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말씀!! 한번 더 !!!

[스크랩] 감동 없는 지식-토마스 왓슨

하나님아들 2012. 8. 26. 09:20

감동 없는 지식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관념적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뜨겁지가 않다. 그들의 지식은 달빛과 같다 할까, 빛은 있지만 열은 없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는 지식은 그들에게 아무런 구원의 효력도 취한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위선자들의 지식은 죽은 지식, 열매 없는 지식이다. 그 지식의 정보를 제공할지언정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런 지식은 위선자들을 조금도 개선시키지 못한다.

“네 지혜와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사 47:10)고 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지식은 그들을 죄 가운데서 더욱 교활한 사람으로 만든다.

이들은 자기들을 지식을 자랑삼을 만한 사유가 워낙 없다. 압살롬은 그의 머리카락이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의 목을 매달아 죽였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은 그들 머리속의 지식을 자랑삼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들을 파멸시키게 마련이다. 고대 세계의 많은 사람이 방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방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다. 적용되지 못하는 지식은 사람에게 지옥에 가는 불을 밝혀줄 뿐이다.

 

가식적인 거룩

우리의 진실성 없는 모든 과시적인 허식의 거룩은 윤색해서 전시해 놓은 부정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방법으로 지옥에 가는 것뿐이다.
올곧은 사람은 핑계가 없고, 그의 말과 그의 마음이 일치하며, 그는 철두철미 고결하다.
사람들은 명성을 갈망하고, 세인의 신망을 얻고 싶어 하며,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성자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신앙적인 외관과 스타일로 어떻게든 단장하려 든다. 하지만 어쩌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데, 내 양심은 나를 정죄한다면 무엇이 더 나으랴? 자기는 지옥에 가 있는데, 다른 이들이 자기를 지옥에 간 줄로 생각해 준들 그게 무슨 유익이 되랴?

거짓 경건은 이중의 죄악이다. 위선자는 생전에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죽을 때 자기 자신을 속인다. 위선자는 모든 사람에게 혐오감을 준다. 악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허식을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허식만 부리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을 너무 많이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허식만 부리기 때문이다. 악인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을 너무 많이 부리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그가 경건의 허식밖에 더 이상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행 26:28).

 

속빈 신앙고백

만일 사람이 사탄의 형상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몸에 지니고 다닌들 그에게 더 나을게 무엇인가? 하나님의 계시진리를 받았으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유리한 점이 무엇인가? 속빈 신앙고백이 구원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정복을 입은 채 지옥에 갈 것이다(마 7:22; 8:12).

 

종교라는 허울

때로는 탐욕이 양심을 사칭하는 경우가 있다. 유다는 종교의 미명 아래 돈을 가로채려 든다. 그는 “이 향유를 어찌 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나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하였다.

얼마나 인정 많은 유다였느냐! 그러나 그의 구제는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종교를 자기들의 야망을 감추는 가면으로 삼는다.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10:16)고 예후는 말한다. 아니다. 예후여, 그대의 열심은 왕궁을 차지하는데 있었다. 그것은 열심이 아니라 국가정략이다. 예후는 왕관을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 종교를 발판으로 삼았다.

사이비 경건은 이중의 죄악이다. 미량의 녹슨 금이 다량의 반짝이는 놋쇠보다 훨씬 낫다. 소량의 차다운 은혜가, 설혹 많은 약점 때문에 무디어 졌더라도, 위선자들의 그 모든 번쩍거리는 겉치레보다 더 선하다.

위선자는 바라보기에 그럴듯하며, 경건한 눈빛을 가졌지만 마음속은 공허하다. 그러나 신실한 사람은 그의 내면이 가장 알차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신망이나 이익과 일치하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려 들지만, 여타의 일에선 면제해 주기만 바란다. 에서와 같다고 할까 그는 아버지께 사냥한 고기를 갖다 드리는 일에는 순종하였는데, 필시 사냥질을 좋아한 까닭에 그랬겠지만, 보다 중요한 일 , 예컨대 자기 아내를 선택하는 일에서는 순종을 거부하였다.

위선자들은 폭풍우 속에서는 항해하려 하지 않는다. 참다운 은혜는 혹한의 계절을 견뎌낸다. 별처럼 가장 깜깜한 밤에 가장 밝게 빛나는, 그런 믿음이야말로 귀중한 믿음이다.

 

피할 수 없는 심판

일단 심판이 선고되면, 그대는 무엇을 할 터인가? 그대는 어디로 갈 터인가? 그대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겠는가?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대는 세상으로부터 도움을 구하겠는가? 세상으로 말하자면 당신의 온 무리가 온통 불바다가 되리라. 성도들로부터? 성도들로 말하자면 땅위에서 그대가 지지리 조소하였다! 그대의 양심으로부터? 양심에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가책이 있다. 긍휼하심으로부터? 기간은 이미 만료되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배상을 요구하실 만한 것, 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도인의 귀에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며, 그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가장 값비싼 향유이다.

부자의 손에 들려진 돈은, 아무리 우리에게 제공되더라도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한, 우리를 부유하게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은덕이나 은총도 믿음의 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믿음은 상처받은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막 9:24)라고 하였다. 참다운 믿음은 언제든지 죄로 상처받은 마음속에 거한다.

의롭다 칭함을 받는 믿음은 기대어 의지하는데 있다. 구원을 위해 우리는 홀로 그리스도만 신뢰한다.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뭇가지라도 붙잡듯이, 가엾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죄인은 자기가 당장 망하게 된 줄 깨달아, 생명의 나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꽉 붙잡게 되며, 그래서 구원을 받는다.

모든 죄 중에서도 불신의 암초를 조심하라. “너희가 삼가 혹 너의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멀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3:12)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술주정뱅이나 저주와 욕, 악담하는 자가 아니기만 하면, 불신자인 것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불신앙은 복음에 대한 죄이다. 불신앙은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를 마치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훼손시킨다. 불신앙은 죄의 상처를 그리스도의 피의 유약보다 더 확대시킨다. 불신앙은 그리스도께 표명하는 고차원적 경멸이며, 유대인들이 그의 옆구리를 찌른 창날보다 더 깊이 찌르는 창날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어찌나 깊은지 죄인의 낮은 위치까지 낮추시며, 하나님이 긍휼은 어찌나 높은지 구름보다 더 높은 위치까지 높이신다.

하나님의 긍휼을 악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의 긍휼의 향기로운 꽃에서 독극물을 빨지 말라.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신다 하여 계속 죄를 지어도 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렇게 하는 것은 긍휼을 당신의 원수로 삼는 소행이다.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죄 짓는다는 것이 마귀의 논리학이다. 긍휼하심 때문에 죄 짓는 자는 바를 만한 약이 있다는 일로 자기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사람과 같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죄짓는 자는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으리라. 긍휼은 악용당하면 격분으로 전환한다. 만일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하면,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신 29:19, 20)고 하였다.

하나님은 긍휼의 보고를 가지셨다. 기도는 이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당신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두 팔로 모시고 나아가라. 모든 긍휼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양을 취하여”(삼상 7:9)라고 하였다.

 

포도나무 선교회 

출처 : 이미와 아직의 여운
글쓴이 : 라벤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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