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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속사의 관점에서 본 빌레몬서 파노라마

하나님아들 2014. 3. 8. 14:36

빌레몬서 파노라마


빌레몬서에는 중요한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빌레몬서의 송신자(送信者)인 바울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주님을 만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던 중 현재 로마옥중에 갇혀있는 몸입니다. 다음은 본 서신의 수신자(受信者)인 빌레몬입니다. 그는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현재는 골로새교회 성도로서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는 상전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네시모입니다. 그는 빌레몬의 노예인데 도망쳐 나와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현재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그를 사랑 받는 형제로 영접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물음이 제기될 수가 있습니다. ㉠ 바울은 오네시모를 왜 돌려보내야만 하는가? ㉡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왜 돌아가야만 하는가? ㉢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왜 형제로 영접해주어야만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이 빌레몬서의 주제라 할 수가 있습니다.


빌레몬서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


이 난제(難題)를 세 사람의 관계성 속에서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공통분모(共通分母)와 같은 또 한 분이 등장합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두가 25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서신에서 모두 11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서의 주인공(主人公)은 바울이 아닙니다. 빌레몬도, 더욱 오네시모도 아닌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통해서도 증거되어야 할 주인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 사람은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주 안에”(8, 16, 20, 23)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등장(登場)하는 세 사람 중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았다면 빌레몬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떠한 관계여야 하는가? “동역자(1)요, 함께 군사(2) 된 자요, 아들(10)이요, 심복(12)이요, 곧 사랑 받는 형제”(16)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거기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당이나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하고 선언하는 복음의 능력과, 위대함과,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발견

 

이런 관점으로 빌레몬서를 새롭게 바라볼 때에 중요한 요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에서 바울은 우리 죄를 대신 회계(會計)하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등장하고, 빌레몬은 모든 사람을 품어주어야 하는 교회(敎會)를 대표하는 자로 등장을 하고, 오네시모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모든 죄인(罪人)의 대표자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1, 9)요, 빌레몬은사랑을 받는 동역자”(1하)요, 오네시모는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심복”(11-12)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변화된 저들의 신분과 사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도망쳤다가 회개하고 돌아가고 있는 오네시모의 모습에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을 통해서 누군가를 받아주지 못하고 갈등을 하고 있는 또 다른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저지른 책임(責任)을 대신 담당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會計)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18-19상) 하고 말씀합니다. 대신 담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네시모와 자신을 일체화(一體化), 내지는 동일시(同一視)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7) 합니다.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것이 곧 바울 자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사형 받아 마땅한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는 것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16)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의,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우리는 지옥만 면한 것이 아니다


본 문에는 “그리스도 안에서”가 두 번(8, 20), “주 안에서”가 두 번(16, 2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가 한 번(23), 모두 합해서 “엔 그리스도”가 5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25) 안에서 가능하게 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도 회복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이 짧은 서신에서 그리스도를 11번이나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빌레몬서의 중심적인 사상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 빌레몬, 오네시모의 관계성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우선 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에는 남남이었으며 타인(他人)이었습니다. 그들 상호간의 관계만이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분리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엡 2:12)였다는 점입니다. 그러했던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므로 그들의 관계성이 새롭게 형성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서신은 빌레몬 개인에게 보낸 사신(私信)이 아닙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2)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레몬서도,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계 2:7)으로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성도들은 이웃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유지해야만 하는가? 이것이 빌레몬서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話頭)입니다.


엔 그리스도

 

그러므로 빌레몬서의 키워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3)라는 인사말에서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한 마음과 한 입으로”(롬 15:6)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면, 우리의 관계성은 분명 사랑 받는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이러한 자들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면,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빌레몬서는 쓰여지지 아니하였을 것이요, 이렇게 부탁하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이 있다고 말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는 바울 자신도,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롬 1:14)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분모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레몬에게,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었다”(5)고 말씀합니다. 이는 중요한 정의(定義)입니다. 에베소 형제들을 향해서도,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엡 1:15) 감사하기를 마지 아니 한다고 말씀합니다. 골로새 형제들에게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골 1:4) 합니다. “믿음과 사랑”, 이 둘은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 즉 신분증명서와도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고, “사랑”은 형제 상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성도, 성도와의 관계성도 성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음을 믿기에 오네시모를 돌려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요


만일 빌레몬이,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17)는 바울의 간구를 거절한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요, 만일,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16)는 요청을 거절한다면 그의 사랑은 헛것임이 판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 상전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빌레몬에게로 보내는 바울의 의도를 신변의 위험을 염려하여 오네시모가 거부했다면 그의 “회개”(悔改)가 거짓 회개임이 입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레몬서에 등장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되는 것이 이 때문입니다. 백전 노장의 존귀한 사도가 도망친 한 노예의 영혼을 위하여 지하 감방의 희미한 불빛 아래서 사슬에 매인 불편한 손에 붓을 들고 중보의 편지를 쓰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영광을 떠나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사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을 봅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하는 말씀에서, “자기를 속전(贖錢)으로”(딤전 2:5-6) 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합니다. 친필이란 이것이 내 말에 대한 보증서(保證書)라는 뜻입니다.

형제여, 빌레몬서를 대하면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해 가지고 도망쳤던 오네시모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형제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서해주고 받아주어야 할 형제에게 있는 오네시모는 누구입니까?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라”(17)고 빌레몬서는 지금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처 : 구속사 파노라마
글쓴이 : 바람이어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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