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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서적 창조론-이웅상(명지대 생물학과 교수, 교목)

하나님아들 2013. 2. 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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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창조론

이웅상(명지대 생물학과 교수, 교목)

쪽지 열린누리 자료

 

 

여러분은 생명의 기원에 대하여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도 각 사람에게 있어 이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질문은 그 어느 것보다도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원에 대한 어떤 한 사람의 입장이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기초가 되고 또한 그의 인생 전반에 있어서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기원에 대한 견해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요?

창조론과 진화론의 생명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한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진화모델은 원소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결합하여 단세포 동물이 되고 차츰 이 세포가 진화하여 현재와 같은 다양한 생물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창조모델은 창조주가 있어 지혜와 설계를 가지고 처음부터 다양한 생물을 초자연적으로 종류대로 창조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진화모델은 무신론이요 인본주의이며, 창조모델은 유신론이요 초자연적인 창조주를 믿는 신본주의입니다.

일반적으로 진화론에서는 지금까지 생물은 수소원자에서 시작하여 수십억 년의 오랜 시간을 지나는 동안 아메바를 거쳐 원생동물, 무척추동물, 파충류, 포유동물, 사람의 순서로 진화하여 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도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또 앞으로 어떠한 모양으로 바뀔런지 모릅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수천만년 후의 진화된 생물은 인간을 아주 우수꽝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를 원숭이 보듯 할 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진화모델은 모든 생물이 공통 조상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반면에, 창조모델에서는 각 종의 기원은 독립적으로 서로 무관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합당하고도 간결하게 창조의 모든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모세의 손을 빌어 기록한 글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타나며 “종류대로”라는 말이 10번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물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진화론을 부정한 성서의 창조이야기

첫째날에는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빛과 어두움이 있게 하셨으며, 둘째날에는 하늘과 물을 지으시고, 셋째날에는 땅과 그 위에 식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다음 넷째날에는 첫째날 창조한 우주공간에 해, 달, 별들을 채우심으로 하늘을 주관하게 하셨고, 다섯째날에는 새와 물고기를 창조하시므로 둘째날에 창조하신 하늘과 바다를 채우셨으며, 여섯째날에는 셋째날 만든 땅과 식물이 있는 곳에 육지동물들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레째날은 쉬시므로 창조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6일 창조 주간 중 첫 사흘 동안은 기본재료들을 존재하게 하셨고 다음 사흘 동안은 그 재료를 바탕으로 땅 위를 채우시는 창조사역을 하시므로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하신 후 칠일째 쉬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마지막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셔서 다른 동물들과 인간을 구분하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화된 고등동물이 아니며 영이신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대로 말은 말대로 창조되었으며 오랫동안 종내에서의 다양한 변이만 있었을 뿐입니다. 즉 개가 말로 변화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각 종을 구분하는데 유전적 한계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때로 다른 종인 말과 당나귀처럼 서로 교배시켜 노새와 같은 종을 생산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러한 경우 생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종의 근본적 변천을 주장하는 진화론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종류의 기본생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종류 내에서 환경에 따라 적응하여 변천할 수 있는 기본 형식을 정하셨다고 보겠습니다.

진화론의 허구와 오류

사실 생명의 발생에 대한 자연발생론과 생물발생론의 논쟁은 인류역사이래 계속되어온 것이나 1892년 불란서의 화학자이자 의학자인 파스퇴르의 실험으로 자연발생론이 폐기되어 모든 생물은 그 생물의 모체에서부터 유래한다고 결론짓게 되었습니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의 번식에 있어서 온도, 습도, 공기 및 영양이 적당하더라도 밖으로부터 미생물이 들어가지 않는 한 미생물은 생기지 않음을 S목 플라스크를 사용하여 실험적으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면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유래한다고 하면 최초의 생명은 어디에서부터 왔겠습니까? 이것은 과학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도 과학교사들을 대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여론조사한 결과 과학교사의 88%가 창조론과 진화론을 교과서에 동시에 수록하여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선택권을 주어야 한다고 찬성하였습니다.

무기물에서 생명의 최소단위인 세포가 이루어지는 단계를 화학진화라 합니다. 질소와 탄소, 수소 등 간단한 유기물들이 저절로 모여 더 복잡한 형태의 조직된 유기 복합물인 간단한 코아세르베이트가 되고 그 다음으로 점점 복잡한 자기번식과 복제를 할 수 있는 최소단위인 세포가 된다는 가정입니다. 즉 질서도가 점점 저절로 성장하여 간다는 것이 화학진화의 가설인데 이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 정면으로 상반되는 가설인 것입니다.

사실 생물진화는 화학진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화학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생물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화학진화의 가설을 ‘생명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내세웠던 구소련의 유명한 생화학자 오파린도 진화론과 열역학 제 2법칙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진화론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의 변천과정은 복잡하고 조직된 기관으로 발달되는 과정이다. 열역학 제 2법칙으로 볼 때 화학진화의 반응이 고분자로 합성되기 보다는, 반대로 분해의 가능성이 더 크다.’ 이렇게 솔직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1809년 프랑스의 라마르크는 화학진화로 생긴 최초의 생물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동물의 기관 중 많이 쓰이는 것은 점점 더 발달하고 반대로 쓰이지않는 것은 퇴화한다는 용불용설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테니스를 즐겨 한쪽 팔이 길어진 부모의 후천적인 획득형질이 자식에게 유전이 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오늘날 누가 있습니까? 후천적인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과학의 법칙입니다.

‘생명의 기원이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줄 수 있는 과학적 자료는 화석입니다. 왜냐하면 화석은 생물이 지구상에 나타난 이후의 자취를 직접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화석으로 나타난 생물의 자취나 유해를 조사 연구해보면 생명의 기원에 대한 학설 중 어느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한지를 판정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조류가 파충류로부터 진화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럴 경우 파충류의 앞발이 날개가 되며 비늘이 깃털로 되는 중간 형태의 화석이 발견되어져야 하는데, 시조새가 그 중간화석이라고 합니다. 시조새가 중간 형태로 간주되어온 배경에는 시조새의 깃털과 날개 끝에 있는 발톱과 시조새의 치아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조새의 깃털은 현재의 나는 새의 깃털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어 완전한 새이고, 날개 발톱은 호애친, 투래코, 타조 등의 날개 끝에 발톱을 지닌 현존하는 새들에게 볼 수 있듯이 파충류에서 조류로의 전이형태라는 증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또한 치아의 유무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파충류는 이빨을 지녔으나 거북은 이빨이 없듯이 진화의 단계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에서 관심의 초점은 사람의 조상 즉 인류의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과연 진화론의 주장대로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는가, 아니면 성경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어 근본적으로 동물과 완전히 구별된 존재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골격형태학적 차이점은 사람만이 직립보행을 한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직립보행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화석 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2백여 만 종에 이르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물들은 주어진 종의 한계 내에서는 다양한 변이를 보여 주지만 어떤 한계를 넘어 다른 생물로 진화하지는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진화론은 생물학적으로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진화를 보여주는 중간화석의 결핍으로 아직도 하나의 생명의 기원에 관한 가정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은 현재 알고 있는 유전학이나 화석학, 분자 생물학 등 자연과학의 지식과 모순없이 일치합니다. 다양한 생물들과 질서 있는 번식, 온 우주에 가득한 자연의 신비는 그 자체가 창조를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을 위한 성경이해

조헌태(서울 원효로교회 교육전도사)

쪽지 열린누리 자료

 

 

인간이 어디에서 왔으며 세상과 우주는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가’라는 문제는 최소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질문해보았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해 인간과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한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은 우리의 이러한 믿음의 확고부동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현대 자연과학을 배운 사람치고 성경의 창조이야기에 대해 이성적, 지적 의심을 품지 않은 경우는 드물 것이다.

창조이야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읽다보면 이성적으로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할 수밖에 없다(믿음이 좋은 신앙의 선배들은 이러한 의심많은 우리에게 “이 믿음이 적은 자들이여”라고 한탄할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믿음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성서의 성격과 창조과학자들의 오해

그래서 창조이야기를 하기전에 먼저 우리를 ‘믿음없는 신앙인’으로 전락시켜 버린 오해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그 오해의 주범은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과학적 세계관의 눈으로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경을 과학적 진리를 말하는 과학책으로, 역사적 사실을 밝혀주는 역사책으로 이해하기에 성경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성경은 절대과학적 진리를 주장하는 책이나 객관적 역사를 서술하는 역사서는 아니다. 그것은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고백되어진 ‘신앙고백서’인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오간 신앙고백적 말씀을 문자 그대로 과학의 눈으로 파악하려 하니 당연히 이해가 안되고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해 ‘믿음없는 신앙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떤 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당신은 아름답게 핀 장미요 들에 핀 백합화입니다’라고 편지를 썼다고 하자. 이 말을 놓고 ‘사랑의 고백’이라는 차원을 덮어버리고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이 꽃이 되어버리는, 믿지 못하는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성경을 문자그대로 놓고 과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얼토당토않는 이야기이겠지만,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신앙고백서로 읽어가다보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간 신앙고백적 언어임을 자각할 때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바를 보다 정확히 이해할 수 있고 ‘믿음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과학의 잣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다음의 두가지 경향이 나타나는데, 그 하나는 성경이 모두 거짓이며 믿지 못할 것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경우이고, 다음은 그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오히려 성경이 과학적으로 옳고 타당하다고 증명하려는 노력이 그것이다. 후자의 입장은 성경의 창조론으로 성서적 진리를 무시해 버리는 자연과학에 대한 기독교 과학자들의 변증이라는 측면에서 일리가 있는 것이다. 진화론의 주장에 대한 창조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설명하려는 일련의 노력은 실재로 진화론이 가지는 허구성을 밝히고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함에 있어서 다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문제는 신앙고백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과학적인 분석과 검증을 통하여 그 내용의 진위를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 속에서, 진화론에 맞선 논쟁의 근거로 삼기위한 일종의 교과서적 역할을 하는 “한 권의 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하는 한계를 지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한 사역을 단지 인간의 지식, 과학으로 밝히고 증명하려는 것은 과학이 인류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과학주의와, 하나님의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론자들에 대한 반박을 넘어서서 부활한 예수의 못박힌 손과 발을 만져보고 믿으려는 도마와 같은 신앙의 실증주의와, 창조의 신비를 다 증명하려는 과학적 신앙주의를 낳게 하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어서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단순히 한 가지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요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고백서로서 성경은 어떤 일에 대한 사실(fact)보다는 사건(event)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경은 신앙인에 의해 ‘해석된 역사’라 할 수 있다. 즉 성경 속에 기록되어 있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의 과학적, 역사적 사실을 묻기 보다는 그 사건이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의미를 묻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기 때문이다.

창조신앙의 배경과 의의

이제 우리는 성경이 과학적 진리를 밝히는 과학책도 아니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역사책도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요청과 인간의 응답 사이에 행해진 신앙고백서임을 전제로 하면서 창조에 대한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창조이야기가 주는 신앙적 의미를 찾아보려고 한다. 창 1-11장에 나타나 있는 태고사는 창조이야기, 에덴동산이야기, 가인과 아벨이야기, 노아홍수이야기, 바벨탑 이야기가 각기 독립적으로 구전과 기록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로 편집되어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라는 역사적 사실에 관심하기 보다는 그 안에 담겨진 신앙적 우주관, 인간관, 죄관, 구원관 등에 더 주목해야 한다.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말하고 있는 창 1-2:25절에 나오는 창조이야기는 하나의 내용이 아니라 두 개의 창조이야기가 편집되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는 1:1-2:4절 전반부로 우주적 관심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신앙고백하는 입장에서 B.C 550년경에 기록된 것이며, 두번째 것은 2:4절 하반부부터 25절까지로 인류학적 관심에서 인간의 기원과 본성, 죄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B.C 85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밝혀졌다.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창세기가 전통적으로 모세에 의해 씌여진 것으로 믿어왔으나,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 이후에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후대에 모세의 권위아래 여러 개의 문서들이 모아져서 편집 기록된 것으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창조이야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상황에서 구전되던 이야기를 모아 일정한 신앙적 의의 아래서 편집된 것으로 이방인의 창조이야기를 다소 수용하고 있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유일신 신앙아래서 새롭게 고백되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성서기자는 창조이야기를 통해 비록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있는 암울한 상황이지만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홍해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이 또한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고(결코 다른 민족의 어떤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이 세상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며, 그 분이 다시 이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재창조의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창조주 하나님을 소망가운데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신앙은 포로기에 기록된 이사야서 40장 이후(제 2 이사야라고 부름)에서 잘 엿볼 수 있다.

첫번째 창조이야기는 먼저 우주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한 이가 다른 신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임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창조의 세계는 혼돈(1:2절에 나오는 공허, 어두움, 심연, 물 등은 이러한 혼돈을 의미한다)으로부터 조성되는 질서의 세계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의 물을 한 곳에 몰아놓고 하나님의 질서(체계적으로 잘 짜여진 질서의 공간)를 부여한 사건인 것이다.

이 창조세계는 모든 숨쉬는 것들의 삶의 장이었으며,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성경의 창조신앙은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혼합해 버리는 것도 거부하며, 창조세계에서 창조주의 현존을 제거하려는 것도 거부하고 있다. 바로 창조신앙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고백하면서, 현존하는 혼돈들로부터 하나님의 질서가 새롭게 부여되기를 소망하는 신앙고백인 것이다.

첫번째 창조이야기가 우주 전체의 구성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반면 두번째 창조이야기는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대지는 하나님, 인간, 동물, 식물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공간임을 말하고 있다. 사람과 생물이 어우러져 사는 생명의 공간이 바로 에덴(그 뜻은 기쁨과 희열이다)동산인 것이다. 이 에덴에서 동반자로서 남자와 여자는 자연과 생물을 지키고 섬기며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창조이야기는 곧 인간의 타락이야기로 이어진다. 즉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파괴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욕심과 교만이 자아낸 것이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게 지음받은 인간은 타락의 길을 선택함으로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에서 타락한 인간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게되며, 그 이후 노아 시대에 세상에 가득찬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한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고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음을 성경은 밝히 보여준다.

결국 창조이야기는 구원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비참함과 파멸을 맛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파괴되어가는 것을 경험한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창조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에덴의 평화가 회복되기를 소망하면서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신앙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는 역사적 시간의 처음에 6일간 이루어지고 완전히 끝나버린 사건이 아니다.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은 절망과 고통에 처해있는 우리가 보기에 창조세계를 떠나 버림과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여전히 창조세계를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섭리’라고 한다. ‘창조의 하나님’은 곧 ‘섭리의 하나님’이시다. 혼돈 속에 파묻혀 있는 것과 같은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여전히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창조신앙에서 온 우주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창조와 섭리의 하나님이 오늘 이 곳에서 우리를 “무”의미한 것에서 생명있는 “유”로 창조해 주셨다는 신앙의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창조신앙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피조물로 본다. 인간이 자연을 다스리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고 창조질서를 훼손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존하는 동반자로서 권위가 부여됨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인간들의 욕심과 교만이 빚어낸 심각한 생태계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은 자연이 인간의 동반자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되어버린 현재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고 보존하라는 창조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바로 우리는 창조신앙에서 인간을 당신의 동반자로 창조해 준 하나님께서 이세상의 생태계의 파괴, 불의, 폭력 등의 ‘혼돈으로부터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라’는 재창조의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고백하게 된다. 동시에 성경의 창조와 타락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쉽게 파괴시켜 버리는 인간의 악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음을 이제 ‘믿음있는 기독교인’이 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juapos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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