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케아 공의회의 경과 및 결과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야 회의(Nicaea, 325년 5월)에서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 회의는 318년 아리우스(Arius)에 의해 발생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소집되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와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323년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지역 주교관구에서 정죄되었으나 논쟁은 깊어만 갔다. 314년 8월 1일에 도나투스 논쟁을 중재한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하였다. 그는 325년초 안디옥을 거쳐 니코메디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디옥에 머물며 안디옥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아리우스와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정죄되고 안디옥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한편 니케야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퀴라로 예정되었으나 후에 니케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6월 19일 니케야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티누스 가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 간 계속되었다. 이 회의에는 회의의 의장 코르도바의 오씨우스와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교회 감독의 대변인들로서 두 명의 장로를 포함하여 일곱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 회의의 참석, 서명자는 200명 내외로 밝혀지고 있는데 후에 니케야 신앙고백을 따르는 교부들에 의하여 318명으로 알려졌다.
참석자가 318명이라는 기록은 358년 말-359년 초의 것으로 보이는 프와띠에의 히라리우스의 글에서 처음 나타나며, 후기 아타나시오스의 글, 그리고 교부들의 글에서 보편적이며 암브로시우스도 이 입장을 취한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헬라어의 300을 가리키는 Τ는 "십자가"를 의미했고 18의 수 ΙΗ 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참석자의 수는 "주님의 수난의 표식과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기에 "주께서 회의에 계셨다"고 하여 이 회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의 표식과 예수의 이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단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는 하나의 승리였던 것이다.
회의에서는 ㉠부활절의 날자(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폴리갑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일로 주장) ㉡20개의 교회 계율제정(디오클레티안 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할권 획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성직자의 직위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분열자들과 이단자들의 재 입회에 관하여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본질(同一本質, homoousios)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주님의교회 목사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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