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리!! 교의신학!! 변증학!!

[스크랩] ?정경옥의 신학사상 1

하나님아들 2013. 1. 26. 16:28

정경옥의 신학사상 1



한숭홍/연세대 신학과와 같은 대학의 연합신학대학원 및 뮌헨대, 튀빙겐대에서 공부했고, 아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장신대 교수이며, 「문학종교학」「기독교 교육 철학사상」등의 책을 썼고, 「20세기 종교사상」「20세기 사회사상」「사회철학이란 무엇인가」등의 책을 번역했다.

기독교(基督敎)는 세계(世界) 여러 가지 다른 종교(宗敎)들과 같이 간주(看做)하여야 할 것을 믿는다.

-정경옥, "나의 신조"21 (1932)-

예수의 말세관(末世觀)은 순전(純全)히 정신적(精神的)이며 도덕적(道德的)이었다. 그러므로 시공(時空)의 문제(問題)가 아니였다. 존속(存續)의 문제(問題)도 아니었다. 생활문제(生活問題)이다. 질(質)의 문제(問題)이었다. 그러므로 천국에 있어서도 어느때에는 현실적(現實的)이오 어느때에는 초자연적(超自然的)이었다.

-정경옥, "기독교의 영생론"(1934)-

이 시대(時代)는 각각(各各) 자기(自己) 문화(文化)에 대한 자아반성(自我反省)을 요구(要求)하고 있다. 기독교(基督敎)는 세계(世界)의 소유(所有)이다. 그러므로 기독교(基督敎)를 해석(解釋)하는 방법(方法)과 그 형태(形態)는 각자(各自)의 문화형태(文化形態)에 비추어 향토화(鄕土化)하고 시대화(時代化)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것이 이 시대(時代)에 있어서의 신학(神學)의 임무(任務)일 것이다.

-정경옥, "기독교 신학개론"(1939)-

I . 머리말

기독교는 처음부터 주위의 종교와 더불어 상호교류 하면서 변형·발전 되어온 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학이란 복음이 전파된 문화권에서 그 문화권 내의 종교와 공존하며 보완되어 왔다. 지난 수세기의 신학사를 개관해 보면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여러 측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때에는 신학이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접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상호 관계를 부정적 시각으로 보며 거부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반응은 지금 이곳에서 찬반논쟁으로 계속되고있다.

오늘날 한국 신학계의 관심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와 타종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서양신학계에서는 이미 해묵은 논쟁으로 논의의 열기가 식은 지 오래된 것이지만, 지금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 문제로 신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 일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는 그 종교가 전파된 문화권 내에서 그곳의 종교와도 교류되고, 상호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종교학적으로도 규정되어야 한다.1

정경옥 교수는 한국신학 형성에 어떤 형태로든지 영향을 끼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신학함은 그가 활동하던 시점에서 본다면 전위적이었고, 종교 신학적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는 첫째 보수주의적 신앙과 자유주의적 신학의 변증법적 합(Synthese)을 그의 신학구조로 설계했고, 둘째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주의를 지양하고,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동일가를 수용하는 종교 상대주의를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으로 설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한편으로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경계선상 위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경계선상 위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신학하며 전진해 갔다. 우리는 그의 신학함을 개관하면서 마치 줄타는 곡예사의 묘기를 보는 것같은 긴장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조화와 균형을 잘 이루면서 진보한 신학이었다.

오늘날 한국 신학계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독교와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이론이 이미 그의 신학론에서 제기된 것을 한국 신학사상계는 증언하고 있다.2 "어떤 점이 그를 한국종교신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정하게 하는가?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신학과 사상을 분석·해석·이해·평가하는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그를 재조명하고, 그의 신학과 사상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것이다. 신학의 곡예사 정경옥,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가?

Ⅱ . 정경옥의 성장배경

정경옥(鄭景玉) 교수는 1903년 5월 24일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면 교동리 103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성장했으며, 그의 입교동기는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는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진도국민학교 시절에 장로교에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3 그는 진도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게속했으나 3.1운동으로 학교가 폐교함에 따라 YMCA에서 영어공부를 계속하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신학공부를 했으나 동경지진으로 귀국하였다.4 그후 그는 1923년부터 1927년까지 4년동안 감리교협성신학교(현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정규 신학공부를했다. 토론, 변증, 논쟁 등을 좋아했던 그는 논리정연하고 냉철한 호소력에 의지하기 보다는 주로 정열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에 의존해서 그의 주장을 밀고 나갔던 재담가였다. 이처럼 토론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신학교 재학시절 주로 이용도와 신학문제로 논쟁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5 "두 사람이 일단 논쟁이 붙게 되면 밤을 새는 수가 한두번이 아니었다6는 것이다."

그는 1927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곧이어 도미하여 시카고 근처 에반스톤(Evanston)에 있는 개 렛(Garrett)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였고, 1929년 롤(Harris Franklin Rall)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학업을 마치고 신학사(B.D)학위를 받았다.7 특히 그의 주임 필수였던 롤 교수는 당시 미국 사상계를 휩쓸던 인격주의(Personalism)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8 개렛신학교를 졸업한 다음 그는 같은 지역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n University)대학원에 진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며, 1931년 5월 "신비주의의 저등과 고등형식들 간의 차이와 관련한 J.H.류바의 종교적 신비주의 심리학에 관한 고찰"(An Examination of J.H. Leubas Psychology of Religious Mysticism with Reference to the Distinction between the Lower and Higher Forms Mysticism)이란 논문으로 문학석사(M.A) 학위를 받았다.9

미국 유학4년 동안에 받은 신학교육은, 비록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생애 동안 그의 신학사상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정경옥이 유학중이던 때는 미국 신학계가 독일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10 청교도적 신앙중심주의에서 비판적 신학사상을 수용하던 때였다. 당시 그들은 예일대학(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의 매킨토쉬(Douglas C. Macintosh), 보스톤대학의 브라이트만(Edgar S. Brightman)과 넛슨(Albert C. Knudson)의 인격주의, 시카고대학의 와이즈맨, 매튜스(Shailer Mathews), 시카고 사도신학원(The Disciples' Divinity House)의 에임즈(Edward S. Ames), 유니온 신학교의 존 베일리 (John Baillie)와 라이만(Lyman), 개렛신학교의 롤(H.F.Rall)등등으로부터 자유주의적 신학성향을 띤 인격주의 신학사상을 미국신학계에 널리 확산시켰다. 그것은 정통 보수주의에 대한 강한 대립적 입장을 견지하던 한 흐름이었다. 특히 알브레히트 릿출(Albrecht Ritschl)신학은 윤리적 규범자체에 신학의 초점을 모았기 때문에, 실용주의적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선호하던 미국인들에게는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엽의 미국신학계는 형이상학적 접근방식에 의존하고 있는 사변신학보다 오히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동인(Motiv)에 절대가치를 부여하려는 릿출학파의 규범신학에 더 매력을 갖게 된 것이 사실이었다.11

19세기 말기부터 독일의 성서비평학이 미국으로 흘러들어오면서 대다수의 신학교들은 성서비평학을 새로운 성서학 방법론으로 간주하며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12 신학사상과 방법에 있어 급진적인 운동이 미국에 확산되자 기독교계 일각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운동에 대항해서 근본주의 운동을 전개했으나, 대류에 대항하기는 거의 역부족이었다.13 오히려 미국의 유수한 대학교의 신학부나 신학대학들은 앞다투어 신 신학의 물결을 받아들이고 소개하는 추세에 앞장섰다.

예일대학 신학부(Douglas C.Macintosh, Luther Allen Weigle, Frank Chamberlin Porter), 보스턴대학 신학부(Edgar SheffEield Brightman, Albert C. Knudson), 시카고대학 신학부(Henry Nelson Wieman, Shailer Mathews), 시카고 사도신학원(Edward S.Admes),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William Adams Brown, John Baillie, Eugene William Lyman), 개렛신학교(Harris Franklin Rall), 웨스턴 신학교(Daniel Arthur Mcgregor), 그리고 프린스톤 신학교 소장학파의 대다수 교수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적극 수용하며, 신학의 새로운 형식과 방법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 반면에 프린스톤 신학교의 노장학파 일각에서는 이런 새로운 신학사조가 밀려오는 상황을 직시하며 장로교의 정통주의적 신학경향을 더욱 강하게 보수하려 했다. 메이첸(G.Machen)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1929년 정통보수주의 신앙을 표방하는 웨스트민스턴 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필라델피아에 설립하였으며, 이곳에서 정통보수주의적 칼빈주의의 전통을 이어가려 결심했다.14 이처럼 20세기의 초기 30여년 동안은 미국 신학계가 자유주의 신학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학적 대립과 갈등, 더 나아가서 반목과 분열로 평온한 기독교계에 큰 파문을 던졌던 시대이다.15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로 미국의 여러 신학교들이 어수선하던 때였지만, 정경옥은 자유주의 신학을 아무런 제재나 걸림돌이 없이 완전히 도입 소개할 수 있었던 두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마음껏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롤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입장과 인격주의를 강하게 수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정립할 기초를 세웠고,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는 종교심리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받은 이런 신학교육 배경을 통해 그의 신학이 매우 종교신학적 경향을 나타내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16

한국에서 협성신학교에서 4년동안 신학을공부했고, 미국에서도 개렛신학교에서 2년간 신학을 공부하여 신학사(B.D)학위까지 받은 그가 왜 노스웨스턴 대학교 대학원에서는 종교심리학을 전공하여 학위(M.4)를 받았는지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그는 교리와 전통에 구속될 수 밖에 없는 신학에 대한 매력을 버리고 학문연구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종교학에 새로운 매력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유주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도입하기 위하여 슬라이에르마허(F. Schleiermacher)가 그의 「종교론」 (Uber die Religion: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achtern)을 통해 신앙의 궁극적 정서주의를 주장했던 방법을 따라 일단 신학을 계속 연구하는 과정을 중단하고 종교학의 영역인 종교심리학 쪽으로 관심을 펼쳤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렇다면 그는 자유주의신학을 좀더 철저히 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 종교학을 먼저 수용 · 정립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은 다만 사실적 근거가 없으므로, 매우 논리적 주장을 펴기에 약하지만, 그러나 그가 짧은 생애동안에도 불구하고 남겨놓은 많은 글들 가운데서 거의 우리의 추측이 매우 타당하고, 근거있는 추측이었음이 입증되고 있어 간접적으로나마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17

그는 1931년 귀국하자마자 감리교 협성신한교 조직신학 강사로 취임하게 되었다.18 그때까지 그는 목사안수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서울 근교의 작은 교회를 담임, 전도사 과정을 밟으며 연회에서 해마다 한차례씩 진급시험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강의하며 목회하기를 3년이나 하고 난 뒤에 그는 목사안수를 받아 정교수가 되었다.19

교수로서 정경옥은 몇가지 특징을 나타냈던 인물이다. 당시 직접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산 증인인 윤성범 교수는 그의 언변이 매우 설득력 있었던 점을 기억하면서 "그의 열변은 온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고 말았다. 그의 설득력은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실토했다.20 그를 직접 만나보았던 김철손 교수는 "똑똑한 사람이고 학적 실력이 대단하고 게다가 진보적인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젊은 세대(학생들에게)"인기가 높았다"고 인상을 적고 있다.21 어쨌든 정경옥은 그의 전공분야에서 매우 인기있는 교수로 학문탐구에 정진하여 많은 논문을 쓰기도 했는데,22 이것은 그에게 너무 무리한 것이었고 그래서 1937년부터 1939년까지 2년 동안 그는 학교를 쉬며 고향의 바닷가에서 요양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23

이 요양기간 동안에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현대적 이해를 8장에 걸쳐 서술하여 「그는 이렇게 살았다」(1938)라는 제목으로 책을 한권 출판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그 동안 학교에서 가르치던 재료를 손질해서"24 「기독교 신학개론」(1939)을 출판하였다. 그는 당시 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세상 물정(物情)에 시달리고 죄(罪)에 허물로 병들었던 내가 새로운 영감(靈感)을 얻어 보려고 향촌(鄕村)의 바다가를 찾아온지 벌써 일년(一年)이 다 되었다. 그동안 나는 해변(海邊)에 가서 낚시질도 하였고 산(山)에 올라서 명상(瞑想)도 하였다. 흙을 가까이할 기회(機會)도 많았고 등화(燈火)를 친(親)히 할 여유(餘裕)도 있었다.

그러나 그 동안에 무엇을 얻었는지 나는 모른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내가 좀더 참되게 살아야 하겠다, 좀 더 뜻있는 일을 하여야 하겠다 이러한 생각 밖에 없다.‥‥지금 나는 예수의 일생(一生)을 몹시도 동경(憧憬)하며 사모(思慕)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살았다. 그의 발자취를 나도 따르리.25

그는 1939년부터 모교에서 다시 교수생활을 시작했으나 1941년 사임하고 만주 사평가(四平街) 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942년까지 만주에 머물다가 귀국하였다.26

1943년 2월부터 그는 2년간 전남 광주 기독교회(현재 광주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다.27 이때는 일제 말엽으로 기독교의 일본화가 진행되며 변질이 심해지던 시기였고, 특히 정경옥을 파송한 감리교의 지도자들인 양주삼, 윤치호, 정충수, 신흥우, 김영섭, 이윤영, 유형기 등은 이른바 감리교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불려지는 일본교단에의 합병으로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이란 새 체제를 갖추면서 일본화를 더욱 구체화하기 시작했다.28 그리고 "순연(純然)한 일본적 기독교로 혁신"하려 했다. 이것이 1941년 3월 10일 정동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교단 창립총회를 열어 통리사 정춘수(鄭春洙, 창씨명 禾谷春洙)가 선임된 사건이다.29 1942년 12월 2일 감리교단 총회는 변홍규(卞鴻圭, 창씨명 卞田鴻圭)를 제2대 통리로 선출했고, "말세심판, 재림론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미신적 사상을 제거하며", "복음서에 있어서의 기독의 교훈 및 시범을 신앙생활의 기초로 하여 일절의 유태사상 및 그 유린을 배제한다"는 내용을 선언했다.30 그러나 정춘수계의 반발로 1943년 10월 14일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규칙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정춘수를 다시 통리로 선출했다.31 이날의 임시총회는 마치 계파 사이에 친일성향 농도를 경쟁적으로 표출 · 제시하는 연출장 같았으며, 친일적 기독교혁신교단의 변질된 작태를 보여준 친일부역의 결성총회와 같은 분위기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정춘수가 다시 만장일치로 통리사에 선출된 분위기였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 목사들이나 지도급 인사들의 정신과 태도를 단적으로 정확하게 보여준 표본이었다고 하겠다. 이날 조선 감리교단은 교단혁신을 표방하며, 유태사상배제, 구약전서와 신약의 묵시록 사용금리, 사복음서에 기인한 교의선포를 결의했다. 민경배 교수는 이때의 결의를 "이미 기독교의 정통사에서는 떠난 것"32 이라고 잘라 논평했다.

조선 기독교의 일본화와 일본 예속은 비단감리교만 당하는 일은 아니었다.33 이런 일제의 조선교회 탄압과 혁신교단으로 변질된 기독교단 내의 파송에 의해서만 활동이 합리화되던 당시의 감리교 목회는 사실상 순교적 각오가 아니면, 형식적 부역의 모양새를 띨 수밖에 없던 묘한 상황이었다.34 이런 상황은 당시의 많은 종교인들의 공통적 고민이며, 내적 갈등이었다. 바로 이 당시 정경옥은 만주에서 귀국하자마다 목회를 시작했고, 2년동안의 목회는 친일부역으로 비판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를 애국자(愛國者)로 확신하고 있다. 치재(稚齋) 김천배(金天培) 목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선생(先生)은 피끓는 애국자(愛國者)였다. 그 당시의 선배(先輩) 애국자(愛國者)들의 공통(共通)된 운명이 그러한 것이었듯이 그 역시 '강간(强姦)당한' 애국자였다. 향리(鄕里)인 진도(珍島)의 경찰서(警察署)에서 팔개월(八個月)을 썩고 난 그는 일본적(日本的) 기독교(基督敎)를 형성(形成)하라는 명령(命令)을 받고 출감(出監)하여 광주(光州)에 자리 잡았다. 나는 우연히 광주(光州)로 향하는 선생(先生)을 목포역(木浦驛) 구내(構內)에서 만나 동승(同乘)하여 광주(光州)로 올라 왔다. 나의 그를 쳐다보는 눈초리는 항의(抗議)의 불을 뿜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내 손을 힘있게 쥐며 '생각한 바가 있어'라고 한 마디 할 뿐이었다. 그의 생각이란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발악하는 일본(日本)의 진상(眞相)과 말로(末路)를 다 재어본 그는 감방(監房)에서 썩느니보다 차라리 기회를 이용하여 갑자기 오고야 말 새 한국(韓國)의 일꾼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이 생각은 진실하였다. 그는 토요일(土曜日)과 일요일(日曜日)을 제외한 매일 새벽 사시(四時)로부터 육시(六時)까지 (여름 철엔 더 일르게) 자기의 방에서 만 삼년간(三年間)을 십명(十名)남짓한 남녀 청년(男女 靑年)에게 심혈(心血)을 기울인 강의(講義)를 하였다. 형사(刑事)들은 언제나 자기들보다 한걸음 앞선듯한 그의 「일본적 기독교(日本的 基督敎)」론에 도취하여 그밖에 하는 그의 모든 짓을 간섭하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도박이었다. 이에 앞서 그는 진도(珍島) 경찰서(警察署) 유치장(留置場)에서 「일본적 기독교의 신학적 과제」라는 글을 썼다. 이천자(二天字)원고지(原稿紙)로 이천삼백여매(二天三百餘枚)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35

김천배 목사는 정경옥의 제자로서 그를 존경하고 항상 따르던 학생이었지만, "강간당한" 친일부역의 현실 앞에서 선생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야 어떻게 전개되었던지 당시 정경옥은 일본의 관계와 회유에 말려들어 사실상 친일의 길에 들어선 오점을 남겼다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강하게 들리고 있다. 이점에 관한 유동식 교수의 견해를 들어보는 것도 지금 이 시점에서는 매우 분명한 해답을 얻는 길이 될 것이므로 그의 글을 읽어 보기로 한다.

그후 정경옥(鄭景玉)은 광주(光州)에서 목회(牧會)하였다. 일제(日帝) 말엽 기독교(基督敎)를 일본화(日本化)한다는 묘한 선풍 속에 정경옥이 말려들었다는 경력 때문에 정경옥에 대한 평판(評判)은 구구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 한 제자들은 그를 애국자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친일(親日)의 가면(假面) 밑에서 그는 한국의젊은 일꾼들을 훈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6

그러나 문제는 "정경옥이 말려들었다는 경력 때문에 정경옥에 대한 평판은 구구한데가 있다"면, 그의 행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내려져야 하며, 그리고 "친일의 가면 밑에서" 그가 일꾼들을 키웠다고 하면 가면으로나마 어느 정도의 친일행위를 했는지에 관해서도 객관적으로 적나라하게 서술되어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본 논문의 관심사가 아니다. 정경옥의 친일행위, 즉 "친일의 가면"의 정체를 규명하는 작업은 또다른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정경옥은 1945년 4월 1일 복막염으로 별세했다. 그러나 그는 비록 42세의 짧은 생애동안에도 3권의 신학저서들을 비롯하여 많은 논문들과 다양한 값진 글들을 남겨 놓았는데, 그의 저서들과 대표적인 논문들은 다음과 같다.

<저서>

「基督敎의 原理」京城 : 監理敎會 神學校, 昭和10年(1935)(이 책은 감리교의 「교리적선언」을 강해한 교재 ).

「그는 이렇게 살았다」平壤 : 愛隣社會事業硏究社 出版社,1938.

「基督敎 神學槪論」京城: 監理敎會 神學校, 昭和(1939).

<논문>

「神學世界 」에 발표된 논문 가운데 중요한 것만을 추려 연대별로 열거한다. 제목 뒤의 숫자는 권수와 호수를 나타낸다.

1928

● 종교와 도덕(13:2)

1932

● 종교기원론의 본질적 비판(17:1,2)

● 나의 신조(17:3)

● 종교적 신비주의의 의의와 가치(17:4)

● 위기신학의 요령(17:5)

● 스피노사의 종교(17: 6)

1933

● 종교의 발전(18:1)

● 현대신학사상의 추향(18:2)

● 기독교사상계통(18:3, 4, 5, 6; 19:1, 2)

1934

● 기독교의 성신론(19:3)

● 기독교의 영생론(19:4)

● 과거 30년간 영미 종교철학사상의 일반경향(19:5)

● 구속의 경험론적 비판(19:6)

● 종교심리의 방법론(19:6)

1935

● 현대 미국 신학사상의 추향(20:1)

● 성오거스틴의 초연신관과 이에 관련한 종교사상에 대한 비판(20:3)

● 신학적 현대주의의 강요와 비판(20:4)

● 신인본주의 비판(20:5)

1936

● 통속신학 : 예수의 사상(21:1)

● 종교철학의 과제로 본 이적론 서설(21:2)

● 위기신학사상의 연구(21:3)

● 기독교의 6대 경이(21:4)

● 반동신학의 재현(21:5)

1939

● 현대신학의 과제(24:3)

● 전체주의와 신학의 동향-정통주의의 부흥에 대한 일고(24:4)

● 정춘수 목사의 조선감리회 감독취임을 축함(24:5)

● 푸로이드 심리분석론과 푸로이디안의 종교관(24:5)

● 기독교의 성애(24:6)

<강해>

요한1서 강해(18:1, 2, 3; 19:6; 20:1, 2, 5, 6,; 21:1; 24:5, 6)

<번역>

物의 언어(13:1)

● 기독교의 윤리관(20: 6)

● 새사람(성극, 원명 :떡)(21:5)

● 구유에 나신 예수(성극)(21:6)

● 마드라스와 기독교사상(24:4,5)

정경옥 교수는 짧은 인생을 살다간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소박함과 순수함이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그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도 아니고, 유아독존형의 기인도 아니었다. 그는 많은 글을 통해서 그의 신학과 사상을 체계화하면서 삶을 다양하게 전개했다. 그는 인격자였고, 참된 스승이었으며, 비록 "강간당한 애국자"였지만, "피끓는 애국자"였음을 그의 제자들은 철저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가 "친일의 가면(親日의 假面)"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하며, 우리는 민족지성의 한사람인 인간 정경옥이 가면뒤에서 피눈물을 흘렀을 그의 비애와 고통을 단지 민족수난사에 묻혀 흘러가는 개인사의 비극 정도로만 보아야 할지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 질문해 본다. 그는 예리한 학문 탐구자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심각한 인생 탐구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단명은 우리에게 더욱 아쉬움을 남겨 준다.

Ⅲ. 정경옥의 신학배경

1. 요한 웨슬리 (John Wesley,1703∼ 1791)

정경옥이 협성신학교에서 4년동안 신학교육을 받았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가 감리교신학과 교리의 영향권에서 그의 신학과 사상을 싹틔울 수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요한 웨슬리의 전통을 받았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웨슬리 신학을 통하여 그가 받은 신학은 하나님 중심주의 신학과 의인교리를 중심으로 하는 성화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1939년에 그의 「기독교신학개론」 서언에서 그의 신학의 면모를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과 사람과의 영원한 대립을 전제로 하고 양자 사이에 원만하고 정당한 관계를 발견하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죄악이란 사실이 이러한 이상적인 본연의 관계를 지양하고 '죄인된 인간'은 다시 구속을 요구한다. 그리하여서 기독교는 '죄인된 인간'과 '신의 구원'의 제2차적인 대립에서 현실의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사실(事實)'은 이 관계를 완결한다고 해석 한다.37

정경옥에게 깊은 영향을 준 감리교 교리를 형성하고 있는 웨슬리 신학의 중심사상은 대체로 7가지로 요약된다.

①하나님의 은혜는 우주적이고 무차별적이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

②그리스도는 모든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③하나님의 만인구원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는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④감리회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위해 도덕적 생활을 요구한다.

⑤감리회는 원죄는 믿지만, 완전타락은 믿지 않는다.

⑥감리회는 은혜의 방법으로 믿음을 인정한다.

⑦감리회는 의인도 온전히 성화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이신득의(justification by faith),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atonement), 사죄에 의한 성령의 증거와 확신,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주시는 은혜(free grace),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좇아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타락하지 않는다는 교리, 그리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영혼은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교리로 압축된다.38

요컨대, 웨슬리 신학의 이러한 사상들이 정경옥의 신학사상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으며, 이것은 그가 신학의 깊이에 몰입되면서 점차적으로 신학함 자체를 종교적 실천행위에 초점을 두며, 신앙과 신학의 이중가치를 일단구분하고 나서 완전 성화의 과정으로 이 두 종교적 본체들을 전개하려는 사상속에서 완연히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의 보수주의와 신학의 자유주의라는 이질적인 두가지 기준을 그의 신학사상에 과감하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 자체가 보수주의적이며 동시에 자유주의적이라는 일반적 두 극단의 일치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신앙의 보수주의적인 입장은 철저히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Street)에서의 종교적 체험 이후의 신앙관을 그가 이어받고 있다는 간증이며, 선언이라고 하겠다. 웨슬리는1738년 5월 24일(수요일) 밤 9시 15분경 올더스게이트 거리집회에서 회심의 체험을 통해 그의 합리적 신앙이해, 곧 신앙을 합리적인 동의나 이성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 즉 신념같은 것이 아님을 깨닫고, "성서적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내 전체이다"39 라고 간증할 정도로 그의 신앙태도의 변화를 나타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성서의 절대권위를 무조건 받아들였다. 정경옥이 "나는 신앙에서 보수주의 이다"라고 그의 신앙입장을 밝힌 것은 바로 웨슬리의 성서적 기독교에서 강조되고 역설되었던 성서의 권위를 믿는 신앙태도를 수용하고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웨슬레에게 있어서는 성서가 그의 신학의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최고의 권위였다. 웨슬레는 성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으로 그릇됨이 없다(infallibly true)고 믿었다."40

1930년대 한국 신학계에는 신앙입장을 두고 보수주의라고 불려지는 정통주의 신학주류와 일본이나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돌아온 일군의 젊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신학계와 교계에 밀려들기 시작했었다. 이즈음에 정경옥은 그의 입장을 흔히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신앙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적이지만 신학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적이라는 이론을 펼치며, 그들의 신학작업을 계속했던 방식을 빌어 "나는 신앙(信仰)에 있어서 보수주의(保守主義)요, 신학(神學)에 있어서 자유주의(自由主義)란 입장(立場)을 취(取)한다"41 고 입장정리를 했다. 여기에서 그가 공포한 신앙의 보수주의란 그 스스로 웨슬리의 중심교리를 따르는 감리회의 신조를 철저히 보수하는 입장에 있음을 강하게 표명한 선언이었다. 이만큼 그에게서 웨슬리 신학은 강하게 인상되었으며, 철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서의 권위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기계적 성서영감설까지도 수용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신묘(神妙)하고 값이 있는 은혜(恩惠)를 베푸시는 방법(方法) 혹은 기관(機關)중에 하나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알고 또 여기에 접할 수 있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42

이처럼 그가 그의 신앙보수주의를 표방하며 기계적 성서영감설을 비판했다고 해서, 그가 인간적 경험설을 수용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①주지주의(主知主義)의 일종이다. ②기계적 영감설에 기초하고 있다. ③이 세상을 인간적인 것과 초인간적인 것으로만 양분하여 대립만을 역설하는 사상이다 라고 비판하고 있다.43 그에게서 "성서는 우리의 생활에 지도와 격려와 위안과 용기를 준다. 이는 그들에 의하면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쳐 주는 가장 귀한 문학이요 교과서였다."44 다시 말해서 "첫째로 성서는 하나님의 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관한 책이다."45 그리고 동시에 "둘째로 성서는 인간의 책이다. 누구나 성서를 읽는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것을 절실하게 깨달을 것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희망과 공포가 그려져 있고 승리와 실패가 쓰여져 있다. 물론 그 중심은 신앙에 있다."46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이미 계시와 이성의 완전한 상호관계를 암시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와 인간으로부터 응답되는 이성의 변증법적 구조의 중심에 신앙을 정립한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말하는 성속(聖俗)의 반대의 일치 구상과 매우 유사한 방식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구원의 근거는 성경에 있다. 감리교가 성서적인 종교인 것은 요한 웨슬리가 이미 밝힌 바이다. '성서는 다 하나님의 감동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언(聖言)이 그리스도인의 실행과 신앙에 유일한 힘있는 법칙인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조직적으로 기독교 원리를 간명하게 표술(表述)하라고 한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의 교훈과 경험을 기초로 하여서 기독교의 근본 원리를 정의하고 이로서 우리로 하여금 그릇된 방향에 빠지지 않게하며 바른 신앙의 길에 서도록 하게 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47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신앙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적 관계유지와 인간적 삶의 정도를 이끌어 가는 성서의 권위를 확신하였기 때문에 신앙보수를 역설한 것이다. 이러한 신앙 입장을 고수하면서, 정경옥은 신앙의 보수주의를 선언하였던 것이다. 그가 웨슬리 신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은 성서적 기독교가 그 중심으로 포괄하고 있는 복음적 신앙이었다. 그는 이런 입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누구든지 그의 품격과 행위가 참된 경건과 부합되는 이상에는 개인신자의 충분한 신앙자유를 옳게 인정한다.' 여기에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원리를 선언하야 우리가 믿는바 '복음적 신앙이 우리의 유업(遺業)'이오 영광스러운 소유인 것을 표명 하자는 것에 지나지 아니한다.48

우리는 여기에서 정경옥이 웨슬리의 신학을 철저히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체험(1738)의 때와 자신의 「기독교 신학개론」(1939) 출판의 때 사이의 200년간의 시차를 겪으면서 웨슬리적 신앙양태를 "신앙에서 보수주의"란 의미로 표현했음을 추출해낼 수 있었다. 그가 명제화해서 표현하고 있는 신앙에서의 보수주의란 사상은 신앙에서의 복음주의를 의미하며,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는 기계적 영감설을 주장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복음주의자라고 하겠다. 요컨대, 그의 보수주의적 신앙, 곧 신앙보수주의는 "복음적 신앙"이란 웨슬리적 개념의 또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웨슬리의 영향은 결코 그를 18세기의 웨슬리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는 20세기 한국 상황에서 웨슬리 신학을 각색하여 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웨슬리의 영향을 뼈속 깊이 이르기까지 철저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제2의 웨슬리'라거나 '한국의 웨슬리 '라고 불려질 수 없을 만큼 웨슬리적이 아닌 것이 그의 모습 그대로이다.

2.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

정경옥이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슬라이에르마허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영향은 종교에서의 절대의존의 감정이다. 슬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종교의 본질은 사유와 행위가 아니고, 절대자에 대한 직관(Anschauung)과 감정(Gefuhl)이다.49 그러므로 슬라이에르마허는 종교는 직관과 감정이라는 두가지 질료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은 것이며, 일종의 방법론적인 것, 곧 종교성 자체인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50 그리고 그는 계속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는 우주적 실재(Universum) 내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하나의 완전한 합(Synthese)을 이루고 있는 실체, 종교란 바로 이 우주적 실재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 속에서 하나의 절대신앙을 형성하게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51 그렇다고 그의「종교론」(Uber die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achtern) 에서 표방하는 직관과 감정은 신인합일의 신비주의적 경지에서 체득될 수 있는 신체험도 아니고, 종교적 예식을 통해 개인의 삶에서 표출되는 단순한 직접적 종교체험도 아니며, 더욱이 일정한종교의 이론과 실천의 동인이 되는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종교성, 즉 인간의 종교적 본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52

정경옥이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사상에 얼마나 깊이 관련되어 있었나 하는 것은 다음의 글에서 직접 뒷받침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실로 프로테스탄트신학의 특징은 우리의 신앙이 일체의 교의와 외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생명적인 경험과 경건한 생활에 의거할 것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복음적인 것이다. 슬라이얼막헬의 사상의 중심도 건조무미한 스코라학파에 대항하여서 심정(心情)의 종교를 회복하고 회심(回心)의 의식과 성령(聖靈)의 임재에 치중하려 함이었다.53

그는 분명히 20세기초 구미에서 강하게 대두하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에 반대하는 신학 입장을 취하면서 절대자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을 그의 신앙의 역동주의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그가 신앙 내재주의에 기울여 있음을 암시하며, 매우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에 기울여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그의 신학입장과 견해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자술하고 있다.

신학을 구태여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의 두가지로 구분하고 나더러 그중에서 꼭 한가지만 내것으로 택하라고 하는 궁색한 질문을 한다면 나는 슬라이얼막헬이나 으릇쉘(A.Ritschl)이나 빨트가 주저할 것 없이 취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바 복음주의적 입장에 있어서의 계시신학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계시가 인간의 경험과 실체상으로나 본질상으로 구분된다 라고는 생각할 수는 없다.54

슬라이에르마허로부터 종교적 감정의 본질을 영향받은 정경옥의 신학사상에는 항상 종교적 정서나 종교적 '심정(心情)'을 통한 인간의 신인식 자체에 더 초점을 두었다. 이것은 이성에 의한 신에의 인식과정을 부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오는 신을 향한 의식자체를 가능케 하는 계시성을 의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정경옥은 자연이성을 수용하는 신학보다는 종교경험을 수용하는 계시신학에 보다 깊은 관심과 자신의 신학입장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성향을 그는 계시신학이라고 부르면서, 슬라이에르마허, 리출(Albrecht Ritschl),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도 일종의 계시신학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정경옥의 신학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핵심적 요소중의 하나는 계시로서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의 내적 종교성 자체이다. 그에게서 계시는 인간의 종교적 "경험과 실체상으로나 본질상으로 구분"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일하다. 이러한 종교관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가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과 신앙론에서 깊이 영향받은 것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종교성에 대한 이해에는 슬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이 처음부터 근저에 깊이 깔려있었다. 그는 이런 내용을 암시하는 말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첫째로 종교는 우주안에 있으나 우주를 초월한 실재를 믿는다. 우리는 특수를 경험하기 전에 총전(總全)을 직각(直覺)한다. 그리고 우리는 분해(分解)와 총합(總合)의 방법으로 알 수 없는 영계의 동적세계(動的世界)가 있는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종교는 초연적(招然的)실재가 계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종교는 이러한 우주적 실재의 도움을 구한다. 하나님의 도움이라면 우리의 힘으로도 넉넉하다. 좀 붙잡어주면 수월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근원은 신의 의지 그 도덕적 권위를 절대로 의뢰한다는 적극적 태도이다. '내 마음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올리는 그곳에 참 종교의 싹이난다. 마술과 종교의 구별은 사람의 편의를 따라 신을 부리라는 태도와 환경과 자아를 죽이고라도 정의를 좆지말라는 태도의 달음에 있는 것이다. 계시란 사람의 적은 편견과 약한 힘을 버리고 우수의 대영(大靈)에 잠기어서 그 뜻과 그 힘을 받는 활동이며 결과이다.56

여기에서 우리는 정경옥이 얼마나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의 사상과 구조를 그대로 도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용어로서 "우주를 초월한 실재", "총전(總全)", "영계의 동적 세계(靈界의 動的世界)", "초연적 실재(超然的 實在)", "우주적 실재(宇宙的 實才)", "신의 의지(神의 意志)", "그 도덕적 권위를 절대로 의뢰", "철시(哲示)", "우주의 대영(宇宙의 大靈)"이란 낱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은 슬라이에르마허가 신적 실체를 말할 때 "초주관적 실재", "일자이며 전체", "영원한 세계", "우주적 실재"(Universum), "절대의존의 감정", "생동적인 신성", "우주의 정신"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그의 종교기원론을 설명한 것을 완전히 번역 · 도입한 것이다.56

요컨대, 정경옥은 슬라이에르마허로부터 종교적 체험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과 이해 가능성을 수용한 후, 우주적 실재로 표현되고 있는신에 대한 절대의존의 감정으로 신앙의 절대성을 확인하려는 신앙론을 그의 신학에서 그대로 수용 · 승화하여 자신의 종교론을 정립한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 저변에 흐르는 주관주의적 내재주의는 그의 신학형성에 슬라이에르마허의 감정의 신학이 깊이 작용했음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57

심지어 정경옥은 그의 신학구조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도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체계를 그대로 답습하여 자신의 이론을 삼았다. 그는 그의 「기독교신학개론」에서 신학의 학문성에 관한 본질규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학교신학은 세가지 부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역사신학(歷史神學)이요 둘째는 이론신학(理論神學)이요 셋째는 실천신학(實踐神學)이다. 이러한 분류는 과거 경험에서 얻은 가치의 퇴적(堆積)을 존중하며 현재 이성의 선택취사를 귀히 여기고 미래 실제적 방향의 규정을 목표삼는 문화일반의 발전단계에 나타난 본질적 지향에 기준한 것으로서 이 구별은 신학에 대한 건전한 개념과 효과있는 방법을 세우는데 가장 적절하다고 인정된다.58

기독교 신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그는 신학의 3부분을 각각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먼저 기독교가 실질상으로 역사가운데 끼쳐준 경험 일반을 고찰한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 신학의 시야는 먼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원(歷史的資源)에 유의할 것이란 말이다.59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역사적 경험을 고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치 아니한다 ‥‥ 종교적 신앙은 진리 아니면 동(動)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깨달음이 없이는 아무 일에도 손을 대지 아니하려는 정신이 포함된다 ‥‥ 그러므로 신학의 특징은 연구자의 내적 경험과 그 학문 자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환언하면 종교적 진리는 종교경험의 원칙을 통하여서 더 확연하게 소유할 수 있으며 종교적 진리에 대한 확실성은 종교적 견해의 심천(深淺)에 정비례한다 ‥‥ 실로 신학은 '학'(學)으로서의 체계구성에 주력하는 것보다도 '신학하는 것' 즉 신앙체험에의 관찰과 여기에 대한 열정과 동경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는 개념적 사유(槪念的 思惟)의 형식에 의한 신앙의 자성(自省)인 것이다. 개개의 생활순간을 타당적 지식으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원리로서 고양하려는 활동이다.60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학은 반드시 실천적지향(實踐的 指向)이 추정되어야 한다. 전통은 역사적 발전단계에 있어서 목적지시에 의하여 선택된 인류의 경험이요 규범은 논리적 필연성에 의하여 법칙화한 보편이다. 그러면 이러한 전통과 규범은 각자의 종교성찰에 있어서 그 종교적 기초이론을 명확하게 하여 주는 동시에 이것이 곧 그 사람에게 실천의 원칙과 동력을 주는 것이라야 한다. 환언하면 신학은 광막한 이론에만 그칠것이 아니요 실생활의 원칙과 표준을 제공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란 말이다.61

슬라이에르마허는 「신학연구의 단편적 서술」(Kurze Darstellung des thelolgischen studiums, 1811)에서 신학을 실증과학(positive Wissenschaft)으로 규정하면서 신학을 3부분(Trilogie)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철학적 신학(개념적 사유의 신학), 역사신학(역사적 자원의 신학), 실천신학(실천적 지향의 신학)으로 분류된다. 정경옥은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구조에서 진술된 신학의 영역 가운데서 역사신학 부문을 첫번째로 서술했을 뿐이다. 그러나 신학의 3부문에 대한 순서상의 차이 외에는 진술내용과 본질규정이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의 3부문에 대한 진술내용과 본질규정과 완전히 동일할 정도로 거의 그의 신학사상과 신학구조를 답습하였다. 슬라이에르마허에 따르면 철학적 신학이란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 공동체의 형식 그리고 이 두 면의 관계 방식을 소개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종합적 현상에서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려는 과제를 가진 "신학의 철학적 부분"이다.62 그러므로 철학적 신학은 신학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철학적 신학은 종합적인 신학적 사고방식의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역사적 실천적 신학들이 야기되어진다. "63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신학은 신학에 대한 철학적 이해란 측면에서 볼 때 이론신학이며, 신앙을 사유의 형식으로 관찰하려는 신앙인식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역사신학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면, 모든 역사를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는 역사적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는 교회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신학은 "기독교의 종합적 발전에 관한 지식(des Wissen um diegesamte Entwicklung des Christentums)"이다.64 이런 의미에서 보면 교회사는 기독교의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슬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 신학의 세번째 부분을 실천신학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의 신학구성론에 의하면 "실천신학은 교회의 기능에 대한 새롭고 포괄적인 신학규정과 유기적이고 동일적인 이해에서 드러난다."65 "그러므로 그의 입장에 의하면 신학과 교회, 성직자와 평신자, 이론과 실천의 양극의 상관관계에서 실천신학은 가능하며, 이 방법론적-변증법적-상호관계의 본질은 실천신학에서 'Synthese'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66

아무튼 우리는 지금까지의 분석을 통해서 정경옥은 슬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 동인 뿐만아니라 심지어 신학구조와 방법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영향 받았음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의 서술을 슬라이에르마허의 진술과 비교 고찰하며 신학사상의 일치점과 신학내용과 형식의 동일성 그리고 신학구조의 유사성을 도출 · 제시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슬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철저하게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3. 알브레히트 릿출

(Albrecht Ritschl, 1822∼89)

윤성범 교수는 정경옥에게 영향을 준신학자로서 알브레히트 릿출을 거명하고 있다. 그는 "정경옥 교수가 독일의 신칸트학파의 신학자 알쁘레히트 릿출의 도덕신학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컸음은 우연한 일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단정하면서, 정경옥이 칸트를 좋아했으므로 "칸트에서 시작해서 릿출을 통하고 미국의 인격주의, 실용주의를 받아들였음"을 확신하고 있다.67 그러나 윤 교수는 정경옥의 어떤 사상적 진술이 릿출적인가 하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증적 자료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아마 정경옥이 자신의 저서 「기독교신학개론」 서문에서 "나는 슬라이얼막헬이나 으릇쉘[릿츨]이나 빨트가 주저할 것없이 취하였으리라고 생각되는 바 복음주의적 입장에 있어서의 '계시신학'을 택할 것이다"68 라고 기술한 구절에서 그가 릿출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윤 교수는 정경옥의 이 구절도 인용 ·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윤성범이 정경옥의 어떤 신학내용이 릿출의 영향인지 밝히지 못하고 단지 몇줄로 영향이 컸음을 주장했음은 아쉬운 점이다.

우리는 정경옥의 여러 글에서 릿출의 신학적 분위기를 직접 찾아내면서 릿출의 영향을 밝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릿출 자신의 신학의 주지가 무엇인지 개관하고, 정경옥의 신학사상에서 그 흔적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나갈 것이다.

릿출 신학의 중심사상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첫째, 릿출은 19세기 개신교에 지대한 영향을 준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준 최상의 영향은 그의 도덕적 인격이며, 인간은 그 스스로 헌신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예수에게서 발견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신앙은 그 자체로서 이미 인간의 최고의 가치판단이라는 것이다. 그 반면에 예수는 인간에게 의인(Rechtfertigung)과 화해(Versohung)를 이룩해 놓았으며,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의 중심점 주위를 달리는 원주와 비교되지 않고, 두 초점에 의해 지배되는 타원형과 비교된다(Das Christentum isneicht einer Kreislinie zu vergleichen, welcheum einen Mittelpunkt liefe, sondern einer Ellipse, welche durch zwei Brennpunkte beherrscht ist)."69

둘째, 릿출은 형이상학이나 사변철학으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존재론적 신인식이론을 거부했고, 신학의 근본은 실천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그가 인간의 인식능력은 물 자체(Dingan sich)에까지 도달할 수 없다는 칸트(I. Kant)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바로 이런 인식이론 때문에 릿출은 신칸트학파의 신학자로 분류되고 있다. 릿출은 기독교 신앙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격으로 간주하므로 실천성을 강조했고, 이러 한 논리로 기독교를 가치판단 위에서 형성된 종교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가치체계이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지식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것은 그가 철저히 형이상학적 신지식론, 즉 존재론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경옥이 릿출의 영향을 받은 구체적 내용은 다음 글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예수는 초인간적이라고 할만큼 인격성의 극치를 성취하였다. 예수에게도 우리가 일상생활에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있었다. 그는 어떠한 것이 가장 정당한 생활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되었었고 어떻게 하면 원만한 생명을 얻을까 노력하여야 하였다. 그는 느끼고 사랑하고 울고 웃고 가르치고 분투하고 기도하고 의뢰하고 죽기까지 복종하였다. 예수의 인격은 그 시대가 만들어 놓은 문명 가운데서 자라난이 만큼 그 시대의 양심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거룩한 초인간성도 이해할 수가 없다. 70

여기에서 정경옥이 사용하고 있는 예수의 "인격성의 극치"란 개념은 릿출 신학에서 표현되는 참인간(vert homo) 예수의 완벽한 도덕적 인격이란 개념을 그대로 수용한 내용이다. 그리고 "예수의 인격"을 "그 시대의 양심"으로 진술한 내용은 릿출이 역설했던 예수의 인격은 인간의 "최고의 가치판단"이란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과는 이러한 의미맥락에서 예수의 실상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한다.

예수의 이상은 곧 예수의 생활이다. 예수는 생의 법조(法條)를 이론하는 설교자가 아니었다. 멀리 뻗쳐있는 길을 손가락질하며 생의 종주에 이르려면 저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방관적으론 진리의 길을 지시하는 도학자(道學者)도 아니다. 예수는 그 자신이 이상을 따라서 살았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71

이것은 정경옥이 릿출의 영향을 받았음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들이다. 그는 그의 신앙고백으로 불려지는 "나의 신조"에서 릿출의 글로 착각할 정도로 매우 유사한 신학사상을 진술하고 있다.72

45. 나는 사람의 최고이상(最高理想)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크신 인격은 인간경험에서 성취하여 얻은 최고정점(最高頂点)이다.73

48.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자유롭게 모방하여서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활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동정심을 체득하고 그가 사랑하던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가 따르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며 그가 보여준 이상적 사회를 바라는데 있다고 본다.74

{{}}49.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도덕적이며 영적 생활에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을 체험하며 우리의 경제생활이나 사회생활이나 정치생활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라고 노력하는데 있다는 것을 믿는다.75

여기에서 정경옥은 분명히 인류의 최고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완전히 표출되는 예수의 생활태도에서 현실화 된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예수는 인간의 도덕적 이상의 정점이며, 바로 이런 근거에서 기독교는 도덕적 이상이 현실화된 도덕종교이다. 간단히 말해서 정경옥의 인간이해는 정신적이고 도덕 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예수의 사랑 동인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가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핵심내용은 어디에서 빌려온 것인가 하는데 관심의 초점을 모아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윤리적 세계관의 기초 위에서, 한마디로 주의주의적 도덕철학과 가치철학의 기저로부터 형성된 릿츨신학의 영향임을 문맥과 사상분석을 통해 발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경옥이 역설했던 그의 이러한 도덕종교론적 기독교해석과 인간 이해의 요지를 릿츨의 주장 가운데 몇 곳에서 찾아내면서 다시 한번 릿츨의 신학이 정경옥의 신학배경을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확인한 셈 이다.

릿출에 의하면,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가 세울 종교공동체의 도덕적 목적(den sittlichen Zweck)에 관해서 인식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사랑의 동인(Motiv der Liebe)의 실천을 통해서 형성될 인류의 조직을 이해한다. 기독교는 유일신론적 성취된 정신적 그리고 도덕적 종교(die monotheistische vollendete geistige und sittliche Religion)이다76

그는 계속하여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의학적 인간론은 성서적·창조기사와의 관계에 의해서 충전(充塡)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규정(diegeistige und sittliche Bestimmung der Menschen)에 의해서 충전된다. 그것은 예수의 생활태도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그의 태도에서 명백히 들어났다.77

주(註)-----------------

1. 유동식, "한국종교회 신학적 과제", 한국기독교학회편, 「종교다원주의와 신학적과제」(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1), p.13교서회, 1991), p. 13.

2. 송길섭, 「한국신학사강사」(서을 :대한기독교출판사,1988), pp. 330∼343.

3. "정경옥 목사의 약력" 「정경옥, 기독교의 원리」(경성:감리교회신학교, 소화10년), 1979년 5월 24일 영인본 복사발간에 정경옥의 약력이 실려있음.

4. 차풍로, "정경옥의 신학과 생활에서 본 인격주의교육", 「신학과 세계」 제5권(1979.10), p. 85.

5. 박봉배, "정경옥의 신학과 윤리", ibid.. p.48.

6. 윤성범, "정경옥, 그 인물과 신학적 유산", ibid., p. 14

7. 차풍로, "정경옥의 신학과 생활에서 본 인격주의교육", p.86; 박인대, "정경옥 교수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미국신학의 배경", 「신학과 세계」 제6호 (1980.10),pp. 173-174.

8. 윤성범, "정경옥, 그 인물과 신학적 유산", p. 14; 정경옥, "현대 미국 신학사상의 추향", 「신학과 세계」제20권 제I호(소화9년), pp. 122-123; 박인대, "정경옥교수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미국신학의 배경" pp. 182-184.

9. 윤성범, "권두언", 「신학과 세계」제5호(1979. 10), p.5

10. O.W. Heick, with contributions by J.L.Neve,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2: History of protestant Theology, 서남동 역. 「기독교신학사」(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0, (제5편 제7장 20세기(pp464∼497);박인대, "정경옥 교수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미국신학의 배경", pp. 174-177;정경옥, "현대미국신학사상의 추향", pp. 122∼123.

11. 이종성, 「신학과 신학자들」(서울 :양서각. 1987), p. 190∼191.

12. ibid.

13. ibid.

14. 정경옥, "현대 미국 신학사상의 추향", pp. 21∼26, 48f.

15. O.W. Heick, with Contributions by J.L. Neve, 서남동 역, 「기독교신학사」, pp.464∼497.

16. 정경옥, 「기독교신학개론」(경성 감리교회신학교, 소화 14년), pp. 31∼81, 496f 특히 "나의 신조"(전체 71조) 등에서 그의 종교신학론에 관한 간결한 명제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기타 「신학세계」에 발표된 그의 논문들 가운데 여러 편에서 종교로서의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신학의 종교신학적 시도를 찾아낼 수 있다.

"종교와 도덕"(「신학세계」, 13권 2호), "종교기원론의 본질적 비판"(Ibid, 17권 1,2호) "종교적 신비주의의 의의와 가치"(Ibid, 17권 4호), 등의 논문 참조

17. 감리교신학대학 편, 「정경옥 교수 논문집」(서을 감리교 신학대학, 1978); 정경옥, 「기독교신학개론」 등을 참조할 것.

18. 박대인 "정경옥 교수의 신학사상에 나타난 미국신학의 배경", p. 173;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 331.

19. 김철손, "정경옥과 성서연구", 「신학과 세계」제5호 (1979.10), p.24.

20. 윤성범, "정경옥, 그 인물과 신학적 유산", p. 11

21. 김철손, "정경옥과 성서연구", p. 22.

22.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서울 . 전망사, 1990), p177.

23. 정경옥은 「그는 이렇게 살았다」(서울 : 애린 사회사업연구사 출판부, 1953, 초판 1938), "서"(p. 1)에서 병들어 향촌 바닷가에 와 있는 자신의 심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책의 "서"를 1938년 2월 7일 진도에서 샜다. 그는 그의 「조직신학」이라고 불려지는 「기독교 신학개론」의 저자 머리말 "서"에서도 "지난 2년동안 내가 학교를 떠나 고요한 다도해의 일우에서 쉬게된 것을 기회삼아 그동안 학교에서 가르치든 재과를 손질해서 이 「개론」을 쓰게 되었다"(ibid., p. 3)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향촌 진도에 내려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오늘날 까지도 정화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그가 학교를 떠난 것이 실제로 병 때문이었는지, 그렇다면 어떤 병에 시달렸는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시의 어떤 상황적 요인 때문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병들어 향촌 바닷가에" 오게 되었다고만 적고 있다.

24. 정경옥, 「기독교 신학개론」, "서"(p.3).

25. 정경옥, 「그는이렇게 살았다」, "서"(p.1).

26. 정경옥, 「기독교의 원리」(서울 : 기독교 대한감리회 본부교육국, 1979). "정경옥 목사의 약력".

27. Ibid.

28. 민경배, 「일제하의 한국기독교 민족 신앙운동사」(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91), p.99.

29. Ibid., pp. 99∼101.

30. Ibid., p. 100.

31 Ibid., p. 100.

32. Ibid., p. 101.

33. Ibid., pp. 89-104("그 한국기독교회의 일본화 과정과 그 합병").

34. 엄밀히 말해서 일제 말기의 몇년 동안은 목사들의 수난기였다. 신사참배의 절대거부와 교단의 지도부에서 기독교의 일본화를 결점하여 하달하는 교단결의에 반항하며 반일적 목회를 한다는 것은 사실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일제말기외 목회는 어쩔 수 없이 대류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비중있는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강제로 신사참배는 물론, 친일행위를 공개 표명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렇지 않을경우 목회는 중단되고, 교회를 떠나야했던 일도 많았다. 다시 말해서 신사참배를 안하려면 목회를 그만 두어야 했고, 목회를 계속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친일의 가면"이라도 써야했던 상황이었다. 정경옥은 "친일의 가면"을 쓴 목회자로서 "강간당한 애국자"(김천배)로 칭송되고 있다.

35. 치제(김천배), "고 정경옥 교수의 편모", 「기독교사상」 제2권 제5호(1958.5), p.27.

36.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p. 179.

37. 정경옥, 「기독교신학개론」, "서"(p.3).

38. 조종남, 「요한 웨슬레의 신학」(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 92.

39. Ibid., p. 52f

40. Ibid., p. 62.

41. 정경옥, op. cit., p. 4(서).

42. 정경옥, ibid., pp. 399∼400

43. Ibid., pp. 401 ∼405.

44. Ibid., p.406.

45. Ibid., p. 407.

46. Ibid., pp. 407∼408.

47. 정경옥, 「기독교의 원리」, pp. 11∼12.

48. Ibid., p. 16.

49. Friedrich Schleiermacher, Uber die Religion: Reden an die Gebildeten unter ihren verachtern(3rd. ed. Gottingen:1913), p.26.

50. 한숭홍,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철학과 신학구조",「신학논단」 제14집(1980.7), pp. 134∼137.

51. Ibid., pp. 135∼136.

52. Ibid., pp. 133∼137,한숭홍, "슬라이에르마허의 「신앙론」에 대한 분석적 이해", 「장신논단」창간호(1985), p. 297.

53. 정경옥, 「기독교신학개론」, p. 172.

54. Ibid., "서"(p.4).

55. 정경옥, "종교기원론의 본질적 비판", 「신학세계」제17권 제1, 2합호(소하 7년=1932), p. 98.

56. F. Schleiermacher, Uber die Religion, p.65, cf. pp.26, 27, 29; 한숭홍,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철학과 신학구조", p. 135ff

57. 정경옥은 「기독교신학개론」에서 여러 번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신앙론」 등의 내용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신학의 기초로서 수용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특히 「기독교신학개론」 p. 11에서는 매우 분명하게 슬라이에르마허의 저서들에 관해 이해하고 있음을 표현했다. 그는 "슬라이엘막헬의 신학은 한편으로 종교의 본질을 사유나 행위에서 보다도 '우주외 직감'에서 찾았고 또 한편으로 경험의 내용을 '감정의 독자적 결단'(eigenthumliche Abanderung)으로서의 역사적 신앙에서 구하였다"(Ibid., pp. 13∼14)라고 요약하여 제시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가 슬라이에르마허의 저서들을 깊이 탐독했으며, 그 신학을 철저히 수용했던 것이 그의 저서에서 명확히 제시되어 있다.

58. 정경옥, 「기독교신학개론」, p.4.

59. Ibid., p. 4.

60. Ibid., pp. 6-7.

61. Ibid., p. 8.

62. F. Schleiermacher, 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 zum Behuf einleitender Vorlesungen entworfen ed. Heinrich Scholz. Darmstadt: Wissenschaftliche Buchgesllsche Buchgesellschaft, 1st ed.& 25, p. 7(이후로는 KD로 표기함).

63. 한숭흥, "슬라이에르마허의 종교철학과 신학구조".p. 143.

64. KD., & 149, cf Ibid., & 90; 한숭홍, ibid., p. 147.

65. 한숭흥, ibid.. p.149. cf pp. 148∼150.

66. 한숭흥, ibid., p.149.

67. 윤성범, "정경옥, 그 인물과 신학적 유산", 「신학과 세계」 제5호 (1979), p. 15.

68. 정경옥, 「기독교 신학개론」, "서"(p.4).

69. R. H. Grutzmacher, Textbuch zur systematischen Theologie des 17, bis 20. Jahrhunderts(Leipzig: A. Deichertsche Verlagsbuchhandlung, 1935), p 195.

70. 정경옥, Ibid., pp. 457∼458.

71. ibid., p. 468.

72. 정경옥, "나의 시조", 「신학세계」 제17권 제3호(소화7년=1932), pp. 14∼20,

73. ibid., p. 18("나의 신조" 45번).

74. ibid., pp. 18∼19("나의 신조" 48번).

75. ibid., p. 19("나의 신조"49번).

76. R.H. Grutzmacher, ibid., p. 195

77. ibid., p. 199

--------------------------------------------------------------------------------

출처 : 최경복의 희망광장
글쓴이 : 최경복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