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녀

[스크랩] 하나님의 자녀의 현존과 종말적인 희망

하나님아들 2013. 7. 30. 22:58
"하나님의 자녀의 현존과 종말적인 희망"
□ 롬 8,12-25 □
김희성 (신약학·서울신학대학교)
I. 로마서의 구조와 본문의 맥락.
우리가 다룰 본문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에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구조와 본문의 맥락을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1)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본론은 신학적 논증(1-11장)과 윤리적 교훈(12-15장)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뉘어 진다. 우리의 본문이 속해있는 신학적 논증 부분은 다음처럼 짜여져 있다: 맨 먼저 롬 1,16-17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주제가 선언된 후 이 주제가 4개의 단원으로 나뉘어져 설명된다. 첫 단원(롬 1,18-3,20)은 먼저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둘째 단원(롬 3,21-4,25)은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됨을 역설한다. 셋째 단원(롬 5,1-8,39)은 이 의가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사실로 이루어짐을 가장 길게 설명하고, 넷째 단원(롬 9,1-11,36)은 이 의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서의 주제: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롬 1,16-17):
1. 하나님의 의의 필요성(1,18-3,20).
2.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의 실현(3,21-4).
3.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5,1-8,39).
4.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운명(9,1-11,36).
우리가 다룰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을 설명하는 셋째 단원에 속해있다. 이 단원은 다시 4개의 문단으로 나누어진다. 맨 처음에 간결한 분사구문을 통하여 "이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는 논제(롬 5,1a)가 선언된다. 이후에 이 논제에 대한 설명이 4개의 장에 걸쳐 나온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은 첫 문단인 5장에서 사망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둘째 문단인 6장에서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셋째 문단인 7장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임을 밝히고 마지막 문단인 8장에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정돈하면 다음과 같다.
셋째 단원의 주제: 그리스도인의 실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사실성:
1) 사망의 권세에서의 자유(5장).
2) 죄의 권세에서의 자유(6장).
3) 율법에서의 자유와 율법의 의미(7장).
4)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자유(8장).
이 셋째 단원 가운데서 우리가 다룰 본문은 4째 문단에 속해있다. 이 4째 문단도 대체로 4개의 항으로 다음처럼 나누어진다.
넷째 문단의 주제: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자유:
(1) 성령의 지배를 통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8,1-11).
(2)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8,12-17).
(3)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론적 희망에 대한 보장(8,18-30).
(4) 승리의 보장에 대한 기쁨의 개가(8,31-39).
이렇게 보면 우리가 다룰 본문은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단원에, 이 단원에서 가장 중요한 문단에 그리고 이 문단에서 가장 중요한 항에 속해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 본문의 문맥.
본문의 앞 문맥은 다음과 같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의 실존은 뒤틀려 있다. 그래서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신은 죄의 법을 따른다.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을 죄를 향하는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었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저주케 하심으로 뒤틀린 인간의 실존문제를 해결하셨다. 이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인간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율법의 요구, 즉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할 때에야만 가능하다. 내재하는 영을 좇는 자는 영 안에 있는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들의 몸은 내재하는 영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게 된다.
이 본문의 뒤 문맥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탄식하며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를 성령이 친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간구하심으로 도와준다. 이들, 즉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은 이들을 미리 아셨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그가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도록 예정하셨고, 부르셨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감히 어느 누가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께서 공동상속자인 우리에게 그와 더불어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분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할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누가 정죄할 것인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는가? 아무 것도 어떠한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우리의 본문은 위와 같은 앞 뒤의 두 문맥 사이에 밀접하게 서있다. 본문은 앞 문맥의 흐름을 이어받아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방법을 간단히 언급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자에 대해 정의를 내린 후, 그들의 몸의 구원에 대한 종말적 희망과 현재적 고난에 대하여 피력한다. 뒤 문맥은 현재적 고난을 인내해야 한다는 본문의 결론을 이어 받아 성령의 간구하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여러 단계 안에 서 있음을 통해 승리한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II. 주요용어 설명.
(양자의 영: 프뉴마 퓌오테시아스): 퓌오테시아는 아들로 인정함, 양자 삼음의 뜻을 갖고 있다. 이 단어가 여기서 영(프뉴마)을 수식하는 소유격으로 사용되면서 앞에 나오는 프뉴마 둘레이아스에 맞서 있다. 프뉴마 둘레이아스는 집의 아들이 아니라 종이 받는 것과 같은 영, 종의 근성의 영이다. 거기에 맞서 있는 프뉴마 퓌오테시아스는 양자로 삼는 영 혹은 아들로 삼는 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에 따르면 신자들이 받는 영은 아들로 삼는 영이다. 이 영은 신자들이 새로운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 숭클레로노모이 크리스티): 숭클레로노모이는 공동으로 상속하는 뜻을 갖는 형용사 숭클레로노모스의 명사로서 공동상속자란 뜻을 갖는다. 이 말은 다음에 오는 인물의 소유격과 함께 사용되어 그 인물과 공동으로 상속함을 시사한다. 그런고로 숭클레로노모이 크리스티는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 헤 아포카라도키아 테스 크티세오스): 아포카라도키아는 열망, 고대, 강렬한 기다림을 뜻하고, 크티시스는 피조물을 뜻한다.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어구는 간절히 기다리는 피조물과 같은 의미이다.
(허무: 헤 마타이오테스)는 공허, 무가치, 덧없음, 무상(無常), 허무를 뜻한다.
(썩어짐: 헤 프토라)는 창조, 생성과 맞서있는 말로 파멸, 멸망, 섬멸을 뜻할 뿐만 아니라 무상의 상태나 무상의 상태에 존재하는 것(허무)을 뜻한다. 허무의 종(헤 둘레이아 테스 프토라스)은 허무한 상태가 행사하는 종의 종속성을 의미한다.
(함께 탄식하다: 수스테나조)는 함께 탄식하다, 같이 신음하다의 의미이고,
(함께 고통하다: 순오디노)는 함께 고통을 느끼다, 같이 슬퍼하다의 의미이다. 전자는 전체 피조물을 규정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로"의 해방을 갈망하는 강력한 회화어로 사용되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헤 앞아르헤 투 프뉴마토스): 헤 앞아르헤는 첫 열매, 맏물을 뜻한다. 이 단어는 사람과 사물에 의미가 전의 되어 장자, 첫 사람, 첫 선물, 첫 은사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 이 어구에서는 사물에 전이된 의미로 사용되어 성령의 첫 선물, 첫 은사를 뜻한다.
(몸의 구속: 헤 아폴루트로시스 투 소마토스): 헤 아폴루트로시스는 원래 종이나 포로를 몸 값을 주고 사거나 구출하거나 해방함을 뜻했다. 그런데 이 뜻이 전이되어 구원, 해방의 의미로 사용된다. 토 소마는 몸, 육체의 의미를 갖는데 소유격으로 사용된다. 이 소유격은 분리 소유격이 아니라 목적 소유격이다. 그러므로 몸으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몸의 구원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여기서 소마는 육체의 의미로서 몸이다.
III. 본문의 번역.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이제는 우리가 육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의무를 지고 있지 않습니다.
13절: 만약에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 입 니다.
15절: 여러분은 말하자면 다시금 무서움에로 내모는 노예근성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아 들로 삼는 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절: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합니다.
17절: 만약에 우리가 자녀이면 역시 상속자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 도와 더블은 공동 상속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실제로 고난을 받는다면 말입니다.
18절: 나는 요컨대 현재의 고난이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19절: 피조물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절: 왜냐하면 이 피조물은 무상함에 예속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 라 예속케 하시는 분에 의하여 희망을 근거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21절: 왜냐하면 이 피조물도 허무의 예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 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절: 우리는 전체 피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습 니다.
23절: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즉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들조차도 우리 몸의 구 원, 즉 아들 됨을 기다리면서 마음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24절: 왜냐하면 우리는 희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볼 수 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닙니다.
25절: 만약에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IV. 본문의 짜임새, 흐름, 제목 잡기.
1) 본문의 짜임새.
12-13절: 1-11절에 의한 결론적인 경고와 권면
14-17절: 13절의 권면에 대한 설명
14절: 권면의 조건에 해당하는 자에 대한 정의
15-16절: 15절: 정의에 대한 논증
16절: 정의를 내릴 수 있는 이유
17절: 16절로부터 나오는 귀결
18절: 17c절로부터 도출한 주장(논제)
19-22절: (피조물의 예를 통한) 첫째 설명
19절: 설명의 명제
20절: 첫째 이유(부정적인 면)
21절: 둘째 이유(긍정적인 면)
22절: 첫째 설명의 심화와 둘째 설명을 위한 발단
23-25절: (우리의 예를 통한) 둘째 설명
23절: 설명의 명제
24a절: 그 이유
24b-25절: 결론적 권고
2) 본문의 흐름과 제목 잡기.
본문은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 즉 율법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도록 정해진 새로운 실존이라는 앞 문맥을 이어 받아 전개된다. 그 흐름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제들(그리스도인)은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의무가 없다. 육신대로 살지 말고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이렇게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들은 아들로 만드는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 됨을 성령이 친히 증거해 주신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의 공동상속자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에 받는 고난은 미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피조물은 허무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러한 희망 가운데 현재에서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우리도 탄식하며 우리 몸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희망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보이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참고 기다려야 한다.
본문이 이처럼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제목을 간단하게 잡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맥과 본문의 흐름을 고려하여 제목을 잡아본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현존과 종말적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V. 본문풀이.
12절: "그러므로 이제는"이란 도입구를 통하여 앞의 진술들로부터 경고적인 결론이 도출된다. 여기서 바울은 3-4절에서 개진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의 목적인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로마서의 청중들에게 육적인 욕망을 따르는 삶에로 복귀하는 것에 대하여 경고한다. 이 경고는 바로 앞의 9-11절에서 기독인의 존재, 즉 우리의 영도 살리고 우리의 몸도 살리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육에 거하지 않고 영 안에 있는 존재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에서 이끌어낸 것이다. "형제들이여"란 부름은 경고의 긴박감을 고조한다. 우리 성경에 "빚진 자"로 번역된 말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항상 "의무를 진"이란 뜻으로 사용된다. "육을 따라"는 "육적인 욕망을 따라"의 의미로,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된 속격 부정사 "육을 따라 사는"은 "육을 따라 살도록"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12절은 그들이 육적인 욕망을 따라 살도록 육신에게 봉사할 의무를 진 것이 아니란 사실을 긴박하게 강조한다.
13절: 13a절은 12절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육을 따라 산다면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이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바울의 경고가 담겨있다: 기독인들도 육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는다. 왜냐하면 육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죄와 사망의 법을 아직도 종처럼 섬기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오는 구절(13b)은 앞의 구절과 다음처럼 대구적인 병행을 이루면서 중요한 권고를 하고 있다: "육을 따라 살면"이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에, "죽는다"가 "산다"에 각각 맞서있다. 또 "죽는다"에는 "반드시 ... 할 것이다"를 사용했다면 "산다"는 단순히 미래형으로 쓰여져있다. 이 대구적인 병행을 통하여 뒤 절의 권고 내용이 현저히 부각된다. 기독인이 육을 따라 죄의 법을 섬기면 반드시 죽게 되나, 성령의 능력으로 육체의 일을 죽이면 살게 될 것이다. 이 대구적인 병행구절에 기독인의 죽음과 삶(생명)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사상이 반영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발생한 죄와 죽음의 멸절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존재가 더 이상 죄에게 종노릇하지 말고 의 안에서 행함을 통하여, 즉 몸의 행실을 죽이고 영을 따름으로써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요구를, 그의 뜻을 준행함을 통하여 증명되어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허무에 예속되어 있는 몸의 구원이 실현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의 자유 가운데 영원히 산다. 그렇지 않으면 이 궁극적인 구원에 하등의 기회가 없다.
14절: 이 구절의 구조는 다음처럼 13b절의 구조를 따른다.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을 때에야 가능한 것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통해서 그 근거를 갖는다. 이러한 구조적 연관성을 통하여 이 구절은 앞 절의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는 권고를 설명한다. 앞 절의 "영"이 여기서 "하나님의 영"으로 정확하게 규정된다. "인도함을 받는다"는 몸의 행실을 죽이는데 있어서 성령의 능동적인 영향력을 시사한다.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이 우리의 의무(12절 참조)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은 인간의 능동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기독인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령의 능력이 더 강조된다. 그러나 인간의 능동성이 배제되지 않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란 말은 성령이 인도하게 하다와 동일한 의미이다. "... 하는 자들은 모두"는 배제적이고 강화된 "... 하는 이들만이 그리고 이들은 모두"의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먼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그것의 왕적인 대표성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이 후에는 드물지만 경건한 개인에게로 전용(轉用) 되었다. 그것이 헬라 사회에서는 신인간에게, 밀의 종교에서는 비전(秘傳)의 전수자에게, 영지주의에서는 천상세계의 구성원으로서의 신자에게 적용되었다. 초대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경향성 때문에 이런 주변세계와 구별하여 그 칭호를 성령에 사로잡힌 자에게 사용했다. 이 본문에서도 이러한 관련성이 깊게 나타나 있다. 그런고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을 받는 자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인도하게 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15-16절: 이 두 구절은 앞 절의 하나님의 아들을 설명한다. 15절에서 바울은 다시 "너희들은 ... "하고 2인칭 복수를 사용하여 먼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후 "노예근성의 영"과 "아들로 삼는 영"을 대조적으로 맞세우고 있다. 그는 2절에서 언급한 율법으로부터 기독인의 해방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했다. 먼저 상반절의 노예근성은 율법 아래에 있는 성향을 말한다. "두려움"은 속박의 결과로서 구속되지 못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서있는 피조물의 표시이다. 이 상반절은 너희는 율법 아래에 있는 성향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있는 죄인의 두려움에로 복귀시키는 영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반절의 "아들로 만드는 영을 받았다"라는 단순과거는 이미 과거에, 말하자면 세례시에 성령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양자로 삼음의 원래 헬라적인 의미보다는 아들로 삼음이 부각된다. 아들로 삼는 영은 다음에 오는 관계절에서 그 특성이 잘 나타난다. 관계절의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셉튜아진타에서는 긴박한 기도를 위한 전문용어다. 아바 아버지는 주기도문의 처음에 나온다. 그런고로 이것은 예배시 영에 사로잡힌 황홀경에서의 부름 혹은 환희적 기도의 부름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16절과 잘 연결된다. 이 기도의 부름 안에서 성령이 우리의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 앞 절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대치된다. 이 두 어구는 분명히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용어이다.
"우리의 영"은 신적인 증거를 받아드리는 마음, 정신적인 나, 이성, 영혼 과 같은 인간적인 기관을 의미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영"을 인간적인 이성과 엄격하게 구별할(고전 14,14)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가장 내면적인 나를 묘사하려는 곳(롬 7,17-23)에서도 의식적으로 "영"의 사용을 피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받는 기관에 대한 생각을 표명하는 곳에서 이것을 "영"으로 불렀고 그것을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으로 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은 철저히 하나님의 영의 본성을 보존하고 인간 자신의 존재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그를 위해 사는 "가장 내면적인 나"가 된다. 그런고로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형성된 기독인의 "가장 내면적인 나"다.
이러한 해석은 다음의 "더불어 증거하다"의 해석을 통해서 더욱 확실하게 된다. 이 말을 엄격히 해석하자면 그것은 성령만이 아니라 기독인 안에 있는 "가장 내면적인 나"도 자기를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함을 내포하고 있다. 바울신학에 따르면 인간에게 고유한 "가장 내면적인 나"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형성된 "가장 내면적인 나"를 통해서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절의 진술을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기독인의 "내면적인 나"의 신앙증언이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확증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7절: 바울은 여기서 16절로부터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아들 됨이 상속권을 향유한다. 기독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즉 약속된 유산이 우리 기독인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유산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종말의 사실성 안에 보존되고 그들에게 주어질 희망물이다. 문맥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 몸의 구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우리 기독인들은 그리스도와 상속을 함께 받는 "공동상속자"이다. 종말적인 미래에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지상적인 현재에 그와 함께 사실로 고난을 받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 이 조건절에는 기독인이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로서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반영되고 있다. 기독인은 사실적인 고난 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현존하는 곳에서는 아무도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분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미래에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아주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 조건절은 문맥을 고려하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상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만이, 고난과 함께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만이 그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18절: 여기서 바울은 17c절의 조건적 진술로부터 이끌어 낸 종말적인 희망에 관한 논제를 제시한다. 그는 이것을 "주장하다, 판단하다, 믿다, 생각하다"를 뜻하는 동사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그것을 가지고 확신이 아니라, 확고한 판단을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 논제는 현재의 고난과 장래의 영광과의 대비 속에서 묘사된다. "현재"는 과거와는 구분된,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있는 구원사적인 전환을 통하여 규정된 종말론적인 현재다. 그것은 지상적인 현재도, 구원의 시대도, 사악한 시대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열려진 구원의 시대를, 즉 이미 현재에 시작된 그러나 아직은 아닌 종말적인 상황이 지배하는 시대를 표시한다. "현재의 고난"은 마지막 구원의 시대의 도래에 앞서 일어날 환난들(롬 5,3)이다.
이 "현재의"와 반제로 맞서있는 "미래의"는 원래 "임박하다, 막 ... 하려고 한다, ... 해야만 한다"는 뜻을 갖는 동사의 미래를 위한 대치로 사용된 수동태 분사다. 이 분사는 다음에 따라오는 단순과거 부정사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나야 할" 혹은 "우리에게 나타나야만 하는"의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다리는 사건, 즉 재림의 임박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타나야 할 미래적 구원사건의 사실성을 강조한다. "영광"은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근본적인 하나님의 존재양식이고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분위기이다. 이것은 그분의 계시를 통하여 나타나는데 창조주의 능력 안에서 빛나는 이성에 의하여 보여지고(롬 1,19ff. 참조), 역사적 현시들 안에 있는 그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눈으로 보여지고,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롬 6,4 참조) 안에서 보여진다. 이 영광은 종말사건 안에서 결정적으로 빛나게 된다. 이 안에 구원의 세계가 존재한다. 바로 이 영광이 그리스도인들이 희망해야 할 최종적이고 고유한 것이다.
그런고로 바울은 여기서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에 비하여 하등의 가치가 없다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을 언급하는 마지막 구절은 다음에 오는 희망과 관련된 모든 진술의 해석학적인 범주가 된다. 왜냐하면 이 영광은 이미 내재적인 희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19절: 바울은 18절에서 제기한 논제를 피조물의 예를 들면서 전개하기 시작한다. "피조물"은 모든 인간을 포함한 전체 피조물이나, 기독인을 제외한 전체 피조물이 아니라, 인간을 제외한 전체 피조물을 뜻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기독인들이 종말사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그러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들의 나타남은 그들을 아들로서 부활하신 분과 함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고(롬 8,29절 참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그리스도의 공동상속자가 된다. 피조물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결정적인 종말사건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논제를 전개한 바울은 전체 피조물이 이 사건을 갈망하는 이유를 20절에서 부정적으로, 21절에서 긍정적으로 상술한다.
20절: 피조물이 간절히 기다리는 이유는 그들이 허무에 내던져져 있기 때문이다. "무상"이란 단어는 실재세계에 대조를 이루는 가상세계의 상황이나 존재의 소외상황을 묘사하는 말로서 존재의 소외, 존재의 상실, 존재의 덧없음 혹은 존재의 가멸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피조물의 무상(無常)은 하나님의 상존, 불멸과 맞서 있다. 여기서 말하는 피조물의 무상함, 덧없음은 시작과 끝을 갖는다. 시작의 앞과 끝의 저편에 하나님과 "무상함"이 없는 피조물이 서있다. 피조물은 이 무상함에 자의적이나 잘못으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예속되어 있다. 자의가 아니라는 것은 피조물이 스스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 덧없음에 예속된 것은 인간타락의 결과다. 여기에 피조물의 운명과 상황이 인간의 운명과 상황에 종속되어 있다는 묵시적 사상이 반영된다. 피조물이 덧없음에 던져짐은 그렇게 하시는 분에 의해서 였다. 이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긍정적인 전망을 가지시고, 즉 희망을 근거로 그렇게 행하셨다. 덧없음에 내던져짐은 종말적인 구원 사건의 전망 안에서 발생한 것이다.
21절: 피조물이 고대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허무의 예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허무"는 앞 절에 나온 무상의 개념을 설명한다. "허무의"는 질(質)의 속격이기 때문에 "허무의 예속"에서 예속은 피조물 위에 가리워진 허무가 의미하는 것이다. 허무의 예속은 영광의 자유에 대조적으로 병행한다. 여기서 허무와 영광은 이원론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힘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광의 자유"도 질의 속격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광과 자유는 질적으로 일치한다. 여기에 연이어 있는 속격 구조는 강조적이다. 모든 것이 날카롭게 자유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이 어구는 종말적인 영광이 자유를 완성하고 이 자유가 다시 하나님의 자녀들의 종말적인 영화의 내용이 됨을 시사한다. "해방되다"의 논리적 주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그 자신의 존재양식인 그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창출해 주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피조물의 기대는 기독인의 기다림과 동일한 희망 안에 근거를 갖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22절: 여기서 바울은 "우리는 ... 알고 있다"란 도입어투로 위의 설명을 계속하면서 다음의 둘째 설명 단락을 준비한다. "알고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함께 탄식하다"는 20절의 예속된 것을 근거로 하고 19절의 고대하다란 용어를 대치한다. 이 단어는 다음 단락의 표제어가 된다. "함께"는 전체 피조물을 시사한다. 탄식의 합창이 전세계를 가득 채운다. "지금까지"는 문장의 맨 뒤에 세워져서 강조되며 18절의 "현재"를 의미한다. 이 시기는 피조물의 현존과 목적 사이에 있는 모순에 의하여 허무에의 예속이 항상 지속되는 시기이며 탄식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이다. 피조물의 탄식은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점증을 묘사하는 순서의 첫 단계다. 23절에 둘째 단계인 기독인의 탄식이 나오고 마지막 단계인 성령의 탄식이 26절에 나온다. "함께 고통을 느끼다"는 바로 앞의 탄식하다를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이 두 용어의 배후에는 오는 새 시대의 예표인 메시아 시대의 고통의 묵시적 상이 놓여 있다. 이 구절에서는 허무에 예속되어서 그래서 미래적 해방을 고대하는 피조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탄식과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고대하고 있다.
23절: 여기서부터 25절까지는 둘째 설명을 다루는 부분이다. 먼저 설명의 명제로 탄식의 두번째 순서인 기독인의 탄식이 등장한다. 도입구 "그들만이 아니라 ... 우리들조차도"를 통하여 피조물의 탄식과 기독인의 탄식 사이의 병행만이 아니라 점증되는 순간임이 강조된다. 이것은 "우리들"과 "우리들조차도"를 통한 강조적 반복에서 분명해진다. "첫 선물"은 고후 1,22;5,5의 담보 혹은 보증(아라본)과 동의어이다. 성령은 종말로부터 미리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는 아들 됨을 증거하고 미래의 구원을 보증한다. 그가 증거하는 아들 됨의 실현은 하나님의 종말적 사건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 됨은 "몸의 구원"으로만 완성된다. 이 용어는 18절과 21절을 받아 우리에게 나타날 미래의 영광의 영향, 즉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몸의 구원이야말로 구원의 최종적 완성이다. 그것은 영광의 자유를 내용으로 한다. 이 기독자의 몸의 구원은 피조물의 허무로부터의 해방에 병행하고 피조물의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기다리다"는 19절에서의 피조물처럼 현재의 예속적 현존과 고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에 이루어질 기독인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목적으로 갖는다. 기독인은 다른 피조물과는 조금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고 종말적인 존재의 첫 선물인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아직 허무에 예속되어 있다. 그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즉 그들의 죽을 지상적인 몸이 죽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변함으로써만 완성되는 몸의 구원을 마음 속으로 고대하고 있다. 기다리기 때문에 그들은 피조물처럼 탄식한다. 완전한 자유를 기다리며 허무의 예속을 탄식함에 있어서 기독인과 피조물은 연대적이다.
24-25절: 여기서 앞의 명제에서 언급한 기다림에 대한 이유가 나온다. 이 기다림이 기독인의 존재의 특성을 묘사하는 용어인 "희망"으로 대치된다. 희망은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믿음과 함께 기독인의 현존의 세 가지 특성을 구성한다: 미래적인 것의 기다림, 신뢰와 인내. 그런고로 기독인의 존재는 희망없이 생각할 수 없다. 희망은 하나님의 약속, 이미 증명된 하나님의 사랑, 칭의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를 근거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든 불확실성을 물리친다. 그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게 한다. 이 희망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에게 일어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희망의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희망이 넘치게 하신다(롬 15,13).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의 희망 없는 상태를 끝장내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희망의 삶을 선사하셨다. "희망 안에서"란 말은 하나님의 아들 됨의 실현, 즉 우리 몸의 구원을 내용으로 한다. 몸의 구원은 아직 미래적이고 희망의 대상이다. 이 희망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게 부여한 희망과 같다. 기독인들이 희망하는 구원은 전 피조물의 해방을 포함한다. "우리는 이 희망 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라는 진술 안에 미래의 최종적인 구원과 현재적 구원 사이의 긴장이 반영된다: 기독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그리고 부활하신 분, 즉 이미 영광을 받은 자와 결합됨을 근거로 의롭다 함을 받고 진노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인 구원이 미래에 있기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이 증거한 것의 실현에 대하여, 즉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하여 기다려야 한다.
이 기다림에 대한 이유에 곧 희망에 대한 정의가 따른다. 이 정의에서 보는 것과 희망하는 것 사이의 대조가 다루어진다. 희망은 "보다"와 대조적이다. 왜냐하면 희망은 보이지 않는 것에 향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볼 수 있을 때 희망은 필요치 않다. 그런고로 "사람이 볼 수 있는 희망은 희망이 아니다".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희망한다. 여기 25절에서 바울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우선 참아야 한다. 기독인은 이미 발생한 칭의와 아직 기다려야 할 완성 사이의 긴장 가운데 서 있다. 이 긴장을 신자는 인내로 극복해야 한다. 다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면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다"는 19.23절의 표제어(피조물이 기다리다, 우리가 기다리다)를 받는다. 기독인의 기다림은 피조물의 기다림과 다르지 않다. 그는 전체 피조물을 대리하여 성령을 첫 선물로 그리고 담보로 이미 받은 경험과 신앙 안에서 허무의 압박을 이기는 희망의 힘을 실현하여 인내로 기다리고 인내의 기다림을 계속해야 한다.
VI. 메시지.
본문을 통한 메시지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이 복음되게 하라"이다. 즉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하여 발생한 것이 기독인에게 실재가 되도록 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발생한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발생한 것은 죄사함만을 야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죄를 멸한 것이다. 부활에서 발생한 것은 사망을 멸하신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영광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사건이다(롬 1,3-4). 죄와 사망의 죽임과 하나님의 아들이 됨은 죄의 법을 따르는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을 따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행위 안에서 증명이 되어야, 즉 믿음의 내용이 행위를 통하여 증명되어야 실재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법을 따라 율법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야만 허무에 예속된 그의 몸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도달하게 된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이 바로 이 궁극적인 구원의 조건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뜻하시는 율법의 요구를 수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런고로 기독인의 현존은 신령한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데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요구를, 하나님의 뜻을 준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신자는 영화롭게 됨을 바라보며 현재에서 거룩한 삶,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영원히 산다.
율법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수행하려면 우선 소극적으로는 육신을 따라 살지 말아야 한다. 육적인 욕망대로 살면 죄의 법을 따르는 것이 되고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살면 반드시 죽는다. 육신을 따라 삶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그리하여 죽음으로 인도하는 죄는 무지막지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롬 1,29-31과 갈 5,19-21에 나타난 평범한 죄들이다. 예를 들면 탐욕, 시기, 악의, 비방, 교만, 음행, 수군거림, 무정함, 방탕함 등이 죽음에 이르는 병들이다. 이러한 육의 성향들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려면 적극적으로는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한다. 성령은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르고 영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성령의 법을 따르고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을 따르는 삶에서 나오는 일들은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 등이다. 이렇게 육신을 따르지 않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게 될 때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은 종말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실재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실행함으로 종말에 성령이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상속자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상속자다. 그는 공동상속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존재다. 현재 지상에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자 만이, 그 고난을 인내로 이기며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 만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기독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몸의 구원을 통하여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기독인의 희망은 바로 이 종말론적 구원에 있다. 허무에 예속되어 있는 피조물도 동일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될 것이다. 피조물의 운명은 인간의 행위에 종속되어 있다. 그들이 인간의 범죄로 허무에 예속되었듯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인간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날 때) 영광의 자유를 얻게 된다. 기독인은 탄식과 희망과 기다림에 있어서 피조물과 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인은 성령의 첫 선물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서 피조물의 대표자이다. 이러한 대표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로서 기독인은 현재에는 승리를 기약하는 인내로 몸의 구원을 기다리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삶을 삶으로써 장래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피조물들의 기다림과 희망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영광의 자유에로 해방되어져서 우리 모두와 더불어 영광과 자유의 천국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출처 : ※★☆보물1호☆★※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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