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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개요
▣ 로마서-개요와 서론-
로마서 개요
▣ 주제:하나님의 의
▣ 서론/ 1장 1-17절
인사말/1장 1-7절
해명/1장 8-17절
1. 죄(의가 요구됨)/1장 18절-3장 20절
죄 아래 있는 이방인 /1장 18-33절
죄 아래 있는 유대인 /2장 1절-3장 8절
죄 아래 있는 전세계 /3장 9-20절
2. 구원(의가 전가됨)/3장 21절-5장 21절
칭의에 대한 설명 /3장 21-31절
칭의에 대한 명시(아브라함의 예)/4장 1-25절
칭의에 대한 경험 /5장 1-21절
3. 성화(의를 분여함)/ 6-8장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지위 /6장
“알다“-“여기다“-“양도하다“
육신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문제 /7장
성령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능력 /8장
4.이스라엘의 선택(의가 거절됨)/ 9-11장
이스라엘의 선택-과거 / 9장이스라엘의 거절-현재 / 10장
이스라엘의 구속-미래 / 11장
5. 섬김(의를 실천함)/ 12장 1절-15장 13절
하나님에 대한 헌신 / 12장
권위에 대한 순종 / 13장
연약한 자를 위한 고려 / 14장 1절-15장 13절
▣ 결론 / 15장 14절-16장 27절
사역에 있어서의 바울의 충성됨 / 15장 14-21절
사역에 있어서의 바울의 미래 / 15장 22-33절
사역에 있어서의 바울의 친구들 / 16장 1-23절
마지막 축복 / 16장 24-27절"
로마서 서론
▣ 로마서 서론
▣ 중요성: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유익하면서도 성경의 어떤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더 많은 교리적 진리들을 내포하고 있다. 확실히,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바는 우리에게 있어서 창세기에 나오는 계보들보다 더욱 실제적인 가치가 있다.
성 어거스틴은 로마서를 읽고 회심하였고,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 1장 17절을 읽고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감리교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도 누군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는 것을 듣고 회심하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해야 될 책이 있다면, 곧 로마서이다.
로마서는 교리적인 진리를 제시한다-칭의, 성화, 양자됨, 심판, 그리스도와의 동일시 등.
로마서는 9-11장에서 신적 경륜의 진리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안에 있는 이스라엘과 교회 간의 관계를 보여 준다.
로마서는 실천적인 진리를 제시한다-그리스도인이 육신을 정복하는 승리의 비결,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향해 갖는 의무, 정부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의무.
로마서는 세기를 통하여 내려오며 신앙에 대한 위대한 방어가 되어 왔다. 아마도 로마서는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논리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책일 것이다. 어떤 주제들, 예컨대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주의 재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는 반면에, 이를 믿음에 대한 다른 중요 교리에 연관지어 언급하고 있다.
만일 성경 연구자가 어느 한 권을 택하여 정통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로마서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푸는 열쇠이다.
▣ 배경:로마서는 바울이 고린도를 방문했던 3개월 동안에 쓴 것이다(행 20:1-3). 로마서 16장 2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이오와 에라스도와 같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데, 이들은 둘 다 고린도 교회를 조력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고전 1:14/딤후 4:20).
이 편지는 아마도 고린도의 항구인 겐그레아(행 18:18)에 살았던 뵈뵈(16:1)에 의해 전달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친구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본래 로마로부터 왔는데(행 18:2), 로마서 16장 3절에서 바울이 그들에게 문안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로마로 다시 돌아간 것을 알 수 있다.로마에서는 어떻게 신자들의 무리가 형성되었을까 ? 바울은 그의 편지에 “로마 교회“에게 보낸다고 쓰지 않고 “로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썼던 것에 유의하자(1:7). 16장을 읽으면 로마에는 하나의 지교회가 있었다기보다는 서로 다른 신자들의 그룹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5, 10-11, 14-15절).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인 근거는 없지만 전설에 의하면, 로마에서의 사역은 베드로에 의해 기초가 놓여졌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25년간 로마에서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진술이 증명될 수는 없다. 만일 베드로가 로마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이라면 신자들이 흩어져 있기보다는 조직된 교회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바울은 16장에서 여러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으나, 베드로의 이름은 없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다른 편지들에서는 영적 지도자들에게 꼭 인사를 전하곤 하였다. 만일 위대한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그의 옥중서신 어딘가에서(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모데후서) 베드로를 언급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로마에서의 사역을 기초한 사람이라는 데에 반대되는 가장 현저한 논급은 로마서 15장 20절인데, 바울은 다른 사람의 기초 위에는 건축하지 않겠다고 언급하였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치리하기 위해 로마로 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데(1:13/15:22-24/15:28-29/행 19:21/ 행 23:11), 만일 다른 사도가 그곳에서 사역을 이미 시작했다면 이러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이 로마에 전해졌을까? 사도행전 2장 10절은 오순절날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복음을 아는 로마 유대인이었다. 16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모두 이방인들인데, 이것은 다른 도시들로부터 온 비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이주하면서 복음을 가져왔음을 시사한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다른 교회에서 바울에 의해 회심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의 거대한 중심지였으며, 수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 제국의 대로를 따라서 황제가 사는 도시에 갔을 것이다. 로마서 1장 13-15절, 11장 13절과 15장 14-16절은 편지를 받은 신자들의 대다수가 이방인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물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유대적인 요소들이 있었으며, 또한 많은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었다.
▣ 기록 경위:바울은 아시아에서의 사역을 마치려 하고 있었고(15:19) 아시아 교회들로부터 보내 온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방문하려는 중이었다(15:25-26). 로마에서 설교하려는 일은 늘 그의 마음에 부담을 주고 있었으며, 이 긴 편지는 그가 직접 가기에 앞서 그리스도인들을 예비시키는 방법의 일환이었다.고린도에 있는 동안(행 20:1-3) 그는 또한 갈라디아서를 썼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를 혼란시키는 유대주의자들의 말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보다 앞서 로마에 도착하여 그의 계획을 망쳐 놓는 일이 없도록 로마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하며 가르치고 싶었을 것이다.
3장 8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거짓 고발을 한다고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그렇다면 이 편지를 쓴 이유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계획한 방문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왜 더 빨리 방문하지 못하는가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1:8-15/15:23-29).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뒤흔들어 놓는 일이 없도록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근본적인 교리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의 교리로 잘못 인도해 가는 일이 없도록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상호간의 의무와 국가에 대한 의무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바울에 대한 고발에 대해 해명하기 위함이었다(3:8).
▣ 성경에서의 위치:로마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하박국 2장 4절 말씀에 근거하여 기록된 세 편의 서신들 중 첫번째 서신이다. 이 구절은 로마서 1장 17절(“의“를 주제로 삼음), 갈라디아서 3장 11절(“살리라“), 히브리서 10장 38절(“믿음으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로마서는 신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서신이다. 신약 서신서들의 순서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나오는 순서에 맞춘 것임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에 유익하니“).
-교훈(교리)-로마서(신약의 교리 대전)
-책망-고린도전 후서(죄를 책망함)
-바르게 함-갈라디아서(거짓 가르침을 교정함)
-의로 교육하기-에베소서 등(그리스도인의 교리에 입각한 거룩한 삶을 가르침)▣ 주제:바울의 근본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의이다. “의롭다“는 단어가 이런저런 형식으로 40회 이상 사용된다. 1-3장에서는 의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3-8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를 예비하셨음을, 9-1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는가에 대하여, 12-16장에서는 이러한 의가 일상의 생활을 통하여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바울은 하나님이 어떻게 의로우실 수 있으며 동시에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는지 그 방법을 보여 준다!"
롬 1:1-7
▣ 이방인의 반역-로마서 1장-
1. 인사말(1:1-7)
열 세 편의 바울의 서신들은 모두 이 위대한 사도의 이름으로 시작된다. 그 당시에는 글쓰는 이의 이름과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종이요, 사도라고 신분을 밝히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아(5절), 이 놀라운 사역에로 성별되었다고 말하여(행 13:1-3/갈 1:15-24)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
그는 즉시로 그의 사역이 복음에 속한 것이라고 서술하는데, “하나님의 복음“(1절), “그의 아들의 복음“(9절), “그리스도의 복음“(16절)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이 “기쁜 소식“이 그가 발명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약속되어 있음을 언급한다(고전 15:1-4 에 나오는 “성경“이란 말은 구약 성경임이 분명하다. 그 때는 신약이 기록되고 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약을 복음에 연관시킴으로 그의 편지를 읽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와 관계된다. 그는 육신으로는 유대인이시지만(3절), 부활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입증되었다(4절). 복음은 주님의 인성과 신성을 입증한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될 수 있는 신인(神人, God-man)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신 이 복음의 목적은 무엇인가? 5절은 “모든 민족들로 믿음에 순종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준다. 인간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신뢰할 때 그는 주님께 순종할 것이며, 순종을 통하여 자기의 믿음을 입증할 것이다.
6-7절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인 그의 수신자들이 누구인지를 설명한다. 그들도 역시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았으나, 사도가 되기 위하여가 아니라 성도가 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성도란 그리스도를 믿는 살아 있는 신자임에 유의하자. 하나님만이 죄인을 성도로 만드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부르실 때처럼(마 3:17) 우리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시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에서 그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역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다(요 17:23).이 간단한 인사말에 다음과 같은 점이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기자-바울
-수신자-로마에 있는 성도들(불신자가 아님)
-주제-그리스도와 구원의 복음"
롬 1:8-17
2. 해명(1:8-17)
바울은 이제 이 편지를 쓰는 이유(8-15절)와 그가 쓰려고 하는 내용(16-17절)에 대한 이중의 해명을 한다.
이유(8-15절)-오랫동안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방문한기를 원해 왔다. 그들의 간증은 로마 제국을 통하여 이미 널리 퍼져 나갔으며(8절/ 살전 1:5-10), 바울은 방문하려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즉, 믿음 안에서 굳건히 세워지도록 돕기 위함(11절)과, 그들을 보고 기뻐하기 위함(12절), 그리고 그들 중에 “얼마의 결실을 얻기“ 위함, 곧 다른 이방인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13절).
바울이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자였음을 기억한다면 이방의 제국 수도에 사는 성도들과 죄인들을 위한 부담감을 분명히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그들을 더 빨리 방문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았다고 설명한다(13절). 이것은 사단에 의한 방해가 아니라(살전 2:18) 다른 곳에서 사역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롬 15:19-23). 이제 그 일이 끝났으므로, 그는 로마를 방문하려고 하였다. 바울의 생애에 있어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 무엇이었는지 주목해 보라. “나는 빚진 자이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주제(16-17절)-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의를 계시한다“는 것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의 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에 기초한 것으로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의로운 분이신 동시에 또한 의롭게 하시는 분인가, 하나님은 어떻게 죄인을 의롭게 하시면서 여전히 그의 거룩한 법을 유지하실 수있으신가“를 설명한다. 그는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인용하였다(서론 참조)."
롬 1:18-32
3. 정죄(1:18-32)
우리는 이제 이 서신의 첫부분인 “죄“에 대해 보게 된다(1:18-3:20 개요 참조). 1장을 끝맺는 구절들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여 그들을 삼켜버리는 무서운 어두움에 빠졌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향해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한다. 이방이 타락해 가는 역사의 과정을 주목해 보자.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18-20절)-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신을 “저희 안에“(양심)와 “저희에게“(창조)의 방법을 통해 이중으로 계시하셨다(19절). 인간이 무지함으로 출발하여 점차 지성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강한 계시와 더불어 시작하였으나 그러한 계시에 대하여 등을 돌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순간으로부터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핑계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간들을 어떻게 심판하시는지는 2장에서 다룰 것이다.
그들은 그분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았다(21-23절)-헛된 생각과 철학자들이 실천하는 바, 어리석은 추론이 인간을 진리에서 거짓말로 돌아서게 하였다. 우리는 무관심이 배은 망덕으로 인도해 가며 결국은 무지하게 됨을 본다. 오늘날 사람들은 헬라와 로마의 철학들 앞에 절하며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인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철학들을 “허망한 생각“이며 “알지 못하던 시대의 일“(행 17:30)이라고 부른다. 다음 단계는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높이는 우상 숭배의 단계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꾸어 놓았다(24-25절)-이 단어는 “교환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단의 거짓말로 대치하였다. 사단의 거짓말은 무엇인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섬기고 하나님 대신 인간을 섬기는 것, 그리스도 대신에 일 또는 물건들을 섬기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이같이 하라고 유혹하였다(마 4:8-11).
로마서 1장 18절에서는 이방인들이 “진리를 막았고“ 여기서는 “진리를 바꾸었음“에 주목하자. 진리를 믿고 순종할 때에 우리는 자유로와지며(요 8:31-32) 진리를 거절하고 불순종할 때에 노예가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식을 거절하였다(26-32절)-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지식에서 출발하였으며(19, 21절) 죄에 대한 그의 심판을 알았으나(32절) 이들은 이제 아래로 떨어져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고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이러한 타락의 비극적인 결과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원시적이며 무지하고 짐승 같은 형태에서 놀라운 피조물로 오늘날과 같은 “진화하였다“고 믿게 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 상황, 즉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에서 시작하여 짐승의 수준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다음에 제시된 하나님의 세 가지 심판에 유의하자.-하나님은 그들을 부정함과 우상 숭배 가운데 버려 두셨다 / 24-25절
-하나님은 그들을 타락한 정욕에 버려 두셨다 / 26-27절
-하나님은 그들을 “상실한(버림받은)“ 마음에 버려 두셨다 / 28절 이하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 두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었다(18절). 여기 나오는 죄의 목록은 너무도 타락한 것이어서 정의하거나 토론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오늘날도 인간의 승인을 받으며 온 세상에서 자행되고 있다! 인간들은 죄가 심판을 받게 됨을 알지만 어찌 되었든 죄 가운데서 즐거움을 취한다 !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스스로의 죄의 노예가 될 것이다. “말할수 없는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롬 2:1-5
▣ 이방인의 정죄-로마서 2장-
2장 1절에서 3장 8절까지 바울은 자기 백성 유대인에게로 촛점을 돌려 그들도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로 정죄됨을 보여 준다. 1장 20절에서 이방인들이 핑계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2장 1절에서는 유대인들도 역시 핑계댈 것이 없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언급은 특권 의식을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천둥과 같은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루려고 하시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는 공정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그는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리들 세 가지를 지적하며 유대인들도 이방인들과 함께 동일하게 정죄됨을 입증된다.
1. 심판은 인간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에 따른다(2:1-5)
1장에서 바울이 “이교도들“을 기소하는 것을 읽고 유대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마땅한 대우로군 !“이라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들의 태도는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라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당연시하는 유대인에게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너희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일들을 하므로 마찬가지의 죄가 있다!“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풍문이나 잡담, 우리 자신의 좋은 의견 또는 인간의 평가에 따르지 않고 “진리에 따라“ 심판하신다(2절).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들을 미워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서 그런 실수들을 발견할 때는 특히 더하다.“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하지만 그들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때 똑같은 죄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다시 논쟁을 벌인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사용하신 똑같은 진리로 우리를 심판하시지 않으실 것이 분명해 ! 왜냐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선하게 대해 오셨는지를 보면 알지 !“ 그러나, 이들은 그의 선하심을 쏟아 부으실 때 하나님의 심중에 가지신 목적을 알지 못했으며, 왜 그처럼 인내하시며 그들이 순종하기를 기다렸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의 선하심은 회개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회개하는 대신 마음을 굳게 하여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받을 진노를 더욱 더 쌓았다(계 20장). 당신은 오늘날 잃어버린 죄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는가? “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 왜냐하면 그분은 나에게 선한 일을 너무도 많이 베풀어 오셨기 때문이야.“ 이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기 위한 준비인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하고, 겸손한 감사로 경배하는 대신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더욱 많은 죄를 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단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정죄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바울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두가지 핑계를 오늘날도 듣게 된다. 즉,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선하다. 따라서 내게는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는 것과 “하나님은 나에게 선하셨다. 따라서 나를 정죄하지는 않으실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의견과 평가에 따르지는 않을 것이며 진리에 따르게 될 것이다."
롬 2:6-16
2. 심판은 인간의 지위가 아니라 그 행위에 따른다(2:6-16)
최근에 출간된 「Status Seekers」라는 책에서는 미국인들이 어리석게 “사회적 신분“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과,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값이라도 치르려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계산상에 있어서 높은 신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율법을 잘 듣는 사람이 되는 것이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임을 깨닫지 못하였다(13절).
이 구절들은 구원받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류가 삶의 과정을 통한 행위들에 따라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 7-8절은 인간의 경우에 따른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생의 목적을 말하는 것으로 윌리엄 뉴웰(William Newell)은 “생의 선택“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만약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추구한다면, 아무리 참을성 있게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결코 영생을 발견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6, 10절), “모든 영“(9절),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편애하는 분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온 생애에 기초하여 모든 인류를 심판하시는 분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들을 이런 식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신가?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이방인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12-15절에서 설명하듯이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그들이 받은 빛에 따라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모세를 모르는 이방인들이 율법 없이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덕법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19 참조). 콩고(Congo)선교의 베테랑인 단크로포드(Dan Crawford)는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나와서 “이교도들은 홍수와 같은 빛을 받으면서도 이에 대항하여 죄를 범한다“고 말했다. 로이 로린(Roy Laurin)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들은 그들이 소유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이며, 결코 그들이 소유하지 않은 더 높은 표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듣고 이를 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더욱 맹렬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롬 2:17-29
3. 심판은 인간의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른다(2:17-29)
이미 바울은 “심판의 날“에 대하여 두 번 언급하였다(2:5/2:16). 이제 그는 이 심판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있는 은밀한 것들을 드러내셔서 마음의 심판이 될 것을 언급한다.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것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족적 종교의 특권 의식을 자랑으로 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 보다 훌륭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이방인들을 소경이요, 어두움 가운데 있으며, 어리석고, 어린 아이들이라고 보았다(19-20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독점적인 총아로 생각했으나, 그들이 보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러한 특권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보다 많은 책임을 지운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바로 그 율법을 그들 스스로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사악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기에 이르렀다! 바울은 아마도 이사야 52장 5절, 에스겔 36장 21-22절, 또는 사무엘하 12장 14절에 나오는 다윗에게 한 나단의 말을 참고했을 것이다.
만일 “종교“를 가진 백성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 민족일 것이다. 그들의 종교는 내적인 실재의 문제가 아니라 외적인 의식의 문제였다. 그들은 할례 의식을 자랑으로 여겼는데, 이 의식은 그들을 살아 계신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다면 육체의 의식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바울은 말씀에 불순종하는 할례받은 유대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 훨씬 낫다고 말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할례받은 유대인들을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본다 ! 왜냐하면 참된 유대인이란 내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의 마음이 변화된 사람이며, 육신에 거하여 외적으로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27절은 비록 할례를 받지 않은 본질상 이방인들이 율법을 성취한다면 유대인들을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담대하게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내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너희가 거듭나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의 비밀들을 심판하실 때 그 시험을 통과하게 하는 것은 종교적인 제도들에 순종하는 일이 아니다.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1:16).
복음을 믿지 않고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정죄받은 편에 서게 된다. 자신의 종교와 율법주의를 지닌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또는 더욱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알 수 있는 보다 큰특권과 기회들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좋은 견해나 신분이나 종교에 따라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리들에 따라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서,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서 심판하신다.
결국, 바울은 1장에서 이방인들이 핑계할 수 없음을 입증하였고, 여기 2장에서는 유대인들이 핑계할 것이 없음을 입증한다. 3장에서는 온 세상이 죄와 정죄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롬 3:1-20
▣ 온 세계가 유죄함-로마서 3장-
이 장은 첫번째 부분(죄)과 두번째 부분(구원)사이에서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전반부에서(1-10절) 바울은 정죄의 문제를 다루며 유대인과 이방인, 온 세상이 죄 아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후반부(21-31절)에서 그는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주제를 소개한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두 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사실 3장은 이 책의 남은 부분을 위한 “모판“(seed bed)이다. 1-4장에서 그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다루는데, 이는 9-11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8절에서 그는 죄 가운데 사는 문제를 언급하며, 이는 6-8장에서 논의된다(3:8 이 6:1 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것에 유의하자).
21절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주제를 떠올리는데, 이것은 4-5장의 주제이다. 끝으로, 31절은 율법을 세우고 순종하는 일을 언급하며, 이는 12-16절에서 제시된 주제이다(13:8-14 을 유의하자).
1. 나쁜 소식-죄 아래 있어 정죄됨(3:1-20)
바울은 이 부분에서 네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해 답한다.
유대인들이 정죄되었다 할지라도, 유대인이라는 것이 특권이 되는가?(1-2절)-특권이 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로서 그의 말씀에 나타난 뜻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다면 그 민족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그들을 통하여 축복이 온 세상에 퍼지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특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이러한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케 하는가?(3-4절)-물론 그렇지 않다 !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하심(“미쁘심“-3절)을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비록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더라도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바울은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하는데, 여기서 다윗 왕은 자신의 죄와 그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있다. 자기의 죄를 시인하면서조차 다윗은 하나님의 의와, 말씀의 진실성을 확증하였다.그렇다면, 죄를 범해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이 왜 안되는가?(5-8절)-“결국 하나님이 나의 죄를 심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신다면 나는 하나님께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 또는 나를 심판하는 대신, 하나님은 나를 죄 가운데 버려 두심으로써 영화롭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따라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의롭지 못한 일이다.“ 바울은 재빨리 이같은 죄악된 삶을 옹호하는 논급을 6절에서 반박함으로써 처리해 버린다. 그 같은 견해는 하나님께서 결코 세상을 심판하실 수 없다는 뜻인데, 아브라함조차도 하나님이 이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알지 않았던가!(창 18:25)
바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를 심판하고 그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한 대로 행하신다면 세상에서 모든 진리와 정의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유대인 적들은 바울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으며, 그가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8절)는 식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말했다(6:1/6:15 참조). 이러한 서술은 이성과 성경에 모두 위배되므로 바울은 이를 거론하지 않는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스스로 정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
그러면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선한가?(9-18절)-그렇지 않다. 그리고 또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둘다 죄인들이며 하나님의 무서운 정죄 아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차이가 없다 !“ 이 말은 로마서가 전하는 위대한 멧세지이다. 죄에 있어서나 구원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3:22-23/10:12-13).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죄 아래 있다고 결론을 내리심으로, 은혜 가운데 모두들 자비를 얻도록 하셨다(롬 11:32).
이제 바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의 전 죄악성을 설명함으로써 전 세계가 유죄함을 입증한다. 10-12절에서, 그는 시편 14편 1-3절을 언급하며 그들의 죄악된 성품을 묘사한다. 그리고 13-18절에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해 설명한다(시 5:9/시 140:3/시 10:7/시 36:1/사 59:7-8 인용). 이 구절들을 읽고 그 배경을 주의깊게 살펴보라.
19-20절에는 그의 마지막 판결이 나온다. “온 세상은 유죄하다!“ 유대인들이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율법은 그들을 정죄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3:21-31
2. 좋은 소식-믿음으로 의로워짐(3:21-31)
율법에서 벗어남(21절)-21절은 “그러나 이제 은혜의 시대에 의, 곧 새로운 종류의 의가 나타났는데 이는 율법에 의존하는 의가 아니다“라고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법적인 의, 행위적인 의를 원한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은 정죄할 뿐이며 결코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미 증명하였다.
이러한 은혜로 인한 의는 구약에 이미 나타나 있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창세기 15장 6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선포되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였다. 로마서 9장 30-33절을 읽고 이스라엘이 왜 이러한 믿음의 의를 상실하였는지 알아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함(22-26절)-바울이 위대한 단어 “믿음“을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에 유의하자. 23절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아담을 통하여 단번에 모두가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늘상 이르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바울은 몇 가지 중요한 용어들을 소개한다.
- 의로워지다-이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을 뜻한다.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같이“ 의롭게 여기신다. 이 일은 지상에서 우리가 처한 환경이나 조건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변함없는 우리의 지위를 뜻한다
- “칭의“-하나님께서 나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의, 또는 나의 것으로 돌려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다.
- 성화-나누어 받은 의 또는 나의 일상 생활에 살아 있는 의이다.
- 구속-이것은 죄와 그 형벌로부터 그 값을 치르고 구원받는 것이다. 이 값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이다.
- 화해-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본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 만족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잃어버린 죄인들을 용서하실 수가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만족을 얻었다. 그는 이제 잃어버린 세계를 사랑과 자비로 보실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절) 얼마나 감격적인 말인가 ! 행위나 선한 의도나 은사나 기도로써가 아니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된 것이다 ! 바울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며 동시에 의롭게 하시는 분“이심을 설명하는 것도 이 서신에서이다(26절). 그리고 그 해답은 십자가이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그는 자신의 몸에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고(벧전 2:24)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살아계셔서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이다 !
2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충분히 계시되기 전의 시기에 대해 지적하는데,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간과하심“(passing over-넘어가다)으로, 예컨대 노아와 아브라함, 에녹 등과 같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불의하게 보인다. 사실상,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는 진노를 보내셨으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있는가?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드러내실 것을 아셨고, 소와 염소의 피로써는 다만 “덮을 수“있을 뿐이었던 죄들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구속의 길을 예비하실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히 9-10장).
믿음으로 받아들임(27-31절)-“문제의 전체 결론을 들어보라 !“ 유대인들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하나님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하나님이 된다. 이스라엘만이 율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 같은 방법, 곧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러한 간단한 구원의 방법은 율법을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에 대해 죽음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던 것이다. 이로써, 복음은 율법을 세운다 ! 하나님의 법은 그의 은혜의 필요성을 계시하며, 하나님의 은혜는 또한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한다."
롬 4:1-8
▣ 믿음으로 의롭게 됨-로마서 4장-
어떻게 하든 이 장을 완전히 습득하라 ! 본 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어떻게 불경건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가(의를 선언함)를 설명한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본 장에서 바울은 칭의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사실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1. 칭의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4:1-8)
모든 유대인은 “조상 아브라함“을 존경하였으며 창세기 15장 6절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접을 받은 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그들은 하늘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은 아브라함을 지적하며 묻는다! 우리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는가?“
행위로써였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가 성취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을 것이지만, 구약에는 그러한 기록은 없다. 구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창 15:1-6)라고 말한다. 의의 선물은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믿음으로써 왔다.
바울은 그의 논급에서 “여기다(reckon), 전가하다(impute), 간주하다(co-unt)“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3-6, 8-11, 22-24절).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의 구좌에 넣는다“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칭의란 나에게로 의가 전가되어(내 구좌에 넣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는 것을 뜻한다. 성화란 의를 나누어 받아(내 생활의 일부가 됨)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고,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그들이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언급하듯이 둘 다 구원의 일부이다. 만일 나의 생활이 하나님께 대해 신실함(faithfulness)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fa-ith in God)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구원이란 행위로 인하여 얻는 상급이거나, 아니면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둘 다일 수는 없다. 5절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사람들을(의로운 사람들이 아님) 의롭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조상 아브라함“이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임을 입증하였다.
다음으로 바울은 다윗을 언급하며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쳤음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은 죄를 우리에게로 돌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히려 하나님은 순전히 은혜의 기초에 입각하여 우리에게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가진 것인가 !"
롬 4:9-17
2.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4:9-17)
이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만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율법은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원이 그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생긴 일임을 지적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한다 ! 할례는 언약의 징표였으며 유대인 자녀가 율법 체제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
할례는 세례(침례)와 같이 단순히 내적인 변화에 대한 외적인 표시일 뿐이다. 육체의 의식이 영적인 변화를 산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많은 “종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표식인 의식을 믿었으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실상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며 “믿음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갈 3:7/갈 3:29). 바울이 2장 27-29절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다.
13-17절에서 바울은 1-8절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킨 것처럼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킨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약속이다(13, 14, 1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여기서 “세상“이란 약속된 씨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는 영광된 왕국을 가리킴) 율법이나 할례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15장을 다시 읽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개입하셔서 그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을 때는 “그 자신은 끝났을 때“였음에 유의하자.
아브라함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믿는 일 뿐이었다 ! 율법은 누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율법은 진노를 가져오며 죄를 드러낼 뿐이다. 율법이 은혜를 완전히 무효화함과 마찬가지로, 행위는 믿음을 무효화시킨다. 두가지가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때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16절에서, 칭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육신적인 조상일 뿐아니라,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은혜와 율법에 대해서는 갈 3장 참조)."
롬 4:18-25
3. 칭의는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4:18-25)
첫 부분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켰고(1-8절), 둘째 부분에서는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켰는데(9-17절), 이제 세번째로,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킨다(18-25절).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밝히고 있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몸은 아이를 낳을 연령에서 많이 지나 있었다(히 11:11-12). 어떻게 90세와 100세인 사람 둘이서 아들을 가질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 그러나, 육체가 죽어 있을 때, 성령의 부활의 능력은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으나, 그가 이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받았다. 참으로 구원의 기적을 보여 주는 완전한 예증이라 하겠다 !
사람이 육신을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힘을 아직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한, 그는 의롭다 하심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자기가 죽은 것을 인정하여 투쟁하기를 멈추면, 그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새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하신다. “믿음에 견고한 것“(20절)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육신에 강한 것“은 구원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었는가? 24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진술을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그의 말씀에 기록하셨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곧, “우리가 믿는 것“이다 !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로마서에서 알아보라(1:16/3:22/3:26/4:3/4:24/5:1/10:4/10:9-10 등).
죄인이 말씀 가운데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똑같은 부활의 능력이 그의 생애에 들어와 그리스도인이 되고, 믿음의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죄인은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구절(25절)은 칭의의 기초,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한다. 바울은 5장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 준 바되었으며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죄인들임을 입증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실은 우리가 그의 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것은 칭의가 부활의 능력에 관한 문제이며 육신의 연약한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거한다.
본 장의 전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 믿음
보상 가(이) 아니라 선물 (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율법 은혜 하심을 얻는다:칭의
인간의 노력 부활의 능력"
롬 5:1-11
▣ 하나님과의 평화-로마서 5장-
본 장은 4장에 나오는 마지막 말, 곧 “의롭다하심“을 설명하는 것이다. 신약의 어떤 장이라도 본 장보다 더욱 상세하고 더욱 중요한 장은 없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의 뜻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바울의 논점을 파악해야 한다.
1. 칭의의 축복(5:1-11)
칭의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것은 나에게 전가된 의, 내 구좌에 넣어진 의이다. 성화는 나누어받은 의,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성취된 의이다. 칭의는 하나님 앞에 선 나의 지위이며, 성화는 내 앞에 전개된 지상에서의 나의 신분이다. 칭의는 결코 변화되지 않으나, 성화는 변한다. 칭의를 통하여 우리가 가지는 축복을 살펴보자.
평화를 갖는다(1절)-우리가 원수였을 때가 있었으나(10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며, 심판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을 대면한다(2상반절)-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구원을 받기 전에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으며 정죄를 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존전에 출입할 수가 있다(히 10:19-25).
소망을 갖는다(2하반절)-직역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소망을 자랑한다“는 뜻이 된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을 읽고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은 “소망이 없음“을 살펴보자. 우리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가져온다고 자랑할 수는 없으나(엡 2:8-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구원을 자랑할 수는 있다. 이것은 “복된 소망“이다(롬 3:23/롬 5:2 비교).
일상적인 신념을 갖는다(3-4절)-“우리는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한다“(자랑한다, 영광으로 여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장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생활 가운데 부딪히는 현재의 시련들 가운데서도 신념을 가진다. 우리는 시련이 끝났음을 영광으로 여기거나, 시련의 주변에서 영광스러워 하지 않고 시련 가운데서 영광을 누린다(마 13:21/살전 1:4-6/약 1:3 이하 참조).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시련+그리스도=인내
-인내+그리스도=성품(경험)
-경험+그리스도=소망
하나님의 사랑을 갖는다(5-11절)-내주하시는 성령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발산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같이 “무력하고“, “경건하지 못하며“, “죄인들이고“, “원수들“인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십자가에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바울이 말하는 점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면, 이제 그의 자녀들인 우리를 위하여는 얼마나 더한 일을 하실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는다(9절).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작용할 때(빌 3:10) 그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10절). 우리는 “화목함“을 얻었으며(11절-속죄) 이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롬 5:12-21
2. 칭의의 기초(5:12-21)
이 부분은 복합적인 부분이다. 여러 번 읽고 현대 번역본을 사용하도록 하자. 바울은 여기서 어떻게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한 사람(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어떻게 거룩하지 못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제일 먼저 “한 사람“이란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12, 15, 16, 17, 18, 19절-11회). 14, 17, 21절에서는 “왕노릇하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에 주목하자. 핵심이 되는 사상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보실 때 아담과 그리스도의 두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어 잃어버림을 받았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 있어 구원을 받았다. 중간 지점이란 없다.
14절에서는 아담을 그리스도의 모형(표상)으로 언급하는데, 그는 “첫아담“이요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다(고전 15:45). 두 아담을 다음과 같이 대조시킬 수 있다.첫아담 마지막 아담-그리스도
흙으로 만들어짐(고전 15:47) 하늘에서 오신 주님(고전 15:47)
옛창조의 왕(창 1:26-28) 새 창조의 주님(고후 5:17)
완전한 동산에서 시험을 받아 실패함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승리함
죄와 죽음과 정죄를 가져옴 의와 생명과 칭의를 가져옴
죽음이 통치함(5:14/5:17) 믿는 자, 은혜가 통치함(17, 21절)
많은(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됨(19절) 믿는 자는 의인이 됨(19절)
우리는 육신의 출생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인 출생을 통하여
“아담 안에 있음“ “그리스도 안에“ 있음
구약은 아담의 세대들에 관한 책이며(창 5:1-2) “저주“(말 4:6)라는 말로 끝을 맺는 반면에,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들에 대한 책이며(마 1:1) “더이상 저주가 없다“는 말로 끝난다(계 22:3). 아담이 잃어버린 창세기의 낙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회복되었다.
바울이 여기서 교훈하는 것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의 단일성이다(행 17:26 참조). 그가 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할 때,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와 동일시되고 있으며, 그의 죄는 우리의 죄이고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다. 바울은 12-14절에 주어져 있는 논점을 다음과 같이 진행시켜간다.
우리 모두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하면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는 율법이 없었는데도 사람들이 죽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여 죽었음은 알려진 바이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의 사람들은 그와 같은 법에 불순종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죽음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 원인이 바로 아담의 죄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죄와 저주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은혜로 “마지막 아담“을 주셨는데, 이는 그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아담이 죄 가운데서 행한 모든 것을 풀어 놓으신 새로운 “머리“이시다.
구원과 죄-바울은 이제 구원과 죄 사이의 대조점들을 몇 가지로 제시한다.
-범죄 대(vs.) 값없는 선물(15-16절)-아담의 범죄는 정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은 의와 생명을 가져왔다.
-죽음 대 생명(17절)-아담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왕노릇하였으나,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미래의 일이 아님), 풍성한 삶을 누린다 !-정죄 대 칭의(18절)-아담의 죄는 인류를 저주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과 바른 지위를 가지도록 하였다.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자유로이 대면한다.
-불순종 대 순종(19절)-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으며 우리를 죄인되게 하였다. 반면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셨으며,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의롭게 된다.
-율법 대 은혜(20절)-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다. 이는 인간의 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율법의 요구에 응하셨다. 그리하여 율법이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죄로부터의 구원을 공급하셨다.
지금까지의 전체적인 논급이 20절에 요약되어 있다. 새로운 창조에서는(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를 의미함) 더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며 은혜가 왕노릇한다. 죽음이 다스리지 못하며 생명이 다스린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 안에서 다스린다 !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왕들과 제사장들이 되게 하셨다(계 1:5-6).
문제의 제기-이제 중요한 질문은 “나는 아담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아담 안에“ 있다면 죄와 죽음이 나의 삶을 다스리며 나는 정죄 아래 있다 반면,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은혜가 통치하며,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통치한다. 죄는 더이상 나를 노예로 삼지 못한다(6장의 주제).
5장 6-11절에서 바울은 대속(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을 가르친다. 그러나, 5장 21절에서는 좀더 수준을 높여 일체성(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게 되었다)을 가르친다. 할렐루야, 참 구주가 아니신가 !"
행 6
▣ 부가적 해설-로마서 6-8장-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실천적인 거룩함을 강조해야 할 절실한 필요를 느낀다. 만일 진실로 거듭났다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로마서 5장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6장과 8장으로 진행해 나가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 우리가 성화에 관한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며,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정의:“성별“이라는 것은 단순히 “따로 떼어 놓는다“는 말이다. 성별은 반드시 사물의 본성을 따지지는 않으며 다만 하나님과 연관된 그 위치만을 말한다. 성막과 그 가구들은 성별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따로 떼어 놓았다. 나무, 옷, 금속, 다른 재료들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께 따로 떼어 놓여진 것이다.
요한복음 17장 19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본래보다 “더욱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 그가 말씀하시는 뜻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스스로를 따로 떼어 놓는다는 뜻이다. 그는 구원을 통하여 신자들을 하나님의 영광 속에 따로 떼어 놓으실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성화는 삼중적이다.
-위치상의 의미-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옮겨져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있다(요 17:16)
-실천적인 의미-죄를 날마다 극복하여 이기며, 거룩함과 그리스도를 닮음에 있어 점차적으로 장성한다.
-완성-“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하신지를 있는 그대로 알 것이기 때문에 그 분과 같이 될 것이다!“
▣ 범위:우리가 만일 로마서 6장의 멧세지를 로마서 7장의 멧세지와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바울의 멧세지를 혼동하게 되어 큰 축복을 잃게 될 것이다. 다음의 표는 로마서 6장의 멧세지와 로마서 7장의 멧세지의 차이를 설명한다.
로마서 7장은 로마서 6장에서보다 더욱 깊은 문제를 제시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육적인 본성이 그를 끌어내려 노예로 삼고자 한다는 로마서 6장로마서 6장 로마서 7장
우리가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성이 이처럼 죄악된
계속해서 범죄할 것인가? 것일 때 어떻게 죄아닌 다른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죄의 몸에 속박당함 율법과 규율과 규칙에 속박당한
우리가 죄에 대해 죽음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음
종과 주인에 대한 예증 한 아내와 두 남편에 대한 예화
문제의 제기:내가 죄악된 본성을 문제의 제기:나의 죄악된 본성에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악을 행치 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선을 행할
않을 수 있는가의 문제 수 있는가의 문제
문제의 해결: 문제의 해결:-죄에 대해 죽었다고 앎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앎
-믿음으로 자신을 죽었다고 여김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시인함
-하나님께 양도함 -성령께 양도함
의 문제를 깨닫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 7장의 경험, 곧 “우리는 선하지 않다“는 겸손한 깨우침으로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율법 아래 산다. 이들은 규율과 규칙의 연속 가운데에서 살며 육신적인 힘을 사용하여 종교적으로 순종하면서, 이러한 생활을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 성령께서 안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된다.
육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즐거워하며 율법과 규례에 순종하려고 노력한다. 육에 관하여 가장 속기 쉬운 것은 육이 실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대단히 거룩하고 대단히 영적으로 나타나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로마서 6장은 악을 생성하는 육을 다루며, 7장은 율법을 통하여 “선“을 생성하는 육을 다룬다.
▣ 육체:이 말은 몸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보다는 하나님의 영향과 능력으로부터 떠나 있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여기서 육을 나타내는 다른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옛 사람, 죄의 몸, 자아(self /“나“) 등이다. 정련된 사람들(그리스도인들조차)이 우리 안에 아무 선한 것이 없다고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성경이 육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다. 신자가 스스로 육신을 조절할 수 없으며, 육을 변화시킬 수 없고, 육을 정결케 할 수 없으며, 스스로 육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는 결코 로마서 8장의 생명과 자유에 들어가치 못할 것이다. “탁월한 바리새인“인 바울도(빌 3장 참조) 로마서 7장에서, 그의 육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아마도 바울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죄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내적인 마음가짐을 품었을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하지만, 거룩한 법이라 할지라도 죄악된 육을 조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잘 교육을 받은 신자들에게조차도 하나의 충격으로 밀어 닥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육의 에너지로써 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의 어떤 신자이든 육으로는 아무리 경건하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
우리는 육체가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음을 인정하고 성령께 항복(또는 헌신)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생에 대해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율법, 결의, 규율의 속박 아래 산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영광된 자유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
▣ 십자가에 대한 두 가지 면:로마서 5장은 개요 부분에서 “구원“이란 제목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 토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로마서 5장과 6, 7장 사이의 대조점들을 살펴보자.
로마서 5장 로마서 6, 7장
대속-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연합-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하여 죽으심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죄를 대신 그리스도는 죄에 대하여 죽으시고
하여 죽으셨으며 죄의 형벌을 죄의 능력을 파괴하심
치루심
칭의-하나님은 그의 관점에서 성화-하나님께서 나를 사람들 앞에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심 의롭게 하심
의가 전가-내게로 돌려짐 의의 분여-의가 성령을 말미암아
내 생활의 일부가 됨
믿음으로 아담에게서 나와 믿음으로 육신과 율법의 영역에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 나와 성령의 영역으로 들어감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십자가는 내가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 승리와 평화와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한다.
▣ 우리의 책임:그리스도인의 삶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죽어 있고“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알라, 여기라, 양도하라(드리라)“ 이것은 6장에 나오는 핵심 단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영적인 지위와 특권을 알아야 하며,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불어 시간을 보낸다는 뜻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우리의 삶에서 “진실하다고 간주하여야“ 한다. 이것은 성령으로 난 믿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일을 성령께 양도해야 한다. 일 주일에 한 번이나 또는 매일의 시작에서만 아니라 하루종일 드려야 한다. 이것은 “성령과 더불어 행하는 것“을 뜻한다.
옛 성품은 악을 행하는 데 강하나, 영적인 일을 할 때 “육은 약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으로 새로운 성품을 먹여야 한다. 그리고, 옛 성품은 죽은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죽은 사람에게 먹여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육신의 찌꺼기로 옛 성품을 먹이고 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성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만나와, 기도 중에 가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굶주려 있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셨다. 우리의 책임은 명백하다. 알고, 여기고, 드리라!"
행 6:1-10
▣ 부활을 통한 구원-로마서 6장-
우리는 이제 성화에 대해 다루는 로마서의 세번째 부분(6-8장)으로 이동한다. 이 세 장은 함께 속해 있어서 독립적으로 연구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세 장을 주의깊게 모두 읽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6장은 죄에 대하여 죽은 신자를 다루며 7장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신자, 8장은 성령이 주시는 승리 가운데 살아 있는 신자를 다루는 것에 유의하자.
이 세 장들은 모두 5장 17절의 “생명 가운데 왕노릇한다“는 짧은 구절을 설명하는 것이다. 6장은 어떻게 죄가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가를 설명하며(6:12), 7장은 어떻게 율법이 더이상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는가를 설명한다(7:1). 그리고 8장은 내주하시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시는지를 설명한다(8:2-4).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는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즉, 어떻게 하면 옛 성품(육, 죄의 몸)을 이기고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6장은 첫번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옛 성품은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옛 성품을 이기고 승리한다 !
그러나 두번째 질문은 좀 복잡하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은 “선한 일들조차도“ 옛 성품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 죄란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 마음 가짐과 성향이다. 7, 8장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에 대해 죽고 성령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성취하셨음을 보여 줌으로써 이 문제에 대답한다(8:4). 육을 이기는 비결은 세 핵심 단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알라(6:1-10)
바울이 본 장에서 “알라“는 단어를 얼마나 자주 사용하는지 눈여겨보자(3, 6, 9, 16절). 사단은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영적인 진리에 이르러 우리를 어두움 가운데 두고 싶어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질문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알려면 죄 가운데 살아야 한다 !“고 말한다.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그리스도는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뿐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 성령께서 내게 주님의 몸에 연합하는 세례(침례)를 베푸셨을 때 나는 십자가에서 그의 죽으심에 동참하였다. 3-4절은 물세례(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주님의 몸의 지체가 되도록 “그리스도에게로“ 밀어 넣으시는 작용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내가 함께 죽었으며, 그가 부활하셨을 때 나는 그와 함께 생명의 새로움 가운데 부활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갖는 새로운 지위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을 뿐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으셨다(6:10). 다시 말하면, 주님은 죄의 능력을 깨뜨리셨고 옛 성품을 “퇴치시키셨다“(파괴하셨다/ 6:6). 옛 성품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주된 능력이 파괴당한 것이다.
죄와 옛 성품은 마음이 굳은 주인들이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엡 2장).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다스리던 죄의 지배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어졌는데도 여전히 죄를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 로마서 5장에 이르러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마음에 영접하지만, 로마서 6장으로 옮겨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6장 1-10절을 다시 읽고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었음과(2절), 옛 성품은 십자가에 못박혔음을(6절), 그리고 신자는 죄에서 자유롭게 되었음을(7절) 스스로 알아보라 ! 옛 성품은 더이상 그리스도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
행 6:11
2. 간주하라-여기라(6:1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것을 참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여긴다는 말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나의 생활에서 참되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라고 말하는 단순한 믿음의 단계이다.
여기는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믿음이며, 환경이나 감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말씀하시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을 믿고 옛 성품이 죽음에 넘겨졌음을 믿으라고 하신다. 십자가형은 스스로에게 가할 수 있는 죽음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 것을 믿고 그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단순한 단계이다."
행 6:12-23
3. 양도하라-드리라(6:12-23)
만일 신자가 진실로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믿음을 입증할 것이다. 이것은 옛 성품, 육을 이기고 승리하는 과정에서의 세번째 단계이다.
12절에서 단호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이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는 행위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한 단계이다. 이 놀라운 교리를 아는 것으로,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의 몸의 지체들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마지막 단계를 취해야만 한다.
16-23절에서 그는 종과 주인의 예를 들고 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죄에게 양도함으로 우리는 죄의 종이었으며 죄의 삯인 죽음을 받았다(23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로와지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지위는 새로운 본성과 더불어 새로운 주인을 맞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이다! 몸의 지체들을 그리스도께 “도구“ 또는 “병기“로 드렸을 때, 그는 우리의 생활을 조절하시며 우리는 거룩함의 열매를 맺게 된다(22절).
고의적으로 자신을 죄에 복종시키는 그리스도인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추수 때에 슬픔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는데 죄가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패배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고의적으로 자신을 죄에게 굴복시키기 때문에 죄에 순종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격된 자신의 지위보다 아래에 살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다스리며“ 왕과 같이 살 수있는데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4. 세 단계에 대한 재고찰
이 세 단계를 순서대로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고 여기지 않고는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하며, 육신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서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우리의 특권에 어울리게 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가지는 승리의 관계에 관하여 신자들이 혼동을 일으키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나에게 새로운 내적인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옛 본성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알고, 간주하고, 양도하는(드리는) 이 세 단계는 육신을 극복하고 매일 승리하도록 인도해 간다. 이 세 단계는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은 보좌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그 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생명 안에서 왕노릇한다.“ 거기서 우리는 죄의 노예가 아니라 의의 종이다.
이 세 단계가 일상 생활의 마음가짐을 대표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이 단계들은 어떤 특별한 유혹이 올 때 사용하는 “비상 대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신자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위치를 알게 될 것이며, 기도 시간을 갖는 신자는 자신이 죄에 대해 죽었다고 간주할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 자신을 드림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결심이나 훈련, 단식, 결의, 개혁, 율법주의, 또는 다른 육신의 방법들로는 신자의 생활에 거하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승리는 십자가에 못박힘을 통하여 온다(갈 2:20).
워치만 니의 저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Watchman Nee, The Normal Christian Life)에서 로마서 6, 7, 8장에 대한 탁월한 자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이 장들에 대한 매우 훌륭한 주석이며 오늘날도 유용하므로,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롬 7:1-6
▣ 죄의 비참함-로마서 7장-
본 장은 오해가 많은 장이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바울이 왜 6장에서 승리를 다룬 후에 7장의 패배로 이동해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성경 연구자들이 많다 ! 그들은 6장의 승리로부터 8장의 큰 축복들로 건너 뛰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영감을 받는 저자는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7장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생생한 문제거리를 다루고 있는데, 곧 신자들이 갖는 하나님의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6장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임을 설명한다. 로마서 7장은 “우리가 계속 죄에 거하겠느뇨?“(6:1)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런데 바울은 6장 15절에서 두번째 질문을 하고 있음에 주목하자.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해서 죄를 지으리요?“ 바울은 7장에서 이 질문에 답하여,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같이, 율법에 대하여도 죽은 것임을 설명한다(7:4).
바울이 6장 4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할 때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The Normal Christian Life)에서 워치만 니 (Watchman Nee)는 이 문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며,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무슨 일인가를 하신다는 뜻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인 규칙들과 규율과 훌륭한 결단들“로 말미암아 짐스러워 하며, 율법적인 거룩함이 불가능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율법 아래“ 있어,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갖는 새로운 위치와 성령 안에서 갖는 새로운 능력(8:3-4)은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는 승리와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한다 ! 바울은 일련의 “이중주“를 우리에게 들려 줌으로써 7장에서 이를 설명한다.
1. 두 남편(7:1-6)
우리가 율법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결혼관계를 사용한다. 바울이 “법“이라고 말할 때 이는 모세의 구약 율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죄를 억제하거나 거룩함을 얻으려고 사용하는 온갖 종류의 법률을 말한다.
두 남편이란 율법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여인이 결혼하고 나면 남편이 죽기까지는 그에게 매여 있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다시 결혼해도 되는 자유의 몸이 된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는 율법에 묶여져 있었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율법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 ! 우리는 더이상 율법의 체계와 “결혼한“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으며, 율법은 더이상 우리를 조절할 수 없다.
7장 4절을 거듭해서 읽고 그 놀라운 멧세지에 집중하라. 그 남편이 우리를 조절하지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놀라운 새로운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였을 때, 율법은 우리의 옛 본성에 “죄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일로 인하여 죽음을 산출하게 되었다(5절).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구원을 받으며, 옛 문서(“의문의 묵은 것“)로써가 아니라 성령의 새롭게 하심 안에서 섬기고 있다.
6절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없다고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는 이제 더 커졌다. 신약의 요구들은 구약 율법보다 더욱 어렵다. 왜냐하면, 신약은 산상 수훈의 예만 보더라도 외적인 행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마음가짐을 다루기 때문이다.
6절은 우리의 순종의 동기가 달라졌음을 가르친다. 우리는 일단의 규율에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 사랑으로, 마음으로부터 순종하는 것이다(8:4). 초보적인 피아노 연주자는 악보를 완전하게 연주할 수는 있으나, 숙달된 음악가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노래의 내적인 정신에 사로잡힐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노예가 주인을 두려워하는 것과 다르다. 그와는 달리 신부가 사랑으로 신랑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롬 7:7-14
2. 두가지 발견(7:7-14)
그렇다면 왜 거룩함을 산출하지 못할 율법을 주어 괴롭히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 심중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것일까? 바울은 이 질문에 답이 될 두가지 사실을 발견하였다. 곧, 율법 자체는 영적이다. 그러나, 신자는 육적이며 죄 아래 팔렸다는 사실이다. 교만한 바리새인에 비해 얼마나 겸손한 발견인가 ! 바리새인들의 본성은 영적이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가 없다 !율법은 죄를 드러낸다(7절). 우리가 율법을 읽을 때 율법이 저주하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 율법은 죄에 동력을 제공하며(8절), 죄의 동기들은 우리의 본성을 선동하고 있다. 율법은 죄인을 죽이며 죄인을 속인다(9-11절).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표준에 따라 순종하는 데에 얼마나 미약한가를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죄의 죄됨을 드러내며(13절) 밖으로 나타난 행동만이 아니라 안에 있는 육적인 마음가짐의 죄악성도 역시 나타낸다.
신자가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법으로 말미암아 조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옛 본성은 규율을 알지 못하나, 새로운 본성은 규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 얼마나 복된 시간이겠는가 !"
롬 7:15-25
3. 두 가지 원리들(7:15-25)
율법과 더불어 패배의 경험을 한 후에 바울은 신자의 생활에 작용하는 두 가지 원리 또는 “법“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두 가지는 첫째, 죄와 사망의 법,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8:2 참조)이다.
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자녀들 안에 있는 두 가지 본성에 대한 사실들을 다룬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그 옛 성품을 변화시키거나 정결케 하시는 것, 또는 개혁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자의 옛 성품은 그가 구원받던 날과 마찬가지로 사악하며 영을 거스린다.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시며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를 지을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이제는 거룩함을 위한 욕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죄를 향한 동력은 아직도 있으나, 욕구는 없다.
죄와 사망의 법-이는 다시 말해서 옛 본성이 작용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신자가 선을 행하기를 원할 때에도 악이 공존한다. 우리가 육신의 힘으로 행하는 일은 “선한 일“이라 해도 악에 물들어 있다(21절 참조). 여기서 6장의 승리와 7장의 승리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6장에서는 신자가 육신의 악한 일들을 극복하여 승리를 거두고 있으며, 7장에서는 육신이 율법에 순종하여 행하려는 “선한 일들“을 극복하여 승리한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육은 무익하다!“ 그런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 어떤 법을 정해 놓고는 거기에 순종하도록 육을 훈련시키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육신의 생각(옛 성품)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으며 사실상 순종할 수도 없다“(8:7).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법에 의해 좌절당한다. 우리가 거룩함에서 성장하며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섬기는 것은 외적인 법에 순종함으로써가 아니다. 이 법, 또는 원리는 8장에서, 특히 처음 17절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가 없다. 성령께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를 통하여 성취하신다(8:3-4).
이 모든 문제들은 실제 생활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간단히 정리하자면,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지위는 율법에 대해 죽은 자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어떠한 의무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 마땅히 순종해야 할 어떤 “그리스도인의 법“이 있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아래 속박하시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성취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6장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더이상 육신에게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보다 더한 일, 하나님께 열매를 생산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물론 할 수 있다 !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하려고 시작하는 순간, 그는 실패자라는 사실들 발견할 것이다.
말하기는 유감스럽지만, 선의의 그리스도인들이 거기까지 와서 멈추고 영적인 재난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오히려 로마서 7장의 진리, 곧 그는 실패자이며, 율법은 선하지만 자신은 육신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자기의 생애를 통하여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도록 허락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길 수 있게 하신다면,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축복된 자유(7장)를 누릴 수가 있다."
롬 8:1-4
▣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로마서 8장-
본 장은 성화에 대해 다룬 부분의 절정을 이루며(6-8장), 또한 율법과 육신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질문들에 답한다. 본 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이 지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정복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게되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본 장을 세 구절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죄함이 없음-성령과 율법(8:1-4)
이 구절들은 7장에서 나오는 논쟁의 결론을 이루고 있다. 바울이 7장에서 구원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그는 신자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으신가?
대체로 하나님은 모든 생각과 행위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 여기서 “정죄“라는 단어는 지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5장에서부터 제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며, 그리고 우리가 아직 “육신에 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어 있으므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행하게 하실 수 있을“ 뿐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에 대처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본성의 능력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은 참으로 영광된 날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영광된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가 !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롬 8:5-17
2. 빚이 없음-성령과 육신(8:5-17)
신자는 두 가지 “뜻“(마음)을 품을 수 없다. 그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육신의(육체에 속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반목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면서 성령에 속한 일들을 사모할 수 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대해 아무런 빚이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8:12). 우리의 빚, 우리의 채무는 성령께 대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구원하는 믿음을 부여하고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을 심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에서 매일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는 성령께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 !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령은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시며 우리 안에 사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참으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근심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인치심에 따라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영원한 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축복들의 보증이 되신다(고후 1:22). 성령이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령은 15절에서 “양자의 영“이라고 불리워진다. 육신대로 사는 것, 또는 율법 아래 사는 것(자신을 법 아래 두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다)은 속박 아래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만,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된 자유의 생활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신자에게 있어서 자유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장 나쁜 노예 생활이기 때문이다 ! 오히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자유는 율법과 육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신약에서 “양자“는 고아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오늘날의 양자와는 그 뜻이 같지 않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아들의 지위“인데, 가족이거나 외부에서 손아랫 사람을 취하여 정당한 상속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는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이고 양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속자이므로 그는 우리가 영광 가운데서 그의 유산을 받기까지는 유업을 받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신자는 육신(“fersh“/ 신체의 의미가 아님)에 대해 만족케 하거나 제멋대로 하게 두거나, 육에 순종할 빚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행위를 “죽음에 넘겨 주어야 하며“(억제하다- 8:13/골 3:9-),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지도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롬 8:18-33
3. 끊어짐(분리)이 없다-성령과 고난(8:18-33)
신자가 비록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실상, 세상 만물(19-21절에서는 “피조물“)은 아담이 불순종한 탓으로 인하여 죄의 속박 아래 탄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사단을 정복하실 때에, 그는 전 피조 세계를 그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모든 자연이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감격적인 구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다(5장). 우리는 죄에 대하여(6장),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7장) 죽었기 때문에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다. 어느 날 우리는 자연이 그 무서운 속박에서 구조될 때 죄라는 그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으나 양자될 것, 즉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영은 구원을 받았으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가운데 기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앞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일의 첫열매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구속의 날에(엡 1:13-14) 우리를 인치신 성령은 우리의 몸을 생명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다(8:11).
22-26절에 나오는 세 가지 “탄식“을 살펴보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22절),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탄식한다(23절),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중재하시면서 탄식하신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셨을 때에 친히 탄식하셨음을 눈여겨보자. 피조물의 괴로운 속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부담스러우시겠는가 ! 그리스도는 우리들뿐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값을 치르셨던가 !
바울은 우리가 소망 중에 이러한 고난을 견디어 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기도하는 특전이 있다고 지적한다. 길고, 아름답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신앙심이 깊은“ 기도들이 너무도 많다. 바울은 가장 영적인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 없는 탄식임을 시사한다.
어떤 번역은 26절을 “말로 몹시 깊이 탄식한다“고 번역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8:29).
우리는 8장 29절의 목적을 인하여 8장 28절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8장30절에 나오는 모든 동사들이 과거시제로 사용된 것에 유의하자. “신자는 부름을 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영광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영광을 받았는데 왜 이 세상의 고난 아래 무기력한가? 할렐루야! 놀라운 구주이시다!
바울은 32-35절에서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며 이에 대해 명백하게 답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대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증거는 많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그의 가장 좋은 것을 주셨으며 그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라도 거저 주실 것이다.
누가 우리를 죄 때문에 고발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우리는 의로워졌고 이 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정죄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오른 편에서 우리의 변호사로서 살아 계신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없다. 마귀자신(38절에 나오는 “권세자들과 능력“)도 할 수 없다.
정죄가 없고, 빚이 없고, 끊어짐도 없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롬 9:1-13
▣ 이스라엘의 선택-로마서 9장-
다음의 세 장은 이스라엘의 과거(9장), 현재(10장), 미래(11장)에 대한 영적인 역사를 다룬다. 바울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선택한 백성을 제쳐두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무엇이고, 미래의 어느 날 하나님은 이 민족을 어떻게 회복하실 것인가를 설명하는 데 있다.
1.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설명(9:1-13)
선택으로 인한 축복들(1-5절)-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진실한 부담감을 칭찬할 수 밖에는 없다. 그의 말은 출애굽기 32장 31-32절의 모세를 상기시킨다.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하여 이러한 종류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양자-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의해 선택됨(사 43:20-21).
-영광-성막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출 24:16-17).
-언약-아브라함과, 전 민족과, 그리고 다윗과 맺으신 언약.
-율법의 수여-하나님은 이방인을 다루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그들의 생활을 다스릴 하나님의 법을 받았다.
-하나님을 섬김-성막에서의 제사장 직분.
-약속들-구약의 수 많은 약속들이 유대인들을 위하여 성취될 것이다.
-조상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
-메시야-그리스도는 유다지파에 속한 유대인이셨으며, 율법에 따라 출생하셨다. 5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축복하셨다“ 라고 말한 것에 유의하자.
다른 어떤 나라도 이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은 나라는 없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축복들을 일축해 버렸으며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택한 자들 중에 속해 있으므로 그와 유사한 축복들을 누린다. 곧, 양자(엡 1:5), 영광(엡 1:6-7),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마음에 기록된 율법(히 10:16-17), 그리스도를 통한 제사장 직분(벧전 1:4), 그리고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녀인 것 등의 축복들로서,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선택의 기초(6-13절)-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완전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의 절대 주권을 행사하셨다. 로마서 9-11장에서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민족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음을 유의하자. 이 장들에 나오는 진리들을 구원에 적용시키거나 또는 신자 개인의 안전성에 적용한다면, 그 전하는 멧세지를 완전히 놓치게 된다.
실제로, 바울은 그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종족적으로 논하는 것이지 각각의 죄인들을 개인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님을 조심스럽게 지적한다.
-아브라함-그는 히브리 민족의 조상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유대 백성이 이스라엘의 참된 아들은 아니라는 점을 서술한다(2:25-29 참조).
아브라함은 자녀들이 많았으나 선택된 아들은 이삭 한 사람뿐이었고, 이삭만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다.
-이삭-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의 아들이었던(갈 4:21-31) 반면에, 이스마엘은 행위를 통한 육신의 아이였다. 참된 “아브라함의 씨“는 신자들이며, 혈관에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참 “아브라함의 씨“는 아니다.
-야곱-하나님은 장자인 에서를 지나치셔서 야곱을 택하셨다. 이것은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 왜 그랬을까?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민족적인 목적이 성취될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에서는 하나님께 반역할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결정에 따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목적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둘 다 진리라는 점이며, 말씀에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롬 9:14-33
2. 이스라엘이 선택됨에 대한 변호(9:14-33)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선택의 교리가 몇 가지 의문을 일으킨다.
하나님은 불의하신가?(14-18절)-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선택은 의로움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거저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한 사람은 택하고 다른 사람은 버리신다면 하나님은 공정하지 못하시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공정한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공정하시다면 그는 우리 모두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모세(출 33:19)와 바로(출 9:16)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그의 원하시는 대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고 다른민족은 지나치셨다고 해서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도 전혀 없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에 저항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왜 잘못을 찾아내시는가?(19-29절)-바울은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응답하고 있는데, 아마도 예레미야 18장 1-6절에서 빌려 왔을 것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다. 그리고 세상의 민족들과 그 지도자들은 그릇들이다. 어떤 그릇들이 파괴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인내로 참으시는 진노의 그릇들인가 하면(창 15:16), 다른 그릇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비의 그릇들이다. 이러한 자비의 그릇들은 신자를 나타내고 있다(24절의 “우리“는 유대인과 이방인 둘 다를 뜻함).
다음으로 바울은 호세아 2장 23절과 1장 10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그 이방인들 중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불리울 한 백성을 부르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보여 준다. 이 백성이란 교회를 말한다(벧전 2:9-10 참조).
바울은 이사야 10장 22-23절을 인용하여 유대인의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밝힌다(사 1:9). 다른 말로 하면,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목적으로 인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방인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30-33절)-여기에 모순된 것 같지만 사실은 올바른 역사의 역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고, 유대인들이 가졌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이방인들은 영접을 받았다 !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하였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로 인해 걸려 넘어졌다(사 8:14/사 28:16/마 21:42/고전 1:23/벧전 2:6-8). 이들은 그 민족에게 정치적인 승리를 가져올 메시야를 원하였으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믿을 수가 없었다. 반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아보기 위해서는 스가랴서에 대한 본 서의 설명을 참조하라.
본 장에서 바울이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이스라엘의 위치를 설명하는 일이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었고, 다른 어느 나라도 갖지 못한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이 민족은 세상을 축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데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본 장은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를 높이고 있으며, 이 주제는 오늘날 인간의 의지와 자기 공로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날 인간의 불순종에도 관계없이 잘 이루어져 나갈것이며, 불순종하는 사람은 축복을 잃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측정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11:33-36 참조).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가 없었다면 구원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 특별 연구
9장 13절-“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귀절은 말라기 1장 2-3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고 민족들을 가리킨다. “에서“는 에돔을, “야곱“은 유대인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택하신 것을 예증하기 위한 강압적인 방법일 뿐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빛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다른 이들은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는 없다.
9장 18절-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심에는 이중의 과정이 있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셨고 바로는 이에 저항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 얼음을 녹이는 바로 그 동일한 태양이 진흙을 굳게 한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구절을 읽고 바로가 그의 마음을 굳게 한 것과(출 8:15), 하나님이 또한 바로의 마음을 굳게 하셨음을(9:12) 눈여겨보자.
9장 28절-마지막 적용은 환란의 “단축“에 관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은 시험을 받고, 수가 감소될 것이며, 남은 자들은 참된 신자들 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롬 10:1-13
▣ 이스라엘의 거절-로마서 10장-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의 현재의 거절에 대해 다룬다.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왜 현재의 영적인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장이다.
1. 거절의 이유(10:1-13)
핵심 단어는 의(義)이다. 유대인들은 의를 원하였으나 그릇된 방법으로 얻고자하였다. 마태복음 23장 15절에서 묘사하는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 시간과 재물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무지함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적인 사람들“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보고서 하나님이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두 종류의 의를 언급한다. 즉, 율법을 순종하여 얻는 행위 의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 의이다. 유대인들은 믿음의 의에 순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민족적이고 종교적인 교만은 그들로 하여금 단순한 믿음에서 맹목적인 종교로 등을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하였고 율법에 매달렸으며,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길을 준비한 것이라는 사실과 그가 친히 십자가에서 율법의 지배를 종식시켰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 모세의 율법은 더이상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로 인간을 다루신다. 율법의 의는 레위기 18장 5절에서 설명되어 있으며, 믿음의 의는 신명기 30장 12-14절에 설명되어 있다.
그 신명기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죄인들도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것임과, 그리스도가 죄인들 가까이 계셔서 구원할 준비를 하고 계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용된다. 6-8절은 바울이 신약의 진리를 전하기 위하여 구약의 구절들을 사용한 좋은 예이다. 신명기 30장 11-14절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율법이 그들에게서 멀다고 말하지 않도록, 특히 이스라엘이 나라들 가운데 흩어지게 될 때에 적용하여(신 32:1-55) 모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찾으러 하늘에 가거나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입술과 그들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바울은 이것을 곧 말씀(요 1:1)이신 그리스도께 적용하여,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다시 하늘에서 불러오거나 또는 지하 세계에서 끌어 올릴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구원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에 있어서, 믿어 구원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사람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마음에 믿을 때에 오며, 마음에 믿은 것을 입으로 고백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당대의 어떤 유대인들은 주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았다(요 12:42-43).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공개적으로 그를 고백할 때에 그의 믿음이 증명되며 의의 선물을 받는다.
11절에서 바울은 다시 이사야 28장 16절(롬 9:33 참조)을 인용한다. 본래는 “믿는 사람은 누구나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로 되어 있는데, 성령은 그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치 않도록 하실 것이라고 뜻을 부연하신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라는 말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선택된 백성“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13절에서 바울은 요엘 2장 32절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유대인만이 아닌 것이다 ! “차별이 없다.“"
롬 10:14-17
2. 거절에 대한 치료책(10:14-17)
여기서 순서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전도자가 파송을 받고 주의 말씀을 전파하며, 죄인들이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죄인이 말씀을 믿으며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가 구원을 받는다 ! 여기서의 논점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7절).
15절에서 바울은 이사야 52장 7절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으로 설립될 때 완전히 성취될 구절이다. 그들의 메시야가 통치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될 때에 이스라엘이 누릴 기쁨을 생각해 보라 ! 바울은 평화의 복음을 오늘날 버림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하는 것으로 적용한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평화이다(엡 2:13-17).
우리는 선교사들을 이방 나라들에 보내는 근거로 로마서 10장 14-15절을 자주 사용한다. 이것은 물론 잘하는 일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복음을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전파하는 것에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가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파하는 이유는 로마서 1장 16절 때문이 아니라(“첫째는 유대인에게“) 로마서 10장 14-15절 때문이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부담감을 나누어 진다면 복음을 그들과 함께나누고 싶을 것이다. 이방인이건 또는 유대인이건 잃어버린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다운 발“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태도는 어떠한가? 이사야 53장 1절에서 말하듯 “누가 믿었는가?“의 상황이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날에(요 12:37-38), 그리고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들이 증거하는 동안에 불신앙으로 돌아섰으며,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은 오늘날 불신앙 가운데 정착하게 되었다. 바울은 18절에서 시편 19편 4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자연을 통한 말씀조차) 온 세계에 미쳤으며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핑계할 수 없음을 밝힌다."
롬 10:18-21
3. 거절의 결과(10:18-21)
이스라엘이 거절한 결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향하셨으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한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불러내시게 되었다(행 15장 참조). 그러나, 이 일은 유대인들에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명기 42장 21절에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며, 시기가 나게 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을 사용하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 65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것이며, 이방인들은 그를 발견하고 그의 구원을 찾게 될 것임을 알리셨다.
구약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약속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그러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같은 수준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한 구절은 아무 곳에도 없다. 그리고, 두 부류 출신의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한 곳도 없다. 구약에서의 계획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흥왕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에 왕국을 건설함으로써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계획에 실패하였다.
그러면 다음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하여 자비가 이방인들에게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11:11). 하나님은 모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다고 판단하시며, 은혜로써 모든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려는 방법이 갈보리의 일로 가능하게 되었다(11:32).
로마서 10장 21절은 오늘날도 해당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언급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민족이 맹목과 불신앙 가운데 버림받았으나(고후 3:15-4:6/롬 11:25), 잃어버린 이방인들에게 그러하듯이 구원받지 못한 유대인들을 찾으신다.
오늘날 말씀을 듣고 있는 많은 유대인들이, 교회가 올리워 간 후 환란 기간이 시작되면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자기 의“를 추구하는 교만과, 영적으로 눈멀었음을 비판하는 대신, 그들이 우리에게 성경과 구세주를 주었음에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실패를 통해서도 우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 실천적인 교훈
구원은 차별이 없다. “누구든지...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잃어버린 죄인들에게 제시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며, 믿음을 주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말씀이다. 영화, 전도지, 노래 등 이들 모두는 각자의 위치(역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전파된 말씀이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종교“가 있다. 행위의 의와 믿음의 의의 종교이다."
롬 11:1
▣ 이스라엘의 영접-로마서 11장-
본 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논하고 있는데, 바울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영속적으로 버려 두실 것인가, 또는 이 민족을 위한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스라엘에게는 장래가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바울은 몇 가지 증거를 제시한다.
1. 개인적인 증거(11:1)
“이스라엘 사람인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증거이다“라고 바울은 진술한다. 바울의 회심(사도행전에 세 번나옴)은 디모데전서 1장 16절 말씀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오늘날 이방인이 개심하는 형식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죄인들이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를 보았거나, 그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거나 3일간 눈이 멀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의 경험은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오실 때, 이스라엘이 회심하게되는 방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울처럼 그들은 믿지 않으며 반역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박해했던 분을 보게 될 것이며(슥 12:10/계 1:7),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같다고 말하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보기 수천 년 전에 그가 유대인으로서, 주님을 보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롬 11:2-10
2. 역사적인 증거(11:2-10)
바울은 열왕기상 19장 10-28절로 돌아가, 하나님은 불신앙이 극도에 달한 시대에도 충성된 남은 자들을 반드시 남겨 두셨음을 보여 준다. 사실상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축복하신 사람들은 남겨진 자들이라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사 1:9 참조).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대다수가 언제나 믿음에 실패하고 개혁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이 남은 자들을 취하여 다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5절은 하나님께는 은혜로 말미암아 남은 자들이 있는데, 이는 “몸된“ 교회라고 진술한다. 비록 많지는 않아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몸 가운데 있으며,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적인 특징들이 제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일 이스라엘이 눈멀어 있을 교회 시대에 유대인들을 구원하고 계신다면 이스라엘이 다시금 무대에 등장할 때는 얼마나 더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결코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증언이다.
우리는 이 교회 시대 동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처럼 민족적으로 다루지는 않으셨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히브리인으로 구성된 교회“는 에베소서 2장 14-17절에 의하면 성경적인 것이 못된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한 그룹을 하나님이 선택한 남은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8-10절에서 바울은 이처럼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눈먼 것은 이사야 29장 10절과 신명기 29장 4절에 예언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마 13:14-15/사 6:9-10 비교). 9-10절에서 그는 시편 69편 22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그의 말씀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축복들을 저주로 바꾸실 것을 약속하셨다."
롬 11:11-24
3. 경륜적인 증거(11:11-24)
바울은 지금 유대인과 이방인을 논하고 있으며, 죄인 개개인들이나 성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이 부분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멸망뒤에 경륜적인 뜻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증거한다. 그 뜻이란 이른바 이방인의 구원이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죄 아래 정죄하실 수가 있으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도 있으시다 ! 이방인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 전에 유대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만일 유대인의 타락이 세상에 이처럼 축복을 가져왔다면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에는 그 축복이 어떠할 것인가를 논한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어떻게 세상에 부활을 가져올 것인가(15절) ! 다른 말로 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서 빛을 보게 될 미래가 있음을 확신한다.
오늘날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구약의 왕국 약속들은 교회를 통해서 “영적인 방법“으로 성취되었다고 가르치는 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바울은 미래에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영접을 받아 축복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내다본 것이다.
감람나무의 비유는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민족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한 감람나무이다. 하나님은 가지들 중의 더러를 쳐서 이방인, 곧 “돌감람나무“를 접붙히셨다. 이것은 “자연과는 반대로“ 된 것이다(24절). 왜냐하면 좋은 가지를 보다 못한 줄기에 접붙히는 것이 실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연약한 이방인들을 종교적인 특권을 가진 이스라엘이라는 줄기에 접붙히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역하는 이스라엘을 잘라 내시는 엄격하심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방인은 이제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감히 자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도 역시 잘라버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방 민족들이 “세계 교회“에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할 이 시대의 종말에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참된 교회를 부르시며 이방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하신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주제는 민족적이지 개인적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참된 그리스도인을 구원에서 “잘라 버리시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에는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롬 8:35-39).
오늘날 교회는 주로 이방인이며, 우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유산으로부터 유익을 받고 있다(감람나무의 풍성한 수액).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민족적인 면으로 볼 때 우리는 이방인들이며, 함께 나눌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롬 11:25-36
4. 구약의 증거(11:25-36)
물론 바울은 이 세 장에서 구약 성경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는 이사야 59장 20-21절, 27장 9절과 시편 14편 7절을 펴고,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고 회복하실 구원자가 오실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이 눈멀었던 “비밀“에 대해 언급한다. 이것은 구약에서는 감추어진 진리였으나 신약에서는 온전히 계시된 비밀이다. “이방인의 충만함“이란 이 교회 시대에 구원을 받게 될 이방인의 수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몸이 완성될 때 주님은 교회를 공중으로 들어올리실 것이며, 그 후에 지상에는 7년 대환란 곧 “야곱의 역경의 시대“가 올 것이다. 그 시대의 종말에 구원자가 올 것이며, 남은 자는 자신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란 말은 마지막까지 남은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날에 모두 구원을 받게 되어 구속받고 중생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뜻이다.
27절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이 인용되어 있다(렘 31:31-34). 이 “새로운 언약“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믿고 그들이 죄에서 돌이킬 때 이스라엘에게 적용될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여전히 사랑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들 때문이다. 인간들은 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으며, 자신의 약속을 변경시키거나 취소하실 수 없다(29절).
마지막 단락에서(30-32절) 바울은 이방인들이 한 때는 하나님을 거절하였으나(롬 1:18-)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있듯이 오늘날 유대인들이 불신앙 가운데 있지만 어느 날 자비를 받을 것임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시에 불신앙과 죄 가운데 있다고 결론을 내리셨는데, 이것은 둘 다 은혜를 통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재고찰한 후에 이러한 놀라운 찬양의 노래를 하게 되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33-36절)"
롬 12:1-2
▣ 그리스도인의 행실-로마서 12장-
본 장은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섬김 / 12-16장)을 시작한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배운 것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말한다. 본 장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네 가지 상징을 말한다.
1. 제단의 희생제물(12:1-2)
참된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생활은 주님께 대한 개인적인 헌신으로 시작된다. 실패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기를 거절하여 제단에서 먼저 실패한 사람이다. 사울왕은 제단에서 실패하였으며(삼상 13:8/삼상 15:10-) 이 일은 자기의 왕국을 내놓게 했다.
헌신의 동기-헌신의 동기는 사랑이다. 바울은 “내가 명하노니“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이미 행하신 일로 인하여 권하노니“라고 했다. 우리는 자비를 얻으려고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자비를 얻었으며(3:21-8:39),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헌신의 요건-참된 헌신은 날마다 하나님께 몸과 마음과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 헌신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나, 또는 캠프 파이어에 장작을 넣는 것 정도가 아니다. 헌신이란 말씀으로 새로워진 마음을 가지고, 기도와 순종을 통하여 의지를 굴복시키며 그분께 매일 몸을 드리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살며 세상을 닮아 순응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매일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변화되는 사람, 둘 중의 하나이다(“변화되다“는 마 17:2 의 “변형되다“는 말과 같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성령을 받아들일 때에 변화된다(변형된다)고 말한다.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할 때에만 그는 그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세 가지 뜻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감사하는 가운데 성장해 가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들에게 선하다(good)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종한다. 그리고 그들은 징계를 두려워한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기뻐하실 만하기(acceptable) 때문에 순종한다. 그러나, 가장 깊은 헌신은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며 그 뜻이 온전하다(perfect)는 것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적인 제사“를 드려야 한다(벧전 2:5). 하나님께서 원하는 첫번째 희생은 우리의 몸과 마음과 의지, 곧 하나님께 대한전적인 순종이다."
롬 12:3-8
2. 몸의 지체(12:3-8)
고린도전서 12장은 이러한 구절들과 똑같은 진리를 제시한다. 신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는 세례(침례)를 받고 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할 은사를 받게 된다. 오순절로부터 휴거될 때까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Body)가 있다. 또한 “지교회“(local body)가 있으며, 이를 통하여 신자는 주님께 봉사를 하게 된다. 교회에 대한 112회의 신약 구절들 가운데 대부분은 세례(침례)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지교회를 지칭한다.
지교회에서의 봉사는 개인적인 헌신으로 시작하여(1-2절) 다음으로는 그 신자가 소유한 영적인 은사들에 대해 정직하게 평가한다(3절). 바울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우리가 가진 영적인 은사가 보장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높이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목회자가 되도록 소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은사를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으로써 그가 소명을 받았음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의 은사들은 다르지만 모두 성령으로부터 오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 한다.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말미암아“(엡 2:8-9)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믿음의 분량“과 “받은 은혜에 따라서“(6절) 성령의 은사를 행사하여야 할 것이다. 그는 일곱 가지 봉사 사역을 열거한다.
-예언-고린도전서 14장 3절에 정의되어 있다.
-섬기는 일-“집사의 일을 하는 것“ 또는 집사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가르침-디모데후서 2장 1-2절에 따르는 중요한 책임이다.
-권위(권고)-사람들에게 주님을 섬기고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권하는 일이다.
-구제-순수한 동기로 마음으로부터의 순전함 가운데 행해져야 한다(행 5장 참조).
-다스림-지교회를 치리하는 데 관계된 일이다(딤전 3:4/딤전 3:12).
-긍휼(자비)을 베풂-필요한(가난한) 사람들에게 행하는 개인적인 사역이다.에베소서 4장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받은 사람들을 제시하며,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은 지교회에 있는 신자들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은사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또한 자신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기를 거절하는 것도 역시 비극이다(딤후 1:6).
사도행전 19장 1-7절에 나오는 열 두 사람들은 성령과 그의 은사에 대하여 무지하였으며, 사도행전 19장 13-16절에 나오는 일곱 사람들은 그들이 받지않은 은사를 가짜로 흉내내려고 하였다. 그 두 가지 모두 실패로 끝났다."
롬 12:9-13
3. 가족 안에서 한 형제됨(12:9-13)
신자마다 이룩해야 할 영적인 봉사 사역이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해 준다. 사랑은 정직해야 하고 위선이 없어야 한다(요일 3:18). 우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고수해야 한다(시 97:10).
사랑은 친절과 겸손, 일에 있어서의 충성스러움, 영적인 일들에 대한 열정으로 인도해 간다(여기서 “열심“이란 “끓는, 능력으로 불타다“의 뜻). 이 부분에서 언급된 특성이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주어진 성령의 열매와 비슷하다는 점에 유의하자.
지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돌보며 서로 나누어야 한다. 12절에서의 기도가 어떻게 13절의 돌보는 태도로 이끌어 가는지를 주목해 보라. “대접하다“는 것은 직역하면 “사람들을 찾아 대접하기를 힘쓴다“는 뜻이다. 베드로전서 4장 9절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집을 개방할 때 불평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신령하지 못한 접대의 경우가 잠언 23장 6-8절에 나와 있다(눅 14:12-14/딤전 3:2/딤전 5:10/히 13:2)"
롬 12:14-21
4. 전투 중에 있는 병사(12:14-21)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축복을 누리고 있는 만큼 전투상황도 겪고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그들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야 한다(마 5:10-12). 물론, 그릇된 생활(벧전 2:11-25) 때문에 문제에 봉착하는 신자들이 있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동정심(12:15)과 겸손함(12:16)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기심과 교만은 나쁜 의지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를 반대하는 사람에게 “보복하여서는“ 안되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나 장래의 심판에서 “갚으시기를“ 기다려야 한다(19절).“모든 사람의 면전에서 열심으로 쓸 것들을 공급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만인 앞에 드러난 “유리집“에 살고 있으므로, 다른 이들이 자세히 보고 있음에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는 내 삶을 살겠다“는 태도는 로마서 14장 7-8절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악된 태도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므로,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죄와 타협해서는 안되며, 또는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평화를 누리자“는 태도를 가져서도 안된다. 마태복음 5장 38-48절의 태도와 정신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가 되는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마 5:9).
12장 19-21절에서 바울은 잠언 25장 21-22절과 신명기 32장 35절을 언급하고 있다(히 10:30 참조). 여기 나오는 원리는 신자가 자신을 주님께 드림으로(12:1-2) 주님께서 자신을 돌보시게 하며, 자기를 대신하여 싸우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하다(약 1:5). 그렇지 않으면, 나쁜 간증을 남기는 한편,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리게 된다.
바울은 자신과 복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번 로마의 법을 사용하였으며(행 16:35-40 참조), 더구나 몇몇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대해 그들과 같이 되는 것을 즐겨 하였다. 우리가 매일 로마서 12장 1-2절을 실행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시하셔서 본 장의 남은 부분에 순종하게 하실 것임은 분명하다."
롬 13:1-4
▣ 권세자에 대한 의무-로마서 13장-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지만(요 15:18/요 17:14), 그는 여전히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최선의 시민은 그리스도인 시민이다. 비록 교회가 정치에 개입되어서는 안되지만 개개의 신자들은 시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들을 당연히 사용해야 한다. 이방의 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사역을 행사할 수 있었던 요셉과 다니엘 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헌신한 신자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볼수 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인간의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 네 가지 동기를 말해 준다.
1. 진노하심을 위하여(13:1-4)
“높은 권력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해도 정부의 치리자들이다. 우리는 복음이 도시의 재무관리였던 에라스도와(롬 16:23) 네로의 몇몇 관리들과 같은 이들에게도 미칠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빌 4:22).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정부의 관리들조차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점이다. 비록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은 존중해야 한다.
치리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께 반대하는 곳에서는 사도행전 5장 29절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후에(창 8:20-9:7) 중요 형벌을 포함하여 인간의 정부를 제정하셨음을 명심하자. 검을 지니는 편은 교회가 아니라 정부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세 가지 기관만을 세우셨다. 곧, 가정(창 2장)과 교회(행 2장)와 인간의 정부(창 9장)이다. 이들의 기능은 중복되어져서는 안되며, 그렇게 되면 반드시 혼란과 문제가 생긴다."
롬 13:5-7
2. 양심을 위하여(13:5-7)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는 동기가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저급한 동기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양심은 우리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의 양심에 증거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다(롬 9:1). 만일 그가 주님께순종하지 않는다면 양심을 감화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알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양심이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갖는다(딤전 1:5). 양심에 말씀하시는 성령의 증거에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더럽혀진 양심, 화인맞은 또는 굳어진 양심(딤전 4:2)이 되게 하고, 마침내는 거부당한 양심(딤전 1:19)이 되게 한다.
바울은 세금(또는 조공)을 바치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세를 지불하며 모든 관리들에게 존경을 표할 것을 권고한다(벧전 2:17 참조).
롬 13:8-10
3. 사랑을 위하여(13:8-10)
이제 바울은 정부 관리들뿐 아니라 우리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도록 범위를 넓힌다. 이웃에 대한 신약의 정의는 거리의 주소나 지리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명심하자.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관원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6)에서, 예수께서는 “이 셋 중에서 누가 그의 이웃이냐?“고 질문하신다.
문제점은 “누가 내 이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며, 바울이 여기서 다루는 것도 사랑에 대한 것이다.
신자는 그 나라의 법 아래 살고 있으며, 또한 천국의 시민으로서 훨씬 높은 법, 곧 사랑의 법 아래에 살고 있다. 사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순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하루 종일 수고를 하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라고 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살인과 탐욕과 부정직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안식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자. 안식일은 사실상 유대인의 의식법의 일부이며, 이방인이나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계명 중에서 아홉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것으로 신약에 반복되고 있으나,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반복되고 있지 않다.
물론, 복음을 거절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종종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그들에게 이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논쟁을 통해서보다는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받는다. 사랑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최선의 시민이다."
롬 13:11-14
4. 구세주를 위하여(13:11-14)
우리는 이제 동기들 중의 정상에 이르렀다. 양심의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를 갈구하는 양심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더 가깝다는 의미에서 볼 때, 매우 가깝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새로운 몸, 새로운 가정 등 우리가 소유할 총괄적인 축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빛에 속하였으며 낮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복음의 빛을 본 사람들로서, 깨어 있어 경계해야만 한다(고후 4장).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죄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낮이 가까워왔다“(히 10:25- 참조)
바울은 여기서 많은 지독한 죄들을 열거한다. 성도들 가운데서는 이름도 꺼낼 수 없는 죄들이다. 술취함과 부도덕은 늘 수반되며, 싸움과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술취함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는가 !
14절은 신자들의 이중적인 책임을 말해 준다. 즉,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옷입어“ 그리스도를 자기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소극적으로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반스 하브너(Vance Havner)가 말하듯 “죄를 계획한다.“ 다윗이 그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리스도가 곧 오실 빛 가운데서, 영적으로 깨끗한 근신하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마지막 때는 무법한 시대일 것이므로(딤후 3:1-/요일 3:4 참조),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간증을 유지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렵게 될 것이다. 정부들은 점점 더 성경과 그리스도를 적대할 것이며, 결국은 죄의 사람(The Man of-Sin)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사단의 제도로 연합시켜 진리를 반대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4장 5절을 읽고,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님께 충성하기를 기원한다 !"
롬 14:1-5
▣ 형제들과의 관계-로마서 14장-
로마서 14장 1절-15장 7절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의문스러운 일들“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바울은 각 지교회에 성숙한 신자들(“우리 강한 자“- 15:1)과 성숙하지 못한 자(“믿음이 연약한 자“- 14:1)가 있음을 인정하며, 이 두 그룹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실제에 있어서 자연적으로 부조화가 생기는 것을 인정하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성일들과 율법에 제시된 먹는 규례를 고수하려 한 반면에, 이방인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방종으로 바꾸었으며 유대인 형제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일을 지키며 먹는 규례를 따르는 등의 극단적인 율법주의가 강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반대가 진리라고 서술한다 ! 골로새서 2장 18-23절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믿음 안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세상적인 오락과 같이 의문스러운 행동 강령에 대하여 생각들이 다르다. 바울은 이러한 차이들을 어떻게 대처하여 해결할 것인가하는 방법을 말해 준다. 그는 규칙들을 열거하는 것보다는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수 있는 여섯 가지 기본적인 원리들을 기록한다. 이 원리들을 질문의 형식으로 서술하고 우리 자신의 생활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나는 온전히 확신하는가 ?(14:1-5)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감정에 따라서 행동해서는 안되며 기도와 말씀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내적인 확신에서 행동하여야 한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확신 가운데서 행한다면 아무런 논쟁이 없을 것이다. “견해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며, 확신이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강한 그리스도인은 연약한 자를 성숙하지 못했다고 업신여겨서는 안 되며 연약한 믿음의 사람이 보다 성숙한 형제를 심판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둘 다 용납하셨으므로 이처럼 우리도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우리의 삶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도를 받아야 하며, 인간들의 생각이나 판단에 이끌려서는 안된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는 일을 왜 하는지, 또는 어떤 일들을 삼가해야 하는지를 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이 그의 생활을 조절한다."
롬 14:6-9
2.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을 향한 것인가?(14:6-9)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산다“는 식의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죽거나 살거나 우리는 여호와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만 한다.
자기의 생활에서 의문스러운 실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향하여“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고 정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그러한 실천 생활을 하는 것이며, 주님은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만일 주님께로 향하여 특별한 날들을 지킨다면 주님께 영접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그를 판단해서는 안된다."
롬 14:10-12
3. 이 일은 심판대의 시험을 견딜 것인가?(14:10-12)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판단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과 생활이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시험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흰 보좌의 심판은 아니지만, 교회가 본향으로 소집된 후에 있을 그리스도인의 행위에 대한 시험이다(고후 5:10/고전 3:1-).
나는 내 형제의 생활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므로 오늘날 그를 정죄할 권리가 없다. 확실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앞에서 불시험을 견디는 생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상을 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롬 14:13-21
4. 나는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고 있는가?(14:13-21)
우리가 판단해야 할 한 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판단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남용함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분명히 그 일 자체는 부정한 일이 아닌데 어떤 실천상황과 습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하게 생각된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의도적으로 나의 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을 한다면 나는 사랑의 규율에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여 죄에 빠뜨리는 일은 심각한 일이다. 마가복음 9장 33-50절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유의하자. 여기서 “범죄케 한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원인이 되다“는 뜻이다. 의문스러운 행동 강령에 붙들려 있어 다른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행실에서 떨어지게 하는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하신 무서운 댓가를 보지 못할 정도로 눈멀어 있다고 하겠다. 우리의 선함이 오히려 나쁜 말을 듣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먹고 마심과, 또한 그 밖의 어떠한 것들이 아니고 의와 평강과 기쁨이며, 이 모든 것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자신을 즐기기 위한 이기적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사랑 안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세워 주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율법 아래 사는 것이 아니므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우리를 세우거나 다른 이들을 세워 주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진술한다(고전 8장 참조).
로마서 14장 15, 20절에 나오는 “망하게 하다“는 말은 “헐다, 잡아떼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이기적인 삶 때문에 다른 신자의 영적인 생활을 헐어 버린다면 얼마나 이기적인 일인가. 그의 실재 생활이 합법적일 수는 있으나, 이것은 사랑의 법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롬 14:22-23
5. 나는 믿음으로 이 일을 하는가?(14:22-23)
여기서 “믿음“이란 말은 우리의 신념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서 생겨난 확신에서의 “확신하다“는 뜻과 거의 같다.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신자와 주님 사이에서 전개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그가 주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가를 언제나 확인해야만 한다는 원리를 세워 준다. 자기의 실제 생활에 대해 의문이 있으면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가 없다.
23절의 “정죄되었나니“라는 말은 영원한 형벌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유죄 판결을 받다“는 말로 읽어야 할 것이다. 즉,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태도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기가 행하고 있는 그 일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다“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뒷받침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이나 죄이다. 그 일을 믿음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스러운 것은 부정한 것이다 !“는 말은 따르기에 알맞은 방책이다.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우유나 물을 마시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독이 들었을 음식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이 의문을 제기하는 관습까지도 부주의하게 행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의심스러운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 죄라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롬 15:1-7
6. 나는 자신과 다른 사람 중,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15:1-7)
강한 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도 이들을 세워 주도록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근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해야 한다.
바울은 시편 69편 9절을 인용하였는데, 이 구약의 구절이 신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이 되는가? 물론 적용된다. 왜냐하면 구약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가 인내와 위로와,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오는 소망을 얻고자 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일한 마음(“한 마음“-likemined)을 가져야 하며, 만일 모든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을 주님 안에서 성장하도록 도우려고 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7절에는 “서로 용납하라“는 바울의 마지막 결론이 나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셨기 때문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기본 원리들을 고찰하면서 이 원리들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실천적인 것인지를 보게 된다. 지교회는 사역에 힘을 얻는 데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기준들을 설정할 권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의문스러운 관습의 문제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활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이 이웃을 세우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숙한 교회가 될 것이다."
롬 15:8-13
▣ 그리스도인의 수고-로마서 15장-
본 장은 교회 안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관계되며, 우리가 깨닫고 이해해야 할 세 가지 다른 사역을 보여 준다.
1.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도지 사역(15:8-13)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다음은 이방인에게“라는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사역을 깨닫지 못하는 성경 연구자는 진리의 말씀을 결코 옳게 분변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 그의 오심이 유대 민족에게 전해 졌으며, 왕국에 대한 구약의 약속들과 연관되었다. 8절은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언약들과 약속들을 성취하기 위하여 유대인에게 우선적으로 사역하셨다고 말한다.
바울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누가복음 1장 30-33, 46-55, 67-80절을 주의깊게 읽어 보라. 이 성령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이방인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여 약속된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셨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스라엘은 자기의 왕을 세 번에 걸쳐 거절하였다. 이들은 헤롯이 왕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을 죽이도록 버려 두었으며,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스데반을 죽였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형식이 반복된다.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왕국이 건설되고 회심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축복이 흘러갔을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이제 이방으로 가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흥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인함이라고 밝혔다. 9-11절에 그 진행의 방식이 나온다. 이방인들이 말씀을 들으며(시 18:49) 유대인들과 함께 기뻐한다(신 32:43). 그리고, 모든 이방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며(시 117:1),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통치를 즐거워한다(사 11:10).
이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역사를 거의 요약하고 있다.
-유대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함(9절/ 행 10-14장)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교회에 참여함(10절/ 행 15-28장)
-이스라엘이 최종적으로 바울에 의해 제쳐지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탁월한 위치에 오름(11절/ 행 28장 이후 계속)
-이방인들이 참여할 미래의 왕국(12절)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주제로 찬양한다. 12절은 왕국이 통치할 미래의 그날을 말하며 “열방이 그를 믿을 것이다“(또는 소망을 둘 것이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13절의 기도를 통하여 “소망“의 주제를 끌어 낸다. 기쁨과 평화와 소망을 가지기 위하여 왕국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그러한 축복들을 지금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
롬 15:14-22
2.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바울의 사역(15:14-22)
바울은 그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임을 강조하는 데 매우 열심이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에서 바울의 사역이라는 특별한 입장을 보지 못하는 것은 오늘날 “개신교“를 이처럼 혼란과 무력함에 처하게 한 장본인이다. 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의 찬양의 제물로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신약의 제사장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에 또다른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바울의 특별한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는 특별한 멧세지를 담고 있으며(16절), 특별한 기적들(18-19절)과 특별한 방법(20절, 그리스도가 전파되지 앉은 곳으로 감)을 갖고 있다. 바울은 개척자였으며, 그는 율법과 은혜, 믿음과 행위, 이스라엘과 교회를 혼합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이를 뒤섞는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요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고전 1:22), 하나님은 또한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다(행 19:11-12 절의 에베소에서). 사도행전 7장(이스라엘의 마지막 거절) 이후에도 기적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 민족을 다루고 계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바울이 로마에 오는 것은 방해되고 있었는데, 이는 사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전파된 많은 곳에서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는 가능한 모든 지역을 거친 후에 이제 로마를 향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바울이 기꺼이 로마에서 전파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그 곳에 다른 사도들, 예를 들면 베드로 등이 가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그의 방침은 개척 지역으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롬 15:23-33
3. 유대인에 대한 이방 교회들의 사역(15:23-33)
바울은 서바나(스페인)로 가기를 소원하였다. 그가 그 곳에 도착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설에 의하면 갔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당시에 그는 자신이 세운 이방 교회들이 기부한 구제 헌금을 가난으로 찌든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 가져가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상세한 것은 고린도전서 16장과 고린도후서 8-9장을 참조하라.
바울은 이 구제 헌금에 대한 몇 가지 이유를 말한다.
영적인 빚(27절)-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받았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어느 정도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정말로 빚이 있는 이방인이라는 부담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인적인 사랑-바울은 유대인들을 위하여 큰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헌금으로 그들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연합(31절)-유대인 신자들 중에 더러는(행 15장 참조) 그 무리 중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다. 이 헌금은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반목하고 있다는 말에 의해 생긴 불화를 치료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 일은 오늘날 모든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대한 책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프로그램은(1:16) 더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첫째는 유대인에게“라는 원리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1-7장에서 적용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책무는 지상명령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직무이며, 우리를 택하시고 참 감람나무에 우리를 접붙이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고(롬 11:20-), 로마서 10장 11-17절의 명백한 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죄에 관한 한 아무 차별이 없듯이, 구원에 관해서도 아무 차별이 없다.
이스라엘은 비록 무대에서 임시적으로 퇴장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며, 이스라엘은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받고 있다(롬 11:28). 그리스도인은 반 유대적인 감정이나 관습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그리스도께로 그들을 인도해야만 한다.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앞을 보지 못하였으나, 유대인 개개인들은 성령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심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1절에서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예상하였음에 유의하자. 그런데, 그러한 마찰이 일어났다 ! 사도행전 21장 15절 이하를 재고하고, 구원받지 않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어떻게 취급하였는지에 유의하자.
본 장은 유대인과 이방 교회 사이의 중요한 특수성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장이다(고전 10:32). 사실 로마인들에게 말한 바울의 마지막 발언은16:25-27)교회에 대한 위대한 비밀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복음을 통하여 이러한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로서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
롬 16:1-16
▣ 형제들에게 보내는 인사-로마서 16장-
본 장은 깜짝놀랄 일들로 가득 찬 독특한 장이다! 여기 열거된 사항들을 읽어 가노라면, 바울은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로마로 갈 것을 알고 있는 바울로 말미암아 회심한 사람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를 방문한 일이 없고 이들을 다른 도시들에서 만났을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주인이 그러하듯 양들을 그 이름으로 알고 있었으며, 각각을 향하여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 바울이 문안하는 성도들(16:1-16)
로마에 사는 신자들은 한 전체적인 교회에서 모인 것이 아니고 여러 집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5, 10, 11, 15절). 조직적인 의미의(빌 1:1) 로마 교회가 없었다는 것은 베드로가 거기서 교회를 조직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이다.
뵈뵈는 로마로 가고 있는 집사 부인 또는 여집사인 것이 분명하며, 이 편지를 전달한 사람이다. “그녀를 영접하고... 도우라“는 구절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좋은 권고이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법적인 문제가 있어 로마에 갔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바울은 성도들에게 특별한 문제에 봉착해 있는 그녀에게 도움을 베풀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다시 만난다 ! 바울에게 이들은 얼마나 소중한 친구들이었는가!(행 18:2-28/고전 16:19/딤후 4:19) 이 두 성도들이 언제 바울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무릅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을 구원한 일로 말미암아 교회는 그들에게 참으로 큰 빚을 진 것이다 !
그들은 박해로 인하여 로마를 떠났다가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났고, 이제는 로마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얼마나 놀라우며, 주님의 섭리의 역사하심은 얼마나 기이한가 !
본 장에는 아홉 여인의 이름이 나온다. 뵈뵈(16:1), 브리스길라(16:3), 마리아(16:6), 드루배나(16:12), 버시(16:12), 드루보사(16:12), 루포의 어머니(16:13), 율리아와, 네레오의 자매(16:15)들이다. 어떤 이들은바울이 여인들을 불리하게 대한다고 비평하지만 그보다 더 이교의 속박에서 여성을 해방하고,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의도하신 방법으로 여성의 권위를 존중한 사람도 없다.
바울이 지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여성이 어떤 특정한 지위가 있다고 가르치기는 했으나, 여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성들을 설교하도록 부르시지는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여성도들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고 축복을 받고 있는가 !
몇몇 구절들에서 사도 바울의 “친척“을 언급한다(7, 11, 21절). 이것은 혈연의 친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 유대인, 아마도 베냐민 지파를 말하는 것같다.
7절은 바울보다 먼저 구원받은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루포가 흥미있는 인물이다(13절).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십자가를 진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마가복음이 기록될 당시에는 교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성도들이었다.
로마서 16장 13절에 나오는 루포의 아버지가 사실상 시몬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기의 어머니를 주님께 인도하였다. 만일 그와 그의 가족이 예루살렘에 머물렀다면 바울을 자기의 집에 머물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바울이 그녀를 자기의 수양 어머니로 모셨을 수도 있다."
롬 16:17-20
2. 피해야 할 몇몇 죄인들(16:17-20)
이러한 경고는 인사들로 가득 찬 본 장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처한 위험을 알았으며 성도들을 경고하고 싶었다. 물론 우리는 각각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를 용서하여야 한다. 그러나 교회 기관에 대항하는 죄들은 성경적인 징계에 따라 처리가 되어야 한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데, 대개 자기들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일들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교만을 범한다. 이들을 지교회에서의 친교에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들에게 표를 해두고 그들을 피하라!“ “표한다“는 말은 “주시하고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달리며 문제와 분열을 일으키는 “교회 방랑자“들에게서 교회가 눈을 떼지 않는 일은 바른 일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유연하게 말하며“ 단순한 사람들을 우롱하는 법을 안다. 그러나 분별력 있는 성도는 그들의 속임수를 꿰뚫어 볼 것이다. 사단을 정복하라. 그가 당신을 정복하게 하지 말라."
롬 16:21-24
3. 영광을 받을 몇몇 종들(16:21-24)
베테랑들이 많이 기록된 놀라운 명단이다.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요 주님의 종인 디모데가 나온다(빌 2:19-22). 안디옥에서 초창기에 그를 조력하였던 루시오(행 13:1)도 있다(이 사람이 누가인 것 같지는 않다). 야손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과 함께 여행하였으며(행 17:5-9), 소시바더는 베뢰아 사람이었다(행 20:4).
바울은 이 동료들을 사랑하였으며, 이들이 없었다면 사역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두가 바울같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이 더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더디오는 성령께서 바울에게 지시하실 때 이를 편지로 받아 쓴 서기(비서)였다. 이 사람은 로마인으로서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람인 것 같다.
가이오는 사도행전 19장 29절에 언급된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것 같다. 또는 더베의 가이오일 수도 있다(행 20:4). 이 사람이 고린도전서 1장 14절에 나오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며, 바울이 고린도 사역 기간 동안에 세례(침례)를 베푼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는 고린도에 있었는데, 이 말이 그가 가이오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데에 영감받은 사도와 충성된 서기(또는 비서), 친절한 그리스도인 주인, 희생적인 여인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에라스도는 그 도시의 재무관이었으며, 복음이 그 시의 관원 가족에게도 전해졌음을 보여 준다(빌 4:22). 그는 디모데후서 4장 20절에 언급된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형제 구아도 !“ 바울에게 있어서 언급하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성도란 없었다 !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을 읽고 여기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자.
바울은 언제나 그의 편지들을 그의 “은혜의 표적“으로 개인적인 서명을 하였는데(살후 3:17-18) 여기 24절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나쁜 시력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비밀을 강조하는 이 위대한 송영을 첨부한 것인 듯하다. 27절에 언급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은혜의 복음에 관한 진리들을 계시하는 데 사용하신 신약 선지자들이다(행 13:1/행 15:32/행 21:10/고전 12:28-29/고전 14:29-32/엡 2:20/엡 3:5/엡 4:11 참조).이렇게 하여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완성된다.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고 적용한다면 27절은 현실이 될 것이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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