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강해(12)
성령의 세례와 충만
요한복음 7장37~39절, 고린도전12장13절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성도들의 영혼 깊은 곳,
곧 속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죄의 뿌리를 제거하시고, 우리의 영혼의 깊은 차원을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뜻합니다.
이 사역은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는 기도를 드리는 순간에 단번에 이루어집니다.
전광석화와 같이 일어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인간의 업적도 공로도 개입하지 않으며,
오직 성령의 주권적인 작용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사역 그 자체는 인간의 의식으로 감각할 수 없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 곧 우리의 속사람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나 감정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신비로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이라는 점도 이 사역을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1. 성령의 세례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임하는 보편적 축복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운 성령의 사역 곧,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기독교인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보편적인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나 연륜이 짧은 사람이나,
어떤 특별한 체험이 있는 사람이나 그저 평범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방언을 하는 사람이나,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초신자나, 감리교인이나 장로교인이나 성결교이나 아니면 심지어 카톨릭교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2: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본문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이나,
성령을 마신다는 표현은 같은 뜻입니다.
이처럼 성령세레는 기독교인이 처음 기독교인이 될 때 받는 축복이지 기도를 많이 함으로써 얻는 결과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번에 순식간에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성령세례는 체험될 수 있고 감각될 수 있는 축복이 아니라,
인간이 감각할 수 없고 체험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성령세례는 겉사람 또는 의식의 세계에 임하는 축복이 아니라,
속사람 또는 잠재의식의 차원에 임하는 축복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자기가 겪은 어떤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서 그런 경험이 있어야만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건전하지 못한 성령론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방언을 하든지 어떤 특별한 예언을 하든지 아니면 병을 고치는 능력을 받는다든지 아니면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는 것은 물론 성령을 받은 성도들에게 은사로서 주어질 수 있는 현상들이지만 이 같은 현상들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한다든지 성령세례를 받으면 반드시 이런 현상들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 비성경적인 가르침이라고 단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이면 누구든지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뒷받침하는 본문들이 여러 군데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고전적인 본문은 고린도전서 12장3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말은 성령을 받은 증거, 곧 성령세례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말씀이 고린도서에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어떤 교인들입니까?
윤리적으로 얼마나 문제가 많고 교회 안에서는 여러 파로 나뉘어져서 싸우던 사람들이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입니다.
이런 교인들을 향해서 바울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의 행동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들을 향해서"육신에 속한 자"라고 책망하고 있는데(고전3:1,3),
이 말은 주의해서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니까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불신자라는 뜻이 아니고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인데 생활면에서는 악한 마음(육신)을 따라서 사는 미숙한 기독교인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불신자의 신분으로 돌아갔다고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고,
도대체 성도의 신분에 합당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저런 행동은 성도의 신분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그런 행동을 보고 "저 사람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불신자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극히 신중을 기해야만 합니다.
2. 속사람의 차원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은 겉 사람의 차원에서 계속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제 단 회적으로 일어나는 성령의 세례로서 기독교인의 모든 것이 완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는 기독교인의 생활여정 가운데 최초로 받는 축복입니다.
성령세례는 영혼의 깊은 속사람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변화인데,
기독교인이 이 세상에서 영위해야 하는 생활은 겉 사람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겉 사람, 또는 의식의 세계는 성령과 무관한 세계인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전 영역이 성령의 다스림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와 같은 겉 사람의 차원, 의식의 세계와 성령과의 관계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성경이 이와 같은 겉사람의 세계와 성령과의 관계를 말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도들이 서술한 서신서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의 서신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이미 기독교인이 된 자들이요 성령세례를 받은 자들이어서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다시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기독교인이 될 것을 가정하고 서술된 복음서에는,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서신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본문이 에베소서 5장18절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나 계속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의 속사람 안에 있는 성령의 권능이,
우리의 겉 사람의 차원에 나타나서 겉 사람의 차원 곧,
삶의 차원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뜻합니다.
3. 성령의 충만은 간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계속하여 임한다.
성령의 세례는 값없이 은혜로 단번에 주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생활 속에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은
간구하고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납니다.
성령의 세례는 단번에 전광석화와 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점진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세례는 완전하고 실수가 없습니다. 단번에 모든 것을 성취합니다.
곧, 단번에 우리의 죽었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해내고,
단번에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버립니다.
속된 말로 표현한다면 한 방에 깨끗이 끝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실수와 죄 때문에 언제나 불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또 성령이 한번 충만하게 임했다고 해서 항상 충만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고 성령의 뜻과 주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모습이 보이면 성령도 대체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합니다.
그러나 기도하기를 게을리하고, 교회생활을 등한시하고, 말씀읽기를 게을리하고, 자기고집대로 살면, 성령은 충만함을 거두어 가 버리십니다.
그때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기는 커녕 근심하며 탄식하십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로 성령을 근심케 하고 탄식하게 하는 교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에 불순종하고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부터 13년간이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떠나 있었습니다.
삼손도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들릴라에게 비밀을 말한 뒤로는 여호와의 능력이 떠나갔습니다.
사울왕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었으나,
다윗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후부터 하나님이 사울을 떠나셨습니다.
이같은 구약의 사건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이들에게 임했던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떠나 버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4. 성령의 충만이 우리에게서 떠날 수도 있음을 유념하라
이처럼 성령의 충만함이 떠나버리면 우리는 이름은 기도교인인데 능력도 힘도 없고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짝 메마르고 볼품없는 미지근한 성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이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초신자에게도, 신앙생활의 경륜이 오랜 신자들에게도,
성령이 충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또한 성령의 충만이 떠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평신도에게도, 집사에게도, 권사에게도, 장로에게도, 목사에게도 이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었어도 성경연구하지 않고 기도하기를 게을리하고 엉뚱한 일을 하게 되면 바짝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초신자라도 성경배우는 일을 꿀맛 같이 여기고 기도하기를 즐겨하고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면 성령은 충만하데 임합니다.
처음이 나중되고 나중이 처음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세계에서는 프로선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아마추어일 뿐입니다.
자기가 신앙생활의 프로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이미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전에 성령충만 받았다고 해서
오늘도 성령이 반듯이 충만하라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항상 우리에게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병고치는 은사를 받아서 여러 사람의 병을 고쳐 주다 보면 소문이 나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그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능력을 간구하면 성령께서 계속 충만하게 그에게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에게 임한 병고치는 은사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받은 성령세례가 무효가 된 것은 아닙니다.
또 그가 병고치는 은사를 나쁜 목적에 사용하든지 기도를 계을리 하든지 하게 되면 언제든지 병고치는 은사는 떠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은사가 떠나고 난 후에도 사람들이 병을 고쳐달라고 몰려오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가 기도해보고 능력이 안 나타나면 이제는 더 이상 성령께서 능력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돌려보내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슬그머니 유혹이 생겨서 모여든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성령의 능력이 떠났는데도 이상한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병을 고치려고 하게 되면 그때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5. 정상적인 성도는 성령의 충만을 항상 갈급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을 명령하는 본문은 앞에서 말씀드린 에베소서5:18절 이외에 아주 적절한 본문이 또 있습니다.
그 본문은 요7:37~39절 말씀입니다.
"[37]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말씀은 성령충만의 성격을 아주 잘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태양볕이 뜨겁게 내려 쪼이는 무더운 날씨에 메마를 대로 메마를 광야나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를 머리속에 그리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여행자는 탈수 상태로 허덕이면서 물을 갈구하는 자입니다.
여기서 태양볕이 뜨겁게 내려 쪼이는 광야는,
하나님이 없는 메마르고 삭막한 세속사회를 상징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성도들은 메마르고 삭막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갈 때 갈증으로 허덕이는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메마르고 삭막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영적인 갈증을 느끼지 못하고 이세상이 그저 달콤하고 감리롭게 느껴지면 뭔가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는 상태는,
장차 우리가 가게 될 새 예루살렘에서만 맛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주리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항상 배부르다고 느끼면 그 성도는 시험에 빠진 성도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그저 편안하고, 말씀을 듣지 않아도 마음에 아무런 불안함도 없고, 기도하지 않아도 그저 즐겁다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의 유혹에 깊이 빠진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체적인 생명을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먹고 마셔야 합니다.
가정주부들은 사람이 얼마나 자주 먹어야 하는지 잘 아는 분들입니다.
아침식사를 마련해서 가족식구들 먹여서 보내고 나면 금방 점심식사 반찬걱정을 해야 하고, 점심먹고 나면 금방 또 저녁반찬 걱정을 해야 합니다.
하루종일 삼세끼 밥해대다가 하루가 저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먹어야 후리 생명이 유지됩니다.
부페에 가서 근사하게 한 끼를 배부르게 먹고 나면 일주일동안 안먹어도 살 수 있습니까?
아주 근사하게 한 끼를 먹으면 다음 한 끼 정도는 건너 뛸 수 있지만,
두 끼째는 어김없이 먹어야 합니다.
몇 끼를 굶고도 배고픔을 못 느끼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면 규칙적으로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한 주일이라도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성경공부를 거르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거르면 뭔가 답답하고 견딜 수 없음을 느껴야 살아있는 신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도들이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갈증을 느끼면서 허덕일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니, 우리 안에 이미 예수님이 계신데 왜 또 새삼스럽게 예수님께 가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갈증을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생수의 근원을 가지고 계시지만 이 생수는 찾는 자에게 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찾지 않는 자에게도 이 생수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계시는 예수님께 우리는 규칙적으로 날마다 새롭게 나아가서 새롭게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날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예수님께 새롭게 나아가서 능력을 주시기를 간구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의 배에서입니까? "예수님께 나아와 간구하는 자의 배에서"입니다.
나오기는 예수님께 나오는데 생수는 어디서 흘러 나옵니까?
간구하는 자의 배에서 흘러나옵니다.
간구하는 자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는 말은
간구하는 자의 몸 안에, 영혼 깊은 곳 안에 이미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내주해 계신다는 것을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은
전혀 낯설고 새로운 어떤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겉사람의 차원에, 우리의 생각과 삶과 행동의 차원까지 그 영향력과 주권을 행사해 주시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구하면 우리 안에 있는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생수가 곧, 충만한 성령의 권능이 강처럼 흘러나온다고 말합니다.
깊은 산 속에 있는 샘물의 근원으로부터 한번 샘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이 샘물은 냇물을 이루고 점점 더 흘러넘쳐서 큰 강을 이루면서 메마른 대지를 축축히 적셔주고 마침내 황무지와 같았던 대지가 아름다운 식물들과 꽃들이 피어나는 들판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생수의 근원으로부터 성령의 생수를 공급받으면 우리의 메마르고 허무하고 짜증스럽고 힘겹고 고달픈 생활이 생명력이 넘치는 활기있는 삶으로 피어납니다.
우리의 입에서 감사가 터져 나오고 찬송이 넘쳐 나오고 이세상에서 의롭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이 새로워 집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이 성령의 생수로 가득 넘치면 이 성령의 생수는 우리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물이 한번 강을 이루면서 흐르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의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안에 넘쳐흐르는 성령의 생수는 우리를 넘어서서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 넘쳐서 자연스럽게 그들도 이 생명수의 축복권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이 삭막하고 메마른 이 세속사회를 적셔주고 희망을 주고 새 생명이 꽃피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이 놀라운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사람의 안수를 받아야 이 축복이 임할까요?
아니면 산속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고 기도에 매달려야 이 축복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시면서 구하기만 하면 성령의 생수는 충만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 성령의 생수가 강같이 흘러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생수가 충만하게 여러분의 삶 속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생활속에 찾아오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은혜는 우리가 받은 성령세례의 놀라운 사역을 결코 능가할 수 없고, 그 완전한 새 창조의 사역에 배교하면 언제나 불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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