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5)
외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마16장13~20절
신학자 오스카 굴만(Oscar Cullmann)은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과 중심점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라고 했습니다.
우선 순위로 볼 때 분명히 첫 번째 명제인 하나님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출발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성령에 대한 신비의 빛이 드러나게 되고 고백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의 고백은 성부 하나님에 관한 짧은 고백문이 있은 다음
곧 바로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으로 넘어 갑니다.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은
사도신경 고백문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우주를 만드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친근한 아버지가 되실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사역이 없으면 성부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심판과 공의의 하나님으로 우리와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이 큰 죄악을 용서받고,
하나님의 양자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근거가 바로 성자 하나님의 사역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자 하나님이 사도신경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존재가 모두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차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사건은 신비중의 신비로서, 인간의 논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고 다만 믿음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고백문인 사도신경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것입니다.
1.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의 내용 개관
사도신경 안에 있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고백문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곧 예수님의 인격 또는 품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2)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라는 고백문은 예수님의 지상생애와 지상에서 하신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예수”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3)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고백문은 예수님의 천상에서의 삶과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2. 외아들과 주의 의미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은 “그 외아들”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그”라는 대명사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외아들은 외아들인데 누구의 외아들이냐? 바로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입니다.
이 고백의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과 같은 본문들입니다.
요1:14,18절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외”라는 말은 “하나”라는 숫자 개념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독특하고 특별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은 어떤 점에서 독특하고 특별할 까요?
성자 하나님은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첫째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가운데 삼대독자가 있으면 부모님은 이 독자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각별히 아끼고 애정을 가지고 돌보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말은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아들임을 뜻합니다.
어떤 다른 존재도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사랑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3:17절에서 성부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는 성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또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위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 성부 하나님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둘째로,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특별합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인간도, 또 천사나 그 누구라도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성자 하나님뿐입니다.
성자 하나님과 성부 하나님이 본질이 같다는 생각은 “아들”이라는 표현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시편2:7편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물론 여기서 낳는 다고 할 때는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성부께서 성자를 낳았다는 뜻은 아니고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나타나는 한 가지 특징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그 특징이 무엇일까요?
그 특징은 낳은 어머니와 태어난 아들은 본질이 같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사람이면 낳은 아들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식을 낳았는데 본질이 다른 예쁜 시계가 나왔다든지, 아니면
고양이 한 마리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어머니의 몸에서는 사람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처럼 성부께서 낳은 아들이 성자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본질에있어서 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성자도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0:30절에서 예수님은 “나(성자 예수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심각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어떤 성경본문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요14:28절에 보면 성자이신 예수님이 스스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부께 철저히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그렇다면 같은 하나님이라도 성부는 성자보다 크신 분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의문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성자 하나님의 본질이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은 아니고 다만 비슷하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래도 성자 하나님은 성부하나님보다는 열등한 분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을 유사본질파 또는 호모이우시오스파라고 부릅니다.
호모이/우이오스라는 표현은 라틴말인데,
호모이는 유사하다는 뜻이고,
우시오스는 본질이라는 뜻이니까 본질이 유사하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유사보질파가 교회를 지배할 때,
아타나시우스라는 유명한 감독이 나타나서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유사하다고 말하게 되면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하면서 호모이우시오스가 아니라 “이”를 빼고 호모/우시오스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호모는 동일하다는 뜻이고, 우시오스는 본질이라는 뜻이니까 이 두 단어를 합하면 본질이 같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아타나시우스를 추종하는 자들을 동일본질파 또는 호모우시오스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황제의 지원을 받던 자들이 유사본질파였고,
이들이 절대다수를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는 황제의 미움을 받아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는 쫓겨다니면서도 팜플렛을 통해서 계속 줄기차게 “호모우시오스”곧 “동일본질”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아타나시우스를 핍박한 황제가 죽은 다음379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때 숫적, 정치적, 합리적으로 절대적 불리한 가운데서도 아타나시우스의 확신에 찬 명쾌하고 설득력있는 주장에 감동되 회의 참석자들이 숫적으로 절대 강세였던 유사본질파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동일본질을 정통교리로 채택하는 기적이 일어나서,
카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다 같이 고백하는 교리로 정착이 되었습니다.
이후 1600년이 넘는 긴 기간동안 교회는 인간의 논리에 더 잘 들어맛는 유사본질론을 버리고 인간의 논리에 맞지 않는 동일본질론위에 서 왔는데,
이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대결하여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거둔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는 고전1:25절의 말씀이 입증된 것입니다.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주”라는 표현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 말로 “주”라고 번역된 헬라어 큐리오스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히브리어인 “여호와”(야훼) 하나님을 번역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면서 여호와라는 말을 썼는데,
이 용어에 상응하는 용어인 주라는 용어가 신약성경에 서는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이유는 성자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3. 예수의 의미
사도신경은 계속해서 성자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먼저 예수라는 이름의 뜻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성자 하나님에게 예수라는 명칭이 부여된 것은 마1:21절에서 기원합니다.
마1:20~23절은 잘 알려진 것 처럼 천사를 통하여 성자 하나님이 이땅위에 인간으로 탄생할 것을 알리는 수태고지(受胎告知)를 기록한 본문입니다.
여기서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부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땅위에 태어날 성자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동시에 그 뜻까지 알려 주셨는 바, 그 뜻은 “구원자”입니다.
이 이름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인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은 뜻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명령을 기억했다가 성자 하나님이 태어나신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실 때 천사의 지시에 따라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후에 예수라는 이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서,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시고, 성년이 되신 갈릴리 지방에서부터 공생애 3년간의 사역을 시작하셨다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신 한 인간을 뜻하는 명칭으로 불리워졌습니다.
4. 그리스도의 의미
다음으로 그리스도라는 명칭에 대하여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어떤 직분을 위임할 때 거행하는 예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언제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고 직분을 위임 받으셨는가?
예수님이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 세례를 받으실 때였습니다.
마3:16~17절.
예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위에 임하셨는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포해 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신분을 공인해 주셨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곧바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곧 사역을 위임받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로서 하신 일은 어떤 일들입니까?
그 실마리를 우리는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직분에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첫째는 선지자요, 둘째는 대제사장이요, 셋째는 왕입니다.
1) 기름부음을 받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고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설교와 많은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뜻과 지혜를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요8:28).
2) 다음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는 일을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기 몸을 완전하고 흠 없는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죄인인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후에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를 계속 연결시켜 주는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롬8:34절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신다는 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와 같이 성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
곧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아니 위험이나 칼로도 끊을 수 없고,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바울은 계속해서 노래합니다.
3) 마지막으로 구약시대에는 왕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성도들을 다스리시며 보호하시며 보존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우주의 왕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세 가지 직분에 대한 설명은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성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곧,
신성을 강조하는 명칭임을 보여 줍니다.
5. 예수가 곧 그리스도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바로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역사상 예수라는 한 인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믿지만,
그 예수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임을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공자나 석가모니나 마호멧트와 같은
비범하고 탁월한 인간으로 보는 양자론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믿으면서, 인간이신 예수를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곧,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이 예수라는 가면을 살짝 뒤집어쓰고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이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두 가지 입장은 379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한 후 다시는 교회회의에서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오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 예수도 믿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도 믿는데, 예수와 그리스도가 서로 별개의 성품으로서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는 입장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 안에는 인성과 신성이 있기는 있는데, 인성과 신성이 따로따로 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한 인간의 인격 안에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머리를 가진 괴물 비슷한 존재로 해석하는 경향이 등장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을 편 사람이 결교의 창시자가 된 네스토리우스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주후451년에 소집된 칼케돈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예수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은 예수님의 한 인격 안에서 신비롭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입장이 확립된 후 오늘까지 교회의 정통교리로 확립되었습니다.
6. 왜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하나님이셔야 하는가?
그러면 왜 성자 하나님은 인간(예수)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그리스도)이셔야 했는가?
첫째로, 인류를 대신하고 대표하여 죄의 댓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과 똑 같은 성정을 가진 인류의 한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는 인간이 범죄 했으므로 대신 죄의 형벌을 받을 때 인간이 그 형벌을 받을 것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류의 대표로서, 육체와 영혼의 모든 본질적 특성뿐만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대한 경험적 지식과 타락한 이후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허약함을 그대로 가진 인성을 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참된 인간이라야만 인간의 모든 경험과 시련과 유혹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인간이시지만 그는 죄가 없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 물로 드리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살아 있는 생명이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들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죽은 생명이기 때문에 대속 물로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인류의 죄악을 향하여 쏟아 부으시는 엄청난 무게의 진노를 견뎌낼 수 있기 위해서,
그리고 무한한 가치를 지닌 완전한 희생을 요구하시는 성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영혼이 신적인 무한함과 신적인 완전함을 지니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신성을 지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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