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1:3-14과 창 1-3장 사이의 구조 속에 함의된 신학적 연계성에 관한 고찰
(A Study on the Theological Correspondence &
Continuity contained in the structure between
Eph 1:3-14 & Gen 1-3)
Ⅰ. 도입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the Book of self disclosure)이다. 본문에서 계시란 특별히 창세전에 수립된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3-14)을 피조세계 속에서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점진적으로 펼쳐 보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표현이다. 따라서 역사란 본질상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용이며, 계시에는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의 일하심이란 주제가 반드시 수반되기 마련이다.
이처럼 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계시의 구체적인 표출로 기능하기 때문에 성경역사(계시사)를 창세전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구속의 경륜과 연관시켜 그 본의를 유기적으로 바르게 정립하지 못하면 자칫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해석의 가감이 발생할 수 있다(계 22:18-19). 이는 성경을 사욕의 수단으로 이용하게 돼, 결과적으로 불복종적이고 불법적인 신앙관을 형성케 하는 동인으로 작용하게 된다(롬 10:2-3, 마 7:21-23). 바른 지식(해석)은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척도로 기능한다는 명제는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롬 10:17).
본 논고에서는 엡 1:3-14에 기술된 신령한 복의 내용인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을 계시의 원천으로 삼고,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으로 창 1-3장의 내용을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조적인 맥락 속에서 전개시켜 나감으로 두 본문 간에 함의된 유기적인 신학적 상응성(correspondence)과 연계성(continuity)을 논증코자 한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4장부터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의 본질이 창 3:15에 약속된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한 언약적 구속사인 사실을 문맥 속에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경역사(계시사)의 본질이 언약적 구속사인 사실은 창세전 삼위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그리스도 안에서', 엡 1:4상)에 근거하고 있으며, 구원협약의 성격은 언약의 방식으로 약정돼 있다(예수님의 새 언약 사상과 일치 됨)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세전 구원협약(엡 1:3-14)은 구속사(계시사)의 원천이며 언약의 원형(뿌리)으로 기능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1) 성경본문을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이런 사실로 인해 요구된다. 성경을 언약적 구속사(성경신학)의 관점으로 해석하게 될 때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본의를 바르게 포착할 수 있으며, 이런 결과는 바른 신관/바른 구원관/바른 신앙관 정립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될 것이다.
Ⅱ. 전개
에베소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는 가운데 행해지는 일체의 신앙생활의 동인은 다름 아닌 구원의 실질을 전인적으로 누리게 될 '신령한 복'의 보증에 근거한다고 역설한다(엡 1:3).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선행되지 않는 신앙이란 단지 형식적인 종교생활에 불과하다. 그런 신앙은 자의적인 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과 무관하며 열납되지도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마 7:21-23, 롬 10:2-3). 가인이 드린 제사의 경우가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시해 준다(창 4:3-5). 가인과 아벨이 드렸던 제사의 진정성의 여부는 믿음이 관건이었지 제물의 차이가 아니다(히 11:4). 결과적으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내신 진리의 체계에 접촉된 믿음의 발로로 드린 제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타락한 종교심을 발동시킨 데서 나온 자의적인 믿음으로 드린 우상 숭배적 제사행위였다. 반면 아벨은 그렇지 않았다. 아벨의 믿음은 그에게 구원과 영생의 믿음을 발생시켰던 진리의 체계 곧 창 3:15(여자의 후손언약)의 원복음에 바르게 접촉된 데서 나온 계시의존적인 믿음의 발로로 드린 제사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령한 복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늘에 속한 영원하고 영속적인 복의 본질 곧 구원의 실질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언약적 표현이다. 본 논고에서 신령한 복의 내용인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의 성격을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해 표현하는 것은 구원협약의 내용이 본질상 예수님의 새 언약 사상(구속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적으로 찾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사역)을 구체적으로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이 양자(구원협약과 새 언약 사상) 사이에 공존하면서 두 주제의 궁극적인 성취를 보증하는 언약적 공통분모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은 구원협약에 담긴 핵심 사상을 달리 '피로 맺은 약정'(히 9:12, 22절)으로 설명하면서 구속의 구체적인 집행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시행된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1. 선(先) 계획 :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
(1)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4-6절, 수립자)
삼위하나님께서는 창세전 영원한 목적으로서 구원협약을 약정하셨다.2)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규정한다(엡 1:3). 신령한 복이란 복의 본질이요 실체란 의미로 하늘에 속한 영원하고 영속적인 구원의 삶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언약적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복의 내용은 삼중적인 성격을 띠면서 성부 하나님의 선택, 성자 예수님의 구속, 그리고 성령님의 인침과 적용의 사역으로 구분해 설명한다(엡 1:4-14).
먼저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셨다(4절). 선택의 일차적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당신의 친 백성으로 삼기 위함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선택한 백성들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아들 곧 양자로 삼아 주실 것을 예정하셨다(5절).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의 상반된 두 요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개혁파들의 통상적인 신학적 관점이다.3) 반면에 같은 개혁파 안에서도 선택의 시점에 관해서는 전택설(supralapsarianism)과 후택설(infralapsarianim)로 나눠져 있는 것이 일이니다. 이들 설(說)에 관한 비교논증과 고찰은 관점의 차이가 여전히 상존할지라도 이미 그 전모가 밝혀져 진부해 진 내용으로 본 논고의 취지와는 다소 벗어남으로 여기서는 추가적인 언급은 피할 것이다.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사상은 이중적인 목적을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피택자에 대한 죄로부터의 구원에 집중된다(엡 1:6상, 7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구현이다(엡 1:6하, 12절, 14절).4) 영광구현의 삶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범사에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전인적인 순종의 삶을 가리킨다(요 17:4, 고전 10:31).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가리키며(7절), 예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기뻐하시는 뜻에 기초한 절대 주권사상에 근거함을 의미한다.5) 사실상 예정과 선택의 근거로 작용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뻐하시는 뜻으로 설명되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은 유한한 피조물로서는 그 본의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는 권한과 비유적으로 동질성을 띤다는 것이 로마서 기자의 관점이다(롬 9:21). 본 토기장이 비유에서 특별히 천히 쓰임 받게 될 그릇의 입장에서 보면 토기장의 부당성과 불공정함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아주 없지 않다. 반면 토기장이의 입장에서는 장인(匠人)의 마음대로일 뿐이다. 여기서 장인이 자기 마음대로 같은 재료를 가지고 여러 가지 물건들을 다양한 용도에 따라 만든다고 해서 잘/잘못과 옳고/그름을 지적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나 책임이 없다. 이것이 장인이 갖는 특권이다. 동일한 원리 속에서 하나님에게도 창조주로서 피조물에 대한 특권이 주어진다. 이런 특권을 일컬어 신학적으로 절대 주권(absolute sovereignty)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기뻐하신 뜻에 기초한 선택과 예정의 총체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영원토록 찬미하며 경배드리게 하기 위함이라고 기술한다(6절, 12절, 14절). 전도서 기자는 이와 관련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기술한다(전 12:1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소요리 문답 제 일 문항에서는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답변한다. 고린도서 기자도 동일한 관점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하라"고 강력히 촉구한다(고전 10:31). 여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분의 뜻과 말씀의 원리를 좇아 살아가는 계시의존적이고 섭리의존적인 신앙생활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요 17:4). 마태는 이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는 전인적인 삶의 자세로 요약해 말한다(마 6:33).
(2)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7-12절, 시행자)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기 위해 대속의 방식으로 피흘려 죽으심으로 구속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창세전 구원협약을 통해 약정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확증해 준다. 이 약정을 신학적으로 '피의 약정'(bond in blood)이라고 부른다.6) 곧 '생명은 피에 있고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는 사죄의 원리를 좇아서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엡 1:7)는 표현이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7)
나아가 성자 예수님은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때가 찰 때에 친히 여자의 몸을 통해 성육신하셨고(창 3:15, 렘 31:22, 갈 4:4, 마 1:18-23),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육신사건과 수난의 공생애 사역, 그리고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속하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계획이 세상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된 사건의 결정판이다(막 10:45, 눅 19:10, 행 2:23, 4:27-28).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약정(언약)의 방식으로 협약되었기에 '선(先) 언약하시고 후(後)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피조세계 속에서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수립하신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성경을 통해 세상역사 속에 드러내신 행위를 계시사(啓示史)라고 총칭한다. 곧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수립된 하나님의 구원협약이 세상역사를 방편삼아 때를 좇아 점진적으로 드러나도록 섭리하셨다. 서신서 기자는 이처럼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으로서 구원협약을 가리켜 영원 전부터 감추었던 '비밀 또는 비밀의 경륜'(엡 1:9, 3:3, 9-11, 골 1:26, 롬 16:25, 딤후 1:9) 등으로 기술한다. 창세전에는 감추어 졌던 비밀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마침내 세상 가운데 그 실체와 전모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계시사의 본질은 구속사와 동질성을 띠게 된다.
한편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공효에 대한 적용 범주와 대상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피조물 곧 창조계 전역에 유효하게 적용된다(롬 8:19-22).8) 아담 부부의 타락과 범죄는 저들의 후손들에게 뿐만 아니라(롬 5:12) 모든 피조물들에게도 하나님의 저주를 불러들인 동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창 3:17-18, 롬 8:19-22). 그리스도의 구속이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전 창조계를 포괄한다는 관점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함"이란 표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엡 1:10). 골로새서 기자는 동일한 주제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신다"고 기술한다(골 1:20). 창조의 면류관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만물이 애매히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처음 창조시 피조물의 상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로 보존되었다. 따라서 범죄한 인류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신다면 인류의 죄로 인해 피조물에게 임한 저주 또한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제거되는 것은 마땅하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이 그리스도 안에서 곧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선택된 백성들과 창조계 전체를 포함한 상태로 약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은 나아가 창세기 1-3장에 기술된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구조적 패턴'9)과 상호 불가분의 인과(因果)관계의 연관성을 맺음으로 종말론적인 화해와 화목의 보증까지도 전망케 하고 있음을 논리상 부인할 수 없다(계 22:1-5). 결과론적으로 재해석하면 하나님의 구원협약 (엡 1:4-14)속에는 창 1-3장에서 제기되고 있는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이라는 일련의 연속적인 주제들이 이미 자체 속에 암묵적으로 내재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속에 기뻐하신 뜻대로 의도하셨던 '그리스도 안에서'10)란 구속사상이 피조세계 속에서 현실화되기 위해 구속의 전 단계인 창조와 타락의 필요성은 '논리적'으로(logically)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 하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창조), 주로 말미암고(섭리), 주께로 돌아간다(재창조)'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롬 11:36). 이런 시각의 연장선상에서 계 21:1에 기술된 새 하늘과 새 땅의 재창조 사역은 창 1:1의 처음 천지창조와 상호간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적으로 간직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곧 완전 재창조의 개념보다는 갱신(renewal, 체질의 변화)을 통한 재창조의 개념이란 관점에서 말이다(벧후 3:10-13, 계 21:4-5, 롬 8:19-22, 딤전 4:4).11)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3장에 기술된 창조-타락-구속을 통한 재창조 사역의 구조적 틀은 비록 문자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수립하신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계시록의 중심사상 또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집중적으로 강조해 조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계 5:9-14).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사(구속사)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요 5:39).1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의 최종 완성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는 단순히 과거 에덴의 회복의 차원을 훨씬 능가할 것이다. 과거 에덴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적 가능성들이 창조계 속에 내재된 하나님 나라의 초기상태를 계시했던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상태는 과거 에덴 창설시 문화명령의 적극적인 수행(사회/문화적 활동)을 통해 창조계 속에 잠재돼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의 가능성들이 총체적으로 구현되고 집약된 고도의 문명국가의 이미지를 띠면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의 정체성은 첫 창조와 불가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갖는 가운데 정화와 갱신의 과정을 거쳐 재창조에 이르게 된다는 관점이다.13)
(3) 성령 하나님의 인침과 적용(13-14, 적용자)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수님께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복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인치시고(성령세례, 고전 12:13, 고후 1:22, 5:5) 그들의 마음에 내주하심(인격적 관계 맺음)으로 믿어 거듭나게 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도록 협약하셨다. 이런 성령님의 인침과 내주의 적용사역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신약교회공동체의 가시적인 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른다.
성령님은 오늘도 교회 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말씀을 조명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본의를 밝히 해명해 주실 뿐 아니라,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을 대리적으로 수행하신다. 계시록에 소개된 일곱 교회를 향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각 교회들의 당시 형편과 처지를 좇아 칭찬과 책망과 권면과 약속 등을 다양하게 말씀하시는 가운데(계 2:1, 8, 12, 18, 3:1, 7, 14절), 그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계 2:7, 11, 17, 29, 3:6, 13, 22절)고 강권하시는 내용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해 준다.
이처럼 21세기 현대 교회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몸으로는 천상의 보좌에 계실지라도 영으로는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당신의 몸 된 교회 속에서 현재적으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해 기도하며(롬 8:26-27),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하므로(갈 5:16), 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명분과 실질(롬 12:2)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2. 구체적 실행 : 천지창조/타락/구속(창 1-3장)
창세기 1-3장은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는 가운데 그 집행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선(先) 계획-후(後) 실행, 또는 선 언약-후 성취의 일환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세계는 구원협약이 구체적으로 시행되는 현장의 의미를 띠고 있으며 만물은 도구로 선용된다. 그 중 인간은 창조의 면류관과 절정의 성격을 띠면서 창조사역의 최대 수혜자로 기능한다.
(1) 창조(창 1-2:3, creation)
① 1단계 창조사역(1-2절) : 무로부터의 창조
태초에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2단계를 통해 완성된다. 원시상태의 원물질에서 6일 창조에 의한 구체적인 상태로의 진전과정을 통해서 말이니다. 태초는 천지창조와 관련해 특징지어지는 시간의 첫 시작을 가리킨다.14)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는 선언은 우주만물에 대한 창조 사실을 포괄적으로 설명해 주는 표제어의 역할로 기능한다. 2절의 내용은 특별히 땅의 원시상태를 언급하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기술한다. 이것이 1단계 창조 상태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로부터의 창조설'은 1단계 창조사역을 가리킨다.15) 본문에서 '혼돈과 공허'의 의미는 땅이 완전히 조성되기 전의 원물질의 상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모양이 구체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았다'(unformed/formless)는 것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의미는 아니다.16) 마치 잘 반죽된 진흙 한 덩이로 특별한 물건을 구체적으로 만들기 전의 덩어리 상태처럼 말이다. 이때의 땅의 상태는 표면이 깊은 물로 뒤덮여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빛이 아직 없었기에 천지는 온통 흑암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런 의미에서 빛 창조는 완전히 조성되지 않은 우주의 원시상태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질서정연한 우주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첫 번째 사역에 해당한다.17) 첫 날에 창조된 빛은 태양 빛과는 본질상 구별되는 빛의 근원이며 일종의 에너지원으로서 동시에 6일 창조물의 생명보존의 근간으로 기능한다. 어거스틴은 이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근원적이고 영적인 빛으로 보았다(요 1:1-9).18) 계시록에서는 회복된 에덴에서의 피조물의 생명보존과 활동의 근본이 태양 빛이 아닌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의 빛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함으로 이런 사실의 개연성을 뒷받침 해 준다(계 21:23-24, 22:5). 이처럼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사역은 땅의 원시상태에서 6일 창조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정형화 된 창조의 상태로 발전된다. 이를 논리상 2단계 창조사역으로 부른다.
② 2단계 창조사역(3-31절) : 정형화 된 창조
2단계 창조사역은 6일 창조사역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1단계 원물질의 창조와 2단계 6일 창조 사이에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6일 창조의 원천은 원물질의 창조사역(2절)에 근거한 정형화된 창조인 사실로 인해 6일 창조의 성격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게 중론이다.
6일 창조사역은 단정적일 수는 없으나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될 수 있다. 기존의 소위 구조이론(Framework)이 주장하는 A=B라는 등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으나, 보다 큰 윤곽으로 보면 개념과 의미 또는 구문론적인 입장에서 평행법이 성립될 수 있다는 관점은 수용할 만하다. 오히려 이런 식의 구조적인 이해는 창조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면밀하고 질서정연하며 동시에 점진적이고 의도적인 전략을 잘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19)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는 빛과 궁창과 바다와 육지(풀과 각종 채소와 과목) 등 주로 배경에 해당되는 창조사역에 집중된다.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내용물에 해당되는 해와 달과 별, 하늘을 나는 새와 각종 물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땅의 각종 짐승들과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사람을 창조하신다. 인간창조는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공유적 속성)의 반영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유일한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피조물의 면류관이 되게 하심으로 온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권을 사람에게 위임하신다(창 1:28, 2:15). 이런 관점에서 6일 창조에서 인간창조는 창조의 절정일 수 있다. 일체의 피조물의 창조의미가 인간의 존재와 삶을 위해 집중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섯째 날에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의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 이처럼 천지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계획적이고 주도면밀해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 지향적이며 질서정연하게 전개되었음을 간파하게 된다.20) 그런 의미에서 천지만물의 창조는 결코 우연의 산물일 수 없다.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며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총평을 덧붙임으로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확증해 준다. 이런 식의 보충적 설명은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하심에 대한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당초 의도하셨던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진 사실을 가리킨다.21) 창세전에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하게 계획하셨던 내용들이 피조세계 속에 그대로 현실화되었다는 의미로서 말이다.22) 이런 관점에서 엡 1:4-14의 구원협약과 창조-타락-구속의 주제를 담고 있는 창 1-3장의 내용은 '선(先) 계획(언약)과 후(後) 성취'의 틀 속에서 상호간 인과(因果)관계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원리는 대단히 중요하다. 본 논고의 취지는 이 런 사실의 전제와 이를 구체적으로 논증하므로 계시사의 다양성과 일관성 및 통일성의 함수관계를 제시해 바른 계시관의 정립이야말로 바른 해석을 통한 바른 신앙관 정립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함에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롬 11:36)는 말씀의 기조가 이런 사실에서 연유한다.
흔히 처음 삼일 간의 창조사역과 관련해 태양을 지으신 것은 넷째 날에 해당함으로 처음 삼일에 해당되는 날의 개념은 태양력의 하루가 아닌 것으로 간주해 다양한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 그럴 수 있는 개연성의 여지를 아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6일 창조의 문맥을 통해 6일 간의 날들이 동일한 날의 개념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단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 째 날'이라고 하는 관용구적 표현이 모든 날을 규정하는 데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로서 비록 처음 삼일이 태양력에 의한 날들과 무관하다는 이론이 제시될지라도 본질상 태양력에 의한 하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견해를 수용하게 된다. 창세기 저자는 창조사역과 관련해 다양한 기간(12시간, 24시간, 무한 기간 등)을 의미하는 날(yom, 욤)이란 용어를 혼합적으로 사용함으로 과학적 결과와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를 애써 외면하려는 지도 모른다. 사실 성경의 내용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자기계시서란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초이성적이고 초과학적이며 초자연적일 수밖에 없는 여지가 얼마든지 상존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만 그 본의에 접촉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자증이다(히 11:3).23)
천지만물의 창조사역과 관련해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방편은 말씀이다(히 11:3).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하나님의 창조적 명령'이라고 부른다.24)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란 표현이 이런 사실을 뒷받침 한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라고 고백했으며, 계속해서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며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고 증언한다. 이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기사를 염두에 둔 표현으로 천지만물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의 응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거하는 내용이다.25) 따라서 명령에 의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구체적인 형태로 표명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전지성과 전능성의 산물임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라사대에 의한 천지창조'(creation by fiat)의 의미가 창조주의 전지성과 전능성의 결과란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창세기의 말씀에 의한 창조기사를 요한복음 1장의 몇 구절과 연관시켜 보면 성육신 이전 말씀(로고스, the Word)으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의 주체와 창조의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셨음을 간파하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바울 또한 사도 요한의 경우와 동일한 관점에서 이런 사실을 기술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동일한 맥락의 진술이 고전 8:6("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과 히 1:2("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에서도 소개된다. 이런 관점에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의미가 단순히 하나님의 전지성과 전능성의 표출로만 설명된다면 뭔가 부족과 아쉬움의 여지가 남는다. 그 이상이다. 곧 말씀의 본체 되신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령 하나님(창 1:2)과 더불어 태초부터 창조의 주체와 중보자로 적극 창조사역에 동참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26) 그런 의미에서 창조기사와 관련된 '가라사대'와 요한복음의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 사이에는 본질상 일맥상통하는 신학적 동질성과 상응성의 여지가 함의돼 있음을 아주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창조사역의 정체성은 성자 예수님을 중보삼으신 삼위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란 결론이다.27)
한편 인간창조와 관련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복으로 약속해 주신 소위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본문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으로 명명된 것은 아담 부부에게 그들의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가운데 창조계에 잠재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나감으로 이 땅 가득히 하나님의 뜻에 합한 신정왕국(하나님 나라)을 건설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 인간의 거주지로 창설된 에덴동산의 상태는 하나님 나라의 절정을 향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초기 상태인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28) 본문에서 특별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역사의 현장에서 땅을 경작하고 계발하여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켜 나감으로 하늘에서 수립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 땅 위에 충만히 펼칠 것에 대한 요청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본 문화명령의 본의는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체가 되셔서 아담과 하와 및 이들의 후손들을 통해 친히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가시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표명된 은혜성을 내포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복으로 약속하신 내용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원형과 뿌리는 인과관계의 원칙 속에서 자연히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서 그 기원이 유래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에덴으로부터 시작되는 창조의 발전과정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인간의 사회/문화/문명적 발전 단계와 본질적으로 부합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대적인 관점으로 설명한다면 아마도 자연친화적인 고도의 문명사회와 국가 건설을 지향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29)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이 대리적으로 경영한다는 배경에 비추어 역사의 의미를 정의해야 한다.30)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을 완전 재창조가 아닌 첫 창조의 갱신을 통한 재창조란 관점에서 추정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초한다.31) 여자의 후손언약의 구체적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 뿐 아니라, 함께 저주받았던 피조계 전부를 동시적으로 회복시켜 하나님과 화목케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정상화시킨 결정적인 재창조 사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롬 5:10, 8:19-23, 엡 1:10, 골 1:20).32)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을 완전 재창조사역의 결과로 보는 주장이 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를 인류에게만 제한적으로 적용시킨다는 데 있다. 반면 성경은 인류와 더불어 동반 저주를 받았던 모든 창조계에 확대 적용시킨다(롬 8:19-22, 엡 1:10, 골 1:20, 창 9:12-16).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가 모든 창조계의 회복을 포괄한다는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상태가 처음 창조의 연장선상에서 정화(purification)와 갱신(renewal)에 의한 재창조의 개념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한다.33)
③ 하나님의 안식(창 2:1-3)
6일 창조사역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사역에 만족하시면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본문에서 안식의 개념은 문맥 속에서 이중적인 의미로 암시된다.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만물의 안식의 의미로 말이다.
하나님의 안식 개념은 단순히 일을 마치고 쉰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이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섭리하심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시종일관하게 집행해 가시는 주체로 일하신다. 역사의 정체성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귀결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인류를 대리인으로 앞세워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미래지향적인 발전 단계는 인간의 문명단계에 부합된다.34) 하나님의 안식의 본의는 문맥 속에서 이중적으로 묘사된다. 첫째,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창 1:31)는 표현에 근거해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계획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로 인한 만족감의 표출이다. 둘째, 피조물들이 창조의 목적대로 존재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좇아 생명력을 발휘해 나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총체적으로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의 개념은 성경 전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삶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천상적 용어로 사용되곤 한다(출 20:8, 신 5:15, 12:10, 수 21:44, 왕상 4:25). 이런 관점에서 신약의 성도는 안식의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영원한 안식 곧 하나님 나라의 축복된 삶에 이미 현재적으로 참여해 그 실질을 전인적으로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친 백성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일곱째 날을 특별히 안식일로 거룩하게 구별시켜 제정한 사실과 관련해 일곱째 날의 개념의 본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시간적 순서상 일곱째 날은 여섯째 날 다음에 위치한다. 그럼에도 앞의 6일과 일곱째 날과는 본질상 다른 점을 확인하게 된다. 창세기 저자는 앞의 6일을 개별적인 날들로 구별하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몇 째 날이라"는 표현으로 마감시켜 설명함으로 각각의 날들을 차별화시키며 동시에 일련의 동질성을 띤 날들로 시사한다. 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일곱째 날에는 이런 관용구적인 표현이 생략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일곱째 날이 여섯째 날 다음에 위치할지라도 본질상 앞의 6일과는 근본적으로 차별화된 전혀 다른 날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일곱째 날 다음에 다시 첫째 날과 둘째 날 등 6일의 개념의 날들이 반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곱째 날은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만물이 안식하는 시작의 날이며 동시에 완성의 날로서 곧 날의 총체적인 개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35) 이런 사실은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동산은 그 자체로서 만물 안에서 하나님이 안식하시고, 하나님의 안식 안에서 만물이 안식 할 수 있었던 안식의 현장, 곧 하나님 나라 자체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 나라의 안식 안에서 더 이상의 연속적인 날들의 개념은 무의미하다. 영생의 삶 속에서 날들의 개념이 무슨 의마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는 영생복락의 나라로서 무시간적인 특징을 가짐으로 항상 현재적으로 존재하는 나라일 뿐이다. 6일 창조 이후 아담 부부가 살았던 범죄 이전까지 에덴의 삶의 본질이 이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동일한 원리와 맥락 속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미 천상의 안식과 영생의 삶에 현재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성도들의 삶 또한 본질상 삶과 죽음이 일반인 것으로 인해 여기서부터 세상질서를 극복한 안식의 상태로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히 4:3, 요 11:25-26, 16:33).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의 삶의 정체성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인 셈이다.
본문의 창조적 안식은 범죄 이후 구속을 통한 재창조의 안식의 개념으로 갱신된다(출 20:11, 신 5:15). 결국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 개념은 주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의 기쁨을 동시적으로 만끽하면서 이를 기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매일의 삶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이미 천국의 안식에 들어가 천상의 삶을 여기서부터 실질로 소유해 누리는 삶으로 정의된다.
이상 천지만물의 창조사역을 개략적으로 기술하면서 본문을 통해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36)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사역은 첫째, 삼위 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란 사실이다. 이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 근거한 필연적인 결과로 볼 수 있다. 둘째, 무(無)로부터의 창조이다. 이는 창조사역의 결과가 하나님의 창조적 전지성과 전능성의 산물임을 증거한다. 셋째, 무로부터의 창조는 본질상 말씀으로 창조하신 사실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갖는다. 여기서 명령을 통한 말씀으로의 창조는 단순히 하나님의 전능성뿐만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역사 가운데 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이 창조사역에 주체와 중보자로 참여하고 계셨음을 함의한다(요 1:1-3, 골 1:16, 고전 8:6, 히 1:2). 넷째, 목표 지향적이고 질서정연한 창조사역이다. 이는 6일 창조의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먼저 만물의 존재와 활동영역인 배경을 준비하시고 후에 내용물들을 지으심으로 생존과 활동에 차질이 없도록 합목적적으로 진행시키셨다. 맨 마지막에 인간을 동물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창조의 절정과 피조물의 면류관으로 지으심으로 저들에게 만물의 통치권을 위임해 주셨다. 이런 사실은 온 피조물 중 인간만을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을 반영시킨 유일한 교제의 대상으로 삼으신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책임적 존재와 하나님의 백성 된 신분으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악과의 정체성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통해 인간의 피조성과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는 계시적 사건의 의미를 지닌다. 다섯째, 만물을 각각 종류대로 지으셨다. 처음부터 각 종(種)간의 차별성을 두고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오랜 진화와 변이의 과정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동식물들(인간을 포함)이 생성되었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적 관점을 근원적으로 일축시키는 선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만족해하셨던 선한 창조사역이다. 이는 지으신 만물이 창세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차질 없이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만물이 존재 목적대로 본성를 발휘함으로 하나님께 만족과 기쁨과 영광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별히 6일 창조사역을 마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는 총평은 모든 창조의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안식에로 이끄는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한다(창 2:1-3). 성경에서 안식의 개념은 하나님 뜻의 궁극적 성취와 동질성을 띠면서 하나님 나라의 임재와 동의어적으로 사용되곤 한다(신 12:10, 수 21:43-45, 왕상 4:20-25, 히 4:3). 이런 관점에서 6일 창조로 말미암는 당시 에덴동산은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과제로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2) 타락(창 2:4-3:24, depravity)
①첫 사람 아담 창조(4-7절)
본문의 인간창조 기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창 1:26-27의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다. 오히려 3장의 인간 타락이라는 새로운 주제와 관련해 그 배경을 기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입된 상황설정이다. 본 내용을 도입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의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표제어가 창세기 전체를 통해 이런 사실을 증거합니다. '대략'(톨레도트)으로 표현된 본 표제어에 사용된 용어는 창세기를 통해 수차례 반복해서 사용되는데(창 5:1, 6:9, 10:1, 11:10, 27절, 25:12, 19절, 36:1, 9절, 37:2) 계보, 출생, 역사, 가족 등과 같은 다양한 뜻을 가진다.37)
이런 관점에서 4절의 본문은 1장의 천지창조 사역의 내용을 종결짓는 의미가 아니다. 3장의 타락 기사를 절정삼기 위해 2:4이후의 내용을 도입시키는 서론적인 표제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관점은 동일한 유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창세기의 다른 내용들이 한결 같이 이후의 사건 전개와 관련해 본문의 용어(대략)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저자는 인간과 만물의 창조에 앞서 6일 창조 전 땅이 혼돈과 공허한 상태로 존재했었던 1단계 창조의 내력을 소개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기술한다(창 2:5-6). 이는 창 1:2의 원물질의 창조상태를 3절 이후의 6일 창조내용과 연관시켜 요약적으로 다시 한번 설명하는 내용이다. 이런 설명은 1장의 천지만물의 창조과정을 반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창조를 출발로 타락의 절정에로 독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의도적인 기술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1장의 포괄적인 세상창조의 기사로부터 3장에 언급된 타락의 주역인 인간창조 기사로 내용 전개의 범위를 좁혀 갈 뿐이다. 이상의 맥락에서 저자는 타락의 기사를 정점으로 삼아 인간창조의 기사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것이다(2:7).
하나님은 흙(먼지, 티끌, dust)으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다. 이는 인간 창조와 관련된 하나님의 사역을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의 원리에 근거해 표현한 내용이다.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형상화시켜 만들 듯이 작업했음을 비유적으로 시사하는 내용이다. 본 비유적 표현의 실상은 흙을 재료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지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말씀을 통해 구체화된 것을 가리킨다. 2차적으로 이렇게 흙으로 지으신 사람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living being)이 되게 하셨다. 이런 설명 또한 동일하게 비유적인 표현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존재가치를 동물들과 차별화시켜 하나님의 유일한 인격적인 교제와 관심과 애정의 대상인 영적 존재로 삼으신 사실을 강조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물들의 존재가치는 사람의 그것과 본질에서 차별화된다. 구약의 동물희생제사가 사람의 죄를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기에 자주 같은 제사를 반복해 드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런 양자 간 존재하는 가치의 차별성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다(히 10:11).
한편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동물과 차별화 된 영적 존재라 할지라도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쩌면 처음부터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성과 한계를 지닌 존재였음을 아주 불식시킬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고린도전서 기자는 하늘로부터 거듭나지 않는 한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진술하면서 그 이유를 "첫 사람 아담처럼 땅 곧 흙에서 난 자"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고전 15:47-50). 이로 보건대, 범죄 전 아담과 하와의 영적 상태가 비록 무죄자라 할지라도 본질상 죄와 무관한 완전자(거듭난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런 개연성을 뒷받침 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보다 근원적으로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이 '그리스도 안에서'(엡 1:4) 곧 그리스도의 구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논리적으로 타락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된 인간의 연약성을 아주 배제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첫 사람 아담 부부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보시기에 심히 좋게 지음받았을지라도 논리상 처음부터 범죄의 가능성이 아주 배제된 상태로 창조된 것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런 관점을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으로 해석해 왔다. 그럼에도 보다 깊은 연구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② 에덴동산의 창설(8-17절)
하나님은 인간의 거주지로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해 주셨다. 에덴동산은 흔히 메소포타미아나 아라비아 지역 어딘가에 위치한 것으로 논의되곤 한다. 그러나 범 세계적으로 임했던 노아시대의 엄청난 훙수 심판을 고려하면 대(大)지각변동으로 인해 정확한 장소를 얘기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혹자는 에덴동산이 복락의 장소로 원래 하나님의 임재와 거처의 장소를 표상하는 곳인데,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인간을 초청한 현장이라고 얘기한다.38)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주 안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에덴동산의 실체인 종말적 하나님 나라에 이미 참여해 그 실질을 현재적으로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 안에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 하신 에덴의 생명나무의 실과를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계 2:7, 요 5:24 ).
에덴동산으로부터 네 개의 강줄기가 발원한다(10-14절). 이는 에덴이 영생하는 생명의 원천으로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성소와 하나님의 보좌를 동시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회복된 에덴을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계시록에서는 동일한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른다고 기술함으로 에덴의 성소와 보좌 표상을 뒷받침 해 준다(계 22:1).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심겨져 있다. 이들은 문맥을 통해 각각 영생과 순종의 요구를 상징하는 나무들인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에로 이끌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명하셨다(창 2:15). 하나님을 대신해 피조물의 통치자의 신분으로 말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성도가 다가 올 천국에서 여전히 왕 노릇 한다는 의미가 이런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계 22:5). 피조물로서 엄청난 영광이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네가 임의대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단서 조항을 주셨다(창 2:16-17). 본 단서 조항을 일컬어 선악과 금령, 선악과 언약, 또는 아담언약이라고 부른다. 선악과 금령이 의미하는 바는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으로 먹을 수 있는 반면에, 선악과는 먹지 말 것을 강력히 제한하심으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로 주신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죽음의 단서조항은 아담을 비록 피조물의 통치자로 선임했을지라도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 분의 뜻을 좇아 위임받은 통치권을 제한적(의존적이고 종속적인 자유의지)으로 행사해야 하는 피조성을 강력히 요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39)
이런 관점에서 선악과 금령은 아담을 율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 강제성을 띠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자율적 순종을 통해 이미 주신 은혜언약(창 1:28)을 충성스럽게 감당케 하기 위한 보호수단으로 주신 것이다. 아담은 계속해서 선악과 금령에 나타난 순종의 요구를 자원하는 심정으로 행해 나감으로 창조언약(창 1:28)에 담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선양하며 건설하는 일에 큰 진보를 이룰 것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문화명령(창 1:28)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는 마침내 완성돼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임마누엘 신학의 핵심 사상은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엡 1:4, 창 17:8, 출 6:7, 19:5-6, 렘 31:33, 겔 36:28, 요 14:16-17, 고전 3:16, 계 21:3). 곧 하나님께서 수립하신 창세 전 영원하신 목적(구원협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적어도 선악과 금령에 담긴 표면적인 의미가 이렇다. 본질에서 넘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더욱 든든히 세워줌으로 창 1:28에 담긴 창조언약의 은혜가 은혜 되게 하시기 위해서다.
이 시점에서 아담 부부가 선악과 금령에 순종하는 문제와 관련해 추가로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당시 아담과 하와는 무죄자의 신분으로 지음 받았으나 죄와 절대 무관한 완전자는 아니란 사실이다. 이런 사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은 금령의 준수 여부에 따라 무죄자가 범법자로 전락될 수 있는 개연성(probability)을 근본적으로 불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범죄 가능성을 처음부터 전혀 배제할 수 없었다는 관점이다. 이런 개연성의 결과로 혹자는 범죄 전 아담과 하와를 신학적으로 ‘시험적 존재’(probational being), 내지는 ‘임시적 존재’(temporary being)로 해석하기도 한다.40) 순종과 불순종의 양면성을 동시적으로 소유한 상태란 의미에서 말이다.
결국 이들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 금령을 어기고 죄인으로 전락되는 것을 통해 이런 관점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아담을 ‘시험적 존재’로 추론하는 관점은 동시에 선악과 금령에 담긴 본래의 성격을 ‘시험적 사건’으로 보는 입장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하겠다.41) 선악과 금령은 자체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계시의 이중 구조적 특성상(먹든지/ 안 먹든지) 처음부터 선의적인 시험의 성격을 띤 채 주어졌다고 보는 시각 말이다. 선악과 금령을 ‘시험적 사건’으로, 아담과 하와를 ‘시험적 존재’로 해석할 때, 이를 선의적인 시험(favorable probation)이라는 전제하에 접근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시험은 본질상 인간의 유익을 위해 연단의 성격을 띠고 의도적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창 22:1-3, 욥 42:5, 약 1:1-4, 13). 거기에는 자연히 호의적인 강복(降福)의 성격이 내포돼 있다(벧전 1:7, 4:12-13, 롬 8:18).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창 1:28의 문화명령(창조언약)은 표면상으론 창 2:17의 선악과 금령(선악과 언약/아담언약)의 요구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통해 실현이 가능해 진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창 1:28의 창조언약과 창 2:17의 선악과 언약(아담언약)은 본질상 상호 의존적이며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깊이 연루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선(先) 은혜와 은혜에 수반되는 후(後) 행함이라는 은혜공식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선악과 금령은 하와를 지으시기 전 아담이 독처할 때에 주신 금령인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창 2:17-18). 하와는 선악과 금령에 관해 지음 받은 후에 아담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후에 뱀이 아담이 아닌 하와를 미혹의 일차적인 대상으로 삼은 사실이 이런 내용과 무관치 않다. 금령에 대한 중요성과 경각심에 대한 인지도가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 하와의 경우에 훨씬 덜 했을 테니 말이다.
③ 하와를 지으심(18-25절)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먼저 지으셨다(창 2:7). 아담은 지음을 받은 후 에덴동산에서 한 동안 홀로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창 2:18). 선악과 금령도 혼자 받았다(창 2:16-17).
하나님께서 아담의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시고 '돕는 배필'(helper suitable for him)을 지으실 것을 결심하신다. 이런 의중을 아담에게 암시하신다(18절). 그렇다고 이내 아담의 배필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먼저 친히 지으신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을 아담에게 보이시며 이들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신다. 아담은 고도의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각양 동물들과 새들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합당한 이름을 저들에게 지어준다. 이런 사실을 통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과 위임받은 만물의 통치권자로서 피조물들에 대한 왕적 통치권을 유감없이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19-20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들짐승과 새들 중에는 아담의 마음에 합한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의 배필은 사람과 동등한 인격과 가치를 지닌 대상에게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사람의 통치를 받을 대상이지 결코 사람과 동등한 교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가리킨다. 열등한 동물의 희생제사가 고등한 사람의 죄를 근절시킬 수 없으며, 짐승과의 교접을 금하는 이유 또한 이런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레 18:2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실로 인해 동물과의 교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의 인격을 모독하며 평가절하시키는 망령된 행실과 처사로 범죄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동물들은 결코 사람과 동등한 수준의 돕는 배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아담의 돕는 배필에 대한 언급을 동물들에 대한 명명(命名)기사 앞에 기술한 것이다(18절).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 중에서 자신과 동등한 인격적인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신 후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여자를 지으셨다. 여기서 아담의 잠은 자연적인 수면이라기보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잠에 깊이 빠졌음을 시사한다.42) 마치 횃불언약식을 위해 아브라함을 깊이 잠들게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창 15:12). 여자의 창조를 신비스러우면서도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특별히 여자의 창조를 아담의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해 만드셨다는 설명은 아주 의도적인 기술이다. 여자의 근원이 남자로부터 기인한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에서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않은 사실"과 관련해 그 당위성을 창조의 원리와 범죄의 동인에서 찾는다(딤전 2:11-14). 물론 본문은 남녀의 우열과 인격적인 차등을 보증하는 증거본문이 아니다. 인격적인 면에서 남녀의 차별은 불가하다. 성경도 이를 지지한다(엡 5:22-33). 다만 현대교회 속에서 남녀평등이라는 세상원리를 앞세워 성경의 원리가 평가절하되거나 해석과 적용이 가감된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말씀의 본의를 세속적인 잣대로 해석해 재단하는 일은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으려는 시도는 위험한 발상이다. 하나님의 절대가치는 창조주의 절대 주권성에 기초한 것이기에 세상의 논리와 상대적 가치로 평가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상 치외법권적 영역이기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신다. 아담은 본성적으로 여자의 존재의미를 깨닫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기쁨으로 고백하면서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고 이름 짓는다(23절). 여자란 '남자에게서 기인했다'(from man)는 의미이며 본질상 남자와 여자의 의미는 어원적으로 어근이 동일한 것으로 인해 동등한 인간성과 인격을 지닌 가장 친밀한 관계임을 증거한다.43) 특별히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지어준 사실은 여자는 남자와 본질상 동등한 존재일지라도 돕는 자로서 남자에게 소속된 의존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44) 이상 남녀 창조 속에 내포된 일련의 사실들이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남자의 존재만으로는 진정한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의 창조를 통해 한 몸을 이루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당초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45)
④ 혼인 제도의 제정(24-25절)
남자로부터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이들 둘을 연합시켜 한 몸 되게 하심으로 최초의 결혼제도를 제정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본문의 결혼제도를 통해 우리는 중요한 결혼의 3대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부모를 떠나라는 것이다. 이는 성숙한 책임적 존재로서 독립성의 필요를 제시한다. 어쩌면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8)의 온전한 성취를 위해서 말이다. 둘째, 사랑과 필요에 따른 동등한 두 인격체의 만남을 통한 결합 곧 연합성의 원리이다. 아마도 '돕는 배필'의 원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적용되는 부분이 연합의 원리일 것이다. 따라서 본 결합과 연합의 원리에서 볼 때, 본질을 떠나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조건을 앞세워 연합을 시도하려 한다면 이는 처음부터 중도 파경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아주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혼율의 점증현상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결혼의 원리가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인해 근본적으로 외면되는 데서 오는 사필귀정의 결과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본질의 회복만이 파경의 불행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두 남녀가 한 몸을 이루는 합일성의 원리이다. 결혼에 있어서 합일성의 원리는 다른 무엇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자손보존 본능과 밀접하게 연관된 원리이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문화명령(창 1:28)을 적극 수행하는 첩경으로 기능하게 한다.
⑤ 결혼제도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남녀의 결혼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해 주신 계시적 사건이다. 결혼이 계시적 사건이라 함은 계시의 원형인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 속에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 가운데 이미 내포된 주제였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즉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은 수많은 인류 중에 하나님의 택자들을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성령님의 인침의 사역을 통해 주권적으로 찾으시는 행위로서 인류의 생육과 번성은 남녀의 결혼제도를 통해 비로소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은 씨앗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계시의 원형으로 그 속에는 미래에 나타날 온전한 형태의 모습을 유전적 인자(因子)의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결혼제도의 구속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수립하셨던 구원협약(엡 1:4-14)을 피조세계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를 통해 집행해 가시는 과정에서 왜 남녀를 지으시고 이들을 상호 사랑과 필요에 근거해 묶어 주셔서 한 몸을 이루게 하시는 결혼제도를 마련해 주셨을까.
첫째는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세상 가운데 출산케 하기 위한 방편이란 사실이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 하나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하셨을 때(눅 19:10), 바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 가운데 존재케 하기 위해 결혼제도를 주셨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남녀의 결혼은 자녀 출산의 유일한 통로일 뿐 아니라, 이런 식으로 생육하고 번성한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친 백성을 선택적으로 불러내어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다.
둘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가정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지상에서부터 이루어 체험하게 하심으로 영원한 종말적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며 소망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말씀의 통치를 받아 누리는 언약공동체로서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 임재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셋째는 남녀의 결혼을 통해 출생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을 적극 수행케 하심으로 궁극적으로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넷째는 장차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 된 그 분의 몸 된 교회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통한 완전한 연합과 일치를 예표해 주시기 위함이다(엡 5:22-33, 계 19:6-9, 21:1-4). 그런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런 연합의 종말적 성취인 승리한 천상의 교회에 소속된 자들로 종말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일에 최선으로 경주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는 결혼제도를 통해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 찾으시는 순간이 하나님의 재림과 심판과 구원의 완성의 때가 될 것이다(히 9:27-28). 이때는 세상 역사의 종식과 더불어 본격적인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로 말미암는 천상의 영생복락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새 하늘과 새 땅(계 21:1, 사 65:17, 66:22)의 축복된 삶에는 더 이상 지상의 결혼제도와 가족관계는 존속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나님의 잃어버린 백성들을 찾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제도라면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목적이 성취된 것으로 방편적 기능은 종료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아가 지상에서의 혈연, 인연, 지연의 관계도 모두 일단락 될 것이다. 세상질서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새롭게 시행되기 때문이다(사 65:17).46) 성경은 이런 종말의 상태를 가리켜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와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고 확증시켜 준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의 삶과 관련해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의 어리석은 질문에 답하시면서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이 될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신 내용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넉넉히 추정할 수 있다(마 22:23-30).
이상의 논증을 고려할 때, 결혼제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목적을 위해 지상의 삶과 연관시켜 주신 한시적인 계시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지상에서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룬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가정생활을 통해 가족 구성원들과 더불어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소유해 누린다는 엄청난 축복의 삶인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마땅히 하나님 나라를 방불케 하는 천국의 가정을 이루는 일에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말씀의 통치를 받아 누리는 삶에 적극 동참해야 할 것이다. 가정이 천국화 될 때 교회가 천국화 될 것이며, 교회가 천국화 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세상 가운데 복음을 통해 능력 있게 확장돼 갈 것이 확실하다.
⑥ 인간의 범죄와 타락(창 3:1-6)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여자가 먼저 뱀의 미혹을 받고 금지된 선악과를 따 먹었으며 남자가 이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창 3:1-6, 딤전 2:14). 이 때 뱀은 사단의 사주를 받고 여자를 미혹하는 일에 도구로 악용된다. 뱀이 말을 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지 본문에서 분명치 않지만(1절), 뱀이 결코 사람의 교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여자가 뱀의 접근을 허락하고 그와 대화(교제)를 나눴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여자의 결정적인 실수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 이는 뱀이 미혹의 대상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를 일차적인 표적으로 삼은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뱀이 여자를 미혹의 대상으로 삼은 사실과 관련해 여자가 유혹에 약하다거나 죄의 경향성이 더욱 두드러진다는 등의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억측에 불과할 뿐이다. 뱀이 여자를 먼저 선택한 이유는 본문의 문맥을 통해 선악과 금령을 남자가 받아 여자에게 전해 준 사실에 근거할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지지를 받는다(창 2:16-18).47) 금령에 대한 간접적인 수납은 그 중요성과 위험성 및 계시성에 대한 인지도의 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는 뱀과 여자의 대화를 통해 그대로 적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창 3:1-5). 뱀이 여자에게 선악과 금령과 관련해 질문을 던진다. 미혹을 전제로 한 의도적인 질문이다. 넘어지게 하기 위한 악의적인 시험이다. 천상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세상으로 쫓겨 난 사단은 이런 식으로 피조물의 면류관인 사람(여자)을 미혹해 넘어지게 함으로 우회적으로 하나님께 재도전하는 셈이다(딤전 3:6, 유 1:6, 벧후 2:4, 사 14:12-14). 이처럼 기만과 교만과 참소 및 거짓과 속임수는 사단의 근본 속성들로 심판을 받고 불못에 처해지기까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계 20:7-10).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하)고 질문을 던진다. 본 질문은 평범한 질문이 아니다. 이 질문에는 고도의 의도성이 담겨 있다. 여자가 선악과 금령에 대한 내용을 어느 정도 올바르게 숙지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코자 하는 계산된 의도가 담겨 있는 시험적 질문이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부분적인 제한을 두셨음에도 불구하고, 뱀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켜 금령을 전체로 확대해 적용시켰던 것이다. 뱀의 질문이 미혹을 전제로 한 악의적인 시험이었다는 사실이 이런 연유로 확인된다.
뱀은 이런 식으로 선악과 금령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왜곡시킴으로 여자로 하여금 의심과 불신과 욕심에서 비롯된 교만한 마음을 불러일으킴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게 미혹했던 것이다. 뱀의 의도는 적중했다. 뱀의 질문에 여자가 답변하는 내용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여자가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고 하나님께서 명하셨다고 대답한다. 여자의 대답은 하나님의 금령을 가감한 답변이다. 즉 '먹지 말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로, '정녕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변개시켰다. 결과적으로 여자는 선악과 금령에 대한 내용 숙지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은 뱀이 왜 남자가 아닌 여자를 일차적인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다. 여자는 금령의 일차 수령자인 남자에 비해 그 중요성과 엄위성 및 계시성의 이해에 있어서 훨씬 미치지를 못했던 것이다. 본 사건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있어서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이 얼마나 위험한 관점인 지를 웅변으로 보여준다. 반면에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계시의존적인 관점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 지를 상대적으로 강조해 준다.
본 사건 이후로 말씀의 왜곡과 변개는 사단이 성도를 미혹하는 고전적인 수법으로 자리매김 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에 마귀로부터 받으신 시험의 내용 또한 다름 아닌 말씀의 왜곡이다. 특별히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시 91:11-12을 인용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받들게 하심으로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성경을 인용한다(마 4:5-6).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명하심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신다. 시 91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심으로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체의 위경으로부터 넉넉히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확신을 다양한 은유적 표현을 통해 시(詩)의 문체로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문자적이고 부분적으로만 해석해 적용한다면 이는 저자의 의도를 한참 벗어 난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이 될 뿐이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이와 같은 식으로 본의와 무관하게 부분을 전체로 확대 적용시켜 사욕을 위한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려 한다면 이는 여전히 하나님을 시험하는 패역한 사단적 미혹행위가 성립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단과의 영적 싸움의 성격은 본질상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이란 사실이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는 사상이다(엡 6:12-17, 계 19:11-16),
여자의 답변을 통해 미혹의 덫에 걸린 것을 확인한 뱀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뱀은 여자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적극 공세를 취한다. 본문을 통해 말씀의 왜곡과 변개를 통한 속임수가 사단의 근본 된 속성이란 사실이 재차 확인된다(요 8:44).
이상 뱀이 시도했던 시험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심어주는 가운데 잠재된 욕심을 충동시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여자(인간)로 하여금 하나님과 의존적인 관계를 파기하고 독립된 존재로 지존자의 반열에 설 것을 강력히 촉구한 사실을 보게 된다. 결국 여자를 미혹했던 뱀의 시험의 정체성은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존성에 도전케 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보좌찬탈을 시도하다 실패했던 사단의 야욕(딤전 3:6, 유 1:6, 벧후 2:4, 사 14:12-14)을 재시도하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후 본문의 여자의 미혹 사건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게 된다"(약 1:15)는 불문율의 근거를 제공한다. 총체적인 관점에서 여자(인간)의 범죄 속에 담긴 본의는 이제까지 유지되었던 하나님과의 의존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경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로로 해석될 수 있다.48) 결국 인간의 범죄의 정체성은 자신의 피조성을 부인하고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부단히 독립성과 지존성(자존심)을 추구하려는 시도로 정의된다.49) 범죄 후에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창 3:22)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때 '하나님과 같은 선악의 판단자'란 의미는 왜곡된 판단자를 가리킨다. 자의적인 판단자 말이다. 이는 달리 종래의 신본주의적 삶의 방향에서 인본주의적 삶에로의 전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의 본의를 떠나 죄인으로 전락한 인생들의 삶의 정체성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기술한다(창 6:5-6). 로마서 기자는 전인적으로 타락해 변질된 인간의 종교성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져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다"고 고발한다(롬 1:21-23). 에베소서 기자도 동일한 관점에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켜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규정한다(엡 2:1). 이상의 사실이 총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이제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구원의 문제는 자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절대 타자(하나님)에 의한 외부로부터의 구원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시사해 준다.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이런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켜 전적타락(total depravity)과 전적무능(total inability)이란 용어로 설명한다. 죄인 된 인간이 자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고, 섬기며 행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의미이다(롬 3:10-12, 렘 17:9, 사 64:6).
뱀의 미혹에 빠져 욕심의 덫에 걸린 여자의 눈에 선악과는 더 이상 금단의 열매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매력적인 열매로 보일 뿐이다(창 3:6). 더욱 미혹에 빠진 여자의 눈에 선악과는 먹음직/보암직/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런 실과로 비쳐졌다. 혹자는 이런 관점을 세속성(세족주의)의 본질인 욕심의 삼요소로 정의하면서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요약해 설명한다(요일 2:15-16). 출처와 성격이 선악과 시험에 담긴 사단의 미혹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자가 먼저 선악과를 따 먹고 남자에게도 주매 급기야 남자도 먹는다. 이렇게 여자와 남자는 선악과를 함께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관계와 교제로부터 단절된다. 이내 영적 죽음이 찾아온다.
⑦ 타락의 결과와 현상(7-13절)
첫째, 의식의 변화이다. 가치관의 변화 말이다. 종래의 신본주의 관점이 인본주의 관점으로 변한 것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남자와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범죄 한 직후 저들에게 일어난 최초의 변화에서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는 지적이 이런 사실을 증시해 준다(7절). 본문에서 '눈이 밝아졌다'는 표현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고,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의식의 변화로 말미암는 가치관의 변화를 가리킨다. 이들 남녀가 처음 지음을 받아 한 몸으로 연합되는 원리(혼인관계) 속에서 저들은 벗었으나 상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창 2:24-25). 이는 하나님 안에서 삼자 간에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가 정상적이고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음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수사적인 표현이다. 이런 불가분의 삼자간 정상적이었던 교제의 관계가 죄로 인해 파괴돼 더 이상 지속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록 뱀의 미혹대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은 판단자의 자리에 올랐을지 라도, 왜곡된 판단으로 인해 하나님의 본의를 심히 거스르는 방향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는 판단이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유익이 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害)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언행심사에서 하나님의 뜻에 적극 반(反)함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한 것이다.
둘째, 자력으로 죄의 수치를 덮어보려는 독립적인 행위의 시도이다. 저들은 죄로 인해 드러난 수치를 무화과나무 잎으로 엮은 치마를 만들어 입음으로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7절하).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의 정체성을 전인적인 타락과 전적무능으로 규정함으로 자력구원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롬 3:20).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의인의 대속적인 구속을 통해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론의 근간이다(롬 4:25, 5:18-19, 히 9:11-12, 22절). 본 사건과 병행구를 이루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치마를 벗기시고 대신 가죽옷으로 친히 갈아 입혀 주신다(창 3:21). 하나님의 선한 손길(창 3:21)을 통해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일반은총의 표출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겠다는 묵계적인 의지의 표명일 수 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본문의 가죽옷 사건을 짐승의 죽음과 연계시켜 미래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사건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이런 관점은 양자 간 전제돼야 할 신학적 상응성(theological correspondence)이나 모형과 실체의 구도를 내포하고 있는 구속사의 점진성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다소 성급하고 무리한 시도일 수 있다. 이런 식의 무리한 적용은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할 징표로 사용된 '붉은 줄'의 경우(수 2:18)와 양을 잡아 짐승의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된 경우(창 4:4-5, 히 11:4)에도 동일하게 해당될 수 있다.
셋째, 영적 교제의 단절로 인한 영적 죽음이 찾아온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은 이들 부부를 찾아오신다. 죄인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은혜의 발걸음이시다. 이들 부부는 평소처럼 기쁨으로 하나님을 맞이하지 못한다. 대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뒤에 몸을 감춘다(8절). 본문에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과 몸을 숨긴다는 것은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한 마디로 죄를 지었기에 도망을 쳤다는 의미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법이다. 죄로 인해 의존적인 관계가 배타적인 관계로 파괴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시 단서조항으로 부가된 필연적인 죽음이 '영적 교제의 단절'이란 상태로 이들 부부에게 임하고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여기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의 본질은 단순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 차원을 떠나 근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인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천국에서의 삶과 지옥에서의 삶의 정체성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적 관계성 여부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의 삶은 하나님과 관계성을 맺고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삶을 의미하며, 영벌의 삶이란 하나님과의 일체의 관계가 단절된 하나님 밖에서의 삶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여기서부터 현재적으로 영생의 삶을 이미 누리는 자로서 살아가는 자들이다(요 11:25-26). 상대적으로 불신자를 가리켜 이미 죽은자(마 8:21-22)요, 심판을 받은 자(요 3:18)로 규정하는 성경의 관점이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단절은 영적 죽음을 즉각적으로 초래했을 뿐 아니라, 훗날 육체의 죽음을 위한 사망의 씨가 이미 육체 가운데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셈이다. 이런 식으로 죽음의 완전한 집행은 즉각적으로 선고되지 않고 억제되었다. 왜냐하면 이내 베풀어 주신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죄의 사면과 교제의 회복 및 영생의 삶이 새롭게 보증되었기 때문이다.50)
넷째, 죄책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온다. 죄는 죄형법정주의라는 원칙상 형벌을 동반한다. 선악과 금령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창 2:17). 그런 의미에서 죄에 대한 두려움은 죄책(형벌)과 연관된 본능적인 마음의 발로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들 부부를 찾아 오셨을 때, 이들이 '두려워하여 숨었다'(10절)고 실토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죽음 앞에서 인류가 한결 같이 두려워하는 이유도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지만 그 후에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히 9:27). 지상에서의 삶의 전 내용이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공의롭게 판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증언이다(고후 5:10, 계 20:11-15).
다섯째, 인간관계의 단절이다. 이는 범죄와 관련해 야기된 상호간 책임회피와 온갖 변명과 핑계와 관련해 제기된 문제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의 동인을 물으셨다. 왜 금령인 선악과를 먹게 되었는 지를 질문하셨다. 아담은 자신의 범죄를 여자의 탓으로 돌린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셔서 함께 한 여자라고 지목하면서 범죄의 원인을 하나님에게로까지 전가시키려는 괴악한 발상을 하게 된다(11-12절). 이처럼 죄성의 발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사람과의 관계마저 훼손시키는데 왕적 권세와 능력을 발휘한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범죄 동기를 물으시자 여자는 다시 뱀에게 책임을 전가시킨다. 여기서 보듯이 죄성의 발로는 책임전가와 핑계와 변명 등을 통해 자신을 합리화시키며 정당화시킴으로 자신을 온갖 죄로부터 은폐시키려는 특징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내 탓이라고 시인하기보다는 네 탓이라고 부단히 자신의 실책을 상대방에게 전가시키려는 악의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주의 날이 임하게 될 때, 주의 재판정에서 각 사람의 행위는 물론 마음에 품은 생각조차도 선악 간의 그 실체와 전모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게 성경의 진술이다(고전 4:5, 고후 5:10).
⑧ 죄책의 형벌(14-21절)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를 발하신다. 뱀에 대한 저주는 배로 다니며 흙을 양식 삼는 일이다(14절). 뱀도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될 것'이란 저주는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이다. 뱀의 식물이 흙이 아닌 사실이 이를 증거한다. 성경은 이런 표현을 전쟁에서 패배한 자의 굴욕적인 모습을 표현하는데 사용하곤 한다(시 72:9, 사 49:23). 저주 받은 뱀의 모습을 전쟁에서 패배한 자의 모습에 빗대어 묘사한 내용이다. 이런 사실은 이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적대적인 갈등과 대적과 투쟁적 관계를 예언하고 있는 소위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의 결과가 뱀의 패배로 일단락 될 것을 미래적으로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성경의 구속사 진행 속에서 이런 사실은 현실로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요 19:30, 계 16:17, 계 21:6).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뱀이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묘사돼 뱀의 승리를 예견하는 듯 했으나,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사건은 오히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여자 곧 예수님의 최종 승리로 장식된다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갈 4:4, 계 12:5-9, 20: 1-3, 7-10).51)
여자에게도 형벌이 주어진다. 잉태하는 고통이 더해짐으로 수고를 통해 자녀를 출산하게 된다(16절상). 그런 의미에서 자녀 출산은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저주를 통한 축복의 의미를 겸하여 담고 있는 셈이다.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며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게 된다(16절하). 이는 여자가 남자를 본성적으로 의지하며 자원하여 섬기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대신 남자는 여자를 철저히 사랑으로 보호하며 생활을 책임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혹자가 비약해 해석하듯이 결코 남자에 대한 여자의 일방적인 종속과 예속관계를 차별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의 존재기원이 남자의 갈빗대를 취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해 인격적인 평등의 관계와 한 몸의 관계는 어떤 경우라도 결코 변할 수 없다.
남자에게도 형벌이 주어진다. 땅의 저주와 수고의 대가로 생계를 위한 소출이 보장된다. 이 과정에서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냄으로 소출의 정상적인 생산량을 저지한다. 그만큼 수고하며 땀 흘려야 될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남자에게 주어진 저주의 영향력이 땅 곧 전 창조계로 확대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창조의 원리상 남자가 여자를 대표하고 있을 뿐 아니라(고전 11:3, 딤전 2:13), 피조물의 면류관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대표성의 원리에 근거한 표현이기도 하다(문화명령, 창 1:28, 2:15).
마지막으로 인간 타락으로 말미암는 결정적인 저주는 죽음의 도래다. 죄의 형벌로 사망이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죄의 값을 사망으로 규정하면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기술한다(롬 5:12). 역설적으로 죄의 사면은 곧 영생의 삶과 직결된다는 원리 또한 도출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속을 받게 될 때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것이 복음 속에 감춰진 은혜의 비밀이다(엡 1:8).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이 원복음의 성격을 띠고 구속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은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산 자의 어미'란 의미가 담긴 하와(the life-giving one)로 명명한 데서 암시된다(20절). 본 절에서 산 자의 어미란 하와를 통해 창세기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며, 그 결과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구속자인 여자의 후손('그')의 당사자와 그 후손의 구속에 함께 연합돼 죄로부터 사면을 받고 영생의 생명을 소유하게 될 여자의 후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둔 구속사적 표현이랄 수 있다. 이런 구속의 보증이 다음 단계로 가죽옷을 해 입히시는 은혜의 손길 속에 미래지향적으로 함께 내재돼 있다고 본들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⑨ 하나님의 조치(22-24절)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취하신 하나님의 조치는 본문을 통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길의 차단이다. 범죄한 부부가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 수 있는 개연성을 사전에 근절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만에 하나 그렇게 되면 차후의 구원의 기회는 전무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생명나무에로의 차단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으신 은혜의 일환이기도 하다. 즉 이들 부부가 비록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되었을지라도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미래적인 구원이 보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생명나무로의 접근 차단은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에덴으로부터의 방출이다. 에덴을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성소)이요 처소로 전제할 때, 이들 부부의 에덴으로부터의 방출은 하나님과의 분리 곧 교제의 단절로 인한 격리와 소외를 의미한다. 이는 한편으로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의 비극을 표상할지라도 다른 한편 자신들의 영적 비참함을 절감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게 되는 바 구원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마치 율법의 긍정적인 기능 인 죄를 깨닫게함으로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school master/tutor)의 역할을 수행케 하듯이 말이다(갈 3:24).
(3) 구속(창 3:15, redemption)
① 하나님의 딜레마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함으로 범죄 해 타락한 아담과 하와는 즉각적인 영적 죽음이 찾아온다. 문맥 속에서 아담 부부의 영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단절된 모습으로 묘사된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에 아담 부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표현이 이런 사실을 증거한다(창 3:8). 아담 부부의 영적 죽음은 이들의 육체 가운데 이미 심겨진 사망의 씨로 하여금 서서히 저들을 죽음가운데로 이끌어 갈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어떤 특단의 조치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구원은 요원할 뿐이다. 죽음 외에 아담 부부의 불순종으로 인해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창 1:28에 복으로 약속해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무효화에 관한 내용이다.
본 문화명령은 하나님께서 복의 형식을 빌려 일방적으로 맺어주신 은혜성을 띤 일종의 은혜언약이다. 물론 본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원형은 인과관계의 원리 속에서 엡 1:3-14에 근거한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에서 뿌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창 2:17의 선악과 금령을 어긴 차원에서만 보면 이들 부부는 죄책의 결과로 당연히 죽어야 한다. 반면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본 언약이 은혜성을 띠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 부부의 죄와 무관하게 문화명령을 주도적으로 진행시켜 마침내 성취시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주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당시 하나님의 입장은 진퇴양란에 놓인 셈이다. 선악과 금령은 단서조항에 근거해 죽음을 요구하는 데 반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은혜성에 근거해 지속적인 진행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란 주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나님을 의인화 시켜 설명하는 신인동성동형론(anthropomorphism)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이다.
②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여자의 후손언약은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딜레마를 일시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처방책이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지목된 '그(He)'에 의한 구속의 원리 속에서 아담 부부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그 결과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여자의 후손언약을 원복음(protoevangelium)52)으로 부르는 배경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물론 이 시점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원복음으로 보는 관점은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에 근거해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과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될 구속의 공효를 선취적으로 적용시킨 경우이다.53) 여자의 후손언약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간섭에 의한 적대감이 삼중적으로 설정된다.
첫째, 뱀(사단)과 여자가 원수 관계가 된다. 여기서 여자는 당시 하와가 뱀의 미혹을 먼저 받았다는 정황상 일차적으로 그녀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저자는 여자의 정체가 누구냐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뱀의 미혹사건 이후 하와와 뱀과의 원수 관계가 구체적인 실례로 기술되지 않은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신 왜 뱀과 여자의 적대적인 관계를 우선적으로 설정했는가에 독자의 관심을 유도한다. 계속되는 문맥 속에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및 '여자의 후손(그)과 뱀'과의 적대적인 투쟁사의 예언을 도입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여자와 뱀과의 원수관계는 후자의 두 예언의 동인과 필연성을 포괄적으로 선언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하와를 '산 자의 어미'(the mother of all the living) 곧 하와(the life-giving one)로 이름 지은 사실 속에서도 확인된다(창 3:20, 딤전 2:15).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구원해 낼 후손을 낳을 자로서 여자의 역할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로 여자가 먼저 언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54) 하나님께서는 한 여자의 잉태와 출산을 통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 확실하다(마 1:20-21, 갈 4:4, 딤전 2:15).55)
둘째,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대 관계가 주어진다. 뱀과 여자와의 원수관계라는 처음 예언을 통해 볼 때, 이번 예언은 첫 예언의 구체적인 실행이란 성격을 띤다. 그렇다면 본 절에서 여자의 후손은 누구이고 뱀의 후손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문맥을 통해 여자의 후손은 하와의 후손과 불가피하게 연계되겠지만 그렇다고 하와의 후손인 인류 전체를 여자의 후손으로 간주하는 데는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인은 아벨과 더불어 하와(아담)의 자녀이다. 그러나 가인은 이내 아벨을 살해한다. 본 사건과 연관시켜 신약의 저자는 가인을 '악한 자에게 속한 자'로 규정한다(요일 3:12). 유다서에서는 하나님의 저주 받을 자들을 총칭해 '가인의 길'로 행한 자로 묘사한다(유 1:11). 이런 표현들은 가인이 사단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출생한 뱀의 후손이란 의미가 아니다. 사단의 성품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다(요 8:44).56) 이런 관점에서 뱀의 후손이란 사단에게 속해 사단의 성품을 부여받은 멸망 받을 자들을 비유적으로 총칭하는 표현이다(마 25:41, 계 12:7-9). 반면 여자의 후손이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 이들 두 후손들 간에 적대적인 반목과 대립과 투쟁의 역사가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 될 세상역사를 통해 구체화될 것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다. 실례로 창 4장에 소개된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해사건을 들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아벨의 제사가 열납되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당한 데 대한 가인의 시기와 질투가 동생을 죽이는 살인사건으로 비화된 사건이다. 그러나 본 사건의 본의는 그렇지 않다.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 간의 적대적인 관계설정이 제사열납의 유무를 통해 살인사건으로 표출된 것이다. 결국 창세기 저자는 4장을 통해 가인을 뱀의 후손으로 아벨을 여자의 후손으로 암시한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런 식으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인간역사 곧 세상역사를 방편 삼아 언약적 구속사의 정체성을 띠고 면면히 진행된다.
셋째, 여자의 후손(그)과 뱀과의 대립관계이다. 본 절에 언급된 여자의 후손은 문맥 속에서 동시에 '그'로 언급된다.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정체가 15절 전체를 통해 단수와 복수로 이중적인 의미를 띠고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집합적(복수)인 성격을 띠고 언급된 여자의 후손의 정체에 대해서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살펴봤다. 그렇다면 단수 대명사로 사용된 '그'의 정체는 누구를 가리킬까.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두 대상 간의 적대적인 투쟁관계를 통해 이들의 정체를 추정할 수 있다. 본 절에서 뱀의 경우 뱀의 후손들을 대표하는 성격을 띤다. 마찬가지로 '그' 또한 여자의 후손을 대표하는 인물로 설정해 상호 대립적인 상응성을 적용할 수 있다. 결국 이들 두 대상들은 서로가 속한 두 무리를 대표하는 자들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두 대표들 간에 사생결단의 적대적인 싸움이 벌어질 것이 예언 돼 있다. 결과는 그로 언급된 여자의 후손(단수)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본 예언은 이후 성경의 계시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렘 31:22, 갈 4:4)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뱀으로부터 발꿈치에 해당하는 상처를 받으셨지만, 부활을 통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사단의 무장해제) 십자가로 승리하심"(골 2:15)으로 뱀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셨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여자의 후손 언약에 담긴 중심사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및 이들의 후손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사면해 주심으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건설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큰일'(행 2:11)과 '하나님의 열심'(사 9:7)에 집중돼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결국 여자의 후손언약에 암시된 구속사상의 배경은 인과관계의 논리상 창세전 구원협약에 기초한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이 보다 진전된 모습으로 창조사역을 통해 가시화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57)
이런 이유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후 창세기 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단수/복수)을 세상 가운데 출현시키기 위한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적극적으로 진행된다.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요,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무대와 방편삼아 진행된다는 원리가 이런 상호 의존성을 통해 확인된다.
3. 여자의 후손언약과 새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미 살펴본 대로 '여자의 후손(그)과 뱀'과의 영적 투쟁의 결과를 통해 여자의 후손 언약의 당사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미래지향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이번에는 여자의 후손 언약이 어떻게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과 동질성을 띠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성취되는 지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의 족보를 통해 밝혀 보고자 한다.
(1) 인류의 초기 역사 속에 계시된 여자의 후손 계보(창 4-11장)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세상역사)는 창 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과 불가분의 연계성 속에서 구속사의 방편이라는 성격을 띠고 진행된다. '세상역사의 본질은 구속사요,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도구삼아 진행된다'는 신학적 명제가 이런 전제 속에서 도출된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런 방식으로 인류의 초기 역사 속에서 아담 부부의 출산의 방식을 통해 구속사의 거보(巨步)를 내딛게 된다.
특별히 창세기 4장에 소개된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중 아벨의 제사가 열납된 사건은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예언 된 여자의 후손이 아벨의 계보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란 사실을 독자들에게 암시한다(창 4:3-5). 이런 사실은 제사 열납의 문제와 관련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으로 더욱 구체화된다(8절).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은 제사 열납의 유무와 관련된 시기 질투의 결과가 아니다.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 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면화된 사건이다.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가인은 뱀의 후손(요일 3:2, 유 11)을, 아벨은 여자의 후손(히 11:4)을 시사하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가인이 제사문제로 아벨을 살해한 후, 하나님은 아벨 대신 셋을 출생케 하심으로 아벨의 뒤를 잇도록 섭리하신다(창 4:25). 따라서 창세기 4장은 여자의 후손 언약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왜 아담에게서 아벨이 아닌 셋으로 연결되는 지의 연유를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의 소개를 통해 설명해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본격적인 여자의 후손 언약에 담긴 구속사의 진행은 창세기 5장부터 기술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창세기 저자는 5장부터 본격적으로 여자의 후손을 족보를 통해 기술한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4장은 5장의 본격적인 구속사의 진행을 위한 도입 부분의 성격을 띤다. 아담에게서 셋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저자는 여자의 후손을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까지 7대를 우선적으로 구분해 기술한다. 저자는 특별히 아담의 7대손인 에녹의 삶을 조명하면서 그가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믿음의 선진이었다고 강조해 소개한다(창 5:21-24, 히 11:5-6). 저자가 이처럼 여자의 후손 계보를 소개하면서 아담의 7대손 에녹의 믿음의 삶을 상대적으로 강조해 조명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처사다. 왜냐하면 동일한 아담의 7대손인 라멕을 가인의 후손인 뱀의 후손으로 소개하면서 라멕의 불신과 불경과 패역한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창 4:23-24). 이처럼 인류의 초기 역사 때부터 하나님의 구속사는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라는 상반된 예정의 두 요소를 담고 세상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의지나 선행과 무관하게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은혜 중의 은혜이다. 이 선택적인 구원의 은혜가 감사와 감격의 마음을 유발시켜 자원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하는 일에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약 2:22). 무익한 종의 고백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거한다(눅 17:10). 기독교 신앙에서 행함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으로 마땅한 도리이지 보상과 대가의 조건적인 개념으로 성립될 수 없다. 기독교가 선행을 구원의 첩경인 것처럼 강조하는 조건적인 성격을 띤 자연종교라면 은혜는 설 자리를 잃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또한 본의를 상실하게 된다. 기독교의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롬 3:21-22, 28, 엡 2:8-9).
에녹 이후 여자의 후손 계보는 969세를 향수함으로 인류 중 가장 장수했던 므두셀라로 이어진다. 이후 라멕-노아에 이르러 인류가 죄의 관영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다(창 6:5-7, 7:6). 노아시대에 인류가 경험했던 물 심판은 죄의 관영 곧 하나님과 무관한 삶(인본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삶: 요일 2:15-16)의 결국은 심판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남겨 주었다. 성경은 현 시대의 결국에도 노아와 롯의 시대와 동일한 원리가 적용될 것을 이미 경고한다(눅 17:26-30).
물 심판 때 노아와 그의 일곱 식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구원을 받았다. 당시 물 심판을 통해 '구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와 믿음으로 받는다'(엡 2:8-9)는 신약적 선언을 새삼 재확인하게 된다.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세 자녀들을 대상으로 아담과 맺으셨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재확약해 주신다(창 9:1-2, 8-10절). 이를 노아의 보존언약이라 부른다.58) 노아와 그의 세 자녀들을 통해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하셨던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창 1:28, 6:18) 이 재차 확인되기 때문이다.
홍수 후 노아의 세 아들들 곧 셈과 함과 야벳을 통해 인류는 다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 진다(창 10장). 오늘 날과 같이 각기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땅에 편만하게 흩어져 나름대로의 삶을 경영해 간다(창 10:5, 20, 31절). 이들 세 아들들 중 여자의 후손 계보는 특별히 셈과 그의 다섯 아들들 중 셋째인 아르박삿을 통해 데라에 이르기까지 선택적으로 계승된다(창 10:22, 11:10, 24절).
창세기 저자는 이런 식으로 족보를 통해 여자의 후손을 기술하는 가운데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를 10대로(홍수 전), 노아로부터 셈을 거쳐 데라까지를 10대로(홍수 후) 맞춰 소개함으로 다분히 의도적인 기술을 시도합니다. 마치 10이라는 성경의 완전수를 사용함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한 구속사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저자의 의중을 독자들에게 암시하려는 듯이 말이다. 이런 추정은 빗나가지 않는다. 창세기 11장은 인류가 총체적으로 하나님께 배도하는 반역적인 모습을 바벨탑 축조사건을 통해 보여준다(창 11:1-4). 바벨탑 사건은 홍수 후에도 물 심판이라는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인간의 죄성을 근절시킬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다(창 8:21). 이는 여자의 후손 언약 속에 암시된 구속의 도리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란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영적 암매와 패역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실성에 근거해 셈의 후손을 통해 여자의 후손 언약을 시종일관하게 성취해 가심을 보여주려는 것이 바벨탑 반역사건과 나란히 셈의 계보를 기술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의 팽배로 인본주의와 종교다원주의가 만연돼 가고, 상대적으로 절대가치인 기독교 신본주의 신앙이 무섭게 도전과 외면을 받고 있을지라도 알파와 오메가가 되셔서 역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은 오늘도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구속사를 여전히 세상 역사 속에서 차질 없이 집행해 가실 것이다. 역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가 차면 마침내 구속사를 완성하실 것이다. 계시록은 이런 사실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에 근거해(요 19:30), 악의 세력이 최종적으로 패배할 것(계 16:17, '되었다')과, 이로 인해 구속사가 종말론적으로 완성 될 것(계 21:6, '이루었도다')을 미래지향적인 관점으로 선언한다.
(2) 아브라함 언약으로 말미암는 구속사의 전환기(창 12:1-3)
창세기 12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전면에 친히 나타나셔서 데라의 후손 중 특별히 아브람을 선택적으로 부르시고 그를 여자의 후손 언약의 당사자로 삼아 주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람 소명과 관련해 '아브람 언약'(창 12:1-3)이라 일컫는 은혜언약을 맺어 주시는 사건은 창 4-11장에 기록된 인류의 초기 역사와 비교해 볼 때 가히 획기적인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암묵적이던 것을 명시적으로, 포괄적이던 것을 구체적인 것으로 집합적이던 것을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맺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혹자들은 창세기 12장에 소개된 아브람 소명(calling) 사건을 구속사의 전환점 또는 구속사의 분수령으로 부르기도 한다.59)
아브람 언약은 전체적으로 네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 자손언약, 땅 언약, 왕 언약, 그리고 아브람으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여자의 후손 언약은 아브람 언약 중 자손언약을 통해 진행될 것이기에 편의상 자손언약의 성취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아브람은 이복 누이인 사래를 아내로 취해(창 20:12) 백세에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낳는다(창 21:1-5). 이삭은 숙부인 나홀(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인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창 24:15)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을 출산한다(창 25:24-26). 하나님은 동생 야곱을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적으로 지명해 여자의 후손언약을 계승해 나가신다(롬 9:10-13). 본 사건은 쌍둥이를 예로 들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사상이 본인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부르시는 이의 기뻐하시는 뜻(절대 주권)을 좇아 섭리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시사건이다.
이후 하나님은 야곱의 생애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시는 가운데 하란에 거주하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이십년을 동거케 하신다(창 31:38).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 및 이들의 몸 종인 실바와 빌하를 통해 열 두 아들을 출산토록 섭리하신다(창 29-30장). 이들 열 두 아들들이 후에 신정왕국인 이스라엘 민족을 구성하는 열 두 족장들이 된다. 하나님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레아에게서 출생한 넷째 아들 유다를 통해 여자의 후손 계보를 잇도록 주관 하신다. 이런 사실은 왕권의 상징인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야곱이 임종 직전에 예언적으로 축복한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창 49:8-10).
유다는 가나안 여인을 아내로 맞아 세 아들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는다(창 38:1-5). 장자 엘이 다말이라는 여인을 아내로 맞아 결혼했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세상을 떠난다. 동생 오난이 율법에 명기된 계대 혼인법(신 25:5-6), 곧 수혼법(嫂婚法)의 규례를 좇아 형의 가문을 잇기 위해 형수 다말과 결혼한다. 이 결혼마저 오난의 비협조로 중도에 무산되고 급기야 오난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어버린다(창 38:8-10). 후에 하나님은 이들 유다의 가정을 선용하셔서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통해 쌍둥이(베레스/세라) 후손을 얻게 하신다(창 38:27-30). 쌍둥이 중 베레스를 섭리적으로 간섭해 여자의 후손 반열에 세워주신다.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쌍둥이 아들 중 베레스가 유다의 뒤를 이어 여자의 후손 계보를 잇게 된 사건은 계대 혼인법(신 25:5-6)과 기업 무르는 법(고엘제도, 레 25:25)을 통해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룻 2:1)로 하여금 과부된 룻을 취해 유다의 후손인 엘리멜렉의 계보를 잇게 했던 룻기서의 유다의 계보를 통해 확인된다(룻 4:18-22). 유다에서 베레스로 이어지는 유다의 후손 계보를 통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다윗의 아비 이새를 낳고 이새를 통해 다윗이 출생하게 된다. 이처럼 율법에 명기된 계대혼인법(수혼법)과 기업 무르는 법(고엘제도)은 유다와 보아스의 경우를 통해 만일의 경우 발생할 수도 있는 여자의 후손 언약성취의 차질을 예방적 차원에서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로 주신 제도적 장치의 일환임을 간파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창 3:15) 계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아브라함을 역사의 전면에 불러내시고, 그와 아브라함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창 12:1-3) 본격화된 언약적 구속사의 진행은 다윗에 이르러 다윗언약에 근거해 다시 한번 새로운 전환의 국면을 맞게 된다(삼하 7:11-17, 시 89:3-4).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되었던 네 요소들이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통해 비록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총체적으로 성취됨으로 당시 통일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신정왕국으로서의 자태를 만천하에 현시하게 된다(왕상 4:20-25). 반면 솔로몬 통치 말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우상숭배의 만연과 율법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해 솔로몬 사후 통일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는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은 신정왕국의 건설자란 영광과 더불어 몰락자란 불명예를 동시에 안고 있는 불가사의한 자로 기록된다.60)
한편 열왕기서 기자는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왕상 4:25)고 기술함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총체적인 성취를 통한 신정왕국의 현시를 확증한다. 본문에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승리로 말미암아 도래하게 될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하는 과정에서 미가 선지자가 인용했던 표현이다(미 4:1-4, 슥 3:10). 이로 보건대 당시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가 적극 시행되는 신정왕국으로 존재했던 것이 확실하다.61)
(3)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솔로몬 사후에 통일 이스라엘은 언약적 징계로 남북으로 분열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의 위(位)와 집(왕조)과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삼하 7:16)62)을 신실히 시행하심으로 남 유다가 여자의 후손 계보를 계승한다(왕상 11:36).63)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 지속되던 두 왕국은 마침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다(BC 722), 남 유다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침공을 받고 많은 무리가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비운을 맞는다(BC 586).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민족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 이방인들에게 침략을 당해 멸망한다는 사실이다. 신학적으로는 다윗 언약에 약속된 다윗의 왕위와 나라에 대한 영원한 보증이 무효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64) 이 과정에서 선지자들에 의한 새 언약 사상이 선포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칠십년으로 포로생활을 한정하신다(렘 25:11-12, 29:10). 포로생활을 마치게 될 때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회복돼 바벨론 포로로부터 가나안 고토로 귀환하게 될 것과, 성전이 복구될 것을 약속해 주신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사 11:1)과 다윗의 혈통에서 한 의로운 가지(렘 23:5)를 일으켜 다윗의 위와 통치를 회복시킴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되었던 신(新)다윗왕조가 복원될 것을 확약해 주신다(겔 37:24-28). 이때에는 마음 속에 새 신을 주셔서 죄를 사해 주시고, 새 마음을 품게 하심으로 율법을 자원해 순종함으로 공평과 정의가 하수같이 넘치는 메시아 왕국이 도래할 것도 약속해 주신다(렘 31:31-34, 사 9:6-7). 이상의 결과로 가나안 고토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렘 23:3, 사 10:20-22)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는 다윗의 신정왕국이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렘 31:33, 겔 37:27). 이처럼 바벨론 포로귀환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한 신(新)다윗왕조의 재건 등을 총체적으로 담고 있는 선지자들의 미래지향적인 예언의 내용을 가리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이라고 부른다.65) 특별히 이사야서에 나타난 새 언약 사상에서 참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실 하나님의 의로운 종의 미래상을 고난의 종과 만왕의 왕의 상반된 이미지로 기술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사 52:14, 53:5-6, 9:6-7, 52:13, 15절). 전자의 경우는 죄에 대한 대속과 구속을 위함이요(마 1:21, 막 2:17, 10:45, 요 1:29, 롬 4:25), 후자의 경우는 구원의 최종 완성과 종말적 심판을 위함(마 25:31-33)이란 사실을 신약적 배경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구약에 나타난 제반 신적 언약들의 특징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을 포함해 성취의 양상이 이중적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이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성취되고, 본질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완성되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상의 기술에 근거해 여자의 후손언약을 다윗언약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담긴 신학적 연계성과 비교할 때, 다윗에게까지 이어졌던 여자의 후손 계보가 다윗언약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속에서 계시의 비약이 일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바벨론 포로로부터 회복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신(新)다윗왕조의 왕은 옛 다윗왕조의 혈통적 후손이 아닌 다윗의 실체로서 참 다윗 왕이란 사실이다(겔 37:25). 이사야 선지자가 언급했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실 것"(사 11:1-2, 9:6-7)이라는 예언의 당사자가 다름 아닌 참 다윗을 가리키는 내용아다. 예레미야 또한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고 다윗에 의한 새로운 통치를 보증한다. 이들 선지자들의 예언이 한결 같이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과 직후인 것을 감안하면, 본 예언 중에 지목된 다윗의 이미지는 과거 다윗 왕의 연속선상에서 다윗의 실체인 참 다윗 왕인 사실을 문맥 속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들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에 언급된 옛 다윗의 실체인 참 다윗은 누구를 지목하는 것일까. 고난의 종으로 죄를 구속해 주시고, 만왕의 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공평과 정의로 통치하심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의의 나라를 세우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을 신약의 기자들은 도처에서 구체화시켜 기술한다. 마태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선언한다(마 1:1). 이는 아브라함 언약 중 자손언약의 실체가 이삭이 아닌 예수님이시며(갈 3:16),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아들의 실체가 솔로몬이 아닌 예수님이란 사실을 가리킨다(요 2:19-21, 마 12:6, 42, 눅 11:31).66) 마 1:21에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구주가 예수님이라고 선언한다. 마가의 경우 예수님의 구속사역과 관련해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막 2:17), 죄인을 구속하기 위한 대속물로 오셨다고 기술한다(막 10:45). 누가는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수태사실을 알리면서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아기 예수님께 주시고 야곱의 집 곧 이스라엘 민족의 왕으로 영원히 그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강조해 전한다(눅 1:31-33).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야곱의 집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 된 신약교회 곧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킨다.67) 마태와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상징하는 성찬식의 제정을 기술하면서 이를 새 언약으로 명명함으로 예수님의 새 언약 제정 속에 내포된 중심사상이 구속으로 말미암는 죄사함에 집중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눅 22:19-20, 마 26:26-28). 히브리서 기자는 보다 직접적으로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중심 주제인 죄의 전적 사면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永)단번(once for all)의 구속 사역과 연관시킨다. 이런 사실은 선지자들의 새 언약의 내용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중심인 십자가의 구속사건 안에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논증해 준다(히 10:11-18).
물론 다윗언약에서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다윗의 아들로 솔로몬이 암시되는 것을 보면(삼하 7:12-13, 대상 22:9-10), 여자의 후손언약은 일면 혈통적으로 솔로몬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통치 속에서 성전건축과 정치군사적 안정과 평화는 약속대로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중도 하차한다. 이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솔로몬과 성전의 정체는 다윗의 혈통적 후손인 솔로몬과 솔로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서 성전이 아니란 사실이다. 대신 솔로몬과 성전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미래지향적으로 전망하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간파할 수 있다(마 12:6, 42, 요 2:19-21).68)
(4) 족보를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는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예수님의 혈통적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전제하면서(마 1:1)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이어 진 남유다의 왕들을 열거하면서 다윗의 먼 후손인 요셉과 그의 아내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술한다(마 1:16). 하향식의 방식을 취한다. 이는 마태의 의도적인 기술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법적 정통성과 왕통의 합법적인 계승자로 오셔서 다윗의 위를 계승할 유대인의 참 다윗 왕이요 메시아 대망 사상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반면 누가는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을 거쳐 하나님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눅 3:38). 상향식의 방식을 취한다. 이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증거하려는 강한 의도가 엿보인다. 누가의 족보 기술이 마태의 기술과 두드러지게 다른 점은 아래서부터(요셉) 위로(아담-하나님)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외에. 다윗의 아들을 솔로몬(밧세바의 넷째 아들)이 아닌 나단(밧세바의 셋째 아들, 대상 3:5)으로 연결시킨다는 사실이다. 한편 누가는 요셉이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을 낳은 사실을 전제하면서(눅 3:23상) 요셉의 위는 헬리로 기술한다(눅 3:23하). 마태가 요셉의 아비를 야곱(마 1:16)으로 기술하는 것을 보면 누가가 지목한 헬리는 요셉의 양부이거나 장인 곧 마리아의 아비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면 누가의 족보는 마리아 쪽의 계보를 잇고 있음을 아주 부인할 수 없다.69) 이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구속자(갈 4:4, 렘 31:20)를 의식한 데서 오는 의도적인 기술일 수 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고 기술한다. 예레미야 선지자 또한 동일한 메시아 대망 사상과 관련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새 일'로 규정하면서 그 성취의 시점을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로 묘사한 예언 속에서 찾는다(렘 31:20). 이상의 표현들은 구속사의 핵심사상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종말론적 성취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거의 4세기 동안 세상 역사 속에 깊이 침잠했던 하나님의 구속사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좇아 때가 차매 새 언약의 미래적인 성취를 향해 새로운 거보를 내딛기 시작한 셈이다. 구약의 제반 언약들의 중심 주제인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가 아기 예수님 탄생에 맞춰 정조준 해 왔던 것이다.70)
이상의 논증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과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구속사역(새 언약) 안에서 성취의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보다 근원적으로는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4-14)의 근간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란 신학적 명제가 창조세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확증시켜 준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은 창세전과 창세후의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총체적으로 포괄하면서 상호간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이루는 공통분모로 기능한다. 창세전 구원협약과 창세기 1-3장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는 창조-타락-구속의 구조적 맥락 속에서 발견되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의 원리를 통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4. 여자의 후손언약에 함의된 두 계열 간의 적대적 투쟁사(창 3:15)
창 3:15을 구속사 진행의 관점에서 흔히 원복음(원시복음), 또는 문맥의 의미를 따라 여자의 후손언약71)이라고 부른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창1-3장의 언약적 문맥을 통한 내용 전개상, 복음의 성격을 띤 은혜언약으로 간주된다. 이는 신적 언약의 특성 중 하나인 연계성(continuity)이란 관점에서 접근할 때, 창 2:17의 선악과 금령(일명 선악과 언약 또는 아담언약)을 위반해 죄인으로 전락해 버린 아담과 하와의 죄책을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대속적으로 해결해 주는 방식을 통해,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계속해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이렇듯 여자의 후손언약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건설해 갈 수 있도록 사죄의 길을 열어 준 복음의 요소를 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함의(含意)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는 단수('그')적이며 동시에 복수적(집합적)인 이중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물론 이런 관점은 뱀의 후손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이다.72)
이상의 논증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내포돼 있는 두 계열 간에는, 예언의 내용대로 상호 적대적인 관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첨예한 긴장과 대립 및 충돌과 투쟁의 제반 요소들이 민감하게 교차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뱀의 후손의 총수라고 할 수 있는 사단은 천상계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일차 실패해 세상으로 쫓겨난 뼈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유 6절,73) 벧후 2:4, 요 12:31, 16:11, 고후 4:4, 마 4:8, 벧전 5:8), 이번에는 우회적인 방식을 통해 더욱 집요하고 간교하게 창조의 면류관인 사람을 미혹해 하수인으로 삼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고 있다(고후11:14-15). 사단의 미혹은 세상 끝날 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한 뱀의 간계 속에는 천상계에서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사단의 악의적이고 도전적인 책략이 담겨있는 셈이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격이 사죄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와, 심판이라는 양극단의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배경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사에 대한 예언이 성경의 계시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는 언약성취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증해줌으로 계시의존적인 신앙관 확립에 기여할 뿐 아니라,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최종 성취 또한 보증해 줌으로 종말지향적인 신앙관 확립에도 일조할 것을 확신한다.
(1) 아벨에 대한 가인의 살인사건(창 4:8)
아담이 '그 아내'74)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출산한다. 하와는 감격에 겨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고 기쁨의 탄성을 발한다. 가인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획득했다'(acquisition, I have gotten),75) '낳았다’(I have created)76)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와는 가인의 출산 속에 담긴 본의를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의 일차적 성취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호와로 말미암아’란 강조적 표현이 이를 암시적으로 시사한다. 자신으로 말미암아 남편 아담은 물론 후손들인 온 인류까지도 죄인의 신분으로 전락시킨 장본인(창 3:6, 딤전 2:14)77)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가인의 출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하와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하와는 가인의 출생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 틀림없이 성취될 것을 가시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상황에서 가인은 여자의 후손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통로로서 중보적 기능을 담당할 언약계승자로 보증될 수 있었기에 말이다. 그래서 이름까지도 ‘구속자를 낳았다’는 의미가 함의된 가인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들의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아들 가인은 아담부부가 생각했었던 것처럼 여자의 후손언약의 합당한 계승자가 되지 못했다. 가인의 무엇이 아담부부로 하여금 그토록 부정적인 확신을 갖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한다. 우리는 가인에 대한 저들의 실망과 후회스런 심정이 가인의 동생 아벨의 이름 속에서 역설적으로 암시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아벨의 이름이 ‘무의미와 하찮음’이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78) 이는 가인에 대한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진데 대한 실망과 낙담의 심정이 이런 식으로 아벨의 이름을 통해 표출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치 지난 시절에 삼 대 독자 집안에서 딸만 내리 다섯을 낳았다면 아들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에서 마지막 다섯 째 딸의 이름을 말순이라고 짓는 경우가 있었듯이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인에 대한 아담부부의 실망과 낙심은 이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행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즉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거부당한다(창4:3-5). 여기서 아벨의 제사가 열납 된 것은 제물의 차이가 아니다. 제물에 담긴 예배자의 믿음의 여부이다. 자의적(恣意的) 숭배신앙이 아닌 계시 의존적 신앙자세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본 제사사건을 구속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히11:4)고 설파한다. 본 절에서 믿음이란 구체적인 계시의 내용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롬 10:17)79)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건대 창3:15의 여자의 후손언약을 가리키고 있음을 문맥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제사가 거부당한 사실로 인해 극한 시기 질투의 반감을 품게 된 가인은 어느 날 결국 동생 아벨을 들로 불러내 살해하기에 이른다(창 4:8). 하나님께서 수차 사전 경고를 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살인의 저변에는 억제할 수 없는 분노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마음을 적절히 다스리지 못하는 데서 온갖 유형의 범죄가 유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은 일체의 행위의 좌소(座所)로 기능한다. 분노와 혈기를 다스리는 것과 관련해 잠언기자가 이렇게 교훈한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 율법의 본의를 밝히 해명해 주시는 가운데 살인행위와 분노한 마음을 동질선상에서 해석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마 5:21-22). 이는 살인행위의 성립이 분노한 마음에서부터 기인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본 주제를 통해 가인의 살인행위의 성격을 규명함에 있어서 이를 단순히 제사의 열납 유무와 관련한 가인의 시기, 질투 및 분노한 마음의 발로 차원에서만 해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위의 서론 부분에서 언급한 대로 이 사건이 문맥상 여자의 후손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80)
그렇다면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이 여자의 후손언약과 어떤 식으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겨 있는 두 계열, 즉 여자의 후손계열과 뱀의 후손계열 간의 지속적인 적대적 투쟁과 극한 대립의 불가피성을 살펴본 바 있다(창 3:15).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빛과 어두움의 첨예한 반목과 긴장관계로도 설명될 수 있다(엡 5:8). 이런 관점에서 가인의 살인사건의 성격을 접근해 보면, 이는 사단이 가인을 미혹해 하수인 곧 뱀의 후손으로 삼아 여자의 후손인 아벨을 제거함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벨을 통해 계속해서 성취돼 갈 것을 사전 차단하려는 사단의 고도로 계획된 악의적인 계략이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의 후손언약의 계승자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원천봉쇄하려는 사단의 적극적이고도 도발적인 간교한 전술과 전략 말이다.81)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절대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어느 누가 근원적으로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롬 8:35-39). 피조물이 창조주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어찌 비교될 수 있겠는가. 사단의 지혜와 능력이 어찌 하나님의 그것을 능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이 말씀은 피조물인 사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과 그 분의 판단과 능력은 어떤 피조물과도 감히 비교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무한 광대할 뿐이다(롬 11:33).82)
아벨의 죽음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 무효화되거나 취소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주권성과 은혜성이라는 신적 언약(Divine Covenant)의 특성상 궁극적으로 실현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must)을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다. 창세기 4장 말미에 아담부부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해 셋(허락하다, granted, 임명하다, 대신하다, appointed one)83)을 주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창 4:25).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은 여자의 후손언약을 아담에게서 셋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는 언약적 구속사의 길을 열어주심으로 마침내 구원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히 10:20)을 예수님의 속죄사역 안에서 마련해 놓으셨다.
(2) 애굽 왕 바로의 이스라엘 남아 살해명령(출 1:15-22)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적대적인 계열간의 첨예한 투쟁과 대립의 사례는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에 이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의 등극으로 말미암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바로의 압제통치 속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그 대략은 이렇다.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노아의 보존언약(창 9:1-2, 8-10) 및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5:13-21) 속에 이미 약속된 대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고센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해 가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된다(출 1:1-7).84) 그러나 이스라엘의 창성함과 강대함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게 되자 상황이 돌변한다. 이제까지 평화와 공존의 상호호혜 관계가 반목과 경계와 압제의 주종관계로 전락한다. 새 왕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관점에서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고(國庫)성을 짓는 작업현장의 노역과 각종 육체노동에 이스라엘 민족을 강제로 동원시킨다(출 1:8-14).
이스라엘의 민족적 상황이 한 순간에 노예처럼 비참한 지경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더욱 번성하고 창성해 갔다고 출애굽기 기자는 기술한다(출 1:12). 언약을 신실히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강력하게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애굽인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불안과 위기감을 고조시키게 된다. 마침내 새 왕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단의 조치를 강구한다. 곧 이스라엘 여인들이 출산 할 때, 히브리 산파로 하여금 남아(男兒)인 경우에는 가차 없이 다 죽이라는 살해명령을 내린 것이다. 먼 훗날에 유대의 헤롯 왕이 ‘유대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자신의 왕권에 극심한 도전과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몰살시키려고 끔찍한 살해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마 2:16-18). 그런 경우가 지금 애굽 왕 바로에게서 선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의 이런 잔인한 조치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의 생육과 번성에서 오는 정치/군사적인 위협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사전 강구책이 아니라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가인의 아벨 살해사건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돼 있는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적대적 관계에 대해 확인한 바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세상역사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인 사실과 동시에 세상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성취되는 현장이요 무대인 사실도 살펴본 바 있다.
이처럼 지금 바로 왕에 의해 하달된 이스라엘 남아 살해명령은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두 세력 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동일한 성격의 주제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 사단은 영원세계에서부터 집요하게 하나님의 왕권에 도전해 오던 연장선상에서 지금 피조세계 속에서 바로를 통해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은 곧 자신의 파멸과 최후를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마 25:41, 계 20:7-10). 이런 이유로 사단은 애굽의 바로 왕을 충동해 이스라엘의 남아를 지속적으로 살해하려는 시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여자의 후손의 단절과 차단을 재차 목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역사 이래 이 두 계열 간의 적대적 투쟁과 반목은 훗날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직전에 광야에서 40일 금식 후 마귀로부터 직접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을 통해 구체화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된다.85) 후에 이 사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바로를 통해 공격해 오는 사단의 책략을 좌시하지 않으신다. 적극적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신다. 히브리 산파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바로의 명령을 피해갈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주신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아(男兒)들이 무사히 출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다.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 하였더이다”(출 1:18-19).
바로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깊이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며 동시에 언약적 구속사의 진전이란 관점에서 보면 사단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차 명령을 내린다. 이번에는 더욱 확실한 조치를 취하려 시도한다. 애굽 백성들로 하여금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산에 적극 관여토록 지시를 내린다. 이스라엘 여인들이 남아를 출산하면 이내 나일 강에 던져서 익사시키고 여아를 낳게 되면 살려주라고 명령한다. 이는 겉으로 이스라엘의 생육과 번성을 사전에 차단함으로 자신의 정치-군사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에서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여자의 후손의 출생을 근절시키려는 고도의 사단적 책략이 숨어있는 조치인 셈이다.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바로의 악의적인 조치가 이후 어떻게 진전되었는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구체적으로 부연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출애굽기 2장을 시작하면서 이내 모세의 출생과 관련해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버려진 하수(河水)로부터 때마침 목욕 차 나온 바로의 공주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돼 애굽 왕실에서 안전하게 보호와 양육을 받게 되었는지를 소상하게 소개한다(출 2:1-10). 출애굽기 기자는 이런 방식으로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던 이스라엘의 모든 남아들 또한 동일한 원리 하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에 의해 섭리적으로 인도와 보호를 받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바로의 지혜와 능력을 압도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남아 살해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후에 출애굽기 기자는 이스라엘 남아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 그 명령 또한 지속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음을 우회적으로 암시해 준다(출 2:23). 이는 사단의 역사가 한시적이고 제한적일 뿐 아니라, 종말론적 패배가 기정사실화 되어 있음을 표상함에 다름 아니다(욥 1:12, 2:6, 마 25:41).86)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된다(민 23:19)87). 방해를 받을지언정 결코 무효화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아 생명의 도리로 소중하게 붙들고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딤후 3:15-17).88)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는 법이고 들음의 내용은 곧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롬 10:17).89)
(3) 아달랴가 유다 왕족의 씨를 진멸함(왕하 11:1-3, 대하 22:10-12)
본 사건은 유다의 왕족을 철저히 진멸함으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이며 왕비인 아달랴가 유다의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역적 행위를 기술한다. 본 사건은 왕권의 쟁탈차원을 넘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왕권의 지속적인 보존과 계승을 차단하려는 사단의 또 다른 계략에 대한 기술이다.90) 이런 식으로 역사 이래 사단의 미혹은 뱀의 후손 계열들을 도구삼아 부단히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기회만 있으면 여자의 후손 계열을 공략하는 일에 혈안이 돼 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특별히 구속계시의 도구로 선용되고 있는 신정국(神政國, theocracy)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상황이 첨예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언약적 구속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입각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참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참 이스라엘91)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신약시대의 교회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직면하게 될 사단과의 영적 전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시사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베드로도 같은 의미로 성도들을 경계시킨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당시 남북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황을 통해 본 사건이 갖는 구속사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아달랴는 당시 유다의 왕인 여호람의 아내이며 동시에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곧 이세벨의 딸이기도 하다(왕하 8:16-18, 25-26절).92) 이세벨은 당시 가나안 북쪽에 위치한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서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상호 화친을 위해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왕상 16:19-33). 아합 왕은 이런 식으로 이방여인과 혼인관계를 맺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들여와 산당을 짓고 공개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적극 가담함으로 국가적 차원의 우상숭배를 도입해 이스라엘의 어느 왕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는 데 앞장을 선다. 당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이방나라들 뿐만 아니라, 동족 간에도 결혼관계를 통해 정략적으로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기를 시도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화친을 맺는 가운데 아합(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정략적으로 혼인을 시켜 사돈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런 식으로 정치 군사적 안녕을 명분삼아 이방여인과 혼인을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신민(神民)으로서 이미 모세 율법에 명시된 금기조항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결과가 성립된다(신 7:1-4). 물론 이런 금기사항은 혼인관계 자체보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로까지 발전돼 결과적으로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이탈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임을 성경은 밝히 증거한다. 이런 사실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후에 분열 이스라엘의 멸망의 주된 원인은 다름 아닌 우상숭배에 집중하고 있었다는 것이 선지자들의 한결 같은 경고요 지적이다(왕하 17:7-8).93)
이런 방식으로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 시대에는 왕비 이세벨을 통해, 그리고 남 유다 왕 여호람 시대에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왕비가 되는 것을 통해 바알과 아세라로 특징지어지는 이방의 우상숭배 신앙이 양 국가 전반에 걸쳐 막힘없이 들어와 만연하게 된다(왕상 18:20-22, 왕하 8:16-18).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의 혼인관계를 경계시킨 이유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비록 손으로 만든 우상을 직접적으로 섬기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해서 마음을 빼앗기고 거기에 착념하게 된다면 이런 자기중심의 욕심과 탐심이 다름 아닌 본질상 우상숭배 죄가 성립된다고 성경은 엄중히 경고한다(골 3:5, 출 20:4, 신 5:8, 딤전 6:9-10). 그런 의미에서 극한 욕심의 발로인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 사상은 그 자체로서 개인의 신격화와 다름없으며 이는 여호와 신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배역행위가 성립될 수 있다.94)
이런 식의 정략적 혼인관계의 분위기 속에서 유다 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아들 여호람이 왕권을 계승하게 된다. 여호람은 이 과정에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을 한다. 이로 인해 여호람 또한 아합의 집과 방불한 우상숭배의 길을 걷게 된다. 성경은 여호람의 우상숭배의 동기를 아달랴가 아합의 딸인 사실에서 찾는다(왕하 8:17-18). 아달랴는 어미 이세벨로부터 우상숭배에 대한 악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이 영향을 여호람이 이어 받은 셈이다. 선을 좇기보다 악을 즐겨 행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발로이다. 잠언기자는 유아교육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지금 이런 교훈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이세벨로부터 아달랴에게 전수된 셈이다. 여호람과 아달랴 사이에 여러 아들과 딸을 두게 된다. 후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충동해 여호람의 죄를 물어 남 유다를 공격케 하신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말째 아들 아하시야(여호아하스)만 피신을 하게 된다(대하 21:16-17). 얼마 후 하나님의 징계로 여호람이 병사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아하시야가 여호람의 뒤를 이어 유다 왕위에 오른다(대하 21:18-20, 22:1). 아하시야 또한 모친 아달랴의 영향을 받아 악을 행함으로 아합의 집의 길로 행했다고 역대기 기자는 고발한다(대하 22:2-3).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온다. 하나님께서는 아합과 이세벨의 악행을 묵과하지 않으신다. 엘리야를 통해 저들의 비참한 죽음의 종말을 예고해 주신다(왕상 21:17-26). 하나님께서는 이 일의 성취를 위해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내정해 주시는 가운데, 아합과 이세벨에 속한 자들을 철저히 진멸할 것을 명하신다(왕하 9:1-10). 예후를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선택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예후는 아합과 이세벨 및 저들에 속한 혈육들을 철저히 살육한다. 더불어 이스라엘의 바알 선지자, 숭배자, 제사장들 또한 철저히 진멸시킨다.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아하시야와 아합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요람이 예후에 의해 함께 살해당한다(왕하 9:2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아합의 집을 척결한 예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시면서 4대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약속해 주신다(왕하 10:30).95)
이상 일련의 혁명적 숙청사건의 전개 속에서 본 주제인 ‘아달랴의 유다 왕족 진멸사건’ 속에 담긴 본의를 발견해야 한다. 당시 자신의 아들이며 유다의 왕인 아하시야와 친정 아합 왕가의 혈육들이 북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예후에 의해 몰살을 당하게 되자 아달랴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즉각 죽은 아하시야의 통치권을 접수하고 보복적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다윗왕가의 친손자들인 왕세자들을 일거에 진멸한다. 인륜을 저버린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처사이다. 이는 왕인 아들의 죽음으로 자신의 위상이 위협을 받을 것을 예측하고 정권탈취를 통해 일신상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고도의 정치적인 책략의 일환인 동시에 하나님의 다윗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행위이다.
재론하건대 아달랴의 정권탈취를 위한 숙청사건을 단순히 정치적인 권력욕 차원에서만 해석한다면 보다 중요한 핵심내용을 간과(看過)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 특별히 다윗 왕가인 남유다의 정체성이 다윗언약(삼하 7:11-17, 시 89:3-4)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친히 보존해 주시는 신정왕권(theocracy)이란 사실을 고려한다면, 단순히 왕위찬탈이란 표면적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보다 깊은 내막이 감춰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 아달랴의 친정 아합 왕가에 속한 자들을 남김없이 척결하는 것을 보면서 아달랴는 반대급부로 유다의 다윗왕가를 향한 강한 보복 심리를 발동시키게 된다. 이런 복수심이 아들 아하시야의 죽임을 계기로 일거에 폭발하는 형식으로 표출된 것이다(왕하 11:1). 우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의 배후에서 사단이 아달랴의 복수심을 이용해 궁극적으로 다윗왕가를 멸절시킴으로 다윗언약을 파기시키려는 고도의 책략이 숨겨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아달랴를 충동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킴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진정한 자손(삼하 7:12-13) 곧 여자의 후손의 씨를 말살하려는 사단의 고도의 술책 말이다.
당시 남유다의 정치적/종교적 정체성은 비록 다윗과 솔로몬 통치 때처럼 명실상부한 신정왕국의 모습을 보전하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여전히 다윗언약에 의해 하나님의 신정왕국의 정체성이 유효하다는 것이 열왕기서 기자의 한결 같은 관점이다(왕하 8:18-19).96)이런 사실은 여로보암에게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내어 줄 것을 약속하시면
서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11:36)고 하신 말씀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등불’이란 왕위 또는 왕권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곧 다윗 왕권의 지속적인 보장과 계승 말이다. 이런 사실의 구체적인 실례를 본 주제와 관련해 병사(病死)한 여호람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행하는 모든 일들이 아합의 집과 방불했는데 이는 아합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맞이한 연고였다고 성경은 지적한다(왕하 8: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 이유를 설명하면서 열왕기서 기자는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許)하셨음이더라“(왕하 8:19)고 부연해 설명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남 유다 왕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언약적 징계’로 다스릴망정 왕권을 아주 빼앗지는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다. 다윗언약이 영원한 언약의 성격을 띠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삼하 7:11-17).97)
다윗언약의 영원성과 관련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관점이 있다. 다윗의 왕권과 왕위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참 다윗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가시적으로 연장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윗의 왕권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시드기야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략으로 인해 시드기야의 아들들이 저의 목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을 통해 사실상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다(왕하 25:1-7, BC 586). 더 이상 다윗의 왕조는 지속되지 않는다. 비록 이후 70년이 지나서 선지자들의 예언98)을 따라 1차, 2차,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귀환이 이루어짐으로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는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된다(렘 25:11-12, 29:10, 30: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다윗의 왕권은 회복되지 않는다(겔 37:25-28, 렘 23:5-6, 사 9:6-7). 오히려 강력한 새로운 이방 왕조들의 흥망성쇠로 인해 가나안 지경은 열강들의 정치/군사적 목적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이 와중에 역사적 이스라엘은 국가적 정체성을 잃은 채 여러 이방 왕조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 시기를 일컬어 신구약 중간사(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부른다. 성경적으로는 말라기 4장에서 마태복음 1장까지 거의 400여년에 걸친 계시의 침묵기를 가리킨다.99)
여기서 잠시 신적 언약의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 구조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 마저 멸망당한 사건은 유다백성들에게 신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게 된다. 다윗언약에 약속된 다윗왕조의 영원성(삼하 7:11-17, 시 89:3-4)과 상충되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신학적 고민). 언약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이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다윗왕권이 하나님의 계시사 속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본래의 신학적 목적을 고찰하게 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언약의 이중성 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모형적이고 예표적인 성격을 띠고 일차적으로 실현되고,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로 성취된다는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에 근거해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적 다윗왕권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장차 도래하실 참 다윗 왕이신 메시아의 사역을 계시하는 예표적이고 모형적인 의미를 띤 채, 계시의 도구로서의 한시적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시 110:1, 렘 23:5-6, 사 11:1-2, 9:6-7).100)
다윗언약은 이후 예레미야를 중심으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진 소위 새 언약의 예언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회복의 가능성을 제시받게 된다.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역사로 말미암아 역사적 이스라엘은 한편으로 다윗언약을 혈통적으로 계승해 나가는 동시에(마 1:2-16, 눅 3:24-38),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언약관계를 하나님과 맺게 된다는 사실이다(렘 31:31-34, 겔 36:26-27, 37:24-28, 사 9:6-7, 11:1-2, 52:13-15, 53:5-6, 마 22:41-46). 다윗언약의 갱신과 확장 및 발전의 의미를 띠면서 말이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미래는 가시적인 성전이나 다윗계통의 인간 왕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본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교회공동체와 세우시는 “새 언약”에 초점이 맞춰진다(눅 22:19-20, 마 26:26-28, 렘 31:31-34, 23:5-6). 이 새 언약에 근거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세우실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 의로움”이며, 그는 이스라엘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다스릴 것이며, “그의 날들에 유다가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게 될 것이다”(렘 23:5-6, 사 11:1-2, 9:6-7, 겔 37:26-28, 36:26-27). 이 새 언약의 수혜자(受惠者)들이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사람’으로 일컬음 받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참 이스라엘 곧 신약의 교회 공동체이다(엡 2:11-23).101)
새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의해 단 한번의 속죄로 영원히 죄를 도말해 주신다(히10:14).102) 이로 인해 구약의 희생제사는 폐지되고 전적으로 새로운 언약의 계시시대가 도래 하게 된다. 새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께 속한 새로운 백성이 구성되고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진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새 언약의 중심에 대제사장 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원수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화목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롬 5:10). 이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내포하고 있는 새 언약 안에서 구약의 모든 약속들은 총체적으로 성취된다(눅 22:10-20, 24:27, 44절).103)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할 때, 사단은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의 오므리 집안과 시돈의 엣바알 일가를 화친이란 명목으로 통혼케 해서 궁극적으로 유다의 다윗 왕가(여자의 후손)에 아달랴라는 마귀의 자녀(뱀의 후손)를 침투시켜 당대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모략을 꾀해 왔다는 사실을 넉넉히 짐작하게 된다. 마치 ‘곡식 가운데 가리지를 덧뿌린 원수마귀의 악한 소행’처럼 말이다(마 13:24-25).104)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 누가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을 무산시킬 수 있겠는가. 비록 사단이 아달랴를 충동해 아하시야의 왕자들 곧 다윗의 왕족을 일거에 진멸시키려 시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섭리의 손길로 아하시야의 왕자들 중 유일하게 요아스를 절체절명의 위경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 이 일에 쓰임 받은 자가 다름 아닌 죽은 아하시야의 누이요 아비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이다(왕하 11:2, 대하 22:10-11). 그런 의미에서 여호세바는 동시에 아달랴의 딸의 신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아달랴의 친 딸인지의 여부에 대해 성경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태의 정황으로 판단할 진대 친 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다윗왕조를 도와 친어미에게 반기를 든다는 것이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말이다. 특별히 여호람(요람)과 아달랴 사이에 낳은 아들을 가리킬 때는 유독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로 호칭하면서도, 딸 여호세바를 지칭할 때는 요람(여호람)왕의 딸로 언급하고 있는 열왕기서 기자의 의도적인 기술이 이런 사실을 충분히 반증케 한다.105)
어찌했든 이 사건은 하나님의 극적인 반전(反轉)의 섭리역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어린 모세를 바로의 공주가 구해내 바로의 궁에서 키웠듯이(출 2:1-10), 여호람 왕의 딸이 악한 어미의 손에서 왕손인 조카 요아스를 극적으로 구출해 아달랴가 집권했던 6년 동안을 하나님의 전(殿)에 숨겨서 키웠으니 말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여호세바가 당시 성전 제사장인 여호야다의 아내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대하 22:11), 보다 근원적으로 다윗가문에 ‘등불’을 남겨 두시겠다는 언약에 따라(왕상 11:36)106)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친히 요아스를 여호세바를 통해 아달랴의 포악한 살해음모로부터 구원해 주셨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호람의 딸인 여호세바가 아비나 동생 아하시야처럼 아달랴의 우상숭배적 악행을 답습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되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일찍부터 배워 익혔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린 요아스를 보호하시는 일에 여호세바가 선용되었다는 사실로 보건대 하나님의 은혜가 일찍부터 그녀에게 임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아달랴에 의한 유다 왕세자들의 살육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야욕에서 빚어진 한 여인의 정권탈취 사건만이 아니다. 본질에서 여자의 후손이 다윗언약에 근거해 다윗의 혈통을 통해 세상에 출현할 것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방해공작이란 시각에서 해석해야 할 문제이다.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말이다.
출애굽사건 직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 왕이 온 이스라엘의 남아를 몰살 내지는 익사시키는 방식으로 여자의 후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세상에 오실 것을 철저히 방해하려 했음을 살펴본 바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사단은 아달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윗의 왕손들을 일거에 살해하는 방식으로 다윗언약에 약속돼 있는 여자의 후손인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시도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에게 반기를 들어 그녀를 축출하고 요아스(즉위 당시 7세, 대하 24:1)를 유다의 왕으로 옹립함으로 마침내 6년간의 정치적이고 영적인 암투는 하나님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왕하 11:4-21, 대하 23:1-21). 이처럼 다윗의 자손에 대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 씨를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어떤 경우라도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표명의 일환임을 확인하게 된다. 본 사건을 통해 여호와 신앙의 본질이 철저히 계시 의존적이어야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며,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은 말씀의 본의를 생명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비로소 확증될 수 있음을 천명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현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생애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라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절정 안에서 이미 미래가 승리로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다(롬 8:33-39). 이런 사실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데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천상적 능력을 실질로 경험하며 누린다는 사실이 성립된다(히 11:38). 복음이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4) 하만에 의한 유다민족의 몰살 음모(에 3:1-6)
에스더서는 바사제국(페르시아)이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키고 세계열강의 중심세력을 형성하던 시절, 성경적으로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 즉 스룹바벨에 의해 인도된 첫 번째 바벨론 포로귀환(BC 537)과 에스라에 의해 시도된 두 번째 귀환(BC 458) 사이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기록이다.107) 비록 본서의 내용에는 하나님이란 언급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서 전체의 내용 전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라는 뚜렷한 주제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바사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이 다스리던 때(에 1:1), 왕이 아각(아말렉)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여 모든 대신 위에 오르게 한다(에 3:1). 아마 총리자리에 임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자 왕의 모든 신복들이 왕의 명을 받들어 하만을 볼 때마다 꿇어 절을 하며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유독 유대사람 모르드개 만은 이를 거부한다. 아마도 하만에 대한 예(禮)를 표함이 단순히 존경의 도를 넘어 신적 경배행위를 강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108) 이런 사실은 동료관리가 모르드개의 그런 불손한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고 왜 하만에 대해 절하라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지 묻는 질문에 ‘자기는 유다인’이라고 답변하는 데서 사태의 정황을 추정하게 된다. 하만에게 절하는 문제와 관련해 자신은 유다인이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입장표명 말이다. 당시의 관례상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가 자신이 유다인인 사실을 들어 하만에게 절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답변한 배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의 투철한 유일신 사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케 한다.109)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그가 비록 바사제국의 총리신분이라 할지라도 신적경배의 심정을 가지고는 결코 예를 표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된다. 모르드개에게 질문했던 하급관리가 이 일의 결국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모르드개의 일을 즉각 하만에게 보고한다. 하만이 분노를 발한다. 하급관리는 기회를 타서 모르드개가 유다인인 사실을 부연해 고발한다. 이는 모르드개만이 아니라 유다인 모두가 하만에 대해 불경과 불손한 심정을 갖고 있음을 싸잡아 고발하려는 의도를 띤다. 모르드개의 동료로서 그 하급관리는 이번 일로 인해 모르드개 뿐만 아니라 유다인 전부가 하만에 의해 응분의 처벌을 받게 되기를 내심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이 하급관리 또한 하만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마귀에게 속한 자(뱀의 후손)들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110)
하만은 모르드개를 향해 강한 적개심을 발동시킨다. 그런 결과로 모르드개 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유다인 전부를 일시에 살해할 것을 결의한다(에 3:6).111)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성급하고 부당한 결정이요 처사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모르드개의 신분 노출로 인해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말렉 족속들과의 역사적인 오랜 견원지간(犬猿之間)의 앙숙관계의 앙금이 새삼스럽게 부각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다인 모르드개 한 사람의 일로 유다인 전부를 몰살하려는 계획은 단순히 역사적인 적대적 관계 이상의 모종의 배후세력이 하만일행을 적극 충동하고 있음을 넉넉히 짐작케 한다. 이 사건 또한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접근해 볼 때 유다인 전체를 멸절시킴으로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계보를 단절시키려는 사단의 악랄하고 교활한 계교가 담겨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하만은 이 일의 완벽한 성사를 꾀하고자 왕을 설득해 조서를 꾸미고 왕의 반지로 인(印)을 쳐 아달월 십 삼 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도륙하고 진멸할 뿐 아니라, 유다인의 전 재산을 탈취할 것을 바사제국 관할 전국 각 도에 하달한다. 이제 유다인의 목숨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진다. 스스로 구원의 길은 전무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사태의 전말을 이미 알고 계신 듯, 당시의 상황을 선용하심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심을 보게 된다. 사태의 배후에서 말이다. 즉 하만이 제비 뽑아 아달월(12월) 13일로 유다인 학살 일자를 정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반전시키셔서 오히려 모르드개를 하만을 대신해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르게 하심으로 당일에 하만 일가와 그 일당 및 유대인들을 죽이려는 전국 각 도, 각 읍의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진멸하라는 명을 내리게 하신다(에 9:1-2)112). 오늘도 동일한 원리가 여전히 적용된다. 이런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게 될 때, 비록 고난과 환난 중에도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의지함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천상적 능력으로 작용하게 된다.113)
하만의 계교를 알게 된 모르드개는 서둘러 혈육의 조카인 왕비 에스더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구원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모르드개는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계시의존 사색신앙관114)을 발휘함으로 현실을 정확히 통찰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에스더에게 전한다. ”이때에 만일 네가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모르드개는 현재 유다인들이 처한 생사의 절박한 상황과 관련해 에스더의 왕비 간택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면서 그녀의 도움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드개의 고백 속에서 비록 유다인의 현실적인 처지가 바사제국의 속국백성의 신분에 처해있고 하만에 의해 도륙의 위기에 몰려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유다인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확고부동한 언약적 신앙관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또는 이사야 선지자들에 의해 이미 예언된 유다민족의 회복을 보증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신 말이다.115) 때문에 설령 왕비인 에스더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게 될 것“에 대한 모르드개의 확신에 찬 어조 속에서 언약적 구속사를 해석하는 그의 영적 통찰력과 계시적 안목을 확인하게 된다.116) 모르드개의 이런 확신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신앙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있는 계시의존사색신앙과 섭리의존순종신앙의117) 실상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한 당시 유다인의 현실을 해석하고 있는 모르드개의 관점과 영적 통찰력은 정확했다. 신적 언약의 특징인 절대 주권성과 은혜성에 입각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은 취소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다(민23:19). 필연적으로 성취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히 성취하시고자, 그래서 당신의 언약백성들을 도륙의 위기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만의 계략에 적극 개입하신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식이 다름 아닌 ‘반전(反轉)의 섭리역사’이다. 반전의 실상은 왕비 에스더의 지략에 의해 하만의 악의적인 계략의 전모가 밝히 드러났을 뿐 아니라(에 7:4-6),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준비해 둔 나무에 하만이 달려죽게 하는 방식으로 하만의 간악한 범죄행위를 고발해 심판하신다(에 7:9-10).118)
이 일 후에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를 하만의 자리에 대신해 앉힌다. 자신의 인장을 모르드개에게 넘겨준다. 모르드개는 왕의 서기관들을 소집해 하만이 선포한 조서에 맞대응으로 새로운 조서를 반포한다. 아달월 십 삼 일에 하만이 반포한 조서를 따라 유다인을 멸절하려는 자에게 유다인들이 합력해 대응해서 저들을 도륙하고 진멸하며 재산을 탈취하도록 명한다(에 8:11). 이 반전의 드라마에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깊이 관여해 주신 사실은 “모든 민족이 저희(유다민족)를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었다”는 기자의 설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된다(에 9:2). 유다인들은 대적들을 멸하는 과정에서 특히 하만의 열 아들을 도성 수산 궁에서 진멸하였으나 재산에는 일체 손을 대지 않는다(에 9:10). 이는 하만의 아들들을 포함해 유다인들의 대적을 진멸하는 행위가 재산탈취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성격을 띠고 있음을 시사한다.119)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의 방식을 통해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게 하신 것처럼 말이다(창 15:16하).120) 본 사건은 이후 유다인들에게 부림절의 기원이 된다(에 10:20-32).
악의 결국은 멸망과 파멸이다. 사단이 일시적으로 득세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패망하며 심판에 처해 진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패하는 것 같지만 승리로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의 백성들을 눈동자와 같이 지켜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마 28:18-20, 시 121:1-8). 하만의 유다인 살해 음모를 통해 유다인들은 존폐의 위기를 맞는다. 모르드개를 빙자해 전(全)유다인들에 대한 하만의 개인적이고 민족적인 적대적 감정이 폭발한 것이 아니다. 사단이 하만을 도구삼아 모르드개의 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멸하려 했던 계시적 사건이다. 이를 통해 다윗의 혈통을 단절시키고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출현을 차단하려는 고도로 계산된 음모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적극 개입하셔서 위기를 반전시켜 주신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사태를 역전시켜 주신다.
우리는 본 사건을 살펴보면서 사단의 하수인인 하만의 모략으로부터 유다인들을 보전하심으로 궁극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을 지속적으로 성취시켜 나가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을 확인하게 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사 9:7)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로 말미암아 언약의 궁극적 실현성, 구원의 안전성과 영원성, 그리고 언약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적 돌보심과 사단의 종말론적 멸망 등을 섭리적으로 주도해 가심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성도들의 생애 속에 깊숙이 개입하셔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우리의 삶을 합력해 선으로 인도해 주시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신앙으로 수납하게 될 때,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하게 된다(잠 3:5-6). 이런 신앙의 원리가 오늘도 성도로 하여금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 정립에 결정적인 근간으로 기능하게 된다.
(5) 헤롯의 2살 미만 영아 학살명령(마 2:13-18)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궤계를 통해 여자의 후손계보를 차단해 말살하려는 사단의 계략을 주권적으로 간섭하셔서 무효화시키신다. 마침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세상 가운데 탄생할 수 있도록 섭리적으로 주관하신다(눅 1:26-38, 렘 31:22, 갈 4:4).121) 마태는 이런 사실을 언약적 구속사의 배경 속에서 통찰하는 가운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는 표현을 통해 기술한다(마 1:1).122) 이는 첫째로 아브라함 언약 속에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가 이삭을 통해 이삭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창 12:1-3, 7:21, 갈 3:16123)). 둘째로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인 다윗언약 속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 솔로몬을 통해 솔로몬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삼하 7:11-16, 마 12:42124)).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의 관계는 본질상 상호 연속성을 갖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삭의 참 후손이며 동시에 다윗의 참 아들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구약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및 시편에 언급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과 모형들이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킨다(눅 24:27, 44절).
이상의 논리전개 속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고려한다면 그 동안의 사단의 궤계는 일단 수포로 돌아간 셈이다. 여자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씨를 제거하려 했던 숱한 계략들이 허사가 된 셈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마침내 세상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마 1:16).125) 그러나 사단은 결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사여부가 관련된 절박한 상황이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사단은 당시 유다의 분봉왕인 헤롯을 충동한다. 헤롯은 마침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 별을 보고 멀리 동방으로부터 경배 차 찾아온 박사들로부터 ‘유대인의 참 왕’이 탄생한 소식을 전해 듣는다(마 2:1-3). 헤롯은 일순간 권좌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애써 이를 감추면서 어디서 탄생할 것인지를 묻는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미가 선지서를 인용해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에 대해 조언한다(마 2:6, 미 5:2126)). 헤롯은 동방의 박사들을 불러서 아기 왕을 찾으면 자신도 경배하기를 원하니 알려달라고 조용히 부탁한다.
별이 다시 나타나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한다.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다. 그날 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서 고국으로 돌아간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심히 노한 나머지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참작해 베들레헴과 그 인근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미만의 영아(嬰兒)들을 일제히 몰살하라는 반(反)인륜적인 살해명령을 내린다(마 2:16). 이 살해명령 또한 겉으로만 보면 권좌의 위협을 느낀 헤롯이 자신의 왕권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하나님의 구속계시와 깊이 연관이 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정쟁(政爭)의 양상인 세속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언약의 씨’를 향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사단의 적극적인 시도가 일단 ‘사전 저지’라는 차원에서 실패하게 되자, 이제는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을 향해 직접적으로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127)
하나님께서는 한 발 앞서 이런 위기에 대처하신다. 헤롯이 살해명령을 내리기에 앞서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해 이르기를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잠시 피할 것을 전한다(마 2:13). 요셉 가족의 출애굽 사건은 헤롯이 죽고 그의 아들 아켈라오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된 후에 이루어진다(마 2:19-23). 요셉 일행은 주의 사자의 지시를 따라 베들레헴 지역이 아닌 북쪽 갈릴리 지방 나사렛에 정착하게 된다.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은 여기 갈릴리 나사렛에서의 아기 예수님의 성장배경과 관련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처럼 사단은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가 세상 가운데 오시기 전 사전공략에 실패하자 직접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쏘아댄다. 이때 유다의 분봉왕 헤롯이 사단의 도구로 이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의 손길이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피신시켜 이번에도 헤롯의 무자비한 살육으로부터 안전히 생명을 보존시켜 주신다.
이런 식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3:15)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관계는 오랜 세월동안 간단없이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세상역사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과 충돌을 반복하는 가운데 마침내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이 아니고는 결코 지속될 수 없었던 여러 차례의 숨 가쁜 난관과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우여곡절을 극복케 하심으로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로 세상 가운데 보내 주셨다. 창세전 구원협약 속에 약정되었던 '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구속사상의 실체가 피조세계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해 암시되었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양한 인물들로 예표되었다가, 아기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마침내 참 모습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것이다.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에 따른 공생애 사역을 통해 마침내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인 사역을 통해 인간의 죄는 도말될 것이며 이를 믿음으로 수납하는 모든 자들을 죄 없다 하시고 의롭다고 인(印) 쳐 주셔서 구원의 은총을 덧입혀 주실 것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128)
(6)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마 4:1-11)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에 앞서 세 번에 걸쳐 사단의 시험을 받으시는 사건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사전 저지하려는 사단의 의도적인 계략이 농후하다.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갈등의 역사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관련해 여전히 적용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겪는 시험 속에는 몇 가지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첫째, 아담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 빠뜨리게 해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한 사건을, 예수님께서 아담의 실체(롬 5:14)129)로 오셔서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가운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의 새 생명의 길로 이끄신다는 사실이다.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실 것에 대한 확실한 보증의 의미 말이다(롬 5:18-19). 특별히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심에 있어서 성령님에 의해 내몰아졌다는 지적은 이 사건이 구속사적인 의의를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사단의 시험을 승리로 이끄시는 것을 통해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온전히 성취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전제 될 때, 사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가능한 창 1:28 속에 담긴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을 정당하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 결과 당초 계획했던 대로(창 1:28) 진정한 여자의 후손들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가 창조세계 속에 무한히 잠재된 하나님의 창조적 가능성들을 사회/문화적 활동의 전개를 통해 개발해 냄으로 구체화되며 가시화 될 것이다.130) 이와 관련해 팔머 로벗슨은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언급하면서 "구원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에덴동산으로 돌아감으로 실현되지 않을 것이며, 천국의 새 이미지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사는 첨단문명도시의 이미지로 나타날 것"을 피력한다.131)
이런 관점에서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세상 역사 속에서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닌'(not yet)의 이중적인 구조를 띠면서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양면성을 가지고 현재진행형으로 진전될 것을 추정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마 12:28에 기록된 대로 성령을 힙 입어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의미하는 바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천상적 능력의 발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런 사실을 명백히 뒷받침 해 준다.132)
둘째, 구약교회로서 역사적 이스라엘의 40년 광양생활의 불순종의 역사를 회복시키는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교회(행 7:38)의 자격을 가지고 광야에서 40년간 시험을 받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 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신 8:2).133) 본문의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가나안 정탐사건(민 13:1-2, 25-26절)은 비록 저들의 요청을 허락하시는 방식으로 진행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신 1:19-23) 본질상 가나안을 진격하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진위를 가늠해 보려는 하나님의 선의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주어진 사건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신 8:2). 마치 백세(百歲)에 주셨던 언약의 씨인 이삭을 어느 날 갑작스럽게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던 사건처럼 말이다(창 22:1-2). 왜냐하면 가나안 정복은 오직 하나님과 그 분의 약속의 말씀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의 방식을 통해서만 수납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광야’라고 하는 장소가 갖는 상징적 성격과 의미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40’일이라고 하는 시험기간에 대한 상징적 의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광야 40년간의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시험과 연관시켜 해석돼야 할 부분이다. 이런 식으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연속선상에서 예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40년 동안의 시련의 역사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신명기 말씀(신 8:2-3, 16절)에 의지하여 다시금 이와 같은 방식을 재현하심으로 참 이스라엘인 신약의 성도들 안에 과거의 실패를 성공으로 회복시키려고 스스로 참 이스라엘인 교회의 대표자의 자격으로 마귀의 시험에 참여하신 것이다.
셋째,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단의 시험은 불가피하게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두 계열간의 적대적인 투쟁과 반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아기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시(時), 사단은 헤롯을 충동해 두 살 미만의 영아들을 모조리 살해함으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간악한 음모를 꾀했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으로 아기 예수님을 애굽으로 사전에 피신시키심으로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기게 주선해 주셨다.
그러나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본 사건의 개요는 이제까지의 사태와 경우가 좀 다르다. 사단이 먼저 접근한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을 사단의 시험에로 우정 인도하셨다. 정공법을 쓰신 것이다. 선의적으로 말이다. 곧 사단의 시험을 적극적인 승리로 이끌게 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공생애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케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마 12:29).134) 이 과정에서 성령께서 예수님 안에 충만히 임재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권세 있게 수행케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직무를 넉넉히 수행하셔서 과거 아담의 시절부터 시작하여 광야 교회와 이스라엘의 신정왕국 역사를 거치는 동안 늘 일삼아 왔었던 일체의 죄로 인한 불순종의 역사가 새롭게 회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단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심으로 후에 공생애 사역 중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사역의 의미를 마 12:28-29을 통해 분명하게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135) 결국 본 말씀을 상고해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 나타난 각종 귀신들에 대한 예수님의 축사(逐邪)사역은 결과적으로 여기 광야에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신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십자가의 사역에로까지 확장됨을 전망케 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곳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통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회복시키셨다. 이후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사실을 통해서 첫 사람 아담이 초래시킨 죄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셨다. 따라서 전자의 순종(마귀의 시험에 승리)은 첫 언약의 머리된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는 순종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졌고, 후자의 죽음(십자가의 대속사건) 역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린 셈이다.
새 이스라엘, 혹은 참 이스라엘로서 신약교회공동체(갈 3:29, 6:16)는 이상의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확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지상의 가시적인 유형교회(지역교회)로 하여금 본질상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은 실로 예수님의 위대한 공로다.136)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역사성과 그 본질적인 의미를 떠나서는 오늘날 가시적인 교회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직무는 교회로 하여금 참 아담, 참 아브라함의 자손, 참 이스라엘, 참 다윗의 아들 및 참 성전이 되게 하신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한다. 바로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관심과 애정 및 섬김과 경배의 도리는 그야말로 우리의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바칠만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행20:24).137) 신앙의 당위적인 명제의 성격을 띠고서 말이다. 무익한 종의 고백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눅 17:10).
(7)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롬4:25)
여자의 후손언약의 성취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절정을 이룬다.138)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죄인 아닌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심은 표면적으로는 성전모독 죄와 하나님의 아들을 자칭한 불경죄로 말미암는다. 이 일에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합세했다(행 4:27). 특별히 이 일에 한 때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 포함되었던 가룟인 유다가 배신해 일조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줄 방책을 의논하매”라고 기술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관련해 유다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결정적인 일조를 담당했음을 지적한다(눅 22:3-4, 요 13:2). 결국 유다의 고발로 예수님은 체포돼 법정에 서게 되고, 일단의 무법자들에 의해 마침내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일단의 무리들은 사단의 적극적인 충동에 의해 깊이 좌우되었음을 문맥을 통해 충분히 확인하게 된다. 십자가상에 높이 매어달린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단과 그 졸개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비웃으며 조롱하던 일단의 무리들과 더불어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창3:15)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과 뱀 간의 적대적 투쟁사건의 절정을 보게 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미혹사건 이래로 줄기차게 역사 속에서 전개돼 왔던 두 계열간의 극한 투쟁과 대립의 역사가 바야흐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결정적인 고비를 맞는 듯하다. 지금껏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을 통해 위기를 승리로 반전시켜 오셨던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과 간섭하심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예언된 “뱀의 머리가 상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었다. 단지 사흘이다. 사흘 후에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살아생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사흘 후에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마 16:21, 17:23, 20:18). 부활하신 것이다. 스스로 선언하신 예언의 말씀을 좇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후손언약 속의 예언과 예수님의 죽음 및 부활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다름 아닌 예수님의 수욕과 고난에 이은 죽음과 깊이 연관돼 있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사단의 패배를 통해 절정을 이룰 것을 은유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결정적인 반전의 역사를 목격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의 반전은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신 영(永)단번(once and for all)의 구속사역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히 9:12, 10:12-18).
여자의 후손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통해 성취의 절정에 이른다. 더 이상 사단에 의한 전면적은 불가능하다. 십자가에서 사단의 머리는 치명상을 당해 사실상 완패했다(계 12:7-9, 20:1-3). 다만 예수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때까지 승리가 보장된 국지전(局地戰)의 성격을 띤 전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139)계시록은 이상의 사실을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감금당한 용의 이미지(계 20:1-3)와 용을 대신해 교회와 영적 전쟁을 벌이는 용의 하수인 두 짐승(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 계 13장)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사용하면서 기술한다.140) 그러나 그 결국은 백마 탄 자의 이미지(계 19:11)로 등장하는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용과 두 짐승이 불못에 던져지는 종말적 심판을 통해 일단락된다(계 19:20, 20:7-10).
5. 창세기 1-3장에 함의된 신적 언약의 상호 연계성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언약적 구속사(covenantal redemptive history)의 성격을 띠고 진행된다. 계시라 함은 창세전 영원세계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수립된 영원하신 목적으로 우주 만물에 대한 작정과 구원 계획을 성경기자들을 통해 포괄적으로 세상 역사 속에 드러내신 사실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언약을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의미이다. 본 논증에서 계시의 총체적인 주제를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으로 정리한 바 있다.
한편 구속사란 창세전 구원협약의 근간을 이루는 '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표현에 기초하는 사상이다. 즉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 된 인류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구속으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들을 통해 주님의 몸 된 교회공동체를 이루시는 가운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종말론적 영광을 받으시고자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사역을 가리킨다(엡 1:4-6, 사 48:11, 겔 36:22).
이런 일련의 상호 불가분의 계시적 정황상, 계시사와 언약사 및 구속사란 표현은 본질에서 동질성(homogeneity)을 띠면서 궁극적인 목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 및 하나님의 영광구현을 향해 서로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 구속사를 예시(豫示)적으로 진행해 나가기 위해 앞서 세상 가운데 드러내신 계시의 도구로서 모형적이며 예표적인 성격을 띤다.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언약들은 성격상 다양성을 띠면서도 기원이 신적인 것으로 인해 통일성을 지향하는 가운데 상호 밀접하게 연계된 상황에서 갱신, 확장,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창조-타락-구속이란 중심 주제들이 신적 언약을 매체로 상호 깊이 연관돼 있음을 바르게 확인하게 될 때, 창세 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삼위하나님의 구속계시의 경륜(엡 1:3-14)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엡 1:3-14은 창세전 하나님의 계획으로, 창 1-3장은 창세후 하나님의 집행이란 상호 인과관계의 연계성을 띠고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나머지 성경역사 전체를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일관성 있게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와 지침을 제공해 준다.
(1)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창 1:28) : 창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을 따라 세상을 지으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거주케 하신다.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신다(창 1:28, 2:15).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인 통치권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성례전적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막중한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창 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실체가 이랬다. 이는 인간의 사회/문화적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함의한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문맥 속에서 암시적으로 시사한다. 문화명령에 암시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창조계 속에 잠재돼 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발전의 무한한 가능성들을 인간의 선의적인 연구/개발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간파하게 된다.14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대리권자인 사람이 경영한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창 1:28). 역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는 게 성경적 관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명령에 담긴 창조언약의 본의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후손들을 통해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구속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엡 1:4-14)을 손수 주관해 가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담긴 은혜성의 언약으로 정리될 수 있다.
(2) 선악과 금령(선악과 언약)인 아담언약(창 2:17) : 타락
창 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상징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에 담긴 선악과 언약의 비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선악과 금령은 죽음을 조건으로 순종을 강력히 요구함으로 아담과 하와의 피조성을 상기시킨다. 에덴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으로 먹을 수 있으나(창 2:16) 선악과는 임의로 먹을 수 없다는 제한조건을 둠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창조주의 뜻 안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금령(선악과 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근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피조물인 사람의 본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명령을 자원해 지키는 의존적인 관계를 통해 확증됨을 가리킨다(전 12:13). 선악과 금령은 죽음을 전제로 순종을 요구하고 있으나 순종을 조건으로 영생을 동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율법에 대한 순종이 의와 생명을 보장할지라도(롬 7:10, 10:5, 눅 10:28, 레 18:5, 신 6:25), 성경이 말하는 율법의 본래적 기능은 인간이 죄와 무능과 심판의 불가피성을 깨닫고 메시아의 대속적인 구속을 기대케 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에 집중되기 때문이다(갈 3:22-25, 롬 3:19-20). 따라서 영생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거듭남(born again)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이다(롬 3:20-22). 더욱이 창세전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이 '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구속사상과 상호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논리상 선악과 금령은 순종을 통한 자력구원이나 자력영생을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증하고 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당시 아담과 하와는 비록 무죄자의 신분으로 창조되었을지라도 땅에서 나왔으며 흙에 속한 자로서 본질상 순종을 통해 자력으로 영생의 생명을 취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는 게 성경의 관점이다(고전 15:47-50).142) 그러므로 당시 비록 아담이 무죄자로 지음받았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필요성을 미래지향적으로 요구받고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후에 선악과를 먹음으로 타락한 이들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 것을 막기 위해 생명나무에로의 길을 천사들로 하여금 차단시킨 사실(창 3:22-24) 속에서 영생의 주제는 처음부터 생명나무와 관계되었음을 암시해 준다.143)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서 선악과 언약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게 된다. 창 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이다. 17절의 선악과 금령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증거한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된다(창 2:19-20). 아담은 각종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命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생물들의 본성에 근거해 지어준 것이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과 피조물에 대한 대리적인 통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확증시켜 준 경우이기도 하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와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된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하면서 동시에 17절에 근거해 철저히 제한시킴으로 하나님의 뜻을 적극 좇아야만 했다.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제한적으로 선용하는 데서 인간의 존재이유와 안식의 삶이 보장된다는 것이 창조적 안식의 근본 원리다(창 2:2-3).
그런 의미에서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아담과 하와 및 이들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창 2:17의 선악과 금령에 적극 순종하는 방식을 좇아 성취될 것이 자명하다. 이를 위해 순종을 통해 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주신 것이 선악과 금령의 본의인 셈이다.
(3) 아담의 범죄와 원복음인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 구속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유 6절, 벧후 2:4, 딤전 3:6, 사 14:12-15)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이다(요12:31, 16:11, 마 4:8, 엡 6:12).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靈界)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邪慾)을 채우고자(유 6절, 벧후 2:4, 사 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한다.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한다. 아담과 하와가 이 시험에 미혹된다(창 3:1-6). 에덴에 죄가 유입된다. 에덴은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정체성을 잃게 된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이다. 하나님과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 버린다. 이들은 선악과 금령 속에 형벌로 주어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결과적으로 창 1:28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위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무효화된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란 문제가 제기된다.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없는 상황이다. 하나님은 아담 부부와 이들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신다. 반면 창 2:17의 선악과 금령은 자체 속에 조건적인 단서조항을 갖고 있기에,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죽음의 형벌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에게 죽음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그렇게 될 때, 창 1:28의 문화명령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 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하나님의 딜레마란 표현은 스토리의 전개상 하나님의 의인화(personification)를 위해 임의적으로 도입한 신인동형동성(anthropomorphism)론의 원리에 근거한 작위적인 묘사이다.144)
하나님의 딜레마 안에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은 은혜성에 근거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향해 계속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반면 선악과 금령(창 2:17)은 아담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되는 양상을 고려한 데서 나온 수사(修辭)적인 표현이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중도에서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다. 더욱이 선악과 금령은 독립적으로 보면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을지라도 신적 언약의 상호 연계성이란 측면에서 본질상 창 1:28의 창조언약의 은혜성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질 수는 없는 상황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창 1:28의 언약이 식언(食言)이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한다(민 23:19). 하나님의 언약은 그 기원이 창세전에 맺으신 구원협약(엡 1:4-14)에 근거하고, 구원협약은 신적 언약의 원형이며 근간으로 작용하기에, 어떤 경우라도 무효화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자체 안에 이미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 3:15의 소위 여자의 후손언약을 해결책으로 제시해 주신다. 창 3:15에 언급된 여자의 후손(the seed of the woman)에 관한 예언이 언약의 성격을 띠는 것은 창세기 1-3장 사이의 문맥 속에서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부부의 죄를 구속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세상역사를 통해 구속사를 전개시켜 나가는 원복음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런 이유로 한편으로 창 2:17의 선악과 금령을 어긴 이들의 죄책(罪責)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 1:28의 창조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셈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언약은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극복케 해 주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언약을 가리켜 복음의 원형, 곧 원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는 구속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본문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그'로 일컫는 자의 사역의 핵심은 신약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의미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로 호칭되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실상 사단을 근본적으로 패배시킨 십자가 사건을 뱀과의 적대적인 투쟁의 이미지를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갈 4:4-5, 골 2:14-15, 렘 31:22).145)
(4)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 재창조 사역
당초 창조원리(창 1:28)에 근거해 아담부부와 이들의 후손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인해 자연히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창 3:15)를 통해 재정립되기에 이른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표인 하나님 나라 건설이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갱신(更新) 될 뿐이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엡 1:4, 딤후 1:9, 행 2:23, 4:27-28).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 11:32).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3장의 편집구도인 창조-타락-구속(재창조)의 틀은 엡 1:4-14의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의 내용과 구원협약의 진행방식인 '선 언약-후 성취'의 언약적 구조 속에서 상호 밀접하게 인과(因果)관계와 신학적 상응성이 성립된다.
이상 창세기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구속사적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된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른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선(先)언약-후(後)성취의 방식으로 언약을 도구삼아 진행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실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눅 3:23-38)과 아브라함 및 다윗(마 1:1)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이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이며 구속사는 세속사를 방편삼아 진행된다는 계시사 성취의 원리가 이런 양자 간 불가분의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된다.
이런 의미에서 창세기 4장에 기록된 가인에 의한 아벨 살해사건은 단순히 제사의 열납 유무와 관련해 형제간에 일어난 시기질투의 결과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관점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예언된 두 계열, 곧 여자의 후손(아벨)과 뱀의 후손(가인) 간의 상호 적대적인 투쟁과 대립 및 갈등과 반목의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표출돼 충돌한 계시사적인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본질상 성취의 절정을 맞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창 1:28에 약속된 창조언약으로서 문화명령은 마 28:19-20의 대위임명령(구속의 완성, the Great Commission)을 통해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향한 구속사의 길을 열어 놓은 셈이 된다. 오늘날 지역교회의 존재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초한다. "그의 나라(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하나님의 뜻)를 추구하는 삶을 위해서 말이다(마 6:33, 신앙생활의 목표). 성경의 계시 역사를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으로 접근해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6. 구원협약과 창 1-3장 사이에 함의된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
구원협약(엡 1:3-14) 창 1-2-3장
계시의 성격 원인(계획) 결과(실행)
계시의 목표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
계시의 중심 그리스도 안에서(구속사상) 여자의 후손(구속사상)
계시의 방편 언약 언약
언약의 방식 선 언약(원형) 후 성취(진행:창조/타락/구속)
언약의 성격 은혜성 은혜성
(1) 계시의 성격 : 원인(계획)과 결과(실행)
구원협약은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을 통해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의 거듭남과 인침의 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구속하시는 절대주권적인 사역을 중심 골자로 하는 삼위하나님의 약정을 말한다. 본 약정은 어떤 의미에서 성부를 협약의 수립자로, 성자를 집행자로, 성령님은 적용자로 분류하면서 구속사역의 분할이 있음을 문맥을 통해 시사한다(엡 1:3, 7, 13절).146) 반면 창세기 1-3장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조적인 틀을 통해 창세전에 수립하신 삼위하나님의 구원협약이 세상을 무대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는 과정을 소상하게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기술한다.
그런 의미에서 피조세계는 구원협약의 구체적인 실행을 위한 현장과 무대로 기능한다. 6일 창조사역은 이어서 무대에 등장하게 될 주연, 조연, 엑스트라 및 각종 소품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 중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여섯째 날에 지음을 받은 사람은 단연 피조물의 절정과 창조의 면류관으로 하나님의 창조 무대에 주연급으로 부각된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수립하신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에 근거해 분명한 의도와 전략을 가지고 창조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다. 매일의 창조사역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자평하신 본의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4, 10, 12, 18, 21, 25, 31절). 하나님께서 당초 계획하셨던 창조목적대로 만물이 피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과 기쁨에 대한 표출인 셈이다.147). 이런 표현은 심미적이기보다는 창조의 목적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다.148) 하나님은 이들 부부에게 '문화명령'을 복과 언약의 방식으로 약속해 주심으로 피조물에 대한 신적 통치권을 위임하신다(창 1:28). 이후부터 아담부부는 에덴동산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리하고 다스리면서 창조계 속에 잠재돼 있는 무한한 하나님의 창조적 가능성들을 적극 개발해 나감으로 피조세계가 명실상부한 하나님 나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책임적 존재로서의 사명을 적극 담당해야 했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과 창세기 1-3장에 기술된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상호 관계를 고찰할 때, 계시의 성격상 전자는 원인과 계획, 후자는 결과와 실행 내지는 집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先) 계획과 후(後) 실행'이라는 인과관계의 원리 속에서 목적달성을 위한 현장과 도구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돼 천지창조 사역이 수반되었다는 관점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3장을 구성하고 있는 창조-타락-구속의 일관된 주제들은 창세전 구원협약의 구체적 실행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때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본의를 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2) 계시의 목표 : 하나님 나라
두 본문이 인과관계의 원리 속에서 상호 불가분의 신학적 연계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양자 간 자체 속에 함의된 계시의 목표 또한 동질성과 통일성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정왕국인 하나님 나라 사상이다. 먼저 타락 전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의 주제와 관련해 몇 가지 측면에서 그 실상을 규명해 봄으로 창세전 구원협약의 목표 또한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① 문화명령에 담긴 하나님 나라 사상(창 1:28)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은 성격상 편무(偏務)언약의 성격을 띤다. 아담의 동의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담에게 복으로 베푸신 은혜언약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창조언약은 아담부부와 이들 후손들을 통해 피조물들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잘 다스리고 관리할 뿐 아니라, 특별히 땅을 정복해 나갈 것을 강조한다. 땅의 정복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기인된 인간의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능력을 발휘해 하나님께서 창조계 속에 감춰 놓으신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가능성들을 개발해 선용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하나님 나라를 점진적으로 건설해 가는 전인적인 활동을 가리킨다. 이를 신학적으로 '문화명령’(cultural mandate),149) 또는 위임명령(commission mandate)150)이라 부른다. 아담 부부는 이 명령에 적극 순종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신해 만물을 그 분의 선하신 뜻 가운데 다스리고 관리하고 보존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부여받았다. 본 문화명령의 내용을 세밀하게 탐구해 보면 어떤 심오한 사상에 접촉되게 된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이다.151)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개념 속에는 이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가 반드시 요구된다. 첫째는 나라의 구성원으로 ‘백성’의 필요다. 둘째는 이들이 살아갈 장소(땅)가 요구된다. 셋째는 이들을 구속하고 다스릴 ‘통치권’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를 일컬어 ‘나라의 3요소’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에게 복으로서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이들 세 가지 요소가 함축적으로 포함돼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백성과 관련해,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약속하신다. 본 약속이 의미하는 바는 아담부부를 통해 수많은 ‘자손’ 곧 하나님의 언약백성을 주시겠다는 확약이시다. 둘째로 백성들이 거주할 땅과 관련해, 땅에 충만할 것과 땅을 정복하라고 약속하신다. 이는 아담의 후손들이 여러 민족과 나라를 이루는 가운데 세상 도처에 흩어져 살면서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다양한 사회/문화적 활동을 전개시켜 나감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문화를 창달해 나갈 것에 대한 강력한 주문이시다. 셋째로 왕적 통치권과 관련해,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신다. 이는 만물에 대한 왕으로서 통치권의 약속을 가리킨다.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는 대리적인 통치권 말이다. 세상 나라의 본질이 하나님 나라이며, 세상 왕들의 정체성이 본질상 하나님의 대리적인 통치권자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이 이런 원리에 근거한다(롬 13:1).152)
이상의 사실을 고려할 때, 아담 부부에게 복으로 주신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내용(창 1:28)은 성격상 이들의 후손들을 통해 어떤 특정한 한 나라를 친히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본 문화명령을 일방적으로 명하신 당사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감안하면 이 나라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임에 틀림없다.
결과적으로 아담에게 주신 언약적 복(창 1:28)의 구체적인 내용은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 부부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신해 에덴동산을 관장하게 하신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 이들의 후손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신정왕국을 세우시겠다는 데 관심의 초점이 모아진다. 이들에게 은혜로 주신 언약적 복의 내용 속에 담긴 ‘나라의 3요소’가 이런 사실을 객관적으로 증거한다. 결국 창 1:28의 문화명령 속에 담긴 창조언약의 실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 사상인 셈이다.
② 에덴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위에서 에덴동산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처음 아담에게 주신 복으로서 문화 명령적 창조언약(창 1:28) 속에 담긴 나라의 삼요소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타락 전 에덴동산을 구성하고 있는 외적인 요소들을 통해 확인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런 작업에 몰두하는 것은 이미 천명한 대로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을 규명하는 것을 통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의 원형이며 기원(起源)인 창세전 구원협약의 목표 또한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됨으로 양자 간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맺고 있음을 확증하기 위함이다.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동산에는 인류의 시조로서 아담 부부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친 백성으로 존재했었다(백성). 이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은 창조의 면류관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과 화목의 교제를 나누며 안식의 삶을 만끽했었다. 이들에게 에덴동산은 부족함이 없는 저들만의 완벽한 삶의 터전이었다(땅).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 죽음의 형벌을 죄책(罪責)의 대가로 선언하시고(19절) 이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시는 것을 통해(23절) 에덴을 죄의 세력으로부터 철저하게 보호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에덴동산은 명실 공히 아담의 기업으로서 땅, 곧 하나님 나라를 표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나라의 3요소 중 왕적 통치권과 관련해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에게 맡겨진 피조물들에 대한 통치권은 어디까지나 위임된 대리적 통치권이다. 실권은 여전히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존돼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명령하신 선악과 금령(창 2:16-17)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왕권). 하나님 나라는 왕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분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통치적 개념 속에서 그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은 말씀의 권세가 능력 있게 시행되는 것을 통해 비로소 확인된다. 당시 선악과 금령은 이런 하나님 나라의 통치원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별화된 정체성을 띠면서 하나님 나라의 왕적 통치권을 강력히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은 창 1:28의 문화명령과 관련해 아담 부부를 선의적으로 구속(拘束)해서 자율적 순종을 촉구함으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통치권을 정당하게 집행하시려는 데 있다. 은혜의 은혜 됨은 수혜자(受惠者, receiver)가 시혜자(施惠者, giver)에게 자원해서 순종하는 방식을 통해 비로소 은혜의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약 2:22).153) 이런 관점에서 은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체 속에 나름대로의 집행적 요소로서 순종이 강력히 요구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약 2:17, 22, 26, 롬 16:26, 요 14:15, 출 20:1-17, 골 3:1-3).
이상의 논증을 통해 에덴동산은 외적인 구성 요소로 볼 때, 나라의 삼요소인 ‘백성과 땅과 왕적 통치권’이 분명히 존재해 시행되는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목적삼음으로 총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뚜렷이 현시하고 있음을 본다. 결국 아담에게 복으로 베푸신 창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과 에덴동산을 외부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삼대 구성요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가 에덴동산 속에 구체적으로 현시되고 있음을 확증시켜 준다.
③ 에덴의 내적 성격(character)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이번에는 에덴동산에 내재돼 있는 구조적 성격을 통해 에덴에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로마서 기자는 로마서 14장을 통해 신앙공동체 안에서 교회원들 간에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판단과 비판적 행동에 대해 경계시킨다.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짐 지는 가운데 하나 됨을 위해 힘쓸 것을 권면한다(롬 14:1-3).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있는 모습 그대로의 상태로 받아 주셨다는 사실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내적인 것이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통해 그 진정성이 확인된다. 이는 철저히 성령의 통치와 인도를 받는 삶을 가리킨다. 로마서 기자는 이와 관련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롬 14:17). 하나님 나라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및 이생의 자랑을 좇아 살아가는 세상지향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천상지향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전인적인 삶을 가리킨다(갈 5:22-23).154) 결국 하나님 나라를 특징짓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가 원천적으로 해결된 사실에 근거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영적 교제가 온전히 회복된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롬 5:9-11).155) 곧 타락 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누렸던 전인적인 교제의 회복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세상의 관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세상의 판단기준은 주로 외부적으로 드러난 가시적인 요소들을 통해 사물을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반면 하나님 나라의 경우는 내적이고 본질적인 속성을 통해 사물의 진정성을 분별한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보다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설명된다(살전 2:4, 히 4:12, 롬 8:27). 결국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의를 바르게 인식해서 이를 믿음으로 수납해 전인적으로 추구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진다(롬 10:2-3).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격과 특징을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설명하는 로마서 기자의 관점을 통해 이들 하나님 나라의 내적 요소들이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동산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에덴동산은 처음 창조 때부터 하나님 나라를 모형적으로 증시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적어도 죄가 유입되기 전, 에덴의 모습은 천국의 실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표출해 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반영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내재된 삶의 성격(계 21:4-5, 22:1-5)을 과거 에덴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그렇다면 로마서 기자가 지적하고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어떤 모습으로 에덴동산에서 발견되는지 둘 사이에 내재돼 있는 신학적 상응성(correspondence)을 통해 확인해 보자.
첫째, 아담 부부를 포함해 에덴동산에 존재하는 일체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상호 ‘조화와 균형과 질서 유지’를 통해 풍성한 교제와 화목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는 표현 속에서 이런 사실이 구체적으로 뒷받침된다. 이런 표현은 ‘심미(審美)적이기보다는 목적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지칭하는 말이다.156)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와 운행이 창세 전 하나님의 계획과 본의대로 진행되고 있음에 대한 만족감의 표출인 셈이다.157)
둘째,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부부와의 ‘정상적인 수직적 관계유지’와 ‘교제의 원활함’이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화목의 특성을 극명하게 계시해 준다. 아울러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범죄 후에 발견되는 상호 적대적인 조짐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모든 피조물들이 대리적으로 수행되는 아담의 통치권에 자연스럽게 순응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증거이다. 이런 사실의 징후는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 2:19-20)는 표현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셋째, 아담과 하와의 ‘무죄상태’는 하나님의 공의가 적극적이고 권세 있게 에덴동산에서 시행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런 사실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을 규정짓는 가장 강력하고 우선적인 내적 증거로 작용한다.
넷째, 6일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총평을 하시는 하나님의 대(大)만족하심(창 1:31)의 표현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안식하심’(창 2:1-3)의 사건을 통해 의와 평강과 희락의 천상적 요소들이 동시적이고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본문의 설명에서 하나님의 ‘만족’(보시기에 좋았더라)은 하나님의 ‘안식’을 가능케 하는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 순서적으로도 그렇다. 따라서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의 개념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나님의 만족하심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만족은 목적대로 창조된 사실 뿐 아니라, 창조 목적대로 온갖 피조물들이 본성을 좇아 발휘되고 있음을 내포한다. 이후 아담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화목의 관계가 깨지고 이로 인한 불화의 초래는 급기야 온 피조물에까지 부정적인 영향이 파급되는 것을 통해(창 3:17; 롬 8:19-20)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은 동시적으로 훼방을 받는다.
결국 하나님의 만족은 하나님의 안식과 밀접히 연결돼 에덴동산은 명실상부하게 하나님 나라를 적극 반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안식 개념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반영해 내는 결정적인 요소로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안식은 동질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신명기서 기자는 후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경험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삶을 설명하면서 가나안 땅에서의 안식개념과 일치시켜 설명한다(신 12:9-10). 여호수아서 기자는 일부 정복과 일부 도면상의 분배를 통해(수 18:1-10)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이 본질상 성취된 것으로 기술하면서 동일하게 안식이란 용어를 사용해 신명기서의 예언과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뒷받침 한다(수 21:43-45).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상의 안식개념이 총체적인 성격을 띠고 명실상부하게 성취된 사건이 다름 아닌 다윗과 솔로몬 통치 하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립이다. 열왕기서 기자는 특별히 솔로몬 통치 때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신정적 정체성(Theocratical Identity)을 ‘안식의 편만한 도래’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당시 통일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신정왕국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가장 풍성하게 발휘하고 있음을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더라"는 비유적 표현을 통해 공식적으로 천명한다(왕상 4:25).158) 미가와 스가랴 선지자가 동일한 표현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로 비유된 삶의 성격을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연관시켜 사용하는 것을 통해 이런 사실이 분명하게 확증된다(미 4:4, 슥 3:10). 결국 열왕기서 기자는 이런 방식의 표현을 통해 솔로몬 통치 때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정체성이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 및 다윗언약이 총체적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신정왕국을 구체적으로 현시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상은 후에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눅 6:5)으로 자증하심으로 안식의 개념이 신구약을 관통해 하나님 나라와 불가분의 연관성을 맺고 있음은 물론,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고 있음을 시사하신다.
에덴에서의 창조적 안식의 개념은 만물이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된 가운데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경영되고 섭리된다는 데서 찾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쉬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로마서 기자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대로 만물이 처음 창조의 원리를 좇아 섭리적으로 운행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은 실현가능하다. 안식의 본래적인 의미 또한 이런 사실의 전제 속에서 찾아진다. 이런 관점에서 처음 에덴동산의 내적이고 외적인 상태와 성격은 하나님 나라를 현시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때는 아직 인간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 방해받지 않던 시기였다. 이런 식으로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상태가 풍성히 발휘되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진정한 의미의 천상적 안식을 만끽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 4가지 측면에서 살펴 본 에덴의 내적 특성(의/평강/희락/안식)들이 로마서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특징적인 측면에서 상호 유기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는 에덴동산이 신약의 복음의 빛 하에서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비록 모형적이고 예표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풍성히 계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당시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를 단지 모형적으로 계시하고 있었다는 관점은 이후 죄의 유입으로 인해 에덴동산의 천상적 환경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이상 본래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으로부터 추방되고 생명나무에로 이르는 길도 차단된다. 온갖 피조물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창조의 면류관이었던 사람과의 관계성마저도 단절되고 상호 배타적으로 돌변한다(창 3:16-24, 롬 8:19-22).
이상의 논증을 통해 아담 부부의 범죄 전 에덴동산은 다양한 관점에서 명실상부하게 하나님 나라를 증시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먼저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 속에 담긴 복의 내용들 곧 나라의 삼요소인 아담 부부의 후손, 땅, 그리고 대리적인 통치권의 보장 등이 하나님 나라를 총체적으로 지향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 나라를 외부적으로 구성하고 있었던 삼요소인 아담부부(백성)와 이들의 거처인 에덴동산(땅)과 이들 부부를 주관했던 선악과 금령에 담긴 하나님의 왕적 통치권의 발휘가 에덴동산을 명실 공히 하나님 나라로 증거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내적 특성인 의와 희락과 평강의 삼요소(롬 14:17)가 아담 부부의 범죄 전 에덴의 상태 속에서 하나님의 만족과 안식에 근거해 하나님과 아담부부와 피조물 간의 삼각 구도 속에서 막힘없이 교감과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당시 에덴이 명실 공히 하나님 나라로 존재하고 있었던 사실을 확증하게 된다.
이 처럼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해, 에덴동산의 상태가 다양한 측면에서 하나님 나라로 존재할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과관계(선 언약/후 성취)의 원리 속에서 하나님 나라 사상의 뿌리와 원형을 창세전 구원협약 속에서 찾아야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님의 인침과 적용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려는데 집중된다(엡 1:4-14).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존전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송축하며 경배드리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배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전망하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구원협약 속에 배태돼 있던 하나님 나라의 씨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 에덴동산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 모습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화명령을 통해, 외부적인 요소들을 통해, 그리고 내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말이다.
따라서 비록 양자 간에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문자적으로 확인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주제 속에서 그 의도성이 상호 연계되고 일치되는 것을 통해 두 사건 사이에 공존하고 있는 계시의 최종 목표가 종말적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3) 계시의 중심 : 구속사상(그리스도 안에서/여자의 후손언약)
창세전 구원협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취시키는 결정적인 동인과 척도는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이다(엡 1:4). 그리스도 안에서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저희 죄로부터 구원해 당신의 언약백성을 삼으셔서 하나님은 저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정체성을 총체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관용구적 표현이다.
한편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구속사상과 결부시켜 해석하게 될 때, 논리적으로 선행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이 제기된다. 창조와 타락사상이다. 창조에는 구원협약의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현장으로서 창조의 배경(하늘과 땅)과 내용물로 구성될 수 있다. 창조에 있어서 절정은 단연 인간창조에 집중될 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찾기 위함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혼제도를 주신 하나님(창 2:24)의 일차적인 목적은 인구의 증식을 통해(창 1:28)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다(눅 19:10).159)
다음으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단절과 이 영향으로 피조계 전체가 하나님의 저주가운데 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타락이 전제되지 않는 구속이란 논리상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구원협약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상은 이처럼 자체 속에 비록 문자적으로는 발견되지 않더라도 씨의 개념을 통해 논리적으로 창조와 타락이라는 중요한 두 신학적 주제를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 속에 은닉적으로 담고 있는 셈이다. 마치 한 알의 씨앗을 통해 비록 가시적으로 씨앗의 실체인 정형화된 나무나 꽃이나 풀의 모양을 확인할 수 없을지라도 그 구체적인 인자들이 씨 속에 이미 내재돼 있듯이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기 1-3장을 통해 발견되는 구조적인 틀로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신학적 주제들은 우연의 산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창세전 영원한 작정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자체 속에 내재되었던 중요한 사상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한 알의 씨앗이 심겨지고 때가 차매 마침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잎과 꽃과 열매를 맺듯이 말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부부의 범죄와 타락은 이런 맥락에서 구원협약 속에 기술된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과 논리적으로 인과관계의 연계성을 맺는다. 비록 표면적으로 아담부부의 자유의지의 오남용의 결과로 빚어진 범죄행위일지라도 논리상 구원협약 속에 암시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관점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지금까지 이를 하나님의 허용적 작정(permissive decree)으로 정의해 왔으나 앞으로 좀 더 심도있는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주제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제한주권으로 평가절하시킬 위험성의 여지가 내포돼 있기 때문이다(롬 9:14, 21절).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뱀의 미혹을 받아 타락한 아담부부에게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해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방식으로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계속 창달해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재창조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협약 속의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은 창세기 1-3장에 기술된 창조-타락-구속의 맥락 속에서 동일한 구속사상을 암시적으로 함의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통해 미래지향적으로 예시되고 있는 셈이다. 계시의 중심사상이 이런 식으로 양자 간 내재된 구속사상을 통해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4) 계시의 방편 : 언약
계시의 방편이 언약이란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신의 감춰졌던 구속의 경륜을 드러내시는 과정에서 언약을 계시수단의 방편으로 사용하셨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베푸시는 은혜와 약속에 따른 주권적 집행의 성격을 띤다. 시여(施輿)와 시혜(施惠)의 개념을 띠고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은 성자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 간의 맺은 일종의 약정이다. 구원협약이 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당신의 백성을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표명돼 있을 뿐 아니라, 선지자들의 새 언약(사 53:5-6, 렘 31:31-34, 겔 36:26-28, 37:24-28) 사상과 그 성취로서 성찬식 제정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마 26:26-28, 눅 22:19-20) 사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창 3:15)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님께서(갈 4:4) 자기 피로 영(永)단번(once for all)의 속죄를 이루어 주심으로 누구든지 이를 믿는 자마다 의롭게 되며, 멸망치 않고 구원의 영생을 얻게 해주심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신 은혜언약에 집중된다(히 10:11-18, 롬 3:21-22).
구원협약의 내용이 창조사역을 통해 피조세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선(先) 언약-후(後)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다. 이런 관점에서 아담 부부에게 문화명령으로 주신 창 1:28의 내용은 복으로 약속하신 언약인 셈이다. 문화명령 속에서 복은 언약의 내용이고, 언약은 복의 형식을 빌어 주어진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160) 문화명령을 창조언약으로 부를 수 있는 배경은 천지창조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창조와 관련해 은혜로 맺어주신 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명령이 창조언약의 성격을 띠는 것은 비록 자체 문맥 속에 언약이란 용어가 확인되지 않더라도 언약의 특징인 시혜자의 강력한 의지 표명과 수혜자 및 약속의 세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소위 다윗언약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을 통해서도 동일한 원리가 확인된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다윗의 집과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위가 영원히 견고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삼하 7:16). 그러나 본문의 다윗언약 속에서 언약의 요소는 발견되지만 언약이라는 용어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 시편 기자는 삼하 7:16을 인용하면서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으로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고 약속하신 내용을 언약의 이름으로 기술한다(시 89:3-4). 이로 보건대 비록 어떤 특정 본문 속에 언약이라는 용어가 발견되지 않을지라도 내용의 성격상 언약의 요소를 담고 있다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란 사실을 정리하게 된다. 아브라함 언약의 경우도 동일하다. 아브라함 언약으로 일컫는 창 12:1-3에서 언약이란 용어는 문자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 17:2-8의 내용은 창 12:1-3의 내용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기술하면서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고 확증해 주신다(창 17:7). 이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명을 담고 있는 창 12:1-3의 내용을 아브라함 언약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같은 맥락 속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이 은혜언약의 원형이요 뿌리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161)는 사실을 고려하면 문화명령에 담긴 복의 언약 또한 신적 언약의 특징인 상호 연계성의 원리 하에서 은혜성의 언약인 사실을 간파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 하늘에서 이루신 것 같이 이 땅 가득히 하나님의 나라를 친히 세우실 것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통해 피력하고 계신 것이다.
한편 본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은 신적 언약의 연장선상에서 선악과 금령(창 2:17)과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다시 말해 아담 부부와 이들의 후손들이 '땅의 정복'이라는 명제 속에 담긴 문화명령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과정에서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피조성과 의존성 및 자율적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시험적 기능을 담당한다.162) 선악과 금령의 성격이 시험적이란 관점은 아담 부부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의존적인 자유의지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가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163) 다시 말해 순종을 통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 속에 담긴 은혜성을 더욱 은혜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은혜를 오히려 원수로 갚을 것인가의 양자 택일의 문제가 결부돼 있다.164)
선악과 금령에 결부된 시험적 기능은 뱀이 왜곡된 말씀으로 여자를 먼저 미혹하고 남자가 이에 동참함으로 즉각 사망선고를 받게 돼 하나님과의 일체의 영적 교제가 단절되는 참담한 비극이 초래된다(창 3:7-10, 16-19). 아담 부부의 범죄로 문화명령을 계속 수행하는 데는 한계에 부딪친다. 창조언약이 일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창조언약이 아주 무효화될 수 없음은 은혜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악과 금령이 요구하는 언약적 징계로서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은 이처럼 문화명령과 선악과 금령 사이에 언약의 성격상 불가피하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은혜(무조건)와 조건 사이에 맴돌던 팽팽한 긴장감을 일거에 불식시키는 절묘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 원복음의 성격을 띤 전형적인 은혜언약의 구조를 띠고서 말이다. 즉 여자의 후손('그')으로 하여금 아담 부부의 죄를 대속하게 함으로 창조언약(창 1:28) 속에 담긴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재창조의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통해서 말이다.
이처럼 창세기 1-3장 사이에는 창세전 구원협약을 언약의 원형과 기원으로 삼고 이를 구체적으로 성취시켜 나가기 위한 일환으로 에덴동산에서 일련의 언약들이 상호 연계성을 띠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중심 주제들을 일관성 있게 연결시켜 주는 고리는 다름 아닌 언약인 셈이다.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창 1:28)과 선악과 금령(2:17), 그리고 여자의 후손언약(3:15)이 그 실체다. 이런 관점에서 이들 세 언약 간의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들에 대한 정당한 해석 여부는 창세기 4장부터 세상역사를 도구삼아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한다.165)
(5) 언약의 방식 : 선(先) 언약-후(後) 성취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서이다. 이는 성경에 하나님의 계시가 부분적으로 들어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경 전체가 성령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영감시켜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시서란 관점이다. 이때 영감이란 성령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주관하셔서 그들의 은사와 재능을 선용하심으로 이들이 쓰고 있는 것이 신적 권위와 신뢰성을 가지고 일체의 오류로부터 벗어나도록 간섭하신 것을 말한다.166)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실 때 언약을 계시전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뜻과 계획을 역사 속에 나타내신단 말인가. 우리는 위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선 언약(계획)하시고 후 성취(실행/집행)하시는 방식을 통해 역사 속에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심을 살펴보았다. 특별히 창세기 1-3장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는 아담 부부의 범죄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 사상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었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을 지속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맺으신 구원언약이다. 구원언약은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인간과 맺은 최초의 언약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암시적으로 제시된다(창 1:28). 여자의 후손언약을 원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으로 부르는 이유가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가 본 언약 속에 깊이 관여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세기 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암시된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구속자(메시아)를 세상 가운데 보내주시기 위한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출발하게 된다.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요, 구속사는 세상역사를 도구 삼아 진행된다는 신학적 명제가 이런 사실에 근거한다. 이런 관점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을 '선 언약'으로, 창세기 1-3장 속에 담긴 일련의 언약들을 '후 성취'의 틀 속에서 상호 언약적 연계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피조세계 속에서 원복음인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속사의 출발로 삼고(선 언약), 창세기 4-11장에 소개된 인류의 초기 역사와 아브람을 부르시는 창 12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신적 언약들을 '후 성취'의 틀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구속사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언약적 계시안목이 요구된다.
(6) 언약의 성격 : 은혜성
은혜란 '받을 수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호의'라고 로이드 죤스는 그의 로마서 주석을 통해 말한다. 은혜의 성격이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이유가 이런 사실과 무관치 않다.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정을 받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은 구원의 동인이요 근거로서 은혜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총체적으로 시사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가 말로만이 아니라 아들의 희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죄의 값을 지불한 사실을 함의한다(롬 5:8).167) 구원의 가치와 관련해 우리 편에서는 구원을 값없이 은혜의 선물로 받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죄의 값인 사망을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구원의 생명을 공급하셨다는 사실이다(요일 4:10).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하는 자리에서 교회를 가리켜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지칭함으로 구원의 생명의 값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값과 동등한 가치임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생명의 값은 구체적으로 얼마짜리란 말인가. 혹자의 표현대로 예수님짜리이다. 그것은 무한대의 값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무한대의 값인 성자 예수님의 생명을 기꺼이 지불하시는 방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은혜의 선물로 주신 것이다. 구원을 은혜의 선물로 받은 사실과 관련해 우리 편에서 아무 것도 지불한 것이 없이 거저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공짜의 개념으로 구원을 평가한다면 이는 예수님의 생명의 가치를 폄하하는 불경죄가 성립될 수 있다.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값도 지불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선물로 받았을지라도 하나님 편에서는 무한 가치의 아들의 생명이 지불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가 받은 구원의 성격은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의 최고의 상급으로 기능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도와 관련해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질문하시는 의도가 이와 무관치 않다. 바울이 지적하는 신령한 복의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사상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화된다는 데 집중된다(엡 1:3-6).168)
구원의 의미는 어떠한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함의하고 있는 바는 사중적인 특혜의 의미를 가진다. 첫째, 모든 죄와 죄책으로부터의 사면이다(히 9:12). 이는 원죄사상은 물론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를 포괄하는 일체의 자범죄(actual sins)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가리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고 확증시켜 준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한 속죄(영단번, once for all)를 이루셨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사상은 성도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죄인으로 정죄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속의 공효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다(롬 8:1-2). 둘째, 죄의 값인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다(엡 2:1). 사망이 죄의 결과로 비롯되었기에(롬 5:12, 6:23),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 죄의 사면은 동시에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을 보증해 준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선언하는 고린도서 기자의 진술이 이런 사실을 확증시켜 준다. 셋째, 최후의 종말적 심판으로부터 제외이다(요 5:24, 마 25:31-34). 성경은 사후의 종말적 심판을 분명히 경고한다(히 9:27, 계 20:11-15). 심판의 척도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진위성 여부가 구원과 정죄와 심판을 가름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하게 될 것을 성경은 밝히 증거한다(행 17:31, 요 5:28-29, 마 25:31-46). 넷째, 불못으로 상징되는 지옥의 영벌로부터 해방이다(마 25:46, 계 20:15). 성경은 불못을 둘째 사망으로 정의하면서 불신자들이 물리적으로 고통당하는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언급한다(계 20:11-15, 마 25:41, 46절).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불신자를 가리켜 이미 현재적으로 죽은 자요(마 8:21-22) 심판을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3:18), 영생과 영벌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천국과 지옥의 삶이란 본질상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원리 속에서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이중 구조 속에서 설명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성도가 받은 구원의 의미와 가치가 이처럼 의미심장하고 무한 가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기독교 신앙을 한낱 이기적이고 현세지향적인 목적을 위해 방편적이고 기복적인 수단으로만 여기는 관점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폄하하는 얼마나 비성경적이며 신성모독적인 행위가 성립되는 것인 지를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공급해 주신 구원의 의미와 가치는 생명의 영원한 보증이란 관점에서 한 마디로 인간의 궁극적인 필요를 일시에 충족시켜 준 지상 최대의 호의적인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온 천하를 얻는다 해도 목숨을 잃는다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목숨의 영원한 보장(구원)은 복 중의 복이요 상급 중 최대의 상급으로 기능하면서, 구원의 생명을 은혜로 공급받은 자들로 하여금 '무익한 종'(unworthy servant, 눅 17:10)169)의 심정을 가지고 자원해 순종의 삶을 살아 갈 것을 요구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이다. 은혜(믿음)는 행함을 수반하며 행함을 통해 온전한 은혜(믿음)가 성립된다는 신앙원리 속에서 말이다(약 2:22). 따라서 구원은 믿음으로 받고 행함은 복과 상급의 조건으로 기능한다는 이원론적 발상을 하게 된다면, 이는 성경의 본의와는 무관한 자의적 숭배신앙과 우상숭배적 신앙관에 불과할 뿐이다. 갈라디아서 기자가 예기하는 다른 복음이다(갈 1:6). 그런 발상은 처음부터 구원의 생명에 접촉된 사실이 없음을 자인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와는 무관할 뿐이다. 구원의 은혜와 관계되는 한, 기독교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감사의 계시종교이지 주옵소서의 우상종교로 성립될 수 없다.
은혜의 개념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에 기초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호의라는 관점으로 해석할 때, 창세전 구원협약(엡 1:4-14)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원천이며 기원으로 기능한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선택적인 구원의 은혜를 리브가가 잉태한 쌍둥이 형제를 근거해 "그 자식들이 아지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지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롬 9:11)라고 설명함으로 선택적인 구원의 은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곧 절대주권(absolute sovereignty)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강변한다.
한편 창세기 1-3장의 내용이 인과관계의 원리 속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에 대한 구체적인 실행의 결과라는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라면, 창세기1-3장을 구성하고 있는 구조적인 틀인 '창조-타락-구속'이란 일련의 주제 또한 은혜성의 맥락에서 기술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은 아담 부부에게 문화명령으로 주신 창조언약(창 1:28)이 비록 아담 부부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것을 명한 것일지라도, 이 일을 주도적으로 주관해 가실 주체는 하나님이신 사실로 인해 본 창조언약의 성격은 다름 아닌 은혜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런 은혜성의 언약이란 맥락에서 창조언약과 불가분의 관련성을 맺고 있는 선악과 금령 또한 비록 자체 속에 불순종에 따른 죽음이라는 단서 조항을 띠고 있을지라도 행위언약으로 단정하기보다 본질상 창조언약의 은혜성 속에서 그 본의를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선악과 금령은 독립적인 행위언약이 아니다. 창조언약의 연장선상에서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인 장치로서의 기능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을 어길 경우 언약적 징계 차원에서 죽음을 선고받을지라도 아담부부를 아주 죽게함으로 창조언약이 원천적으로 무효화되거나 파기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취지는 하나님의 언약백성들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켜 회개를 촉구함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본래의 목적을 적극 추구해 나가게 하는 정화와 회복과 목표지향적인 삶을 위한 방편적 기능을 담당한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아담 부부의 범죄와 타락의 성격은 이상 문화명령적 창조언약과의 언약적 연속성이라는 관점으로 그 본의를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범죄한 아담 부부에게 은혜언약의 성격을 띤 원복음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을 맺어 주신 것은 당장 두 가지 구속사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는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 죽음이란 언약적 심판을 선고받은 아담 부부의 죄를 여자의 후손('그')을 통해 속량(atonement)해 줌으로 이들 부부를 먼저 의롭게 해 주는 일이다. 다음으로 죄로부터 구속받아 의롭게 된 아담 부부를 통해 당초 은혜로 맺어 주신 창조언약 속에 담긴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미래지향적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이 열리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인류를 향한 구원의 은혜와 관련해 피조세계 속에서 계시된 최초의 복음으로 기록된다.170) 창세전 구원협약 속에 기초했던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엡 1:4)은 이런 방식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구조적 틀을 통해 마침내 그 예비적인 실체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협약(엡 1:4-6) 속의 '그리스도 안에서'란 표현은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과 본질상 구속이라는 주제 속에서 동질성을 띠게 된다.
7. 두 본문 사이의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에 관한 도표
(1) 구원협약과 창세기 및 성경 66권과의 관계
(엡 1:3-14)-(창 1-3장)-(창 4-11장)-(창 12-50장)-(출/레/민/신)-(역사서/시가서/선지서)-(4복음서)-(행/서신서)-(계시록)
(2) 구원협약과 창세기 1-3장의 창조-타락-구속과의 관계
창세전 영원세계(구원협약:엡 1:3-14)-피조세계(창조-타락-구속)-교회-현재적 하나님 나라-종말적 하나님 나라
Ⅲ. 결론
본 논고에서는 창세전 하나님의 구원협약(엡 1:3-14)을 계시의 원천으로 삼고,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조적인 맥락을 통해 기술된 창 1-3장의 내용을 계시의 구체적인 실행이란 관점에서 두 본문 간에 함의된 유기적인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 및 상호 의존성에 대해 논증했다.
창세전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은 단연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에 집중된다. 본 구속사상은 인과관계의 원리 속에서 창조-타락-구속이란 맥락을 통해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에서 암시적이지만 가시화된다. 다시 말해 선악과 금령(창 2:17)을 어긴 아담 부부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 창조언약(창 1:28) 속에 담긴 문화명령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을 열어주신다는 내용이다. 물론 문화명령의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에 집중된다. 문화명령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사실은 에덴동산 자체에 함의된 내적/외적 요소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를 표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화명령 속에 담긴 나라의 삼요소인 자손의 번성, 땅에 충만, 땅의 개발과 피조물의 관리를 통한 문화활동의 전개를 연장시켜 볼 때 더욱 명약관화해 진다. 에덴동산을 통해 계시된 창조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가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면 이는 창조사역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던 창세전 구원협약의 목표 또한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과관계의 원칙을 통해서 말이다.
본 논고에서 창세전 구원협약의 중심사상을 '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구속사상으로 전제 할 때, 천지창조 사역과 관련해 에덴동산에서 발생 했던 일련의 창조-타락-구속의 연속적인 사건들은 단연 계시성을 띠면서 논리적으로 창세전 하나님의 목적이 구체화된 것으로 논증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구원협약 속에 함의된 구속사상은 창세기 1-3장에 나타난 창조-타락-구속이란 맥락 속에서 특별히 구속사상을 암시하고 있는 여자의 후손언약을 통해 현실화됨으로 양자 간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증거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대교회 속에 두 본문 가운데 여전히 잠재돼 있는 적잖은 신학적인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본 논고에서는 논리적인 시도를 통해 양자 간에 발생할 수 있는 교리적인 문제의 가능성들을 기존의 상대로 유보코자 한다.
두 본문을 논리적으로 접근해 인과관계의 원리를 적용하게 되면, 창세기 1-3장에서 발견되는 창조-타락-구속의 주제들은 불가피하게 창세전 구원협약의 구체적인 실행과 집행이란 공식 속에서 해석하게 된다. 선(先) 계획, 후(後) 실행과 성취라는 구조적인 틀을 통해서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협약 속의 그리스도 안에서란 구속사상은 에덴동산 속에서 창조-타락의 과정을 지나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잠재된 구속을 통해 가시화됨으로 양자 간 신학적 상응성과 연계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여자의 후손언약은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연장선상에서 후에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성취의 절정을 이룬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면서 구약적인 배경에서 여자의 후손언약 사상을 담고 있는 선지자들의 새 언약 사상(렘 31:31-34, 사 53:5-6, 겔 36:26-28, 37:26-28)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사상의 핵심인 구속사역을 통해 사실상 '영(永)단번'(once for all)의 방식으로 현실화되었음을 기술한다(히 10:10-18). 이런 사실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선언에 근거한 내용으로, 근원적으로는 창세전 구원협약에 표현된 '그리스도 안에서'(엡 1:4)란 구속사상과 연계되면서 동시에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언급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란 예언의 성취까지도 함의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성경이 자증하는 언약적 구속사관에 의해 성경을 통시적이고 통전적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성경 속에 함의된 하나님의 본의에 저자의 심정과 성령의 의중을 좇아 보다 근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해 보았다. 바른 계시관의 정립이야말로 바른 신관/바른 구원관/바른 신앙관 정립을 위한 첩경으로 기능하는 것은 당연하다(롬 10:2-3, 마 7:21-23).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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