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980년에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던 백인이 콜라를 마신 뒤, 빈 콜라병을 비행기 밖으로 던졌습니다. 그 콜라병이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떨어졌습니다. 그곳에서 살고있던 부시맨들은 난생 처음으로 콜라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콜라병을 가지고 반죽도 하고 과일을 찧어보기도 하고 콜라병을 이용해 스탬프를 찍으며 스카프 디자인도 했습니다. 그래서 부시맨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의 내려준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이 시끄러워졌습니다. 하늘이 내려 준 콜라병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다투고 끝내는 원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콜라병이 없을 때에는 평화로웠던 마을이 콜라병 때문에 그것도 빈 콜라병으로 인해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던 추장은 땅끝을 찾아가 콜라병을 버렸습니다. 그리고나서야 마을은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작 빈 콜라병 하나 때문에 온 부족이 원수지간이 된 이유는, 그들에게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빈 콜라병을 하늘이 준 선물로 여기면서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그저 “나” 혼자만 사용하겠다는 이기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라는 공동체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우리”입니다. 교회는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들의 교회입니다. 가정도 “우리”입니다. 나라도 “우리”입니다. “우리”가 있기에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님을 잊지마십시오.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참된 우리가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교회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 사랑이 있어야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가정도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고, 교회도 나라도 “사랑”이 있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무엇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좋아하는 감정, 설레이는 마음, 한번 보고 싶고 두번 보고 싶다면 그것이 사랑이겠습니까? 물론 사랑하면 좋아하게 되고 설레게 되고 자꾸 보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우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 안에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든 원치않든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서로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용서가 없이 과연 “우리”라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용서가 없다면 참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용서입니다. Love is forgiveness.사랑한다면 마땅히 용서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는 메세지가 바로 용서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 없이 우리는 구원도 영생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용서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도 따지고 보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저변에 물론 하나님의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 용서였습니다. 사랑한다면 용서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악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용서해주신 우리의 죄는 본질적인 죄입니다. 흔히 원죄라고 하는, 근본적인 죄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죄를 영원히 그리고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더 이상의 용서가 필요치 않은 완전한 용서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용서로 우리는 더 이상 근본적인 죄악을 고백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기도에 담겨 있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는 기도는 본질적인 죄악에 대한 회개가 아닙니다. 이 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서도 날마다 짓게 되는 일상의 죄들입니다. 흔히 자범죄라고도 하는 이 죄는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의 이기심과 욕망 때문에 날마다 짓게 되는 죄들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타락해 있고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방치하거나 죄를 짓고서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짓게 만드는 우리의 옛 성품과 옛 습관들을 날마다 버리도록 힘 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누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날마다 나누며, 날마다 더 큰 영혼의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날마다 짓는 죄들을 용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는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에 전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우리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서로의 죄를 용서해 준 것 같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는 것이 대전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전에, 우리가 우리를 서로 용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님의기도가 끝나자마자 마태복음 6:14-15을 통해 이같이 부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만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할 수 있다는 조건부 용서가 됩니다. 과연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결과론적으로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용서에 조건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요구하는 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에게 조건을 내거셨습니까? 아니예요. 무조건 달리시고 무조건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무슨 조건을 달거나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경험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용서입니다.
만일 내 안에 아직도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남아 있다면, 그 역시 죄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사해달라고 용서를 구하면서도, 내 안에 있는 타인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버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온전히 용서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죄가 있는데, 여전히 미움과 분노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참다운 용서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 속으로는 누군가를 지독히도 미워하고 틈만 나면 입을 열어 헐뜯으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면,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주는참 평화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라는 거액의 빚을 진 한 종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이 종에게 몸과 아내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팔아 당장 갚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한 달란트는6천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는 자그마치 20년치 품삯에 해당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한 달란트도 아니고 1만 달란트의 빚을 진 것입니다. 즉 6천만 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 돈은 장장 20만년 동안 죽어라고 일을 해서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아야 겨우 갚을 수 있는 어마 어마한 돈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평생을 수십 번 살아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빚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몸을 팔고 아내와 자식을 팔고, 모든 소유를 판다해도 그 빚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종이 주인 앞에 엎드려 빌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서 주인은 그 어마어마한 빚을 아무 조건도 없이 모두 탕감해주었습니다. 결국 일만달란트라는 천문학적인 희생을 주인이 고스란히 떠안은 것입니다. 그 한 종을 용서해주기 위해 주인은 크나큰 희생을 한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수십 수백번을 살아도 갚을 수가 없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생을 고스란히 감당하시며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십자가에 흘리신 하나님의 사랑을 늘 기억하십시오. 그래야 우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 자기에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닥달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 막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온 직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고작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며 위협을 했던 것입니다.
동료는 엎드려 그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나에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그러나 그 종은 동료의 간청을 무시하고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의 동료가 빚을 진 금액은 백 데나리온입니다. 고작 3개월치 품삯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자신이 주인에게 탕감받은 빚은 6천만 데나리온, 무려 20만년의 품삯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었어야 했습니다. 아니, 탕감해주어야 마땅합니다. 자신이 탕감 받은 액수에 비하면 6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동료가 빚을 갚지 않는다며 옥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악한 행위였습니다. 은혜를 악으로 갚은 것입니다. 이 종이 과연, 주인으로부터 참다운 용서를 받은 자이겠습니까? 이 과정을 옆에서 본 사람들이 주인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이같이 말했습니다.
마태복음 18:32-34의 증언입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성경에서 빚은 죄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말씀은 서로가 서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육천만 데나리온의 죄를 탕감받은 자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동료가 내게 아무리 잘못해봐야 백 데나리온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탕감받은 죄에 비하면 세발의 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리의 동료를 용서치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8:35 말씀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만큼, 우리도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동시에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조건없이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조건없이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에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집 가운데 ‘세속의 신전’(The Capitol of the World)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스페인을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느날 아들의 잘못한 행동에 대해 아버지가 심하게 책망을 하자 아들이 그만 가출을 해버렸습니다. 한달 두달이 지나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1년 동안 아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을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야,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파코라는 이름은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약속한 날 몬타나 호텔 앞으로 나갔을 때, 파코 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 800명이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용서 받고 싶은 아들 가운데 파코라는 아들만 800명이나 되었던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을 통해 참된 용서가 없는 세상의 허무함과 용서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용서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음식점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 보면, 식당 간판에 ‘원조’라고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조라는 간판이 한 군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 저기에 붙어 있습니다. 어느 간판에는 ‘진짜 원조’라고 붙어 있습니다. 자기네 식당이 진짜 원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도 왜 원조를 찾아다닙니까? 원조에만 진짜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진짜를 찾아다닙니다. 식당도 진짜를 찾듯이 교회도 진짜를 찾기 위해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합니다. 그러다 교회에서 진짜를 찾지 못하면 카톨릭으로도 갔다가 불교로 옮기기도 합니다.
지난 해 7월 미국 워싱턴 DC 광장에서 티벳 불교의 고승인 달라이라마를 초청한 법회가 열렸습니다. 35도의 땡볕이 내리쬐는 그곳에 수많은 미국의 지성인들이 달라이라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였들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인도에 망명 중인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해마다 인도를 찾았던 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진짜가 있을까? 달라이라마에게는 뭔가 진짜가 있을 것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교회가 사랑의 원조입니다. 교회가 용서의 원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참다운 용서를 누리지 못하고, 우리가 우리의 형제와 이웃들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우리에게서 진짜 사랑 진짜 용서를 찾지 못하고 또 방황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진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원조, 용서의 원조가 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진짜 교회를 찾아다니는 분들에게 진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몇년째 그 미움과 분노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 지금 저는 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내가 하나님의 용서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세계 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독일군에게 쫓기던 유대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네덜란드의 처녀 코리텐 붐과 그녀의 온 가족은 나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고문으로 코리텐 붐의 가족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녀만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코리텐 붐 여사는 복음전도자가 되어 세계를 돌아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녀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는 곳마다에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에서 특별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녀의 명성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몰려들었습니다. 저녁 집회를 은혜롭게 마친 코리텐 붐 여사는 교회 정문 앞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일일히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자기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노신사가 있었습니다. 그 노신사를 바라보던 코리텐 붐 여사는 너무 놀라 얼굴이 창백해지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노신사가 바로 자기 가족을 고문해서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꽃다운 처녀시절 옷을 벗기고 때리고 고문하며 온갖 고통과 수모를 안겨주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얘야! 나는 그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단다.’ 나는 그 사람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렸단다
놀라운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다시금 깨닫게 된 그녀는 노신사에게 용서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훗날 코리텐 붐 여사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은혜의 순간은 바로 그때, 그 노신사의 죄를 용서해줄 때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번도 용서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용서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들이요 또한 지금도 용서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넣고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여러번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서했습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치는 유대인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고, 바울은 자기에게 등을 돌린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며 모두 용서했습니다. 그들은 진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때, 그것이야 말로 용서받은 자의 삶이요, 진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답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정지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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