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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교회의 사회적 책임

하나님아들 2013. 2. 6. 14:16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신현수 박사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교수 (조직신학 담당)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지난 1970년대 이후 보수주의 및 진보주의로 양극화 되어갔다. 이 양극화 현상이 신학적으로 표명된 것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사회 구원’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297-308쪽을 볼 것.
보수주의는 개인 구원과 교회 확장이 선교라고 보아 정교분리의 명분 하에 현실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 침묵했다. 반면 진보주의는 하나님의 구속 의지의 사회적 실현에 참여하는 것이 선교라고 보고 인권 문제, 정의로운 분배 등의 사회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러한 현상의 한 예를 들면, 1970년대 중반 동아일보가 박정희 정권의 압력으로 광고를 싣지 못할 때 이 문제를 놓고 서울 동대문지구 청년연합회 임원들이 이 지역 교역자들과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당시 보수주의에 속하는 목회자들은 일관되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마태 22:21)라는 말로 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 당시 진보주의의 교회에서는 동아일보 지원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러나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은 개방성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를 완결된 것으로 보는 폐쇄성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 대신, 새로운 신학과 삶의 상황에 늘 열려있다. 이것은 보수주의의 사상적 근거인 종교개혁 전통의 기본 성격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전통은 신학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성경은 초월적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기에 완벽하고 절대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비판의 여지를 넘어선다. 하지만 신학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은 보편성이 있으나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특정한 삶의 상황을 완전히 떠날 수 없는 제한성이 있다. 그러기에 그것은 늘 비판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학이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에 비추어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전통은 삶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만큼 비-문화적 혹은 탈-문화적이지 않다. 그것은 성경의 진리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따라서 만일 보수주의가 이러한 열림(openness)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개혁되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보수주의의 길에서 떠난 교조주의적(dogmatic) 신학에 불과하다.
이러한 ‘열린 보수주의’의 성격은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복음화대회’ (ICOWE)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대회는 빈곤, 정치적 민주화, 및 인권에 대한 관심을 확인하였다. 그후 1989년 필리핀에서 세계복음주의자들은 ‘마닐라 선언’을 통해 ‘총체적 복음을 총체적 세계에 선포할 것을 재확인’했다. 이것은 바로 인권과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에큐메니칼 진영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는 현상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의 변화는 결코 복음 진리의 변질이 아니라 복음의 상황화이고 사회화의 노력이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국의 보수주의는 이러한 열림의 성격을 잘 실천하지 못하였다. 보수주의의 명분으로 전통 신학을 되풀이하는 것에 만족하고 이 전통 신학의 원리를 우리의 삶의 상황에 구체화하려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이것이 초래한 부정적 현상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신학과 목회 현장의 이원화, 2) 믿음과 삶의 분리, 3) 믿음 생활의 자리가 개인의 구원 영역에 머물고 맒, 4) 믿음이 세상적 가치관에 기초한 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여김, 5) 믿음을 단지 닦아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한 일 순간의 종교 의식으로 받아들임, 6)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만 사회를 보고 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음 등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난 1세기동안 세계 선교 역사상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로부터 비판을 벗어나기가 어렵게 된 것은 바로 한국 보수주의 교회가 복음의 사회화의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데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러한 이기적 신앙을 극복하고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교회로 발전할 수 있을까? 이것은 21세기를 맞이한 한국 보수주의 교회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필자는 교회의 사회 책임에 대한 보수주의 신학의 입장은 개인 구원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영역을 포함한다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신학’을 제창함으로써 '열린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 글에서 논증하려는 것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현을 위한 신앙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대두되는 통합적 사고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창조는 구속과 분리될 수 없다. 창조의 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의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구원의 삶을 이루어 가는 영역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신 구속은 이 창조의 질서의 구속을 목표한다.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계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창조 질서의 한 영역인 사회는 교회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복음을 구체화하는 영역이다.
위의 논점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 다룰 첫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전망에서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어서 주되심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사회와 본질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맺는지를 살핀다. 그런 다음,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회 변혁의 구체적인 방향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의 기본 성격과 관련하여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사회 영역에 대하여 갖는 책임 이행의 방법을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재(reality)인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sign)의 관점에서 다룬다. 맺는 글에서는 모든 논의를 요약하고 이 글의 제한성과 앞으로의 과제를 밝힌다.

1. 주되심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성격과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볼 때 많은 교회 이해 지평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지평은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 이해 지평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 사건이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모든 기독교적 진술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에게 자신의 은혜가운데서 계시하고 화해시키는 말씀이다. Karl Barth, Church Dogmatics, IV/1-4, G. W.Broilery와 T. F. Torrance 펴냄, G. W. Bromley 옮김(Edinburgh: T. & T. Clark, 1980-1983, ,I/1,4 볼 것.
역사상의 기독교는 그것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분명한 대상 인식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장에서 스콜라 신학이 주창하였던 맹목적 믿음(fides implicita) 개념을 비판하면서 믿음을 정의하기를,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지식이지 교회에 대한 존경심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알고 신뢰하는 것이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John T. McNeill 펴냄, Ford Lewis Battles 옮김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3), III.ii.3. 여기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이라기 보다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는 대체물인 교회, 권위에 대한 감정적 동의라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고 어떠한 일을 하셨는가를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 이해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일이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새로운 영적 관계를 갖는 수단으로써만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 주는 구원의 ‘유익’(benefits)에만 관심을 두고 그 유익을 주는 그분 자신을 놓친다. 또한 이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강조하지 않기 때문에 믿는 사람의 구체적 삶의 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역동성을 간과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정해진 종교적 의식을 갖는 것으로 머물고 만다.
그러나 구원의 유익은 그것을 베풀어주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다. 그 유익은 믿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유익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이 주는 선물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성경 특히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과 더불어 그 유익을 베푸는 분이 누구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유익은 그것을 받은 사람의 삶과 떨어질 수 없다. 성경은 구원을 말할 때 믿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들의 삶의 터에서 계속적으로 구체화시켜 가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사랑의 사귐을 갖도록 이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아 가도록 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의 은혜는 그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실제적 삶과 떨어질 수 없다. 이 두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믿는 사람이 모든 삶의 분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을 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란 이 땅에서 그의 주되심을 실현하기 위한 행위이다. 이 사건은 그가 주로 고백될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을 그의 주되심의 영역으로 이끌기 위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로서의 정체성(identity)은 그의 다스림(ruling)과 같이 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사는 삶의 전 과정에서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께 받침으로써 그의 주되심을 실현하였다. 삼위 하나님은 자기를 상대방에게 주는(self-giving) 상호 관계를 통해서 존재하며 어거스틴(Augustine)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관계성이 인격(persona) 개념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인격적 존재이다.
자신의 뜻을 인류에게 밝히고 죄에서 구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온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순종의 표현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살았던 삶은 한 마디로 아버지와 그의 다스림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이러한 자기 순종 행위의 절정이다. 그가 죽은지 사흘 되던 날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마지막으로 확증한 사건이다. 한 걸음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 자기 헌신은 그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는 방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완벽한 순종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그의 다스림에 반역한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여 그의 주되심의 영역 안으로 이끌었다. 이 구속의 방식은 인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존재와 구원 사역의 방식으로 갖는 이 자기 헌신은 이미 영원 전에 자신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주되심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와 사랑의 사귐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다. 이 땅에서의 헌신은 바로 이러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주되심에 대한 순종의 역사적 구현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전망에서 이해해야 한다면, 교회의 정체성 역시 이 전망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 신앙에 그 기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관점에서 볼 때 교회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개신교 전통은 일반적으로 교회의 본질은 communio sanctorum으로 보고, 교회의 유형을 ‘전투적 교회’와 ‘승리적 교회’,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조직체로서의 교회’로 나누고, 선택, 유효한 소명, 세례와 믿음의 고백 등의 관점에서 교회를 정의하며, 교회의 속성을 통일성, 거룩성, 보편성으로 이해하며, 교회의 지표로 순수한 말씀의 선포와 정당한 성례의 집행, 신실한 권징의 시행을 강조한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84), 553-78쪽 볼 것.
교회의 신약 성경적 의미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의 총체적 삶의 공동체이며,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교회는 가시적으로 볼 때 한 사회적 공동체이나 불가시적으로는 종말론적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형기, "본훼퍼에 있어서 교회와 사상 -두 왕국사상의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서", 성경과 신학 제 2권(1984): 123-75 쪽을 볼 것.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는 그를 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의 주로서의 다스림을 받아가겠다고 헌신한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고백과 삶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본질을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이 땅에서 매개해 가는 사역의 공동체이다. 이 주되심의 성격은 보편적이다. 그것은 인종, 성, 나이, 사회 계층, 민족, 나라 등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를 주로 고백하고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주되심을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실현해 간다. 이러한 뜻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현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도구이다.
이렇게 교회의 정체성을 주되심의 공동체로 규정할 때 그것은 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2. 교회와 사회의 관계 이 주제에 관하여는 G. S. M. Walker, "Calvin and the Church", Readings in Calvin's Theology, edited by Donald K. McKim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4): 212-30쪽; J. B. Metz, The Church's Social Function in the Light of "Political Theology"", Concilium, 6권 4호(1968): 3-11쪽; J. B. Metz, “The Church and the World”, The Word in History (London: Collins, 1968), 69-85 쪽; H. Henry Meeter, The Basic Ideas of Calvinism, 6th edition, revised by Paul A. Marshal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90), 71-143쪽;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Oxford: Blackwell, 1993), 202-17쪽; P. D. L. Avis, "'The True Church' in Reformation Theolog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0권 4호(1977): 319-45쪽; G. Philips: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 Concilium, 6권 1호(1965): 4-13쪽; 등을 볼 것. 단행본으로 김애영, 칼 바르트 신학의 정치-사회적 해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1)을 참조할 것.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은 그들을 통해 온 인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위해(for many) 이 땅에 왔고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였듯이, 교회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만일 교회가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교회의 기본 성격에서 벗어난다. 한국 교회가 오늘날 사회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사회와 갖는 본질적 관계를 바르게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교회가 만일 이 사회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집단이기주의에 머물고 말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가 현대 기독교의 비극은 교회가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극복하는데 실패한 데에 있다고 지적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W. Pannenberg, Ethics, Keith Crim옮김(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1), 17-18쪽.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존재 방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주되심은 물론 그 본질에 있어서 구속적이다. 그것은 세상 사람이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구속의 주라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구속적 다스림을 삶의 영역에서 역동적으로 받아가도록 한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구속적 주되심의 실현은 창조 질서인 사회 영역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 구속적 주되심은 단지 영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분야에 머물지 않고 모든 삶의 영역에까지 확대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의 주이며 그러한 분으로 그 모든 영역을 다스린다. 한 걸음 나아가, 이 구속적 주되심은 이 모든 영역을 구속의 차원 즉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사랑이 실행되고 실천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회는 정치적, 교육적, 경제적, 문화적 및 우주적 영역과 더불어 인간의 삶의 중요한 영역이다. 교회를 주되심의 공동체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에서 그 주의 다스림을 지속적으로 받아 가는 것을 강조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다스린다. 따라서 교회가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바로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함이다.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명한다. 이것은 세상의 죄된 것은 멀리해야 한다는 뜻이지 세상을 떠나라는 말씀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강력하게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영역은 교회 안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상 곧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사회 영역에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기로 한 믿음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하나를 이루는 삶을 살도록 그리스도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이 하나되는 삶은 교회 안에서의 하나됨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와 연합하라는 부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을 받는 삶은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것과 본질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이 둘은 혼자서는 설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 관계도 다스리는 주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는 더 이상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생활의 영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믿음의 삶의 마당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회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교회가 사회 영역과 본질적으로 관련된다면 그것은 사회의 변화에 어떻게 관계하는가? 교회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으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세속화에 이른다. 그러나 주되심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할 때 그것은 적극적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시켜가야 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이 땅에 사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그러면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석될 수 있는가?

3. 교회의 사회 책임의 방향

주되심의 공동체인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해가야 할 책임의 구체적 방향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가 갖는 기본 성격에서 추론할 수 있다. 첫째로, 교회는 사회가 늘 새롭게 되는 역동적인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그것을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는 머물러 있지 않고 역동적이다. 그것은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어떤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되는 실재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것은 순전히 새로운 것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헬라의 혹은 동양의 철학과 대조를 이룬다. S. H. Mayor, "Jesus Christ and 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Societ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32/1, 1979), 49-51쪽 볼 것.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그의 주되심을 실현시킨다. 그의 말씀은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나 어떤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을 새롭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창조와 구속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행위가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의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동적 성격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해석할 수 없다. Colin Gunton, "The Political Christ: Some Reflections on Mr. Cupitt's Thesis," Scottish Journal of Theology(32/6, 1979); 533-40쪽과 Alan Richardson, The Political Christ (1973), 41-52쪽을 볼 것.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열심당원이나 다른 어떤 정치적인 힘과 일치시키지 않았다. 복음은 단지 어떤 정치적 힘보다 더욱 근본적이다. Ern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제1권, Olive Wyon 옮김, (Harper and Row Publisher, 1960), 82쪽 이하를 볼 것. Mayor, 49쪽.
이러한 역동적 성격이 시사하는 것은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란 그 자체 안에 변화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변화의 불가피성을 내포하는 사회를 말한다는 것이다. Mayor, 51쪽.

둘째로, 교회는 하나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는 하나됨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한다. 이러한 ‘하나됨’에는 개인과 사회가 분리되지 않고 서로 깊은 관련을 맺는다. W. Pannenberg, 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78쪽 볼 것.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의 주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의 근거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개념에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은 그 존재함과 계시 및 인류 구원의 행위에서 서로 구별되나 또한 통일을 이룬다. 샤르댕(Teilhard de Chardin)과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인류의 발전 특히 인간 역사의 현대적 국면에는 하나됨을 향한 수렴적 흐름(convergent drift)이 있다. 이의 결정적인 조건은 인간의 ‘반추하는 능력’이다. 이 반추는 보편적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과 관련된다. 사람은 자신 안에서 그 자신의 통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을 뛰어넘어 자신을 이루는 어떤 통일성을 찾으려고 한다. 바로 여기에 인간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사회적 단위가 요청된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는 인간 역사의 현재를 특징짓는 이 하나됨을 향한 수렴 과정은 지금까지 모호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개인과 사회적 운명 사이에 긴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개인은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뛰어넘는 어떤 통일성 곧 그가 속한 사회를 필요로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 자체의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개인과 그들의 판단에 의해 대표되는 사회의 공동 또는 인류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소외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다. 윗글, 66-69쪽.

셋째로, 교회는 평화와 정의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의 특징은 평화와 정의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W. Pannenberg, "On the Theology of Law," Pannenberg, 윗글(1981), 23-56쪽 볼 것.
이러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린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사회에서 평화와 정의를 실현하는 나라였다. W. Pannenberg, "Constructive and Critical Functions of Christian Eschatology," Harvard Theological Review, 77권 2호(1984), 120쪽 볼 것.
법은 정의 구현에 필요하다. 평화와 정의로운 사회에는 모든 개인이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기 몫을 나눠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평화와 정의로운 삶의 공동체는 정치적 행동이나 사회 질서의 변화를 통해서 실현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다만 외부적 평화와 정의만을 이룰 뿐이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는 판넨베르그가 잘 지적한 것과 같이 언제나 권력이 남용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Stanley J. Grenz, "Ecclesiology," Reason for Hope: The Systematic Theology of Wolfhart Pannenberg(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0), 156쪽.
따라서 모든 정치 질서는 비록 그것이 기독교적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비추어 보면 잠정적일 수 밖에 없다. Pannenberg, 윗글(1981), 13쪽.

정의로운 삶의 공동체가 정치적 질서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실현되지 않는다는 이 사실은 사회가 정치 질서 곧 평화와 정의로 나타나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적 실재의 이상으로서의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주로서 다스릴 때 실현된다. 이 때 인류는 완전한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는 삶의 공동체를 경험할 것이다.
넷째로, 교회는 사랑이 실현되는 삶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는 자기 희생의 사랑이 실천되는 삶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사람의 모든 삶의 영역이 정의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자기 희생적 사랑의 질서에 지배받을 때 실현된다.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정의가 법과 일치될 수 없다. 법은 정의 구현을 위하여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다. 궁극적인 정의는 오직 자기 희생의 사랑을 통해서만 성취된다. 이러한 뜻에서 사랑은 율법의 중심 내용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다. 이러한 사랑이 실천되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이 요청된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모든 사회적 노력을 포함한다.
이 자기 희생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이 구속적 사랑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사랑의 사귐을 위해 서로 서로에게 자기 자신을 주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을 행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 특징이 창조적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를 용서함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다섯째로, 교회는 개방적 삶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의 특징은 개방적이다. 이 사회는 어떤 특정 종교나 문화나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제한된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만의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이 사회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만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온 인류에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의 시대에서 이러한 보편성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의 모습을 잘 나타내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상호 섬김의 공동체가 되게 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가 갖는 특징 중의 하나는 구성원 상호간의 섬김이다. 모든 개인은 삶의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 섬기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일한다. 이것은 자기 희생의 삶의 원리에 기초한다. 이것은 인격적 존재로서 갖는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상대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존재하고 일한다. 이것이 사랑의 사귐을 유지하기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러한 방향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가야 한다. 이 방향은 교회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서 마련해 가야 할 모든 구체적이고 제도적인 사회 변혁 방안의 기본 틀이며 원리이다. 주되심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이 방향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 등을 포함한 모든 영역을 변혁시켜 가야 한다. 이러한 변혁의 노력은 정치신학 경제신학 문화신학 사회신학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모든 창조의 질서가 이러한 방향으로 변혁되어야 하며 그것은 바로 만물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요구하는 바다.
교회는 위에서 제시한 방향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따르는 고난을 믿음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변혁의 일은 위에서 살펴 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위한 것이고, 이 주되심의 실현은 바로 믿음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되심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이 주되심의 실현을 위해서 받는 고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주로서의 다스림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다. 이것이 교회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다.
교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모든 창조의 질서를 변혁시켜 가는 노력을 기울여 가야 하면서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이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되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만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과 판넨베르그가 사회의 표상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때 ‘하나님 중심’의 생각을 강조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John Calvin, Calvin's Commentary on Psalm, 118:25과 Pannenberg, 윗글(1969), 52쪽 볼 것.
이러한 사회의 실재(reality)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의 실재이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그 당시 정치적-경제적 실재와는 대조를 이루는 사회적 실재로서 하나님이 건설하는 것이었다. 칼빈이 강조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으로 증진시키거나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John Calvin, 윗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서만 온전히 성취된다. 이러한 점에서 바이스(Johannes Weiss)와 슈바이쳐(Albert Schweitzer)와 더불어 판넨베르그가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정부나 정치적 혁명으로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한 지적은 옳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란 예수 당시 열심당(the Zealots)에 속한 사람들이 정치 혁명을 통하여 회복하려 했던 유대인의 정치적 이상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칸트나 리츌이 이해한 사회와도 구별된다. 그들에게서 사회란 윤리적 사회로서 인간의 도덕성 개발을 통해서 성취하는 목표였다. Pannenberg, 윗글(1969), 33쪽 볼 것.
더 나아가, 이 사회는 몰트만(J. Moltmann)과 같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인간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이룩될 수 있는 사회와도 다르다.
또 다른 하나의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는 이미와 아직(already-not yet)의 긴장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실현되었으나 미래의 최종적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공동체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칭호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갖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관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의 삶과 일 전체를 통해서 그의 주되심을 이미 실현하였다. 그는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에게 바침으로써 세상의 주가 되셨으며 죄의 세상을 그의 주되심의 영역 안으로 이끌어 들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사람들을 그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로서의 다스림이 실현된 사회는 정치적 질서가 아닌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것은 개혁이나 사회 관계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되심의 실현에 대한 개인의 태도에 대해 묻게 한다. Pannenberg, 윗글(1981), 11쪽 볼 것.
주되심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에게는 이 사회는 이미 현실로 닦아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와 연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주되심의 사회적 실현인 사회에 현재적으로 참여한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희생의 사랑을 그들의 삶의 공동체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원리로 살아야 할 것을 요청 받는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의 주이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미 시작된 사회를 매개하고 구현함으로써 그것의 발전적 실현에 기여한다. 역사의 미래는 이러한 실현 과정의 최종적 완성이다.

4. 교회의 사회 참여의 방법: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되는 사회를 향해서 해야할 사회적 책임 이행의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주되심의 실재(reality)이다. 그러면 어떻게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될 수 있는가?
판넨베르그는 교회가 성례전적 사귐을 통해서 인류의 정치적 이상인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이 역사의 끝에 실현할 실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정부나 정치적 혁명으로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질서에서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갖는 것도 아니다. 개인과 사회의 반목의 최종적 해결은 인간 역사의 현재적 조건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종말론적 이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뿐만 아니라 각 개인이 맞는 인류의 최종적 상태가 실현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어떤 사람도 더 이상 지배적인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만 비로소 사람의 사람에 의한 지배와 이 지배와 어쩔 수 없이 관계되는 정의롭지 못함이 끝이 난다.” 윗글, 70쪽.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다스림만이 사람의 사람에 대한 지배가 없는 사회를 가져 올 수 있고 따라서 사람의 사회적 종국을 성취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미래의 실재는 이스라엘의 전통이 시사하는 바와 일치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표상하는 메시지의 출발점이 이스라엘이 기대하고 있는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와도 일치한다. 윗글, 53-68쪽 볼 것.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역사의 마지막에 실현될 하나님의 나라에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것에 근거할 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이 ‘하나님 나라’에서 실현될 인류의 보편적 정치적 이상의 선취(prolepsis)이다. 이 미래 실재에 대한 판넨베르그의 강조는 그의 보편 역사 전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원은 19세기 후반 때 바이스와 슈바이쳐가 주창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격 회복에 거슬러 올라간다. 판넨베르그에 따르면, 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상징적인 방식으로만 오늘에 임한다. Grenz, 윗글, 156-157쪽 볼 것.
교회가 갖는 성례전적 교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질 인류의 보편적 정치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는 선취적 형태이다. 이러한 뜻에서 이 성례전적 사귐은 인류가 역사의 종말에 실현할 공동체적 삶의 표징이다. W. Pannenberg, The Church, Keith Crim 역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9), 151.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서 다스리는 삶의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선지자적 사명에서 찾아야 한다. 이 사명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매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사건’으로 이미 실현되었고 미래의 최종적 완성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전제한다. 칼빈과 바르트가 잘 지적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시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사랑(agape)을 세상에 계시하였고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의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 선포를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에게 자신을 바침으로써 세상을 어두운 죄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들였다. 또한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나라에 현재적으로 참여한다. 역사의 미래는 이것의 최종적 실현이다. 쿨만(Oscar Cullman)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해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의 ‘성육신’(incarnation)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미래는 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라 하였다. 칼빈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는 그가 이 땅에 온 것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고 T. F. Torrance, Kingdom and Church: A Study in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Edinburgh: Oliver and Boyd, 1956), 115쪽 볼 것. 이 주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이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는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으나 1557과 1565년 사이에 출판된 「구약 선지서 강독」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늘로 올라간 후에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John T. McNeil 엮음, Ford Lewis Battles 옮김(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5), II권 16장 14항.
사도들의 복음 선포를 통해 성령 안에서 진보를 이루고 John Calvin, Lecture 33 given on Dan. 7.8; Lecture 88 given on Mic. 4.3 볼 것.
종말에 최종적으로 완성된다(consummation)고 해석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의 마지막에 실현될 인류의 마지막 보편적 정치 질서의 야기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이미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이며, 복음 선포를 통한 이 하나님의 현재적 진보 역시 미래 실재에 이르기 위한 잠정적 실재가 아니라--비록 불완전하지만--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인 미래 실재는 바로 이러한 과거의 시작과 현재적 진보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이 시작과 진보가 미래의 실재를 보증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매개하기 위한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은 첫째로,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이 땅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도록 한다.
둘째로, 이 땅의 사람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되는 공동체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살도록 가르치는 일이다. 자유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고 인간이 갖는 품위와 사람답게 사는 권리가 보장되는 삶의 공동체가 포함된다. 이 일은 이 땅에 사는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구속의 차원 곧 정의를 넘어서서 자기 희생적 사랑의 원리가 실현되는 사회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셋째로, 선지자적 말씀 선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를 매개하는 교회의 사명은 그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이루어감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 주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매개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매개하는 교회의 일은 그 공동체 자체가 만물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삶의 공동체가 되는 것과 늘 같이 간다. 이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의 본질은 이 주되심에의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통해 다스리기 때문에 이 순종은 성경 말씀을 따르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과 삶의 원리를 공동체적으로 추구하고 실천해 가도록 그리스도로부터 부름 받았다.
이와 같이 교회는 복음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다스림을 받도록 하게 하고 나아가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실현되는 공동체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이 될 수 있다.

맺는 말

이제까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현을 위한 신앙의 영역이라는 것을 이 주되심의 전망에서 밝힘으로써 '열린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을 드러내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다스림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받아가기로 헌신한 주되심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 주되심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사회와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이 주되심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며 이 영역의 구속 즉 자기 희생의 사랑이 삶의 원리로 실천되는 것을 목표한다. 사회는 인간 삶의 중요한 영역으로서 그 주되심의 실현의 영역이 된다. 교회가 해야 할 사회 변혁의 구체적 방향은 이 주되심이 실현된 사회의 모습에 기초한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하나되며, 평화와 정의 및 자기 희생의 사랑 및 개방의 공동체, 그리고 구성원 모두가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이루는 방향이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실현되는 사회를 위한 교회의 책임 이행은 이 주되심의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를 매개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그 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여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도록 하는 것과 사회가 자기 희생의 원리를 삶의 원리로 실천하게 가르치는 것 그리고 교회 공동체 자신이 주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글은 교회가 사회 영역에 대하여 갖는 본질적 책임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전망에서 제시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다루는 범위에 있어서 여러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경 주석적, 역사적, 및 교의학적 논의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고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신학계에서 토론되고 있는 점들을 자세히 다루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은 교회가 갖는 사회적 책임을 교의신학의 차원에서 분석한 것이기에 한국사회 현상 분석, 이러한 한국사회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한 사회적 실체(entity)로서 갖는 사회적 기능 등과 관련하여 교회의 책임의 성격과 한계 분석은 다루지 못하였다. 본 연구를 이러한 종교사회학적 연구와 깊이 관련시키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가 될 것이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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