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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신경 강해(3)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아들 2013. 4. 11. 06:40

사도신경 강해(3)

제목 : 전능하신 하나님

본문 : 창세기17:1절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이라는 본질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분명하고 뚜렷하게 독립된 세 인격체로 존재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신경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서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삼위 하나님 한 분 한 분을 차례차례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 첫 고백은 성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 첫 부분이“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이 부분에는 3가지 수식어가 나옵니다.

① 전능하사

② 천지를 만드신

③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오늘은 이 3가지 가운데 첫번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 아버지 하나님이냐,

어머니 하나님도 되지 않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나, 남성 우월주의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조창인의 장편소설 "가시고기"가 있습니다.

작가는 그 소설에서 한 아버지의 순수하고 애틋한 '부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대신할 수 있겠는데,

그렇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순수한 아버지의 부성애를 그려 놓았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먹지도 잠자지도 않고 새끼를 돌보는 가시고기"로 상징화시키고 있습니다.

백혈병으로 고통당하는 아들과 아버지를 맺어주는 본질적인 힘이 무엇입니가?

그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명예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요즈음처럼 상하고, 왜곡된 부성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아버지라는 호칭은 잘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아버지 상 때문에,

아버지라는 호칭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 큰 장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화] 아버지학교

그러나 반대로 왜곡된 아버지 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의 경우,

나님 안에서 참 아버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의 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신 자리가 어디인가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여기에서 드러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Fatherhood)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친밀감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요하킴 예레미아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Abba)라고 부르신 호칭의 기원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연구결과 그러한 호칭은 옛날 아람 사람의 가정에서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했던 호칭임을 찾아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바"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그 어떤 서먹서먹한 거리감,

이질감도 없습니다. 아주 가까운 관계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가깝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에 대해 조금도 거리감을 갖지 않습니다.

그 분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면서 우리에게는 아주 친밀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아버지 하나님은 인간에게 요구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자기자신입니다.

대부분 이방신들은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면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예화] 이단들의 선교

하나님은 그러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때때로 그분으로 인해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더 좋은 것을 담기 위한 포기이지 강요는 아닙니다.

셋째,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용서는 우리를 옛것에서 해방시켜 주고,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고 우리의 심령을 소생시켜 주는 용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용서는 용서받은 우리 자신에게만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흘러 나가게 하는 용서입니다.

-이웃에 대해 닫혀 진 마음을 열게 하는 용서,

-우리 자신을 받아들이게 하는 용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는 용서입니다.

그분의 용서는 새 삶을 만들어 가는 용서입니다.

넷째,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우리를 찾고 계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에게 도망하여 숨어버린 인간을 찾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다섯째, 십자가에서 우주적이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아버지는 세상 전체를 사랑하시면서 세상에 있는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얼굴과 눈을 마주 대해 바라보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상한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나니"(마 10:29∼30)

이 말씀은 아주 세심한 아버지의 사랑,

돌보시는 아버지의 관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기원,

원천, 목적이 그 분으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육신의 아버지가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오늘 본문 17장 1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히브리어는 “엘 샤다이”라고 말을 합니다.

엘은 하나님의 명칭 가운데서 엘로힘의 단수형이고,

샤다이‘충분한’ ‘자족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합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또는

“하나님은 산 위에 우뚝 서신 위엄이 높으신 분이시다”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것은 하나님의 전 성격을 나타내는데,

모든 것을 총괄하시는,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 중에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일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알을 낳은 일, 그 알에서 어린참새 한 마리가 깨어나는 일, 그리고 그것이 아침에 짹짹이며 먹이를 주워 먹으며,

나뭇가지에 앉아 하루를 살며 겪는 작고 사소한 일부터,

한 인간의 생로병사와 한 나라의 흥망성쇠,

그리고 저 넓은 우주의 거대한 움직임까지도,

철저하게 주관하시는 분이 역사의 주관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크게는 우주로부터 작게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역대상 29장11~13절 “[1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12]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섭리를 따라 온전하게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가 계획하신 일에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광야는 더위와 추위가 교차하며,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입니다.

장정만 60만이니까 전체는 2백만 명이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축들도 있습니다.

이 많은 인원과 가축들이 불모지인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가능케 하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지키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모든 자와 함께 하시므로,

믿는 자에게도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가 하실려고 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막과 뜨거운 태양, 차가운 밤, 기갈이 있습니다.

험한 세월입니다. 환난과 질고와 시험과 실패와 슬픔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와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강요했을 때, 빌라도는 최종적으로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우고

"보라 이 사람"(Ecce homo)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이 아버지를 보라." "너희들의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입니다.

그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기 자녀들의 죄를 걸머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분을 보라." 그 전능하신 분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요 19:4)

사도 요한은 이 아버지는 사랑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사랑에 묶여 있는 전능하신 아버지를 보라."고 사도는 증언합니다.

그 아버지는 사랑의 한계 가운데서 전능한 일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파괴와 분열이 아닌

지속적인 창조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 분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범죄 한 인류에게 파멸이 아닌 다시 사는 영생의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닮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닮는 길이 서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요1서4:7)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10)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14)"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여주신 아버지의 전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갈보리 언덕 위에서 드러낸 아버지의 전능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는 자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전능이 무엇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전능하심에 자신을 위탁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그 근거도 역시 아버지의 전능에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워진 삶의 짐을 지고 가면서 아버지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전능은 레나 마리아를 인간의 최악의 불행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레나 마리아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을 때 “완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아브람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75세에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사라가 단산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2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그의 아내가89세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의학으로 볼 때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왜 믿지 못하느냐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내가 한다면 하는 것이지,

네 아내가 단산한 것이 무슨상관이 있느냐,

흔들리지 말고 믿으라고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때로는 어지럽고 때로는 악하고 때로는 모순 투성이고 어려운 일이 부딪쳐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그가 계획하고 원하시는 것은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불만스러운 환경속에서도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에게 낙심은 금물입니다.

항상 내 무능과 내 부족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온전히 돕지 못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나를 도우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어려울수록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야곱이 회개로써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회와 회개로 감동시켜 드려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과 넘치는 긍휼이,

저와 여러분께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헤브론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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