 동양과 서양의 갈림길에 놓여 있으며 로마제국 각처를 통하는 해로의 교통지였다. 이러한 교통의 중심지며 아울러 문화의 중심지인 다소에는 국립대학이 있어 나라에서 경영하였고 다소의 향학열과 철학에 대한 관심이 아덴과 알렉산드리아보다도 더 강했다고 한다. 이처럼 다소는 당시 세계 3대철학 도시인 아덴,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그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대문화 대도시에서 출생한 바울은 당시 다소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후11:6)고 고백함에서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서신의 문체나 단어는 헬라적이며 또한 유대적이다.
2)유대주의
바울당시의 유대인들은 두 부류로 팔레스틴 유대인과 팔레스틴 주변에 흩어져 사는 헬라적 유대인인 디아스포라로 구별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이 두 부류의 유대인들 사이의 사상적 차이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비스(W.D.Davies)의 지적은 지리적, 역사적 요인과 빈번한 전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헬라니즘 세계의 형성 이전에 흩어져 살았으므로 그 차이가 극히 적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느쪽의 영향을 받았든지 그의 유대주의 배경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사상에 뿌리를 박고 있음이 분명하다.
바울은 순수한 유대인으로 바리새인이지만 다소의 시민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말리엘의 제자로 엄격한 바리새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교육적 영향으로 바울은 철저한 유신론자이며 이방종교와 우상숭배 그리고 부도덕한 행위를 엄격히 배척하였고 구약을 영감의 글로 인정하였으며 그것을 인용하였다.
3.바울의 회심
바울이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려면 먼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 사상을 알아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바울은 자신이 고백했던 것처럼, 그 자신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울 자신도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메시야 사상은 다음과 같다.
'메시야'는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인데 둘 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그는 고대 다윗왕가의 한 왕으로 드라마틱하게 왕림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성전에 들어가서 증오의 로마인들을 내몰아낼 것이다.
1)핍박자 바울
스스로 고백하듯이 율법과 조상들의 유전에 대한 철저한 광신자였던 바울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려는" 어떠한 움직임에도 강하게 반발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은 메시야가 오셔서 규례를 고치시고 율법을 폐기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오래된, 아마도 바울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기 구분법이 있었다. 그들은 세계사를 각각 이천년의 기간을 가진 세 시기로 구분했다-혼돈시대,(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를 주신 사건을 기점으로 한) 율법의 시대, 메시야 시대, 이 세 시기가 다 지나가면 영원한 안식(sabbath)이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시기 구분법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율법은 메시야 시대가 동터 오기까지만 지속되는 한시적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바울이 이 시기 구분법을 받아들이도록 교육 받았다면, 그는 메시야가 오셔서 새로운 새로운 질서로 율법을 대치하시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장하듯이 나사렛 예수가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라는 것은 바울에게 재고(再考)의 가치도 없는 엉터리 같은 주장이었다. 예수의 사회적 지위, 경력, 가르침은 바울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의 사회적 지위, 경력, 가르침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예수는 왕궁 출신은 커녕 존재도 없는 곳에서 태어났고 군대도 없었으며 종종 물리적인 폭력을 경멸했다. 그가 스가랴의 예언 성취로 성전에 들어갔을 때는 로마인들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오히려 그들의 손에서 수모와 죽임을 당하는 전주곡이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바울이 확정적인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바울에게 확실한 것은 단지 이것이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메시야라는 것은 말 자체가 모순이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마땅한 일이었다든가 사법상의 실수라고 말하는 것은 핵심을 벗어난 논쟁이었다. 핵심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따라서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신명기21:23에 선포된 말씀에 해당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메시야라는 말을 공공연히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 바울이 취할 태도는 분명했다. 그들은 신성 모독죄를 범했고, 따라서 그에 걸맞는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고 바울은 생각한 것이다.
제자들의 활동과 가르침은 율법과 규례들, 조상의 유전 등 유대교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 점 때문에 반감이 자랐고 이 반감은 근본적인 대수술을 불렀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삶을 의미있게 하는 모든 것을 방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열심과 정력을 쏟아 부을 수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그 패거리들이 제자들에 대한 탄압을 개시하자 바울은 앞장서서 그들의 열성적인 부관(副官) 노릇을 했다. 바울의 동기는 철저히 종교적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박멸해야 한다는 열심에 사로잡힌 바울은 대제사장에게서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얻어냈다(행9:2).
2)바울의 회심
바울이 대제사장에서 받은 공문서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행진하여 다메섹 성문까지 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강력한 빛이 내리비치었으며 예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늘의 빛은 너무 강렬하여 바울의 눈을 멀게 하였으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예수의 음성은 너무나도 부드럽고 똑똑하고 권위가 있어서 그 음성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바울은 그에게 나타난 메시야가 다름 아닌 자신이 그토록 픽박하던 예수라는 것을 발견했고, 자신이 죄인의 괴수임을 발견했다.
바울은 사람이 바뀌고 말았다. 이 사건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품었던 희망들이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신령하신 메시야는 군인이 아닌 종으로 오셨던 것이었다. 또한 그가 이긴 투쟁은 로마인들과의 싸움이 아닌, 바울이 나중에 표현한 대로 '정사와 권세'를 대항 한 것이었다. 이제 바울이 그렇게 멸시했던 나사렛 예수가 그앞에 서서 하나님의 아들과 만유의 주(主)로서 조국과 바울 자신의 생애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인정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요구에 승복하였다. 그는 나중에 아그립바왕에게 간략하면서도 뜻깊은 고백을 하였다.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행26:19)
4.사도로서의 바울
원래 사도( )는 예수의 직계 제자에 한해서 그 직인을 받았다. 그래서 "원사도"(The Original Twelve)는 12명으로 고정되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결여되었을 때, 그 한 사람만을 보선하여 12숫자를 채웠었다. 그러나 후에 원사도들이 순교당하였을 때에라도 다시 보충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시고 그의 전 안목을 바꾸어 놓으셨을 때, 성령에 의해 효력이 발생했다. 이 부활 현현에 대해 그는 사도라는 그의 주장의 확인안에서 나타냈다(고전9:1). 그리고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임명받은 사도로 깨달았다(갈1:1). 이로써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갈릴리의 예언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영광의 주였으며, 메시아였다. 즉 바울은 12제자처럼 직접으로 예수를 접촉할 수는 없었으나 부활하신 그리스도, 지금도 살아서 그 안에서 역사하시며그의 생명과 능력의 원천이 되시는 영원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다. 이 까닭에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르스(Bruce, F.F)는 "예수께서 그의 부활의 실체의 영광으로 바울 앞에 나타났던 회심의 순간 바울은...... 모든 개념을 즉각적으로 예수께로 변환시켰다"고 말했다. 이러한 입장은 바울 자신도 고백하고 있다. 그는 그의 회심과 사도됨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택이라고 했다.
B.바울의 예수관
바울의 예수관을 살펴보려면 먼저 바울이 개인적으로 예수를 알고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기적 구절들에 따르면 랍비가 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공부있는 동안에 바울은 예수가 죽는 것을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행22:2ff, 26:4).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은 오직 한 번 말을 했다. 고린도후서 5:16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고 지상적 예수를 들먹이면서 바울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했던 대적자들에게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선언하였다. 그럼 이 구절은 관연 바울이 역사적 예수와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사실 바울은 역사적 예수와 함께 했던 열두 사도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수와 바울의 관계를 부인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주장하는대로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고전15:8), 또 그에게서 계시를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갈1:12). 사실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가 예수의 복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응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롬16:25-26; 갈1:1, 11:12, 엡3:2-10)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어떻게 믿었는가를 알아보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 바울은 조직 신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적어도 도서관이나 서재에 앉아서 신학의 체계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바울은 자기의 경험에 입각해서 논술하였다. 그는 믿음에 기초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는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을 때 그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그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피력한 것이다.
둘째, 바울의 신앙에는 고정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는 인간의 경험에 대해 눈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움직이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교회가 아직 유동적 상태에 있었던 시대와 아직 조직적인 정통을 수립하기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새로운 위대함과 그리고 새로운 타당성을 발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원히 그 어떤 것도 옳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예수에 관해 바울이 언급한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예수는 이스라엘인으로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탄생하셨고(갈3:16; 롬1:3), 유대인들의 율법 아래 사셨고(갈4:4), 제자의 손에 배반당하셨으며,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성찬을 제정하셨고(고전11:23이하), 유대 지도자들의 모략으로 로마의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으셨으며(살전2:15; 고전1:23; 갈3:1,13, 6:14등),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여러 곳에서 많은 증인들에게 보이시되, 그 중 한 경우에는 오백여 형제들에게 단번에 보이셨던바 그 중 대다수가 25년 이후인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당시까지도 살아있었다(고전15:4이하).
또한 바울이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은 본문에서도, 그가 예수의 말씀을 얼마나 친숙하게 깨닫고 있는가를 넉넉히 보게 된다. 특히, 믿는 자들의 삶을 위한 복음의 구체적 의미를 요약해서 가르치는 롬12:1-15:7을 산상 보훈과 비교해 보면, 그가 자기 주인의 가르침에 얼마나 철저히 젖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로마서 이외에도 바울이 다른 서신들에서 가르치는 윤리적 교훈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바울이 회심할 당시에 믿은 예수는 분명히 서신 속에 나타난 신적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회심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기껏해야 3-4년이 지나서 일어났다. 더구나 바울의 신적 그리스도와 원시 예루살렘 교회의 [다른 예수]와의 사이에 있을 법한 어떠한 분쟁의 흔적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바울의 그리스도는 나사렛 예수와 함께 걸어가고 함께 이야기한 사람들의 그리스도이기도 했다. 이것이 서신의 증거이다. 그것은 또한 복음서에 의해서 확증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복음서는 단순한 의의 교사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편상적 속죄주로 제시하고 있다.
C.바울의 십자가의 개념
신약성경에는 십자가란 말이 여러가지 다른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기본단어는 , , 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에 못박히심"이란 말로 대신 표현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는 칭의나 화해 등의 단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본래 십자가( )란 말은 란 동사에서 왔는데, 그 어근은 " "(세우다)에서 온 것이다. 그 뜻은 수직 버팀대, 말뚝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들어와 는 땅에 박은 말뚝을 뜻했으며 그 위에 "T"자형으로 횡대가 가설되었다. 십자가 처형 방법은 동양에서 기원하였다. 그리고 이 방법을 배워온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이었다. 그리고 로마인들은 카르타고(Carthage)의 페니키아인들에게서 이 방법을 배워 사용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팔레스틴에 있어서 십자가 처형은 일상 다반사였다고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한 것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로마인들과는 달리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다. 단지 사형수에게 창피를 주기 위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 위에 매달아 놓을 때가 많았다(민25:4; 수10:26; 삼상31:30). 또한 그들은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였다(신21:22-23). 그러면 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했을까?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적 사상과 달랐으며,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말로 하나님과 동일시함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신성모독 죄였다. 그 이유로 예수는 유대인으로 부터 죽임을 당했는데, 유대인의 법이 아닌 그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로마의 법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된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들로 부터 신성모독 죄와 사회동요 죄로 고발을 당하였고, 로마의 법에 의해 심한 채찍질을 당한 후 그 자신의 십자가(요19:17)를 처형지까지 운반하여야 했다. 물론 이 십자가는 무거운 나무토막이 아니었으나 이미 쇠약해진 예수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막15:21; 비교. 고후13:4). 그 다음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러나 이러한 문자적 의미를 훨씬 넘어 예수의 십자가는 역사와 구속사업의 완성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체계적이며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울신학에 나타난 십자가의 개념을 살펴보기로 하자.
1.죽음의 십자가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을 '의로 인정하는'데 필연적인 전제가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구원의 사업의 시작이고, 이것으로 구원사업이 성취된 사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다루며,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사상과 뗄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풍성히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피, 그의 십자가, 또는 그의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 등의 상당히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십자가"가 바울의 중심주제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수난 기사들과 히브리서의 한 구절(히12:2)을 제외하면 신약성경에서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이 바울뿐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죄인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곧 죄를 인하여 자기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가 이를 입증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와 함께 죽고"(딤후2:11), "그와 함께 못박히고"(롬6:6; 갈2:20), "그의 죽으심을 향하여 세례를 받고"(롬6:3), "그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고"(롬6:4; 골2:12), "그와 함께 고난 당하고"(롬8:17),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나니 그 정과 욕심까지니라"(갈5:24)라고 이를 강조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는 죽으셔야만 했는가?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나타낸다. 인간은 죄에 대한 노예요 죄아래 팔리웠고 죄의 법에 사로잡힌 초로요 죄의 법을 섬기고 산다. 이는 사람이 하는 일 때문이 아니라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했다.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절대요 중심이다. 바울에 있어서 죽음은 육과 영의 분리인 육신적 죽음과 하나님께 떨어지는 영혼의 죽음등을 뜻한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롬5:12)이며 죄의 값이다(롬6:23). 그러나 이죽음은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죄값을 치르셨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바울의 생활이었으며 선교의 중심이었다(고전1:23, 2:2; 갈3:1). 여기서 '못박혀 죽으셨다'는 동사는 완료분사( )을 썼는데 그 뜻은 이미 한번 죽은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로서 계속하고 있다는 뜻이다. 즉 십자가의 죽음은 영구적인 의의를 갖고 있지 단지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결단코 없다"(갈6:14)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 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요 둘째는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율법을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두는 정복자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요구를 다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사람들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죄와 율법과의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
1)희생적 죽음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라고 보면서 이것을 구약의 의식제도, 즉 희생의 개념에서 해석하고 있다.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약의 희생의식 개념에 관련시킨다. " "(롬3:25)이 70인역(Septuaginta)에서 처럼 "속죄소"로 번역되든 안되든 간에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에 의해서 받쳐지는 속죄물을 직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엡5:2)으로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속죄의 날에 대제사장이 제물을 바치는 그 개념에서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를 본 것이다(엡5:2; 롬8:3). 그리하여 그것은 유월절의 어린양의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 좀더 정확하게는 유월절의 어린양이 그림자라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 실체요 완성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적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언급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롬3:25, 5:9; 엡1:7, 2:13; 골1:20).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적 측면은 그의 피와 자주 관련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하여 화목 제물로 삼으셨다(롬3:25).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며(롬5:9), 구속함을 받았다(엡1:7). 또 그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가까와 졌으며(엡2:13), 화평을 이루었다(골1:20). 따라서 희생제물의 죽음은 하나의 죽음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내보내는 것이다.
2)대리적 죽음
바울은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할 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의미와 단순히 죽으신 것도 아니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리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살전5:9),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롬5:8), "우리 모두 사람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다"(롬8:32),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았다"(갈3:13)는 구절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설명한다.
3)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의미하는 다른 하나는 그것이 대속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희생은 본질상 대속적인 것이다. 구약의 희생 제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위해 할 수 없는 것을 제단에서 대신 해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스도는 죄를 알지 못했으므로(고후5:21) 무죄한 그가 죽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신의 죄나 죄책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죄를 범하고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들을 대신한 죽음이었다. 따라서 그의 죽으심은 대속적 죽으심이기에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고후5:14). 그 결과 죄인들은 죽음의 운명과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으므로 하나님께 희생제물을 드리는 것에 익숙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제물과 연결된 대속의 사상은 바울에게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서신에서 대속의 개념을 찾을 수 없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여러 신학자들은 그의 서신에서 대속의 사상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지 않고 " "를 사용했다는 이유를 들어 바울의 교훈에서 대속적인 요소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Deissmann에 의하면 " "란 전치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편지를 쓰는 경우에 사용함으로 대속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Radermacher의 연구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고후5:15에서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가 바로 그것이다.
2.화해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또 다른 국면(Aspect)은 화해(Reconciliation)이다. 희생은 죄로 말미암아 생긴 절박한 필연성을 염두에 두었고 속량은 하나님의 진노와 그 진노를 옮기기 위한 준비에 관심으 촛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화목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의 유원상태와 그의 은총 가운데로 우리를 원상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에 관심의 촛점을 두고 있다. 즉 화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의 죽으심은 단순히 사람과 그들의 죄와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과도 관계되는 화해( )의 뜻도 가진다. 롬3;24-25의 화목제물( )이란 말은 최근에는 '보상금'이란 말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 화목제물의 뜻을 알려면 그 문맥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용어는 하나님의 진노, 죄의식, 죽음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롬1:18에서는 이 화목제물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준비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럼 화해는 왜 일어나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를 위해서는 죄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항적이고 적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화해를 해야하는가? 화해에 있어 화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할 쪽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최초의 불순종과 반역으로 원수되게 한 자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태도를 돌이켜야 할 자는 바로 인간들이라는네 이의가 없다. 바울이 사용한 화해에 대한 언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 자신이 인간과 화해하신다는 언급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화해의 역사를 이루신 이는 누구인가? 인간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조건없이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이 마련한 어떤 재물을 드림으로서 화해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화해케 하신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화해를 이루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 인간은 어떤 수단으로도 하나님과 화해될 수 없다.
1)화해의 주체와 객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화해를 말함에 있어 주체(The Subject)와 객체(The Subject of reconciliation)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즉 화해케 하는 이가 누구며 누가 누가 누구에게 화목되는가의 문제이다.
화해의 주도자 오직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그의 객체일 뿐이다. 화해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롬6:11, 고후5:18에서 우리는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의 화해의 객체가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롬5:10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였던 우리 자신이다. 롬11장에 의하면 그것은 순종치 아니하던 우리들이요, 엡2:12에 의하면 약속에 대해서 외인이요, 소망도 하나님도 없는 이방인이다. 고후5장에 의하면 넓은 의미에서의 세상, 곧 죄를 질 수 있는 피조물인 전 인류이다.
2)화해의 사건
하나님의 화해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고후5:21에서는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화해의 사역을 이루실 때, 그리스도에게 대리적으로 죄를 담당시킨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 대신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유죄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과 인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반목을 일으킨 것에 의해서 그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모든 반목을 철폐했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이 은혜에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고후5:21은 이 모든 것을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
3)화해의 성격
①화해는 완성된 사역이다. 화해는 우리들 밖에서 이루어진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죄를 자기와 인간 사이의 장벽 구실을 더 이상 하지 못하도록 다루신 사역이며 현재 되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진 사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유일회적이며 완성된 사건이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것을 선포했다. 하나님은 유일한 행위자일 뿐 아니라 이에 완성된 사역의 행위자이시다.
②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셨다고 했다. 화해는 만물의 종말론적 회복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고후5장에 있는 화해 문맥에서 명백하다. 화해는 새로운 피조물과 이전 것이 지나가는 것과 새것이 오는 것의 기초가 된다(고후5:17-18). 또 그것은 구원의 날과 은혜받을 때의 기초가 된다(고후6:2).
4)화해의 결과
①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과의 교제는 화해의 내용의 한 부분이며, 화해의 한 결과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낳는다. 전에는 하나님과의 원수였으며, 이것은 법적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그러했다. 화해되지 않는 육신의 생강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8:8). 그런데 이제 화해된 자는 평화를 가지며, 자유를 누리며, 아버지 안에 있는 즐거움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우리는 그를 알고, 그를 보고, 그안에 있으며, 그의 사랑을 경험한다. 끊임없는 그와의 교제 안에서 영적 생명을 유지한다.
②자유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는 화해와 직접 관련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좁은 의미에서 화해의 결과 혹은 열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화해되었기 때문에 자유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누린다. 이 자유는 죄로 부터의 자유, 죄와 사망으로 부터의 자유 등 여러가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전에는 너희가 죄의 종이더니 죄에게서 해방되어" 이러한 자유는 화해의 내적 내용이며 결과이다.
③자녀됨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의 멍에를 벗어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화해의 열매요 결과라고 했다. 이 자녀됨은 화해의 의미의 이해를 돕는다. 화해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위이며(요1;12, 엡1:5), 그것은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며(갈3:26),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요11:52; 갈4:5). 바울은 엡1:5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아들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었다고 했다. 화해의 목적은 노예를 그냥 풀어주는 것만 아니라 그들을 다시 아들로 삼는 것 까지이다.
④사람과의 화목
죄는 하나님과 인간만을 원수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또한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깨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들 사이의 불화의 대표적인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관계이다. 그런데 바울은 엡2장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을 논하였다.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사람과의 화해를 가져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에서 화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화해란 하나님과의 교제로의 관계회복이다. ②화해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화해이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화해가 아니다. ③화해는 하나님에대해 성취되었다. ④인간은 화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⑤화해는 그리스도를 통해 곧 그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
3.구속의 십자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을 목적으로 한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회복을 설명하는데 구속이란 단어를 중시했다." 구속이란 어느 외부 통치의 권력아래 있다가 해방을 받아 그 결과로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다. 즉 어떤 권력으로 부터 해방되는 것을 말한다. 이 어휘의 문자적인 뜻은 매수(Purchase) 혹은 속량(Ransom)의 뜻이다.
속량이란 속박과 구금 아래 있는 자를 값을 지불하고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매수나 속량적 의미로써의 구속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된 자유에로 석방시킨 것이다.
이 구속의 비유에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노예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은 죄악과 우상과 인간과 죽음 아래서 노예적인 부자유한 상태에 있다. 이렇게 속박 아래 있는 인간을 그리스도께서 속량하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속이다. J.머래이가 "희생은 우리 죄 때문에 필요하게 되었고, 유화(Propitation)는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라고 한 말은 구속의 의미를 잘 표현한 말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구속에 대한 말씀(마20:28; 막10:10)에서 3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실하게 해준다. ①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성취하시려는 사역은 속량의 사역이다. ②자신 곧 자기의 생명을 주신 것은 대속물이다. ③그리고 속량의 성격은 대리적이다.
구속이라고 할때 두 가지 부류의 단어를 사용한다. 하나는 , 와 다른 하나는 , 이다. 이란 보상금 또는 구속이란 말인데 바울서신에는 나오지 않고 다만 막10:45에 나온다. 이 단어는 노예를 매매하거나 해방시켜주는 일에 있어서 고대세계에서 사용되던 전문용어였다. 바울서신에는 대신에 복합어들이 사용되어 구속의 의미를 통일성 있게 전하고 있다. 바울서신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단어는 인데, 그 뜻은 '구속의 대가'이다(롬3:24; 엡1:7). 이 때 그 '대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함축되어져 있다. 그리고 다른 모든 표현들은 그 값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치루어졌다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중요성은 구속이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몸의 구속의 날'이라고 말함으로서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하게 해준다. 엡1;14에서도 좀 불투명하지만, 역시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의 구속을 바라고 계신다(롬8:23). 그것은 성령이 하나님에 대한 보증이 되시는 구속의 최종 사역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 성령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한다(엡4:30)
L. Morris는 고전6:20과 갈3:13에 사용된 단어에 대해 다음의 세가지로 요약한다.
①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노예의 상태를 전제하며, 그 뜻은 지불할 능력이 없는 부채를 외부의 사람이 지불해 준다는 말이다.
②지불된 대가를 뜻한다고 하였다. 구속의 개념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는 것이다.
③신자의 결과적인 상태를 뜻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역설적인 표현이나 죄에서 자유하는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의미도 된다. 따라서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은 새 주인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과거의 주인이었던 율법, 죄, 죽음에서 자유함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성경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속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죄에서의 구속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예의 상태에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죄의 기만성의 일부분이다. 죄는 자유를 약속하지만, 언제나 노예로 만든다. 죄는 기쁨을 약속할지 모르나 결국 고통을 줄 뿐이다. 죄는 성공을 약속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실패를 초래케 한다. 탕자는 자유를 원했다. 그는 형과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먼곳으로 가버렸다. 비록 그가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는 그의 자유가 곧 노예의 신분으로 바뀌어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방의 엄한 주인에게 노예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탕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나타난다. 즉 우리는 죄로 인하여 죄의 종이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된다.
죄에서의 해방이나 구원이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의 기본 요소가 되는 것은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이 뜻은 "예수"( )라는 이름의 의미로서도 충분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구주라는 명칭으로도 예수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에수는 주님이시며 구주 에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마도 구원의 행위가 가장 많이 내포하고 있는 사상은 "구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구속은 어떤 면으로 보아도 '죄'( )로 부터의 구속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또한 구속이란 말은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또는 최종적으로 가르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다. 죄가 인간을 얽어매는 속박은 죄책(Guilt)과 더러워짐(Defilement)과 능력(Power)의 세가지이다. 이 세가지중 어느것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한 성경과 분리될 수 없다.
롬3:24절에는 죄책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엡1:7절에도 역시 죄를 강조하였다. 딛2:14절에서는 죄와 더러워짐을 강조 하였다. 능력의로의 죄는 때때로 무시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성경을 주의깊게 연구해 보아야 한다. 능력으로 나타나는 죄는 인간을 포로로 만들며 흑암의 왕자요 이세상 신인 사탄은 종주권을 행사하여 인간을 속박한다.
요12:31절과 히2:14절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탄의 권세를 이겼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 골2:15절에서도 악의 권세를 이겼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은 사탄에 대한 심판이다.
더구나 믿지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사탄의 기만과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한 망령된 행실은 서로 분리 시킬 수 없으며 사탄의 기만과 그 권세의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중심사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은 그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아 났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함께 죽었고 그의 부활의 능력 안에서 함께 살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의 죄의 지배로 부터 구출되는 것을 보증한다.
2)율법의 저주로 부터 구속
율법의 저주라고 하는 것은 율법 자체가 저주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율법은 거룩(Holy)하고 바르고(Just) 선(Good)하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범하는 자는 모두 형벌을 받게되며 율법의 저주는 범죄자에게 선고되는 형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즉 율법의 저주는 형사적 처벌이며 이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또는 저주이며 율법적 요구의 모든 위반에서 오는 하나님의 처벌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저주로부터의 구출은 없으면 더우기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이 구속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값주고 사심은 바로 이 저주로 부터 사신 것이며 그 값이란 그리스도 자신이 받으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의 고귀한 피흘림 뿐만 아니라 골고다에서의 그 수치가 구속의 귀중한 값이 된 것이며 우리를 위한 '저주를 받은 바'된 것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율법의 저주로 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며 율법에 대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며 또한 그 율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정죄의 속박으로 부터 벗어 났으며 자유롭게 되었고 율법을 떠나 의롭게 되었다.
특히 바울은 형식적 율법의 속박으로 부터의 구속을 언급하기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한 것은 이 율법 아래에서 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해방되어진 우리는 지금까지 죄의 노예와 기타 모든 노예적 상태에서 부터 그리스도의 종과 그리스도의 소유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그 이외에도 모든 것에서 자유함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는 종의 멍에를 벗고 아들의 명분을 얻었다고 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이루어진 특권이며, 큰 축복이다.
3)옛 사람에서의 구속
우리는 옛 사람의 속박에서 구속함을 받았다.
바울은 롬6:6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옛 사람의 생활로 부터 해방시켜주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5장에서 옛 사람의 생활을 자세히 보여준다. 바울에 의하면 옛 사람은 육체의 열매를 맺는 자로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이라 했다. 이 같은 생활은 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으로 성령을 거스리는 생활, 즉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고 사람의 정욕을 좇은 생활을 의미한다. 이 같은 사실은 베드로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쳤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이란 속박을 주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얽어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름다운 자유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는 우리를 옛 사람에서 구출하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옛 사람을 벗어 버린 우리는 이제 새 사람이요, 하나님의 뜻을 좇는 자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된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 즉 옛 사람의 생활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4.승리의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 중 또 하나는 우주적인 권세들에 대한 승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두는 것이다(고전15:24-25). 십자가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승리는 골2:15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 "이란 용어이다. 엡2;2에서 사단을 권세잡은 자( )라고 표현하고 있고, 고전2:6에서는 이 세상의 관원( )을 그렇게 표현한다. 어떤 자들은 이것을 "정사와 권세들"(엡3;10)이란 말의 유사어로 이해한다. 이 해석에 의하면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게 한 것은 영적 권세들로서 무지로 인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쿨만(Cullmann)은 이 단어를 롬13:12의 "권세들"( )과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통치자의 배후에 있는 영적 권세들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승리요 부활은 그 승리의 개선가라고 했다. 이는 아버지가 일으킨 것이요 죽음의 완전정복이요 승리이기도 하다고 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에 대한 온전한 승리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가 신자들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14:9)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백성에 대한 예수의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음에 대하여 승리하신 것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승리하신 것이다.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 여기서 "첫 열매"라는 개념은 나중 열매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부활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백성인 우리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승리임을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은 골2;13-15절이다.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의 일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측면, 즉 우리의 죄의 용서라는 측면과 우주적 세력인 정사와 권세와 정복이라는 측면을 함께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럼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으로서 무엇을 이기고 승리하셨는가?
첫째, 바울은 마귀의 유혹을 완전히 거부함으로써 마귀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십자가를 피하라는 유혹을 받으면서도 예수는 순종의 길을 걸었으며 그리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의 구원 사역에 필수적인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의 길에서 벗어나 불순종 했다면 구원 사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순종했고, 마귀는 뿌리 뽑혔다.
둘째, 바울은 죄의 권세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그 죄로 말미암아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하였으며 그로인해 우리는 정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게 되었으며, 의인이 되었고, 영생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은혜 아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목적으로 이로 인해 우리는 죄의 몸에서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이긴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였다.
세째, 바울은 사망의 권세를 정복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대 역전 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인간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이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로는 사망이 다시 인간을 주장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후로는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헤 아래 있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인 영생을 얻게 된 것이다.
5.사랑의 십자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다. 이 점에서 바울은 십자가를 인류사의 단순한 사건으로 보지 않고 있으며 단순한 주관적 체험을 위한 단순한 상징도 아니라고 하였다.
구원과 관계 깊은 말로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골1:16) 이 밖에도 바울은 사랑이란 말을 많이 썼는데 그 서신의 목회서신에 12번을 포함하여 77번을 썼고, 동사형으로는 34번, 형용사로는 목회서신의 2번을 포함하여 27번을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여야 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최대 계시라는 점이다. 바울은 속죄를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시킨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계속해서 확증한다. 바울은 십자가를 인간 역사 속에서 일어난 단순한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역사적 환경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를 가장 치욕적이며, 잔인하게 처형한 사건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준 사건이다. 바울은 다음과같이 말한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살리셨도다"(엡2:4이하). 그러나 바울이 명백히 "사랑"을 말하든지 아니면 "은혜"나 "복음"이란 말로 표현하든지간에 바울이 말하는 저변에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근본적인 것이었다(고후13:11). 또한 구원에 관한 그의 사상에 있어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그 근원이란 개념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없다. 구원이란 인간존재의 그 어떤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그 행위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런 개념으로 로마서5장의 전반부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번 언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사랑의 실재를 확신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첫번째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다"(5절)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8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입증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하여 그 사랑을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인류를 사랑하셨으며 영원전 부터 하나님의 사랑은 인류를 위해 희생과 고난의 길을 모색해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영원한 고난받는 사랑에 대해 열어 놓아주는 창문과 같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 그리고 그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 안에서 죄로 부터 자유가 실현되었고, 사랑을 위해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사랑 안에서 율법의 요구는 성취되며 성령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적인 증거는 십자가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뗄 수 없는 관계로 본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D.십자가와 칭의의 관계
칭의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며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법령이다. 그리고 칭의는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법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다른 그리스도인보다 더 의롭다고 할 수 없다. 칭의란 결코 과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대사령(大赦令)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엄청난 양의 자기 노력이나 선행도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인되게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직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을 의롭게 하셨다고 선포하셨다. 이것은 석방선언을 의미한다. 의롭다고 한다는 것은 죄책이 없다고 선언한다는 뜻이다. 즉 의롭다고 보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석방선언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의 법정 앞에 설 떄, 그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바울은 칭의를 말할 때 먼저 그 어떤 종류의 율법의 행위도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왜 율법의 행위로 될 수 없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벗어 버릴 수 없다.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타락했기 때문에 어떤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때 사람편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존하는 믿음 뿐이다. 칭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칭의는 불변하다.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고 선포한 이상, 죄문제는 단번에 전부 해결이 된다.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칭의는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는 용서와 다르다. 칭의는 죄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칭의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을까? 어찌하여 거룩한 하나님이 죄를 간과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른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것을 철저히 처벌하신다. 로마서에서 칭의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1.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롬3:24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있을까? 그는 우리를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의롭게 하신다. "값없이"란 단어는 요15:25절에서 "연고없이"로 번역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은혜로, 연고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해 주고 싶은 근거가 전혀 없다. 칭의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이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2.그 피를 인하여
롬5:9절은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뿐 아니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은혜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된다. 칭의란 하나님이 눈을 감고 인간의 죄를 잊어버리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성품의 하나님은 마땅히 죄를 다루어야만 한다. 그는 그들의 죄를 처리하셔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대신 피를 흘리실 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다. 그는 형벌을 받으신 것이다. 즉,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게 된 것이다.
3.믿음으로
롬3:28절은 분명히 언급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우리는 은혜로서 피로 의롭다함을 얻을 뿐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행위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수 없다. 오직 진리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그렇다고 믿음만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의롭다함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우리의 행위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이다. 즉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십자가와 칭의의 관계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칭의는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죽으심, 즉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으로 인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없다면 칭의 역시 없게 된다. 그것은 죄 지은 인간은 용서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죄 사함이 없는 우리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공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며, 그 피를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 즉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잊어서는 안될 것은 결코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Ⅲ.결론
이 논문의 결론은 지금까지 고찰하여 본 바울의 십자가에 대한 개념을 요약함으로써 본 논문의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본 논문을 요약한다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의 상징, 멋을 내기 위한 악세서리로 보지 않았다. 오직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권능이었고, 전도의 핵심이었으며, 모든 것이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죄에 대한 구속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죄와 사망에서의 승리였다.
본 논문에서 제일 먼저 다룬 것은 바울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누구이며,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으며, 사도로써 어떤 생활을 하였고, 바울은 예수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바울은 먼저 자신을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로마시민인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늘 핍박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기쁨이 있었으며, 천국의 소망이 있었다. 즉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소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으며, 구세주로 믿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영원히 그 어떤 것도 옳은 것이 될 수 없다고 믿었다.
본 논문이 두번째 다룬 것은 본 논문의 제목인 바울의 십자가의 개념이다.
첫째, 바울은 십자가를 죽음의 개념으로 본다.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육과 영의 분리와 하나님께 떨어지는 영혼의 죽음을 뜻한다. 즉 이 죽음은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다. 그로인해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죄로인하여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 즉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십자가의 죽음을 두 가지로 보는데 첫째는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요 둘째는 율법에 대하여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다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와 율법과의 철저한 결별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둘째, 바울은 십자가를 화해의 개념으로 본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히 사람과 그들의 죄와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도 관계되는 화해의 뜻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왜 화해를 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를 위해서는 죄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으며 원수의 관계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과 하나님과의 원수되었던 관계가 깨어지고 화해의 관계가 된 것이다. 여기서 화해의 주체는 하나님이요 객체는 인간이다. 그리고 이 화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졌으며, 자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세째, 바울은 십자가를 구속의 개념으로 본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속을 목적으로 한다고 한다. 인간은 죄악과 우상과 죽음 아래서 죄의 노예로 속박당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죄의 종이 아닌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의 속박에서 구속됨을 말한다. 둘째, 바울은 율법의 속박에서 구속됨을 말한다. 세째, 바울은 옛 사람의 생활에서 구속되어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네째, 바울은 십자가를 승리의 개념으로 본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승리요 부활은 그 승리의 개선가라고 하였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마귀의 유혹으로부터의 승리요, 죄의 권세로부터의 승리이며, 사망의 권세로 부터의 승리라고 하였다.
다섯째, 바울은 십자가를 사랑의 개념으로 본다. 바울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로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속죄를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시킨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계속해서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그 사랑 안에서 죄로 부터 인간은 자유가 실현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최종적인 증거이다.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도 아니요, 여자들의 멋을 위한 목걸이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며,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속함을 나타내는 것이요, 우리를 의롭다함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불의한 인간을 만나실 때, 즉 불의한 인간이 자기의 고의적인 불복종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된 그리고 의로우신 뜻에 거역함으로 하나님의 저주와 적대하심을 일으켜 하나의 난국이 생겨났을 때 그난국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참 소망이요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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