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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근본주의 논쟁

하나님아들 2013. 1. 26. 21:56

근본주의 논쟁

목창균/서울신대 교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20세기초 유럽에서 일어난 것이 신정통주의 신학이라면, 미국에서 일어난 것이 근본주의 신학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과 진화론과 같은 현대 과학 이론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새로운 신학을 전개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보수하고 촉진하려고 한 운동이다.

1968년에 발표된 캠벨(Robert Campbell)의 통계에 의하면, 미국의 기독교 신자 가운데 근본주의자는 2천 3백 5십만명으로 추산되며, 몽고메리(John W. Montgomery)의 조사에 의하면 미국 목사의 20퍼센트와 평신도의 25퍼센트가 근본주의 단체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미국 신학의 흐름을 논하면서 근본주의를 언급하지 않는 것은 미국의 자연경관을 살피면서 로키 산맥을 빠뜨리는 것과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근본주의자라는 말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긍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경향이 있다. 근본주의는 흔히 편협하고 논쟁지향적이며 분파주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그들이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사상에 대해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파들은 그들을 근본주의자라는 조롱스런 이름으로 불렀다.

근본주의란 명확하고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극단적으로 서로 다른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어떤 특정 집단을 가리키는 명칭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광범위한 지성적, 종교적인 흐름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에 대한 일치된 정의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 비판가들은 근본주의를 비교화주의, 분리주의,'새로운 이단' 혹은 '왜곡된 기독교'로 평하는데 반해, 변호자들은 "원칙적으로 기독교 자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평가자 자신의 기본적인 신앙노선이 무엇이냐에 따라 근본주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근본주의자라는 명칭보다는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모든 보수적 복음주의가 곧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근본주의는 일반적으로 극우파 보수주의를 의미한다. 필자는 근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개괄하고 신학적 배경을 분석함으로써 근본주의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1920년대에 일어난 초기 근본주의 논쟁을 토대로 하여 근본주의가 주장한 것과 반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한다.

근본주의의 역사

근본주의는 19세기말 북미에서 보수적이며 성서적인 기독교 정통주의를 보존하고 촉진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19세기이후 정통적 기독교는 자유주의 신학, 진화론, 역사 비평적 성서연구로부터 그 존립 마저 위협 당하는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 전투적인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 근본주의였다. 따라서 성서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을 강조하고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비평학을 단호히 거부하며 자신의 견해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등이 근본주의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근본주의 연구의 대가, 샌딘은 근본주의를 근본주의운동과 근본주의논쟁으로 분류하고, 근본주의는 1920년대의 근본주의 논쟁 전, 후에도 종교운동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근본주의가 정통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논쟁을 통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보지 않고, 그 논쟁과 독립적으로 존재했다고 본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9세기 중엽까지 근본주의자라고 불리운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로 불렀다. 그 후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세력과 보수주의세력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근본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 비평적 성서주석과 현대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반대운동으로 일어난 것이다.

근본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었다. 특히 1878년 나이아가라 성경대회(the Niagara Bible Conference)에서 채택된 나이아가라신조는 근본주의의 중심적인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1895년 나이아가라 대회에서는 근본주의란 말이 성서해석의 기본 입장을 진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근본적인 것들」(The Fundamentals)이란 제목의 소책자가 미국에서 발간되던 기간을 근본주의의 시작으로 간주하며, 근본주의란 용어도 이 책자로부터 유래했다고 본다.

이것은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유럽과 미국의 신학자들의 공동 작업으로 총 12권이 출판되었으며, 64명의 기고자들 가운데는 저명한 보수주의 학자와 설교가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몰간(G. Campbell Morgan), 워필드(Venjamin B. Warfield ), 올(James Orr), 토레이(R. A. Torrey), 피어슨(A. T. Pierson), 어드만(Charles Erdman) 등이 그들이다. 이 책자들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두명의 평신도, 레이먼(Lyman)과 스튜와르트(Milton Stewart)의 재정지원으로 출판되어 영어사용권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주일학교 교사, YMCA와 YWCA 책임자 등에게 주소가 입수되는 대로 무료로 3백만부 이상 보내졌다. 여기에 수록된 총 90편의 논문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초자연적인 이적 행사와 대리적인 속죄의 죽음, 육체적 부활과 승천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들로 간주했던 반면, 사회주의, 열광주의적 이단, 고등비평주의, 진화론, 신령주의 등을 기독교 신앙의 적으로 취급했다.

20세기 초반에 근본주의는 조직화되었으며 현대주의사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로교와 침례교에서 더욱 그러했다.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총회는 근본주의자들의 영향력에 의해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과 육체적 부활, 기적으로 요약되는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으로 선언했다. 이 선언은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재확인되었다.

한편 침례교단에서는 1919년 북침례교회의 라일리(William B. Riley), 남침례교회의 모리스(Frank Morris), 캐나다 침례교회의 쉴즈(Thomas T. Shields)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에서 세계 기독교 근본주의 협회(World's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s)가 창립되었다. 이 모임은"문서, 자유주의자와 논쟁, 성경대회를 통해 미국인의 신앙생활의 우선 순위를 성서적 기독교에 두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들은 1923년에 침례교 성서 연합(the Baptist Bible Union)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모체가 되어 1932년 근본주의 침례교단(the General Association of Regular Baptist Churches)이 창립되었다. 또한 디한(M. R. DeHaan), 왈부우드(John F. Walvoord), 버스웰(J. O. Buswell, Jr.)을 중심으로 미국 독립근본주의 교단으로 미국 침례교 협회(the Amencan Baptist Association), 그레이스 형제단(the Grace Brethren)등이 창립되었다.

성서학원의 설립과 대중 활용이 근본주의의 확장에 크게 공헌했다. 1930년까지 심프슨(A. B. Simpson)의 선교사 훈련원(Missionary Training Institute, 1882)과 무디(D. L. Moody)의 무디 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 1886)을 비롯하여 50개 이상의 성서학원들이 설립되어 근본주의 입장에선 인물들을 배출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대중 언론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들의 입장을 전파하는데 신문, 방송, 잡지를 적극 활용했다. 근본주의의 운동과 논쟁은 192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으며 그 후에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현대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패배한 것과 근본주의 운동 내부의 분열이 약화의 원인이었다. 1925년 근본주의자와 진화론자의 대립으로 일어난 원숭이 재판사건은 근본주의의 대중적인 기반에 타격을 주었다. 이 재판의 결과로 근본주의자들은 과학에 관해 상당히 무식하다는 여론의 평가를 받았으며 일반 대중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은 교권투쟁에서도 패배하여 교단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한편 근본주의 내부에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다. 근본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가운데 그 신학과 교리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과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근본주의의 논쟁지향적이며 반지성주의적 경향과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1914년에 미국복음주의협회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만들었으며, 이것은 옥켄가(Harold Ockenga), 헨리(Carl Henry),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등의 지도하에 크게 성장했다. 이 새로운 운동이 신복음주의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소속교단을 탈퇴하거나 교단으로부터 면직된 근본주의자들 중 일부는 새로운 교회와 교단을 창립함으로써 1930년대에 신근본주의운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929년 매첸(J. Gresham Machen)은 프린스톤신학교 교수직에서 쫓겨난 후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1936년에는 점차적으로 자유주의화 되는 북장로교에 대항하여 정통주의 장로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914년에는 매킨타이어 (Car1 Mclntire)의 주도로 반현대주의 적인 미국교회협의회(the 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그리고 1948년에는 반 W.C.C.적인 국제기독교협의회(the 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가 창립되었다. 1950년에는 근본주의의 교리를 근본신조로 하는 성서침례회(the Bible Baptist Fellowship)가 창립되었다. 성서침례회는 급성장하여 미 대륙에서 가장 큰 근본주의의 교단이 되었으며 현재 약4천개의 지교회를 가지고 있다.

근본주의는 본래 보수적인 종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점차 그 영역이 문화, 사회, 정치분야에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근본주의는 극단의 정치적 보수주의와 손을 잡았다. 근본주의자들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적인 문제에도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1970∼80년대에 급속히 성장한 근본주의는 팔웰(Jerry Falwell)의 주도로 정치적 행동 그룹인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를 창설하여 정치인을 위한 성경운동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80년과 '84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레이건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함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근본주의 신학적 배경

근본주의의 근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의 차이가 있으나. 근본주의가 어느 한가지 신앙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근본주의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견해의 응합이었다. 19세기 부흥운동의 신학과 프린스톤신학을 근간으로 하여 여러 줄기의 복음주의적 흐름을 계승한 것이다. 샌딘에 따르면, 근본주의의 근원은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다. "근본주의는 19세기의 서로 연합될 수 없는 두 신학의 조류, 즉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이 1918년까지 공동의적인 현대주의와 싸우려고 공동전선을 펴기 위해서 형성한 일종의 연합 운동이다."「근본적인 것들」에 논문을 기고한 저자들 가운데 19명이 세대주의자였으며, 세대주의의 전천년설, 성경의 문자주의, 축자 영감설 등이 근본주의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프린스톤신학은 근본주의 운동에 조직과 지도자와 기본적인 신학체계를 제공했다고 보았다.

한편 샌딘이 근본주의의 근원을 세대주의와 프린스톤신학으로 보는 것과 달리, 말스덴(George M. Marsden)은 그것 이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있음을 주장했다. 부흥회 운동, 성결운동, 전천년설과 칼빈주의 등이 그것이다. 말스덴에 따르면, 근본주의는"기독교를 현대 사상속체 집어넣으려는 현대주의자들에게 맹렬하게 대항한 운동"으로서 "여러 가지 서로 모순되거나 절대로 일치할 수 없는 전통과 흐름의 모자이크였다."말스덴은 근본주의의 중심신학을 형성한 것은 부흥회주의와 경건주의 전통이었으며 여기에 성결운동과 프린스톤신학 전통이 첨부되었다고 보았다.

바(Barr) 역시 근본주의가 여러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복음주의적 부흥운동과 하지와 워필드의 프린스톤신학을 근본주의 근원으로 지적하면서도 부흥운동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는 근본주의 형성의 유력한 전통을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이라는 종교체험으로 보았다. 이름뿐인 기독교인과 진정한 기독교인을 대조시키는 것이 근본주의의 핵심이 되었으며 모든 근본주의자들의 사상과 행동의 기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바는 근본주의 운동은 복음적 부흥사들이 신학적 입장을 토대로 하였으며, 여기에 주요한 교리적 흐름으로 하지와 워필드의 프린스톤신학이 포함되었다고 보았다.

이상의 견해를 종합할 때, 근본주의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성서적 기독교를 보존하려 했던 다양한 그룹의 연합체였다. 신학노선상으로는 칼빈주의자와 알미니안주의자가, 종말론적으로는 전천년주의자와 무천년주의자 또는 후천년주의자가, 정치제도적으로는 감독교회지지자와 회중교회 지지자가함께 근본주의 운동에 속해 있었다.

근본주의 신학은 5개의 조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 무오설과 그리스도에 관한 4개의교리, 즉 동정녀 탄생, 대속적인 죽음, 육체적 부활 그리고 육체적 재림이 그것이다. 성경무오설이 성경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교리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기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그리스도의 기적, 인간의 전적인 타락 등의 교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되기도 하지만, 근본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술한 5개 조항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다. 이 가운데 성경관과 천년왕국설을 중심으로 근본주의의 신학적 입장을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근본주의의 중심점은 성경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 영감설, 성경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강조했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들」에 게재된 총 90편의 논문 중 29편이 성경의 권위문제를 주제로 삼았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근본주의는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므로 어떤 종류의 과오, 즉 신학적 과오는 물론 역사적, 지리적, 과학적 과오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성경 무오의 신앙과 축자영감의 개념은 고대 기독교의 유산이며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본질적 부분이다. 20세기에 이것을 보존한 것이 근본주의이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주요한 근거는 디모데후서 3장 16∼17절과 베드로후서 1장 20-21절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본문에 대한문자적 해석에 근거하여, 성경이 영감을 받고 무오 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특히 하지와 워필드의 프린스톤신학에 크게 힘입고 있다. 하지에 따르면, "성서가 무오하며 신적인 권위를 가졌다는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 때문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은 그 책이 성령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프린스톤신학의 성서교리는 성서는 영감을 받았기 때문에 무오하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러한 입장이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근본주의 신학은 '한 주요한 교리, 즉 성경의 무오성의 신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천년왕국설은 근본주의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전통적인 전천년설자와 세대주의자들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한편, 자유주의자와 대항해 싸움으로써 근본주의를 형성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근본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문자적, 육체적 지상 재림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 원리로 간주했지만, 그러나 재림의 때와 방법에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를 제시하지 못했다.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전천년설자와 세대주의자였으나, 모든 전천년설자가 반드시 세대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세대주의자는 전천년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의 체계를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근본주의자가 반드시 전천년설자도 아니었다. 개혁교회와 프린스톤신학은 전통적으로 문자적인 의미의 천년왕국설을 부정해왔다. 따라서 근본주의자 가운데는 전천년설자가 압도적이었으나 후천년설자와 무천년설자도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에 따르면, 근본주의는 천년왕국설자들과 천년왕국설자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연합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근본주의 신학은 새로운 것이나 독창적인 것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신학의 내용이 개신교정통주의와 동일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정통주의 신학사상으로부터 몇 가지 교리를 도입하여 이를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통성의 표준으로 삼았다.

근본주의 논쟁

근본주의 운동은 논쟁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 왜냐하면 근본주의는 본래 자유주의신학, 성서비평주의, 성서적 창조론에 대한 과학적 진화론의 도전 등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난 전투적 반작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본주의에 있어서 논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은 성경의 권위, 진화론의 타당성, 성서비평의 기술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1920년대에 그 절정에 달했다. 필자는 몇가지 논쟁점과 사건을 중심으로 초기 근본주의 논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근본주의 논쟁의 핵심 주제는 성경의 권위문제였다. 성경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며 성경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자와 근본주의자의 근본적인 논쟁점이었다. 자유주의는 문학비평과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복음서 기록의 역사성을 문제시했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기적과 같은 성경의 초자연성을 부정했다.

자유주의는 최고의 권위를 성경 자체에 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두었으며 개인문제보다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와는 달리, 근본주의는 신앙과 생활의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에 두었다. 성서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을 강조하는 한편, 성서비평을 거부했다. 그리고 사회문제보다는 개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상반된 입장으로 인해 논쟁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근본주의자들이 자유주의를 기독교가 아닌 전혀 다른 종교요 기독교 내의 치명적인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은 포스딕 사건을 통해서였다. 포스딕(Harry E. Fosdick)은 침례교 출신의 자유주의 신학자요 저명한 설교가였다. 1922년 6월 포스딕은 뉴욕 제일장로교회 초청목사로 활동하면서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이 설교를 통해 그는 자유주의자들도 기독교인임을 강조했다. 또한 근본주의자들의 편협과 불관용을 지적하는 동시에 그들의 관용을 호소했다. 포스딕의 의도는 근본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논쟁을 완혹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논쟁을 더 격화시켰던 것이다. 메카트니 (Macartney)는 "포스딕 박사에게 답함 :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통해 포스딕에 대응했다. 그는 자유주의가 교회를 서서히 세속화시키고 있다는 것과 이를 저지하지 않으면 새로운 종류의 기독교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어번 선언(the Auburn Affirmation)이라고 불리우는 자유주의 선언을 통해 근본주의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1910년 북장로교총회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등 5개조의 교리를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으로 선언했으며 1916년과 1923년 총회에서 그것을 재확인했다. 이 선언은 근본주의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총회 직후인 1924년 1월, 어번 선언이라고 불리우는 문서가 150명의 서명과 함께 출판되었으며 그 후 1274명의 서명이 더 첨가되었다. 이 선언은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주내용은 총회가 어떤 교리를 본질적인 것으로 정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과 총회가 선언한 5개조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무오의 교리를 '매우 해로운 교리'로 간주했다. 이 어번 선언을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이 계속 이어졌다.

1925년 원숭이 재판사건은 근본주의 논쟁을 절정에 이르게 했다. 테네시주의 고등학교 교사 스콥스(John Scopes)는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있는 테네시주의 법령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국방상을 역임한 유명한 변호사요 교회 장로인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이 근본주의 입장을 변호했던 반면, 한 무명신문 기자는 스콥스를 변호했다. 이 재판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싸움이었다. 결과는 브라이언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과학에 대해 무식하다고 매도당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 재판의 여파로 일반 대중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그 기반을 잃어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논쟁은 현대주의의 승리로 끝났으며, 근본주의자들은 교단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소수파로 밀려나게 되었다.

맺는 말

근본주의는 20세기초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성서적이며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어난 종교운동이다. 근본주의는 정통주의의 교리 중 다섯가지 항목을 기독교 신앙의 근본원리로 강조했으며 핵심은 성경의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이었다. 반면, 근본주의는 세속주의, 현대 과학의 진화론, 자유주의,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극렬히 반대했다. 따라서 근본주의자들은 호전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택한 방법과 태도는 비판받을 수 있다. 근본주의는 종교문제에 이성을사용하는 것을 거부할 정도로 이성과 학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근본주의는 과거의 것을 단순히 보수하고 되풀이하는 것을 신학의 과제로 간주했다. 따라서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다시 표현하고자하는 학문적 노력을 불필요시했다. 이 점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갈라진다. 양자는 신앙의 내용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옹호하는 방법이 다르다. 메이첸은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졌었지만 근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근본주의가 이성을 불신하고 문화를 도외시하며 성직에 대해 무관심하며 지나친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것을 개탄했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일종의 타락된 복음주의로 보았다.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복음주의적 신앙과 교리를 수호하려 한 것과 자유주의의 거센 흐름을 차단하는 동시에,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주의의 위험성을 각성하게 한 것은 근본주의의 역사적 공헌점이다. 근본주의가 성서의 무오성과 초자연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에 반대한 것은 정당하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원리들을 보존하려는 열심과 순수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목창균/드루대학교에서 조직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서울신대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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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최경복의 희망광장
글쓴이 : 최경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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