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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신교의 공예배시 성만찬과 예전복

하나님아들 2013. 6. 9. 18:12

개신교의 공예배시 성만찬과 예전복

 


목 차
Ⅰ. 서 론 .................................................... 1
A. 연구동기와 목적 ............................................ 1
B.연구방법과 범위 ........................................... 3
Ⅱ.성만찬에 대한 성서와 신학적 고찰 .............................. 4
A. 성만찬의 성서적 근거 ....................................... 5
1. 성만찬의 성서적 중요성 ................................. 5
2. 성만찬의 역사적 기원 ................................... 8
3.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 ...................................3
B.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 ................................. 16
1. 가톨릭의 견해 ......................................... 16
2.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 21
Ⅲ. 성만찬 예전의 실천 ......................................... 30
A.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 31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 31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 33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 34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 36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 37
B. 한국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갱신 ............... 39
1. 개신교 공예배의 문제점 ................................ 39
2.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 회복 ............ 54
3.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 .............................. 59
Ⅳ. 공예배와 예전복 ............................................. 75
A.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 .................................... 75
B.예전복의 성서적 고찰 ..................................... 77
1. 구약시대의 예전복 ..................................... 78
2. 신약시대의 예전복 ..................................... 84
C. 현대사회에서의 예전복 .................................... 85
1. 성만찬과 예전복 ........................................ 85
2. 예전복의 필요성 ........................................ 88
D. 개신교회의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 모델의 제시 ............... 89
1. 가운 (Gown) ........................................... 90
2. 영대 (Stole) .......................................... 91
Ⅴ. 결 론 ................................................... 93
참 고 문 헌 ............................................... 96

Ⅰ. 서 론
A. 연구동기와 목적
세계교회의 예배갱신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보전해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따라서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지고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우주적 주권과 권위를 가진 이가 없으므로 피조물은 그에게만 최고의 가치를 인정하며 돌려야 한다. 그것이 곧 예배이다.
한편 공예배는 신자들의 개인적 삶의 집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받은 성도의 공동체 즉 교회적인 예배를 말한다. 따라서 공예배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성도들이 주의 날에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성경 말씀과 성만찬을 먹으며 기도하는 일과 찬미하는 일을 하며, 신앙고백을 통하여 구속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섬기기로 결단하는 교회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 예배는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한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의식(Liturgy) 없는 메마른 예배를 드림으로써 귀중한 기독교 유산인 성만찬 의식을 경시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신앙 공동체 의식도 고취되지 못한채 오직 설교 중심의 예배로만 치우쳐 온 까닭으로 예배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점에서 개신교의 예배현장이 설교자의 설교에 예배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사실과 말씀으로 성장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전의 의미와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는 데서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따른 예전복에 대한 관심은 더 더욱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주로 착용하는 검정색 가운(Black Gown)은 예배의식에서 으례히 착용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예복으로써 상징하는 의미가 전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의 임무와 기능을 상징하는 예전복은 성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예배의미 표현의 상징적 가치가 있으며 목회자 자신에게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개신교 예배의 성만찬 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살려서 오늘의 한국교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성만찬이 예배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예전복 역시 예전복의 원칙이 없는 개신교회에 성서적 모델인 예전복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의 성만찬의 위상 확립과 예전복의 필요성을 연구하고자 하는 동기를 얻었다. 또한 그러한 의미와 가치를 살펴 실제 예배에 적용하는 갱신 방안을 제시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B.연구방법과 범위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과 전문서적들을 참고하여 이론적인 기초를 서술하고자 한다.
제 Ⅰ 장에서는 연구동기와 목적, 그리고 방법과 범위를 서술하고, 제 Ⅱ 장에서는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가톨릭과 개혁자들의 신학적 견해를 고찰하며, 제 Ⅲ 장에서는 성만찬에 대한 현대교회의 견해를 살펴보고 성만찬 예전 갱신 모델을 제시하려고 한다. 제 Ⅳ 장에서는 예배갱신에 따른 예전복의 의미와 성서적 근거를 살펴보고 예전복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 제 Ⅴ 장에서는 결론을 맺고 본 논문의 연구에서 발견된 문제를 제언하고자 한다.

Ⅲ. 만찬 예전의 실천
금세기 중엽부터 태동한 세계교회 예배갱신 운동의 초점은 공예배의 성서적 원형을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공예배에서 본의 아니게 경시되어 온 성만찬의 바른 위치를 되찾아 온전한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노력이 교회사상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계교회의 운동으로 다른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성서와 예전분야의 학문적 연구로서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의 공예배가 성서적인 근거에서 멀어지고 있고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지에서도 빗나간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만찬이 1년에 두번 내지 네번 정도만 집행되고 있는 것이 잘못 된 예배의 관습임을 깨닫고 매주일 예배에서, 아니면 적어도 월 1회 정도는 성만찬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함을 예배갱신 운동에서 강조되고 있다. 성만찬이 경시되는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성만찬이 보다 중요시 되는 공예배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성만찬의 위치를 바로 이해하는 예배의 신학이 받아들여 지고 그 신학이 예배의 현장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 살아계신 주님을 경험하고, 상만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성만찬이 현대교회의 예배갱신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지 그 견해를 살펴보고, 한국교회가 공예배 갱신을 이루기 위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점을 찾아, 공예배의 갱신 모델을 제시하려고 한다.
A.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오늘날 세계교회의 예배갱신의 운동은 본래적인 전통교회의 예배를 새롭게 표현해 가려는 노력이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의 전통적 의미의 현대적 재구성이 중심적 과제가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성만찬에 대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어떤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왔던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물을 드리는 봉헌에서부터 이런 신앙적 행위가 시작되었으며,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물들었던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주신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이러한 사상은 칼빈에 와서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 라고 표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성만찬은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하여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며,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의 연합, 창조주에 대한 봉헌, 나아가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드리는 거대한 감사제인 것이다.
성서를 보면 시편은 찬양의 제사와 감사로 가득차 있다. 시편 99편은 찬양의 제사의 내용이다. 시편 115편은 유월절 식사 예식의 부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것을 노래했다. 사도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게 하신 왕같은 제사장"(벧전 2:9)이 되었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는 이 길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 16, 참고 시 50:14,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이며 같은 것으로서의 예식과 실제적 봉사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찬양의 제사이며 관용의 제사로서 여기에 묘사된다. 결국 예수가 유월절 식사의 과정으로 첫번째 성만찬을 거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를 위한 감사 기도요, 찬양의 제사인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방법 안에서 그것을 이해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예식문들이 성만찬 기도의 처음에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엄숙한 감사 기도나 축복으로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스트(Eucharist)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성만찬 기도를 감사 기도와 찬양의 제사 모형 안에서 시작한다.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세례를 포함한 성례전 전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이다. 이러한 신학은 칼빈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의 한 부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Seal)을 치고 계약을 확인해 가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로 이런 사상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5: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성만찬의 제정은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성찬의식에 있으나 그 실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속에 임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 혹은 동참의 뜻을 가진다 고 앞에서 말한바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라고 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선상에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며, 그 이름을 일컬으며, 그 능력으로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가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중요한 내용이라 하겠다.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주님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분부하셨다. 이것은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부활의 승리와 귀하신 교훈을 되새기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인 의미
는 성만찬이 떡과 잔을 나누는 의식으로써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는 기념적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떡과 잔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회상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지는 표적으로써 기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서 생명력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날마다 회상과 기념의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맥 튜리안(M.Thurian)에 의하면 이 회상은 "유대 민족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재경험하는 유월절 식탁과 같은 성격의 성만찬이 되어야 한다" 고 한다. 회상이란 원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단순한 기념적 의미만을 갖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만찬 거행에 진지하고 섬세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겠다.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memorial)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예배가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present efficacy)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속적 기념가운데 임재하셔서 친히 교제를 나누시고 구속의 일을 행하신다. 주님께서 성만찬 제정시에 하나의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눅 22:19)는 말씀과, 잔을 부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예전으로서 성례전을 가져 왔었다. 여기서 참여자는 더 이상의 죽음을 통한 희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 대신 자신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롬 12:1)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전 11:26). 이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을 직접 보고, 그 살을 받으며, 그 피를 마시는 엄숙한 예전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계속 유지되어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기념적인 의미만을 지닌 생명력이 없는 성만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성만찬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부활의 영광으로 기념하는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선포와 함께 성만찬이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말씀은 성찬과 함께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의 실제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실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예배에 말씀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제로 성만찬 가운데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스롤리(J.H.Srawley)같은 학자도 초대교회에서의 성만찬은 무엇보다도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재현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으심을 선포하는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오늘도 계속 되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희생에 대한 찬미의 제사의 의미 가 이 성만찬 예전에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본질 중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자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이 성만찬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확대는 바로 이런 운동성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며, 땅 끝을 향하여 확대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표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례전을 행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이 성만찬 안에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의 성례전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시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가 있는 것이며, 이를 경험하는 신앙이 있을 때 성만찬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일치된 온전한 형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만찬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체인 그리스도의 하나인 몸을 가능케하는 나눔의 제전임과 동시에 전체를 하나의 신령한 모체로 묶는 결합의 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 가운데 항상 구속적인 나눔의 모체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하셔서 첫 열매되신 새 형상의 결합의 모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성만찬이 오늘의 교회 안에 각각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나 그 중심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초대교회의 전통적핵심을 간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므로 성만찬의 예전적 공예배와 말씀의 비예전적 예배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신,구교 각 교회가 예배 갱신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공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의식이라는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이와같은 신학적 작업과 공동의 노력이 성만찬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함께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 것이다. 성만찬은 공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살아나고 표현되어진다. 그리고 성만찬의 의미는 거듭되는 의식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모체에 그 의미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B. 한국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갱신
1. 개신교 공예배의 문제점
선교 2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오래지 않은 선교의 역사를 거치면서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과 그들의 신학적인 배경 그리고 한국민족의 종교 심성등으로 기독교 공예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이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① 설교 중심적인 공예배
한국 개신교 공예배는 설교 중심적 예배로 정착하였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예배 형식과 복음이해, 그리고 신앙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으로 심어진 공예배 스타일인데 특별한 발전없이 그대로 정착된 것이다. 발전이 있었다면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 중심적으로 이끌어 가는 예배로 발전한 것이다. 설교 중심의 공예배라는 의미는 성만찬을 제외하고 모든 순서는 설교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정용섭교수는 한국 개신교 공예배를 논하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설교에서 감명을 주고 은혜를 받게 하려는 데서 무리가 많이 생긴다" 고 평한 바 있다. 그러기에 개신교의 성도들은 단지 '교회에 가는 존재'(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들어보는 존재'(Sermon-Hearer)로 머물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예배는 말씀 중심을 우선적으로 주장해 온 것은 사실이다. 특별히 모국어로 듣게 된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과 적용이라는 설교의 사역은 개신교 특유의 사건으로써 종교개혁의 으뜸가는 요소였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교의 사역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최고의 가치성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예배가 그 말씀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듣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도 타당성이 있는 말이 되지 못한다.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당연한 행위이다. 이 행위의 실천자들과 만남을 허락하시고 찾아 주시는 과정이 바로 성경과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예배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모순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설교만을 위한 모임으로 형태를 갖추어 왔고, 목사는 예배의 집례자의 위치를 망각하고 설교자로서만의 준비에 급급해 온 실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관심과 신학이 결여되어 성만찬은 예배의 부속물이나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오로지 설교에만 최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성례전 없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일년 내내 계속하면서 그것이 예배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성례전은 일년에 봄, 가을로 두번만 치르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양 착각을 하고 있다. 나아가 성례전 없는 예배가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와같이 한국교회의 예배가 예전을 소홀히 하고 설교에 지나치게 편중하게 된 원인중의 하나는 복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선교사들의 예배가 예전을 소홀히 하는 설교중심의 예배였었다고 하는 점이다. "탈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착" 되어 있었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여 준 예배 내용은 예전을 소홀히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 예배와 성례전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한국교회의 설교중심의 예배는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② 성만찬 격하의 공예배
한국 개신교의 공예배가 설교중심예배인 것은 성만찬 격하를 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가 루터나 칼빈도 매주 설교와 성만찬 예배를 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많은 개혁 신앙의 대부분의 신조에서는 말씀의 선포 다음에는 언제나 성례전의 올바른 집례가 행해지는 곳이 교회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가들의 절대수가 매주일의 성례전 거행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존엄을 높이 인정하면서 성례전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현장이라는 것에 가장 우선적인 해석을 주고 있었다. 또한 야웨의 공동체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에 이 예전을 통하여 공동체의 재확인을 거듭할 것을 촉구했었다. 그러기에 성례전은 매주 말씀의 예배와 병존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 공예배는 성만찬이 격하된대로 정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예배와 성만찬의 밀접한 관계 즉 일원적인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 관계는 초대 사도들의 교회의 전통에 속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서 회당의 예배, 곧 구약성서를 중심한 설교와 찬송이 주가 된 말씀의 예배(Synaxis)에 참예하였었다. 이 말씀의 예배는 성질상 오늘 우리들의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와 같은 것이었다. 회당의 말씀의 예배는 제사행위가 없는 것이었는데 제사는 예루살렘 중앙 성전에서만 있었다.
그런데 성만찬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의 명절을 지켰던 저녁 식탁에서 비롯되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떡과 포도주로써 상징적으로 예고하시고 새 언약 또는 계약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행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탁과 명령을 살려서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예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였다.
이제 그들은 예배드릴 때 구약을 읽고 설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며 이 모든 것에 붙어있는 의미의 종합적인 표현이 되는 성만찬 의식을 집회 때마다 집행하였었다. 즉 그때 성만찬 의식을 빼놓으면 기독교인의 예배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에 대한 새 언약이며 보증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의 대표적인 사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며, 그것의 상징적 의식인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되었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예배가 성만찬을 제외시킨다면 그것은 유대교 회당의 예배와 유사한 것이 된다. 즉 기독교 예배의 특이성이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만찬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 두번으로 끝나는 성만찬의 회수에서 그렇고, 그 내용에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성만찬의 성례전은 "나를 기념하라"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우기 그 현장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③ 이교문화적 요소를 벗어나지 못한 공예배
한국 민족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제 파동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휩쓸리게 되었고 이 땅위에서 잘 살아 보려는 생각보다 내세를 동경하며 그 심정을 종교적인데 두고 살았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심성은 그 바탕에 기본적으로 강한 종교성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 위에 세워진 한국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철저히 이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4300년의 샤머니즘, 2000년의 불교, 1500년의 유교라고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이교적 신앙 풍토속에서 살아 온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이교적 요소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이와같이 "한국은 마치 세계 종교의 실험실과도 같다" 고 할만큼 한국의 종교는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선사시대는 원시종교인 샤머니즘의 독무대였으며, 신라와 고구려 시대에는 불교가 주종을 이루었고, 이조시대에 오면서는 유교가 민족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조가 멸망하면서 오늘날 한국의 지배적 종교로는 기독교가 새로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한민족의 정신세계 속에 샤머니즘이나 불교, 유교들이 한차례 거쳐간 이후에 기독교가 전래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은 자연히 그들의 종교심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유동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민족의 사상에는 다양한 사회 문화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해 오고 있는 기초이념 즉 사상적 전통성이 흐르고 있는데, 이 기초사상이 한국에 들어온 각종종교 - 유교, 불교, 기독교 -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한민족의 기초사상을 유동식 교수는 '한·멋·삶'이라는 세 요소로 말하고 있다. 곧 '한 멋진 삶'은 옛부터 우리 한민족이 몸에 지니고 살았던 이념이요, 삶의 목표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한국사상이란 한국의 기초사상과 외래종교인 유교나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사상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상들이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면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탈피하지 못하므로 기독교 신앙생활에 커다란 이질적 요소로 나타나는 것이다.
a) 샤머니즘(Shamanism)의 영향
먼저 샤머니즘의 영향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샤머니즘이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여러면에서 살펴볼 수가 있으나 예배에 끼친 그 대표적인 것은 기복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교 풍토속에 들어온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을 현세적인 복, 동양적인 오복(五福)으로 받아 들였다. 제의나 영에 대한 중재를 일체 무당에게 일임하고 그 옆에서 구경만 해 온 샤머니즘적인 신앙생태는 그대로 한국 기독교 안에 흡수되어 일체의 예배의식과 기도를 목사에게 일임하고 그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앉아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무교는 자신과 신령과의 수직적 관계만 있을 뿐 횡적, 사회적 관계에 관심이 적어 개인의 이기에만 집착한다. 그 결과 신앙공동체 형성의식이 결여를 보이고 있고, 무교의 비합리적 주술과 가무의 위력을 강조한 것에 영향을 입어 기독교에 권위주의적 심성이 조장되었다. 또 샤머니즘의 특색은 엑스타시(ecstasy) 현상에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주의 속에 나타나 입신, 방언, 기적의 체험이 있어야 은혜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을 낳았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사오니 만복근원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라는 공공연한 기도 속에 현세적인 제재기복의 사상이 맡바닥에 깔려 있어 공예배는 물론 가정 심방 기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것은 샤머니즘의 바탕에 우리 한국 기독교 예배가 정착한 것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b) 불교문화의 영향
불교가 개신교 예배에 끼친 영향이라고 하면 부정적이고 도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기본교리는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 극기(克己)등이다. 이는 부정적인 현실관과 현실 도피적인 생태를 낳았다. 이런 풍토속에 들어와 허무주의와 현실 도피적인데서 구원해 내야할 기독교가 오히려 기독교적인 허무주의와 내세주의적인 신앙생태를 만들어 온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였다.
이 영향으로 기독교에 체념사상이 스며들어 있고, 불교가 세상과 사회보다 개인을 중시하므로 사회에 무관심한 은둔적 기독교 사상을 조장하였다. 또한 한국의 종교 혼합주의는 불교속에 일관하여 온 하나의 특성이므로 이에 영향받아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독교를 신봉하면서도 미신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자기 소업(所業)에 따라 받아지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한국교회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음을 설교의 경향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신자들이 죄에 대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죄에 대한 인과응보의 강박관념 속에 사로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런 이교적 생리가 한국 민족의 심성에 흐르고 있는 연유도 있지만 한국 기독교 자체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가 다같이 참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못했고, 그리스도적 신관도 구원관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한국교회는 '예수믿고 천당갑시다'라는 전도표어와 부흥회 교과서로서 오래동안 사용되어 온 [천로역정]이 이런 신앙생태에 부채질을 해왔다. 예배 때 부르는 찬송도 때로는 타계주의 적인 찬송가나 이른 바 부흥성가의 노래로 채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교인들은 장송곡을 부르듯이 구슬프고 느리게 부른다. 그렇게 불교적인 영향이 한국 개신교의 예배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c) 유교문화의 영향
유교의 특색은 주종관계의 계급질서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 권위주의적인 사상을 낳게 되었다. 하나는 배타주의적인 당파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학(儒學)은 성리학(性理學)에서 크게 발전을 본 듯 하였으나 그것이 당쟁과 결부되자 이(理)니 기(氣)니 하는 것은 당쟁과 사리를 위한 공론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유교는 편협하고 고루한 정신만을 기르게 되었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설이면 그 자체의 가치야 어떻든 간에 그것을 모두 이단 사설이라 하여 배격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한국 유교는 그 중추를 이루었던 주자학(朱子學)이 그 성리학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에게 무신론적인 기반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아직도 한국교회에 그리스도교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리고 교회예배의 기도마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기 보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멀리있는 신에게 드리는 독백이나 시처럼 수사적이고 서정적인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할리가 없는 성리학으로 꽃을 피운 한국 유교의 뿌리 깊은 생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인들은 한식이나 추석이 주일이 되어보라. 보수적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나 열광적인 신앙을 특징으로 하는 교회에서도 낮예배 시간에는 빈 자리가 생긴다.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윤성범박사는 [기독교와 한국사상]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앞으로 그리스도교회로서의 본연의 전통과 권위를 다시 찾아야만 되겠다. 우리는 여전히 유교의 전통주의에 사로 잡혀서 그리스도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감이 나타나곤 한다"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주종관계의 권위의식과 삼강오륜의 체면주의와 이(理)와 기(氣)의 당쟁과 사리로 당파성과 공리주의와 성리학의 무신론 등의 영향이 공예배에 깊
이 뿌리 박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배에도 체면때문에 참여하는 수가 많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함께 예배하면서도 마음은 서로 나누어져 있기도 한다. 이 모든 이교적 요인을 하루 속히 갱신해야 한다.
④ 예배 신학의 부재
예배신학이란 예배를 예배되게 하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배의 근거를 밝혀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 예배는 예배신학의 결여로 인하여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예배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예배학을 가르쳐오지 못한 신학교육의 책임도 있지만, 예배 인도자나 회중들이 예배의 신학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배신학의 결여는 교회의 성장과 양적부흥을 추구하게 되었고 결국 대중들의 편의와 취향에 맞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예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이제 예배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수양이나 수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신학의 부재로 오는 현상들은 부지기수이다. 예배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배라기 보다는 복받기 위해 드리는 경향이 많고, 따라서 회중들은 일체의 예배의식과 기도등을 목사에게 맡기고 구경만하는 관람객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목사의 손은 복덕 방망이가 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 교인들의 예배행렬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꼬리를 물고 들어오고, 설교중심의 예배이기 때문에 설교전의 순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설교가 끝나자마자 일어나 가버리는 조퇴신자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뒷자리에 앉으려 하고, 찬송은 앞자리로 옮겨앉는 신호로 사용하는 교회도 많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예배신학의 수립이라고 하겠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주의적이고 빈약하며 이교적인 예배로 흐르기가 일쑤이고,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냉하고 죽은 것이다. 예배와 신학이 합쳐질 때, 그리스도교 신앙에 강한 모티브가 되고 충실한 크리스챤 생활의 동력이 된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근거는 실용주의적이 아니고 신학적이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전도집회도 아니고 복받기 위한 예배도 아니다. 예배는 그 자체안에 목적이 있고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이 아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효과를 위해 예배를 시도한다면 그 행동은 이미 예배가 아니고 그 결과는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예배는 이 계시에 대한 응답이다.
크리스챤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예배자는 맹종하는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 그런 자세 속에서는 깊은 의미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자들이 예배에 관하여 이해하고 있는 신학적인 관심에 따라서 예배의 성격과 그 생동력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 예배 신학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를 집례하는 목회자들이 자기 위치를 정립하고 자신이 집례하는 예전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세글러 교수도 "예배의 실제 경험은 예배자 자신, 성령님의 힘, 그리고 예배의 순서와 그 인도에 마련되는 인간의 지도력에 있다" 고 강조하였다. 두번째는 회중들의 예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이다. "왕같은 제사장들"로서 회중은 공예배에 중요한 책임을 가진다 고 볼 때, 결코 예배는 목회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올바른 신학적 정립을 갖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평신도 교육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린그린 교수도 예배 교육에 대해서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깊은 신앙이 자라고, 교육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교회생활의 모든 면이 강화될 수 있다" 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예배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평신도들에게 예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교육이 절실히 요청된다. 예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교육이 선행될 때, 회중들은 보다 더 능동적인 자세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그들의 삶도 생명력이 넘치는 구체적인 예배행위가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제 한국교회는 성례전없는 예배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예배 집례자들과 성례전에 대한 성서적, 역사적인 올바른 이해를 정립하여 성례전 없는 불완전한 예배에서 과감히 벗어나 그리스도 예배의 두 기둥인 설교와 성만찬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어 올바른 공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2.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 회복
기독교 초기 다락방 예배는 구약의 성례전적인 성전예배와 설교 중심의 회당예배의 두 핵심의 요소를 보완했던 다양성있는 예배였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원형이었다. 이와같이 설교와 성만찬의 두 핵심이 균형을 이룰 때 기독교 예배가 성립되는 것인데, 이것이 깨어질 경우에는 구약성경의 성례전적 예배 아니면 설교 중심적 회당예배, 그 어느 하나로 전락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갱신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시급히 그리스도의 교회 본연의 전통과 권위를 찾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어떤 교회가 기독교 예배의 본래의 모습인지를 바로 찾아서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예배는 먼저 제일의적 및 원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행동이고, 그 다음에 비로소 제이의적으로 그 기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이다. 그 행동에 있어서 시람이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봉사( )뿐이다. 그런데 이 봉사가 하나님의 봉사 즉 예배가 되게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 예배에 고유한 방편을 예비해 두심으로, 이 방편들을 통하여 은총을 베푸시는데 이 방편이 바로 말씀과 성례전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공예배는 축제의 성격도 없고, 성만찬 안에서 각 날을 현재적으로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도 없이 설교 위주로 되어있다. 교회의 설교와 예배와 교회력에 같은 관점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가 설교 중심의 부흥회나 전도 집회가 되어 있는 것이다. 설교 중심의 예배는 주님이 제정하신 일을 외면하는 것이며 초대 기독교에서 물려 준 예배의 절대 핵심 요소인 성만찬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는 다섯가지 감각(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에 의하여 전달되는데, 설교에만 의존하고 있는 예배는 '청각'적인 영역으로만 제한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예배는 '듣기만' 하든가 '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행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성례전 없이 설교중심으 로 진행되는 예배를 기독교 예배인 줄로 알고 일년동안 계속 드려왔다. 그리고 성례전은 특별한 절기를 이용하여 일년에 한번이나 두번만 치르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정신이나 원리에 따라 성서의 권리를 으뜸으로 치며, 그 말씀의 선포와 교훈이 은혜를 받는 가장 유력한 길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 시간의 예배의 성패 즉 은혜를 받고 못받는 것이 설교에만 달렸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성례전 없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표면적으로 불완전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국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에 군림하게 됨으로써, 다른 예배요소들은 설교의 보조 역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가 제일 큰 몫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실력을 드러내고자 한다. 또한 한국교회의 설교는 복음의 온전성과 구원의 전체성을 주제로 삼기보다는 종교적 이기주의나 부분적 구원을 더 소리높여 외치고 있다. 대체로 율법주의적 옷을 입고 있는 설교, 기복적, 무속성의 옷을 입고 있는 설교가 오늘의 한국교회의 설교 양상인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만찬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예배의 두 순서였을 뿐이지
결코 두 예배의 결합이 아니었다. 성만찬 없이 진행되는 예배에 대한 시사는 전체 고대교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예배에 있어서 말씀과 성만찬은 함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을 경험하며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갱신되며 함양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폰. 알멘(Von Allmen)은 왜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이 꼭 필요한 것인가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① 그리스도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명령되어졌기 때문이며, ② 복음서가 결국은 머리말이 덧붙여진 수난사이듯이 설교도 성만찬에 이르러 완성되기 때문이며, ③ 성만찬은 사람으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 말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고 세상과의 분계선을 넘어 복음적 삶으로 뛰어들게 하고 헌신의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바르트(K.Barth)가 "설교가 성만찬의 틀에서 벗어나 성만찬 없는 설교가 될 때 전혀 다른 성격과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예배는 매주일 설교와 성례전을 포함해야 한다" 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에겐 주님의 만찬을 예배 가운데로 재통합시키는 일이 없이, 혹은 예배를 주의 만찬 가운데로 재통합시키는 일이 없이 우리의 예배를 계속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브릴리오드(Brilioth) 역시 말하기를 "성만찬이 없는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고전적인 형식을 잃은 것이다. 일반 기도는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되고, 기독교 예배는 성스러움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종종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표현하기 쉬운 설교자의 말이 성례전의 객관적인 말씀의 자리를 대신하기 쉽다", 또한 "성만찬의 가장 큰 본질중의 한 요소가 이탈되며, 예배의 균형이 깨어지고 성만찬을 희생제사로 보는 편협한 개념이 강조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성만찬을 생략해버릴 근거와 타당성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코 설교를 중심한 예배는 설교가 항상 모든 청중에게 동일한 감화를 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며 또한 설교가 진리의 설득뿐만 아니라 청중의 정서를 감동시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선포자의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국은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진리와 은혜의 효과 이외의 것이나,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즉 성찬 의식의 효과는 기독교 설교의 내용의 집약이며 종합이라 하겠다. 이것은 복음적인 것이다. 이런 효과를 성만찬은 우리에게 실감있게 하며 가장 순수하고 승화된 종교적 정서를 우리에게 준다. 설교 못지 않게 심금을 울리는 힘이 성만찬에도 있다. 거기는 감격과 감사와 사랑과 위로와 치유와 사죄와 소망과 헌신의 결단이 자연히 생기고 형제의 사랑과 친교와 일체감이 절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탈피하여 성만찬의 의식을 예배의식 안에 회복시켜서 되도록 자주 거행하여 예배를 완성시켜야 할 것이다. 성만찬 의식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 행위이며 이러한 성찬식이 다시한번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예배의 정규적이고 규범적인 형태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
현재 성만찬을 공예배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개신교 예배를 위하여 성만찬을 포함한 공예배의 갱신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만찬이 초대교회에서부터 내려오는 공예배의 부분이라는 것은 모든 교회가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 개신교 공예배가 성만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갱신되어 지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측면에서 공예배의 이상적 모델들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본다.
공예배 의식의 이상적인 모델을 작성하는 그 원리는 첫째, 성경에 근거하여야 하고, 둘째로는 예배학적인 이론에 의하여 작성하여야 한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모여 예배하는 교회는 흩어져 세상으로 파송되어 나가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작성되어진다. 이와같은 근거로 하여 작성되어지는 공예배 요소에는 절대요소와 부가요소로 구분된다. 절대요소는 성경에 있는 요소로써 공예배에서 빠지면 안되는 요소이다. 부가요소는 절대요소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요소로써, 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가감된 요소이기도 하다. 이 부가요소는 경우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상과 같은 요소에 의하여 다음에 제시하고자 하는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명동교회가 5년여 동안을 공예배 의식의 원형을 성경에서 찾아 제시한 모델로써, 1992년 10월 4일자 의식 순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참고적으로 절대요소 순서 앞에 '*'의 표시를 하려고 한다. 또한 절대요소에는 명동교회의 담임교역자인 백천기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거로,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개회의 예배
예배위원입장 ------------------ 오르간 --------------- 예배위원

입 례 송 ----------------- 시편찬양 ---------------- 다같이
(찬양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예배하라)
* 예배에로의 부름 ---------------------------------------- 인도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 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히 하도록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순서이다. 시편외에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내게 오라"(사 55:1,렘 29:12,마 11:28-30)고 인간을 부르신 말씀을 다양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 성령임재의기도 ------------------------------------- 예배위원중
이 기도는 예배 드리는 동안에 하나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셔주시기를 다같이 기원하는 간구이다.
* 경배찬송 -------------- 일어서서 ------------------ 다같이
기독교 예배의 기본요소로써 찬송을 공예배 중에 여러번 반복하
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사적 예배의 큰 유산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찬송을 반복하여 불렀으며(엡 5:19), 사도 바울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께 찬양하라"(골 3:16)고 권유하고 있다.
참회에로의 부름 ---------------------------------------- 인도자
* 참회의 기도 ------------------------------------------ 회중각자
사도들에 의해 제시된 예배요소로써(행 8:22)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죄인으로서 자기 부족한 점을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순서이다.
* 용서를 구하는 기도 ------------------------------------- 인도자
회중의 각자 참회기도를 마감하면서 인도자가 짧은 기도를 한다. 공예배에서의 공중기도는 각자 참회한 성도들의 용서를 위해 다시 한번 중보의 기도를 하는(욥 42:7-10) 것이다.
* 주기도문영창 ---------------- 548 장 ------------------- 다같이
* 사죄의 확언 -------------------------------------------- 인도자
이는 사도들에 의하여 제창된 예배요소로써(롬 3:24-26, 골 1:13-14, 히 10:17-18, 딛 2:14), 예배하는 회중에게 사죄의 확신을 주어 사죄의 기쁨을 갖게하는 순서이다.
* 영광송 ------------------------------------------------- 찬양대
사도들에 의하여 제시된(엡 1:6, 계 1:6, 14:7, 롬 16:27, 빌 4:20) 영광송은 모든 허물을 사해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향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 내용은 죄 용서받은 기쁨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회중들의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다.
말씀의 예배
* 구약성서봉독 --------------------------------------- 예배위원중
기독교 초기 예배 때마다 성경을 낭독하였는데 구약 예언자의 글과 모세의 글을 먼저 낭독했다(고후 3:14-15). 공예배 때 구약성서 낭독의 중요한 순서는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 1세기에 교부들에 의하여 정식 채택되었었다.
* 서신교독 ------------------------------------------ 목사와 회중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사도의 서신들이 교회 공예배에서 낭독될 것을 권장하였다(골 4:16, 살전 5:27). 또한 사도 요한은 "이 글을 읽고 듣는 자가 복되도다"라고 하였다(계 1:3). 교부 폴리갑은 사도서신을 공중예배에서 읽도록 권장하였으며 이 서신 교독은 공예배에서 중요한 순서가 되었다.
목사: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회중: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목사: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았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다.
회중: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차고 넘치게 베푸셨고
목사: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지는 믿음과 사랑을 나에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회중: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 니다.
목사: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회중: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 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목사: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 뿐이시고
회중: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다같이:아멘
* 찬양 --------------------------------------------------- 성가대
찬양 순서는 공중에배에서 말씀과 함께 이어지는 중요한 순서로, 사도에 의하여 권장되었다(고전 14:26). 이 순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음서를 봉독할 때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는 우리 왕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찬양의 성격이 있다.
* 복음서봉독 --------------------------------------- 예배위원중
복음서를 봉독할 때에는 전 회중이 다 함께 일어서서 경청하는 것이 상례이다(고전 7:10, 9:14, 11:23, 행 20:35).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이거나 그에게 관계된 사실을 증거하는 순서이므로 교회는 언제나 중요하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기쁨과 경외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 설교 ------------------------------------------------- 설교목사
설교는 원래 회당예배의 한 요소였는데 성경봉독과는 대조적인 요소였다(행 13:15,20:17). 이 요소는 다락방 예배에서도 중요하게 행하여졌었다(행 2:42). 설교는 사도들의 기본적 활동이었는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도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였다(막 16:20). 하나님은 인간에게 성령으로 그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설교는 교회생활의 심장부요 예배의 중심부에 그 위치를 두어야 한다.
*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이 순서는 설교후 설교 말씀에 회중이 응답하는 신앙고백 순서이다.
봉헌의 말씀 -------------------------------------------- 인도자
여호와께 믿음있는 자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들어 감사기도 드리자(시 30:4). 감사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그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야훼께 돌려라(시 96:8). 십일조를 드릴 때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말 3:10).
* 응답의찬송과봉헌 --------------------------------------- 다같이
응답의 찬송은 어떤 의미에서 "아멘"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찬송은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신앙 결단으로 부르는 순서 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찬송가는 설교 주제나 내용과 관련된 것을 채택하여야 한다. 아울러 봉헌은 영원히 성별시킨다는 사실을 묘사하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준비된 성만찬 예물을 거룩히 성별시켜 드리는(롬 12:1) 신앙적 마음으로 드리는 순서이다.
* 봉헌기도 ----------------------------------------------- 인도자
이때의 기도는 드리는 예물과 관련된 내용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와 예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기뻐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딤전 2:1-3, 왕상 8:12-61).
교회소식 ----------------------------------------------- 인도자
성만찬의 예배
성찬찬송 ----------------- 284장 1,4절 ----------------- 다같이
초대와 응답 -------------------------------------- 인도자와회중
목사: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초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참여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떡과 포도주를 사랑으로 나눕시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이 식탁에 함께 하여 주심을 믿나이다.
목사:하나님은 그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하
였고, 동정녀 마리아를 감동케 하셨으며, 요단강에서 예수님 위에 강림하셨고,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역사하셨습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이 식탁에 함께 하여 주심을 믿나이다.
목사: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연약함, 근심, 걱정,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의 예언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된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신비한 능력이 이 성만찬에 같이 하심을 믿으
십시오.
회중:주의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찬양하나이다.
목사: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이 임재하신 이 성만찬 식탁에 나
오십시오.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체험하십시오. 이 성만찬 식탁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
의 사역을 믿으십시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을 찬양하나이다.
삼성송(SANCTUS) ---------------------------------------- 다같이






* 성찬제정의 말씀 ----------------------------------- 목사와 회중
성만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행하라 하신 명령임을 다시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주의 말씀을 직접 받아 그에 응답하여 행동하게 하는 순서이다.
목사: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성취하게 하옵
소서.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자 마셔라.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로 맺은 새로운 언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셨으니(고전 11:23-25), 신앙의 신비가 크고 또 놀랍습니다.
회중:마라나타! 오 주여 오시옵소서.
* 평화의 인사 -------------------------------------- 목사와 회중
이 순서는 교회의 전통적으로 중요한 공예배의 요소이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배의 절정에서 "거룩한 입마춤으로 형제와 인사"(살전 5:26, 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2)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신성한 유대관계에서 행하여졌던 것이다.
목사: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
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27).
회중:주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옵소서.
목사: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중:목사님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목사:이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화해와 평화의 증표로 옆의 교
우 들과 "샬롬"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회중:"샬롬" (옆의 교우와 목인사)
* 성령임재의 기원 ---------------------------------------- 인도자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 주의 영광은 측량할 길이 없나이다. 주께서 일찍부터 세상 가운데 보내셨던 성령을 지금 또 다시 이 거룩한 성만찬 상에 보내 주시어 이 식탁이 성별되게 하시옵소서. 이 떡과 이 잔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배스러운 몸과 피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키리에(Kyrie) 기도송 ----------------------------------- 다같이





분병과 분잔례 ------------------------------------------- 목 사
목사:우리가 먹는 이 떡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요.
회중:아멘.
목사:우리가 마시는 이 포도주는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
의 피입니다.
회중:아멘.
하나님의 어린양 ---------------------------------------- 다같이





* 성만찬에의 참여 ---- '사랑의 나눔'을 계속 부르며 ---- 세례교인
성찬순서는 인도자가 먼저 시작하는 순서로 한다. 성찬분배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젰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눅 22:17-20) 성찬을 나누었던 성경을 근거러 하여 회중이 성찬대 앞으로 나와서 차례대로 직접 성찬기에서 가져다 먹는 방법이 성경적이라 하겠다.
"이제 세례를 받으신 성도께서는 신앙을 표현하는 태도로 앞으로 나와서 성만찬을 받읍시다. 그리고 아직 세례받지 못하신 교우께서는 빨리 세례를 받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다."
'사랑의 나눔'



감사의 기도 -------------------------------------------- 인도자
구원의 주 하나님! 이 성만찬에 참여하므로 다시 감사드리나이다. 이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생명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사랑과 화해로 가득차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옛날 바벨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들이 언어의 분열로 혼란 가운데 빠졌으나 오순절 성령받은 초대교회 신자들은 한 마음과 하나의 뜻으로 뭉쳐 살았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이 성만찬에 참여한 우리들도 한 마음 한 뜻되어 주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옵소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의 예언의 말씀이 오늘 이 성만찬을 나눈 우리들을 통하여 성취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니다. 아멘.
오르간 반주 -------------------------------------------- 반주자
파송의 예배
* 송영 ---------------- 일어서서 1 장 ------------------ 다같이
이 순서는 예배 마감 송영으로,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세상에 나아가서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며(롬 15:10-11) 봉사의 삶이 되어지도록(딤전 1:17) 거룩한 삶의 걸심을 하나님께 응답하는 순서이다.
* 파송의 말씀 -------------------------------------------- 인도자
이 순서는 흩어지는 교회를 이루는 순서이다. 이제부터 세상에 나아가(눈 6:7-13) 예배에서 받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신앙의 실천을 다짐하는 순서이다(딤전 6:11-16, 살 5:12-19).
목사:이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역군으
로써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회중:우리의 맡은 바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다하도록 주 성령이
시여 우리와 함께 하시옵소서.
* 축도 --------------------------------------------------- 인도자
이 순서는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온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민 6:24-26).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축복의 선언이 더 구체적으로 이행된다(고후 13:13). 이들은 기독교 예배에 정착되어 오랜 시간을 지켜온 순서이다.
이상에서 제시된 예전의 모델은 예배속에서 설교와 성만찬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배의 진행되어지는 순서가 인도자와 회중간의 교독의 형식으로 되어있어 회중들이 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인도자인 목사와도 한층 친밀감을 갖게 해 준다. 또한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의 진행이 집례자의 일방적인 전달이며, 그로인해 회중들이 자칫 예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가 산만해지기 쉬운데 반하여, 집례자와 회중이 서로 반응하며 일관된 예배의 진행은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이 예전의 모델은, 현재 한국교회가 예배에서 경시되어져 있는 성만찬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데 좋은 모델이 되어진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본 예전의 모델은 매주일 성만찬이 실행되는 것을 전제로 작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매주일 성만찬을 통하여 예배적 효과가 지속되고 발전되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교회가 연대의식을 높이고 결속력을 가져오게 함으로 한몸인 교회에 속하도록 한다. 이와같은 노력으로 매주일 성만찬이 거행되는데 어려운 사항들은 해소되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예배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바로 온전한 예배가 되어져서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본질이 오늘의 예배에서도 실현되어 지는 것이다.

Ⅳ. 공예배와 예전복
이제까지 한국 개신교의 성만찬의 공예배에 따른 문제점과 갱신에 의한 올바른 공예배의 실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근간에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에 많은 관심과 또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가 소수의 복음전파자들로 인하여 오늘날의 기독교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일지라도 그들의 외로운 실천운동을 통하여 머지 않아 우리의 교회는 진정한 공예배가 확산되어 설교와 성만찬이 균형을 이룬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꼭 첨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다. 예전복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력과 예전복의 관계 및 성만찬 집례시의 예전복 착용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고, 예전복의 성서적 고찰과 의미를 살펴본 후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A.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예전복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하는데 돕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의 예전복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예배의식의 신성함을 상징해 준다. 또한 목회자의 종교적 직무를 나타내며 하나님과 세속세계와의 중보적 관계를 뜻하여 주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하는 직분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제사장의 예복은 제사복으로써 착용하였고, 로마교회시대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예전복은 예복 하나하나에 종교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직제나 교회력의 절기의 의미를 색채로 나타내 준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예배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모든 의식적 요소들이 제거당하게 되었고 교회력에 의한 제반 행사가 폐지되었으며 목사는 가운(Gown)을 입고 예배를 집행하였다. 그러나 다른 복장으로 예배를 주관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예배의식복으로 사용된 것이면 아무리 복장의 종류가 달라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예전복으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예배에서 목사의 예전복은 일반적인 의식복이 그러하듯이 그 의식이 갖는 의미를 표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복을 통해서 신앙과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는 기능을 하며, 의식복의 상징과 색채를 통해 기쁨, 슬픔등을 나타내므로 예배 참여자로 하여금 심리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키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첫째로 목회자가 예배의식을 수행할 목적으로 예전복을 착용했을 때 자연인이 아닌 목회의 공직자로써, 직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심리적 영향을 받으며 성직자로써 인간과 하나님과의 중보적 역할과 기능의 수행을 표현해 준다. 둘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교회의 질서를 나타내 주기도 한다. 즉 목사와 평신도의 신분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종교적 지위나 서열을 구분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 세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그 예복을 착용하므로 지위, 학력, 빈부등이 가리워지고 평등을 나타내주어 신자로 하여금 평화의 마음이 되게 하고 신자 자신도 예배에 더욱 참되게 임할 수 있도록 심리적 전달의 기능을 갖는다. 네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예배의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예배의 언어와 같은 표현을 하게된다.
이와같은 기능을 가진 예전복은 예배의식에서 다른 예배요소인 설교, 성만찬, 찬송 및 다른 상징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예배의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B.예전복의 성서적 고찰
1. 구약시대의 예전복
구약성서에 나타난 제사장복은 하나님이 정한 제복으로 백성을 대신하여 입었으며 제복을 착용하지 않으면 죽게되는 생명의 옷으로 매우 중요시 하였다. 제사장은 성별의식 즉 목욕과 기름바름과 착복의식과 희생제사를 통해 제사장직에 임명됨에 따라 이때부터 구체적인 제사장의 예전복이 지정된 것을 출애굽기에 보면 알 수 있다. 제사장은 위임을 받을 때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매우 값지고 아름다운 예복을 착용해야 했다. 만일 이 법을 어길 때는 죽음의 징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출 28:40-43).
이와같은 제사장의 예복은 특별한 정신적 의미가 있으며 제사장의 특권과 책임을 나타내며 제사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제사장의 예복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제사장은 또한 그 역할과 제사직의 직위에 따라 예복을 다르게 착용했다. 이러한 제사장의 예복을 가장 세밀하게 보여주는 성서의 기록은 출애굽기 28장, 29장, 39장이다. 이 중에 출애굽기 28장 1절에서 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되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속옷과 관과 띠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장이 입을 예복까지 상세하게 지시하였다. 즉 제사장의 직무가 거룩하므로 이에따라 예복도 깨끗하고 순수하고 값비싼 재료를 가지고 가장 지혜있는 자의 우수한 기술에 의해 옷을 만들도록 하였다.
대제사장의 예복은 아주 독특하여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속옷과 관과 띠 그리고 고의를 착용했고 머리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 쓴 정금패를 달았다(출 28:4-39, 39:1-31, 레 8:7-9). 대제사장이 바로 대제사장중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표상이었던고로 대제사장의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상징하였다. 대제사장의 아들들은 제사장이 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도 제사장이라 일컬어지므로 제사장의 예복은 성도들의 특성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복과 의식을 따르는 제사장 직분은 하나의 방편이 아니라 성막에서의 예배, 바로 그 생활이었다.
대제사장의 예복은 짜임새나 재료나 솜씨에 있어서, 이 모든 예복들의 질은 그 종류중에서 최상의 것들이었다. 즉 정교한 베실, 순금, 보석, 값비싼 관유등을 사용하여 교묘한 솜씨와 지혜로운 마음으로 예복을 만들었다. 이런 사실은 그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특성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며, 바로 최고의 질이 아니면 우리 인간의 본보기인 그 분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 제사장의 예복은 겉옷과 속옷과 흰색 고운 베실로 짠 관과 청색, 홍색, 자색실로 수 놓은 띠기 있다(출 28:40, 29:8-9, 39:27-29, 레 8:13).
이와같은 제사장들의 예복은 다음과 같다.
① 에봇 (Ephod)
대제사장이 흉패밑에 입는 옷으로, 출애굽기 28장 6절에서 14절에 보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옷감을 짜서 만든 것으로 이스라엘 예복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 에봇은 소매가 없는 짧은 겉옷으로 대체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이 보통이었고 같은 재료로 된 띠를 허리에 둘렀고 12부족의 이름을 새긴 보석 호마노가 달린 견대로 결합시키도록 되었다. 에봇에는 흉패를 달도록 되어 있으며 예복으로 매우 화려하고 값진 것이었다.
이 에봇에 12부족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견대에 붙였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종교적인 책임을 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며 대제사장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제사장이 입은 에봇의 견대에 붙은 이름을 보시고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복을 내린다(느 5:19, 13:31). 이와같이 에봇은 대제사장의 필수적인 예복이었다.
일반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에 겉에 장식이 없는 세마포로 된 에봇을 착용했다. 이 에봇은 사무엘이 입었고(삼상 2:18, 14:3), 다윗도 법궤앞에서 입었다(삼상 6:14, 삼하 9:14-15). 그러나 B.C.587년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귀환후에는 에봇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② 흉패 (가슴받이:Hoshen)
대제사장의 에봇 앞가슴에 달려 있는 것으로 대제사장의 장신구 중에 가장 중요하다. 흉패는 에봇과 같은 재료 즉 청색, 자색, 홍색실과 베실로 길이가 두뼘, 폭이 한뼘으로 에봇 짜는 법으로 짜서 사방 한뼘이 되도록 두겹으로 하여 여기에 12보석을 장식하였다. 12보석에는 12지파의 이름을 새겼으며 첫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며 둘째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이며 세째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며 네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을 금테에 물려 장식하였다.
흉패는 "호쉔"(Hoshen) 이란 말로 "아름다움" 또는 "주머니"란 뜻도 되는데 판결 흉패로 "우림과 둠밈"(Urim and Thummim)을 넣어 신탁(神託)에 사용하였다. "우림"은 "빛"이란 뜻이고 "둠밈"은 "완전"을 의미하는데 우림과 둠밈의 사용은 제사장의 특권이었으며 원래 유죄와 무죄를 판결하는데 쓰는 두개의 조약돌이었다(삼상 14:41-42, 26:60).
흉패의 12보석은 대제사장의 중보역할의 상징이 되었고, 바벨론 포로후에는 우림과 둠밈이 쓰이지 않았다(스 2:63). 이상과 같이 흉패는 시비를 가리는 우림과 둠밈의 주머니 역할을 해 왔던 것 같다.
③ 겉옷 (M il)
대제사장이 에봇에 받쳐입는 청색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속옷이 보이며 소매가 없고 머리 들어갈 구멍만 내고 갑옷 깃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옷의 가장자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무늬를 수놓고 주위에 금방울을 석류수와 교대로 하여 달았다. 이는 대제사장이 겉옷을 입고 성소에 들어갔을 때 금방울 소리를 통하여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다(출 28:31-35).
④ 반포속옷 (자수속옷:Cetoneth)
수놓은 바둑무늬의 세마포옷으로 제사장들의 예복중에 겉옷 밑에 입는 옷으로 길이가 발까지 닿았고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오며 바느질한 띠로 허리를 묶었다(출 28:39).
⑤ 띠 (Abn t)
의복과 같은 재료 즉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 만든다(출 28:39).
⑥ 고의 (袴衣)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섬길 때 넓적다리까지 내려오는 바지로 하체를 가렸다. 이 고의는 베실로 꼬아 만들었으며 반드시 입어야만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출 28:43).
⑦ 관 (冠)
대제사장들이 쓴 관은 마이터(Mitre) 관이라고 하는데 고대 동방 임금이 썼던 것과 같은 것이며 아마포로 만들어졌다. 반제사장과는 달리 대제사장은 관에 정금패를 달았다(출 28:36).
⑧ 정금패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긴 패는 대제사장의 신분을 말해주며 이 말의 뜻은 대제사장이 여호와께 성결히 바친 바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바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 된 사실을 의미한다(출 28:36-37).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제사장의 예복은 많은 규제와 지시를 받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들은 직무의 수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입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잃었다. 이것은 예복이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므로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2. 신약시대의 예전복
구약시대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들의 제사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역할로 인해 구약시대와 같은 대제사장제도가 필요없게 됨으로 제사장들의 예복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눅 2;22) 성전 안에서의 예전복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내에서 각각 직무가 구별된 것은 초대교회부터였으며, 구약시대와 같은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그것은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의식을 갖출 여건이 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사려된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화나 모자이크를 자세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그 당시 유대인의 복장인 그리스, 로마인의 튜닉(Tunic) 과 토가(Toga)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입었던 의복은 속옷은 바느질을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키톤(Chiton)이고(요 19:23-24), 겉옷은 '홍포'라고 하는 왕이나 장군이 입는 것과 같은 외투나 옷위에 두르는 망토 히마티온(Himation) 이었다(마 27장, 요 18:2). 또 옷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속죄의 제물이 되는 구약의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옷으로써 성례복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딤후 4:13)를 보면 다른 사도들도 그 당시 유대인의 평상복을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 제사장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므로 신약시대에는 평상복으로 예전복의 의미를 나타냈었다고 볼 수 있다.
C. 현대사회에서의 예전복
1. 성만찬과 예전복
지금까지 세계교회 안에서 널리 애용된 성만찬 예복을 든다면 알브(alb), 체스유블(chasuble), 영대(stole), 검정색 가운(black gown-한국에서 이용되는 가운) 등이 있다.

① 알브 (Alb)
알브는 흰색의 예복으로 어깨부터 무릎 혹은 발목까지 내려오며 소매는 팔에 맞도록 좁게 되어 있는 옷이다. alb라는 말은 라틴어 albus(흰색)에서 왔는데 그 흰색은 그리스도의 순결과 빛을 표상한다. 11세기까지 모든 예배를 위한 성직자의 예복으로 사용되었고, 써플리스(surplice-백의)가 비성만찬 예배를 위해 사용된 후부터 알브는 아침기도, 저녁기도를 제외한 모든 예배의 예복으로 애용되었다. 성직자들은 가장 간단한 예복을 입는 경우 알브 위에 허리띠와 영대(stole)를 사용했고, 성만찬 예식의 경우 알브 위에 체스유블(chasuble)을 입었다.
② 체스유블 (Chasuble:제의복)
체스유블은 주요의식을 위해 입는 옷이므로 제의복으로 칭해진다. 이 예복은 성찬식이나 그외 주요 의식을 행할 때 성직자가 알브와 영대위에 입는 판초나 망또 모양의 예복이다. 체스유블의 특징은 소매없이 판초 모양으로 넓게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여기서 넓은 것은 하나님의 포옹을 상징한다. 즉 체스유블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거룩한 만찬의 충만함을 표징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예복은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입었던 왕의 옷을 상징한기도 한다. 체스유블은 그 자체가 깊은 뜻을 표상해 주므로 그위에 장식물이 부착되지 않았고,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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