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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속사의 관점에서 본 디모데전서 파노라마

하나님아들 2014. 3. 8. 14:36

                            디모데전서 파노라마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가리켜 목회서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이 서신들이 노 사도인 바울에 의해 젊은 제자들인 디모데와, 디도에게 그들의 목회를 돕기 위해서 보내진 서신들이기 때문입니다. 돕는 것만이 아니라 달려갈 길을 마치려는 바울에게서 말씀의 바통을 이어받은 계주자(繼走者)로써, 선한 싸움을 마치려는 바울로부터 성령을 검을 물려받은 충성된 군사로써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할 것을 명하는 유언과 같은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 중에서는 모세가 죽기 전에 행한 세 편의 설교인 신명기가 이런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모세는 첫 번 설교에서 자신의 사역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둘째 번 설교에서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율례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설교에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과 맹세에 참여”시킴으로 말씀을 마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서신도 이런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일반 서신에 비해 만년에 기록된 것이며, 디모데 후서는 바울이 남긴 마지막 서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디모데에게 보내진 두 편의 서신도 성격은 차이가 있습니다. 전서가 보다 목회적이라면, 후서는 보다 개인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서가 목회서신 적인 성격이 현저한 반면, 후서는 보다 자신의 사역을 정리하고 결산하면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유언과 같은 성격을 띄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전서가 교회를 위한 것이라면, 후서는 디모데 자신을 위한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 전서의 기록 목적을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3:14-15) 하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전서의 중심점은 “하나님의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를 가리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에서 어떻게 행하여야(섬겨야)할 것인가? 디모데 전서의 주제가 여기에 맞춰져있습니다. ㉠ 다른 교훈”(1:3), 즉 이단에 대한 경계(4:1-16)와, ㉡ 예배에 관한 교훈(2:1-15)과, ㉢ 교회 직분에 관한 교훈(3:1-16)과, ㉣ 여러 계층의 교회 구성원들을 지도해야할 일(5-6장) 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목회사역을 “선한 싸움”으로 보고 있다는데 본 서신의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대적자는 “무너뜨리려”(딤후 2:18) 하나,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딤후 2:19) 한 대로 “세우는” 싸움을 하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3:15)는 묘사 속에는 모진 박해와 공격에도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세워져 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러므로 후서에서는,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딤후 2:19) 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창세기 3:15절로부터 시작된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계속될 싸움인 것입니다. 첫 장에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선한 싸움을 싸우라”(18) 하고 명하는 사도는, 마지막 장에서도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6:11-12) 하고 거듭 당부합니다. 이렇게 명하고 있는 바울 자신도 평생의 사역을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딤후 4:7) 하고, “선한 싸움”이었다고 정의합니다.

목회를 선한 싸움이라고 정의한 바울은, 목회자를 “군사”(딤후 2:3-4)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서신에는 “명령”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10번 정도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5:21) 합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6:13-14) 합니다. 바울 자신도 다른 서신과는 달리 서두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命令)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1:1)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군사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것이 목회서신의 정신(精神)인 것입니다. 이는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 하라” 하신 민수기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 1:3, 9:23) 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군사로서 선한 싸움을 싸우려는 자에게는 훈련이 필수적입니다. 훈련은 두 가지 방면(方面)으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훈련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경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짧은 서신 속에 경건이라는 말이 9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점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나타내는 경외심을 의미합니다. 경건이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이전에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가 하는 신앙인격을 나타냅니다. 러므로 경건이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4:7) 한 대로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목회자의 자격은 첫째가 경건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선결조건인 것입니다. 만일 목회자가 자신과의 싸움, 즉 경건생활에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3:5)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대적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누구인가? 바울은 디모데 전후서를 통해서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딤전 3:7, 딤후 2:26) 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리의 대적은 사탄입니다. 목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을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서,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위한 영적 싸움의 무기는 무엇인가? 의외라고 여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영적 전쟁이란 “말씀의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는 이단에 대한 경계가 강조적입니다. 첫 말씀이,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1:3)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4:1-5절과, 또 마지막 부분에 가서도,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6:3-5) 하고 이단에 관하여 거듭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이것이 곧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 서신에서는 “가르침”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4:11) 하십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4;13) 하십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4:16)고 말씀합니다.

사탄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이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훼방입니다. 일 단 믿게 되면, 둘째로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배우지 못한 무지(無知)한 자, 무기력(無氣力)한 자, 무장하지 못한 자, 그리하여 있으나마나한 자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하는데, 바른 믿음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심령을 죽이는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딤후 2:17) 독초와 같은 믿음도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사탄은 네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와는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전쟁은 말씀의 전쟁임과 동시에 말씀을 방편으로 하여 싸우는 “영의 전쟁”임을 명심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이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를 알았기에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5;17)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는 목회자는 양의 무리를 무방비 상태로 방임하는 것과 같고, 반면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 신자는 결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에는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잘하는 감독을 세워야하며, 목회자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행 6:4)하도록 재정과 행정을 관리할 “집사”(3:8-13)를 어떻게 세워야할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이제 디모데 전서에서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증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2:5) 하고 유일하신 “중보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중보 역할을 수행하셨는가?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2:6)고 말씀합니다. “속전”(贖錢)이란 죄를 속하기 위한 값을 의미하는 데, 주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죄 값을 지불하시고 대속하여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서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2:5하) 하신 대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15)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고전 6:19)이 분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 백성”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내 군대”(출 7:4, 12:41, 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란 “여호와의 군대”, 십자가 군병으로 모집함을 받은 자(딤후 2:4)임을 명심하십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싸움”(빌 1:30)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십시다. 다음으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십시다. 그리고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 쓰라”(딤후 4:2) 하십니다. 그리고 유치부나, 유초등부나, 중고등부나, 대학부나, 구역이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맡아 가르치기를 시작하십시오.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요, 사탄의 궤계를 멸하는 선한 싸움인 것입니다. 형제여,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부탁합니다. 배우든지 가르치든지 하십시오. 목회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출처 : 구속사 파노라마
글쓴이 : 바람이어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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