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 사상
- 4복음에 나타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중심으로-
손 윤 탁
1. 신약과 선교(머리말)
2. 예수 그리스도와 선교
3. 대위임령에 대한 연구들
4. 대위임령의 성격
5. (피터스의) 대위임령에 대한 분석
6. 선교적인 과제와 교훈(맺음말)
*. 대위임령에 관한 부분은 George W. Peters의 A Biblical Theology of Mission,
(Chcago:Moody Press, 1984), pp. 172-198의 글을 발제자가 번역, 요약하여 그 흐름에 따라 내용을 주로 기술하고 전개하였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1. 신약 성경과 선교
성경은 선교의 책이다. 이말은 신구약 성경 모두가 선교의 책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보다 더욱 보편적이며, 명시적이다. 물론 신약의 선교 개념은 구약과 무관하지 않다. 구약 예언의 성취와 구약 선교의 완성이 바로 신약의 선교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선교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면 신약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 하나님의 주권성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공동체는 그의 명령(대위임령)에 따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은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셨으며,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라 는 이 명령과 이 일을 위하여 앞서 계신 성령님께 순종하며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이광순교수는 구약을 하나님의 선교, 복음서를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 사도행전을 성령의 선교, 서신들을 교회의 선교, 그리고 계시록을 선교의 완성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그 자체가 선교의 책이며, 그 중 어느 것 하나도 선교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결국 신약 성경에 나타난 선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 선교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한 선교의 성격과 그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한 지상명령을 이해하게 될 때 더욱 명확해 진다. 사도행전의 역사와 서신들은 모두 이 명령에 순종한 사도들의 행적과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선교
예수님은 친히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선교사이다. 죄악 가운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 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친히 두로와 시돈,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이방 선교를 행하셨으며(막7:24-31), 이방인들의 간청을 들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막7:25-30) 마지막 날 이방인들이 참여할 천국 잔치까지 말씀하셨다(마8:11).
그의 선교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된다. (그의 선교 지역)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1:14-15). 그러나 마태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이 이방 지역, 곧 흑암과 사망의 땅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큰 빛이 되었다고 전한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 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하였느니라 (마4:13-16).
이곳에서 그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기도 하셨고, 그 곳에서 백성 중에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기도 하셨다(마4:23, 막1:21-28, 눅4:33-37). 그래서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에 두루 퍼지게 되고 갈릴리,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으며(마4:25), 심지어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었다(눅6:1下).
그의 지상 생애의 절정은 예루살렘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공관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3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요2:13-3:36, 5:1-47, 12:2-8), 그 중 유대 전도에 대한 기사가 요한복음3장22절 이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서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고 기록되어 있으며, 박수암은 마가복음 6장 14절로 56절의 기사를 예수의 유대 지방의 사역으로, 그 후에 나타나는 막7:4-30을 이방 지역을 위한 사역으로 보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그의 삶을 마감하고 승천함으로서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유대 전도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었다.
동시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사마리아와 베뢰아 지방 역시 중요한 복음 전도의 거점이 된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는 중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게 되고(요4:3-4), 당시의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고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여 천국의 비밀을 전해 주었고, 그 대화 이후에도 이틀이나 그 곳에 머무시며 일하셨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때 사마리아의 한 촌이 저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눅9:53-53). 예수께서는 다른 촌으로 들어 가셨다(눅9:56).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이런 일을 당하셨다.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다 배척을 당하자 곧 이방인에게 향한다고 선언 한 것처럼(행13:46) 예수님께서도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셨다. 예수께서 고향을 방문하셔서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듣고 놀라는 기사가 나온다(마13:53-54, 막6:1-6).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당하셨다. 그래서 그는 다른 촌으로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게 된다(막6:6下). 그래서 이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방향을 바꾸어서 베뢰아 지방으로 향하신 것이다. 베뢰아 지방으로 향하신 예수님은 여리고에 들어가시기까지(눅19:1) 70인의 제자를 파송 하시기도 하시고, 각종 비유와 교훈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기도, 욕심, 회개와 겸손, 물질적 문제, 제자로서의 삶, 재림과 구원, 복음 증거 등을 가르치심으로 그의 죽음을 대비케 하셨다.
결국 예수의 사역도 정리해 보면 주로 갈릴리와 예루살렘, 사마리아와 베뢰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승천 시에 명령하신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이러한 지역적인 개념이 나타나게 되는 데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이라는 표현이 그것인 데(행1:8) 이는 곧 점진적인 복음 확장과 우주적인 개방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시기를 원하셨다.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고(마4:18, 막1:16-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으며(막1:19-20), 세관에 앉은 레위를 부르시고(눅5:27), 그 외의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열 두 제자를 세우셨다(마10:2-4, 막3:13-19, 눅6:12-16).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신 목적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다(막3:13-15). 70인을 세우셔서 각 동 각 처로 둘씩 보내시며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다(눅10:9).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나의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요14:2)라고 말씀하심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을 격려하시며 자신의 일을 계속할 것을 당부하셨다. 그의 지상 명령과 더불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는 약속은 계속적으로 부르신 인간들과 함께 동역하시기를 원하고 있음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God works through men and women).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지상 생활을 통하여 이들을 부르신 후 훈련을 시키셨다. 그들을 통하여 그가 가장 중히 여기시는 사역을 실행토록 명령을 하셨다. 지금도 이 사역을 위하여 그의 성령을 보내셔서 그 일을 이루어 나가신다.
예수님은 실로 다양한 방법으로 선교하셨다.
각종 병을 고치시며(마8:1-4, 14-17, 9:2-8, 막1:29-34, 40-45, 눅4:38-41, 5:12-26), 귀신들을 내어 쫓으셨다(마8:28-34, 막1:23-28, 눅4:33-37).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치기도 하시고(마4:13-17, 13:3-51), 때때로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기도 하셨다(요2:1-12, 눅5:4-9).
굶주린 무리를 먹이기도 하시며(마14:13-21, 15:32-38, 막6:34-44, 8:1-9, 눅15:-16:), 직접적으로 전도 훈련을 시키기도 하셨다(마10:5 이하, 눅101:20). 기도로 모범을 보이기도 하신(마26:36-46)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고난 당하신 후 다시 부활하셔서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도 하셨다(마28:19-20, 행1:8).
방법도 방법이지만 예수님의 사역은 융통성이 있었다. 유대인들의 경직된 율법주의에 구애되지 아니하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시며, 각색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막2:23-26, 3:1-6, 요5:18등).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려 하심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함이 목적(마5:17)이라고 하신 그는 구약에 구애됨이 없이 율법들을 재해석하셨다. 마태복음 5장에 나타난 내용만 보더라도 구약에 나타난 각종 율법들을 지금까지의 문자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시거나 그 내용을 더 강화하시기도 하시는 데 살인 행위(마5:21-22), 간음(마5:27-28), 이혼(마5:31-32), 맹세(마5:33-37), 보복에 대한 비폭력, 무저항주의(마5:38-42), 원수를 위한 기도(마5:43-48)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백성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10:5-6)고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방 선교를 행하셨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방 지역에 대한 사역이 나온다(막7:24-8:10). 즉 예수님께서 두로 지경으로 나아가 아무도 모르게 한 집에 들어 가셨다. 그러나 이를 안 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7:28)라는 애절한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두로 지경에서 나아 와 시돈으로, 데가볼리로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는 이방 지역을 위한 선교 여행을 행하셨다(막7:31). 특별히 박수암은 마가복음 8장 1절 이하에 나타난 급식 보도 에 대한 기사를 마가복음 6장 34절에서 44절 사 이의 5병2어의 급식 이적과 비교하면서 마가복음 8장에 나타나 마가의 이 급식 보도는 예수의 이방 지역에서의 선교 사역으로 주석하였다. 즉 8장 1절의 그 즈음에 (en ekeinais tais hemerais)란 말은 앞 절과 연결시키면서도 정확한 지식이 없음을 나타냄으로 이 사건은 적어도 마가에 있어서는 데가볼리 이방 지역에서 발생한 것임을 강조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유대 지역(벳새다 광야, 눅9:10f)에서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고 다음에 이곳 이방 지역에서 개들 (이방인)을 배불리는 것으로(7:27) 풀이하였다. 그래서 박수암은 7병 2어로 4천명을 먹이고 일곱 광주리를 거둔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신학적 메시지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선교 :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우주적이어야 한다. 그것은 어떤 민족, 어떤 인종, 어떤 계층에만 국한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은 빚진 자이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내용 자체의 문자적 실천이라기 보다는 그의 융통성 있는 선교 실천의 일례인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 목적은 하나님 나라에 있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한 지상 생활의 최종 선교 목적은 그의 몸된 교회를 설립하는 데 있었다.
처음부터(마4:23) 끝까지(행1:3)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가 선교의 목적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나 복음서에 비록 교회라는 말이 강조되지 않았고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교회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전혀 없지만 교회라는 개념은 예수의 선포와 계시의 범위 안에서 볼 때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그 믿음의 반석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시되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는 말씀은 그의 사역의 목적을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육신인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승천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교회를 통하여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사역을 계속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와 함께 계시며(마28:20), 교회 안에 살아 계시고, 교회를 통하여 사역하신다(골1:23).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선교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공생애의 사역은 그가 보내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게 될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사역이었고, 대위임령은 세상 모든 나라들을 향하여 그의 몸된 교회가 수행하여야 할 최대의 임무가 무엇인지 지적해 주는 것이다.
왕국의 복음은 어디에서나 전파되어야 한다. 부활과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는 이방 선교의 시기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왕국을 이방 민족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순교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막13:10)
3. 대위임령에 대한 연구들
특별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기초한 지상명령에 대한 완전성과 순수성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문서상으로는 고등 비평주의자들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아왔다. 어떻든 복음주의적인 입장에서는 이 구절의 완전성과 순수함에 대하여 집요하게 방어하였고, 내외적인 증거를 기초하여 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래서 조지 피터스(George W. Peters)는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 말씀을 주께서 말씀하신 말씀으로 분명하게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열거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사도들에게 국한되는가? 아니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표로서 명령을 받게 된 것인가? ……세례와 가르침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세례와 가르침은 제자 만드는 일과 어떤 관계인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에 대한 3위를 일일이 열거하면서도 이름이라는 단어는 왜 단수인가?
그러면서 복음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이 명령은 교회에 주어진 명령이며, 세상 끝 날까지 순종해야 하는 전체 계시의 빛으로 해석하였다.
마태복음 28:18-20
마가복음 16:15-16
누가복음 24:46-49
요한복음 20:21-22
사도행전 1:8
사도바울에게, 행26:13-18 (16-18)
…너로 사환과 증인으로 삼으려 함이니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 기업을 얻게 하리라
그러면서 피터스는 이 지상명령에 대하여 철저하게 다룬 주석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한다. 다만 최근에 두 편의 주석이 있는 데 하나는 Karl Barth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R.D.Culver가 복음주의 신학회 잡지(Bibliotheca Sacra, July, 1968)에 의해 출간된 What is the Church s Commossion? 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이 글마저도 미흡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대명령의 전체적인 범위를 다루지 못하고 모두 마태복음 연구에만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피터스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에게 강조한 주님의 명령을 재차 확인한다.
칼 바르트는 4복음서의 끝부분과 사도행전의 첫 부분,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는 부활에 대한 내용을 지적한다. 부활 자체가 제자들에게 숨겨두었던 그의 삶과 죽음의 목적이 되고, 예수님의 주권과 왕국을 선언하는 임무를 그들에게 주는 것이 대명령의 중심이 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발제자 역시 흔히 장례식에 더러 사용한 구절이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절이었다.
고린도전서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4. 대위임령의 성격
이 대위임령은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이나 기독교를 선교적인 종교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인격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구약 성경의 열려진 하나님, 이스라엘의 부르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과 복음서에 드러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우리 주님에 의하여 예언된 오순절과 그 후에 드러난 성령의 사역, 사도들의 편지 속에 드러난 교회의 성격 등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것은 이 모든 사건이 명령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적이고 종합적인 설계와 구체적인 우리 주님의 말씀, 그리고 증거하며 나아가게 하는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바르트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지상 명령은 어떤 종류의 사상이나 이념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서 되어진 일을 말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다. 지상명령은 우리 주님에 의하여 말씀되어진 것을 성령에 의하여 복음서에 기록되어졌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분명한 명령으로서 복음서의 제자들에 의해 재진술되고 초기 교회의 전통에 의해 증거되었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기독교 운동이 본래적으로 역동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위임령은 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모두 기록된 이 말씀은 모두 원심적인 성격을 가지면서 각각 강조하는 점이 다르면서도 서로 보충하는 가운데 통일성을 가지며 복합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마태복음 - 권위, 사역에 대한 포괄적인 목표, 시간의 확장(세상 끝날까지)
마가복음 - 긴급성, 사역의 방법과 지리적 범위. (마지막 심판 강조)
누가복음 - 기독론적 메시지와 사역의 보편성 (예언의 성취)
요한복음 - 영적인 준비와 사역의 영적 본성
4복음서 모두가 합해져서 전체적인 대위임령을 완성시키고 있음 볼 수 있다.
대위임령의 분석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또 다른 강조점이 있다. 마태와 마가에 각각 나타난 두 개의 초점은 타원형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명령형의 동사이다. 마태의 초점은 제자 만들기 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보충하는 것이 된다.
그 이유를 이종윤박사는 선교의 긴급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명령은 소위 가장 큰 명령, 대명령, 혹은 지상명령이라고 한다. 이 지상 명령을 세분하면 가라 고 했고, 세례를 주라 가르치고 증거하고 제자 삼으라 고 했다. 여기에서 다섯 개의 동사가 나타나지만 본동사는 하나-즉, 제자 삼으라 는 것이다. 가서, 세례 주고, 가르치고, 증거 하라는 말은 모두 분사형이다. 다시 말해 조동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하는 데 있어서 바른 목적은 제자를 삼는 것 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고,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그리스도를 위해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제자를 만드는 것이 선교의 바른 목적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가의 것으로 피터스는 복음 선포 를 또 다른 하나의 초점으로 보고 있으나 제자를 만들기 위하여 증거하라는 마태복음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누가와 요한에게서는 명령적인 동사가 없다. 그러나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을 받을 것 을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역동성과 영적인 사역의 명령적인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다.
다음은 4복음서에 기록된 지상명령의 포괄적인 목표인 열방으로 나아가 제자 삼으라 는 목적의 성취를 위해 피터스가 지적하는 우리들의 사역 패턴이다.
(1) 우리는 열방을 향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설득하며 전해야 한다. 복음 선포 에 집중적으로 매달려야 한다.
(2) 우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해야 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믿는 모든 자에게 그 이름으로 용서하시는 은혜를 체험토록 인도해야 한다.
(3) 우리는 가르쳐 주를 따르게 하고, 세례를 받게 함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회중이 되게 함으로 옛 생활과는 구별된 삶을 살게 하여야 한다.
(4) 우리는 성령에 의지하여 그 안에서 복종하고 일하며 행하게 하여야 한다. 성령의 은사와 그 은사의 중요한 가치를 그들도 알게 하여야 한다.
(5) 우리는 그들이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이 인도하심 안에서 살도록 해야 한다.
5. 저자에 따른 복음서의 대위임령 분석
1) 마태의 대위임령
그리스도의 이 선포장면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를 만나게 될 것이라 약속하시던 갈릴리의 한 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개 변화산 혹은 산상수훈을 선포하셨던 산으로 보지만 조지 피터스는 후자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의 새로운 계명 을 선포하셨던 것처럼 여기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들 삼으라는 새로운 프로그램 을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 또 피터스는 마태는 단지 열 한 제자만을 언급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오백여 형제들에 의해 목격된 사건의 근거로 이 만남은 주님과 제자들과의 약속에 의한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이 나와서 주님을 보고, 만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 위임령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잡을 수 있다.
<1> 왕의 능력(통치) - 모든 권세.
<2> 왕의 목적 - 제자를 삼는 것
<3> 왕의 명령 - 가서 ...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
<4> 왕의 현현(顯現) - 너와 함께 하리라
가라사대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장엄한 선포로 시작된다. 모든 영역에 있어서, 역사(시간)와 자연(우주)의 통치자이시며 홀로 주가 되신 그 분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그의 대사를 파송하는 명령권자임을 밝힌다.
이 명령 속에 그리스도는 그의 대사들을 지리적으로 제한 없이 모든 세계로 파송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신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2:36).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롬 14:9).
성경은 반복적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하나님의 보좌에 좌정하신 최고 권위의 통치권자이심을 드러낸다.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계 3:7).
그는 능력을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활동을 선언하신다. 주님은 단지 집행하는 지위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사역을 실행하시는 분이셨던 것이다. 그는 오늘을 열고 오늘을 닫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닫혀진 선교의 문 앞에서 결코 무력하게 참으시지 않으신다. 그는 기쁨으로 문을 여신다. 그러므로 문이 닫혔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가 열쇠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의 권위에는 평안함과 두려움이 있다.
우리의 평안함은 우리 주님께서 부르시고 파송하실 때 그의 종들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확신이다. 그는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인 모든 것을 공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는 그의 대사들을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실 수 있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 까마귀들을 보내실 뿐만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구하기 위해 천사의 군대를 보내실 수 있는 분이시다.
동시에 우리 주님의 통치권과 권위는 우리의 두려움이 된다. 우리가 그를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음을 알고 언젠가 그를 대면해야만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명령의 초점은 제자를 삼는 것 에 있다.
위임령의 핵심을 꿰뚫고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사실들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임령을 잘 분석해야 한다. 이 위임령 속에는 열쇠가 되는 네 가지 모습의 동사가 들어있다.
이 네 가지 형태는 go , teach (실제로는 disciple ), baptizing , 그리고 teaching 이다. 이 네 가지 단어 중에서 제자를 삼으라 고 번역된 동사 disciple 이 중심이다. 오직 그 단어 하나만 명령형이다. 그것이 위임령의 핵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동사들은 위임령을 수행하기 위한 길과 방법으로써 중심적인 위임령에 포함되어 있는 분사들이다. 그것들은 주 동사를 보충하는 것이다. 명확하고 분명한 과정 절차를 통하여 교회는 제자 삼는 것에 대한 위임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제자 삼으라는 것이 명령의 초점이다.
그리스도 제자도의 교리는 우리의 위임령과 신약성서에서 핵심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안에서 270번 언급되고 있으며 서신서에서는 바울에 의해 아주 자주 사용되곤 하였다. 그리스도 제자도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생명력 있는 표현이다. 그리스도 제자도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과 가르침 속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는 제자를 삼는 자이다. 그의 부르심은 복음안에서 3중의 방법으로 나타난다.:
(1) 개별적인 소명의 역사적인 기록. 개인적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다. 하지만 제자로의 소명과 사도로의 임명은 구별된다. 전자는 마태복음 4:19-21과 9:9의 구절에서 알 수 있고 반면에 후자는 마가복음 3:13-19과 누가복음 6:12-16에 서술되어 있다.
(2) 나를 따르라 는 말씀 속에서 개개인들을 향한 반복적인 연설.
따르라 , 나를 따르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는 말은 20번 이상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다양한 개개인들에게 하신 말씀들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나타난다. : 시몬과 안드레(마 4:19; 막 1:17); 야고보와 요한 (마 4:21; 막 1:20, 이들 문장속에 함축되어 있다); 마태 (마 9:9; 막 2:14; 눅 5:27) ; 빌립(요한 1:43) ; 베드로 (요한 21:19,22) ; 부자청년(마 19:21; 막 10:21; 눅 18:22) ; 그의 다른 제자들(마 8:22); 아무든지(마 16:24; 막 8:34; 눅 9:23, 요한 12:26).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것같이 고린도인들에게 자신을 본 받는자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고전 11:1). 또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도 그의 간곡한 권고는 계속된다(엡 5:13, 빌 3:17, 살전 1:6).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을 매일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위하여 거룩한 소명을 받은 것이다.
(3) 다른 여러 가지 경우의 표현 -
십자가를 지라. 이것은 모든 신자에게까지 제자로 부르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어떠한 크리스챤도 예외는 없다.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의 소명은 계속된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눅 9:23-24; 참조 마 10:38-39; 16:24-25; 막 8:34; 눅 14:27).
동시에 우리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 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바울은 주님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길 세 번이나 간구 했었다. 주님께서는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고 응답하셨고 바울에게 평화를 허락하셨으나 고통으로부터 구해 주시지는 않았다. 육체의 가시 는 바울의 삶에 있어서 고도의 인격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유익을 위하여 자신을 지키도록 육체의 가시 를 갖게 됨을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인생의 짐들 이 있다. 그것들은 괴로움, 시련, 실망 그리고 억압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질병, 사고, 화재, 자연재해와 같은 인생의 짐들을 함께 공유한다. 그러면서 이 육체의 가시 와 인생의 짐들 과는 대조적인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경험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신자 이상이다. 제자는 평범한 지식 속에서 배우는 자 이상이다. 심지어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 이상이다. 그러면서도 제자는 믿는 사람이다 :
제자의 성경적 개념은 항상 겸손한 추종, 변함없는 교제, 깨끗하고 편견 없는 마음, 이의 없는 순종과 예비된 복종, 당당한 믿음, 끈기있는 노동, 이타적인 봉사, 자기부인, 고통의 인내, 희생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목적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성취이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크리스챤으로 부름을 받았다.
둘째, 제자들은 모든 민족으로 만들어진다.
위임령은 민족주의, 국수주의, 지방색, 배타주의를 금하고 있다. 우리 주님은 세계의 열방이라는 표현으로 특정한 민족을 인정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차별 대우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위임령의 성취는 국제적이며, 모든 인종과 문화를 초월한다.
사도행전에 있는 교회는 다양한 사회 계급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셋째로 제자를 삼는 것은 교제와 가르침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성장과정을 포함한다.
제자들에게는 졸업이 없다. 그러므로 초신자도 기성 신자도 모두 같은 제자이다. 제자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아무도 완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제자도를 완벽하게 성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2) 마가복음에 입각한 대위임령
마가복음의 배경은 그 후에 (16:14)라는 단어와 관련된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나타나심에 대한 장면과 관련이 있으나 이 간결한 언어로 정확한 시간을 결정하기 어렵다. 한 가지 명백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전 40일 중 어느 날 이 위임령을 명하셨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1> 선교의 방법 - 설교(전파하라)
<2> 선교의 범위 - 세계(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3> 선교의 메시지 - 복음
마가복음의 선교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구두로 선포하는 것이다.기쁨의 좋은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는 대위임령은 우리의 것이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의 교회로 하여금 증인이 되라고 온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설교하는 의무를 명백하게 지워준 것이다.
3) 누가복음에 따른 대위임령
누가의 대위임령은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닫혀진 문 뒤에서 떨고 있는 제자들과 만나신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기록된 것이다. 두려움으로 정신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실망과 좌절 상태였던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인사하시며 주님은 들어오셨다.
<1> 복음의 계시적 기초 - 성경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시편.
<2> 복음의 내용 -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
<3> 복음의 대가 - 회개와 사죄의 선포(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
<4> 복음의 범위 - 모든 족속
<5> 복음의 도구 - 너희들이 증인이다.
<5> 복음의 역동성 -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교회는 자신의 지혜나 창의력을 신뢰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의 메시지가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나온 메시지여야 한다.
성경의 메시지에 대하여 열린 이해를 가지고 그것을 믿고 순종하는 가운데 선교사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형성된 성경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선교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에 메시지의 중점을 주어야 한다.
(1)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한 사실이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한다.
(2) 회개와 사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3) 크리스챤의 생활은 오직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여야 한다.
4) 요한복음에 따른 대위임령
요한은 이 날을 제자들이 모였던 바로 그 날(아마도 부활하신 날)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장면은 누가복음에서 보는 것과 같다. 익숙한 인사말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 지어다 (20:19)라는 함께 그의 부활을 물리적으로 증거하여 제시하고 그들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며, 그들의 중요한 사역을 명령하고 있다.
<1> 근거 -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2> 명령 - 그러므로 나도 너희를 보낸다.
<3> 구비 조건 - 성령을 받으라
<4> 사명 - 죄를 사(용서)하라
요한은 영적인 면을 강조한다. 제자들에게 평강을 말씀하신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어 모든 의심과 두려움을 몰아낸 후 자신이 친히 아버지께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듯이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나아가라고 명하신다.
(1) 이 사명은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위임하신 사역으로 제자들이 주님과 하나됨을 의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그리스도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그의 사역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물러나시지 않을 것이다. 세계 복음화 사업이 그의 구속 사업만큼 중요할 뿐 아니라 이 사업이야말로 바로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가장 위대한 사도이시다(히3:1). 사도들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그의 사업을 계속해 나가도록 명령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화해의 사역을 맡기셨다.
(2)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 행해지는 선교여야 한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말은 여기서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데 저자는 이것을 단지 오순절에 성취되어질 약속으로만 보는 입장에 반대한다. 그리고 제자들이 성령을 받았던 바로 그때나 그 이후 오순절에 성령의 은사나 권능을 받았던 때로 국한하는 것도 반대한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이 보여주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와 오순절에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던 성령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역사 하셨던 성령과 같으며(슥4:6), 더 나아가 크리스챤의 온전한 삶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3) 선교는 제자들은 영적인 사역에 몰두하며, 화해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다.
어떤 누구의 죄일지라도 네가 사하면 그 죄가 사라질 것이요, 어떤 누구의 죄일지라도 네가 내버려두면 그대로 남을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 약간의 갈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리적으로 분명하게, 이 구절은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능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자들은 축복의 특권을 가지고 있고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께 죄인들을 중재하고 화해의 사역을 감당해야할 엄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의심할 것도 없이 제자들에게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든 열방 가운데 선포되어야 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메시지 없이 구원의 길은 발견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죄를 사할 권능은 없으나 죄를 없이 할 수 있게 하는 능력 안에서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만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사람들을 회개하게 하고 믿게 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그 백성들의 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세상을 향한 교회의 거룩하고도 막중한 책임이 있다. 만일 교회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전하는 데 실패한다면 그 어떤 누구도 그 일을 할 수 없고 세상은 죄 가운데 있고 결국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악의 노예로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 때문에 교회는 단호하게 악의 세력에 반대하고 부차적인 모든 종류의 일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자기 스스로를 노력해야 한다.
6. 선교적인 과제와 교훈
예수님은 자신이 친히 이 땅에 선교사로 오신 분이시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으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다양한 방법(선포뿐 아니라 치유와 가르치심을 포함한다)으로 선교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종이 되어 죽기까지 복종하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위임령을 선포하셨다. 불순종 밥먹듯 하던 동화 속의 청개구리도 어머니의 유언에는 순종하였다. 제자들은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그의 생애와 함께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네 기자에 의해 기록된 위대한 지상명령은 우리들에게 자세한 선교적 과제의 패턴을 제시하기에 충분하다. 다시 말해서 이 위탁은 단순하게 현실적인 교회의 모든 것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명령은 우선 교회가 자신의 손을 내밀어 모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위탁은 단순히 성도들의 교화를 위한 프로그램이나 교회 생활 향상을 위한 처방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대위임령이 강조하는 것은 제자 만드는 일과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명령은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그리고 적절한 균형과 역사적인 관점에서 수용되어져야 한다. 그럴 때에 모든 세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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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 Gerald H. Anderson,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Mission,
박근원역, 선교신학서설,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5.
박수암, 예수의 하나님 나라와 세계 선교 (세계선교 1992.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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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현,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 (기독교사상 450), 대한기독교서회, 1996.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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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목사후보생 목회훈련과정 교재』,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신학교육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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