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13)
양식의 문제
주기도문의 첫째부터 셋째까지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을 위한(하나님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거기에 속합니다. 주기도문의 후반부 세 가지는 인간을 위한 기도 제목입니다. 일용할 양식, 죄 용서, 시험과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가 그것입니다. 그 중에서 첫 번째가 일용할 양식인데, 이 기도를 전체 문맥에서 본다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로, 양식의 중요성입니다. 인간을 위한 첫 번째 기도가 바로 양식을 구하는 기도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양식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의식주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드리는 기도에 염려 대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7월 말에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금강산 아래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금강산도 食後景이다!” 먹는 것은 결코 천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 백성들에게 정결한 음식을 가려서 먹도록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을 하나님 성전에서 먹도록 했습니다. 먹는 것은 존재를 위한 신성한 수단입니다.
양식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양식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쌀 80kg 한 가마니에 대략 20만원입니다. 그런데 금 한 돈에 7만 2000원입니다. 금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쌀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가치가 왜곡된 것입니다. 특히 모든 물건이 화폐로 평가되는 시대에 살기 때문에 식량의 왜곡 현상은 더욱 심각해 집니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15억의 인구가 절대 빈곤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기근이 있는 빈곤 국가에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습니다. 소말리아, 수단, 이디오피아, 르완다 등등. 그런데 잘 사는 나라에서는 식량이 남아 돕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쌀 개방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우리는 공산품을 생산하여 내다 파는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무역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값 싼 농산물이 마구 수입됩니다. 돈만 있으면 먹을 것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열대 과일에서 희귀 식물까지 넘쳐납니다. 그런데 돈이 없는 나라는 굶어죽어도 식량이 가질 않아요. 식량도 상품이기 때문에 돈 있는 곳으로 가지, 돈 없는 곳으로는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는 거예요. 오늘 우리 곁에 먹을 것이 풍성하다고 값 없이 여기지 마세요. 식량은 가장 중요한 생존 수단입니다. 날마다 기도해야 됩니다.
둘째로, 양식 문제가 영적 문제에 앞서 있다는 점입니다. 즉, 육신을 위한 양식이 죄 용서의 문제나, 시험과 악의 문제보다 앞서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전체 기도제목 여섯 가지 중에 다섯 가지가 영적인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 죄의 문제, 시험과 악의 문제 등등. 육신을 위한 기도는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 기도가 바로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렇다고 일용할 양식이 육신적인 기도라는 뜻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 역시 영적 생활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항상 영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소홀히 합니다. 심지어는 육신이 굶주리거나 타락해도 영적인 것과 별개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육적 생활이 바르지 못하면 영적 생활도 무너집니다. 배고프면 장발장 되기 십상입니다. 남의 것을 막 집어 먹어요. 그래서 아굴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성경에 보면 전쟁과 기근이 다가올 때 배고픈 사람들이 동물의 배설물을 먹고, 심지어는 사람까지 잡아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굶주리면 영적 생활도 안정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릴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40일간 금식하시고 주리셨을 때에 마귀가 와서 시험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라! 배고프면 돌이 떡으로 보이고, 돌을 떡이 되게 하려는 허황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육신의 양식을 올바로 취하는 것은 영적 생활을 바로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양식의 공급자는 오직 하나님
양식의 공급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생각들을 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식은 내가 벌어서 얻는 것이고, 하나님께는 특별한 문제만 기도하면 된다! 그렇습니까? 진짜 신앙은 거기서 달라집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있지만 우리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다 하나님께 받고 있습니다. 공기 중의 산소를 하나님이 공급하십니다. 매일 마시는 물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양식도 그렇습니다. 60억의 인류가 먹고 살만큼의 엄청난 식량이 매년 생산됩니다. 여러분은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만일 기상 이변이 나타나서 단 일 년만이라도 지구상의 농사가 망쳐졌다고 가정해 보세요. 끔찍한 재앙이 나타날 겁니다. 하나님께서 해마다 햇빛과 비를 적절히 내리셔서 곡식을 자라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사는 겁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좋은 밭에 뿌린 씨앗은 30배, 60배, 100배의 생산성이 있습니다. 옥수수 한 알갱이를 심으면 몇 개가 나옵니까? 한 이삭에 수 백 개는 붙어 있을 겁니다. 그런 이삭 수만 해도 여러 개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저는 고등어나 참치를 먹을 때마다 걱정이 됩니다. 고기를 이렇게 다 잡아 먹으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그런데도 매년 고기가 잡힙니다. 생명 없는 석유나 광물들은 한 번 캐 먹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생명체인 양식은 엄청나게 재생산 됩니다. 이런 생산성이 없다면 인류는 벌써 굶어 죽었을 겁니다. 인구학자였던 말다스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마침내는 인구 폭발로 인류는 망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측에 의하면 인구는 2000년대 중반 90억까지 늘어났다가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아무튼지 그 많은 인구가 먹고 살만큼 매년 생산되는 것이 농산물입니다. 이런 식량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양식이 풍성한 환경에 살게 된 것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산업이 발전된 나라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만일 우리가 낙후된 빈곤 국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등 교육을 받아도 일 자리가 없습니다. 노력해도 원천적으로 먹고 살기 힘듭니다. 이런 나라들이 지구상에 허다합니다. 야곱은 20년이나 땀 흘려 노동했지만 품삯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얼룩이 양들을 야곱에게 주실 때에 그는 비로소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풍성한 식량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노력하면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에 태어난 것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문화니 인권이니 따질 수 있는 나라에 사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지구상에는 인간 대접 받지 못하면서 사는 종족들이 허다합니다. 양식의 공급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점을 분명히 알고 항상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왜 일용할 양식인가?
첫째로, 매일매일의 생존을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뜻입니다. 우주 만물 가운데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존재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 다른 피조물은 모두가 의존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잘났어도 하나님이 호흡을 거둬 가시면 끝장입니다. 바로 이점을 가장 잘 기억시켜 주는 것이 매일의 양식입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 신앙의 중요한 표식이 식사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식사 때마다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하십니까? 한 끼의 식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거기에는 신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우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진수성찬이면 뭐합니까? 소화가 안 되면 그림의 떡입니다. 소화가 잘 되려면 신체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근심거리가 많으면 입맛이 없습니다. 밥이 모래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식사 기도 때마다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감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 양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화 잘 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안한 마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음식을 만든 모든 손길에 복 주시옵소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새 힘을 주셔서 힘차게 일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식사 때마다 감사로 기도하는 사람은 평생 양식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축복의 원리를 모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의지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지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소원이 뭡니까? 어떻게 하든지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먼 나라에 가서 마음껏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을 미리 상속받아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뭡니까? 허랑방탕해서 거지가 되고, 마침내는 돼지가 먹는 음식을 얻어먹는 신세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돼지와 동격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염려해야 될 것은 양식이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즉, 경제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떨려 나가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1:17) 매일매일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어제 의지했으니 오늘은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생존 방법입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 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 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사30:15-67)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시125:1)
둘째로, 육체의 욕망을 절제하라는 뜻입니다. 만일 하루 치 양식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면 얼마나 구할 것 같습니까? “오늘날 나에게 10년 치 양식을 주옵소서” 그 정도는 양반입니다. “오늘날 나에게 평생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그것도 괜찮습니다. “오늘날 나에게 자손 3, 4대까지 먹을 양식을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해도 시원치 않을 사람들이 허다하게 많습니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10억 재산을 모으려고 애씁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먹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먹는 것은 생존을 위한 방법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먹는 것이 목적이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헤맵니다. 인간은 참으로 잡식 동물입니다. 못 먹는 게 없습니다. 오죽하면 먹고 해롱해롱 하는 마약에, 독약까지 먹어요. 본래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은 草食입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29-30) 인간이나 동물이나 기본적인 양식은 채소였습니다. 그러다가 홍수 후에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창9:3-4) 아마 황폐해진 자연 때문에 노아가 소유했던 동물들을 식량으로 허락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외에도, 끊임없이 먹거리를 찾아냈습니다. 홍수 후에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 벗고 자는 장면이 나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에 롯의 딸들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서 못된 짓을 합니다. 먹어서는 안 되는 온갖 음식을 만들어 내고 먹는 바람에 인간의 품위를 잃어버렸습니다.
욕망을 제한하지 못하면 신앙도 팔아먹게 됩니다. 아굴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8-9) 쓰지 않고 쌓아 둔 물질은 썩습니다. 광야시절 하나님은 만나를 내리시면서 매일매일 하루치 양식만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엉큼한 사람들은 몰래 만나를 두 배 세 배를 모아다가 집에 쌓아 뒀습니다. 다음 날 보니까 다 썩어버렸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6:19-20)
만일 우리가 욕망을 버린다면 우리는 더 중요한 양식을 얻게 됩니다. 즉,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뜻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주님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께는 평안이 있습니다. 주님께는 영혼의 기쁨과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께는 위로와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육신의 양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한 것들을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교제를 원하신다면 탐식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셋째로, 근면하게 노동을 하라는 뜻입니다. 오래 전에 윌리엄 래즈베리 기자가 미국사회의 단면을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특히 흑인 사회에서 육체노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는 어떻게 하든지 자녀들이 육체노동 하는 직업을 갖지 않고 정신노동을 하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비록 마약 밀매를 하고 깡패 짓을 할지언정 막노동을 안 한다.” 우리는 미국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만 보내 놓으면 육체노동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시대의 士農工商의 뿌리 깊은 차별과, 관료 사회가 만들어 낸 기현상입니다. 어째서 육체노동은 천한 직업이고, 정신노동만 고상한 직업입니까? 우리나라의 기현상이 뭡니까? 몸 파는 여자는 5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공장에는 직공 구하기가 힘들어요. 성매매를 단속하니까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서 데모를 합니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세월 좋아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서서 데모를 하다니요? 식당마다 조선족 사람들이 들어와서 일을 하고, 중소기업에는 일손이 부족한데, 왜 꼭 몸을 팔아서 생존해야만 합니까? 직업의 귀천은 없지만 그렇다고 도덕성을 상실한 직업까지 용납될 수 없습니다.
편하게 살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는 노동을 통해서 양식을 얻는 겁니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창3:19) 성경에는 하루 노동하고 하루 품삯을 주는 장면이 종종 나타납니다. 포도원 품군의 비유에 보면 품군들이 시간대 별로 와서 일을 하고 주인에게 일당을 받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노동자들의 품삯을 당일에 주라고 말씀합니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신24:14-15) 노동자들이 일하고 일당을 받는 것은 고대에는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요즘이야 월급이나 연봉 제도가 있지만 옛날에는 대부분이 일당이었습니다. 일당 제도는 가장 경건한 근로 방식입니다. 노동의 가치를 가장 잘 깨달을 수 있어요. 성경은 노동의 가치를 소중하게 인정합니다. 일확천금이나 불로소득을 기대하지 마세요. 땀의 가치를 아는 자만이 양식을 먹을 자격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에는 이러한 근로정신이 들어 있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10:4)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니라”(잠12:27)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제목입니다. 양식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양식 기도는 영적 생활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양식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십니다. 다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만 이 기도를 드립니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매일매일 양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양식을 구하되, 탐욕에서 벗어나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동의 가치를 깨닫고 근면하게 살아야 합니다. 일용 양식을 위한 기도는 모든 경건 생활의 기초입니다. 이 기도 생활을 통해서 믿음을 지켜 가시기 바랍니다.
'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0) | 2013.11.20 |
---|---|
[스크랩]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0) | 2013.11.20 |
[스크랩]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0) | 2013.11.20 |
[스크랩] 나라이 임하옵시며 (0) | 2013.11.20 |
[스크랩]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0) | 2013.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