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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도신경 강해(6)지상의 생애 : 탄생, 수난, 죽음

하나님아들 2013. 4. 11. 06:41

사도신경 강해(6)

지상의 생애 : 탄생, 수난, 죽음

본문 : 이사야 53:1~12절

지난 강의에서 우리는 성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은 하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외아들로서,

성부와 본질이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인간을 뜻하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뜻하는 명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두 이름 중에서 예수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사도신경에서 고백되고 있는 내용을 묵상하겠습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수난을 받으셨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다(십자가에 목박혀 죽으시고)로 고백함으로써,

예수님의 지상생애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역사 안에 실제로 사셨던 한 인간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지상생애탄생, 수난, 죽음이라는 고백의 순서로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탄생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하여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거치지 않고,

성령의 신비롭고 기적적인 사역에 의하여 잉태되었고,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관계 없이 처녀의 몸에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이성으로 납득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물론 근래에는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성적인 결합을 거치지 않고도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예컨대 단순히 세포조직에 속한 유전자만 잘 배양해도,

똑 같은 형태의 생물체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학의 획기적인 발전도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마리아의 세포안에 있는 유전자를 뽑아내서 배양한 결과로서 탄생한 분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나님의 신비로운 작용에 의하여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구약성경 이사야 7:14절에 예언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본문에 보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는데,

처녀라는 단어는 그냥 평범한 여인이라는 뜻도 있고, 처녀라는 뜻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단어를 그냥 여인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징조라고 말하고 있는데,

징조라는 것은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사건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그저 평범한 여인이 아들을 낳는 것이 무슨 징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처녀가 잉태하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야 징조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이 본문의 문맥 자체가 처녀잉태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정상적인 결혼관계를 거치지 않고,

이처럼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나셔야만 했는가?

1)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

먼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었으므로,

잉태된 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탄생의 기원이 성령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 안에서 마리아로부터 자양분을 취하면서, 또 마리아의 정신적인 상태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나셨습니다.

이 같은 태중의 성장과정은

예수님이 우리 인간들과 같은 인성을 가지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은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임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이라

이 본문에서 “대제사장”예수님을 뜻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음을 보여 줍니다.

“죄는 없으시니라··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는 죄 없는 인간임을 보여 주며,

하늘 보다 높이 되신 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셔야만 했는가?

먼저 예수님이 인간이셔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에스겔18:4, 20절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4]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20]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버지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버지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인의 공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떤 사람이 의를 행했을 경우에는

그 의에 대한 보상이 그 의를 행한 사람에게 돌아가듯이,

어떤 사람이 범죄하여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게 될 경우에

형벌도 행한 사람이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와 같은 공의의 원리에 근거하여 추론해낼 수 있는 진리는,

인간이 범죄를 했을 경우에 그 범죄에 대한 형벌은 인간이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실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라야 합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피조물, 예컨대, 동물이나 천사가 대신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악을 행한 자와 형벌을 받는 자가 동등할 것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추상과 같은 공의를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인간들의 대표로서 형벌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과 시련과 유혹이 어떤 것인가를 아시는

온전한 인간이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죄를 범한 타인의 형벌을 대신 받는다고 할 때,

과연 죄인인 인간이 죄악을 향하여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나훔 선지자가 이렇게 한탄합니다.

*나훔1: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시편130: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내리시는 추상과 같고 조금도 치우치지 않는 진노와 형벌을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습니다.

온 인류가 범한 해아릴 수 조차 없이 많고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죄악들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이 내리시는 어마어마한 무게의 진노와 심판과 형벌을 누가 감히 감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이 엄청난 무게의 진노와 형벌을 감당해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성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물로 자신을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인성에 있어서 참으로 흠이 없고 깨끗한 성품을 지니셔야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와 다름없는 인성을 지닌 인간이시면서도

그 인성은 흠이 없고 완전하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실 수 있는 구속주는

첫째,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시면서,

둘째, 그 인성은 무죄한 인성이셔야만 했으며,

셋째, 하나님이셔야만 했는데,

예수님이 바로 이 조건들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마리아에 대하여 언급하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로마 카토릭교회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다는 사실을 너무나 높인 나머지 마리아를 한없이 높여서 마리아는 죄없이 잉태되었으며,

우리의 중보자이며, 죽지 않고 하늘로 올리움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미신적이며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마리아는 아기 예수의 수태고지를 받을 때도,

예수님을 “내 구주”라고 겸손하게 고백했고,

자신을 비천한 계집종이라고 낮추었으며,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철저하게 자신이 평범한 한 여인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했습니다.

또한 마리아는 평생을 동정녀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곧 요셉과 평범한 남녀관계를 가져서 자녀들을 계속해서 낳음으로써 평범한 목수의 아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승천 하신 후에는

다른 제자들 틈에 끼어서 같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성경은 마리아에 대해서 어떤 특별한 지위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2.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고백한 후에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수난과 죽음은 두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십니다.

그 다음에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단순히 인간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죄를 미워하시는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순교자들의 죽음과 다릅니다.

순교자들은 죽는 순간 삼위 하나님의 따뜻한 영접과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토록 괴로워하셨고, 될 수 있으면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수난은 가룟 유다가 예루살렘 성전 경찰들을 대동하고 감람산으로 찾아와서 배반의 입맞춤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자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소동소리에 잠이 깨어 베 홑이불만 걸치고 집밖으로 나왓던 마가는 체포될 듯 하자 몸에 걸치고 있던 베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도망쳤습니다.

예수님을 멀찌기 따르던 베드로는 주님의 예언대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된 후 유대국의 사법기관인 산헤드닌 공의회 앞에서 심리를 받기 위해 죄수의 몸으로 서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의장인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고 묻습니다.

이 질문을 받고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이 본문에서 “권능자”는 성부 하나님을 뜻하고,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통치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왕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신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태도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시도가

성공할 수 없을 것임을 예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시고

또 다시 오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답변은 대제사장이 기다렸던 답변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성부 하나님만이 하나님으로 인정되었고,

인간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때는 신성모독죄를 범했다고 판단하여

사형판결을 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 자신의 입으로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산헤드린 공의회의 계획대로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대제사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옷을 찢어서

하나님을 사칭한 신성모독죄에 대한 분노를 표시한 후,

공의회원들과 협의하여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런데 당시 공의회에는 사형 선고권은 있었지만,

사형집행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형집행권을 가진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야만 했습니다.

공의회는 예수님에게 침을 벹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쳤습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 나온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27:11)

여기서 죄목이 산헤드린 공의회 재판 때 교묘하게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재판 때에는 예수님이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죄목이라야만 공의회에서는 사형을 선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죄목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던 총독부 재판에서는 사형선고의 이유가 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공의회는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할 때는

예수님이 왕을 사칭함으로써 내란죄를 주도한 것으로 살짝 바꾸어서 고발했습니다.

내란죄를 주도했다고 해야 비로소 사형판결을 받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함 답변을 주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마27:11). 질문을 했는데,

네 말이 옳다고 하니 빌라도는 어리둥절하여 판결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빌라도는 명절 때면 한 사람을 석방시켜 주는 특사제도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시도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석방시키러고 한 의도는 예수님을 석방시킴으로써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했던 산헤드린 공의회를

정치적으로 견제하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련한 산해드린 공의회 회원들은 빌라도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꿰뚫어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공의회원들은 바라바를 석방시켜달라는 요청을 하도록 무리를 충동질했습니다.

바라바는 유대백성들 사이에서 추종자가 많았던 정치범으로서 민족해방운동을 하다가 잡혀들어간 인물입니다.

그래도 빌라도가 머뭇거리자 공의회원들은 무리들로 하여금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도록 사주함으로써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경우에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빌라도는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가장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어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해서 빌라도라는 이름은 2000년 가까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할 때마다 악명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채찍을 맞습니다.

이 채찍은 납과 날카로운 뼈조각이 달려 있어서 한번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온 몸은 피범벅이 되고 마는 무서운 채찍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신 예수님은 행장으로 끌려가시기 전에 병사들의 놀이개감으로 이용당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일종의 소극을 연출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너덜너덜한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나무로 엉성하게 면류관을 엮어서 왕의 구색을 갖춘 다음 예수님 앞에서 절하는 시늉을 하면서 갈대로 머리를 치며 침을 뱉었습니다.

희롱을 다 마친 후에 다시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으로 갈아입힌 후,

해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골고다 언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갔습니다.

인간들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으신 예수님 곧, 정적인 바리세인들과 해롯당원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으신 예수님은 마침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 가셨습니다.

2) 예수님의 죽음

군병들은 골고다 언덕까지 끌고 온 예수님에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님은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당시 몰약을 탄 포도주는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해서 십자가 형을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 포도주 받는 것을 거부하셨을 까요?

예수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하여 내리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형벌에 따르는 고통을 남김없이 받으시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추상과 같은 공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드리기 위하여 마취제를 받기를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가 18센티미터가 되는 대못, 대못이라고 하기보다는 돌을 쪼는 정에 해당하는 못에 두 손과 두 발이 박히신 채 높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예수님이 받으시는 진노의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요한과 야고보는 어디로 내뺐는지 얼굴도 안 보이고 예수님이 못박히신 십자가 양옆에는 엉뚱한 정치범 두 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아침 아홉시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광경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희롱하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소리질렀습니다.

낮 열두시가 되자 갑자기 온 하늘이 캄캄해지면서 어두움이 온 땅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이 어두움은 성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성자 예수님을 버리고 진노를 그 위에 쏟아 부으시는 광경을 우주 만물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리운 징조였습니다.

이 어두움은 세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 세시간 동안에 인류역사상 가장 무섭고 처절하고 비극적인 시간과 사건이 진행되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무서운 균열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진노를 쏟아 붓고 사랑의 관계가 끊어져 버리고 이로 인하여 성부 하나님의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성자 하나님의 육체와 영혼이 저주를 받아 울부짖는 비참함이 나타난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이 성부와 성자 사이를 이렇게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두움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이 어두움이 끝나갈 무렵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이 이처럼 모든 인간들로부터 버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시고, 죽음의 형벌을 받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져서 인간들이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인류구속사역이 완성된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모든 연약함과 고뇌와 즐거움과 기쁨을 아시는 예수님의 흠없고 죄없는 자신의 몸을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드리고 아버지 하나님이 쏟아 부으시는 진노의 잔을 남김없이 마시고 죽음의 형벌을 당하시자 몇천년 이상을 닫혀 있던 성소의 휘장이 찢어 지면서 모든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성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영생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사53:11,12절)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

출처 : 헤브론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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