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파노라마
주제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사야는 메시아 예언으로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신약성경에 로마서가 있듯이, 구약성경에는 이사야서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사야서가 없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시라는 증거를 세울 수가 없었을 정도로 그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예언서입니다.
그런데 고등비평가들은 이런 이사야서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통일성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1-39장까지만이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이고
나머지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제2이사야(40-55장), 제3이사야(56-66장)의 기록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약성경은 이사야서를 22회 이상 인용하면서 전체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을
한 결같이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마 3:3, 막 1:2, 눅 3:4, 요 1:2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40:3) 하신 예언의 성취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하신 61:1절을 찾으셔서 낭독하신 후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7-21) 하고
자신이 예언의 성취자임을 친히 증거하셨습니다.
성령께서 구스 내시를 회심케 하실 때 사용하신 말씀이 이사야 53장인데 성경은 이를 가리켜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행 8:28)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모두가 이사야의 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40장 이하에 나오는 말씀들이요,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중요한 대목들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이런 본문들을 설교할 때에 이는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말씀이 아니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제2 이사야의 글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므로 저들의 주장을 받아드리게 되면 이는 이사야서에 대한 훼손뿐만이 아니라, 위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사야서를 논거(論據)로 삼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게 될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증거가 약화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1:1) 4대에 걸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이사야의 활동 기간을 웃시야 왕이 죽던(6:1) 해로부터 계산하여, 예루살렘을 침략했다가 패퇴한 산헤립이 죽임을 당한(37:38) 때까지만 계산한다해도 58년 이상이나 됩니다.
이토록 오랜 기간에 걸쳐서 기록된 것이라면 문체(文體)가 다양하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를 겸비한 마음으로 받아드리려 하지 않고 이성의 잣대로 판단하려는 저의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사야서의 핵심 장을 말할 때에 53장을 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53장은 이사야서뿐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메시아 예언의 핵심적인 장입니다. 신앙생활에 생기가 없고 심령의 갈급 함을 느낄 때에 53장을 낭독해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이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사야서에는
“구원”이란 말이 30회, “구속, 구속자”란 말이 28회 이상이나 등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해주고 있는가?
이사야서의 중심주제가 “구원”에 있음을 말씀해줍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너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12:2-3)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는 또 하나의 핵심 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6장입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6:1)고 말씀합니다.
왕이 죽던 해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계시하여 주신 의도가 무엇인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6-27).
즉 보이는 왕, 지상의 왕, 유한한 왕은 갈리어도,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영존(永存)하시고, 여상(如常)하시며, 무궁(無窮)하신 왕은 갈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지상의 나라들이 하늘 보좌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계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성경 전체로 보아도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53장에 나오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복음의 핵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복음의 주체(主體)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심과, 그에 의하여 계획되고 성취해 나가시는 복음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 아들의 복음”(롬 1:1, 9)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중심에 와야 하고 그의 백성 된 자들은 이를 기억하고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사야서의 두 주제, “보좌와 어린양”을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어려운 시기에 높이 들린 보좌를 본 것처럼, 요한도 밧모라 하는 유배지에서 높이 들린 보좌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뵈었던 것입니다. 계시록에는 “보좌”가 44회, “어린양”이 29회나 등장합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7:10) 합니다.
그런가 하면,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6:16-17) 하고 진노도 나타납니다
. 이처럼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이사야서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이사야서를 구속사라는 맥락에서 바라보노라면 경탄할 정도로 통일성과 일관성이 있음을 대하게 됩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1:4) 하고,
“죄와 허물”로 인한 슬픔과 절망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인간의 소행입니다
. 그런데 후반부에 가서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하고 소망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 왜 이렇게 해주셨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 하신 그 언약, 즉 구속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가를 상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언약하신 “언약”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41:8) 하고 부르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51:2) 하고 그들이 언약백성임을 상기시키십니다.
이사야와 동시대에 세움을 받은 미가 선지자는 그의 예언을,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미 7:20) 하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를 지켜주실 것을 확신함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나라를 굳게 세우고”(9:6-7) 하고,
다윗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의 자손으로 한 왕이 나실 것(16:5)을 말씀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55:1-3) 하고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
선지서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놓쳐서는 아니 됩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언약은 변함이 없고,
오직 여기에 회복이 있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5-27).
이를 알았기에 바울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하고 증거합니다.
선지서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렇다해도 그들이 증거하고 있는 핵심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를 망각하고 선지서에서 교훈이나 축복을 찾으려다보니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사야서를 대하면서 내용의 배열(配列)이 연대기(年代記)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주제(主題)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크게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럽다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서의 기록목적과 특성을 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입니다. 선지서를 기록케 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전후해서 16명의 문서선지자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셨습니다.
그러나 멸망을 막은 선지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실패를 보여주시려고 기록했단 말인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윤리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이 있습니다.
윤리적인 면은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즉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들은,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에 신학적인 면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선지서의 중심주제가 심판에 대한 경고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입니까?
성경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자는 것은 중심주제인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교훈만을 강조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는 뜻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의 기록목적은 당대를 위한 것도 아니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심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즉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자들이 돌아옴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성취는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의 후예들이 돌아옴으로 회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은 어린양의 구속으로만이 기능하여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선지서의 궁극적인 기록목적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선지서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선지서에는 4중적(4重的)인 복합성이 있습니다.
즉 네 장면(場面)이 겹쳐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선지자 당대의 장면과,
둘째는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되는 장면과,
셋째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넷째는 최후심판의 장면이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16명의 문서선지자들은 한결같이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런데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 즉 회복을 약속합니다. 그 심판이 당대에는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는 것으로 임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최후심판으로, 그리고 회복에 대한 예언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39장까지는 주로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
즉 “진노”를 말씀하는 문맥이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고 시작이 되는 40-66장까지는 초점이 위로와 회복, 즉 “긍휼”에 맞춰져 있습니다.
전반부의 죄에 대한 진노가 보좌에 앉으신 이의 공의(公義)와 결부되어 있다면,
후반부의 긍휼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1장은 명제와 같은 말씀으로 이사야서 전체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장을 바르게 깨닫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① 이스라엘에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② 그들의 반역과,
③ 반역으로 인한 심판과,
④ 심판 후에 남은 자에 대한 회복을 말씀합니다.
㉠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2상) 하십니다. “자식, 양육”이란 표현에서 그들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계획하심이 나타나 있습니다. ㉡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2하) 하십니다.
자식들이 하나님을 거역한 것은 여기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런 반역은 에덴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역의 현장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사탄을 정복케 하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원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여자의 후손”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 22:18) 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게 될 것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게 될 것(삼하 7:12-16)을 언약하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신 “거역”이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에 대한 “거역”임을 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것은 구약성경에서 교훈적인 윤리만을 보고 언약하신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신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구약의 형제들보다 윤리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신구약을 막론하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을 뿐입니다.
㉢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7) 하고 멸망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심판 받게 된 결정적인 원인이 우상숭배요, 이는 메시아언약을 배신한 죄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이런 일은 인간의 소행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9) 하고,
“남은 자”가 있게 될 것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18), 하고 구속하여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해주실 은혜인데, 어떻게 해서 가능하여지는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합니다.
이것이 1장의 요약이요, 이사야서의 구도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는
그리스도의 탄생(7:14, 9:6, 11:1)과, 죽으심(53장)과, 그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65:17)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스러운 이사야서를 신학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목회자의 입장에서,
그것도 성경신학적(구속사) 관점에서 바라보아 그리스도를 증거코자 하는 것이 본 강해의 목적입니다.
'구속사 !!! 구원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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