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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하나님아들 2013. 11. 20. 15:25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13)


죄를 용서 받는 문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 제목, 우리 자신을 위한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바로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도 자신을 위한 기도는 세 가지입니다. 일용할 양식, 죄 용서 받는 것, 악의 시험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이 세 가지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드릴 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양식의 문제가 육체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도라면, 죄의 문제는 영혼의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에 모든 불행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이 어디서 오는지 잘 모릅니다. 그저 경제 문제가 생존의 전부인줄 알고 있어요. 오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영혼의 죄입니다. 죄 때문에 인류가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죄 때문에 육체의 죽음이 시작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모든 인간 관계가 깨지고, 전쟁과 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굶주림과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만 가지 불행의 원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집니다. 죄는 인생 행로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매일 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본문에 나타난“죄”라는 단어는 아주 특이한 단어입니다. 통상 사용되는 단어는 “aJmartiva”(하마르티아)인데, 여기서는 “ojfeilhvmata”(오페이레마타)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debts”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빚”(債務)란 단어입니다. 죄와 빚은 여러 가지 유사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빚은 갚지 않으면 처벌 받습니다. 구약 시대에 빚을 갚지 못하면 채주에게 종으로 팔렸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잠 22:7) 요즘 신용불량자 되면 사회생활 하기 힘들어집니다. 경제 행위를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죄도 그렇습니다.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처벌을 받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된 원인이 죄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죄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해도 상당한 징계를 받게 됩니다. 다윗이 용서는 받았지만 징계는 철저하게 받았습니다.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이 죽었습니다. 자식들 사이에 패륜과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고 신하가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지옥 가지 않는다고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죄는 반드시 처벌 받습니다.
둘째로, 빚은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죄를 청산하지 않으면 영혼이 불안하고 부지 중에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과 아벨의 얘기가 나옵니다. 가인은 친 동생을 시기하여 아무도 몰래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추궁하시기도 전에 먼저 가인의 마음이 불안에 떨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죽일 것 같은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 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4:13-14) 하나님께 벌 받는 것도 두렵지만, 사람이 두려워 졌습니다. 이웃도 두렵고, 혈육도 두렵고, 남자도 두렵고, 여자도 두렵고, 다 두려워요. 성경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48:22)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잠10:24)
셋째로, 빚은 인간 관계를 깨어지게 합니다. 과도한 채무 때문에 부부가 헤어집니다. 부모형제 사이에 소송이 발생합니다. 평생 친구 사이의 우정에 금이 갑니다. 마찬가지로 죄는 인간 사이는 물론 성도와 하나님 사이가 벌어지게 만듭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셨습니다. 서로 원수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벌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3,15)
넷째로, 빚은 다른 죄를 유발시킵니다. 요즘 일어나는 강력 범죄를 보면 빚 때문에 발생한 것이 많습니다. 카드 빚 때문에 멀쩡한 가정 주부가 은행 강도짓을 합니다. 빚 때문에 친구 집을 털고, 빚 때문에 택시 강도를 합니다. 빚 때문에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입니다. 죄도 마찬가집니다. 한 가지 죄는 다른 죄를 유발합니다. 거짓말은 도적질을 낳고, 도적질은 강도 살인으로 발전합니다. 죄는 인간에게 증오심과 미움을 증폭시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다섯째로, 빚은 청산해야만 되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죄 짓고 그냥 통과되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청산해야만 할 때가 옵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을 때에 청산할 수도 있고, 현세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청산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시107:10-12)
죄는 우리 생존에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죄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이단자들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사죄의 기도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5:14-16) 분명히 서로 죄를 고백하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죄는 매일 청산해야 합니다. 마치 사람이 항상 손과 발을 씻듯이 죄도 항상 씻어야만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요13:10) 죄는 그날그날 씻어야지 누적될수록 청산이 힘들어집니다.


용서는 죄인을 구원하신 방법

용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때에 바로 이 용서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요즘 살인마 유영철이 감옥에서 난동을 부리고, 재판정에서 판사에게 달려들고 야단입니다. 이런 유영철이를 과연 구원할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적으로는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성품이 있으십니다. 첫째는 공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를 절대로 용납지 않으십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모든 사람이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시는 정도의 하나님이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성품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공의와 사랑은 함께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죄를 단호한 죽음으로 처벌하셨습니다. 단, 모든 인류를 죽음에 던지는 대신 자기 아들을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대리 속죄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인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기만 하면 차별 없이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어떤 죄인도 다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유영철과 비슷한 살인 강도가 예수님 곁에서 사형틀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평생 강도짓만 하고 백해무익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그 때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 뻔뻔한 놈아, 겨우 이제 구원해 달라는 말이냐? 평생 죄 값이나 받아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오늘 네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당장에 구원해 주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돌에 맞아 죽기 직전 주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사람들은 정죄할 줄만 알았지, 용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용서할 능력이 있으셨습니다. 자신이 누구든지 대신하여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중풍병자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때문에 소경이 보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던 세리 마태와 삭개오가 구원 받았습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거가 어떻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직 주님 앞에 죄인임을 자백하고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저는 과거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던 죄인입니다. 이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알기도 전에 주님이 이미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이제 주님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평생 내 인생의 목자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지만 오늘 새롭게 영접하실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 이 시간 이 기도를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세상살이에 바빠서 자신의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부터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우리는 빚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탕감을 요청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3-5)


용서에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만큼 용서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내가 남을 용서했다고 하나님께서 무조건 받아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본래 남에게 어떤 죄에 대한 채권도 없습니다. 나 역시 하나님 앞에 동일한 범죄자일 뿐이요, 남을 용서했다고 무슨 권리를 요구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실 때에 상당히 중요한 참작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처럼 기도 하라고 권장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남에게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는지, 하나님은 철저하게 감찰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2-24)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7) 예배를 드리기 전에, 혹은 금식하기 전에 먼저 형제들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용서에는 많은 유익이 따라옵니다.
첫째로, 용서는 깨진 인간 관계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은 인간관계를 끊어지게 만듭니다. 부모 형제나 부부 사이에도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복수는 인간 관계를 악화시킬 뿐입니다. 절대로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복수의 권한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報讐는 내것이라”(신32:35)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히10:30) 하나님은 복수 대신에 용서를 명하십니다. 복수는 인간 관계를 깨지게 만들지만 용서는 깨진 관계를 복원시켜 줍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7-18)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눅6:35) 누구에게 큰 피해를 당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모욕을 당하고 원수진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채권자입니다. 우리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우리의 긍휼과 용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관계 회복을 위해서 결코 용서를 뒤로 미루지 마세요. 용서는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둘째로, 용서는 평안을 줍니다. 미움은 불안을 가져오지만 용서는 평안을 가져옵니다. 누구를 미워하게 되면 불면증, 소화불량, 우울증, 신경통, 두통, 치통, 고혈압, 심장병, 다 걸립니다. 그러나 용서하고 털어버린 사람은 단잠을 잡니다. 평안을 회복합니다. 건강해집니다. 인생이 가벼워져요. 누구를 미워한다는 것은 인생의 커다란 짐입니다. 불필요한 짐을 질 이유가 없습니다. 용서로써 마음의 평안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용서는 영적 생활을 회복시켜 줍니다. 누구를 미워하면 틀림없이 경건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별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설교가 지루하고, 기쁨이나 감격이 없습니다. 기도가 막혀버립니다. 새벽기도 뜸해지고, 봉사활동에 시큰둥해집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찬송은 밤낮 한 가지입니다.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처량하고, 곤하고, 슬프로, 외롭고... 왜 그런 신앙생활을 합니까? 용서와 관용 가운데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용서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은 항상 소극적입니다. 남들이 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고독을 씹으면서 외톨이 생활을 하게 됩니다. 미움은 사람을 멀어지게 합니다. 반면에 용서는 모든 사람을 가까이 오게 만듭니다. 용서 잘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사람이 따라다닙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용서에는 원수를 친구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용서는 가장 적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용서의 많은 유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공동체가 함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용서는 공동체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단어는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기 “우리”(hJmw'n, hJmei'")라는 복수 명사가 세 번 나타납니다. “죄 지은 자”란 단어도 원문에는 “죄 지은 자들”(toi'" ojfeilevtai")이란 複數 명사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공동체적인 용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의 죄는 개인의 죄로 인식할 뿐 아니라, 공동의 죄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일방통행 식의 대립과 투쟁입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을 “수구꼴통들”이라고 합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을 “빨갱이 좌파”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에는 중도파가 없어요. 중도파는 회색분자로 낙인찍힙니다. 서로 나만 옳다고 합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상대가 죽어 자빠질 때까지 싸우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 죽어 자빠지기를 기다립니까? 결국은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당과 야당이 싸우고, 여자와 남자가 싸우고, 보수와 진보가 싸우고, 노동자와 경영자가 싸우고, 신세대와 낡은 세대가 싸웁니다. 잘못은 공동체 공동의 책임이란 의식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의 잘못을 그만의 잘못으로 돌리지 말고, 우리 공동의 잘못이란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 잘못하면 나도 함께 회개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용서 정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공동체적인 책임의식이 있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누가 잘못하면 그 사람만 탓하지 말고 공동의 죄의식을 가져야합니다. 요즘 어떤 방송이 기독교를 부정적으로 폄하한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교회가 타락한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있습니까? 남의 탓 하지 마세요. 바로 나도 그런 공동체에 속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멀쩡하다고 책임이 없나요? 다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몰래 눈물 흘리면서 형제들의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에스라 시대 사람들은 동족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함께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까지도 함께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에스라9장) 오늘 우리도 그 같은 공동체적인 용서와 기도가 필요합니다.
모든 공동체가 마찬가집니다. 국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가족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직장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세요.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죄는 인생의 생사화복에 절대적인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는 만가지 불행의 원인입니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죄를 해결하는 방법은 용서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도 하나님의 용서로써만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용서에는 많은 유익이 따라 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영적 생활을 회복시켜 줍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용서의 능력을 깨닫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공동체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정죄하기 전에 공동체적인 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공동체가 강화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용서의 사람들이 되시고, 날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원주사랑의교회
글쓴이 : onsegy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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