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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크리스천의 성(性)/ 성(性)이란 성(聖)스럽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아들 2013. 7. 30. 23:13


크리스천의 성(性)/ 성(性)이란 성(聖)스럽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1998년 9월호)

김종철

대전 대일교회 집사, 충남의대 교수

1. 서론

인간은 성적(性的)인 동물에 속한다. 가끔 선천적으로 양성(兩性)을 가지고 있거나 반음양증(半陰陽症) 혹은 가성 반음양증의 애매모호한 성을 가지고 있는 환자들도 있기에, 우선 우리들은 우리가 확실한 남자 혹은 여자인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참 복잡하기만 하여서,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자기가 남성인 것을 극도로 싫어하여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여장(女裝)을 하고 지내다가 중년에 여성으로 성전환(性轉換)하는 수술을 받아 다른 남성과 결혼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요즈음은 성전환 수술도 많이 발달하여 음경(陰莖)을 절제하고 직장(直腸)의 점막 등으로 인공 질(膣)도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전환 수술을 받아야 할만큼 자신의 성에 대해 강렬한 불만을 가지지 않고 살고 있다는 것, 즉 우리에게 주어진 성에 대해 큰 불편이나 원망 없이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진정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간에, 부모의 성적 결합을 통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 빼놓고는 말이다. 그만큼 성이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소중한 성이 작금에 이르러 쾌락과 유희의 도구로 전락되고 값싸게 상품화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너무 괴롭게 만든다. 단순히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한 백의민족의 장래,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여 복 주신 전 인류의 장래가 암담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프리 섹스라는 성적 타락의 급류가 지구촌 전체를 휩쓸면서 교회 안과 기독교인 가정에도 깊숙이 침범하고 있다. 그래서, 자녀를 키우는 아버지요, 환자를 돌보는 의사이고, 의사를 양성하는 교수이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고자 애쓰는 기독인의 한 사람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필자는 20여년 전부터 올바른 성교육을 교회 안에서부터 실시하자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성을 터부시하면서 교회 내에서 성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거부나 금지의 벽 속에 기독교인을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쉬쉬하는 사이에 우리의 자녀들은 세상의 성 물결에 휩싸여 돌이킬 수 없는 퇴폐와 파멸의 길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성에 대한 올바른 성경적 근거를 찾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하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성을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성직자, 의사, 상담가, 심리학자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유아, 어린이, 청소년, 중년, 노년을 대상으로 계속 교육, 평생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2. 신비로운 성의 의학적, 심리학적 접근 : 하나님의 신묘막측(神妙莫測)한 걸작품 (시 139:14)

(1) 의학적인 접근

인체의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 어디서부터인가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양심적인 의사(특히 크리스천 혹은 가톨릭 의사)들은 남성의 정자와 여성의 난자가 결합하는 수정(受精)의 순간을 생명의 태동으로 보고 있다. 이 때 유전자를 통해 그 수정란(受精卵)의 성별(性別)까지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는가? 그러기에 외관상 형태를 알기 힘든 임신 초기의 태아도 분명히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단지 일차 혹은 이차 성징(性徵)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결정된 성(性)과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가진 존귀한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체의 발생과정이 의학자인 필자의 눈에는 너무도 신기하고 오묘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남녀 생식 기관의 분화와 발달 과정은 연구하면 할수록 새롭고 신비롭기만 하다.
남녀의 생식기는 성선(性腺), 성관(性管), 그리고 외부 생식기라는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성선이란 정자가 만들어지는 고환(복강에서 내려옴)과 난자가 만들어지는 난소를 말하며, 성관이란 정자가 전달되는 정관과 난자가 전달되는 난관을 말한다. 외부 생식기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음경과 질을 말한다.

남성의 경우에는 요도(약 17-20 cm)라는 같은 구조물을 이용하여 소변과 정액이 배출되는데 비해, 여성의 경우에는 비뇨기(특히 여성 요도의 길이는 약 4-5 cm로 남성 요도의 1/4 - 1/5밖에 되지 않음)와 생식기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더 고급스럽게(?) 창조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신장에서 생성되어 요관을 거쳐 방광에 고인 소변이 통과하는 남성의 요도는 후방 요도와 전방 요도로 나뉘는데, 이 후방 요도 중의 하나인 전립선 요도에는 전립선과 정낭에서 만들어진 정액이 사정(射精)되는 사정관이 연결되고 있다. 그러니까, 방광에서 내려오는 소변이나 사정할 때 나오는 정액(고환에서 생성된 정자가 정관을 통해 올라가다가 정낭과 합쳐 사정관이 되므로 이 정액 속에는 당연히 정자가 들어 있음) 모두 요도라는 한 통로를 통하여 몸밖으로 배설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평생 모른 채 성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때 특수한 방지 장치가 없으면 사정된 정액이 요도를 통해 외부로 나오지 않고 거꾸로 방광으로 역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특수 장치란 방광의 목 부분에 있는 내부 방광 괄약근(括約筋)이라는 것인데, 남성이 사정할 때 이 근육이 수축하여 정액이 방광으로 역류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사정할 때와 괄약근이 수축할 때의 시간이 정확하게 일치되면서 말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설계가 아닐 수 없다. 실지로 이 괄약근이 장애를 입거나 괄약근과 사정의 정교한 조화가 깨어지는 병적 상태에서는 사출(射出)된 정액이 거꾸로 방광으로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남성의 음경(페니스)에는 뼈가 없다. 아래쪽 가운데에 있는 음경 요도(소변 배설로)를 제외한 나머지의 음경 부분은 혈관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해면체로 구성되어 있다. 음경 해면체 어느 곳에 주사침을 꽂아도 혈액을 채취할 수 있고, 그 주사 바늘을 통해 필요한 약제를 주입하여도 혈관 주위의 연부 조직으로 새지 않고 혈관 속으로 잘 흡수가 될 정도로 말이다. 이렇게 음경 대부분이 특수한 미세 혈관 덩어리로 구성되었기에, 정상인보다 심장병, 동맥경화, 고지혈증, 당뇨병 환자들에서 발기(勃起) 부전증이 더 많이 발생할 수도 있다. 평소에는 이 음경이 부드럽게 위축되어 있는데, 성적인 자극(가장 큰 자극은 시각을 통함)을 받으면 급작스럽게 본래보다 3-4 배까지 커지는 발기 과정을 거치면서 상당히 단단해진다. 정상 혈압이 120/80mmHg인 사람에서는 음경 해면체 혈압이 90mmHg 이상만 되면 성교가 가능해진다. 이 90mmHg 정도의 해면체 혈압은 450-550g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수직 강직도를 나타내는 막대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성적 흥분 상태에서는 음경의 위쪽에 있는 동맥이 늘어나 혈액이 음경으로 모이게 되고, 이 혈액이 스펀지 모양의 혈관 그물로 모여 음경의 길이를 연장하고 크기를 확대시킨다. 동시에 음경 정맥을 눌러 혈액이 빠져 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음경이 계속 발기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병적인 환자들이 예상 외로 많아 발기 부전증, 조루, 불임 등의 증상을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남성들이 요즈음 관심을 모으는 '비아그라'와 같은 혈관 확장제를 복용하여 발기 부전증을 치료하거나 발기 상태를 오래 유지해보려고 하는데, '비아그라'의 부작용이 적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곤 하는 것이 가끔씩 보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음경이 발기된 상태로 성적 흥분을 오래 지속하고픈 것이 대다수 남성들의 공통된 욕구인 것 같지만, 실지로는 발기된 상태가 몇 시간만 지나게 되면 모두들 심한 통증과 불편을 느끼게 된다. 확장된 해면체 혈관에 고인 혈액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장시간 머물러 있으면 흡사 지옥을 맛보는 듯한 고통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방법으로 성적 쾌락을 극대화하다보면 그런 불행이 자초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정상적인 남성이 사정을 하게 되면 동맥의 확장이 중단되어 정맥을 압박하지 못하여 해면체 내에 고여 있던 혈액이 정맥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그래서 음경이 원래의 상태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흥분, 발기, 사정, 위축의 단계가 결코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각 단계별로 신경, 혈관, 호르몬(내분비계), 전기 기계적 작용, 생리 및 생화학 작용(발기 신경 말단에서 신경 전달 물질인 내인성 화학 물질이 분비됨), 정신 작용, 심리 작용 등이 정교하게 합목적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라고 볼 수 있다. 건반악기, 관악기, 타악기, 현악기 자체가 최고급의 성능을 구비해야 하고, 그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가 정확한 박자, 음정, 음량(강약), 음색을 내면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세계적인 성악가와 환상적인 하모니를 연출해야 하는 오페라처럼, 성반응이란 각 단계마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되지 않고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최첨단 종합예술인 것이다. 현대 의학이나 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여 성반응의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생화학적인 면을 어느 정도 밝혀 내긴 하였지만, 아직도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남성의 발기 현상조차 제대로 완전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더구나,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남성의 급속한 성 반응에 비해 훨씬 더 느리고 복잡한 여성의 성반응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 성반응 주기 4단계(흥분, 고조, 오르가즘, 이완 단계)에 따른 남녀의 차이점은 정말 신기하고 복잡하기만 하다. 사실 성(性)이란 인간의 한 부분인데, 이러한 인간의 성 하나만 보더라도 하나님의 솜씨가 얼마나 정교하고 대단한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인간 그 자체는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존재인가? 인간이란 정말 하나님의 최고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남성과 여성은 상호 보완하도록 많은 점에서 서로 다르게 창조되었다. 남녀간에 차이점이 많이 있기에 서로 끌리고 또 부부가 같이 살아갈수록 재미가 있는 것이다. 성적인 면에서도 남성과 여성은 참으로 많이 다르다. <표 1>은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차이점을 의학 및 심리학적인 면에서 구분해본 것이다.

표 1.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점 : 의학, 심리학적 측면

여성은 성생활을 남편과의 보다 안정된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추구하는 경향이 있으나, 남성은 사랑 없이도 성행위가 가능하다. 남성은 시각과 후각을 통해 성적 흥분을 느끼는 즉시 육체적 결합을 시도할 수 있으나, 여성은 사랑이나 좋아하는 감정이 따르지 않는 남성과는 성행위를 할 수 없는 보다 고차원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즉, 성행위 대상에 대한 식별력이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강하다. 남성의 성적 욕구는 마치 가득 쌓아 놓은 나뭇잎이나 건초 무더기에 불을 놓은 것과 같아서, 쉽게 점화가 되고 쉽게 타오르며 쉽게 꺼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 욕구는 마치 숯불이니 연탄불을 피우는 것과 같아서 서서히 점화되어 천천히 타오른다. 이 때 여성에서도 남성과 같은 강렬한 흥분은 있으나, 남성과 달리 절정에 이르는 데 있어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 흥분 상태가 잦아지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장년이나 노인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이러한 남녀 차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결혼 전의 청소년들은 <결혼 예비 학교>를 거쳐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결혼식", 집, 가구, 살림을 위해서는 빚을 내면서까지 엄청난 준비를 하면서도 "결혼 생활"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무런 준비 없이 결혼했다가 결국은 파경에 이르는 커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개의 정상적인 남성에서는 한 번 사정(射精)된 정액 내에 약 3억 마리의 정자가 존재한다. 이렇게 사정된 정자는 3-5일밖에 살지 못한다. 한편, 여성의 난소에서는 월경 주기마다 한 번씩 배란(排卵)이 되는데, 이 때의 난자는 대략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 그러기에 남녀가 성교를 했다고 해서 매번 임신이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배란 전 5일에서 배란 후 1일 사이의 적당한 시기에 성행위가 이루어져야 수정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도, 한 개의 난자가 3억 마리의 정자 중 한 마리만을 선택하게 되니, 그야말로 3억대 1의 경쟁을 뚫고 승리한 정자만이 난관의 팽대부에서 수정란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개의 수정란이 탄생할 확률은 엄청나게 희박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어렵사리 수정된 수정란이 모두 태아로 발육하는 것은 아니다. 수정란은 난관의 운동으로 자궁 쪽으로 가면서 세포 분열을 하게 되는데, 이 수정란이 자궁 내막에 도달하려면 약 5-7일이 소요된다. 자궁에 도착해도 자궁내막에 제대로 착상(着床)하지 못하면 임신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수정란이 착상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 성호르몬들이 적당히 분비되어야 임신이 지속되면서 태아가 제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에도 산모의 자궁 속에서 약 10개월간 태아가 안전하게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너무 많기에, 하나의 새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은 정말 신비로운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아닐 수 없다. 신생아 분만 과정에서도 기형, 장애나 질병 없이 정상적으로 탄생하는 것까지 따져보면, 정상아가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적은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정상인으로 태어나 제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진정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2) 심리학적인 접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식욕, 수면욕, 성욕, 명예욕, 재물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5가지 욕구 모두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들이다. 한 번 생각 해보라. 하나님께서 식욕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벌써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아니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도 먹고 마시고 싶은 욕구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풍성하였던 에덴 동산에서조차 아사(餓死)하여, 그의 까마득한 후손인 우리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을 지도 모르지 않은가? 수면욕은 또 어떤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는 데(시 127:2), 만일 인간에게 자고 싶은 욕망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류는 벌써 과로와 질병으로 멸종된 지 오래일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정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기라도 하였겠는가? 또 필자가 지금 이런 글을 쓸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성욕이 없어 남녀가 서로 끌리지 않는다면 지구촌은 이미 오래 전에 싸움과 전쟁으로 멸망하지 않았겠는가? 이성간에 매력을 느껴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쳐다보고, 연애 편지를 쓰거나 직접 만나길 애쓰고, 매일 같이 있고 싶어 결혼을 하는 등 일련의 가슴 뭉클한 일들이, 성욕이란 것 없이 정말 가능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명예를 추구하고 부(富)를 축적하고 재물을 모으고자 하는 욕구조차 없는 사람이 애써 가정을 꾸리고 그 가족을 위해 상사들의 눈치를 봐가면서 이 IMF 시절에 힘들게 일하려고 하겠는가? 그런데, 지나친 금욕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인 중에도 이런 5가지 인간의 기본 욕구를 무조건 죄악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욕구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 욕구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저 이 욕구들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자신과 가족 및 이웃을 건강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필자는 의사로서 20년이 넘도록 많은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병원에 찾아오거나 입원하는 환자들 중의 상당수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적 욕구마저 상실하고 있음을 너무나 많이 또 자주 보아 왔다. 질병에 시달리는 환자들 중 많은 이들이 밥맛을 잃고 잠을 못 자서 더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식욕과 수면욕이 없어진 환자들은 대개 성욕까지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더 진행이 되면 명예도 체면도 안중에 없어지고 돈 벌어 가족을 부양할 책임감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완전 탈진 상태에서 삶의 의욕 마저 잃은 환자는 세계적인 명의(名醫)가 아무리 좋은 처방과 의술로 치료해도 그 병이 잘 낫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식욕, 수면욕, 성욕, 명예욕, 재물욕이 우리에게 아직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작용하고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는 영혼이나 심신이 병든 사람에게는 감소되고 생명을 잃은 사람에게는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는 사람에게 있어서 어떤 행위를 유발하는 동기로 작용한다. 그런데 이 5가지 욕구에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든지 배가 고프면 식욕이 동하기 마련이다. 아니, 적극적으로는 시장한 사람에게 있어서 식욕이 반드시 동해야 한다. 배가 대단히 고픈데도 식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심각한 병적 상태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거나 걱정ㆍ불안ㆍ공포에 시달리고 있거나, 아니면 신체에 중한 질병이 있어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식욕을 느껴야 음식을 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배가 고파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과식, 폭식, 포식의 결과를 생각하며 스스로 자기의 식욕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맛있다고 또 너무 굶주렸다고 마구 먹어대다가는 소화불량, 설사, 구토 등의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고, 또 너무 급하게 먹다가는 체해서 사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식욕의 다스림을 받기 전에 자기가 식욕을 다스릴 줄 안다. 식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의 불행한 결과를 우리는 많이 보아 왔다. 성욕도 마찬가지이다. 급하고 강한 성욕을 느낀다고 해서, 임신, 낙태, 성병, 가정 파괴, 강간 등의 성범죄, 근친 상간, 패륜, 정신적 피해 등의 후속 결과를 전혀 외면하고 자기 욕심만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성이나 자기를 좋아하는 이성을 보고 그 황홀한 순간만을 생각하면서 마냥 육체를 탐하거나 허용하는 것은 너무 경박하고 무책임하지 않은가? 인생은 그렇게 단순화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한편, 여러분들은 이러한 5가지 기본 욕구 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성욕이라고 대답하길 잘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자가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여러분을 누군가가 납치하여 독방에 가두었다고 가정합시다. 일주일 동안 전혀 음식을 주지 않고 잠도 자지 못하게 하며 배우자와의 면회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 후에 간수가 와서 감방 문을 열어 주면서 '너 먹을래, 잘래, 아니면 배우자를 원해?'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요?"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목마르고 허기지고 한 숨도 못 자서 두 눈이 다 충혈 되어 있는데도 성욕을 먼저 채우길 원하겠는가? 그러기에 성욕은 수면욕이나 식욕보다 강렬하지 않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5가지 욕망은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선하게 조화롭게 또 절제 있게 사용할 때 그 진가가 발휘될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는 이런 욕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서 스스로 파멸에 이르고 또 자기 주변 인물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늘 잠에 취해 지내는 사람을 한 번 가정해 보자. 그런 사람은 직장에 자주 지각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직장 동료들에게조차 많은 피해를 줄 것이다. 이런 사람이 버스나 열차를 몰고 가다가 졸음에 빠진다면 대형 사고라도 나지 않겠는가? 한편, 식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만에 빠져 당뇨병, 고혈압, 뇌졸중, 심장병, 고지혈증(高脂血症) 등 각종 성인병에 시달려 자기 가족까지도 고달프게 만들 것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사 먹을 돈이 모자랄 경우 남의 것을 훔치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명예욕, 재물욕도 너무 지나치면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자신도 패망시키고 집안과 이웃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우리는 역대의 정치가나 재벌들을 통해 잘 보아오고 있지 않은가? 성욕도 예외일 수 없다. 성욕은 인간이 태어나서 사망할 때까지 소멸되지 않고 계속 작용한다. 물론 연령이나 심신의 상태 및 주어진 상황에 따라 정도나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왕성한 성 충동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채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말초적인 쾌락의 도구로만 사용하다가는 끝내 패가망신하게 되어 있다. 자신과 다름없이 존엄한 인격체인 상대방을 단순한 성의 수단 즉 sex partner로만 격하시키는 인격 모독에서부터, 남과 자신의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고, 천형(天刑)인 AIDS와 각종 성병으로 자신과 이웃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등 그 악영향이 대단하지 않은가?

인간의 여러 욕망 중에서도 특히 성욕에 탐닉하다 보면 심한 중독 상태에서 성욕의 노예가 되어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렇게 몰입된 성욕은 제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성욕은 정말 조절하기 힘든 uncontrollable fire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형광등이나 가스 레인지, 각종 전자 제품이니 기계 혹은 컴퓨터 등은 스위치만 누르면 개폐(開閉)와 작동/정지를 명령할 수 있지만, 불타는 정열과 충동적인 성욕은 여간해서 자기 감정이나 의지의 스위치로 그 개폐와 강약을 조절하기가 힘든 것이다. 성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점점 더 자극적인 성적 흥분을 요구하여 정상적인 성행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강간, 매춘, 관음증(觀淫症), 프리 섹스, 가학성 성행위, 동성 연애, 그룹 섹스, 아내 교환(changing partner), 아동 성폭행, 근친 상간, 수간, 성적 흥분제나 마약 사용 등의 변태적인 성행위를 확산시킨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면 배우자 이외의 이성에 대한 성적 욕망도 자연스럽게 조절될 수 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합법적인 부부에게는 서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굉장한 특권을 주셨다는 것이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잠 5:18-19)라는 말씀이 바로 그 증거 아니겠는가? 성적 갈증을 느낄 때 그 갈증을 채워 줄 수 있는 물은 오로지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합법적인 샘, 즉 정식 부부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 하여 네 샘물을 길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잠 5:15-17). 이러한 사실은 다음 장에서 좀더 상세하게 언급될 것이다.

3. 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 거룩하고 신비
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

과거에는 성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순진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성에 대한 무지'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순진하고 깨끗한 것'으로 위장되어서도 안 된다.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성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법칙/교훈'을 배워야 한다. 말씀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성적인 타락에 대처하는 영적 전쟁에 앞장서야 한다. 성(性)은 성(聖)과 통한다. 성(性)은 성(聖)으로만 풀 수 있다. 성(性)은 영성(靈性)의 적이 아니고 친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부부만의 성생활을 허락한다. 성경(聖經)은 성경(性經)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성에 관한 말씀이 신구약 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7-28)라고 최초의 성스러운 명령을 주셨다. 인류 최초의 남녀가 사랑하면서 인격적으로 또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진정 아름답고 거룩하고 즐거운 것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도 심히 좋았을 것(창 1:31)임에 틀림없다. 누가 감히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복 주신 성을 더럽고 추하고 비열한 것으로 평가 절하할 수 있는가? 부부의 성생활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하나님의 최초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신성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창세기 1장에서 성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신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영적 이스라엘도 포함)이 여호와의 품을 떠나 창녀 고멜처럼 음란하게 살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구약성경 아가서(雅歌書)는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과 성적 결합을 얼마나 신선하고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가? 더구나,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서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들을 맞이하는 신혼 예식을 거행하시러 이 땅에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계 19:7-9)? 꿈에도 그리던 혼인식에 신부로 초대될 것을 생각만 해도 우리들의 가슴은 벅차 오르지 않는가? 그런 소망 때문에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현실의 여러 가지 어려운 역경도 극복할 수 있었고, 또 순교까지도 할 수 있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라는 서로 다른 성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성은 혼인 관계 안에서만 계획되었기에 진정 아름답고 거룩하고 멋지고 소중하고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인정을 받은 합법적인 부부 사이에서 행해지는 성행위(육체적인 접촉만이 아니고 인격과 삶이 수반된 총체적인 결합이요 상호간에 솔직한 최고급의 의사 소통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값지고 복된 선물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정식 혼인 관계에서의 성을 복되게 하셨지만, 그에 반해 남녀간에 지켜야 할 성 질서를 파괴하는 혼전 관계(신 22장, 행 15:20, 고전 6장), 혼외 정사(레 19장, 신 22-24장, 마 5:27-28, 고전 6장), 강간, 근친 상간(incest), 동성 연애, 수간, 윤락 행위(레 15, 18장, 신 22-23장, 롬 1:26-27, 고전 6장, 갈 5:19, 유 1:7) 등을 엄금(嚴禁)하셨다(표 2).

표 2. 성 관리 지침



우리는 혼인 질서 속의 정당한 성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로 감사히 받아 부부 사이에서 평생 즐기며 살아야 한다. 부부는 성생활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한다(표 2). 아무리 세상이 초급속도로 바뀌어도 정식 부부 이외의 성행위는 죄악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엄연한 하나님의 법도이다. 이 지구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엄연한 사실을 절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사탄이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수 있다. 육체까지라도...' 라고 음악, 미술, 조각, 무용, 영화, 비디오, 연극, 문학 세계 등에서 아무리 미화하여도, 그리스도인들은 그 미혹에 절대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아직도 그 마누라(혹은 남편)하고 사느냐?", "여태까지 애인 하나 만들지 못하였느냐?", "매춘이나 원족(遠足) 아르바이트, 음란 채팅, 묻지마 관광, 전화방, 폰 섹스, 가상 현실(virtual reality)을 이용한 사이버 섹스(컴퓨터 섹스), 인터넷 포르노그라피, 몰래 카메라, 국내판 음란물 등도 모르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라고 말하면서 팔불출로 취급하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부부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전혀 개의치 않아야 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구세대의 유물이라느니,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수구주의자요 보수주의자라느니, 멋과 풍류조차 모르고 사는 "꽉 막힌 원시인"이라느니 하면서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부어도,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말씀과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인들은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 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8)"라는 말씀에 따라 당당하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의 성은 배우자끼리 가장 친근한 교제(communication or companionship)를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 하나님의 최고 선물이다. 독처(獨處)하는 외로움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대화, 동거, 취미 공유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부부간의 풍성한 성생활은 고독하지 않는 단계를 벗어나 서로간에 만족스럽고 황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벌거벗어도 서로 부끄럽지 않는 것은(창 2:24-25) "하나됨"의 연합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친근한 하나님의 교제법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여호와를 알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부부가 서로를 아는 것처럼 친밀하게 속속들이 하나님을 알아주기를 원하시지 않던가?

부부의 성생활은 두 사람만의 시간과 은밀한 공간에서 부부끼리 깊은 쾌락(pleasure)을 누리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잠 5:15-17)"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는 부부의 성생활을 통해 상호간에 원숙한 기쁨을 누릴 것을 오히려 권유하고 계신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라는 말씀을 통해, 조강지처를 즐김으로써 그녀를 평생 복되게 하라고 남편들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시다. 성경은 또한 아내 역시 자기 남편의 몸을 즐길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음을 보여 준다. "나의 사랑하는 그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아 5:10)"라고 칭찬하면서, 아내들은 믿음직스러운 자기 남편의 튼튼한 팔과 드넓은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이다. 아내가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남편의 모든 것을 즐기고자 할 때, 남편은 아내의 적극적인 자세를 절대로 비웃거나 핀잔 주어서는 안 된다. 부부의 성생활에서 발생하는 기쁨은 분명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속하므로, 부부는 성생활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이 대화하고 정보를 교환해야 한다. 서로 상대방을 리드해보기도 하고, 평생 상대방을 연구하면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을 개발하여 둘 사이에서만 은밀하게 시도해볼 수도 있어야 한다.

부부의 성생활은 음행, 성적인 범죄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준비하신 하나님의 예방책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고전 7:1-5). 기혼자는 자기 배우자의 성적인 긴장이나 무절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배우자에게 성적 결합을 요구할 권리도 있다.
합법적인 부부가 주 안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둘이 하나가 되어 서로를 즐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도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침실에 하나님을 초대할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한국 크리스천들은 유교적인 배경, 성을 금기시 하던 잘못된 교회의 전통으로 인해 부부의 성행위 현장에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초청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서로를 탐하는 부부의 성적 결합 행위가 얼마나 수치스럽고 더러운 일인데, 그곳에서 어떻게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 부부의 한 몸 되는 과정을 외면하시고 저주하시면서 우리에게 벌을 주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기독인들이 대부분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의 성을 창조하시고 그 성에 복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둘이 한 몸 되는 과정을 벌하시겠는가?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총체적인 결합을 기뻐하실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뿌리깊은 우리 사고의 오류를 깨닫고 과감하게 발상의 전환을 도모해야 할 때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말씀을 암송하면서 말이다.

아직 미혼이거나 독신으로 살길 원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주 안에서의 참되고 순결한 사랑"은 미래의 자기 자녀를 위해서도 필요하고(시 127:3, 벧전 3:7), 미래의 배우자(히 13:4), 교제 중인 사람(고전 13:7, 롬 13:10), 자기 자신(롬 13:9, 고전 6:18),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도(마 22:37, 요 14:15) 필수적인 것이다. 결혼 전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계속해서 순결을 유지하게 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게 된다. 즉, 죄책감이 생길 리가 없고, 성병, AIDS나 원하지 않던 임신 등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성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돈을 주고 혹은 서로 탐하여 성관계를 가졌던), 불특정 성적 파트너와 정식으로 결혼한 자기 배우자를 비교하는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으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어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자기 배우자를 세상 끝날까지 신뢰할 수 있으며(돌발적인 성적 충동을 느끼는 대상과의 값싼 1회용 성행위에서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자기 배우자에게로만 향한 매력적인 기대감이 충족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또한, 신혼 초야의 신성한 침실과 결혼 생활 속의 풍성한 침실에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초청하는 복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현실로 나타난 왜곡된 성의 세계

한국 대학생의 성의식 구조에 대해 조사한 한 통계에서 보듯이, "서로 좋아하면 언제라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다."(62%), "혼전 성관계도 무방하다."(20-30%), "굳이 결혼 생활을 할 필요가 없다."(20%)는 등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해가 갈수록 우리 사회에 만연해지고 있다. 전국의 대학생 1,200명을 대상으로 한 얼마 전의 또 다른 설문 조사는 우리를 더욱더 깜짝 놀라게 만든다. "사랑한다면 그 사람과의 혼전 성관계도 좋다."라고 응답한 학생이 약 80%를 넘어 섰고, "결혼 후에 배우자의 과거를 알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학생도 약 75% 이상인 반면, "혼전 성관계는 절대 안 된다" 라고 응답한 대학생은 15% 정도에 불과하였으니 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우리 나라 남자 고등학생의 약 20% 이상과 여고생의 약 10%가 이미 성을 경험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결혼하기 전에 어느 정도의 성경험을 해야 결혼 후에 부부관계가 원만해진다.", "총각 딱지는 일찍 뗄수록 좋다. 왜냐하면 빨리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까짓 몸 한 번 주는 것이 대수냐?", "이성에 대한 성경험이 있어야 일찌감치 세상을 알게 되는 것 아냐?", "여자를 단번에 정복해버려야 완전히 내 것이 되어 꼼짝 못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지." 라는 등의 잘못된 생각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아무런 죄책감이나 책임감도 없이 말이다.

기혼 부부들도 예외는 아니다. 기혼 남성들은 평균 약 6명의 여성과 혼외 정사를 하고 있고, 결혼한 주부들도 약 2-3명의 다른 남자들과 외도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 성과학 연구소의 이윤수(李倫洙, 비뇨기과 전문의) 소장이 1997년 12월에 성인 2,1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한국 유부남의 73%가 혼외 정사를 한 경험이 있으며, 기혼 남성의 88% 정도가 '다른 여성과 성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이 있음.'이 드러났다. 또 전체 조사자의 63%가 21세 이전에 첫 성관계를 가졌는데, 이 중 72%가 약혼자나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행위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센 프리 섹스의 물결 속에서 교회는 결코 치외법권 지역이나 피난처, 혹은 안전 지대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사탄이 공격하기 쉬운 위험 지대가 되어, 성적 타락의 파도가 이미 교회 안에도 깊숙이 밀려왔다. 기독 청소년들이 자기 주위에서 너무나 많은 성적 타락 현상을 보다보니, 그것이 마치 정상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그 조류를 타지 않으면 자기가 원시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교회 중직자(重職者들)도 맹렬한 사탄의 공격을 받아 쉽게 성적 범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IMF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성적인 문제도 예외가 될 수 없어 고용 불안을 악용한 직장 내에서의 성희롱(sexual harassment), 성추행, 성폭행/성폭력(sexual violence)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여기서 '성폭행 혹은 성폭력'이란 상대의 동의 없이 무력 또는 위협이나 회유를 통해 자신의 성적 각성(sexual arousal)이나 만족을 꾀하는 행위로서, 피해 당사자에게 법적으로 명백한 인권 침해를 또 정신 건강적으로 인격적 파괴를 초래하게 된다. 한국 성폭력 상담소는, 1998년 1월부터 6월까지 직장 상사나 동료, 혹은 직장 외의 업무 관련자인 거래처 직원으로부터 성추행 또는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의 상담이 144건 접수되어, 1997년 같은 기간의 106건보다 35.8%나 증가하였다고 밝힌 적이 있다. 과거에는 상사나 동료로부터 성희롱, 추행, 폭행을 당한 직장 여성들은 수치감으로 인해 대개 사직하고 다른 직장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IMF 체재 이후에는 고용불안이 심각해져서 그나마 지옥 같은 그런 직장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피해를 감수하며 계속 같은 직장에 남아있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97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여중고생들의 약 60%가 학교 주변에서 의도적으로 노출된 성기를 본 적이 있으며, 약 40% 정도는 성적 농담을 경험한 적이 있으며, 약 30% 정도는 전철이나 버스 안에서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한국 형사 정책 연구원이 조사한 성폭력 경험을 분석해보면, '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 교통을 이용할 때'가 47.8%, '밤늦게 혼자 걸어갈 때'가 24.6%로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유형별로는 성기 노출, 성적 희롱, 음란 전화, 강간 미수, 강간(rape), 어린이 성추행 순이었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조사에서 성폭력에 대한 대책으로는 청소년과 성인에 대한 성교육, 여성 신고시 비밀 보장 및 명예 보호, 성폭력범에 대한 신속한 검거와 중형 선고, 성적 자극물의 단속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 나라 매춘 여성의 60%가 16세 이전에 심각한 성폭행을 경험한 걸로 나타난 자료를 보면, 성폭력이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동 성폭력이나 성학대(sexual abuse)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매년 약 10만 건 정도로 추산될 정도이니 말이다.

연령이나 지위 고하 혹은 관계의 종류(예를 들어 사제 간계, 친척 관계, 이웃 할아버지와 어린 아이 등)를 막론하고,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남성에게는 Yes 혹은 No라고 분명히 자기 의사를 밝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 권리까지 자유스럽게 행사하지 못할 만큼 우리의 사회 여건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더 한심한 것은, 어려워진 경제 사정을 틈타서 주부, 여대생, 여중고생(속칭 '보도')의 매춘 행위가 암암리에 더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IMF 자금 지원 시대에 가족 전체가 연명하기조차 힘들어도, 절대로 성을 도구화하여 생계 유지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에는 매춘 접대부의 수가 120-150만 정도 된다고 한다. 결혼 적령기의 20대 여성 437만 명의 약 1/3인 셈이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여러분의 이웃이나 직장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지 두렵지 않은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중대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연령에 관계없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경험을 이상적이고 진정한 사랑의 형태로 착각하며 산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이 '사랑에 빠진' 경험을 안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다. '사랑에 빠진' 대상에게 감정적으로 매료된 채 상대방이 완전하다는 환상에 빠져, "앞으로 닥쳐올 문제쯤이야 서로 양보하면 다 해결할 수 있어"라고 착각하길 잘한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요구하면 결혼도 하기 전에 몸도 마음도 스스럼없이 다 주어 버린다. 그러나 이 '사랑에 빠지는' 감정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 심리학자인 도로시 테노브(Dorothy Tennov) 박사는 이 사랑에 빠질 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수많은 기혼 부부들을 대상으로 오랫동안 연구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사람들이 정말 로맨틱한 사랑에 사로잡혔던 기간은 평균 2년에 불과하더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밀리에 행해지는 사랑이라면 조금 더 지속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구름 위를 떠다니는 상태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경험은 의지에 따른 행동이나 의식이 있는 선택이 아니고 단지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지는 값싼 감정적 현상에 불과하며, 자신의 성장이나 상대방의 발전에 별다른 관심을 부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가 별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가져다 줄 정도로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다. 스코트 팩(M. Scott Peck)이나 도로시 테노브는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테노브 박사는 진정한 사랑과 구별되는 단어로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생리적인 사랑(limerance)'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로잡힌 감정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것으로서, 결혼 생활의 단지 서론에 불과하다. 정신과 전문의 유르그 윌리 박사는, "연애 시절부터 가장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들이 결혼 후에 이혼하는 주된 이유는 연애시절과 달리 로맨틱한 사랑이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랑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꼭 필요한 요소이며, 그 결핍을 동정심이나 존경 또는 합리적인 이유로 메울 수는 없다. 부부간에는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말 한 마디로 로맨틱한 사랑이 새롭게 생길 수 있으며, 그렇게 될 때 결혼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과는 달리 이성과 결단에 의한 의지적인 사랑이야말로 예로부터 현인(賢人)들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설파하고 있는 참된 사랑인 것이다. 그러기에, 요즈음의 현명한 청소년들은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사랑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고귀한 순결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사랑에 빠진 상대에게 몸과 마음을 함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우리 나라 청소년들의 대부분은 불건전한 컴퓨터 환경에 물들어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 청소년의 56% 정도가 성인용 음란물인 포르노그라피를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성과학 연구소의 이윤수 소장은 '컴퓨터 통신으로 인한 청소년의 성의식 변화'라는 논문을 통해, "인터넷, PC 통신 등을 통해 동영상(動映像) 음란물에 접하는 청소년들은 잡지나 책을 통해 접하는 경우보다 훨씬 더 과격한 성행동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통신에 나오는 성인 정보나 포르노는 변태나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경우가 많은데, 청소년들이 그런 장면을 자꾸 접하면 '일상적인 행위'로 인식하게 되는 그릇된 사고를 형성하기 쉽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PC 통신과 인터넷을 이용하는 중3부터 고3까지의 학생 1,054명을 조사해 본 결과, 77.1%가 음란 정보나 포르노에 접근해본 경험이 있고(80.5%가 자신들의 집에서 심야 시간대에 음란 정보 획득), 이들 중 36.5%는 자신들의 성의식에 변화를 느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런데, 각종 포르노 잡지, 비디오, 영화, 소설, 만화, 도색 카드, 춤(댄싱), 상점, 호텔, CD-ROM(우리 나라 대학생들이 포르노 CD-ROM을 직접 제작하여 점조직으로 암거래까지 한다는 소문), PC 통신이나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음란물들은 거의 대부분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여 돈을 벌기 위해 만든 얄팍한 상업주의 수단으로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구, 환상, 몽상을 스토리로 꾸며대는 일이 대부분임을 청소년들과 성인 모두 간파하여야 한다. 장시간 불특정 다수와 마구잡이로 성행위를 하는 것은 과장된 것으로 심각한 병적 상태임에 틀림없다. 몸, 마음, 영혼, 물질, 시간과 정력마저 다 빼앗긴 채 성의 노예가 되는 인생은 정말 비참하기 그지없다. Sex가 돈에 결탁되면 강력한 힘이 발휘되고 쉽게 파괴적이 되어버려,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까지 비도덕적, 비정상적인 행위조차 개의치 않게 만들어 버린다. 섹스, 폭력, 스피드, 스포츠가 등장하지 않으면 아예 장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많은 분야에서 성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악용ㆍ오용ㆍ남용되고 있음을 가능한 한 빨리 파악해야 한다.

자고로 끝없는 성적 쾌락의 추구는 개인이나 사회의 정신적 빈곤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쾌락에만 탐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면, 문학, 미술, 조각, 연극, 음악, 무용, 영상 등의 문화 예술 활동이나, 학문, 체력 단련, 취미 활동 등으로 성욕을 승화하는 기회가 점점 줄어들면서, 거친 인격, 메마른 감정, 나약한 의지를 가진 폐인들만 득실거리는 어두운 사회가 형성될 것이다. 변태나 비정상적인 성행위, 성희롱, 성폭력, 성추행, 성범죄의 초기에는 대개 죄책감이 일기 마련이지만, 그것도 반복하다 보면 죄에 대한 면역이 생겨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마침내 그것에 중독이 되고 탐닉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문학이나 예술이라는 탈을 쓰고 외설을 강조하는 상술과 인기전술에 속아서도 안 된다. 여러분들은 대형 성기 모형, 콘돔 광고와 함께 "날 강간하라." 라는 주제의 성문화제가 우리 나라의 유수한 모 기독교 대학 캠퍼스 내에서 개최되었던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음란 정보를 가정이나 학교에서 차단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한편,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낙태(정확하게는 '인공 임신 중절' : 잉태된 태아를 자연 분만 이전에 인위적으로 모체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생명을 소멸시키는 행위) 왕국이다. 이미 1980년대 중반에 1년에 150만 건 정도의 낙태가 이루어졌었다. 이는 매일 4,110 건이라는 말이요, 매시간 171 건, 매분 약 3건 정도에 해당된다는 말이다. 한 번 생각해 보라, 1분에 3명의 인간이 죽어 가는 사회라면 얼마나 끔찍한 살인마(殺人魔의)의 사회인가? 너무 지나친 표현이라고 상을 찌푸린 채 외면만 할 것인가? 실제로 낙태되는 태아의 대부분은 임신 후기나 중기의 생명체로서 기관이나 장기가 거의 다 형성된 상태임을 여러분들은 알고 있는가? 신뢰할 만한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 기혼 여성의 약 60%가 낙태 경험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18세 이상의 전체 성인 여성의 약 39%가 낙태를 한 번 이상 경험하였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전체 낙태 건수의 약 30%가 미혼 여성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들에게서 실시되고 있으며, 이들 중 2회 이상 낙태를 경험한 사람이 약 50%이고, 그 중에서도 약 85%가 10대라는 점이다.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실인가?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낙태를 하는 여성의 약 30%가 여중고생이고, 아이를 입양하는 여성의 약 47%가 십대라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런 세태에 기독 청소년들이라고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나라 미혼모들의 37%가 그리스천이라는 모 아동 복지기관의 보고는 우리를 얼마나 놀라게 하는가? 필자는 의과대학 방사선과 교수 및 의사로서 기독 청소년들의 문란한 성행위의 결과를 병원에서 직접 보고 있기에, 우리 민족의 장래가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다. 기독 청소년들의 대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또한, 분만할 때의 심한 통증이 견디기 힘들다고 제왕절개를 요청하는 산모들이 올해 들어 점점 증가하고 있어 의사의 한 사람으로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총 출산 여성의 약 36%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산부인과 의료진들의 잘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왕절개를 해야만 하는 엄격한 의학적 기준을 무시하고 단순히 산통(産痛)을 줄이거나 피하려고 제왕절개를 시행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산모의 제왕절개가 외국보다도 훨씬 많이 시행되는 우리 나라에서, 행여나 인내심이 부족한 산모와 예쁘고 귀여운 아기와의 긴밀한 관계가 느슨해지지나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현행 의료법상 태아의 남녀 성감별은 못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요구와 불법 의료진들의 합작에 의해 태아 성감별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남아 선호 사상에 의해 아들이 아닌 태아는 산모의 요구나 남편, 시댁 식구 등의 강권에 의해 낙태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런 잘못된 사회적 관행이 지속되면 앞으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들 우리의 꿈나무들이 그 쓴 열매를 맛볼 수밖에 없다. 신생아의 남녀 성비를 나타낼 때에는 여아 백 명 당 남아의 출생수를 나타내는 총 출생 성비(性比)를 지표로 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떤 자료에 의하면, 이렇게 우리 사회에서 자꾸 여아를 인공 임신 중절하다 보니, 첫째 아이가 출생할 때의 총 출생 성비가 105이던 것이, 둘째 아이일 경우에는 121, 셋째일 경우 141, 넷째일 경우 242로 심한 왜곡과 불균형을 초래하였단다. 한국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총 출생 성비가 1981년의 107.2에서 1995년의 113.4로 높아졌다고 하는데, 이런 추세로 가면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심화되어 2011년에는 125.1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남자 중고생이 결혼할 때쯤이면 치열한 신부 쟁탈전이 벌어지고 중국 연변 처녀 등 외국으로부터 신부감을 데려오는 일도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부가 될 처녀가 신랑감에게 엄청난 재산과 많은 지참금을 요구하게 될 지도 모른다. 현재의 남자 중고생 중 약 25%가 2001년 이후에는 처녀가 모자라 장가도 못 간다고 상상이나 해보라.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 인류역사상 전쟁이나 과로 등으로 남자의 씨가 말린 적도 있었지만, 여태까지 남녀 성비가 잘 조절되어 온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아닌가? 그런데, 지혜를 주셔서 발달하게 하신 현대 의학을 악용하여 남아가 아니라고 태아를 마구 죽이는 살인 행위를 반복한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 자녀들에게 무덤을 파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 주위에는 태라는 살인행위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개미 죽이듯 행해지고 있는 반면에, 아이를 가지지 못해 눈물짓는 불임 부부들도 상당히 많다. 기혼 부부의 약 10-15%가, 즉 정식 결혼한 부부 7-10쌍 중의 한 쌍이 그렇게도 원하는 아기를 가지지 못해 매일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임에는 남성측 원인이 약 40%, 여성측 원인이 약 40%, 남성과 여성측의 원인이 복합된 경우가 약 20% 정도이며, 기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남성의 경우 정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세계 보건 기구(WHO)에서 제안하고 있는 정상 정액은 나흘간 금욕후의 검사에서 정액의 양이 2cc 이상이어야 하고, 1cc 당 정자의 수가 2,000만 마리 이상이어야 하고, 채취 1시간 내에 전진 운동을 하는 정자가 50% 이상이거나 급격하게 전진하는 정자가 25% 이상이어야 하며, 정상적인 정자를 가진 정자가 30% 이상이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도 이혼하는 가정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혼 사유도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고 있지만,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가장 많은 원인은 결국 배우자의 부정(不貞), 즉 간통 행위이다. 로마가 멸망한 다섯 가지 원인(성적 타락, 끝없는 쾌락의 추구, 사치와 허영, 가정 파탄, 종교적 부패) 중에서도 성적 타락이 제 1위 아니었던가? 이혼 증가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더 이상 얘깃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1993년에는 남녀 7쌍이 결혼하는 동안 기혼 부부 1쌍이 이혼하던 것이, 불과 1년 뒤인 1994년에는 결혼 6쌍에 1쌍 꼴로 이혼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현재는 5쌍 중의 1쌍이 이혼하는 20% 정도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은 33%, 미국은 50%, 러시아는 70%의 이혼율을 보이고 있는데, 우리 나라도 이런 추세로 나간다면 결혼 2쌍에 1쌍 꼴로 이혼하는 미국의 뒤를 따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망도 나올 법하지 않은가? 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가정의 기초 단위인 부부가 흔들리는 징후가 뚜렷이 감지되고 있다. '부부를 기초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가족'의 사전적 정의가 더 이상 존재할 의미조차 상실할 정도로 말이다. 독신 가족, 공동체 가족, 동성애 가족, 계약 결혼, 홀부모 가족 등 온갖 종류의 비정상적인 가족 형태가 등장하여 행복해야 할 'Sweet Home'을 마구잡이로 위협하고 있다. 더구나, IMF 관리 체제하에서 이혼하는 한국인 부부들은, 이혼은 하더라도 자녀만은 자기가 데려다 키우겠다고 다투던 과거와는 달리, 서로 상대방에게 자녀 양육권을 떠넘기려고 아우성치다 못해 별도의 소송까지 제기하고 있다. 이혼 법정을 나서면서 서로 아이를 키우지 않겠다고 떠미는 바람에 애꿎은 아이만 울어 재끼거나, 억지로 떠맡은 아이를 남자 혼자 키우다 못해 시립 보육원에 데려다 놓고 돌아오려 하였더니 그 아이가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처롭게 눈물 흘리던 장면이 거실의 TV 화면에까지 등장하였으니, 얼마나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이렇게 부모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자기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부모의 이혼으로 내버려지는 '이혼 고아'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다간 조만 간에 <해외 입양 왕국>의 오명(汚名)도 모자라 <이혼 고아 왕국>의 악명(惡名)까지 세계 타이틀로 추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차제에, 이야기를 한 번 심각하게 비약해보자. 여러분들은 이렇게 '좋아하거나 사랑하게 된 사람'과의 육체적인 관계를 전혀 죄악시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파트너를 바꾸며 성관계를 갖는 부모 밑에서 살고 싶은가? 여러분들이 그런 부모 밑에서 아비나 어미도 모르는 자식으로 태어났어도 괜찮은가? 부모도 모르는 버려진 자식들의 고통을 여러분들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아이들이 자라서 불량 청소년이나 반사회적인 범법자가 되어도 괜찮은가?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의 형제, 자매나 태어날 자녀들이 이렇게 자기만 좋으면 아무하고나 육체 관계를 맺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또한 프리 섹스를 즐기며 살던 사람을 여러분과 평생을 같이 지낼 배우자로 선택할 수 있겠는가?

피임법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100%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지는 없다. 피임이 왜 필요하냐, 쌍방간의 합의 하에 서로의 육체를 탐하고 즐기면 되는 것 아니냐 하고 대들며 반문을 한다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람을 과연 지ㆍ정ㆍ의란 인격을 갖춘 존엄한 인간, 천하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그분의 형상을 닮은 생령(living soul)이라고(창 2:7) 부를 수 있을까? 우리의 몸은 우리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성전인데(고전 3:16-17, 6:19-20, 고후 6:16, 엡 2:21),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음란의 수단으로 써서야 되겠는가? 또 육욕의 결과로 원치 않는 생명이 잉태되었을 때, 그 생명에 대한 보호와 양육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원치 않은 임신이니 그냥 지워버리면 되지 않느냐, 임신한 여자 자신이 책임지고 알아서 할 일이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반문만 할 것인가?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일생이 얼마나 비참해질 것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낙태 수술의 부작용이나 합병증(불임, 자궁 및 골반강 감염, 다량 출혈, 쇼크, 급성 신부전, 자궁 천공, 복막염, 경관 무력증, 자연 유산, 우울증, 신경증, 정신병, 100명 중 평균 2명 꼴로 산모가 사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인공 유산에 의한 산모의 사망률은 보통 임신 12주(약 3개월) 전에는 1-2%, 임신 12주 이후에는 6%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5. 결론

성은 하나님의 걸작품인 인간에게 주신 선물의 하나이다. 보통 선물이 아니라 거룩하고 아름답고 즐겁고 좋으며 복된 선물이다. 그러나, 이 성생활은 주님 안에서 혼인한 정식 부부 사이에서만 풍요롭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을 이 땅의 가정에서도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성을 부부간에 올바르게 또 즐겨 사용하면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다. 미혼 남녀들은 참 사랑이 뭔지도 모르면서 "사랑하니까"라고 합리화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의의 병기(롬 6:13, 고후 6:7),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고전 3:16-17, 6:19-20, 고후 6:16, 엡 2:21)인 자기 몸을 결코 아무에게나 함부로 주어서는 안 된다. 미혼 남녀들은 하나님과 미래의 배우자 앞에서 철저히 자기의 순결을 서약하고 평생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결혼식 전까지는 그 누구와도 성관계를 갖지 않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자신의 성을 자기 배우자에게만 사용하겠다고 맹세한 후, 이를 철저히 지켜야 한다. 독신의 은사를 받은 사람도 신랑 되신 주님을 위해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 한편,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혹은 기독교인이 된 후에도 그릇된 세상 풍조에 휩쓸려 혼전 성경험을 한 죄를 범하였던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면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요일 1:9-2:2). 그러기에, 이런 사람은 잘못된 과거를 하나님과 자신만이 아는 비밀로 남겨둔 채,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제 2의 순결 서약'을 해야 할 것이다. 결혼한 남편들 역시 젊어서 취한 자기 아내만 세상 끝날까지 즐거워하고 또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우리 몸은 우리 것이 아니기에 신랑 되신 주님 재림하실 때 흰 세마포 입은 신부로서 순결한 영육을 우리 모두 주님께 기꺼이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생 주님과 배우자에게 총체적인 순결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몸과 마음과 영을 하나님의 관리 지침대로 잘 관리하는 충직한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성욕에 지배당하지 말고 성욕을 다스리며 살 수 있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악한 세대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우리의 성생활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주권을 행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 몸을 그 분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할(롬 12:1)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9월호)





참고 문헌

1. 충남대학교 기독교수회 (편),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대전: 충남대학교 출판부, 1997
2. 게리 체프먼 (장동숙 옮김), "5가지 사랑의 언어,"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7
3. "건강과 생명, 98년도 5월호, 7월호, 8월호," 서울: 건생, 1998
4. 천안 서부 교회, "혼전 순결 서약 자료 / 청소년용", 1995
5. 조이스 페너, 글리포드 페너(김의식 역), "성 상담," 서울: 두란노, 1996
6. CMF 학원 사역부 (편), "성경적 관점에서 본 생명 의료 윤리," 서울: 한국 누가회 문서출판부, 1997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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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1.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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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약읽기/ 신비의 古峰 「創世記」(I)(1998년 11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창세기의 구조

구약이라는 거대한 산맥이 시작되는 최초의 높은 산 오경은 태초의 신비를 온 몸에 감싸안고 있는 창세기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는 우주 생성과 인간 존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태고의 거봉이다. 그 신비의 거봉을 등정하기에 앞서 선진들이 남긴 지도를 통해 창세기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창세기 정복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먼저, 역사적 구조를 살펴보자.
1) 창1-11장은 선사시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즉, 역사적 사실은 인정되지만 객관적인 사료들을 통하여 편년 등을 입증하기 곤란한 시대를 일컫는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하나님을 거역한 세계 민족의 역사이다. 2) 창12-50장은 역사시대의 역사로서 객관적인 사료들을 통해 역사성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시대이다. 이 곳에서는 한 민족의 선택을 통해 모든 민족을 축복하시는 역사를 그리고 있다.

둘째, 문학적 구조를 살펴보자. 창세기는 '엘레 톨레도트'("이것들이 ---의 대략/역사/자손/후손/계보들이니라")이라는 어구가 10회 출현하며 창세기를 모두 11개 부분의 족보군으로 구분한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천지창조의 역사(2:4-4:26)
2) 아담의 계보(5:1-6:8)
3) 노아의 계보(6:9-9:29)
4) 셈,함,야벳의 후예(10:1-11:9)
5) 셈의 계보(11:10-26)
6) 데라(아브라함)의 계보(11:27-25:11)
7) 이스마엘의 후예(25:12-18)
8) 이삭의 계보(25:19-35:29)
9) 에서의 후예(36:1-37:1)
10) 야곱의 계보(37:2-50:26)

셋째, 언약신학적인 면에서 창세기의 구조를 살펴보자.
1) 행위 언약(2:16,17)과 은혜언약(3:15) - 전자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성 유지를 위한 채널이고 후자는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언약이다.
2) 은혜 언약(구속언약) -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타락한 인간의 구속을 약속하셨다.
가. 아담 언약(3:15) -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인류 구원을 약속하심(원시복음이라고도 부름)
나. 노아 언약(9:1-7) - 여자의 후손을 목적으로 자연계와 인간혈통의 보존을 약속하심
다. 아브라함 언약(12:1-3;15장;17장;22장) - 아브라함을 통한 수많은 자손과 그들이 거주할 땅을 약속하심


창세기의 주요 내용

가. 천지 창조(1:1-2:8)
1)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써 無에서 有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흙'을 재료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셨고(2:7) 또한 땅 위의 짐승과 조류들을 창조하셨다(2:19). 그런데 사람을 만드신 흙은 '아파르'이고 짐승과 새들을 만드신 흙은 '아다마'이다. 이 둘은 본질상 차이가 없으나 전자는 후자보다 보드라운 입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먼지', '티끌' 등으로 번역된다. 즉, 전자는 후자 안에 "들어있는" 또는 후자로부터 "축출한"(또는 "정제한") 것으로서 히브리어 원전에 '아파르 민 하아다마', ("a dust from the earth" or "a dust among the earth")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과 짐승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셨음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께서 無로부터(ex nihilo) 有를 '창조하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사는 ('빠라')이다. 이 동사의 주어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용되는데 하나님의 절대 창조권을 잘 보여주는 동사이다.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다'라는 동사로는 '아사'와 '야차르'가 있는데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함께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각기 종류대로'('레미노','레미네후') 창조하셨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허황된 이론임을 보여 준다. 6일 창조의 기간에 관하여 '날'('욤')의 개념을 어떤 이들은 장구한 기간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24시간의 하루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또 어떤 이들은 첫째 날에서 셋째 날까지는 장구한 기간을, 넷째 날부터는 24시간을 가리킨다고 절충안을 주장하나 설득력이 약하다.

나. 인간 창조(1:26-28)
1)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첼렘')과 모양('떼무트')대로 즉, 하나님의 인격적 속성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창조의 순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의 창조는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배려하신 인간 중심의 창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일명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고 일컫는 창1:28에 잘 드러나 있다.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며, 셋째는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의 총체적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명령이다. 신약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는 것이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1-33)는 것이다. 이 신성한 노동의 명령은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대칭을 이루며 메아리치고 있다.

태초의 +- 땅에 충만하라 --+ +-- 모든 족속에게 가라 -+ 예수님의
문화명령--+ 땅을 정복하라 --+---+-- 세례주어 제자 삼으라 +-- 지상명령
(창1:28) +- 땅을 다스리라 --+ +-- 지키도록 가르치라 -+ (마28:19-20)

2) 하나님은 이 신성한 명령의 준행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제도를 마련해 주셨다. 첫째는 결혼 제도이다. 결혼은 성생활의 기쁨과 종족의 보존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이라는 신앙공동체를 이룸으로써 교회와 같은 의의를 지닌다. 따라서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기초 단위로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예배공동체이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의 장이며, 영생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선교의 산실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섬기고 봉사하며 구제하는 교제의 장이어야 할 것이다.

둘째는 노동 제도이다. 노동이란 곧 일함이다. 우리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義)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노동 중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직업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직업(Vocation)이란 무엇인가? Vocation이란 말은 라틴어 Vocare(=to call)에서 왔다. 따라서 직업은 소명(召命, Calling)을 뜻한다. 그러나 직업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불러 맡기신 소명이려면 다음 세 가지 요건에 충족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합법성, 공익성, 윤리성이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의 요건에 부합되는 일터를 우리들은 하나님 주신 천직으로 알고 성실하게 일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는 안식 제도이다. 하나님은 노동의 복과 더불어 쉼의 기쁨을 허락하셨다. 일하게 하심도 복이요 쉬게 하심도 큰 기쁨이다. 이것은 육체가 노동활동으로부터의 쉼도 의미하지만 죄로 인한 죽음의 형벌로부터 구원받을 영혼의 안식과 인생의 삶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종말론적 안식을 보장해 주신 은혜이다.

다.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와의 바른 관계성 유지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2:16,17)을 파기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은혜의 구속계획을 발표하셨다. 그것이 바로 아담에게 약속하신 구속언약, 즉 은혜언약인 것이다(창3:15). 이 구속언약은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와의 언약(9:1-17), 아브라함과의 언약(12:1-3) 등을 거쳐 족장들의 생애 가운데 거듭 확인되며 이어졌다. 이 구속언약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으로서 오실 구주 메시야(예수 그리스도)이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이방을 믿음으로 구원하시려고 선포하셨던 복음'(갈3:8)이라고 해석하며 아브라함언약의 핵심은 여자의 후손이 곧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해석하였다(갈3:16). 그리스도를 목적한 언약의 혈통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여자의 후손(3:15)
. 셋의 줄기(4:25)
. 셈의 자손(9:26,27)
. 아브라함의 가계(12:3)
. 이삭의 후손(26:3,4)
. 야곱의 후예(46:3)
. 유다지파(49:10;cf.신33:7;삼하7:8-16;렘23:5-6;겔34:23-24)

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
창세기에는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그 어느 책보다도 독특하고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우주만물의 근원 되시는 분임을 강조한다(1:1;시8;19;29;104;잠8:22-31;사40;44:24;요1:1-3;요일1:1;행17:24-31;히1:1-2;골1:15).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2,26;18:1-15).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 사려 깊으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죄를 엄하게 다루시는 '심판의 주 하나님'이시다(6-8장). 그 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리온')이시며(14:17-20;신32:8)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엘 로이')이시다(16:13). 하나님은 지혜로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아브라함을 불러 그 후손들의 삶을 인도하시며 자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섭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따이')이시다(17:1;18:14;28:3,15;35:11;43:14;49:24;cf.출6:3;3:14).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그 분을 창조와 섭리의 주로서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으로 불렀다(24:3,7). 또한 그 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엘 올람')이시다(21:33).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큰복을 주시는 '임마누엘'하나님(2:17;3:8;15:1;21:22;26:26-28;28:15;31:3,5,42;39:2-3,21-23),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행복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약속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2:16,17;3:15;6:18-21;9:8-17;12:1-3;15:3-5,13-16;17:4-14;22:16-18;26:2-5;28:13-15;35:10-12).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든다면 그 분은 '역사의 주'로서 타락한 인간에 대한 구속언약, 노아시대의 홍수심판, 바벨탑 사건, 아브라함의 선택과 약속 그리고 족장들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시어 구속사를 주관하셨다(45:5-8;49:10;50:19-20).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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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읽기/ 출애굽과 여호와 하나님(1998년 12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1. 요셉과 모세 사이의 역사

가. 셈족 치하의 애굽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에 힘입어 애굽의 정치체제를 봉건군주들을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 체제에서 국무총리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급히 전환시켜 놓았다(47:20-26). 요셉의 후광을 입어 그의 형제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살기 좋은 땅 고센과 라암세스를 중심으로 번창하였다(창47:6,11). 그러나 주전 1806년 요셉이 죽자 지방의 봉건군주들은 기근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빼앗기게 된 권리들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중앙의 고위관리들은 요셉 이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갈등과 투쟁으로 애굽의 국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 때를 틈타서 애굽을 장악한 셈족이 있었다. 그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내려와 팔레스틴을 거쳐 애굽으로 쳐들어 왔다. 애굽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힉소스(Hyksos, '외국에서 온 통치자'란 뜻)라고 불렀다. 힉소스족은 모두 여섯 명의 왕들이 애굽을 약 150년(주전 1720-1570년) 동안 통치했다. 이 사실은 애굽의 역사를 가장 잘 전해주고 있는 주전 3세기경의 애굽 제사장 마네토(Manetho)의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전 3천년기로부터 기록되어 있는 애굽 왕(paraoh)들의 명단에 보면 위의 기간에 해당되는 애굽 왕들의 이름이 없다. 주전 약 16세기 초엽, 드디어 힉소스족은 애굽인들의 강한 저항을 받고 쫓겨나게 된다.

나. 아피루(Apiru)로서의 히브리인
출1:8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은 저들을 팔레스틴으로 축출하고 애굽의 제 18왕조를 세운 애굽의 새로운 통치자를 가리킨다.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요셉과 힉소스족의 통치, 즉 셈족 계열의 이방인들에 의하여 오랜 세월 동안 다스림을 받은 사실은 엄청나게 큰 수치일 뿐만 아니라 원한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급속히 팽창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남아살해를 명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종 내지 노예(Apiru 또는 Habiru라고 부름)로 부리며 큰 고통과 학대로써 잔혹하게 다스리게 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이 당하는 고통은 요셉 이후로부터 힉소스족들이 쫓겨날 때까지 누렸던 번영과 평안을 송두리째 잠식하고 말았다. 옛적의 영화는 사라지고 이제는 가장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되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들은 옛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마저 뿌리 채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역으로 인한 히브리인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 없었다(출2:23-25).

2. 거절할 수 없는 출애굽 제안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의 수여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창15:13-16)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주시겠다는 약속은 비참한 처지에 있던 히브리인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히브리인들의 반응에 관계없이 시행하실 주권적 사역으로서 자신의 신실하심에 입각한 은혜였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나일강 유역을 떠나 애굽을 벗어난다는 것이 곧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왜냐하면 애굽의 종과 노예로서 히브리인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애굽사람들이 포기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을 탈출하는 것을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이 그대로 놔둘 리 없었고, 군사들의 추격을 따돌린다 해도 홍해가 가로막고 있었으며 홍해를 무사히 통과한다 해도 시나이반도의 사막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의 사막은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으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험준한 산악지대이다. 따라서 사막지대 최대의 적인 물과 양식문제,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 밤에는 혹독한 추위, 그리고 험준한 사막지대의 미로에 도사리고 있는 도적떼들, 전갈과 불뱀들이 모두 생사를 좌우하는 넘어야 할 과제들이었다.

3. "나는 여호와니라"(출3:15;6:2-3)

거절할 수 없는 엄청난 제의에 대하여 모세는 백성들이 기뻐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모험이라는 생각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의문을 가질 것을 예상했다. 이것을 모르실 리 없는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Jehovah), 즉 히브리어 발음으로 "야웨"라고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6:2-3)

"야웨"는 "to be", "to become", "to live" 등의 뜻을 가진 동사 '하야' 또는 '하와'의 일반동사 능동형(Qal) 내지 사역동사의 능동형(Hiphil)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반동사 능동형(Qal)으로 볼 경우
그 뜻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3:14)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비하신 속성 중에 자존성(自存性)을 말한다. 따라서 '야웨'가 지니는 신학적인 의미는 '유일하신 분'(the one who is), '절대 불변하시는 분'(the absolute and unchangeable one), '영존하시는 분'(the existing, ever-living) 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아 왔던 애굽의 신들은 거의 모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세력들이었기에 그러한 피조물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유일하신 창조주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10가지 재앙으로 애굽 사람들을 치신 것은 그들이 믿는 우상들을 훼파하심으로써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유일하시고 참된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자 함이었다(출7:3-5).

2) 사역동사의 능동형(Hiphil)으로 볼 경우
먼저, to be의 차원에서 '야웨'는 "마땅히 있을 것을 있게 하는 분"(the one bringing into being / giver of existence / creator)을 뜻한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히브리인들을 출애굽 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는 과정에 필요한 물과 양식, 낮에는 시원한 그늘과 저녁에는 따뜻한 온기 등의 모든 필요를 능히 채워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to live의 차원에서 '야웨'는 "삶(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life giver)을 뜻한다. 이것은 죄악의 상징인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아 약속의 땅에 이르는 과정에 생사의 갈림길이 많으나 궁극적으로 여호와는 자기 백성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마지막 to become의 차원에서 '야웨'는 "마땅히 되어야 모습으로 되게 하는 분", "언약을 성실히 이행하시는 분"(performer of his promises)을 뜻한다. 이것은 "너희는 내 백성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창17:7)고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심을 가리킨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다.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출6:7-8)

그리하여 하나님은 애굽에서 구속해 낸 히브리인들을 시내산에서 자기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서 세계 역사의 무대 위에 선포하신다(출19:5-6).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권인 동시에 사명이었다.

4. 마치며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의 메시지를 접하지만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분, 즉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온갖 은혜와 은사를 주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나는 너를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사48:17). 오늘과 같은 어려운 때일수록 여호와께 대한 굳센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 지혜일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며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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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약읽기/ 광야 40년 유랑(流浪)의 역사(1999년 1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아브라함의 후예들에게 자신의 여호와(야웨)되심을 나타내 보이시며 그들을 구출해 내셨다.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기던 자연의 피조물들이 얼마나 허황되고 무익한 것인가를 여실히 드러내시며 자신만이 유일한 신이시요 창조주시며 구원자 되심을 강조하셨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치시되 그들이 신으로 섬기던 바로의 장자를 죽이신 것은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참된 신이심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눈앞에 닥친 현실을 보고 하나님의 여호와이심을 믿지 못하고 불안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불안과 초조를 넘어서 원망과 불평, 거역과 배신 등의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저지르고 만다. 이와 같은 출애굽 이후의 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애굽군대의 추격과 홍해의 장벽(출14장) : 현실의 장애로 인한 두려움과 원망

출애굽이라고 하는 해방과 자유함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상기된 얼굴에 감돌던 해방의 기쁨과 감격은 그들의 뒤를 추격해 오는 애굽 군사들의 칼날과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홍해 앞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심히 두려워한 그들은 즉각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 이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게 하느냐'고 소리치며 후회어린 원망을 한다. 그러나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고 그들을 독려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애굽군사들을 홍해에 수장시키심으로써 자신이 전쟁의 용사이심(15:3)을 보여주시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구원의 주님을 따라 나선 우리들은 어떤가. 눈앞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후회막심한 원망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2. 식량으로 인한 불평과 원망(출16장;민11:4-23,31-35) : 의식주 문제로 인한 불평과 원망

애굽을 탈출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애굽을 떠날 때 가지고 왔던 양식들이 동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애굽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과거를 들먹이며 차라리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걸 허황된 말에 속아서 광야에까지 와 굶어 죽게되었다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홍해에서의 이적적인 능력을 체험한 것이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는지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것이 무엇이냐"고 놀랄만큼 이름 뜻에 걸 맞는 맛있고 영양가 높은 만나를 내려주심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만나에 싫증을 느낀 무리들은 정력이 약해졌다고 투덜거리고 애굽에서 즐기던 신선한 야채와 고기들을 그리워하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화가 나신 하나님은 손만 뻗으면 얼마든지 잡아먹을 수 있도록 수많은 메추라기를 주신다. 그러나 그들이 고기를 맛있게 구워서 입에 넣고 막 씹으려는 찰나 하나님은 그들을 쳐 죽이심으로써 원망과 불평의 주역들을 징벌하셨다. 탐욕의 결말은 자명한 것이다.

3. 므리바 물 사건(출17:1-7;민20:10-13;신3:23-29;32:48-52) : 백성들의 항거와 지도자 모세의 실수

사막지대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물이다. 단 한 사람의 갈증이라도 달래줄 물기라고는 전혀 없는 사막에서 남녀노소 합하여 약 200만 명이 마실 물이 없어 아우성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이것이야말로 난리 중의 난리가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의 엄청난 소요와 거센 항의로 인하여 모세는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능력을 의심하며 모세에게 거세게 대들었다. 여기에서 지도자 모세의 실수가 터져 나온다. 첫째는, 지팡이를 들고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는 믿지 못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두 번째 실수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백성들의 거센 항의에 흥분한 나머지 성질을 내며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씩이나 내리친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물이 바짝 마른 바위를 깨치고 솟아올랐다. 여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여호와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 결과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가나안 땅을 코앞의 시점에서 가나안 입성을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이 일로 내게 다시는 말하지 말라"(신3:23-29)는 거절의 답을 듣는다. 오늘의 영적 지도자들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4. 금송아지 사건(출32장) :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불신앙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열흘, 스무날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시내광야의 삭막함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들로서는 물과 양식 없이 맨 몸으로 높은 산에 올라간 모세가 틀림없이 죽었다고 판단된 것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지 어느덧 새 달이 바뀌고 40일째 다가오자 더 이상 의심할 나위 없이 모세는 죽었고 그들의 소망은 끊어졌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 아론은 당혹스런 나머지 애굽에서 그들이 보아왔던 신의 개념, 즉 피조물의 형상을 만들어 백성들 앞에 제시한다. 그 송아지 우상이 이제까지 그들을 인도했고 앞으로도 이끌어 갈 여호와라고 선포하며 백성들을 안돈시키려 애쓰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이 기막힌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치였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감각적 확인 없이는 믿지 못하는 나약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는지 돌이켜 볼 일이다.

5. 다베라 사건(민11:1-3) :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 불평

자세한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고 불평한 결과 여호와께서 진노의 불로써 그들의 일부를 태워 죽이셨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신다. 오늘의 사회 현실을 감안할 때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견디기 어려운 여러 종류의 상황이 믿음을 위협할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누구든지 사람듣기에도 거북스러운 말들을 뱉어내기 십상이다. 특히, 성도들은 하나님께 원망 섞인 불평과 원망을 하기 쉽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저주하려는 무서운 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다윗의 고통스러운 고백에 귀를 기울이자,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6. 가데스바네아에서의 폭거(민 13-14장) : 하나님 언약에 대한 불신앙

시내산을 떠나 가데스바네아 이르렀을 때에 모세는 가나안 정복 작전의 일환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먼저 투입하여 적진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탐보고대회는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더라"는 긍정적 보고와 "그러나 이제야 우리는 죽게 된다"라는 부정적 보고로 인하여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최소한 장정 두 명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온 포도 한 송이와 무화과, 석류 등이 그 곳의 비옥함을 여실히 증명하건만 똑같은 사물과 현실을 목도하고도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는 소수의 사람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흔들리고 만다. 부화뇌동된 백성들이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진노는 폭발하였고 결국 이스라엘은 40년에 걸친 광야 유랑길에 오르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소유자는 눈앞의 현실을 부정적이고 회의적이며 비관적으로만 보게 되고 그 결과는 쓰디쓴 것이다.

7. 쿠데타 4인방과 250명의 반란(민16:1-50) : 신정정치(神政政治)에 대한 인간적 욕심의 반란

모세와 아론의 지도권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역들을 보면 그들의 목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한 부류는 르우벤지파로서 장자지파다. 또 한 부류는 레위지파로서 구별된 지파였다. 전자는 모세의 정치적 지도권에 대하여, 후자는 아론의 종교적 지도권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그 권한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정질서를 무시하고 한낱 세속적인 권력욕을 채워 보고자하는 더러운 욕심에서 나온 짓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도 유사한 일들이 적지 않다. 교회의 거룩한 직분을 세상의 명예나 권세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교회를 어지럽힌다. 교단 정치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재미있는 것은 쿠테타의 주역들이 내세운 명분이다. 그들은 이스라엘 회중 내지 민중, 즉 국민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들의 속셈은 감추었던 것이다.

8. 불뱀과 놋뱀 사건(민21:4-9;출13:17-22) : 길(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인한 불평

40년 광야유랑이란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피하지 못할 여정이었다. 숨막힐 듯 메마르고 재미없는 황야길을 생각해 보라. 경치가 수려해도 지루할 판인데 수십 년을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서 보내야 하다니. 그것은 그들의 죄값으로서 마땅히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과는 생각하지 않고 길로 인하여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퍼부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대한 이 죄악은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이중고통을 안겨 주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면 살게 되었으나 고통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며 이를 갈던 자들은 모두 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산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는가(요3:14-15).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9. 바알브올 사건(민22-25장) : 제1,2,7계명을 위반하는 배신행위

모세가 이끄는 질풍노도 같은 이스라엘을 막아 물리칠 방도로써 저주의 요청을 받았던 발람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세 번 연속 축복의 말만 쏟아 놓는다. 더러운 돈에 욕심이 난 발람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이스라엘을 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을 발락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로 하여금 그들을 치도록 유도하라는 계략이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바알신을 섬기는 이방의 매력적인 풍습에 정신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선택된 언약백성으로서의 신실성을 깨뜨리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를 파기하는 배신행위였다. 현대 크리스천이 주의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세속문화의 죄악적인 쾌락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란 이름의 형식과 내용을 심층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들이 많다. 사탄의 계략 중의 하나가 대중문화를 빙자하여 기독신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문화 위에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세속문화를 건전한 하나님 중심 문화로 바꾸는 일, 이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내가 몰래 즐기는 그 문화로 인하여 병들어 갈 것이다.

위와 같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자기백성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오늘의 어려운 시대적 환경에서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원망이나 불평을 하며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새 힘과 용기를 주시며 궁극적으로는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을 굳게 신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81:10).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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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약읽기/ 가나안 정복 전쟁과 사사시대(1999년 2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보름이면 갈 길을 40년만에 당도하다(신1:1-9)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는 길은 고작 열 하룻길이었다(신1:2). 이 말은 가데스바네아로부터 가나안 땅 중심부에 이르는 길은 길어야 3,4일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앙적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광야를 방황하게 된다(민13-14장). 시내 반도의 황량한 사막지대(산악형)를 방황한지 38년만에 이스라엘은 사해 남부에서 사해로 흘러드는 세렛시내를 건너 요단 동편 모압 땅에 당도하게 된다(신2:14). 바로 이 때 모세가 요단 서편(cis-jordan)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을 위하여 요단 동편(trans-jordan)에서 설명한 율법의 말씀이 신명기다(신1:1,3,5).

* 교훈 :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굳게 신뢰하느냐 못하느냐가 축복의 시기를 좌우한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이었다(신7, 20장)
이스라엘은 그들보다 많고 힘이 있는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과 맞붙어 싸울지라도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대적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원문: 넘겨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신7:1-2).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군사적인 전술, 전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출15:3)께 대한 굳센 믿음만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제사장은 전쟁에 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너희는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대적을 치고 너희를 구원하는 자니라"(신20:3-4)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서 전쟁에 나아가지 않아도 되는 병역 면제자들을 들 수 있다(신20:5,8). 첫째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행치 못한 자, 둘째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 셋째 여자와 약혼하고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자, 넷째 전쟁이 두려워서 마음에 겁내는 자 등이다. 차(車) 떼고 포(包) 떼면 그 누가 나가서 싸운단 말인가? 이래서야 어찌 이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이 곧 여호와의 전쟁이다. 여호와의 전쟁은 군사나 무기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교훈 :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 왜냐하면 승패는 믿음의 유무 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여호와 전쟁의 이중성: 승리의 신학 / 징벌의 신학
여호와의 전쟁은 이중성을 띠고 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for) 싸우시는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여(against) 싸우시는 전쟁이다. 필자는 전자를 승리의 신학(Theology of Victory)으로 후자를 징벌의 신학(Theology of Sanction / Defeat)으로 정의하였다(윤용진.「여호와의 전쟁 신학」. 서울: 그리심, 1998.). 전자는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성실한 순종에 근거하고 후자는 여호와의 언약에 대한 불성실한 파기에 근거한다. 여리고성 정복에서 전자의 예를 찾을 수 있고 아이성에서의 실패는 후자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전쟁에 사용하시는 수단과 방법은 바람과 지진, 천둥과 번개, 홍수와 우박, 하늘의 불과 염병 등으로 다양하다. 아모리 족속들에 대한 우박덩이 공격과 태양을 중천에 머물게 하심으로써 대적들을 멸하게 하신 사건은 여호와께서 이적 적인 방법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전쟁의 대표적인 예이다(수10:6,14). 특히 자기 백성을 치시는 징벌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적을 징벌의 채찍과 막대기로 이용하신다. 징벌의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승리에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을 선민답게 만드시기 위한 사랑의 채찍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교훈 :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신실한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적들과 싸우심으로써 항상 승 리 하시는 구원의 주이시다.

정복한 땅의 분배
정복된 땅들을 분배하는 특별한 기준은 없었다. 적당히 그려온 땅의 분할지도를 제비뽑기를 통하여 분배하였다(수14:1-5). 단지 두 가지 면에서는 독특하다. 첫째는 요단강 동편을 두 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미리 분배한 것이다. 둘째는 레위인들에게는 일정한 구획을 분할해 주지 않고 도피성 여섯을 포함한 각 지파 내의 성읍 마흔 여덟 개를 주어 거주하게 한 사실이다(수20,21장). 분배과정에서 보여준 갈렙의 온전한 믿음과 형제애는 큰 귀감이 되지만(수14:6-15)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의 출신 지파인 에브라임 사람들의 불신앙과 교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수17:14-18). 에브라임 지파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하리라는 야곱의 예언(창49:22-26)을 악용하여 교만하였으며 불신앙적인 태도로써 욕심을 부렸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갈렙'(수14:8,9,14)은 이방 족속 출신이었지만 큰 믿음의 소유자로서 형제 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정복한 좋은 땅을 형제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험난한 곳을 싸워서 얻겠다는 굳센 믿음과 겸손의 사람이었다.

* 교훈 :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 놓으신 자녀의 분깃은 이미 보장되어 있다(시16:6).

순종여부를 시험하기 위하여 남겨두신 가나안 족속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후 세대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가나안 사람들 일부와 블레셋 사람들, 헷 사람, 아모리 사람, 브리스 사람, 히위 사람, 여부스 사람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남겨두셨다(삿3:1-6).

삿1:19-36에 보면 유다 지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파들이 자기 영내의 이방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거나 축출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단 지파는 대적에게 쫓겨 산지로 도망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은 올무에 빠뜨리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심에 목적이 있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족속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취하여 혼인하였다(삿3:5-6). 혼인은 단지 혈연 관계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상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것까지 포함하므로 거룩한 언약 백성으로서 여호와께 대한 배신이요 반역이었다(신7:3 ; 수23:11-13).

* 교훈 : 이미 주어진 행복은 여호와께 대한 순종 여하에 따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구약의 암흑시대 : 악순환의 4대 고리
한 마디로 말해서 사사시대는 구약의 암흑시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부여받고도 은혜의 목적(제사장 나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사명이 있음. 출19:5-6)을 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실상은 다음과 같은 4대 고리의 악순환을 통하여 무려 3,4백년이나 계속되었다.

범죄 진노 회개 용서(구원)라는 악순환의 양식은 사사가 죽으면 '또'(다시) 반복되었다(삿3:12;4:1;6:1;13:1).

사사시대의 특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사시대는 사회적 혼란기였다. 계속되는 범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극심한 고통 중에 헤매이던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와 같은 강력한 왕정체제를 원하여 기드온을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삿8장).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는 신정(神政)정체임을 굳게 믿은 기드온의 거절로 무산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서자 이스마엘이 외척의 힘을 빌어 스스로 왕이 되었다가 결국 제거되고 말았다(삿9장). 또한 에브라임 지파의 교만으로 인하여 사사 입다 시대에는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다(삿12장).

둘째, 사사시대는 종교적(신앙적) 혼란기였다. 사사가 죽으면 계속되는 우상숭배의 죄악과 더불어 사사 입다는 자기 딸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맹세하였고(삿11장), 미가라는 사람은 자기 집안에 우상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장을 고용하여 섬기게 하였으며 그 사실을 안 단 지파는 미가의 우상을 발췌하고 제사장을 납치하여 자기 지파의 우상숭배에 섬기도록 하였다(삿17-18장). 그리하여 사사기 저자는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17:6 ; 18:1 ; 19:1 ; 21:25)고 사사시대를 한 마디로 평가하였다.

* 교훈 : 아무리 캄캄한 시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단절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구 원 역사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나아간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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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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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약읽기/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I (1999년 3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사사시대가 저물어 갈 무렵 이스라엘의 사회, 정치, 윤리, 종교적 상황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엘리 제사장의 가문은 그 아들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저주를 받아 끊어지게 되었고 언약궤는 대적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빼앗겨 그들의 손에 넘어갔다가 되찾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등 절망적인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 극도의 불안을 느낀 백성들은 늙은 사무엘에게 나아가 이방 나라들과 같이 왕정정치를 요구하게 된다. 그들은 강력한 왕정이야말로 유일한 살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왕의 주요 임무 중의 하나가 전쟁이었기 때문이다(삼상8:20). 자신의 아들들을 문제삼으며 도전해 온 백성들의 강력한 왕정요구에 자존심이 몹시 상하고 황당해진 사무엘은 하나님께 직고하였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는 신정정체인데 감히 왕을 요구하다니. 몹시 흥분한 사무엘에게 하나님은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줘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요 나를 버려 (나로 하여금)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8:7)고 위로하시며 왕 제도의 혹독함을 가르쳐 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한 이유는 영적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과 대적들의 침략으로 인한 공포에 기인하였다. 이방나라와 같이 강력한 왕이 대적들의 침략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며 안정된 번영을 보장해 줄 것처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모든 불안한 요소들은 그들에게 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반복적인 범죄에 그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눈 앞의 현실을 임기응변으로 탈피해 보려는 발상은 진정한 왕이요,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를 모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출15:3,18). 이미 이스라엘의 이러한 작태를 예견하신 여호와 하나님(신17:14)께서는 사무엘을 통하여 그들에게 왕 제도의 허와 실을 경고하시고 왕을 허락하신다(삼상8:22).

이스라엘 왕정의 전개

초대 왕 사울의 통치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처음에는 겸손하였고 위풍이 훌륭하였으며 당당하였다(삼상9:2,21,22,24,27; 11:12,13). 그는 암몬왕 나하스의 길르앗 야베스 침공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삼상11:1-15), 블레셋을 비롯한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쳐서 이겼다(14:47-48).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첫째는 블레셋과의 전투시 제사장의 권한을 침범한 일(삼상13:9)이고, 둘째는 아말렉과의 전투시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불복한 일이다(삼상15장). 결국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고 악령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삼상16:14). 그 뿐만 아니라 그는 군사력을 총동원하여 청년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녔으며(삼상18-26장) 그 과정에서 그릇된 인사정책으로 인한 에돔인 도엑을 통해 아히멜렉을 비롯한 거룩한 제사장 팔십오명을 살해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또한 기브온 족속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그들을 많이 죽였으며 대적을 통한 하나님의 징벌이 임박해 오자 그는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죄를 저지르고(28:3-25) 결국에는 아들들과 더불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삼상31장; 삼하1장).

다윗의 통치
사울의 사망 직후 다윗은 유다지파만의 왕으로 군림했고 북쪽 10개 지파는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의 지지를 받아 사울의 네째 아들(대상8:33;9:39)인 이스보셋을 세워 북쪽을 통치하게 되었다. 이 때에 남북간의 갈등은 상호간의 전투로 이어졌다. 이스보셋과 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의 불화로 아브넬이 다윗에게 북쪽 10지파를 넘겨주려고 계획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불안을 느낀 요압이 아브넬을 살해하였고 이스보셋도 부하장군에게 피살됨 으로써 비로소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부상하게 된다(삼하2-3장). 그는 여부스족속의 땅을 점령하여 수도로 삼았고(대상11:6) 성전봉헌 의지에 대한 보응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왕국의 언약을 받게 된다(삼하7:8-16). 그 약속은 다윗의 후손이 왕권을 계승(유다지파)할 것이고 그 나라는 영원히 번영하리라는 것으로서 시편 기자는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언약'(시89:3-4, 28-29; 132:11-12)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약속은 후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메시야(예수 그리스도)로써 성취된다.

다윗은 이웃과의 전쟁을 통해 영토 및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전 지역(창15:18;민34:2-12)이자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이스라엘의 전 영역이었다(겔48:16-20). 그는 군대의 조직(대상27:1-15)과 행정제도를 개편하였고(16-22), 전국의 재산관리 및 왕을 위한 고문단도 조직하였다(25-34). 또한 두 제사장(사독, 아비아달) 밑에 제사장, 레위인들을 24반열로 조직하여 일주간씩 교대로 성소에 봉사케 하는 종교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대상24:1-19). 친구의 아들 므비보셋을 후대하였으며(삼하9장) 기브온 사람들을 위한 공의를 시행하였다(삼하21:1-14; cf.수9:1-27). 그러나 여호와께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국방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인구조사를 단행하였고(삼하24:1-25;대상21) 충성스런 부하인 헷족속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는 비열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그의 말년은 세째 아들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반역(삼하13-19장), 베냐민 지파 세바의 반란(삼하20장), 네째 아들 아도니야의 반역(왕상1:1-2:9;대상22:6-23:1) 등으로 얼룩져 버렸다.

솔로몬의 통치
치열한 왕권 쟁탈전 속에서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왕상1:11-53). 그는 먼저 외교와 국방에 관심을 가져 애굽과의 연혼관계를 형성하고(왕상3:1; 7:8; 9:16), 두로왕 히람과 동맹을 맺었다(왕상5장). 또한 므깃도를 비롯한 견고한 병거성과 마병성을 건축하였고 수많은 은과 금을 비축하였다. 이것은 결국 여호와께서 금지하신 왕의 금기사항을 어긴 것이다(cf.신17:14-17). 세금과 공물을 많이 거두어들이고 외국으로부터 조공도 받았으며(왕상 10장) 외국과의 무역을 통해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왕상4:20; 9-10장).

솔로몬왕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치적은 예루살렘 성전의 건축이라 할 수 있다(왕상5-6장; 7:15-51; 대하2-4장). 그의 즉위 제 4년째 되는 봄(주전 약 966년, 왕상6:1)에 모리아 산상에서 기공(대하3:1)하여 7년 후인 즉위 제 11년 가을에 완공하였다(왕상6:38). 그 규모는 장이 60규빗, 광이 20규빗, 고가 30규빗이고 내소(지성소)의 장이 20규빗, 광이 20규빗, 고가 20규빗이었다(왕상6:2ff.). 장엄한 성전 봉헌식과 기도는 예루살렘 성전이 세계 선교의 구심점으로서 이스라엘 제의종교의 특징을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왕상8:22-53;대하6:12-42). 솔로몬은 남달리 지혜가 뛰어났고 문서활동도 왕성하였다. 그의 행적들은 선지자 나단의 기록(대상29:29; 대하9:29)과 "솔로몬의 행장"(왕상11:41), 선지자 아히야와 잇도의 기록(대하9:29)에 실려 있다. 그는 수많은 시와 잠언을 남겼고 성전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국가의 번영과 안정이라는 목적을 위해 잘못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나라를 혼합종교로 전락시켜 버렸다. 왕의 금기 사항인 재물을 많이 쌓았고, 말을 많이 수입하여 군사력을 증강시켰으며 평화를 위한 국제 결혼으로 인하여 이방의 우상숭배가 침투하게 되었다(왕상11:1-40; cf.신17장). 국토의 새로운 구획 분할로 인한 백성의 불만은 고조되었으며(왕상4:7-19), 13년에 걸친 왕궁 노역으로 인하여 백성들의 원성은 날로 커져 갔다. 그 결과 솔로몬 말년은 괴로움으로 가득 찼다. 에돔인 하닷이 반역을 일으켰고(왕상11:25), 다메섹의 르손이 침공해 왔으며(왕상11:2-25), 에브라임지파 여로보암이 반역하여 북쪽 10지파를 쪼개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왕이 되었다(왕상11:26-40).

왕국의 분열

솔로몬은 두 번씩이나 경고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고 금기 사항 세 가지를 모두 어김으로써 나라를 혼합종교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나라를 두 쪽으로 가르시어 남쪽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한 유다왕국으로서 르호보암이 통하게 하셨으며 북쪽은 에브라임을 비롯한 10개 지파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로서 여로보암이 통치하게 하셨다. 단일왕국의 짧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언약에 충실하느냐의 여부가 개인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사실과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고 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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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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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약읽기/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II (1999년 4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II)
-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

두 역사책의 공통점과 차이점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책은 열왕기와 역대기이다. 이 두 책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전개라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면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는 사실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책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점이 놓여 있다. 우선, 열왕기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되 선지자적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남, 북이스라엘 양국에 대한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열왕기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율법에 입각한 공정한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의 전통적인 입장은 열왕기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와 더불어 전기 선지서에 편제시키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역대기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역대기의 역사는 북조 이스라엘을 배제한 남방 유다 중심의 편중된 역사이다. 역사 기술의 대상을 남방 유다에 국한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남방 유다의 역사만을 다루고 있는 역대기 사가(史家)의 입장은 무엇인가. 역대기에는 남방 유다의 정통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남방 유다의 정통성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역대기 사가(史家)의 주관적 역사관 : 남방 유다의 정통성(正統性) 주장

바벨론 포로생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들로부터 들었던 젖과 꿀이 흐르던 땅은 황폐하였고 웅장하던 예루살렘 성과 영광스럽던 예루살렘 성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귀환이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보장받은 것도 아니었다. 이방인들 뿐만 아니라 그들과 유대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들이 텃세를 부리는 불안한 사회 분위기와 궁핍한 경제적 상황은 귀환자들에게 한없는 불안만 안겨줄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선민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에스라, 느헤미야는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선민의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제사장적 사명(출19:6;사61:6)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역사의식을 고취시켜 주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대기 사가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의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그 주인공임을 역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에서 역대기는 기록되었다.

첫째, 정치적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역대기 사가는 남방 유다 백성들이 다윗 언약(삼하7:12f.)에 따른 국체(國體), 정체(政體)의 정통성을 지닌 백성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남방 유다는 다윗 언약대로 다윗의 자손, 즉 유다 지파의 혈통이 평화로운 왕권 교체를 통해 대를 이어 내려갔지만 북조 이스라엘은 유혈 쿠테타에 의해서 왕권이 뒤바뀌는 혼란스러운 역사를 이어갔다. 이러한 점에서 역대기 사가는 북조 이스라엘을 괴뢰정권으로 간주하여 아예 역사 기록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역대기 사가는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옛적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연속성을 이어갈 주체임을 각성케 하고자 했던 것이다.

둘째, 종교적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남방 유다 왕국은 북조 이스라엘 왕국과 비교할 때 세 가지 면에서 신앙적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남 유다 왕국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에 입각한 바른 제의를 시행하는 영적 순결성을 유지하였으나 북조 이스라엘은 이방의 우상을 숭배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비기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운 제단을 비치하고 백성들을 호도하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20세 이상이 되면 반드시 1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서 3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순례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북조 이스라엘의 창건자 여로보암은 이렇듯 신앙적인 면에서의 콤플렉스를 벗어나고자 비정상적인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2) 남 유다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수종들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율법에 입각하여 임직되었으나 북조 이스라엘에서는 성직이 매매되는 불상사가 저질러졌다. 북조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직임을 박탈하고 지방 성소에서 축출하였다. 내쫓긴 그들은 분하고 민망한 가슴을 쓸어 내리며 남방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몰려갔다. 여로보암은 수소 한 마리와 수양 일곱 마리를 뇌물로 바치는 평민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3) 남방 유다는 3대 절기를 비롯한 거룩한 절기들이 제 때에 율법이 정한대로 시행되었으나 북조에서는 백성들의 남방 유입을 막고자 변질된 절기 준수를 강요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초막절(7월 15일)을 8월 15일로 변조시킨 것이다.

셋째, 혈통적 순수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남방 유다 왕국은 다윗 언약을 잇는 언약백성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있었으나 북조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였다. 분열된 이후 북조 이스라엘의 왕권은 최소 8번의 유혈 쿠테타를 통하여 왕권이 교체되었다. 즉, 초대 왕 여로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총 9개 왕조 19명의 왕들이 통치하였다. 그러나 남방 유다 왕국은 다윗의 후손이 왕위를 이어 내려갔다. 물론 왕의 실정으로 인하여 부하들에게 시해되긴 하였어도 후임자로는 시해된 왕의 아들을 추대하여 대를 잇게 하였다. 역대기 사가는 유다 왕국의 혈통적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왕권의 혈통적 계보를 아담 - 아브라함 - 모세 -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유다 왕들을 소개하면서 반드시 부모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북조 이스라엘의 혈통은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하여 강제로 흩어진 이후 돌아오지 못했다. 잡혀가지 않고 수도 사마리아에 남겨졌던 무지한 이스라엘 족속들마저 강제 이주되어온 이방인과의 섞임으로 인하여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혼혈족을 탄생시켰다. 그들에게 여호와 신앙이나 선민의식, 민족적인 정통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남북 이스라엘 왕조의 역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두 왕조의 역사를 서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네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 유다와 이스라엘이 투쟁하던 시대(남 : 르호보암 - 아사 / 북 : 여로보암 - 바아사)
* 유다와 이스라엘이 화평하던 시대(남 : 여호사밧 - 아하시야 / 북 : 오므리왕조)
* 유다와 이스라엘이 평행하던 시대(남 : 요아스 - 아하스 / 북 : 예후왕조 이후)
* 유다만 홀로 있던 시대(남 : 히스기야 - 시드기야)

앞서 말했지만 북방 이스라엘의 역사는 모두 아홉 개 왕조 19명의 왕들로 구성되는 피로 얼룩진 쿠테타의 역사이고 비극의 역사이다.
* 제1왕조(여로보암 - 나답) - 제2왕조(바아사 - 엘라) - 제3왕조(시므리) - 제4왕조(오므리 - 아합 - 아하시야 - 요람) - 제5왕조(예후 - 여호아하스 - 요아스 - 여로보암 II - 스가랴) - 제6왕조(살룸) - 제7왕조(므나헴 - 브가히야) - 제8왕조(베가) - 제9왕조(호세아)

여기에서 이들의 치적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고 대략적인 평가를 내리자면 북조 이스라엘의 왕정은 1) 남방 유다에 대한 열등의식이 팽배하여 서로 갈등하였고 2) 피의 반란을 통한 정권교체로 인하여 혼잡한 역사가 반복되었으며 3) 혼합종교로 전락하여 신앙적 부패가 만연하였다. 4) 결국, 여호와를 저버리고 이방나라를 의지함으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하여 남방 유다 왕국의 역사는 역대기 사가(史家)의 관점과 같이 다윗 언약(삼하7:12-16)에 근거한 세 가지 면에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는 있겠으나 그들의 종말도 결국 우상숭배로 인하여 비참하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조와는 달리 남조의 왕들 중에는 아사, 여호사밧과 같이 혼합종교로부터의 개혁이나 율법교육과 사법제도의 개혁을 일으킨 왕들도 있었고 히스기야나 요시야 같은 민족적인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킨 왕들이 있었다. 북조가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멸망했다면 남조는 프라이드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조에게 있어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시행된다는 점이다. 결국 남방 유다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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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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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약읽기/ 하나님의 이름Ⅰ(1999년 5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의 호칭은 매우 다양하다. 불신자들이라도 당장 몇 가지의 다양한 호칭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호칭만큼이나 그 의미 또한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 것인데 성도들이 과연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용하는지 궁금하다. 추측하건대 호칭의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신앙의 대상은 분명하니까 상호 동의적인 의미에서 생각나는 대로 부르고 있을 것이다. 자고로 이름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 나름대로의 가치와 명예를 지니고 있다. 하물며 천지를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이름이야 어찌 존귀하지 않겠으며 그 명예와 영광이 온 우주에 충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은 그 분을 제대로 대접해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죄로 인한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값없이 영원한 생명으로의 구원을 얻은 성도들조차 그 분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심 없이 일상의 대화 속에 함부로 거론하는 것은 그 분의 계명을 어기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나님은 제 3계명을 통하여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20:7)고 경고하셨다.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지한 인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정확하게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자신의 다양한 이름들을 두어 번에 걸쳐서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1.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

가. 하나님
1) 엘
고대 근동 아시아 셈족들의 문서에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신의 이름은 엘이다. 특히 우가릿 문서에서는 최고 신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들에게 있어서 엘 신은 신들과 사람의 원시적인 아버지로서 때론 엄격하고 때론 자상하며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진 존재였다. 이 명칭이 서부 셈족어에서는 복합되어 나타나는데 어떤 이들은 이것을 엘 신에 대한 국지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 예로 멜기세덱이 호칭한 엘 엘리욘을 든다(창14:18-20). 이와 같이 엘 또는 그와 복합된 명칭이 구약에서 약 200회 이상 발견된다.

구약에서의 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이름에도 여호와의 요소가 아니라 엘의 요소가 들어가 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과 엘의 관계가 이스라엘과 여호와의 관계보다 역사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호와라는 명칭(출6:2-3)의 역사가 모호하기 때문에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엘이란 명칭이 보다 고대적인 본문에 더 자주 사용된다는 것 뿐이다. 엘과 복합된 형태의 명칭들로는 첫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멜기세덱이 고백한 엘 엘리욘(창14:18-20;신32:8 참. 시73:11;107:11), 둘째,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으나 하나님의 완전성을 강조하며 여호와와 동격으로 사용된 엘 올람(창21:33), 셋째, 70인역(LXX)에 기초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번역된 엘 샤따이(창17:1;28:3;35:11;43:14;48:3;49:24-25; 참. 민24:4,16)가 있는데 이 명칭은 출6:2-3을 통하여 여호와와 동일한 명칭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명칭은 이스라엘에 대한 특별한 언급도 없는 욥기에 약 30여회 나타나 욥기의 고대적 배경을 보여 주고 있다. 넷째, 엘 엘로헤 이스라엘(창33:20)은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으로서 여호와보다는 엘의 요소가 이스라엘의 신 명칭에 더 가까움을 보여준다. 다섯째, 엘 로이는 애굽 여인 하갈의 이야기(창16:13)에만 등장하는 이름으로서 비 이스라엘계와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이 하나님을 호칭한 유일한 예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특별한 체험이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흥미 있게 반영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엘이란 명칭은 특히 창12-50장에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모세 이전시대에 있어서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2) 엘로힘

흔히 엘의 복수형이 엘로힘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엘로힘의 단수는 엘로아이다. 엘로아(Eloah)는 모두 57회 정도 나타난다. 그 중에 약 41회가 이스라엘의 사회 배경과 거리가 먼 욥기에 나타난다. 엘로힘은 구약에만 약2,570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복수 형태는 자주 여호와와 다른 신들의 호칭으로도 쓰인다(출20:3). 그러할 경우 엘로힘 앞에 정관사가 붙기도 하고(출18:11) 복수 형용사(시97:7)나 복수 동사들이 함께 쓰이기도 한다. 이방신에 관련되어 사용된 복수 형태는 다신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엘로힘은 하나님의 절대성 내지 배타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장엄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창1:26이나 사6:8등의 다양한 증거들이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로힘은 여호와처럼 엘과도 호환될 수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시42-83편이 엘로힘을 특별히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을 예로 들며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국한되었던 이스라엘 내의 일부 그룹이 엘로힘이라는 신의 명칭을 선호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비 이스라엘계의 하나님 경배와 관련하여 의도된 것으로 변증적이거나 선교적인 목적 하에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이해한다.

나. 주

1) 여호와
한국 개역성경이 여호와(Jehovah)라고 번역한 히브리어는 "야웨"(Yahweh)로 발음하는 것이 좋겠다. 이 명칭의 어원은 '하야' 또는 '하와'라는 동사로서 그 의미는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이다"(be), 둘째 "...이 되다"(become), 셋째 "일어나다"(happen/take place), 넷째 "살다"(live) 등이다. 이 동사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많이 활용되고 있다(창1:1-2:4).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관련된 활용의 예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을 때 이 동사가 어김없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주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자신의 메신저인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경우에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동사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야웨"인데 이것과 관련된 또 다른 하나는 그 의미를 풀어서 말씀해 주신 "에예 아쉐르 에예"(출3:14)라는 구절이다. 특히 후자는 동사 '하야'의 활용 중 가장 난해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이러한 명칭이 강조된 배경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행하시려고 미디안 광야로 피신해 있던 모세를 부르셨다(출3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들은 모세는 이 엄청난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그리하여 이 엄청난 계획을 수행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누구관대..."라고 자신의 무능함을 토로했고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보장의 말씀을 주셨다. 또한 자기 동족들에게 이 소식을 전할 때 그들이 '우리 조상의 하나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경우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는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에예 아쉐르 에예"라고 답을 주셨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에예"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 후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바로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출애굽을 허용할 것을 요구하였다(출5장). 그 결과 바로의 거부는 물론이고 이스라엘은 더욱 학대를 당하게 된다. 백성들의 거센 항의에 면목이 없게 된 모세의 항변을 들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한번 출애굽의 언약을 확인시키시며 자신의 이름을 야웨(출6:2-3)로 계시하신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는 야웨이고 다른 하나는 에예이다.

우선 본문의 순서대로 에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으로 소개해야 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의미는 여호와의 정체성(identity)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여호와의 성격(character/nature)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의 독특성을 강조해 준다는 해석이 있다. 70인역에 따르는 Schild와 Lindblom은 에예 아쉐르 에예를 "I am the one who is"로 번역하여 여호와는 여러 이방신들 중에 유일한 참 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정상적인 히브리어 문법에 어긋남으로 인하여 비판을 받는다.

둘째,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심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Albright와 Freedman은 에예를 사역동사(Hiphil)로 이해하여 에예 아쉐르 에예를 "I create whatever I create"로 번역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본문의 맥락이 이스라엘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강조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지키시어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는 여호와의 기능에 촛점이 맞춰져 있고 또한 이 동사가 사역형으로 사용된 다른 실예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

셋째,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문형 자체는 성경 히브리어에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예로 출4:13(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왕하8:1(거할 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출33:19(은혜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등을 제시한다. 따라서 에예 아쉐르 에예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위한 구속계획의 성취를 보장하는 여호와의 약속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야웨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BDB는 이 품사의 문법적 성격을 동사 하야의 Qal(일반동사 능동형) 또는 Hiphil(사역동사 능동형)임을 조심스레 제시하고 있다. 첫째, 야웨를 일반동사의 능동형(Qal)으로 볼 경우 야웨의 의미는 여호와의 신비한 속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the one who is", "the absolute and unchangeable on", "the existing, ever-living", "creator" 등을 뜻한다. 이것은 다른 이방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임을 명시하는데 목적이 있다. 둘째, 야웨를 사역동사의 능동형(Hiphil)으로 볼 경우 위에서 언급한 어근 동사 하야의 몇 가지 의미를 중심으로 야웨의 신학적 의미를 생각해 보자. a) "to be"의 관점에서 볼 때 야웨는 "마땅히 있을 것을 있게 하는 자"(the one bringing into being), 다시 말해서 "필요한 것을 반드시 공급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b) "to become"의 관점에서 볼 때 야웨는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되게 하는 분"(giver of existence)이시다. 즉, 자기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구속언약을 성취하시는 분(performer of his promises)이시다. c) "to live"의 관점에서 야웨는 자기 백성들에게 진정한 삶을 가져다 주시는 분(lifegiver)이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름을 야웨로 계시한 출애굽 사건에 관하여는 제 3장에 가서 다루도록 하자.

2) 아도나이
고대 근동 아시아의 셈족어 문서들에서도 신들과 인간에 대하여 사용된 이 명칭의 동족어들이 발견된다. '주' 또는 '주인'을 뜻하며 구약에 약 30회 출현하는 아돈의 복수형에 제 1인칭 공성 단수의 대명사 접미 (아이, my)가 붙은 형태인 아도나이는 모두 449회 나타난다. 발음은 "나의 주인들"(my lords)과 혼동하지 않도록 살짝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주(Lord)"를 의미하는 여호와란 명칭을 대신할 수 있기에 여기의 어미는 접미라기 보다는 명사적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어느 것을 택하든 이 명칭은 위엄과 강함을 뜻한다. 또한 '바알'("주인", "남편")과 유사한 의미로 인하여 적절한 변화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용례로는 이 명칭이 315회나 여호와라는 명칭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사용된 몇몇의 실례들은 이 명칭 자체가 통치나 소유권 또는 능력이 아니라 권위에 더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아브라함, 창18:12; 라반, 창31:35; 요셉, 창45:8; 엘리, 삼상1:15). 하나님의 대용으로 이 명칭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곳은 선지서인데 모두 320회나 된다. 그 중 에스겔서에만 무려 217회 나타나 있다. 시편에서도 55회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선지서의 대표적인 용례 중 특히 사3:15;10:24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관련되어 나타난다. 몇몇의 본문들이 보여주는 보다 보편적인 예로는 "온 땅의 주"(수3:13;시97:5;미4:13), "주의 주"(신10:17;시136:3) 등이 있는데 이 외의 여러 요소들을 종합해 볼 때 아도나이는 "모든 것의 주"를 의미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아도나이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인 것이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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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약읽기/ 하나님의 이름Ⅱ(1999년 6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지난 호에 이어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다양한 이름에 대해서 싣는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라는 의미의 여호와, 아도나이에 이어 야웨 체바오트에 관한 내용이다. <편집자 주>


야웨 체바오트

이 용어는 흔히 "만군의 여호와"로 번역되고 있으나 체바오트의 의미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다. 이 용어는 "전쟁에 나가다", "징집되다", "제의(祭儀)를 섬기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 차바에 기원을 둔 여성복수 명사형이다. 명사의 뜻은 "병역", "전사(戰士)", "군대", "제의 봉사", "노역" 등으로 다양하다. 고대 근동의 아카드 언어에서도 같은 어근의 유사한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 이 용어의 동사형은 479회나 출현하는 명사형에 비해서 겨우 14회 정도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 용어의 대부분의 용도는 전쟁과 제의에 관련되어 있다. 특히 구약과 고대 근동 아시아의 문서들(ANE Texts)이 전쟁과 제의의 두 영역에 중첩되어 사용되는 예들은 현대 성경해석자들을 적지 않게 자극하고 있다. 구약시대에 일반적인 여호와의 현현(顯現)의 장소는 언약궤가 안치된 성막 또는 성전에서와 전장(戰場)에서의 두 가지 경우이다. 그리하여 야웨 체바오트를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출15:3)를 강조하는 "만군(萬軍)의 여호와"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그 대표적인 용례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시작하기 직전의 여호수아가 정복전쟁의 승리를 보장받은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수5:13-15).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사르 체바 야웨는 한글 개역성경이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번역하고 있다. 대부분의 영역본들도 "LORD of Hosts"로 읽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체바오트의 용도를 군대에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것으로서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의 특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군대를 지칭할 때는 단수로 표현하지 복수형으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체바오트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야웨 체바오트가 천사들과 연결된 구절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군대로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데(창28:12;32:2; 수5:14; 왕상22:19; 시68:17;103:21;148:2; 사6:2) 대부분 단수가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군대적 의미를 배제시키고 있으며 오히려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이름의 의미와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한다(신33:2; 왕상22:19; 시24:10; 사6:3;24:23; 슥14:16).

그러나 여호와의 천사들이 여호와의 군대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고 여호와께서 거룩한 전쟁의 용사 되시는 사실은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므로 야웨 체바오트에서 군사적인 의미를 전혀 배제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체바오트를 '별들'로 이해하려는 입장이 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

여호와라는 이름에 관련하여 수식어들이 붙어 여호와의 속성 내지는 사역의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주는 이름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성경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는 야웨 이레이다. 이 명칭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 이를 저지하시고 수양을 준비시켜주신 하나님의 사역에 관련된 이름이다(창22:14). 이 호칭은 아브라함이 그 땅, 곧 모리아 땅을 가리켜 한 말이다. 여기에서 이레는 동사 '보다'의 일반형 능동(Qal)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서 "그(여호와)가 볼 것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의하여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서 고착된 것이다. 이 용어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자세를) 보실 것이다" 또는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마음을) 아실 것이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더 나아가서는 "여호와께서 (바치는 자의 마음과 믿음을 아시고 꼭 필요한 것을) 준비하실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미의 확장된 해석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개인적인 생활에 관련해서도 적용할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로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야웨 로페이다. 이 명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호칭하신 것이다. 애굽을 탈출한 후 시내광야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에서 물로 인해 고통받을 때 그 쓴 물을 고치시고 자신의 사역의 특성을 강조하신 명칭이다(출15:26). 출15:26의 히브리 원문에는 로페라는 Qal 능동분사 남성 단수 뒤에 '너를'이라는 목적격 접미가 붙어 있다. 로페는 '고치다', '치료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라파의 능동분사형으로서 그 의미는 '치료하는' 또는 '치료하는 자'이다. 그리하여 야웨 로페의 정확한 의미는 '치료하시는 여호와' 또는 '치료하시는 자 곧 여호와'이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잘 지켜 의를 행한다면 그 어떤 질병도 내리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자신은 만병을 통치하시는 최고의 의사이심을 드러내고 계신다.

셋째는 야웨 닛씨이다. 이 명칭은 출애굽의 여정을 가로막는 대적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써 승리한 뒤 모세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 제단의 이름을 야웨 닛씨라고 부른 것이다(출17:15). 여기에서 닛씨란 '깃발'을 뜻하는 명사 네쓰에 소유격을 의미하는 대명사 접미(1인칭 단수)를 붙인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이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명칭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대적들과 싸우시는 전쟁의 용사이심을 보여준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대적들의 침략과 압제를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용사요 통치자 왕이시다(출15:3,18).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그 누구를 무서워하며 그 무엇을 두려워할 것인가. 여호와는 자신의 구원역사를 가로막는 모든 원수들을 쳐부수고 승리하시어 그의 나라를 굳건히 세우시는 분이시다.

넷째는 야웨 샬롬이다. 이 명칭도 제단의 이름이다. 사사 기드온이 "미디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그 중대한 사명에 힘겨워할 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분명한 표징을 확인하고 나서 부른 이름이다(삿6:24).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또한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뵈었던 여호와의 사자를 인하여 기드온은 죽을까봐 두려워 떨었다. 그 때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여호와의 보장을 받고 감사함으로 쌓은 제단을 기드온은 야웨 샬롬이라고 불렀다. 샬롬이란 '완성되다', '건강하다', '평안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 동사 샬람의 명사형으로서 '완성', '평화', '평강' 등의 뜻을 갖는다. 이 외에도 샬람은 강조동사 능동형(Piel)으로서 "맹세를 이행하다"라는 용도로 쓰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야웨 샬롬은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여호와는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시다"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명기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명칭은 오직 여호와로서 여호와의 속성과 그 사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평강의 주로서 자기 백성들과의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마지막으로 야웨 샴마를 들 수 있다. 이 명칭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겔48:35). 에스겔은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의 징벌로써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환상을 보았다(겔10:18-22;11:22-24). 그 후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는 메시지와 더불어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갔던 예루살렘 동편 문을 통하여 다시 돌아오는 환상을 본다(43:1-5). 새로운 성전의 건설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은 이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거처가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 성읍의 이름이 야웨 샴마가 될 것이다. 여기에서 샴마란 '거기에'를 뜻하는 샴에 방향을 표시하는 헤가 접미되어 공간적인 의미를 지닌 보어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야웨 샴마란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라는 뜻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온갖 더럽고 추한 것들을 멀리 제하여 버릴 때에 영원토록 그들 중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겔43:9). 즉, 여호와는 그의 자녀들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계실 것이고, 어느 때든지 영원토록 함께하실 것이다. 단, 여호와의 뜻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할 때 그리 하실 것이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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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구약읽기/ 하나님의 이름 III (1999년 7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아버지(압)
이 용어는 보통 자녀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쓰이지만 성경에서는 조상들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신학적인 비유로서 이스라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된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에까지 확대된다. 이 명칭이 이스라엘 사회에 깊이 배어 있다는 사실은 요압, 아비야, 엘리압 등과 같은 이름들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의 입장과 행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출4: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신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신8: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시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
잠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렘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렘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호11:1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의 다윗 왕의 아버지가 되시는 여호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삼하7:14;시2:7;89:26). 또 한 가지 이 용어는 신명기에 많이 나타나 있듯이 상속적인 개념도 함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매우 큰 기대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스라엘은 아버지 되신 여호와께 신실해야 하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한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sons)'이라는 복수 표현을 한 것은 민족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불성실했고 불순종하였으며 거역하였다(사1:2;30:9;렘3:4,19;말1:6). 특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자식같이 양육하였거늘 이스라엘은 짐승만도 못하게 배은망덕하였다"고 탄식하셨다(사1:2-3).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관계성에 관련된 책임과 의무는 율법언약에 규정된 언약관계에서의 그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은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아니었다. 출애굽과 시내산 언약 체결 당시에 형성된 이 관계성(출4:22)은 율법언약의 파기로 인하여 깨져 버렸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을 버리셨다. 바벨론 포로라는 엄청난 사건은 도무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자지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성을 기억해 주시도록 간곡하게 호소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자존심에 강력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사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사64: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선지자로서 사역했던 예레미야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렘31: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렘31: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렘31:19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렘31: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31:21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선지자들의 간곡한 호소에서 엿볼 수 있듯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 뒤에 가서 살펴보겠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결코 그 명예와 영광을 다른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신다(사48:9-11).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심이 매우 강하신 분이시다.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에서 가장 강하게 부각되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다윗의 후손 메시야이시다(행2:24-28).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께서 왕으로 묘사된 것과 유사한 비유적 용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애굽, 시리아 등지의 문헌에서도 발견된다. 왕이라는 용어 앞에 정관사가 붙어 나올 때는 왕에 대한 공손한 태도를 보이거나(삼하3:21) 존경의 뜻을 표현할 때이다(느2:3).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명칭으로 왕이라는 표현을 단독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여호와의 왕권에 관하여 지혜문학에서는 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고 내러티브(narrative)나 초기 선지서 등에서 약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사야, 예레미야, 스가랴 등의 선지서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시편(29;93편)에서 여호와 내지 메시야를 왕으로 비유하는 예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다니엘, 말라기서를 비롯하여 쿰란(Qumran) 문서와 같은 후기 작품들에서도 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왕되심은 구약신학의 핵심 주제(theme)로서 수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분은 온 세상의 왕이시고, 신들의 신이시며, 모든 나라의 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예레미아스(J. Jeremias)는 시29;47;74;93;출15:1-18;신33:2-5,26-29;삼하6:15;사6:1-5 등의 구절이 여호와의 왕권 사상을 잘 드러내 준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왕권사상 모티프(motif)가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빌어온 재해석이라고 이해하는데 문제가 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는 처음부터 진정한 왕이시다. 이스라엘의 왕 제도가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 근동의 역사보다 뒤진다고 해서 여호와의 왕권사상이 고대 근동의 문헌이나 제도에서 왔다고 보는 관점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결여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왕이신 여호와의 이미지는 반드시 전쟁의 용사로서의 이미지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전쟁의 용사이신 여호와는 전쟁에서의 승리로써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후 그들을 안전한 처소로 인도하시는 통치자 왕이시다(출15:1-18). 시내산 언약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와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자신의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선포하신다(출19:5-6). 백성의 상대적 개념은 왕이 아닌가? 하나님은 이미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정(神政)정치를 거부하고 왕정을 요구했던 것은 왕의 기본 의무가 자기 백성들을 대적으로 손으로부터 구원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삼상8:5,20). 이 사실은 백성들의 왕정의 요구에 놀란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삼상8:7)라고 말씀하신 데서 엿볼 수 있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대적으로부터의 안전 그리고 진정한 나라의 번영과 안정은 참된 왕이신 여호와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진정 여호와는 온 우주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이시요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왕이시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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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구약읽기/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1999년 8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가. 하나님(데오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칭 중에 엘(El), 엘로힘, 엘리욘, 엘 샤따이 등에 해당하는 신약의 명칭은 데오스이다. 이 말은 한글개역 성경에서 하나님으로 번역되었다. 구약의 명칭에서 보는 것처럼 엘(El)과 더불어 사용된 복합적 용례들이 신약에서도 나타난다. 엘리욘은 휩시스토스 데오스(Hupsistos Theos)로 번역되었고(막 5:7; 눅 1:32, 35, 75; 행 7:48, 16:17; 히 7:1), 샤따이와 엘 샤따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와 데오스 판토크라토르(Theos Pantokrator)로 번역되었다(고후 6:18; 계 1:8, 4:8, 11:17, 15:3, 16:7, 14). 그러나 데오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모든 자녀들과 각각의 자녀의 하나님으로 간주될 수 있는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 인하여 나의(mou, 무), 너의(sou, 수), 우리의(hemon, 헤몬), 너희의(humon, 휘몬) 등과 같은 소유격 후접사들이 동반되어 사용되고 있다(행2:39; 벧후1:1; 계4:11, 7:12, 19:5).

그러나 신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데오스의 의미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마 23:9; 롬 3:30; 고전 8:4,6; 갈 3:20; 딤전 2:5; 약 2:19). 하나님의 유일성과 더불어 모든 믿는 이들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가장 분명한 신앙은 엡 4:6을 통해 고백되고 있다. 이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하나밖에 없는 참 신이시다(롬 3:30, 갈3:20, 살전 1:9; 딤전1:17, 2:5; 유25; cf.요 17:3). 이렇듯 참 신에 대한 본질적인 속성을 가리키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방의 신들을 표현하는 데에도 사용되고 있다(행 17:16,23).

이 외에도 하나님의 탁월성을 표현할 때에 데오스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유의 주재이시다(행 17:24; 히 3:4; 계 10:6). 하늘은 그의 보좌이고 땅은 그의 발등상이다(마5:34, 23:22; 행7:49). 그분은 못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다(막 10:27). 가장 존귀하신 분이시며(막 5:7; 눅 1:32; 행 7:48, 16:17; 히7:1) 만국의 통치자 왕이시다(계 15:3).

나. 주(퀴리오스)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LXX(70인역)에서는 이 명칭이 약 9,000회 이상 나타난다. 이 용어에 걸맞는 구약의 용례들이 많지만 그 중에 아돈(lord)에 대한 번역으로서 사람에 관련하여 사용된 경우는 약 190회이다. 아돈(lord)은 일정한 그룹이나 사회의 최고 책임자로서 명령권자를 가리키는데(삼상 25장) 호 2:16에서는 '주인'과 '남편'이라는 용법으로써 여호와께 적용되었다(호 2:16). 또한 바알(lord)의 번역으로 사용된 경우는 15회로서 주로 혼인법이나 재산법 관계에서 나타난다(호 2:18; 삿 19:22-23).

그러나 이 용어가 가장 많이 적용되는 히브리어는 역시 야웨이다. 이스라엘 역사의 전개 결과로 인하여 LXX에서는 야웨라는 명칭을 피하여 아도나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의 야웨 신앙이 포로 이전의 민족적 종교차원에서 알렉산더 시대(356-323 B.C.) 이후로 국제화되고 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야웨는 창조주이시고 전 우주의 주재이시며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이시다. 여기에서 야웨라는 이름이 지니는 특수성을 몇 가지 살펴보면 첫째, 야웨는 그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둘째,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로부터 구출하시고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서 선택하셨기 때문에 법적으로 이스라엘의 주인(Lord)이시다. 셋째, 그는 온 우주의 창조자로서 만물을 마음껏 다스릴 수 있는 법적인 주인이시다.

신약에 나타나는 퀴리오스의 구절은 모두 약 717개이다. 그중 누가의 저작(210회)과 바울의 서신서들(275회) 가운데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누가와 바울이 헬라의 지배하에 살고 있는 청중들을 위하여 쓴 책과 그들에게 보낸 서신들에서 퀴리오스를 많이 사용하였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유대적 기독교인들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겨우 18회 정도 나타날 뿐이고 그것도 대부분 인용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신약에서 퀴리오스가 사용되는 경우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인(lord)과 종이라는 사회적인 신분 관계에서 통속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마 10:24 f.;18:25, 27. 25:19; 눅 12:36f., 46; 엡 6:5,9; 골3:22). 즉, 헬라어 퀴리오스는 소유주(막 12:9; 눅 19:33; 마15:27; 갈4:1)이나 고용주(눅16:3,5)를 의미한다. 아내에게 남편은 퀴리오스이다(벧전 3:6;cf .창18:12 in LXX).

둘째, 하나님의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구약의 야웨에 해당되는 신의 명칭으로 가장 많이 쓰였다. 특히 다양한 복합어들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의 손(눅 1:66; 행11:21), 주의 천사(마 1:20; 눅 1:11; 행 5 :19 등), 주의 이름(약 5:10,14), 주의 영(행 5:9, 8:39), 주의 말씀(행 8:25, 12:24, 13:48 f.;15:35 f.) 등이다. 또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문형도 구약에 근거한 용법들이다(롬 12:19=신 32:35; 고후6:17=사 52:11; 계1:8 cf. 출 3:14).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알파와 오메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 '주(야웨) 하나님'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표현으로써 강조되고 있다(계1:4, 8, 17, 2:8, 4:8, 11:15, 17, 16:7;, 19:6, 21:6, 22:6, 13).

셋째, 예수님을 주(퀴리오스)로 호칭한다. 지상 사역 중의 예수님을 주로서 불렀다(마7:21, 17:4, 21:29 ff.;막 2:28; 눅 6:46 등).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주이시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그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를 다스리시는 주이시다(롬 14:9). 그는 주의 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시다(계1:5, 17:14, 19:15f.). 그는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다시 오실 심판의 주이시다(빌3:20;고전1:7-8;5:5;고후1:14;살전5:2;살후1:9;2:1,8;딤전6:14).

다. 아버지(파테르)

파테르는 구약 성경의 압(아버지)에 해당되는 용어로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정을 듬뿍 느끼게 하는 용어이다. 어머니(메테르)와 더불어 인도-유럽어원을 가지고 있다. 파테르의 가장 흔한 용례는 역시 아버지 또는 조상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 하나님의 명칭으로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이방인들의 풍습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우가릿(Ugarit)의 신 엘(El)은 '인류의 아버지'로, 고대 바빌로니아의 달신 신(Sin)은 '신들과 사람의 아버지'로 불렸다. 그리이스 시대의 제우스(Zeus)도 '사람과 신들의 아버지'로 불려다. 그러나 구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불리운 것(신 32:6; 사63:16, 64:8; 렘31:9; 말 1:6, 2:10 등)은 이스라엘의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며(출 4:22; 신 14:1f.; 호 11:1ff.), 그들을 선택하여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렘 31:9, 20; 호11:8)으로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한 가정의 아버지와 같은 권위와 능력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존경과 순종의 대상이시다(신32:5f.; 렘3:4f.,19; 말1:6).

신약에서 언급되는 아버지의 용례 중 약 245회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약 157회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여러 번 호칭하셨다. 마가복음에 3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구에서 4회, 누가복음의 독특한 구절에서 4회, 마태복음의 나머지 부분에서 31회, 요한복음에서 100여 회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셨는데(마 11:25-27) 예수님이 행하신 대부분의 기도문이 그 증거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마 26:39, 42; 막14:36; 눅 10:21, 22:42, 23:34, 46; 요 11:41, 17:1, 5, 11, 21, 24f). 그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너희 아버지'라고도 호칭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임을 강변하셨다(요10:30).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약 40회 언급하고 있다. 그 양태도 다양한데 축복의 메시지(롬 1:7; 고전 1:3; 고후 1:2)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찬미(롬 15:6; 고후 1:3; 엡 1:3)를 통하여도 언급한다. 또한 교리적 신조 구절(고전 8:6; 엡 4:6)과 기도문(엡 5:20; 골 1:12)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의 어법들은 대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롬 15:6; 고후 1:3, 11:31) 등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특별한 관계, 즉 삼위 중 제 1위와 제 2위되시는 부자관계를 표현하는데 자주 사용하였다(요 6:57, 10:30, 14:10f.).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계셨고(요3:35, 10:15, 16:15)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그 자체였다(요1:18, 8:26-29, 12:49f., 14:7,9). 그러나 기독론적 연관 없이 하나님의 아버지이심을 표현하는 엡3:14f.; 히12:9; 약1:17 등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주이심과 보편적 개념의 우주적 아버지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흥미 있는 철학적 해석을 지니고 있다. 플라토(Plato)는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에 근거하여 '우주의 아버지'이심을, 스토아 학파(the Stoics)에서는 온 우주를 주재하시는 '하나님의 권위', 즉 그의 자녀들의 '창조주요 아버지며 주재자'이심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사실이었다(마카비II 5:7; 지혜서 2:16ff.; 토빗 13:4). 또한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게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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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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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구약읽기/ 예배와 교육(1999년 9월호)

윤용진
kireb@netsgo.com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창4:1-7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1-7)


가인과 아벨의 출생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의 첫 열매는 가인과 아벨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되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지으셨다. 남녀 생식기의 신비한 구조는 성적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내려주신 하나님의 축복이다. 히브리인들은 남녀의 성관계를 나타내는 점잖으면서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말로 '동침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다'의 기본 의미는 '알다'(to know)이다. 다시 말해서 한글개역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1절)라는 문장의 히브리어 원전에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안다'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시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경험 내지는 체험을 통하여 깊이 아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용어는 구약에서 남녀간의 성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는 성행위를 통하여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고 서로를 깊이 알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구절을 Adam knew Eve his wife로 직역하는 역본으로는 KJV(New KJV), RSV, ASV이 있고 LXX(70인역)도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공동번역은 "아담이 아내와 한자리에 들었더니"라고 완곡하게 표현했다. 또한 NASV도 "Now the man had relations with his wife Eve"로 번역하여 히브리어 (하아담)을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그 사람(그 남자)"이라는 보통명사로 이해하였으며 부부행위에 대한 묘사도 "그의 아내 이브와 관계를 가졌다"고 번역하여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완곡한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야다'란 동사의 묘미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직역의 입장이 더욱 효과적이 아니겠는가?

세월의 간격
한글개역이 번역한 "세월이 지난 후에"(3절)라는 구절의 히브리 원전은 직역하면 "그리고 날들의 끝이 되었다" 또는 "그리고 날들의 뒤에 있었다" 또는 "그리고 날들의 끝에 놓이게 되었다"이다. 이 모든 번역이 시사하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생활의 형편이 어느 정도 고착되었다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출생했고 그들도 삶의 기술을 익혀 나름대로 먹고 살 수 있는 형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세월의 간격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단지 에덴에서의 축출 후 당면했던 여러 가지 삶의 고통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다시 말해서 아담의 입장에서 볼 때 가족의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의 고통과 땀흘린 대가로 얻는 열매의 기쁨을 알게 되었고, 하와의 입장에서는 임신하여 출산하기까지의 고통, 생명체를 얻은 기쁨 그리고 양육의 수고와 즐거움을 체득하게 되기까지의 세월이 흘렀음을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독립된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위치만큼 성장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제 어엿한 성인으로서 장성한 두 아들은 부모님들이 하시던 대로 또는 가르쳐주신 대로 땀흘려 수고한 소산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아벨과 그의 제물(제사)은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보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에 대해서는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외면하셨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이들은 가인의 제물이 동물로써 드리는 피의 제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제사(제물)이란 용어 '민하'는 동물제사나 곡식제사에 공통적인 용도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제물의 종류가 일치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억측은 배제하고 있다.

문제는 믿음이 결여된 제사, 다시 말해서 가인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과 감사가 결여된 제사였다는 데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 바치려고 가져온 예물을 최고의 정성을 깃들여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먼저, 아벨의 제물을 살펴보자. 한글개역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4절) 드렸다고 했는데,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하여 히브리 원문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의 양의 첫 새끼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리고 그것들의 기름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가져왔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아벨이 믿음과 감사의 표시로 최고의 정성을 기울인 예물로써 하나님께 제사 드렸음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가인의 제물에 관하여는 이러한 설명이 없다. 이것은 아벨의 제사처럼 온전한 제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아벨의 제사행위는 의롭고 가인의 제사행위는 악하였다고 가르친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일3:12;cf.유11)

'더 나은 제사'와 '의로운 제사 행위'라는 평가는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믿음과 정성의 유무가 결정하였다. 오늘날 수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예배행위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실까? 흡족한 모습을 가지시고 두 눈으로써 주목하여 보실까 아니면 몹시 불쾌한 모습으로 두 눈을 질끈 감으시고 외면하실까?

예배와 교육의 사명에의 적용
인류의 최초의 가정인 아담의 가정은 전 인류를 위한 대표성을 띠고 있다. 가정 창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가정은 하나의 작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랑이고 교회의 기본 사명 내지 기능은 예배와 교육, 선교와 친교, 봉사와 구제 등이다. 에덴동산에서의 뼈아픈 대실수(cf.창2:16-17)를 경험한 아담과 하와는 자식들에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영위하는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고 또 당연히 교육시켰을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의 고통도 하나님의 깊으신 배려요 은혜임을 가르쳐야 마땅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른 예배생활의 기본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의 실수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문제의 본질은 가인의 예배의식 결여에 있었고, 문제의 핵심은 부모의 지속적인 자녀교육 부재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 수 있는 변화된 생존 환경에서 먹고 사는 데 분주했을 것이다. 물론 자식들에게 하나님 경배하는 방법을 가르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현실적으로 분주했기 때문에, 더 정확히 말한다면 먹고 사는 데 바빴기 때문에 분가하여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자식들의 신앙을 자주 점검해 줄 틈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부모들의 삶은 어떠한가? 대부분이 맞벌이로써 부모가 모진 고생을 하더라도 돈은 벌어다 줄 테니 너희(자녀)들은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여 남들보다 성공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신없이 생활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싼 돈을 들여 온갖 과외를 다 시키지만 정작 자녀들이 바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갈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귀한 돈을 투자하고 있는가? 자녀들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그들이 진정으로 잘 되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자녀들의 앞날을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번역상의 문제
한글개역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번역본들(공동번역, KJV, NKJV, ASV, RSV, NASV 등)이 5-6절의 번역에 있어서 히브리 원문과 다소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문제는 핵심은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분노하여 화를 낸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다. 5절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가(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물을 주목하여 보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가 가인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 그랬더니 그의 얼굴이 떨어졌다"(5절)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화를 낸 주체는 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가인은 진노의 대상(목적)으로 나타나 있다. 가인은 면목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얼굴은 땅을 향해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인에게 화를 낸 '그'(3인칭 남성 단수)는 누구일까? 그것은 6절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6절의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그가 어찌하여 너에게 화를 내느냐?
그리고 너의 얼굴이 어찌하여 떨어졌느냐?"

여기에서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사를 외면하시자 가인에게 몹시 화를 낸 '그(He)'는 아벨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자기의 예물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물러나 흐뭇한 마음으로 형 가인의 제사를 지켜보던 아벨이 예기치 못했던 일이 발생하자 몹시 당황한 심정으로써 형 가인에게 '도대체 어찌 준비했길래 하나님이 외면하시느냐'고 화를 낸 것이다. 형의 제사에 대한 아벨의 반응에는 가족이라는 인간애적인 안타까움도 있었겠지만 만물의 창조주요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범죄한 한 인간을 엄히 꾸짖는 질책의 심정도 담겨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결언 : 예배 성공은 인생 성공이다
위의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자. 예배 성공은 인생 성공이다. 가정예배의 성공은 가정의 행복을 보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른 예배의 삶을 사는 자녀들로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예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시간과 장소를 같이하여 일정한 순서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의식으로서의 예배이고, 다른 하나는 지극히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로서의 예배(마5:13-16;롬12:1-2)이다.

바른 예배 생활은 바른 교육을 통해서 만이 정착될 수 있다. 예배와 교육, 이 두 가지는 교회의 주요 사명 중의 핵심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 죤 듀이의 실용주의적 교육철학의 테두리 안에 묶여 참 교육의 기회를 맛보지 못하고 세속적이고 이기적이며 개인중심적 인간으로 몸집만 커가는 기형적 아이들은 아닌가? 21세기를 코앞에 둔 현대사회의 어두운 면들과 현행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문제점 내지 한계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녀들의 꽁무니를 뒤쫓아 다니며 일일이 그들의 삶을 지도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언제,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는 인격체로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비싼 학과목 과외보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경적 인생관(가치관/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한 성경과외공부는 어떠할까?(월간 <교회와신앙> 199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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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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