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生年은 B.C. 4112년이다
창세기 5장
창세기 5:1-2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3 아담(5:3 130세) - 셋(5:6 105세) - 에노스(5:9 90) - 게난(5:12 70세) - 마할랄렐(5:15 65세) - 야렛(5:18 162세) - 에녹(5:21 65세) - 므두셀라(5:25 187세) - 라멕(5:28 182세) - 노아(5:32 500세) - 셈, 함, 야벳
※ 아담이 창조된 후 셈의 출생까지 1556년(창세기 5:3-32)
창세기 11장
창세기 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11:10 100세; 홍수 후 2년) - 아르박삿(11:12 35세) - 셀라(11:14 30세) - 에벨(11:16 34세) - 벨렉(11:18 30세) - 르우(11:20 32세) - 스룩(11:22 30세) - 나홀(11:24 29세) - 데라(11:26 70세) - 아브람, 나홀, 하란
※ 셈의 출생부터 아브람의 출생까지 390년(창세기 11:10-26)
※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명됨(17:5)
※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담의 출현에서 아브람(아브라함)의 출생까지는 1946년의 세월이 흘렀다.
※ 아브라함의 출생이 B.C. 2166년(1990. 4. 25. 기독지혜사 발행. 라이프 성경의 성경인물연구 58쪽-60쪽 참조) 이었으므로 아담은 B.C. 4112년에 지상에 출현했다.
오늘이 2001년 12월 3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6,113년 전에 인류의 시조 아담은 지상에 출현한 것이 된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아브라함&사라-이삭(&리브가)-에서(야곱의 쌍둥이 형), 야곱(에서의 쌍둥이 동생)
야곱&레아(라헬의 언니), &라헬(레아의 동생), &실바(라헬의 시녀), &빌하(라헬의 시녀)
레아-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 ⑨잇사갈, ⑩스블론
⑪디나(女)
빌하-⑤단, ⑥납달리
실바-⑦갓, ⑧아셀
라헬-⑫요셉, ⑬베냐민
야곱의 아내들이 자식을 낳고 한 말들
레아-르우벤(29:32)(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레아-시므온(29:33)(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레아-레위(29:34)(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레아-유다(29:35)(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빌하-단(30:5)(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빌하-납달리(30:7)(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실바-갓(30:10)(복되도다)
실바-아셀(30:12)(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레아-잇사갈(30:17)(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레아-스불론(30:19)(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레아-디나(30:21)
라헬-요셉(30:23)(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유다 &(다말)(38:28-29)-베레스, 세라
예수의 世系1(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이-이삭-야곱-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라합)-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우리야의아내)-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여고냐(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요셉(&마리아)-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마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예수의 世系2(누가복음 3:23-38)
하나님-아담-셋-에노스-가이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레멕-노아-셈-아박삿-가이난-살라-헤버-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아니-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나단-맛다다-멘나-멜레아-엘리아김-요남-요셉-유다-시므온-레위-맛닷-요림-엘리에서-예수-에르-엘마담-고삼-앗디-멜기-네리-스알디엘-스룹바벨-레사-요아난-요다-요섹-서머인-맛다디아-마앗-낙개-에슬리요-나훔-아모스-맛다디아-요셉-얀나-멜기-레위-맛닷-헬리-요셉-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마태복음서》 1장 1~16절과 《누가복음서》 3장 23~38절에 적혀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면서 41명의 이름을, 누가는 예수로부터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77명의 이름을 들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요 약속된 자손임을 강조한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이 중요한 이름임을 나타낸 점이다. 두 책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마태는 유대인을, 누가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삼은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마태가 그리스도의 왕적(王的)인 특성을 나타내려고 한 데 반하여, 누가는 그리스도의 대사제(大司祭)적인 성격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1.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2.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3.<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4.하와(여자)는 아담(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는가?
5.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6.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7.<길가메슈 서사시>란 무엇인가?.
8.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10.<족장설화>에서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11.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12.왜,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13.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누이인가.
14.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16.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17.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8.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1.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창세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야훼가 땅과 하늘을 만들었을 때 땅에는 아직 들에는 나무 한 포기 없고 풀도 없었다. 하나님은 땅에 인간 의 죄악이 가득 찬 것을 알고 땅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분히 여겨 땅에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생명이 있는 모 든 피조물을 멸망시켰다.
홍수는 40일간 계속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에 탄 노아와 그 가족과 각종 동물의 한 쌍씩만이 구원되어 아라랏산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을 축복했다. 이윽고 피조물들이 다시 번창하여 인류는 동쪽 슈메르 땅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 때 온 세상은 말이 같았다. 그들은 불손하게도 벽돌로 하늘에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 설하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두 하나의 백성 하나의 말이었던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하여 서로 말이 통 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온 세상에 흩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를 세우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디아인이며 우르에 살았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온 가족과 가산을 거느리고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신앙과 그 명령에 대 한 복종이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하여 그 자손이 번창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과 늙은 아내 사라 사이에 오랜 기도가 효험하여 장 자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이 그 뒤를 계승한다. 이삭은 레베카와 결혼하고 에서와 야곱의 쌍동이를 낳는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형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들에서 사는 청년이 되고 동생 야곱은 내성적이어서 집안에 만 묻혀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이삭은 잡아오는 짐승의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사랑했다. 어느날 동생 야곱은 계략을 꾸며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 권과 부친 이삭의 분노를 사서 동쪽에 있는 친척 라반에게 로 도망갔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야곱은 또한 길르앗에서 흘러 요르단강으로 들어가는 얍복 개울을 건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다>의뜻) 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주어졌다.
민간 어원적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의 유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의 4대는 족장이라고 해서, 모두 유목민의 족장이었다. 그 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12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2. 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창세기라는 이름은 70 인역에서 나온 것이며, 창세기 2 장4절의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창조하신) 순서는 위와 같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히브리어 원전의 명칭은 1장 1절의 <베레시스>(<태초에>라는 뜻)라는 어휘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말 성서 의 창세기라는 명칭은 한문 성서에 유래된 것이다. 현존하는 창세기는 적어도 시대를 달리하는 세 가지 주요 사료층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로 돼있는 야훼이스트 사료층, 하나님의 이름이 에로힘 으로 돼있는 제사적 사료층의 세 가지이다.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포로 후, 기원전 5 세기에 모세 5경 전체를 편찬한 제사학파에 의하여 기록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제사학파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정리하고 지키기 위해서 계보, 연대, 날짜, 통계 등의 객관적인 기록을 즐 겨 쓰고 모든 사료를 편찬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체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하나 깊은 신학적 통찰은 야훼 이스트 사료와 에로히스트 사료층이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성립 당초의 유대교단의 신앙이 숨겨 져 있다.
제사학파에 유래되는 사료층 안에는 상당히 오래된 사료도 들어있다.
내용은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1장-11장), 족장들 의 역사(12장 -50장)으로 돼있다. 전자는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카인과 아벨, 아담의 계보, 홍수와 노아의 자손, 바벨탑과 셈의 계보, 후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전설, 야곱의 전설, 요셉의 전설 등으로 돼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4절 전반의 천지 창조설은 제사적 사료층에 의한 것이며, 그 원형은 <위로는 하늘의 이 름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없을 때에>하는 구 절로 시작되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하 <에누마. 에리슈 신화>였다고 생각된다. 창세기 3장에는 낙원의 상실이 얘기되어 있으며, 이것 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는 이야기이며, 메소포타미아의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장은 도덕적 종교적 통창이 대단히 깊고 구약성서 중 에서도 가장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며, 어느 구약성서는 창세기 중의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불사와 금단의 열매에 관한 부분과 흡사한 내용을 가지 고 있는 점토판 문서가 이집트 제18 왕조의 이단왕 아벤 호테프 4세(BC 14세기)가 아멘신의 수도 테베의 하류에 세운 새로운 수도 아케토아텐, 현지명 텔.엘-아마르나와 앗시리아 왕 앗슐바니팔이 니네베에 건설한 왕 궁 부속의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아다파전설.이라고 불려진다. 그 대충 줄거리 는 지혜의 신 에아가 자기 종을 삼기 위해서 아다파라는 원인을 인간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에아에 의하여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된 이 아다파가 에아의 질투 때문에 영생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는 이 이야기가 3장의 원형이라고 하고 야훼 이스트가 그것을 순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소재 는 메소포타미아로 소급된다 할지라도 제한된 적은 사료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3. <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성서 중에는 <주해자의 십자가>라고 일러지는 난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성서의 첫 부분에 있는 창세기 1장 13절은 그 첫 번째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의 기사이며, 1장1절- 2장 4절상과 2장 4절하-2장25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 어휘, 문장, 사상 등으로 보아 전자는 제사적 사료층이고 후자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첫머리의 1장1절과 2,3절의 관계에 관해서 최근에 많은 연구가 있다. 우선 여기서 원문을 보자
(1)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 (2)땅 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여기서 제1절은 표제적 성격을 갖는 독립 구절이라고 보 는 전통적 해석이 일반적이고, 제2절에서 창조의 설명이 전개되고 창조의 소재인<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은 깊은 물> 이 어디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제사적 사료층은 창조를 무와 유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혼돈과 질서의 대립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해석자는 제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독립 구절이 아니라, 3절의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하는 구절의 종속절이라고 해석한다. 2절은 상황 설명의 도입 구절, 3절은 주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2장4절하-6절(야웨이스트 사료 층)의.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었다>는 구절과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화 <에누마. 에리슈.의 첫머리의 한 구절 <위에는 하늘의 이름 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아직 없었을 때.>하는 것과 같이 이 부분도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 에, 땅에는 아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창조 설화에는 내용적으로 바빌로니아 신화의 다신교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1장1절의 어순은 히브리어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돼있다. 숫자는 번역의 순서이다.
8 7 1 3 2 4 6 5
태초에 .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 을 . 하늘 . 그리고 을 . 땅
(<하나님>은 명사. 남성. 복수. 형이 복수이며 의미가 단수인 것을 <경외의 복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짝을 만들어 주리라>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자 아담 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그래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 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창세기 2장7-25절) 이것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의 창세기의 일부이다. 구약성서는 여러 시대를 통해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유럽 중세기에는 <하와가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하는 속된 생각이 있었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성향을 갖는 하와는 남자보다 짐승 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인가보다. 창세기에 의하면 낙원에서 사는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었을 것이다. 알몸의 남녀(이것은 왼쪽에 아담이, 오른 쪽에 하와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사이에 뱀이 서려있 는 나무가 서있는(고대 그리스나 서아시아에서는 유혹을 상징했다)그림이 3세기초에 나타났다. 그것은 1920년 에 우연히 발견된 투라. 유로포스(북시리아의 안타오키아와 세르키아 사이)의 <그리스도교도의 집>의 세례실의 벽화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상실의 서막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로마의 라테라노 미술관 소장의 3-4세기의 석관 부조의 <하와의 창조> 장면의 묘사에도 보인다. 여기서 는 아담이 누워있고 그 발치에 하와가 서 있다. <뱀의 유혹>이 미술의 테마로서 중세를 통해서 취급되었는데 <하와의 창조>는 9세기경부터 다시 취급되고, 13 세기부터는 신학적 의의 때문에 아담의 창조 이상으로 자 주 취급되었다.
그럼 중세기의 속된 생각처럼, 하와는 과연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진 것일까. 성서는 하와가 아담의 어느쪽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언급은 없다. 아담이 깊이 잠든 사 이에 야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만들었다고 만 했다. 하와는 아담의 심장과 평행으로 있는 갈빗대로 만든 것이므로 하와와 아담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등 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다. 시각 예술의 면에서는 아담의 오른 쪽 갈빗대에서 하와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서양 미술에 있어서 오른쪽과 왼쪽은 무엇을 의미할까.
5.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야훼게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을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 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 엘. 무카이아르)나둘. 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6. 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1872년 가을, 당시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유물 수리인으로 있던 죠지 스미드(1840-1876)는 1853년에 모슬 주 재 영국 부영사의 동생 H.랫삼(1826-1910)이 니느웨의 앗슐. 바니발 왕(BC668-626)의 왕궁 부속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한 단편의 기록이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기록돼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J사료층, P사료층에 들어 있는 것이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와 흡수한 것을 발견하고, 동년 12월에 새로 창설된 <성서 고고학회>에서 그것을 보고했다. 이 보고는 각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이것이 <길가메슈 서사시>의 본래의 부분인지 여부는 별 문제로 치고, 이것이 후일에 <길가메슈 서사시>의 제11 서판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고, <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최대의 에피소드로서 각광을 받은 서판의 발견이 되었다. 죠지.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앗사리아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H.C. 롤링손이 간행한 착 쐐기꼴 글자 도판의 제작 등을 도우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쇄기꼴 글자의 구조를 알게 되고 점토판 위에 기록된 고대 문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변견 후 4년째인 1876 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단편들(랏삼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점토판 문서의 일부)의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나는 반조각이 된 묘한 서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여섯 난으로 된 것이었다. 그 셋째 난을 보자 나는 배가 니시르 산에 닿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낸 일, 그것이 내려앉을 곳이 없어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곧 이것이 <대홍수>의 갈디아(지 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와 같다)판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죠지. 스미드는 신문사 등의 후원으로 다음 해 1873년 초에 현재 니느웨로 갈 수 있게 되어 1873년과 74년의 2회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지휘하고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다시 홍수 설화의 일부가 되는 대량의 점토판들 을 발견하였다. 그는 먼저 발견한 서판이 12매의 서판 으로 된 대문학 작품의 일부라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어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서사시라는 것을 알 았으나 세개의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주인공의 이름을 쉽게 해독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창세기 10장8절에 보이는 영웅 나므롯이다.
엔키두는 우르크로 내려와서 그곳 생활 양식을 익힌다. 양자는 우르크시의 성문에서 격투를 한다. 서로 상대의 힘을 알고 우정을 맺어 그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가 되고 힘을 합해서 모험을 하게 된다.
길가메슈는 엔키두에게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할 계획을 의논한다. 결국 두 사람은 우르크의 장로들과 의논해서 여행의 수호신과 태양신 샤마슈의 허락을 받고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을 떠난다.
두 사람은 측백나무 숲의 산지기인 괴물 프와와를 죽이 고 측백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돌아온다. 사랑과 향락의 여신 이슈탈은 개선하는 길가메슈를 발견하고 이 세상의 부를 약속하고 구혼한다. 여신의 불륜을 알고 있는 길가메슈는 이것을 거절한다. 그래서 분노한 여신 이슈탈의 저주로 하늘의 신 아누로부터 하늘소가 파견되지만 두 사람은 이것을 격퇴하고 우르크로 돌아온다.
다음에 여신 이슈탈은 친구 엔키두를 12일간의 병고로 눕게 하고 저 세상으로 빼앗아 가버린다. 비탄에 젖은 길가메슈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과 인생의 공허함을 깨닫고 불사의 약초를 찾아 방랑의 여 행을 떠난다. 그는 산과 들을 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고있는 인간의 조상 우도 나피슈팀이 살고 있는 행복의 섬을 찾아가서 그에게 영 원한 생명의 비밀을 묻는다.
그는 신이 내린 대홍수의 위험에서 자기가 어떻게 피했는지를 말한다. 신 에아의 말씀으로 자기는 네모진 배를 만들고 위험을 피할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길가메슈는 찾고 있던 해답을 얻지 못하고 낙심해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도나피슈팀은 그의 아내의 권고에 따라 바다 밑에 있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다. 길가메슈는 곧 바다 밑으로 가서 그 약초를 얻고 기쁘게 그것을 우르크로 가지고 온다. 도중에 차고 맑은 샘을 발견하고 거기서 목욕하는 사이에 이 약초의 향기에 끌려 온 뱀이 물 속에서 나와 이 약초를 훔쳐 달아난다. 길가메슈는 실망에 빠져 허무하게 우르크로 돌아간다.
본문에는 이상의 줄거리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다.
우도나피슈팀의 설화는 창세기 6장-9장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흡사하다. 노아가 홍수가 빠졌 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려보낸 새가 까마귀와 비둘기인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양자는 전혀 다르다. <길가 메슈 서사시>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난 것은 신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돼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죄가 만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여 내린 것으로 돼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대홍수 이야기를 그 신앙에 따라 고쳐 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도나피슈 팀은 신에아가 특별히 불쌍히 여겨 가르쳐 주었기 때문 에 대홍수를 면한 것으로 돼 있는데,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방주를 타고 구원된 것으로 돼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의 원형은<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우도나피슈팀 설화로 소급되고, 다시 이 설화의 원형은 슈메르의 서사시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파손이 많이 된 점토판 문서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인간의 창조와 왕국의 기원과 홍수 설화와 슈르파 크와이며 경건한 주스트라가 배를 타고 이 난을 면한 이 야기이다.
전승은 주스트라->아도나피슈팀->노아,로 이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길가메슈 서사시>는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애호되고 많은 조각과 그림 등의 테마가 되었으며, 또한 서사시 전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동양적 허무주의는 구 약성서의 전도서로 계승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바빌로니아의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그리고 소아시아를 통해 서 그리스에도 전해진 문화 교섭의 역사를 해명하는데 도 중요한 연구 사료가 된다.
8. 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창세기8장1-4절)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돼 있지 않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오랜 야훼이스트 사료층과 새로운 제사적 사료층 이 섞여있으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편찬자가 천지 창조 설화와 같이 오래된 전승을 버리지 않고 남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 던 것은 물론이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아라랏산과 노아의 방주에 관해서는 저 유명한 마르코폴로도 언급 한 것처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삼아 왔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어디 있는 산일까. 지도를 보자.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있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 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 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나 된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고 했다. 1929년에는 도이치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 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세기의 원문에는 <아라랏산들>이라고 돼 있으며 한 봉우리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지대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헤브라이어의 아라랏은 앗카 도어의 우랄루두 (<높은지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반 호수지방의 고원지대를 가리켜 이름지어진 것이며, 기원전 8세기경에 그 땅에는 우랄루두 왕국이 번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야훼이스트 사료층이 기록 된 시대와 맞먹는다. 오늘날 우리는 니실산이나 아라랏산 이나 방주의 도착지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슈메르 의 홍수 설화에는 산 얘기가 없다. <홍수층>쪽이 확실한 고고학적 사료의 증거가 되고 있다.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이루고 있는 헤브라이즘의 담당자였던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 유가 없는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원 제 20세기의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의 여러가지 연구는 이에 관해서 고고학의 여러 가지 성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마리문서>(BC 18세기), <누즈문서> (BC 15세기),<아라락 문서>(BC 15세기), <우가리트문서.(BC 15-14세기),<보하스.쿄이문서>(BC 14세기)등이 그것이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전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12장-25장), 이삭(25장-26장),야곱(25-36장)등에 관한 족장 설화는 오랫동안에 걸쳐 구전되어 온 구비를 근거로 한 전승들이며, 이 전승들이 야훼이스트의 손으로 새로운 문맥과 수식이 가해지는 것은 기원전 10세기로 소급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존하는 모양으로 완성한 것은 바빌로니아 포로시대(BC 6세기)나 그 이후라고 상정되는 제사적 사료층의 기록자와 그 밖의 약산의 가필자들이라고 생각된다. 족장 설화는 19세기 말경까지는 후대의 창작의 반영이라고 했으며,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신화적인 인물로 쳤으며,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인 부족의 조상이라고 여겨져 그 사실성이 부정되는 일이 많았다.
그 후 오리엔트 고고학의 진전에 따라, 특히 1925년 이후의 고고학적 제 발견에 의하여 그 내용이 일변하였다. 즉 족장 설화와 메소포타미아와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가, 특히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이 기원전 2천년대 초기에서 중엽에 걸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의 생활 관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전승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사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장 설화는 출토된 여러 사료와의 관련으로 역사적인 테두리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족장들의 연대에 관해서 1950년 이후의 주요 견해들을 대별하면, 기원전 2천년대 전반기로 치는 설과 기원전 2천년대 중엽 이후의 아람인의 이주와 결부시키는 설로 나뉘고, 양자는 학계의 쟁점이 돼 있다. 전자는 <마리문서>나 <누즈문서>등을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전반의 어느|때로 잡는가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이와 반대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이후로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C.H.골든 등이 있다.
그는 <누즈문서>와 창세기에 전해지고 있는 족장시대의 관습이 평행되고 있는 예를 들어서, 그리고 <우가리트 문서>를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아마르나=미케나이시대로 잡는다.
골든의 견해에 관해서는 뒤에 소개하겠다.
10. <족장설화>에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족장 설화는 전승되는 소재들을 제공한 시댜와, 그것이 전승된 시대 및 그것들이 문장으로 기록되고 편찬된 시대를 포함한 이른바 세 가지 성격의 시대의 기록이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자체가 족장들의 생애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족장 설화들의 핵심에 이스라엘 민족의 여명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역사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부터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 집단이 남러시아의 습지대에서 파상적으로 남하하여 서아시아로 침입하고, 그 일족은 아나트리이와 고원지대 하티를 정복하여 힛타이트 왕국(BC 1700경-1200경)을 세 우고, 아시아의 원주민 속에서는 이란 서쪽 경계의 산간에 있던 카시드인이 바빌로니아를 검거하여 그 땅을 약500년간 지배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이북지방에 있던 원주민 후르리인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인도. 이란어파의 일부인 미탄니인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 미탄니 왕국(BC 15-14세기 중엽)을 세웠다. 미탄니인이 기마술이 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오리엔트의 대부분은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불안 동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불안 동요 가운데 소아시아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지방을 거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에서 다시 남하해서 나일 강의 델타 지대까지 침입하여 그 땅의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삼아 기원전 18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서 1세기 남짓한 사이에 이집트의 태반을 지배한 것이 <힉소스>라고 하는 혼송 민족 집단이었다.
힉소스의 민족 구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고 아시아의 후르리인을 기간으로 하고 거기에 옛부터 고대 오리엔트지방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셈어족 등을 포함하는 혼성 민족군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후르리인과 셈어족이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오리엔트 세계에 있어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그 땅을 활동 범위로 했던 것이다.
그후 힉소스가 침입해서 1세기 후인 기원전 16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에서는 힉소스의 지배에 반항하는 이집트인의 세력이 발흥하고, 테베 출신의 아하메스가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뒤에는 북진하여 페니키아 연안까지 빼앗아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타파했다.
이렇게 해서 아하메스 1세(BC 1567-47)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제 18왕조(BC 1567-1320)의 기틀을 잡았다.
이 해로부터 이집트 역사 뿐아니라 오리엔트 전체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아시아의 분열된 여러 나라 사이에서 신왕국 시대로 들어가서 이른바 제국주의적 침략을 해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약 200년 간 여러 나라의 우의에 섰다. 이 사이에 시리아. 팔레스타인지방은 이집트 신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 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처음에 아브람이었으나, 후에 하나님 야훼는 아브람과의 계약을 맺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였다.
하나님과 노아와의 계약의 증표는 무지개였고 아브람과의 증표는 할례였다. 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는 의식이며, 할례를 행하는 풍습은 옛 부터 셈족이나 함족(이집트인) 사이에 보급되어 있었고 성인의 표시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인은 여기에 전혀 새로운 의의를 발견했다. 남자가 출생하면 8일째 날에 할례를 베풀고 명명하는 관습이 그것이고, 지금도 이것은 엄수되고 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계약의 증표를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언어학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개명은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을 뜻하고, 또한 인간의 생애의 중요한 계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명의 갱신도 뜻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1-4절에 기록돼있는 야훼가 아브람에게 내린 축복과 저주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말하는 족장 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175세의 천수를 누리고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손으로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 부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 교도의 마음 속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계속 살아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창세기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2. 왜,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셈으로부터 계산해서 10대째가 되며 데라의 아들이고, 나홀과 하란의 두 동생이 있었다 가나안 땅으로 이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으나,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도시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버지 데라는 여기서 250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왕비라는 뜻)는 창세기 20장 12절(E사료층)에 의하면 아브람은 이복 누이동생이지만 그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창세기 11장 27-30절의 기록은 혈통이 가까운 부족 사이의 이합 집산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름은 아마 원래는 부족의 이름이었던 것 같으나 확증은 없다.
아내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과 재산과 물건들을 가지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한다. 아브람 일족이 메소포타미아의 변경인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한 것은 그곳에서 안주할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그들 일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 야훼를 위해서 제단을 쌓지만, 다시 남하하여 네게브 지방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지방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다. 아브람은 이집트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오.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창세기 12장 11-13절).
과연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가자 이집트인들은 사래의 미모에 매혹돼 버린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내 하와를 빼놓고 사래는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왕의 신하들도 절세 미인 사래를 보고 매혹되어 그녀를 왕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사래가 왕궁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 일체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아내 사래는 무사히 남편 아브람에게 돌아왔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양 문명은 종래 주장된 것처럼 두개의 다른 문명이 아니라 동부 지중해라고 하는 공통된 지반에 세워진 유사한 구축물이라는 것을 원사료를 구사해서 강조하는 C.H.골든은 족장 설화와 우가리트의 <케레트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일리앗>의 세가지가 모두 빼앗긴 아내를 다시 찾는 모티브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3.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 누이인가
아브람은 이렇게 이집트 왕에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창세기 20장 1-18절(E사료층)과 26장 6-11절(J사료층)에도 나온다.
전자에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으며, 후자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마찬가지로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아마 원래는 하나님의 사실이었는데 그것이 변형하여 현존하는 설화가 된 것인 듯하다.
1925년에서 31년에 걸쳐 언어학자인 동시에 고고학자로 유명한 E.키에라(1885-1933)가 지휘한 바그다드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 및 하버드 대학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티그리스강 동부의 구릉지대의 고도 누즈(바그다드 북쪽 약 240km )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결과 그 땅에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수천의 점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그후 이들 점토판 문서들의 해독과 연구에 의하여 족장 설화의 사회적 배경의 일단이 밝혀졌다. 이 문서들은 후르리인의 서기에 의하여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것이며, 그 중에는 본래의 후르리어도 자주 사용되어 있다. 문서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15세기나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조금 뒤에 쓰여진 것이며, 후르리인의 법률 문서가 많이 들어있으며, 그 내용은 족장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누즈는 고앗카드시대에도 가슬이라고 해서 작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후르리인이 살았고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후르리어는 카프카스어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아르메니노이드계라고 한다. 후르리인은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의 기록에 나오며, 그리고 우르 제3왕조 시대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대 후반에 카프카스산맥의 남쪽,즉 아르메니아지방의 반 호수 부근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입해서 점점 서쪽 시리아지방으로 이동하고, 다시 남하하여 가나안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기원전 2천년대를 통해서 셈어족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다.
그들의 문화나 관습의 대부분은 아무르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으나 힉소스 이후 가나안에 새로운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고 흑적 이색의 선상 문양으로 나타낸 물새나 태양의 장식이 있는 토기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는 <호리족>(창세기 14장 6절, 기타)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탄니 왕국의 지배 아래 있던 후르리인의 법 관습에 의하면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누이가 되어 이중의 연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이중의 연분에 의하여 아내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중의 연분은 혈연 관계가 있을 경우에 더욱 많았으며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같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아내가 좋은 집안의 여자이고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도 존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중간, 유프라테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텔. 엘=무카얄(역청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1854년에 J.E.테일러에 의하여 이 이름 없는 황폐한 언덕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디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유적은 1918년에 C.톰슨이나 H.R.H.홀 등에 의하여 소규모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후 1922년에서 34년 걸쳐 대영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의 공동 출자로 L.울리 경의 지휘 아래 발굴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성과가 많았다. 그 조사에 의하여 그곳이 슈메르의 도시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우르의 도시 영역은 길이 1.2킬로 미터,너비가 800미터나 되는 다수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에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고 드문드문 성문이 있었다.
우르에는 우바이드 기(B.C.4천년대)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문화가 번창했던 흔적이 보인다.
채문 토기, 원통 도장, 진흙 토기(terracatta)등은 선사시대의 풍요했던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후에 우르는 대홍수에 의하여 유실되어 버렸다. 이 대홍수는 두께가 2.4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덮여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홍수는 바빌로니아 평원 일대를 덮친 격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홍수 전설을 낳았고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설화는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우르 제1왕조(BC 26세기)는 슈메르의 패권을 잡고 있었으며<우르 왕릉군>은 당시의 높은 물질 문화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같은 슈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슈에게 패배해서 당분간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다시 우르 제3왕조(BC 21세기)가 번영을 되찾아 전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여, 그 문화를 엘람,시리아에 전하고 모든 왕은 성문 법전<우로난므법전><슈메르 법>등)을 제정했다. 이어서 바벨로니아 전역은 바빌론 제1왕조(BC 19세기-16세기)아래 통일되는데 우르는 자주 슈메르인의 반란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우르는 재건되고 지그라드의 복구 공사등도 있었으나 페르샤 시대에 다시 쇠퇴하여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폐허가 되고 만다.
우르 제1왕조 및 제3왕조의 수도였던 우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르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한 神域과 이 신역을 포함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리고 그 성벽 바깥쪽에 펼쳐지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우바이드 기의 취락의 유적 위에 몇 번이나 다시 세워진 작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그 운하에 따라 성벽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제방이 있다.
달의 신 난나르와 그 배우신 닌가르의 신전은 시가지보다도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흙벽돌의 거대한 담에 싸여 있었다. 신역에는 몇군데의 신전이 있고 각 신전에는 관청과 창고가 붙어있었다.
신전과 지그라드가 우르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우르의 도시지역 중앙 북쪽에는 신역이 있었다.
1927년에 우르 제1왕조나 제 2왕조 시대라고 추정되는 <우르의 왕묘군>이 발굴된 것은 신역의 동남쪽이다.
메스 .카람. 두그의 왕묘에서 황금제 그릇, 투그 ,촛대, 은제 띠, 단검 등 막대한 부와 정교와 기술을 말해주는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바르.기 왕의 고분 현낸 문서를 근거로 창세기 23장34장 10, 21절,42장 34절,이사야서 23장 8절 등을 비교 논증하고 있다. 아래에 그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
아브라함도 하타이트 왕의 비호 아래<우가르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에서 가나안으로 온 호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23장 6절의 <영감님>을 70인역이 <왕>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이것을 프토레마이오스 시대<왕>이 아니라 호메로스에 나오는 의미의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즉 동부 지중해적인 의미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말한 창세기의 제 기록이나 아마르나 = 미케네 시대의 국제 환경을 더듬어 아브라함이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을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우르 중에서 갈디아인의 우르라는 지명이 오직 한 군데 뿐이라고 할 수는 없고,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는 갈디아의 우르가 아니라 <우가리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라고 하며, 그곳을 하란 근처에서 찾는다.
이상의 여러 점에서, 왕들의 서사시로서의 족장 설화는 틀림없이 왕실을 찬양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온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갈디아인의 우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가 아니고, 크세노판이 언급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웃이라고 하는 북방 갈디안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3장 13절의 갈디아인의 나라는 바빌로니아의 남부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북방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Hald는 아르메니아/우랄어 것 같지 않다.
16. 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다 자리잡고 살았다(창세기 11장 31절).
갈디아인의 우르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도시, 현재의 이라크의 나사리아 근처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승은 우르의 도시보다도 오히려 하란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결부되어 있다. 현재의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터키령, 유프라테스강의 지류 베리크 강변에 <하란>이라고 하는 아랍인 한촌이 있다. 그 근처는 예전에 바빌로니아-소아시아-이집트를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통상의 중심지였다. 이 하란과 창세기의 전승과의 연결은 아브라함의 조상의 이름이나 형제의 이름과 하란 근처의 도시들의 이름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기원전 2천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있던 도시들과의 관계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C.H.골든은 하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슈에서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번영했던 우가리트에 보실 근처와 선도(義道)에서 59명의 정장한 순장자의 유해가 발견되고, 두 대의 손수레와 그것을 끄는 소와 은제의 배 모형도 발견되었다.
슈브.아드 왕비의 고분에서는 수금과 황금이나 청석금등을 사용해서 만든 머리 장식품이나 목걸이 등이 나왔다. 수금은 각각 숫소와 암소와 숫사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L.울리경은 이것은 각각 베이스, 테너, 앨토의 표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왕묘에서는 노는 방법은 모르지만 조개껍질을 상감한 게임 판이나 <우르의 군기>라고 불리는 조개껍질을 상감한 군기 등이 출토되었다.
<우르의 군기>는 각각 출정과 개선의 그림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술 작품으로서도 훌륭하며 역사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고, 당시의 전투 광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것이다.
우르의 왕묘군-대지하 고분군-의 발견은 종래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확실한 비문이 없기 때문에 왕묘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풍년제>에서 사랑의 여신 이슈달과 곡물의 신 다므즈의 역할을 하는 제관의 분묘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일강 유역에서 온 망명자의 분묘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묘는 지하 깊숙히 만들어졌고 발굴 조사를 하려면 지하수가 넘쳐서 곤란하다 . 1천년 이상이나 지난 고대 은나라 왕묘와 흡사한 <우르의 왕묘군>에 이어지는 발견은 앞으로 다시 있을 것의 옛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갈디아인의 우르는 골든 경의 말처럼, 과연 <우라>일까. 앞날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17 .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소돔<둘러싸인 곳>이라는 뜻과 고모라<깊다><물이 많다>는 뜻의 도시들은 아라바의 저지 습윤한 땅에 있던 가나안인의 다섯 도시 중에 들며,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은 백부 아브라함과 헤어져 비옥한 요르단의 저지 소듬으로 옮겨 살았다.
소돔과 소모라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의 내습을 받고, 소돔의 왕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다행히 난을 면했다(14장2-22절).그후 이 도시의 악덕이 심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 불 비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천사의 경고에 따라 소돔에서 도피했으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어겨서 뒤돌아 봤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요르단 동쪽의 산지로 피해서 동굴 속에 살았다고 한다.
사해 서남 연안의 이 이른바 소돔 가까이에서는 1952년에 칼리(Kali)공장이 세워지고 1955년에는 질소공장이 신설되어 사해 개발을 위해서 조업하고 있다.
1957년에는 광대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과거 큰 지진에 의하여 땅이 내려앉고 천연가스와 석유가 폭발했기 때문에 도시들이 화염에 싸여 사해의 수중에 침몰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해 남부 수중 수심 1.8미터 정도의 얕은 부분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라고 한다.
오늘날 사해의 남단에 가까운 서안 지역 남북 10킬로미터,폭 2.4-5킬로미터,높이 216미터의 암염 산이 있다. 이곳은 아라비아어로 제벨.우스돔(소돔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둥근 봉우리들로 돼 있다. 그 근처의 도로흙은 염분이 말라 백색으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슭에는 풍화 작용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이상하게 생긴 암염기둥이 여러개 서 있다. 제벨, 우스돔의 북쪽 기슭 한 모퉁이에 있는 사람 형상의 암염 기둥이 <롯의 아내의 소금기둥>이라고 한다. 이 기암이 뒤를 돌아다 보는 부인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는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누가복음 17장 32절). 영어의 소도미 (sodomy,異色)는 악덕의 도시 소돔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돔은 죄악과 악덕의 형용사가 되어 부패한 지도자는 <소돔의 백성>(이사야서 1장 10절),<소돔과 포도나무> (신명기 32장 32절)등으로 불리고, 또한 예루살렘의 죄악이 심함을 <소돔의 죄> (에스겔서 16장 49절)라고 표현했다.
성서를 통해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죄악과 하나님의 형벌의 귀감으로 인용되고 있다.
18.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과연 실재했을까
1976년 11월 1일 <요미우리 신문> 석간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쎈트루이스에서 10월 29일 개최된 세계 종교학회연차 회의의 강연에서 로마대학의 죠반니 페티나드 교수(고고학)가 <시리아의 고대 유적에서 출토한 셈어로 기록된 점토판 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고 발표하여 관계자를 흥분시키고 있다고 한다. 단 한장의 점토판이기는 하지만 이 보고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구약성서 이외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보고자 페티나드 교수는 이미 10년 이상이나 시리아 북서부 텔.마르디크 지역에서 고대 에블라 왕국의 유적의 발굴 조사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에블라 왕국이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4월 1일자<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조간은 로마대학의 파테오.마티에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대가 12년전부터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동 조사대가 도시 에블라에서 약 1만5천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7월 2일자<아사이 져널 특집 고대의 부르는 소리>(제18권 26호)에는 스기이사무씨가 <모습을 드러낸 에브라 왕국 - 기원전 20세기의 도시국가)라는 귀중한 논문을 보냈다. 이하 이에 근거해서 <에블라왕국>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에블라 Ebla는 이블라 Ibla라고도 표기하며 셈어로 <목장>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지방의 주민이 유목민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적은 지금의 알레포의 남남서 7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거의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 라타키아(고대 우가리트는 이곳 북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와 알레포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으며 알레포 남쪽에 있는 하마와 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텔이라는 것은 시리아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 도시의 폐허를 가리키며, 이곳의 윤곽은 거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아크로폴리스를 이루고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어 있다.
이 유적은 몇 개의 층으로 나뉘고 가장 오랜 층은 대략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까지의 것으로 추정되고, 제2기는 대략 기원전 2300년에서 2000년 내지 1900년경, 제3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에서 1700년경의 것이다.
이 중에서 왕궁이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고 제3기의 신전은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처음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제3기의 신전 발굴 등에 주력했다고 한다. 제3기가 되자 에블라는 타민족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단히 견교한 성벽을 쌓게 되었는데 그 성벽도 발견되었다.
1만 5천장에 달하는 점토판 문서는 이 제3기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궁정 도서관에 붙은 두개의 작은 방에서 점토판이 나왔고, 이 도시는 앗카드의 나람신 왕(BC 24세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약탈되고 소각 당했으나 폐허 밑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에블라의 국명은 이미 기원전 24세기로 소급되는 아카드 왕조의 조상 사르곤 왕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나라의 존재 자체는 여러 비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블라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쐐기꼴 글자는 유프라테스강 중류 오른쪽 강안의 폐허 텔.하리리에서 출토된 <마리문서>(BC 18세기)의 예로 보아서 아마도 마리의 말과 같은 아무르(구약성서의 아모리)어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함무라비 왕조시대(BC 18세기)의 말과 같은 서북 셈어족의 말이다. 따라서 <에블라 문서>는 <마리 문서>보다 오래된 것이 된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라는 연대와 북시리아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생각해보면 <우가리트 문서>의 경우처럼 1만 5천 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중에는 북서 셈어족 이외의 셈어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다. 족장들의 지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전승(창세기 12-25장)은 헤브론, 이삭 전승(25-26장)은 브엘세바, 야곱 전승(25-26장)은 베델, 세겜, 드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주요 무대가 중부 팔레스티나의 일정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각지에는 어디나 옛부터 가나안의 성소가 있고 각 족장은 이 땅에 제단을 쌓았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기록은 족장들의 각 전승이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연결되어 생성, 형성, 전개된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각 족장의 전승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전승의 재료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의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대를 거쳐서 만들어지고 편찬되어 현재의 문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 전승과 관계가 있는 무대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어느 것이나 중기 청동기시대의 중부 팔레스티나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창세기의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7장 1절28장 3절,35장 11절,43장 14절,48장 3절, 출애굽기 6장 3절, 에스겔서 11장 5절),엘.요르욘(높으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4장 18절-24절),엘오람<영원하신 하나님)의 뜻, 창세기 21장 33절),엘.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창세기 16장 13절),엘. 베델(베델의 하나님의 뜻).창세기 31장 13절35장7절), 엘. 베르테(계약의 하나님)의 뜻.(판관기 9장46절)등이 그것이다.
이 하나님의 호칭의 공통되고 있는 <엘>에라는 어간은 원래 셈어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였다.
한편 엘은 가나안의 만신전(Pantheon)의 주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문서>의 발견 해독 연구(50항 참조)에 의하여 엘은 또한 가나안 종교의 특정한 신격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엘은 여신 아슈라와의 거룩한 결혼으로 얌,모토 등의 신들을 낳았다. 엘은 조물주, 왕,신 들과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엘은 폭풍의 신 바알에 의하여 가나안의 만신전의 왕좌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이것은 엘을 주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이미 가나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각 엘은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결부되어 있다. 그들의 신들은 생성 번식을 기원하는 자연신이고 지연신이었다.
비옥한 땅 가나안의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족장들이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도이치의 위대한 구약학자 A.알트(1883-1956)가 말하는 <족장의 신>이라는 신의 타입을 남긴 것이었다.
알트는 족장 전승이나 기타 구약성서의 전승에서 볼 수 있는 신의 호칭, 즉<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장 13절31장 42,53절),<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삭을 돌보시던 두려운 하나님>(창세기 31장 42.53절)<야곱의 하나님>(창세기 49장 24절)등의 호칭에 족장시대부터 전해진 옛 신의 호칭을 보고, 이 신의 이름을 짓는 방법에 족장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신은 신의 현현을 체험한 족장의 이름과 결부시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엘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신은 족장 개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자는 산, 강, 나무, 돌 등의 일정한 땅과 결부되는 <토지신>이고, 후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특정 인물과 결부되는 <인격신>이다. 이 인격신이야말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적 신이다.
이렇게 신이 일정한 토지와 결부되는 토착신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에게 현현하는 특징이 바로 족장들의 종교와 모세의 종교와를 연결시키는 이스라엘 종교의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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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노아시대
바벨탑 사건 (창 11:1-9)
B.C
2166 아브라함의 출생 (창 11:27)
2166 우르에서 하란까지 (창 12:4)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 (창 12:56)
2067 할례 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 (창21:23)
? 욥이 고난 받음 (욥 1:12-19, 2:7-11)
욥이 축복받음 (욥 42:10-15)
욥의 죽음 (욥 42:17)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 (창 25:26)
1991 아브라함의 사망 (창 25:8)
1929 야곱의 하란도피 (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 (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 (창 30:24)
1898 애굽으로 팔려감 (창 37:36)
1886 이삭의 죽음 (창 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 (창 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 (창 46:7)
1859 야곱의 사망 (창 49:33)
1805 요셉의 사망 (창 50:26)
1527 모세의 출생 (출 2:12), 모세의 시 (시 90)
1447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 (출 5:1)
1446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라암셋 출발 (출 12:37), 홍해 도착 (출 14:11)
만나, 메추라기 시작 (출 16:1314), 시내광야 도착 (출 19:1), 십계명 받음 (출 20:3-17)
1445 성막 건축 (출 40:33), 레위기의 규례 지시< 1-2월 >,첫 번째 인구 조사 (민 1:2)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민 33:16-36), 70인 장로선정 (민 11:24), 가데스 정탐군 파견 (민 13:3)
1406 모세의 유언 설교 (신 1장 - 신 33장), 모세의 죽음 (신 34:5), 아론의 죽음 (민 20:28)
모압 광야 도착, 두번째 인구 조사 (민 26:1), 발람과 발락의 사건 (민 22장 - 민 24장)
후계자 여호수아 임명 (민 27:23), 요단 동편정복 (민 32:1)
1405 요단강을 건넘 (수 3:17), 이스라엘의 가나안 도착, 두번째 유월절 (수 5:1011)
만나 그침 (수 5:12), 요단 동편땅 분할 (수 13:15-31)
1400 요단 서편땅 분할 (수 14장 - 수 17장), 실로에 회막 세움 (수 18:1)
1390 여호수아 사망 (수 24:29)
1375 사사 통치의 시작
1384 옷니엘 < 40년 사역 > (삿 3:9-11)
1316 에훗 < 80년 사역 > (삿 3:15-30)
1236 삼갈 (삿 3:31)(
1216 드보라와 바락 < 40년 사역 > (삿 4장, 삿 5장)
1169 기드온 < 40년 사역 > (삿 6장 - 삿 8장)
1120 돌라와 야일 (삿 10:1-5)
1117 룻과 나오미
1103 사무엘의 출생
1085 입다 < 6년 사역 > (삿 11:1-33)
1079 입산.엘론.압돈 (삿 12:8-15)
1075 삼손 < 20년 사역 > (삿 13장 - 삿 16장), 사무엘의 사역 < 75년 > (삼상 7:3),
미스바 대회개 (삼상 7:3-11)
1050 사울 치하의 통일왕국시대 (삼상 10:24)
1040 다윗의 출생 초기생애 (시 7:11-13,17,22,23,34,35,52,54,56,57,59편)
1025 기름부음 받은 다윗 (삼상 16:13)
1020 다윗과 골리앗 (삼상 19:1-15)
1017 사무엘의 죽음 (삼상 25:1)
1010 사울의 전사 (삼상 31:6) (대상 10:6), 다윗의 등극 < 헤브론 > (삼하 2:4)
(대상 11:3), 왕정 초기 (시 8, 9,15,16,18-21,24,26,29,36,58,60,68,101,108,110편)
1003 다윗의 통일왕국 (삼하 5:5), 예루살렘 천도 (삼하 5:910) (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 (삼하 6:1617) (대상 15:29)
991 다윗의 간음죄 (삼하 11:1-21), 범죄 후 망명 전 (시 5,6,32,38,-41,51,55,64편)
990 솔로몬의 출생 (삼하 12:24)
979 압살롬의 반란 (삼하 15:10-12), 망명시기 (시 3,4,27,28,31,61,63,69,70,143편), 아삽의 시 (시 50, 73-83편)
고라 자손의 시(시 42:,44-49,84,85,87,88편), 헤만의 시 (시 88장), 왕정 말기 (시 3:,37,103,139편)
973 블레셋의 침입 (대상 20:4), 다윗의 인구조사 범죄(삼하 24:1-7) (대상 21:1)
970 다윗의 죽음(왕상 2:10) (대상 28:11-21), 솔로몬의 등극 (왕상 2:12), 솔로몬의 시 (시 72,127편)
966 성전 기공 (왕상 6:1) (대하 3장, 4장)
965 아가서 기록
959 성전 완공 < 7년 > (왕상 6:38), 왕궁기공(왕상7:1)
솔로몬의 잠언(잠 1장 - 잠 9장, 잠 10:1-22, 16:25-29,31장), 아론의 잠언 (잠 30장)
935 솔로몬의 전도서
931 솔로몬의 죽음 (왕상 11:43) (대하 9:31), 왕국 분열 (왕상 11:43-12:20)
926 애굽왕 시삭의 침입 (왕상 14:15-28)
910 아사의 유다왕 즉위 (왕상 15:8) (대하 14:1)
885 오므리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3)
875 엘리야의 사역 시작
874 아합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9)
872 여호사밧의 유다왕 즉위 (왕상 22:41) (대하 17:1)
853 벤하닷의 사마리아 침입, 아합의 전사 (대하 18:34)
848 엘리사의 사역 시작 (왕하 2:13)
841 예후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0:30), 아달랴 왕후의 유다 섭정 (대하 22:12)
835 요아스의 유다왕 즉위 (왕하 11:21), 요엘의 사역 시작
814 여호아하스의 이스라엘왕 즉위
797 엘리사의 사역 종결 (왕하 13:20)
796 요에의 사역 종결
793 요나의 사역 시작,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4:23)
790 웃시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26:1)
783 살만에셀 4세의 앗수르왕 즉위
772 앗술단 3세의 앗수르왕 즉위
760 아모스의 사역 시작 (암 1:1)
759 요나의 니느웨 전도 (욘 3:1-10)
755 아모스의 사역 종결
754 앗술니라리 5세의 앗수르왕 즉위
753 스가랴의 이스라엘왕 즉위, 요나의 사역 종결
752 살룸의 반란,살룸이 시해됨
751 요담의 유다왕 즉위
746 호세아의 사역 시작 (호 1:1)
742 미가의 사역 시작, 브가히야의 이스라엘왕 즉위, 아하스의 유다왕 즉위
740 이사야의 사역 시작 (사 6:1)
733 르신과 베가의 침입 (사 7:1)
732 호세아의 이스라엘왕 즉위, 다메섹의 함락
728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왕하 18:4) (대하 29-32장)
724 앗수르의 3차 침략 (왕하 17:5), 호세아의 사역 종결
722 북왕국 이스라엘의 함락 (왕하 17:6), <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
미가의 예언 성취 (미 1:67)
714 앗수르왕 산헤립의 침입 (대하 32:1)
701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697 므낫세의 유다왕 즉위 (대하 33:1)
695 미가의 사역 종결
669 앗술바나팔의 앗수르왕 즉위
663 테베의 멸망
681 이사야의 사역 종결
642 아몬의 유다왕 즉위
640 요시야의 유다왕 즉위(왕하 22:1) (대하 34:1), 나훔,스바냐의 사역 시작
630 스바냐의 사역 종결
627 예레미야의 사역 시작 (렘 1:1)
622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612 니느웨의 함락,앗수르의 멸망, 나훔의 예언 성취 (나 2,3장)
힐기야의 율법책 발견(왕하 22:8) (대하 4:14), 하박국의 사역 시작
609 요시야왕의 전사,여호야김의 유다왕 즉위
608 하박국의 사역 시작 < 유다 >
605 갈그미스 전투 (왕하 24:1), 바벨론의 1차 침입 < 1차 포로 >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감 (렘 46:2) (단 1:12)
602 여호야김의 반 바벨론 정책
601 애굽과의 재동맹 (렘 22:13-17)
598 바벨론의 2차 침입 < 2차 포로 > (왕하 24:10)
597 시드기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36:11),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감, 하박국의 사역 종결
593 에스겔의 예언 시작 < 바벨론 > (겔 1:12)
586 남왕국 유다의 함락 < 3차 포로 >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 포로가 됨(왕하 25:8) (대하 36:17),
하박국의 예언 성취 (합 1:5-11), 스바냐의 예언 성취 (습 1:8-18)
예레미야의 사역 종결 (렘 39:1-18), 오바댜의 사역 시작
583 오바댜의 사역 종결
580 다니엘의 풀무불 (단 3:19-25)
570 에스겔의 사역 종결
562 느부갓네살의 사망
559 바사의 고레스 즉위
550 다니엘의 4짐승 환상 (단 7:1-8)
539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단 5:30)
538 다니엘의 사자굴 (단 6:16-24),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대하 36:23)
537 1차 귀환 (스 2:1) < 스룹바벨 >
536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스 3:8), 성전 재건 작업 1차 방해,중단(스 4:4-23)
530 다니엘의 사망
522 다리오의 바사왕 즉위
520 학개,스가랴의 사역 시작 (슥 1장 -슥 8장), 성전 재건작업 재개 (스 5:2) (학 1:1)
< 학개, 스가랴의 사역 시작 >
516 제 2성전 완공 (스 6:15), 스가랴의 사역 (슥 9-14장)
486 아하수에로의 바사 통치
480 그리이스의 바사 침공
479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에 2:17)
475 스가랴의 사역 종결
474 하만의 책략 (에 3:9)
473 부림절 제정 (에 9:28)
465 아닥사스다 I의 바사 통치
458 2차 귀환 조서 (스 7:11), 2차 귀환 (스 7:9) < 에스라 >
444 3차 귀환 < 느헤미아 > (느 2:9-11), 성곽 중수 필역 (느 6:15)
435 말라기의 사역 시작
433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아 (느 13:6), 말라기의 활동
432 느헤미아의 2차 귀국 (느 13:7)
37 헤롯의 유다왕 즉위
5 세례 요한의 탄생
4 예수 탄생 (마 2:11), 헤롯의 유아 학살 (마 2:16-18), 헤롯 대왕의 죽음
A.D
8 유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12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황제 즉위
26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막 1:4), 본디오 빌라도의 유다 총독 부임
27 예수의 공생애 시작 (마 3:13-17) (막 1:14) (눅 1:36), 예수의 제1차 갈릴리 사역
가나안의 첫 이적 (요 2:1-11), 니고데모의 전도 (요 3:1-21)
28 12제자를 세우심 (마 10:1-4) (막 3:13-19), 예수의 제2차 갈릴리 사역
29 오천명을 먹이심 (마 14:13-21) (요 6:1-15), 물위를 걸으심 (요 6:16-21)
베드로의 신앙 고백 (눅 9:18-22), 예수의 제3차 갈릴리 사역
30 승리의 입성 (마 21:1-11), 성전 숙정 (눅 19:18-22), 주의 만찬 (막 14:22-25)
예수의 수난과 부활 (마 27,28장), (막 15:24-16:8) (눅 23:26-24:12) (요 19:17-20:10)
그리스도의 승천 (행 1:9-11), 오순절의 성령강림 (행 2:1-4), 스데반의 순교 (행 7:60)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
31 이방인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
32 사울의 다메섹 회심 (행 9:1-9)
35 바울의 예루살렘 1차 방문 (행 9:26) (갈 1:1819)
44 요한이 형제 야고보의 순교 (행 12:12), 베드로의 투옥 (행 12:4)
45 대 기근 <글라우디오 치하 >
47-48 바울의 1차 전도여행 (행 13:1-14:28)
49 예루살렘 공회 (갈 2:1),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
50-52 바울의 2차 전도여행 (행 15:36-18:23) (살전 1:56, 3:1-6)
51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53-58 바울의 3차 전도여행 (행 18:23-21:16), 로마서 기록,고린도전.후서 기록
54 네로의 로마황제 즉위
56 갈라디아서 기록
58 바울 체포 (행 21:27-39)
59 베스도의 유다총독 부임, 바울의 로마여행 (행 27:1-28:15)
60 히브리서 기록
61 바울의 로마 투옥 (행 28:16) (엡 3:16:20) (엡 1:12)
62 바울의 로마 도착, 주의 형제 야고보 순교
62 야고보서 기록,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에베소서 기록, 빌립보서 기록, 골로새서 기록, 빌레몬서 기록
63 바울 석방,디모데를 권고하여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함 (딤전 1:3), 디모데전서 기록
64 로마 대화재, 네로의 박해 < 1차 박해 >, 베드로전서 기록
66 유대인의 반란,디모데후서 기록,디도서 기록, 베드로후서 기록
67 바울의 순교
68 베드로의 순교
69 베스파시안의 예루살렘 침입
70 예루살렘 함락,산헤드린 공회 폐지
70-80 유다서 기록
81-96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 2차 박해 >
90 요한계시록 서신서 기록
95 요한의 밧모섬 유배 (계 1:6), 요한계시록 기록
96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100 얌니아 회의,사도 요한의 죽음
150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100-165)이 로마에 [예수제자훈련학교]설립(Disciple-School)
156 폴리갑의 순교
170 콥틱(Coptic)어로 쪽복음 번역
180 인도에서의 판테누스(Pantaenus) 설교
197 터둘리안(Turtullian 160-222)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03 퍼피튜아의 순교
206 에뎃사이(Edessa) 아브갈 4세의 회심
220 오리겐(Origen 185-254)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49 로마의 고넬료가(Conelius)가 골(Gaul)종족에게 7인 선교사 파송
287 그레고리(Gregory 240-332)에 의한 알메니안인들의 집단적 개종으로 야만인의 왕 티리바테스 2세 (Tiribater II)의 폭력적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마침내 왕도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
303 디오클레시안 황제 박해시작 - 최후, 최악의 박해
313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313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합법화
325 니케아 회의 : 교회융합→제국통합
328 프루멘티우스(Frumentius), 이디오피아에 복음전파
340 울필라스, 고트족에서 선교시작
360 투어스의 마틴(Martin of Tours)이, 선교사역개시
400 에집트의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어로 성경번역
420 아스페벧 족장(Sheikh Aspebet) 치하에서 아라비아의 아랍족속이 기독교로 개종
430 반달(Vandal)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432 패트릭(Patrick)의 아일랜드 회개운동 시작
450 왕들의 주도아래 지역단위로 기독교 개종
496 프랑크족(Franks)의 왕 클로비스(Clovis) 개종
498 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520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하의 말라바 (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ㅡ훈족(Huns), 터크족(Turis), 위거족(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523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 14,000명의
아랍 크리스챤들이 학살(Duh-Nuwas)
537 성소피아 성당 완공
540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549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White Huns)
주교를 파송
563 콜룸바(Columba)가 스코트랜드에 복음전도
570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590 교황권 확립(그레고리 1세)
596 그레고리대제(Gregory the Great)가 영국에 어거스틴(Augustine) 주교를 파송
597 켄트(Kent)족의 왕 에텔버트(King Ethelbert) 세례
622 헤지라(메카→메디나, 이슬람 원년)
626 동로마 성상숭배 금지
627 노텀부리아(Norbhumbria)족의 왕 에드윈(King Edwin) 세례
631 동 앵글(East Angles)족의 개종
635 네스토리아 선교회(Nestorian Mission) 중국 도착
637 롬바르드(Lombards)족의 개종
638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640 북아프리카 650만 베르베르(Berbers)족의 80%가 기독교로 개종,
그러나 950년까지 전부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
685 윌 프리드(Wifrid) 영국의 기독교 개종을 완성
716 보니페이스(Boniface)의 장기선교역사 시작
723 도르(Thor)의 참나무가 쓰러짐
730 베데(Bede)의 『영구 교회사(Church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편찬,
앵글로 쌕슨족(Anglo-Saxon race)의 개종을 서술
732 마르텔장군 뚜르 쁘와디아 전쟁에서 승리(이슬람군 격파)
780 촬레마그네(Charlemagne)가 쌕슨(Saxon)족에게 강제로 세례, 그리고 세례 거부자는
하루에 4천 5백명을 처형하고 수천명을 유형지로 추방
826 덴마크(Denmark)의 왕 하랄드(King Harald) 세례
827 안스갈(Ansgar)의 덴마크 복음화운동 전개
831 안스갈(Ansgar)의 스웨덴 복음화운동 시작
862 시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가 모라비아(Moravia)에 파송
864 불가리아(Bulgaria)의 왕자 보리스(Boris) 개종
900 마그야르스(Magyars, 현재의 헝가리)에 복음전파
949 이슬람세력이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유목민 베르베르(Berber)족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의 50%를 점령 954 러시아(Russia)의 공주 올가(Princess Olga) 세례
962 신성로마제국 탄생(오토 10세)
987 러시아의 왕자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 세례
1000 fp이프(Lief the Lucky)의 그린랜드(Greenland) 복음선교
1009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북몽고(North Mongolia)의 수도 가라코룸(Karakorum)에서 터키족인
20만명의 케라이트(Keraits)족을 개종, 나미안족(Namians)과 메르키트족(Merkites)을 세례
105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완전분열
1077 카놋사의 굴욕(헨리4세 vs 그레고리7세)
1122 보름스협약 (성직임명권 협약)
1124 키프차크 터키족(Kipchak Turks)의 쿠만인(Cumans) 몇 명이 헝가리의 스테판 2세(Stephen Ⅱ)를
통해 기독교에 접촉하여 복음을 영접
1150 중앙아시아 옹구트족(Onguts)의 개종
1200 웬드족(Wends), 프러시안족(Prussians), 리츄아니안족(Lithuanians)과 기타 발틱해안의
종족들을 제외한 유럽 전반에 걸쳐 기독교화
1219 프랜시스코 수도사들(Franciscan Friars)의 북아프리카 파송전도
1250 중앙아시아 위커족(Uighurs), 케라이트족(Keraitits), 몽골족(Mongols) 그리고 모든 주요종족들이
부분적으로 기독교화
1291 십자군 악코에서 철수(십자군전쟁 종료)
1295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의 요한(John)이 중국 북경에 도착
1303 아나그니 굴욕(교황 보니페이스 vs 프랑스필립왕)
1309 바빌론의 유수(∼70년간)
1347 유럽, 페스트로 인구 1/3 감소(∼1351)
1365 페름(Perm)의 주교 스테반(Steaphan 1335-1396)이 러시아의 콤미-페름(Komi-Perm)종족을 복음화
1368 중국 명조(Ming Dynasty)에 의해 기독교 폐지
1450 트리포(Trifo)와 테오도릿(Theodorit)이 콜라라프족을 복음화
1453 동로마 멸망(by 이슬람)
1493 캐톨릭 선교사들의 신세계 도착
1498 바스코 다 가마(Vasoc da Gama)와 캐톨릭 선교사들의 인도선교
1500 새로 조직된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150-200년 동안 복음을 받지 못한 종족들에게 접촉하기 이해
노력을 경주
1503 황금해안(Gold Coast)의 추장 에후투(Efutu)와 1300명 원주민의 세례
1517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 조항의 선포
1529 루이스 볼라노스가 아르헨티나의 투구만 2만명을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OFM이 이들을 위해 사역
1530 마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1세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졌을 뿐이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끊어졌다고 가르치다
1534 칼티엘(Cartier)이 선교사들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
1536 포르투갈인(Portuguese)들이 코로만달(Cormandal)해안의 힘센 어부 바라타(Bharatha)족 1만명을
한꺼번에 세례
1540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활동 개시
1542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ier)의 선교활동 개시
1544 프란시스 자비엘이 트라반코(Travancore)에서 선교활동 시작. 1개월만에
1만명의 무쿠바족(Mukuvas)을 세례
1555 칼빈(Calvin)이 위그노교도(Huguenots)를 브라질에 파송
1556 세일론(Ceylon) 콜롬보(Colombo)부근 카레아스(Careas) 해안의 어부 7만명을 천주교로 개종,
1583년까지 마나르(Marar)섬에서 파라바족(Paravas)과 카레아족 등 지주조개 잡이 어부들 가운데
4만 3천명의 기독교인
1564 어거스틴교단(Augustineians)의 필리핀 도착
1580 페루의 제수잇(Jesuit)교파 신학자 호세 드 아코스타(Jose-de Acosta 1539-1600)가
<미개인 복음전파>(On the Preaching of 혿 Gospel Among the Savages)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아메르 인디안(Amerindian)종족 전도의 문제점을 제시
1583 마테오 릿치(Matteo 꺛챠)dml 중국 도착
1588 영국교회(Anglican) 교구목사 하드리안 사라비아(Hadrina Saravia)가 최초로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
1593 프란시스코 교단(Franciscans) 일본 도착
1602 네덜란드 정부가 동인도제도의 말레이족(Malays)을 개종하기 위한 선교사 파송
1606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의 마두라(Madura) 도착
1614 일본에 반기독교 교서 공포
1622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ⅩⅤ 1554-1623)가 「신앙전파를 위한 신성회중」
(C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을 설립
1629 마태복음이 말레이어(Malay)로 번역, 이는 비서구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건
1649 「뉴잉글랜드 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가 설립되어, 아멜인디언(Amerindian) 선교를 위해 죤 엘리옷(John Eliot)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1650 러시아 정교회가 버링 스트레잇종족(Bering Strait)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Siberia)를 횡단
1663 져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an Weltz 1621-1668)가 독일교회와 학생들의 세계선교에
대한 각성을 촉구
1664 폰 벨츠(Von Weltz) 문제가 선교의 필요를 언급하다
1667 영국 시인 죤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서 「실락원」에 [만민에게 복음을!]이란 구절을 사용
1668 스페인의 괌(Guam)에 군사기지와 캐톨릭 선교회를 설립
1670 다카(Dacca)에서 2만명의 나마수들아 벵가릴(Na masudra Bengalis)들이 힌두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
1673 러시아에서 칼믹(Kalmyks)족 최초로 동방정교회로 개종
1698 『기독교 증진회』(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창설
1701 러시아이 중부 볼가(Middle Volga) 지방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야만인
케레미스(Cheremis)인들이 세례
1701 복음전파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해외부서 창설
1702 토볼스크(Tobolsk)의 주교 흴로훼이(Filofey)가 1721년까지 160개 교회로 성장시키고,
4만명의 오스트족(Ostyaks), 보컬(Voguls)족, 시리안족(zyrians), 야쿠족(Yakuts)을 세례
1705 「화란-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 창설
1710 칼 폰 칸스테안(Karl Von Canstein) 백작이 동독의 할레(Halle)에 최초로 칸스테인
하우스(Canstein House) 인쇄소를 설립하여 80년동안 300만권의 성서를 출판
1722 진젠돌프(Zinzendorf)가 독일에 헤른후트(Herrnhut) 설립
1732 모라비안 교도(Moravians)의 첫 선교사 파송
1736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알창겔스크 사모에드 족을(Samoyeds of Archangsk) 위한 선교사역
1736 중공의 반기독교 칙령 발포
1740 러시아 스비자스크(Svijazks)에 「새 세례자를 위한 기관」(Office for Newly-Baptized)을
설립하여 1741년부터 1762까지 43만 550명의 볼가(Volga) 야만인들을 세례
1743 요셉 초툰세비스키(Josef Chotunceviski)를 중심으로 캄차카(Kamchatcha)를 위한 복음화 운동개시
1747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세계 복음화 기도운동> 제창
1751 오스트야크(Ostyaks)가 오브도르스크(Obdorsk) 지역의 북극 연안까지 복음을 전파
1759 제수잇파(Jesuits)가 브라질에서추방
1773 예수회(Society ofJesus) 탄압
1784 이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조선에 전래
1787 「모라비안교파 해외선교 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창설
1792 러시아 정교(껸냐무 Orthodox)의 수도사 출신 8명의 선교사들이 알라스카의 코디아크(Kodiak)섬에
도착하여 2천 500명의 에스키모 정령숭배자들을 세례. 1795년까지 1만명 세례
1792 영국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침례교선교사협회」
1793 윌리엄 캐리가 최초로 「세계 기독교선교현황」을 조사
1795 「런던 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스코틀랜드 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글라스고우 선교사협회」(Glasgow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네덜란드 선교사협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런던 선교사협회」(LMS)가 최초로 선교사들을 타히티(Tahiti)에 파송
1799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9 학생운동(Student Movement) 폭발
1799 「전도지 선교회」(Religious Tract Society) 창설
1802 미국에서 「메싸추세스 침례교 선교회」(Massachusetts 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개척지 복음전파]를 위해 창립
1804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yt) 창설
1806 「해이스택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말미암아 학생선교운동 개시
1807 로버트 모리선(Robert Morrison) 중국 도착
1810 「미국 해외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창설
1812 최초로 미국 선교사들이 인도를 향해 항해
1814 예수회(Society for Jesus) 복귀
1815 「바셀 선교사협회」(Basel Missionary Socieyt) 창설
1816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yt) 창설
1817 로버트 모회트(Robert Moffat)의 아프리카 도착
1819 「런던 사무원협회」(London Secretarise' Association) 창설
1822 「파리 복음선교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5 「미국 전도 소책자 선교회」(American Tract Society) 창설
1826 「미국 가정 선교협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6 볼가(Volga)지역에서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로부터 집단적 이탈
1828 「라인 선교사협회」(Rhenish Missionary Society, RMS)가 창설되어 보르네(Borneo)의
대야크족(Dayaks)을 위한 선교를 시작. 1839년에 대야크인의 첫 세례자 탄생
1840 영국의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에 도착
1842 남경조약(Treaty of Nanking)으로 중국 개방
1846 런던의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창설
1847 동방정교의 시베리아 이디드이르(Anadyr) 지방의 코리아크(Korik)와 척치(Chukch)인들을
위한 선교사역
1849 모라비안 교파가 니카라과의 미스키토(Miskitos)을 위한 선교사역
1852 「성서와 의료선교사협회」(Bil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 창설
1854 「런던 선교대회」(London Missionary Conference)
1858 「뉴욕 선교대회」(New York Missionary Conference)
1858 미국에서 1858-1859 대각성운동과 「훌턴스트릿 기도회」(Fulton Street Prayer Meeting)
1859 개신교 선교사들의 일본 도착
1860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61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1862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한 선교사역
1865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1867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1870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1875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1878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1880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1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1884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1885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Appenzeller) 한국 도착
1885 「켐부릿지 7인」(Cambridge Seven)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 선교회(CIM)를 통해 중국 파송
1886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1887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8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1890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1891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1897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회 주교들 참석
1898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1900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1900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1903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1905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1906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1910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2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1912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1913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 세계 복음화 십자군
(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1916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
(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1917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1920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1921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1921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1922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SVM에 동참
1926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설
1926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1927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1928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
(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1929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1930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1931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1931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1935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1936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1936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구 조사
1938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1941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1942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1945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46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1946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1947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1947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1947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1948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1950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1951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1951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1951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1952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1955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1956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1957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1958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1958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1959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1960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1960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1961 IMC와 WCC의 병합
1961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1963 DWME의 멕시코 집회
1964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1965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1965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1966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베를린회 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1966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1966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1966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1966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1966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67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1968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1969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가.
매년 96만명 성장
1970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1970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1970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 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에 5억 4천 900만권
1971 일본 해외 선교협회(Japan Overseas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72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한 개척지 상황(Frontier Situations for Evangelization)이 바레트(D.B. Barrett), 호로네크(M.L. Hronek), 맘보(G.K. Mambo), 브비티(J.S. Mbiti), 맥베이그(M.J. McVeigh)에 의해 발간
1972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Missiology) 창설
1972 시카고에서 복음과 개척지 종족을 위한 협의회
(Consultation on The Gospel and Frontier Peoples) 개최
1972 국제 선교학 논평지(Missiology, An International Review) 발간
1973 방콕에서 DWME 집회
1973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필리핀에서 전 아시아 학생선교대회(All-Asi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서울에서 전 아시아 선교협의회(All-Asia Missionary Convention) 창설
1973 교회선교위원회 협의회(Association of Church Mission Committees) 창설
1973 아시아 선교회(Asia Mission Association) 창설
1973 얼바나 전도(Urbana Reversal) : 1970년에 8%, 1976년에 28%에 학생들이 헌신서약
종족 복음화 선교전략 대확장
1974 로잔에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in Lausanne)
1974 일본 전도대회(Japa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74 CCC 한국 대회(Explo '74) 개최
1974 최초의 하기 국제 연구소(First Summer Institute of International Congress)
1974 1980년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위한 공식적 회집
1975 나이로비에 레나나에서 케냐 비복음화 종족 대회(Unreached Peoples Conference)
1975 동서선교 정보수집과 전략개발센터(East-West Center for Mission Research and Development)가
서울에 설립
1975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 설립
1976 세계 복음화 중국대회(Chines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개최(홍콩)
1976 캔사스에서(IFMA/EFMA연합 실행 위원수련회) 개최
1976 미국 해외선교센터(United States Center for the World Mission) 창설
1976 얼바나 선교대회(Urbana '76)에서 50% 학생헌신
1976 이슬람 세계대회(Islamic World Congress)가 기독교 선교사의 철수
1976 선교사들이 성경이 없는 5천 2백억 언어 그룹중 300 언어로 성서번역 500언어로 성경 개편과 새로 번역
1977 전인도 선교 및 복음화 대회(All-India Congress on Mission And Evangelization)
1977 인도 선교 협회(IMA) 조직
1977 미국 세계선교센터 국제연구소(ISS)에서 최초로 선교전망 'Perspectives'코스 제공
1978 모슬람권 복음화를 위한 북미대회
1978 ISI가 레이톤 친(Leiton Chin)으로 WCFM책임자 임명
1979 중국교회 재 개방
1979 서독의 바드 리벤젤(Bad Liebenzell)에서 세계복음협회 주최로 비복음화 종족대회 개최
1979 비복음화 종족을 위한 EFMA 실행위원 수련회, 1990년까지 5천 208종족 복음전파 계획
1979 맥가브런(McGavran), 빌리스(Bliss), 질(Gill)의 [2천년까지 모든 종족에 교회 개척] 주장
1979 얼바나(Urbana)대회에서 75%학생들 헌신
1980 제자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대회(Philippine Congress on Discipling a Nation)
1980 멜보우르네 DWME 선교대회(DWME Conference Melbourne)
1980 태국에 파타야(Pattaya)에서 LCWE 대회 개최
1980 에덴버그(Edinburgh)에서 개척지 선교 세계협의회(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1980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학생 협의회(International consu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1981 개척자협회(.Frontier Fellowship)창설과 [Global Prayer Digest" 발간
1981 IFMA 개척자 위원회 (IFMA Frontier peoples)
1981 얼바나(Urbana)대회에서 90% 학생들 헌신
1981 숨은 종족 (Hidden People)을 주제로 독일복음선교협회
(German Association of Evangelical Mission)회의
1981 영국 하드포드(Hertford)의 하이레리그(High Leigh)에서 복음선교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주체로 비복음화 종족 전도(Reaching Unreached Peoples)를 위한 대회
1982 그랜드 래피드(Grand Rapids)에서 복음전파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협의
1982 3년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교협의회 대회(Asia Mission Association Consultation) 개최
1983 암스테르담에서 83만 5천명 순회 전도자들의 전도 연구
1983 세계 복음주의 협회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서 위튼 83(Wheaton '83)개최
1983 IFMA 와 EFMA 실행위원수련회에서 각각 미해결 과제(Unfinished Task)에 대해 강조
1984 USCWM에서 IFMA/EFMA/AEPM 수련회를 통해 개척선교에 대한 사명의 재확인
1984 호놀룰루에서 중국민족 세계복음화대회 (Ethnic Chiness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984 세계복음화 기도동맹(WEPA - World Evangelization prayer Alliance)결정
1985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국내단위 선교대회 개최
1985 CCC 엑스폴로 '85(Explo '85) 개최
1985 맥가브런이 선교학자 회의를 열어 2천년 세계선교의 대전진(Gaint Step)에 대한 연구
1985 미국 휴스턴에서 소수민족 복음화를 위한 국내 대회
(National Convocation on Evangelizing Ethnic) 개최
1985 자이레 국내복음화 대회(Zaire National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64교단 지도자들이
1990년까지 1만 교회를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에 설립할 것을 계획
1985 나이제리아 복음주의 선교회(Nigeria Evangelical Mission Association)가
나이제리아 비복음화 종족 연구
1985 선교 2천년(Mission 2000) 계획을 선교 학자 맥가브란(D.A.McGavran)이 제안,
유럽의 10만 교회의 선교회가 세계의 비복음화 종족에 2천년까지 교회 개척 계획
1986 미국 남침례 해외 선교부에서 비거주 선교 분과 신설
1986 인도 선교협회(India Mission Association)가 인도의 숨은 종족 연구를 대규모로 개시
1986 맨데이트 '86 선교대회 개최
1986 갈렙 프로젝트(Caleb Peoject)가 선교기관들과 협력 1만 3천 대학생들에게 영향력 발휘
1986 휠트 윌쓰(Fort Worth)에서 미국 교회사 협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주최로 1986년 축제
1986 암스텔담 '86(Amsterdam '86)에서 8천명의 목사와 전도자들에게 도전
1986 콜로라드 스프링(Colorodo Springs)에서 개척지 선교학 협회(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창설
1986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국제대회 미국에서 개최
1987 콤미밤 '87(COMIBAM '87)최초의 남아프리카 선교대회(Latin American Congress on Mission)개최
1987 제3세계 선교협회(Association of Third World Mission) 최초의 국제대회
1987 제8차 아시아 신학 협의회
1988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 학생협의회 (International Student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 결성
1988 개척지선교 세계 협의체(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oin)결성
1988 리더쉽 '88(Ledership '88) 기독교 젊은 지도자를 위한 로잔대회
1988 제1회 개척지 선교를 위한 신학생 국제대회
(First International Meeting of Theological Students for Frontier Mission) 개최
1988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88)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최초로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램 센타에서 1988년 7월 25-30일 열림
1989 GCOWE '89(Global Consultation for World Evangelization by AD 2000 & Beyond)싱가폴에서
1989년 1월5-8일 50개국대표 314명이 참가한 2000년대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989 로쟌II 마닐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 1989년 7월 11-20일 마닐라에서 개최
(International Congress for World Evangelization in Manila. Lausanne II)
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92) 7월27-8월1일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래함센터에서 개최
1995 GCOWE '95 제2차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7-25일 한국 서울 횃불선교센터 214개국 4662명 참가
1996 제3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 96) 선교사 384명 2,300명이 모여 시카고 윗튼칼리지에서 개최
1997 GCOWE '97 남아공에서 아프리카 지도자들로 미전도종족에 초점을 맞추게 함
1999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창립 1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개최
2000 제4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2000) 7월 24-28 윗튼대학에서 열림
2000 2000년 세계선교대회 8.14-19 서울, 잠실체육관, 사랑의교회, 명성교회, 소망교회, 영락교회에서 개최
2000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 7.29-8.6 빌리그램함 전도협회 주최로 암스텔담에서 개최
2000 어바나 2000 선교대회 12.27-31 개최
1. 첫 번째 창조 이야기
(창 1장)
1. 두 가지 창조이야기
구약성경에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4절 앞 부분까지, 두 번째는 창세기 2장 4절 뒷 부분에서부터 2장 끝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말 개역성경의 창세기 2장 4절은 히브리어 원어성경과 비교하면, 두 가지 점이 수정되어야한다. 4절 앞부분의 "야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에서 천지는 "땅과 하늘"을 가리키는 지천으로 고쳐야한다. 그리고 4절 앞 부분과 뒷 부분의 순서도 바뀌어야 한다. 4절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천지(하늘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야웨 하나님이 지천(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때에"가 된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1:1)로 시작하여 "천지(하늘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2:4a)로 끝맺고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야웨 하나님이 지천(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때에(2:4b), 야웨 하나님이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2:5)"로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늘"에 촛점(우주론적 관점)이 모아지고, 두 번째는 "땅"이 관심의 주요 대상(인간론적 관점)이 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창조 이야기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조명함으로써, 오히려 상호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2. 창조신앙과 자연과학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였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연과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과학서가 아니다. 특히 성경의 창조이야기는 우주만물의 생성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을 신앙적으로 설명하고, 이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분명히 하며, 인간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서 피조세계에 대하여 책임지는 존재임을 밝히는 것이 그 중심의도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자연과학과 경쟁하거나 대결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과학이 갖고 있는 한계점의 부족을 보강 내지는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과학은 전체(all)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고 분석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도, 더 나아가 전체(우주)의 의미에 대하여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은 성경의 몫인 셈이다.
3. 하나님의 복수형 ("우리"):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초대 교부신학자들은 '우리'라는 복수형을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이미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서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무리없이 수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도 볼수 있으나, 이것은 일종의 교리적인 해석으로 성경적인 해석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심사숙고의 복수형(Pluralis deliberationis)"이며, 이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심사숙고할 때 쓰이는 화법이다. 또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우리'라는 복수형은 하늘회의 장면에서 보통 언급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나님이 하늘에서 천상의 존재들과 함께 하늘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참조, 왕상 22:19; 욥 1:6; 2:1; 38:7; 사 40:11). 다른 피조물을 창조할 때는 이러한 회의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은 "심사숙고의 복수형"이든 "하늘회의 장면"에서 나온것이든 간에,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인간만이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주는 말이다.
4.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외형적인 유사성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가시적으로 형상화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 사람은 왕과 같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고대 중동세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왕을 지칭하던 말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이 왕과 같이 최고의 존재로, 피조물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왕을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 즉,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왕과 같이 존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평등(동등)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3)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연을 통치하는 대리 통치자라는 것이다. 고대 중동세계에서 제국의 대왕들이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때, 자기가 직접 통치하기 어려운 먼 지역에는 왕 자신의 형상(동상)을 만들어 세움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왕의 통치권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다른 피조물(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위탁하여 관리하도록 하셨다.
4)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사람 밖에 없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이 갖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Communio :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에게만 허용된 선물이요 특권이다.
5. 자연에 대한 봉사적인 사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주신 명령이다. 이 명령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활편리를 위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사용하여 훼손하고 파괴하라는(혹은 파괴해도 좋다는) 말씀인가? 지금까지 인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본문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자연을 파괴해 왔다. 지금도 그러한 자연환경의 파괴는 개발이라는 가면을 쓰고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와 환경오염에 창세기의 이 본문이 책임이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자연 파괴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말씀이 아니다.
1) 땅을 정복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땅을 이용하고 일구어 복받은 삶을 이루어 놓을 뿐 아니라, 땅의 훼손이나 피괴로부터 땅을 보호하고 지켜서 오히려 비옥한 땅의 생산으로 더욱 복된 삶을 누리라는 뜻이다.
2)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은 생물을 생포하고 학대하고 살해하라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잘관리하고 보살피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물들이 사람에 의해 지속저으로 보존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정복과 다스림은 오히려 창조의 일익을 계속 담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하는 인간의 책임이요 사명이다. 사람은 결코 자연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람은 자연에 대한 하나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선하고 완벽하게 창조하였다(창1:31).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피조세계를 사람에게 맡기셨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피조물들(자연환경)은 탄식하고 있다(롬 8:22). 선한 하나님의 피조물을 탄식하며 고통받는 피조물로 만든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2.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창2장)
1. 일하는 낙원 : "에덴 동산에 두사 다스리며(경작하다)"(창 2:5+15).
최초의 사람 아담이 살았던 곳은 '에덴 동산'이었다(창 2:8). '에덴'(???)이라고 발음되는 이 히브리말은 '기쁨/환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히브리말 '에덴 동산'은 헬라말로 '파라다이스'이다(창 2:8, 15). 이 '파라다이스'라는 낱말은 본래 고대 페르시야의 말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서 즐거움이 넘치는 정원, 공원'을 뜻한다.
이 에덴 동산, 즉 낙원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곳인가? 낙원은 일하는 곳이요, 최초의 인간 아담도 일하는 농부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장 5절의 '경작하다'와 15절의 '다스리며'라는 낱말은 같은 히브리말이 다르게 번역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아바드'(???)는 기본적으로 '일하다/경작하다'라는 뜻이다. 낙원은 인간이 마냥 풍요와 쾌락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손으로 흙을 파고 땀을 흘리며 노동해야 하는 곳이다. 사람은 노동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노동은 창세 때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정하신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이 점은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계속된다.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에서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는 것도 바로 이를 뜻한다. 노동자체는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진 벌도 아니고 죄의 삯도 아니다. 죄의 결과로 그 노동이 더욱 더 수고로워졌을 뿐이다. 노동은 본래부터 인간의 삶을 이루는 본질의 하나이며, 자기를 실현해 가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하나님의 일이다.
2. 인간창조 : "땅에서 나온 먼지와 생기 그래서 생령(생명체)이 되어"(창 2:7)
현재 우리 개역 성경은 창세기 2장 7절의 본래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야웨 하나님이 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는 간단한 언급으로 인간창조에 대한 기록이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우주창조에 주된 관심이 있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와는 달리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와서는 인간창조에 초점이 모아져서 그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다. 우리는 이 짤막한 한 본문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 대답을 해 볼 수 있다.
1)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인생의 허무함) : 먼지로 된 존재
개역성경의 '흙'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말 '아파르 민 하아다마'의 문자적인 의미는 '땅의 먼지'이다. 사람은 땅의 먼지로부터 온 존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땅(아다마)도 아니고 먼지(아파르)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먼지'라는 부적당한 재료로 만들어진 무상한/허무한 존재라는 것이다 : "너는 먼지(아파르)이니 먼지(아파르)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이 없다면, 사람은 그저 먼지에 불과한 허무한 존재인 것이다(참조, 시 90:3; 103:14 등). 이러한 인생(인간)의 허무성은 전도서의 기자도 잘 보여주고 있다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1).
2) 인간은 땅과 공동운명체이다 : "아담(사람)과 아다마(땅)"
이 둘은 어근이 같다. 사람과 땅은 각각 히브리말로 '아담'과 '아다마'이다. 이것은 '아담'과 '아다마'가 한 뿌리에서 나온 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창세기 2장 5절에서 하나님은 땅(아다마)을 경작케 하려고 사람(아담)을 만드셨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과 땅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곧 '사람'과 '땅'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사람이 경작할 땅이 죽으면 우리 사람도 죽을 수 밖에 없고, 땅이 살아야 우리 사람도 산다는 뜻이다. 따라서 땅을 경작하는 일은 우리 인간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3)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다 : "생명의 숨을 불어놓으시니"
개역성경에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네페쉬 하야'는 문자적으로 보면 '살아있는 존재(ein lebendige wesen/ a living being)'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창 2:19; 9:10,12등). '네페쉬 하야'가 '살아있는 존재 모두'를 뜻하고 있으므로 '생명체'로 번역하고 있는 표준새번역의 번역이 적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이 인간도 동물도 모두 생명체로 부르고 있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물에게도 생명의 숨이 있기는 하지만(창7:22),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것을 불어넣어준 것 같이 생명의 숨을 동물에게도 주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 중에서 사람에게만 특별히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와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숨'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3.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17)
이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 본문인 동시에 많은 의문점들을 갖게 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왜 이런 나무를 만드셨는가? 처음부터 이런 나무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의 타락도 없었을 것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이 불순종할 줄 모르고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도대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또 무엇인가? 등등. 이외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갖는 모든 질문들이 본문에 대하여 전부 올바른 것은 아니다. 본문을 다구치기 전에 먼저 이 본문이 갖는 의미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낙원에서는 본래 사람이 영생이 가능했었다(창 2:9)
8-9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을 낙원에 두시고 풍성한 과실을 맺게 해 주셨다. 그리고 낙원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다. 창세기 3장 22절에 의하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자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이 본문은 물론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가 이 생명나무의 실과도 먹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 우려가 되어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생명 나무의 실과를 금한 것은 타락 이후의 사건이고, 타락 이전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지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실과와 더불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자유로이 따먹게 하였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2) 영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낙원에서 자라나는 두 나무 가운데 생명나무가 먼저 언급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다음에 언급된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중심 이야기에서는 생명나무 보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생보다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3) 인간은 하나님과 다르다 : 한계와 제한된 인간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인 사람과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낙원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지으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과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은 생명나무를 자유로이 따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었고, 낙원이라는 완벽한 삶의 조건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다. 창세기 2장 16절의 '각종 나무의 실과'라는 표현에서 '각종'은 히브리말로 '모든 것/전부(콜, call)'를 의미한다. 모든 나무 실과를 따먹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족하지 않고 열매까지도 먹으려 했다면, 인간의 욕심은 얼마가 지나친가!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나 그러나 단 하나만 금지되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단 한가지를 못하게 제한하므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마지막 금을 그으신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지만, 한 가지의 제한과 한계를 두신 하나님께 순종하므로써, 사람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제한성 내지는 의존성이라는 정당한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든지 간에, -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금하다는 사실이다. - 금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동시에 자신의 제한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으로 하나님되게 하고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마지노 선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 사람의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모험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사람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갖도록 해주셨다. 그 사람에게 금지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명령이 없으면, 사람에게도 자유가 없는 것이다. 명령이 일체 주어지지 않은 동물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제한 하는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자유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낙원에서의 아담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고, 노력 여하에 따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4. 돕는 배필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에 직접 '돕는 베필'을 창조하였다. 이 돕는 베필에 해당되는 히브리말은 '에제르 크네그도'이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에서 '돕는 배필'(개역), '거들짝'(공동번역),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새번역)으로 번역되어있다. '어제르'는 '돕는자'라는 뜻이다. 돕는 배필이란 다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돕는 반대자
'크레그도'는 '이와 반대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적용하면 돕는 배필이란 '돕는 반대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만일 남자가 존경을 받을 만하면 그의 아내는 '돕는자'(에제르)가 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반대자(크레그도)가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부부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에 한 개체의 파괴는 곧 전체의 파과와 같은 것이며, 동시에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돕는 반대자'이기 때문에 결국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2) 동등한 돕는자
'크레그도'에는 '∼와 반대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적용하면, 돕는 배필이란 '돕는 반대자'라는 의미이다. 남녀는 동등하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즉 서로 '다르다/ 동등하며', '열등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이다. 결국 돕는 배필이란 '완전한 짝을 이루어 서로 돕는 동반 관계'를 말한다.
3) 신적 도움을 주는 대등한 돕는자
'에제르'는 주로 하나님의 도움을 언급할 때 쓰는 말이다(출 18:4; 신 33:7; 시 121:1 등). 창세기 2장 18절은 남자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으로 살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매개하고 통로가 된다. 돕는 배필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주는 대등한 돕는자라는 뜻이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야웨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3. 인간의 타락
(창세기 3 장)
1. 악의 기원(?) : 악의 현실을 전제함
보통 창세기 3장은 악 또는 죄의 기원을 밝혀주는 본문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본문은 악(죄) 그 자체의 존재와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악을 하나의 현실로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기원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조차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이렇듯 하나님의 기원이 신비의 영역으로 가려 있듯이, 그 악도 인간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신비로서 그 기원이 결코 해명되지 않는 불투명한 실존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사람(아담과 하와)에게는 계속해서 심문을 한다. 그러나 뱀에게는 "왜 유혹하고 속였는지"를 전혀 추궁하지 않으신다. 뱀에게 심문이 없다는 것은 악의 기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악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악의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세이다.
2. 여자만의 책임(?): 남자도 공범자임
흔히 창세기 3장은 죄라는 것을 인간사회에 들여다 놓은 장본인이 바로 여자 혼자였으며, 그 책임도 여자에게만 있다고 말하는 본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많은 여성 해방론자들로 하여금 인간 타락 이야기를 비롯하여 나아가 성경 자체를 여성 운동의 적이 되는 책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본문을 객관적으로 보면, 오해임이 들어난다.
1) 뱀은 여자에게 말하면서 일관성있게 복수 대명사(1절 : "너희더러"/ 3절 "너희는 먹지도 말고"/ 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있는 동안 줄곧 남자는 그의 아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
2)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6절)라는 구절에서 '함께 한'이란 공간적 접촉을 의미하는 전치사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있던 남편'에게 주었다는 뜻이 된다. 그 여자가 실과를 따먹을 당시 그 남편도 그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더욱이 과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금지 명령을 받은 사람은 남자 혼자였다(창 2:17; 3:17).
이상의 몇 가지 사실에 의하면 여자는 물론 남자도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함께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단지 주도권만을 여자가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남자도 여자와 더불어 공동책임을 지닌 공범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금지 명령을 받은 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은 여자보다는 오히려 남자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3. 바로 우리 이야기임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첫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흘러간 과거의 사건만도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과거의 한 인물일 뿐 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을 대표한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라는 히브리말은 예외없이 정관사 '하'가 붙어서 나온다(창 3:9, 12, 17, 20, 21, 22). 여기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한사람'을 지목하는 고유명가("그 아담")가 아니라, 그 낱말의 원뜻대로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그 사람")로 쓰인 것이다. 여기서의 아담은 과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 이야기는 우리(사람)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바로 오늘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락 이야기에서 말하는 우리(인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호의, 배려, 자비에 대하여 불신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이"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충동을 부채질하는 뱀이 유혹에서 나타난다.
셋째, 인간은 죄지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본연의 위치를 떠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인간은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에서 살게 되었다. 즉 사람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삶의 근원은 바로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자신들의 죄에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는 곳에서 인간의 삶도 정지한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시는 행위에서 쉽게 발견된다.
4. 가인과 아벨 이야기
(창세기 4장)
1. 가인과 그리고 그 제물
가인은 농부였기에 땅에서 난 곡식을 야웨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기에 양떼 가운데서 그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그런데 야웨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전통적인 한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종류에 있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피에 있으며,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에(레 17; 11) 하나님은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물보다는 피의 제물인 아벨의 것을 받으신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농부인 가인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농부인 가인에게는 소제(곡식제물)는 번제(희생제물)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결국 곡식제물과 희생제물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두 사람이 각각 드린 서로 다른 제물의 종류가 하나님에게서 제물을 열납하시는지 여부와 관계가 없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제물의 열납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행위를 하시는 분이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인간은 왜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으셨느가를 물을 자격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삼으신 것은 가인의 제물 자체가 아니라 가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를 낸 태도였다(7절).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가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믿음의 제물: 아벨은 의로왔으나 가인은 악한 자였고(요일 3:12; 유 1:11),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히 11:4), 하나님은 아벨의 믿음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약성경의 이해는 창세기 4장에서 그 예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서 신약의 구약본문 해석은 존중되야 한다.
3)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제물보다 세상에서의 삶: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 여부를 기록하는 본문의 기록순서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야웨께서 아벨과 그리고 그 제물'은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리고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4-5절). 하나님은 제물 그 자체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삶을 '먼저' 살피신다. 하나님은 아벨을 기뻐 받으신 다음에야,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으신 것이며, 또 가인을 기뻐 받지 않으신 다음에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인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 이전, 즉 세상 속에서의 문제가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7절).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보다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인 가인의 삶을 중요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제물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제물이 필요치 않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1).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오기 전까지의 삶이다. 일상적인 삶이 선한 삶이면, 그 사람과 그리고 그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다.
2.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아담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하신 것과 같이, 아우 아벨을 쳐죽인 가인에게도 가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모든 사건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고백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하며 하나님께 대든다. 본래 인간 창조의 목적은 약자인 아우를 지키는 것이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자를 돌보고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요 의무인 것이다. 형(힘이 있는 자)은 아우(힘없는 자)를 지켜야 한다. 형 가인은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이다.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고 무관심한 오늘의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하고 지금도 물으신다.
3.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 "아우의 핏소리가 내가 호소하느니라"(창 4:10)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레 17:11)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피는 곧 생명을 뜻한다. 생명은 오로지 새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파괴는 인간의 권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된다. 땅에 흘려진 피는 땅 속에 묻혀 있을 수 없다. 그 피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생명의 주님께 호소한다. 생명이란, 타인의 생명이건 자신의 생명이건,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생명인 자신을 파괴하는 자실행위도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핏소리가 내게(하나님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제 아무리 은밀히 행해진 범죄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4. 야웨의 보살핌이 없는 삶: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창 4:14)
아우 아벨을 죽인 살인자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은 땅이 저주를 받게되어, 농부인 가인에게 다시는 경작지의 소산이 없다는 것이다(창 3:11-12). 또 하나의 형벌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그에게는 거처없이 떠도는 생활만이 있다는 것이다(창 3:12). 그런데 가인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살인자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며 견딜 수 없나이다"(13절)하며 하소연한다. 가인은 주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호벽을 상실한 셈이다. 마치 양 떼들이 그들을 보호하던 울타리가 걷히므로 이리나 늑대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물러난 삶, 곧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없는 삶은 하나님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악한 세력(벧전 5:8)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5. 무릇 나를 만나는 자는 누구인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지금까지 언급된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4명 뿐이다.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되었으므로 3명만 남았을 뿐인데, 이들 3명 외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벨이 죽기까지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와 가인과 아벨 등 네 명만이 언급된 것은 그 때까지 이들 4명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성경은 이 네 사람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가인이 두려워하는 자가 아벨의 죽음에 대하여 복수를 꾀하는 아담의 다른 자손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추정에 지나지 않고 확인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언급된 4명의 등장인물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뿐이다. 성경은 "그들이 누구의 후손인가?"라는 우리의 호기심에 침묵한다.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에 대답하는 책이 아니며, 또한 성경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연극의 경우를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죄로 인하여 죽음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라는 주제의 연극무대가 막을 올렸다. 등장인물은 모든 인류다. 많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그 배우들 가운데 현재의 주인공들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다. 그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진다. 그러나 그 네 명의 주인공들 뒤에는 또 다른 많은 배우들이 서 있다. 아직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지 않아 관객들의 눈에는 그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들이 바로 성경에 전제된 "무릇 나를 만날 자"인 것이다.
6. 가인의 표: "가인에게 표를 주사"(창 4:15)
가인의 표가 '문신'이나 '머리모양'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추측들이 있지만, 그 표가 실제 어떤 것이 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표는 가인을 해하려는 자에게 그가 야웨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가인의 받은 표는 범죄자로서의 낙인이 아니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표이다. 이것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그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야웨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문책하시고 벌하시지만,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만큼은 보호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를 보호해 주심으로써, 피의 복수라는 악순환의 사슬을 근본적으로 막으시고, 어떠한 명분으로도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일 권리를 갖지 못하게 하시며, 모든 생명을 보호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7. 라멕의 노래: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 라멕을 위하여는 77배"(창 4:23-24)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을 일흔 일곱 갑절이다.
(창 3:23-24. 표준새번역)
에덴을 떠난 인간들의 파괴된 사회상이 라멕의 복수 노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덴에서의 타락(창 3장)과 형제살인(창 42장) 이후로 점차 심가해지는 죄의 양상과 무질서한 삶의 모습이 부각된다. 개역성경에서 "창상"(상처: 표준새번역)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폐짜"는 고작 타박상이나 멍이 들 정도의 위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년에게 타박상을 입혔다고 해서 라멕은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를 해하는 자는 그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가인의 7배와 비교하여 라멕의 경우는 77배로 증폭되었고, 가인의 경우 복수 수행을 야웨 하나님이 맡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라멕의 경우는 스스로 복수수행을 하겠다고 말한다. 복수는 야웨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보수(원수갚는 것)는 내것이라 … 내가 갚으리로다"(신 32:35; 참조, 롬 12:19). 또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또는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면배치된다(마 18:22). 낙원 밖에 있는 인간의 첫 작품은 형제살해였으며, 그 이후 죄는 점점 증대한다. 사소한 일로 하나님의 생명(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야웨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며, 인간 스스로 복수를 서슴치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품(낙원)을 떠난 인간은 악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5. 아담의 족보
(창 5장)
1.야웨의 종교는 인류의 원(原)종교: "그 때에 야웨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창 4:16-26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족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가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에서는 조상에 해당되는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여(4:16) 아주 포악한 보복살륙을 자랑하는 라멕의 노래로 끝맺는다(4:23-24). 이에 반해 셋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야웨 예배로 시작한다(4:26). 야웨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인 '셋'을 주심으로써, 구속사의 단절이라는 위기를 막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가신다. 셋의 후손인 '에노스'는 그 말뜻이 '인간/사람'이다. 여기에서 '에노스의 때', 즉 '인간의 때에 사람들이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은 인류의 생성과 더불어 야웨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야웨라는 이름이 모세에게서 비로소 이스라엘에게 계시되었지만(출 6:2-3), 야웨 종교는 인류의 역사 처음부터 있었다. 야웨 종교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원(原) 종교'이다.
2.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보존된다: "자기 형상과 같은"(창 5: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창세기 5:3은 대답한다.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을 낳았다는 언급은 타락한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유전되었다.
3.영생의 첫 그림자인 에녹: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창 5:24)
아담의 7대 후손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친밀한 교제를 뜻한다.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은 에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으며 살았고, 그 결과로 죽지 않았다. 동사 '라카크: 데려가다'(주어: 하나님, 목적어: 사람)는 피안적 생활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신학 용어이다(왕하 2:10; 시 49:15). 에녹은 후대의 엘리야처럼(왕하 2:1,9-11) 죽지않고 사라졌다. 에녹의 승천 이야기는 죽음의 세력에도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갖는 영생의 첫 그림자인 셈이다. 극소수의 경건한 자(예, 에녹, 엘리야)에게만 주어졌던 영생이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4.창조 원리에 순응하는 삶이 장수한다
성경은 선조들의 수명을 계산할 때, 아담에서 노아 사이는 700살에서 1000살로, 노아에서 아브라함 사이는 200살에서 600살로,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은 100살에서 200살로, 현재에는 70살에서 80살(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로 계산하고 있다. 창조 때의 출발점에서 멀어짐에 따라 인간의 본래적인 놀라운 생명력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는 죄에 의하여 작용된 죽음이 서서히 인간의 본래적인 신체적 저항력을 분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번 창 2:9에 관한 설명에서 지적하였듯이,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낙원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영생이 가능하도록 피조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력을 단축시켜 버린 셈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건강이나 생명 연장을 위하여 작은 노력을 총동원해 보지만, 실제적으로 큰 유익이 없어 보인다.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창조 원리)에 사람의 초점을 맞추어 살 때만,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6.홍수 이야기1
(창6장)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창 6:1-4)
이 본문은 구약 성경의 본문들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달들에 결혼하며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던 '용사'라는 자식을 낳았다는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르키는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의 인간들을 가리킨다. 이집트왕 바로(창 12:10-20)나 다윗왕(삼하 11장)처럼 남다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아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닥치는 대로) 여자를 취하는 등(창 6:2) 자기 욕심과 욕망대로 움직이는 도덕적 타락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에 대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여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처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하나님과 교제하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경건하지 못한(타락한) 가인의 후손들로 보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셋의 후손들은 점차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가인의 후손들과 동화되어 갔다.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죄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교제하며 통혼(通婚)까지 행하였다. 창 6:4은 당시에 많은 타락한 자들[네피림: 히브리어 동사 '나팔'(떨어지다)에서 유래했으며 문자적으로는 '(하늘에서 부터) 떨어진다'라는 뜻이다] 이 땅에 있었고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의 결혼 때문에 땅이 점점 더 타락하고 있었음을 가리켜 준다.
셋째,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킨다. 천상적 존재들(하나님의 아들들)과 지상적 존재들(사람의 딸들)의 결합으로 인하여 그 지상적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이라는 생명력이 본래 창조 때 의도되었던 것보다 지나치게 많이 부여됨으로써 창조 대 설정해 놓은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천상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갈라 놓았던 포괄적인 질서들이 파괴된 것이다. 전 피조 세계의 타락이 극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이렇게 만연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홍수라는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인류의 범죄는 한 남녀의 차원(창 3장)에서 시작하여 형제의 차원(창 4장)으로 진척되었고, 이는 어떤 특정 집단의 차원(창 4:23-24)으로 결국 온 인류의 차원(창 6:1-4)으로 확산되었다. 창 6:1-4의 본문은 죄의 확산의 극치를 보여준다. 즉 인간의 타락이 근단적으로 증대되어 그 파장어 마침내는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그리고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를 갈라놓는, 이른 바 가장 포괄적이고도 가장 근원적이며 가장 우주적인 질서까지도, 파괴한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인류는 하나님의 홍수 대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홍수는 인류의 죄가 극에 도달하였을 때 내린 불가피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2. 하나님의 한탄과 조심: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다음에 근심하시고"(창 6:6)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것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죄를 지을 것을 모르시고 사람을 지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생(사람)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사람의 아들)가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가 없으시다"(민 23:19; 삼상 15:29). 여기서 사용된 '한탄하다'라는 동사는 "유감으로 생각하다/고통스러워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라는 하나님의 강한 심정적 동요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멸절하려는 중대한 결정을 방관적이고 냉정한 무관심 속에서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인 대홍수는 하나님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창 6:8)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노아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언급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눈에 들어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선택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감추어진 비밀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죄의 정체가 신비로운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자비도 신비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4. 노아의 방주(창 6:14-22)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쓸어버린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창 6:13) 그 준비를 일러주신다(창 6:14,21).보통 방주(方舟)라고 알려져 있는 이 배의 히브리어 원어는 '상자'라는 뜻을 가진 '테바'이다. 이 단어는 출 2:3에서는 역청을 바른 왕골 갈대 상자를 가르킨다. 이 낱말은 모세의 구출 이야기와 여기의 홍수 이야기에서만 사용된다. 이 방주는 갓난 아기인 모세를 태워서 그의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쓰인 것과 같이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장치이다. 방주에는 조타 장치(운전대)가 없다. 이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은 오로지 방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와 보호하심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방주의 크기를 제시하실 뿐만 아니라 방주에 승선할 사람들의 명단을 일일이 부르셨다(6:18). 방주의 손님으로 초대된 사람들은 생명선에 탑승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방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탑승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방주인 교회도 하나님이 하나하나 부르셔서 모든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다.
7. 홍수 이야기 2
(창 7-8 장)
1. 노아의 의로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창 7:1)
우리말로 '의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짜디크'는 윤리적 의미의 '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면, 즉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그는 '의로운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로움(義)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계 개념이다: "아브람이 야웨를 믿으니 야웨께서 이를 그의 의(쩨다카)로 여기시고"(창 15:6).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마른 땅 위에 방주를 건조하라고 하는 명령에도(창 6:14) 한 마디의 질문도 그리고 반문도 없이 묵묵히 순복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계속해서 순종하였다는 점이 창 7:5 그리고 9절 등에도 언급되고 있다. 노아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데려가신 에녹같이(창 5: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다(창 6:9). 노아는 처음 시대의 마지막 인물로서 동시에 새 시대를 여는 자로서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후로는 아브라함만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노아에게 내려진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주 건조 명령은 일종의 순종과 신앙의 시험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히 11:7). 노아는 이성과 지성이라는 합리성의 걸림돌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므로 신앙의 시험을 통과하며 이로써 '의롭다'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2.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노아의 대홍수로 세상은 창조 이전의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창조 이전에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였다"(창 1:2). 혼돈의 물로 둘러싸여 있는 세상을 하나님은 하늘 한 가운데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었다(창 1:6-7).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하나님이 설치하신 궁창이라는 경계로 나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여서 질서를 갖춘 오늘과 같은 세계(Cosmos)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시 104:9). 그러나 대 홍수 사건으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져서 궁창 아래의 물이 솟구치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서 궁창 위의 물이 마구 쏟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숨쉬는 것들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빛의 창조로 밀려났던 태초의 혼돈(Chaos) 상태(창 1:2)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노아 때의 홍수는 우주 전체에 미치는 대재난인 것이다. 이는 전 세계 구조의 붕괴로서 피조 세계는 다시 혼돈 속에 빠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혼돈의 세력을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주의 질서가 세워지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고(창 6:12),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게 되어(6:11) 하나님의 우주 질서의 보존 노력에도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묶어 놓았던 혼돈의 세력(물)을 풀어놓았으며 이것은 곧 세상에게 심판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가 잠시라도 중단되면, 인간은 혼돈의 먹이가 되고 만다.
3. 대홍수 후의 첫 행위: "노아가 야웨를 위하여 단을 쌓고"(창 8:20)
노아의 가족은 홍수라는 대재난에서 구원된 후 먼저 단을 쌓았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온 세상을 멸하시는 가운데에서 노아와 그의 가정을 특별히 구원하여 주신데 대한 감사에 예배이다. 동시에 새롭게 얻은 삶을 계속 지켜 주실 것을 청하는 예배이다. 노아는 깨끗한 짐승 가운데서 희생 제물을 골라 번제로 바친다. 번제는 희생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이런 제사는 곧 제사 드리는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야웨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 8:21)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서 여기서만 나타난다. '희생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였다'라는 표현은 제사가 야웨께 받아 들여졌음을 의미한다(출 29:18; 레 1:9; 겔 20:41).
4. 하나님의 인내: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 제물을 받고 만족하시며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고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결심하게 된 동기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는 이것이 심판의 이유였다(창 6:5,11-13). 그러나 대홍수 이후에는 하나님 쪽에서 마음을 바꾸신다. 이전에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하셨지만, 이후에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런 심판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을 그의 악한 행위대로 벌한다면 아마 역사 속에서 노아 홍수 같은 심판은 매일매일 거듭되어야 할 것이다. 태어나면서 어려서부터 이미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악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홍수로써 온 세상을 쓸어버린 그 놀라운 힘을 종말에 이루어진 심판 때("땅이 있을 동안에는")까지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창 8:22). 인간의 죄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과 처벌 대신에 인간과 그의 잘못을 길이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5. 노아의 홍수가 갖는 의미
1) 노아의 홍수 심판은 죄의 결과이며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홍수는 자연적 재해나 재난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또한 종말의 날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다.
2) 노아의 홍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에 대한 은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은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이 드러난다.
3) 노아의 홍수는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죄가운데 죄를 의식도 못한 채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얻음을 지킨 사람은 심판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신앙은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가능케 한다.
8. 홍수 이야기 3
(창세기 9 장)
1. 새 시대의 새 축복(창 9:1)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의 첫 번째 창조 명령이 여전히 유효한가? 세상에 사람의 죄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홍수 심판을 받은 변화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창 9:1은 대답한다. 새로운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은 홍수 이전의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과 거의 같다. 새 시대에도 하나님의 축복은 가능한 것이다. 홍수로 말미암아 옛 시대는 심판 받아 물러갔고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으로 개시된다. 홍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축복은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댓가라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처음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사람은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늘 슬프고 불평하며 지내는 것이다.
2. 피조물 간의 평화가 사라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창 9: 3)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 중의 하나는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홍수 이전 사람에게 허락된 음식은 식물로 국한되었고, 모든 동물의 먹이도 식물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이제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창 9:2). 인간과 동물 사이에 유지되었던 평화 공존의 관계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종말의 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질 때, 피조물간에 있는 반목과 살생을 종식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노래하고 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사 11:6-8).
3. 생명은 하나님의 것: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으니라"(창 9: 6)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생명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침해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6절의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라는 본문을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을 통하여(히브리어: 베) 그 피를 흘릴 것이다"로 보아서, 살인자에 대한 사형 제도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본문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은) 사람 때문에(히브리어: 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본문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아니다. 모든 살인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든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든 간에, 하나님과 그 지배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고문을 포함한 일체의 폭력과 사형 제도까지도 이런 측면에서 새롭게 고려되고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4. 영원한 언약: "무지개"(창 9: 8-17)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 및 지상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체결하신다(9:9-10). 보통 언약계약이라 하며, 계약 당사자들 간에 서로의 의무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언약은 세속적인 언약과는 다르다. 인간들이 지켜야 할 내용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이 여기서 체결해 주신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모든 민족,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을 대표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그 은혜 언약의 한 파트너이다.
언약의 표지로 주어진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케쉐트로, 이 뜻은 원래 '활'을 의미한다. 일종의 무기였다. 이 무기는 고대 신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에누마 엘리쉬 등의 신화들에서 활은 전쟁의 신들의 무기였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구였다. 여기서는 신의 호전성과 적의를 나타내던 상징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표지가 된 것이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 감사드리게 되는 역할을 한다.
5. 노아의 실수와 자식들의 태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지라"(창 9: 21)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노아의 술취함은 그가 최초의 포도재배자였기에 포도주의 취하게 하는 성분에 대하여 몰랐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의 실수를 드러낸 사건이다. 노아는 벌거벗은 채로 술에 만취되어 누워 있었다. 함은 아버지의 수취(성기)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으나(9:22),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취를 보지 않고 옷으로 그 하체를 덮었다(9:23). 노아의 실수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서로 다른 태도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는 초점은 노아의 실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의 태도가 그 초점이다. 부모(여기서는 노아)가 실수로 인하여 그 인간적, 사회적 위엄을 상실하였을 때, 자식이 그 부모의 상실된 위엄을 변호하고 방어하며 새롭게 재건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보고", 또 형제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는 것이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 포기이다. 함은 그 책임을 포기하였으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가 손상된 것을 회복시켜 주려고 하였다. 부모(또는 어른, 백발의 노인)에 대한 효도와 존경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계명이며(제5계명, 출 20:12), 이 점이 왜 노아가 그를 모욕한 아들을 저주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장수의 축복과도 관련된다. 아무튼 여기서 또 하나 배우는 사실이 있다. 허물을 비난하는 사람은 저주의 나락에 떨어지지만,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축복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9. 바벨탑 사건(1)
(창세기 11 장)
1. 언어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심판(창 11:9)
창 11:1 "온 땅의 구음(사파)이 하나이요 언어(드바림)가 하나이었더라"에 의하면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원래 언어가 하나였다는 언어의 본질을 말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다양한 민족들이 생겨낳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시작하는 말이다. 언어가 다양해져서 인간들의 의사 소통이 단절된 것은 하나님과의 조화를 깨뜨린 결과이다. 사람들과의 언어의 다양성으로 인한 의사 소통의 단절은 감히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요 심판이다.
그런데 스바냐 3:9 - "그 때(종말의 때)에 내가(야웨) 열방(이방민족들)의 입술을 깨끗게하여(죄의 정화를 뜻하며 야웨 예배를 위한 전제가 됨) 그들(이방민족들)로 다 나 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섬기게 하리니" -에서 같이 종말의 때에는 언어로 인한 장애는 제거된다.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하나님을 믿는 모든 나라 사람들)과 함께 서로 의사가 소통이 되어 하나님 야웨를 섬기게 된다. 한 분이신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만이 인류의 언어로 인한 혼합을 제거할 수 있다. 이미 이 일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서 예시적으로 이루어졌다(행 2:1-13).
2. 인간의 교만: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
바벨탑 사건의 무대는 시날 평지이다. '시날'이란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전체(오늘의 이라크)를 가리킨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라는 표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발달된 문명을 암시한다. 건축 재료로 돌 대신에 진흙을 구어 만든 벽돌과 그 틈을 메꾸는 것으로 진흙 대신 역청이 사용된다. 이는 새로운 문명에로의 돌입을 의미한다. 역청을 발라 쌓아 올린 진흙의 벽돌 구조물들은 놀랄 만큼 견고하여 수천 년을 지탱하였다.
4절에서 사람들의 의도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도시(성)와 탑(대)을 쌓아 세워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한다. "하늘에 닿는다"라는 표현은 '아주 높은 위치'를 의미한다(신 1:28). 여기서 말하는 탑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를 말하는 것이다. 지구라트는 구운 벽돌로 높이 쌓아(약 91.5m 높이) 올린 피라미드 구조의 층계식 건축물로서 그 꼭대기에는 신전이나 제단이 있었다. 이렇게 높은 탑은 메소포타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간주되었다. 이 탑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그 꼭대기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제단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우리 이름을 내고"가 문제가 된다. 이를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짖자"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작명은 작명받는 자에 대한 작명자의 지배권(창 2:19-3:20)과 소유권(왕하 23:24)을 의미한다. 이들은 그 누구의 지배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는 진정한 작명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창 12:2; 삼하 7:9). 이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아보겠다는 자기 교만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교만과 오만이다.
10. 바벨탑 사건(2)
(창세기 11 장)
1. 하나님의 초월성과 위대성: "야웨께서 강림하셨더라"(창 9:6)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시려고 친히 내려오셨다는 본문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초월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하늘 높이에 탑을 쌓는다. 인간은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높이 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장면을 조사하시려고 한참(?) 내려오셔야만 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된다.
둘째, 하나님의 위대성이다.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의 거대한 건축 사업이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야웨 하나님의 천리안적(?) 눈에도 잘 포착되지도 않아서 야웨께서는 그것을 보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엄청난 프로젝트조차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교도 되지 못한다.
2. 하나님의 처벌은 동시에 보호조치이다: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창 11:6-7)
하나님이 없이 인간들끼리만 결합하게 될 때 인간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게 된다. 그 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을 정도의 방종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방치해 둘 경우 타락은 명약관화한 일이며, 분명히 더욱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처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더 혹독한 처벌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못할 일이 없는' 인간의 잘못된 단결은 인간을 멸망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사 소통의 수단인 언어를 혼잡케 하는 방법으로 거들을 처벌하신다. 언어의 혼란과 이로 인한 인류의 분산은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인 동시에 인류에 대한 보호조치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가진 한계선 안으로 인간을 되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벌은 큰 심판을 모면케 하는 일종의 하나님의 은총의 배려일 수도 있다.
3.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교만: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창 11:8-9)
하나님은 문명의 발달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시대 과학 지식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도시와 탑이라는 건축물을 파괴하지 않으셨고, 건축하는 사람들을 언어로 혼잡케 함으로써 흩으셨다.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명을 주도하는 인간의 성격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떠나려는 유혹이 강해진다. 문명의 발달이 하나님의 입지를 축소시킨다면, 그 문명은 바로 바벨의 문명이다. 이러한 문명을 세운 주체인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성을 쌓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중심적으로 도시, 국가 또는 세계를 건설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인류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과학 문명으로 우주까지 정복할지 몰라도, 그 과학 문명으로 인한 인간의 교만으로 인류가 자멸할 수도 있음을 앞질러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분문이다. 하나님 없는 모든 문명은 인류의 파괴만을 자초할 것이다.
11. 아브람의 소명과 실수
(창세기 12장)
1.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창 12:1)
창세기 1장부터 11장은 인류의 구원역사를 다룬 부분이다. 창세기 12장부터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족장들에 관하여 기록해주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족의 역사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바로 아브람의 소명 사건이다(창 12:1-3). 족장시대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그의 구원사역을 새롭게 시작하시는 때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류를 전체적으로 다루었으나 이 시대에는 특별히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인류의 구원이 한 사람의 선택으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아브람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창 12:4). 그가 이 나이가 되기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 아브람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철저히 침묵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이후의 삶이다. 이제부터의 삶이 아브람이 살아야 할 진정한 생애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본토는 아브람의 삶의 중심지인 고향이고, 친척과 아비 집은 그의 보호막이 되는 피를 나눈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과거 그가 몸담고 있던 지연공동체(地緣共同? : 본토)와 혈연공동체(血緣共同? : 친척, 아비집)를 벗어나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 이전의 아브람은 사람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간 자연인(自然人)이었다. 그러나 부름 이후의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인생을 건 신앙인(信仰人)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사건은 아브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가야할 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매순간 하나님의 손가락에만 의지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2.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
- 땅, 민족과 복의 근원(창 12:1-3)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지시하시지 않고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지만 여기에는 은혜로운 약속이 함께 주어진다. 이 약속에서 핵심적인 말은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축복/복"이란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소개되는 하나님의 축복(베라카)은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이것은 인간의 세상살이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장수, 부귀, 평안, 풍년의 수확, 자녀의 번성함 등을 말한다(창 24:35-36; 레 26:4-13). 구약성경은 이러한 축복을 제공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3절에서 다섯 번이 강조되는 "내가"라는 외침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인 땅의 소유, 민족의 형성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브람은 소유하고 있던 땅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온 유랑하는 형편에 놓여있었고, 약속받은 자의 아내 "사래"는 후손 번성의 가능성이 단절된 불임여성이었기 때문이다(창 11:30). 게다가 아브람은 자신의 정착지가 없이 길을 떠나는 "나그네(게르)"였다. 당시 나그네는 원주민들과 함께 살지만 아무런 법적인 보호나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원주민들이 베푸는 호의에만 의지하여 붙어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고아나 과부와 더불어 이런 나그네도 특별히 돌보도록 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이런 나그네 신분이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약속은 "믿음"없이는 받을 수 없으며(히 11:8),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진 일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한 목적이 세 번째 약속에서 드러난다. 아브람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한 자들은 이제 그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영적인 축복이든 물질적인 축복이든,
이러한 축복을 나누는 것이 "복의 근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나 가정, 특정 교파나 단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 축복을 내리시는 것이다.
3. 아브람의 순종 - "야웨의 말씀을 좇아갔고"(창 12:4)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였고, 불가능에 가까운 약속을 받아들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났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한 것이다. 믿음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4. 약속의 땅에서 쌓은 최초의 제단
- "야웨를 위하여 단을 쌓고" (창 12:7)
약속의 땅이 바로 가나안이었음은 7절이 일러주고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람이 한 최초의 행위는 야웨를 위하여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 홍수라는 심판에서 구원받은 후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을 최우선으로 한 것 같이(창 8:20) 아브람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아마 그는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언젠가는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단을 쌓은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의 첫걸음 닿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5.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 :
-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창 12:10)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10절에서는 기근이란 말을 두 번씩 씀으로써 아브람과 그의 가솔이 흉년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알려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가나안 지방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애굽으로 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창 41:54-57). 아브람도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향한다.
첫째, 여기서 아브람은 야웨께서 지시한 땅을 떠날 때, 먼저 그 일이 옳을 일인지를 한번쯤 야웨께 물었어야 했다. 야웨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던 사람이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자기의 뜻대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아브람이 먹거리를 해결할 곳으로 애굽을 택한 것도 잘못이다. 아무리 애굽에 먹거리가 풍성해도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곳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먹거리가 올무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을 애굽에서 종살이하게 만들뿐이다. 구약성경의 정신은 "향(向)애굽"이 아니라 "출(出)애굽"인 것이다(사 30:1-7).
6. 아브람의 실수로 인한 사래의 위기:
-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창 12:15)
굶어 죽지 않으려고 가나안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해간 아브람은 또 다른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한 아브람은 애굽의 국경에 왔을 때, 사래에게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한다(창 12:11-13). 사래는 침묵으로 동의한다.
이때 사래의 나이는 65세였다. 65세 할머니의 아름다움이 남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미(美)는 우리의 기준과는 달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호리호리한 젊은 여인이 아닌, 풍만하고 어머니다운 여인이 이상적 여인상을 대표했을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볼 때, 사래는 그 나이에도 아름답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위해 비굴하게 아내를 권력자에게 넘겨준다. 여기서 하나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아브람은 신앙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흔히 잘못을 저지르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체는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처신 때문에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위험에 빠졌으나, 하나님은 이에 적극 개입하셔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신다. 인간의 약점, 죄 혹은 제도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꺾지 못하며,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아브람의 언약(1)
(창세기 15장)
"쪼갠 동물 사이에 있는 언약"
1.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신 하나님 :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창세기 15장은 "이 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로 시작한다. "이후에"라는 말은 앞서 일어났던 사건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창세기 15장은 창세기 14장과 연결하여 읽을 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창세기 14장은 아브람의 전투를 보도한다. 이 전투에서 아브람은 그돌라오멜의 군대를 격파시키고, 그의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이 약탈해 간 재물들, 재산들 및 포로들을 되찾는다(창 14:16. 당시 싸움터의 승자에겐 전리품이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에서 전리품 하나 취하지 않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 "네게(소돔왕)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아브람)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고 하신 말씀에는 군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삼하 22:3,31; 시 3:4). 방패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마겐이라는 낱말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의 일종으로, 특히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시 3:4; 115:9-11). 사실 아브람이 최초의 전투에서 올린 승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의 방패이시다. 또한 상급이란 히브리어 사카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낱말은 본래 "용병들의 보수"를 의미한다. 에스겔 29:19에 의하면 특별히 그것은 "군사들의 노획물"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전투에서 어떤 노획물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아브람의 노획물, 즉 전리품(상급)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결국 아브람이 차지하게 된 것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된 것이다. 참 신앙인이란 땅의 것을 취할려고 혈안이 되기보다는, 하늘을 품으려고 넉넉한 마음을 쓰며 사는 자들이다.
2. 아브람의 항변 :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창 15:2)
아브람은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하고 질문한다. 사실 이 질문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직접 물은 최초의 물음이며 동시에 한탄조의 항변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는 자식이 없고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 기를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당연히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며 따지듯이 하나님께 말한다(창 15:2-3).
기원전 15세기 티그리스강 동부지대인 누지(Nuzi) 지역에서 발굴된 소위 누지문서에 의하면 자식이 없는 부부는 종이나 나그네를 입양해서 아들로 삼고, 그로 하여금 가문을 계승하고 양부모를 그들의 노경에 공양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장례를 치러주는 의무를 지는 대신 재산을 상속받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아브람은 당시의 합법적인 풍습으로 엘리에셀을 양자로 입양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브람은 몸은 매일 늙어가는데도 자식출생의 약속이 지연됨에 따라서 초조한 나머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편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아브람 같은 신앙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3. 하늘 바라보기 :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
아브람의 항변을 듣고 하나님은 그에게 친아들을 주실 것(4절)과 그의 자손이 셀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처럼 늘어날 것(5절)을 약속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는 초대는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하늘 바라보기를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창조주가 이루어 놓으신 넓디넓은 우주로 인간의 시야를 옮기라는 말씀이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절박한 위험 속에서도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탈출구가 보일 것이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웨에게서로다"(시 121:1-2).
4. 아브람의 의(義) : "아브람이 야웨를 믿으니 야웨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셨다. 본래 "의롭다" 또는 "의로 여기다"라는 말은 희생제물이 적합하게 봉헌되었음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제사장들의 제의적 용어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은 다르게 쓰인 것 같다. 아브람은 여기에서 희생제물을 드린 것도 아니다. 아브람은 실제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 없다. 다만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다. 의(쩨다카)란 말은 "관계개념"이다. 의는 결코 도덕적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관계에서 성실함을 인정받는 차원이다 :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너희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야웨 너희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쩨다카)이다"(신 24:13).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상호관계(사람과 사람/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바르게 처신하는 자에게. 그리고 이 상호관계로부터 부과되는 각종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자에게 의롭다(쩨다카)라는 말이 주어지는 것이다.
아브람은 자기 처지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관계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브람은 자기 수중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아브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다.
창세기 15장 6절의 본문은 기독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본문이다. 여기에서 "믿음을 통한 의로움(이신득의 : 以信得義)" 이라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5. 약속의 성취는 고난이후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되어 그들을 섬기겠고"(창 15:13)
창세기 15장 12-16절은 약속이 성취되기 이전에 아브람의 후손이 겪어야 할 어두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아브람의 후손이 사백년 동안 노예살이를 한 후에야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가나안의 아브람이 다시 가나안으로 그의 후손이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땅 약속의 성취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백년의 고통스러운 훈련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약속성취의 지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약속의 성취라는 열매는 고난을 먹고 자라는 법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고난이라는 덫을 통과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겪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는가!
6. 언약맺기 : "야웨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창 15:18)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람은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면서 반문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땅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언약의식을 준비시킨다. 명령에 따라서 동물들이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이게 되었고, 해가 지고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10절, 17절). 고대 중동 사람들은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동물을 잡아 쪼개놓고 계약당사자들이 그 사이로 지나감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 이유는 고기사이로 지나가는 자가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쪼갠 고기처럼 되는 저주를 감수하겠다는 맹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연기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바로 하나님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의식을 잃은 깊은 잠(타르테마)에 빠져 있었고(12절) 하나님만 토막난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계약을 위반할 때, 저주를 감수하겠다는 맹세를 하나님만 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과 언약(베리트)을 맺으신다는 말인가? 언약이라는 것은 모두 비슷한 자끼리 주고받는 약속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아브람에게 땅 약속의 성취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쏟아놓은 일방적인 서약이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13. 아브람의 언약(2)
(창세기 17장)
살에 새긴 영원한 언약
1. 전능한 하나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이라고 소개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 샤다이"는 최초의 헬라어 번역본 70인역을 따라서 흔히 영어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도 알 수는 없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서 이 엘 샤다이는 철저히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고 축복해주는 말씀과 함께 쓰이고 있다(창 17:1; 28:3; 35:11; 48:3). 여기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이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과 함께 나타내고 있다. 자녀생산이 불가능한 아브람과 사래의 부부에게 후손의 번성을 가능케 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명령은 첫째 "내 앞에서 행하라", 둘째 "완전하라"는 것이었다.
1) 내 앞에서 행하라: "내 앞에서 행한다"는 말은 원래 신하가 왕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이르는 전문용어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심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명하시는 것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점은 시편 139편에 잘 나타나 있다:
"야웨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야웨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2) 완전하라: "완전하라"는 뜻의 히브리어 타밈은 레위기 1장 3절("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타밈)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야웨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의 예배규정에서 '흠없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흠없는 제물같이 책망받을 것이 없는, 흠없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타밈이라는 낱말은 본래 "전적으로" 혹은 "온전한"을 뜻하지만, 도덕적 의미의 온전성/완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하라"는 의미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남김없이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전적으로 마음을 모두 바쳐 하나님께 속해 있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승천하게 되었다(창 6:24).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온전한 자(타밈)요,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하며 살다가 대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다(창 6:9). 아브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행하라"(할라크) 그리고 "완전하라"(타밈)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은 아브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 "너는 네 하나님 야웨 앞에 완전하라(타밈)"(신 18:13).
3. 아브람의 아멘 : "아브람이 엎드린대"(창 17: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 명령하신 다음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것을 선언하신다(2절). 그리고 후손이 번성케 되리라는 약속도 해주신다(2절). 아브람은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린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의 중동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것은 '말없는 복종' 혹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절'로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복종의 표시이며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램(아멘)의 표시이다.
4.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창 17:5)
하나님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신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인격과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치 새로운 왕이 추대되었을 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것처럼 과거와는 분리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높임을 받는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이다. 족장 아브람의 역할이 한 가족의 가장의 자리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위치로 확대된다. 모든 받는 자들의 조상(열국의 아비)이 되는 것이다.
5.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할례 :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언약체결을 약속하시고 그 표징으로서 남자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다(10절). 할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할례는 고대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이집트, 가나안 그리고 셈족사회에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 게르만족, 몽고족,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삼상 17:26; 삼하 1:20). 대체적으로 할례는 첫째, 의학적-위생적인 이유로 행했다. 성기를 청결하게 보존하고, 번식을 촉진시키며, 질병을 막으며, 성교를 용이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사회적인 이유로 성년이 되고 결혼 적령기에 이른 자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셋째, 종교적인 이유로 피를 흘리기 때문에 일종의 제사로 여겨지기도 하고, 악마를 쫓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할례는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렇게 쓰이는 경우는 성경 이외에는 없다. 할례란 본래 종교적 의미가 별로 없었던 관습이었으나 성경에서는 언약과 연결되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표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었다. 또한 성인 예식이었던 할례를 생후 8일만에 실시함으로써 언약백성의 일생전부가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나타내는 신앙의 행위가 되었다.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별된 자"라는 표시로서 민족일치의 상징이었고, 또한 헌신적인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체결은 할례를 통하여 일종의 징표가 되었다. 이 할례는 지울 수 없이 살에 새긴 영원한 언약의 표시이다 : "내 언약이 너희 살(남성의 성기에 대한 완곡한 표현)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13절).
6. 아브라함의 불 신앙 :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창 17:17)
아브라함(더 이상 아브람이 아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야웨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듣고 그만 웃어버린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웃은 것이다. 기쁨의 웃음인가, 놀람의 웃음인가 아니면 의심과 허무의 웃음인가? 아브라함이 속으로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웃음은 분명 불신앙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머리로는 아니 아브라함 같은 사람에게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7. 믿거나 말거나 :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창 17:19)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한다(18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정적인 신앙에 제동을 거신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어주고, "내 년 이맘때"(21절)에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 말씀을 마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고야 만다.
8.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줌 :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증대하여"(창 17:20)
하나님이 오로지 이삭만을 통해서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여 이스마엘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축복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축복하심으로써 그 역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과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는 자(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14. 하나님의 심방(창18장)
1. 나그네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아브라함 : "그들을 보라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2)
장막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달려가 영접하여 집안으로 맞아들인다. 이 사람 셋은 누구일까? 초대교회에서는 그들을 삼위일체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 한 분과 두명의 천사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창 더운 대낮이기에 휴식이 필요한 그들은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다(2절). 중동의 관습에서 서 있는 자세는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방법이었다. 창세기 18:2-8은 세 분의 나그네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접대를 자세히 묘사해준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그들을 향하여 "달려나갔다". 족장 이야기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처럼 서둘러 달려가서 나그네를 영접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이 나그네들은 초대받은 손님들도 아니었고, 아브라함은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는지도 모르고 접대한 것 같다. 그는 여행으로 지친 나그네들에게 늘 하던대로("보자, 곧 달려나가")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던 것이다. 후대의 히브리서 저자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말한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탈무드에 기록된 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천사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2.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 "그가 가라사대"(창 18:10)
아브라함이 접대한 대상은 분명 사람 셋(2절)이었다. 그들이 예기치 않았던 후한 대접을 받은 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손님이 주인에게 그 부인의 행방을 묻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로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절)한다. 여기서 "그"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히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13절에서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는 다름아닌 야웨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이 그들 세 나그네 중의 한 분으로 성육해 계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야웨 자신이였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야웨 앞에 그대로 섰더니"(2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머지 둘은 소돔으로 떠나고(19:1), 야웨 하나님은 그들과는 길을 달리하시고 아브라함과 독대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심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방! 오늘도 나그네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방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3. 사라의 수태고지(受胎告知)와 사라의 웃음 :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창 18:10+12)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수태를 고지한 때는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였다(창 17:24; 18:10). 사라는 이미 옛날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다(창 11:30). 게다가 지금은 폐경기의 여인이다. 사라가 아기를 낳는 일은 성관계, 임신, 출산으로 이어지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모든 사정을 염두에 둔 사라는 속으로 웃는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하였던가! 사라도 아브라함을 따라서 웃고 만다(창 17:17). 이 웃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의 표시였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오해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인데, 사라는 그것을 "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던 것이다(참고, 창 16:15).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와 "내가 낳을 것이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사라의 수태는 후자의 생물학적 임신이 아니라, 전자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임신인 것이다. "낳는다"는 내가 하는 일을 뜻하며, "이다"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능력만을 계산하였다는 데 있다. 인간의 절망을 하나님의 불가능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 "야웨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신앙이란 원래 인간의 상식적인 판단과 인식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지는 않는다. 신앙이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15. 소돔의 멸망(1)
(창 19장)
1. 심판하기 전의 마지막 심방 :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창 19:1)
창세기 18장 20-21절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시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두 천사가 소돔으로 파송된다. 하나님은 소돔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기에 앞서서 천사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소돔성을 심방하신 것이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이 두 명의 천사를 동반하여 아브라함에게 심방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창세기 19장의 소돔성 심방은 심판의 불가피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소돔성의 죄악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래도 다시 한번 이를 확인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심판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은 심사숙고하며 신중하게 처리하신다. 할 수 있으면 심판을 거두려고 애쓰시는 하나님과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고 심판을 재촉하는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소돔성의 사람들은 우리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2. 소돔성 심방의 의도 : "거리에서 경야하리라"(창 19:2)
아브라함이 손님을 극진히 접대하는 것 같이 롯도 손님 접대의 예절을 갖춘다. 그러나 롯의 초청을 천사들은 거절한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묵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레호브)란 보통 길이 이니라, 사방으로 뚫려서 이곳 저곳의 광경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넓은 광장이다(참조. 룻 4:1; 삼하 18:24; 왕하 7:1). 천사들이 소돔성에 온 것은 단순히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살펴서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성적 타락과 나그네에 대한 횡포 :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앞장에서는 "부르짖음"이르는 말로 요약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지은 죄의 특성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 노인까지도! - 모두 관계된 성적 타락("소돔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창 19:4)과 나그네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져버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횡포를 자행하는 죄악을 범한다.
1) 성적 타락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알게 하라"이다. 히브리어 "야다"(안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말은 성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창 4:1)에서 "동침하매"라는 말도 히브리어로 "야다"(안다)이다. 즉, 소돔 사람들이 그 나그네들을 상대로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는 뜻이다. 동성애(同性愛)를 벌이겠다는 것이다(삿 19:22). "소돔(Sodom)"이란 말에서 파생된 영어인 "소도미(Sodomy)"가 남색(男色, 남자끼리 하는 성행위)이나 동성애를 지칭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나그네에 대한 횡포
유대인들의 탈무드(Tosefta Sotah 3:11-12)는 이 본문을 다른 시각에서 풀이한다 : "소돔 사람들이 그 도시를 찾아 온 나그네들을 험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이다. 소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룩한 번영을 낯선 사람들과 결코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 도시를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소돔 사람들은 떼로 몰려가서 그들을 겁을 주고 내쫓을 작정이었다.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낯선 땅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나그네에게 도리어 횡포를 부린 데 있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손님 접대법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가 바로 그들의 죄였다. 소돔성은 "나그네를 영접치 않은 성읍"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다 :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여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나그네에 대한 원주민의 횡포! 못 가진 자에 대한 가진 자의 횡포! 이것이 그들의 죄악이었다.
16. 소돔의 멸망(2)
(창 19장)
1. 보호하려는 자가 도리어 보호를 받는 자로: "롯을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창 19:10)
롯은 자기가 모신 손님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는 소돔사람들의 공격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서서 자기의 두 딸을 무뢰한 자들에게 내어 주겠다고까지 제의한다. 이러한 롯의 제의는 전혀 해결할 길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롯은 자기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죄악에 이미 마음의 눈이 먼 소돔사람들은 롯을 해치고 폭력을 행하려 한다. 그 때 나그네들의 개입으로 그들의 눈이 멀게되어 롯의 집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롯은 목숨을 바쳐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보호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된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0:13)
2. 재촉하는 천사와 지체하는 롯: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롯이 지체하매"(창 19:15-16)
이제 소돔의 죄는 입증되었고, 소돔성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의 실체는 충분히 확증되었다. 확인절차는 끝났다. 형벌집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13절). 롯은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야웨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14절)고 경고한다. 그러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 이는 노아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노아의 가족은 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노아의 말을 진지하게 수용하여 구원을 받았다. 롯은 가정에서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천사는 롯의 가족들이 멸망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소돔성에서 빨리 떠나도록 재촉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롯은 지체한다. 결국 천사는 손으로 롯과 그의 가족들을 끌어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미련없이 고향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된다.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절박하게 애태우는 쪽은 천사이고 자신의 소유를 못내 아까와 하며 머뭇거리는 쪽은 인간들이다. 허무한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더 중요한 생명의 위협에는 무감각한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다.
3. 뒤돌아 보는 롯의 아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창 19:26)
천사들은 롯의 가족들에게 생명을 보존키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뛰어가라고 명령한다(17절). 천사들은 왜 뒤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을까? 이 이유는 하나님이 이 땅에 개입하셔서 직접 행동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행동을 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아내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은 잠(마취)에 빠지게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창 2:21).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진 다음이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창 15:12).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가능성과 그 심판을 면제받은 가능성만 있지,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을 구경할 수 있는 제3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혹의 아내는 하나님의 경고를 불신한 것이다. 롯의 아내는 마침내 소금기둥이 되어버린다. 소금기둥은 불신앙의 영혼을 가리키는 기념탑이다(솔로몬의 지혜서 10:4).
4. 딸에게 성폭행 당한 최초의 아버지 롯(창 19:30-38)
소돔성의 심판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롯과 두 딸뿐이었다. 그런데 소알성 근처 산 속 굴에서 롯의 두 딸이 번갈아가며 자기 아버지 롯을 겁탈(?)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롯은 자기 딸들에게 성폭행 당한 인류 최초의 아버지가 되는 치욕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생기게 된다(36-38절).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핏줄을 타고났건만, 끝내 아브라함의 후손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그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택했고(창 13:10-13), 도시에 안주했던 모습은 동굴에서의 마지막 생활과 대비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17. 사람을 두려워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을 두려워한 아비멜렉
(창 20장)
1. 아브라함의 나그네로서의 삶: "그랄에 우거하며"(창 20:1)
아브라함은 반(半)유목민으로 살았다. 완전한 유목민처럼 유랑만 하지는 않았고, 일년에 절반 가량은 유랑하며 보내고 그 나머지는 한 곳에 자리잡고 살았던 사람이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랄 지역도 정착지는 아니었고, 유랑지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본문은 그가 "그랄에 우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랄 지방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 신세였다. 당시의 나그네는 법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무고한 학대의 타켓이 되곤 하였다. 자신이 정착할 땅 한 조각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삶,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땅을 비롯한 인간적으로 힘이 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한 평생 쌓아올린 모든 기득권마저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인생의 주파수를 맞추어 살다보니, 세상의 수모와 푸대접, 위협과 회유를 당하는 나그네로서 산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이러한 삶을 살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2. 사라의 회춘(回春)?: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더니"(창 20:2)
당시에 부녀자를 납치하여 왕의 후궁으로 삼는 일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흔히 발생하는 풍습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에 대비하여 아내 사라에게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20:13)고 단단히 일러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이때 사라의 나이는 이미 90세가 넘었다(창 17:17). 90세가 넘은 할머니, 젊어서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가 아니었던가. 이미 노쇠한 그녀에게 여성다운 성적매력이 아직도 남아있었단 말인가?
이것에 대하여 랍비의 전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녀의 몸은 도로 젊어지게 되었고(回春), 그녀의 주름은 펴졌고 그리하여 그녀가 갖고 있던 본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는 여성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사라는 더 이상 석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임신할 수 있는 여인으로 회춘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기에 우리는 이를 흔히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신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3. 아비멜렉에게 내린 하나님의 사형선고: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라"(창 20:3)
고대사회에서 남의 부인을 취하는 행위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죄이며, 신성하게 공인된 법령을 어기는 행위였다. 이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부부관계를 깨뜨리는 간통행위는 고대 중동 전역에서도 '큰 죄'로 간주되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하게 하였느냐?"(창 20:9). 아비멜렉은 '남편이 있는 여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3절).
4. 간통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죄악: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창 20:6)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행위는 엄격하게 보면 아비멜렉과 사라의 주인(?)인 남편 아브라함과의 문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녀간의 간통사건을 하나님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행위라고 말씀하신다. 고대 중동지방의 법전은 간통의 문제를 가정과 가정, 아내의 주인이 되는 남편과 간통을 저지른 남자 사이의 문제로 다룬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간통은 사람에게 저지른 죄악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죄악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어기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뿌리치며 내뱉은 말에도 잘 나타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5. 최초의 선지자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창 20:7)
'선지자'라는 낱말은 히브리어로 '나비'이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가운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단어의 기원은 아직까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보통 아카디안어인 '나부'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나부'라는 말은 '부르다'(to call)라는 뜻이다. 이에 근거하여 나비(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one who receives the divine call)'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one who proclaims)'로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임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임무이다. 쉽게 말하면 예언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자이다. 양자의 중간 위치에 서 있는 자이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기도 하며, 때로는 백성을 위해서 그들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기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선지자로 불리는 이유는 아비멜렉을 위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중보기도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방인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였듯이 최초의 선지자 아브라함,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였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신 교회는 각 시대의 선지자적 임무를 감당해야 한다. 선지자적 임무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타협없이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아니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중보기도는 오늘날 다시 한 번 회복되어야 할 이 시대의 선지자적 임무인 동시에 의무이다.
6. 누가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창 20:11)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아비멜렉은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아뢰고 결국 사면(赦免)의 방법을 통보받는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왜 그런 거짓말을 하였는 지를 캐묻는다.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아내로 인하여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거짓말을 하였다고 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비단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경건한 심성과 태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가운데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은 도리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반면에 이방인인 가나안왕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였다: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창 20:8).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아비멜렉이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보다 권력과 재력을 갖춘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7.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창 20:12)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친척끼리는 물론이고 배다른 형제자매끼리도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근친결혼은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다윗의 배다른 자식들인 암논의 다말에 대한 성폭행사건 이야기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가능했음을 전제하고 있다: "내가 이 수치를 무릎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다윗)가 나(다말)를 네(암논)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삼하 13:13). 그러나 후대에 가서는 근친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너는 네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레 18:9).
아무튼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복누이인 사라와의 결혼은 흉이 될 것도 없고 또한 그의 말도 사실이었다. 즉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는 말은 사실(事實)이었다. 그러나 진실(眞實)은 아니었다. 진실은 사라가 지금은 더 이상 누이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알리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시험인 윤리와 도덕기준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험인 신앙인의 양심기준에는 함량미달이었다. 하나님은 겉사람(사실)보다는 속사람(진실)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웨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성경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의 비행과 실수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인간적 허물을 그대로 폭로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단점투성이인 인간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진행시키고 마침내 성취시키신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8. 구약의 골고다 모리아산에서의 승리
(창 22장)
1. 시험받는 믿음의 조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창세기 22장은 '그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 일'이란 창세기 21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21장에 의하면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이 출생하였으며, 그가 젖을 떼는 날(약 3세때 쯤) 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 21:8). 그런데 이삭을 위한 잔치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자식인 이스마엘을 집 밖으로 내어 쫓아야 하는 비극적 사건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여기에서 '그 일'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부자지간의 정을 끊고 그를 광야로 추방했던 시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22:1).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며 대답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시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반하여, 하나님이 개인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직 이 대목뿐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은 아브라함, 그런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단련시키시기 위하여 갖가지 위험과 시련을 보내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장애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2. "과거의 포기"도 부족해(?) "미래의 포기"까지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다(창 12:1). 그는 75년 동안 한 평생을 땀흘려 세워놓았던 과거의 모든 인간적 보호막을 송두리 채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삭이 누구인가! 25년만에 얻게 된 약속의 자손이 아닌가! 이스마엘을 내쫓은 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이삭을 제물로 잡아바쳐야 한다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과거를 포기시키신 후, 땅과 후손의 증대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약속하셨다(창12:1-3). 미래의 약속 가운데 처음으로 겨우 그 성취의 시작(이삭)을 맛보기 시작하였는데, 그 미래마저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미 100세가 넘은 아브라함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요 그의 모든 미래가 달려있는 이삭이 아니던가! 하나님에 의해서 과거를 포기했던 아브라함이 미래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다.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의 강도가 상식을 넘어서 파괴적일 정도로 냉혹하다. 보통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것이다. 시험의 강도도 믿음의 성숙도에 정비례하는가 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3. 철저한 침묵과 흔들림 없는 순종: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 22:3)
약속의 자식 이삭을 번제물로, 즉 통째로 불에 태워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직접한 말은 1절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것 외에는 한 마디도 없다. 소돔성의 멸망 앞에서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 18:23) 하며 하나님께 따지듯이 반문했던 아브라함이 이 대목에 와서는 이상하리 만큼 철저히 침묵한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자마자 모든 준비물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시하는 곳을 향하여 간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언반구도 반문하지 않고 곧바로 일체의 동요도 없이 결연한 모습으로 순종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웨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을 머리로 따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순종하며 하는 것이다.
4.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창 22:6)
이윽고 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다다른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단둘이 산에 오른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태울 때 사용되는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위험한 도구인 불과 칼을 들고 간다. 여기서 나오는 칼은 히브리어로 '마아켈레트'이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잘 쓰이지 않는 희귀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사기 19장 29절에서 죽은 시신을 열 두 덩어리로 나눌 때 사용된 예리한 칼과 같은 히브리어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들고 있는 칼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보통 칼이라기보다는 크고 묵직한 위험한 칼로 보인다(참조. 잠 30:14).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배려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식사랑을 엿볼 수 있다. 침묵의 행진을 깨뜨린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일한 대화는 제물로 바쳐져야 할 사람이 제물에 대하여 묻는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뿐이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22:7).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라고 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자신의 바람이자 아비로서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5. 이삭의 침묵과 복종: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잡고 잡으려 하더니"(창 22:9-10)
창세기 20장 1-19절은 보통 '아케다'라고 불린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아케다'란 히브리어 '아카드'('묶다'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었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한 마디씩의 대화 이후 계속해서 침묵이 흐른다. 아브라함의 무거운 침묵은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스스로 죽여서 제물로 드려야하는 아버지의 괴로움이 언어의 표현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리라. 아브라함은 말이 없다. 오직 움직일 뿐이다. 그것도 신속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9-10).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놀랍게도 이삭은 말없이 복종한다. 번제물이 어디 있느냐 하며 질문할 정도면 이삭은 제사의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을 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산길을 오를 때 땔감을 지고 올라갈 정도의 힘도 있는 상태였다. 100세가 넘은 힘없는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행동에 대하여 이삭은 얼마든지 물리적인 힘으로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복종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절대신뢰에서 비롯된 영화 같은 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 같다.
6. 다급해진 하나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
하나님의 천사는 급하게 아브라함을 두 번씩 부르며 이삭의 희생을 막는다. 1초만 늦었어도 어린 생명은 끝장났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바치는 희생제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와 복종이었다. 하나님은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삶을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가짐이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표현되는 선한 행실인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웨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7. 모리아의 사건과 골고다의 사건: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창 22:16-17)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곧 이어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주어진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22:16-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시험에서 승리한 것이다. 흔히 모리아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길은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via dolorosa)로 비유된다. 아브라함의 모리아의 길과 예수님의 골고다의 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골고다의 사건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듯이, 모리아의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재확인되는 축복이 주어졌다(창 12:1-3; 13:16; 15:5). 모리아 산은 구약의 골고다에 해당된다. 부활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잉태한 산물이다. 미래의 소망은 고난의 대가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고난은 소망을 향한 첫걸음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19.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의 매입
(창 23장)
1.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
사라는 일백 이십 칠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의 셈에 의하면 살만큼 살다가 간 나이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과 특별히 가깝게 사는 사람들은 상식을 뛰어 넘을 정도로 장수의 복을 누린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장수의 복을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심히 슬퍼하며 애통해 한다. 아마도 평생을 바라다가 얻는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간 사라의 인생살이가 아브라함의 슬픔을 더하게 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이삭이 그의 나이 마흔에 혼인하였으니(창 25:20) 사라는 이삭의 혼인 삼년 전에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자신을 추스리고 사라의 시체 앞에서 일어난다. 그는 사라를 묻을 땅을 찾는다. 그는 자신이 정착하고 있는 땅의 원주민인 헷 족속에게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설명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입니다". 한 평의 땅도 없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남의 땅에 살되, 합법적으로 사는 사람, 합법적으로 살기는 하되 자기 땅을 한 평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평생을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것을 이른바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이라 부른다. 기독교인은 땅에 매이지 않고, 이 땅에서 성공하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두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인이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믿음을 따라 본향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음박질하는 순례자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2. 나그네로 살면서도 인정받는 아브라함: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창 23:6)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자신의 희망사항을 겸손하게 밝힌다. 그는 나그네 신세로 땅이 없기 때문에, 아내 사라를 장사지낼 매장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헷 족속은 정중한 경의를 표하면서 아브라함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호칭은 존경의 호칭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한 평의 토지도 소유할 수 없는 남의 땅에 빌붙어 사는 처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사회에서 귀한 어른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 인간의 외적 형편보다는 그 사람의 생활태도가 그 사람의 값을 결정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나그네이지만 그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어른으로 높임을 받았다. 우리 자신이 처해있는 사실(현실)보다는 이에 대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3. 매장허락과 매매거부: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 23:6)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그는 나그네라는 신분 때문에 자기의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도 그 곳의 땅 주인인 원주민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4절에서 두 가지 요구사항을 허락해 달라고 원주민들에게 부탁한다: 첫째,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둘째,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게 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한다. 이러한 부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진다: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6절). 원주민이 사용하고 있는 어느 누구의 무덤이든지 한 곳을 택하여 무덤으로 쓰라는 이러한 대답은 첫 번째 부탁인 "사라의 매장을 허락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8절에서 이 점을 확실하게 해두려고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다: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그러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부탁은 거절된다.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매우 예외적인 호의를 베풀면서도 결국은 그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만큼은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은 자의 매장은 허락해 줄 수 있으나, 매장지를 위하여 토지를 소유하려는 토지매매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창 12:1-3). 그러나 그가 현재 발붙이고 서 있는 땅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이 아닌가(창 12:7).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직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땅 약속의 실현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약속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묵묵히 성취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이러한 자세가 참 신앙인의 모습이리라.
4. 아브라함의 끈질긴 매매요구: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창 23:9)
땅의 소유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꿈은 무산되었다.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방인이며 빌붙어 사는 나그네인 주제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굴복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매매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충분한 값)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의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8-9절). 값은 드릴 만큼 다 드릴 터이니 제발 굴을 팔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아내의 매장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손들에게 대대로 상속할 수 있는 땅의 확보가 보다 큰 관심사였다. 헷 사람들의 호의로 그들의 땅에 사라를 장사한다 하더라도 그곳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런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라 외에 아브라함(25:9), 이삭(35:29), 리브가와 레아(49:31), 그리고 야곱(50:13)도 여기에 안장되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과 후손들의 삶을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다시금 드러난다. 그는 인생의 반쪽인 아내의 죽음이라는 하늘이 내려앉는 개인적인 절망 속에서도 후손의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한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이라는 위기를 땅을 소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여긴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하는 문을 두드리게 하는 것이다. 위기 앞에서 절망하는 자에게 위기는 말 그대로 걸림돌이며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된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위기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5. 최초의 부동산 매매: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창 23:15)
아브라함의 절박한 요구를 알아차린 막벨라 굴의 주인인 에브론은 구입 희망자에 대하여 절대우위에 서서 흥정을 주도한다. 아브라함이 원래 의도했던 것은 막벨라 굴 하나에 대한 구입이었다. 그러나 에브론은 다음과 같이 운을 뗀다: "내가 그 밭은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11절). 막벨라 굴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그 굴을 둘러싸고 있는 밭도 함께 구입해야 한다는 매매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에브론의 말이 '굴과 밭'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동양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정을 위한 상투적인 표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15절에서 은 사백 세겔이라는 비교적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은 매매를 위한 흥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도 상인들은 '팔다'라는 노골적인 말을 회피한다. 이런 말은 고귀한 손님에게 모욕적인 언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리겠다', '선사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넓은 도량을 보임으로 손님을 더욱 붙잡아 놓는다. 이런 점잖은 말씨로 보아서, 아브라함은 값이 대단히 비쌀 것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굴과 밭'을 묶어서 함께 팔겠다는 에브론의 조건 제시에 아브라함은 울며 겨자먹는 식으로 동의한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13절). 이제 흥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바로 가격 결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땅 가진 자가 부르는 것이 가격인 셈이다. 에브론은 "은 사백 세겔짜리 땅이 저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하며 가격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며 상당한 액수를 제시했다.
당시의 가치개념이 오늘날과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액수를 현재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우리는 그 토지의 크기를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액수는 이후 성경에 나오는 부동산 매매가격과 비교하면 상당히 큰 돈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레미야가 밭을 살 때 지불했던 돈은 불과 은 17세겔에 지나지 않았고(렘 32:9),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할 때 은 50세겔을 지불하였다(삼하 24:24). 또한 오므리왕이 사마리아 전체를 건설하기 위해 샀던 지역도 다 합해서 은 6,000세겔(은 두 달란트) 뿐이었다(왕상 16:24).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전혀 흥정을 하지 않고 달라는 금액을 모두 지불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16절).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부동산 매매는 아브라함 편에서 본다면 손해가 막심한 부당한 거래였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세상살이였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 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한다면, 그는 참 신앙인의 반열에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내하며 오히려 이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 막벨라 굴의 매입이 갖는 의미
1) 하나님의 주신 약속이 당대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 삶을 바쳤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물로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의 성취가 가장 간절한 시점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취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의 처지로 상당한 가격을 치르면서 약속의 땅 가운데 한 조각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자기 당대에 보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약속을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 때에는 그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면 너의 때에는 경험할 수 있으리라"(참조. 창 50:24) 하며.
2)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부분적인 성취로도 볼 수 있다: 막벨라 굴을 매입한 일이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17:8)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도 해석된다. 약속 때문에 모든 것을 저버렸던 아브라함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약속된 땅의 아주 작은 부분(무덤의 토지)이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것도 합법적인 소유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마을 법정에서 모든 헷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23:18), 충분한 가격을 치르므로 '법적 소유권'을 공인받은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샀던 막벨라 땅은 약속된 가나안 땅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첫걸음이며, 믿음의 조상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자기 땅에 묻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차 그 약속이 완전히 실현될 것을 믿고 일찍이 그의 후손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한 지점을 정하고 거기에 그의 깃대를 꼽은 것이다.
20. 이삭의 짝짓기:1
(창 24장)
1. 이상한 맹세의식: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2절)
창세기 24장은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긴 본문이다. 이 본문은 요셉 이야기(창 37-50장)와 같이 한 편의 단편소설과도 같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브라함의 아 들 '이삭의 결혼'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죽었다. 이제 그도 나이가 많아 늙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으므로 부자가 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재산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남 았다. 바로 '이삭의 짝짓기'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 인 그의 충복을 부른다. 익명으로 나온 이 충복은 아마 아브라함이 한 때 자기 재 산 전부를 물려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던 엘리에셀이었을 것이다: "아브람이 가로 되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 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고 명령한 후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겠다"고 맹세하게 한다. '환도뼈'란 생식기를 의미한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주인의 생식기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하다니! 이 이상한 맹세의 식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생식기에 손을 넣고 맹세하는 것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생명의 근원에 맹세'시킴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하나의 관습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창 47:29-30).
둘째, 생식기는 생식력의 원천이다. 생식기 밑에 손을 넣는 것은 '후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식을 상징하는 남성의 중요한 부분에 손을 대고 맹세할 때에, 이를 어기는 자는 불임이 되거나 그 후손이 멸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창 24:41 "설혹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라는 말씀에는 맹세의 위반시 어떤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 다.
2.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 여 아내를 택하라"(창 24:4)
앞 장 창세기 23장에는 사라의 죽음과 장사지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 함은 죽은 자에 대한 그의 의무를 다한 후에 이제는 살아있는 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짝짓기가 그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 자기 아들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삭 만큼은 고향에 있는 친척과 결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풍습이었던 족내혼(族內婚)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요구는 단순히 이러한 풍습을 따 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으로 비롯되는 종교적인 혼합을 우 려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오염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들(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 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 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야웨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야웨 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이러한 그의 요구는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언 과도 같은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이미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넘겨주었다: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36절). 다음 장인 창세기 25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이 간략하게 언급된 이후(25:8), 이삭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24장의 서두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종에게 이것 저것을 명령 하였다. 그러나 그 종이 이 임무를 잘 감당하고 이삭의 짝을 찾아온 순간부터 아브 라함은 이 본문의 무대에서, 아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족장 아브라함 에서 족장 이삭으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수(壽)를 다 살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약속과 후손에 대한 약속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창세기 23장에서 사라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매입하여 땅의 약속의 터를 마련하였고, 창세기 24장에서는 이삭의 신부감을 맺어줌으로 후손 약속의 길을 터 놓은 셈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수를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인간으로서의 최선을 다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이끌고 가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하나 님의 일방적인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약속받은 자는 먼저 그 약속의 성취를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3. 아브라함이 제시한 신부감의 조건: 엑소더스(Exodus)할 수 있는 신앙인(창 24:7-8)
아브라함이 말한 이삭의 신부감으로서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아브라함의 고향에 서 색시를 고르되, 그곳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 오겠다고 하는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다(7-8절). 이 외에 다른 조건은 없다. 아브라함이 내세운 단 하나의 조건은 자신이 오래 전에 걸었던 길, 즉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의 여행길을 똑같이 걸어 올 수 있는 고향 여인이면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뒤를 계승할 인물로 고향 땅을 엑소더스 할 수 있는 신앙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 여족장인 사라를 계승하게 될 새로운 여족장(matriarch)은 선배와 같이 지금까지의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어맡기겠다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듯이,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신앙의 여인을 찾고 있다.
21. 이삭의 짝짓기:2
(창 24장)
4. 종이 생각하는 여족장의 조건: "아름다운 마음씨"
아브라함의 종은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성의 성 밖 우물 곁에 당도한 후 야웨 하나님께 기도한다. 기도 내용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며느리가 될 처녀를 쉽게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우물에 물 길으러 나오는 한 소녀에게 마실 물을 청할 때, 나그네인 그에게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그의 약대에게도 물을 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야웨께서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배필로 알겠다고 한다.
이 짤막한 기도에서 그가 찾는 여족장의 조건이 드러난다. 주인 아브라함이 제시한 며느리감의 조건은 '신앙' 하나 밖에 없었으나, 그의 종은 여기에다 '아름다운 마음씨'라는 또 하나의 조건을 덧붙인다. 그가 찾는 여성은 나그네에게 베푸는 친절한 마음, 자신의 것을 희생해서 남에게 주기를 자원하는 마음, 심지어 짐승들도 이해하고 돌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 진 여성을 찾은 것이다.
리브가라는 한 소녀는 이러한 조건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의 여성이었다. 여기에서 리브가의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급히'라는 말과 '배불리' 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 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18-19절). '급히'라는 말은 18절과 20절에 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는 리브가의 '활동성, 근면성, 적극성'을 보여주며, '배불리'라는 말은 그 소녀가 '인색하지 않고, 넓은 마음'을 갖고 있음을 가리킨다.
리브가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종이 기도한 조건에 들어 맞았고, 동시에 그녀가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의 손녀라는 사실(15+24절)은 아브라함이 찾는 조건에도 일치하였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들이 요구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미모'도 더불어 갖춘 여인을 짝지워주신 것이다. 리브가는 한 가정, 한 가문, 한 부족의 여족장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앙인들이 배우자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그 배우자가 하나님의 나라, 즉 본향을 향해 평생 함께 순례할 수 있는 신앙의 동지이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자이어야 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새삼 배우게 된 다.
5. 사람의 모든 삶에 은밀히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야웨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창 24:27)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리브가라는 한 소녀가 다름아닌 그의 주인의 친척임을 알았을 때 야웨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웨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였사오며 야웨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에 이르게 하였나이다"(27절). 늙은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음을 깨닫고 이를 감사하고 있다.
야웨 하나님은 주로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통해서 혹은 제의적 사건(예배현장)속에서 활동하시고, 또한 그렇게 알려져왔다. 이건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나지는 않아도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삶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삶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 점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 세상살이의 모든 면에 은밀히 개입하셔서 이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 창세기 24장의 중심주제로서 이러한 점이 강조되고 있다. 평범한 일 상생활이나 한 개인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않고 기도하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6. 맡은 일에 충실한 아브라함의 종: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 겠나이다"(창 24:33)
리브가의 집으로 초대된 늙은 종은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으로부터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는다: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밭과 그 종자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32-33절). 라반은 리브가가 선물로 받은 값진 장식물을 보고, 부유한 손님 을 잘 접대하기 위해 우물로 달려가서(30절), 그 종을 집으로 모셨다(31절). 이 때 아브라함의 종은 먹는 일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사실 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33절).
그는 34-49절에서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자가 된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소유를 아들에게 상속했으며, 그 아들의 배필 을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임무를 받아 그 자신이 그곳까지 오게 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우물가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야기하여 이삭과 리브가의 혼담이 단순히 인간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것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일이라는 사실이 가족들에게도 받아들여져서 이 혼담은 종의 의도대로 결정된다: "이 일이 야웨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야웨의 명대로 그(리브가)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절).
늙은 종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였다. 그는 한때 아브라함이 양자로 맞아들여 전 재산을 상속시키려고 지목했던 사람답다(창 15:2). 육신의 주인의 명령에도 이토록 충성스러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오늘의 성도들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의 우선 순위를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 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7. 기도하며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 이삭: "날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 가"(창 24:63)
63절의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아 '수아'는 그 뜻이 분명치 않다. 이 단어는 '묵상하다, 산책하다, 기도하다' 등 여러 가지로 옮겨진다. 여기서는 고대 역본(탈굼)이 번역한 '기도하다'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삭은 모친의 사망 후 그 자리를 메꾸어 줄 아내를 기다리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삭을 본 리브가는 종을 통하여 그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인 것을 알고 면박을 취하여 얼굴을 가리었다. 구약시대의 풍습에 따르면 이 면박은 결혼식장에 들어가서야 벗기게 된다. 이삭은 리브가를 그의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아내로 삼는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절). 리브가를 모친의 장막으로 들인 것은 그녀가 열국(列國)의 어미인 사라의 계승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22.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1)
(창 27장)
1.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축복: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 27:4)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삭은 그의 큰 아들 에서를 불러 사냥을 하여 그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한다. 축복을 하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기운을 마지막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한으로 잘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축복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혹은 축복행위와 연관된 일종의 종교의식일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창 48:9-16; 50:24). 본래 축복은 작별할 때(창 24:60)나 임종 때 주어졌다. 특히 임종 때의 축복은 윗대의 생명력이 다음대로 이어지는 것과 관계된다. 이제 생명이 끊어질 이삭이 자기의 모든 힘을 그 아들에게 넘겨주고자 한 것이다.
이삭이 말한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4절)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내 영혼(네페쉬)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이다. 여기에서 쓰인 히브리어 ‘네페쉬’는 헬라적인 인간 이해에서 비롯된 것처럼 영혼과 육체 혹은 영?육?혼처럼 인간을 구성하는 몇가지의 요소 중의 하나로서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을 2-3가지의 구성요소로 나누지 않으며, 인간은 나뉠 수 없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네페쉬 하야: a living being, 창 2:7)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그의 아들의 복을 요청한 것이다. 이삭은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의거하여 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으로 그가 받은 복을 그의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2. 여족장 리브가의 지나친 열심: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창 27:13)
초대 여족장 사라가 세 명의 천사와 아브라함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과 같이(창 18:10) 제 2대 여족장 리브가도 이삭과 에서가 나눈 말을 엿듣고(27:5) 장자 에서 대신 차남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꾸민다. 여기에서 행동의 주역은 야곱이 아니라 일을 꾸민 리브가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족장시대의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도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리브가는 신속히 계획을 짜놓고 야곱을 부른다. 리브가의 계획은 참으로 치밀하였다. 리브가는 에서가 사냥을 나간 동안 야곱을 불러 집에서 기르는 염소새끼를 잡아오도록 하고 그것으로 별미를 만들고,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야곱에게 에서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그리고 염소 새끼의 가죽을 매끈매끈한 야곱의 손과 목에 붙이고, 그가 요리한 별미와 떡을 야곱을 시켜서 이삭에게 들고 가게 한다. 야곱은 매끈매끈한 자신과 털이 많은 에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음모가 쉽게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아버지를 속이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어 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고 하면서 그녀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장자의 축복권을 둘러싼 음모와 사기극의 장본인으로 나선 여족장 리브가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브가의 행위는 그녀가 에서와 야곱을 잉태했을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뜻(“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고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는 것을 막으려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리브가는 거짓과 음모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다.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창 25:28)이 축복을 받게 하려는 비뚤어진 모성애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과 인간적인 열정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열정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하게 해서는 안v 된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좀 더 기다리고 지켜보아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신앙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야웨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3. 어머니보다 한 술 더 뜨는 야곱의 사기극: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창 27:19)
연출자 리브가, 주연 야곱, 조연 이삭의 ‘장자의 축복권 탈취’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주연의 등장과 함께 신분확인을 위한 조연의 질문이 시작된다.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야곱은 ‘맏아들 에서’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로 답변한다. 그때에 수상한 낌새를 눈치라도 챈 듯 이삭의 날카로운 두 번째 질문이 던져진다: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참으로 놀라운 거짓말이었다: “아버지의 하나님 야웨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다”(20절).
눈이 먼 사람을 속이는 일 자체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었다: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8). 그런데 야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거짓을 은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빙자하는 신성모독적 언사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은 권모술수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의 몫인가? 야곱의 이러한 반(反)윤리적 범법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창세기 27장의 저자는 야곱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야곱의 반윤리적인 범행을 옹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창세기 28장 이후의 이야기들은 야곱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도덕성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죄를 통해서도 성취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기준과 이성을 뛰어 넘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계획이 방해받도록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이 저질로 놓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밀고 나가시며 끝내 성취시키신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4. 이삭의 축복: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창 27:27)
야곱의 완벽한 사기극에 넘어간 이삭은 축복의식의 절차에 따라서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다. 이 의식의 첫 번째 단계는 축복받는 자를 확인하는 일이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절). 두 번째 단계는 식사하는 일이다: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25절). 세 번째 단계에서는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신체를 서로 접촉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리”(26절).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와서 축복의 말이 내린다: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27절). 이삭이 야곱이 입고 있는 옷의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축복을 선언하기 직전까지 야곱의 정체를 의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8-29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삭의 축복 내용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풍부한 양식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둘째는 정치적, 군사적 우위권이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9절 상반절). 셋째는 하나님의 보호이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9절 하반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축복의 내용보다는 축복의 주체이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에게 ---을 해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다. 축복의 주체는 이삭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제 수단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23.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2)
(창 27장)
1. 야곱에게 '베코라'와 '베라카'를 빼앗긴 에서: "그가 나를 속임이 두 번째이니다"(창 27:36)
형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를 위해 별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서는 그 별미를 가지고 가서 이삭의 축복을 기대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이삭은 심히 놀라 떨면서 분노했고, 에서는 방성대곡하였다.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에서는 맡아놓은 복을 빼앗겼다.
에서가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서는 이를 더욱 분통해 하고 있다. 첫번째 속임수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창세기 25장 29-34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에서는 수렵을 하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25:27). 야곱은 사냥하는 자들이 사냥에서 실패할 경우 육체적, 정신적 좌절에 쉽게 빠지는 심리적 약점을 노리고 있다가, 형 에서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이 기회를 포착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하였다.
에서는 동생이 요리하는 붉은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요리를 붉은 국(선지국)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그것이 붉은 콩죽(팥죽)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신이 크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야곱은 팥죽을 선지국으로 속여서 형에게서 장자의 상속권을 가로챈 것이다. 그는 상속권 이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에서의 맹세를 요구하였다: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25:33). 이러한 맹세가 없으면 상호협정이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맹세는 맹세하는 당사자에게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수 9:19). 이것이 에서가 야곱에게서 첫 번째로 속은 사건의 전모이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는 장자의 축복권마저도 빼앗겼다.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본문에서 사용된 '장자의 명분'은 히브리말로 '베코라'라고 하고, '복'은 '베라카'라고 한다. 에서는 비슷한 발음을 내는 두 가지 히브리말로 '베코라'도 속아서 빼앗겼고 '베라카'까지도 가로챔 당했음을 인상깊게 하소연하고 있다.
에서는 출생을 통해 주어진 장자의 상속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심했다가 동생 야곱에게 당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현실에만 안주하며, 미래지향적인 삶에 게을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퇴보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2. 에서에게도 주어진 '베라카':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창 27:36)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이 뒤늦게 이삭과 에서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몹시 당혹해 하였다. 비록 속임수로 준 축복이지만, 한번 준 축복은 확정적이며 철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에서는 부차적인 축복(베라카)만 받는다. 이삭은 다음과 같이 에서에게 축복한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에서가 받은 축복은 사건을 통한 일종의 예언으로 볼 수 있으며, 비록 기름지지 않은 척박한 초원지대라 할지라도 그 역시 살아갈 수 있고, 후일 그의 후손인 에돔족은 스스로 이스라엘(야곱의 후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이다(참조. 왕하 8:20-22). '베라카'는 야곱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에서에게도 '베라카'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축복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베라카는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서서 모든 이방인에게도 미치는 우주적인 은총이다. "하나님이 그 해(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3. 이삭과 리브가 가정의 파탄: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 27:45)
에서는 이 일로 앙심을 품고서 보통 7일(창 50:10)이 소요되는 아버지의 상이 끝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처럼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41절).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궁여지책으로 야곱을 도피시킨다. 리브가는 야곱의 도피장소로 자기 오빠 라반의 집을 택한다. 야곱을 떠나보내면서, 리브가는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라고 탄식한다. 만약 에서가 야곱을 죽게 되면, 형제를 살인한 에서를 친척들이 축출하거나 혹은 피의 복수가 자행되어 결국은 두 아들 모두가 죽게 되기 때문이다.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아들 둘을 잃는 것보다는 하나를 내보냄으로 숙명적인 형제 간의 유혈충돌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이 며칠 동안만 그의 오라버니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창 27:44-45), 그것이 2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걸렸고, 결국 그녀는 그토록 아끼는 아들 야곱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장자의 축복권을 둘러싼 형제 간의 암투는 한 가정의 불행으로 막을 내린다. 하나님의 열심을 앞지른 리브가의 열심이 결국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을 파탄으로 이르게 하였다.
24. 라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야곱(1)
(창 31장)
1. 능력보다 사랑: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불러다가"(창 31:4)
창세기 31장 4절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라반으로부터의 도주의사를 부인들에게 밝힌다. 야곱이 두 아내를 부르는 순서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라헬이 레아보다 앞서 있다(참조. 창 31:4). 레아는 라헬의 언니이며,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일부다처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야곱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그다지 부도덕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상의할 때에는 당연히 첫 번째 부인이 처음으로 거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헬을 선호한다. 레아는 야곱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넷이나 낳아 주었다(창 29:32-35). 라헬은 가까스로 한 명의 아들만 두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야웨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창 30:24).
당시 여성의 능력은 자식생산에 비례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레아는 능력있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무능한 라헬을 더 아낀다. 그는 능력 있는 레아보다 사랑하는 라헬을 더 챙긴다. 이는 라헬이 야곱의 첫 사랑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 3대 족장 야곱은 능력보다 사랑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는 능력보다 사랑을 택한 것이다. 물질주의가 꽉 들어찬 오늘날 정신적 가치(사랑)를 물질적 가치(능력)보다 앞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도들은 믿음의 조상 야곱의 후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 20년에 걸친 타향살이의 회고: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을 떠났다(창 28:10). 형의 복수심이 가라앉도록 몇 날 동안만 머물 것으로 생각했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타향살이는 어느덧 2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마침내 야곱은 라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결심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31:1)는 라반의 아들들의 고발을 야곱이 듣게 되었다. 둘째,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31:2)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에 대하여 라반의 태도가 달라졌다. 셋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31:3)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로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에게 라반에게서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지나온 20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회고의 핵심은 야곱이 있는 힘을 다하여 외삼촌이면서 장인인 라반의 일을 도왔지만, 라반은 야곱을 번번이 속이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쳤다는 말에 담겨져 있다. 그는 남의 일만 죽도록 하고 번번히 사기를 당하는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결코 지난 20년 동안의 머슴살이의 서러움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31:5).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였다"(31:7).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31:9). 야곱은 자신의 역경스러운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성도라면 누구나 지나간 삶을 신앙적으로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3. 작은 경건과 큰 축복: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창 31:13)
한 때 야곱은 집을 떠나 먼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달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창 27:43-44). 그 때 야곱은 홀홀단신으로 머나 먼 하란 지역을 향해 떠났다. 여행 도중 그는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에서 천사가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는 꿈 속에서 야웨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창 28:15). 야곱은 잠에서 깬 후 베고 잤던 돌을 기둥으로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올렸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웨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이것이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였다. 이 때 만난 분이 벧엘의 하나님이었다. 이 당시 야곱이 행한 일은 돌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소한 경건 행위를 기억하시어, 위기의 시점에서 축복으로 보답하셨다. 하나님은 벧엘에서의 약속 즉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기억해 내셨고, 드디어 야곱에게 그것을 허락하셨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31:13). 야곱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작은 정성, 작은 경건을 기뻐하시고 또한 그것을 기억하심으로 적절한 시점에 이르러 큰 축복으로 되돌려 주신다. 예수님 역시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크게 기뻐하셨다(막 13:41-44; 눅 21:1-4).
4. 친정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불만: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창 31:15)
남편 야곱의 회고를 들은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 라반에 대하여 자신들도 그 동안 눌러왔던 불만을 터트린다. 고대 중동사회 특히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에서는 약혼자가 장인에게 준 신부 몸값의 일부가 혼인 후에는 신부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에게서 그의 노동을 신부 몸값으로 받아 부유하게 되었지만, 딸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라반은 사실상 딸들을 팔아버린 꼴이 된 것이다. 딸의 결혼을 두고 아버지가 딸을 팔았다는 식의 심한 표현을 쓰는 경우는 구약성경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라반은 이기적인 아버지로 낙인 찍혔다. 사실, 라반의 처사는 당시의 결혼법을 무시한 것으로 딸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하였다.
한 사람의 물질적 욕심으로 자신이 낳고 키운 자식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게 되고 비난을 받게되는 슬픈 가족사를 보게 된다. 우리들의 가정에 악마적인 물욕(物慾)이 틈타서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주지했으면 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물질과 관계된 일로 성도의 가정이 몰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25. 라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야곱(2)
(창 31장)
1. 라헬의 엉덩이에 깔려 꼼짝 못하는 이방신상: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창 31:34)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 자신의 소유를 모두 챙겨서 가나안을 향하여 도망하였다. 유목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이 때가 되면 며칠동안 먹고 즐기며 잔치를 벌렸다(참조. 삼상 25:2-11; 삼하 13:23-24). 야곱과 그 가족이 이러한 중요한 잔치에서 제외된 것은 라반이 그들을 "남처럼 여겼다(개역: 외인으로 여기는 것, 15절)"는 레아와 라헬의 항의가 정당했음을 입증해 준다. 그런데 이 때가 라반의 눈길을 피해 야곱이 도주하기에는 최적기였다. 또한 라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Teraphim)을 훔쳤다: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깍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19절).
드라빔은 사람 모습대로 만든 신상(神像)으로(삼상 19:13-16) 받침대가 없고 라헬이 깔고 앉아 은닉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체였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34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정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믿고 섬겼던 우상을 말한다. 드라빔은 점을 칠 때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겔 21:21; 슥 10:2), 라헬은 그의 아버지가 야곱의 도주를 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에서 이것을 훔쳤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친정을 떠나는 마당에 아버지로부터 달리 얻어낼 것이 없어서 가정의 부와 안녕을 지켜 준다는 우상을 집어들고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고대 중동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집의 수호신을 훔치는 행위는 아주 심각한 일로 그 집의 유산을 탈취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야곱의 도망소식을 접한 라반은 곧 바로 추적하여 칠일만에 야곱과 만날 수 있었다. 라반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의 신 드라빔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나"(30절).
드디어 드라빔을 찾기 위한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헬은 약대 안장에 드라빔을 넣고 그 위에 올라 앉았다. 라헬은 생리 중이어서 일어나서 아버지를 영접할 수 없다고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참조. 레 19:32). 생리 중인 여자에 대해 레위기는 매우 엄격한 규정을 세워놓고 있다. 레위기 15장 20절에 보면 "그 불결할 동안(생리 중) 그의 누웠던 자리는 다 부정하며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이라 한다. 라반의 신은 약대 안장 속에 갇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구나 생리 중인 라헬의 몸에 닿아 부정을 타게 되었다. 여기에는 우상과 이방신상의 무기력과 허망함이 해학적으로 묘사된다. 우상들은 별 볼일이 없는 것들이다. 이에 비해 우리 하나님은 라반의 꿈 속에서도 나타나시어 야곱에 대한 그의 부당한 행위를 막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24절).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 "너희는 태초부터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여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이는 없다"(사 46:9).
2. 사기꾼의 사기당한 20년 세월: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창 31:41)
라헬의 기지(奇智) 때문에 라반은 결국 그의 신을 찾지 못했고 야곱은 위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도적으로 몰렸던 야곱은 이제 라반을 향하여 대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야곱은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라는 말로 라반에게 거칠게 항변하기 시작한다(36절).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보낸 지난 20년 동안의 삶은 더 이상 사기꾼의 삶은 아니었다. 참으로 성실한 자세로 적지 않은 손해도 감수하며 살아왔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39절; 참조. 출 22:12; 암 3:12). 그런데 그는 훨씬 고단수의 사기꾼을 만난 것이다. 그는 20년동안 갖은 압박과 설움을 참아가며 종살이를 했으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외삼촌의 두 딸과 양떼를 위하여 자그만치 20년 동안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해왔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40절). 그러나 외삼촌이 그를 속여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꿨다(7절; 41절). 외삼촌이자 장인에게 번번이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에게서 받은 압박과 설움, 특히 삯을 둘러싼 불의와 부정을 토로하며 분노하고 있다. 그는 힘없는 약자의 설움을 지난 20년 동안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다. 사기꾼이었던 야곱은 사기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철저히 배운다. 야곱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사기꾼이 아니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되었다(38-41절).
3. 약자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창 31:42)
계속되는 라반의 사기에 번번히 농락당한 야곱은 힘이 없는 약자이기에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힘을 통한 불법적인 노동력 착취가 자행되는 자리에서 억압당하는 약자의 입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나오는 부르짖음이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철저히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부르짖음을 듣는 분이 계시다: "야웨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출 3:7).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권력(힘)이 정의(올바름)를 압도하는 위험이 일정한 수위에 오르게 되면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약자 야곱을 대신하여 정의를 세워주셨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절).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동안 모은 재산과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친히 말씀하셨고, 라반이 뒤쫓아와 야곱을 해하고자 할 때에도 이를 막아주셨다: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절). 하나님은 마음씨 나쁜 힘센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땅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억울한 약자들을 사랑하신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시 146:6-9)
26. 형 에서와의 화해를 준비하는 야곱(1)
(창 32장)
1.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창 32:1)
여우같은 라반의 착취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빠져 나온 야곱은 이제 호랑이 같은 에서와 부딪혀야 할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자, 걱정과 근심에 싸이게 된다. 라반과 평화적으로 헤어진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을 만난다. 1절은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고 함으로써 야곱이 우연히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의도적으로 야곱을 만나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 시편 기자도 이 점을 분명히 노래하고 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을 만나주셔서 힘과 용기를 주신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복을 가로챘다가 오히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이방세계로 도피해야 했던 야곱이 벧엘에서 잠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은 꿈속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다(창 28:10-12).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타향에서 보내고 이제는 고향으로 향하며, 형 에서와의 화해를 염려하며 고민하는 야곱을 천사를 통하여 만나 주신 것이다. 이것이 야곱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 여정에 늘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오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적절히 도우신다.
2. 야곱의 참회와 용서를 구함: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창 32:4)
야곱은 형 에서가 있는 에돔벌 세일 땅으로 심부름꾼을 자기보다 먼저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창 32:4-5). 야곱은 에서를 과거처럼 형으로 부르지 않고 자기와는 격이 다른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주(主)'로 호칭한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결코 겉으로만 형의 환심을 사서 눈앞의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야곱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형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4-15절에 나열되어 있는 에서에게 바칠 엄청난 양의 가축들도 뇌물이라기보다는 참회의 표시로 보인다.
야곱은 더 이상 형과 다투는 경쟁자가 아니다. 또한 형을 속이는 사기꾼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옛날의 야곱이었다. 이제 막 에서 앞에 선 현재의 야곱은 형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과거의 야곱이었다면, 참회와 용서의 간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된 야곱이기에 가능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참회를 하며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의 간구는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3. 인간의 노력 그리고 기도: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창 32:11)
야곱은 심부름꾼을 형 에서에게 보내어 참회의 마음을 표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나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한다.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심부름꾼의 짤막한 보고는 야곱을 더욱 더 불안하게 하였다. 거친 세일 땅에서 다른 족속들과 생존의 사투를 벌이기 위해서 에서는 잘 훈련된 군사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언제나 그들을 대동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에 비해 야곱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은 전쟁을 대비한 강력한 군사 조직체라기보다는 야곱의 가축떼와 남녀 하인들 및 식솔들에 불과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해 오는 줄로 생각한 것 같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자 야곱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되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절). 형 에서와의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 야곱은 비상수단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한 종들과 가축들을 두 패로 나눈다. 에서가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를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7-8절). 이제 인간적으로 필요한 조처는 다 취한 셈이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한다. 9-12절까지의 본문이 그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야웨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9+11절). 그는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어 자신의 참회모습과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또한 모든 소유를 두 패로 나누는 등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도 간절히 요청했다.
불안과 초조함에 안절부절 하였던 야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했다. 우리도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도 더불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기도만 하고 나 자신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또는 반대로 제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며 행동(인간적 노력)하고, 행동하며 기도하는 것이 문제에 직면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4. 재산보다 화해: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창 32:13)
야곱은 자신의 소유 가운데서 형 에서에게 바칠 상당량의 예물을 따로 챙겨 놓는다. 여기에서 예물이란 히브리어로 '민하'이다. 이 단어는 친밀감과 존경을 표하는 '선물'(창 43:11, 15, 25-26)이나 제공자가 종속된 지위(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며 드리는 '공물'(삼하 8:2,6; 왕상 4:21)을 뜻한다. 본문에서 이 예물이 '선물'인지 '공물'인지는 이것을 받게 되는 에서의 판단에 맡겨진 듯 하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 진다해도 야곱에 대한 에서의 노여움이 풀어지면 그만이다. 이것은 화해의 제스쳐이기 때문이다(창 32:20).
야곱이 에서를 위해서 따로 떼어논 예물의 목록이 창세기 32장 14-15절에 열거된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 가축을 모두 합산하면 무려 550 마리에 이른다. 예물치곤 어마어마한 분량의 예물이다. 야곱은 인생의 황금기인 청장년기에, 그것도 20년 동안 종살이하며 모은 재산보다 피붙이인 형과의 화해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용서를 구하는 화해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진정한 화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성실히 지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한세대 한준희 서울신대 구약
빅뱅(Big Bang)?
Q. 빅뱅 (Big Bang, 대폭발) 이론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과학적 증거는 무엇입니까? (대구 배은재)
A. 빅뱅이론은 1974년 가모프가 원시원자이론을 확장하여 제안한 것으로 지금부터 100에서 200억년전에 1016K이상의 초고온과 1016g/cm3 이상의 초고밀도의 원초물질이 폭발하여 오늘날과 같은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증거로 적색편이 현상과 절대온도 3K 흑체배경복사 파장의 존재를 들고 있다. 3K 흑체배경복사는 1964년 벨연구소의 펜지아스와 윌슨이 고감도 전파망원경에 생기는 전파잡음의 원인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것을 프린스턴 대학의 로버트 디키와 제임스 피블스가 가모프의 대폭발에 의한 우주배경복사이론(5K의 배경복사를 예언)으로 설명하였다. 우주에는 수분의 1에서 50cm까지의 약하고 등방성이며 연속적인 파장을 가진 배경복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빅뱅이론에 대한 근거로서 이러한 것들이 채택될 수 있는가는 과학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먼저 빅뱅이론 내에서도 극도로 큰 적색편이 값을 갖는 퀘이사(Quasar)라고 알려진 천체에 대해 허블의 법칙(우주팽창이론)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3K 배경복사 현상을 설명하는 대안적인 여러 다른 이론들이 있어서 빅뱅(대폭발)의 잔재라고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첫째로, 빅뱅(대폭발)의 원초물질은 어디서 왔으며, 그 폭발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
둘째로, 허블의 적색편이 현상이 알려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관측에 의한 허블 상수는 일정치 않아 왔고 또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주 진화론자들이 우주의 나이를 계산할 때에는 허블 상수의 역수를 이용해 왔다. 그러므로 우주기원의 시점에 대한 계산은 정확할 수가 없다. 또한 허블이 우주팽창의 근거로 해석한 적색편이현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중력장에 의한 적색편이의 해석(아인슈타인의 해석)도 있다.
셋째로, 빅뱅이론은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자체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빅뱅이론에서(적색편이에 의해 추정할 때) 100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멀리 있는 천체의 경우, 빅뱅이론에 의하면 빅뱅 (대폭발)의 초기 상태이므로 은하 상태가 아니라 원시 성간물질의 형태이어야 하나, 관측에 의하면 완전한 형체를 가진 은하이다.
넷째로, 암흑물질의 문제이다.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관측가능한 물질의 양은 이론에서 필요로 하는 양의 10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다섯째로, 빅뱅이론에 의하면 다음 과정을 통하여 헬륨이 생겨난다.
(1) 중성자+양성자=중수소+광자 (2) 중수소+중수소=헬륨+중성자
(3) 중수소+중수소=삼중수소+양성자 (4) 중수소+삼중수소=헬륨+중성자
그런데 헬륨은 불활성 원소이어서 핵반응이 급격히 멈추게 된다. 따라서 가벼운 원소들, 즉 리듐, 베릴륨, 붕소등이 미량이 생길 뿐 무거운 원소들의 생성은 불가능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빅뱅 이론은 우주 기원론의 유력한 이론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완전히 옳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움말: 영남대 권진혁 교수)
창세기 5장
창세기 5:1-2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 5:3 아담(5:3 130세) - 셋(5:6 105세) - 에노스(5:9 90) - 게난(5:12 70세) - 마할랄렐(5:15 65세) - 야렛(5:18 162세) - 에녹(5:21 65세) - 므두셀라(5:25 187세) - 라멕(5:28 182세) - 노아(5:32 500세) - 셈, 함, 야벳
※ 아담이 창조된 후 셈의 출생까지 1556년(창세기 5:3-32)
창세기 11장
창세기 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11:10 100세; 홍수 후 2년) - 아르박삿(11:12 35세) - 셀라(11:14 30세) - 에벨(11:16 34세) - 벨렉(11:18 30세) - 르우(11:20 32세) - 스룩(11:22 30세) - 나홀(11:24 29세) - 데라(11:26 70세) - 아브람, 나홀, 하란
※ 셈의 출생부터 아브람의 출생까지 390년(창세기 11:10-26)
※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개명됨(17:5)
※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아담의 출현에서 아브람(아브라함)의 출생까지는 1946년의 세월이 흘렀다.
※ 아브라함의 출생이 B.C. 2166년(1990. 4. 25. 기독지혜사 발행. 라이프 성경의 성경인물연구 58쪽-60쪽 참조) 이었으므로 아담은 B.C. 4112년에 지상에 출현했다.
오늘이 2001년 12월 3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6,113년 전에 인류의 시조 아담은 지상에 출현한 것이 된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아브라함&사라-이삭(&리브가)-에서(야곱의 쌍둥이 형), 야곱(에서의 쌍둥이 동생)
야곱&레아(라헬의 언니), &라헬(레아의 동생), &실바(라헬의 시녀), &빌하(라헬의 시녀)
레아-①르우벤, ②시므온, ③레위, ④유다, ⑨잇사갈, ⑩스블론
⑪디나(女)
빌하-⑤단, ⑥납달리
실바-⑦갓, ⑧아셀
라헬-⑫요셉, ⑬베냐민
야곱의 아내들이 자식을 낳고 한 말들
레아-르우벤(29:32)(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레아-시므온(29:33)(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레아-레위(29:34)(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레아-유다(29:35)(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빌하-단(30:5)(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빌하-납달리(30:7)(내가 형과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
실바-갓(30:10)(복되도다)
실바-아셀(30:12)(기쁘도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하리로다)
레아-잇사갈(30:17)(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레아-스불론(30:19)(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라)
레아-디나(30:21)
라헬-요셉(30:23)(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유다 &(다말)(38:28-29)-베레스, 세라
예수의 世系1(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이-이삭-야곱-유다(&다말)-베레스-헤스론-람-아미나답-나손-살몬(&라합)-보아스(&룻)-오벳-이새-다윗(&우리야의아내)-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요람-웃시야-요담-아하스-히스기야-므낫세-아몬-요시야(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여고냐(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스알디엘-스룹바벨-아비훗-엘리아김-아소르-사독-아킴-엘리웃-엘르아살-맛단-야곱-요셉(&마리아)-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마 1: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예수의 世系2(누가복음 3:23-38)
하나님-아담-셋-에노스-가이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레멕-노아-셈-아박삿-가이난-살라-헤버-벨렉-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베레스-헤스론-아니-아미나답-나손-살몬-보아스-오벳-이새-다윗-나단-맛다다-멘나-멜레아-엘리아김-요남-요셉-유다-시므온-레위-맛닷-요림-엘리에서-예수-에르-엘마담-고삼-앗디-멜기-네리-스알디엘-스룹바벨-레사-요아난-요다-요섹-서머인-맛다디아-마앗-낙개-에슬리요-나훔-아모스-맛다디아-요셉-얀나-멜기-레위-맛닷-헬리-요셉-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마태복음서》 1장 1~16절과 《누가복음서》 3장 23~38절에 적혀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내려오면서 41명의 이름을, 누가는 예수로부터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77명의 이름을 들었다. 이 두 책의 공통점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요 약속된 자손임을 강조한 것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이 중요한 이름임을 나타낸 점이다. 두 책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마태는 유대인을, 누가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삼은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는 마태가 그리스도의 왕적(王的)인 특성을 나타내려고 한 데 반하여, 누가는 그리스도의 대사제(大司祭)적인 성격을 나타내려고 했다는 견해도 있다.
다까바시마오 저, 한영철 역
1.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2.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3.<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4.하와(여자)는 아담(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는가?
5.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6.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7.<길가메슈 서사시>란 무엇인가?.
8.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10.<족장설화>에서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11.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12.왜,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13.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누이인가.
14.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16.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17.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8.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1.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창세기가 전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 야훼가 땅과 하늘을 만들었을 때 땅에는 아직 들에는 나무 한 포기 없고 풀도 없었다. 하나님은 땅에 인간 의 죄악이 가득 찬 것을 알고 땅에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고 분히 여겨 땅에 홍수를 일으켜 세상의 생명이 있는 모 든 피조물을 멸망시켰다.
홍수는 40일간 계속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에 탄 노아와 그 가족과 각종 동물의 한 쌍씩만이 구원되어 아라랏산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아들들을 축복했다. 이윽고 피조물들이 다시 번창하여 인류는 동쪽 슈메르 땅에 정주하게 되었다. 그 때 온 세상은 말이 같았다. 그들은 불손하게도 벽돌로 하늘에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 설하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제까지 모두 하나의 백성 하나의 말이었던 그들의 말을 혼란하게 하여 서로 말이 통 하지 않도록 하고, 그들을 그 땅에서 온 세상에 흩어지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도시를 세우는 일을 중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디아인이며 우르에 살았으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고향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온 가족과 가산을 거느리고 이주하였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신앙과 그 명령에 대 한 복종이 모범적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의하여 그 자손이 번창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아브라함과 늙은 아내 사라 사이에 오랜 기도가 효험하여 장 자 이삭이 태어나고 이삭이 그 뒤를 계승한다. 이삭은 레베카와 결혼하고 에서와 야곱의 쌍동이를 낳는다. 그 아이들이 장성하여 형 에서는 사냥을 잘해서 들에서 사는 청년이 되고 동생 야곱은 내성적이어서 집안에 만 묻혀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 이삭은 잡아오는 짐승의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사랑했다. 어느날 동생 야곱은 계략을 꾸며서 형 에서에게서 장자 권과 부친 이삭의 분노를 사서 동쪽에 있는 친척 라반에게 로 도망갔다.
야곱은 라반의 두 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어 가나안으로 돌아온다. 야곱은 또한 길르앗에서 흘러 요르단강으로 들어가는 얍복 개울을 건너 하나님과 씨름을 하고 이겼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다>의뜻) 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이 주어졌다.
민간 어원적 설명에 의하면 이것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의 유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및 야곱의 열두 아들들 의 4대는 족장이라고 해서, 모두 유목민의 족장이었다. 그 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열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12 부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2. 성서의 모델은 이집트인가 메소포타미아인가
창세기라는 이름은 70 인역에서 나온 것이며, 창세기 2 장4절의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창조하신) 순서는 위와 같다>는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히브리어 원전의 명칭은 1장 1절의 <베레시스>(<태초에>라는 뜻)라는 어휘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말 성서 의 창세기라는 명칭은 한문 성서에 유래된 것이다. 현존하는 창세기는 적어도 시대를 달리하는 세 가지 주요 사료층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 즉,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로 돼있는 야훼이스트 사료층, 하나님의 이름이 에로힘 으로 돼있는 제사적 사료층의 세 가지이다. 이것은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포로 후, 기원전 5 세기에 모세 5경 전체를 편찬한 제사학파에 의하여 기록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제사학파의 기록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정리하고 지키기 위해서 계보, 연대, 날짜, 통계 등의 객관적인 기록을 즐 겨 쓰고 모든 사료를 편찬하는 기준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문체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하나 깊은 신학적 통찰은 야훼 이스트 사료와 에로히스트 사료층이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성립 당초의 유대교단의 신앙이 숨겨 져 있다.
제사학파에 유래되는 사료층 안에는 상당히 오래된 사료도 들어있다.
내용은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역사(1장-11장), 족장들 의 역사(12장 -50장)으로 돼있다. 전자는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카인과 아벨, 아담의 계보, 홍수와 노아의 자손, 바벨탑과 셈의 계보, 후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전설, 야곱의 전설, 요셉의 전설 등으로 돼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4절 전반의 천지 창조설은 제사적 사료층에 의한 것이며, 그 원형은 <위로는 하늘의 이 름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없을 때에>하는 구 절로 시작되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하 <에누마. 에리슈 신화>였다고 생각된다. 창세기 3장에는 낙원의 상실이 얘기되어 있으며, 이것 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는 이야기이며, 메소포타미아의 전승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3장은 도덕적 종교적 통창이 대단히 깊고 구약성서 중 에서도 가장 훌륭한 부분의 하나이며, 어느 구약성서는 창세기 중의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불사와 금단의 열매에 관한 부분과 흡사한 내용을 가지 고 있는 점토판 문서가 이집트 제18 왕조의 이단왕 아벤 호테프 4세(BC 14세기)가 아멘신의 수도 테베의 하류에 세운 새로운 수도 아케토아텐, 현지명 텔.엘-아마르나와 앗시리아 왕 앗슐바니팔이 니네베에 건설한 왕 궁 부속의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되었다. 이것은 <아다파전설.이라고 불려진다. 그 대충 줄거리 는 지혜의 신 에아가 자기 종을 삼기 위해서 아다파라는 원인을 인간의 모습을 닮게 만들었다. 에아에 의하여 초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된 이 아다파가 에아의 질투 때문에 영생의 음식을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학자는 이 이야기가 3장의 원형이라고 하고 야훼 이스트가 그것을 순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소재 는 메소포타미아로 소급된다 할지라도 제한된 적은 사료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3. <성서>의 첫 부분에 숨겨진 신비
성서 중에는 <주해자의 십자가>라고 일러지는 난해한 부분이 적지 않다. 성서의 첫 부분에 있는 창세기 1장 13절은 그 첫 번째 것이다. 창세기 1-2장은 천지 만물의 창조의 기사이며, 1장1절- 2장 4절상과 2장 4절하-2장25절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고, 그 어휘, 문장, 사상 등으로 보아 전자는 제사적 사료층이고 후자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첫머리의 1장1절과 2,3절의 관계에 관해서 최근에 많은 연구가 있다. 우선 여기서 원문을 보자
(1)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였다. (2)땅 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나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여기서 제1절은 표제적 성격을 갖는 독립 구절이라고 보 는 전통적 해석이 일반적이고, 제2절에서 창조의 설명이 전개되고 창조의 소재인<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은 깊은 물> 이 어디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제사적 사료층은 창조를 무와 유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혼돈과 질서의 대립에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해석자는 제1절을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독립 구절이 아니라, 3절의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하는 구절의 종속절이라고 해석한다. 2절은 상황 설명의 도입 구절, 3절은 주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성은 2장4절하-6절(야웨이스트 사료 층)의.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 땅에는 아직 아무 나무도 없었고 풀도 돋아나지 않았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직 땅에 비를 내리지 않으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마침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시었다>는 구절과 바빌로니아의 창조 신화 <에누마. 에리슈.의 첫머리의 한 구절 <위에는 하늘의 이름 이 없고 아래로는 땅의 이름이 아직 없었을 때.>하는 것과 같이 이 부분도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 에, 땅에는 아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구약성서의 창조 설화에는 내용적으로 바빌로니아 신화의 다신교적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 1장1절의 어순은 히브리어 원전에는 다음과 같이 돼있다. 숫자는 번역의 순서이다.
8 7 1 3 2 4 6 5
태초에 . 창조하셨다 . 하나님(이) . 을 . 하늘 . 그리고 을 . 땅
(<하나님>은 명사. 남성. 복수. 형이 복수이며 의미가 단수인 것을 <경외의 복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경우 짝을 만들어 주리라> 그래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다음, 아담의 갈빗대를 하나 뽑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고는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려 오자 아담 은 이렇게 외쳤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지아비에게서 나왔으니 지어미라고 부르리라!"
그래서 남자는 어버이를 떠나 아내와 어울려 한 몸이 되 게 되었다. 아담 내외는 알몸이면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창세기 2장7-25절) 이것은 야훼이스트 사료층의 창세기의 일부이다. 구약성서는 여러 시대를 통해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왔다. 유럽 중세기에는 <하와가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보다 못하다>고 하는 속된 생각이 있었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성향을 갖는 하와는 남자보다 짐승 에 가까운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인가보다. 창세기에 의하면 낙원에서 사는 아담과 하와는 알몸이었을 것이다. 알몸의 남녀(이것은 왼쪽에 아담이, 오른 쪽에 하와가 있는 것이 보통이다)사이에 뱀이 서려있 는 나무가 서있는(고대 그리스나 서아시아에서는 유혹을 상징했다)그림이 3세기초에 나타났다. 그것은 1920년 에 우연히 발견된 투라. 유로포스(북시리아의 안타오키아와 세르키아 사이)의 <그리스도교도의 집>의 세례실의 벽화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상실의 서막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로마의 라테라노 미술관 소장의 3-4세기의 석관 부조의 <하와의 창조> 장면의 묘사에도 보인다. 여기서 는 아담이 누워있고 그 발치에 하와가 서 있다. <뱀의 유혹>이 미술의 테마로서 중세를 통해서 취급되었는데 <하와의 창조>는 9세기경부터 다시 취급되고, 13 세기부터는 신학적 의의 때문에 아담의 창조 이상으로 자 주 취급되었다.
그럼 중세기의 속된 생각처럼, 하와는 과연 아담의 왼쪽 갈빗대로 만들어진 것일까. 성서는 하와가 아담의 어느쪽 갈빗대로 만들어졌다는 언급은 없다. 아담이 깊이 잠든 사 이에 야훼 하나님이 아담의 갈빗대를 뽑아 만들었다고 만 했다. 하와는 아담의 심장과 평행으로 있는 갈빗대로 만든 것이므로 하와와 아담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동등 하며 사회적으로 평등하다. 시각 예술의 면에서는 아담의 오른 쪽 갈빗대에서 하와가 만들어지는 장면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한다. 서양 미술에 있어서 오른쪽과 왼쪽은 무엇을 의미할까.
5. 바벨탑은 어디 있었는가
창세기 11장 1-9절은 바벨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 하고 있다.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 있었다. 물론 낱말도 같았다. .야훼게서 땅에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당장 땅에 내려가서 사람들이 쓰는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해야겠다" 야훼께서는 사람들을 거기에서 온 땅을 흩으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도시를 세우던 일을 그만 두었다.
야훼께서 온 세상의 말을 거기에서 뒤섞어 놓아 사람들 을 온 땅에 흩으셨다고 해서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혼란이라는 뜻)이라고 불렀다. 탑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바빌론 제1왕조(BC 19-16세기) 시대에 바빌론 주변에 세워진 인공의 거대한 산, 즉 지그라드의 하나이다. 그 정상에는 제사 때에 신이 하늘에 서 강림했다고 생각되었다. 헤브라이어의 바벨은 바빌리의 변음이며 바빌리안 앗카도어로 <신의 문>이라는 뜻이며 원래는 도시 이름이었던 것이 뒤에 그리스어로 바뷸론이라고 불리게 되고, 다시 그 지방 일대가 바빌로니아라고 부르게 됐다. 이층탑은 메소포타미아 제 도시의 주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지고 파라밋 형태를 이루고 큰 토대 위에 보통은 7층으로 쌓아올린 햇빛에 말린 벽돌로 돼있으며 각층 은 경사지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최상층에는 신전이 설치 되어있고 거기서 희생을 드리는 의식이 거행된다.
고대의 우르(현대명 텔. 엘. 무카이아르)나둘. 운탄(현 대명 초가.잔빌)의 층탑은 특히 유명하다. 구약성서의 바벨탑은 바빌론의 유적 발굴조사의 결과 바빌론의 도성 마르둑의 신전 에사길라(<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이라는 뜻)의 북방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토대의 집>이라는 뜻)라고 하는 층탑으로 동정되어 있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이었으나 셈족의 침입으로 정치적 변동이 일어나 준공하지 못하고 그 미완성의 층탑은 오랫동안 고대 세계의 수수께끼의 하나였다.
그후 재건이 시도됐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하고 겨우 기원전 6세기에 느브갓네살 2세(BC 604-562)에 의하여 수축되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성벽도 이때 축조된 것이라고 한다. 바벨탑 설화는 야훼이스트 사료층에 속하며, 단순히 지명의 유래를 설명하는 민간 어원이나 전설이 아니라 인간의 오만이 인간 상호간의 몰이해를 빚어내어 탑 건축 이 중단된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의도는 바빌론의 탑의 기원에 빙자해서 홍수 후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에게 도전하려고 하는 인간의 오만에 대 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러시아 문호 도스토엡스키(1821-1881)는 <카라마조프의 형제>(1867-1880)에서 인간의 가공한 바벨탑의 건축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6. 점토판에 새겨진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원형
1872년 가을, 당시 런던의 대영박물관의 유물 수리인으로 있던 죠지 스미드(1840-1876)는 1853년에 모슬 주 재 영국 부영사의 동생 H.랫삼(1826-1910)이 니느웨의 앗슐. 바니발 왕(BC668-626)의 왕궁 부속 도서관 자리에서 출토한 점토판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중에서 한 단편의 기록이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기록돼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J사료층, P사료층에 들어 있는 것이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와 흡수한 것을 발견하고, 동년 12월에 새로 창설된 <성서 고고학회>에서 그것을 보고했다. 이 보고는 각계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대단한 평판을 받았다.
이것이 <길가메슈 서사시>의 본래의 부분인지 여부는 별 문제로 치고, 이것이 후일에 <길가메슈 서사시>의 제11 서판의 일부라는 것이 알려지고, <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최대의 에피소드로서 각광을 받은 서판의 발견이 되었다. 죠지.스미드는 대영박물관에서 <앗사리아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H.C. 롤링손이 간행한 착 쐐기꼴 글자 도판의 제작 등을 도우면서 당시 알려져 있던 쇄기꼴 글자의 구조를 알게 되고 점토판 위에 기록된 고대 문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는 그때의 광경을 변견 후 4년째인 1876 년에 출판한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이 단편들(랏삼이 니느웨에서 발굴한 점토판 문서의 일부)의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후에 나는 반조각이 된 묘한 서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처음에는 분명히 여섯 난으로 된 것이었다. 그 셋째 난을 보자 나는 배가 니시르 산에 닿았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낸 일, 그것이 내려앉을 곳이 없어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곧 이것이 <대홍수>의 갈디아(지 리적으로는 바빌로니아와 같다)판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죠지. 스미드는 신문사 등의 후원으로 다음 해 1873년 초에 현재 니느웨로 갈 수 있게 되어 1873년과 74년의 2회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지휘하고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또다시 홍수 설화의 일부가 되는 대량의 점토판들 을 발견하였다. 그는 먼저 발견한 서판이 12매의 서판 으로 된 대문학 작품의 일부라는 것도 알았다. 이것은 어는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서사시라는 것을 알 았으나 세개의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주인공의 이름을 쉽게 해독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창세기 10장8절에 보이는 영웅 나므롯이다.
엔키두는 우르크로 내려와서 그곳 생활 양식을 익힌다. 양자는 우르크시의 성문에서 격투를 한다. 서로 상대의 힘을 알고 우정을 맺어 그후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가 되고 힘을 합해서 모험을 하게 된다.
길가메슈는 엔키두에게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할 계획을 의논한다. 결국 두 사람은 우르크의 장로들과 의논해서 여행의 수호신과 태양신 샤마슈의 허락을 받고 측백나무 숲으로 원정을 떠난다.
두 사람은 측백나무 숲의 산지기인 괴물 프와와를 죽이 고 측백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돌아온다. 사랑과 향락의 여신 이슈탈은 개선하는 길가메슈를 발견하고 이 세상의 부를 약속하고 구혼한다. 여신의 불륜을 알고 있는 길가메슈는 이것을 거절한다. 그래서 분노한 여신 이슈탈의 저주로 하늘의 신 아누로부터 하늘소가 파견되지만 두 사람은 이것을 격퇴하고 우르크로 돌아온다.
다음에 여신 이슈탈은 친구 엔키두를 12일간의 병고로 눕게 하고 저 세상으로 빼앗아 가버린다. 비탄에 젖은 길가메슈는 처음으로 이 세상이 끝이 있다는 것과 인생의 공허함을 깨닫고 불사의 약초를 찾아 방랑의 여 행을 떠난다. 그는 산과 들을 넘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 드디어 삶과 죽음의 비밀을 알고있는 인간의 조상 우도 나피슈팀이 살고 있는 행복의 섬을 찾아가서 그에게 영 원한 생명의 비밀을 묻는다.
그는 신이 내린 대홍수의 위험에서 자기가 어떻게 피했는지를 말한다. 신 에아의 말씀으로 자기는 네모진 배를 만들고 위험을 피할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을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길가메슈는 찾고 있던 해답을 얻지 못하고 낙심해서 돌아오려고 하자, 우도나피슈팀은 그의 아내의 권고에 따라 바다 밑에 있는 불로장생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다. 길가메슈는 곧 바다 밑으로 가서 그 약초를 얻고 기쁘게 그것을 우르크로 가지고 온다. 도중에 차고 맑은 샘을 발견하고 거기서 목욕하는 사이에 이 약초의 향기에 끌려 온 뱀이 물 속에서 나와 이 약초를 훔쳐 달아난다. 길가메슈는 실망에 빠져 허무하게 우르크로 돌아간다.
본문에는 이상의 줄거리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첨가되어 있다.
우도나피슈팀의 설화는 창세기 6장-9장에 기록되어 있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흡사하다. 노아가 홍수가 빠졌 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 날려보낸 새가 까마귀와 비둘기인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주의 깊게 읽어보면 양자는 전혀 다르다. <길가 메슈 서사시>에서는 대홍수가 일어난 것은 신들이 서로 싸웠기 때문인 것으로 돼있는데,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인간의 죄가 만연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노하여 내린 것으로 돼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인의 대홍수 이야기를 그 신앙에 따라 고쳐 쓴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도나피슈 팀은 신에아가 특별히 불쌍히 여겨 가르쳐 주었기 때문 에 대홍수를 면한 것으로 돼 있는데,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방주를 타고 구원된 것으로 돼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노아의 홍수 설화의 원형은<길가메슈 서사시>중의 우도나피슈팀 설화로 소급되고, 다시 이 설화의 원형은 슈메르의 서사시들 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파손이 많이 된 점토판 문서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인간의 창조와 왕국의 기원과 홍수 설화와 슈르파 크와이며 경건한 주스트라가 배를 타고 이 난을 면한 이 야기이다.
전승은 주스트라->아도나피슈팀->노아,로 이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길가메슈 서사시>는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애호되고 많은 조각과 그림 등의 테마가 되었으며, 또한 서사시 전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이른바 동양적 허무주의는 구 약성서의 전도서로 계승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바빌로니아의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될 뿐 아니라 시리아, 팔레스타인에 그리고 소아시아를 통해 서 그리스에도 전해진 문화 교섭의 역사를 해명하는데 도 중요한 연구 사료가 된다.
8. 노아가 도달한 아라랏산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노아와 배에 있던 모든 들짐승과 집짐승들의 생각이 나셔서 바람을 일으키시니 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땅 밑 큰 물줄기와 하늘 구멍이 막혀 하늘에서 내리던 비가 멎었다. 그리하여 땅에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한지 150일이 되던 날인 7월17일 배는 마침내 아라랏 산 등마루에 머물렀다.> (창세기8장1-4절) 창세기 6장에서 9장에 걸친 노아의 홍수 설화는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돼 있지 않다.
방주에 실려진 짐승들 이야기도 홍수의 원인이나 기간 등도 오랜 야훼이스트 사료층과 새로운 제사적 사료층 이 섞여있으며 중복과 모순이 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편찬자가 천지 창조 설화와 같이 오래된 전승을 버리지 않고 남겼기 때문이다. 구약성서가 전해진 뒤로 많은 사람들이 홍수 설화를 읽고 노아의 방주에 관심을 가졌 던 것은 물론이다.
이 설화를 테마로 그린 화가도 많고 교회당의 장식으로 노아의 방주와 비둘기를 조각한 조각품도 많다. 아라랏산과 노아의 방주에 관해서는 저 유명한 마르코폴로도 언급 한 것처럼,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문제삼아 왔다.
노아의 방주가 최후로 도착했다고 하는 아라랏산은 어디 있는 산일까. 지도를 보자. 흑해와 카스피해의 두 바다 사이에 아르메니아지방이라고 하는 고원지대가 있다. 높은 봉우리가 많고, 이것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 티 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이 되어 이라크 평야를 적셔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아르메니아 지방에 있는 어느 높은 산 이 아라랏산이라고 한다.
아르메니아 지방은 소련, 터키, 이란의 세 나라로 갈라져 있는데, 아라랏산은 이 3국 국경에 솟아있는 화산이며 터키령에 있다. 그 최고봉은 5,156미터나 된다. 아르메니아 지방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옛날부터 이 산마루에 노아의 방주가 남아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산에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신성한 산으로 여기고 있다.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전설의 산 아라랏에 오르려고 했다. 1929년에는 도이치 의학자이며 등산가인 파로트가 이 아라랏산에 올라가서 산마루에서 노아의 방주가 앉을 만한 넓은 대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를 실제로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세기의 원문에는 <아라랏산들>이라고 돼 있으며 한 봉우리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지대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헤브라이어의 아라랏은 앗카 도어의 우랄루두 (<높은지방>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반 호수지방의 고원지대를 가리켜 이름지어진 것이며, 기원전 8세기경에 그 땅에는 우랄루두 왕국이 번영하고 있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야훼이스트 사료층이 기록 된 시대와 맞먹는다. 오늘날 우리는 니실산이나 아라랏산 이나 방주의 도착지점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슈메르 의 홍수 설화에는 산 얘기가 없다. <홍수층>쪽이 확실한 고고학적 사료의 증거가 되고 있다.
9.이스라엘 민족사의 시작
헬레니즘과 함께 유럽의 정신적 전통을 이루고 있는 헤브라이즘의 담당자였던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에 유가 없는 기구한 운명을 짊어지고 오늘에 이른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기원 제 20세기의 이스라엘 민족의 초기는 깊은 안개 속에 싸여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실증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의 여러가지 연구는 이에 관해서 고고학의 여러 가지 성과로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마리문서>(BC 18세기), <누즈문서> (BC 15세기),<아라락 문서>(BC 15세기), <우가리트문서.(BC 15-14세기),<보하스.쿄이문서>(BC 14세기)등이 그것이다.
창세기 12장 이하에 전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 즉 아브라함(12장-25장), 이삭(25장-26장),야곱(25-36장)등에 관한 족장 설화는 오랫동안에 걸쳐 구전되어 온 구비를 근거로 한 전승들이며, 이 전승들이 야훼이스트의 손으로 새로운 문맥과 수식이 가해지는 것은 기원전 10세기로 소급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현존하는 모양으로 완성한 것은 바빌로니아 포로시대(BC 6세기)나 그 이후라고 상정되는 제사적 사료층의 기록자와 그 밖의 약산의 가필자들이라고 생각된다. 족장 설화는 19세기 말경까지는 후대의 창작의 반영이라고 했으며,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신화적인 인물로 쳤으며,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인 부족의 조상이라고 여겨져 그 사실성이 부정되는 일이 많았다.
그 후 오리엔트 고고학의 진전에 따라, 특히 1925년 이후의 고고학적 제 발견에 의하여 그 내용이 일변하였다. 즉 족장 설화와 메소포타미아와의 지리적 역사적 관계가, 특히 족장 설화의 역사적 배경이 기원전 2천년대 초기에서 중엽에 걸쳐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의 생활 관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지고 전승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사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장 설화는 출토된 여러 사료와의 관련으로 역사적인 테두리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족장들의 연대에 관해서 1950년 이후의 주요 견해들을 대별하면, 기원전 2천년대 전반기로 치는 설과 기원전 2천년대 중엽 이후의 아람인의 이주와 결부시키는 설로 나뉘고, 양자는 학계의 쟁점이 돼 있다. 전자는 <마리문서>나 <누즈문서>등을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전반의 어느|때로 잡는가는 학자에 따라서 다르다. 이와 반대로 족장들의 연대를 기원전 2천년대 중엽이후로 주장하는 학자로는 미국의 C.H.골든 등이 있다.
그는 <누즈문서>와 창세기에 전해지고 있는 족장시대의 관습이 평행되고 있는 예를 들어서, 그리고 <우가리트 문서>를 근거로 해서 족장들의 연대를 아마르나=미케나이시대로 잡는다.
골든의 견해에 관해서는 뒤에 소개하겠다.
10. <족장설화>에는 어떤 역사 배경이 있는가
족장 설화는 전승되는 소재들을 제공한 시댜와, 그것이 전승된 시대 및 그것들이 문장으로 기록되고 편찬된 시대를 포함한 이른바 세 가지 성격의 시대의 기록이다.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 이하의 족장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난 선조들이다. 즉 구약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 자체가 족장들의 생애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족장 설화들의 핵심에 이스라엘 민족의 여명기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선조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들어간 역사적 개요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부터 인도. 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 집단이 남러시아의 습지대에서 파상적으로 남하하여 서아시아로 침입하고, 그 일족은 아나트리이와 고원지대 하티를 정복하여 힛타이트 왕국(BC 1700경-1200경)을 세 우고, 아시아의 원주민 속에서는 이란 서쪽 경계의 산간에 있던 카시드인이 바빌로니아를 검거하여 그 땅을 약500년간 지배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 이북지방에 있던 원주민 후르리인은 서쪽과 남쪽으로 이동을 개시하여 인도. 이란어파의 일부인 미탄니인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 미탄니 왕국(BC 15-14세기 중엽)을 세웠다. 미탄니인이 기마술이 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오리엔트의 대부분은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 휩쓸려 불안 동요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이 불안 동요 가운데 소아시아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지방을 거쳐 시리아.팔레스타인지방에서 다시 남하해서 나일 강의 델타 지대까지 침입하여 그 땅의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삼아 기원전 18세기 말부터 16세기 초에 걸쳐서 1세기 남짓한 사이에 이집트의 태반을 지배한 것이 <힉소스>라고 하는 혼송 민족 집단이었다.
힉소스의 민족 구성은 분명하지 않으나 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이 아니고 아시아의 후르리인을 기간으로 하고 거기에 옛부터 고대 오리엔트지방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셈어족 등을 포함하는 혼성 민족군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후르리인과 셈어족이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오리엔트 세계에 있어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그 땅을 활동 범위로 했던 것이다.
그후 힉소스가 침입해서 1세기 후인 기원전 16세기 전반에는 이집트에서는 힉소스의 지배에 반항하는 이집트인의 세력이 발흥하고, 테베 출신의 아하메스가 힉소스의 수도 아바리스를 점령하고, 뒤에는 북진하여 페니키아 연안까지 빼앗아 힉소스 세력을 완전히 타파했다.
이렇게 해서 아하메스 1세(BC 1567-47)는 이집트를 재통일하고 제 18왕조(BC 1567-1320)의 기틀을 잡았다.
이 해로부터 이집트 역사 뿐아니라 오리엔트 전체 역사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이집트는 아시아의 분열된 여러 나라 사이에서 신왕국 시대로 들어가서 이른바 제국주의적 침략을 해서 세계 제국을 건설하고, 약 200년 간 여러 나라의 우의에 섰다. 이 사이에 시리아. 팔레스타인지방은 이집트 신왕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1. 할례는 언제 왜 시작했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처음에 아브람이었으나, 후에 하나님 야훼는 아브람과의 계약을 맺고 아브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아브라함이라고 개명하였다.
하나님과 노아와의 계약의 증표는 무지개였고 아브람과의 증표는 할례였다. 할례란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르는 의식이며, 할례를 행하는 풍습은 옛 부터 셈족이나 함족(이집트인) 사이에 보급되어 있었고 성인의 표시로 행해지고 있었으며, 고대 이스라엘인은 여기에 전혀 새로운 의의를 발견했다. 남자가 출생하면 8일째 날에 할례를 베풀고 명명하는 관습이 그것이고, 지금도 이것은 엄수되고 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계약의 증표를 의미하고 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언어학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개명은 첫째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을 뜻하고, 또한 인간의 생애의 중요한 계기를 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명의 갱신도 뜻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 1-4절에 기록돼있는 야훼가 아브람에게 내린 축복과 저주의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말하는 족장 설화의 중요한 모티브이다.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175세의 천수를 누리고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손으로 아내 사라가 묻힌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아브라함 부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이슬람 교도의 마음 속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계속 살아있다.
아브라함의 계보를 사료 비판에 관계없이 창세기에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12. 왜, 약속의 땅<가나안>으로 떠났는가
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셈으로부터 계산해서 10대째가 되며 데라의 아들이고, 나홀과 하란의 두 동생이 있었다 가나안 땅으로 이사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으나, 메소포타미아 서북부의 도시 하란까지 가서 그곳에 주저앉게 되었다. 아버지 데라는 여기서 250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왕비라는 뜻)는 창세기 20장 12절(E사료층)에 의하면 아브람은 이복 누이동생이지만 그 출생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창세기 11장 27-30절의 기록은 혈통이 가까운 부족 사이의 이합 집산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래의 이름은 아마 원래는 부족의 이름이었던 것 같으나 확증은 없다.
아내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과 함께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과 재산과 물건들을 가지고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해서 출발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75세였다고 한다. 아브람 일족이 메소포타미아의 변경인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향한 것은 그곳에서 안주할 땅을 찾기 위해서였다. 얼마 후 그들 일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고 야훼를 위해서 제단을 쌓지만, 다시 남하하여 네게브 지방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이 지방에 기근이 들어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갔다. 아브람은 이집트에 들어가면서 아내 사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정말 아름다운 여자라고 생각하오. 이집트인들이 당신을 보면 당신의 남편이라고 해서 나를 죽이고 당신만 살려 둘 것이오, 그러니 나를 오라버니라고 부르시오. 그러면 내가 당신 덕으로 죽음을 면하고 대접도 받을 것이오"(창세기 12장 11-13절).
과연 그들이 이집트로 들어가자 이집트인들은 사래의 미모에 매혹돼 버린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아담의 아내 하와를 빼놓고 사래는 세계 제일의 미인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왕의 신하들도 절세 미인 사래를 보고 매혹되어 그녀를 왕에게 칭찬했기 때문에 그녀는 왕궁으로 불려 들어갔다. 사래가 왕궁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그 기간이 얼마나 됐는지 일체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아내 사래는 무사히 남편 아브람에게 돌아왔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와 이스라엘의 양 문명은 종래 주장된 것처럼 두개의 다른 문명이 아니라 동부 지중해라고 하는 공통된 지반에 세워진 유사한 구축물이라는 것을 원사료를 구사해서 강조하는 C.H.골든은 족장 설화와 우가리트의 <케레트 서사시>와 호메로스의 <일리앗>의 세가지가 모두 빼앗긴 아내를 다시 찾는 모티브에서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13.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인가. 누이인가
아브람은 이렇게 이집트 왕에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창세기 20장 1-18절(E사료층)과 26장 6-11절(J사료층)에도 나온다.
전자에서 아브라함이 그랄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으며, 후자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마찬가지로 그랄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고 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아마 원래는 하나님의 사실이었는데 그것이 변형하여 현존하는 설화가 된 것인 듯하다.
1925년에서 31년에 걸쳐 언어학자인 동시에 고고학자로 유명한 E.키에라(1885-1933)가 지휘한 바그다드 아메리카, 오리엔트 연구소 및 하버드 대학의 학술 조사대에 의하여 티그리스강 동부의 구릉지대의 고도 누즈(바그다드 북쪽 약 240km )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결과 그 땅에서 쐐기꼴 글자로 기록된 수천의 점토판 문서들이 출토되었다.
그후 이들 점토판 문서들의 해독과 연구에 의하여 족장 설화의 사회적 배경의 일단이 밝혀졌다. 이 문서들은 후르리인의 서기에 의하여 바빌로니아어로 쓰여진 것이며, 그 중에는 본래의 후르리어도 자주 사용되어 있다. 문서들의 대부분은 기원전 15세기나 고바빌로니아 시대보다 조금 뒤에 쓰여진 것이며, 후르리인의 법률 문서가 많이 들어있으며, 그 내용은 족장 설화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
누즈는 고앗카드시대에도 가슬이라고 해서 작지만 역사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으나, 기원전 2천년대 중엽에는 후르리인이 살았고 그 지방의 중심지였다.
후르리어는 카프카스어에 속하며 인종적으로는 아르메니노이드계라고 한다. 후르리인은 이미 기원전 3천년대 후반의 기록에 나오며, 그리고 우르 제3왕조 시대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들은 기원전 3천년대 후반에 카프카스산맥의 남쪽,즉 아르메니아지방의 반 호수 부근에서 티그리스 강 동쪽으로 침입해서 점점 서쪽 시리아지방으로 이동하고, 다시 남하하여 가나안 지방으로도 진출하여 기원전 2천년대를 통해서 셈어족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에서 가장 세력을 떨쳤다.
그들의 문화나 관습의 대부분은 아무르인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독자의 왕국을 세우지 않았으나 힉소스 이후 가나안에 새로운 문화 요소를 만들어내고 흑적 이색의 선상 문양으로 나타낸 물새나 태양의 장식이 있는 토기에 의하여 그들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는 <호리족>(창세기 14장 6절, 기타)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탄니 왕국의 지배 아래 있던 후르리인의 법 관습에 의하면 아내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누이가 되어 이중의 연분이 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이중의 연분에 의하여 아내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이중의 연분은 혈연 관계가 있을 경우에 더욱 많았으며 좋은 집안의 여자라면 같은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아내가 좋은 집안의 여자이고 그 지위가 사회적으로도 존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4. 사라진 도시국가 우르는 어디 있었는가
바그다드와 페르샤만 중간, 유프라테스강에서 서쪽으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텔. 엘=무카얄(역청이라는 뜻)이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1854년에 J.E.테일러에 의하여 이 이름 없는 황폐한 언덕이 구약성서가 말하는 아브라함의 고향 칼디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것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우르의 유적은 1918년에 C.톰슨이나 H.R.H.홀 등에 의하여 소규모의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후 1922년에서 34년 걸쳐 대영박물관과 펜실바니아 대학의 공동 출자로 L.울리 경의 지휘 아래 발굴조사가 행하여지고 그 성과가 많았다. 그 조사에 의하여 그곳이 슈메르의 도시 중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사에 의하면, 우르의 도시 영역은 길이 1.2킬로 미터,너비가 800미터나 되는 다수 불규칙한 타원형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벽에는 방어 시설이 설치되고 드문드문 성문이 있었다.
우르에는 우바이드 기(B.C.4천년대)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문화가 번창했던 흔적이 보인다.
채문 토기, 원통 도장, 진흙 토기(terracatta)등은 선사시대의 풍요했던 생활을 엿보게 한다.
그후에 우르는 대홍수에 의하여 유실되어 버렸다. 이 대홍수는 두께가 2.4미터나 되는 점토층이 덮여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홍수는 바빌로니아 평원 일대를 덮친 격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여러가지 홍수 전설을 낳았고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 설화는 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우르 제1왕조(BC 26세기)는 슈메르의 패권을 잡고 있었으며<우르 왕릉군>은 당시의 높은 물질 문화의 번영을 말해주고 있다.
그후 같은 슈메르의 도시국가 라가슈에게 패배해서 당분간 외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다시 우르 제3왕조(BC 21세기)가 번영을 되찾아 전바빌로니아를 지배하여, 그 문화를 엘람,시리아에 전하고 모든 왕은 성문 법전<우로난므법전><슈메르 법>등)을 제정했다. 이어서 바벨로니아 전역은 바빌론 제1왕조(BC 19세기-16세기)아래 통일되는데 우르는 자주 슈메르인의 반란의 중심지가 됐기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후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우르는 재건되고 지그라드의 복구 공사등도 있었으나 페르샤 시대에 다시 쇠퇴하여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폐허가 되고 만다.
우르 제1왕조 및 제3왕조의 수도였던 우르는 이 도시의 수호신인 달의 신 난나르의 대신전을 중심으로 한 神域과 이 신역을 포함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그리고 그 성벽 바깥쪽에 펼쳐지는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우바이드 기의 취락의 유적 위에 몇 번이나 다시 세워진 작은 언덕 위의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그 운하에 따라 성벽이 있고 그 내부에는 제방이 있다.
달의 신 난나르와 그 배우신 닌가르의 신전은 시가지보다도 한층 높은 기단 위에 있으며 흙벽돌의 거대한 담에 싸여 있었다. 신역에는 몇군데의 신전이 있고 각 신전에는 관청과 창고가 붙어있었다.
신전과 지그라드가 우르의 번영을 상징하고 있다.
15.우르의 대지하 고분군의 발견
우르의 도시지역 중앙 북쪽에는 신역이 있었다.
1927년에 우르 제1왕조나 제 2왕조 시대라고 추정되는 <우르의 왕묘군>이 발굴된 것은 신역의 동남쪽이다.
메스 .카람. 두그의 왕묘에서 황금제 그릇, 투그 ,촛대, 은제 띠, 단검 등 막대한 부와 정교와 기술을 말해주는 많은 유품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아.바르.기 왕의 고분 현낸 문서를 근거로 창세기 23장34장 10, 21절,42장 34절,이사야서 23장 8절 등을 비교 논증하고 있다. 아래에 그 골자를 추려 소개하자.
아브라함도 하타이트 왕의 비호 아래<우가르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에서 가나안으로 온 호상이었다고 주장하며, 창세기 23장 6절의 <영감님>을 70인역이 <왕>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주목하고,이것을 프토레마이오스 시대<왕>이 아니라 호메로스에 나오는 의미의 <왕>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즉 동부 지중해적인 의미의 <왕>이라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위에서 말한 창세기의 제 기록이나 아마르나 = 미케네 시대의 국제 환경을 더듬어 아브라함이 상업 활동을 했던 것을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우르 중에서 갈디아인의 우르라는 지명이 오직 한 군데 뿐이라고 할 수는 없고,아브라함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는 갈디아의 우르가 아니라 <우가리트 문서>에 보이는 <우라>라고 하며, 그곳을 하란 근처에서 찾는다.
이상의 여러 점에서, 왕들의 서사시로서의 족장 설화는 틀림없이 왕실을 찬양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용돼 온 것이라고 결론 짓는다. 즉 갈디아인의 우르는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가 아니고, 크세노판이 언급하고 있는 아르메니아인의 이웃이라고 하는 북방 갈디안의 그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사야서 23장 13절의 갈디아인의 나라는 바빌로니아의 남부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북방의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며, Hald는 아르메니아/우랄어 것 같지 않다.
16. 갈디아인의 우르는 어디인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아들 하란에게서 난 손자 롯과 아들 아브람의 아내인 며느리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다 자리잡고 살았다(창세기 11장 31절).
갈디아인의 우르는 일반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남부 도시, 현재의 이라크의 나사리아 근처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의 전승은 우르의 도시보다도 오히려 하란을 중심으로 하는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결부되어 있다. 현재의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터키령, 유프라테스강의 지류 베리크 강변에 <하란>이라고 하는 아랍인 한촌이 있다. 그 근처는 예전에 바빌로니아-소아시아-이집트를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통상의 중심지였다. 이 하란과 창세기의 전승과의 연결은 아브라함의 조상의 이름이나 형제의 이름과 하란 근처의 도시들의 이름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구약성서의 족장들과 기원전 2천년대의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있던 도시들과의 관계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C.H.골든은 하타이트 왕국의 수도 하투샤슈에서 기원전 15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번영했던 우가리트에 보실 근처와 선도(義道)에서 59명의 정장한 순장자의 유해가 발견되고, 두 대의 손수레와 그것을 끄는 소와 은제의 배 모형도 발견되었다.
슈브.아드 왕비의 고분에서는 수금과 황금이나 청석금등을 사용해서 만든 머리 장식품이나 목걸이 등이 나왔다. 수금은 각각 숫소와 암소와 숫사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으며, L.울리경은 이것은 각각 베이스, 테너, 앨토의 표시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왕묘에서는 노는 방법은 모르지만 조개껍질을 상감한 게임 판이나 <우르의 군기>라고 불리는 조개껍질을 상감한 군기 등이 출토되었다.
<우르의 군기>는 각각 출정과 개선의 그림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술 작품으로서도 훌륭하며 역사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있고, 당시의 전투 광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것이다.
우르의 왕묘군-대지하 고분군-의 발견은 종래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확실한 비문이 없기 때문에 왕묘인지 아닌지에 관해서 논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풍년제>에서 사랑의 여신 이슈달과 곡물의 신 다므즈의 역할을 하는 제관의 분묘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나일강 유역에서 온 망명자의 분묘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왕묘는 지하 깊숙히 만들어졌고 발굴 조사를 하려면 지하수가 넘쳐서 곤란하다 . 1천년 이상이나 지난 고대 은나라 왕묘와 흡사한 <우르의 왕묘군>에 이어지는 발견은 앞으로 다시 있을 것의 옛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갈디아인의 우르는 골든 경의 말처럼, 과연 <우라>일까. 앞날의 연구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17 .악덕한 도시 소돔과 고모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창세기에 의하면, 소돔<둘러싸인 곳>이라는 뜻과 고모라<깊다><물이 많다>는 뜻의 도시들은 아라바의 저지 습윤한 땅에 있던 가나안인의 다섯 도시 중에 들며, 아브라함의 동생 하란의 아들 롯은 백부 아브라함과 헤어져 비옥한 요르단의 저지 소듬으로 옮겨 살았다.
소돔과 소모라는 그돌라오멜의 연합군의 내습을 받고, 소돔의 왕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다행히 난을 면했다(14장2-22절).그후 이 도시의 악덕이 심해서 소돔과 고모라는 다른 도시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 불 비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롯은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천사의 경고에 따라 소돔에서 도피했으나 롯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어겨서 뒤돌아 봤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었다. 롯은 두 딸과 함께 요르단 동쪽의 산지로 피해서 동굴 속에 살았다고 한다.
사해 서남 연안의 이 이른바 소돔 가까이에서는 1952년에 칼리(Kali)공장이 세워지고 1955년에는 질소공장이 신설되어 사해 개발을 위해서 조업하고 있다.
1957년에는 광대한 천연가스층이 발견되었다. 그 지역은 과거 큰 지진에 의하여 땅이 내려앉고 천연가스와 석유가 폭발했기 때문에 도시들이 화염에 싸여 사해의 수중에 침몰한 것으로 생각된다.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해 남부 수중 수심 1.8미터 정도의 얕은 부분은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라고 한다.
오늘날 사해의 남단에 가까운 서안 지역 남북 10킬로미터,폭 2.4-5킬로미터,높이 216미터의 암염 산이 있다. 이곳은 아라비아어로 제벨.우스돔(소돔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며 둥근 봉우리들로 돼 있다. 그 근처의 도로흙은 염분이 말라 백색으로 돼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슭에는 풍화 작용으로 이루어진 그야말로 이상하게 생긴 암염기둥이 여러개 서 있다. 제벨, 우스돔의 북쪽 기슭 한 모퉁이에 있는 사람 형상의 암염 기둥이 <롯의 아내의 소금기둥>이라고 한다. 이 기암이 뒤를 돌아다 보는 부인의 모습과 가장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리라.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는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누가복음 17장 32절). 영어의 소도미 (sodomy,異色)는 악덕의 도시 소돔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돔은 죄악과 악덕의 형용사가 되어 부패한 지도자는 <소돔의 백성>(이사야서 1장 10절),<소돔과 포도나무> (신명기 32장 32절)등으로 불리고, 또한 예루살렘의 죄악이 심함을 <소돔의 죄> (에스겔서 16장 49절)라고 표현했다.
성서를 통해서 소돔은 고모라와 함께 죄악과 하나님의 형벌의 귀감으로 인용되고 있다.
18.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실재했는가
악덕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과연 실재했을까
1976년 11월 1일 <요미우리 신문> 석간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미국 쎈트루이스에서 10월 29일 개최된 세계 종교학회연차 회의의 강연에서 로마대학의 죠반니 페티나드 교수(고고학)가 <시리아의 고대 유적에서 출토한 셈어로 기록된 점토판 중에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고 발표하여 관계자를 흥분시키고 있다고 한다. 단 한장의 점토판이기는 하지만 이 보고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름이 구약성서 이외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보고자 페티나드 교수는 이미 10년 이상이나 시리아 북서부 텔.마르디크 지역에서 고대 에블라 왕국의 유적의 발굴 조사에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에블라 왕국이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4월 1일자<요미우리 신문> <아사히 신문>조간은 로마대학의 파테오.마티에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대가 12년전부터 발굴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데, 동 조사대가 도시 에블라에서 약 1만5천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문서를 발견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7월 2일자<아사이 져널 특집 고대의 부르는 소리>(제18권 26호)에는 스기이사무씨가 <모습을 드러낸 에브라 왕국 - 기원전 20세기의 도시국가)라는 귀중한 논문을 보냈다. 이하 이에 근거해서 <에블라왕국>을 간단히 소개하겠다.
에블라 Ebla는 이블라 Ibla라고도 표기하며 셈어로 <목장>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지방의 주민이 유목민을 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유적은 지금의 알레포의 남남서 70킬로미터 지점에 있으며 거의 지중해 연안의 대도시 라타키아(고대 우가리트는 이곳 북쪽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다)와 알레포를 연결하는 선상에 있으며 알레포 남쪽에 있는 하마와 거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텔이라는 것은 시리아에서도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고대 도시의 폐허를 가리키며, 이곳의 윤곽은 거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중앙은 아크로폴리스를 이루고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어 있다.
이 유적은 몇 개의 층으로 나뉘고 가장 오랜 층은 대략 기원전 3500년에서 3000년경까지의 것으로 추정되고, 제2기는 대략 기원전 2300년에서 2000년 내지 1900년경, 제3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에서 1700년경의 것이다.
이 중에서 왕궁이나 신전의 유적이 발견되고 제3기의 신전은 특히 중요시되고 있다.
처음에는 아크로폴리스의 제3기의 신전 발굴 등에 주력했다고 한다. 제3기가 되자 에블라는 타민족의 내습을 방어하기 위해서 대단히 견교한 성벽을 쌓게 되었는데 그 성벽도 발견되었다.
1만 5천장에 달하는 점토판 문서는 이 제3기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이다. 궁정 도서관에 붙은 두개의 작은 방에서 점토판이 나왔고, 이 도시는 앗카드의 나람신 왕(BC 24세기)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 도시는 약탈되고 소각 당했으나 폐허 밑에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고 한다.
에블라의 국명은 이미 기원전 24세기로 소급되는 아카드 왕조의 조상 사르곤 왕의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나라의 존재 자체는 여러 비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에블라 문서>에 기록되어 있는 쐐기꼴 글자는 유프라테스강 중류 오른쪽 강안의 폐허 텔.하리리에서 출토된 <마리문서>(BC 18세기)의 예로 보아서 아마도 마리의 말과 같은 아무르(구약성서의 아모리)어 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함무라비 왕조시대(BC 18세기)의 말과 같은 서북 셈어족의 말이다. 따라서 <에블라 문서>는 <마리 문서>보다 오래된 것이 된다. 기원전 2천년대 초기라는 연대와 북시리아라는 지리적 상황으로 생각해보면 <우가리트 문서>의 경우처럼 1만 5천 장의 쐐기꼴 글자 점토판 중에는 북서 셈어족 이외의 셈어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19.고대 이스라엘인은 어떤 신을 섬겼는가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해 왔다. 족장들의 지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전승(창세기 12-25장)은 헤브론, 이삭 전승(25-26장)은 브엘세바, 야곱 전승(25-26장)은 베델, 세겜, 드단과 연결되어 있다. 즉 이 주요 무대가 중부 팔레스티나의 일정한 지역으로 한정되어 있다. 이들 각지에는 어디나 옛부터 가나안의 성소가 있고 각 족장은 이 땅에 제단을 쌓았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기록은 족장들의 각 전승이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연결되어 생성, 형성, 전개된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각 족장의 전승은 원래 독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전승의 재료는 어떤 구체적인 사건에 의해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오는 시대를 거쳐서 만들어지고 편찬되어 현재의 문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각 전승과 관계가 있는 무대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에 의하면 어느 것이나 중기 청동기시대의 중부 팔레스티나의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창세기의 전승에 의하면, 족장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7장 1절28장 3절,35장 11절,43장 14절,48장 3절, 출애굽기 6장 3절, 에스겔서 11장 5절),엘.요르욘(높으신 하나님의 뜻),창세기 14장 18절-24절),엘오람<영원하신 하나님)의 뜻, 창세기 21장 33절),엘.로이(나를 보시는 하나님의 뜻),창세기 16장 13절),엘. 베델(베델의 하나님의 뜻).창세기 31장 13절35장7절), 엘. 베르테(계약의 하나님)의 뜻.(판관기 9장46절)등이 그것이다.
이 하나님의 호칭의 공통되고 있는 <엘>에라는 어간은 원래 셈어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보통 명사였다.
한편 엘은 가나안의 만신전(Pantheon)의 주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가리트 문서>의 발견 해독 연구(50항 참조)에 의하여 엘은 또한 가나안 종교의 특정한 신격을 나타내는 고유 명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엘은 여신 아슈라와의 거룩한 결혼으로 얌,모토 등의 신들을 낳았다. 엘은 조물주, 왕,신 들과 인류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백발의 노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엘은 폭풍의 신 바알에 의하여 가나안의 만신전의 왕좌를 빼앗기고 추방되었다. 이것은 엘을 주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이미 가나안에 존재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각 엘은 가나안의 특정한 성소와 결부되어 있다. 그들의 신들은 생성 번식을 기원하는 자연신이고 지연신이었다.
비옥한 땅 가나안의 신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나안으로 들어간 족장들이 후대에 남긴 최대의 유산은, 도이치의 위대한 구약학자 A.알트(1883-1956)가 말하는 <족장의 신>이라는 신의 타입을 남긴 것이었다.
알트는 족장 전승이나 기타 구약성서의 전승에서 볼 수 있는 신의 호칭, 즉<아브라함의 하나님>(창세기 28장 13절31장 42,53절),<이삭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삭을 돌보시던 두려운 하나님>(창세기 31장 42.53절)<야곱의 하나님>(창세기 49장 24절)등의 호칭에 족장시대부터 전해진 옛 신의 호칭을 보고, 이 신의 이름을 짓는 방법에 족장 종교의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의 이름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족장들의 신은 신의 현현을 체험한 족장의 이름과 결부시켜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엘이 특정한 장소와 결부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들의 신은 족장 개인에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즉 전자는 산, 강, 나무, 돌 등의 일정한 땅과 결부되는 <토지신>이고, 후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의 특정 인물과 결부되는 <인격신>이다. 이 인격신이야말로 후대에 전해진 역사적 신이다.
이렇게 신이 일정한 토지와 결부되는 토착신이 아니라 특정한 인물에게 현현하는 특징이 바로 족장들의 종교와 모세의 종교와를 연결시키는 이스라엘 종교의 큰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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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노아시대
바벨탑 사건 (창 11:1-9)
B.C
2166 아브라함의 출생 (창 11:27)
2166 우르에서 하란까지 (창 12:4)
2091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 (창 12:56)
2067 할례 제정(창 17:9-14)
2066 이삭의 출생 (창21:23)
? 욥이 고난 받음 (욥 1:12-19, 2:7-11)
욥이 축복받음 (욥 42:10-15)
욥의 죽음 (욥 42:17)
2006 에서와 야곱의 출생 (창 25:26)
1991 아브라함의 사망 (창 25:8)
1929 야곱의 하란도피 (창 28:10)
1918 유다의 출생 (창 29:35)
1915 요셉의 출생 (창 30:24)
1898 애굽으로 팔려감 (창 37:36)
1886 이삭의 죽음 (창 35:29)
1885 애굽의 총리가 됨 (창 41:46)
1876 야곱의 애굽 이주 (창 46:7)
1859 야곱의 사망 (창 49:33)
1805 요셉의 사망 (창 50:26)
1527 모세의 출생 (출 2:12), 모세의 시 (시 90)
1447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 (출 5:1)
1446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 라암셋 출발 (출 12:37), 홍해 도착 (출 14:11)
만나, 메추라기 시작 (출 16:1314), 시내광야 도착 (출 19:1), 십계명 받음 (출 20:3-17)
1445 성막 건축 (출 40:33), 레위기의 규례 지시< 1-2월 >,첫 번째 인구 조사 (민 1:2)
시내산에서 가데스까지(민 33:16-36), 70인 장로선정 (민 11:24), 가데스 정탐군 파견 (민 13:3)
1406 모세의 유언 설교 (신 1장 - 신 33장), 모세의 죽음 (신 34:5), 아론의 죽음 (민 20:28)
모압 광야 도착, 두번째 인구 조사 (민 26:1), 발람과 발락의 사건 (민 22장 - 민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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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 그침 (수 5:12), 요단 동편땅 분할 (수 13:15-31)
1400 요단 서편땅 분할 (수 14장 - 수 17장), 실로에 회막 세움 (수 18:1)
1390 여호수아 사망 (수 24:29)
1375 사사 통치의 시작
1384 옷니엘 < 40년 사역 > (삿 3:9-11)
1316 에훗 < 80년 사역 > (삿 3:15-30)
1236 삼갈 (삿 3:31)(
1216 드보라와 바락 < 40년 사역 > (삿 4장, 삿 5장)
1169 기드온 < 40년 사역 > (삿 6장 - 삿 8장)
1120 돌라와 야일 (삿 10:1-5)
1117 룻과 나오미
1103 사무엘의 출생
1085 입다 < 6년 사역 > (삿 11:1-33)
1079 입산.엘론.압돈 (삿 12:8-15)
1075 삼손 < 20년 사역 > (삿 13장 - 삿 16장), 사무엘의 사역 < 75년 > (삼상 7:3),
미스바 대회개 (삼상 7:3-11)
1050 사울 치하의 통일왕국시대 (삼상 10:24)
1040 다윗의 출생 초기생애 (시 7:11-13,17,22,23,34,35,52,54,56,57,59편)
1025 기름부음 받은 다윗 (삼상 16:13)
1020 다윗과 골리앗 (삼상 19:1-15)
1017 사무엘의 죽음 (삼상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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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 다윗의 통일왕국 (삼하 5:5), 예루살렘 천도 (삼하 5:910) (대상 11:7)
법궤의 예루살렘 안치 (삼하 6:1617) (대상 15:29)
991 다윗의 간음죄 (삼하 11:1-21), 범죄 후 망명 전 (시 5,6,32,38,-41,51,55,64편)
990 솔로몬의 출생 (삼하 12:24)
979 압살롬의 반란 (삼하 15:10-12), 망명시기 (시 3,4,27,28,31,61,63,69,70,143편), 아삽의 시 (시 50, 73-83편)
고라 자손의 시(시 42:,44-49,84,85,87,88편), 헤만의 시 (시 88장), 왕정 말기 (시 3:,37,103,139편)
973 블레셋의 침입 (대상 20:4), 다윗의 인구조사 범죄(삼하 24:1-7) (대상 21:1)
970 다윗의 죽음(왕상 2:10) (대상 28:11-21), 솔로몬의 등극 (왕상 2:12), 솔로몬의 시 (시 72,127편)
966 성전 기공 (왕상 6:1) (대하 3장, 4장)
965 아가서 기록
959 성전 완공 < 7년 > (왕상 6:38), 왕궁기공(왕상7:1)
솔로몬의 잠언(잠 1장 - 잠 9장, 잠 10:1-22, 16:25-29,31장), 아론의 잠언 (잠 30장)
935 솔로몬의 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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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0 아사의 유다왕 즉위 (왕상 15:8) (대하 14:1)
885 오므리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3)
875 엘리야의 사역 시작
874 아합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상 16:29)
872 여호사밧의 유다왕 즉위 (왕상 22:41) (대하 17:1)
853 벤하닷의 사마리아 침입, 아합의 전사 (대하 18:34)
848 엘리사의 사역 시작 (왕하 2:13)
841 예후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0:30), 아달랴 왕후의 유다 섭정 (대하 22:12)
835 요아스의 유다왕 즉위 (왕하 11:21), 요엘의 사역 시작
814 여호아하스의 이스라엘왕 즉위
797 엘리사의 사역 종결 (왕하 13:20)
796 요에의 사역 종결
793 요나의 사역 시작, 여로보암 2세의 이스라엘왕 즉위 (왕하 14:23)
790 웃시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26:1)
783 살만에셀 4세의 앗수르왕 즉위
772 앗술단 3세의 앗수르왕 즉위
760 아모스의 사역 시작 (암 1:1)
759 요나의 니느웨 전도 (욘 3:1-10)
755 아모스의 사역 종결
754 앗술니라리 5세의 앗수르왕 즉위
753 스가랴의 이스라엘왕 즉위, 요나의 사역 종결
752 살룸의 반란,살룸이 시해됨
751 요담의 유다왕 즉위
746 호세아의 사역 시작 (호 1:1)
742 미가의 사역 시작, 브가히야의 이스라엘왕 즉위, 아하스의 유다왕 즉위
740 이사야의 사역 시작 (사 6:1)
733 르신과 베가의 침입 (사 7:1)
732 호세아의 이스라엘왕 즉위, 다메섹의 함락
728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왕하 18:4) (대하 29-32장)
724 앗수르의 3차 침략 (왕하 17:5), 호세아의 사역 종결
722 북왕국 이스라엘의 함락 (왕하 17:6), < 북왕국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아 >
미가의 예언 성취 (미 1:67)
714 앗수르왕 산헤립의 침입 (대하 32:1)
701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697 므낫세의 유다왕 즉위 (대하 33:1)
695 미가의 사역 종결
669 앗술바나팔의 앗수르왕 즉위
663 테베의 멸망
681 이사야의 사역 종결
642 아몬의 유다왕 즉위
640 요시야의 유다왕 즉위(왕하 22:1) (대하 34:1), 나훔,스바냐의 사역 시작
630 스바냐의 사역 종결
627 예레미야의 사역 시작 (렘 1:1)
622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612 니느웨의 함락,앗수르의 멸망, 나훔의 예언 성취 (나 2,3장)
힐기야의 율법책 발견(왕하 22:8) (대하 4:14), 하박국의 사역 시작
609 요시야왕의 전사,여호야김의 유다왕 즉위
608 하박국의 사역 시작 < 유다 >
605 갈그미스 전투 (왕하 24:1), 바벨론의 1차 침입 < 1차 포로 >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감 (렘 46:2) (단 1:12)
602 여호야김의 반 바벨론 정책
601 애굽과의 재동맹 (렘 22:13-17)
598 바벨론의 2차 침입 < 2차 포로 > (왕하 24:10)
597 시드기야의 유다왕 즉위 (대하 36:11), 에스겔이 포로로 끌려감, 하박국의 사역 종결
593 에스겔의 예언 시작 < 바벨론 > (겔 1:12)
586 남왕국 유다의 함락 < 3차 포로 > 예루살렘 함락, 바벨론 포로가 됨(왕하 25:8) (대하 36:17),
하박국의 예언 성취 (합 1:5-11), 스바냐의 예언 성취 (습 1:8-18)
예레미야의 사역 종결 (렘 39:1-18), 오바댜의 사역 시작
583 오바댜의 사역 종결
580 다니엘의 풀무불 (단 3:19-25)
570 에스겔의 사역 종결
562 느부갓네살의 사망
559 바사의 고레스 즉위
550 다니엘의 4짐승 환상 (단 7:1-8)
539 고레스의 바벨론 점령 (단 5:30)
538 다니엘의 사자굴 (단 6:16-24),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대하 36:23)
537 1차 귀환 (스 2:1) < 스룹바벨 >
536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스 3:8), 성전 재건 작업 1차 방해,중단(스 4:4-23)
530 다니엘의 사망
522 다리오의 바사왕 즉위
520 학개,스가랴의 사역 시작 (슥 1장 -슥 8장), 성전 재건작업 재개 (스 5:2) (학 1:1)
< 학개, 스가랴의 사역 시작 >
516 제 2성전 완공 (스 6:15), 스가랴의 사역 (슥 9-14장)
486 아하수에로의 바사 통치
480 그리이스의 바사 침공
479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에 2:17)
475 스가랴의 사역 종결
474 하만의 책략 (에 3:9)
473 부림절 제정 (에 9:28)
465 아닥사스다 I의 바사 통치
458 2차 귀환 조서 (스 7:11), 2차 귀환 (스 7:9) < 에스라 >
444 3차 귀환 < 느헤미아 > (느 2:9-11), 성곽 중수 필역 (느 6:15)
435 말라기의 사역 시작
433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아 (느 13:6), 말라기의 활동
432 느헤미아의 2차 귀국 (느 13:7)
37 헤롯의 유다왕 즉위
5 세례 요한의 탄생
4 예수 탄생 (마 2:11), 헤롯의 유아 학살 (마 2:16-18), 헤롯 대왕의 죽음
A.D
8 유아 예수의 예루살렘 방문
12 디베료 가이사의 로마황제 즉위
26 세례 요한의 사역 시작 (막 1:4), 본디오 빌라도의 유다 총독 부임
27 예수의 공생애 시작 (마 3:13-17) (막 1:14) (눅 1:36), 예수의 제1차 갈릴리 사역
가나안의 첫 이적 (요 2:1-11), 니고데모의 전도 (요 3:1-21)
28 12제자를 세우심 (마 10:1-4) (막 3:13-19), 예수의 제2차 갈릴리 사역
29 오천명을 먹이심 (마 14:13-21) (요 6:1-15), 물위를 걸으심 (요 6:16-21)
베드로의 신앙 고백 (눅 9:18-22), 예수의 제3차 갈릴리 사역
30 승리의 입성 (마 21:1-11), 성전 숙정 (눅 19:18-22), 주의 만찬 (막 14:22-25)
예수의 수난과 부활 (마 27,28장), (막 15:24-16:8) (눅 23:26-24:12) (요 19:17-20:10)
그리스도의 승천 (행 1:9-11), 오순절의 성령강림 (행 2:1-4), 스데반의 순교 (행 7:60)
오순절과 교회의 탄생, 스데반의 순교
31 이방인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
32 사울의 다메섹 회심 (행 9:1-9)
35 바울의 예루살렘 1차 방문 (행 9:26) (갈 1:1819)
44 요한이 형제 야고보의 순교 (행 12:12), 베드로의 투옥 (행 12:4)
45 대 기근 <글라우디오 치하 >
47-48 바울의 1차 전도여행 (행 13:1-14:28)
49 예루살렘 공회 (갈 2:1), 로마로부터 유대인 축출
50-52 바울의 2차 전도여행 (행 15:36-18:23) (살전 1:56, 3:1-6)
51 데살로니가 전.후서 기록
53-58 바울의 3차 전도여행 (행 18:23-21:16), 로마서 기록,고린도전.후서 기록
54 네로의 로마황제 즉위
56 갈라디아서 기록
58 바울 체포 (행 21:27-39)
59 베스도의 유다총독 부임, 바울의 로마여행 (행 27:1-28:15)
60 히브리서 기록
61 바울의 로마 투옥 (행 28:16) (엡 3:16:20) (엡 1:12)
62 바울의 로마 도착, 주의 형제 야고보 순교
62 야고보서 기록, 주의 형제 야고보의 순교, 에베소서 기록, 빌립보서 기록, 골로새서 기록, 빌레몬서 기록
63 바울 석방,디모데를 권고하여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함 (딤전 1:3), 디모데전서 기록
64 로마 대화재, 네로의 박해 < 1차 박해 >, 베드로전서 기록
66 유대인의 반란,디모데후서 기록,디도서 기록, 베드로후서 기록
67 바울의 순교
68 베드로의 순교
69 베스파시안의 예루살렘 침입
70 예루살렘 함락,산헤드린 공회 폐지
70-80 유다서 기록
81-96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 2차 박해 >
90 요한계시록 서신서 기록
95 요한의 밧모섬 유배 (계 1:6), 요한계시록 기록
96 도미티아누스의 죽음
100 얌니아 회의,사도 요한의 죽음
150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100-165)이 로마에 [예수제자훈련학교]설립(Disciple-School)
156 폴리갑의 순교
170 콥틱(Coptic)어로 쪽복음 번역
180 인도에서의 판테누스(Pantaenus) 설교
197 터둘리안(Turtullian 160-222)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03 퍼피튜아의 순교
206 에뎃사이(Edessa) 아브갈 4세의 회심
220 오리겐(Origen 185-254)의 세계선교운동 촉구
249 로마의 고넬료가(Conelius)가 골(Gaul)종족에게 7인 선교사 파송
287 그레고리(Gregory 240-332)에 의한 알메니안인들의 집단적 개종으로 야만인의 왕 티리바테스 2세 (Tiribater II)의 폭력적 박해가 시작되었으나 마침내 왕도 개종하여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
303 디오클레시안 황제 박해시작 - 최후, 최악의 박해
313 콘스탄틴 황제의 회심과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313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합법화
325 니케아 회의 : 교회융합→제국통합
328 프루멘티우스(Frumentius), 이디오피아에 복음전파
340 울필라스, 고트족에서 선교시작
360 투어스의 마틴(Martin of Tours)이, 선교사역개시
400 에집트의 수도사들이 에티오피아어로 성경번역
420 아스페벧 족장(Sheikh Aspebet) 치하에서 아라비아의 아랍족속이 기독교로 개종
430 반달(Vandal)족의 북아프리카 점령
432 패트릭(Patrick)의 아일랜드 회개운동 시작
450 왕들의 주도아래 지역단위로 기독교 개종
496 프랑크족(Franks)의 왕 클로비스(Clovis) 개종
498 기독교 복음이 중앙아시아 전역에 전파되기 시작, 네스토리안(Nestorians)
선교사들이 1350까지 터키스탄(Turkestan)에서 활약
520 시리아인 전도자(Nestorians)들에 의해 세일론섬(island of Ceylon)에서, 페르시안 주교 산하의 말라바 (Malabar)에서, 간지즈강 유역에서ㅡ훈족(Huns), 터크족(Turis), 위거족(Uighurs), 중에서,
그리고 티벧(Tibet)과 수마트라(Sumatra)등지에서 수 많은 기독교 개종자 속출
523 유대인 아랍왕 두누와스의 박해로 아라비아의 나란(Najran)과 힘마(Himyar)지역에서 14,000명의
아랍 크리스챤들이 학살(Duh-Nuwas)
537 성소피아 성당 완공
540 저스티니안 황제(Emperor Justinian)의 명령으로 비잔틴제국 주변의 모든 야만족이 기독교로 개종,
소아시아의 7만명에게 강제로 세례
549 네스토리안 대주교가 중국 만리장성 북방 헤프탈릴(Hephthalites)지경의 백인 훈족에게(White Huns)
주교를 파송
563 콜룸바(Columba)가 스코트랜드에 복음전도
570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 메카에서 출생
590 교황권 확립(그레고리 1세)
596 그레고리대제(Gregory the Great)가 영국에 어거스틴(Augustine) 주교를 파송
597 켄트(Kent)족의 왕 에텔버트(King Ethelbert) 세례
622 헤지라(메카→메디나, 이슬람 원년)
626 동로마 성상숭배 금지
627 노텀부리아(Norbhumbria)족의 왕 에드윈(King Edwin) 세례
631 동 앵글(East Angles)족의 개종
635 네스토리아 선교회(Nestorian Mission) 중국 도착
637 롬바르드(Lombards)족의 개종
638 이슬람의 예루살렘 점령
640 북아프리카 650만 베르베르(Berbers)족의 80%가 기독교로 개종,
그러나 950년까지 전부 이슬람으로 다시 개종
685 윌 프리드(Wifrid) 영국의 기독교 개종을 완성
716 보니페이스(Boniface)의 장기선교역사 시작
723 도르(Thor)의 참나무가 쓰러짐
730 베데(Bede)의 『영구 교회사(Church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편찬,
앵글로 쌕슨족(Anglo-Saxon race)의 개종을 서술
732 마르텔장군 뚜르 쁘와디아 전쟁에서 승리(이슬람군 격파)
780 촬레마그네(Charlemagne)가 쌕슨(Saxon)족에게 강제로 세례, 그리고 세례 거부자는
하루에 4천 5백명을 처형하고 수천명을 유형지로 추방
826 덴마크(Denmark)의 왕 하랄드(King Harald) 세례
827 안스갈(Ansgar)의 덴마크 복음화운동 전개
831 안스갈(Ansgar)의 스웨덴 복음화운동 시작
862 시릴(Cyril)과 메토디우스(Methodius)가 모라비아(Moravia)에 파송
864 불가리아(Bulgaria)의 왕자 보리스(Boris) 개종
900 마그야르스(Magyars, 현재의 헝가리)에 복음전파
949 이슬람세력이 모리타니아(Mauritania)의 유목민 베르베르(Berber)족을 포함한 기독교 세계의 50%를 점령 954 러시아(Russia)의 공주 올가(Princess Olga) 세례
962 신성로마제국 탄생(오토 10세)
987 러시아의 왕자 블라디미르(Prince Vladimir) 세례
1000 fp이프(Lief the Lucky)의 그린랜드(Greenland) 복음선교
1009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이 북몽고(North Mongolia)의 수도 가라코룸(Karakorum)에서 터키족인
20만명의 케라이트(Keraits)족을 개종, 나미안족(Namians)과 메르키트족(Merkites)을 세례
1054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완전분열
1077 카놋사의 굴욕(헨리4세 vs 그레고리7세)
1122 보름스협약 (성직임명권 협약)
1124 키프차크 터키족(Kipchak Turks)의 쿠만인(Cumans) 몇 명이 헝가리의 스테판 2세(Stephen Ⅱ)를
통해 기독교에 접촉하여 복음을 영접
1150 중앙아시아 옹구트족(Onguts)의 개종
1200 웬드족(Wends), 프러시안족(Prussians), 리츄아니안족(Lithuanians)과 기타 발틱해안의
종족들을 제외한 유럽 전반에 걸쳐 기독교화
1219 프랜시스코 수도사들(Franciscan Friars)의 북아프리카 파송전도
1250 중앙아시아 위커족(Uighurs), 케라이트족(Keraitits), 몽골족(Mongols) 그리고 모든 주요종족들이
부분적으로 기독교화
1291 십자군 악코에서 철수(십자군전쟁 종료)
1295 몬테코르비노(Montecorvino)의 요한(John)이 중국 북경에 도착
1303 아나그니 굴욕(교황 보니페이스 vs 프랑스필립왕)
1309 바빌론의 유수(∼70년간)
1347 유럽, 페스트로 인구 1/3 감소(∼1351)
1365 페름(Perm)의 주교 스테반(Steaphan 1335-1396)이 러시아의 콤미-페름(Komi-Perm)종족을 복음화
1368 중국 명조(Ming Dynasty)에 의해 기독교 폐지
1450 트리포(Trifo)와 테오도릿(Theodorit)이 콜라라프족을 복음화
1453 동로마 멸망(by 이슬람)
1493 캐톨릭 선교사들의 신세계 도착
1498 바스코 다 가마(Vasoc da Gama)와 캐톨릭 선교사들의 인도선교
1500 새로 조직된 개신교 교회들이 거의 150-200년 동안 복음을 받지 못한 종족들에게 접촉하기 이해
노력을 경주
1503 황금해안(Gold Coast)의 추장 에후투(Efutu)와 1300명 원주민의 세례
1517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95개 조항의 선포
1529 루이스 볼라노스가 아르헨티나의 투구만 2만명을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OFM이 이들을 위해 사역
1530 마틴 루터를 포함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1세기의 사도들에게 주어졌을 뿐이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끊어졌다고 가르치다
1534 칼티엘(Cartier)이 선교사들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
1536 포르투갈인(Portuguese)들이 코로만달(Cormandal)해안의 힘센 어부 바라타(Bharatha)족 1만명을
한꺼번에 세례
1540 예수회(Society of Jesus) 선교활동 개시
1542 프란시스 자비엘(Francis Xavier)의 선교활동 개시
1544 프란시스 자비엘이 트라반코(Travancore)에서 선교활동 시작. 1개월만에
1만명의 무쿠바족(Mukuvas)을 세례
1555 칼빈(Calvin)이 위그노교도(Huguenots)를 브라질에 파송
1556 세일론(Ceylon) 콜롬보(Colombo)부근 카레아스(Careas) 해안의 어부 7만명을 천주교로 개종,
1583년까지 마나르(Marar)섬에서 파라바족(Paravas)과 카레아족 등 지주조개 잡이 어부들 가운데
4만 3천명의 기독교인
1564 어거스틴교단(Augustineians)의 필리핀 도착
1580 페루의 제수잇(Jesuit)교파 신학자 호세 드 아코스타(Jose-de Acosta 1539-1600)가
<미개인 복음전파>(On the Preaching of 혿 Gospel Among the Savages)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아메르 인디안(Amerindian)종족 전도의 문제점을 제시
1583 마테오 릿치(Matteo 꺛챠)dml 중국 도착
1588 영국교회(Anglican) 교구목사 하드리안 사라비아(Hadrina Saravia)가 최초로 개신교
세계선교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
1593 프란시스코 교단(Franciscans) 일본 도착
1602 네덜란드 정부가 동인도제도의 말레이족(Malays)을 개종하기 위한 선교사 파송
1606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의 마두라(Madura) 도착
1614 일본에 반기독교 교서 공포
1622 교황 그레고리 15세(Gregory ⅩⅤ 1554-1623)가 「신앙전파를 위한 신성회중」
(Cacred Congreg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Faith)을 설립
1629 마태복음이 말레이어(Malay)로 번역, 이는 비서구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건
1649 「뉴잉글랜드 복음전도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가 설립되어, 아멜인디언(Amerindian) 선교를 위해 죤 엘리옷(John Eliot)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1650 러시아 정교회가 버링 스트레잇종족(Bering Strait) 선교를 위해 시베리아(Siberia)를 횡단
1663 져스티니안 폰 벨츠(Justinian Van Weltz 1621-1668)가 독일교회와 학생들의 세계선교에
대한 각성을 촉구
1664 폰 벨츠(Von Weltz) 문제가 선교의 필요를 언급하다
1667 영국 시인 죤 밀턴(John Milton 1608-1674)이 저서 「실락원」에 [만민에게 복음을!]이란 구절을 사용
1668 스페인의 괌(Guam)에 군사기지와 캐톨릭 선교회를 설립
1670 다카(Dacca)에서 2만명의 나마수들아 벵가릴(Na masudra Bengalis)들이 힌두교에서 카톨릭으로 개종
1673 러시아에서 칼믹(Kalmyks)족 최초로 동방정교회로 개종
1698 『기독교 증진회』(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창설
1701 러시아이 중부 볼가(Middle Volga) 지방에서 1705년까지 3.638명의 야만인
케레미스(Cheremis)인들이 세례
1701 복음전파회(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해외부서 창설
1702 토볼스크(Tobolsk)의 주교 흴로훼이(Filofey)가 1721년까지 160개 교회로 성장시키고,
4만명의 오스트족(Ostyaks), 보컬(Voguls)족, 시리안족(zyrians), 야쿠족(Yakuts)을 세례
1705 「화란-할레 선교회」(Danish-Halle Mission) 창설
1710 칼 폰 칸스테안(Karl Von Canstein) 백작이 동독의 할레(Halle)에 최초로 칸스테인
하우스(Canstein House) 인쇄소를 설립하여 80년동안 300만권의 성서를 출판
1722 진젠돌프(Zinzendorf)가 독일에 헤른후트(Herrnhut) 설립
1732 모라비안 교도(Moravians)의 첫 선교사 파송
1736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알창겔스크 사모에드 족을(Samoyeds of Archangsk) 위한 선교사역
1736 중공의 반기독교 칙령 발포
1740 러시아 스비자스크(Svijazks)에 「새 세례자를 위한 기관」(Office for Newly-Baptized)을
설립하여 1741년부터 1762까지 43만 550명의 볼가(Volga) 야만인들을 세례
1743 요셉 초툰세비스키(Josef Chotunceviski)를 중심으로 캄차카(Kamchatcha)를 위한 복음화 운동개시
1747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의 <세계 복음화 기도운동> 제창
1751 오스트야크(Ostyaks)가 오브도르스크(Obdorsk) 지역의 북극 연안까지 복음을 전파
1759 제수잇파(Jesuits)가 브라질에서추방
1773 예수회(Society ofJesus) 탄압
1784 이승훈이 중국에서 천주교를 조선에 전래
1787 「모라비안교파 해외선교 기관인 이교도를 위한 복음 전도회」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 창설
1792 러시아 정교(껸냐무 Orthodox)의 수도사 출신 8명의 선교사들이 알라스카의 코디아크(Kodiak)섬에
도착하여 2천 500명의 에스키모 정령숭배자들을 세례. 1795년까지 1만명 세례
1792 영국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침례교선교사협회」
1793 윌리엄 캐리가 최초로 「세계 기독교선교현황」을 조사
1795 「런던 선교사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스코틀랜드 선교사협회」(Scottis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6 「글라스고우 선교사협회」(Glasgow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네덜란드 선교사협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7 「런던 선교사협회」(LMS)가 최초로 선교사들을 타히티(Tahiti)에 파송
1799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창설
1799 학생운동(Student Movement) 폭발
1799 「전도지 선교회」(Religious Tract Society) 창설
1802 미국에서 「메싸추세스 침례교 선교회」(Massachusetts Baptist Missionary Society)가
[개척지 복음전파]를 위해 창립
1804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yt) 창설
1806 「해이스택 기도회」(Haystack Prayer Meeting)로 말미암아 학생선교운동 개시
1807 로버트 모리선(Robert Morrison) 중국 도착
1810 「미국 해외선교 위원회」(American Board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가 창설
1812 최초로 미국 선교사들이 인도를 향해 항해
1814 예수회(Society for Jesus) 복귀
1815 「바셀 선교사협회」(Basel Missionary Socieyt) 창설
1816 「미국 성서 공회」(American Bible Socieyt) 창설
1817 로버트 모회트(Robert Moffat)의 아프리카 도착
1819 「런던 사무원협회」(London Secretarise' Association) 창설
1822 「파리 복음선교회」(Paris Evangelica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5 「미국 전도 소책자 선교회」(American Tract Society) 창설
1826 「미국 가정 선교협회」(American Home Missionary Society) 창설
1826 볼가(Volga)지역에서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로부터 집단적 이탈
1828 「라인 선교사협회」(Rhenish Missionary Society, RMS)가 창설되어 보르네(Borneo)의
대야크족(Dayaks)을 위한 선교를 시작. 1839년에 대야크인의 첫 세례자 탄생
1840 영국의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아프리카에 도착
1842 남경조약(Treaty of Nanking)으로 중국 개방
1846 런던의 「복음주의 동맹」(Evangelical Alliance) 창설
1847 동방정교의 시베리아 이디드이르(Anadyr) 지방의 코리아크(Korik)와 척치(Chukch)인들을
위한 선교사역
1849 모라비안 교파가 니카라과의 미스키토(Miskitos)을 위한 선교사역
1852 「성서와 의료선교사협회」(Bilble and Medical Missionary Fellowship) 창설
1854 「런던 선교대회」(London Missionary Conference)
1858 「뉴욕 선교대회」(New York Missionary Conference)
1858 미국에서 1858-1859 대각성운동과 「훌턴스트릿 기도회」(Fulton Street Prayer Meeting)
1859 개신교 선교사들의 일본 도착
1860 「리버풀 선교대회」(Liverpool Missionary Society) 창설
1861 「스코트랜드 국립 성서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창설
1862 동방정교 선교회가 시베리아 아부르(Amur) 강주변의 골드(Gold)와 길야크(Gilyak)족을 위한 선교사역
1865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에 의해 「중국 내지선교회」(C.I.M-China Inland Mission) 창설
1867 「성서 유니온」(Scripture Union) 창설
1870 남인도의 집중적 선교운동으로 1백만의 텔루구(Tellugu)반민들이 30년간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로 개종
1875 「프린스톤 해외선교협회」(Princeton Foreign Mission Society)에 의해 프린스톤에 부흥 운동
1878 로얄 윌더(Royal Wilder)에 의해 「세계선교사 회보」(Missionary Review of World) 출간
1880 뉴저지 32개신학교 250명 신학생들에 의해 「신학교 선교동맹」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1 「기독교 열성 청년회」(Young People's Socieyt of Christian Endeavor) 결성
1884 미국의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한국 도착
1885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셀러(Appenzeller) 한국 도착
1885 「켐부릿지 7인」(Cambridge Seven) 선교사들이 중국 내지 선교회(CIM)를 통해 중국 파송
1886 「대학생 자원 해외선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결성
1887 심슨(A. B. Simpson)에 의해 「기독교 선교연맹」(C&MA-Christiam and Missionary Alliance) 결성
1888 「성서 기증 선교회」(Scripture Gift Mission) 창설
1890 10년간 믿음선교(Faith Mission) 현상
1891 「대학생자원 해외선교운동」 제1회 전국대회
1892 「북미주 해외선교대회」(Foreign Mission Conference of North America) 개최
1897 런던 남부에서 제4회 「람베스선교대회」(4th Lambeth Conference) 개최.
194명의 영국교회 주교들 참석
1898 「런던 에큐메니칼 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 개최
1900 「뉴욕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개최
1900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으로 중국선교 혼란
1903 독일 프란시스코 교도들을 통해 브라질 문두루쿠 인디안(Munduruccu Indians) 복음화
1905 「인도 전국선교사 협회(National Missionary Society for India) 결성
1906 평신도 선교운동 개시
1910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Edinburgh)
1912 「국제 선교회보(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발간
1912 영국 선교사회 대회(Conference of British Missionary Societies) 결성
1913 영국의 스터드(C.T.Studd 1862-1931)가 전 세계 복음화 십자군
(World-Wide Evangelization Crusade) 창설
1916 영국 정치가 출신 선교사그러브(K.G. Grubb 1900-1980)에 의해 「세계 정복 운동」
(World Dominion Movement)이 결성되어 세계선교지 종족 언어에 대한 구체적 조사
1917 「초교파 해외 선교협회」(Interdenomination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정
1920 필리핀에서 캐톨릭 교황 파이우스 10세(Pius Ⅹ)의 의교리분답서(Catechism)를 20만명의
모슬렘을 위해 졸로-모로(Jolo-Moro)어로 번역
1921 레이크 모홍크(Lake Mohonk)에서 「국제선교협회」(International Mission Council) 결성
1921 「노르웨이 선교협회」(Norweigian Mission Council) 결성
1922 카메룬 타우센드(Wm. Cameron Towsen)와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이 SVM에 동참
1926 미국에서 「보르네오 비복음화 종적선교회」(Unevangelized Tribes Mission of Borneo) 창설
1926 제수잇파(Jesuits) 선교사들이 브라질의 일본인들을 위해 사역, 1978년까지
1백만명의 일본인중 63만명이 천주교로 개종
1927 「근동 기독교 협의회」(Near East Chirstian Council) 결성
1928 「국제선교사 협의회 예루살렘 대회」
(Jerusalem Conference of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개최
1929 CIM대표 호스테(D.E. Hoste, 1861-1946)가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을 위한 200명의 선교사 모집 공고
1930 일본에서 전도자 도요히코 카가와(Toyohiko Kagawa, 1888-1960)를 중심으로
「하나님의왕국운동」(Kingdom of God Movement)을 시작, 1백만 이상에게 복음을 전파
1931 영국 런던에서 「비복음화지역 선교회」(Unevangelized Fields Mission) 창설
1931 에쿠아도르의 HCJB 방송국에서 방송개시
1935 타운센트(Townsend)에 의해 클리프 성경번역 선교회(Wycliffe Bible Translator) 창설
1936 「대학생 해외선교협회」(Student Foreign Missions Fellowship) 결성
1936 WEC선교사 브리에르레이(L.G. Brierley)가 처음으로 「비복음화 종족」(Hidden People) 연구 조사
1938 「영국교회 협의회」(British Council of Churches) 형성
1941 제2차세계대전시 1천 1백만 미국인들의 선교의식 각성
1942 「IMC 마드리스 대회」 개최
1945 복음주의 해외선교 협의회(Evangelical Foreign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46 ICVF/SFMF 대학생 선교대회 토론토에서 개최
1946 교회 세계 봉사회(Church World Service) 창설
1947 루터교 세계연맹(Lutheran World Ferderation) 조직
1947 복음주의 대학생 국제협의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s) 결성
1947 IMC 휘트비 대회(Whitby Conference of IMC) 개최
1948 세계선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결성
1950 아프리카 대륙에 4천 4백만 기독교인 달성, 500종족들 가운데 년당 180만명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토착교회(AICs)는 1천 700개의 교단으로 성장
1951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결성
1951 대학생 선교회(Campus Crusade for Christ) 창설
1951 개신교 선교사들의 중국 철퇴 개시
1952 IMC 월링겐대회(Willingen Conference of IMC) 개최
1955 미국인 선교학자 맥가브란(D.A. McGavarn)이 The Bridges of God를 발행.
종족단위 복음화 개념을 천명
1956 에쿠아도르의 아우카 인디안(Auca Indians)에게 5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의 정글에서 살해
1957 신학교육 기금(Theological Education Fund) 설치
1958 IMC 가나대회(Ghana Conference of IMC) 개최
1958 영국에서 복음주의 선교사 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결성
1959 아시아 기독교대회 발족대회(Inaugural Assembly of Asia Christian Conference) 개최
1960 연장신학교육(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실시
1960 니카라과의 심층전도(Evangelism-in-depth) 실시
1961 IMC와 WCC의 병합
1961 한국에서 UBF 선교회 발족
1963 DWME의 멕시코 집회
1964 계간 복음선교(Evagelical Mission Quarterly) 발간 개시
1965 카메룬의 야운데(Yaounde)에서 [현대 서부 아프리카 복음화]에 대한 DWME회의에서
라우선(J.S.Lawson), 바레트(D.S. Barrett), 아얌(B. B. Ayam)이 132 아프리카 종족복음화 단계 연구
1965 훌러 세계 선교대학(Fuller School of World Mission) 설립
1966 MARC가 창설되어 교회의 세계선교를 위한 신학과 연구자료를 공급하며 세계복음화를 위한 베를린회 의(Berlin Congression World Evangelization)와 연결되기 시작. 종족그룹에 대한 근대적 아이디어 탄생
1966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 복음주의자협회(Association of Evangelicals of Africa and Madagascar) 창설
1966 미얀마에서 선교사 축출
1966 홍위병들이 중국교회 파괴
1966 태평양 교회 대회(Pacific Conference of Churches) 결성
1966 베를린 전도대회(Berli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67 종족복음화를 위한 신성회중(Sacred Congregation for the Evangelization of Peoples)이
9천 900여개 언어종족과 1만 5천 종족그룹을 위한 사역
1968 국제선교 협력기구(K.I.M-Korea International Mission) 창립
1969 아프리카 토착 교회가 300개의 다른 종족으로 집합된 1,700만명과 5,800개 교단으로 증가.
매년 96만명 성장
1970 복음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총회(All Philippine Congress on Evangelization) 결성
1970 대만에서 중국 전도대회(Chinese Congress on Evangelism)
1970 「연합성서공회」가 세계인구에 97%를 위한 구약 249개 언어, 신학 578언어, 쪽 복음 1천 431언어로
출판, 년 성경반포수는 1966년에 8천만권, 1970년에 1억 7천 300만권, 1985년에 5억 4천 900만권
1971 일본 해외 선교협회(Japan Overseas Mission Association) 결성
1972 아프리카 복음화를 위한 개척지 상황(Frontier Situations for Evangelization)이 바레트(D.B. Barrett), 호로네크(M.L. Hronek), 맘보(G.K. Mambo), 브비티(J.S. Mbiti), 맥베이그(M.J. McVeigh)에 의해 발간
1972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Missiology) 창설
1972 시카고에서 복음과 개척지 종족을 위한 협의회
(Consultation on The Gospel and Frontier Peoples) 개최
1972 국제 선교학 논평지(Missiology, An International Review) 발간
1973 방콕에서 DWME 집회
1973 미국선교학회(American Society of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필리핀에서 전 아시아 학생선교대회(All-Asi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 개최
1973 서울에서 전 아시아 선교협의회(All-Asia Missionary Convention) 창설
1973 교회선교위원회 협의회(Association of Church Mission Committees) 창설
1973 아시아 선교회(Asia Mission Association) 창설
1973 얼바나 전도(Urbana Reversal) : 1970년에 8%, 1976년에 28%에 학생들이 헌신서약
종족 복음화 선교전략 대확장
1974 로잔에서 세계복음화 국제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in Lausanne)
1974 일본 전도대회(Japan Congress on Evangelism) 개최
1974 CCC 한국 대회(Explo '74) 개최
1974 최초의 하기 국제 연구소(First Summer Institute of International Congress)
1974 1980년 세계 선교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를 위한 공식적 회집
1975 나이로비에 레나나에서 케냐 비복음화 종족 대회(Unreached Peoples Conference)
1975 동서선교 정보수집과 전략개발센터(East-West Center for Mission Research and Development)가
서울에 설립
1975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 설립
1976 세계 복음화 중국대회(Chinese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개최(홍콩)
1976 캔사스에서(IFMA/EFMA연합 실행 위원수련회) 개최
1976 미국 해외선교센터(United States Center for the World Mission) 창설
1976 얼바나 선교대회(Urbana '76)에서 50% 학생헌신
1976 이슬람 세계대회(Islamic World Congress)가 기독교 선교사의 철수
1976 선교사들이 성경이 없는 5천 2백억 언어 그룹중 300 언어로 성서번역 500언어로 성경 개편과 새로 번역
1977 전인도 선교 및 복음화 대회(All-India Congress on Mission And Evangelization)
1977 인도 선교 협회(IMA) 조직
1977 미국 세계선교센터 국제연구소(ISS)에서 최초로 선교전망 'Perspectives'코스 제공
1978 모슬람권 복음화를 위한 북미대회
1978 ISI가 레이톤 친(Leiton Chin)으로 WCFM책임자 임명
1979 중국교회 재 개방
1979 서독의 바드 리벤젤(Bad Liebenzell)에서 세계복음협회 주최로 비복음화 종족대회 개최
1979 비복음화 종족을 위한 EFMA 실행위원 수련회, 1990년까지 5천 208종족 복음전파 계획
1979 맥가브런(McGavran), 빌리스(Bliss), 질(Gill)의 [2천년까지 모든 종족에 교회 개척] 주장
1979 얼바나(Urbana)대회에서 75%학생들 헌신
1980 제자화를 위한 필리핀 전국대회(Philippine Congress on Discipling a Nation)
1980 멜보우르네 DWME 선교대회(DWME Conference Melbourne)
1980 태국에 파타야(Pattaya)에서 LCWE 대회 개최
1980 에덴버그(Edinburgh)에서 개척지 선교 세계협의회(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1980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학생 협의회(International consutation on frontier missions)개최
1981 개척자협회(.Frontier Fellowship)창설과 [Global Prayer Digest" 발간
1981 IFMA 개척자 위원회 (IFMA Frontier peoples)
1981 얼바나(Urbana)대회에서 90% 학생들 헌신
1981 숨은 종족 (Hidden People)을 주제로 독일복음선교협회
(German Association of Evangelical Mission)회의
1981 영국 하드포드(Hertford)의 하이레리그(High Leigh)에서 복음선교동맹(Evangelical Missionary Alliance) 주체로 비복음화 종족 전도(Reaching Unreached Peoples)를 위한 대회
1982 그랜드 래피드(Grand Rapids)에서 복음전파와 사회적 의무에 대한 협의
1982 3년마다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 선교협의회 대회(Asia Mission Association Consultation) 개최
1983 암스테르담에서 83만 5천명 순회 전도자들의 전도 연구
1983 세계 복음주의 협회 (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서 위튼 83(Wheaton '83)개최
1983 IFMA 와 EFMA 실행위원수련회에서 각각 미해결 과제(Unfinished Task)에 대해 강조
1984 USCWM에서 IFMA/EFMA/AEPM 수련회를 통해 개척선교에 대한 사명의 재확인
1984 호놀룰루에서 중국민족 세계복음화대회 (Ethnic Chiness Congress on World Evangelization)
1984 세계복음화 기도동맹(WEPA - World Evangelization prayer Alliance)결정
1985 남아프리카에서 최초로 국내단위 선교대회 개최
1985 CCC 엑스폴로 '85(Explo '85) 개최
1985 맥가브런이 선교학자 회의를 열어 2천년 세계선교의 대전진(Gaint Step)에 대한 연구
1985 미국 휴스턴에서 소수민족 복음화를 위한 국내 대회
(National Convocation on Evangelizing Ethnic) 개최
1985 자이레 국내복음화 대회(Zaire National Congress on Evangelism)에서 64교단 지도자들이
1990년까지 1만 교회를 복음화되지 않은 지역에 설립할 것을 계획
1985 나이제리아 복음주의 선교회(Nigeria Evangelical Mission Association)가
나이제리아 비복음화 종족 연구
1985 선교 2천년(Mission 2000) 계획을 선교 학자 맥가브란(D.A.McGavran)이 제안,
유럽의 10만 교회의 선교회가 세계의 비복음화 종족에 2천년까지 교회 개척 계획
1986 미국 남침례 해외 선교부에서 비거주 선교 분과 신설
1986 인도 선교협회(India Mission Association)가 인도의 숨은 종족 연구를 대규모로 개시
1986 맨데이트 '86 선교대회 개최
1986 갈렙 프로젝트(Caleb Peoject)가 선교기관들과 협력 1만 3천 대학생들에게 영향력 발휘
1986 휠트 윌쓰(Fort Worth)에서 미국 교회사 협회(American Society of church History)
주최로 1986년 축제
1986 암스텔담 '86(Amsterdam '86)에서 8천명의 목사와 전도자들에게 도전
1986 콜로라드 스프링(Colorodo Springs)에서 개척지 선교학 협회(Society for Frontier Missiology)창설
1986 아시아 선교협회(Asia Mission Association)국제대회 미국에서 개최
1987 콤미밤 '87(COMIBAM '87)최초의 남아프리카 선교대회(Latin American Congress on Mission)개최
1987 제3세계 선교협회(Association of Third World Mission) 최초의 국제대회
1987 제8차 아시아 신학 협의회
1988 개척지 선교를 위한 국제 학생협의회 (International Student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ion) 결성
1988 개척지선교 세계 협의체(World consultation on Frontier Missoin)결성
1988 리더쉽 '88(Ledership '88) 기독교 젊은 지도자를 위한 로잔대회
1988 제1회 개척지 선교를 위한 신학생 국제대회
(First International Meeting of Theological Students for Frontier Mission) 개최
1988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88) 한국기독교 100년사에 최초로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램 센타에서 1988년 7월 25-30일 열림
1989 GCOWE '89(Global Consultation for World Evangelization by AD 2000 & Beyond)싱가폴에서
1989년 1월5-8일 50개국대표 314명이 참가한 2000년대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989 로쟌II 마닐라 세계복음화 국제대회 1989년 7월 11-20일 마닐라에서 개최
(International Congress for World Evangelization in Manila. Lausanne II)
1992 제2차 한인세계선교대회(Korean World Missions '92) 7월27-8월1일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래함센터에서 개최
1995 GCOWE '95 제2차 세계복음화 전략회의, 17-25일 한국 서울 횃불선교센터 214개국 4662명 참가
1996 제3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 96) 선교사 384명 2,300명이 모여 시카고 윗튼칼리지에서 개최
1997 GCOWE '97 남아공에서 아프리카 지도자들로 미전도종족에 초점을 맞추게 함
1999 10월 일본 교토에서 제3세계선교협의회(TWMA) 창립 10주년 기념 선교대회가 개최
2000 제4차 한인세계선교대회(KWMC 2000) 7월 24-28 윗튼대학에서 열림
2000 2000년 세계선교대회 8.14-19 서울, 잠실체육관, 사랑의교회, 명성교회, 소망교회, 영락교회에서 개최
2000 암스텔담 2000 선교대회 7.29-8.6 빌리그램함 전도협회 주최로 암스텔담에서 개최
2000 어바나 2000 선교대회 12.27-31 개최
1. 첫 번째 창조 이야기
(창 1장)
1. 두 가지 창조이야기
구약성경에는 창조에 관한 이야기가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4절 앞 부분까지, 두 번째는 창세기 2장 4절 뒷 부분에서부터 2장 끝까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말 개역성경의 창세기 2장 4절은 히브리어 원어성경과 비교하면, 두 가지 점이 수정되어야한다. 4절 앞부분의 "야웨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에서 천지는 "땅과 하늘"을 가리키는 지천으로 고쳐야한다. 그리고 4절 앞 부분과 뒷 부분의 순서도 바뀌어야 한다. 4절을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천지(하늘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야웨 하나님이 지천(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때에"가 된다. 첫 번째 창조이야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1:1)로 시작하여 "천지(하늘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2:4a)로 끝맺고있다. 두 번째 창조이야기는 "야웨 하나님이 지천(땅과 하늘)을 창조하신 때에(2:4b), 야웨 하나님이 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고(2:5)"로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는 "하늘"에 촛점(우주론적 관점)이 모아지고, 두 번째는 "땅"이 관심의 주요 대상(인간론적 관점)이 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창조 이야기는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조명함으로써, 오히려 상호보완해 주는 역할을 한다.
2. 창조신앙과 자연과학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였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연과학적 질문에 대답하는 과학서가 아니다. 특히 성경의 창조이야기는 우주만물의 생성기원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을 신앙적으로 설명하고, 이 우주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분명히 하며, 인간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서 피조세계에 대하여 책임지는 존재임을 밝히는 것이 그 중심의도이다. 그러므로 창조신앙은 자연과학과 경쟁하거나 대결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연과학이 갖고 있는 한계점의 부족을 보강 내지는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과학은 전체(all)가 아니라 전체의 일부분만을 대상으로 하여 관찰하고 분석할 수 밖에 없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혹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하여도, 더 나아가 전체(우주)의 의미에 대하여도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점들은 성경의 몫인 셈이다.
3. 하나님의 복수형 ("우리"):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초대 교부신학자들은 '우리'라는 복수형을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이미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져서 한국교회에서는 거의 무리없이 수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도 볼수 있으나, 이것은 일종의 교리적인 해석으로 성경적인 해석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히브리말의 "심사숙고의 복수형(Pluralis deliberationis)"이며, 이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심사숙고할 때 쓰이는 화법이다. 또는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우리'라는 복수형은 하늘회의 장면에서 보통 언급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하나님이 하늘에서 천상의 존재들과 함께 하늘회의를 열었다는 것이다(참조, 왕상 22:19; 욥 1:6; 2:1; 38:7; 사 40:11). 다른 피조물을 창조할 때는 이러한 회의가 없었다.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은 "심사숙고의 복수형"이든 "하늘회의 장면"에서 나온것이든 간에,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인간만이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음을 드러내주는 말이다.
4.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창 1:26)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외형적인 유사성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가시적으로 형상화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1) 사람은 왕과 같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이다. 고대 중동세계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왕을 지칭하던 말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말은 인간이 왕과 같이 최고의 존재로, 피조물 중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2)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것이다. 왕을 뜻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고, 남자와 여자 즉,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는 즉,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왕과 같이 존엄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평등(동등)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3)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연을 통치하는 대리 통치자라는 것이다. 고대 중동세계에서 제국의 대왕들이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때, 자기가 직접 통치하기 어려운 먼 지역에는 왕 자신의 형상(동상)을 만들어 세움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왕의 통치권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은 다른 피조물(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사람에게 위탁하여 관리하도록 하셨다.
4)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기도)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것은 사람 밖에 없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들이 갖지 못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다. 사람만이 하나님과 교제(Communio :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에게만 허용된 선물이요 특권이다.
5. 자연에 대한 봉사적인 사람: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1:28)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주신 명령이다. 이 명령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활편리를 위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마음대로 사용하여 훼손하고 파괴하라는(혹은 파괴해도 좋다는) 말씀인가? 지금까지 인류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 본문을 그런식으로 이해하고 자연을 파괴해 왔다. 지금도 그러한 자연환경의 파괴는 개발이라는 가면을 쓰고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날로 심각해져 가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와 환경오염에 창세기의 이 본문이 책임이 있다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자연 파괴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말씀이 아니다.
1) 땅을 정복하라: 이 말은 하나님의 규정에 따라 땅을 이용하고 일구어 복받은 삶을 이루어 놓을 뿐 아니라, 땅의 훼손이나 피괴로부터 땅을 보호하고 지켜서 오히려 비옥한 땅의 생산으로 더욱 복된 삶을 누리라는 뜻이다.
2)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 말은 생물을 생포하고 학대하고 살해하라는 말이 아니고, 오히려 잘관리하고 보살피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물들이 사람에 의해 지속저으로 보존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정복과 다스림은 오히려 창조의 일익을 계속 담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해야하는 인간의 책임이요 사명이다. 사람은 결코 자연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람은 자연에 대한 하나의 "봉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선하고 완벽하게 창조하였다(창1:31).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피조세계를 사람에게 맡기셨다. 그런데 오늘날 모든 피조물들(자연환경)은 탄식하고 있다(롬 8:22). 선한 하나님의 피조물을 탄식하며 고통받는 피조물로 만든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2. 두 번째 창조 이야기
(창2장)
1. 일하는 낙원 : "에덴 동산에 두사 다스리며(경작하다)"(창 2:5+15).
최초의 사람 아담이 살았던 곳은 '에덴 동산'이었다(창 2:8). '에덴'(???)이라고 발음되는 이 히브리말은 '기쁨/환희'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히브리말 '에덴 동산'은 헬라말로 '파라다이스'이다(창 2:8, 15). 이 '파라다이스'라는 낱말은 본래 고대 페르시야의 말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어서 즐거움이 넘치는 정원, 공원'을 뜻한다.
이 에덴 동산, 즉 낙원은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곳인가? 낙원은 일하는 곳이요, 최초의 인간 아담도 일하는 농부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2장 5절의 '경작하다'와 15절의 '다스리며'라는 낱말은 같은 히브리말이 다르게 번역된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 '아바드'(???)는 기본적으로 '일하다/경작하다'라는 뜻이다. 낙원은 인간이 마냥 풍요와 쾌락을 즐기는 곳이 아니라, 손으로 흙을 파고 땀을 흘리며 노동해야 하는 곳이다. 사람은 노동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노동은 창세 때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정하신 창조질서에 속한 것이다. 이 점은 낙원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계속된다.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에서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는 것도 바로 이를 뜻한다. 노동자체는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진 벌도 아니고 죄의 삯도 아니다. 죄의 결과로 그 노동이 더욱 더 수고로워졌을 뿐이다. 노동은 본래부터 인간의 삶을 이루는 본질의 하나이며, 자기를 실현해 가는 도구로서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하나님의 일이다.
2. 인간창조 : "땅에서 나온 먼지와 생기 그래서 생령(생명체)이 되어"(창 2:7)
현재 우리 개역 성경은 창세기 2장 7절의 본래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본문을 히브리어 원문에 충실하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 "야웨 하나님이 땅의 먼지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된지라".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라는 간단한 언급으로 인간창조에 대한 기록이 끝을 맺고 있다. 그러나 우주창조에 주된 관심이 있는 첫 번째 창조 이야기와는 달리 두 번째 창조이야기에 와서는 인간창조에 초점이 모아져서 그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소개된다. 우리는 이 짤막한 한 본문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 대답을 해 볼 수 있다.
1)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인생의 허무함) : 먼지로 된 존재
개역성경의 '흙'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말 '아파르 민 하아다마'의 문자적인 의미는 '땅의 먼지'이다. 사람은 땅의 먼지로부터 온 존재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땅(아다마)도 아니고 먼지(아파르)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먼지'라는 부적당한 재료로 만들어진 무상한/허무한 존재라는 것이다 : "너는 먼지(아파르)이니 먼지(아파르)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숨이 없다면, 사람은 그저 먼지에 불과한 허무한 존재인 것이다(참조, 시 90:3; 103:14 등). 이러한 인생(인간)의 허무성은 전도서의 기자도 잘 보여주고 있다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1).
2) 인간은 땅과 공동운명체이다 : "아담(사람)과 아다마(땅)"
이 둘은 어근이 같다. 사람과 땅은 각각 히브리말로 '아담'과 '아다마'이다. 이것은 '아담'과 '아다마'가 한 뿌리에서 나온 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창세기 2장 5절에서 하나님은 땅(아다마)을 경작케 하려고 사람(아담)을 만드셨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과 땅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곧 '사람'과 '땅'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이다. 사람이 경작할 땅이 죽으면 우리 사람도 죽을 수 밖에 없고, 땅이 살아야 우리 사람도 산다는 뜻이다. 따라서 땅을 경작하는 일은 우리 인간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3)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이다 : "생명의 숨을 불어놓으시니"
개역성경에 '생령'이라고 번역된 히브리말 '네페쉬 하야'는 문자적으로 보면 '살아있는 존재(ein lebendige wesen/ a living being)'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인간 외의 동물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고 있다(창 2:19; 9:10,12등). '네페쉬 하야'가 '살아있는 존재 모두'를 뜻하고 있으므로 '생명체'로 번역하고 있는 표준새번역의 번역이 적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경이 인간도 동물도 모두 생명체로 부르고 있다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물에게도 생명의 숨이 있기는 하지만(창7:22),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것을 불어넣어준 것 같이 생명의 숨을 동물에게도 주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 중에서 사람에게만 특별히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 이것이 사람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와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숨'이 필요한 특별한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3.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17)
이 이야기는 가장 유명한 본문인 동시에 많은 의문점들을 갖게 하는 본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왜 이런 나무를 만드셨는가? 처음부터 이런 나무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의 타락도 없었을 것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최초의 사람이 불순종할 줄 모르고 그렇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전지(全知)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도대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또 무엇인가? 등등. 이외에 여러 가지 의문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들이 갖는 모든 질문들이 본문에 대하여 전부 올바른 것은 아니다. 본문을 다구치기 전에 먼저 이 본문이 갖는 의미에 귀를 기울여 보자.
1) 낙원에서는 본래 사람이 영생이 가능했었다(창 2:9)
8-9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사람을 낙원에 두시고 풍성한 과실을 맺게 해 주셨다. 그리고 낙원 한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를 두셨다. 창세기 3장 22절에 의하면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는 자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 이 본문은 물론 하나님께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가 이 생명나무의 실과도 먹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 우려가 되어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시켰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생명 나무의 실과를 금한 것은 타락 이후의 사건이고, 타락 이전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지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른 실과와 더불어 생명나무의 실과도 자유로이 따먹게 하였다.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2) 영생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낙원에서 자라나는 두 나무 가운데 생명나무가 먼저 언급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그 다음에 언급된다. 그러나 이어 나오는 중심 이야기에서는 생명나무 보다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생보다도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라는 점을 암시해 준다.
3) 인간은 하나님과 다르다 : 한계와 제한된 인간
하나님에 의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인 사람과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낙원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지으셨다는 사실 외에는 하나님과 커다란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은 생명나무를 자유로이 따먹고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도 있었고, 낙원이라는 완벽한 삶의 조건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다. 창세기 2장 16절의 '각종 나무의 실과'라는 표현에서 '각종'은 히브리말로 '모든 것/전부(콜, call)'를 의미한다. 모든 나무 실과를 따먹을 수 있었다. 그에게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만족하지 않고 열매까지도 먹으려 했다면, 인간의 욕심은 얼마가 지나친가! 모든 것이 허락되었으나 그러나 단 하나만 금지되었다.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만 금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단 한가지를 못하게 제한하므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마지막 금을 그으신 것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지만, 한 가지의 제한과 한계를 두신 하나님께 순종하므로써, 사람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제한성 내지는 의존성이라는 정당한 관계가 세워지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든지 간에, - 그것이 무엇이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금하다는 사실이다. - 금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써,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동시에 자신의 제한성을 수용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으로 하나님되게 하고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마지노 선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 사람의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모험
하나님은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면, 사람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물으실 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갖도록 해주셨다. 그 사람에게 금지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명령이 없으면, 사람에게도 자유가 없는 것이다. 명령이 일체 주어지지 않은 동물들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제한 하는 모험을 감행하신 것이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자유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낙원에서의 아담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고, 노력 여하에 따라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지음받았다.
4. 돕는 배필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 2:18)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에 직접 '돕는 베필'을 창조하였다. 이 돕는 베필에 해당되는 히브리말은 '에제르 크네그도'이다. 이 말은 우리말 성경에서 '돕는 배필'(개역), '거들짝'(공동번역),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새번역)으로 번역되어있다. '어제르'는 '돕는자'라는 뜻이다. 돕는 배필이란 다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돕는 반대자
'크레그도'는 '이와 반대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적용하면 돕는 배필이란 '돕는 반대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만일 남자가 존경을 받을 만하면 그의 아내는 '돕는자'(에제르)가 될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반대자(크레그도)가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부부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에 한 개체의 파괴는 곧 전체의 파과와 같은 것이며, 동시에 아내는 남편에 대하여 '돕는 반대자'이기 때문에 결국 '예'와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2) 동등한 돕는자
'크레그도'에는 '∼와 반대되는'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적용하면, 돕는 배필이란 '돕는 반대자'라는 의미이다. 남녀는 동등하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도우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즉 서로 '다르다/ 동등하며', '열등하지 않고 상호 보충적'이다. 결국 돕는 배필이란 '완전한 짝을 이루어 서로 돕는 동반 관계'를 말한다.
3) 신적 도움을 주는 대등한 돕는자
'에제르'는 주로 하나님의 도움을 언급할 때 쓰는 말이다(출 18:4; 신 33:7; 시 121:1 등). 창세기 2장 18절은 남자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으로 살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매개하고 통로가 된다. 돕는 배필이란 하나님의 도움을 주는 대등한 돕는자라는 뜻이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야웨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3. 인간의 타락
(창세기 3 장)
1. 악의 기원(?) : 악의 현실을 전제함
보통 창세기 3장은 악 또는 죄의 기원을 밝혀주는 본문으로 읽혀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본문은 악(죄) 그 자체의 존재와 기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악을 하나의 현실로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기원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문제 삼는 것조차 어리석은 행위로 간주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이렇듯 하나님의 기원이 신비의 영역으로 가려 있듯이, 그 악도 인간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신비로서 그 기원이 결코 해명되지 않는 불투명한 실존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여 타락한 이후 하나님은 사람(아담과 하와)에게는 계속해서 심문을 한다. 그러나 뱀에게는 "왜 유혹하고 속였는지"를 전혀 추궁하지 않으신다. 뱀에게 심문이 없다는 것은 악의 기원이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창세기 3장의 이야기는 악의 기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의 현실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악의 현실에 살고 있는 사람의 자세이다.
2. 여자만의 책임(?): 남자도 공범자임
흔히 창세기 3장은 죄라는 것을 인간사회에 들여다 놓은 장본인이 바로 여자 혼자였으며, 그 책임도 여자에게만 있다고 말하는 본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이해는 결국 많은 여성 해방론자들로 하여금 인간 타락 이야기를 비롯하여 나아가 성경 자체를 여성 운동의 적이 되는 책으로 간주하게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본문을 객관적으로 보면, 오해임이 들어난다.
1) 뱀은 여자에게 말하면서 일관성있게 복수 대명사(1절 : "너희더러"/ 3절 "너희는 먹지도 말고"/ 4절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뱀이 여자를 유혹하고 있는 동안 줄곧 남자는 그의 아내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을 암시한다.
2)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6절)라는 구절에서 '함께 한'이란 공간적 접촉을 의미하는 전치사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함께 있던 남편'에게 주었다는 뜻이 된다. 그 여자가 실과를 따먹을 당시 그 남편도 그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음을 보여준다.
3) 더욱이 과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금지 명령을 받은 사람은 남자 혼자였다(창 2:17; 3:17).
이상의 몇 가지 사실에 의하면 여자는 물론 남자도 범죄의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고, 함께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단지 주도권만을 여자가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남자도 여자와 더불어 공동책임을 지닌 공범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금지 명령을 받은 자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은 여자보다는 오히려 남자의 책임을 더 무겁게 하고 있다.
3. 바로 우리 이야기임
창세기 3장의 타락 이야기는 오늘의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첫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고, 이미 흘러간 과거의 사건만도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과거의 한 인물일 뿐 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인간을 대표한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라는 히브리말은 예외없이 정관사 '하'가 붙어서 나온다(창 3:9, 12, 17, 20, 21, 22). 여기서 아담이라는 단어는 '특정한 한사람'을 지목하는 고유명가("그 아담")가 아니라, 그 낱말의 원뜻대로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그 사람")로 쓰인 것이다. 여기서의 아담은 과거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타락 이야기는 우리(사람)가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바로 오늘 우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락 이야기에서 말하는 우리(인간)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첫째, 인간은 하나님의 호의, 배려, 자비에 대하여 불신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과실을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계명)에 불순종하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충동을 가진 존재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같이"되고 싶어하는 인간의 충동을 부채질하는 뱀이 유혹에서 나타난다.
셋째, 인간은 죄지은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본연의 위치를 떠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 이러한 죄의 결과로 인간은 고통스럽고 암울한 현실에서 살게 되었다. 즉 사람들이 겪는 고통스러운 삶의 근원은 바로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자신들의 죄에 있다는 것이다.
넷째,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는 곳에서 인간의 삶도 정지한다. 인간의 죄의 역사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시는 행위에서 쉽게 발견된다.
4. 가인과 아벨 이야기
(창세기 4장)
1. 가인과 그리고 그 제물
가인은 농부였기에 땅에서 난 곡식을 야웨께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기에 양떼 가운데서 그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그런데 야웨께서는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왜 그랬을까? 전통적인 한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물의 종류에 있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피에 있으며, 피가 죄를 속하기 때문에(레 17; 11) 하나님은 피흘림이 없는 가인의 제물보다는 피의 제물인 아벨의 것을 받으신다는 설명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농부인 가인에게는 너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레위기 2장 1절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농부인 가인에게는 소제(곡식제물)는 번제(희생제물)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제사에 있어 동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결국 곡식제물과 희생제물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된다. 두 사람이 각각 드린 서로 다른 제물의 종류가 하나님에게서 제물을 열납하시는지 여부와 관계가 없다면, 이 사건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1)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 제물의 열납 여부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야웨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런 조건이나 전제도 없이 자유롭게 선택행위를 하시는 분이다.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인간은 왜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으셨느가를 물을 자격이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삼으신 것은 가인의 제물 자체가 아니라 가인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몹시 화를 낸 태도였다(7절).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일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가인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 믿음의 제물: 아벨은 의로왔으나 가인은 악한 자였고(요일 3:12; 유 1:11),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기 때문에(히 11:4), 하나님은 아벨의 믿음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약성경의 이해는 창세기 4장에서 그 예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라서 신약의 구약본문 해석은 존중되야 한다.
3)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의 제물보다 세상에서의 삶: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열납 여부를 기록하는 본문의 기록순서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야웨께서 아벨과 그리고 그 제물'은열납 하셨으나, '가인과 그리고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4-5절). 하나님은 제물 그 자체보다는 제물을 드리는 자의 삶을 '먼저' 살피신다. 하나님은 아벨을 기뻐 받으신 다음에야, 그 이유 때문에 아벨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으신 것이며, 또 가인을 기뻐 받지 않으신 다음에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가인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받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오기 이전, 즉 세상 속에서의 문제가 있었음이 암시되어 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7절).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보다 그 제물을 바치는 사람인 가인의 삶을 중요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드려지는 제물 자체가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제물이 필요치 않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1).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오기 전까지의 삶이다. 일상적인 삶이 선한 삶이면, 그 사람과 그리고 그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다.
2.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한 아담에게 먼저 찾아가셔서 "아담아, 내가 어디 있느냐?"하신 것과 같이, 아우 아벨을 쳐죽인 가인에게도 가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신다. 모든 사건을 이미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고백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하며 하나님께 대든다. 본래 인간 창조의 목적은 약자인 아우를 지키는 것이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약자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자신보다 약한자를 돌보고 지키는 것이 사람에게 주어진 창조 질서요 의무인 것이다. 형(힘이 있는 자)은 아우(힘없는 자)를 지켜야 한다. 형 가인은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이다.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고 무관심한 오늘의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하고 지금도 물으신다.
3.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것: "아우의 핏소리가 내가 호소하느니라"(창 4:10)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느니라"(레 17:11)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피는 곧 생명을 뜻한다. 생명은 오로지 새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파괴는 인간의 권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행위가 된다. 땅에 흘려진 피는 땅 속에 묻혀 있을 수 없다. 그 피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며 생명의 주님께 호소한다. 생명이란, 타인의 생명이건 자신의 생명이건,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생명인 자신을 파괴하는 자실행위도 하나님에 대한 범죄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핏소리가 내게(하나님에게) 호소한다는 것"은 제 아무리 은밀히 행해진 범죄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보고 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4. 야웨의 보살핌이 없는 삶: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창 4:14)
아우 아벨을 죽인 살인자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은 땅이 저주를 받게되어, 농부인 가인에게 다시는 경작지의 소산이 없다는 것이다(창 3:11-12). 또 하나의 형벌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 그에게는 거처없이 떠도는 생활만이 있다는 것이다(창 3:12). 그런데 가인에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살인자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며 견딜 수 없나이다"(13절)하며 하소연한다. 가인은 주의 낯을 뵈올 수 없게 되어 자신의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는 마지막 보호벽을 상실한 셈이다. 마치 양 떼들이 그들을 보호하던 울타리가 걷히므로 이리나 늑대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물러난 삶, 곧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없는 삶은 하나님의 보호막에서 벗어나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악한 세력(벧전 5:8) 앞에 서 있는 것과 같다.
5. 무릇 나를 만나는 자는 누구인가?: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
지금까지 언급된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4명 뿐이다.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되었으므로 3명만 남았을 뿐인데, 이들 3명 외의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아벨이 죽기까지 성경에서 아담과 하와와 가인과 아벨 등 네 명만이 언급된 것은 그 때까지 이들 4명만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성경은 이 네 사람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가인이 두려워하는 자가 아벨의 죽음에 대하여 복수를 꾀하는 아담의 다른 자손들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추정에 지나지 않고 확인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언급된 4명의 등장인물 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뿐이다. 성경은 "그들이 누구의 후손인가?"라는 우리의 호기심에 침묵한다. 성경은 우리의 호기심에 대답하는 책이 아니며, 또한 성경이 주고자 하는 메시지도 그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면은 연극의 경우를 예를 들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죄로 인하여 죽음에 처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救援史)"라는 주제의 연극무대가 막을 올렸다. 등장인물은 모든 인류다. 많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올라왔다. 그 배우들 가운데 현재의 주인공들은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과 아벨이다. 그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진다. 그러나 그 네 명의 주인공들 뒤에는 또 다른 많은 배우들이 서 있다. 아직 스포트라이트가 비쳐지지 않아 관객들의 눈에는 그 정체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들이 바로 성경에 전제된 "무릇 나를 만날 자"인 것이다.
6. 가인의 표: "가인에게 표를 주사"(창 4:15)
가인의 표가 '문신'이나 '머리모양'같은 것이 아니었겠는가!"라는 추측들이 있지만, 그 표가 실제 어떤 것이 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표는 가인을 해하려는 자에게 그가 야웨의 특별한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는 그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가인의 받은 표는 범죄자로서의 낙인이 아니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의 표이다. 이것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그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야웨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문책하시고 벌하시지만,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만큼은 보호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를 보호해 주심으로써, 피의 복수라는 악순환의 사슬을 근본적으로 막으시고, 어떠한 명분으로도 인간이 같은 인간을 죽일 권리를 갖지 못하게 하시며, 모든 생명을 보호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7. 라멕의 노래: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 라멕을 위하여는 77배"(창 4:23-24)
가인의 후손인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말하였다.
라멕의 아내들은,
내가 말할 때에 귀를 기울여라.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을 일흔 일곱 갑절이다.
(창 3:23-24. 표준새번역)
에덴을 떠난 인간들의 파괴된 사회상이 라멕의 복수 노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덴에서의 타락(창 3장)과 형제살인(창 42장) 이후로 점차 심가해지는 죄의 양상과 무질서한 삶의 모습이 부각된다. 개역성경에서 "창상"(상처: 표준새번역)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폐짜"는 고작 타박상이나 멍이 들 정도의 위해라고 할 수 있다. 나이 어린 소년에게 타박상을 입혔다고 해서 라멕은 그를 죽여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를 해하는 자는 그 벌이 77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가인의 7배와 비교하여 라멕의 경우는 77배로 증폭되었고, 가인의 경우 복수 수행을 야웨 하나님이 맡기고 있는 것과는 달리, 라멕의 경우는 스스로 복수수행을 하겠다고 말한다. 복수는 야웨 하나님의 고유권한이다. "보수(원수갚는 것)는 내것이라 … 내가 갚으리로다"(신 32:35; 참조, 롬 12:19). 또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또는 일흔 일곱 번)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면배치된다(마 18:22). 낙원 밖에 있는 인간의 첫 작품은 형제살해였으며, 그 이후 죄는 점점 증대한다. 사소한 일로 하나님의 생명(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고, 야웨의 고유권한을 침해하며, 인간 스스로 복수를 서슴치 않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품(낙원)을 떠난 인간은 악의 늪으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5. 아담의 족보
(창 5장)
1.야웨의 종교는 인류의 원(原)종교: "그 때에 야웨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창 4:16-26은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이라는 두 가지 족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가인의 후손에 대한 기록에서는 조상에 해당되는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여(4:16) 아주 포악한 보복살륙을 자랑하는 라멕의 노래로 끝맺는다(4:23-24). 이에 반해 셋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처음부터 야웨 예배로 시작한다(4:26). 야웨 하나님은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인 '셋'을 주심으로써, 구속사의 단절이라는 위기를 막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속해서 이어가신다. 셋의 후손인 '에노스'는 그 말뜻이 '인간/사람'이다. 여기에서 '에노스의 때', 즉 '인간의 때에 사람들이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라는 말이 암시하는 것은 인류의 생성과 더불어 야웨 종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야웨라는 이름이 모세에게서 비로소 이스라엘에게 계시되었지만(출 6:2-3), 야웨 종교는 인류의 역사 처음부터 있었다. 야웨 종교는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원(原) 종교'이다.
2.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은 보존된다: "자기 형상과 같은"(창 5: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창세기 5:3은 대답한다.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을 낳았다는 언급은 타락한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 보존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유전되었다.
3.영생의 첫 그림자인 에녹: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창 5:24)
아담의 7대 후손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친밀한 교제를 뜻한다. 하나님과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은 에녹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믿으며 살았고, 그 결과로 죽지 않았다. 동사 '라카크: 데려가다'(주어: 하나님, 목적어: 사람)는 피안적 생활 영역으로 옮기는 것을 나타내는 전문적인 신학 용어이다(왕하 2:10; 시 49:15). 에녹은 후대의 엘리야처럼(왕하 2:1,9-11) 죽지않고 사라졌다. 에녹의 승천 이야기는 죽음의 세력에도 제한받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에녹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들이 갖는 영생의 첫 그림자인 셈이다. 극소수의 경건한 자(예, 에녹, 엘리야)에게만 주어졌던 영생이 오늘날에 와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주어졌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4.창조 원리에 순응하는 삶이 장수한다
성경은 선조들의 수명을 계산할 때, 아담에서 노아 사이는 700살에서 1000살로, 노아에서 아브라함 사이는 200살에서 600살로,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등)은 100살에서 200살로, 현재에는 70살에서 80살(시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로 계산하고 있다. 창조 때의 출발점에서 멀어짐에 따라 인간의 본래적인 놀라운 생명력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는 죄에 의하여 작용된 죽음이 서서히 인간의 본래적인 신체적 저항력을 분쇄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난 번 창 2:9에 관한 설명에서 지적하였듯이,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낙원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원래 영생이 가능하도록 피조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력을 단축시켜 버린 셈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건강이나 생명 연장을 위하여 작은 노력을 총동원해 보지만, 실제적으로 큰 유익이 없어 보인다. 인간을 향한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창조 목적(창조 원리)에 사람의 초점을 맞추어 살 때만, 건강과 장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6.홍수 이야기1
(창6장)
1.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창 6:1-4)
이 본문은 구약 성경의 본문들 가운데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달들에 결혼하며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던 '용사'라는 자식을 낳았다는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법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르키는가?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의 인간들을 가리킨다. 이집트왕 바로(창 12:10-20)나 다윗왕(삼하 11장)처럼 남다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아 "자기들이 좋아하는 대로"(닥치는 대로) 여자를 취하는 등(창 6:2) 자기 욕심과 욕망대로 움직이는 도덕적 타락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타락에 대하여 하나님이 개입하여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인정하도록 처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하나님과 교제하던 경건한 셋의 후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경건하지 못한(타락한) 가인의 후손들로 보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자 셋의 후손들은 점차 하나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가인의 후손들과 동화되어 갔다.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의 악한 죄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이 교제하며 통혼(通婚)까지 행하였다. 창 6:4은 당시에 많은 타락한 자들[네피림: 히브리어 동사 '나팔'(떨어지다)에서 유래했으며 문자적으로는 '(하늘에서 부터) 떨어진다'라는 뜻이다] 이 땅에 있었고 하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의 결혼 때문에 땅이 점점 더 타락하고 있었음을 가리켜 준다.
셋째, 천상의 존재들을 가리킨다. 천상적 존재들(하나님의 아들들)과 지상적 존재들(사람의 딸들)의 결합으로 인하여 그 지상적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영(성령)이라는 생명력이 본래 창조 때 의도되었던 것보다 지나치게 많이 부여됨으로써 창조 대 설정해 놓은 창조 질서가 파괴되었다. 천상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갈라 놓았던 포괄적인 질서들이 파괴된 것이다. 전 피조 세계의 타락이 극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죄가 이렇게 만연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서 홍수라는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인류의 범죄는 한 남녀의 차원(창 3장)에서 시작하여 형제의 차원(창 4장)으로 진척되었고, 이는 어떤 특정 집단의 차원(창 4:23-24)으로 결국 온 인류의 차원(창 6:1-4)으로 확산되었다. 창 6:1-4의 본문은 죄의 확산의 극치를 보여준다. 즉 인간의 타락이 근단적으로 증대되어 그 파장어 마침내는 천상의 영역과 지상의 영역, 그리고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사이를 갈라놓는, 이른 바 가장 포괄적이고도 가장 근원적이며 가장 우주적인 질서까지도, 파괴한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국 인류는 하나님의 홍수 대심판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홍수는 인류의 죄가 극에 도달하였을 때 내린 불가피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2. 하나님의 한탄과 조심: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다음에 근심하시고"(창 6:6)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하나님이 한탄하셨다는 것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죄를 지을 것을 모르시고 사람을 지으셨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묘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생(사람)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사람의 아들)가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가 없으시다"(민 23:19; 삼상 15:29). 여기서 사용된 '한탄하다'라는 동사는 "유감으로 생각하다/고통스러워하다"라는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신다'라는 하나님의 강한 심정적 동요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멸절하려는 중대한 결정을 방관적이고 냉정한 무관심 속에서 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인 대홍수는 하나님에게도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준 사건이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노아(창 6:8)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 이 본문에 의하면 노아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언급도 없다. 다만 하나님의 눈에 들어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 여기에 구원의 신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선택받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감추어진 비밀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죄의 정체가 신비로운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자비도 신비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것이다.
4. 노아의 방주(창 6:14-22)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쓸어버린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창 6:13) 그 준비를 일러주신다(창 6:14,21).보통 방주(方舟)라고 알려져 있는 이 배의 히브리어 원어는 '상자'라는 뜻을 가진 '테바'이다. 이 단어는 출 2:3에서는 역청을 바른 왕골 갈대 상자를 가르킨다. 이 낱말은 모세의 구출 이야기와 여기의 홍수 이야기에서만 사용된다. 이 방주는 갓난 아기인 모세를 태워서 그의 생명을 구하는 도구로 쓰인 것과 같이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장치이다. 방주에는 조타 장치(운전대)가 없다. 이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물로부터 구원받는 방법은 오로지 방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께서 인도와 보호하심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방주의 크기를 제시하실 뿐만 아니라 방주에 승선할 사람들의 명단을 일일이 부르셨다(6:18). 방주의 손님으로 초대된 사람들은 생명선에 탑승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의 방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탑승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방주인 교회도 하나님이 하나하나 부르셔서 모든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다.
7. 홍수 이야기 2
(창 7-8 장)
1. 노아의 의로움: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창 7:1)
우리말로 '의로움'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짜디크'는 윤리적 의미의 '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여 있다면, 즉 하나님을 믿고 신뢰한다면 그는 '의로운 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로움(義)은 법률적 개념이 아니라 신학적인 관계 개념이다: "아브람이 야웨를 믿으니 야웨께서 이를 그의 의(쩨다카)로 여기시고"(창 15:6).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 마른 땅 위에 방주를 건조하라고 하는 명령에도(창 6:14) 한 마디의 질문도 그리고 반문도 없이 묵묵히 순복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계속해서 순종하였다는 점이 창 7:5 그리고 9절 등에도 언급되고 있다. 노아는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에 데려가신 에녹같이(창 5: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였다(창 6:9). 노아는 처음 시대의 마지막 인물로서 동시에 새 시대를 여는 자로서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마지막 인물이었다. 이후로는 아브라함만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요구된다: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노아에게 내려진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주 건조 명령은 일종의 순종과 신앙의 시험이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히 11:7). 노아는 이성과 지성이라는 합리성의 걸림돌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절대 순복하므로 신앙의 시험을 통과하며 이로써 '의롭다'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2.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노아의 대홍수로 세상은 창조 이전의 혼돈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창조 이전에는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였다"(창 1:2). 혼돈의 물로 둘러싸여 있는 세상을 하나님은 하늘 한 가운데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었다(창 1:6-7).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하나님이 설치하신 궁창이라는 경계로 나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여서 질서를 갖춘 오늘과 같은 세계(Cosmos)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시 104:9). 그러나 대 홍수 사건으로 큰 깊음의 샘들이 터져서 궁창 아래의 물이 솟구치고 하늘의 창들이 열려서 궁창 위의 물이 마구 쏟아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숨쉬는 것들을 쓸어버리기 위하여 빛의 창조로 밀려났던 태초의 혼돈(Chaos) 상태(창 1:2)로 다시 되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노아 때의 홍수는 우주 전체에 미치는 대재난인 것이다. 이는 전 세계 구조의 붕괴로서 피조 세계는 다시 혼돈 속에 빠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혼돈의 세력을 묶어 놓으셨기 때문에 우주의 질서가 세워지고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하고(창 6:12),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하게 되어(6:11) 하나님의 우주 질서의 보존 노력에도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묶어 놓았던 혼돈의 세력(물)을 풀어놓았으며 이것은 곧 세상에게 심판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관심과 보호가 잠시라도 중단되면, 인간은 혼돈의 먹이가 되고 만다.
3. 대홍수 후의 첫 행위: "노아가 야웨를 위하여 단을 쌓고"(창 8:20)
노아의 가족은 홍수라는 대재난에서 구원된 후 먼저 단을 쌓았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온 세상을 멸하시는 가운데에서 노아와 그의 가정을 특별히 구원하여 주신데 대한 감사에 예배이다. 동시에 새롭게 얻은 삶을 계속 지켜 주실 것을 청하는 예배이다. 노아는 깨끗한 짐승 가운데서 희생 제물을 골라 번제로 바친다. 번제는 희생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로 이런 제사는 곧 제사 드리는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갖는다. "야웨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 8:21)는 표현은 창세기 전체에서 여기서만 나타난다. '희생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였다'라는 표현은 제사가 야웨께 받아 들여졌음을 의미한다(출 29:18; 레 1:9; 겔 20:41).
4. 하나님의 인내: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하나님은 노아의 희생 제물을 받고 만족하시며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고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신다. 하나님이 이렇게 결심하게 된 동기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 이전에는 이것이 심판의 이유였다(창 6:5,11-13). 그러나 대홍수 이후에는 하나님 쪽에서 마음을 바꾸신다. 이전에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하셨지만, 이후에는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런 심판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을 그의 악한 행위대로 벌한다면 아마 역사 속에서 노아 홍수 같은 심판은 매일매일 거듭되어야 할 것이다. 태어나면서 어려서부터 이미 기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악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홍수로써 온 세상을 쓸어버린 그 놀라운 힘을 종말에 이루어진 심판 때("땅이 있을 동안에는")까지 사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창 8:22). 인간의 죄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과 처벌 대신에 인간과 그의 잘못을 길이 참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인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5. 노아의 홍수가 갖는 의미
1) 노아의 홍수 심판은 죄의 결과이며 최후 심판에 대한 경고이다: 홍수는 자연적 재해나 재난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또한 종말의 날에 일어날 최후의 심판을 예시하고 있다.
2) 노아의 홍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에 대한 은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은 아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관용이 드러난다.
3) 노아의 홍수는 심판 가운데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이 죄가운데 죄를 의식도 못한 채 살았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얻음을 지킨 사람은 심판 때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신앙은 심판의 한 가운데에서도 구원을 가능케 한다.
8. 홍수 이야기 3
(창세기 9 장)
1. 새 시대의 새 축복(창 9:1)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의 첫 번째 창조 명령이 여전히 유효한가? 세상에 사람의 죄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홍수 심판을 받은 변화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이 여전히 가능한 것인가? 이에 대해 창 9:1은 대답한다. 새로운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축복은 홍수 이전의 인간에게 주어진 축복과 거의 같다. 새 시대에도 하나님의 축복은 가능한 것이다. 홍수로 말미암아 옛 시대는 심판 받아 물러갔고 새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하나님의 새로운 축복으로 개시된다. 홍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축복은 변함이 없다. 축복은 사람의 특정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댓가라기보다는 무조건적으로 처음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사람은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항상 기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늘 슬프고 불평하며 지내는 것이다.
2. 피조물 간의 평화가 사라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창 9: 3)
홍수 이전과 이후의 차이 중의 하나는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홍수 이전 사람에게 허락된 음식은 식물로 국한되었고, 모든 동물의 먹이도 식물이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이제 동물들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창 9:2). 인간과 동물 사이에 유지되었던 평화 공존의 관계는 옛말이 되어 버렸다. 종말의 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질 때, 피조물간에 있는 반목과 살생을 종식될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를 노래하고 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 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사 11:6-8).
3. 생명은 하나님의 것: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으니라"(창 9: 6)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생명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침해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6절의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라는 본문을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을 통하여(히브리어: 베) 그 피를 흘릴 것이다"로 보아서, 살인자에 대한 사형 제도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본문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누구든지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은) 사람 때문에(히브리어: 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도 볼 수 있다. 이 본문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보여주는 본문이 아니다. 모든 살인은,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든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든 간에, 하나님과 그 지배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고문을 포함한 일체의 폭력과 사형 제도까지도 이런 측면에서 새롭게 고려되고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4. 영원한 언약: "무지개"(창 9: 8-17)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 및 지상의 모든 생물과 언약을 체결하신다(9:9-10). 보통 언약계약이라 하며, 계약 당사자들 간에 서로의 의무를 담당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언약은 세속적인 언약과는 다르다. 인간들이 지켜야 할 내용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폭력에도 불구하고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9:11). 하나님이 여기서 체결해 주신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모든 민족, 모든 인류와 맺은 언약을 대표하는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그 은혜 언약의 한 파트너이다.
언약의 표지로 주어진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케쉐트로, 이 뜻은 원래 '활'을 의미한다. 일종의 무기였다. 이 무기는 고대 신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에누마 엘리쉬 등의 신화들에서 활은 전쟁의 신들의 무기였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도구였다. 여기서는 신의 호전성과 적의를 나타내던 상징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의 표지가 된 것이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약속을 재확인하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 감사드리게 되는 역할을 한다.
5. 노아의 실수와 자식들의 태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지라"(창 9: 21)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노아의 술취함은 그가 최초의 포도재배자였기에 포도주의 취하게 하는 성분에 대하여 몰랐을 것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그의 실수를 드러낸 사건이다. 노아는 벌거벗은 채로 술에 만취되어 누워 있었다. 함은 아버지의 수취(성기)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으나(9:22),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수취를 보지 않고 옷으로 그 하체를 덮었다(9:23). 노아의 실수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들의 서로 다른 태도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이 이야기는 초점은 노아의 실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의 태도가 그 초점이다. 부모(여기서는 노아)가 실수로 인하여 그 인간적, 사회적 위엄을 상실하였을 때, 자식이 그 부모의 상실된 위엄을 변호하고 방어하며 새롭게 재건하는 일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보고", 또 형제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는 것이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 포기이다. 함은 그 책임을 포기하였으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명예와 권위가 손상된 것을 회복시켜 주려고 하였다. 부모(또는 어른, 백발의 노인)에 대한 효도와 존경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절대로 필요한 계명이며(제5계명, 출 20:12), 이 점이 왜 노아가 그를 모욕한 아들을 저주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책임을 다하는 것은 장수의 축복과도 관련된다. 아무튼 여기서 또 하나 배우는 사실이 있다. 허물을 비난하는 사람은 저주의 나락에 떨어지지만,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축복을 소유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9. 바벨탑 사건(1)
(창세기 11 장)
1. 언어의 다양성은 하나님의 심판(창 11:9)
창 11:1 "온 땅의 구음(사파)이 하나이요 언어(드바림)가 하나이었더라"에 의하면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원래 언어가 하나였다는 언어의 본질을 말한다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다양한 민족들이 생겨낳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시작하는 말이다. 언어가 다양해져서 인간들의 의사 소통이 단절된 것은 하나님과의 조화를 깨뜨린 결과이다. 사람들과의 언어의 다양성으로 인한 의사 소통의 단절은 감히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이 요 심판이다.
그런데 스바냐 3:9 - "그 때(종말의 때)에 내가(야웨) 열방(이방민족들)의 입술을 깨끗게하여(죄의 정화를 뜻하며 야웨 예배를 위한 전제가 됨) 그들(이방민족들)로 다 나 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일심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섬기게 하리니" -에서 같이 종말의 때에는 언어로 인한 장애는 제거된다. 이 땅의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하나님을 믿는 모든 나라 사람들)과 함께 서로 의사가 소통이 되어 하나님 야웨를 섬기게 된다. 한 분이신 야웨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만이 인류의 언어로 인한 혼합을 제거할 수 있다. 이미 이 일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서 예시적으로 이루어졌다(행 2:1-13).
2. 인간의 교만: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
바벨탑 사건의 무대는 시날 평지이다. '시날'이란 지명은 메소포타미아 지방 전체(오늘의 이라크)를 가리킨다.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라는 표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발달된 문명을 암시한다. 건축 재료로 돌 대신에 진흙을 구어 만든 벽돌과 그 틈을 메꾸는 것으로 진흙 대신 역청이 사용된다. 이는 새로운 문명에로의 돌입을 의미한다. 역청을 발라 쌓아 올린 진흙의 벽돌 구조물들은 놀랄 만큼 견고하여 수천 년을 지탱하였다.
4절에서 사람들의 의도가 드러난다. 사람들은 도시(성)와 탑(대)을 쌓아 세워서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한다. "하늘에 닿는다"라는 표현은 '아주 높은 위치'를 의미한다(신 1:28). 여기서 말하는 탑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Ziggurat)를 말하는 것이다. 지구라트는 구운 벽돌로 높이 쌓아(약 91.5m 높이) 올린 피라미드 구조의 층계식 건축물로서 그 꼭대기에는 신전이나 제단이 있었다. 이렇게 높은 탑은 메소포타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로 간주되었다. 이 탑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며, 그 꼭대기에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한 제단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바로 "우리 이름을 내고"가 문제가 된다. 이를 직역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짖자"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작명은 작명받는 자에 대한 작명자의 지배권(창 2:19-3:20)과 소유권(왕하 23:24)을 의미한다. 이들은 그 누구의 지배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사람의 이름을 지어주는 진정한 작명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며, 사람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창 12:2; 삼하 7:9). 이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살아보겠다는 자기 교만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전형적인 교만과 오만이다.
10. 바벨탑 사건(2)
(창세기 11 장)
1. 하나님의 초월성과 위대성: "야웨께서 강림하셨더라"(창 9:6)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쌓고 있는 도시와 탑을 보시려고 친히 내려오셨다는 본문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의 초월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하늘 높이에 탑을 쌓는다. 인간은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가장 높이 탑을 쌓아 올린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장면을 조사하시려고 한참(?) 내려오셔야만 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된다.
둘째, 하나님의 위대성이다. 하늘에까지 닿을 정도의 거대한 건축 사업이 무소부재하신 창조주 야웨 하나님의 천리안적(?) 눈에도 잘 포착되지도 않아서 야웨께서는 그것을 보시려고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엄청난 프로젝트조차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비교도 되지 못한다.
2. 하나님의 처벌은 동시에 보호조치이다: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창 11:6-7)
하나님이 없이 인간들끼리만 결합하게 될 때 인간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게 된다. 그 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을 정도의 방종에 빠지게 된다. 이것을 방치해 둘 경우 타락은 명약관화한 일이며, 분명히 더욱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면 이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한 처벌을 내리게 될 것이다. 더 혹독한 처벌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못할 일이 없는' 인간의 잘못된 단결은 인간을 멸망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의사 소통의 수단인 언어를 혼잡케 하는 방법으로 거들을 처벌하신다. 언어의 혼란과 이로 인한 인류의 분산은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벌인 동시에 인류에 대한 보호조치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가진 한계선 안으로 인간을 되돌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처벌은 큰 심판을 모면케 하는 일종의 하나님의 은총의 배려일 수도 있다.
3.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교만: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창 11:8-9)
하나님은 문명의 발달 그 자체를 문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 시대 과학 지식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도시와 탑이라는 건축물을 파괴하지 않으셨고, 건축하는 사람들을 언어로 혼잡케 함으로써 흩으셨다. 인간의 운명이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문명을 주도하는 인간의 성격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떠나려는 유혹이 강해진다. 문명의 발달이 하나님의 입지를 축소시킨다면, 그 문명은 바로 바벨의 문명이다. 이러한 문명을 세운 주체인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성을 쌓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인간 중심적으로 도시, 국가 또는 세계를 건설하려고 할 때, 그 결과는 인류의 혼란으로 나타난다. 오늘의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과학 문명으로 우주까지 정복할지 몰라도, 그 과학 문명으로 인한 인간의 교만으로 인류가 자멸할 수도 있음을 앞질러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분문이다. 하나님 없는 모든 문명은 인류의 파괴만을 자초할 것이다.
11. 아브람의 소명과 실수
(창세기 12장)
1.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
-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창 12:1)
창세기 1장부터 11장은 인류의 구원역사를 다룬 부분이다. 창세기 12장부터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라는 족장들에 관하여 기록해주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민족의 역사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바로 아브람의 소명 사건이다(창 12:1-3). 족장시대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선택하여 그의 구원사역을 새롭게 시작하시는 때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인류를 전체적으로 다루었으나 이 시대에는 특별히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인류의 구원이 한 사람의 선택으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아브람은 75세에 부름을 받았다(창 12:4). 그가 이 나이가 되기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 아브람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철저히 침묵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이후의 삶이다. 이제부터의 삶이 아브람이 살아야 할 진정한 생애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신다. 본토는 아브람의 삶의 중심지인 고향이고, 친척과 아비 집은 그의 보호막이 되는 피를 나눈 사람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과거 그가 몸담고 있던 지연공동체(地緣共同? : 본토)와 혈연공동체(血緣共同? : 친척, 아비집)를 벗어나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 이전의 아브람은 사람의 보호 속에서만 살아간 자연인(自然人)이었다. 그러나 부름 이후의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인생을 건 신앙인(信仰人)으로 탈바꿈 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사건은 아브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가야할 땅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는다. 매순간 하나님의 손가락에만 의지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2.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
- 땅, 민족과 복의 근원(창 12:1-3)
하나님께서 목적지를 지시하시지 않고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지만 여기에는 은혜로운 약속이 함께 주어진다. 이 약속에서 핵심적인 말은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있는 "축복/복"이란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소개되는 하나님의 축복(베라카)은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이것은 인간의 세상살이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면 장수, 부귀, 평안, 풍년의 수확, 자녀의 번성함 등을 말한다(창 24:35-36; 레 26:4-13). 구약성경은 이러한 축복을 제공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3절에서 다섯 번이 강조되는 "내가"라는 외침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인 땅의 소유, 민족의 형성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가능해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브람은 소유하고 있던 땅도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온 유랑하는 형편에 놓여있었고, 약속받은 자의 아내 "사래"는 후손 번성의 가능성이 단절된 불임여성이었기 때문이다(창 11:30). 게다가 아브람은 자신의 정착지가 없이 길을 떠나는 "나그네(게르)"였다. 당시 나그네는 원주민들과 함께 살지만 아무런 법적인 보호나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원주민들이 베푸는 호의에만 의지하여 붙어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고아나 과부와 더불어 이런 나그네도 특별히 돌보도록 명하고 있다. 아브람이 이런 나그네 신분이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복의 근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약속은 "믿음"없이는 받을 수 없으며(히 11:8),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진 일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한 목적이 세 번째 약속에서 드러난다. 아브람을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체험한 자들은 이제 그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영적인 축복이든 물질적인 축복이든,
이러한 축복을 나누는 것이 "복의 근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개인이나 가정, 특정 교파나 단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해 축복을 내리시는 것이다.
3. 아브람의 순종 - "야웨의 말씀을 좇아갔고"(창 12:4)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였고, 불가능에 가까운 약속을 받아들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도 못하면서 떠났다.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이런 행동을 가능케 한 것이다. 믿음이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고,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4. 약속의 땅에서 쌓은 최초의 제단
- "야웨를 위하여 단을 쌓고" (창 12:7)
약속의 땅이 바로 가나안이었음은 7절이 일러주고 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아브람이 한 최초의 행위는 야웨를 위하여 제단을 쌓는 일이었다. 홍수라는 심판에서 구원받은 후 노아가 하나님께 제단 쌓는 일을 최우선으로 한 것 같이(창 8:20) 아브람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아마 그는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언젠가는 그의 자손들이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상징적으로 단을 쌓은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의 첫걸음 닿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5.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 :
-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창 12:10)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10절에서는 기근이란 말을 두 번씩 씀으로써 아브람과 그의 가솔이 흉년으로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알려준다. 흉년이 들었을 때 가나안 지방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애굽으로 가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창 41:54-57). 아브람도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향한다.
첫째, 여기서 아브람은 야웨께서 지시한 땅을 떠날 때, 먼저 그 일이 옳을 일인지를 한번쯤 야웨께 물었어야 했다. 야웨의 인도하심을 받아 오던 사람이 상황이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자기의 뜻대로 쉽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잘못이다.
둘째, 아브람이 먹거리를 해결할 곳으로 애굽을 택한 것도 잘못이다. 아무리 애굽에 먹거리가 풍성해도 그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그 곳은 하나님의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먹거리가 올무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을 애굽에서 종살이하게 만들뿐이다. 구약성경의 정신은 "향(向)애굽"이 아니라 "출(出)애굽"인 것이다(사 30:1-7).
6. 아브람의 실수로 인한 사래의 위기:
-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창 12:15)
굶어 죽지 않으려고 가나안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해간 아브람은 또 다른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아내 사래의 아름다움 때문에 죽게 될 것을 예견한 아브람은 애굽의 국경에 왔을 때, 사래에게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한다(창 12:11-13). 사래는 침묵으로 동의한다.
이때 사래의 나이는 65세였다. 65세 할머니의 아름다움이 남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고대 사회의 미(美)는 우리의 기준과는 달랐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호리호리한 젊은 여인이 아닌, 풍만하고 어머니다운 여인이 이상적 여인상을 대표했을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볼 때, 사래는 그 나이에도 아름답게 여겨졌을 것이다.
아브람은 자신의 안전과 재산을 위해 비굴하게 아내를 권력자에게 넘겨준다. 여기서 하나님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아브람은 신앙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상황에서 흔히 잘못을 저지르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체는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아브람의 처신 때문에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위험에 빠졌으나, 하나님은 이에 적극 개입하셔서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루신다. 인간의 약점, 죄 혹은 제도는 하나님의 구원의지를 꺾지 못하며, 어떠한 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사업을 계속하신다.
아브람의 언약(1)
(창세기 15장)
"쪼갠 동물 사이에 있는 언약"
1.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신 하나님 :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창세기 15장은 "이 후에 야웨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로 시작한다. "이후에"라는 말은 앞서 일어났던 사건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창세기 15장은 창세기 14장과 연결하여 읽을 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창세기 14장은 아브람의 전투를 보도한다. 이 전투에서 아브람은 그돌라오멜의 군대를 격파시키고, 그의 포로로 잡혀간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오멜이 약탈해 간 재물들, 재산들 및 포로들을 되찾는다(창 14:16. 당시 싸움터의 승자에겐 전리품이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아브람은 여기에서 전리품 하나 취하지 않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 "네게(소돔왕)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아브람)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하나님이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고 하신 말씀에는 군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삼하 22:3,31; 시 3:4). 방패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마겐이라는 낱말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무기의 일종으로, 특히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를 나타낼 때 자주 쓰인다(시 3:4; 115:9-11). 사실 아브람이 최초의 전투에서 올린 승리도 하나님께서 친히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믿는 백성들의 방패이시다. 또한 상급이란 히브리어 사카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낱말은 본래 "용병들의 보수"를 의미한다. 에스겔 29:19에 의하면 특별히 그것은 "군사들의 노획물"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싸워 이긴 전투에서 어떤 노획물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아브람의 노획물, 즉 전리품(상급)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결국 아브람이 차지하게 된 것은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된 것이다. 참 신앙인이란 땅의 것을 취할려고 혈안이 되기보다는, 하늘을 품으려고 넉넉한 마음을 쓰며 사는 자들이다.
2. 아브람의 항변 :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창 15:2)
아브람은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하고 질문한다. 사실 이 질문은 아브람이 하나님께 직접 물은 최초의 물음이며 동시에 한탄조의 항변에 해당되기도 한다. 그는 자식이 없고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 기를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당연히 그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하며 따지듯이 하나님께 말한다(창 15:2-3).
기원전 15세기 티그리스강 동부지대인 누지(Nuzi) 지역에서 발굴된 소위 누지문서에 의하면 자식이 없는 부부는 종이나 나그네를 입양해서 아들로 삼고, 그로 하여금 가문을 계승하고 양부모를 그들의 노경에 공양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장례를 치러주는 의무를 지는 대신 재산을 상속받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아브람은 당시의 합법적인 풍습으로 엘리에셀을 양자로 입양하려고 하는 것 같다.
아브람은 몸은 매일 늙어가는데도 자식출생의 약속이 지연됨에 따라서 초조한 나머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정도(正道)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편법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아브람 같은 신앙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3. 하늘 바라보기 :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
아브람의 항변을 듣고 하나님은 그에게 친아들을 주실 것(4절)과 그의 자손이 셀 수 없이 많은 하늘의 별처럼 늘어날 것(5절)을 약속하신다. 여기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는 초대는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하늘 바라보기를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인간사의 좁은 영역에서 벗어나 창조주가 이루어 놓으신 넓디넓은 우주로 인간의 시야를 옮기라는 말씀이다. 하늘을 바라보라! 그러면 절박한 위험 속에서도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탈출구가 보일 것이다 :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웨에게서로다"(시 121:1-2).
4. 아브람의 의(義) : "아브람이 야웨를 믿으니 야웨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하나님은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셨다. 본래 "의롭다" 또는 "의로 여기다"라는 말은 희생제물이 적합하게 봉헌되었음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제사장들의 제의적 용어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조금은 다르게 쓰인 것 같다. 아브람은 여기에서 희생제물을 드린 것도 아니다. 아브람은 실제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이 없다. 다만 하나님을 믿었을 뿐이다. 의(쩨다카)란 말은 "관계개념"이다. 의는 결코 도덕적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사람과 하나님사이의 관계에서 성실함을 인정받는 차원이다 : "해가 질 무렵에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담보로 잡혔던 그 겉옷을 덮고 잠자리에 들 것이며, 너희에게 복을 빌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야웨 너희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쩨다카)이다"(신 24:13).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상호관계(사람과 사람/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바르게 처신하는 자에게. 그리고 이 상호관계로부터 부과되는 각종 요구들을 충족시키는 자에게 의롭다(쩨다카)라는 말이 주어지는 것이다.
아브람은 자기 처지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아브람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관계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브람은 자기 수중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아브람은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여기신 것이다.
창세기 15장 6절의 본문은 기독교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본문이다. 여기에서 "믿음을 통한 의로움(이신득의 : 以信得義)" 이라는 기독교의 구원론이 출발하기 때문이다.
5. 약속의 성취는 고난이후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되어 그들을 섬기겠고"(창 15:13)
창세기 15장 12-16절은 약속이 성취되기 이전에 아브람의 후손이 겪어야 할 어두운 역사를 말하고 있다. 아브람의 후손이 사백년 동안 노예살이를 한 후에야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가나안의 아브람이 다시 가나안으로 그의 후손이 되돌아오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땅 약속의 성취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사백년의 고통스러운 훈련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약속성취의 지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약속의 성취라는 열매는 고난을 먹고 자라는 법이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고난이라는 덫을 통과하게 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겪고 나서 부활의 영광을 차지하지 않는가!
6. 언약맺기 : "야웨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창 15:18)
땅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람은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면서 반문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땅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언약의식을 준비시킨다. 명령에 따라서 동물들이 쪼개어 마주 대하여 놓이게 되었고, 해가 지고 어두울 때에 연기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10절, 17절). 고대 중동 사람들은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이 동물을 잡아 쪼개놓고 계약당사자들이 그 사이로 지나감으로 계약을 맺었다. 그 이유는 고기사이로 지나가는 자가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 쪼갠 고기처럼 되는 저주를 감수하겠다는 맹세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간 "연기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은 바로 하나님을 가리킨다. 아브람은 의식을 잃은 깊은 잠(타르테마)에 빠져 있었고(12절) 하나님만 토막난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계약을 위반할 때, 저주를 감수하겠다는 맹세를 하나님만 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과 언약(베리트)을 맺으신다는 말인가? 언약이라는 것은 모두 비슷한 자끼리 주고받는 약속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스스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은 아브람에게 땅 약속의 성취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쏟아놓은 일방적인 서약이요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13. 아브람의 언약(2)
(창세기 17장)
살에 새긴 영원한 언약
1. 전능한 하나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 17:1).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 때에 나타나서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이라고 소개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엘 샤다이"는 최초의 헬라어 번역본 70인역을 따라서 흔히 영어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으로 번역하지만 정확한 의미는 아직까지도 알 수는 없다. 창세기의 족장 이야기에서 이 엘 샤다이는 철저히 후손의 번성을 약속하고 축복해주는 말씀과 함께 쓰이고 있다(창 17:1; 28:3; 35:11; 48:3). 여기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이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과 함께 나타내고 있다. 자녀생산이 불가능한 아브람과 사래의 부부에게 후손의 번성을 가능케 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신 명령은 첫째 "내 앞에서 행하라", 둘째 "완전하라"는 것이었다.
1) 내 앞에서 행하라: "내 앞에서 행한다"는 말은 원래 신하가 왕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것을 이르는 전문용어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심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명하시는 것을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점은 시편 139편에 잘 나타나 있다:
"야웨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야웨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2) 완전하라: "완전하라"는 뜻의 히브리어 타밈은 레위기 1장 3절("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타밈)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야웨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찌니라")의 예배규정에서 '흠없는 제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흠없는 제물같이 책망받을 것이 없는, 흠없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타밈이라는 낱말은 본래 "전적으로" 혹은 "온전한"을 뜻하지만, 도덕적 의미의 온전성/완전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완전하라"는 의미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남김없이 헌신하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없이 전적으로 마음을 모두 바쳐 하나님께 속해 있으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승천하게 되었다(창 6:24).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온전한 자(타밈)요, 하나님과 동행(할라크)하며 살다가 대홍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는다(창 6:9). 아브람에게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행하라"(할라크) 그리고 "완전하라"(타밈)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은 아브람 한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 "너는 네 하나님 야웨 앞에 완전하라(타밈)"(신 18:13).
3. 아브람의 아멘 : "아브람이 엎드린대"(창 17: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 명령하신 다음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것을 선언하신다(2절). 그리고 후손이 번성케 되리라는 약속도 해주신다(2절). 아브람은 이 약속의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린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의 중동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이것은 '말없는 복종' 혹은 '겸손하고 감사하는 절'로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복종의 표시이며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램(아멘)의 표시이다.
4.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창 17:5)
하나님은 "아브람"이라는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주신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인격과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상징한다. 마치 새로운 왕이 추대되었을 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것처럼 과거와는 분리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다. "높임을 받는 아버지"라는 의미의 아브람에서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뀐 것이다. 족장 아브람의 역할이 한 가족의 가장의 자리에서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위치로 확대된다. 모든 받는 자들의 조상(열국의 아비)이 되는 것이다.
5. 언약의 표징으로서의 할례 :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창 17:11)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언약체결을 약속하시고 그 표징으로서 남자들 모두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신다(10절). 할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실정이다. 할례는 고대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이집트, 가나안 그리고 셈족사회에 널리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 게르만족, 몽고족, 앗수르, 바벨론, 블레셋 등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삼상 17:26; 삼하 1:20). 대체적으로 할례는 첫째, 의학적-위생적인 이유로 행했다. 성기를 청결하게 보존하고, 번식을 촉진시키며, 질병을 막으며, 성교를 용이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사회적인 이유로 성년이 되고 결혼 적령기에 이른 자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셋째, 종교적인 이유로 피를 흘리기 때문에 일종의 제사로 여겨지기도 하고, 악마를 쫓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러나 할례는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표징으로 쓰이고 있으며, 이렇게 쓰이는 경우는 성경 이외에는 없다. 할례란 본래 종교적 의미가 별로 없었던 관습이었으나 성경에서는 언약과 연결되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의 표시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었다. 또한 성인 예식이었던 할례를 생후 8일만에 실시함으로써 언약백성의 일생전부가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나타내는 신앙의 행위가 되었다.
할례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구별된 자"라는 표시로서 민족일치의 상징이었고, 또한 헌신적인 신앙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하나님과 아브람의 언약체결은 할례를 통하여 일종의 징표가 되었다. 이 할례는 지울 수 없이 살에 새긴 영원한 언약의 표시이다 : "내 언약이 너희 살(남성의 성기에 대한 완곡한 표현)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13절).
6. 아브라함의 불 신앙 :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창 17:17)
아브라함(더 이상 아브람이 아님)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야웨의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듣고 그만 웃어버린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웃은 것이다. 기쁨의 웃음인가, 놀람의 웃음인가 아니면 의심과 허무의 웃음인가? 아브라함이 속으로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17절)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의 웃음은 분명 불신앙의 표현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의 머리로는 아니 아브라함 같은 사람에게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놀랍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7. 믿거나 말거나 :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창 17:19)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한다(18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부정적인 신앙에 제동을 거신다.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지어주고, "내 년 이맘때"(21절)에 이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일러준다. 이 말씀을 마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거나 말거나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고야 만다.
8.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줌 :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증대하여"(창 17:20)
하나님이 오로지 이삭만을 통해서 언약을 맺으신다고 하여 이스마엘을 비롯한 다른 민족을 축복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축복하심으로써 그 역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신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과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른 민족과도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믿는 자(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14. 하나님의 심방(창18장)
1. 나그네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는 아브라함 : "그들을 보라 곧 장막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창 18:2)
장막문에 앉아 있던 아브라함은 사람 셋이 맞은 편에 서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달려가 영접하여 집안으로 맞아들인다. 이 사람 셋은 누구일까? 초대교회에서는 그들을 삼위일체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 한 분과 두명의 천사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한창 더운 대낮이기에 휴식이 필요한 그들은 상수리 수풀 근처에 장막을 치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아브라함을 향해 서 있었다(2절). 중동의 관습에서 서 있는 자세는 자신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방법이었다. 창세기 18:2-8은 세 분의 나그네에 대한 아브라함의 지극한 접대를 자세히 묘사해준다. 특히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그들을 향하여 "달려나갔다". 족장 이야기 어디에서도 아브라함처럼 서둘러 달려가서 나그네를 영접한 일은 없었다. 더구나 이 나그네들은 초대받은 손님들도 아니었고, 아브라함은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는지도 모르고 접대한 것 같다. 그는 여행으로 지친 나그네들에게 늘 하던대로("보자, 곧 달려나가")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던 것이다. 후대의 히브리서 저자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말한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이다. 탈무드에 기록된 대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천사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다.
2.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 "그가 가라사대"(창 18:10)
아브라함이 접대한 대상은 분명 사람 셋(2절)이었다. 그들이 예기치 않았던 후한 대접을 받은 후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는지를 묻는다. 손님이 주인에게 그 부인의 행방을 묻는 것은 이례적인 경우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로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10절)한다. 여기서 "그"는 누구인가? 그는 분명히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13절에서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는 다름아닌 야웨 하나님이시다. 야웨 하나님이 그들 세 나그네 중의 한 분으로 성육해 계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바라본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은 야웨 자신이였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야웨 앞에 그대로 섰더니"(2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나머지 둘은 소돔으로 떠나고(19:1), 야웨 하나님은 그들과는 길을 달리하시고 아브라함과 독대해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심방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방! 오늘도 나그네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심방은 계속되고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3. 사라의 수태고지(受胎告知)와 사라의 웃음 :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창 18:10+12)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수태를 고지한 때는 아브라함이 99세, 사라가 89세였다(창 17:24; 18:10). 사라는 이미 옛날부터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다(창 11:30). 게다가 지금은 폐경기의 여인이다. 사라가 아기를 낳는 일은 성관계, 임신, 출산으로 이어지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모든 사정을 염두에 둔 사라는 속으로 웃는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하였던가! 사라도 아브라함을 따라서 웃고 만다(창 17:17). 이 웃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의 표시였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식대로 오해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인데, 사라는 그것을 "나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판단했던 것이다(참고, 창 16:15).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와 "내가 낳을 것이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사라의 수태는 후자의 생물학적 임신이 아니라, 전자의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임신인 것이다. "낳는다"는 내가 하는 일을 뜻하며, "이다"는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을 내포한다. 여기서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능력만을 계산하였다는 데 있다. 인간의 절망을 하나님의 불가능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 "야웨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의 한계로 규정해서는 안된다. 신앙이란 원래 인간의 상식적인 판단과 인식의 울타리 안에만 갇혀있지는 않는다. 신앙이란 불가능한 가능성이다.
15. 소돔의 멸망(1)
(창 19장)
1. 심판하기 전의 마지막 심방 :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창 19:1)
창세기 18장 20-21절에서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시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두 천사가 소돔으로 파송된다. 하나님은 소돔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기에 앞서서 천사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소돔성을 심방하신 것이다. 창세기 18장에서 하나님이 두 명의 천사를 동반하여 아브라함에게 심방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창세기 19장의 소돔성 심방은 심판의 불가피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소돔성의 죄악상을 소상히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래도 다시 한번 이를 확인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의 심판이라 할 지라도 하나님은 심사숙고하며 신중하게 처리하신다. 할 수 있으면 심판을 거두려고 애쓰시는 하나님과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리고 심판을 재촉하는 사람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소돔성의 사람들은 우리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2. 소돔성 심방의 의도 : "거리에서 경야하리라"(창 19:2)
아브라함이 손님을 극진히 접대하는 것 같이 롯도 손님 접대의 예절을 갖춘다. 그러나 롯의 초청을 천사들은 거절한다. "거리에서 하룻밤을 묵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레호브)란 보통 길이 이니라, 사방으로 뚫려서 이곳 저곳의 광경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넓은 광장이다(참조. 룻 4:1; 삼하 18:24; 왕하 7:1). 천사들이 소돔성에 온 것은 단순히 잠을 자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구석구석을 살펴서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성적 타락과 나그네에 대한 횡포 :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앞장에서는 "부르짖음"이르는 말로 요약되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지은 죄의 특성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 노인까지도! - 모두 관계된 성적 타락("소돔성 각 마을에서, 젊은이 노인 할 것 없이, 모든 남자가 몰려와서, 그 집을 둘러쌌다", 창 19:4)과 나그네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져버리고 오히려 그들에게 횡포를 자행하는 죄악을 범한다.
1) 성적 타락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을 직역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알게 하라"이다. 히브리어 "야다"(안다)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 말은 성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창 4:1)에서 "동침하매"라는 말도 히브리어로 "야다"(안다)이다. 즉, 소돔 사람들이 그 나그네들을 상대로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는 뜻이다. 동성애(同性愛)를 벌이겠다는 것이다(삿 19:22). "소돔(Sodom)"이란 말에서 파생된 영어인 "소도미(Sodomy)"가 남색(男色, 남자끼리 하는 성행위)이나 동성애를 지칭하게 된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나그네에 대한 횡포
유대인들의 탈무드(Tosefta Sotah 3:11-12)는 이 본문을 다른 시각에서 풀이한다 : "소돔 사람들이 그 도시를 찾아 온 나그네들을 험하게 대접하는 것은 그들을 낙담시키기 위해서이다. 소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룩한 번영을 낯선 사람들과 결코 나누려 하지 않았다!" 그 도시를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소돔 사람들은 떼로 몰려가서 그들을 겁을 주고 내쫓을 작정이었다.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낯선 땅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나그네에게 도리어 횡포를 부린 데 있다. 다른 측면으로 보면 손님 접대법을 무참히 짓밟는 행위가 바로 그들의 죄였다. 소돔성은 "나그네를 영접치 않은 성읍"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이다 :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여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겔 16:49). 나그네에 대한 원주민의 횡포! 못 가진 자에 대한 가진 자의 횡포! 이것이 그들의 죄악이었다.
16. 소돔의 멸망(2)
(창 19장)
1. 보호하려는 자가 도리어 보호를 받는 자로: "롯을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창 19:10)
롯은 자기가 모신 손님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는 소돔사람들의 공격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서서 자기의 두 딸을 무뢰한 자들에게 내어 주겠다고까지 제의한다. 이러한 롯의 제의는 전혀 해결할 길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롯은 자기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나그네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죄악에 이미 마음의 눈이 먼 소돔사람들은 롯을 해치고 폭력을 행하려 한다. 그 때 나그네들의 개입으로 그들의 눈이 멀게되어 롯의 집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롯은 목숨을 바쳐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보호를 받는 위치가 되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기꺼이 도우며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된다: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 20:13)
2. 재촉하는 천사와 지체하는 롯: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롯이 지체하매"(창 19:15-16)
이제 소돔의 죄는 입증되었고, 소돔성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의 실체는 충분히 확증되었다. 확인절차는 끝났다. 형벌집행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13절). 롯은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야웨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14절)고 경고한다. 그러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다. 이는 노아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노아의 가족은 이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노아의 말을 진지하게 수용하여 구원을 받았다. 롯은 가정에서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천사는 롯의 가족들이 멸망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소돔성에서 빨리 떠나도록 재촉한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롯은 지체한다. 결국 천사는 손으로 롯과 그의 가족들을 끌어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미련없이 고향을 떠났던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게된다.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절박하게 애태우는 쪽은 천사이고 자신의 소유를 못내 아까와 하며 머뭇거리는 쪽은 인간들이다. 허무한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더 중요한 생명의 위협에는 무감각한 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다.
3. 뒤돌아 보는 롯의 아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창 19:26)
천사들은 롯의 가족들에게 생명을 보존키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뛰어가라고 명령한다(17절). 천사들은 왜 뒤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을까? 이 이유는 하나님이 이 땅에 개입하셔서 직접 행동하실 때 인간은 하나님의 행동을 보아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담의 아내를 만드실 때 아담을 깊은 잠(마취)에 빠지게 하신 것도 이 때문이다(창 2:21).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도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진 다음이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창 15:12).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가능성과 그 심판을 면제받은 가능성만 있지,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을 구경할 수 있는 제3의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혹의 아내는 하나님의 경고를 불신한 것이다. 롯의 아내는 마침내 소금기둥이 되어버린다. 소금기둥은 불신앙의 영혼을 가리키는 기념탑이다(솔로몬의 지혜서 10:4).
4. 딸에게 성폭행 당한 최초의 아버지 롯(창 19:30-38)
소돔성의 심판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은 롯과 두 딸뿐이었다. 그런데 소알성 근처 산 속 굴에서 롯의 두 딸이 번갈아가며 자기 아버지 롯을 겁탈(?)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롯은 자기 딸들에게 성폭행 당한 인류 최초의 아버지가 되는 치욕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생기게 된다(36-38절). 롯은 아브라함과 같은 핏줄을 타고났건만, 끝내 아브라함의 후손의 반열에 들지 못한다. 그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택했고(창 13:10-13), 도시에 안주했던 모습은 동굴에서의 마지막 생활과 대비되어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다.
17. 사람을 두려워한 아브라함과 하나님을 두려워한 아비멜렉
(창 20장)
1. 아브라함의 나그네로서의 삶: "그랄에 우거하며"(창 20:1)
아브라함은 반(半)유목민으로 살았다. 완전한 유목민처럼 유랑만 하지는 않았고, 일년에 절반 가량은 유랑하며 보내고 그 나머지는 한 곳에 자리잡고 살았던 사람이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랄 지역도 정착지는 아니었고, 유랑지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본문은 그가 "그랄에 우거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랄 지방에 잠시 머무는 나그네 신세였다. 당시의 나그네는 법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고, 무고한 학대의 타켓이 되곤 하였다. 자신이 정착할 땅 한 조각없이 떠도는 나그네의 삶,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땅을 비롯한 인간적으로 힘이 되는 모든 것들을 포기한 사람이 아닌가!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에 한 평생 쌓아올린 모든 기득권마저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인생의 주파수를 맞추어 살다보니, 세상의 수모와 푸대접, 위협과 회유를 당하는 나그네로서 산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이러한 삶을 살 각오가 되어야 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10).
2. 사라의 회춘(回春)?: "그랄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였더니"(창 20:2)
당시에 부녀자를 납치하여 왕의 후궁으로 삼는 일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흔히 발생하는 풍습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에 대비하여 아내 사라에게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20:13)고 단단히 일러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이때 사라의 나이는 이미 90세가 넘었다(창 17:17). 90세가 넘은 할머니, 젊어서도 아기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가 아니었던가. 이미 노쇠한 그녀에게 여성다운 성적매력이 아직도 남아있었단 말인가?
이것에 대하여 랍비의 전승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녀의 몸은 도로 젊어지게 되었고(回春), 그녀의 주름은 펴졌고 그리하여 그녀가 갖고 있던 본래의 아름다움이 회복되었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는 여성성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사라는 더 이상 석녀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임신할 수 있는 여인으로 회춘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기에 우리는 이를 흔히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신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6).
3. 아비멜렉에게 내린 하나님의 사형선고: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라"(창 20:3)
고대사회에서 남의 부인을 취하는 행위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죄이며, 신성하게 공인된 법령을 어기는 행위였다. 이 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남자가 유부녀와 통간함을 보거든 그 통간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신 22:22). 부부관계를 깨뜨리는 간통행위는 고대 중동 전역에서도 '큰 죄'로 간주되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리 하느냐? 내가 무슨 죄를 네게 범하였관대 네가 나와 내 나라로 큰 죄에 빠질뻔하게 하였느냐?"(창 20:9). 아비멜렉은 '남편이 있는 여인'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3절).
4. 간통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죄악: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않게 하였나니"(창 20:6)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행위는 엄격하게 보면 아비멜렉과 사라의 주인(?)인 남편 아브라함과의 문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녀간의 간통사건을 하나님 자신에게 저지른 범죄행위라고 말씀하신다. 고대 중동지방의 법전은 간통의 문제를 가정과 가정, 아내의 주인이 되는 남편과 간통을 저지른 남자 사이의 문제로 다룬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회에서 간통은 사람에게 저지른 죄악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 범죄하는 죄악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가르침을 어기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셉이 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을 뿌리치며 내뱉은 말에도 잘 나타난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5. 최초의 선지자 아브라함: "그는 선지자라"(창 20:7)
'선지자'라는 낱말은 히브리어로 '나비'이다. 이 단어는 구약 성경 전체가운데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단어의 기원은 아직까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보통 아카디안어인 '나부'에서 온 것으로 보고 있다. '나부'라는 말은 '부르다'(to call)라는 뜻이다. 이에 근거하여 나비(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one who receives the divine call)'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one who proclaims)'로 볼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임무요, 다른 하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하는 임무이다. 쉽게 말하면 예언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자이다. 양자의 중간 위치에 서 있는 자이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기도 하며, 때로는 백성을 위해서 그들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기도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선지자로 불리는 이유는 아비멜렉을 위해서 하나님께 아뢰는 중보기도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방인 아비멜렉을 위해서 기도하였듯이 최초의 선지자 아브라함,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였다. 하나님이 이 땅 위에 세우신 교회는 각 시대의 선지자적 임무를 감당해야 한다. 선지자적 임무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타협없이 알리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아니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중보기도는 오늘날 다시 한 번 회복되어야 할 이 시대의 선지자적 임무인 동시에 의무이다.
6. 누가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가?: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창 20:11)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아비멜렉은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께 아뢰고 결국 사면(赦免)의 방법을 통보받는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왜 그런 거짓말을 하였는 지를 캐묻는다.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아내로 인하여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거짓말을 하였다고 본심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비단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면 모두 지니고 있는 종교적인 경건한 심성과 태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가운데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은 도리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반면에 이방인인 가나안왕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였다: "아비멜렉이 그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모든 신복을 불러 그 일을 다 말하여 들리매 그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더라"(창 20:8).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다.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한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 아비멜렉이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본문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보다 권력과 재력을 갖춘 사람들을 더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들이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깨우쳐주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7. 사실(事實)과 진실(眞實):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창 20:12)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친척끼리는 물론이고 배다른 형제자매끼리도 결혼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근친결혼은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다윗의 배다른 자식들인 암논의 다말에 대한 성폭행사건 이야기는 이복누이와의 결혼이 공식적으로 가능했음을 전제하고 있다: "내가 이 수치를 무릎쓰고 어디로 가겠느냐 너도 이스라엘에서 괴악한 자 중 하나가 되리라 청컨대 왕께 말하라 저(다윗)가 나(다말)를 네(암논)게 주기를 거절치 아니하시리라"(삼하 13:13). 그러나 후대에 가서는 근친결혼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너는 네 자매 곧 아비의 딸이나 네 어미의 딸이나 집에서나 타처에서 출생하였음을 물론하고 그들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레 18:9).
아무튼 아브라함의 시대에 이복누이인 사라와의 결혼은 흉이 될 것도 없고 또한 그의 말도 사실이었다. 즉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는 말은 사실(事實)이었다. 그러나 진실(眞實)은 아니었다. 진실은 사라가 지금은 더 이상 누이가 아니고 아브라함의 아내라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만 알리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시험인 윤리와 도덕기준에는 별 문제가 없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험인 신앙인의 양심기준에는 함량미달이었다. 하나님은 겉사람(사실)보다는 속사람(진실)을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웨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성경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의 비행과 실수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인간적 허물을 그대로 폭로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단점투성이인 인간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진행시키고 마침내 성취시키신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18. 구약의 골고다 모리아산에서의 승리
(창 22장)
1. 시험받는 믿음의 조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창 22:1)
창세기 22장은 '그 일 후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 일'이란 창세기 21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키고 있다. 창세기 21장에 의하면 드디어 약속의 아들 이삭이 출생하였으며, 그가 젖을 떼는 날(약 3세때 쯤) 큰 잔치가 벌어졌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의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더라"(창 21:8). 그런데 이삭을 위한 잔치가 아브라함의 또 다른 자식인 이스마엘을 집 밖으로 내어 쫓아야 하는 비극적 사건으로 발전하고 말았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취하여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자식을 이끌고 가게 하매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들에서 방황하더니"(창 21:14).
여기에서 '그 일'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과 부자지간의 정을 끊고 그를 광야로 추방했던 시련의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22:1). 아브라함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며 대답한다. 이 말은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시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반하여, 하나님이 개인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직 이 대목뿐이다.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약속까지 받은 아브라함, 그런 사람에게도 시험이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을 정화시키시고 단련시키시기 위하여 갖가지 위험과 시련을 보내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장애와 시련을 극복함으로써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약 1:12).
2. "과거의 포기"도 부족해(?) "미래의 포기"까지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그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야 했다(창 12:1). 그는 75년 동안 한 평생을 땀흘려 세워놓았던 과거의 모든 인간적 보호막을 송두리 채 포기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이 그에게 떨어진 것이다. 이삭이 누구인가! 25년만에 얻게 된 약속의 자손이 아닌가! 이스마엘을 내쫓은 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이삭을 제물로 잡아바쳐야 한다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든 과거를 포기시키신 후, 땅과 후손의 증대 그리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미래를 약속하셨다(창12:1-3). 미래의 약속 가운데 처음으로 겨우 그 성취의 시작(이삭)을 맛보기 시작하였는데, 그 미래마저도 포기하라는 것이다. 이미 100세가 넘은 아브라함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요 그의 모든 미래가 달려있는 이삭이 아니던가! 하나님에 의해서 과거를 포기했던 아브라함이 미래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이다.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의 강도가 상식을 넘어서 파괴적일 정도로 냉혹하다. 보통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떨어진 것이다. 시험의 강도도 믿음의 성숙도에 정비례하는가 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3. 철저한 침묵과 흔들림 없는 순종: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창 22:3)
약속의 자식 이삭을 번제물로, 즉 통째로 불에 태워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직접한 말은 1절의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것 외에는 한 마디도 없다. 소돔성의 멸망 앞에서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 18:23) 하며 하나님께 따지듯이 반문했던 아브라함이 이 대목에 와서는 이상하리 만큼 철저히 침묵한다. 그리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자마자 모든 준비물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시하는 곳을 향하여 간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는,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명령에 일언반구도 반문하지 않고 곧바로 일체의 동요도 없이 결연한 모습으로 순종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야웨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필요로 하기보다는 인간의 순종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앙생활을 머리로 따지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순종하며 하는 것이다.
4.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 "자기는 불과 칼을 들고"(창 22:6)
이윽고 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 다다른 아브라함은 종들을 산 아래에서 기다리게 하고 이삭과 단둘이 산에 오른다. 아브라함은 번제물을 태울 때 사용되는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고 자신은 위험한 도구인 불과 칼을 들고 간다. 여기서 나오는 칼은 히브리어로 '마아켈레트'이다. 이 히브리어 낱말은 잘 쓰이지 않는 희귀한 단어이다. 이 단어는 사사기 19장 29절에서 죽은 시신을 열 두 덩어리로 나눌 때 사용된 예리한 칼과 같은 히브리어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들고 있는 칼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보통 칼이라기보다는 크고 묵직한 위험한 칼로 보인다(참조. 잠 30:14).
여기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배려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자식사랑을 엿볼 수 있다. 침묵의 행진을 깨뜨린 아브라함과 이삭의 유일한 대화는 제물로 바쳐져야 할 사람이 제물에 대하여 묻는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뿐이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22:7). 이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라고 한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예견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온 자신의 바람이자 아비로서의 진실이었을 것이다.
5. 이삭의 침묵과 복종: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잡고 잡으려 하더니"(창 22:9-10)
창세기 20장 1-19절은 보통 '아케다'라고 불린다. 유대인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아케다'란 히브리어 '아카드'('묶다'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었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한 마디씩의 대화 이후 계속해서 침묵이 흐른다. 아브라함의 무거운 침묵은 아마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스스로 죽여서 제물로 드려야하는 아버지의 괴로움이 언어의 표현능력을 넘어서기 때문이리라. 아브라함은 말이 없다. 오직 움직일 뿐이다. 그것도 신속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22:9-10).
이와 같은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놀랍게도 이삭은 말없이 복종한다. 번제물이 어디 있느냐 하며 질문할 정도면 이삭은 제사의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을 만큼 성장했을 것이다. 그는 산길을 오를 때 땔감을 지고 올라갈 정도의 힘도 있는 상태였다. 100세가 넘은 힘없는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위험한 행동에 대하여 이삭은 얼마든지 물리적인 힘으로도 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아버지가 하시는 대로 복종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절대신뢰에서 비롯된 영화 같은 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 같다.
6. 다급해진 하나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창 22:11)
하나님의 천사는 급하게 아브라함을 두 번씩 부르며 이삭의 희생을 막는다. 1초만 늦었어도 어린 생명은 끝장났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이 바치는 희생제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와 복종이었다. 하나님은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삶을 원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가짐이며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표현되는 선한 행실인 것이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야웨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7. 모리아의 사건과 골고다의 사건: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창 22:16-17)
아브라함은 수풀에 걸린 수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이삭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다. 곧 이어서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 주어진다: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22:16-18).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시험에서 승리한 것이다. 흔히 모리아로 오르는 아브라함의 길은 골고다로 오르는 예수님의 고난의 길(via dolorosa)로 비유된다. 아브라함의 모리아의 길과 예수님의 골고다의 길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의 길이다. 그러나 골고다의 사건 이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었듯이, 모리아의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이 재확인되는 축복이 주어졌다(창 12:1-3; 13:16; 15:5). 모리아 산은 구약의 골고다에 해당된다. 부활은 골고다의 십자가가 잉태한 산물이다. 미래의 소망은 고난의 대가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고난은 소망을 향한 첫걸음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19.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의 매입
(창 23장)
1.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창 23:4)
사라는 일백 이십 칠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의 셈에 의하면 살만큼 살다가 간 나이이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과 특별히 가깝게 사는 사람들은 상식을 뛰어 넘을 정도로 장수의 복을 누린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장수의 복을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심히 슬퍼하며 애통해 한다. 아마도 평생을 바라다가 얻는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간 사라의 인생살이가 아브라함의 슬픔을 더하게 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이삭이 그의 나이 마흔에 혼인하였으니(창 25:20) 사라는 이삭의 혼인 삼년 전에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반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자신을 추스리고 사라의 시체 앞에서 일어난다. 그는 사라를 묻을 땅을 찾는다. 그는 자신이 정착하고 있는 땅의 원주민인 헷 족속에게 자신의 처지를 담담히 설명한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로 우거하는 자입니다". 한 평의 땅도 없는 나그네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남의 땅에 살되, 합법적으로 사는 사람, 합법적으로 살기는 하되 자기 땅을 한 평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평생을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살아야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것을 이른바 나그네의 신학(theologia viatorum)이라 부른다. 기독교인은 땅에 매이지 않고, 이 땅에서 성공하는 데 지나치게 마음을 두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신앙인이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믿음을 따라 본향을 향하여 부지런히 달음박질하는 순례자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16).
2. 나그네로 살면서도 인정받는 아브라함: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창 23:6)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자신의 희망사항을 겸손하게 밝힌다. 그는 나그네 신세로 땅이 없기 때문에, 아내 사라를 장사지낼 매장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헷 족속은 정중한 경의를 표하면서 아브라함의 말에 대답하였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호칭은 존경의 호칭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한 평의 토지도 소유할 수 없는 남의 땅에 빌붙어 사는 처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사회에서 귀한 어른으로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한 인간의 외적 형편보다는 그 사람의 생활태도가 그 사람의 값을 결정한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외부적인 조건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나그네이지만 그는 모든 이에게 존경받는 어른으로 높임을 받았다. 우리 자신이 처해있는 사실(현실)보다는 이에 대한 삶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
3. 매장허락과 매매거부: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창 23:6)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다. 그는 나그네라는 신분 때문에 자기의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도 그 곳의 땅 주인인 원주민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으며, 또한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은 4절에서 두 가지 요구사항을 허락해 달라고 원주민들에게 부탁한다: 첫째,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며, 둘째,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게 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한다. 이러한 부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이 주어진다: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6절). 원주민이 사용하고 있는 어느 누구의 무덤이든지 한 곳을 택하여 무덤으로 쓰라는 이러한 대답은 첫 번째 부탁인 "사라의 매장을 허락한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8절에서 이 점을 확실하게 해두려고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다: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그러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해달라는 아브라함의 두 번째 부탁은 거절된다. 헷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매우 예외적인 호의를 베풀면서도 결국은 그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만큼은 부여하지 않으려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죽은 자의 매장은 허락해 줄 수 있으나, 매장지를 위하여 토지를 소유하려는 토지매매 요구는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창 12:1-3). 그러나 그가 현재 발붙이고 서 있는 땅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약속의 땅이 아닌가(창 12:7).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직 그 땅을 소유하지는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다. 땅 약속의 실현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그 약속을 의심하지도 않았고, 묵묵히 성취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이러한 자세가 참 신앙인의 모습이리라.
4. 아브라함의 끈질긴 매매요구: "내 소유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창 23:9)
땅의 소유권을 확보하고자 했던 아브라함의 꿈은 무산되었다. 헷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이방인이며 빌붙어 사는 나그네인 주제에 매장하는 것을 허락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굴복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매매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로 그 밭머리에 있는 막벨라 굴을 내게 주게 하되 준가(충분한 값)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서 당신들 중에 내 소유의 매장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8-9절). 값은 드릴 만큼 다 드릴 터이니 제발 굴을 팔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죽은 아내의 매장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손들에게 대대로 상속할 수 있는 땅의 확보가 보다 큰 관심사였다. 헷 사람들의 호의로 그들의 땅에 사라를 장사한다 하더라도 그곳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수 있을런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사라 외에 아브라함(25:9), 이삭(35:29), 리브가와 레아(49:31), 그리고 야곱(50:13)도 여기에 안장되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죽음과 후손들의 삶을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다시금 드러난다. 그는 인생의 반쪽인 아내의 죽음이라는 하늘이 내려앉는 개인적인 절망 속에서도 후손의 미래를 위해서 열심히 준비한다. 그리고 아내의 죽음이라는 위기를 땅을 소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여긴다. 위기는 곧 기회이다.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향하는 문을 두드리게 하는 것이다. 위기 앞에서 절망하는 자에게 위기는 말 그대로 걸림돌이며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가 된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위기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5. 최초의 부동산 매매: "땅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나와 당신 사이에 어찌 교계하리이까?"(창 23:15)
아브라함의 절박한 요구를 알아차린 막벨라 굴의 주인인 에브론은 구입 희망자에 대하여 절대우위에 서서 흥정을 주도한다. 아브라함이 원래 의도했던 것은 막벨라 굴 하나에 대한 구입이었다. 그러나 에브론은 다음과 같이 운을 뗀다: "내가 그 밭은 당신께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께 드리되"(11절). 막벨라 굴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그 굴을 둘러싸고 있는 밭도 함께 구입해야 한다는 매매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여기에서 에브론의 말이 '굴과 밭'을 무상으로 주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동양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흥정을 위한 상투적인 표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15절에서 은 사백 세겔이라는 비교적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이 말은 매매를 위한 흥정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오늘날에도 상인들은 '팔다'라는 노골적인 말을 회피한다. 이런 말은 고귀한 손님에게 모욕적인 언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드리겠다', '선사하겠다'라고 말하면서, 넓은 도량을 보임으로 손님을 더욱 붙잡아 놓는다. 이런 점잖은 말씨로 보아서, 아브라함은 값이 대단히 비쌀 것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굴과 밭'을 묶어서 함께 팔겠다는 에브론의 조건 제시에 아브라함은 울며 겨자먹는 식으로 동의한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13절). 이제 흥정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렀다. 바로 가격 결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땅 가진 자가 부르는 것이 가격인 셈이다. 에브론은 "은 사백 세겔짜리 땅이 저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하며 가격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며 상당한 액수를 제시했다.
당시의 가치개념이 오늘날과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 액수를 현재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우리는 그 토지의 크기를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이 액수는 이후 성경에 나오는 부동산 매매가격과 비교하면 상당히 큰 돈이었음을 알게 된다. 예레미야가 밭을 살 때 지불했던 돈은 불과 은 17세겔에 지나지 않았고(렘 32:9),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구입할 때 은 50세겔을 지불하였다(삼하 24:24). 또한 오므리왕이 사마리아 전체를 건설하기 위해 샀던 지역도 다 합해서 은 6,000세겔(은 두 달란트) 뿐이었다(왕상 16:24).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전혀 흥정을 하지 않고 달라는 금액을 모두 지불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좇아 에브론이 헷 족속의 듣는데서 말한대로 상고의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16절).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부동산 매매는 아브라함 편에서 본다면 손해가 막심한 부당한 거래였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세상살이였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눈꼽 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을 어렵게 만드는 일을 한다면, 그는 참 신앙인의 반열에 서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땅에 살면서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내하며 오히려 이를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6. 막벨라 굴의 매입이 갖는 의미
1) 하나님의 주신 약속이 당대에는 아직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브라함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소유를 다 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전 삶을 바쳤다. 하나님은 그에게 선물로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의 성취가 가장 간절한 시점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성취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의 처지로 상당한 가격을 치르면서 약속의 땅 가운데 한 조각을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자기 당대에 보지 못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에 대해서 실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 약속을 후손들에게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 때에는 그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시면 너의 때에는 경험할 수 있으리라"(참조. 창 50:24) 하며.
2)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부분적인 성취로도 볼 수 있다: 막벨라 굴을 매입한 일이 하나님의 땅에 대한 약속(17:8)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도 해석된다. 약속 때문에 모든 것을 저버렸던 아브라함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단 말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약속된 땅의 아주 작은 부분(무덤의 토지)이 그의 소유가 되었다. 그것도 합법적인 소유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마을 법정에서 모든 헷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23:18), 충분한 가격을 치르므로 '법적 소유권'을 공인받은 것이다. 비록 아브라함이 샀던 막벨라 땅은 약속된 가나안 땅의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첫걸음이며, 믿음의 조상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주인으로서 자기 땅에 묻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장차 그 약속이 완전히 실현될 것을 믿고 일찍이 그의 후손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한 지점을 정하고 거기에 그의 깃대를 꼽은 것이다.
20. 이삭의 짝짓기:1
(창 24장)
1. 이상한 맹세의식: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2절)
창세기 24장은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긴 본문이다. 이 본문은 요셉 이야기(창 37-50장)와 같이 한 편의 단편소설과도 같다. 이 이야기의 줄거리는 아브라함의 아 들 '이삭의 결혼'에 관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죽었다. 이제 그도 나이가 많아 늙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으므로 부자가 되었다. 성경에 따르면 개인이나 공동체의 재산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었다. 이제 아브라함이 해야 할 중요한 일이 하나 남 았다. 바로 '이삭의 짝짓기'였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 인 그의 충복을 부른다. 익명으로 나온 이 충복은 아마 아브라함이 한 때 자기 재 산 전부를 물려줄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던 엘리에셀이었을 것이다: "아브람이 가로 되 주 야웨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 섹 엘리에셀이니이다"(창 15:2).
아브라함은 엘리에셀에게 "네 손을 내 환도뼈 밑에 넣으라"고 명령한 후 "아들 이삭의 아내를 찾아오겠다"고 맹세하게 한다. '환도뼈'란 생식기를 의미한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주인의 생식기에 손을 대고 맹세를 하다니! 이 이상한 맹세의 식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생식기에 손을 넣고 맹세하는 것은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생명의 근원에 맹세'시킴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하나의 관습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죽을 기한 가까우매 그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창 47:29-30).
둘째, 생식기는 생식력의 원천이다. 생식기 밑에 손을 넣는 것은 '후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식을 상징하는 남성의 중요한 부분에 손을 대고 맹세할 때에, 이를 어기는 자는 불임이 되거나 그 후손이 멸절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창 24:41 "설혹 그들이 네게 주지 아니할지라도 네가 내 맹세와 상관이 없으리라"라는 말씀에는 맹세의 위반시 어떤 저주가 임할 것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 다.
2. 아브라함의 마지막 말: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 여 아내를 택하라"(창 24:4)
앞 장 창세기 23장에는 사라의 죽음과 장사지냄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 함은 죽은 자에 대한 그의 의무를 다한 후에 이제는 살아있는 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식인 이삭의 짝짓기가 그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 자기 아들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삭 만큼은 고향에 있는 친척과 결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의 풍습이었던 족내혼(族內婚)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요구는 단순히 이러한 풍습을 따 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가나안 사람들과의 통혼으로 비롯되는 종교적인 혼합을 우 려한 것이다. 우상숭배의 오염을 막으려 한 것이다: "그들(가나안 사람들)과 혼인하 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 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야웨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야웨 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이러한 그의 요구는 아브라함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언 과도 같은 말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며 이미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넘겨주었다: "나의 주인의 부인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36절). 다음 장인 창세기 25 장에서는 아브라함의 죽음이 간략하게 언급된 이후(25:8), 이삭의 이야기가 중심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 24장의 서두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종에게 이것 저것을 명령 하였다. 그러나 그 종이 이 임무를 잘 감당하고 이삭의 짝을 찾아온 순간부터 아브 라함은 이 본문의 무대에서, 아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족장 아브라함 에서 족장 이삭으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수(壽)를 다 살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에 대한 약속과 후손에 대한 약속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창세기 23장에서 사라의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매입하여 땅의 약속의 터를 마련하였고, 창세기 24장에서는 이삭의 신부감을 맺어줌으로 후손 약속의 길을 터 놓은 셈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수를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인간으로서의 최선을 다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이끌고 가는 것이긴 하지만, 결코 하나 님의 일방적인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약속받은 자는 먼저 그 약속의 성취를 굳게 믿고, 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3. 아브라함이 제시한 신부감의 조건: 엑소더스(Exodus)할 수 있는 신앙인(창 24:7-8)
아브라함이 말한 이삭의 신부감으로서의 조건은 단 하나였다. 아브라함의 고향에 서 색시를 고르되, 그곳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 오겠다고 하는 사람을 고르라는 것이다(7-8절). 이 외에 다른 조건은 없다. 아브라함이 내세운 단 하나의 조건은 자신이 오래 전에 걸었던 길, 즉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까지의 여행길을 똑같이 걸어 올 수 있는 고향 여인이면 된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뒤를 계승할 인물로 고향 땅을 엑소더스 할 수 있는 신앙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 여족장인 사라를 계승하게 될 새로운 여족장(matriarch)은 선배와 같이 지금까지의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어맡기겠다는 결단을 하여야 한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듯이, 아브라함은 여기에서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신앙의 여인을 찾고 있다.
21. 이삭의 짝짓기:2
(창 24장)
4. 종이 생각하는 여족장의 조건: "아름다운 마음씨"
아브라함의 종은 메소포타미아의 나홀성의 성 밖 우물 곁에 당도한 후 야웨 하나님께 기도한다. 기도 내용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어 그의 며느리가 될 처녀를 쉽게 만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는 우물에 물 길으러 나오는 한 소녀에게 마실 물을 청할 때, 나그네인 그에게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그의 약대에게도 물을 주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야웨께서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배필로 알겠다고 한다.
이 짤막한 기도에서 그가 찾는 여족장의 조건이 드러난다. 주인 아브라함이 제시한 며느리감의 조건은 '신앙' 하나 밖에 없었으나, 그의 종은 여기에다 '아름다운 마음씨'라는 또 하나의 조건을 덧붙인다. 그가 찾는 여성은 나그네에게 베푸는 친절한 마음, 자신의 것을 희생해서 남에게 주기를 자원하는 마음, 심지어 짐승들도 이해하고 돌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 진 여성을 찾은 것이다.
리브가라는 한 소녀는 이러한 조건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상의 여성이었다. 여기에서 리브가의 행동을 나타내는 표현 가운데 '급히'라는 말과 '배불리' 라는 말이 사용된다: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 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18-19절). '급히'라는 말은 18절과 20절에 두 번 사용되었는데 이는 리브가의 '활동성, 근면성, 적극성'을 보여주며, '배불리'라는 말은 그 소녀가 '인색하지 않고, 넓은 마음'을 갖고 있음을 가리킨다.
리브가의 아름다운 마음씨는 종이 기도한 조건에 들어 맞았고, 동시에 그녀가 아브라함의 동생인 나홀의 손녀라는 사실(15+24절)은 아브라함이 찾는 조건에도 일치하였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들이 요구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미모'도 더불어 갖춘 여인을 짝지워주신 것이다. 리브가는 한 가정, 한 가문, 한 부족의 여족장으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앙인들이 배우자의 조건으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그 배우자가 하나님의 나라, 즉 본향을 향해 평생 함께 순례할 수 있는 신앙의 동지이며,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자이어야 한다는 점을 여기에서 새삼 배우게 된 다.
5. 사람의 모든 삶에 은밀히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야웨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창 24:27)
아브라함의 종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리브가라는 한 소녀가 다름아닌 그의 주인의 친척임을 알았을 때 야웨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웨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였사오며 야웨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집에 이르게 하였나이다"(27절). 늙은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음을 깨닫고 이를 감사하고 있다.
야웨 하나님은 주로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한 지도자의 카리스마를 통해서 혹은 제의적 사건(예배현장)속에서 활동하시고, 또한 그렇게 알려져왔다. 이건 사실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나지는 않아도 여기에서는 공동체의 삶 뿐 아니라 한 개인의 삶 구석구석까지 하나님의 손길이 미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 점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지는 현장이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 세상살이의 모든 면에 은밀히 개입하셔서 이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 창세기 24장의 중심주제로서 이러한 점이 강조되고 있다. 평범한 일 상생활이나 한 개인의 삶 속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쉬지않고 기도하며,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6. 맡은 일에 충실한 아브라함의 종: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먹지 아니하 겠나이다"(창 24:33)
리브가의 집으로 초대된 늙은 종은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으로부터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는다: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약대의 짐을 부리고 짚과 보리를 약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밭과 그 종자의 발 씻을 물을 주고 그 앞에 식물을 베푸니"(32-33절). 라반은 리브가가 선물로 받은 값진 장식물을 보고, 부유한 손님 을 잘 접대하기 위해 우물로 달려가서(30절), 그 종을 집으로 모셨다(31절). 이 때 아브라함의 종은 먹는 일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이 더 중요하고 긴급하다는 사실 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33절).
그는 34-49절에서 일의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한다. 그는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큰 부자가 된 아브라함이 그의 모든 소유를 아들에게 상속했으며, 그 아들의 배필 을 구해오라는 아브라함의 임무를 받아 그 자신이 그곳까지 오게 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우물가에서 일어난 사건도 이야기하여 이삭과 리브가의 혼담이 단순히 인간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것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일이라는 사실이 가족들에게도 받아들여져서 이 혼담은 종의 의도대로 결정된다: "이 일이 야웨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야웨의 명대로 그(리브가)로 그대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절).
늙은 종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였다. 그는 한때 아브라함이 양자로 맞아들여 전 재산을 상속시키려고 지목했던 사람답다(창 15:2). 육신의 주인의 명령에도 이토록 충성스러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오늘의 성도들은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의 우선 순위를 올바로 분별하는 지혜 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7. 기도하며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 이삭: "날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 가"(창 24:63)
63절의 '묵상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아 '수아'는 그 뜻이 분명치 않다. 이 단어는 '묵상하다, 산책하다, 기도하다' 등 여러 가지로 옮겨진다. 여기서는 고대 역본(탈굼)이 번역한 '기도하다'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이삭은 모친의 사망 후 그 자리를 메꾸어 줄 아내를 기다리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삭을 본 리브가는 종을 통하여 그가 그녀의 남편 될 사람인 것을 알고 면박을 취하여 얼굴을 가리었다. 구약시대의 풍습에 따르면 이 면박은 결혼식장에 들어가서야 벗기게 된다. 이삭은 리브가를 그의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아내로 삼는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절). 리브가를 모친의 장막으로 들인 것은 그녀가 열국(列國)의 어미인 사라의 계승자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22.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1)
(창 27장)
1. 죽음을 앞둔 자의 마지막 축복: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창 27:4)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삭은 그의 큰 아들 에서를 불러 사냥을 하여 그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가져오라고 한다. 축복을 하기 전에 맛있는 음식을 취해야 하는 이유는 사라져가는 기운을 마지막으로 회복하여 자신의 생명력을 최대한으로 잘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축복의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혹은 축복행위와 연관된 일종의 종교의식일 수도 있다.
죽어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은 구약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창 48:9-16; 50:24). 본래 축복은 작별할 때(창 24:60)나 임종 때 주어졌다. 특히 임종 때의 축복은 윗대의 생명력이 다음대로 이어지는 것과 관계된다. 이제 생명이 끊어질 이삭이 자기의 모든 힘을 그 아들에게 넘겨주고자 한 것이다.
이삭이 말한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4절)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내 영혼(네페쉬)이 너를 축복하게 하라”이다. 여기에서 쓰인 히브리어 ‘네페쉬’는 헬라적인 인간 이해에서 비롯된 것처럼 영혼과 육체 혹은 영?육?혼처럼 인간을 구성하는 몇가지의 요소 중의 하나로서의 영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체를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을 2-3가지의 구성요소로 나누지 않으며, 인간은 나뉠 수 없는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네페쉬 하야: a living being, 창 2:7)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이삭은 그의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그의 아들의 복을 요청한 것이다. 이삭은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에 의거하여 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으로 그가 받은 복을 그의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2. 여족장 리브가의 지나친 열심: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리니”(창 27:13)
초대 여족장 사라가 세 명의 천사와 아브라함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은 것과 같이(창 18:10) 제 2대 여족장 리브가도 이삭과 에서가 나눈 말을 엿듣고(27:5) 장자 에서 대신 차남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일을 꾸민다. 여기에서 행동의 주역은 야곱이 아니라 일을 꾸민 리브가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족장시대의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도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리브가는 신속히 계획을 짜놓고 야곱을 부른다. 리브가의 계획은 참으로 치밀하였다. 리브가는 에서가 사냥을 나간 동안 야곱을 불러 집에서 기르는 염소새끼를 잡아오도록 하고 그것으로 별미를 만들고, 눈이 어두운 남편 이삭을 속이기 위해 야곱에게 에서의 옷 가운데 가장 좋은 옷을 입힌다. 그리고 염소 새끼의 가죽을 매끈매끈한 야곱의 손과 목에 붙이고, 그가 요리한 별미와 떡을 야곱을 시켜서 이삭에게 들고 가게 한다. 야곱은 매끈매끈한 자신과 털이 많은 에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음모가 쉽게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아버지를 속이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어 복은 고사하고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 리브가는 “내 아들아, 너의 저주는 내게로 돌리라”고 하면서 그녀의 단호한 의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장자의 축복권을 둘러싼 음모와 사기극의 장본인으로 나선 여족장 리브가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브가의 행위는 그녀가 에서와 야곱을 잉태했을 때,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뜻(“야웨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고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창 25:23)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는 것을 막으려는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리브가는 거짓과 음모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한다.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사랑하는 자식(창 25:28)이 축복을 받게 하려는 비뚤어진 모성애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과 인간적인 열정은 참으로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이다.
인간의 지나친 열정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우를 범하게 해서는 안v 된다.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믿음으로 좀 더 기다리고 지켜보아야 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신앙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야웨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 3:26).
3. 어머니보다 한 술 더 뜨는 야곱의 사기극: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창 27:19)
연출자 리브가, 주연 야곱, 조연 이삭의 ‘장자의 축복권 탈취’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주연의 등장과 함께 신분확인을 위한 조연의 질문이 시작된다. ‘네가 누구냐’는 질문에 야곱은 ‘맏아들 에서’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로 답변한다. 그때에 수상한 낌새를 눈치라도 챈 듯 이삭의 날카로운 두 번째 질문이 던져진다: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이에 대한 야곱의 대답은 참으로 놀라운 거짓말이었다: “아버지의 하나님 야웨께서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셨음이니다”(20절).
눈이 먼 사람을 속이는 일 자체도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스라엘에서는 금지되었다: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8). 그런데 야곱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거짓을 은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빙자하는 신성모독적 언사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은 권모술수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자의 몫인가? 야곱의 이러한 반(反)윤리적 범법행위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창세기 27장의 저자는 야곱의 이러한 행위에 대하여 윤리적으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야곱의 반윤리적인 범행을 옹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창세기 28장 이후의 이야기들은 야곱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도덕성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죄를 통해서도 성취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의 기준과 이성을 뛰어 넘는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계획이 방해받도록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이 저질로 놓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면서 당신의 구원역사를 밀고 나가시며 끝내 성취시키신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4. 이삭의 축복: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창 27:27)
야곱의 완벽한 사기극에 넘어간 이삭은 축복의식의 절차에 따라서 야곱에게 축복을 내린다. 이 의식의 첫 번째 단계는 축복받는 자를 확인하는 일이다: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24절). 두 번째 단계는 식사하는 일이다: “내게로 가져오라 내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리라”(25절). 세 번째 단계에서는 껴안거나 입을 맞추는 등 신체를 서로 접촉하는 것이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리”(26절).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 와서 축복의 말이 내린다: “아비가 그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가로되”(27절). 이삭이 야곱이 입고 있는 옷의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축복을 선언하기 직전까지 야곱의 정체를 의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28-29절의 기록에 의하면 이삭의 축복 내용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풍부한 양식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둘째는 정치적, 군사적 우위권이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29절 상반절). 셋째는 하나님의 보호이다: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29절 하반절).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축복의 내용보다는 축복의 주체이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에게 ---을 해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한다. 축복의 주체는 이삭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이 제 수단으로 얻는 것은 아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23.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2)
(창 27장)
1. 야곱에게 '베코라'와 '베라카'를 빼앗긴 에서: "그가 나를 속임이 두 번째이니다"(창 27:36)
형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를 위해 별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서는 그 별미를 가지고 가서 이삭의 축복을 기대하였으나, 이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이삭은 심히 놀라 떨면서 분노했고, 에서는 방성대곡하였다. 이삭은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갔고, 에서는 맡아놓은 복을 빼앗겼다.
에서가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래서 에서는 이를 더욱 분통해 하고 있다. 첫번째 속임수는 장자의 명분을 빼앗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창세기 25장 29-34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에서는 수렵을 하는 사냥꾼이었고, 야곱은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25:27). 야곱은 사냥하는 자들이 사냥에서 실패할 경우 육체적, 정신적 좌절에 쉽게 빠지는 심리적 약점을 노리고 있다가, 형 에서가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이 기회를 포착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요리를 하였다.
에서는 동생이 요리하는 붉은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요리를 붉은 국(선지국)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그것이 붉은 콩죽(팥죽)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자, 자신이 크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 야곱은 팥죽을 선지국으로 속여서 형에게서 장자의 상속권을 가로챈 것이다. 그는 상속권 이전을 확실히 하기 위해 에서의 맹세를 요구하였다: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25:33). 이러한 맹세가 없으면 상호협정이 무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맹세는 맹세하는 당사자에게는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수 9:19). 이것이 에서가 야곱에게서 첫 번째로 속은 사건의 전모이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는 장자의 축복권마저도 빼앗겼다. 에서의 입장에서 보면, 분통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본문에서 사용된 '장자의 명분'은 히브리말로 '베코라'라고 하고, '복'은 '베라카'라고 한다. 에서는 비슷한 발음을 내는 두 가지 히브리말로 '베코라'도 속아서 빼앗겼고 '베라카'까지도 가로챔 당했음을 인상깊게 하소연하고 있다.
에서는 출생을 통해 주어진 장자의 상속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아버지 이삭의 축복이 자신에게 자동적으로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방심했다가 동생 야곱에게 당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현실에만 안주하며, 미래지향적인 삶에 게을리하는 사람은 언제나 퇴보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마 20:16).
2. 에서에게도 주어진 '베라카':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창 27:36)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사건이 뒤늦게 이삭과 에서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몹시 당혹해 하였다. 비록 속임수로 준 축복이지만, 한번 준 축복은 확정적이며 철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에서는 부차적인 축복(베라카)만 받는다. 이삭은 다음과 같이 에서에게 축복한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에서가 받은 축복은 사건을 통한 일종의 예언으로 볼 수 있으며, 비록 기름지지 않은 척박한 초원지대라 할지라도 그 역시 살아갈 수 있고, 후일 그의 후손인 에돔족은 스스로 이스라엘(야곱의 후손)의 지배에서 벗어날 것이다(참조. 왕하 8:20-22). '베라카'는 야곱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에서에게도 '베라카'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축복은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베라카는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서서 모든 이방인에게도 미치는 우주적인 은총이다. "하나님이 그 해(햇빛)을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3. 이삭과 리브가 가정의 파탄: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창 27:45)
에서는 이 일로 앙심을 품고서 보통 7일(창 50:10)이 소요되는 아버지의 상이 끝나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처럼 동생 야곱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41절). 이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궁여지책으로 야곱을 도피시킨다. 리브가는 야곱의 도피장소로 자기 오빠 라반의 집을 택한다. 야곱을 떠나보내면서, 리브가는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라고 탄식한다. 만약 에서가 야곱을 죽게 되면, 형제를 살인한 에서를 친척들이 축출하거나 혹은 피의 복수가 자행되어 결국은 두 아들 모두가 죽게 되기 때문이다.
리브가는 하루 아침에 아들 둘을 잃는 것보다는 하나를 내보냄으로 숙명적인 형제 간의 유혈충돌을 피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리브가는 이 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나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리브가는 야곱이 며칠 동안만 그의 오라버니 라반의 집에 머물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창 27:44-45), 그것이 20년이나 되는 긴 세월이 걸렸고, 결국 그녀는 그토록 아끼는 아들 야곱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장자의 축복권을 둘러싼 형제 간의 암투는 한 가정의 불행으로 막을 내린다. 하나님의 열심을 앞지른 리브가의 열심이 결국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을 파탄으로 이르게 하였다.
24. 라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야곱(1)
(창 31장)
1. 능력보다 사랑: "야곱이 보내어 라헬과 레아를 불러다가"(창 31:4)
창세기 31장 4절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라반으로부터의 도주의사를 부인들에게 밝힌다. 야곱이 두 아내를 부르는 순서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라헬이 레아보다 앞서 있다(참조. 창 31:4). 레아는 라헬의 언니이며, 야곱의 첫 번째 부인이기도 하다. 그 당시는 일부다처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야곱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는 것은 그다지 부도덕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일을 상의할 때에는 당연히 첫 번째 부인이 처음으로 거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헬을 선호한다. 레아는 야곱에게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넷이나 낳아 주었다(창 29:32-35). 라헬은 가까스로 한 명의 아들만 두었다: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야웨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창 30:24).
당시 여성의 능력은 자식생산에 비례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레아는 능력있는 여자였다. 그런데도 야곱은 무능한 라헬을 더 아낀다. 그는 능력 있는 레아보다 사랑하는 라헬을 더 챙긴다. 이는 라헬이 야곱의 첫 사랑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 3대 족장 야곱은 능력보다 사랑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고 있다. 그는 능력보다 사랑을 택한 것이다. 물질주의가 꽉 들어찬 오늘날 정신적 가치(사랑)를 물질적 가치(능력)보다 앞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성도들은 믿음의 조상 야곱의 후예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2. 20년에 걸친 타향살이의 회고: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창 31:5)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을 떠났다(창 28:10). 형의 복수심이 가라앉도록 몇 날 동안만 머물 것으로 생각했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타향살이는 어느덧 20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마침내 야곱은 라반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결심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31:1)는 라반의 아들들의 고발을 야곱이 듣게 되었다. 둘째, "야곱이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31:2)에서 볼 수 있듯이 야곱에 대하여 라반의 태도가 달라졌다. 셋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31:3)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로 야곱은 두 아내 라헬과 레아에게 라반에게서 떠나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지나온 20년 동안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 회고의 핵심은 야곱이 있는 힘을 다하여 외삼촌이면서 장인인 라반의 일을 도왔지만, 라반은 야곱을 번번이 속이면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쳤다는 말에 담겨져 있다. 그는 남의 일만 죽도록 하고 번번히 사기를 당하는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결코 지난 20년 동안의 머슴살이의 서러움만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셨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31:5).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해치 못하게 하였다"(31:7).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짐승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31:9). 야곱은 자신의 역경스러운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성도라면 누구나 지나간 삶을 신앙적으로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3. 작은 경건과 큰 축복: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창 31:13)
한 때 야곱은 집을 떠나 먼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은 계획된 것도 아니었고,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하기 위하여 어머니 리브가의 지시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 피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달 동안 그와 함께 거하라"(창 27:43-44). 그 때 야곱은 홀홀단신으로 머나 먼 하란 지역을 향해 떠났다. 여행 도중 그는 벧엘이라는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꿈에서 천사가 하늘과 땅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다. 게다가 그는 꿈 속에서 야웨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창 28:15). 야곱은 잠에서 깬 후 베고 잤던 돌을 기둥으로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올렸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야웨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이것이 벧엘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모였다. 이 때 만난 분이 벧엘의 하나님이었다. 이 당시 야곱이 행한 일은 돌 위에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소한 경건 행위를 기억하시어, 위기의 시점에서 축복으로 보답하셨다. 하나님은 벧엘에서의 약속 즉 야곱으로 하여금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해 주시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기억해 내셨고, 드디어 야곱에게 그것을 허락하셨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31:13). 야곱의 이야기에서처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의 작은 정성, 작은 경건을 기뻐하시고 또한 그것을 기억하심으로 적절한 시점에 이르러 큰 축복으로 되돌려 주신다. 예수님 역시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크게 기뻐하셨다(막 13:41-44; 눅 21:1-4).
4. 친정 아버지에 대한 딸들의 불만: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었으니"(창 31:15)
남편 야곱의 회고를 들은 라헬과 레아는 아버지 라반에 대하여 자신들도 그 동안 눌러왔던 불만을 터트린다. 고대 중동사회 특히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에서는 약혼자가 장인에게 준 신부 몸값의 일부가 혼인 후에는 신부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에게서 그의 노동을 신부 몸값으로 받아 부유하게 되었지만, 딸들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라반은 사실상 딸들을 팔아버린 꼴이 된 것이다. 딸의 결혼을 두고 아버지가 딸을 팔았다는 식의 심한 표현을 쓰는 경우는 구약성경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라반은 이기적인 아버지로 낙인 찍혔다. 사실, 라반의 처사는 당시의 결혼법을 무시한 것으로 딸들의 비난을 받을 만 하였다.
한 사람의 물질적 욕심으로 자신이 낳고 키운 자식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게 되고 비난을 받게되는 슬픈 가족사를 보게 된다. 우리들의 가정에 악마적인 물욕(物慾)이 틈타서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주지했으면 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물질과 관계된 일로 성도의 가정이 몰락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25. 라반의 착취에서 벗어나는 야곱(2)
(창 31장)
1. 라헬의 엉덩이에 깔려 꼼짝 못하는 이방신상: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창 31:34)
야곱은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나간 틈을 타 자신의 소유를 모두 챙겨서 가나안을 향하여 도망하였다. 유목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일은 매우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이 때가 되면 며칠동안 먹고 즐기며 잔치를 벌렸다(참조. 삼상 25:2-11; 삼하 13:23-24). 야곱과 그 가족이 이러한 중요한 잔치에서 제외된 것은 라반이 그들을 "남처럼 여겼다(개역: 외인으로 여기는 것, 15절)"는 레아와 라헬의 항의가 정당했음을 입증해 준다. 그런데 이 때가 라반의 눈길을 피해 야곱이 도주하기에는 최적기였다. 또한 라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라헬은 아버지의 드라빔(Teraphim)을 훔쳤다: "때에 라반이 양털을 깍으러 갔으므로 라헬은 그 아비의 드라빔을 도적질하고"(19절).
드라빔은 사람 모습대로 만든 신상(神像)으로(삼상 19:13-16) 받침대가 없고 라헬이 깔고 앉아 은닉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체였다: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약대 안장 아래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얻지 못하매"(34절).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정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가정의 수호신으로 믿고 섬겼던 우상을 말한다. 드라빔은 점을 칠 때 사용되기도 하기 때문에(겔 21:21; 슥 10:2), 라헬은 그의 아버지가 야곱의 도주를 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에서 이것을 훔쳤다고 볼 수 있다. 또는 친정을 떠나는 마당에 아버지로부터 달리 얻어낼 것이 없어서 가정의 부와 안녕을 지켜 준다는 우상을 집어들고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고대 중동의 관습에 의하면 어떤 집의 수호신을 훔치는 행위는 아주 심각한 일로 그 집의 유산을 탈취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야곱의 도망소식을 접한 라반은 곧 바로 추적하여 칠일만에 야곱과 만날 수 있었다. 라반의 가장 큰 관심은 자신의 신 드라빔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제 네가 네 아비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가하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적질하였느나"(30절).
드디어 드라빔을 찾기 위한 수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라헬은 약대 안장에 드라빔을 넣고 그 위에 올라 앉았다. 라헬은 생리 중이어서 일어나서 아버지를 영접할 수 없다고 이해와 용서를 구한다(참조. 레 19:32). 생리 중인 여자에 대해 레위기는 매우 엄격한 규정을 세워놓고 있다. 레위기 15장 20절에 보면 "그 불결할 동안(생리 중) 그의 누웠던 자리는 다 부정하며 그의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한즉"이라 한다. 라반의 신은 약대 안장 속에 갇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더구나 생리 중인 라헬의 몸에 닿아 부정을 타게 되었다. 여기에는 우상과 이방신상의 무기력과 허망함이 해학적으로 묘사된다. 우상들은 별 볼일이 없는 것들이다. 이에 비해 우리 하나님은 라반의 꿈 속에서도 나타나시어 야곱에 대한 그의 부당한 행위를 막으신다: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24절).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 "너희는 태초부터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여라, 나는 하나님이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와 같은 이는 없다"(사 46:9).
2. 사기꾼의 사기당한 20년 세월: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창 31:41)
라헬의 기지(奇智) 때문에 라반은 결국 그의 신을 찾지 못했고 야곱은 위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도적으로 몰렸던 야곱은 이제 라반을 향하여 대반격의 포문을 열었다. 야곱은 "나의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라는 말로 라반에게 거칠게 항변하기 시작한다(36절).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보낸 지난 20년 동안의 삶은 더 이상 사기꾼의 삶은 아니었다. 참으로 성실한 자세로 적지 않은 손해도 감수하며 살아왔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내었으며"(39절; 참조. 출 22:12; 암 3:12). 그런데 그는 훨씬 고단수의 사기꾼을 만난 것이다. 그는 20년동안 갖은 압박과 설움을 참아가며 종살이를 했으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지 못했다. 그는 외삼촌의 두 딸과 양떼를 위하여 자그만치 20년 동안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해왔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40절). 그러나 외삼촌이 그를 속여서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꿨다(7절; 41절). 외삼촌이자 장인에게 번번이 사기를 당한 것이다.
야곱은 20년 동안 라반에게서 받은 압박과 설움, 특히 삯을 둘러싼 불의와 부정을 토로하며 분노하고 있다. 그는 힘없는 약자의 설움을 지난 20년 동안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다. 사기꾼이었던 야곱은 사기를 당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철저히 배운다. 야곱은 변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사기꾼이 아니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되었다(38-41절).
3. 약자의 권리를 찾아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창 31:42)
계속되는 라반의 사기에 번번히 농락당한 야곱은 힘이 없는 약자이기에 이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힘을 통한 불법적인 노동력 착취가 자행되는 자리에서 억압당하는 약자의 입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나오는 부르짖음이 사람들에게는 의도적이건 의도적이지 않건 철저히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 부르짖음을 듣는 분이 계시다: "야웨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출 3:7).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권력(힘)이 정의(올바름)를 압도하는 위험이 일정한 수위에 오르게 되면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약자 야곱을 대신하여 정의를 세워주셨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공수로 돌려 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2절).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동안 모은 재산과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친히 말씀하셨고, 라반이 뒤쫓아와 야곱을 해하고자 할 때에도 이를 막아주셨다: "너를 해할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29절). 하나님은 마음씨 나쁜 힘센 사람들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억울하게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마땅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우시는 분이다. 우리 하나님은 억울한 약자들을 사랑하신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시 146:6-9)
26. 형 에서와의 화해를 준비하는 야곱(1)
(창 32장)
1.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창 32:1)
여우같은 라반의 착취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빠져 나온 야곱은 이제 호랑이 같은 에서와 부딪혀야 할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자, 걱정과 근심에 싸이게 된다. 라반과 평화적으로 헤어진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을 만난다. 1절은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고 함으로써 야곱이 우연히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의도적으로 야곱을 만나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 시편 기자도 이 점을 분명히 노래하고 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을 만나주셔서 힘과 용기를 주신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복을 가로챘다가 오히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이방세계로 도피해야 했던 야곱이 벧엘에서 잠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은 꿈속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다(창 28:10-12).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타향에서 보내고 이제는 고향으로 향하며, 형 에서와의 화해를 염려하며 고민하는 야곱을 천사를 통하여 만나 주신 것이다. 이것이 야곱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 여정에 늘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오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적절히 도우신다.
2. 야곱의 참회와 용서를 구함: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창 32:4)
야곱은 형 에서가 있는 에돔벌 세일 땅으로 심부름꾼을 자기보다 먼저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창 32:4-5). 야곱은 에서를 과거처럼 형으로 부르지 않고 자기와는 격이 다른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주(主)'로 호칭한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결코 겉으로만 형의 환심을 사서 눈앞의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야곱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형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4-15절에 나열되어 있는 에서에게 바칠 엄청난 양의 가축들도 뇌물이라기보다는 참회의 표시로 보인다.
야곱은 더 이상 형과 다투는 경쟁자가 아니다. 또한 형을 속이는 사기꾼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옛날의 야곱이었다. 이제 막 에서 앞에 선 현재의 야곱은 형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과거의 야곱이었다면, 참회와 용서의 간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된 야곱이기에 가능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참회를 하며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의 간구는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3. 인간의 노력 그리고 기도: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창 32:11)
야곱은 심부름꾼을 형 에서에게 보내어 참회의 마음을 표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나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한다.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심부름꾼의 짤막한 보고는 야곱을 더욱 더 불안하게 하였다. 거친 세일 땅에서 다른 족속들과 생존의 사투를 벌이기 위해서 에서는 잘 훈련된 군사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언제나 그들을 대동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에 비해 야곱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은 전쟁을 대비한 강력한 군사 조직체라기보다는 야곱의 가축떼와 남녀 하인들 및 식솔들에 불과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해 오는 줄로 생각한 것 같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자 야곱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되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절). 형 에서와의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 야곱은 비상수단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한 종들과 가축들을 두 패로 나눈다. 에서가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를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7-8절). 이제 인간적으로 필요한 조처는 다 취한 셈이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한다. 9-12절까지의 본문이 그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야웨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9+11절). 그는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어 자신의 참회모습과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또한 모든 소유를 두 패로 나누는 등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도 간절히 요청했다.
불안과 초조함에 안절부절 하였던 야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했다. 우리도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도 더불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기도만 하고 나 자신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또는 반대로 제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며 행동(인간적 노력)하고, 행동하며 기도하는 것이 문제에 직면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4. 재산보다 화해: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창 32:13)
야곱은 자신의 소유 가운데서 형 에서에게 바칠 상당량의 예물을 따로 챙겨 놓는다. 여기에서 예물이란 히브리어로 '민하'이다. 이 단어는 친밀감과 존경을 표하는 '선물'(창 43:11, 15, 25-26)이나 제공자가 종속된 지위(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며 드리는 '공물'(삼하 8:2,6; 왕상 4:21)을 뜻한다. 본문에서 이 예물이 '선물'인지 '공물'인지는 이것을 받게 되는 에서의 판단에 맡겨진 듯 하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 진다해도 야곱에 대한 에서의 노여움이 풀어지면 그만이다. 이것은 화해의 제스쳐이기 때문이다(창 32:20).
야곱이 에서를 위해서 따로 떼어논 예물의 목록이 창세기 32장 14-15절에 열거된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 가축을 모두 합산하면 무려 550 마리에 이른다. 예물치곤 어마어마한 분량의 예물이다. 야곱은 인생의 황금기인 청장년기에, 그것도 20년 동안 종살이하며 모은 재산보다 피붙이인 형과의 화해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용서를 구하는 화해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진정한 화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성실히 지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한세대 한준희 서울신대 구약
빅뱅(Big Bang)?
Q. 빅뱅 (Big Bang, 대폭발) 이론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과학적 증거는 무엇입니까? (대구 배은재)
A. 빅뱅이론은 1974년 가모프가 원시원자이론을 확장하여 제안한 것으로 지금부터 100에서 200억년전에 1016K이상의 초고온과 1016g/cm3 이상의 초고밀도의 원초물질이 폭발하여 오늘날과 같은 우주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의 증거로 적색편이 현상과 절대온도 3K 흑체배경복사 파장의 존재를 들고 있다. 3K 흑체배경복사는 1964년 벨연구소의 펜지아스와 윌슨이 고감도 전파망원경에 생기는 전파잡음의 원인을 연구하다가 발견한 것을 프린스턴 대학의 로버트 디키와 제임스 피블스가 가모프의 대폭발에 의한 우주배경복사이론(5K의 배경복사를 예언)으로 설명하였다. 우주에는 수분의 1에서 50cm까지의 약하고 등방성이며 연속적인 파장을 가진 배경복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빅뱅이론에 대한 근거로서 이러한 것들이 채택될 수 있는가는 과학적으로 확실하지 않다. 먼저 빅뱅이론 내에서도 극도로 큰 적색편이 값을 갖는 퀘이사(Quasar)라고 알려진 천체에 대해 허블의 법칙(우주팽창이론)을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3K 배경복사 현상을 설명하는 대안적인 여러 다른 이론들이 있어서 빅뱅(대폭발)의 잔재라고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첫째로, 빅뱅(대폭발)의 원초물질은 어디서 왔으며, 그 폭발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에 대답할 수 없다.
둘째로, 허블의 적색편이 현상이 알려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관측에 의한 허블 상수는 일정치 않아 왔고 또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우주 진화론자들이 우주의 나이를 계산할 때에는 허블 상수의 역수를 이용해 왔다. 그러므로 우주기원의 시점에 대한 계산은 정확할 수가 없다. 또한 허블이 우주팽창의 근거로 해석한 적색편이현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중력장에 의한 적색편이의 해석(아인슈타인의 해석)도 있다.
셋째로, 빅뱅이론은 우주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자체 모순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빅뱅이론에서(적색편이에 의해 추정할 때) 100억 광년 이상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멀리 있는 천체의 경우, 빅뱅이론에 의하면 빅뱅 (대폭발)의 초기 상태이므로 은하 상태가 아니라 원시 성간물질의 형태이어야 하나, 관측에 의하면 완전한 형체를 가진 은하이다.
넷째로, 암흑물질의 문제이다.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관측가능한 물질의 양은 이론에서 필요로 하는 양의 10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다. 여러가지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다섯째로, 빅뱅이론에 의하면 다음 과정을 통하여 헬륨이 생겨난다.
(1) 중성자+양성자=중수소+광자 (2) 중수소+중수소=헬륨+중성자
(3) 중수소+중수소=삼중수소+양성자 (4) 중수소+삼중수소=헬륨+중성자
그런데 헬륨은 불활성 원소이어서 핵반응이 급격히 멈추게 된다. 따라서 가벼운 원소들, 즉 리듐, 베릴륨, 붕소등이 미량이 생길 뿐 무거운 원소들의 생성은 불가능하다.
이상의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볼 때, 빅뱅 이론은 우주 기원론의 유력한 이론의 하나인 것은 틀림없지만, 완전히 옳다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들이 남아있다. 우리는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결론을 유보하는 겸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움말: 영남대 권진혁 교수)
출처 : ※★☆보물1호☆★※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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