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 !!! 구원사!!!

[스크랩] 구속사로 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수정/보완)

하나님아들 2014. 3. 8. 13:59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구속사적 의미
(삼상17:41-54)

1.도입

본문의 내용은 사울 왕이 이끄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영원한 대적인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한 사건 기록입니다. 이때 블레셋은 골리앗이라고 하는 구 척 장수가 전신갑주로 무장한 채 블레셋 군대를 대신해 이스라엘과 대면해 나왔으며, 마침 아비 이새의 심부름으로 앞서 전장에 나온 형들의 안부를 확인코자 보낸바 된 다윗이 이스라엘 군대를 대신해 골리앗과의 한 판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전격적으로 승리한 기사를 담고 있습니다.

소년과 장수의 싸움, 무장과 비무장의 대결, 칼과 물맷돌의 충돌, 전광석화와도 같은 한 판으로 승패가 갈린 전투 등, 본 사건 내용은 이런 다양한 극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가운데 생존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능력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섭리적이며 계시적인 사건기록입니다. 그러나 본 사건만큼 그 사건에 담긴 계시적 의미가 본의와는 무관하게 자의적이며 임의대로 해석되고 적용되는 경우도 드물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은 본문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거의 예외 없이 관심의 초점을 삼아 강조하며 교훈하는 내용이 다윗이라는 개인의 믿음과 용맹에 치우쳐 설명하고 있음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즉 다윗의 담대한 믿음, 다윗의 용감성, 다윗의 불굴의 투지와 믿음의 승리 등등 말입니다. 여기서 조금 발전하면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승리 정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일반적으로 메시지의 핵심을 다윗이라는 영웅적 인물의 탁월한 믿음에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와 같이 ‘다윗의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을 본받아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의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탁하는 것을 통해 마침내 승리하는 성도들이 됩시다’라고 적용시키는 것이 다반사란 말입니다.

물론 본문을 전후의 문맥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해서 적용시킨다면 다윗에게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크게 잘못됐다고 지적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역사의 본질이 구속사로서 곧 하나님의 뜻이 세상 역사를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래서 본 내용과 사건을 통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내용이 무엇인가를 고려한다면, 단순히 인간의 신앙적 행동을 모범적 실례로 해석해 적용시킨다는 것은 본문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와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적 본의를 한 참 비껴간 왜곡된 관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창세전에 수립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을 밝히 드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啓示)서인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계시의 보고(寶庫) 말입니다. 때문에 성경은 어느 대목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한다 할지라도 언제나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그 부분을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원리가 적용돼야 하는 법입니다. 성경 신학적 해석, 곧 구속사적 접근 말입니다. 이는 달리 성경의 총체적 계시관에 바르고 깊이 접촉돼 있지 않으면 성경본문의 본래적 해석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 내용은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관찰해서 해석하고 적용할 때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적합한 합당한 해명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히12:2)으로서 유일무이한 신앙의 모범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의 요구를 유일하게 지켜 순종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마5:17, 롬10:4). 어느 사람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는 말씀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한다’(롬3:23)는 말씀에서 제외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느 사람도 타인 앞에서 완전한 자로서 타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이유와 명분이 이에서 나와집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가 없는 분입니다(요일3:4, 히4:15). 죄를 짓지 않은 분입니다(벧전2:21).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입니다(고후5:2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이 곧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빌2:6, 요일5:20, 요1:1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성경의 특정 인물을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모범이나 삶의 귀감으로 제시한다면 이는 처음부터 성경의 본의와는 무관한 왜곡된 시각인 것입니다.

결국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내용은 저자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다윗의 신앙적 담대함과 승리, 그리고 용맹성을 고취시켜 적용시키고자 소개한 내용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문에 소개된 전투를 관전(觀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본 싸움을 해명해야 합니다. 저자가 본 전쟁기록을 통해 독자들에게 시사하고자 하는 계시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성경 신학적으로 접근해 해석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총체적 성경 계시관의 입장에서 본 사건의 본의를 파악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해 이야기의 핵심이 인본주의적 설교와 관점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되지 못함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는 무관한 불법적 설교로 판단되게 마련입니다. 말씀에 대한 정당한 성경적 해석이야말로 바른 성경적 신앙관 정립의 관건으로 작용합니다. 믿음은 들음에 근거하며 들음은 곧 그리스도의 체계화된 말씀(하나님의 구속사)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롬10:17). 이로 인해 ‘지식-믿음-순종’의 상호의존적 관계성은 적법한 성경적 신앙의 패러다임(範例)으로 작용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저자는 누구든지 계시로 주신 말씀(신구약 성경) 외에 더하거나 덜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것이며 모든 심판의 재앙이 그에게 더해질 것임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계22:18-19). 오늘날 공개적으로 드러난 이단의 무리들을 제외한다면 누가 기독교 교회공동체 안에서 공공연하게 말씀을 문자적으로 가감하는 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시록 본문에서의 가감의 문제를 적용시킴에 있어서 교회 밖의 이단의 무리에서 찾기보다는 기독교 교회공동체 안을 향해 경계로 주신 말씀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적용시켜야 될 줄 압니다. 우리는 교회역사 속에서 이미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 온 거짓 선지자나 교사나 사도에 대해 경계할 것과 저들을 시험해 철저히 교회 밖으로 내 쫓을 것에 대해 엄히 요구하는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줄 압니다.

그렇다면 말씀의 가감에 대한 현대적 적용의 실상은 어떤 경우일까요. 오늘날 말씀에 가감은 교회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왜곡된 해석과 자의적 적용을 의미합니다.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해석과 임의적이고 편의적인 적용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 적용하는 것을 통해 인간의 세속적 행복과 번영과 성공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런 자의적 숭배신앙의 결국은 하나님을 인간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도구와 수종자로 삼아 섬기는 것으로 인해 우상 숭배적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게 되는 것이 십상입니다. 성경을 총체적 계시관에 입각해 통일성 있는 지식의 체계로 이해해서 신앙하지 못할 때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소위 파편적 지식의 위험성이 이에서 나와집니다. 어느 한 본문을 부분적으로 왜곡되게 이해하는 잘못과 더불어 이를 자의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본의와는 전혀 무관한 해석과 적용을 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자칭 그리스도인으로 비쳐질 수는 있을망정 하나님과는 관계도 분깃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자기 기만적 신앙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롬10:2-3과 마7:21-23에 소개된 자기 뜻에 옳은 대로 섬기는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의 설교를 마감하시는 결론 부분에서 이들 거짓된 신앙의 실체를 엄중하게 고발하고 계십니다. 불법적인 신앙관이라고 정죄하셔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말씀의 본의에 바르게 접촉돼 붙들린바 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극명하게 제시하는 경우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과연 바른 해석과 바른 적용은 바른 성경적 신앙관 정립의 첩경입니다. 이런 원리에 근거해 바른지식/바른신앙/바른교회라는 일련의 신앙적 패러다임이 산출됩니다.

그렇다면 주어진 본문의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를 어떤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며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제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성경의 바른 해석법의 일환인 성경 신학적 방법, 곧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문을 접근해 봅니다. 이를 다른 말로 계시 의존적인 해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2.전개

성경의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속죄사역 안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공동체를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심으로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활동사역 말입니다(엡1:4-6).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적이고 예표적으로 진행해 나가시기 위해 세상을 향해 앞서 드러내신 계시로서의 모범적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과 골리앗 전투사건은 이런 구약 구속사의 본래적 의미와 연결시켜 해석하지 않으면 사건 속에 담긴 계시의 본의를 바르게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약적 구속사의 태동

①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저들에게 위임해 주십니다(창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대리적 통치자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원형적이고 본래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창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실체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집중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처음부터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②선악과 금령법으로서 아담언약(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적 삶을 특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

그렇습니다.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존속여부가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이란 일종의 선의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왜냐하면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상 제한적이고 의존적이며 종속적인 자유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의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실존적 절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전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양면성을 띠고 나타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③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일 뿐입니다(요12:31, 16:11, 마4:8, 엡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과 하와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창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로 인해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이제 이들에게는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형벌로 주어진 죽음만이 찾아올 뿐입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합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듯 싶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靈界)에서 못 다한 한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가 제기됩니다.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떠먹은 아담부부(창3:6)에게 죽음의 형벌은 필연적입니다. 이 두 언약의 상호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방해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進退兩難)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현실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민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해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질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신적 기원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창2:17을 어긴 이들의 죄책(창3:6)을 해결해 주시며 동시에 창1:28의 최초의 은혜언약의 내용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이 추가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곧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점진적 계시의 원리상 종말론적 구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시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하기에 이릅니다.

④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이제 당초 창조원리(창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창3:15)을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갱신됐다는 얘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의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자취를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상은 여자의 후손(창3:15)을 세상 가운데 오게 하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구체적 언약으로서 아브람 언약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후 인류의 초기역사 진행 속에서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을 통해 종말론적 성취를 향한 구체적 언약의 계보를 드러냅니다(창4:25-26, 5:1-5). 이렇게 해서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은혜언약의 ‘선택적 특성’상 셋에게로 연결되고 이후 노아에게 이르는 가운데 세상 가운데 많은 인류를 생산해 땅에 충만케 하기에 이릅니다(창6:1). 그러나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된 죄성은 그 왕적 권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기에 이를 정도로 죄의 관영함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노아 때에 이르러 온 인류는 하나님의 물 심판에 처해집니다. 이는 죄에 대한 불가피한 심판의 필연성과 당위성에 대한 계시적 사건으로서 종말론적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표적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약의 복음서 기자는 노아 시대의 물 심판과 롯 시대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심판을 종말론적 최후심판의 예시적 사건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마24:37-39, 눅17:26-30). 하나님의 물 심판에서 노아와 그를 포함한 여덟 식구만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로 생명을 보존해 주심으로 여자의 후손 언약의 계보는 여전히 은혜가운데 종말론적 성취를 향한 구속사의 진행을 계속합니다.

과연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세상이 다 주께 속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모든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될 것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이 모든 역사적 사건을 주도적으로 섭리해 가십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셔서 오늘도 여전히 존재케 하시며 구원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며 운반하며 건설하는 자들로 여기 이렇게 살게 하시는 분도, 당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은혜가운데 물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주신 동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 안에서 이미 종말론적 최후심판에서 이미 제외된 자들입니다(요5:24). 이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고후5:10, 롬14:10, 계20:11-12) 그 심판대에서 악인과 죄인으로 정죄 당해 지옥의 형벌을 종말론적으로 선고받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요5:25, 롬8:1-2). 이런 의미에서 성도가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심판은 선악간에 행한 행위에 대해 최후의 정산 및 정화와 교정의 의미가 담긴 종말론적 정산(精算)의 성격을 담고 있음이 확실합니다(고전3:10-15, 롬14:10-12). 성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평생에 성화적 구원을 이루어 가야하는 이유가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빌2:12). 구원은 결코 방종의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엡4:22, 골3:5-8). 오히려 철저히 정결하고 순결한 삶을 촉구합니다(엡4:23-24, 골3:1-3, 롬12:1-2).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 언약에 근거해서 노아와 새롭게 언약을 갱신하시는 가운데 보존언약을 체결하십니다(창9:1-3, 8-10절). 이 보존언약이 갱신의 성격을 띠는 것은 그 내용이 창1:28을 통해 아담과 맺으신 창조언약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 언약은 이제 노아의 후손을 통해서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지는 가운데 마침내 섭리적 작정의 기간이 차면 정하신 여자에게서 나시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갈4:4-5).

노아에게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셈과 함과 야벳이 그들입니다(창9:18). 이들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셈에게 부어집니다. 셈에게는 모두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창10:22)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은 이들 중 셋째인 아르박삿을 택하셔서 여자의 후손을 잇는 언약적 계보로 삼으십니다(창11;10). 이 아르박삿의 후손 중에서 아브람의 아비인 데라가 출생하게 되며(창11:24) 마침내 데라의 세 아들(26절) 중 맏이인 아브람을 이스라엘의 혈통적 조상이며 여자의 후손 언약의 명시적인 당사자로 부르시게 됩니다(창12:1). 그리고 아브람과 보다 구체적이며 공개적인 언약을 개인적으로 그를 지명해서 부르심으로 맺어 주십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지금까지 암시적이고 은닉적으로만 진행돼 오던 초기 인류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사는 아브람에게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으로 그 실제적 모습을 역사의 전면에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해 아브람 언약을 사실상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공식적인 효시(嚆矢)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람 언약이 이전의 언약들과의 관계 속에서 독립된 별개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의 성격이 한결 같이 신적 기원을 갖는 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인해 구속사적 언약은 계시적 동질성을 가질 뿐 아니라, 동일한 연속선상에서 종말의 최종적 완성과 성취를 향해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 언약이 갖는 내용적이며 계시적인 성격은 무엇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백성과 땅과 메시아적 왕의 약속으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임에 다름 아닙니다(창12:1-3). 이렇게 해서 창조언약에서부터 기원된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은 이후 죄에 대한 속죄를 보증하는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구속사적 원리로 갱신되면서 인간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를 본격적으로 출발시킴으로 마침내 아브람에게 이르러 그 미래적 전모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아브람을 조상으로 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로서의 신정왕국을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을 공식적으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브람 이후의 하나님의 구속사는 이스라엘의 초기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삼대 구성요소인 백성과 땅과 왕에 대한 약속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적 간섭을 통해 성취돼 가는지를 소상하게 소개하면서 그 내용을 심도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일련의 언약적 구속사를 성경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통해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가 마침내 여자의 후손을 세상 가운데 보내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죄의 속박에서 구원하실 뿐 아니라, 저들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임을 확증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성격이 계시 의존적이고 섭리 의존적인 믿음으로 나타나야 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①자손언약의 성취

이후 창세기 저자는 창12장 이후부터 신명기서에 이르기까지의 모세오경 기사를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형성돼 명실 공히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인준되는지의 계시적 과정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소개함으로써 아브람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언약성취의 신실성을 강조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출애굽사건은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자손언약이 430년이란 섭리적 작정의 기간을 통해 어떻게 때가 차매 성취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계시한 언약적 구속사건입니다. 참으로 언약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푸는 열쇠입니다. 구속사의 핵심단어(key word)는 언약이란 말씀입니다.

②땅 언약의 성취

모세오경 뒤에 편집된 여호수아서는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의 성취에 이은 가나안‘땅’ 정복 사건에 대한 구속사적 기록내용입니다. 비록 직접적인 물리적 정복은 다윗과 솔로몬 치세 하에서 최종적으로 완료되지만 신적 기원에 근거한 언약의 필연적 성취라는 종말론적 성격상 여호수아서 기자는 도면상에서의 분배를 직접적인 물리적 땅 정복사건과 동일시 여기는 것을 통해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간주합니다(수18:8, 21:43-45). 이는 신약적 표현을 빌리자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할 때 기도의 내용이 앞으로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을 미리 전제해서 ‘감사함’으로 기도할 것을 요구받는 내용과 같은 맥락의 표현입니다. 빌4:6-7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울러 종말론적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성도의 영적이고 본질적인 구원의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에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미 앉힌바 된 자들로 설명됩니다. 엡2:5-6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다시 말해 미래적인 것을 현재적으로 이미 소유해 누리는 자들이란 의미가 성립된다는 얘깁니다.

왕 언약의 성취

그렇다면 이제 남은 부분은 왕에 대한 언약의 성취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선택과 등극으로 말미암는 사실상의 신정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 말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왕의 구속사적 신분과 성격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적 통치권자의 의미를 갖습니다. 왕의 통치하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과 평안을 누림으로 구원을 안전하게 보장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이스라엘에 대한 구속사적 계시역사는 도중에 실패의 역사로 끝나는 것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이스라엘인 성도, 곧 교회공동체를 통해 이루실 것에 대한 예비적 조치였음을 간파해야 될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이스라엘은 전 우주적 역사 속에서 새 이스라엘로 출현하게 될 교회공동체와 이를 통해 현시 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한시적으로 선용된 계시적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①왕의 필요성 시사

따라서 사사기서를 통해 저자는 구속사적 통찰력과 안목을 가지고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사21:25)라고 기록하는 것을 통해 ‘왕의 필요성’을 암시적으로 시사하게 됩니다. 이는 앞으로의 이스라엘의 초기역사는 왕의 출현과 이로 말미암는 가시적 신정왕국의 건설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임을 가리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사들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 왕의 모형이며 예표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왕의 예비적 성취자들로서 말입니다.

②왕에 대한 암시

룻기서에서는 이런 사사기서에서의 왕의 필요성을 통해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대리적 통치권자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암시하며 시사하는 ‘왕의 암시’를 안내한 계시서입니다. 룻기서 기자는 특별히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서 얻은 베레스로부터 시작되는 다윗의 집 계보와 다윗의 이름을 끝으로 룻기서를 마치는 것을 통해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명실상부한 메시아적 왕으로 다윗을 묵시(黙示)적이지만 의도적으로 지목하는 가운데 그의 기록을 마감합니다(룻4:18-22).

사무엘서는 본격적으로 다윗을 기름 부어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 선지자이며 제사장인 사무엘의 출생에 관한 계시를 먼저 소개하는 것으로 서두를 열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의 출생 또한 이런 구속사적 관점을 갖고 해석해야지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란 내용으로 단순히 ‘기도는 만능’이며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사무엘서의 본래적 기록의도와 사무엘 출생의 구속사적 의미에 대한 하나님의 의중과 본의를 비껴가는 결과를 초래해 자의적 해석으로 전락하게 될 뿐입니다. 인본주의적 설교의 실상이 이런 경우입니다.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해석과 적용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무시하고 본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편의적으로 적용시키는 무례한 태도야말로 성경이 그토록 경계시켜 말하는 이른 바 ‘가감의 실상’(계22:18-19)인 것입니다.

③왕에 대한 하나님의 내정(內定)

사무엘서는 사사기와 룻기의 시대적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이는 사사기에서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과 암매함과 불순종으로 일관하는 왜곡된 신앙관이 여전히 사무엘서 초반 몇 장에 걸쳐서 적나라하게 소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당시 엘리 제사장의 무능과 그의 아들들의 극심한 방종과 타락의 정도는 이들이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란 점을 감안한다면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어느 정도에 이른 지를 쉽게 가늠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무엘서 기자의 지적을 통해 극명하게 확인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3:1).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셨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더 이상 계시로 말씀해 주지 않으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동시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시에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볼 때, 계시의 희귀는 백성들의 영적-도덕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이었습니다(암8:11-12). 로마서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소위 ‘방치와 무관심’의 심판 말입니다(롬1:24, 26, 28절). 아울러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아들들을 일컬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삼상2:12)고 고발합니다. 제사장의 아들들이 이렇다면 백성들의 태도는 어떻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마저 결국 죽임을 당했으며 이 소식을 접한 엘리 제사장 또한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기에 이릅니다. 이때 비느하스의 아내는 시부와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나머지 마침 잉태한 아이를 출산하면서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짓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삼상4:17-22). 이런 일련의 비극적 상황은 불충한 엘리 제사장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적 선언 속에서 이미 예견된 사건의 구체적 성취입니다(삼상2:34-35). 이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수준과 도덕적 상태가 사사기 시대의 패역과 불순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지적합니다.

이런 영적 암매와 불순종이 만연하고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무엘을 준비시키시는 가운데 신정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위해 섭리적 간섭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부응해 선지자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해 영적 대 각성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기에 이릅니다(삼상7:5-6). 하나님께서는 이를 기쁘게 열납하심으로 때마침 이스라엘을 공격해 온 블레셋을 대파시켜 주십니다. 이렇게 대해 사무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사무엘이 나이가 많게 되자 그의 아들이 사무엘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책봉되지만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못하고 불의와 불법을 일삼는 고로 백성들의 장로들이 늙은 사무엘을 찾아와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릅니다(삼상8:4-5).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불완전하지만 시내산 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존재하고 있음으로 인해 사실상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고 계신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오히려 약속하신 왕을 주실 때까지 믿음으로 기다려야 했음이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요구에 불편한 마음을 표출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사실인 즉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해석하십니다(삼상8:7). 이는 근본적으로 모세 언약 곧 시내산 언약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배역(背逆)한 행위인 것입니다. 사무엘은 열방의 왕의 제도의 부당성과 불합리성을 제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기는 일에 회복되기를 촉구해 봅니다(10-18절). 그러나 이미 빗나간 저들의 변절된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를 않습니다. 막무가내로 오직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열방과 같은 왕을 세워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합니다.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20).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사무엘로 하여금 마침내 사울에게 기름을 붓게 해,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서 룻기서에서 보았듯이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아님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바로 ‘그 왕’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신 배경은 무엇일까요. 이는 사람의 뜻을 좇아서 세워진 왕의 결국이 어떠함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앞서 예비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야말로 참 왕인 사실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기술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사울은 처음부터 신정적(神政的) 이스라엘의 참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상실한 자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권자로서 신적 기원으로 말미암는 신분적 성격에 미달한 자로 말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이후 등장하게 될 참 왕의 등극을 위한 예비적이고 시험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서의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자는 신정왕국의 대리적 통치권자로서 이스라엘의 바람직한 왕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사무엘 저자는 이런 사실을 이후 사울 왕의 행적을 통해 명백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신정적 이스라엘 왕으로서 사울의 부적격성은 시내산 언약의 율법을 결정적으로 불순종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노출됩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아말렉 진멸에 대한 사울의 타협적 행동이었으며(삼상15장),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사무엘을 대신해 번제를 독단적으로 집례한 월권의 행위(삼상13장)인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서 보여 준 사울의 행동은 한결 같이 변명과 핑계로 일관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대신해 그 마음에 합한 왕을 따로 세우실 것을 사무엘을 통해 시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무엘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를 세워 기름을 부을 것을 명령하심으로 다윗을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참 왕으로 추대할 것임을 지시하십니다(삼상16:1). 이렇게 해서 아직은 소년의 티를 채 벗지 못한 이새의 말 째 아들인 목동 다윗을 참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內定)하게 됩니다(10-13절). 이것이 다윗의 첫 번째 기름 부음 받은 사건입니다.


④왕에 대한 하나님의 공적 계시(啓示)/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본의

사무엘 기자는 16장에서 이새의 말 째 아들 소년 다윗을 기름 부어 하나님께서 마음에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내정한 후, 바로 17장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내용을 소개합니다. 구속사에 민감한 독자라면 이런 저자의 저술이 다분히 의도적인 편집이며 기록인 것임을 간파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으로 하여금 골리앗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는 것을 통해 16장에서 은밀하고 비공개적으로 기름 부은 다윗을 이스라엘 앞에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선 뵈는 효과만점의 현장으로 말입니다. 이를 위한 하나님의 세부계획은 당시의 전쟁 상황을 효과적으로 선용하시는 가운데 주도면밀하게 진행됨을 봅니다.

지금 불레셋이 이스라엘을 재공격하고 있습니다. 불레셋은 아말렉과 더불어 이스라엘 역사상 하나님의 나라를 총체적으로 대적하는 사단세력을 상징하는 군대로서 여자의 후손과 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뱀의 후손을 적극적으로 표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침 불레셋 진영에서는 골리앗이라 일컫는 구 척 장수가 온 몸에 전신갑주를 입고 나와 사실상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조롱하며 능멸하는 데 한껏 열을 올리고 있던 차였습니다. 이 전쟁에 마침 이새의 세 아들들이 병사로 출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비 이새는 다윗을 형들에게 심부름 보내면서 형들의 안부를 물어 올 것을 당부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불레셋과의 전쟁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게 되면서 마침 골리앗의 기고만장하고 오만불손한 도전적 모습을 목격하기에 이릅니다. 그의 오만 방자한 태도를 바라보는 다윗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는 거룩한 분노가 불일 듯 다윗의 정서를 자극합니다. 이에 다윗이 무의식적으로 일성(一聲)을 내뱉습니다. “이 할례 없는 불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이런 다윗의 용맹과 의분이 사울에게 전해짐으로 해서 그는 급기야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현장에 출전하기에 이릅니다. 사울은 어린 다윗을 염려해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33절). 그러나 다윗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출전의 의사를 표명합니다. 사시는 하나님께서 사나운 짐승의 발톱에서 다윗과 양무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셨듯이 그렇게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불레셋 사람을 기꺼이 처치하실 것에 대한 강한 승부욕을 불태웁니다.

다윗의 의지가 너무나 당당하기에 마침내 사울은 다윗의 전투를 허락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군복과 갑옷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씌우고 칼을 그에게 들려 보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내 이 모든 전신갑주들을 벗어버립니다. 저자는 그의 이런 행동을 지적하면서 ‘익숙지 못하여’(39절)라고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골리앗과의 전투는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자격으로 이스라엘과 적군 앞에 당당하게 드러내 보이시려는 일종의 하나님의 성전(聖戰)을 의미하는 계시적 사건으로서 철저히 하나님의 방식에 의해서만 수행돼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전투에 필수적으로 소용되는 일체의 인간적인 병기들을 의도적으로 제외시켜 버린 것입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47절에서 다윗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듯이 여호와의 구원이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분명하고도 철저하게 독자들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곧 이어 일어난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단지 물맷돌 하나로 적의 이마를 명중시킴으로서 일격에 상대방을 쓰러뜨린 사건에서 극명하게 입증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시종일관 하나님의 방식으로 수행돼야 합니다. 선한 수단으로 선한 목적에 이르러야 합니다. 선한 목적을 빙자한 모든 수단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사울은 하나님께 제사드릴 목적으로 가장 좋은 우양을 남겼노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의 행동을 불순종으로 간주하십니다(삼상15:21-22). 그를 왕으로 세우신 사실을 후회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는 악한 수단이 선한 목적을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예시적 사건인 셈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기름부음으로 차기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하신 다윗(16장)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앞에 선을 보이신 셈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시의 상황을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왕의 선택에 대한 당신의 선하신 뜻을 결정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던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 사건에서 다윗의 승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현시(顯示)라는 계시적 의미 외에도 구속사적 관점에서 다윗의 승리로 인해 그에게 연합된 온 이스라엘이 구원과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사실을 통해, 장차 참 다윗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죄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교회공동체의 모습을 원리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본 전투에서 사단의 세력을 표상적으로 대표하고 있는 불레셋의 패배는 향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사단세력의 종말론적 멸망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교회공동체의 최종적 승리를 더불어 시사한다 하겠습니다.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모든 열악한 환경가운데서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에 의탁해서 그 분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원리가 이에서 성립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좇아서 내정하신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에서 그를 파격적인 승리로 이끄시는 것을 통해 이를 확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그의 보좌 등극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⑤이스라엘 여인들의 화답

사무엘서 저자는 이어 18장에서 골리앗을 죽이고 불레셋 군대를 대파시킨 사울과 다윗 및 이스라엘 군대가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왕의 성으로 돌아오는 데 왕의 성에 거주하던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나아와 이들을 맞으며 노래하는 내용을 소개됩니다. 이때 여인들이 환영하며 노래하는 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인들의 환호와 창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18:7).

저자는 이 내용을 부각시켜 독자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을 통해 여인들의 창화(唱和)의 소리가 단순한 환영의 노래가 아닌 백성들의 민심이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이미 옮겨지고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반응은 백성들의 마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의 손길이 저들 위에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사울의 시대는 지나가고 다윗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로서의 신정적 통치를 본격적으로 구현해 내는 시기가 한 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동시에 암시하는 것이기도 압니다.

과연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는 세상역사 속에서 ‘때와 환경(사건)과 사람’을 통해 진행됨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이제 다윗은 백성들의 절대적인 환영과 기대에 부응해 이스라엘 중에서 서서히 그의 존재를 보다 구체적이고 강렬하게 각인(刻印)시키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반응에서 첨예하게 나타납니다.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삼상18:8-9).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으신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왕에 대한 부분이 바야흐로 그 최종적 성취를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삼상13;14, 행13:22)의 등극은 곧 이스라엘이 명실공히 신정적 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방에 드러내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신17:14-15). 곧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일차적’ 성취 말입니다.

그렇다면 향후 건설된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당초 언약의 핵심사상인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일차적’이고 ‘예비적’으로만 반영해 내고 있다는 지적은 통일 이스라엘이 오래지 않아 분열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뉘어 지는 것을 통해 처음부터 아브라함과 시내산 언약의 최종적 성취가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역사적 이스라엘은 처음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실 때부터 아브람의 혈통적 이스라엘을 하나님 나라로 전제해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간파하게 됩니다. 갈3:29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롬2:28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 롬9:6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이로 말미암아 역사적 이스라엘은 언약의 초기단계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이스라엘의 출현, 곧 교회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의 도구로 선용됐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3.결론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로서 계시의 내용은 구속사이며 이를 푸는 열쇠는 언약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관에 바르고 깊게 접촉돼야 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성경을 하나님의 본의에 따라 합당하게 해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과 골리앗 전투에 관한 사건 기록을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통한 교훈적이고 신앙적 모범사건으로만 해석해서 편의적으로 적용시킨다면 하나님의 본래적 의도에서 한 참 동떨어진 자의적 견해에 불과할 뿐입니다.

성경의 총체적 주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따라서 언약적 구속사라는 관점에서 성경의 본문을 접근할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과 골리앗 전투기사는 이미 앞에서부터 전개되어 온 일련의 구속사 진행의 연장선상에서 접근해야 함이 필수적입니다. 곧 ‘백성’과 ‘땅’ 언약 성취에 이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의 제시와 선택의 문제 말입니다. 이로 인해 이제 이스라엘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적 왕국을 실현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인 다윗을 이스라엘 앞에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데뷔시키고자 하심이 다윗과 골리앗 전투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의 실질인 것입니다.

참 다윗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언약’ 백성으로 편입된 성도들의 생애는 이상과 같은 하나님의 철저한 섭리적 손길에 붙들린바 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당신의 영원하신 목적을 이루시는 일에 효과적으로 선용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5:7). 성도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서 그 섭리적 장중에 붙들려 은혜가운데 인도와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위경 가운데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작용하기에 족합니다. 샬롬.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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