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강해(14)
성령의 은사들
고린도전서 12장1~11절
우리는 지난 세 번에 걸쳐서 성령의 세례가 무엇을 뜻하며,
세례는 충만과 어떻게 다르며, 성령이 충만한 자에게는 어떤 열매들이 열리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우리의 속사람 안에 있는 죄악의 뿌리를 제거해 주시는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성령의 세례는 단번에 일어나며, 완전합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고 마음속에 성령이 내주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충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와는 달리 성령의 충만은 대체로 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불완전하며, 또한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기를 게을리하면 언제라도 성령의 충만은 떠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이 우리의 생활속에서 충만하게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향한 우리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 안에 있는 나쁜 죄의 흔적들이 여전히 강하게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의 마음이 그 유혹에 흔들리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과 빛이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열매들이 열리게 되는데,
이 열매는 모두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의 열매는 인내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납하는 태도로 나타나며, 홀로 찬양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과 어울려 함께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또한 성령의 뜻을 대언하는 말씀에 주의하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1. 열매는 개인에게, 그리고 은사는 교회의 공동생활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을 때 한 개인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성령의 열매라는 말로서 표현할 수 있다면, 성령의 은사는 교회라는 공동생활을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언제나 교회공동체에 끼치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면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2. 성령의 세례와 은사의 역할의 차이1: 세례는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
성령의 은사는 교회공동체를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은데,
우리는 먼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세례와 은사가 각각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성령의 세례는 교회의 통일성의 근거가 됩니다.
곧 출신이 어떻든지, 배경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써 성령의 세례를 받기만 교회의 회원이 됩니다.
아무리 서로 달라 보여도 성령의 세례를 똑 같이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성령의 세례는 성도들을 하나의 띠로 묶어주는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는 “누구든지”라는 표현이 강조됩니다.
고전12:3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누구든지”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넓은 포용성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도대체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성도라고 볼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가실 수도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생각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도가 되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우리 가족 가운데 아무리 말썽을 피우고 못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자녀가 있어도 여전히 그는 가족의 일원이듯이, 모든 성도들은 출신이나, 학벌이나, 인종이나, 빈부나, 윤리적인 실천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일단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면 모두 그리스도안에서 영적인 가족으로 용납하지 않으면 안되며, 가족 가운데 말썽쟁이가 있을 때 그것을 가족에게 주어진 십자가로 알고 평생 지고 나가지 않을 수 없듯이 교회 안에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있을 경우에도 교회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로 알고 용납하고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개성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심지어 윤리적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모양이 천차만별일 때, 만일 우리가 서로 다른 점에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면 도저히 교회의 통일성과 하나됨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과감하게 우리의 눈을 번쩍 들어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인 것과 교회의 통일성의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의 세례와 은사의 역할의 차이2: 은사는 교회의 다양성의 근거
이처럼 성령의 세례가 교회의 하나됨과 통일성의 근거가 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성령의 은사는 다양성의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는 “각 사람”이라는 말이 강조됩니다.
고전12: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각 사람에게”라는 표현이 사용됨으로써 사람 하나하나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은사가 다를 수 있음이 벌써 강하게 암시되고 있습니다.
은사라는 말은 “은혜로 주어진 선물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겸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은사는 얼마나 다양하며 어떤 은사들이 있는가?
은사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는 중요한 본문으로는 네 곳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그 본문들고린도전서12장, 로마서12장6~8절, 에베소서4장7~12절, 베드로전서 4장10~11절입니다.
먼저 이 본문들 안에 어떤 은사들이 열거되어 있으며,
이 목록이 보여주는 특징이 무엇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1) 고린도전서 12장
① 고전 12:8~10절
“[8]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라고 하였고, 같은
② 고전12:28~31절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목록 가운데는 앞에서 말한 목록과 중복되는 것도 있고,
새로운 것도 있습니다.
2) 로마서12장6~8절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목록을 고린도전서12장에 있는 목록과 비교해 보면, 섬기는일, 위로, 구제와 같은 목록이 첨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에베소서4장11절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섯가지 은사가 등장합니다.
4) 베드로전서 4장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여기에는 말하는 은사와 봉사의 은사가 등장합니다.
이 두 가지 은사는 모두 이전에 등장했던 은사들과는 종류가 다는 것들입니다.
4. 신약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은사의 일부분만을 말한 것이다.
이같은 은사의 목록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의 범위에 관한 매우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각각의 본문에 등장하는 은사들은 약 20개에 가까운 종류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어서 언급된 것도 있고,
종류가 다르지만 잘 살펴 보면 내용상 딱 잘라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유사한 것도 있습니다.
예컨대, 섬기는 은사와 봉사의 은사는 다른 종류로도 볼수 있지만,
봉사 안에 이미 섬기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유사한 은사입니다.
말하는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와 복음 전하는 은사와 목사의 은사와 교사의 은사는 각각 다른 은사들이지만 말을 한다는 점에서 또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능력을 행하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이 따로 언급되어 있지만,
능력을 받지 않고 어떻게 병을 고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 같은 은사의 목록을 잘 들여다 보게 되면, 성경기자들이 생각속에 어떤 특징한 몇가지 두드러진 현상만을 염두에 두고 그것만이 은사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은사개념을 매우 포괄적이고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은사는 고정된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아주 다양한 많은 종류들을 담고 있는 하나의 크고 보편적인 범주를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바울은 무한하게 다양한 종류들-사도 바울 자신도 다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로-을 포함하는 은사의 커다란 보따리 안에서 자신이 경험한 교회생활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가지 은사를 생각 나는 대로 무작위로 끄집어 내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목록이 결코 무한하게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다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밖에도 얼마든지 은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대가 변하며 그 시대에 맞는 은사의 종류도 변할 수 있고 장소가 변하면 그 장소에 맞는 은사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은사의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는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는 은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찬양의 은사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찬양의 은사도 세분하기 시작하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종류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지휘하는 은사, 찬송가를 작고하는 은사, 악기를 다루는 은사 등등으로 세분할 수 있고, 정통성악을 통해서 찬양하는 은사, 유행가곡조를 이용하여 찬양하는 은사가 있고, 악기의 종류만큼 다양한 은사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5. 신약성경에 기록된 은사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오늘날은 주어지지 않는다.
신약성경 시대에는 극히 중요한 은사였는데, 오늘날의 달라진 시대와 교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주장해서도 안 될 은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약성경의 은사 목록에서 사도와 선지자와 예언의 은사들이 제일 먼저 언급될 정도로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사도의 은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목격하고 같이 생활하고 개인적으로 친히 육성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고 성경을 기록한 일들을 가리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말씀을 직접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언도 역시 하나님이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주시는 계시를 직접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가지 은사는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 나타난 독특한 은사들이기 때문에 다른 시대의 성도들이 받을 수 없는 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오늘날에는 아무도 사도의 은사를 받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직접 듣는 선지자나 예언의 은사도 이미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완결되고 난 이후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는 은사들입니다.
오늘날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가 천재적인 말을 하고 방대한 시학서적을 저술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해설하는 해설서는 될 수 있고,
성경이해를 돕는 수단이 될 수도 있어도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는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나타나는 은사도 달라집니다.
사람에 따라서도 나타나는 은사가 물론 다릅니다.
우리가 은사문제를 생각할 때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앞에 인용한 본문들을 잘 들여다 보면 은사들 가운데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가 있는 반면에,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은사들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방언의 은사나 병을 고치는 은사나 예언의 은사나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나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은사들입니다.
여기서 방언에 대하여 간단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복음을 말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를 뜻합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하는 방언은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다보면 나의 마음속에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많은데 우리의 언어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의 안타까움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자유롭게 하나님을 향하여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자유롭고 시원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에 있지만 사람의 말로써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느낀 내용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은 신자 개인에게는 아주 좋은 은사요,
기도를 깊게 하고자 하는 성도들이 사모할 만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방언은 이처럼 신자 개인을 위한 은사이기 때문에 은사의 더 큰 목적인 교회의 유익에는 간접적으로 밖에는 기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방언은 매우 개인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교회공동체에서 너무 드러내놓고 하지 않고 종용히 혼자 기도할 때에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도 있는데, 이 은사도 대체로 기도생활을 깊이 하는 분에게 찾아 옵니다.
기도를 별로 하지 않는 성도들은 마귀의 존재를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깊이 하는 성도들은 그렇지 않은 성도들보다 더 선명하게 마귀의 존재를 체험하게 됩니다.
마귀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은 기도생활에 깊이 들어간 증거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산에 올라가서 철야하며서 기도한 사람들은 대개 마귀들과 싸운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깊이 하게 되면 어떤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가,
그 사람이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인가 하는 것들을,
판별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이 주어질 주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런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6. 은사에는 초자연적인 것도 있지만 자연적인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은사목록을 보게 되면,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와 뒤섞여서 그리고 나란히 기적과는 상관없는 자연적인 은사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서로 돕는 은사라든가, 다스리는 은사라든가 권위의 은사라든가 구제하는 은사 같은 것은 자연적인 은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선천적이든 아니면 교육을 받아서이든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더욱이 경영하고 다스리는 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같은 자연적인 재능들은 성령 안에서 논의되는 은사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으로 주어진 재능들 또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주어진 재능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도 그대로 사용되는데, 다만 그 동기와 목적이 달라지는 것이다” 곧, 기독교인이 선천적으로 주어진 재능들을 주님과 성도들을 사랑하는 동기와 그 사랑을 실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게 될 때 그 재능이 바로 은사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새로운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는 과정에서 선천적인 또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재능들로부터 모난 부분들이 조금씩 다듬어지고 정돈되는 변화가 뒤따르겠지요.
이렇게 해서 사용된 재능들이 이제 성령안에서 은사로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기계를 조작하는 능력이나 컴퓨터을 조작하는 능력이 교회운영과 관리에 없어서는 안되는데, 이때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이 능력들을 바른 동기와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면 바로 은사가 됩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인간성 또는 인격도 그렇습니다.
인간성도 상당부분은 선천적으로 또는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예를 우리는 바나바에게서 잘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1장1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을 보게 됩니다.
바나바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데 탁월한 인물이었는데, 여기 보면 믿음과 성령을 말하기 이전에 성품 그 자체가 벌써 착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나바의 착한 성품이 믿음과 성령충만을 받자 성령의 값진 은사로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로부터 바나바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성품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7. 성령의 은사는 기독교인 모두에게 주어진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할 문제는 이와 같은 성령의 은사가 누구에게 임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네 편의 본문에 보면 이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습니다
네 본문이 은사를 받는 대상으로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표현은 “각사람”이라는 표현입니다.
각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진다는 말은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가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특별한 성도들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은사를 받은 자들입니다.왜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셨는가?
이는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이 교회의 유지와 성장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모든 성도들이 교회일에 적극적으로 함께 참여해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2장12~27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도들은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에 있는 지체들을 어느 한 부분도 필요 없는 부분이 없고,
모든 지체들에게 몸 전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기능이 다 예외 없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 해서 발을 보고 필요 없다고 할 수 없고,
눈이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해서 발을 보고 필요 없다고 할 수 없고,
눈이 자기가 중요하다고 해서 손톱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어떤 한 부분이라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적극적으로 교회운영에 참여해야 할 의무가 있고, 또 그런 의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성도들에게 고유한 은사가 주어져 있습니다.
가장 건전하지 못한 교회는 교역자나 중요한 직분을 맡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교회 일을 다 맡겨 버리고 나머지 성도들은 그저 한량하게 주일예배나 나와서 설교나 감사하고 돌아가는 교회입니다.
그것은 마치 운전사 혼자서 눈을 부릅뜨고 좌우를 살피면서 긴장한 가운데 운전을 하고 차에 탄 나머지 승객들은 하염없이 졸음에 빠져있는 버스와도 같습니다.
교회는 이런 버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조금 시끄럽고 일이 더디고 비효율적이라도 모든 성도들이 일을 나누어 맡아서 협동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만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교제가 부족하니까 이제 한번 만나서 교제를 해보자”하고
작심하고 만나면 정작 할 말이 없고 쑥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됩니다.
할 말을 찾다가 없으니까 이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고 말하면서 소위 일은 안하고 말만 많은 교회가 되어 갑니다.
그것 보다는 예배를 위하여 모이고, 기도회와 성경공부를 위하여 모이고,
각자가 맡은 교회 일을 하기 위하여 모여서 의논하고 함께 협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각 성도들이 각기 자기가 받은 은사를 통하여 교회 일을 하기 위하여 모일 때 마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각자가 가진 악기를 통하여 독특한 음을 내면서도 그 음이 오케스트라 연주 전체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음악으로 조화와 화합을 이루는 것을 의식하는 것처럼 성도들은 각자가 받은 은사의 독특성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면서 이 은사들이 모여서 하나의 아름다운 전체를 이룬다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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