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강해(16)
마태복음5장43~48절
제목 : 성도의 교제
사도신경에서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 다음에 나오는 고백의 내용들은 모두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속사역을 성령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적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의 결과들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의 결과로서
거룩한 보편교회가 형성되고 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며,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서 성도들은 죄사함을 받고 죽은 육체가 다시 살며,
또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섯 가지 성령의 사역이 열거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바,
교회, 교제, 사유함, 신자의 부활, 신자의 영생 그것입니다.
1. 성도들의 생활은 공동체 안에서 영위되는 사회적 생활이요, 개인주의는 죄악의 근거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목록을 배열한 순서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서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평범한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평범한 상식에 따르면 신자 개인들에게 임하는 성령의 사역인 죄사함이나 부활이나 영생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신자 개인들의 모임인 교회가 언급되는 것이 바른 순서일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의 고백은 이런 상식을 뒤 엎고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나서는 바로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고백하고, 그 후에서야 비로소 죄사함, 부활, 그리고 영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도들의 공동생활에 나타나는 성령의 사역을 먼저 언급하고 후에 성도를 개인에게 찾아오는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이 같은 배열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공동체, 사회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하게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일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도들의 반열에 들어서고 난 후에 전개되는 신앙생활은 항상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도들이 혼자 들어앉아 무엇인가를 하는 공간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장면만이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구석구석 비취이고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의 빛이 온 천지에 가득해서 이 빛을 피해 숨을 그늘도 없습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생활은 하나님의 빛 앞에 완전히 열린 생활이요,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로 결코 피할 수 없는 공동생활이요, 공개된 생활입니다.
이와같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성에 비추어 볼 때 개인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는 대립되는 매우 그릇된 사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류의 악의 기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거기에는 이웃의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한 개인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 기원을 우리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야기는 현재 이 세상과는 단절된 이상의 세계인 에덴 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인 반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타락한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서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타락이야기라는 점에 의미가 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질투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채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아벨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묻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받고 가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 가인의 이 대답 안에 어떤 태도가 숨어 있습니까?
“내 아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우는 아우고 나는 나지요.
나는 내 일을 돌보면 되고 아우는 아우 일을 돌보면 되지요.
아우 일은 아우에게 물어 보십시요”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일 뿐,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의 안위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하나님의 질문은 이미 가인이 아우인 아벨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회관계, 연대관계 안에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가인이 이 연재관계를 무시하고 깨뜨렸을 때 결국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만을 알고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생활태도는 도대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와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주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팔당호수는 천만명이 넘는 서울 시민들의 식수원입니다.
그런데 팔당호수 주변에 아파트, 호와 콘도미니움, 공장들을 마구잡이로 지어 놓고 버젓이 페수를 강물에 흘러보냅니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잘살면 그만이지 천만명이 넘는 서울시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무나 크고 무서운 이기주의입니다.
2. 거룩한 보편교회에 대한 고백은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것이고, 성도의 교제에 대한 고백은 땅 위에 있는 지역교회를 향한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보편교회와 성도의 교제에 대한 고백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 또는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백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이제 오늘의 주제인 “성도의 교제”에 관한 고백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미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목해야 할 사실은 거룩한 보편교회를 고백할 때는 고백의 대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를 향하는 것인 반면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고백할 때는 이 세상 안에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지역교회에 강조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거룩한 보편교회는 지역교회를 배제한다거나 성도가 교통한다는 내용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대상은 서로 긴밀한 연속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교회를 고백할 때 이 교회가 지니고 있는 완전하고 깨끗한 모습이 지역교회에 주는 규범적 효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지역교회의 교제를 고백할 때에도 바람직한 지역교회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우주적인 보편교회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성도들이 공동체인 교회는 유기적 연합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뒤따르는 의문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곧, 교제하는 것”이 왜 고백의 대상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제를 하면 하고 말면 마는 것이지 교제하는 것을 왜 고백해야 하느냐? 이런 의문은 사실상 우리 말 사도신경 문구가 그 다지 정확하지 못하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사도신경은 사실 영문으로 된 고백문이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영어에는 성도들의 코뮤니온(Communion)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표현을 우리 말로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연합체 또는 연합되어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정확한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는 상태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연합되어 있다는 말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많은 원자들을 무질서하게 모아놓은 집합체 같은 모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또한 모자이크도 아닙니다.
모자이크에서는 모자이크 조각 하나하나가 다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마음대로 띁었다 붙였다 할 수 있고 다른 곳에 가져다가 붙일 수도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원자나 모자이크의 조각들은 독립된 개체들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연합체인 교회는 지체들 하나하나가 긴밀하게 상호관련을 갖고 있는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입니다.
한 지체가 이 생명체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독립해 버리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버립니다.
아무리 작은 지체라도 한 지체에 문제가 생기면 생명체 전체가 타격을 받습니다.
심지어 한 지체에 가한 작은 타격이 생명체 전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무술을 깊이 단련해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인체의 요소요소에 자리잡고 있는 급소를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 급소는 가볍게 타격을 가하기만 해도 몸 전체가 죽어 버리는데, 이런 급소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과 어울려 싸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기적인 생명체에서 작은 지체가 생명체로부토 떨어져 나가서 독립하여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고, 작은 한 지체가 없으면 전체 생명체에 중대한 지장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생명체는 작은 한 지체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바로 이런 생명체 안에 속해 있고, 성도들이 이 같은 생명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납득이 잘 가지 않기 때문에 고백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4. 고린도교회의 연합문제
결국 이 고백은 교회를 하나의 유기적인 몸으로 비유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12~17절에 있는 몸의 비유를 염두에 둔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연합체로서의 교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 본문은 성령의 은사를 다룰 때 이미 간략히 언급한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방향을 바꾸어서 고린도교회라는 지역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문제를 고찰하는 가운데 이와 같은 유기적 연합체 안에서 성도가 어떻게 교제를 나누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문제가 어떤 것인가는 바로 전장인 고린도전서 11장에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 세상 안에 있는 지역교회는 성도들의 겉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잔재 때문에 이 죄의 세력과 계속해서 전투를 해야 하는 전투적 교회라고 말씀드린 바 있는데, 고린도교회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이 당시 교회에서는 빈번하게 성찬식을 가졌는데, 성찬식은 오늘날처럼 단지 형식적으로 떡과 포도주만을 떼는 것이 아니라 애찬 곧,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이것은 성찬을 제정하실 때 저녁만찬을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방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모든 초대교회들과 마찬가지로 고린도교회도 신분상으로 보면 두 계층으로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한 계층은 자유인들이요, 다른 한 계층은 노에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예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애찬을 나눌 때 변변히 음식을 싸오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자유인 계층에 속한 성도들이 음식을 넉넉히 장만해 와서 노예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애찬시간은 자연스럽게 노예들을 구제하는 아름다운 자리가 되었습니다.
자유인들과 노예들이 서로를 형재와 자매로 대하면서 한자리에 어울려서 식사를 함께 하며 사랑을 나누는 이같은 장면은 극히 엄격한 당시의 신분사회구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마음이 타락하기 시작하니까 슬그머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인색해지고 사회에서 누리던 습관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인색해지기 시작했느냐 하면 자유인들이 가만히 보니까 자기들만 열심히 음식을 준비해 와서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나누어 주기가 귀찮기도하고 아까운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들과는 신분이 다른고 천한 계층인 노예신분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자꾸 꺼림찍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자유인에 속한 계층들이 애찬시간이 되기 전에 아예 자기들까지도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분위기가 인색하고 차갑고 계층간의 갈등이 재연되는 상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듣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책망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이 말은 함께 모여서 만찬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전11:21~22절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사도 바울이라는 위대한 사도가 개척한 교회입니다.
교회 역사상 어떤 교회가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사도의 지도를 받은 교회가 있겠습니가?
그런데 그런 교회가 잠깐 사이에 낯이 뜨거워질 만큼 인색해지고 치사해지고 계층간의 갈등으로 점철된 교회로 타락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일구기는 힘들고 어려워도 타락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교제에 있어서의 문제는 자유자는 자유자 끼리,
노예는 노예끼리 어울리고, 또 다른 차원에서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아볼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게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그리고 아예 그리스도만을 좋아하기로 한 사람들은 또 자기들끼리 어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 수많은 파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교회 전체가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서로 없어서는 안될 지체들을 향하여 욕하고 헐뜯는 추악한 모습을 연출한 것입니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은 인간 안에 자연적으로 있는 선천적인 속성으로서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다 끼리끼리 어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이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 안에는 끼리끼리 어울리는 수많은 동호인 모임들이 있고,
이 모임들은 복잡하게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민주주의 사회의 내부구조를 형성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서로 어울리는 사람들끼리 오울리는 동호인 모임의 차원을 넘어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마5:47~48절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끼리끼리 모이는 것만을 능사로 하게 되면 이방인과 다를 게 하나도 없고 성도다운 맛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도 교제할 수 있고, 심지어 원수된 자들과도 교제할 수 있어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함을 본받는 행동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교회 일로 교제를 할 때 서로 견해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생각이 불완전하고 모두 다 어느 정도는 죄악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오히려 견해의 차이가 있는 것이 교회의 건실한 발전에 유익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분파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운데 편당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전11:18~19절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다시 말하자면 서로 달리하는 견해들이 있어야 사태가 바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도들 사이에서 견해를 달리하게 될경우에 몇가지 점을 유념하면서 교제에 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견해를 달리 하더라도 다른 견해를 표현할 때 신사적인 태도와 어법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견해를 표명할 때 억지로라도 정중한 태도를 갖추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 자기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다수가 자기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지면 적당한 시점에서 흔쾌히 다수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끝까지 자기의 견해를 고집해서 자기 한사람 때문에 전체 분위기가 경직되는 지경에 까지 가서는 안됩니다.
셋째, 견해가 달라도 개인에 대한 감정으로 연결시키지 말고 토의가 끝났을 때는 견해가 달랐던 것은 잊어 버리고 성도로서 사랑을 유지하고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제가 끼리끼리 모이는 모임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은 교회 안에서의 참된 교제는 나이와 연령을 초월하여 간이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교회안의 바람직한 교제의 일부일 뿐이지 전부가 아닙니다.
연령이 차이가 나서 세대 차이가 있고 살아온 환경과 관심분야가 다 달라서 공통된 대화의 주제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경우에도 그런 상대방과 의도적으로라도 교제하고 대화하고 어울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와 연령층이 다르고 관심의 영력이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과 교제하고 대화를 하면 내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되고 나의 사고의 세계가 넓어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성인이 지성인들끼리만 우울리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 자가 되기 쉽고, 거치른 삶의 현실 속에 들어가서 부대끼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끼리만 어울리면 꿈이 없고 그저 돈과 처세만을 아는 현실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서로 대화를 해야 합니다. 주일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각 학년에 맞는 전문적인 교육을 한다고 너무 연령을 세분화시키는 것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연령차이가 큰 아이들이 서로 어울릴 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교육은 지식교육이 아니고 인격교육이고, 인격이란 같은 또래끼리만 어울려서는 결코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랫사람이나 윗사람과의 관계 안에 자꾸 서봐야 전인적인 인격교육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며, 특히 신앙생활은 전인적인 삶과 관계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전인적인 교제안에서 성숙해가기 마련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유기적인 하나의 영적인 생명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가 오늘날 이 사회와 세계를 갈등과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모든 인위적인 차별과 남녀노소, 빈부의 격차, 생활방식과 사고의 차이를 힘차게 뛰어넘어서 위로는 오직 주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며 옆으로는 성도들을 지체로서 용납하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가꾸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신앙고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사도신경강해(18) 부활과 영생 (0) | 2013.04.11 |
---|---|
[스크랩] 사도신경강해(17)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0) | 2013.04.11 |
[스크랩] 사도행전강해(15)거룩한 공회(교회)를 믿는다 (0) | 2013.04.11 |
[스크랩] 사도신경강해(14)-성령의 은사들 (0) | 2013.04.11 |
[스크랩] 사도신경 강해(13)-성령의 열매 (0) | 2013.04.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