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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적 입장에서 본 사생관(死生觀)-11페이지 소논문

하나님아들 2013. 2. 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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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적 입장에서 본 사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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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

잡아함경(雜阿含經)이나 구사론(俱舍論) 등에 의하면 죽음은 이렇게 정의되고 있다. “수(壽)와 난(煖, 체온)과 식(識, 의식)을 잃고 신체가 변괴(變壞)하는 것.” 이것은 생(生), 노(老), 병(病)과 함께 인생의 네가지 상(相) 중의 하나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천명(天命)이 다해서 죽는 즉 명진사(命盡死)요, 또 하나는 뜻하지 않은 불의의 죽음, 즉 외연사(外緣死)이다. 불교에서는 연분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런데 그 연분이 바깥의 좋지않은 불의가 닥쳐 옴으로 말미암아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일찍부터 주목되었던 셈이다. ▿마도 요즈음 같이 사고사가 많은 시대는 외연사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외연사와 횡사가 어떻게 구별되는지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아홉가지 죽음을 횡사라고 하는 문구가 약사경(藥師經)에 나온다. 약사경은 불행한 인생을 구조하는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공덕을 말하는 경이다. 약사란 옛날에 의사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지금 우리들의 해석에 따르면 무궁무진한 공덕과 힘을 지닌 법신(法身)부처님, 즉 우주적 생명력은 중생제도를 위한 방편으로 가지가지 불(佛), 보살(菩薩), 기타 성중(聖衆), 신중(神衆)을 나누시는 분이므로, 세상이 어지러울 때 민중들은 이런 부처님을 갈망했고, 그 갈망에 따라 이 부처님은 하나의 대승경전으로서 세상에 대두가 되었던 것이다.

그 약사여래 공덕경에 의하면 아홉가지 횡사는 다음과 같다. ① 병에 걸려 의약이 없어서 죽는 일. ② 국법에 의하여 사형에 처해져 죽는 일. ③ 비인(非人, 惡鬼 등)에 의해서 정기(精氣)를 빼앗겨 죽는 일. ④ 불에 타 죽는 일. ⑤ 물에 빠져 익사하는 일. ⑥ 악수(惡獸)에 물려 죽는 일. ⑦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일. ⑧ 독사(毒死) ⑨ 아사(餓死) 등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중생들에게는 다섯가지 공포가 있다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불교의 교리는 널리 알려진 대로 윤회를 주장한다. 개인이 죽게되면 그 영혼은 계속 남아 다시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윤회사상의 기본 골격으로서 깨닫지 못하는 한은 이러한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 해야 한다고 한다. 이 개개의 영혼은 전 생애 동안 스스로 행했던 행위가 얼마나 선했고 악했나의 여부에 따라서 그 다음 생에 태어날 6가지의 다른 길 (전통적으로 天上, 人間, 修羅, 餓鬼, 畜生, 地獄 등 여섯) 가운데 한 가지 길을 반강제적으로 택해야만 한다.

불교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이 순환 속에 일어나는 일체를 고뇌로 본다. 이러한 고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고뇌 없는 열반(Nirvana)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요, 진리를 깨닫는 자 즉 불타가 되는 목적이다. 즉, 산다는 것이 고(苦)이며 늙는 것, 앓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간에게 이런 고민과 괴로움이 생기는가? 라는 물음에 불교에서는 ‘멸을 통한 각’에서▿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죽음과 삶의 번뇌에서 시달리는 사람은 아직도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요, 깨달음에 이른 사람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거나 죽음의 삶이 차이가 없는 그런 경지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죽음은 도피 혹은 자기멸절로 보았다. 즉 죽음은 실존이 일으키는 모든 문제의 포기로서 이는 무아의 경지이고, 여기에서 진아가 되며 석가와 대아를 이룬다고 본다. ▿렇게 불교의 죽음은 일종의 해탈(Kenosis)로 받아 들이고 있는데 자신이 모든 사물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 무아가 되는 것을 죽음으로 본 것이다.

이런 강한 내세 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불교의 죽음관은 기독교의 내세 지향적 성격에 편향되어 내세의 구원이 삶의 궁극 수단인 것처럼 생각했다. 그래서 역사의 변동기와 사회적 혼란, 빈궁한 삶을 살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현세의 삶을 도피해 ‘죽은 후 천당’ 간다는 사실은 대단한 종교적 매력을 던져주며 삶을 종말적으로 이끌어 간 것이 사실이다.

이 결과 기독교의 본질을 일탈한 토착화의 문제도 생겼으나 교회는 타종교와의 문화적 유사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이해해야 했었다. 내세관에 있어서도 형이상학적인 열반이 어디엔가 있는듯한 추상의 인식을 포기하고, 복음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해 현존하고 있는 하늘나라의 개념을 밝혀야 한다.

 

2) 힌두교

힌두교도들의 죽음에 대한 신앙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인도만이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도 유포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윤리적으로 파악하고 있고 힌두교에서는 종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도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샤크티, 곧 인간존재 등을 포함한 우주적인 힘을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이 영생이라는 비원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윤회전생의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윤회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여러가지로 말해지고 있으나, 힌두교에서는 이러한 우주의 힘을 업(業)으로서 받아들이고, 특히 知的 힌두이즘(Sanskrit Hinduism)에 있어서는 우파니샤드나 ‘바가바드 기이타(Bhagavad-gita)’ 등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업은 인간의 가능성이라고 보고, 이 업의 세계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것은 정신적인 ‘범(梵, 절대진리 Brahman)’ 속에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달성된다고 보고 있다. ▿곧 정신적인 범은 신이라고도 말하고 있으므로, 이 신과의 합일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런 것을 영생이라고 믿고 있다.

즉, 기독교에서는 영생의 개념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지만 힌두교에서는 절대자와 합일하는 것이 영생이다. 또한 인도의 농민이 믿고 있는 소박한 힌두교 신앙에 있어서는 인간의 비원은 사후가 문제가 아니라 현세적인 이익과 관련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후의 세계는 현세에서 승화된 것이라야 한다. 그리고 신들의 세계의 찬가, 종교적인 의식 등은 그들의 심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일 뿐이요, 신이 살고 있다는 세계로 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신의 세계로 도망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힌두교는 사후의 세계나 미래의 소망을 사후에 바라지 않고 현세에 승화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좋지 않은 것이다. 인도민족에게 내재하고 있는 淨과 不淨의 두 개념 중 죽음은 부정한 것이다. ▿도인들은 사후의 일에 대한 공포나 관심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초상이 나면 죽음을 부정한 것으로 보아 죽음에 의해 부정을 탄다고 생각하여 몸을 삼가고 기피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그들에게도 있다. 힌두교의 죽음을 정리해 보았으나 힌두교라고 하더라도 일정한 교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조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삶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힌두교의 사상은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개념에 해당시킬 수 없는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종교, 철학, 민족의 전통이 혼합되어 하나의 사상체계를 이루고 있는 특수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3) 유교

내세관이 없으면 종교도 없다는 말과 같이 중국의 유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관도 확실하지 않다. ▿교적 입장에서 본 죽음은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요 자연의 법칙이라는 입장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지나친 고뇌와 고민 속에 빠져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에 현세 지향적인 유교는 공자의 말대로 살아서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죽은 후의 일을 논의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태도이다. ▿즉, 공자는 신보다는 인간존주(人間存主)요, 현실주의였기에 “죽음을 말하지 말고 귀신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한 점으로 보아 유교의 죽음에는 피안이 없거나 있어도 그렇게 중요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을 목표로 하는 유교는 천명을 받아 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문제는 불가지론에 빠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중요한 문제로 논의되지는 않는다. ▿간이 태어나면 죽는 것은 자연의 이치요 그 자연적 현상은 우주 자연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 이치와 도에 순응함이 인간의 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유교가 지녔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윤리적 이상을 이 세상에 심어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죽음에 대해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교는 조상숭배의 사상과 직결되는 문제를 구약에 나타나는 ‘스올’의 ▿념 비슷하게 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혼과 백으로 형성되는데 그 두가지가 결합한 상태가 살아있는 현상이고, 그 두가지가 다 분리되는 현상은 죽음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공중에 떠다니는 신세가 되고 백은 땅에 돌아가 흙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공중으로 떠다니는 혼은 컴컴한 곳을 찿아 다니다가 자기가 죽은 기일이 되면 자기집을 찿아와서 자기를 기억하고 차려놓은 제사상의 음식을 먹어야만 그 혼이 계속 존속할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소박한 견해를 보이기도 한다.

유교의 죽음은 조상의 넋이 매어져서만 우리들에게 실감되어 왔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웃어른만을 섬겨야 했듯이, 죽은 넋의 경우도 어른이거나 조상이 아니고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기서 조상숭배와 함께 차례를 지내는 유교의 관습이 대두하게 된다. 특히 효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교에 있어서는 살아 생전 부모에게 효도하고 돌아가신 후에도 마치 “산자처럼 공양한다”는 ▿리적 개념이 첨가되어 죽음의 문제보다는 죽은자에 대한 조상봉사의 과제가 중요시되는 입장이다. 이것은 유교가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면서도 죽음을 탄식할 것만 아니라 오히려 자손들의 번창과 번영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하여 죽음의 비극을 자손 번영으로 극복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그러나 영원한 내세의 소망이 없는 유교의 인생관은 자손번창에서 자기 생명의 연속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정진홍은 죽음에 대한 유교적 입장을 “삶과 죽음에 의해 인간의 본질이 생성 소멸한다거나 그 인간의 대체적 존재 의미가 사라지는 것일 수 없다. 죽음과 삶을 구별하는 것은 오히려 유교의 본래적 자리가 아니다”라고▿했다.

한국의 기독교 역사는 짧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유교 문화 속에 들어와 기독교의 기층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속과 유교나 불교의 관습과 전통의 바탕위에 기독교 문화를 자연스럽게 형성해 일종의 혼합종교(Syncretism)와 비슷한 형태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면은 죽음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에서도 찿아볼 수 있다. 효를 중요시하게 생각해 왔던 유교적 관습 속에 믿는 기독교인들은 죽은 자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성서의 교리까지 저버리면서 어쩔 수 없이 신앙을 포기하면서까지 제사를 지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유교에서는 영혼의 불멸성은 부인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유교의 인생관이란 극히 낙천적인 것이다. ▿ 인간은 윤리적 자기완성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현세지향적으로 예수 믿고 입신양명(立身揚名)하고 이 땅에서 복을 받으면 된다는 기복적 신앙으로 빈약한 내세관을 보여주고 있다.

 

4) 도가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의 理法에 따라 당연한 것이며 죽음앞에 극히 담담한 자세를 지녔던 것은 도가사상가(道家思想家)들의 공통된 태도였다.

도가는 중국사상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인 것으로서 다양한 변모의 발전을 보였다. 이 도가사상은 특징적인 두 개의 흐름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신비적 정적주의(神秘的 靜寂主義)로 인간과 자연에 긍정적 조화를 꾀하는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으로부터의 인간이 종말론적 모반(終末論的 謀叛)을 꾀하는 경향이다.

장자의 도가적 입장의 죽음관은 아주 특이하다. 그에 의하면 몸이 내것이 아니라 천지의 위형(委形)이요, 생명이 내것이 아니라 천지의 위화(委和)요, 성명(性命)이 또한 내것이 아니라 천지의 위순(委順)이요, 자손이 내것이 아니라 천지의 허물벗음이라고 하였다. 여기의 천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힘을 초월하는 절대이다. 말하자면 신선일 수도 있다. 인간이 변신된 신선에게는 죽음 자체가 아주 없다. 다만 끊임없는 자기 정화요 성화(聖化)된 탈바꿈으로 영생의 존재이다. 그는 萬物齊同의 입장에서 차별과 대립의 세계는 도를 모르는 데에서 나온 所致라고 전제하고 모든 만물은 상대적이며 큰 눈으로 볼 때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자는 生과 死도 차별이 없는 것이며(死生一如)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고행을 떠난 자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고 있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요컨데 장자는 생사가 다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인 이상 生이라해서 기뻐할 것도 아니요, 死라 해서 싫어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자신도 이러한 태도를 실천하였다.

노자(老子)는 보신(保身)의 원리를 말하면서도 생명을 너무 아끼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해(害)가 된다고 하였다. ▿자는 도덕경(道德經) 出生入死章에서 이르기를 “살 수 있는 환경에서 벗어나 死地에 들어갔을 때 사는 무리에 속하는 자가 열중 셋쯤 되며 또한 죽는 무리에 끼는 사람도 열 중 셋 가량 된다. 그런데 사람이 망녕되게 움직여 死地에 빠지는 자도 열명에 셋쯤 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생명을 너무나 후하게 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열자(列子)는 노자처럼 인간의 사생을 도의 변화로 보았으며, 生이 필연적인 것같이 死도 필연적인 것이므로 그것에 집착하여 기뻐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인생은 살았을 때는 고생하지만 死後에는 휴식한다고 하였다.

道家의 사상을 요약해 보면 死에 대해서는 春夏秋冬이 있듯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고 來到하는 것이고, 死는 하나의 휴식이며 生과 死가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확신도, 소망도 없었던 것이다.

 

5) 무속

기본적으로 무교에서 보는 죽음은 한스러운 것이다. 죽는 자에게는 죽음의 살이 끼어 있어 원한관계가 생기고 그 결과로 죽는 것이다. ▿렇게 해서 죽은 영혼은 많은 경우에 저승에 곧장 들어가지 못하고 헤매게 되는데 그저 헤매는 것 뿐만 아니라 생전에 가졌던 한(恨) 혹은 원(怨) 때문에 살아있는 가족이나 친지를 괴롭히고 자신의 순탄한 천도를 위해 의례를 가져줄 것을 부탁한다고 한다. 따라서 무교에서 행하는 사령제의 주목적은 죽은 자를 잘 달래고 그 살을 풀어줘 저승에 안착하게 함으로써 후환이 없게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영혼이 이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한국무교에서는 영혼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어 있다는 생령(生靈)이고, 다른 하나는 사후에 저승으로 간다는 사령(死靈)이 그것인데 후자인 사령은 다시 조령(祖靈)과 원령(寃靈)으로 나뉘어 진다. 우선 조령은 순탄하게 살다가 제대로 죽은 착한 영혼으로 별다른 원한이 없기 때문에 저승에 쉽게 안착이 되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반면에 원령은 하고 싶은 일을 못이루었다거나, 객사를 했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일로 생전에 품게 된 원한 때문에 이승에 대한 강한 집착이 생겨 저승으로 가지 못하게 된 영혼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무당의 중재로 천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면 무교에서는 죽은 뒤의 영혼들이 어디로 간다고 하는 것일까? 크게 보아 무교의 저승관은 그 자체로서는 희박한 것 같고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무교의 저승은 불교의 그것과 같이 지옥과 극락으로 크게 둘로 나뉘고 지옥은 다시 “칼산지옥”, “불산지옥”,“독사지옥” 등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유의 저승관념이 잘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교에서 뿐만 아니라 장제 혹은 민담과 같은 토속적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담의 경우를 보면 「황천기(黃泉記)」와 같은 민간설화에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저승관이 아주 모호하고 대부분 불교의 저승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것은 우리 민족이 저승보다는 이승적 현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설화에서도 저승세계에 대한 구체적 묘사보다는 죽은 영혼이 육신을 도로 찾아 재생하는 환생모티브(motif)가 더 많이 발견된다. 이때 주인공은 이승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대단히 반기는데 이것 모두가 우리 민족의 이승지향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는 단서인 것이다.

그런데 무교의 저승관에 대한 불교의 많은 영향에도 불구하고 양자간에 적지않은 차이점이 발견된다. 우선 불교의 저승관은 철두철미하게 인과응보 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무교의 경우는 죽은 영혼이 이승에서 닦은 공덕, 신앙 등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고 그저 망자의 원을 풀어 저승으로 보내 버리는데에 더 관심을 두는 것 같다. 따라서 자연적인 결과로 불교에서는 사령제를 통해 죽은이의 명복을 빌고 보다 나은 다음 생을 받게끔 좋은 법문을 들려 주는 데에 비해 무교는 망자를 어서 저승으로 보내어 살아있는 자손들에게 해를 안끼치게 하는데 주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 외에도 불교는 왕생극락을 하기 위해서 신자들에게 이승에서 많은 수행과 선행을 요구하는데 비해 무교에서는 망자가 살아있었을 때의 공덕보다는 죽은 뒤 타인, 특히 직계 가족들에 의해서 왕생극락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그 차이를 찾아 볼 수 있겠다. ▿론적으로 말해서 무교의 저승관은 망자중심이라기 보다는 생자중심이며 저승보다는 이승에 초점을 더 맞춘다는 면에서 현재와 삶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6) 회교

회교는 정신과 육체를 서로 상반되는 두 실체로 보고 있다. 육체는 죽음과 함께 생명을 잃고 점차 분해되어 소멸되지만 정신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정신이 육체와 결합할 때 육체는 살아 움직이고, 정신이 육체와 헤어져 그 관계를 끊을 때 육체의 기능은 정지되지만 정신은 계속 살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삶은 그 근원이나 원칙을 볼 때 정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쿠란은 정신불멸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너희를 관장하는 죽음의 천사가 너희를 죽게 한 후 너희들은 주님에게 돌아갈 것이다”(32:11). 여기서 육체는 죽은 후 분해되어 흙속의 작은 먼지로 변해 소멸하지만, 정신은 죽음의 천사가 떼어서 신의 관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창조를 겪어 原人이 된다고 풀이한다.

겉으로 나타난 현상만으로 보면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로 간주된다. 이 개인의 생애에는 태어난 날로부터 죽는 날까지의 세월로 메꾸어질 수 있다고 보지만, 이슬람은 정신의 불멸을 믿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을 단순히 정신적 삶의 한 단계에서 그 다음으로 옮아가는 돌변으로 본다. 즉, 인간은 정신적으로 끊임없는 영원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인간을 다음 단계로 이끌어 주는 풀 수 없고 풀리지 않는 무명실의 매듭과 같은 것으로 본다. 다음 단계에 축복을 받게 될지 또는 고난을 당하게 될지는 죽기 전 단계의 삶에서 선행을 쌓았는지 악행을 범했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슬림은 인간의 정신적 삶은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즉, 이승(dunya), 바르자흐(barzakh) 및 천국(jahannam)의 단계이다. 이승은 현세의 삶을 뜻하며 바르자흐는 죽은 뒤 부활의 날까지 기다리는 단계이다.

천국과 지옥은 인간의 정신이 부활한 후 최후의 심판을 받은 결과 선행을 하는 자는 천국, 악행을 하는 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마지막 삶의 단계를 말한다. 따라서 바르자흐는 이승의 삶과 영원한 삶 사이에 있는 중간단계로서 이 둘을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으로 본다. 사람은 죽은 뒤에 즉시 이승에서의 신앙생활과 행적에 관하여 두 천사 문키르(Munkir)와 니카르(Nakir)의 심문을 받게 되며 공정한 조사의 결과 내려지는 판결에 따라 그는 즐겁고 축복받는 생활이나 사악하고 불행한 생활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새로이 얻는 바르자흐의 삶은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기대 속에서 지속된다. 이곳의 삶은 수사관의 심문을 받고 있거나 재판과정에 있는 미결수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에 대한 심문과 조사는 그의 문서가 완결될 때까지 계속된다. ▿르자흐에서의 삶은 이승에서의 삶과 비슷한 생활양식을 갖는다고 한다. 즉, 그가 덕스러운 사람이면 알라를 가까이 하는 순수한 사람들과 어울려 행복하고 풍요한 삶을 누리고 만약 그가 사악한 삶이면 갈등과 고통 속에서 악마와 길을 잃고 헤매는 자들과 한 무리가 되어 고통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바르자흐의 삶은 유대교, 기독교 특히 조로아스터교의 연옥개념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바르자흐 이후의 삶은 연이어 일어나는 세 가지 진행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부활, 심판 및 천국과 지옥에서의 삶이다. 부활에 관한 무슬림의 설명도 조로아스터교, 유대교 및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활의 시간은 대체로 이승에 악이 판을 칠 때 이스라필 천사가 첫번재 나팔을 불면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게되고, 두번째 나팔을 불면 지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은 소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생은 육체적인 것이며 태초의 창조 때처럼 흙덩이에서 재생된다는 것이다. 물론 부활의 날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신만이 알고, 믿음에 따르면 해가 서쪽에서 뜬다든가 거창한 괴물의 등장, 혹은 거짓 예수(almasihu al-Dajjal 즉 Antichrist)의 등장이다.

무슬림이 천국에 갈 것인지 지옥에 떨어질 것인지의 최종판결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명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이슬람 신자는 비록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얼마 동안만 지옥에서 지내게 되면 천국으로 들어가게 될 특전이 전능하신 신으로부터 베풀어진다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의하면 어느날 지옥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다. ▿론 신의 인도를 받는 예언자는 전혀 과오가 없는 분이라는 전제에서 비신자들도 구원된다는 억지 해석을 하는 것이다.

 

7) 천주교

천주교에 의하면 죽은 다음 완전히 순결한 자들의 영혼은 즉시 천당에 가지만, 완전히 깨끗하지 못한 자, 즉 소죄가 있고 지상에서 형벌을 받지 않는 자들은 천당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정화의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한다. 이곳을 연옥이라 부른다. ▿, 하늘나라의 지복소(至福所, beatitude)에 들어가는 사람이 새로운 변화와 적응을 대기하고 있는 조건인데, 단지 어떤 장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러한 연옥은 시련의 처소가 아니라 확실히 천국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자들의 영혼들을 정화하여 준비하는 곳이다. ▿런데 그들이 연옥에 있는 기간을 미리 결정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기간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개인의 죄와 정비례하는 것이다. ▿한 이 기간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 및 선행과 특별히 미사에 의해 단축되며 경감될 수 있다. 이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은 외경인 마카비2서 12장 42-45절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소지를 남겨두게 되며, 그리스도 속죄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인간의 힘이 추가하여 교황과 같은 인간의 권력을 강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천주교는 연옥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 고통이 지옥과 다른 점은 오직 그 기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뿐이다. 그런데 성자들만이 연옥의 고통을 면한다. 이 교리는 천주교도들이 죽음의 공포와 비애를 조장한다.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기 백성을 천부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형언 할 수 없는 수난의 처소로 압송하는 것이다. 또 이 교리는 사람이 사후에 정화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효용성과 제사직이 이 기도를 올릴 권위가 있음을 주장함으로 교회로 하여금 구원을 돈 받고 팔게 하였다.

연옥설은 결과적으로 교인들이 사제들에게 비굴함으로 굴복하게 하였고,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하였다. 교인들은 범죄하고 돈을 지불하면 사제들은 돈을 받고 형벌을 면해 주었기 때문이다.

연옥설에 대하여 종교 개혁자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우리는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 내어 연옥설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외쳐야 한다. 연옥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로 만들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경멸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파괴시킨다.”라고▿혹평을 가하였다.

또 하나 천주교의 죽음과 관계된 교리는 림보에 관한 교리이다. 라틴어 림부스(limbus)는 중세기에 지옥의 연변에 있는 두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니, 즉 조선 림보(limbus patrum)와 유아 림보(limbus infantum)이다.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조선 림보는 구약의 성도들이 주의 부활까지 수난없이 유치되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유아 림보는 세례는 받지 않았으나 아무런 죄가 없이 죽은 어린 아이들을 위해 천당과 지옥의 중간단계(장소는 아니다)에 거주한다. 이 교리는 신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에 의해 반드시 가르쳐지고 있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오늘날 림보 문제는 잘못된 질문에 대한 결함이 많은 답변이라 여겨져서 배척되는 경향이 있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juapos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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