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강해(7)
제목 : 장사지냄과 부활
말씀 : 고린도전서 15:12~20절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세 번째 말씀입니다.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 첫 번째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고백은 성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① 예수님은 그 어떤 피조물도 받을 수 없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②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예수라는 명칭은 성자 하나님이 우리와 다름없는 참된 인간이심을 뜻하며,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인간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셔야 했으며,
-동시에 온 인류가 범한 죄악에 대하여 내리시는 성부 하나님의 무한하고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진노와 심판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그 인격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셔야만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 두 번째 말씀은
성자 하나님의 예수로서의 지상생애에 관한 고백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탄생은 신비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나 한 여인 마리아의 몸에서 자람으로써,
탄생시부터 신성과 인성을 갖추셨습니다.
구원자를 뜻하는 예수라는 이름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성자 하나님은 대제사장과 본디오 빌라도에게 말할 수 없는 수욕을 당하신 후 사형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 달리셨을 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도 처절하게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과 죽음을 대신 받으심으로써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자 비로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죄인인 인간들이 담대하게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1. 지상생애에서 천상생애로
이제 한 인간이신 예수로서의 성자 하나님의 지상생애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되고 그리스도로서의 본격적인 천상에서의 신분과 사역이 시작되는 전환점에 이르렀습니다.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장사지냄이 예수님의 인간으로서의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의 천상의 사역의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생애는 단지 인간 예수만으로서의 생애였고, 부활 이후의 생애는 단지 그리스도만으로서의 사역기간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도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이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신 일은 기름부음 받은 선지자의 사역이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이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은 왕으로서의 예수님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후의 성자 하나님 안에는 인간 예수시절에 가지고 계셨던 인성적인 차원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과 영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인 사역과 신분의 특징에 있어서는,
지상생애 동안에는 예수의 모습이 강조되었고,
부활 이후에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신분과 사역이 강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장사지냄은 죽음의 확실함을 보증한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고백에다가 장사지냄을 받으셨다는 고백을 첨가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의 의문의 여지없는 확실한 죽음이었음을 단언합니다.
오늘날 죽은 사람의 몸은 법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생명이 끊어진 것이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무덤에 안장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의 죽은 몸을 무덤에 안장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그 사람이 죽었으며, 더 이상 소생의 가망이 없음을 공인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사도신경이 이 짧은 고백문안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고백만으로 끝내지 않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고백까지 첨가한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이 의문의 여지가 없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의심의 예를 들어 본다면,
예수님은 실제로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기절하여 혼수상태에 있다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인데, 예수의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이 살아나신 것으로 주장하고 다녔다는 소문이 당시에 유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예수님이 죽으실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선 의학적으로 보면 사람의 심장이 작동을 하고 있을 경우에는 몸에 상처를 내면 심장이 뛰는 힘 때문에 순수한 피만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심장이 작동을 멈추어서 생명이 끊어지면 몸에 상처를 낼 경우에 물과 피가 같이 흘러나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피가 압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19:34절은 한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렸을 때 물과 피가 나왔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의 몸이 이때 이미 의학적으로 죽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백보를 양보해서 설사 예수님의 시신에 생명이 가냘프게라도 남아 있었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3일간 돌 무덤안에 갇혀 있는 동안 그 생명이 자연적으로 소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창에 찔린 자국으로부터는 계속해서 물과 피가 흘러나올 것이요,
육체는 급속도로 기력이 다해가는데,
그 몸이 자연적으로 소생해서 육중한 돌문을 자기 힘으로 열고 나왔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당시 유대사회에는 죽은 자의 영혼은 3일간은 죽은 자 주위에서 맴돌다가 3일이 지나면 완전히 떠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미신도 떠돌았습니다.
따라서 시신이 무덤 속에 3일 동안 있었다는 것은 거듭하여 그 사람의 죽음이 의문의 여지없는 죽음임을 말해 줍니다.
사도신경이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한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남김없이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는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는 반드시 죽을 것을 요구합니다.
창세기2:17절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을 경우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또 창3:19절에서 “흙으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롬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부분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사도신경은 장사지낸 바 되었다는 고백을 첨가한 것입니다.
3.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가 죽음에서 끝났다면,
예수님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한 라비로만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이셨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무서운 죄의 형벌인 죽음을 당하시고도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죄가 없는 하나님이심을 증명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죄가 없고 의로우신 분이시며,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거룩한 의로움과 흠없는 깨끗함 앞에서
사망의 권세도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니신 완전한 의로움과 흠없음이
사망과 대결하여 결국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도저히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서 완전한 의로움과 흠없음을 갖추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탄생하시는 탄생에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기적으로 시작하여 기적으로 지상생애를 마무리하셨습니다.
4.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 부활에 대한 오해, 부활의 증인들로 변화된 제자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인간의 평범한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지상생애 기간동안 거듭거듭 부활을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여인들이나 제자들은 부활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기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은 몸이 무덤에 안장된 후,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이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간 이유는
예수님의 죽은 몸에 향유를 발라서 가능한 한 오랜 기간 썩지 않고 보존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들은 죽은 예수님의 몸이 썩어 부패되는 것을 안타까워할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랐으나, 예수님이 하신 가장 중요한 약속인 부활의 약속은 믿지 않았습니다.
무덤으로 향한 여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기대는 전혀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덤을 막고 있던 돌문이 열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여 그 자리에 계시지 않고,
그 자리에는 천사가 않아 있다가 여인들을 맞이했습니다.
천사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을 책망하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의 약속을 상기시켰습니다.
눅24:5~7에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천사를 만난 여인들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자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보여서 믿지 않았습니다(눅24:11)
허탄한 듯이 보였다는 말은 정신병자의 횡설수설 같았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여겨지는 악의에 찬 소문들도 많이 나돌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군인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갔다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유도했습니다(마28:10~15).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의 제자들의 상황은 로마군병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시신을 도둑질해갈만한 처지가 못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로마당국이 쫓아올 것을 두려워하여 뿔뿔이 도망가 버렸고,
실의에 잠긴 채 자기 생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겁쟁이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해 나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인들이 너무 슬픔에 잠겨 있던 나머지 정신을 잘 가누지 못하고 무덤을 혼동하여 예수님이 안장된 무덤이 아닌 다를 무덤안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15:47절은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될 때 현장에서 목격했다고 보도합니다.
그런데다가 이들이 무덤에 찾아간 때는 이미 해가 돋은 때였기 때문에 여인들이 무덤을 혼동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유대 정부나 로마정부가 예수님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다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시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부활했다니 무슨 소리냐?”라고 말해야 설득력이 있지, 있는 시신을 치울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특히 제자들이 부활소식을 듣고 여러차례에 걸쳐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이 전하는 부활소식을 듣고 무덤에 가서 확인을 하고 난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만난 분이 예수님인 줄을 모릅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생전의 예수님이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고 묻자,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은 그가 자기들의 구원자가 될 줄로 기대했었으며,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덤에 가보니 그가 안보여서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이렇게 책망합니다.
눅24:25~26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토록 의심이 많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오순절날 성령강림을 받고 나서부터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집니다.
의심과 소심함과 우둔함과 불신앙으로 가득차 있던 제자들이 담대하고 진실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부활을 전하는 증인들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모든 설교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부활을 의심했던 베드로가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한 사람을 사도단에 충원시키려고 했을 때 그 조건으로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을 내세웠습니다.(행1:22).
성령충만을 받고 난 이후에 행한 첫 설교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2:31~32절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행3:14~15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거짓되고 조작된 부활신화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존폐문제가 걸린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면,
기독교에서 2000년간 전해온 모든 설교와 전하는 내용이 모두 헛것이 되어 버리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으로 판명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들 전체가 모두 거짓말장요 사기꾼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욱이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고 따라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려야할 것 누리지 못하고 절제해야 하며,
고난을 받아야 하며, 주일이면 딴 곳으로 가지 않고 교회에 모여서 하루종일 시간을 보내야 합니까?
차라리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대로 다 누리고 맛볼 수 있는 대로 다 맛보고 지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5. 부활의 의미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까요?
고전15: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잠자는 자들이란 죽은 성도들을 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은 이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부활할 것을 예고해주고 확신시켜 주는 신호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였으니 성도들도 부활할 것입니다.
마치 사과나무에 맺힌 첫 열매가 곧 이어 열릴 수없이 많은 열매들의 등장을 예고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합니까?
고전15:45절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이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은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영이 되었다”는 구절입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의 영은 죽었던 영혼을 살리고, 죽었던 몸을 살리는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뜻입니다.
롬8:11절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의 영이
성부 하나님이 성도들의 몸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접함으로써 영혼과 몸을 살려내는 예수님이 영의 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이 능력에 힘입어 우리의 영혼이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이제 마지막 날 우리의 몸도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의 몸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부활 이전의 몸과는 차원이 다른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몸은 물질적으로 만져질 수도 있고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눈에 보이기도 하는 육체였으나,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고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고,
벽이 가로막혀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육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식사하는 방에서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기도 하셨고, 어는 틈엔가 들어오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과 함께 식사도 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부활할 때에도 바로 이런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가 받아야 할 죄악의 형벌인 사망의 형벌을 다 받으시고 마침내는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우리의 영혼과 몸을 살려 주는 예수님의 영이 거하심을 믿고 그 영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영의 능력이 마침내는 우리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게 한다는 소망을 가지고 생활할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주의 깊게 살피신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신학자 윌리엄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부활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십자가의 참 뜻을 몰랐을 것이다. 부활이 없었더라면, 십자가는 한 사람의 착한 어른이 비극적 죽음을 마친 것으로 끝나 버리고 만다. 그 소문은 몇 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의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소문은 쉬 사라져 버렸을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가 십자가를 알고 있는 것은 부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답게 하는 일은 부활이다."
로흐만 교수는, "믿음으로부터 부활이 정초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믿음이 정초 된다." 고 했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있은 후 몇 가지 괄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 생겨났습니다.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예수가 부활하기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후 부활의 신앙에 기초한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주님의 날이 생겨났습니다.
주중의 첫 번째 날인 일요일이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주일)로 바뀌었습니다.
부활을 목격하고 경험한 제자들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다시오심을 증거 하는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하나님의 그 미래의 시간들 가운데 감취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의 시간들에 대한 시작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새로운 시간의 시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의 사랑, 헌신, 섬김이 구원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그러한 삶은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자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는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다시 환생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가운데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자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그 부활을 통해서 진정한 새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새 것에 대한 약속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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