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저편이야기
사람들은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며, "죽음의 저편에도 생명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기 14:14)?"하고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 문제에 관해 말씀하셨으니, 죽음의 뜻과 그 이후의 일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최고의 권위이며 최종적인 것입니다(디모데 후서 3:16-17 ; 고린도 전서 14:37 ; 베드로 후서 1:3, 21).
Ⅰ. 인간이란?
죽은 후의 인간의 운명에 관해 종합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근원과 본성에 관해 인간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기록되었고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으며, 주께서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또는 하나님보다 낮게) 지으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편 8:5)"고 했습니다. 이 성구들은 물질적인 몸과 여호와의 입김이 합하여서 인간을 성스럽게 창조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누가복음 3:38).
바울은 사람이 영, 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서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 전서 5:23)"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몸 안에 간직된 영이니, 그 영적 존재가 곧 진정한 자신인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소산인 인간의 영이 그 아버지와 같으며 불멸의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히브리서 12:9)"이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고 했으니(사도행전 17:29),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하시며(시편 90:1, 2), 생명의 근원이시고(요한복음 5:26 ; 디모데 전서 6:16 ; 누가복음 3:38), 이와 같이 인간의 존재도 불멸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영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바람이나, 공기나, 호흡이 아니며 오직 죽지 않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같은 인간의 지성과 도덕적 본성으로서 구성되고 있으며(야고보서 3: 9),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죽음의 저편에서도 살아남는 불멸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는 것이나 ;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죽지 않는 영에 있어서 인간은 불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Ⅱ. 죽음 이란?
성서는 죽음이란, "즉 육체적인 죽음이란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전도서 12:7)."라고 했은즉, 몸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고, 진정한 인간인 영은 그 근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창세기 3:19).
「테이어」 사전에서는 죽음을, "자연적인 또는 폭력에 의해서 땅 위에서의 생명이 끝나게 되는, 몸과 영혼의 분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P. 282 참조).
혼은 임종 때에 그 몸을 떠나는 것이니, 라헬이 죽을 때에 그 혼이 떠났다고 기록되었습니다(창세기 35:18). 그 슬픈 시간에 몸과 혼은 서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기운이 진한 상태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은 "기운이 진하여 죽어……(창세기 25:8)",
그러므로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혼이 떠나 나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장막에 불과하며, 진정한 인간이 사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죽음이란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베드로후서 1:13-15). 생명이란 몸과 영이 같이 있는 상태이며, 죽음으로 표현되는 상태는 그 영이 몸과 분리되는 때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과 합할 수도 있고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 성서에서는 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 존재함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이 죽어도 영은 살아 있다고 가르치시며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태복음 10:28 ; 참조-누가복음 12:4)"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영혼이 죽지 않음과 몸이 죽은 후에도 사람이 죽이지 못하는 영혼은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살게 됨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죽어가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하신 말씀에서 보다 확실히 강조되었는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누가복음 23:4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강도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며 ; 그는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은 그날 죽음으로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이 "분리"라고 하셨으니, 성서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적용되건 비유적으로 해석되건 간에 죽음은 항상 떠남(분리)이며 절멸이 아닌 것입니다. 죽음에는 세 형태가 있으니 : (1) 물리적인 것-혼과 영의 분리(야고보서 2:26 ; 창세기 35:1), (2) 영적인 것-영혼이 하나님을 떠남(에베소서 2:1 ; 요한복음 5:25 ; 창세기 2:17 ; 이사야 59:1, 2 ; 마태복음 8:22 ; 디모데전서 5:6 ; 요한1서 3:14), (3) 영원한 것-하나님과 떨어져서 영원히 지옥에 있음(요한계시록 20:14, 15 ; 21:8 ; 마태복음 25:46 ; 로마서 6:23 ; 야고보서 5:19, 20 ; 데살로니가 후서 1:7-9 ; 에스겔 18:20).
Ⅲ. 죽은 자는 느낄 수 있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묻기를, "죽은 후로부터 부활할 때까지의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하며, 분리된 영은 의식할 수 있습니까?" 성서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며 정확한 지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주님의 이야기는 영혼이 죽음 이후로부터 부활의 때까지의 기간 중에 느낌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6:19-31). 영혼은 몸이 죽은 이후에도 행복이나 슬픔 중에 살아 있으니 이는 이승에서의 그의 생활에 의해 나눠집니다. 부자는 죽자마자 "고통" 중에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슬픔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 땅위에 살아 있는 그의 다섯 형제를 기억하고 그들은 그 장소에 오지 말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그가 지금 고통을 받는 이유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 반면에 나사로는 역시 죽었으나, 곧 안락하고 행복한 중에 있게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의식할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생활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 "한 부자가 있어"라고 하셨으며,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있었다"고 하셨으니 그 부자는 죽었습니까? 그 거지는 죽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이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위대한 사실을 배울 수 있으니 : (1) 죽음은 절멸이 아니니 영혼은 몸이 분해 된 후에도 살아남아서 그 몸이 땅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것, (2) 몸을 떠난 영혼은 그가 몸과 더불어 이승에 살았을 때의 생활에 따라서 행복과 슬픔을 느끼는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니 그들은 존재를 의식하며 생전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사후에도 영혼은 분리되어 의식하는 존재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셋째 하늘과", "낙원"(고린도후서 12:2-4)의 환상을 보는 경험을 갖고 몸을 떠난 의식적 존재를 명백히 가르쳤습니다. 실상은 바울은 그 순간에 몸 밖에 있어도 그는 의식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도 모든 몸과 혼의 분리의 경우와 같이 몸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6:9-11에 보면, 일찍이 순교한 자들의 영혼들도 역시 심판 날을 기다리는 동안 살아 있으면서 의식할 수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죽은 의로운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요한계시록 14:13)". 모든 의식을 잃은 사람은 복되지 않으니 : 성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미래형으로 "복되리라"가 아니고 현재형으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영혼이 무의식중에 있다는 소위 "잠자는 영혼" 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고(다니엘 12:2)." "무덤 속에(마태복음 27:52, 53)" 있는 것이니 죽은 자들이 묻힌 장소인 묘지는 죽은 몸들이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문자적으로 "잠자는 곳"입니다. 영은 무덤 안에 있지 않으며 어느 곳에서도 잠들어 있지 않고 모두 살아서 느끼는 것입니다(누가복음 20:38)-죽던지 살던지 간에.
그러므로 잔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잠자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깨어나서 새로운 하루의 활동을 시작하듯이, 무덤에서 잠자는 몸들은 새 생명은 얻기 위해서 일어설 것입니다.
"잠자는 영혼"설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며 영혼은 결코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긴 동안을 혼수상태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죽음"이란 "절멸"도 아니며, "영혼의 무의식 상태"도 아니니, 떠난 영은 살아 있고 의식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Ⅳ.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은?
그러면, 죽음에서 몸을 떠나게 분리 된 체로 의식하는 존재를 유지하는 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영혼은 몸과 함께 무덤 속에서 잠자는 것도 아니며, 무덤 주위를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어떤 종교인들이 추상하는 바와 틀린 것입니다. 전생이나 환생의 이론은 모두 성서의 가르치심과 어긋나는 것이니, 성서는 영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전도서 12:7).
그렇다면, 영혼이 죽은 후로부터 부활의 때까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들의 심판 후에 있게 될 최종 목적지입니까, 아니면 중간의 임시 거처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살았던 의인들도 그 의로운 집에 들어가고자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니, 오순절에 베드로는 다윗에 관하여 "다웃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사도행전 2:34)"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들은 죽는 순간에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떠난 모든 영혼을 위하여 그들이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임시 거처로 삼도록 주께서 준비하신 곳은 음부라는 곳입니다. 신약성서의 두 구절이 이 사실을 보여주는데 : (1) 누가복음 16:23에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두 영혼이 죽은 후에는 모두 음부에 있었으며 그 부자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2) 사도행전 2:27, 31에서는 예수의 영이 그가 죽었을 때에 음부에 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사도행전 2:27)"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은 음부로 가고 몸은 무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음부는 의로운 자들의 임시 거처인 낙원과 악인의 임시 거처인 깊은 구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부활의 때에는 각기 있던 곳을 떠나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의로운 자는 천국에, 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그와 함께 그날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곳은 바로 몸을 떠난 영이 쉬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참조-욥기 3:17 ; 요한계시록 14:13).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무의식, 비존재가 되어서는 안되며 천국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40일이 지나서야 천국으로 승천하셨음을 유의하십시오. 누가복음 24:50, 51 ; 사도행전 1:3-11). 그리스도와 강도가 같이 낙원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음부로 가셨다면(사도행전 2:27, 31), 낙원이 음부 안에 있는 것이며, 예수님과 그 강도는 함께 낙원에 있는 동안에 동시에 음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3:43의 낙원은 천국을 뜻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신 후에 바로 천국에 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지 사흘만에 그리스도의 영은 음부를 나왔고, 그 몸은 죽은 자들 중에서 일어났습니다. 한편 그 강도의 영은 음부에, 그 몸은 무덤에 각기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그 상태는 부활의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몸을 떠난 모든 영들은 그들의 몸이 부활하기까지는 음부에 남아 있는 것이니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으면 의로운 자는 천국에, 악한 자는 지옥에 바로 가게 된다"는 것은 성서의 명백한 가르치심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로 의로운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주장도 역시 낙원과 천국이 다르다는 점에서 성서적인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참조-사도행전 2:34).
이처럼, 부자와 나사로는 함께 음부에 있었으나 그 상태는 각기 달랐으니, 하나는 평안히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통 중에 있었으며 그 중간에 늘 큰 수렁이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6:23-26). Tartarus(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편안히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 전에는 음부에서의 기쁨과 고통이 있고, 부활한 몸과 영이 재결합되어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기쁨과 벌을 받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음부에 있을 때에 그 상태가 좋았던지 나빴던지 간에 부활의 때에 그 상태는 바뀔 것입니다.
Sheol이나 Hades는 몸을 떠난 영이 부활로 기다리는 도중에 있는 상태를 뜻하며 ; Paradis와 Tartarus가 음부(Hades)에 속하고 ; Gehenna는 부활 이후의 징벌의 장소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죽으면 다시는 삶의 기록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심각한 일이니 죽음은 결코 사람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고 영이 음부로 가게 되면 구원된 자와 버림받은 자의 사이에는 "구렁"이 고정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6:26 ; 참조-사도행전 1:25 ; 잠언 14:32 ; 전도서 11:3 ; 요한계시록 22:11). 사람이 세상이 살 동안에 한 일들이 그의 음부에서의 상황을 결정하며, 영원한 상벌의 보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참조-요한복음 8: 21 ; 로마서 14:12 ; 고린도 후서 5:10 ; 디도서 2:11, 12). 그의 영혼은 중간 상태에 있으면서 시험을 받지는 않으니, 시험은 죽음에서 끝나고 ; 운명은 봉해지며 신의 뜻은 고정되는 것이니(히브리서 9:27), 죽은 후에는 복음이 없습니다(히브리서 3:7, 15).
제 2의 기회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베드로전서 4:6에 관한 것인데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하는 말씀인바, 복음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전파되었고, 본문을 쓰던 때에는 죽은 자들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Ⅴ. 연옥이란?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음부에서 그 죄의 경중에 의한 기간동안에 고통을 받으면 그 죄는 깨끗해지며 정화된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주장이 "연옥설"입니다. 영혼이 의탁된 이곳을 연옥이라고 하는데 그들 자신은 헤어날 방법이 없고 오직 지상의 독실한 신자들의 대신하는 기도에 의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영혼일지라도 Tartarus에서 Paradise로 갈 수는 없으며, 부자나, 나사로나, 십자가의 강도도 연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나, 죽은 자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디모데전서 2:5 ; 로마서 8:34 ; 히브리서 7:25).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며(베드로전서 2:5 ; 요한계시록 1:6), 성도이니(고린도전서 1:2) ; 직접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미신적인 행위이며,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도 지상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시 못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한 부자의 탄원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분리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 이는 그 사이의 구렁이 고정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Ⅵ. 강신론이란?
성서가 가르치는, 죽은 후의 영이 의식한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서는 아무도 일단 이승을 떠난 자와 살아 있는 자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신접한 신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은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 19:31 ; 참조-20:6, 27 ; 신명기 18:10-12 ; 사도행전 19:18-20 ; 요한계시록 21:8 ; 22:25)."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며 죽은 자들과 의는 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나 ;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쫓을지니…(이사야 8:19, 20)." 어떤 마술적인 눈속임이나 요술 등을 통하여 마치 죽은 친구나 애인의 메시지를 받는 것처럼 속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왕에게 죽은 사무엘이 나타났던 엔돌에서의 이야기는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강신술의 실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사무엘상 28:3-25).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타나는 그와 얘기하기는 했지만 어떤 중간 매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이 일이 있는 동안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밤에 엔돌에서 있은 일은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악마적인 사기 수법을 폭로시킨 것이니, 이 강신술사에게 간 것은 사울의 잘못이었으며(역대상 10:13, 14), 강신론은 사신의 것이며 그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Ⅶ. 몸의 부활
성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며, 예수께서는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 29)."고 하셨고 바울은: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사도행전 24:15)"고 하였습니다. 부활하는 몸은 변화되며 이러한 변화는 순간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죽은 자는 일어나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살아있던 자들은 죽지 않은 체로 그 몸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고린도 전서 15:20-57).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은 음부를 떠나고, 몸은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으니, 말세에 이 일이 행해지고 이 영과 부활한 몸은 합하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5:28, 29 ; 데살로니가전서 4:14 ; 요한계시록 1:18 ; 20:13). 이로써 음부는 없어지고 영원한 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 14), 대 심판의 날이 오게 되어 각자는 영원한 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2:41, 42 ; 16:27 ; 25:31-46 ; 사도행전 17:31 ; 24:15).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디모데후서 1:10)"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히브리서 2:14, 15),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음과, 종국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아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 ; 참조-로마서 8:38, 39).
Ⅷ.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
끝으로 "천국에서는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성서는 이 점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주지는 않으나, 많은 구절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상호인식의 기본이 되는 기억과 개인 성격이 그때에도 있음을 가르치셨으니(마태복음 25:46 ; 요한계시록 6:9, 10), 음부에서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알아보고 자비를 청하였으며(누가복음 16:23, 24),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의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습니다(마태복음 17:3, 4).
다윗은 아이가 아직 장사되지 않았을 때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12:23)"고 했으니 이는 "나는 곧 그곳에서 저와 함께 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도 그곳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까요? 바울은 그가 회심시킨 사람들이 믿음 중에 남아 있고 구원된 자들 중에 있음을 천국에서 알게 됨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2:16 ; 4:1 ; 데살로니가전서 2:19, 20 ; 고린도후서 1:14 ; 4:14). 확실히, 바울은 기억이 끊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옛날에 알던 사람들과 새로이 만나게 됨을 기뻐하고, 상호관계의 재형성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본 것을, 미래에 구원된 자들과 함께 하심을 알아보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3).
물론 천국이나 미래의 생명에 관한 사람의 지식은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는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그저 무덤 저편의 기쁨을 잠간 알게 될 따름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상을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 참조 - 신명기 29:29)"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헤어짐이 잠시 뿐임을 알고 있으니, 천국에서 서로 만나서 주님과 함께 영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덤 저편의 삶과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가올 세계에서 재결합할 것을 소망함은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여로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8)."
요 약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저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세 가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니 : (1) 몸과 영이 육신 안에서 합쳐 있음, (2) 몸과 영은 분리되어 각기 음부와 무덤에 있게 되고, (3) 부활한 몸이 영과 재결합하여 최후의 영원한 거처인 천국이나 지옥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은 영혼이 몸 안에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를 표시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존재하고(로마서 6:16-18 ; 마가복음 16:16 ; 사도행전 16:25-34 ; 2:36-38 ; 22:16 ; 에베소서 2:8 ; 요한일서 1:7 ; 요한계시록 1:5), 또 죄악 중에 버려진 상태입니다(마태복음 19:14 ; 요한복음 8:24 ; 베드로후서 2:20-21). 이 최초의 인간 상태는 눅음에서 끝나며 몸은 무덤에, 죽지 않는 영은 음부로 가게 되는 것이니 죽음은 다음 상태로 가는 문입니다.
두 번째의 원은 음부를 나타내며 몸을 떠난 영들이 머무는 곳인데, 모든 영혼은 이 곳에서 의식하는 존재이니-의로운 영은 낙원에서 기쁨 중에 있고, 악한 영은 지옥(Tartarus)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 음부에서는 구렁이 고정되어 버립니다. 이 상태는 죽음에서 시작되어 부활 때까지 계속되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제 3의 상태가 도래하면 음부는 없어집니다.
세 번째 원은 최후의 심판 날을 표시하며(마태복음 25:31-46 ; 로마서 14:12 ; 요한계시록 20:11-15), 이때에 모든 인류는 몸이 행한 바에 대해 선고를 받고 즉시 그 상벌에 대한 집행이 시작될 것입니다(참조-마태복음 7:21-23 ; 누가복음 12:47, 48).
네 번째의 원은 지옥(Gehenna)을 나타내는 것이니 악한자들이 영벌을 받는 곳입니다(마태복음 25:41-46 ; 데살로니가후서 1:9 ; 마가복음 9:44-48) ; 12:40 ; 요한계시록 21:8). 심판 뒤에는 아무도 그 상태를 절멸하지 못하며, 천국에서는 이 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생명이 끝이 없듯이 악한 자에 대한 영원한 형벌에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원은 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집인 천국을 나타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늙지도 않고 항상 완전한 평화로운 중에 살며,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서 충족된 기쁨과 끝없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후 기
하나님은 놀라우신 성인 천국인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써만 천국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그곳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만이 있으며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고, 슬픈 이별도 없습니다
「거기서 온 세대의 성도가 기쁘게 만나며, 거기서 주님과 형제들이 인사를 서로 나누니 : 환희의 찬송이 그치지 않고, 주님의 미소는 모든 영혼의 잔치와도 같구나」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만드신 영원한 도성에 살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죽음과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며, "죽음의 저편에도 생명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욥기 14:14)?"하고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이 문제에 관해 말씀하셨으니, 죽음의 뜻과 그 이후의 일들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최고의 권위이며 최종적인 것입니다(디모데 후서 3:16-17 ; 고린도 전서 14:37 ; 베드로 후서 1:3, 21).
Ⅰ. 인간이란?
죽은 후의 인간의 운명에 관해 종합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근원과 본성에 관해 인간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라고 기록되었고 창세기 2:7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으며, 주께서 인간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또는 하나님보다 낮게) 지으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시편 8:5)"고 했습니다. 이 성구들은 물질적인 몸과 여호와의 입김이 합하여서 인간을 성스럽게 창조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누가복음 3:38).
바울은 사람이 영, 혼, 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면서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 전서 5:23)"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몸 안에 간직된 영이니, 그 영적 존재가 곧 진정한 자신인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소산인 인간의 영이 그 아버지와 같으며 불멸의 존재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히브리서 12:9)"이십니다. 바울은 우리가 "신의 소생"이라고 했으니(사도행전 17:29), 하나님은 영이시며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하시며(시편 90:1, 2), 생명의 근원이시고(요한복음 5:26 ; 디모데 전서 6:16 ; 누가복음 3:38), 이와 같이 인간의 존재도 불멸하는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영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의 영은 바람이나, 공기나, 호흡이 아니며 오직 죽지 않는, 인간의 이성적 부분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같은 인간의 지성과 도덕적 본성으로서 구성되고 있으며(야고보서 3: 9),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 창조하신 사람은 죽음의 저편에서도 살아남는 불멸의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는 것이나 ;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죽지 않는 영에 있어서 인간은 불멸의 존재인 것입니다.
Ⅱ. 죽음 이란?
성서는 죽음이란, "즉 육체적인 죽음이란 영이 몸을 떠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전도서 12:7)."라고 했은즉, 몸은 그 근원인 흙으로 돌아가고, 진정한 인간인 영은 그 근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창세기 3:19).
「테이어」 사전에서는 죽음을, "자연적인 또는 폭력에 의해서 땅 위에서의 생명이 끝나게 되는, 몸과 영혼의 분리"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P. 282 참조).
혼은 임종 때에 그 몸을 떠나는 것이니, 라헬이 죽을 때에 그 혼이 떠났다고 기록되었습니다(창세기 35:18). 그 슬픈 시간에 몸과 혼은 서로 분리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기운이 진한 상태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은 "기운이 진하여 죽어……(창세기 25:8)",
그러므로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혼이 떠나 나오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장막에 불과하며, 진정한 인간이 사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죽음이란 이 장막을 벗어버리는 것을 뜻합니다(베드로후서 1:13-15). 생명이란 몸과 영이 같이 있는 상태이며, 죽음으로 표현되는 상태는 그 영이 몸과 분리되는 때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육신과 합할 수도 있고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니, 실제로 성서에서는 죽은 후에도 영혼이 계속 존재함을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이 죽어도 영은 살아 있다고 가르치시며 "몸은 죽어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태복음 10:28 ; 참조-누가복음 12:4)"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말씀은 영혼이 죽지 않음과 몸이 죽은 후에도 사람이 죽이지 못하는 영혼은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죽은 뒤에도 계속 살게 됨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께서 죽어가며 회개하는 강도에게 하신 말씀에서 보다 확실히 강조되었는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니라(누가복음 23:43)."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강도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며 ; 그는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강도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은 그날 죽음으로써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이 "분리"라고 하셨으니, 성서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적용되건 비유적으로 해석되건 간에 죽음은 항상 떠남(분리)이며 절멸이 아닌 것입니다. 죽음에는 세 형태가 있으니 : (1) 물리적인 것-혼과 영의 분리(야고보서 2:26 ; 창세기 35:1), (2) 영적인 것-영혼이 하나님을 떠남(에베소서 2:1 ; 요한복음 5:25 ; 창세기 2:17 ; 이사야 59:1, 2 ; 마태복음 8:22 ; 디모데전서 5:6 ; 요한1서 3:14), (3) 영원한 것-하나님과 떨어져서 영원히 지옥에 있음(요한계시록 20:14, 15 ; 21:8 ; 마태복음 25:46 ; 로마서 6:23 ; 야고보서 5:19, 20 ; 데살로니가 후서 1:7-9 ; 에스겔 18:20).
Ⅲ. 죽은 자는 느낄 수 있는가?
또, 많은 사람들이 묻기를, "죽은 후로부터 부활할 때까지의 영혼들의 상태는 어떠하며, 분리된 영은 의식할 수 있습니까?" 성서는 이러한 질문에 답을 주며 정확한 지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주님의 이야기는 영혼이 죽음 이후로부터 부활의 때까지의 기간 중에 느낌을 가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누가복음 16:19-31). 영혼은 몸이 죽은 이후에도 행복이나 슬픔 중에 살아 있으니 이는 이승에서의 그의 생활에 의해 나눠집니다. 부자는 죽자마자 "고통" 중에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슬픔을 알고 있었음은 물론 땅위에 살아 있는 그의 다섯 형제를 기억하고 그들은 그 장소에 오지 말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그가 지금 고통을 받는 이유를 깨닫게 했습니다. 그 반면에 나사로는 역시 죽었으나, 곧 안락하고 행복한 중에 있게 되었으니 이들은 모두 의식할 수 있는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그들의 생활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 "한 부자가 있어"라고 하셨으며,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있었다"고 하셨으니 그 부자는 죽었습니까? 그 거지는 죽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이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위대한 사실을 배울 수 있으니 : (1) 죽음은 절멸이 아니니 영혼은 몸이 분해 된 후에도 살아남아서 그 몸이 땅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것, (2) 몸을 떠난 영혼은 그가 몸과 더불어 이승에 살았을 때의 생활에 따라서 행복과 슬픔을 느끼는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것이니 그들은 존재를 의식하며 생전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의 사후에도 영혼은 분리되어 의식하는 존재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셋째 하늘과", "낙원"(고린도후서 12:2-4)의 환상을 보는 경험을 갖고 몸을 떠난 의식적 존재를 명백히 가르쳤습니다. 실상은 바울은 그 순간에 몸 밖에 있어도 그는 의식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 경우에도 모든 몸과 혼의 분리의 경우와 같이 몸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 6:9-11에 보면, 일찍이 순교한 자들의 영혼들도 역시 심판 날을 기다리는 동안 살아 있으면서 의식할 수도 있는 상태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죽은 의로운 자들은 복이 있다고 하였으니 :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요한계시록 14:13)". 모든 의식을 잃은 사람은 복되지 않으니 : 성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이는 미래형으로 "복되리라"가 아니고 현재형으로 "복되다"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는 영혼이 무의식중에 있다는 소위 "잠자는 영혼" 설을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은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고(다니엘 12:2)." "무덤 속에(마태복음 27:52, 53)" 있는 것이니 죽은 자들이 묻힌 장소인 묘지는 죽은 몸들이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문자적으로 "잠자는 곳"입니다. 영은 무덤 안에 있지 않으며 어느 곳에서도 잠들어 있지 않고 모두 살아서 느끼는 것입니다(누가복음 20:38)-죽던지 살던지 간에.
그러므로 잔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잠자던 사람이 아침이 되면 깨어나서 새로운 하루의 활동을 시작하듯이, 무덤에서 잠자는 몸들은 새 생명은 얻기 위해서 일어설 것입니다.
"잠자는 영혼"설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며 영혼은 결코 죽음에서 부활에 이르는 긴 동안을 혼수상태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에서 "죽음"이란 "절멸"도 아니며, "영혼의 무의식 상태"도 아니니, 떠난 영은 살아 있고 의식하는 것임을 확실히 알아야만 합니다.
Ⅳ. 죽은 자들이 있는 곳은?
그러면, 죽음에서 몸을 떠나게 분리 된 체로 의식하는 존재를 유지하는 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영혼은 몸과 함께 무덤 속에서 잠자는 것도 아니며, 무덤 주위를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니 어떤 종교인들이 추상하는 바와 틀린 것입니다. 전생이나 환생의 이론은 모두 성서의 가르치심과 어긋나는 것이니, 성서는 영혼이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전도서 12:7).
그렇다면, 영혼이 죽은 후로부터 부활의 때까지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들의 심판 후에 있게 될 최종 목적지입니까, 아니면 중간의 임시 거처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1-3)."
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의 살았던 의인들도 그 의로운 집에 들어가고자 아직도 기다리고 있으니, 오순절에 베드로는 다윗에 관하여 "다웃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사도행전 2:34)"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들은 죽는 순간에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떠난 모든 영혼을 위하여 그들이 죽음에서 부활까지의 임시 거처로 삼도록 주께서 준비하신 곳은 음부라는 곳입니다. 신약성서의 두 구절이 이 사실을 보여주는데 : (1) 누가복음 16:23에서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두 영혼이 죽은 후에는 모두 음부에 있었으며 그 부자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2) 사도행전 2:27, 31에서는 예수의 영이 그가 죽었을 때에 음부에 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는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사도행전 2:27)"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은 음부로 가고 몸은 무덤으로 가는 것입니다. 음부는 의로운 자들의 임시 거처인 낙원과 악인의 임시 거처인 깊은 구렁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부활의 때에는 각기 있던 곳을 떠나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의로운 자는 천국에, 악한 자는 지옥으로 가게 되어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강도에게 그와 함께 그날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곳은 바로 몸을 떠난 영이 쉬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참조-욥기 3:17 ; 요한계시록 14:13). 낙원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무의식, 비존재가 되어서는 안되며 천국과도 다른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40일이 지나서야 천국으로 승천하셨음을 유의하십시오. 누가복음 24:50, 51 ; 사도행전 1:3-11). 그리스도와 강도가 같이 낙원에 있었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음부로 가셨다면(사도행전 2:27, 31), 낙원이 음부 안에 있는 것이며, 예수님과 그 강도는 함께 낙원에 있는 동안에 동시에 음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3:43의 낙원은 천국을 뜻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신 후에 바로 천국에 가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지 사흘만에 그리스도의 영은 음부를 나왔고, 그 몸은 죽은 자들 중에서 일어났습니다. 한편 그 강도의 영은 음부에, 그 몸은 무덤에 각기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 그 상태는 부활의 때까지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몸을 떠난 모든 영들은 그들의 몸이 부활하기까지는 음부에 남아 있는 것이니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죽으면 의로운 자는 천국에, 악한 자는 지옥에 바로 가게 된다"는 것은 성서의 명백한 가르치심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로 의로운 영혼은 곧바로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주장도 역시 낙원과 천국이 다르다는 점에서 성서적인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참조-사도행전 2:34).
이처럼, 부자와 나사로는 함께 음부에 있었으나 그 상태는 각기 달랐으니, 하나는 평안히 있었고, 다른 하나는 고통 중에 있었으며 그 중간에 늘 큰 수렁이 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누가복음 16:23-26). Tartarus(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속에서 편안히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 전에는 음부에서의 기쁨과 고통이 있고, 부활한 몸과 영이 재결합되어 최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기쁨과 벌을 받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음부에 있을 때에 그 상태가 좋았던지 나빴던지 간에 부활의 때에 그 상태는 바뀔 것입니다.
Sheol이나 Hades는 몸을 떠난 영이 부활로 기다리는 도중에 있는 상태를 뜻하며 ; Paradis와 Tartarus가 음부(Hades)에 속하고 ; Gehenna는 부활 이후의 징벌의 장소라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죽으면 다시는 삶의 기록을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고 심각한 일이니 죽음은 결코 사람의 성격을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오고 영이 음부로 가게 되면 구원된 자와 버림받은 자의 사이에는 "구렁"이 고정되는 것입니다(누가복음 16:26 ; 참조-사도행전 1:25 ; 잠언 14:32 ; 전도서 11:3 ; 요한계시록 22:11). 사람이 세상이 살 동안에 한 일들이 그의 음부에서의 상황을 결정하며, 영원한 상벌의 보응을 결정하는 것입니다(참조-요한복음 8: 21 ; 로마서 14:12 ; 고린도 후서 5:10 ; 디도서 2:11, 12). 그의 영혼은 중간 상태에 있으면서 시험을 받지는 않으니, 시험은 죽음에서 끝나고 ; 운명은 봉해지며 신의 뜻은 고정되는 것이니(히브리서 9:27), 죽은 후에는 복음이 없습니다(히브리서 3:7, 15).
제 2의 기회에 관한 또 다른 오해는 베드로전서 4:6에 관한 것인데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하는 말씀인바, 복음이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전파되었고, 본문을 쓰던 때에는 죽은 자들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Ⅴ. 연옥이란?
세례를 받은 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음부에서 그 죄의 경중에 의한 기간동안에 고통을 받으면 그 죄는 깨끗해지며 정화된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된다는 주장이 "연옥설"입니다. 영혼이 의탁된 이곳을 연옥이라고 하는데 그들 자신은 헤어날 방법이 없고 오직 지상의 독실한 신자들의 대신하는 기도에 의해서만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영혼일지라도 Tartarus에서 Paradise로 갈 수는 없으며, 부자나, 나사로나, 십자가의 강도도 연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성서는 죽은 자를 위해서나, 죽은 자에 대해서 기도하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디모데전서 2:5 ; 로마서 8:34 ; 히브리서 7:25).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며(베드로전서 2:5 ; 요한계시록 1:6), 성도이니(고린도전서 1:2) ; 직접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미신적인 행위이며, 마찬가지로, 죽은 자들도 지상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시 못하는 것입니다. 지상의 형제들을 위한 부자의 탄원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분리된 상태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 이는 그 사이의 구렁이 고정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Ⅵ. 강신론이란?
성서가 가르치는, 죽은 후의 영이 의식한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죽은 자와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성서는 아무도 일단 이승을 떠난 자와 살아 있는 자와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고 가르칠 뿐 아니라 이러한 주장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신접한 신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은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위기 19:31 ; 참조-20:6, 27 ; 신명기 18:10-12 ; 사도행전 19:18-20 ; 요한계시록 21:8 ; 22:25)."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며 죽은 자들과 의는 하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나 ;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쫓을지니…(이사야 8:19, 20)." 어떤 마술적인 눈속임이나 요술 등을 통하여 마치 죽은 친구나 애인의 메시지를 받는 것처럼 속이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왕에게 죽은 사무엘이 나타났던 엔돌에서의 이야기는 이미 연구한 바와 같이 강신술의 실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사무엘상 28:3-25).
사무엘이 사울에게 나타나는 그와 얘기하기는 했지만 어떤 중간 매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이 일이 있는 동안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 밤에 엔돌에서 있은 일은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악마적인 사기 수법을 폭로시킨 것이니, 이 강신술사에게 간 것은 사울의 잘못이었으며(역대상 10:13, 14), 강신론은 사신의 것이며 그 주장은 허무맹랑한 것입니다.
Ⅶ. 몸의 부활
성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며, 예수께서는 :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8, 29)."고 하셨고 바울은: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사도행전 24:15)"고 하였습니다. 부활하는 몸은 변화되며 이러한 변화는 순간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죽은 자는 일어나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살아있던 자들은 죽지 않은 체로 그 몸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고린도 전서 15:20-57).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영은 음부를 떠나고, 몸은 무덤에서 일어난다고 성서는 말하고 있으니, 말세에 이 일이 행해지고 이 영과 부활한 몸은 합하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5:28, 29 ; 데살로니가전서 4:14 ; 요한계시록 1:18 ; 20:13). 이로써 음부는 없어지고 영원한 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요한계시록 20: 14), 대 심판의 날이 오게 되어 각자는 영원한 상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마태복음 12:41, 42 ; 16:27 ; 25:31-46 ; 사도행전 17:31 ; 24:15).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디모데후서 1:10)" 그러므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히브리서 2:14, 15),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셨음과, 종국에는 모든 죽은 자들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아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 ; 참조-로마서 8:38, 39).
Ⅷ.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
끝으로 "천국에서는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하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성서는 이 점에 대해 분명한 언급을 주지는 않으나, 많은 구절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상호인식의 기본이 되는 기억과 개인 성격이 그때에도 있음을 가르치셨으니(마태복음 25:46 ; 요한계시록 6:9, 10), 음부에서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알아보고 자비를 청하였으며(누가복음 16:23, 24), 베드로는 변화 산상에서의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보았습니다(마태복음 17:3, 4).
다윗은 아이가 아직 장사되지 않았을 때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사무엘하 12:23)"고 했으니 이는 "나는 곧 그곳에서 저와 함께 하리라"는 뜻입니다. 이 경우에도 그곳에서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까요? 바울은 그가 회심시킨 사람들이 믿음 중에 남아 있고 구원된 자들 중에 있음을 천국에서 알게 됨을 기뻐한다고 말했습니다(빌립보서 2:16 ; 4:1 ; 데살로니가전서 2:19, 20 ; 고린도후서 1:14 ; 4:14). 확실히, 바울은 기억이 끊어지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옛날에 알던 사람들과 새로이 만나게 됨을 기뻐하고, 상호관계의 재형성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그리스도를 알아 본 것을, 미래에 구원된 자들과 함께 하심을 알아보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습니다(요한계시록 1:13).
물론 천국이나 미래의 생명에 관한 사람의 지식은 그가 지상에 사는 동안에는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 그저 무덤 저편의 기쁨을 잠간 알게 될 따름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상을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 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한일서 3:2 ; 참조 - 신명기 29:29)"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헤어짐이 잠시 뿐임을 알고 있으니, 천국에서 서로 만나서 주님과 함께 영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덤 저편의 삶과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가올 세계에서 재결합할 것을 소망함은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그러므로 이 여로 말로 서로 위로하라(데살로니가전서 4:18)."
요 약
성서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저편에 있는 영원한 존재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세 가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니 : (1) 몸과 영이 육신 안에서 합쳐 있음, (2) 몸과 영은 분리되어 각기 음부와 무덤에 있게 되고, (3) 부활한 몸이 영과 재결합하여 최후의 영원한 거처인 천국이나 지옥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원은 영혼이 몸 안에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를 표시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존재하고(로마서 6:16-18 ; 마가복음 16:16 ; 사도행전 16:25-34 ; 2:36-38 ; 22:16 ; 에베소서 2:8 ; 요한일서 1:7 ; 요한계시록 1:5), 또 죄악 중에 버려진 상태입니다(마태복음 19:14 ; 요한복음 8:24 ; 베드로후서 2:20-21). 이 최초의 인간 상태는 눅음에서 끝나며 몸은 무덤에, 죽지 않는 영은 음부로 가게 되는 것이니 죽음은 다음 상태로 가는 문입니다.
두 번째의 원은 음부를 나타내며 몸을 떠난 영들이 머무는 곳인데, 모든 영혼은 이 곳에서 의식하는 존재이니-의로운 영은 낙원에서 기쁨 중에 있고, 악한 영은 지옥(Tartarus)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됩니다. 음부에서는 구렁이 고정되어 버립니다. 이 상태는 죽음에서 시작되어 부활 때까지 계속되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써 제 3의 상태가 도래하면 음부는 없어집니다.
세 번째 원은 최후의 심판 날을 표시하며(마태복음 25:31-46 ; 로마서 14:12 ; 요한계시록 20:11-15), 이때에 모든 인류는 몸이 행한 바에 대해 선고를 받고 즉시 그 상벌에 대한 집행이 시작될 것입니다(참조-마태복음 7:21-23 ; 누가복음 12:47, 48).
네 번째의 원은 지옥(Gehenna)을 나타내는 것이니 악한자들이 영벌을 받는 곳입니다(마태복음 25:41-46 ; 데살로니가후서 1:9 ; 마가복음 9:44-48) ; 12:40 ; 요한계시록 21:8). 심판 뒤에는 아무도 그 상태를 절멸하지 못하며, 천국에서는 이 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생명이 끝이 없듯이 악한 자에 대한 영원한 형벌에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원은 의로운 자들의 영원한 집인 천국을 나타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늙지도 않고 항상 완전한 평화로운 중에 살며, 하나님께서는 함께 하심으로서 충족된 기쁨과 끝없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후 기
하나님은 놀라우신 성인 천국인 가장 아름답게 묘사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써만 천국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으며, 그곳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만이 있으며 질병도, 고통도, 죽음도 없고, 슬픈 이별도 없습니다
「거기서 온 세대의 성도가 기쁘게 만나며, 거기서 주님과 형제들이 인사를 서로 나누니 : 환희의 찬송이 그치지 않고, 주님의 미소는 모든 영혼의 잔치와도 같구나」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만드신 영원한 도성에 살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습니까?
출처 : ※★☆보물1호☆★※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메모 :
'인간론!! 영!! 혼!! 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창조론과 진화론, 어느쪽이 더 과학적인가? (0) | 2013.08.02 |
---|---|
[스크랩] 인간 기원에 대하여 (0) | 2013.08.02 |
[스크랩] 성서속의 성 (0) | 2013.07.30 |
[스크랩] 크리스천의 성(性)/ 성(性)이란 성(聖)스럽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 (0) | 2013.07.30 |
[스크랩]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0) | 201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