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파노라마
제가 마가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선 고민한 것은 마가복음의 내용 중에 약 90% 정도가 마태나 누가복음에 수록되어 있다는 중복(重複) 문제입니다.
마태나 누가복음을 이미 강해한 입장에서 이를 반복해서 강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리하여 착안한 것이 “성경 본문”(本文)을 최대한 그대로 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정년퇴임한 설교자로서의 뒤늦은 후회가 무엇인가 하면 행함은 뒤따르지 않고 “말이 많았다”는 자책(自責)입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선지자 에스겔은 “말”로 예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行爲)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한 대로 솔선수범할 때에야 그 증거가 진실(眞實)임이 입증이 될 것입니다
.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강해는 설명은 적게 하고 본문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는 것일 거라는 깨달음입니다. 이점을 다른 강해에서도 유념했습니다만 본서는 특히 마가복음의 간결하고 명쾌한 특성을 살리기 위해서 이를 명심하고 썼습니다.
복음서의 중심주제(主題)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공통적으로 분기점(分岐點)이 되는 중요한 질문이 나오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5, 막 8:29, 눅 9:18) 하고 물으신 질문입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고 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告白)을 들은 주님은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할 것을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여기가 복음서의 분기점(分岐點)입니다.
이를 중심하여 전반부는 “예수가 누군가”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기사(記事)가 집중이 되어 있고, 후반부는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오셨는가”를 증거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10:45)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반복적으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누군가? 그가 왜 오셨는가”를 증거하려는 것이
복음서의 주제(主題)요, 기록목적(記錄目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어느 본문으로 설교를 하든지 이 주제와 기록목적을 놓치지 말고 이에 입각해서 증거해야만 복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8:27-38절 말씀을 책의 맨 앞에 놓은 의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특징
마가복음은 건물에 비하면 골조(骨組)와 같고, 나무에 비하면 나목(裸木)과 같은 복음서입니다. 그러니까 지엽적(枝葉的)인 해설보다는 복음의 뼈대를 세워주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자세히 해설해주고 있는 것을 압축을 해서 간단하고 명쾌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회 지도자(指導者)용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하겠습니다.
현대교회 설교에는 복음진리의 뼈대가 빈약합니다. “긍정의 심리학(心理學), 칭찬의 처세술(處世術), 축복의 미학”(美學) 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복음진리를 증거하다가 옥에 갇힌 사도 바울은, “누가 철학(哲學)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初等)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8) 하고 배척을 합니다.
사도는 이를 달리 표현하기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골 2:19) 합니다. 즉 지엽적(枝葉的)인 것을 붙들고 중심(中心) 주제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은 복음의 뼈대가 없이 교양강좌와 같은 현대교회 설교에 규범(規範)이 된다 하겠습니다. 현대교회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머리를 붙드는”, 정통적인 복음주의 설교를 회복해야만 하겠습니다.
수난의 종 그리스도
복음서에는 각기 특징이 있는데 마가복음은 “수난의 종”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으로써 섬기는 삶을 사시다가
종래는 자기 목숨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실 “수난의 종”에게는
족보도 없고, 생일도 없고, 축하해주러 오는 동방박사도 목자들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으로써 회중들을 가르치시는 “말씀사역”은 극소화(極小化)하고,
1장부터 “귀신을 내어좇고,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섬기는 사역을 극대화(極大化)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가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접촉(接觸)하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벙어리 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시되 마태나 누가복음에서는 말씀만으로 “꾸짖으시니” 나갔다(마 17:18, 눅 9:42)고 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손을 잡아 일으키시셨다”(9:27)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를 축복하시는 장면도 마태나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안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가복음은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저희에게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10:16, 9:36) 합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저희에게 대시며”(1:41),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안수하여 고쳐주시고(8:23),
귀먹은 사람에게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7:33) 고쳐주십니다.
마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머슴과 같으십니다.
이런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7:37)고 말했습니다.
무리들은 이처럼 종으로 섬기시는 예수님을 좋아한 것입니다.
창조의시작과 복음의 시작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고 시작이 되는데,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즉 재창조가 시작이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유념할 점은 첫 창조와 재창조의 다른 점인데, 첫 창조는 말씀만으로 가능하였으나 재창조는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를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10:45) 왔노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비로소” 말씀하신 후로는 무리들과의 접촉은 되도록 피하시는데,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9:31) 합니다.
주님은 10장에서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가노니”(33) 하십니다.
누가복음은 9:51절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합니다.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는가?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10:34) 하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1차, 2차, 3차에 걸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장에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1),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7)하십니다. 이를 우리는 종려주일로 기념을 하고 있는데 벌써 고난주간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⅓을 고난의 한 주간(週間)에 할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과 그리스도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14:1) 하고, “유월절과, 예수를 잡고자” 하는 음모를 결부시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유월절에 희생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명절에 맞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고, 저들은 유월절 양을 잡을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는 하나님께서 왜 유월절을 지키라 하셨는지,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이 언제인지 대답할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14:22-24) 하십니다. 이 밤은 예표로 주신 것이 참 것으로 “개혁”(히 9:10)이 되는
마지막 유월절이요, 첫 성찬의 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예에서 해방된 것이 유월절 양의 피로 말미암은 것같이 우리가 사탄의 노예에서 구속된 것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살아나심으로 무엇이 입증이 되었는가?
①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롬 1:4), 즉 그 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②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즉 우리 죄가 다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습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즉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신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여 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1:1)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안에는 여러 편의 복음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가 한 편의 복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에 있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1:1) 하고 시작이 되어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라”(16:16:15)는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내용은 복음이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졌는가를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16:20) 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는 이제도 주님은 형제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진행(進行) 중임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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