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聖書) 속의
성(性) 이야기
- Sex Story in the Bible -
머리말
1.하늘은 아버지이고, 땅은 어머니인가?
2.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3.성으로 본 '하나님의 형상'(1)
4.성으로 본 '하나님의 형상'(2)
5.뼈와 살처럼 하나인 남녀
6.남녀 연합의 신비
7.성과 타락의 기원
8.타락이 성에 미친 영향(1)
9.타락이 성에 미친 영향(2)
10.성과 권력의 관계
11.근친상간의 기원
10. 성과 권력의 관계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1-8).
사람들이 번성하면서 사랑하는 일과 짝짓는 일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그래서 기왕이면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기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성서는 왜 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기사와 네피림(거인 혹은 용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구절은 해석하기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고대의 신화를 보면, 신들이 인간들과 결혼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절을 이런 배경 아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의 아들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천사들이 말 그대로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은 다분히 신화적인 시대의 허구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화는 결코 허구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고대의 신화적인 내용이 왜 성서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잘 몰라도, 성서는 분명히 역사적인 교훈을 주려고 이런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구절의 본질적인 핵심은 "성과 권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에 영웅이나 왕처럼 힘센 용사, 거인은 스스로 신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아름다운 여자들을 취하곤 하였다. 중국의 진시황이나 백제의 의자왕이 그 구체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은 다윗도 충직한 부하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 후에 그의 아내(밧세바)를 강제로 취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솔로몬은 무려 1,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여자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머잖아 나라가 분열되기에 이르고,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았다.
18년간 막강한 독재권력을 행사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여러 여인들을 취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정 여인의 살해사건에서 보듯이, 권력가들은 미모의 여인을 취하고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돈이 곧 힘"인 지금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으로 여자를 취하고 성매매하는 행위를 흔히 본다.
성행위는 바로 권력행위이다. 단지 권력이 강제적인가 아니면 회유적인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며, 권력이 어떤 명분과 기술을 이용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성행위가 평화적, 대화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강압적,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그 성격은 달라진다. 종교도 결코 권력과 무관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교활하고 사악한 교주들은 종교심이나 공포심을 악용하여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수많은 성범죄를 저질러왔다. 오늘날 성매매 산업 뒤에 폭력조직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이다.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 그리고 권력 본능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이다.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권력이 가장 크게 팽창하는 과정은 역시 전쟁터이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는 많은 여인들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한다. 일제 시대의 위안부와 한국 전쟁시의 수많은 성폭력이 이를 실증한다.
성행위의 주체가 자발적인 인간이 아니라 강압적인 권력자가 될 때, 그것은 추악한 범죄로 떨어진다. 그래서 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땅에서 모든 생명체를 쓸어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 사건이 등장한다. 포악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리고 죄많은 인간만이 아니라 죄없는 생물들까지 멸망시킨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와 후회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증거한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건강하게 짝을 맺기를 원하였건만, 인간은 폭력을 동원하여 제멋대로 성을 소유하고 남용한다. 이로써 인간의 역사는 심판의 역사로 변한다. 봄베이의 화산 폭발과 에이즈의 확산의 원인을 인간의 성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종교적 해석이지만, 이런 설명이 아직도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성적 타락의 결과가 너무나 끔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비록 인간은 살과 피를 지닌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의 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창 1:3). 그리고 인간은 정신적, 심리적 존재이다. 그런 인간을 오직 육체 덩어리, 물체인 것처럼 폭력적으로 지배, 소유, 억압, 착위하는 행위는 인간 이하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범죄의 행위임을 성서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랑은 인격에 기초하고 대화를 통해서 발전할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 단지 외모의 아름다움, 매력적인 육체에만 홀려서 성을 마구 취하고 남용할 때, 인간의 삶은 피폐해지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혼란과 멸망에 빠진다. 아니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폐기처분해 버린다.
머리말
어디를 가나 세상은 온통 성(性)으로 가득하다. 끊임없이 시선을 끌어당기는 온갖 광고물 속에는 거의 어김없이 섹시한 여성이 매혹적인 몸매를 과시하고 있다. 비디오와 방송, 인터넷과 신문, 책과 잡지 곳곳마다 성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정말 우리는 지금 성이 지나칠 정도로 넘쳐나는 섹스의 홍수 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홍수 속에 마실 물이 귀하듯이, 성이 넘치는 문화 속에서 아름다운 성은 점점 더 찾아보기가 어려워진다. 선진국 수준에 맞먹는 외도와 이혼율, 급속히 증가하는 청소년 매춘과 번창하는 매음 산업 등은 우리의 성문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간단한 실례이다.
하지만 거룩한 교회는 언제나 성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의 중요한 화제거리와 관심거리, 아니 고민거리인 성을 외면하고서 교회가 어찌 인간을 온전히 구원할 수 있단 말인가?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와 위선적이고 때로는 상당히 이중적인 성관념 때문에 지금까지 성(性)을 신앙과 신학의 담론으로 공론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도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기가 여간 껄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성서는 성을 죄악시하거나 혐오시하지 않으며, 인간을 성과 무관한 고상한 영적인 존재로만 보지도 않는다. 성서는 성 문제로 기뻐하고 괴로워하는 인간의 모습을 진솔하게 그려주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세상의 그 어느 성문학보다 더 적나라하게 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껄끄럽다고 성담론을 회피함으로써 인간의 근본 문제를 회피하기보다는 정직하게 인간의 주요 관심사인 성에 용감히 직면함으로써 아름답고 건강한 성이해와 성생활로 초대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결코 단순한 흥미거리를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 책의 위기를 돌파하는 전략으로 독자의 구미에 당기는 화두를 선택한 것이다. 마치 쓴 약에 당의정을 입히듯이, 외설스럽기는 하지만 인간이 그토록 헐떡거리는, 아니면 우리를 그토록 헐떡거리게 만드는 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성에 대한 혼란과 성적 부패 속에 빠져드는 인간을 치료하는 약제를 짓고자 한다.
하지만 막상 이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보니, 성담론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어 당겨놓고는 성서와 성에 대한 어설픈 지식으로 독자들을 실망시키거나 불분명한 결론으로써 독자들을 더 큰 혼란에 빠뜨리지 않을까 지레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지식은 어차피 불완전한 것이다. 거룩한 성(聖)도 그렇거니와 세속적인 성(性)의 신비를 누가 다 안다고 장담하겠는가? 그리고 가정과 추리, 상상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이 상당히 필요한 주제이고 보니, 보기에 따라서는 예민한 이 주제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견해를 배우고자 한다. 독자들도 필자의 견해를 선입견을 갖고 재단하지 마시기를 부탁한다.
2001년 1월 4일 부천에서, 이신건
2.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
하나님의 신(神)은 수면(水面)에 운행(運行)하시니라(창 1:2)
앞장에서 우리는 예수 이래로 하늘 아버지가 어머니를 무척 닮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여성적인 모습은 예수가 처음으로 소개한 낯선 이미지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 2절에서 우리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구절을 해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여기서 신(神)은 히브리어로 바람, 숨을 의미하는 '루아흐'이다. 루아흐는 그냥 만물을 움직이고 만물에 생기를 주는 바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物活論). 혹은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빗은 후, 그 코에 하나님의 루아흐를 불어넣으니 비로소 산 생명이 되었다"(창 2:7)는 구절처럼 루아흐는 단순히 생명의 에너지, 생기(生氣)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는 구절은 "바람과 같은 신적인 에너지가 물위에서 요동하였다"고 생각하거나, "생명의 기운이 물위에 넘쳐흘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루아흐는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의 영(靈)과 동일시되었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 확립된 이래로 하나님의 영, 즉 성령(聖靈)은 또 한 분의 신적인 존재로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요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누구보다도 자주 성령을 인격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신적이고 인격적인 속성을 가지는 성령은 남성적인가 여성적인가, 아니면 중성적인가?
특히 요한에게서 성령은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거듭나게) 하는 영이다. 어느 날밤에 예수를 찾아온 유대인 관리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3:5)고 말한다. 창세기처럼 여기서도 물과 영이 나란히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가 않다. 물은 생명체가 생존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이며, 생기(생명의 에너지)도 생명체가 움직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래서 성령은 오래 동안 '생명의 영', '생명의 샘'이라고 불리었으며, 고대 교회는 "창조자 영이여 오소서,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Veni Creator Spiritus)라고 기도하곤 하였다.
요한의 표현대로 만약 성령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존재라면, 성령은 아기를 낳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신적인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수면 위에 운행한다"는 구절은 종종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수면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되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태초의 무질서한 형질을 품고 이로부터 생명의 질서를 조직(組織)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할 수 있다.
더욱이 요한은 성령을 보혜사(保惠師)라고 부른다.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함께 거하고 우리 속에 거하는 영"이요, '위로의 영'(요 14: 16-26)이다. 우리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로부터 더 자주 위로의 말을 듣는다. 우리가 힘들 때마다 우리를 어루만져주는 이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주로 어머니이다. 우리의 내면과 무의식 속에 깊이 존재하는 이는 아버지라기보다 어머니이다. 왜 그런가? 어머니는 우리의 생명을 품고 낳고 양육하며 위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식을 품에 앉고 기를 뿐만 아니라 죽은 자식조차 자신의 가슴에 묻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 어머니의 품에 묻힌다.
생명의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아버지가 하는 역할이란 그렇게 크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성들이 자녀 출생과 양육을 하찮은 일이나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기는 현상은 잘못된 여성 운동의 부산물(副産物)이다. 생명 탄생과 양육은 성스러운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 참여하고 동참하는 위대한 일이다. 여성들의 권리와 인격이 남성들과 동등해질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지만,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와 위엄을 제발 가볍게 여기지 말았으면 한다.
그리고 남성들도 정자(精子) 발산의 결과로 얻은 찰나적인 쾌락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하였다는 착각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서, 생명 탄생과 양육의 과정에 더 깊이 참여하여야 한다.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종종 방영되었듯이, 수중분만(水中分娩)의 과정에 남성들이 함께 한다든지, 자녀 출산의 모든 과정을 비켜보고 아내의 고통에 동참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참으로 감격적이고도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 출산은 여전히 주로 여성들의 몫이다. 이 일조차 남성에게 떠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시험관 아기, 대리모 혹은 세포 복제를 통한 출산이 가능해지더라도, 여전히 어머니의 역할은 여전히 지대한 것으로 남는다. 만국의 여성들이여, 하나님처럼 좋은 어머니가 되라!
물론 만국의 남성들도 하나님처럼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 좋은 아버지가 되는 비결은 일평생 자녀와 동반하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자녀의 좋은 친구가 되는 일에 남성과 여성의 구분은 큰 가치가 없다. 자녀들 앞에서 남성들은 때때로 굳센 모습도 지녀야 하지만, 때때로는 부드럽고 자상한 모습도 지녀야 한다. 아니 남성들이 온전한 인간으로 완성되려면, 자신 속에 있는 여성(아니마)을 억압하지 말고 이와 통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의 구분과 그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는 영원한 것도 아니고 신적인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3. 성으로 본 '하나님의 형상'(1)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사람이란 무엇인가? 동물보다 뛰어나기는 하지만 여전히 동물의 한 종(種)에 불과한가, 아니면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인가? 많은 학자들은 이 문제를 놓고 아직도 논쟁하고 있다. 그런데 성서의 인간 이해는 조금 색다르다. 유물론자 포이어바하(Feuerbach)가 "인간이 자신의 형상대로 신을 창조하였다"고 말하였다지만, 이 말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였다"는 말을 뒤집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을 하고 있다니, 이것은 무슨 뜻을 지니고 있을까? 이 구절은 기독교 인간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어왔다.
여기서 매우 전문적인 학설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 학자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하자. 특히 최근에 들어와 많은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남녀의 성적인 구분과 그 사귐에서 찾고 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성적인 구분에 기초한 남녀 간의 인격적인 만남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결론으로부터 하나님도 자신 안에 두 성을 지니고 있다고 추론하기는 어렵다. 하나님은 사람도 아니고 더욱이 동물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성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소박하게 동형동성론적(同形同性論的)으로 사고한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은 인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격의 기초로서 인격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남성적, 여성적 속성을 말할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고, 남녀의 성적이 구분을 넘어서 '친구'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앞에서 말하였듯이, 일신론적 사고에서는 신이 압도적으로 남성적으로 생각되었다. 이것은 아무래도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반영한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서 볼 때, 성부(聖父)는 남성적으로, 성령(聖靈)은 여성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남자들은 성자(聖子) 예수를 오로지 남성적으로만 보았지만, 예수의 품성에서 여성적인 면도 상당히 많을 뿐만 아니라, 필자는 그가 남녀의 성을 초월하거나 둘을 다 포함하고 있는 존재이며, 성부를 '아빠'라고 불렀다는 사실로부터 그가 '어린이'의 모습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나는 '어린이 신학: 하나님을 어린이로 생각하기'(1998년, 한들 출판사)에서 이미 구체화한 적이 있다.
여하튼 삼위일체론적인 기독교 신관에서 볼 때, 하나님은 이미 그 자체 안에서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통일되어 있는 공동체적인 존재, 사회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이 창조를 통하여 인간에게 부여되었다고 한다면, 인간이 갖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그물망 속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4. 성으로 본 '하나님의 형상'(2)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인간의 사회성은 남녀의 구분과 사귐을 떠나서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생명의 번식과 사회적 구성은 꼭 양성생식(兩性生殖)을 통하여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무성생식(無性生殖)을 하는 생물체도 지구상에는 상당히 많다. 장차 성관계가 없는 체세포 복제를 통한 출생이 가능해지고 유행될지는 몰라도, 인류는 고등한 영장 동물처럼 성적인 결합을 통하여 자식을 낳고, 이를 통하여 가족과 사회라는 포괄적인 관계망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영장류나 유인원과는 분명하게 다른 모습으로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인간은 수컷이 암컷 뒤에서 교접하는 동물과 같은 체위로 성관계를 맺지 않는다. 물론 남태평양의 어느 섬(피지) 주민들은 선교사가 와서 가르치기 전에는 동물처럼 성교하였다고 한다. 이런 희귀한 사례를 빼면, 인간은 압도적으로 서로 마주 보면서 성교한다.
인간이 서로 마주 보고 성교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동물과 달리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사실, 즉 직립보행(直立步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동물과 사람의 질적인 차이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이 직립보행에서 찾기도 한다. 인간이 직립하게 되면서 점차로 성적인 기능과 관계도 달라졌다고 한다. 노출된 엉덩이와 성기가 가려지면서, 그 대신에 유방과 입술이 그 기능과 상징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에 미녀와 신부의 조건으로서 큰 유방을 지닌 여성을 선호한 것도 많은 자식에게 젖을 줄 수 있는 경제적인 장점 외에도 유방이 갖는 성적인 매력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도 자식에게 전혀 젖을 먹이지 않는 여성들이 큰 유방을 선호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직립하면서 여성의 성기가 갖는 성적인 기능과 매력은 입술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발정기가 되어 냄새(암내)와 피로 충혈된 성기로써 수컷을 유인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 여성은 향수와 빨간 입술로 남성을 유혹한다. 이처럼 직립은 성적인 기능과 매력을 엉덩이 주변에서 가슴과 얼굴로 가져왔고, 그래서 자연히 정면에서 짝을 부르고 짝을 맺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남자의 경우에는 코가 성기를 상징하게 되었으며, 사냥 능력은 경제력으로 대체되었다.
인간이 직립하면서 달라진 또 하나의 현상은 해산의 고통이다. 네 발로 엎드려 새끼를 낳는 동물과 달리 직립하게 된 인간은 골반 구조의 변화로 비로소 산통(産痛)이 생겨났다고 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전통적으로 누워서 아기를 낳는 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기초를 상당히 무시한 해산 방법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 들어서 동물처럼 엎드리거나 두 발을 벌려 앉은 채 해산하는 사례가 늘어나는데, 이것은 산통을 줄이면서 자연스럽게 해산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직립하게 된 유래를 대개의 동물학자들은 원시의 숲나무에서 내려와 들에서 채집하고 사냥을 하게 된 사실에서 찾는다. 사냥을 하려고 뛰어다니면서 땀을 배출하는 중에 '털이 없는 원숭이'가 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하여 도구와 언어가 발달하고 두뇌의 용적이 커지면서 동물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모든 기능에서 동물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며, 동물을 마음대로 학대하고 죽일 자격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적도 없다. 인간보다 더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동물들(벌과 개미 등)도 많이 있으며, 인간보다 더 희생적이고 상생적(相生的)인 동물도 적지 않다. 오직 인간에게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탁월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동물과 매우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다. 분자생물학의 연구에 따르면, DNA의 구조에서 인류와 침팬지, 고릴라는 99%가 같고, 오직 1%만 다르다고 한다.
사람들은 현대의 큰 재앙 중의 하나로 꼽히는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를 동성애와 같은 비뚤어진 성생활에 탐닉하는 인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하지만, 원숭이 몸에서 서식하던 에이즈 균이 인간에게 옮겨와서 발병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가까운 친척까지 마구 잡아먹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자초한 가혹한 대가가 아닐까? 생물학적으로 1%의 차이가 인류를 동물과 다르고 독특한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생물들도 이 땅에서 함께 살도록 창조된 동료 피조물임을 자각하여 우리는 그들과 조화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생명의 경외"를 실천한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는 전등에 달려드는 밤 벌레들을 보호하려고 더위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닫고 잠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뼈와 살처럼 하나인 남녀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 2:20-23)
앞에서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사회 관계가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한 본질이라는 점을 보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에 그를 돕는 배필인 여자를 만들기 위하여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떼어내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남녀 간에 평화를 가져다 주기보다는 불화를 가져다 주는 데 더 자주 악용되었다. 남자는 하나님의 손으로 정교하게 빚어진 흙조각에 하나님의 거룩한 숨결이 더해져 만들어진 정성스러운 피조물로 묘사되어 있지만, 여자는 고작 남자의 갈빗대 하나로, 그냥 싱겁게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자의 창조에 비해 여자의 창조는 얼마나 밋밋하고 성의가 없는 과정처럼 보이는가? 가장 긴 뼈조각으로써 미끈한 여체를 조각하여 크게 부풀렸다는 말인가? 아니면 뼈를 가루처럼 갈아서 여자 모습을 빚었다는 말인가? 여하튼 이런 구절까지 순진하게 일일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거나 상상하여, "남자가 더 잘났느니, 여자가 더 잘 났느니"하고 서로 다툰다면, 둘 다 속좁은 속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누가 먼저 만들어졌고, 누가 누구로부터 나왔는가?"라는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둘만 있어도 "내가 형이다. 내가 지도자가 되겠다"고 싸우기 좋아하는 권력형 인간에게서 창조의 순서는 권력 이데올로기의 결정적인 원천이 된다. 창세기의 기록대로 하면, 분명히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으니, 남자가 서열상 앞서고 그래서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본문 등을 근거로 남자가 여자를 이끌고 가르쳐야 한다는 신학자가 아직도 없지 않다.
하지만 여성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고 하더라도, 오직 인류의 첫 남자인 아담만이 그럴 뿐이고 그 다음의 모든 남자들은 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창조의 순서를 보더라도, 비교적 늦게 창조된 존재일수록 더 정교하고 귀한 것처럼 여겨진다. 만약 그렇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아름답고 귀하고 빼어난 존재가 아닌가?
그런데 성서는 여자 창조의 이유를 "남자를 돕는 배필"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을 근거로 삼아서, 다시금 남자가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찾았다고 기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배필"이라는 말은 '돕는 반대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남자가 존경을 받을 만하면 그의 아내는 '돕는자'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반대자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자는 '돕는 반대자'이기 때문에 남자에게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남녀는 동등하며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도록 창조된 상호 보충적인 존재이다. 돕는 배필이란 완전한 짝을 이루어 서로 돕는 동반 관계를 말한다. 성서도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된 것은 타락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창 3:16).
탈무드는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 창조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머리뼈로 만드셨다면, 남자가 여자의 머리가 된 것처럼 기고만장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발의 뼈로 만드셨다면, 남자가 여자를 천하게 짓밟으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의 갈비뼈로 만드신 것은 서로 동등하게 사랑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갈비뼈가 있는 곳은 바로 심장(마음, 인격)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썩 그럴 듯한 해석처럼 여겨진다 실로 아담도 화와를 첫 눈에 보자마나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두 손 벌려 환호하고 있다. 이렇게 동등하고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갈가리 찢겨진 것은 비단 거짓으로 인간을 꾀어낸 뱀의 유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6. 남녀 연합의 신비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창 2:24-25)
무릇 모든 생명체들은 성인이 되어 가면서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새로운 가족 단위를 형성하게 된다.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짝을 맺고 자식을 생산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 된다. 창세기도 이런 과정을 놓치지 않고 비교적 진솔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처음 인간인 아담과 그 아내가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서로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생식과 번성이 남녀 한쌍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창세기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들이 오직 이렇게 성을 통해 생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는 무성 생식을 하는 하등 생물들도 상당히 많으며, 심지어는 한 몸에 암수 양성을 지녔거나 특수한 상황에서 성전환하는 생물들도 더러 있다. 고등 동물들은 대개 양성 생식을 한다. 왜 고등 동물은 양성 생식을 하게 되었을까? 생명체가 복잡해질수록 세포의 분화와 함께 성세포의 분화와 성기능의 분화도 가능해졌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양성 생식은 무성 생식에 비해 무슨 장점을 갖고 있을까? 양성 생식은 무성 생식보다는 더 풍부한 쾌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무성 생식을 하는 하등 생물들에게는 감각 신경이 제대로 발달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생식의 과정도 대단히 의무적이고 무덤덤한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양성 생식의 과정은 결합의 쾌락을 동반한다. 애무와 교접 과정에는 정신적 일치감과 함께 육체적 쾌락이 따른다. 이리하여 고등 생명체들은 수많은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그 밖에도 양성 생식은 무성 생식에 비해 탁월한 장점을 갖고 있다. 즉 무성 생식은 항상 동일한 세포만을 생산하지만, 양성 생식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종을 출현시킨다. 이리하여 성적인 쾌락만이 아니라 종의 다양성과 복잡성도 증대하였으며, 그 결과로 매우 우수한 생명체들을 계속 생산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양성 생식이 모든 면에서 무성 생식보다 우수한 것만은 아니다. 양성 생식은 무성 생식에 비해 생식의 과정이 매우 길고 고되면서도 비교적 적은 숫자의 자식들을 생산한다. 인간은 기껏해야 한번에 4명 내외의 아기를 출산하고 일평생 수십명 정도 출산할 수 있겠지만, 미생물들은 빠른 시간 내에 엄청나게 많은 자식들을 낳아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러므로 이 지구 상에는 미생물이 당연히 압도적으로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아니 한 사람의 몸 안에는 이 땅의 생명체들을 모두 합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미생물들이 기생하고 있다고 한다. 고로 양적으로 본다면, 이 땅의 진정한 소유자, 아니 이 땅의 당당한 주인은 바로 미생물이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미생물들은 거의 불사적인 존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항상 똑같은 자식들만을 낳기 때문에 부모가 죽더라도 자식을 통해 동일한 생명체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물론 환경과 다른 생명체에 의한 멸종의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대개 그들은 무한하게 증대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성 생식을 하는 생명체들은 유전자의 다양한 결합을 통하여 서로 다른 생명체를 낳는다. 그러므로 비록 종은 영원할지는 몰라도, 하나의 개체는 영원히 살 수 없다. 비록 육체적인 죽음은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죽음은 바로 양성 생식을 통하여 비로소 들어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약속된 천국에는 성적인 구분이 사라지므로 결혼과 생식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래야만 당연히 영생도 보장되지 않겠는가? 비록 그곳에서 우리가 "신령한 몸"(고후 15:45 )으로 산다고 하더라고, 그 몸으로 다시는 성적인 결합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의 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성적인 몸"이 "성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눈부신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도 성적인 결합이 없이 생식할 수 있는 기술을 갖게 되었다. 이론상으로는 이제 인간도 하나님이 없이도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금지하신 "생명 나무의 열매"(창 3:23)를 이제 인간이 드디어 따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생명복제의 문제는 윤리보다는 생명의 본질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 만큼 높아진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준 걸까? 유전자 공학은 타락한 인간이 쌓아가는 또 하나의 바벨탑일까? 아니면 과학적으로 부활을 앞당긴 인간의 쾌거일까? 참으로 생명의 세계는 신비하고 두렵기만 하다.
7. 성과 타락의 기원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의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1-7).
타락의 기원과 과정은 비단 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영원한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정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타락하고만 덧없는 존재일까? 아니면 점점 더 진화해가는 고등한 동물일까? 만약 인간이 타락하였다면, 왜 타락하였는가? 그리고 타락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을까? 인간 구원이라고 하는 영원한 문제를 풀려면, 당연히 인간 타락의 실상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러기에 본문에 나오는 인간 타락의 기사는 인류사에서 대단한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도 기독교에서는 인간 타락을 입증하는 절대적인 자료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의 타락은 흔히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과 불신앙, 교만과 탐욕의 관점으로부터 해석된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타락을 부추긴 "뱀"이 이미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창조 이해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 그러므로 뱀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종종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타락의 과정에서 성적인 문제가 얼마나 개입되었는지도 중요한 숙제인 것처럼 보인다.
통속적인 해석에 의하면 뱀은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사탄은 타락한 천사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사탄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 왜 하나님의 선한 창조 안에 사탄이 들어왔는가? 이런 질문은 신학적으로 "악의 기원"과 관련된 질문으로서 이른바 신정론(神正論 : 하나님을 옳다고 해명하는 이론)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뱀의 배후에 사탄이 있었다"는 단순한 해답은 "사탄의 배후에는 결국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결론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므로 이런 해답은 하나님을 악의 창시자로 만드는 어리석은 해답이다.
통일교의 창시자요 그 교주인 문선명은 하와가 타락 후에 부끄러워 하체를 가렸다는 설명에 착안하여 기발한 해석을 한 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신이 잘못하거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려고 하므로, 하체를 가리려고 한 하와가 사탄의 꾐에 빠져 사탄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화와의 몸에 들어간 더러운 피를 씻어내기 위해 피가름(교주와 성관계를 맺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영적인 구원자일 뿐이고, 문선명은 육체를 구원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교인들과 피가름 의식을 행했다는 소문이 무성하였다. 문선명이 타락의 과정에 성적인 요소를 간파한 것은 분명히 일리가 있지만, 그의 해석은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문자적 해석이다. 우리는 창세기 설화와 같은 기록을 문자대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창세기의 기록을 일말의 근거도 없는 황당한 신화 정도로 격하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창세기 설화 배후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던 시절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해석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공상적인 추측이나 사변을 버리고,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던 삶의 상황에서 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였는지?"를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동양에서 뱀은 종종 위선의 상징과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생각되지만, 서양에서 뱀은 일반적으로 지혜로운 동물(창 3:1)로 여겨진다. 허물을 벗고 오래 살아가는 모습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에서 뱀은 애완 동물로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동양에서, 특히 한국에서 뱀이 사랑을 받는 한 가지 이유는 정력에 대한 남다른 관심 때문이다. 뱀은 두 개의 성기로 번갈아 가면서 이틀 동안 짝을 맺는다고 하기 때문에 뱀으로 담근 술이나 뱀의 성기는 정력제로 흔히 추천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그리고 창세기가 기록되던 당시에도 분명히 뱀은 성적인 상징, 아니 생산과 다복의 주술적인 상징이었다. 뱀은 주로 농경문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농사가 잘 되는 곳에 메뚜기가 번창한다. 그런데 메뚜기는 개구리의 먹이가 되고, 개구리는 뱀이 먹이가 된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는 뱀을 다산과 풍요의 주술적 상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옛부터 자녀와 농사의 다산은 인간의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의 성전에서도 성적인 매음을 통해 생산력을 중재하는 창녀들(남창도 있었을 것이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분명히 뱀이야말로 가장 신성한 동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뱀은 남성의 성기를 연상케 한다. 그러므로 남성의 성기는 종종 뱀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였다. 봄베이 화산 유적에서 발견된 조각품들 가운데도 바로 그런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그런데 왜 창세기 저자는 뱀을 최초의 유혹자, 아니 타락의 주범으로 그렸을까?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출애굽 사건과 광야에서 만난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이방인의 음란한 풍속에 따라 생산과 번영을 이어가려는 유혹에 빠져가고 있었음을 경고하려는 뜻이다. 아담은 단지 최초의 한 인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대표하는 이름이듯이, 뱀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강력한 힘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뱀의 유혹은 단 한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즉 뱀은 여인의 후손들, 즉 모든 인간들의 발꿈치를 지금도 계속 물고 늘어진다(창 3:15).
그러므로 뱀은 역사와 창조의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는, 아니 그에 대항케 하는 자연신, 물신(物神)의 이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첨예한 양자택일 앞에 놓여진다. 하나님이냐 바알(자연신)이냐? 하나님이냐 맘몬(물신)이냐?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아니 둘 중에 하나는 미워해야 한다(마 6:24). 물질은 분명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도 할만큼 탐스럽다(창 3:6). 하지만 물질은 인간이 경배해야 할 대상도 아니고, 먼저 구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이지 않고 더욱이 탐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예배할 유일한 대상이고, 그의 나라와 그의 정의만이 먼저 구할 대상이며(마 6:33), 그의 말씀만이 진리와 영생으로 인도한다.
끝으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는 젊은 시절에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Safenwil)에서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마침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노사 갈등과 이념 갈등을 심각하게 겪에 있었던 때였으므로, 바르트는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노동자의 편에 서서 정의로운 사회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갈등 속에서 하루는 화려한 옷을 걸친 귀부인이 바르트에게 한가하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목사님, 창세기에 보면 뱀이 말을 하였다고 하는데, 뱀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나요?" 보통 사람이라면, "사탄이 뱀 속에 들어가 말을 하였습니다"라고 말할 법하지만, 정의감에 넘치고 익살스러웠던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한다.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8. 타락이 성에 미친 영향(1)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제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벗었으므르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7-10).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후,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부부 간에 부끄러움을 느껴 나무잎으로 몸을 가렸으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나무 뒤에 숨었다고 한다. 무릇 모든 동물은 자연스러운 옷(가죽, 털, 비늘 등)을 입고 있는데, 왜 하필 인간만은 벌거벗은 채로 이 땅에 등장하였을까? 만약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기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진흙으로 인간의 옷을 만들지 않았다(못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도 처음에는 유인원처럼 온 몸에 털을 걸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채집 생활로부터 수렵과 사냥 생활로 넘어가는 가운데 인간도 점차로 이른바 "털없는 원숭이"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사냥을 위해 힘들게 뛰어다니는 중에 땀샘이 발달하였고 그래서 자연히 털도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나뭇잎, 동물의 가죽 등)로 몸을 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성서는 인간이 왜 처음부터 알몸이었는지를 생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왜곡되고 또 회복되어야 할지에 일차적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서로 간의 관계가 가깝고 친밀할수록 인간은 옷을 벗는 일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부부 간이나 형제와 친구, 동지 간에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관계가 멀어지고 왜곡될수록 우리는 서로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경계하고 자신을 위장한다. 이처럼 타락은 곧바로 부부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분열과 소외를 가져왔음을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사실상 한 몸에서 나왔고 한 몸을 이룬 부부가 이제 타락의 결과로 제각기 남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자신의 솔직한 진면모를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고 심지어는 상대방이 공포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물론 모든 사람은 독립적 주체로서 자신의 개성과 자유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서로 의지하고 믿고 사랑해야 할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서는 타락 행위가 사람의 관계에 긍정적인 결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훨씬 더 많이 가져왔다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뱀의 유혹에 넘어가 물질을 탐스럽게 추구하게 된 인간은 서로 간에 분열하게 되고 결국에는 알력을 빚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이 더불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건만, 물질의 유혹의 넘어간 인간은 서로 경계선을 긋고 으르렁거린다. 물질은 그 자체로서 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인간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고 탐하며 물질을 우상처럼 섬기는 행위는 모든 악의 뿌리임을 성서는 여기서도 생생히 증언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다시 옛날처럼 알몸의 상태로 되돌아가면, 타락의 짐을 벗을 수 있을까? 가끔 우리 주위에는 나체주의자들이 출현하는 것을 종종 본다. 심지어 알몸이 순수한 예술의 대상으로 승화되기도 한다. 정말 우리는 때때로 위선과 허식, 수치와 공포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뒹굴고 싶을 때가 있다. 공중 목욕탕에 들어가면, 우리는 자유감과 유쾌함, 친밀함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옷을 다시 벗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알몸은 항상 우리를 진정한 일치와 평화로 인도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알몸은 타락과 범죄의 도구로 자주 악용된다. 상업주의와 쾌락주의의 도구가 된 알몸, 관음적인 훔쳐보기의 대상이 된 알몸은 인간의 인격과 공동체를 심각히 파괴한다. 관능적인 알몸은 여성에게는 수치감과 열등감을 조장하고, 남성에게는 탐욕과 타락을 부추긴다.
거꾸로 인간이 옷을 겹겹이 입는다고 해서, 소외와 분열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친구들과 동지들, 전우들이 함께 입는 제복은 인간을 평화롭게 만들고 단결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그런 옷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질감과 공격심을 일으키며,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도 위압감과 서열의식을 조장한다. 그리고 옷은 빈부의 격차를 드러낼 뿐만이 아니라 인종적, 성적, 문화적, 인격적 차별을 촉진하며, 종종 위장과 기만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옷을 벗음과 입음이 이제는 타락의 결과를 극복하는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타락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직 타락의 원인을 제거할 때만이 우리는 에덴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 오직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신뢰하는 길만이 참된 평화와 일치를 회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서 천사와 사람이 어떤 화려한 옷을 입는지, 혹시 알몸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를 구태여 상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옷은 이미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옷을 입어야 한다면, 오직 영광의 세마포를 입고 평화와 영생의 빛을 온 누리에 발하리라. 하지만 더 이상 막힘과 가림도 없고, 더 이상 무서움과 부끄러움도 없으리라.
9. 타락이 성에 미친 영향(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게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 ...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 3:12-16)
비록 인간이 환경과 남의 지배 혹은 유혹을 받는다고 하더라고, 자신의 행동의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의 원인을 환경, 사회, 부모, 이웃 등에게 돌린다면, 도대체 이 세상에 누가 칭찬과 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누가 모든 일에 최종적인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애매한 사람에게 누명을 덮어씌우거나 모함하는 일은 사라져야 한다. 정치적으로 무고한 속죄양을 만드는 것은 비겁하고 추악한 짓이다. 하지만 결국에는 책임의 소재는 분명히 가려져야 하지 않는가? 혹시 책임의 소재가 불분명하다면, 최소한 더 큰 책임을 질 사람은 가려내야 한다. 그리고 책임의 소재가 누구에게 있든지 간에,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대신 벌받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의 소유자인가? 예수님도 바로 그러한 분이 아닌가?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의 잘못을 떳떳이 인정해야 할 남자, 아니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같이 한 몸인 아내를 감싸주어야 할 남자는 비겁하게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자신을 유혹한 뱀에게 책임을 돌린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핑계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다. 동물은 죄책감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고 전가하는 비겁함, 아니 사기 행각을 쉽게 일삼는다. 인간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는 것도 역시 타락의 심각한 결과와 현상이라는 것을 성서는 분명히 증언한다.
범죄의 대가는 남녀 모두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죄의 회피와 전가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공히 공범자, 아니 주범자라는 엄연한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남자는 혹독한 노동의 고통과 자연의 황폐화를, 그리고 아내는 해산의 고통과 남성 지배의 전통을 대가로 받고 있다. 인간의 범죄가 자연에게 미쳤다는 생각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보았던 고대인들의 우주관에서 비롯한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인간에 의한 자연 파괴와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응을 실감나게 느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과 자연은 서로 뗄 수 없는 한 운명 속에 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노동과 남성 지배는 어디까지나 타락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므로, 지배자들이나 남성들은 이것을 영원한 질서인 양 고착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일방적으로 그리워한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플라톤의 '향연'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처음부터 네 발과 두 얼굴, 두 성기를 가진 몸이었는데, 신에 대한 도전의 벌로서 남자와 여자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서에도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남녀가 서로 떨어진 자신의 조각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여자만이 남자를 사모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바람난 남자를 계속 사모할 수 밖에 없는 절개있는 여자의 슬픈 운명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남자로부터 넉넉한 식량과 건강한 자손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야 했던 고대의 여인들을 묘사하는 것일까? 여하튼 성서의 기록은 타락 후에는 땅의 열매를 얻기 위한 남자의 노력이 무척 힘겨운 것처럼 남자를 향한 여자의 구애도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의 해산이 고통의 범죄의 결과라는 것도 상식에 어긋나 보인다. 생물학적으로 해산의 고통은 인간의 직립 보행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직립, 즉 인간이 동물 행태로부터 벗어나서 인간다워지는 것이 범죄라는 말인가? 성숙 혹은 진화는 아픔을 초래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러므로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타락을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난 사건"으로 본다. 성숙은 타락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가? 아니 인간은 잘못을 통해서만 점점 더 성숙해지는가? 만약 그렇다면 해산의 고통은 인간이 되기 위해 꼭 치러야만 했던 당연한 대가가 아닌가? 좌우간에 고통과 범죄는 인간을 파멸로 인도할 수도 있고, 성숙과 갱생으로 인도할 수도 있음은 자명하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면, 임산부는 앉은 자세를 취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사극을 보면, 조상들은 한결같이 누워서 분만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이었을까? 유럽에서 누워서 분만하는 자세는 의사가 분만실에 들어온 17세기 이후부터, 즉 의사의 편의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굳이 타락과 연결하지 않더라도, 자연은 인간의 노력만큼 충분히 보상하기 어려우며, 해산의 고통은 당연히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왜 노동과 해산의 고통이 타락과 연결되어 설명되고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범죄 후에 인간이 노동과 해산의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지 않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즉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노동과 고통조차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노력이 무의미하다거나 남에게 의미있는 고통을 주는 것도 좋다고 강변하지는 않다. 하지만 성서는 고통이 무조건 타락의 결과라거나 처음 세상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는 않다. 태초의 창조는 분명히 필연적으로 고통까지 감수하고 동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의 극복과 함께 고통의 의미있는 활용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10. 성과 권력의 관계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1-8).
사람들이 번성하면서 사랑하는 일과 짝짓는 일은 더욱 더 복잡해지고 혼탁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의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그래서 기왕이면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삼기를 좋아하는 것은 남자의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성서는 왜 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일까?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했다는 기사와 네피림(거인 혹은 용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구절은 해석하기 매우 난해하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고대의 신화를 보면, 신들이 인간들과 결혼하는 모습이 자주 나온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구절을 이런 배경 아래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의 아들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신과 천사들이 말 그대로 사람과 결혼했다는 것은 다분히 신화적인 시대의 허구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화는 결코 허구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고대의 신화적인 내용이 왜 성서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잘 몰라도, 성서는 분명히 역사적인 교훈을 주려고 이런 기록을 보존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 구절의 본질적인 핵심은 "성과 권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대에 영웅이나 왕처럼 힘센 용사, 거인은 스스로 신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아름다운 여자들을 취하곤 하였다. 중국의 진시황이나 백제의 의자왕이 그 구체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로 인정을 받은 다윗도 충직한 부하를 위험한 전쟁터에 보낸 후에 그의 아내(밧세바)를 강제로 취하였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솔로몬은 무려 1,000여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여자를 취하였다. 그러다가 머잖아 나라가 분열되기에 이르고, 결국에는 멸망하고 말았다.
18년간 막강한 독재권력을 행사했던 박정희 대통령도 여러 여인들을 취했다는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정 여인의 살해사건에서 보듯이, 권력가들은 미모의 여인을 취하고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돈이 곧 힘"인 지금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돈으로 여자를 취하고 성매매하는 행위를 흔히 본다.
성행위는 바로 권력행위이다. 단지 권력이 강제적인가 아니면 회유적인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며, 권력이 어떤 명분과 기술을 이용하는가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성행위가 평화적, 대화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강압적, 폭력적으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그 성격은 달라진다. 종교도 결코 권력과 무관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교활하고 사악한 교주들은 종교심이나 공포심을 악용하여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수많은 성범죄를 저질러왔다. 오늘날 성매매 산업 뒤에 폭력조직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그와 같은 이치이다.
생존 본능과 생식 본능 그리고 권력 본능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본능이다. 이것들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숱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권력이 가장 크게 팽창하는 과정은 역시 전쟁터이다. 그러므로 전쟁터에서는 많은 여인들이 가장 큰 수난을 당한다. 일제 시대의 위안부와 한국 전쟁시의 수많은 성폭력이 이를 실증한다.
성행위의 주체가 자발적인 인간이 아니라 강압적인 권력자가 될 때, 그것은 추악한 범죄로 떨어진다. 그래서 성서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고 땅에서 모든 생명체를 쓸어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 사건이 등장한다. 포악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리고 죄많은 인간만이 아니라 죄없는 생물들까지 멸망시킨 사건은 하나님의 진노와 후회가 얼마나 큰지를 여실히 증거한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가 자유롭게 사랑하고 건강하게 짝을 맺기를 원하였건만, 인간은 폭력을 동원하여 제멋대로 성을 소유하고 남용한다. 이로써 인간의 역사는 심판의 역사로 변한다. 봄베이의 화산 폭발과 에이즈의 확산의 원인을 인간의 성적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종교적 해석이지만, 이런 설명이 아직도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성적 타락의 결과가 너무나 끔직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리라.
비록 인간은 살과 피를 지닌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의 작용으로 인해 인간은 영적인 존재가 된다(창 1:3). 그리고 인간은 정신적, 심리적 존재이다. 그런 인간을 오직 육체 덩어리, 물체인 것처럼 폭력적으로 지배, 소유, 억압, 착위하는 행위는 인간 이하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범죄의 행위임을 성서는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랑은 인격에 기초하고 대화를 통해서 발전할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 단지 외모의 아름다움, 매력적인 육체에만 홀려서 성을 마구 취하고 남용할 때, 인간의 삶은 피폐해지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는 혼란과 멸망에 빠진다. 아니 하나님이 친히 나서서 자신의 소중한 작품을 폐기처분해 버린다.
출처 : ※★☆보물1호☆★※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메모 :
'인간론!! 영!! 혼!! 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인간 기원에 대하여 (0) | 2013.08.02 |
---|---|
[스크랩] 죽음의 저편이야기 (0) | 2013.07.30 |
[스크랩] 크리스천의 성(性)/ 성(性)이란 성(聖)스럽고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 (0) | 2013.07.30 |
[스크랩]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0) | 2013.07.25 |
[스크랩] 청결한 삶을 사는 비결 (0) | 2013.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