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성장론 일반 총론
제 1 장 교회 성장론(A THEORY OF CHURCH GROWTH)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그에게 충실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성장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가 수직적인 차원(vertical dimension)이요, 둘째가 수평적 차원(horizontal dimension)이다. 수직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신적 차원(divine dimension)을 말함이요, 수평적 차원은 인간적 차원(human dimension)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있어서 그 성장요소의 원천(source)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이고, 인간적 차원이라 함은 교회의 성장요소를 인간에게서 찾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성장 요소의 양면성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에 있어서 주도적인(initiative) 역할을 하시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교회를 주관하시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교회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신성한 기관이기 때문이다(마 16:18). 마이클 하밀톤(Michael Hamilton)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북쪽에 있는 파사데나에서 열렸던 교회성장 세미나에서,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박사가 언급한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는 것이 교회성장을 위한 그의 뜻이다" 라고 했다.
교회성장의 수직적 차원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관계로, 구속사역에 관련되어 있는 중요한 신학적인 이슈(issue)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속사역을 완성하셨는데, 이점에 있어서 조직신학자인 헨리 티센(Henry C. Thiesse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계획을 예정하셨다. 이 계획 속에는 구원이 준비되는 방법들과, 실현되어야 할 목적들, 이 은혜에 참여할 사람들, 이용할 수 있는 조건들, 그리고 적용될 수 있는 중재와 수단들이 포함되어 있다." 성부 하나님께서 구속을 계획하셨고, 성자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성취하셨으며, 성령께서 그 구속을 인간에게 적용시키시고 계신다. 물론, 구속의 계획이나 구속의 성취, 그리고 구속의 적용 등이 전혀 독립적인 사역에 속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속사역도 역시 창조사역(works of Creation)과 마찬가지로 삼위께서 함께 의논하시고,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것이다. 단지 신학적인 논리로 설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본체론적(本體論的, ontological) 측면에서 볼 때 일체이시며, 경륜론적(經倫論的, economical) 측면에서 볼 때 삼위라는 원리에 적용하여 설명하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은 구속계획을, 성자 하나님은 구속의 성취를,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구속의 적용을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절대적으로 교회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경륜론적(經倫論的)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의 논리로 볼 때, 교회성장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성장시키시는 데는 언제나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점에 있어서 씨세모어(John T. Sisemore)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하나님께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항상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이 홀로 자력에 의하여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순한 인간으로서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없다. 교회성장은 하나의 독특한 공동 작업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의 공동 사역으로 창출되는 결과이다."(God seems to always use human instrumentality in producing church growth. This observation does not mean that man alone can produce authentic church growth. Mere man lacks both the potential and the power to grow a church. Church growth is the product of a unique synergy-a coalescence of human effort and divine empowerment) 물론, 이 공동 사역이라는 것은 주도적 역할과 종속적, 의존적 역할로 구분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것은 교회의 성장의지(the will toward church growth) 뿐만 아니라, 성장능력(energy of growth)까지도 하나님께서 부어주셔서 그의 원하시는 교회성장에로 주도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면 인간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인가? 기계나 동물과 같이 사용하신다는 뜻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적이나 동물적으로, 다시 말하면 맹종의 도구로 사용하시지 않는다.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인간을 기계와 같이 맹종으로 사용하신다면, 자신을 맹종의 기계와 같이 만드는 자가당착의 모순에 빠지게 된다. 둘째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와 결단력을 동시에 주셨고, 하나님의 축복 아래서 그 지혜와 용기로 결단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기계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유기적이며 영적인 인간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인간을 기계적으로 다루지 아니하시고 인격적으로 다루신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행사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경에 보면, 바울 사도도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으니"(고전 3:6) 라고 말해서 인간은 교회성장에 보조적 역할, 즉 하나의 도구나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되, 성장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역설했다. 이 구절에서 "나"(I) 라고 하는 이는 물론 바울 사도로서 인간이다. "아볼로"(Apollos) 역시 인간이다.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교회의 성장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요, 교회의 성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성장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서, 인간은 이 사역에 참여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즐거움에도 참여하게 된다(마 25:21). 그러므로 이 사역을 위하여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사명이란 종이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seeding)과, 물을 주는 것(watering)과 관리하는 것(management)등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선교(mission)와 목회(ministry)라고 한다. 그러므로 전자는 교회개척(planting)을 위한 전도와 선교이요, 후자는 설교(preaching)와 돌봄(pastoral care)을 통한 목회사역을 의미한다.
교회 성장에의 접근
(APPROACHES TO CHURCH GROWTH)
교회성장의 원리와 전략분석에 따라 교회성장을 위한 계획(a plan for the church growth)이 수립되는 것이 합리적이며 효과적이다. 우선 교회성장을 위한 계획은 성서적, 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그 개념과 운동들을 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목회자는 성서적, 신학적 방법에 기초하여 교회성장을 위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테일러(Richard S. Taylor)는 "신학적인 기초가 없는 '교회성장'이란 교회성장이 아니요 다른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거론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건전한 교회성장에 관하여 언급하는 뜻이라 하겠다.
교회성장의 개념(Concept of Church Growth)
"교회"(church)라는 용어는 본래 고어의 어근인 "qal" 또는 "kal"에서 유래된 "qahal" 또는 "kahal"이라고 하는데, 의미는 "부르다"(to call)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 "ya'adh"에서 유래된 "'edhah"로서 "지정하다"(to appoint) 또는 "지정된 장소에서 만나다 혹은 함께 가다"(to meet or come together at an appointed place)의 뜻이고, 신약에, " "(out)와 " "(to call)의 합성인 "불러내다"(to call out)의 뜻인 " "와, " "(with)과 그리고 " "(to gather)의 합성어인 "와서 함께 모이다"(to come and bring together)의 뜻인 " " 즉 congregation라는 뜻의 말이 있다. 박형룡 박사 역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불리움을 받아서 함께 모인 공회 혹은 회중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교회"의 개념은 이와 같은 어원학적인 근거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교회"란 하나님께 소속된 집합체(company)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敎會)란 바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company who belong to God)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에 함축된 의미(connotation)는 영적인 모임, 즉 신령교회(神靈敎會) 또는 무형교회(無形敎會)의 뉴앙스(nuance)가 있다. 또 하나는 회중(congregation)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교회 공동체(church community)로 유형교회(有形敎會), 혹은 조직교회(組織敎會)의 뉴앙스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해석들에 비추어 볼 때, "교회"라는 용어는 "성장"(growth of church)이라는 말과 밀접하게 연계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교회라는 말이 "불러서 함께 모인다"(to call and come together)는 의미로 "성장" 즉 전도해서 교회라는 한 장소에 많이 모이게 한다는 뜻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교회성장이란 첫째로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한 대리기관(an agency)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로 불러모으는 것으로부터 이루워지는 것이다. 주류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 전통(Christian tradition)에서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그 관계성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표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가현적 기관으로서의 교회(church)와 동일시하고 있다.
물론, 교회성장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신다. 교회의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은 단순한 전도사역(evangelism)들을 통하여 이룰 수도 있지만, 교회의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 혹은 교인들의 영적 성장(spiritual maturity)은 교회 활동에 참여함(involvement in church activities)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숫적 증가(increase in number), 혹은 양적 성장은 전도활동(evangelism)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지만, 교인들의 질적 성장 혹은 영적 성숙은 계속적인 목회사역(continuing ministry)을 통해서 달성하게 된다. 티페트(A. R. Tippett)는, 교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성장이란 사람의 육체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 그리고 나무의 성장에도 비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다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이란 어떠한 사건(event)나 영적인 부가물(spiritual addition)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요, 세상에서 기독교의 결신자들과 교회들을 창출해 내는 영적인 재창조(spiritual reproduction)와 그 과정을 의미한다. 교회성장은 인간의 개선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반대로 죄인을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인 속죄받은 인간(redeemed man)으로 중생시키고(born again), 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거룩한 모임(assembly of God)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evangelism) 뿐만 아니라 결신자들(converts)을 위한 목회관리(pastoral care)까지 계획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교회는 양적(quantitatively)으로나 질적(qualitatively)으로 달성(達成)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교회성장 운동의 역사 (The History of the Church Growth Movement)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성장"이라는 용어(用語)는 1955년에 교회성장운동(The Church Growth Movement) 기관을 설립했던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의 교회성장 이론(McGavranism)에서 유래되었다. 그때부터 교회성장의 원리가 전세계에 있는 교회들에게 적극적으로 적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교회성장 학파는 훌러신학교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도날드 에이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 랠프 윈터 (Ralph Winter), 아더 그라슬러(Arthur Glassler), 촬스 크래프트 (Charles Kraft), 알렌 티페트(Allen Tippett), 그리고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와 윈안(Win Arn), 죤 윔버(John Wimber)로 형성되어 온 파사데나 학파(Pasadena gang)와 켄트 헌터(Kent R. Hunter), 엘머 타운즈(Elmer Towns), 촬스 채니(Charles Chaney), 론 류이스(Ron Lewis)등과 같은 아웃사이드 학파들(outside school)이 있다. 특히 맥가브란의 명맥을 이어 현재 피터 와그너 (Peter C. Wagner)가 주도하고 있는 파사데나 학파(Pasadena gang)가 현대 교회성장학을 주도하고 있다.
교회성장운동 초기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의 내용으로 된 전도요소들이 강조되었지만, 그것은 제자훈련을 포함하여 전적인 교회참여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교회성장학의 권위자이며 맥가브란의 제자이기도한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성장은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교회 멤버가 되게 하기 위하여 데려오는 일에 포함된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성장시킨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가 교회 멤버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전도해서 교회 멤버가 되도록 만들었을 때에, 이것을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이라고 하고, 교회로 인도해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숙하도록 자라게 하는 것을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이라고 한다. 성경에 보면,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엡 4:13-14)
성서역사나 교회역사로 볼 때에, 교회성장은 많은 경우에 제자훈련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기초를 놓으신 후에, 사도들과 그 후속 교회들이 부단히 이 방법을 사용하여 왔다. 사실, 우리 나라에서는 1970년대에 몇몇 목사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도입, 실행되어 한국 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이미 1900년대 초에서부터 교회성장을 위하여 제자훈련의 방법을 연구하고 적용했다.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장은 신적인 면과 인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주요한 성경적 개념들(key biblical concepts: 마 18:19-20; 행 6:1,7; 엡 4:15)과 비유적 표현들(imageries: 마 13:33; 5:16; 고후 4:6; 행 26:18; 요 4:35; 마 13:31-48; 요 15:5, 8; 엡 2:21, 22 etc.), 그리고 씨세모어(John T. Sisemore)의 주장과 같이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도출해내는 제자훈련의 원동력등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신적인 면(divine aspect)은, "가서 복음을 전하여(evangelizing: preaching the Gospel)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discipling: making disciples)는 하나님의 지상명령에 해당하는 것이고, 인적인 면(human aspect)은 전도, 교회교육, 제자훈련 등과 같은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라는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같이 교회성장의 요소는 인적인 면과 신적인 면이 있다.
기독교안에서 교회성장을 위한 수많은 운동들이 일어났는데, 크게 나누어 교회운동(church movement)과 파라쳐치 운동(para-church movement)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교회 안의 운동이라면, 후자는 교회 밖의 운동을 말한다. 교회 안의 운동으로서는 구역회 활동(home cell group activity), 부흥회(revival meeting)와 특히 한국에서 사경회라고 불리우는 성경강론회 (sa-kyung-hoe)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교회밖의 운동으로는 주로 전도대회와 선교운동으로 외국의 빌리그래함전도회를 비롯하여 대학생 선교회(CCC), 기독대학생 친교회(IVCF), 네비게토(Nevigators), 대학생 성경연구회(UBF), 학생 성경연구회(SBH), 죠이 선교회(Joy Mission), 기독청년회(YFC)등이 이에 속한다. 그 외에도 기도원 운동이나, 요즈음에 카톨릭 교회에서 도입된 뜨레스 디아스(Tres Dias), 잘못되긴 했지만 레마선교회등도 파라쳐치 운동에 속한다.
근래에 와서, 새로운 종류의 평신도운동이 한국의 지역 교회에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지역 교회 목사들이 주도하고 있는 제자훈련이다. 물론 이 운동은 한국에서 교회성장에 상당히 기여하는 바가 있어서 몇몇의 개척교회들이 대형교회로 성장한 사례가 있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으로 제자훈련을 일찍 도입하여 시도해서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장의 모델 케이스가 된 서울 사랑의교회 당회장 옥한흠 목사는 평신도를 재 발견하여 제자훈련을 시키는 일은 어떤 선교단체나 국제기구에 떠맡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역교회의 목회자들이 짊어져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그의 저서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역설했다. 사실, 교회성장을 위하여 전세계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제자훈련 사역은 교회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할 사역이다.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은 목사가 교회의 평신도들을 어떻게 활성화시키느냐에 많이 달려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들은, 그들의 교회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해주고(motivate), 그들로 하여금 활동적(active)이고 생산적(productive)인 사람들이 되도록 하는 구조(構造)들을 어떻게 창출(創出)하며, 그들로 하여금 의미있는 그리스도인의 봉사의 길로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성장의 중요성(Importance of Church Growth)
교회성장이란 하나님에게나 인간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이란 어떠한 의미에서, 인간 구원의 방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에 있는 교회의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확장은 교회성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궁극적인 의미로 볼 때, 지상 교회(earthly church)의 확장이란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교회성장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삼위 하나님의 지상명령(Supreme Order of the Triune God)
하나님은 잃은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겔 34:16; 눅 15:4;).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교회성장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내려 주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다(마 28:19-20; 행 1:8-9). 더욱이 교회성장은 성령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은 성령과 더불어,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는 그의 저서 영적인 능력과 교회성장(Spiritual Power and Church Growth)이라는 저서에서 "제일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순절 교회성장의 근본 요인은 성령의 능력이다"(행 2:37-47)라고 지적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취로 완성된 구속을 인간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께서 실제로 인간에게 교회성장을 위하여 동기를 부여해주시고 실행할 능력까지 주신다. 교회성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다.
교회성장의 중요 문제(Vital Issues of Church Growth)
교회성장에 있어서 중대한 이슈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느냐 아니면 죽느냐 하는 문제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가든 그로브에 있는, 교회성장의 모델 케이스로 이름있는 수정교회(The Crystal Cathedral)의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는 교회성장에 대하여 "성장이 없는 곳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where there is no growing, there is dying)라고 말했다. 교회란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와 같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면 죽게 된다. 성장은 생명의 고유속성이다. 생명체가 성장을 중단하면,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의 성장이 중단되면 쇠퇴하게 된다. 벨리우(Wendel M. Belew)는 왜 어떤 교회는 성장하고 다른 교회는 쇠퇴하는지 기이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병든 상태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젠슨(Ron Jenson)과 스티븐스(Jim Stevens)는 건강한 교회의 비결은 평신도들을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사역에 참여시키는데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평신도들을 목회사역에 직접적으로 참여시켜야 한다. 평신도들을 참여시키지 않는 것이 심각한 병폐이다. 그것은 교회의 중요한 기관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병폐가 된다." 사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방대한 목회사역에 있어서 교회의 무거운 짐을 목회자 혼자서 진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바르나(George Barna)는 "교회들이 문제에 대응하여 기회를 따라 행해야 할 때에, 왜 마비상태가 되는지에 대한 두 가지 중대한 이유 즉 첫째 목사와 둘째 평신도 사역의 실패 가 있다"고 분석했다. 다시 말하면, 첫째로, 목사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 목회사역에 있어서 지도적 위치에 서도록 허용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는 전근대적 목회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렇게 할때에, 교인들을 증가시키고 관리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쉽을 개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평신도들이 교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평신도들이 목회사역에 감동되지 못하고 교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래트니(Pratney, Winkie)는 "당신은 주 예수께 중요한 존재임을 알라!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은 곧 당신이 군중들 가운데 결코 잃어 버린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라고 외쳤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목회사역에 증인과 사역자로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평신도들도 그들이 이미 그들이 처해 있는 지역사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교사들임을 인식해야 한다. 벤네트(Thomas R. Bennett)는 그의 "평신도 프로젝트"(Project Laity)에서 평신도 목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피터 와그너는 성장하는 교회의 첫째로 중요한 표지(the first vital sign)는 교회를 성장하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자기의 은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목사요, 둘째의 표지는 잘 동원되는 평신도(well-mobilized laity)들이라고 말했다. 교회성장은 첫째로 목사의 훌륭한 리더쉽과, 둘째로 잘 훈련된 평신도들의 활동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목사의 리더쉽과 잘 훈련된 평신도들의 활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이끌어 나갈 때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손봉호 박사는, 교회성장은 그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평신도들의 다양한 봉사활동에 달려 있다고 지적했다. 아가르(Frederick A. Agar)는 유능한 교회는 훌륭한 목사의 리더쉽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개발되고 잘 훈련된 평신도의 리더쉽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하여 로빈손(Darrell W. Robinson)은 "목사와 평신도가 함께 그리스도를 위한 공동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을 지었다. 사실, 교회의 성장은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절묘한 조화위에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달성된다.
그러면 다음으로 문제는 무엇인가? 강겔(Kenneth Gangel)은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봉사하는데 있어서, 평신도를 이용하는데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봉사하는데 있어서, 평신도를 이용하는데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 오용(misuse)과 불용(disuse) 그리고 남용(abuse)에 직면하게 된다. 오용이란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사들나 일군들을 고용하는데 대한 언급이요, 불용이란 교회 좌석을 메운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많은 교인들에 대한 언급이며, 남용이란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사람에게 짐을 지워 고용하는데서 오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다."라고 말했다. 이 외에도 교회의 또 다른 문제는 평신도 개인을 위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다. 화물열차로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목사는 견인역할을 하는 기관차(engine)요 평신도는 화물을 운송하는 화차(freight train)이며, 프로그램은 이 화물열차가 진행하는 궤도(rail road)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분명한 비젼(clear-cut vision)을 가지고, 정해진 목표(the goal set)를 향해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하고, 평신도는 목사의 목회 사역에 적극 참여해야 하며, 이러한 사역(activity)에는 반드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그 프로그램에 따라 진행시켜야 한다. 결론적으로, 교회성장의 근본문제는 (1) 아무것도 하지않는 목사(do-nothing pastor), (2) 사역에 참여하지 않는 평신도(uninvolved laity), (3) 프로그램의 결여(no programs)등 세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반대로 이 세가지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하여 교회를 활성화시킨다면 교회는 되살아나며 틀림없이 성장하게 될 것이다.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자의 임무(PASTOR'S TASKS FOR THE GROWTH OF CHURCH)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성장시킬 것이가? 이 문제는 목회자들에게 어느 다른 문제들 보다도 중요하며, 마치 금광에서 금을 찾아 헤메듯 애타게 찾고 연구하며 바라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vital issue)이다. 목회자라면, 다른 무엇에서 보다도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문제가 바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데서 오는 걱정과 그 책임감에서 오는 죄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교회성장을 위하여 기본적으로 어떠한 순서를 밟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기로 한다.
비젼을 먼저 받아야 한다 (Receiving a Vision)
교회성장을 어떻게 창출해낼 것인가? 교회성장의 역사는 지혜의 영이요 계시의 영인 성령을 통하여 비젼(vision)을 받는 것으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행 10:9-16; 16:6-10; 엡 1:17; 요 14:26). 비젼을 받아야 한다는 말에는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비젼에 대하여 신앙적인 개념을 비젼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에, 비젼이란 자기 자신에게서 창출해내는, 실존주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인본주의적 발상으로 기독교적인, 즉 성서적인 개념과 분명히 구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크리스챤의 비젼은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단으로 부터 나오는 비젼이라야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비젼이 없는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인도함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는다(삼상 1:1-2; 계 3:1). 성경은 "비젼 없는 백성은 망한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라고 말한다(잠 29:18 KJV). 비젼이나 뚜렷한 목적이 없을 때에, 사람들은 고충을 당한다. 로버트 슐러가 말한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다(where there is no growing, there is dying). 목사가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을 가지는 것이 성장의 열쇠가 된다. 죽어가는 교회들의 문제는 능력(ability)이 없어서가 아니라 비젼이 없다는 것이다.
비젼(vision)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비젼을 어떤 이상(ideal)이나 미래의 독특한 영상(unique image)이라 한다. 사실 비젼이란 하나님의 비상한 접촉에 대한 개인적 체험의 결과로서, 정신적 혹은 영적 영상(mental or spiritual picture) 이상의 것이다. 비젼은 동기를 부여받은 지도자나 사람들의 그룹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추진력(driving force)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젼은 어떠한 가능성(possibility)까지 포함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본래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gift)이다. 목사는 이러한 비젼을 가져야 하고,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교회성장의 가능성을 보아야 한다. 로이 포인터(Roy Pointer)는 이러한 통찰력을 가리켜 "교회성장의 안목"(church growth eyes)라고 불렀다. 로버트 슐러는, 목사는 교회성장에 대한 "가능성의 사고"(possibility thinking)를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가능성의 사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가능성의 사고는 의도하는 바 하나님께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서의 꿈을 실현시키는 영상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가능성의 사고는 또한 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하신 그러한 종류의 믿음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로버트 슐러는 자기 자신의 목회철학적인 가능성(可能性)의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능이란 없다"(nothing is impossible!)고 담대하게 말한다. 이 가능성의 사고방식이 심령과학적이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슐러는 교회성장에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교회성장의 기적을 이루었다. 그의 말은, 성령은 우리의 생각과 인격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생각을 비워 성령께서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성의 사고방식(possibility thinking)이라고 설명한다.
비젼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Confidence in the Vision)
목사는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에 대한 실현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비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비젼이란 말씀에 근거하여 주어지고, 믿음으로만 받고, 믿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각을 넘어서 믿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해서 비젼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비젼이란 크게 두 가지 신령한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는 불가시성(invisibility)이다. 육안이나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신령한 눈이 열려야만 볼 수 있는 불가시성이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믿음으로 포착하게 된다. '증거'라는 말은 개역성경(RV)에서 '증명'(proving)으로 번역되었고, 그 성경의 각주에서는 '시험'(test)이라고 주석되어 있어, "보여줌으로 확신(conviction; convince)시켜 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더 핑그(Arthur W. Pink)는 보지 못하는 것, 즉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현재 영혼의 눈으로 보고, 영혼의 손으로 붙잡아, 확인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을 확신(convince)하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교회성장을 위한, 아직 달성을 보지 못한 목표를 믿음의 눈으로 미리 바라보는 것이 비젼이다(visualization). 그러므로 비젼을 통하여 불가시적인 성장의 모습(image)을 바라보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비젼(vision)은 미래성(futurity)을 가지고 있다. 역시 히브리서 11:1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했다. 여기에서 '실상'은 헬라어로 ' '로서, '확신'(confidence)이라는 뜻이다. 아메리칸 표준성경(ASV)에는 'ground'(근거)라는 뜻이며, 개역성경 (RV)에는 'assurance'(확신)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실상'이란 영어로 'substance'라고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라틴어 'sub'(under)라는 말과 'stans'(stand)라는 합성어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아래에 서 있다'는 뜻이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비젼이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서 있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로버트 슐러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당신의 능력을 초월한 어떤 것에 당신 자신을 맡기지 아니하는한, 기적을 일으키지 아니하신다"고 말했다. 물론, 가능성의 사고방식(possibility thinking)이 인본주의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가능성의 사고여야 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다시 말하면 비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비젼을 보아야(받아야) 하지만, 만약에 그 비젼에 대하여 지도자 자신 마져 확신이 없다면, 교회 성장에 대한 방향(direction)과 목표(target)가 없기 때문에, 의욕과 추진력(driving power)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비젼을 보이고, 확신시켜야 한다 (Showing and Carring the Conviction of the Vision)
목사가 비젼을 받아서 확신을 가진 후에, 그 비젼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발전(develop)시켜야 한다. 교회성장에 대한 분명한 비젼을 제시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해야 한다. 교인들은 소망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 교회를 떠난다. 교회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안겨주어서 이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은 강단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보여져야 하며, 여러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반복적으로 주입시켜서 교인들의 머리속에 확실하게 새겨져야 하며(oriented),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되고(proved), 성령의 역사(役事)를 통하여 교인들에게 인식되며(recognized), 그 비젼에 대한 동일화(identification)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함께, 목사는 진정으로 교회성장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가진 의욕적인 태도(attitude)와 액숀(action)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들을 설복시키고 확신시켜야 한다. 아무리 좋고 분명한 비젼이라 하더라도 교인들에게 보여주어 저들에게 온전히 인식시키고(recognized) 동일화시키지(identified) 않는 한, 저희들을 교회성장 운동에로 끌어들일(involve)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인들을 교회성장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다.
교회성장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Planning for Church Growth)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을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인식시켜서 강력한 지지를 얻은 다음에는, 비젼을 현실화시키기 위하여 효과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계획수립(planning)은 교회성장을 위한 성공의 열쇠이다. 계획이 없으면, 목사는 교회성장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바라볼 수 있는 분명한 목표(clear-cut target)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로서 목사는 우선 교인들 중에 주요 멤버들에게 교회성장에 대한 원대한 청사진(big picture)을 보여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당회(consistory)나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와 같은 교회의 중추기관들의 핵심 멤버들(key members)에게 목회자의 비젼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교회성장에 관한 개략적인 청사진(big picture)을 보여주고, 이에 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교회 당회의 동의를 얻어서 각 분과위원(executive committee)에 위임한다. 각 분과위원에서는 전년도 사업성과를 면밀히 분석 평가하고, 신년도 예산에 최대한 활용하여 사업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목사의 분명하고 확신있는 비젼과 강력한 리더쉽(leadership)에 근거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추진력이 없다.
교회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Motivating their Congregation)
목사는 분명하고 효과적인 계획을 가지고, 교회성장을 위하여 끌어들인 교인들에게 동기(motivating)를 부여하고, 고취시키고(enhancing), 동원시켜야(mobilizing) 한다. 목사 혼자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많은 일과 무거운 짐들을 질 수가 없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그 일들을 나누어 질수 있도록 그들에게 동기를 줄 필요가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드(Jethro)가 모세(Moses) 혼자서 그의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출 18:18). 그러므로 모세는 그의 주요한 일만을 하고 남은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서 하였다. 열 사람의 평신도들이 일을 나누어서 하게 되면, 한 사람의 목사가 열번에 걸쳐서 해야 할 일의 분량을 한 번에 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미국 캘리포니아 쌘디에고(Sandiego)에 있는 스카이라인 감리교회(Skyline Wesleyan Church)의 담임목사인 죤 맥스웰(John Maxwell)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들 대부분이 남에게 손을 뻗기 전에 동기를 부여받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자연히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손을 뻗으며, 어떻게 동기를 부여받아야 하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동기를 부여해야 하는지를 알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잠재능력을 일깨울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하밀톤(Michael Hamilton)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역교회에 있어서 동기부여가 계속적인 성공의 열쇠이므로, 교인들이 예배와 목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부연하여, 설리반(Sullivan, Bill M.)은 "교회성장을 위한 동기부여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부터 나와야지, 개인적인 만족이나 야심을 채우기 위함이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다. 목사는 교인들이 움직이도록 고취시키고,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의 파장(desire waives)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도록 촉구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조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의 생각속에서 넘쳐나온 성장의 파장은 전교회의 당회, 제직회, 평신도들의 가슴에 메아리쳐 동조하는 파장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전교회가 하나의 거대한 성장운동으로 변화되어 모든 불가능의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놀라운 능력으로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무슨 일이든지 동기가 없으면, 일의 추진력은 물론, 이슈가 없으므로 그 일에 대한 의욕 부터가 없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동기가 없다는 것은 일에 대한 명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비젼과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계획을 담당해서 추진해 나가야 할 사람들에게 그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주지 않으면, 그 계획은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과 훌륭한 프로젝트(project)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에 동원될 평신도들에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지 못하면, 그 프로젝트는 사장되고(hoarding)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교인들을 끌어들여 참여시켜야 한다 (Involving & Participating the People)
목사는 교회성장 운동(church growth movement)을 추진하기 위하여 동기를 부여받고(motivated), 고취된(enhanced) 교인들을 끌어들여(involving) 참여시켜야(participating) 한다. 여기에서 "끌어들인다"(involve)는 말과 "참여한다"(participate)는 이 말은 약간의 다른 뉴앙스를 가지고 있다. "끌어들인다"(involve)는 말은 교인들을 관심을 갖도록 하여 활동에 관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성장 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하여 교회성장을 위한 활동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아직 적극적으로 활동에 뛰어드는 상태 가 아니지만, "참여한다"(participate)는 말은 끌려온 교인들을 교회성장을 위한 활동에 적극 개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뉴앙스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연속된 하나의 과정으로 취급된다. 교인들을 교회성장 운동에 참여시키지 않고는, 그 운동 자체가 쓸모없게 된다. 목사는 교회성장을 위하여 이러한 열망(desire)의 파장(waves)을 전교회에 파급되도록 계속적으로 고취시키고 촉구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여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의 조용기 목사는 수십만의 교인으로 교회를 성장시켰다. 교회성장을 위하여 중요한 것은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을 갖는 것이다.
교인들의 동원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Mobilizing the People)
사실, 교회성장의 성패는 목사와 평신도, 그리고 프로그램등 세 가지 요소에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목사의 리더쉽(pastor's leadership)과 평신도 동원화(laypeople-mobilization), 그리고 프로그램 운용(programming)등 이 세 가지 요소가 교회성장의 열쇠가 된다. 이 중에서 두번째에 해당되는 평신도의 동원화는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다. 이에 대하여 정진황 박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아무리 능력있는 설교를 할찌라도, 설교만으로는 배가적인 방법으로 달성되는 교회의 급성장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장의 열쇠는 평신도의 동원화에 있다." 평신도가 동원될 때에, 목사는 동원된 교인들을 통하여 전도활동, 교육 프로그램, 제자훈련, 선교활동, 그리고 사회 봉사활동 등 교회성장을 위한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동원화된 교인들은 한 사람의 강력한 목사 보다, 교회성장에 있어서, 더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이는 목사가 여러 번, 혹은 긴 시간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평신도를 동원한다면, 한 번에, 혹은 짧은 시간내에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목사의 목회사역에 있어서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다. 시간절약, 에너지절약, 비용절약 외에도 목사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인, 지쳐서 번아웃(burn out)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교회성장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에, 크게 두 종류의 운동, 즉 목회를 위한 부흥회 또는 사경회와 같은 교회운동과, 선교나 전도대회와 같은 범교회운동이 병행해서 전개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범교회운동의 기관들은 제자훈련을 발전시켜서 교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범교회운동이 약간의 부작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에 기여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여러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도입하여 교회성장을 위한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방법은 역시 한국에서도 성공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평신도 동원화 방법은 분담목회(sharing ministry)를 위한 것이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사역은 분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신자들이 거룩한 제사장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2:5). 그리고 교회 멤버들은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고전 6:15; 12:12-27; 롬 12:4,5; 엡 4:25; 5:30; 1:22; 골 1:18). 특히 바울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1-13 KJV).
평신도들의 교회참여를 통하여 초대 교회는 번영하고 왕성하였다. 피터 와그너는 목사들이 그들의 사역을 교회성장을 위하여 평신도들에게 분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목사들이 교회의 성장을 기대한다면, 그들이 지불해야할 제3의 대가는 그들의 사역을 분담하는 것이다. 이것은 평신도는 물론 다른 프로그램의 스탭과 함께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분담목회에 있어서 또 다른 면은 다른 사람들과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즉 사랑의 교제를 말한다. 사랑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죄인들에게 까지 나누어져야 한다. 사실, 가장 순수한 목회의 형태는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접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란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평신도 목회사역을 통하여 모든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 물론, 교회는 다른 방법으로도 성장할 수 있지만, 교회의 양적성장은 물론, 질적 성장은 평신도 훈련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교회성장은 성서적인 기초(foundation)와, 신학적인 견지(perspective)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과연 교회성장이 건전하게 잘 이루어 졌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만족할만한 성장인가? 아무리 교회성장이 좋은 것 같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서적, 신학적인 기초에 근거하지 아니하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점에 있어서 피터 와그너는 타협할 수 없는(unnegotiable) 일곱 가지 신학적 바탕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영광, (2) 주 예수 그리스도, (3) 복음적 설교, (4) 성경의 권위, (5) 종말론적인 것으로서 죄, 구원, 그리고 영원한 사망, (6)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기뻐하시는 일, (7)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대한 책임과, 그들의 사역을 위한 성령의 역사 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교회성장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영광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만이 건전한 교회성장이라 할 수 있다.
교회성장의 원리 (PRINCIPLES OF CHURCH GROWTH)
교회성장에 관하여 연구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교회성장 원리들을 제시해왔다. 어떤 사람은 성서적인 기초에, 혹은 신학적인 견지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특수한 교회성장의 환경(situation)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 모두가 교회성장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간의 관련성 혹은 적응성(relevancy)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어떻게 이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상관관계(co-relationship)가 있다. 최우선적으로 성서적 신학적 기초가 중요한 것이고,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교회 현장의 배경(context)이다. 성서적 신학적 기초가 중요하지마는 목회 현장을 무시한 성서적 신학적 원리들만으로는 효과적인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성장의 선교적 원리를 씨뿌리는 것으로, 그리고 목회현장(ministry fields)을 밭으로 비유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에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밭에, 더러는 가시 떨기에, 더러는 좋은 땅에 뿌렸다고 한다(마 13:3-9). 그 중에서 마지막의 좋은 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종류의 밭들(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은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리더라도 밭의 토양(soil)이 좋지 않으면 결실을 맺지 못한다는 원리이다. 아무리 좋은 복음, 능력있는 말씀의 원리라도 그 원리가 적용되는 여건(conditions)이 조성되지 아니하면 소정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성장 원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원리가 적용될 교회 현장의 여건이 조성되지 아니하면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성장의 성서적 원리도 중요하지만 교회성장을 위한 목회 현장의 배경(context)도 중요하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여러가지 유의사항들을 말씀하셨다. 그 중에서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서 전도할 때의 전도전략(strategy)을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전진과 후퇴의 전략, 전술들(strategies and tactics)을 말씀하신 것이다. "아무 성에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의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 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 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1-14).
위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서는 우선 "합당한 자를 찾아내라"(마 10:11)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무지로 합당치 않은 자를 찾아가서 빈 축복이면, 그 들이 받을 수 없고 수고한 전도자에게 돌아 온다고 하셨다. 여기에 전도자의 특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지해서 합당한 자를 찾아내지 못했을 때에, 그 전도는 일단 실패로 돌아가고 시간과 노력만 낭비한 결과가 된다. 이는 예수님의 전도전략의 원리를 받아 가지고 나갔지만 전도 현장의 여건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효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성장의 원리가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파악하고 적용하는 문제를 간과해서는 아니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대로 교회성장의 수직적 차원(vertical dimension)과 수평적 차원(horizontal dimension)이다. 이 두가지 경우에 있어서, 이들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그들이 운용될 수 있는 영적인 능력(spiritual power)에 의하여 지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성장은 원리(principle)는 물론 능력(power)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들은 교회성장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 관계성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성장의 매 단계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역사하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원리들은 능력을 대신할 수 없고, 그 능력의 역사 역시 그 원리들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못한다." 이 말은 교회성장의 원리와 능력은 별개의 것으로, 교회성장의 절대적 요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교회성장의 원리는 교회성장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교회성장의 능력은 교회성장의 추진력이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특히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교회성장에 관한 많은 원리들이 나타나 있다. 교회성장 원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의 원리들로 나타나 있는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원리를 비유(parables)로 들어 말씀하셨다. 우선 복음서에서 비유를 통한 많은 교회성장의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빛과 소금의 비유(마 5:13), 밭에 씨뿌리는 비유(마 13:3-30), 겨자씨의 비유(마13:31-32), 누룩의 비유(마 13:33),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마 13:44), 진주장사의 비유(마 13:45-46), 그물의 비유(마 13:47-50), 잃은 양의 비유(마 18:10-14), 혼인잔치의 비유(마 25:1-13), 달란트의 비유(마 25:14-30), 추수의 비유(마 9:37; 막 4:29; 눅 10:2; 요 4:35)등, 수없이 많이 보인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는 오순절 교회성장의 원리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행 2:1; 2:41; 2:47; 16:5). 즉 초대 교회의 성장의 특수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비유들에서 교회성장의 원리들을 유추(類推)한 의미심장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유의 대상들에는 무엇보다도 생명성(生命性)과 고귀성(高貴性)이 있어서 천하보다도 귀하고 주님의 몸(Body of Christ)인 교회의 비유로 유추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의 원리는 생명의 성장의 원리서 유추되는 것이다.
교회성장의 신적 국면 (Divine Aspect)
신적인 면에서 볼때에, 교회성장의 동기는 하나님과 그의 주권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8). 하나님의 뜻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이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기를 바라신다. 디모데 전서 2장 4절에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주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지상에 있어서의 교회의 성장을 의미한다. 물론, 교회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된다는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 현현의 일부(part of the manifestation of the kingdom God in the world)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종말까지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파함에 있어서 그의 대리자(代理者, agent)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종말에 가서야 완성될 종말론적(終末論的) 하나님의 나라(the eschatological kingdom of God)의 완성을 전제로한 미완료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성장은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열망하신다.
교회성장의 신적인 면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주권에서 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성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성경에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잘 나타나 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이의 뜻은 내게 주신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요6:39). 이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그의 의지와 주권적인 결단을 볼 수 있다. 야고보서에 보면,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약 4:12)고 하여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바울은 그의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말하고, 바로 전에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다름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여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성장의 인적 국면 (Human Aspect)
인적인 국면에서 볼 때, 토양의 선택(choice of soil)과, 기경(tilling), 파종(sowing) 그리고 양육(follow-up, caring)등과 같은 교회성장의 과정을 수행하는 것은 신적인 원리에 따른 인간의 책임, 즉 인적인 국면이다. 이러한 교회성장의 과정들은 곡식을 심고 가꾸는 원리에 준한 것으로서, 교회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기 때문이다. 곡식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우선 곡식을 심을 토양을 시험하여 옥토를 선택해야 한다(test and choice of good soil). 아무 땅에나 곡식을 심는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길가와 같은 밭에 씨를 뿌린다면, 토양이 굳어 있고 단단해서 씨가 싹이 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새들이 와서 씨를 먹어 치운다고 하셨다(마 13:19). 마찬가지로 매우 강퍅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물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전파해야 하지만(딤후 4:2), 전도의 효과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귀들에 의해서 복음의 싹이 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환영하지 않는 곳은 떠나라고 했다. 아니면 전도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골 4:3).
그러므로 효과적으로 결실을 볼 수 있는 토양인지 테스트하고 좋은 토양을 선택해야 한다. 다음으로, 밭을 갈아야 한다(tilling). 밭을 가는 이유는 땅이 씨를 받아 들이도록 하며, 싹이 날수 있는 부드러운 토양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이것은 복음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condition)을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그 다음의 과정은 파종(sowing)하는 순서이다. 여기서 부터 인적인 국면 중에서 인간의 정성이 중요한 부분이다. 잘 파종하고, 잘 가꾸는 것(caring)에는 정성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종들은 밭을 테스트하고 선택해서 갈고, 씨를 뿌리고 가꾸게 하는 일들로서 이것은 인적인 국면(human aspect)이요, 자라게 하시고 결실하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일로서 이것은 신적인 국면(Divine aspect)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고전 3:6, NIV).
에프 제이 메이(F. J. May)는 교회성장을 위한 11개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이를 대략 살펴보면, (1) 위로 부터의 하나님의 능력(power from on high), (2) 예수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3) 함께 조화를 이룬 통일된 사역(work together in harmony and unity), (4) 영적인 은사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선용될 수 있는 사역의 잠재력(the potential of spiritual gifts and ministries available to the body of Christ), (5) 기도의 사역(the ministry of prayer), (6) 목회의 신학(theology of ministry), (7) 복음의 설교및 가르침의 위임(anointed preaching and teaching of the gospel), (8) 교회성장을 위한 말씀의 효력(the influence of the Word for church growth), (9) 초자연적인 기적들, 표적들, 이적들(supernatural miracles, signs, and wonders), (10)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God sees the world from the perspective of love), 그리고 전도와 교회성장을 위한 기본적이며, 성경적인 계획(a basic, biblical plan for evangelism and church growth)등이다. 이들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메이(May)가 제시한 최우선적인 것(top priority)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뜻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주신 인간의 전략들(human strategies)을 효과있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교회성장 싸이클의 필수적인 여섯단계의 과정(the six essential phases of the church growth cycle)를 제시하였다. 즉 첫째, 동원화(mobilization)로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증인들의 동원화하는 것이다. 둘째, 무장(equiping)으로 전교인이 그들의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하는 것이다. 셋째, 수용성(climate of receptivity)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하는 것이다. 넷째, 중생의 사역(effecting regeneration)으로 거듭남과 영적은사를 개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다섯째, 협동(incorporation)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있어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여섯째, 참여(involvement)로서 온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적인 과정(phases)들에 비추어 볼 때에, 교회성장의 단계를 성경말씀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동기부여(motivation): 씨의 준비와 개발(preparation and development of seeds).....교인들에게 비젼을 제시하고, 그 비젼을 발전시켜 동기를 부여하여 준비시킨다.
(2) 동원화(mobilization): 밭을 기경함(cultivation the soil)...교회성장을 위하여 수용할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한다.
(3) 참여(involvement and participation): 씨를 뿌리는 것(sowing or seeding).....평신도들을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킨다.
(4) 교육과 훈련(training): 양육(feeding or follow-up).....제자훈련과 같은 훈련을 통하여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무장시킨다.
(5) 사명수행(commitment): 결실, 생산(producing the fruits and seeds)...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주고 가르쳐 지키게 한다.
이에 관한 성경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 가운데 잘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성장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때가 이르렀음이니라"(막 4:26-29). 예수께서 이와같이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회성장의 단계는 생명체의 성장과정에 비유하여 설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의 무기적(無機的)인 기관(an inorganic institution)이 아니라 인간의 몸과 같이, 유기적(有機的)인 기관(a living organiz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의 머리를 그리스도로 비유하여, 인간의 몸과 같은 유기적인 기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엡 1:22; 4:15; 5:23; 골 1:18). 교회성장이란 하나의 생명의 원리(principle of life)에 의하여 질서정연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교회성장의 전략 (STRATEGIES FOR CHURCH GROWTH)
지금까지 신적인 면과 인적인 면으로서의 교회성장의 원리들을 성경에 비추어서 거론하였다. 사실, 교회성장의 원리와 단계들은 생명체의 경우와 같이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교회성장 전략들은 다같이 전도(선교)와 교회 부흥회(목회)들로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근래 연구와 실천경험(實踐經驗)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수행하는데 실제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 연구와 경험들을 통하여 교회성장을 위한 훌륭한 전략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전략들이 성령의 역사보다도 교회성장의 우선적 방법으로 취하기 쉽다는 것이다.
교회성장 전략이 실제로 성령의 역사와 양립할 수 있는가? 사실, 그들 사이에 조화의 원리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들을 조화시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내적인 양립성, 즉 죄의 성품과 성령의 소욕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갈 5:18).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체험에 의하여 그 원리를 로마서에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 잡아 오는 것은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롬 7:18-8:2).
그러면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소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물론, 그 대답은 위에서 말한 바울 사도의 고백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성령에게 맡기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소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에 맡겨야 한다(롬 8:5-11).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역사에 우선권을 맡기는 것이다.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사역을 전적으로 위임받은 다른 보혜사이시다(요 14:16, 17, 26).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5-26)고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하실 사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요 16:7-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전략이 전적으로 무시되어서는 아니된다. 인간의 전략은 성령의 역사에 따라 이차로 반드시 채용되어야 한다. 물론, 케인(Kane, Herbert J.)이 "드믈기는 하지만, 교회성장의 지지자들이 신적인 요소들 보다 인간적인 요소들을 강조해 왔다"고 말한 것과 같이 인간적인 요소들이 신적인 요소들 보다 우선이 되어서는 아니된다. 인간의 전략은 절대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에 의존할 때만이 교회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교회성장에 대한 절대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이며, 그렇다고 해서 교회성장의 인적인 면을 무시하시는 말씀은 결코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전략에 있어서 인간의 전략을 교회성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 헌터(Hunter, Kent R.)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은 사역을 크게 증가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의 사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제자들(disciples)은 하나님께서 사역을 위하여 사용된 하나의 도구들(instruments)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즐겨하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용해야 할 만큼 무엇이 부족하시거나 무능하셔서가 아니라,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목적대로, 인간을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인간이 타락한 죄인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다시 구속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교회성장 전략의 성서적 기초(Biblical Foundation of Strategy)
전술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에는 신적인 국면과 인적인 국면이 있는바, 이 두 면은 양립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에 이상적인 교회성장의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인간적인 방법 내지, 더 나아가서 사단적인 방법으로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양적인 증가로서, 외적인 성장에 국한될 뿐 질적인 성장에 이르는 이상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주도하에 인간이 도구가 되어 성실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교회성장에 대한 양면성을 말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고전 3:67). 바울 사도는 인간이 전략을 세웠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행해야 함을 성경의 실례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본래 바울은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는 선교전략을 세웠으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그 전략을 변경하여 마게도냐로 갔다(행 16:6-10). 베드로는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이방인에게는 가지 않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으나, 하늘에서 부터 내려온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행 10:9-48)고 한 의미에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은 인간의 노력과 하나님의 능력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공동사역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말은 전술한 바와 같이 동일한 입장과 권위에서의 신인협동 사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성장 전략의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형태의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선, 성경을 보면 여러가지 종류의 전도전략을 위한 구조들이 기록되어 있다. 즉, (1) 일대일 전략(the man on man strategy), 즉 면대면의 정면전략(face to face strategy: 요 3:1-15; 4:7-30), (2) 이삼명 전략 (the two or three strategy: 눅 24:13-35; 막 9:2-8; 요 11:1-44), (3) 열두제자 전략(the twelve strategy: 마 6:12-16), (4) 칠십문도 전략(the seventy strategy: 눅 10:1), (5) 일백이십문도 전략(the one hundred twenty strategy: 행 1:15) (6) 오백문도 전략(the five hundred strategy: 고전 15:6), (7) 매스 전략(the masses strategy: 마 14:13-21; 행 2:41)등 다양한 전도전략들을 접할 수 있다.
에디 깁브스(Eddie Gibbs)는 사회학자들에 의해 분석된, 규모와 기능에 있어서 다른 세 가지 형태의 그룹들 사이에 구별되는 전략상의 세 개의 그룹구조 개념을 소개하였다. 다시 말하면, (1) 12명으로 구성된 제일그룹(the primary group), (2) 13명에서 최고 175명으로 구성된 제이그룹(the secondary group), (3) 175명 이상으로 구성된 제3그룹(the tertiary group)이다. 제1그룹은 친히 대면해서 전도하는 단위로서, 깊은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준비하게 된다. 제2그룹은 개인적인 상호관계 보다는 사회활동을 강조한다. 제3그룹은 코뮤니티를 위한 기회로, 축제사건을 준비하게 한다.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교회성장 전략의 형태에 있어서 또 다른 접근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에 의해서 시도되었다. 그는 성경에서 착안하여 (1) 베드로의 그물 던지기형(the net-throwing or net-drawing style of Peter: 마 4:18-19; 행 2:40), (2) 요한과 야고보의 그물 깁기형(the net-patching style of John and James: 마 4:21), (3) 바울 사도의 천막 만들기형(the tent-making style of Paul: 행 18:3)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매우 톡특하고 흥미있는 발상(finding)이다. 그물 던지기형은 전도사역(evangelism)과 같은 교회성장 전략을 의미하고 있고, 그물 깁기형은 목사의 목회사역(pastoral care)을 통한 교회성장 전략을 의미하며, 그리고 천막 만들기형은 제자훈련사역(disciple-making ministry)으로서의 교회성장 전략을 의미하고 있다. 이들 교회성장 전략형들 가운데서, 본서는 천막 만들기형(tent-making style ministry)에 관심을 가지고, 제자훈련 사역을 통한 이상적인 교회성장에 관해서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비유적인 표현(metaphorical expression)으로 볼때에, 이 전도전략이 바울 사도가 사용한 하나의 자급자족 사역(self-supporting ministry)이기는 하지만, 바로 예수께서 최초에 그의 열두 제자들을 만드신 것과 같이, 제자삼기 전략(disciple-making strategy)에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교회성장을 위한 매우 기본적인 전략이다. 예수께서도 맨 처음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그의 전도전략으로 단지 열두 사람을 훈련시키셨다.
결론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성서적, 신학적인 기초를 세우는데 있어서, 성경에서는 조직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몇가지 구성요소들을 생각할 수가 있다. 즉, (1) 사람들의 선택(a person or people to be chosen), (2) 비젼을 통한 동기부여 (motivation through a vision), (3) 목표설정에 의한 동원화 (mobil-ization by setting the goal), 그리고 (4) 교회성장을 위하여 미리 예정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전략 (the strategy as the means to accomplish a predetermined goal for church growth)등을 생각할 수 있다. 목사가 교회성장을 위한 분명한 비젼과 전략이 없으면 교회성장을 위한 방향이 없고 추진력이 없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확실한 비젼을 가지고 분명한 목표를 설정한 후,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전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은 그 전략수행을 위하여 전술을 감안해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회성장 전략을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the Strategy)
교회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은, 먼저 비젼을 갖는데(possession of vision)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교회성장 전략은 비젼이 없이는 주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성장 목표가 비젼 없이는 설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비젼을 가지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 전략을 세우는 방법론은 교회성장 방법론과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첫째로, 비젼을 받아야(receiving a vision)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비젼이란 하나님의 제단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비젼을 받으려면 목사가 제단에 엎드러져 기도해야 한다. 이사야는 유다의 성군이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캄캄한 나라의 장래를 바라보며, 낙심 가운데, 성전 제단에 엎드러져 기도할 때에, 제단으로 부터 나라의 장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젼을 보고 믿음과 용기와 사명감을 회복하였다(사 6:1-13). 사무엘은 성전에서 상거하다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삼상 3:1-14).
둘째로, 받은 비젼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어야(showing) 한다. 비젼은 항상 교인들이 분명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지켜 볼 수 있도록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들려지고 보여져야 한다. 목사는 항상 그 비젼에 관한 메시지를 계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해서 목사는 자기의 교인들이 비젼의 분위기(visionary atmosphere)에 휩싸이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교인들이 그 비젼에 오리엔트(oriented)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인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셋째로, 교인들이 그 비젼의 제창자인 목사와 동일화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목사가 그 비젼에 동정(identification)되듯이 교인들도 그 비젼에 동정(同定)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그 비젼에 미쳐야 한다. 교인들은 그 비젼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그 비젼을 가진 지도자(指導者), 즉 목사(pastor: vsionary leader)와 동정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이 없이는 교회성장 전략은 실패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동역하는 사람들은 보통 그들이 누구이며(identity), 그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what they are supposed to be doing)에 대한 보편적인 비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넷째로, 그 비젼은 교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되고(developed), 분명해져야 한다. 만약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인들이 그 비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은 교회가 그의 목표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그 비젼은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개발되어 선명해져야 한다. 더구나 받은 비젼을 받은자까지도 선명하지 못하고, 불투명하여 확신이 없다면, 그 비젼은 죽은 비젼(dead vision)이나 다름이 없다.
다섯째로, 교회는 그 비젼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교인들을 전체적으로 동원해야(mobilization) 한다. 모든 사람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그 비젼을 수행하여 성취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목사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다. 더구나 거대하고 방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는 무한한 인력과 투자를 요하게 되기 때문에, 온 교인들이 함께 동원되어 물심 양면으로 투자해야 한다. 가나안의 비젼을 바라보며 전진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백성을 돌보는 일에도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 될때,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를 받아들여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으로 조직화된 백성들의 협조를 받아서 그 일들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출 18:17-27).
여섯째로, 지도자들은 물론, 교인들도 그 비젼이 성취되도록 기다려야(waiting) 한다. 성경은 이를 비유로 설명한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6)고 했다. 다시 말하면, 비젼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어떠한 과정이 있어서 시간을 요하니까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이다. 성경에 보면, 때와 기한이 있다고 수없이 말씀하고 있다(전 3:1-8; 갈 6:9; 단 7:22; 막 1:5; 눅 1:20; 벧전 5:6; 갈 4:4; 막 14:41; 눅 22:14; 요 4:21; 7:30; 12:23; 16:2; 17:1).
일곱째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전략계획(planning strategy)이 수립되어야 한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계획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교회의 현재 상황(state of the church), 목표설정(setting goal), 프로그래밍(programming), 방법론(methodology), 재검토(review), 평가(evaluation)등에 관한 자료들(data)을 면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전략계획은 아무리 불안정되고 불확실하다 하더라도, 교회가 미래를 향하여 책임있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데이타의 정확한 분석을 통하여 교회의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분석에 기초하여, 교회가 목표를 세우고, 그에 맞는 프로그래밍의 방법을 개발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그 과정과 결과를 재 검토하고 평가(evaluation)해야 한다. 어떠한 면에서 과정(procedure)과 결과(result)는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때로는 교회성장에 대한 욕심이 앞서다 보면, 교회성장을 위한 진행과정을 무시하게 되는데 이는 건전한 교회성장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한다. 결과는 과정에 의하여 그 가치가 평가된다. 과정이 건전할 때에 그 결과도 건전하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그리고 정확한 평가(evaluation)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평가에 기초하여 차기전략(次期戰略)을 수립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성장 전략의 방법론 (Methodology of the Strategy)
군사전략 과학(military strategy science)에 있어서와 같이,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에 있어서도 다양한 전술들이 있다. 전략(strategy)의 개념이 전체적인 과정(overall process)인 반면에, 전술(tactics)의 개념은 전략에 기여하는 여러가지 활동(various activities)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전략과 전술은 상황(context)에 따라 언제든지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전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상황에 따라 선택되어져야 한다. 이와같은 전략의 변경 가능성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 목표가 설정되었을 때에, 그것을 성취시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결코 없다. 전략을 세우기 전에 그 목표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능한 한 여러가지 대안들을 마련하여, 그 중에서 최상의 것으로 보이는 것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견해가 허용되었을 때에, 실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도덕적인 책임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비록 죠셉 플리쳐(Joseph Fletcher)가 그의 저서인 상황윤리(Situation Ethics)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다비스(John Jefferson Davis)는 "상충된 도덕적 책임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실패한 경우가 상황윤리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죠셉 플리쳐는 "기독교 윤리는 진리가 아니며, 더 이상 법제화된 행동의 체계적인 규범이 될 수 없고, 기독교 윤리의 정수(精髓)는 바로 상황윤리로서, 그 원리, 즉 기독교적 결정규범은 사랑: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비기독교적인 실용주의 윤리(non-Christian pragmatic ethics)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독교윤리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 실용주의가 성경에 계시된 교리적, 윤리적 원리들에 위배되지 않는 한,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에 유용할 수도 있다. 이와같은 경우에, 피터 와그너(Wagner, Peter C.)는 이것을 "성화된 실용주의" 혹은 "성별된 실용주의"(consecrated pragmatism)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이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성경에는 성화된(성별된) 실용주의를 사용하고 있는 전략계획을 위한 몇몇 선례들(precedent examples)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구약을 보면, 놀랄만한 선례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모세의 경우이다. 모세가 그의 과중한 업무 때문에 지쳐있을(burn out) 때에, 그의 장인인 이드로(Jethro)가 실용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였다. 그 방법이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임명해서, 모세가 꼭 처리해야 할 중대한 일 외의 업무들을 그들에게 맡기므로 모세가 지치지 않고, 더 효과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매우 실용적인 방법이다. 모세는 이 방법을 좋게 여겨서 자기의 전략을 변경하고 이드로의 충고한 방법을 사용하였다(출 18:13-27). 이것은 실용주의적인 전략계획을 융통성 있게 사용한 일례(an example)이다.
신약 성경에 보면, 역시 실용적인 방법이 발견되는데, 바울의 경우를 들수 있다. 바울은 전도전략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역시 실용적인 전도전략을 사용하였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같이,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아래 있는 자 같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 같이 처신하였는데, 이는 그들 중에 몇을 얻고자 함이라고 하였다(고전 9:19-23). 이것은 전도를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의 일례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역시 대단히 실용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 후서 1:23-24과 2:1-11에 목회를 위한 실용주의적 전략의 예가 나타나 있다. 이 성구들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 가고자 하는 스케쥴을 변경한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고린도 후서 1:23에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이 구절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그가 고린도에 갈 노정을 변경함에 따라서 그 실행시기도 역시 늦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본서를 집필하는 때까지, 그는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가 고린도에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오히려 그 교회에는 유익이 되었으니, 곧 그의 가기전에 그들이 회개함으로 그의 갈 때에는 아무런 꾸지람도 하지 않게 됨이다. 그들이 회개하기 전에 그가 그곳에 갔더라면, 그가 그들을 아낄래랴 아낄 수 없어서 엄한 태도로 대하였을번 하였다."
목사는 그의 교회의 상황을 고려하여, 효과적인 교회성장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평신도들과 동역하는 방법(a method of ministry co-working with laypeople)이 매우 효과적이다.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신약시대의 평신도들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벤자민(Paul Benjamin)은 "놀랄만한 성장을 이룩한 신약시대에, 종종 지나쳐버리기 쉬운 것은 신자의 수를 증가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교인들의 중요한 역할이다"라고 했다. 엘리옷(Elliott, Ralph H.)은 "교회성장에 있어서 평신도의 사용을 강조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없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성장에 평신도들을 활용하기 위하여, 목사는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제자들로 만들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목사들은 교회에서 평신도들을 제자로 만들지 않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목회하는데 실패하게 된다. 확실히, 교회성장이 계속되지 않는 원인중의 하나는 교회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매너 박사(Dr. Maner Robert 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오늘날 작은 교회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들(critical issues) 중의 하나에 봉착하게 된다. 확실히, 그것은 매년 교회가 작아지는 상태로 남아있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만일 우리가 어느 다른 것보다도 더 큰 실패가 있다면, 그것은 교회 멤버들을 제자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교회성장을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교회들이 양적으로(quantitative growth) 즉, 숫적으로(in number)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성숙도에서(in maturity) 즉, 질적으로 성장(qualitative growth)할 수 있으며, 헌금에서(in giving) 즉, 재정적으로 성장(financial growth)할 수 있다. 따라서 교회는 건강하고, 안정되고, 능력있는 교회로 변할 것이다. 이렇게 됨으로써 교회의 총체적인 성장(양적인, 질적인, 재정적인)을 통하여 온 세상에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 2 장 소그룹 운동론(A THEORY OF SMALL GROUP MOVEMENT)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교회활동과, 지역 교회의 상황에 따라 교회의 운동(church movement)과 파라쳐치 운동(para-church movement) 또는 교회밖의 운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전세계의 교회들을 새롭게 하시며 성장시키신다. 실제로, 교회도 마치 사람의 몸과 같이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며, 영양공급을 받지 않으면 결국 죽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유기체 생명(organic body)이 호흡하며 자기 몸에 영양을 공급하며, 세포분열(cell division)을 통하여 성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데, 그 이유는 교회도 살아 있는 유기체(living organism)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와 교회의 중대한 이슈(vital issue)는 "목회자가 어떻게 죽어가는 교회를 살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는 성장이 없는 곳에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에 대한 불타는 욕망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 교회가 죽어 가는가? 미국 오레곤주 포트랜드시에 있는 새소망 공동체교회(New Hope Community Church in the City of Portland, Oregon)의 데일 겔로웨이(Dale E. Galloway) 목사는 그의 저서「20 20 비젼」(20 20 Vision)에서 교회를 침체시키며 교회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열두 가지 상자들(twelve boxes)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 열두가지 상자는 목회자들의 올바로 보지 못하는 맹안(blindness), 불신앙(unbelief), 리더쉽의 부재(lack of leadership), 수퍼스타형의 목사(superstar pastor), 교리에의 편중(focus on doctrine), 상습들(ruts)과, 배타적인 태도(exclusive attitude), 고립적인 자세와(isolation), 다망한 일들(busyness), 불가능성 생각(impossibility thinking), 자만(pride), 그리고 목표 없는 생활(aimlessness)등이다.
그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죽은 교회이거나 살아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죽어 가는 이유는 그 교회가 수퍼스타 목사(super star pastor)등, 앞에서 언급된 교회를 침체시키는 12개의 상자들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은 교회들이 "공연자의 상자"(the performer box)를 깨치고 평신도들을 교회사역(ministry)에로 과감하게 풀어 놓을 때가 왔다고 주장한다. 만일 교회가 평신도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침체되거나 죽어 버리게 될 것이다. 이는 목사 한 사람이 그 많은 성도들을 돌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인들을 돌 볼 수 있는 만큼 필요한 평신도 사역자들을 양성해야 한다. 이것은 폭발적인 인구증가에 상응하는 교회성장을 위한 시대적인 요청인 것이다. 교회성장의 가장 좋은 방법은 소그룹을 통해서 평신도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 소그룹 활동은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과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을 위하여 좋은 장점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성공사례도 많다. 팔머 베이커(Palmer Becker)는 목회사역 방법으로 세 가지의 모델을 제시하고 설명하며, 돌봄의 그룹(care group) 모델을 추천했다. 이것은, 교회는 개인적이고 영적인 필요(spiritual needs)를 가진 신자들이 서로 의지하며, 서로의 이러한 필요를 채우며, 또한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며 자발적으로 서로가 돌봐주는 신자들의 공동체(Christian community)임을 재 확인하는 것이며, 이것이 가장 좋은 사역중 하나인 것이다.
성서와 교회사의 소그룹(SMALL GROUPS IN THE BIBLE AND CHURCH HISTORY)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속에서 소그룹 운동의 선례를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교회성장을 위하여 소그룹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기초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소그룹 운동에 대한 고찰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구약시대에서, 그리고는 신약시대에서 차례대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곧 성경적 소그룹 활동을 받아들이는 공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계속되어 이어지는 소그룹 활동의 역사 또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이러한 단계적 고찰은 성경적 소그룹 활동의 기초를 놓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소그룹의 성서적 신학적 근거(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for Small Groups)
목회자나 소그룹 지도자들(small group leaders)이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이 시도하는 소그룹 사역(small group ministry)에 있어서, 성서적이고도 신학적인 바탕(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s)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소그룹 사역은 성경속에 매우 깊고 강하게 뿌리박고 있다. 그리고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의 소그룹을 살펴보기 전에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조시의 배경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소그룹은 인간 공동체의 모체가 되는 것이다.
창조속에 나타난 소그룹의 기원 (The Origin of Small Group from the Creation)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시간은 이 천지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동방의 에덴동산(a garden eastward in Eden), 곧 낙원(paradise)이라 부르는 그 곳에 자기가 지으신 사람을 두셨다. 이와 같이 인간 창조를 비롯한 천지창조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바탕(basis)에서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모든 만물들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the creation was very pure and good)고 하셨다(창 1:25). 그것이 유일하게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통치하셨던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의 원죄(original sin)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고통 속에 탄식하고 있는 것이며(롬 8:22),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the sons of God)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피조물들의 바라는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롬 8:19-21). 이 말씀은 비록 모양과 형태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이긴 하지만(계 21:1), 피조물들이 전에 에덴의 동산에 있었을 때를 추억하며 소망하고 있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오리라 기대하는 것이다.
교회는, 비록 아직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곧 기독교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 온, 이 땅에 있는 가시적 기관(visible organization)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된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A. Snyder)는 이 모델을 가리켜 제도상의 교회로서의 왕국(kingdom as institutional church), 곧 교회적 왕국(Ecclesiastical kingdo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교회가 총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의 부분(the part of the kingdom of God)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towards) 전진해 나가고 있는, 지상에 있는 가시적인 기관(visible institution)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곧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는 교회성장의 과정(process)을 의미한다.
최초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에덴 동편에 있는 동산에 세워졌었는데, 그 당시 멤버는 한 남자와 한 여자 두 사람 뿐이었다(창 2:25).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그 구성원은 셋이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 구성원들은 하나님과 인간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이 천지창조 이후 최초의 소그룹이었다. 사실, 이 소그룹은 하나님과 인간의 본질을 처음으로 나타내 보여준 경우이며, 에덴동산에 있었던 이 최초의 소그룹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의 소그룹"(Divine group)을 가리켜 전통적으로 불러온 삼위일체의 첫 번째 반영체(the first reflection of the Trinity)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신학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본체론적 삼위일체(ontological Trinity)의 측면에서 볼 때에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시며, 이는 경륜론적 삼위일체(economical Trinity)의 측면에서 볼 때 삼위(three persons)의 하나님을 말한다. 경륜론적 삼위일체의 측면에서 볼 때, 일체로서 삼각형(triangle)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 성삼위(성부, 성자, 성령)는 하나의 신적 소그룹(divine small group)인 것이다. 이것이 신적 차원에서 볼 때 본체론적인 "신의 소그룹"이라 하겠다.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볼 때에, 아이센노글(Gareth Weldon Icenogle)은 이 점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소그룹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하는 것이 좀 드라마틱하게 드릴지 모르겠으나, 교회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말할 때에 세 인격이 하나를 이룬 것이라고 전통적으로 말해 왔다. 어쨌든, 천지창조의 기사는 존재(being)와 행동(action)의 공동체로서 하나님(God)과 인간(man)을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중에 다른 멤버들, 즉 이를테면, 인간을 내적 교제그룹(group intra-communication)으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상호 교제그룹(an inter-communicating group)과의 교제에서, 하나님은 신적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아이센노글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경륜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소그룹으로 존재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 등 삼위로 이루어진 삼인격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 결과, 신의 그룹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의 상호 내적 교제(intra-communication)를 나누시는 반면에, 하나님의 그룹(the Divine group)은 태초로 부터 인간의 공동체(human community)와 상호 공동체(inter-community)의 관계를 이루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총체적 그룹 관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공동체(community)와 함께 공동체로서의 인간(humanity as community)을 창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셨다. 신의 공동체(divine community)는 처음부터 인간 공동체(human community)와 함께 하는 상호 공동체(inter-community)로서 존재하였다. 교제와 공동체의 세 영역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자신의 그룹 안에서(내적으로), 인간의 그룹과(상호), 그리고 하나님의 그룹과 인간그룹 사이에서(상호)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에덴 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의 한 커플이 천지창조 후에, 인간 최초의 소그룹의 대표자들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반영(the reflective)이었다. 처음부터 인간의 소그룹은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졌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이 그룹은 신의 그룹(하나님의 그룹)과 유사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인간의 초기, 사랑스럽고 은혜로운 소그룹으로 있을 때는 매우 행복했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세우신 계약하에 상호 교제하는 신의 그룹과 인간그룹은 에덴동산에 있었다(창 2:15-17). 이 것이 신-인 소그룹(divine-human small group)이다.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친히 조직해주신 역사상 최초의 가정 소그룹(home small group)이기도 하다. 선재하셨던 하나님의 그룹 (삼위그룹)과 창조된 인간 그룹과의 삶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가정 소그룹의 설립 이후, 이 소그룹의 신앙생활의 기원과 본질이 마치 오늘날 기독교인의 신앙생활과 같이 언약에 뿌리박고 있다. 이 언약을 에덴의 언약(Edenic covenant) 혹은 행위의 언약(covenant of works)라고 부른다.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 최초의 소그룹의 지도자(leader)로의 하나님께서는 이 소그룹을 축복하시고, 또한 이 소그룹을 지도하시려고 했지만, 이 그룹의 멤버들이 그를 지도자로 순종하기를 거절하였다. 이후로 이 가정그룹(home group)은 사단의 조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창 3:15). 최초의 소그룹 공동체(small group community)로 지상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첫번째 왕국(the first kingdom of God in the earth)이 인간의 행위계약(covenant of works)의 파기로 인하여 파산한 직후(창 3:23),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은혜계약(covenant of grace)을 주신 것이다(창 3:1-19, 롬 5:12-21).
그 이후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이 두번째 은혜로운 그룹의 멤버가 될 수 있게 되었다. 촬스 핫지(Charles Hodge)는 은혜의 언약에 대하여,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정한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았으며 이는 전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또 성부께서 성자에게 이 일을 이루심에 대한 어떠한 특별한 약속을 하신 것도 진정 분명한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위에서 말하는 특별한 언약이란 성부께서 성자에게 약속하신 은혜계약(covenant of grace)을 의미한다. 아담이 모든 인간 후손의 머리가 되며 대표자가 된 것같이, 예수께서도 모든 그의 백성들, 곧 그의 교회들의 머리와 대표자가 되신다(롬 5:12-21).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담과 언약을 세우셨던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도 언약을 세우셨다. 전자는 신학적으로 행위계약(covenant of work)이라고 불리며, 후자는 은혜계약(covenant of grace)라고 불리우고 있다. 이 원리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셨다(요 9:27; 요 14:31; 18:11).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일은 첫번 인간(아담)의 죄로 깨어졌던, 지상 에덴동산에 첫번째 하나님의 나라의 재건사명(mission of reconstruction)이었다. 이 은혜계약은 성부(God the Father)와 성자(God the Son) 사이에 이루어진 신의 계약(divine covenant)이었다. 이 은혜계약에 의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물로 드려졌고 이 공로로 인하여 깨어진 신-인 소그룹 관계가 수립되고 인간 그룹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구약에 나타난 소그룹의 실례(Examples of Small Groups in the Old Testament)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창조시부터 소그룹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타락 후, 특별히 "소그룹"이라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담의 가족 등 가족이나 친척 단위의 여러 소그룹들이 존재해 있었다. 창조시에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면서 신앙의 소그룹(small group of faith)을 이루도록 창조하셨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첫 남자와 여자가 행위언약을 이루도록 소그룹의 삶을 통하여 인도하셨다(창 2:17). 이것이 인간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소그룹이었던 것이다. 타락사건 이후, 첫번째 소그룹은 가족 단위로 이루어 졌으며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있었다(창 4:1-4). 이것이 맨 처음 사회(society)의 단 하나 뿐인 소그룹이었다. 이 가정 단위의 그룹은 유대인들의 사회적 기초가 되었으며 친척과 가문 위주의 집안그룹(household group)이 형성되기 이전에, 가정 그룹은 초기의 사회적 모든 집단(social groups)의 기초가 되었다.
이와같은 가장 작은 소그룹들 속에서 형제간의 상호관계(inter-relationship)는 아담의 큰아들 가인(Cain)이 동생인 아벨 (Abel)을 죽임으로 깨어지게 되었다(창 4:5-15). 이 가장 작은 단위의 소그룹은 친척이나 가문 위주로 이루어진 집안그룹(household group)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집안그룹은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 자매들, 친척들, 종들, 기타 부양가족들을 포함한다. 예를 들자면 노아의 집안, 아브라함의 집안, 이삭의 집안, 야곱의 집안 등을 들 수 있다. 이것이 곧 성경에서 "요셉의 온 집"(창 50:8)이나 "바로와 그 온 집"(신 6:22)이라고 말할 때에의 소그룹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온 집"(집안)에 대한 실례가 많이 나타나 있다(창 31:37; 42:33; 45:11; 47:12; 레 16:17; 민 18:31; 신 11:6; 14:26; 수 6:25; 7:14; 삿 6:27; 삼상 27:3; 삼하 2:3; 17:23; 19:18; 19:41; 왕상 4:6-7, 5:9; 왕하 7:9; 18:18; 19:1; 느 13:8; 잠 31:15, 21, 27; 사 36:22; 37:2). 물론 "온 집"이라고 말 할 때에는 몇 대의 친척과 그 딸린 종들을 가리킨다. 실제로는 이 "온 집" (household)은 여러 종족그룹(clan groups)을 이루었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씨족그룹들은 여러 개의 집안그룹(household groups)으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에, 그들의 씨족(clan)은 씨족과 가정(family)으로 알려진 친척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가정들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과 그들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의 자녀들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명기 26:5-49에 이 씨족그룹과 가족그룹에 대한 가장 좋은 예가 나와 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twelve tribes)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지파의 이름들은 르우벤(Reuben), 시므온(Simeon), 레위(Levi), 유다(Judah), 잇사갈(Issachar), 스불론(Zebulon), 베냐민 (Benjamin), 단(Dan), 납달리(Naphtali), 갓(Gad), 아셀(Asher)등으로 야곱이 애굽 땅에 들어 갈 때 그의 자손은 모두 칠십인이었다(출 1:1-5). 물론, 여기에 요셉은 이미 애굽에 있었던 관계로 누락되었다. 여호수아 13장 24절에서 가나안 땅을 분배해 줄 때쯤에는 이 지파들과 가족들이 확실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열두 지파와 몇몇 이방인들(gentiles)로 이루어져 있었다(출 12:19; 레 17:8; 신 16:11).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이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숫자적으로도 주위에 있는 나라들 보다 소수(minority)였다. 오히려 수적으로 다른 주변 민족에 비해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신 7: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숫자를 보고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 이스라엘 민족은 큰 집안으로 상징되며 "이스라엘 온 집"(온 족속)이라 불리었다(출 40:38). 광야에서 모세(Moses)는 그의 장인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십부장과(ruler of tens), 오십부장과(ruler of fifties), 백부장과(ruler of hundreds), 천부장(ruler of thousands)등의 소그룹들로 나누었다(출 18:21, 25). 이렇게 소그룹으로 나눈 것은 한 개인 개인을 잘 보살피기 위함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살피기 위해 소그룹 씨스템(small group system)을 도입했다고 보는데, 이것이 오늘날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의 유력한 성서적 근거(biblical foundation)가 된다.
신약에 나타난 소그룹의 실례(Examples of Small Groups in the New Testament)
구약성서에서와 같이 신약성서에서도, 소그룹 사역(small group ministry)이 소개되고 있다. 신약의 많은 부분들이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이며 소그룹인 하나님의 집안(household of God)의 구성원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어떤 자세로 살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위한 소그룹을 형성하시기 위하여 열두 제자들(twelve disciples)을 부르시는 사건들이 있다(마 4:17-25; 막 1:14-20; 눅 5:27-32).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내다보시며 그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이 소그룹과 많은 시간을 보내시며 가르치시고, 설교하시고,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예수께서는 그 제자 열둘을 선택하시고는 그들이 서로를 사랑할 때에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로 인하여 믿게 될 자들을 위하여도 다음과 같이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즉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0-23).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들은 사도들과 함께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믿는 자들이 매일 집에서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교제를 나눈 것을 예로 들 수 있다(행 2:41-47). 또 다른 예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 그룹의 사람들(행 12:12), 빌립보의 두아디라성의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 모였던 그룹의 사람들(행 16:15, 40),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에서의 모임(행 17:4-9), 고린도의 아가야에 있는 스테바나의 집(고전 16:15)의 모임 등과 그리고 에베소, 드로아, 로마 등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복음이 전파된 곳이면 어디든지 이 소그룹의 신자들의 모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인구증가로 인하여 초대 교회의 변화를 가져온 결과, 더 이상 효과적인 예배모임, 기도모임, 찬양모임, 친교모임 등을 갖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억지로라도 교회 성도들을 작은 그룹들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니콜라스(Ron Nicholas)는 "하나님께서 출애급시 모세에게 그의 백성들을 10명과 50명의 작은 단위(small units)로 분할하도록 지도하신 것과 같이, 초대 교회들이 좀더 작은 단위들(smaller units)로 모이도록 인도하셨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의 영향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두 개의 모임 대형그룹 모임(성전에서 함께 모이는)과 소그룹 모임(가정에서 떡을 떼며 모이는)으로 분할되었다"고 주장했다.
어떤 의미에서, 소그룹 씨스템(small group system)은 신약적인 명령(the New Testament mandate)이며, 이것은 교회성장 을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초대 교회들뿐만 아니라, 현대 교회들에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스템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보장받고 지원을 받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두 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노라고 말씀하셨다(마 18:20).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의 수직관계(vertical relationship)와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의 수평관계(horizontal relationship)에 관해서 강조한 것이다. 또 다른 의미로, 이 그룹 시스템은 삼각관계(triangular relationship)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룹 씨스템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relationship between men),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 between God and man)의 삼각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세상 사회의 그룹(mundane society group)은 남자나 여자가 모여서 그룹을 이룬다고 하겠지만, 기독교의 개념(Christian concept)으로 볼 때에, 그 어느 그룹도 하나님 없이는(without God)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8:20). 이 씨스템은 많은 사람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은 숫자를 요구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져온 예배모임과 같은 관습적인 대형모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소그룹의 합당한 기능(legitimate function)도 될 수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이 소그룹 시스템은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4절에서부터 25절까지 보면, 소그룹들의 명령에 대한 통찰(insight)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함께 모이라"는 명령은 교회의 성전(the sanctuary of the church)에서 항상 모이는 정규 주일예배(the regular Sunday worship services) 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격려하기를 힘쓰기 위하여 모이는 소그룹들(small groups)의 모임에 대한 것이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하실 때에, 하나님의 교회의 전 멤버쉽에 개방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내적인 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하겠다(마 28:19). 이 소그룹에 대한 주님의 명령은, 예를 들면 고넬료의 가정그룹과 같이,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까지 적용되었다(행 10:32-33). 바울은 그의 전도사업을 이루기 위해 회당 등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로 전도하기도 했으나, 종종 많은 방해에 부딪히게 됨으로 개인적으로 전도하며 소그룹의 제자들을 개인의 집에서 가르치는 일을 많이 했다(행 19:9). 결론적으로, 구약과 신약에 나와 있는 소그룹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수없이 많다. 구약의 시작에서부터, 아니 천지창조 사건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소그룹 활동은 기독교인들의 생활을 통하여 뗄 수 없는 존재로 이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소그룹의 맥락에서(in the context of a small group) 사역을 하셨다는 사실을 반듯이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방법을 본받아 지역교회의 성도들을 돌 볼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열두 제자들을 불러서 소그룹 사역을 하셨다.
소그룹의 교회사적 고찰(Christian-historical Perspectives on the Small Groups)
거의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모두 소그룹으로 모임을 가져왔다. 고대 교회(100 A.D.-590 A.D.) 시대에 기독교가 그 신봉자들로 받아들였던 소그룹들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들의 대부분이 기독교를 위하든 반대하든 간에 지성인들 층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이 시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두 가지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하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또 하나는 이단종파들로부터의 방어였다. 그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교리적인 변론을 많이 하였다. 사도시대와 같이 적어도 2세기까지 기독교인들의 소그룹은 가정에서 모이고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 소그룹들이 가정교회와 동일시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저스틴의 순교집(Martyrdom of Justin) 2장에 보면 저스틴은 성도들이 모두 꼭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고 그 지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티미오티니아 배드(Timiotinia Bath)에 있는 마틴누스(Martinus)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산다; 그것도 온 생애를(그리고 지금은 두번째 생애를 위해 로마에 살고 있다), 나는 그의 장소 외에 어떤 다른 장소를 모르고 있었다"고 했다. 클레멘트의 인정서(The Clementine Recognition, 10:7)는 자기의 저택(the great palace)을 교회의 이름으로 성의를 다하여 봉헌했던 안디옥의 데오빌로(Theophilus of Antioch)의 친절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 당시 박해의 영향으로 그룹들로 결속되어 있었고, 구별된 백성(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그룹들은 외부인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를 못했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고대 기독교 역사의 거의 모든 시대를 박해관계로 가정이나 카타콤(catacomb)과 같은 지하실에서 모이는 소그룹 형태로 존재했었다. 결국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소그룹 형태로 존재했다는 증거다.
로이스 발렛(Lois Barrett)은 기독교인들이 제3세기 말까지 예배를 위한 성전을 로마의 법정회당(basilica)을 본따서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죤 밀러(John W. Miller)는 이제 더 이상 가정 교회(house church)의 필요성이 거의 없어졌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썼다. 즉 "더 이상 예수안의 나눔이 그리스도의 백성의 소그룹으로 모이는 교제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주교(bishop)에게 와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성찬을 받는 것이다. 로마와 연합한 후, 이제 이러한 모임은 집에서 보다 더 큰 성전에 모여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편리하게 모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가정교회는 이제 거의 구시대의 것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 때는 초대 사도시대가 거의 끝나고 카톨릭교회가 일어나려던 때임을 상기해야 한다. 이제 카톨릭교회의 교황(Pope)이 이끌어 온 암흑시대(the dark ages)의 중세기(the middle ages)에는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소그룹들이 예배와 가르침(worship and instruction)을 위하여 모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가정교회란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중세기 말에(in the latter part of the middle times), 기독교회안에서의 신앙의 갱신운동들(religious renewal movements)로 하여금 신약성서 안에 나타나 있는 가정교회(house church)를 다시 발견케 되었다.
종교개혁(Reformation) 이후 교회 안팎에서 많은 소그룹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수도원 운동들(monastic movements)이 소그룹으로 예배를 드렸다(Barrett 1986, 23).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이끌어진 종교개혁은 평신도들에게 신앙의 자유(the liberty of faith)를 주었다. 마르틴 루터가 쓴 세번째의 신학논문은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On Christian Liberty)이다. 이 논문에서 그는 모든 기독교인은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자유하며, 모든 기독교인은 신앙을 위한 모임을 가질 수 있고 성경을 어디에서든지 읽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하여 소그룹 모임이 다시 전개하게 되었다. 이 종교개혁 기간동안 재침례파(the Anabaptists), 메노나이트파(the Mennonites), 아미쉬파(the Amish), 프랑스의 유그노파(the Huguenots)와, 예수회(the Jesuits)들이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 영국의 퀘이커파(the Quacker)들과 미국의 경건주의자들(the Pietists)이 가정모임으로 돌아갔으며, 감리교(Methodist)에서도 역시 그들의 기원을 가정 모임에 두고 있다.
20세기 현대에 와서 교회의 새로운 각성을 위하여 교회 안팎에서 소그룹 모임을 갖는 것이 활발해졌다. 근래에는 전 세계적으로 가정 소그룹(구역그룹)을 통한 성경공부가 교회 안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교회 밖에서는 제자훈련, 성경공부와 선교등의 파라쳐치 운동들(para-church movements)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범교회 운동의 예로는 빌리 그래햄 전도회, 대학생 선교회(CCC), 대학 성경공부(UBF), 기독대학생 친교회(IVCF), 기독 청년회(YFC), 학생 성경연구회(SBF), 죠이선교회(JM), 네비게이토(Nevigators), 뜨레스 디아스(Tres Dias)등을 들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소그룹 활동이 전세계 거의 모든 교회에 퍼져 있으며, 제자화 훈련이나 가정 구역그룹 등은 특히 한국 본토 교회와 이민 교회(Immigrantion church)에서 인기가 있는 소그룹 운동이다. 소급룹 운동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항상 필요한 운동이다, 소형교회의 전략은 물론 신앙이 성숙치 못한 경우에 영적 성장을 위하여 필요하며, 대형교회에서도 역시 질적 성장은 물론 대외 전도전략이나 선교전략을 위해서도 필요한 운동이다.
소형교회의 교회성장(CHURCH GROWTH FOR SMALL CHURCH)
대부분의 대형교회들은 인도하는 목사에 의해 처방된 어떤 특별한 프로젝트(special project)가 없이도 부흥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소형교회(small church)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일까? 첫째로, 대형화된 교회의 회중(the large sized congregation of the church), 그 자체가 교회가 자연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특별한 성장요소(source of growth)가 될 수 있다. 둘째로, 교회성장의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성도(평신도)들을 활성화(mobilization)하는 것이다. 만일 소형교회가 교인들을 활성화하지 못한다면 교인들을 통한 성장은 조만간 멈추게 되며, 그렇게 되면, 곧 죽어 가는 교회(dying church)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라면 교인 활성화의 특별한 계획이 없이도 교인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활성화할 수 있으며 특별한 계획이 없다 해도 자연스러운 교인들의 접촉을 통하여 다소간 교회성장을 계속할 수도 있다.
또한, 대형교회의 교인들은 여러가지 교회의 일이나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많다. 교인들의 참여는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교회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피터 와그너는 대형교회의 장점에 대하여 "대형교회에서는 친밀한 우호관계를 갖을 기회를 얻게 되고, 보다 쉽게 친하게 되며, 적극적인 사회봉사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종류의 기독교 봉사의 기회가 열려 있고, 세계전도로 선교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최상의 성가대 등 계속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형교회는 다양한 목회활동(multiple ministries)을 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잘 훈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성장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준비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한 분야나 다른 분야에서 전문가인 사람들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붙잡아 두기에 충분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다. 대형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해 잘 훈련된 지도자들(well-trained leaders)을 고용하는 등 교회성장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형교회는 흥분되어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을 위하여 편안한 분위기를 준비하는 것 외에 소형교회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형교회는 교회가 너무 작아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많은 것을 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이것이 교회성장을 위한 소형교회의 치명적인 약점(a fatal weakness of small church)이다.
그러면 소형교회가 교회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날 침체상태에 있는 소형교회들을 위한 중대한 이슈(vital issue)이다. 물론 소형교회의 성장을 위한 여러 가지 처방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 중에서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의 방법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다. 피터 와그너(Peter C. Wagner) 박사는 그의 저서 Leading Your Church to Growth에서 평신도 사역이 절대적인 요소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즉 "목사는 교회성장을 원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려는 강력한 지도자다. 교인들은 추종관계에 대한 성경적인 역할을 알고 있고 그들의 목사에게 인도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교인들은 대체로 성장을 위하여 동기를 부여 받는다. 교회성장에 대한 평신도들의 주요 공헌은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목회사역(ministry)이다"라고 했다. 한국의 대구신학교 실천신학 교수인 정석현 목사는 그의 저서 교회성장과 평신도의 역할에서 성경에 기초한 교회성장의 잠재력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즉 "목사의 기능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그 기능은 평신도를 통하여야만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 성경은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요 15:2)고 말한다. 그러므로 목사는 평신도를 교회성장 운동에 참여시키지 않고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없다. 평신도는 탁월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평신도 사역이 왜 중요한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성서와 신학에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고려하여야 한다. 첫째로 어원학적 접근(etymological approach)이다. "평신도"라는 단어는 본래 헬라어 "레이오스"( )에서 나왔다. 이 말의 뜻은 "라오스"( )에 속한 백성, 혹은 하나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을 가리킨다. 본래의 사용에서 그 단어 "라오스"( )는 전문적인 지도자들과 구별된, 교회내의 어떤 사람들의 그룹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총체(the total body of believers)를 나타내 주는 말이었다. 그것은 신약성경 고린도 후서 6장 6절과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그 말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아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온 백성(the whole people of God who have been chosen and called in Christ)을 가리킨다. 한편, "성직자"(clergy)라는 말은 헬라어 "클레이오스"( )로부터 나왔는데,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 중에서 분리된 그룹(a separate group)이 아니라, 다만 처음에는 지식과 행동능력 (behavioral power)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다가, 후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유업으로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언급된 것이다(행 26:18; 골 1:11, 12). 이러한 어원학적 접근의 견해로 볼 때, 교회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성직자(clergy)와 평신도(laity) 사이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으로부터의 접근이다(마 28:19-20). 사실, 교회성장 능력의 중요한 요소는 사람들의 힘(people power)이다. 목사는 결코 혼자서 교회성장을 촉진시킬 수 없다. 거기에는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 연합된 노력(united efforts)이 필요하다. 미국연합감리교(United Methodist of America)에 소속된 평신도들인 제임스 홀싱거(James W. Holsinger, Jr.)와 에베린 레이코크(Evelyn Laycok)는 교회성장을 위하여 평신도들을 참여시켜야 한다며, "연합감리교 평신도의 리더쉽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 교단의 성직자는 우리의 연관된 모든 수준에서 평신도 리더쉽의 개발에 참여하도록 준비하여야 한다. 우리의 교회가 더 이상 성직자들의 지배기관(a clergy dominated organization)이 될 수는 없다. 우리 평신도들은 선교나 연합감리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성직자들에 의해 파트너(partner)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사실 성직자는 목회사역의 가장 효과적인 수준으로 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평신도들의 리더쉽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의 참여(laity's involvement)는 교회성장을 원하는 목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성장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평신도들에게까지 절실히 필요함을 느껴 왔다. 교회성장학의 원조로 불리우는 도날드 맥가브란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정직하게 받아 드린다면, 평신도를 참여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을 했고, 모든 교회의 성장은 절대적으로 그 교회의 평신도 참여에 의존된다고 강조했다.
소형교회의 원형 (Original Form of Small Church)
엄밀히 말하면, "교회"(church, )의 개념은 "구약교회"와 "신약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좀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교회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한 아담의 가정(아담과 하와)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창조와 동시에 시작되었다(창 2:8). 그 때에 가정교회(house church)의 회원은 그들을 창조하고 결혼주례를 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한 커플이었다(창 2:24; 마 19:5). 하나님이 없이는 교인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설립된 기관이기 때문이다(마 16:18). 하나님은 그 에덴동산에 최초의 교회를 창설하셨다(창 2:8). 그 교회는 단지 한 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소그룹(small group)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소그룹은 인간창조 초기에 있었던 소형교회의 원형(original form of small church)이었다(창 3:8). 소형교회의 원형은 특히 하나의 가정 단위(family unit)였다(창 2:24-25). 구약에서의 소형교회 역시 한 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이다(창 12:5). 하나님은 지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Abraham)을 택하여 부르셨고,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가정은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다.
결국, 구약교회의 원형 역시, 하나님의 언약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으로 구성된 소그룹이었다(창 12:1-3). 광야에서도 그러한 교회가 있었다(행 7:38 KJV). 모세의 장인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로 모세에 의하여 광야교회(the church of the wilderness, KJV)는 소그룹으로 재 편성되었다. 이점에 대하여 팔머 베이커(Palmer Becker)는 "이드로의 충고에 따라 모세(Moses)는 그의 백성들에게 함께 일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선택하도록 부탁을 받았다. 그는 지도자들을 선택하였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10명으로 된 소그룹으로 재 구성하였다. 모세는 혼자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는 사역을 하였으나, 이제는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이 구절에서 광야의 국가적인 대그룹(a large group)은 수많은 소그룹들(small groups)로 재 구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형교회(small church)는 소그룹(small group)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소형교회의 원형인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신약성서의 소형교회는 소그룹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수가 단지 사도들 12명이었다. 그리스도의 승천(Ascension of Christ) 후에는, 초대 교회가 가정에서 모였다(행 2:24-47; 12:12; 16:15, 40; 17:7; 고전 16:5; 고전 16:19; 골 4:14; 몬 2). 이들은 각각 몇몇 가정의 수로 된 가정 교회(house church)들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교회들이 이러한 신약시대의 가정교회들이다. 이렇게 판단해 볼 때에, 신약시대의 교회들의 원형은 소그룹으로 이루어진 소형교회들었음이 틀림없다. 현대에 있어서, 교회는 소그룹의 형태로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교회성장을 위한 전도의 멤버들을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와서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이 각각 제자훈련반(discipleship training group)과, 성경공부반(Bible study group), 친교반(fellowship group), 양육반(nurture group), 구역그룹(home cell group)등과 같은 소그룹 씨스템을 가지고 있다. 소형 교회는 소그룹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소형 교회의 원형(original form of small group)은 여러 형태로 된 소그룹들이었다. 캐논 칼라한(Cannon L. Callahan)은 교회란 소그룹의 모임(an assembly of small group)이라고 정의했다.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대교회에서 대그룹으로 분가해서 세운 교회가 아니면 모두 소그룹에서 시작하게 된다.
소형교회의 특징(Characteristics of Small Church)
사실, 소형교회(small church)의 교인들은 대형교회(large church)의 교인들 보다 더욱 개인적이고 적극적인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 소형교회는 대부분 그 교인들 사이에 친밀성(intimacy)이 있는 한편, 대형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소형교회의 멤버들은 전체적인 교제로서 규칙적으로 만남으로 그들의 일체성(their unity)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밀착되어 살면서, 각자의 집에서 함께 만나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형교회 특성중의 하나는 수직적, 수평적(vertical and horizontal relationship)관계에 있어서 친밀하다는 것이다. 첫째로, 소형교회의 특징들(characteristics) 중의 하나는 각 멤버들이 예수님과 함께 누리고 있는 수직적 관계(vertical relationship)의 수립이 용이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소형교회 멤버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리라"(마 18:20 NIV). 또 다른 번역 성경에는 영어로 이와 같이 번역하였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그 가운데 나도 함께 하리라"(마18:20 KJV). 어떠한 의미에서, 이 구절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수직적 관계이다. 물론, 대형교회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소형교회가 예수님에게 접근하기 좀더 쉬운 환경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로, 소형교회 멤버들은 서로 친밀해지기가 용이하다. 그들은 그들의 사이에 수평적 관계에 의하여 확장되어 나가기가 쉽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얼굴을 대면하는 그룹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친밀한 사랑의 관계이다. 로이스 바렛(Lois Barrett)은 이 특성에 대하여 "가정교회는 보통 집안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친절한 말뿐만 아니라 서로의 친절한 사랑으로 모인 집안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소형교회에 있어서의 두번째 특성(characteristic)은 교회에 대한 소속감(a sense of belonging)이다. 소형교회 멤버들은 대개 대형교회 멤버들 보다 자기 교회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있다. 소형교회의 소속감에 대한 대형교회의 소속감을 가정의 소속감에 대한 나라에 대한 소속감으로 비유해서 설명할 수 있다. 이 소속감은 밀착된 친밀감에서 온다. 소형교회의 모임을 통하여, 사실, 교회의 멤버들이 친밀하게 될 수 있다. 니콜라스(Ron Nicholas)는 소형교회의 소속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양한 소그룹에 소속하게 된다. 우리 각자는 소그룹인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얻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안전(security)은 적어도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것을 아는데 있다. 우리는 서로 알고 알릴 필요가 있으며, 사랑하고 사랑을 받을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
소형교회의 또 다른 특징(characteristic)은 그 교회 멤버들이 사랑의 관계에 있어서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어떤 사람들은 소형교회에서 또 어떤 사람들은 대형교회에서 안정감을 갖는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를, "어떤 사람은 항상 소형교회에서 더욱 안정감을 느낀다. 그들은 전체 사회적 단위의 밀착된 일부분으로 느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아 수많은 낯선 사람들을 볼 때, 불안을 느끼게 된다....그러나 대형교회의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갈 때, 보다 익명으로 알려지지 않는 기회를 갖는 것을 좋게 여긴다. 그들은 그들이나 그들의 가족들이 떠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연히 대형교회를 찾게 된다"라고 했다. 어떠한 의미에서, 안정감이란 사랑의 힘(love power)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아이가 혼자 있을 때에는 불안을 느끼지만, 부모와 같이 있으면 안정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의 관계(love relationship) 때문이다. 사랑은 어머니와 아이에게 담력과 무서운 힘을 제공한다. 이와같이 소형교회는 대개 교인들 사이에 밀접한 사랑의 관계(close relationship of love)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 멤버들은 항상 보다 안정감(a sense of security)을 느끼게 된다.
소그룹 전략의 중요성(Importance of Small Group Strategy)
대형교회로부터 분립된 교회들을 제외하고는, 처음부터 대형교회가 된 교회는 별로 없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처음에는 소형교회들이었다. 피터 와그너는 모든 대형교회가 한때는 소형교회였다고 하며,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관계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를, "만일 소형교회들이 자라게 된다면, 그들이 사실상 대형교회가 될 것이다. 모든 강이 한때는 하나의 시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대형교회도 한때는 하나의 소형교회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소형교회는 계속해서 필요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소형교회의 원시적인 형태(primitive form)는 그것이 대형교회가 되기 전에는 하나의 소그룹(small group)이었다. 그러므로 소형교회 성장을 위한 소그룹 전략은 대단히 중요하다.
소형교회가 인적 자원(workable people)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형 전도전략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소형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하여 "일대일 전도전략"(the man to man strategy)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 각자가 소규모일 때에 평신도 전도자(lay-evangelist)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성장을 위한 "일대일 전략"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 실패의 결과로 그 교회는 소형교회의 신드롬(syndrome)을 앓게 될 것이다. 드웨인 다벤포트(D. Dewayne Davenport)는 "소형교회의 신드롬은 교회가 300명을 넘지 못하는 교회를 너그럽게 보아주지 못하는 병으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교인이 소수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신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면, 그의 저서『성경이 성장하라고 말한다(The Bible Say Grow)라는 저서 제2장을 읽으라"고 권고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에 따라 교회성장을 지속적으로 촉진시킬 수 있는 소그룹 전략들(small group strategies)을 사용하여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마 28:19-20). 소그룹 전략(strategy)은 소형교회가 질적(質的)으로 양적(量的)으로 성장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략이다. 물론, 예수께서도 질적 사역을 위하여 소그룹 사역을 하셨지만, 양적 소득을 위하여 대중집회도 하셨다.
클라이드 라이드(Clyde Reid)는 소그룹이 수천명의 군중들 가운데서 얻을 수 없는 인간의 사랑(human love)과 인간의 욕망(human desire)을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서울에 있는 사랑의교회 담임목사인 옥한흠 목사는 1978년에 겨우 9명의 소그룹 멤버들(제자훈련생)로 시작해서 약 10,000명 이상의 교회로 성장시킨 장본인으로서 소그룹 전략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확신있게 말했다. 또 로버트 매너(Robert E. Maner)는 소그룹 사역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하기를 "소그룹 사역은 사람들에게 질적인 사역은 물론, 성장을 위한 자산이 된다. '사람들에 대한 사역'으로서 우리의 사역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것은 지나치게 강조되어도 좋다. 사람들은 교회의 모든 것이다. 사람들은 전체 기관 중에서 항상 우선이 되어야 한다. 사람, 이름과 얼굴을 가진 실제 사람들, 아이들이 있고 집이 있는 사람들 그것이 교회이다 사람들! 어떤 것들도 그것을 밀어내지 못한다. 이것이 왜 소그룹 사역이 그렇게 중요한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모르는 군중들에 의하여 조성된 상황을 다룰 수가 없다"고 말했다.
소그룹 전략(small group strategy)은 교회성장의 기초를 놓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된다. 왜냐하면, 그 소규모의 멤버들이 기초멤버(base members)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튼튼한 기초를 놓기 위하여 성경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교회성장의 앞날을 위하여 철저하게 훈련받은 멤버들로 기초를 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단의 시험이 올 때에 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행 20:29). 이 점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군중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위의 구절들은 교회의 영적인 기반(spiritual foundation of church)과 개인의 신앙기반(individual faith foundation)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마 16:18에 보면, 그 기반이 그 구절, 즉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음부( )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구절로 보아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반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그에게 자신에 대한 신앙고백을 요구하셨는데, 그 신앙고백(the faith confession)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교회의 기반(foundation)이 되는 것이다(마 16:18). 그의 교회의 기반(the foundation of His church)은 예수의 12제자들로 구성된 최초의 교회 이후, 교회들의 시초에는 소그룹(small group)에 의하여 기초가 놓여지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안 깔로스 올티즈(Juan Carlos Ortiz)는 소그룹들이 뼈대와 근육이라(the small groups are the bones and muscles)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그룹 전략에는 또한 약점들(weaknesses)도 없지 않다. 그 약점들 중에 하나는 전형적인 소형교회가 규모에 있어서 자라도록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소그룹 형태로 그냥 남아 있도록 조직되어 있다는 약점이다. 왜냐하면, 소형 교회은 선교(mission)가 아니라 양육(nurture)에다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형교회는 그 기반을 튼튼히 놓고, 동시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쳐야 한다. 칼 죠지(Carl F. George)는 아무리 대외전도가 좋은 것 같다 하더라도 보다 중요한 사역의 방법론과 그 이슈(issue)는 그룹들과 팀들의 사역을 통한 성장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튼튼하게, 지속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소그룹운동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뜻이다.
소그룹 전략의 장점
(Advantages of Small Group Strategy)
교회에서 프로그램의 시행에 성공하는 것은 물론, 소그룹 전략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변화가 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철저하게 계획된 소그룹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기만 하다면, 교회는 많은 잇점들(advantages)과 이익들(benefits)을 누릴 수 있다. 니콜라스(Ron Nicholas)는 스나이더(Howard Snyder)가 이미 지적한 소그룹의 6가지 장점들(six advantages)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첫째, 융통성(flexible)으로 소그룹은 용이하게 그 진행과정을 변경할 수 있고, 그 멤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둘째, 기동성(mobile)으로 가정에서나 사무실에서도 모일 수 있다. 건물에 매이지 않는다. 가정집회에서 3천명이나 모인 것을 생각해 보라(행 2장). 셋째, 포용성(inclusive)으로 소그룹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 각계각층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오픈되어 있는 것이 소그룹 활동이다. 넷째, 개인성(personal)으로 소그룹은 개인적인 요구와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조성해준다. 다섯째, 위기성(risky)으로 소그룹은 우리를 신앙생활에 있어서 모험의 가장자리로 몰아 넣는다. 우리가 갈등과 돌봄과 대결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발견할 때에, 우리 자신이 성장하게 된다. 여섯째, 전도방법의 탁월성(an excellent way to evangelize)으로 이 소그룹에서의 진정한 우정관계(friendship)는 교회가 세상안에(in the world) 실제로 존재하는 한, 세상에 의하여(by the world) 알려지게 될 것 등이다.
이들은 소그룹이 그 프로그램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훌륭한 장점들이 된다. 소그룹이 그 규모로 보아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가 쉽기 때문에, 보다 더 효과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기대할 수 있다. 대그룹(large group)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열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그룹에서 그들은 마음을 열기 쉬운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서로 친밀하게 교제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즉 수직적으로도 쉽게 교제할 수 있다. 이러한 수직적, 수평적 관계의 결과로 그들은 질적으로는 물론 양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그러면 소그룹 사역으로부터 교회가 얻는 이익은 무엇인가? 제프레이 아놀드(Jeffrey Arnold)는 교회에 대한 이익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건전하고 철저하게 계획된 소그룹 사역이 시행된다면, 교회는 어떤 많은 유익들(benefits)을 누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 가운데는 주로 영적 은사들(spiritual gifts)의 발견과, 평신도 리더쉽(lay leadership)의 개발, 효과적인 교인관리(effective congregational care), 예배(worship)와, 전도(evangelism), 그리고 영적 성장과, 숫적 성장(spiritual and numerical growth)들이 있다"고 했다.
게리 쿤네(Gary W. Kuhne)는 소그룹 사역의 다섯 가지 공동의 유익들을, "첫째, 죄의 영향에서의 방어, 둘째, 격려와 자극의 콤비네이숀, 셋째, 의미심장한 예배의 경험, 넷째, 필요한 것들의 나눔, 다섯째, 상호기도"라고 하였다. 물론, 소그룹은 위에서 제프레이 아놀드(Jeffrey Arnold)와 게리 쿤네(Gary W. Kuhne)가 말한 바와 같이 교회에 많은 유익을 준다. 간단히 말하면, 소그룹 사역은 교회를 위하여 질적으로 양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준다. 데렠 팃볼(Derek Tidball)은 소그룹 시스템이 교회 역사상 큰 가치가 있다고 말하였다. 무엇보다도 소그룹 프로그램을 사용함으로 서로 영적 은사들의 발견, 영적 예배, 효과적인 교인관리, 성경공부, 은혜로운 찬송, 능력있는 기도, 은혜의 나눔, 친밀한 교제들을 통하여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증진시킬 뿐 아니라 소그룹의 개인전도를 통하여 교인 멤버쉽을 증가시킬 수도 있다. 소그룹 전략을 사용함으로써, 비록 그것이 멤버들로 하여금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기 위하여(마 28:19) 하나님의 말씀으로 적합하게 무장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마는, 교회가 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성장하도록 촉진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소그룹은 "제자훈련 그룹"(discipleship training groups)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소그룹 전략은 숫적 증가(numerical increase)보다는 그들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영적및, 도덕적 성장(spiritual, moral growth)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 소그룹의 멤버들은 리더십 훈련(leadership training)을 통하여 영적으로 무장된다. 사실, 현재 많은 교회들이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최우선적인 임무가 평신도로 하여금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그들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소형교회의 성장전략
(Strategies for the Growth of Small Church)
교회성장 전략(a strategies for church growth)은 교회성장 원리(the principles of church growth)와 연관시켜서 생각해야 한다. 대형교회는 물론, 소형교회의 경우에 있어서, 교회는 필연적으로 성장하여야 한다.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은 교회성장 원리에 기초해야 한다. 그 이유는 교회성장 원리들이 그 방향(the directions)을 가르쳐 주고, 교회성장 전략의 계획들(plans), 즉 방법들(methods)을 정해 주기 때문이다. 교회란 무엇인가?(What is church?) 이것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무엇보다도 생물학적인 접근(biological approach)이 우리가 교회의 성장을 위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교회란 하나의 기계(a mechanism)가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an organism)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살아 있는 생명의 기관(an organic body of life)이기 때문이다. 로저 더들리(Roger L. Dudly)는 교회성장을 생물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를, "나무들은 자란다. 강아지들도 자란다. 아기들도 자란다. 관계성도 자란다. 그들이 건강하고 정상적이라면 그와 같이 자란다. 교회들도 그와 같이 자란다. 성장이란 생명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생물들은 성장이 중단되면 쇠퇴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모든 크리스챤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있다"(Trees grow. Puppies grow. Babies grow. Relationships grow. If they are healthy and normal, that is. So do churches. Growth is an essential property of life. When living things cease to grow, they begin to deteriorate. O every Christian is for church growth)라고 했다. 생명체는 자라야만 한다. 그렇지 않아서 때가 되면, 그들은 죽을 것이다. 교회는 살아 있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죽을 것이다. 생물들이 자라기 위해서 무엇을 먹어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 에버트 허파아드(Evertt W. Huffard)는 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육체적으로 건강하기 위하여 사람은 먹어야 하며, 적어도 적절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 지식에 있어서, 발전은 연구와 배우기를 결심하는데 달려 있다. 훌륭한 영적 성장과 교회성장은 동일한 개인의 책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에 대한 결단(決斷)을 동반한다"(To be healthy physically, a person must decide to eat, at least to eat the right food. An increase in knowledge is dependent on a decision to study and learn. Great spiritual growth and church growth carry the same individual responsibility a decision to grow in Christ)고 말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택한 백성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교회의 머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이시며, 그 멤버(지체)는 성도들이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혹은 사도로(apostles) 혹은 선지자로(prophets)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evangelists) 혹은 목사(pastors)와 교사(teachers)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the whole measure of the fullness of Christ)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grow up into him)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body)을 자라게 하며(grows)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builds)"(엡 4:11-19)
그리스도의 몸은 사실 기독교 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라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함께 일하는 몸의 모든 지체들의 개념을 근래 "몸의 생활" 즉 "공동체의 생활"(body life)이라 불리우는데, 이 개념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베네주엘라 성서교회(the Penisula Bible Church)의 스테드만(Ray Stedman) 목사에게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자라야 하는데 만일 당신의 교회가 자라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 밖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성장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은 성경적인 기초로부터 유도해낸 신학적인 방법이다. 그 성경적인 기초는 지상명령으로부터 온 것이다(The biblical basis is from the Great Commission):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이 구절에서 교회의 삼중사명(threefold mission of church)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즉 첫째로, 제자삼기(disciple making), 둘째로, 세례주기(baptizing), 그리고 셋째로, 가르치기(teaching)이다. 마이클 하밀톤(M. Hamilton)은 이 삼중사명을 정의하기를, 첫째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preaching to the world), 둘째로, 신자들의 성숙(maturity of people), 셋째, 하나님께 예배(worship to God)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교회의 삼중사명은 두 분야로 요약될 수 있다: 양육(follow-up)과 성장을 위한 전도(out-reach)이다.
교회의 상황에 따라 교회의 성장을 위한 전략이 다르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어떠한 의미에서, 소형교회는 양육전략을 세우고, 대형교회는 대외전도 전략을 세우는 것은 합리적이다. 전자는 구역활동(home cell unit activity), 성경공부(Bible study),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과 같은 소그룹 전략을 의미하고, 후자는 부흥성회(revival meeting)와, 전도(evangelism), 선교(mission)등을 의미한다. 물론, 대형교회는 소그룹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는 반면에, 소형교회가 전도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형교회에 초점을 맞추어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 전략을 세우는 것이 교회성장에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소형교회는 인적 자원과 재정의 부족으로 대형 전도전략을 사용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소그룹이 최후의 수단으로 훈련이 없이도 개인전도 전략 즉, 일대일 전략(one on one strategy)을 사용할 수 있지만 저자는 소형교회 성장을 위하여 별로 효과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믿음교회(Faith Church)의 목사인 해롤드 피어스(Harold Pierce)는 교회성장 워크샵에서 소형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찾으려고 했다. 그에게 질문은 "훼이스 교회와 같은 소형교회가 어떻게 해야 자라는가?"이다. 거기에는 적어도 그에게와 소형교회의 숫적 증가에 관심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된 여덟 가지 대답들이 있었는데, 그 여덟 가지 답변들 가운데, 소형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양면 소그룹 프로그램"(two-part small group program)이 제시되었다. 하나는 전도를 강조하는 성경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성장 전략을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방법론"(how to) 기술을 위한 연구그룹이다.
데일 겔로웨이는 열 한 가지 역동적인 교회성장 원리들(eleven dynamic growth principles)을 제시하였고, 그 원리들을 사용하여 목회에 성공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원리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원리는 성장원리 다섯번째 "구역 소그룹 씨스템으로 교회를 조직하라"이다. 그는 "최대의 성장을 위하여,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제자훈련을 위하여, 교인들을 얻고 보존하기 위하여 당신의 교회를 구역들을 강조하도록 하라"고 담대히 말한다. 그의 새소망 공동체교회(New Hope Community Church)에서 그들은 1990년까지 매주 구역 소그룹의 참석인원이 거의 485구역에 4,800명이 되었다. 겔로웨이의 교회는 그가 1977년도 초에 교회를 시작했을 때에, 10명으로 된 한 구역이 있었다. 새소망공동체교회는 영(zero)에서 6,000명 이상으로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매년 1,000명까지 증가한 셈이다. 한 주에 5,500명 가량이 500구역 이상의 구역그룹(Tender Loving Care Group: Home Cell Group)에 참석하는데, 매 구역들을 525명의 평신도 구역장들(525 lay-leaders of the home cell groups)에 의하여 한 구역 그룹씩 인도한다. 사실, 교회가 새신자(new comers)의 수와 그들의 영적인 성장에 있어서 급성장하는 것은 소그룹을 통해서이다.. 소그룹 사역의 전략(the strategy of small group ministry)이 주로 소형교회를 성장시키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그룹운동이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다질 수 있으며, 교회가 지속적인 배가 운동(lasting multiplication movement)으로, 빠르면 수년 안에 양적 성장(qualitative growth)까지 달성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소그룹 운동
(SMALL GROUP MOVEMENT IN THE CHURCH)
전항의 소그룹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실상 소그룹운동은 창조시와 초대 기독교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나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일어난 가장 훌륭한 운동이라 하겠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12명의 제자그룹(twelve-disciple group)과 함께 한 이후, 거의 2000여년 동안 역대로 소그룹에서 함께 모임을 가져왔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소그룹은 유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행1:12-26; 2:1-41; 2:42-47; 4:23-37). 초대 기독교회는 소그룹 모임이 사람들의 가정에서 시작되었고, 그 첫번째소그룹 운동은 다락방(upper-room)에서 시작되었다(행1:13). 어떠한 의미에서, 이 소그룹들은 구역그룹(home cell groups)들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특별히 재침례파(the Anabaptist), 웨슬레파(Wesleyan), 오순절 운동들(Pentecostal movements)이 소그룹(cell unit group)으로 시작되었다.
오늘날 소그룹들은 기독교는 물론 세속 세계(世俗世界, secular world)까지 퍼져 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세아에 있어서 기독교의 팽창은 주로 소그룹에서 연유된 것이다. 소그룹은 수많은 미국 교회내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새생활의 열쇠(key to the new life)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비평가들(critics)은 이 소그룹 운동이 특별한 나라의 상황에 그 효과가 제한된다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하면, 어떤 비평가들은 서구 문화(Western culture)에서 시도하는 소그룹(구역) 전략에 관하여 회의적(skeptical)이며, 그들은 한국에서 소그룹(구역)의 성공이 제한된 아시아 사회의 특유한 요소들 때문(the factors unique to a regimented Asian society)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양(Oriental)이나 서양(Western)을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구역 소그룹운동들이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그룹 운동의 전망
(Perspective of Small Group Movement)
한국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 구역 소그룹 운동은 모든 교회에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다. 이 구역그룹의 사역은 특히 교회성장을 위한 중요한 전략중의 하나이다. 소그룹은 교인들이 전도를 위하여 매우 영향력이 있는 교회(a high impact church for reach-out)에 절대로 필요하다. 개척교회의 초기부터 소그룹(구역)은 가정에서 시작되곤 했다. 특히 한국 교회가 이웃과 밀착된 친교정신(neighborhood close-fellowship spirit)과, 미국 사회의 기본구조(basic building block)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반하여, 상호관계에 협동정신(co-operative relationship spirit)의 문화적 특성을 고려할 때, 교회성장을 위한 구역 소그룹에 성공적인 요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구역 소그룹운동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교회가 서울의 여의도 순복음중앙교회(Yoido Full Gospel Central Church)인데, 그 교회의 교인 60만 명이 6만 구역그룹 이상으로 나누어져 있다(Morris 1993, 151). 그러므로 엘머 타운즈(Elmer L. Towns)는 소그룹(구역)이 순복음 중앙교회에 대한 보편화된 상표가 된 것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순복음중앙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한국 교회는 이미 구역회(구역그룹)가 정착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어떤 비평가들은 미국과 같은 서부 문화권에서 시도되는 구역 소그룹 전략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구역 소그룹 전략이 한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세아 사회의 특유한 요소들 때문이라고 논박한다. 한편, 그들은 미국과 같은 서구 문화권에서 구역 소그룹 사역이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역 소그룹 전략은 서구 문화권에서도 역시 성공할 수 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가 양 문화들이 서로 차이점들(cultural differences)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래는 똑 같은 가정문화(family culture)로부터 기원했다는 것이다(마19:4-6; 창 2:18-25; 말 2:15). 둘째로, 두 문화의 생활양식(life style)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두 문화의 사람들은 똑같은 인간(same human being)으로서 역시 똑같은 근본 욕망들(the same original desires)을 가지고 있다. 셋째로, 두 문화의 사람들은 똑같은 인간이기에 똑같은 사회성(the same sociality)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의 사회에서 똑같이 밀착된 관계와 친교를 갖기를 원한다. 그들은 서로 보고 싶어하고, 만나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친교하기를 원하고, 즐기기를 원한다. 이것들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들(original desires)이다. 구역 소그룹 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엔죠이하는 좋은 기회이다. 사랑으로 교제하고 구역활동을 하는 것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가장 좋은 기회가 된다. 구역 소그룹의 모임이 생활화되고 사람들이 행복하며, 그들의 생활에서 주님께서 베푸신 것에 대한 그들의 신앙과 간증(faith and testimony)을 나누게 될 때에,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끌려오고, 그러므로 교회가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볼 때에, 한국 교회나 미국 교회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미국과 같은 서구 문화의 배경 속에서 구역 소그룹 전략이 성공한 좋은 예가 있다. 그 경우가 바로 미국 오레곤주 포트랜드시의 새소망 공동체교회인데 교인수가 6천명이나 된다. 라이너스 모리스(Linus J. Morris)는 개척교회 목사인 데일 겔로웨이(Dale E. Galloway) 목사가 한국의 조용기 목사의 공동체 구역 소그룹 전략을 도입, 적용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새소망교회를 시작하기 전, 겔로웨이는 그 새교회가 포트랜드시에 있는 수천의 불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분명한 비젼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그 교회는 조목사 교회의 공동체 구역그룹의 전략을 적용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봄' 즉 '텐더 러빙 캐어'(Tender Loving Care)의 구역그룹으로 6천명 이상의 교인으로 성장하였다" 겔로웨이는 그가 그의 교회에서 소그룹 사역(cell ministry)을 어떻게 하였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소그룹(cells)이란 우리교회의 또 다른 사역이 아니라, 소그룹(cells)이 바로 교회(church)다"고 대답하였다. 그 교회는 구역그룹으로 조직화되어 있다. 그러면 서구라파는 어떠한가? 현재 매우 침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이너스 성장으로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 영국에서도 이 구역그룹의 전략을 사용하여 성공하고 있는 교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교회가 바로 이취더스 교회(Itchthus Christian Fellowship)이다.
훌러전도 및 교회성장연구원(Fuller Institute of Evangelism and Church Growth)의 원장이며 훌러신학교 객원교수인 칼 죠지(Carl F. George)는 구역 소그룹 전략이란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수많은 북미 교회들은 죤 웨슬레의 반모임(class meeting)들, 19-20세기 주일학교 운동, 그리고 세포교회(cell church)와 오늘날 잘 정착된 소그룹으로부터 소그룹 모임과, 친밀하고 책임성 있는 필요한 모임들의 중요성을 인식해 왔다"고 했다. 한국 서울에 있는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와 미국 오레곤주 포트랜드시에 있는 새소망공동체교회가, 구역 소그룹 전략이 한국이나 미국에서 다같이, 문화적 배경이나 지리적인 위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 그룹전략이 한국이나 미국에서도 성공할 수가 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 구역 소그룹 전략이 실패할 수도 있다. 죤 보한(John N. Vaughan)은 한국 교회나 미국 교회에서 구역 소그룹 전략이 실패한 것을 관찰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기를, "수많은 한국 교회들이 미국 교회에서 성장하지 않는 주일학교(non-growing Sunday school)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성장하지 않는 구역 소그룹들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합당한 목적과, 그들이 무엇이라고 부르던, 주일학교와 구역 소그룹들의 계획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회 안에서 적절하게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에서와 같이 한국에서도 성장의 기회를 놓치고 실패하게 된다"고 했다.
구역 소그룹들은 문화와 지역을 초월해서 고도성장을 위한 교회에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 운동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어디서나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멀리 이중 문화권(bicultural context)인 미국에 있는 한인 이민 교회(Korean immigration church)를 위한 구역그룹 전략은 어떻게 보는가? 구역 소그룹 전략에 대하여, 위에서 연구한 바와 같이 한국과 미국 교회들에게서 다 같이 성공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을 위한 구역 소그룹 전략은 두 개의 문화적 상황이 혼합되거나 분리되지 않는 한, 한국 이민교회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소그룹의 개념과 정의
(Conception and Definition of Small Group)
소그룹의 개념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담과 하와 한 쌍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창조시로부터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하나님과 함께"(with God)라는 개념은 기독교 소그룹의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하나님 없는 소그룹은 의미가 없다. 소그룹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약 기록과 예수님의 백성 곧 기독교인들과 성도들에 대한 신약 기록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면 지역 교회의 상황에서 소그룹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지역 교회의 소그룹에 대한 다른 정의도 있지만, 닐 맥브라이드(Neal F. McBride)는 일반적인 정의를 "교회 내에 소그룹은 상호간 기독교적인 수양과 친교를 나눌 목적으로 자발적이고도 의도적으로 세 사람으로부터 열 두 사람까지 규칙적으로 모이는 그룹이다"라고 시사했다.
이 구절들에서 그는 소그룹의 정의의 내용을 9가지 요소로 분류했다. 즉 첫째, 교회안에서(within the church), 둘째, 자발적(voluntary), 셋째, 의도적인 모임(intentional gathering), 넷째, 세 사람 내지 열두 사람(three to twelve people), 다섯째, 규칙적인 모임(regularly meeting together), 여섯째, 같은 목표를 가지고(with the shared goal), 일곱째, 상호(mutual), 여덟째, 기독교적 수양(Christian edification), 그리고 아홉째로 친교(fellowship)등이다. 이것은 소그룹에 대한 의도된 정의이지만, 이 소그룹 모임에 대한 요소들은 저자의 생각으로는 교회 안에서의 그룹 운동에 국한된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소그룹 사역에 대한 더 중대한 목적은 대외전도 사역기능의 필요성에 있다. 이것이 소그룹의 또 다른 목적이다.
또 다른 정의는 제프레이 아놀드(Jeffrey Arnold)가 소그룹이란 더 훌륭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 위하여 함께 일하도록 위탁된 세 명 내지 열 두 사람으로 구성된 의도적인 모임이라고 정의한 바와 같이, 제자됨(discipleship)과 동역함(co-workership)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렛 아이센노글(Gareth Weldon Icenogle)은 간단한 정의를 내렸다. 즉 "소그룹은 몇몇 사람들(3명-20명)이 얼굴을 맞대고 모여 서로 더 좋은 것과 폭넓게 다른 사람들의 좋은 것들을 나누고 실행하는 모임이다"라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소그룹 사역은 사람들의 소규모의 모임,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의 지상명령인 제자훈련과 전도에 대한 위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뜻이다(마 28:19-20).
소그룹의 유형과 구성요소
(Types of Small Group and Its Components)
교회안에는 여러가지 많은 다른 소그룹의 유형들이 있는데, 그들 모두 다른 이름들로 불리어진다: 교회 새신자 그룹(orientation groups: 새신자를 교회에 처음 인도하는), 돌봄과 나눔의 그룹(caring and sharing groups: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제자그룹(discipleship groups: 교육과 제자훈련을 강조하는), 구역그룹(home cell groups: 교제와 구역분할을 통한 교인 증가를 강조하는), 목회사역그룹(ministry groups: 교회관리를 강조하는), 그리고 전도와 선교그룹(evangelism and mission groups: 교회성장을 위한 대외전도를 강조하는) 등이다. 제프레이 아놀드는 교회 안에서의 소그룹을 기도의 모임(prayer circles)과, 성경공부의 모임(Bible studies), 선교의모임(mission fellowships)과, 나눔과 돌봄의 그룹(sharing and caring groups), 전도팀(evangelistic teams)과, 교회사역 분과(church ministry committees), 새신자반(new member classes)과, 가정교회(house churches), 그리고 계약그룹(covenant groups)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소그룹들을 양육그룹에 초점을 맞춘 또 다른 분류가 그룹의 기본 유형에 기술되어 있다. 이 양육 프로그램은 댄 윌리암스(Dan Williams)에 의하여 다른 구성요소들 위에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그룹생명의 구성요소를 강조하는 특수화된 그룹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왔다: 즉 거기에는 책임그룹(권면을 강조하는), 기도그룹(중보를 강조하는), 그리고 훈련그룹(교육을 강조하는) 들이 있다.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그룹이 예배그룹(어떤 영적 은사들을 강조하는)과 목회 사역그룹(치유를 강조하는)들이다.
소그룹의 유형은 기능에 따라 그 이름이 다양화될 수 있다. 그러나 소그룹들은 운영에 용이할 뿐만 아니라, 교회성장에 효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신약시대에 있어서 기본 소그룹들의 구성요소들이 행 2장 42절에서 47절까지 나타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 구절들에서 소그룹에 대한 네 가지 구성요소들이 발견된다. 즉 양육과(nurture), 예배(worship), 공동체(community), 그리고 신자들이 헌신하는 선교(mission)등이다. 이것들은 생동감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네 가지 요소들이다.
첫째로, 양육그룹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라 새로운 신자들이 스스로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2:42).
둘째로, 예배는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된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경외심을 가지고 신자들이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2:43).
셋째로, 공동체는 친교로 혹은 모든 것을 함께 교제하고 나누는 사회를 의미한다(행 2:44-45).
넷째로, 선교는 복음의 좋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의미한다(행 2:43). 초대 교회 소그룹의 네 가지 요소들의 표현으로 교회의 급성장의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그룹이 이 네 가지 요소들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그룹은 그 중에 하나만을 강조하기도 하고, 한편, 다른 그룹은 은사들의 다양성과 교회안에서 수행되는 다양한 일로 인하여 다른 요소들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룹의 성격이나 특징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들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각 개성에 의한 것으로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그룹은 예배를, 어떤 그룹은 양육을 어떤 그룹은 친교를 또 어떤 그룹은 선교와 사회 봉사를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그룹들은 그들의 활동에 있어서 네 가지 구성요소 모두에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하기도 한다. 물론, 그룹이 네 가지 요소들의 밸런스(balance)를 유지하여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모든 그룹이 초대 교회에서와 같이 신앙생활에 네 가지 구성요소(four components)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며 바람직하다.
소그룹의 역할
(Role of Small Group)
소그룹들은 기독교회에서는 물론, 세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 점에 대하여 가렛 아이센노글은 "소그룹들은 신학적, 역사적 역할과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은 소그룹의 경험들을 통하여 이를 성취하고 완성한다. 사회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현상과학들이 두 사람, 세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공동 목적과 생활을 위하여 함께 하는 거리감이 없는 관계에 대한 분석과 적용으로 번영하였다"고 말했다.
초대 기독교회에 있어서 소그룹들은 소형교회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소그룹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형교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그룹(small group)과 소형교회(small church)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소그룹은 본래 소형교회의 원시적 형태였고, 그 소그룹은 규모에 있어서 자라지 않지만, 한편 소형교회는 대형교회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교회안의 소그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 초기로부터 이 소그룹 역할을 강조하셨는데, 그의 지상명령에 나타나 있다. 즉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인 이 구절들에 소그룹의 역할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세계를 향한 선교와 모든 족속들을 제자로 만드는 일이다. 이 소그룹은 예수님 사역의 초기에는 12제자로 구성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11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마 28:16). 이 그룹은 틀림없이 교회안에서 소그룹 역할을 담당한 최초의 대표 그룹이었다. 이 명령은 내적 초점인 신자들만의 은밀한 사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 되는 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은 것이다.
그 역할의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제자들을 삼는 일(making disciples)이다(마 28:19).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에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그의 계속적인 사역을 위하여 소그룹의 멤버들을 그의 제자로 삼는 것이었다. 둘째로, 부르신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일(baptizing)이다(마 28:19). 세례는 새로운 멤버들을 그리스챤이 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일이다(마 28:20). 한 마디로 말하면, 소그룹의 역할이란 지상 명령을 이루기 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제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에 소그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초대 교회의 소그룹의 역할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소그룹의 역할은 안팎으로 초대 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행 2:43-47). 바울은 여러 곳의 사가(private homes)에서 소그룹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가르치기도 했다(행 19:8-10; 20:20-21). 또 다른 예가 고넬료와 그의 온 집안이 개종한 경우이다(행 10:32-33). 현대 교회도 이 소그룹의 장점과 특성들을 잘 살려서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하여 효과있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소그룹의 원리
(Principles of Small Group)
소그룹의 원리는 목사의 목회철학(philosophy of ministry)에 따라 좀 다르기는 하지만, 성서신학적(biblical theology) 바탕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또한 소그룹 원리들은 목회현장의 상황(the context of ministry field)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피터 와그너는 이 특수상황에 대처하는 전략을 "성별된 실용주의"(consecrated pragmatism)라고 불렀다. 이것들은 지역교회 목사들이 그 교회의 성장을 발전시키고 촉진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목사는 그의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성취하고자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사는 어떠한 종류의 성장, 즉, 내적(질적) 성장 혹은 외적(양적) 성장 중 어느 것을 목표로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이에 부언하여, 목사는 그의 프로그램의 결과를 위하여 얼마 동안 진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지역적 특성, 예를 들자면, 도시이냐 시골이냐를 고려하는 것이 좋다.
데일 겔로웨이(Dale E. Galloway)는 구역그룹을 위하여 21개의 원리들을 제시하였다. 그것들을 요약하면, (1) 세 가지 요소들 즉, 나눔과 대화기도와 성경의 적용, (2) 지도자의 목표에 동참, 사람들의 정돈과 규칙, (3) 대화체의 기도로 시작하고 마침, (4) 필요를 요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그리고 즉각 응하여 줌, (5) 성경을 그들의 권위와 안내서로 삼음, (6) 그룹안에서 나눔을 장려함, (7) 교리적 논쟁을 피함, (8) 상호 교양을 위한 훈련, (9) 사랑으로 인도함, (10) 멤버들의 양육, (11) 새신자들을 자라도록 돌봄, (12) 문제의 인물들에 대한 처리, (13)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의 실수를 말하지 않고 그들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도록 함, (15) 영적으로 자신들을 조절함, (16) 지속적인 교육, (17) 해이하지 않도록 함, (18) 좋은 유모어 감각은 허용함, (19) 필요시 도움을 요청함, (20) 필요시 목사의 도움을 요청함, (21) 인도하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구역그룹을 위한 겔로웨이의 원리들을 소개한 이유는 겔로웨이 목사가 구역 소그룹을 통하여 그의 목회에 크게 성공하고 있고, 그 원리들이 많은 은혜와 사랑이 풍부하고, 실재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그룹의 전략
(Strategies for Small Group)
우선, 목사들은 소그룹 운동을 위한 전략들(strategies)을 세워야 하며, 그리고 그 전략을 위한 전술들(tactics)을 세워야 한다. 이 원리의 견해로 볼 때, 전략이란 전체로서의 그림(big picture)과 같고 반면에, 전술은 그 전략내의 세부적인 계획(project in detail)을 의미한다. 이 소그룹의 전략은 두 부분으로 세울 수 있는데 하나는 지도자의 훈련(leadership training)이요, 다른 하나는 소그룹 운영(small group operation)이다. 이 부분에서는 단지 소그룹 운영이 취급되고, 지도자 훈련은 평신도 지도자 훈련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소그룹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How to Begin Small Groups)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모종의 그룹을 필요로 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본래부터 소속감(sense of belonging)이라고 하는 성향(disposition)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선, 목사들(목회자 혹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비젼을 통하여 그룹의 목적을 분명히 하여야 한다. 만일 목적이 불분명하면, 그 그룹은 존재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룹은 어느 그룹이나 비젼을 통하여 분명한 목표 (clear-cut target)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로, 잠재능력이 있는 그룹 멤버들을 초청해야 한다(invitation of the potential group members). 다시 말하면, 목회자들은 그들의 소그룹 사역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잠재능력이 있는 그룹 멤버들을 불러 들여야 한다. 그 잠재능력이 있는 인재들을 철저히 훈련시켜서 목회사역에 협력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셋째로, 첫 모임(the first meeting)은 그 운영에 있어서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첫 인상이 일반적으로 다음의 모임을 위한 그룹의 진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팔머 베커(Palmer Becker)는 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즉 "첫 모임에서 멤버들은 서로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각 사람이 도착하면 그들이 모든 사람을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라. 멤버가 그들 자신에 관하여 대화를 나눔으로 서로가 알도록 도와 주라. 이름을 소개하고 내력과 자기가 사는 동네와 직업을 소개함으로 시작하라. '아침에 무엇을 잡수셨습니까?'와 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들이지만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안도감을 갖게 함으로 필요하다." 그룹 멤버들로 하여금 교회안에서 그들 그룹에 대한 존재의미와 사명감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소그룹은 어떤 사람이 몇 사람 세 사람에서 열 두 사람 그 그룹이 요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에 시작한다. 물론, 그룹 회원들의 후보(candidates)는 어떠한 규정된 자격에 의하여 선택된다.
소그룹의 조직
(Organization of the Small Groups)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룹을 조직하기 위하여 잠재능력이 있는 멤버들을 선택하는 것이 처음 해야 할 일이다. 그룹멤버를 선택한 후에 소그룹은 효과적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 효과적인 조직이 그룹 활동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그룹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첫째로, 그 그룹회원의 수 보통 세 명에서 12명이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적당하다. 물론, 그것은 그룹의 상황과 지도자의 계획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성경에 비추어 보면 그룹 멤버의 수는 다양하다. 거기에는 각기 다른 그룹들 즉, 소그룹과 대그룹들이 있다. 소그룹의 수는 보통 세 사람에서 12사람으로 구성이 된다. 저자는 소그룹을 5명 내지 7명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숫자가 지도자가 다루기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수에 있어서 12명을 넘어서면 친밀성(intimacy)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멤버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갖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칼 죠지(Carl F. George)는 그룹의 크기가 13명을 초과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를, "그룹의 규모가 13사람을 넘어서면 친밀성과 책임성과 목회적 돌보는 일에 어렵고, 개인적인 기도와 자기를 표현하는데 안도감을 잃게 된다. 그리고 소그룹만이 할 수 있는 확대된 가족의 양육을 대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소그룹 활동의 짧은 시간 동안에 그들의 신앙생활에 관하여 충분한 상의를 할 수 없다. 아마도 소그룹의 가장 효과적인 수는 저자의 그룹활동 경험으로 보아 5명이 가장 좋은 숫자라고 생각이 된다.
소그룹 지도자의 위임
(Committment of the Group Leaders)
소그룹을 조직한 후에 그룹 활동들은 잘 훈련된 지도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위임되어야(committed) 한다. 자격을 갖춘 지도자가 소그룹을 인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격을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소그룹을 인도할 때에, 지도력의 부족으로 그 활동 중에 몇 가지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교리적인 문제, 관계성의 문제, 신앙의 영적인 문제들이다. 소그룹 활동을 어느 지도자에게 맡기기 위하여 교회의 목사는 그 소그룹이 처음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그 지도자를 훈련시켜야 한다. 지도자가 소그룹을 위하여 사역하기 전에 훈련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 외에 소그룹 활동에 있어서 그 소그룹의 지도자를 돕도록 부지도자(assistant leader)를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지도자를 돕고 그 지도자가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을 때에 그를 대신하여 사역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로, 앞으로 기존 소그룹이 분할할 때에 생기는 새로운 소그룹의 지도자가 될 인턴쉽으로서의 훈련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소그룹 활동의 방법
(Methods of the Small Group Activities)
소그룹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주역(leader)이시고 소그룹은 인간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수단(vehicle)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살아 계셔서 소그룹안에서 역사하시며 여러 규모의 그룹들과 내적 관계를 맺으신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pivotal Person)가 되시기 때문이다. 신적인 차원(divine dimension)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삼위(three persons)는 소그룹의 멤버들(small group members)이시다. 그러면 성령의 사역은 무엇인가? 성령의 역사는 소그룹 사역을 위하여 최우선적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소그룹 사역이 교회에서 성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룹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으로 하여금 소그룹을 위하여 활동하실 수 있으시도록 자유하시게 하여야 한다(release the Holy Spirit). 성령의 역사들을 요약하면, (1) 성령은 소그룹 멤버들 안에 보혜사(Comforter)로서 내주하신다(요 4:16-17 KJV; 롬 8:9-11), (2) 성령은 스승(Teacher)으로서 그들을 가르치신다(요 14:26). (3) 성령은 권고자(Advisor)로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신다(요 14:26). (4) 성령은 상담자(Counselor)로서 그들을 인도하신다(요 16:13). (5) 성령은 심판자(Judge)로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깨닫게 하신다(요 16:8-11). 그리고 (6) 성령은 기도의 중보자(Mediator)로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중재역할을 하신다(롬 8:26). (7) 성령은 전능자(the Almighty)로서 하나님의 유용한 은사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능력을 부어 주신다(고전 12:11). (8) 성령은 평화의 조성자(Peace-Maker)로서 평안의 줄로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신다(엡 4:3). 이 사역들은 소그룹 활동을 위하여 절대적인 요소들이 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에, 소그룹은 질적으로, 양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하여 과학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소그룹의 지도자들는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많은 지식(knowledge)과 기술(skills)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소그룹 활동을 하기 위하여 몇 가지 운영방법을 고려하여야 한다. 물론, 소그룹의 운영방법을 일률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각 지역교회의 특성에 맞게 개발하는 것이 좋다.
(1) 회합장소(meeting place) 가장 좋은 장소는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되겠으나 구역 소그룹의 경우에 있어서 가정이다. 왜냐하면 모든 신자의 가정은 지역사회를 위하여 전도의 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구역 소그룹의 장소는 그룹의 여건들에 따라서 사무실(office), 공장(factory), 교회시설(church facilities)의 작은 방 등에 따라 정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멤버들은 그 회합장소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마음속에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장소의 분위기가 그룹활동, 특히 소그룹 활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효과적인 장소를 택해야 한다.
(2) 회합시간(meeting time) 주중 편리한 시간 즉 그들이 모이기에 가장 좋은 시간, 예를 들면 한국 교회의 경우에 있어서는 매주 화요일, 목요일, 금요일 중 저녁 시간이 가장 좋다. 물론 그 그룹 멤버들의 시간에 가장 여유있는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간이 없어서 시간에 쫓기면 그룹활동을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 멤버들의 시간만 가능하다면 여유있는 낮 시간도 무방하다. 목적은 소그룹 활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3) 그룹활동(group activity) 그룹모임의 전후에 식사나 간단한 스낵을 드는 것이 좋다. 그리고 소그룹은 6개월의 생활주기(life cycle)를 갖는 것이 좋다. 이 점에 대하여 랠프 네이버(Ralph W. Neighbour Jr.)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여러 해 동안 그룹활동에 경험을 갖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기간 이후 침체되는 것을 확인했다. 사람은 첫번째 6개월 동안 서로 끌어 주지만, 그 후에는 그들은 모두가 '변방인물'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유 때문에 각 소그룹은 6개월 후 자연적으로 증가하기를 기대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재 구성(reorganize)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4) 프로그램(group program) 모이는 프로그램은 가능한 한 간단한 것이 좋다. 그 프로그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프로그램 내용은 다음과 같이 한다: 묵도, 찬송, 설교 혹은 성경공부, 중보기도, 헌금, 간증, 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에 대한 토의, 그리고 평가와 다른 사람들을 그들의 소그룹 모임에 참여시키기 위한 전도와 사회봉사를 위한 전략, 그리고 나서 약간의 다과를 들면서 교제시간을 갖는다. 그 그룹모임은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기도하며 마친다. 물론, 제자훈련이나 시간을 많이 요하는 그룹활동들은 예외가 된다. 제자훈련은 특수화된 강도있는 훈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 적어도 2, 3시간 이상을 요하게 된다.
소그룹 감독의 필요성
(Needs of Supervision for Small Group)
감독(supervision)은 소그룹 멤버들 사이에 주어진 사역의 질(ministry quality)을 높이는데 필요한 지원관계를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감독하는 것은 멤버들(group members), 그룹 지도자(group leaders)들, 그리고 목회자들(pastors)을 위하여 유익하다. 첫째로, 감독은 그룹 멤버들이 자신들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며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개선하도록 도와준다. 둘째로, 감독은 그룹 지도자들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고, 그들의 일을 효과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셋째로, 감독(supervision)은 목회자로 하여금 소그룹 사역의 흐름(a stream of their small group ministry)을 파악하여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양적 성장, 질적성장)을 위한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차기 전략을 위한 평가
(Evaluation for Next Strategy)
평가(evaluation)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차기 전략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평가가 없이는 목사가 다음 전략을 세울 수가 없다. 평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공식평가(formal evaluation), 또 하나는 (2) 비공식 평가(informal evaluation)이다. 공식평가는 주기적으로 계획된 시간과 수준에 따라 한다. 즉 프로그램 진행 중이나 진행 끝에 한다. 그러나 비공식 평가는 필요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할 수 있다. 비공식 평가는 프로그램의 결과를 위한 정보나 데이타(data)의 형식을 갖추지 않는다. 형식들은 필요할 때에 기안하면 된다. 그러나 공식 평가는 프로그램의 결과를 위한 정보나 자료들, 예를 들면, 설문지들(questionaries), 교회서류들(church documentations), 통계자료들(statistical data), 인터뷰 기록들(interview records)을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갖추어진 형식들에 의하여 공식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정보(informations), 판단(judgements), 결정(decisions)등을 주요소로 하고 있는 공식평가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가자(evaluator) 즉, 목회자나 지도자들의 중심(heart)과 자세(attitude)이다. 닐 맥브라이드는 지도자의 자세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즉 "정보, 판단, 그리고 결정은 공식평가의 주요 요소이다. 그러나 그것들만으로는 성공적인 평가를 할 수 없다. 모든 정확한 이론과 기술이 있는 반면에, 종의 마음(a servant's heart)을 갖지 않는 한, 좋은 성과를 걷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도자로서의 태도는 소그룹을 평가할 때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하였다.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프로그램을 수행한 결과(the results)를 평가해야 한다. 자세히 말하면, 이 소그룹의 구조(the structure of the small groups), 그룹생활(the group life), 수행 스케줄(the schedule of the implementation), 프로그램의 진행(the progress of the program), 상호 관계성(the interpersonal relationship), 그리고 지도자의 리더쉽(the leader's leadership)등이다.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닐 맥브라이드 (Neal F. McBride)는 공식평가의 10단계를 제시했는데, 요약하면 세 단계가 된다. 즉 (1) 계획단계(the planning phase: 평가를 준비하는), (2) 진행단계(the process phase: 필요한 정보를 얻은), (3) 결과단계(the product phase: 판단과 결정을 만들고 나누는 단계)등이다. 저자는 클리닠(clinic) 경험에 의하여, 4단계를 제시하려고 한다. 즉 (1) 자료수집 단계(collection of the data), (2) 자료분석 단계(analysis of the data), (3) 자료처리 단계(treatment of the data), (4) 다음 전략의 결정 단계(decision of next strategy)등이다. 평가는 어느 프로그램을 시행하든 간에 반듯이 필요한 것이다.
소그룹의 발전단계
(Small Group's Development)
앞의 교회성장 부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교회안에 있는 소그룹들은 발전하고 성장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그룹들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있는 유기체(living organism)이기 때문이다. 소그룹 사역은 사실, 사람들에게 대한 질적 성장은 물론, 양적 성장의 자산이다. 그래서 소그룹 사역은 교회를 통하여 발전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모든 소그룹은 조직적인 발전과정을 거치거나 사람의 몸과 같이 성장의 과정을 거처야 한다. 닐 맥브라이드는 성경에 나타난 "몸의 생리의 유추"(body analogy)를 이용하여 소그룹의 발전과정을 설명했다. 그는 소그룹 발전과정을 인간의 "몸의 생리 주기"(body life cycle)로부터 유추된 "소그룹 생리주기"(small group life cycle)와 일치하여 5단계로 구분했다: 즉 첫째, 구성단계(forming)의 출생과 유아기(birth and infancy)로서 2-3회, 둘째, 기초단계(norming)의 유년기(childhood)로서 6-7회, 셋째, 적응단계(conforming)의 소년기(teenage)로서 5-6회, 넷째, 수행단계(performing)의 성숙기(maturity)로서 30회, 다섯째, 개혁단계(reforming)의 개혁기(reformation)로서 5-6회 등이다. 이것은 성경적, 생물학적인 바탕에 기초한 매우 잘 이해할만한 설명이다.
저자는 이 소그룹 발전의 5단계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동시에 "세포유추" 혹은 "셀유추"(cell analogy)의 원리를 제시하려고 한다. 세포(cell)는 생명의 한 단위(unit)이다. 세포가 자라면 두 개로 분열되어 배로 나누어 져서, 분열하는 동안 자세포(daughter cell)는 모세포(mother cell)와 동일한 한 셋트(set)가 생기면 그 종자(species)가 새로 생기게 된다. 이것이 "세포주기 성장분열"(cell cycle growth and division)의 원리이다. 세포그룹은 자라고 분열해서 이와같이 두 개의 세포그룹이 된다. 이 원리가 "소그룹 주기 소그룹 성장과 소그룹 분열"(small group cycle growth and small group division)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성장 후에 분열되어야 하며, 한편 분열로 인해 성장해야 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현하면, 소그룹의 운동역사는 성장→분열→성장→분열→성장(growth→division→growth→division→growth)라는 순환진행(circulating progress)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닐 맥브라이드는 세포그룹이 다음과 같이 5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하였다.
(1) 조직단계(organization) 첫째 단계는 셀그룹의 조직단계이다. 이 기간 중에 셀그룹이 조직되고 유아의 형태로 형성하게 된다. 이 때에 그룹 멤버들은 서로 소개하는 단계이다.
(2) 시험단계(probation) 둘째 단계는 멤버들의 시험해 보는 단계이다. 이 기간중 셀그룹 멤버들은 어린아이의 시기(childhood)와 같이 그룹 멤버들에게 기대할만 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아보는 단계로, 이 때에 고정그룹 멤버들(fixed group members)이 선택된다.
(3) 적응단계(conformation) 셋째 단계는 그룹의 멤버들이 그 소그룹 생활에 적응할 수(adaptable) 있도록 하기 위한 적응단계이다. 이 것이 청소년기(teenager)이다.
(4) 발전단계(development) 넷째 단계는 그룹 발전의 단계로 그룹의 성숙한 기능을 보여준다. 이 기간에는 그룹 멤버들이 상호관계(interpersonal relationship)를 유지하고 대외전도(outreach)를 하면서 지도자와 함께 일한다.
(5) 분할단계(division) 다섯째 단계는 그룹의 성장과 교회 멤버쉽(membership)의 성장을 위하여 셀그룹(cell group)이 분열하는 단계이다. 이 기간에 그룹은 자라서 성장하고 증가해야 한다. 이 그룹 발전의 다섯째 단계는 그룹 발전의 마지막 단계(the last stage)이고 동시에 분열된 셀그룹의 새로운 출발(a new start)이다. 그룹들과 교회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 몸의 세포분열(body's cell division of a living creature)에 의하여 자라는 것과 같이 소그룹의 세포분열에 의하여 자랄 수 있다. 이 세포분열은 죽어가는 세포의 보충, 그리고 더욱 성장하기 위하여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세포그룹들(cell groups)도 이러한 생성의 원리(生成原理)에 의하여 한편으로 소멸(消滅)되며 한편으로는 성장(成長)한다.
소그룹의 분할방법
(Division Methods of the Small Groups)
세포분열은 생명체가 성장할 때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natural phenomenon)이다. 교회는 살아있는 영적 유기체이다(church is living organism). 소그룹은 교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세포들이다. 살아 있는 유기체의 세포들은 자라고 분열한다. 그래서 인간의 몸의 세포와 같이 살아있는 세포들은 자라서 배로 증가한다. 그리고 난 다음에 넷이 분열하면 8이 되고, 8이 분열하여 16이 되고, 16이 분열하여 32로 된다. 그러므로 이 증가원리(multiplication principle)에 의하여 세포그룹은 그 그룹과 멤버쉽에 있어서 증가하게 된다. 이 증가의 결과로 교회는 자연히 성장하게 된다. 세포분열 방법(cell division mode)은 몸의 성장은 물론 교회성장에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교회성장에 대한 이와 같은 생물학적 접근(biological approach)은 성경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엡 4:16; 마 13:1-9). 이 세포분열 방법은 두 가지 방식으로 분리할 수 있다. 하나는 자연분리 방식(natural division mode), 다른 하나는 강제분리 방식(forced division mode)이다.
특히, 구역그룹을 보면, 자연분리는 구역세포 그룹들이 자라서 두 배로 증가할 때에 일어난다. 예를 들면 4가정의 멤버를 가진 세포가 8가정이 될 때에 그 그룹은 두 개의 구역그룹으로 분할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세포분열이 구역세포의 성장 후에 온다는 뜻이다. 이것이 구역세포 그룹의 자연분열 방식이다. 이것은 교회성장을 위한 소극적 혹은 피동적 방법이다. 한국과 미국에 있는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이와 같은 피동적인 방법을 해 왔다. 이와는 달리 교회성장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강제적 셀그룹 분열방식(forced cell group division mode)이다. 이것은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교회의 급성장(fast growth)을 위하여 사용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분열방식이다. 예를 들면, 세포가 두 배로 증가하기 전에, 만약 그들이 반만 증가를 해도 두 개의 구역그룹으로 분할하는 방식이다. 상황에 따라 구역그룹은 처음부터 목회자에 의해 적극적인 방법으로 두 개의 그룹으로 분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케이스(case)는 큰 믿음과 강력한 지도력을 요한다. 조용기 목사는 이 방법을 사용하여 서울에 있는 여의도 순복음중앙 교회를 70만 성도를 가진 가장 큰 교회로 급성장시켰다고 한다. 그는 구역이 10가정만 넘어도 두개의 구역으로 분할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적극적인 구역분할 방법에 관하여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구역그룹 사역의 초기에 많은 사람들이 분할을 싫어했었다고 말한 바 있다. 분할은 강요되어야 한다....순복음중앙교회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룹과 교회의 생명이 부단한 세포분열에 의존한다는 것을 인식한다. 경우에 따라 우리는 한 구역을 분할하도록 설득시키기 위하여 목사 한 사람을 보내야 하지만 보통 분열은 구역이 15가정을 넘을 때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우리교회 규칙이다. "
평신도-지도자 훈련
(LAY-LEADERSHIP TRAINING)
소그룹 프로젝트(small group project)를 시작하기 전에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비젼을 보여 주어야 한다. 비젼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목회철학의 개념(a concept of a philosophy of ministry unrevealed)이다. 그러므로 이 개념(concept)은 구체화(visualization)되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철학에 핵심(pivot of the philosophy of ministry)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이 비젼은 교인들로부터 선택된 지도자 후보생들에게 보여지고(showing the vision), 동정(identification)되여야 한다.
소그룹 지도자의 비젼화
(Visionarization: Planting a Vision)
비젼(vision)이란 무엇인가? 비젼이란 하나님께서 중요한 리더쉽의 포지션(leadership position)을 줄 사람들에게 넣어주는 자질(quality)이다. 사실, 비젼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성령을 통하여, 성경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젼을 보았고, 오늘날의 사람들도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비젼을 볼 수 있다. 비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가 있다: 능력, 혹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데, 믿음으로 미래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서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히 11:1, KJV). 비젼이 없으면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의 전략을 세울 수 없고 그의 목회는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목표(targe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젼이 없으면 비지니스도 없다(If there is no vision, there is no business). 비젼이 없으면 교회가 성장을 중단하게 되고 죽을 수도 있다. 성경은 "비젼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고 했다(잠 29:18 KJV).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비젼이란 새신자를 교회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로 끌어 들이는 두 개의 중심요소들 중에 하나라고 강조했다. 비젼이 없으면 목회자는 교회를 성장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성장의 전략은 비젼과 더불어 시작된다.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의 비젼을 볼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의 안목"(church growth eyes)을 가져야 한다.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한 비젼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성장 전략의 출발점(starting point)이다. 하나님은 지상에서 그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비젼으로 불리움을 받은 그들의 마음의 기능을 통하여 역사하기를 원하신다. 큰 축복은 비젼을 봄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온다. 목회자가 비젼을 받은 후에는, 그들의 회중(congregation)들에게 그 비젼에 대한 확신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비젼은 그들의 회중에게 확신을 주도록 강단으로부터 계속 보여지고 들려져야 한다. 옐레미야와 이사야는 이스라엘 벡성에게 끈임없이 국가의 장래에 대한 비젼의 메시지인 소망의 말씀을 선포하였다(렘 2:11; 사 60-61장). 그렇게 하기 위하여 목회자는 그 비젼에 관한 메시지를 능력있게 전하여야 한다. 그래서 회중들은 그 목사와 공감해야 한다. 교인들이 목사의 비젼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면 목사의 목회사역에 협조하려들지 않는다.
소그룹 지도자의 후보선정
(Selecting and Recruiting Small Group Leaders)
목회자는 회중들 가운데서 주요 멤버들(key members)에게 동기를 부여(motivating)하고 교회성장 운동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켜야 한다. 그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그들을 참가(participate)시키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목회자가 리더쉽 훈련계획(leadership training plan)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소그룹 사역을 위한 준비 프로그램, 즉 리더쉽 훈련 프로그램에 그 주요 멤버들을 참여 시켜야 한다. 소그룹을 운영하기 위하여 지도자는 얼마나 필요한가? 지도자의 수는 소그룹의 수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때에 따라 지도자가 어떤 문제로 인하여 결원이 생겼을 경우에 대신하기 위하여 보충 지도자들이 필요할 때가 있다.
소그룹 지도자들의 자격(qualification)은 무엇인가? 그룹 지도자들의 자격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사역할 지도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자격들이 필요하다. 팔머 베커(Palmer Becker)는 지도자들의 필수 자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특별히 디모데전서 3장을 중심으로 요약해서, 첫째, 대접을 잘하고(hospitable, 요 13:35), 둘째, 존경받고(respected, 딤전 3:1-7), 셋째, 재치가 있어야 하고(sensitive, 행 6:1-7). 넷째로 자원함으로 하며(motivated, 벧전 5:1-7), 다섯째로, 신앙기반이 확고한(grounded, 행20:27-32) 사람이다. 이것들은 지도자들의 인격성향들이다. 사실, 성경에는 지도자의 자격으로 신학교 학위나 안수받는 등의 언급이 없고 지도자의 성격에 관하여 폭넓게 언급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도자가 교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
닐 맥브라이드(Neal F McBride)는 모든 지도자가 소유해야 할 중대한 자격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1) 영적인 원리들(spiritual principles)을 이해해야 한다(딤전 5:22). (2) 그리스도와 더불어 성장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벧후 3:18). (3) 사람들을 돌보도록 위임되어야 한다(고전 12:25). (4) 봉사하고자 하는 욕망에 불타야 한다(갈 5:13). (5) 배우기를 즐겨 해야 한다(엡 5:10). (6) 시간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고전 14:40). 이것들이 맥브라이드(McBride)가 제시하고 있는 지도자들의 지적(intellectual), 의지적(volitional), 그리고 영적 성향들(spiritual dispositions)이다. 저자는 지도자들의 자격이 소그룹을 수행할 수 있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은사들(gifts of God)로 생각하며, 그들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훈련(training)을 받아야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그룹 지도자 훈련
(Training the Small Group Leaders)
리더쉽(leadership)은 소그룹 운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리더쉽이 없으면 소그룹은 전망이 어둡다. 왜냐하면 지도자(leader)는 마치 선장(captain)이 배를 조종하는 것(steering)과 같이 소그룹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그룹을 위한 리더쉽은 꼭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그의 소그룹을 인도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한다. 론 니콜라스(Ron Nicholas)는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기를, "훌륭한 리더쉽은 소그룹의 잠재력을 열어서 활용한다. 훌륭한 음악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에 하모니를 창출한다. 훗볼을 할 때에 쿼터백(quarterback: 미식축구에 있어서 전위(FW)와 중위(HB) 사이에 위치한 선수)은 터치다운 스코아(touch down: 미식축구나 럭비에 있어서 골-라인에 터치해서 얻는 득점)를 얻도록 특별한 플레이로 그 팀을 연결시킨다. 그와 같이 소그룹 지도자는 멤버들로 하여금 그들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도와준다. 훌륭한 지도자를 가진 사람은 그들의 가면(masks)을 벗고 자유롭게 사랑을 주고 받는 길을 모색한다"고 하였다.
소그룹은 훌륭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간사회(mundane society)는 물론 기독교 안에도 완벽한 그룹 지도자는 없다. 유일하게 완벽한 그룹 지도자(perfect group leader)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man)이실 뿐 아니라 하나님(God)이시다. 하나님은 인간 지도자에게 리더쉽에 있어서 완벽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는 인간지도자(human leader)가 더 좋은 리더쉽을 얻기 위하여 계속해서 훈련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면 리더쉽이란 무엇인가? 피터 와그너는 리더쉽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즉 "리더쉽의 은사(gift)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body)의 어떤 지체들(members)에게 장차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여 목표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목표들을 성취하도록 자발적으로, 그리고 함께 조화있게 일하는 방법으로 목표들(goals)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communicate)할 수 있게 하는 특별한 능력(ability)이다"라고 말했다.
맥브라이드는 리더쉽을 정의하기를, 소그룹 지도자가 그들의 그룹의 목표를 달성하도록 그 멤버들에게 힘을 줌으로 그룹을 섬길 수 있도록 지명되고, 인정된 사람이라고 했다. 강력한 리더쉽은 성공적인 교회성장을 이룰 수 있다. 강력한 지도자(strong leader)는 지역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 이와 같이 소그룹은 강력한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강력한 지도자는 어디서 나오는가? 지도자는 선천적(born)인가? 후천적(made)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리더쉽은 하나님의 영적 은사(spiritual gift of God)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인 리더(born leader)보다는 후천적인 리더(made-up leader)를 더 강조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리더쉽의 기술은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월터 헨맄슨(Walter A. Henrichsen)은 "훈련사(discipler)는 선천적으로 낳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다비드 왓슨(David Watson)도 제자와 같이 영적 지도자는 선천적으로 낳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도자들은 지도자들이 되는 것을 배운다. 피터 와그너는 주장하기를 리더쉽이란 얻어지는(earned) 것이며 구별되는(discerned) 것이며 배워지는(learned) 것이라고 했다.
소그룹 지도자들을 무엇을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의 훈련정신과 방법을 따르는 길이다. 사실, 소그룹 훈련의 초점은 아이디어나, 지식이나, 방법이나, 커리큘럼이 아니라, 예수의 인격이다. 이는 마치 목사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자신(Himself)을 증거하는 것과 같다. 그 자신이 교사(teacher)이고, 교과서(text)이고, 커리큘럼(curriculum)이고, 훈련의 모든 것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메시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 자신(Himself)을 가르치셨다. 그에게는 가르칠 교과서도, 도구(tools)도, 커리큘럼도 없었고,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그는 몸소 "나를 따르라"(follow me)라고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다. 그는 직접 제자들을 만나서 대면하시고 그들과 함께 실제 세계(real world)로 동행하셨다. 그는 실제 세계를 사용하여 그 자신과 동일시된 하나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그는 지식이 아니라 실제 인격을 가르치셨다. 이것이 실천교육이요 훈련이다. 소그룹 지도자들은 클라스 룸의 상황(class room situation)이 아니라 실제 그룹상황(group situation)에 따라 훈련을 받아야 한다. 소그룹 지도자들은 배우는데 있어서 그들의 내용과 목적과 가야 할 방향의 쏘스(original source)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훌륭한 훈련을 위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론 니콜라스(Ron Nicholas)는 소그룹 지도자의 10가지 기술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즉 (1)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listening others), (2) 질문을 한다(asking questions), (3) 성경공부에 참석한다(improving participating in the Bible study), (4) 그들과 친밀 해진다(familiarizing with them), (5) 그들을 위해서 서로 돌보아 준다(communicating care for them), (6) 서로를 오픈 한다(reflecting openness), (7) 계속적으로 생활에 참여한다(ongoing life involvement), (8) 문제들을 해결한다(solving problems), (9) 미팅들을 준비한다(preparing for the meetings), (10) 미래를 위한 지도자들을 개발하고 훈련한다(developing and training future leaders)등이다. 이런 기술들(skills)은 다음과 같이 4가지 카테고리로 요약될 수 있다. 즉 (1)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준다. (2) 그들의 문제들을 풀어준다, (3) 그들의 생활을 인도한다, (4) 일의 지도자들로 훈련한다. 이것은 그들 자신을 훈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분할된 그룹(divided groups)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훈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훌륭한 소그룹 지도자들은 클라스 룸에서 예수님의 훈련 방법을 따라 훈련을 받은 후에, 신앙생활과 평신도 사역현장에로 연결시켜 적용해야 한다. 잠재력있는 그룹 성경공부 멤버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룹멤버가 되기로 결심하면, 새로운 교회의 새로운 지체(a new part of the church)가 되도록 위임(commission)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이 중요하다.
소그룹 지도자 위임
(Commissioning the Small Group Leaders)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명령은 제일 먼저 그 당시 그의 제자들에게 위임되었고, 그 후에는 교회에서 목사들에 의해 제자들로 훈련받은 크리스챤 제자들에게 위임된 것이다. 이 제자들은 이미 목사들이나 지도자들에 의해 제자들로서 훈련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자들은 그들의 교회성장을 위하여 가서 세상 모든 족속들을 그들의 제자들로 삼도록 위임받은 것이다. 이것이 지도자 위임(leader commission)이다. 지도자들은 가서 사역을 하라고 위임을 받았을 때에, 이미 소그룹 멤버들을 잘 인도하도록 지도자로서 충분히 훈련을 받은 것이다. 우선 그들은 그들의 멤버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하며 그들을 잘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들이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멤버들에 의해 그들의 지도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들을 선발해서 훈련시킨 후, 목사는 그 훈련받은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소그룹을 인도하도록 위임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하며, 그에게 교회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에 참석하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 운영위원회에서 그들은 승인을 받고 난 후, 그들의 위임 사실을 교회의 주보(weekly bulletin)와 주일 대예배와 같은 주요 예배시에 목사의 광고를 통하여 회중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이러한 위임 과정을 거친 후, 그 훈련받은 지도자들은 그들의 평신도 사역현장, 즉 소그룹 현장으로 파송될 것이다. 그들의 사역현장에서 그들은 슈퍼바이져(supervisor)나 목사(pastor)의 감독 하에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소그룹 지도자의 감독
(Supervising the Small Group Leaders)
목사가 그들의 그룹멤버들을 그 소그룹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베커(Palmer Beck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보호그룹 지도자(care group leader)를 위한 중요한 목표는 그룹에 모든 사람을 참여(involve) 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똑같이 말로 해서 참여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그룹에 대한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함이 없이는 소그룹은 효과적으로 운영될 수가 없다. 먼저 지도자들은 그들의 멤버들을 다룰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받도록 동기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목사가 그들을 격려해야(Pastor has to encourage)한다. 지도자들은 그 소그룹 열차의 엔진(engine)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들에게 영적으로 강해지도록 격려하고 촉구하여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그들이 일을 열심히 하도록 감독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태만해지지 않는다.
목사는 다른 회중들에게 보다도 그 지도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다른 사람들 보다 그의 12제자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셨다. 베커(Palmer Becker)는 지도자들을 위한 시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목사로서 당신이 교회의 어떠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해 주는 것보다 목회사역팀 멤버들에게 더 많이 할애해 주는 것이 잘 하는 것이다. 가끔 목사들은 그들의 임의로운 시간을 새신자들을 돌보는데 사용하거나, 교회에서 변방으로 돌고 있는 문제화된 사람들(problem-oriented people)을 다루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 효과적인 팀을 갖기 위해서는 실제로 그러한 종류의 사역을 하는데 시간을 지나치게 낭비해서는 아니되며, 그 보다 중요한 것은 목사의 사역팀을 육성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더쉽에는 동기부여와 감독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목사들은 지도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고, 그들을 감독(supervise)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은 한편으로 치우칠 수도 있다.
그러면 그들의 그룹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먼저, 지도자들은 그룹미팅(group meeting)에서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소그룹 멤버들은 그들의 미팅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대면하기 때문이다. 사실, 첫 미팅에서 사람들은 서로 마주보고 말하는 것을 주저한다. 그러므로 다같이 빨리 친밀해지도록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 그룹미팅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모임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그룹 멤버들이 도착하고 있는 동안에 미리 음식을 나누고, 복음성가, 찬송가, 기도, 이름 소개, 이력 소개, 고향과 직업등의 소개로 시작한다. 서로 친밀하여지고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미팅 장소에 가득찬 후에, 리더는 그들의 멤버들을 중요한 미팅활동으로 인도하는 것이 좋다. 그들은 간단한 예배와 성경공부를 모두 마친 후에, 그룹활동(group-caring)의 실제적인 목적을 위한 활동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 멤버들에게 성경토론(Bible discussion)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현명하다. 소그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서로 돌보는 일(caring for one another)이다. 그 케어활동(caring)의 시간은 기도송과 찬송으로 시작을 한다. 그리고 돌림 기도(sharing prayer)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리더는 적당한 시간을 보아서 다음 시간에 모든 회원이 전원 참석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여야 한다. 전원이 참석을 하지 아니하면, 리더와 멤버들이 사기가 떨어질 수 있다. 전원이 참석하면, 리더와 멤버들이 신이 나고 격려가 된다. 마지막으로, 다음 미팅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광고한다. 그리고 모든 멤버들이 다 같이 작별 인사를 한다. 이렇게 해서 소그룹 미팅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된다.
제 3 장 제자 훈련론(A THEORY OF DISCIPLESHIP TRAINING)
제3장인 이 부분에서는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 운동으로 제자훈련 프로그램(disciple making program)에 관하여 자세히 취급하게 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전장인 소그룹 운동론에서 논한 교회성장의 방법론인 소그룹 전략의 문제들이 만족하게 풀리게 될 것이다. 다벤포트(Davenport, Donald Dewayne)는 제자훈련은 신약시대에서와 같이 교회성장을 위한 제일의 임무(number one task)이라고 말했다. 도날드 맥가브란의 말과 같이, 제자훈련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교회의 문제 해결이나 교회의 성장을 위한 열쇠가 된다.
올란도 코스타스(Orlando Costas)는 교회성장이 발생하는 주요한 분야를 주로 네 가지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수적 성장(numerical growth), 유기적 성장(organic growth)과, 개념적 성장(conceptual growth) 그리고 화육적 성장(incarnational growth)이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는 교회성장을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보았다. 신앙훈련, 즉 양육(follow-up)을 통한 개인의 성장(growing up)과, 성도의 교제를 통한 회중의 성장(growing together)과, 전도활동을 통한 모교회의 성장(growing out), 그리고 개척을 통한 지교회의 성장(growing more)이다. 이것은 교회성장 부분에 대한 대단히 좋은 분석이다.
그리고 신약성경을 통하여 교회성장에 대한 또 하나의 어원학적인 접근이 시도되었다. 즉 그것들은 "auxano"(increase, growth), "o "(to build up), " "(mature)이다. 저자는 목회 경험에 의해 교회성장을 양적 성장 혹은 숫적 성장(quantitative growth or numerical growth)과 함께 질적 성장 혹은 영적 성숙(qualitative growth or spiritual maturity)과 그리고 경제적 성장(financial growth or giving increase)등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 중에는 숫적 증가(numerical increase) 즉,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이 어느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양이 아니라 질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피터 와그너도 역시 교회성장에 있어서 교인 숫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hyper-concern for numbers)은 하나의 숫자놀음(numbers game)에 지나지 않으며, 사도행전 이후 신약 교회에 있어서 질적 성장이 기독교 사상의 분야에서 강조되어 왔다고 말하였다. 물론, 초대 교회에도 숫자가 대단히 중요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건전한 교회성장에 있어서 두 분야가 모두 중요하며, 상호 분리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안나 넬슨(Nelson, Anna)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질과 양은 상호 배타적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양단간에 선택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하신다. 그는 우리가 두 분야를 위하여 노력하기를 원하신다. 성장이란 영적이며 숫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교회들은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등 두 분야에서 똑같이 성장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로버트 매너(Maner Robert E.)는 질과 양이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양적 성장보다는 질적 성장에 가장 우선(top priority)을 두어야, 질적 성장의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통하여 양적 성장이 가능하다는 논리로 질적인 사역(quality ministry)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성장(growth)이 아니라 질적인 목회사역(quality ministry)이다....그러나 우리가 질에 대한 필요성을 말할 때에, 우리의 교회가 매년 똑같이 작은 교회로 남아 있는 것에 불만을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질적인 것을 준비하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성장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단계가 요구될 것이다. 성장은 질적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나야 한다." 일본의 기독교신학교 전임 교장이었던 죤 영(Young, John M. L.)은 양적 성장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그러나 영적 성장(spiritual maturity)이 양적 성장 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죠지 바르나(Barna, George)도 양이란 질의 결과라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매너(Maner, Robert E.)도 역시 성장은 질적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둘 다 계속적으로, 보다 더 성숙한 교인들로 세우는 데로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이 두 분야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아무도 논리적인 순서로 그 성장의 우선순위를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때에 따라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보다 앞에 올 수도 있는 반면에,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보다 앞서는 경우도 있다. 대개의 경우, 전도대회(evangelism)나 부흥회(revival meeting)를 통하게 되면, 교회가 우선 양적 성장이 앞서 오게 되고, 질적인 성장이 뒤에 오게 되는 반면에,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과 같은 교육, 또는 양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하면 교회가 우선 질적으로 성장한 다음에 양적인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결국,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장이 바람직한데, 그 이유는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의 결과를 동시에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제자훈련을 통하여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안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자훈련 혹은 제자삼기(making disciples) 프로그램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며, 그의 요구일 뿐 아니라, 교회의 최우선적인 과제(primary work)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복음의 메시지의 중심이다. 그리고 제자훈련은 교회를 위한 근본적인 영적 비젼(spiritual vision)이다. 예수께서 명령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NIV). 이 지상 명령은 예수님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공동의 지상명령(the Great Co-mission)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제자훈련의 가치
(THE VALUES OF MAKING DISCIPLES)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제자훈련 사역이 가치(value)가 있는가? 평신도 사역으로서의 제자훈련 사역의 잇점(advantage)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이다. 그러면 과연 제자훈련 사역의 가치와 이점들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몇 가지로 요약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제자 훈련생(disciple)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은 우선 제자훈련생 개인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생도는 훈련기간 동안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한 예배시간에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영적인 성장의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제자훈련은 평소의 개인적인 신앙생활과 달리 특수 훈련이므로, 이 기간 중에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생활이 오로지 경건생활에로 집중되기 때문에 영적 성장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에 대하여 알렌 하디디안(Hadidian, Allen)은 "훈련사(discipler)에 의해서 주어지는 부단한 개인적 암시는 영적 성장 과정의 속도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게 된다(엡 4:13). 또 그가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쁜 행동패턴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NIV)고 말한다. 제자훈련의 또 다른 가치는 훈련생이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교회성장을 위해서 그의 제자들을 만들게 된다. 이것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곧 가서 한 사람씩 제자를 삼는 제자훈련 운동(disciple making movement)이다.
제자훈련 훈련사(discipler)에게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사역은 특히 제자훈련 훈련사(지도자)에게 큰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훈련사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20)에 따라 그들을 제자로 만들 때마다, 그는 어떤 개인적인 유익과 축복을 누리게 된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제자훈련 훈련사는 그의 임무를 다한 뒤에,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의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제자훈련 훈련사는 그가 다른 사람은 물론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제자훈련 기간중 자신이 깨끗하게 될 수 있다. 바울은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 하겠느냐"(롬 2:2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강조했다. 제자훈련 훈련사(지도자)는 직분자로서 주안에서 교인들을 가르치지만, 그러나 믿음은 물론, 직분을 가지고 있는 형제로서 서로가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훈련(discipling)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방법과 상담기술(counseling skills)을 배우게 하고, 대화하는 방법(dialogue methods)과 사람을 목회사역에로 인도하는 방법들을 배우게 하는바, 제자훈련사(discipler)의 훈련생활속에서 그의 사역기술(ministering skills)을 발전시킨다.
제자훈련은 교회(church)에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 사역은 몇 가지 측면에서 교회의 공동체를 강화시켜 준다. 즉 친교, 전도, 교회에 대한 봉사 활동을 활성화시킨다. 제자훈련은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 열심을 내게 할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물론 각 부서간에 조화를 이루어 교회를 튼튼하게 강화시켜 준다. 그리고 제자훈련의 또 다른 가치는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계속적인 제자훈련은 교회의 다음 세대를 보장해 준다. 이 점에 대하여 알렌 하디디안(Allen Hadidia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훈련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역이 차세대에도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제자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목회사역이 계속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디모데 후서 2:2에서 본래 바울사도의 말인즉: '디모데야, 하나님의 사역의 진행을 막아서는 아니되느니라. 너는 충성된 자들을 찾아서 그들에게 바톤을 넘겨줄 수 있으리라'이다."
제자훈련은 세계(world)에도 유익을 준다
제자훈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사역이다. 주님께서도 열두 명의 제자들을 훈련시켜서 오늘날과 같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어 놓으셨다. 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던가? 앞으로, 속히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후계자들을 통하여 제자훈련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왜? 이는 한 마디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세상이 구원을 받고 행복해지려면, 먼저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한다. 단번에 모두가 아니라 열두 사람, 아니 한 사람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알렌 하디디안은 세상에 무엇하러 나왔으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심각한 질문을 던진 다음, 세상을 행복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최대의 소원이라고 피력했다. 그리고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가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첫째가 하나님은 영원하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셋째로, 사람은 영원하다. 이 가설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표현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인간의 영원한 생명(영생)을 보는 것보다 고무적이고 도전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사람이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뜻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제자훈련은 절대적인 것이며,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세상을 위하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제자훈련에 대한 성령의 사역
(HELPS OF THE HOLY SPIRIT IN MAKING DISCIPLES)
제자훈련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에, 교회들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 좋다. 물론, 제자훈련의 성공, 실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노력을 무시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성장을 진행하심에 있어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 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다만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교회성장을 위하여 제자들을 삼는 일에 도와주신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성령은 어떤 사람을 제자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성령은 몇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신다. 성령은 중생시키실 뿐만 아니라(요 3:5), 믿는 자의 신앙을 성장시키시는 분이시다(고전 3:6). 그러므로 제자를 삼는 일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둘째로,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각성하도록 감동하고 촉구하며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하여 성장케 하신다. 예를 들면, 성경 에스골 골짜기의 말씀(성령)의 바람의 역사나(겔 38:1-10),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행 2:1-4), 그리고 교회사상의 대각성 운동들이 모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일어난 운동들이다. 셋째로, 성령은 지역적인 상황이나, 상업적인 여건으로 훈련사(지도자)와 멀리 떨어져 있는 고립된 신자들을 돌보시기도 하신다. 하디디안(Hadidian)은 이 성령의 돌보심으로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훈련사가 새신자들과 가까이 있을 수 없을 때에, 훈련사는 그 새신자들을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성령을 의지하는 것을 앎으로 위로가 된다." 물론, 멀리 떨어져 있는 신자들을 접촉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초대 교회 시대의 바울 사도와 같이 서신을 통하거나, 전화를 통한다든지, 필요할 때에는 친히 심방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인간이 미쳐 신경을 쓰지 못하고 형편상 돌보기가 힘들 경우라도 성령께서는 그들을 돌보신다(롬 8:14, 26). 성령께서는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며 하나님의 교회를지켜주시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은혜로 인도하시기를 소홀히 하시지 않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자녀들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의 접근방법
(APPROACHES TO THE MAKING DISCIPLES)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위한 접근방법은 교회의 상황에 따라 몇가지로 계획할 수 있다. 교회는 그 교회의 규모에 따라 하게 되나, 그 이상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다. 톰 사인(Tom Sine)은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네 그룹으로 구분했다: (1) 개인 제자훈련, 즉 친히 일대일로 접근하는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은 항상 개인적인 부름이었다. (2) 가정 제자훈련, 즉 전가족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방법으로 예를 들면, 고넬료집의 경우이다. (3) 성경연구, 평신도 간증, 혹은 비관습적인 그룹과 같이 소그룹 제자훈련이다. (4) 교회 제자훈련으로서 공식적인 교회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제자훈련을 하는 방법이다. 근본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은 소그룹(small group)으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교회 밖으로부터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영입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영적으로 성장시키는데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제자훈련을 대그룹으로 구성한다면, 그들을 질적으로 성장시키기가 어려운 반면에, 너무 작은 규모로 구성하게 되면, 교회의 양적 성장의 효과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빌 훌(Bill Hull)은 대그룹의 가장 큰 약점은 개인적인 접촉과 조율이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고, 왜 믿어야 하는가를 단지 말로만 봉사할 수 있는 반면에, 소그룹은 충분한 접촉과 조율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치게 시간이 걸리고 개인의 시간을 충분하게 이용하기가 쉽지 않은 면도 있다. 그는 소그룹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소그룹은 예수님의 방법이다. (2) 소그룹은 최적의 목회사역방법이다. (3) 소그룹은 여건을 조정할 수 있다. 헤스텐네스(Hestenese)는 크리스챤 소그룹이 필요한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방되어 그들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일에 우리를 돕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을 동시에 도모하기 위하여, 제자훈련 클라스(class)는 제자훈련사가 운영하기에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계획하여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훈련에 있어서 숫자가 아니라 질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셨다. 물론 예수께서 때로는 한번에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한편 돌봄의 사역(caring ministry)으로 개인들을 접촉하시는 일에 주력하셨다. 단기효과(short term)를 노리는 대전도의 형식(mass evangelism)과는 달리 제자훈련은 장기전략(long term ministry strategy)을 목표로 정예용사들을 무장시키는(equipping) 전략이다. 제자훈련 사역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소수를 택하셨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정예용사를 무장시키는 전략이다. 예수께서도 전도에 있어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고, 돌봄의 사역(caring ministry)으로 한 두 사람과의 상담을 하시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의 제자훈련 사역에 있어서는 그의 정예제자로 만들기 위하여 12명의 소그룹을 택하셨다. 이것이 세계를 향한 그의 사역의 기초가 되었다.
제자에 대한 이해
(UNDERSTANDING THE DISCIPLES)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희랍어 " "(마데테스)에서 왔고, 라틴어 "disciplus"(디시풀러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학습자(learner), "학생"(pupil), "학자"(scholar), "연구생" (student), "추종자"(follower), "제자"(disciple)등을 의미한다. 실제로, 이 용어는 항상 "주인"(master) 혹은 "선생"(teacher)에 반하여 어떤 이의 "학생"(pupil)을 의미한다.
제자의 어원과 의미
(Terminology and Meaning of Disciple)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그 자체가 잘 배우고 잘 훈련된 사람을 의미하는데,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무엇보다도 이 용어는 희랍사람들 가운데서 사용되어 왔고, 간혹 구약성서에서도 언급되었으나(대상 25:8; 사 8:16; 50:4), 후기 유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그것은 고대 사회의 특징으로서 일반화되어 있었던 선생 학생(스승 제자)의 관계성(relationship)을 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talmid"(탈미드, 대상 25:8)로 흠정역(KJV)에서 "학자"(scholar), 개역성경(RSV)에 "학생"(pupil)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limid"(리미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사야 8:16은 두 번역성경에서 모두가 "제자"(disciple)로 번역되었다. 신약에서는 "talmidim"(탈미딤)이 Talmud(탈무드)를 만들어낸 랍비(rabbis)의 제자들을 의미했다. 그러나 Talmud(탈무드) 그 자체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Talmidim(탈미딤)을 말한다. 그러나 "제자"(disciple)라는 용어는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용어(제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의 추종자들(followers)을 말할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예를 들면 모세의 추종자들(요 9:28), 세례 요한의 추종자(마 9:14), 바리새인들의 추종자(마 22:6), 바울 의 추종자(행 9:25)들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제자"(disciple)라는 말은 더욱 좁은 의미로(narrow sense) 사용되기도 했는데, 하나의 고유명사 처럼 "열둘"(Twelve)과 동의어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그 중에 어떤 이들(마 10:1; 11:1; 눅 9:54; 요 6:8)을 언급할 때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기독교내에서는 12제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자자의 이름으로, 고유명사 처럼 인식되고 불리어 왔다. 즉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고유명사 처럼 불리워 오고 있다.
제자의 자세
(Attitudes of disciple)
무엇이 제자이며, 제자가 아니냐? 성서적인 개념으로서의 제자의 의미는 매우 간단하다. 제자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를 말한다. 예수를 따른다는 의미에서 제자는 그리스도인(Christian)이다. 신약에서 제자의 근본 의미는 중생한 그리스도인(born again: regenerated Christian)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제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a new creature)이다. 사실, 제자란 성숙이라는 차원에서 정의될 수 없다. 제자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를 노력하고, 그들의 생활에 확신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그리스도인의 신분 (Christianship)과 제자의 신분(discipleship)에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being saved)과 "제자가 되는 것"(being a disciple)에는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신분(Christianship)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강조하는 한편, 제자의 신분(discipleship)은 하나님의 종의 신분(servantship)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리 쿤네(Gary W. Kuhne)는 제자를 자신의 성장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사역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제자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성장하며, 전도의 열매를 맺고, 그의 열매를 보존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로 불리움을 받을 사람의 자격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을 하며,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응답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Christ's calling)을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있어서 난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을 때에도 예수께서는 "나를 따르라"고 촉구하셨다. 심지어 부친의 죽음의 문제나 장례식과 같은 사후처리 문제까지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죽은 자는 저희 죽은 자들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인륜적으로 볼 때에 불효가 되라는 말씀 같다. 이러한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주 직면하는 교회생활과 세상생활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푸는 키원리(key-principle)가 있다. 그것은 우선순위(priority)의 문제이다. 무엇이 가장 우선(top priority)이냐 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관건이다.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이 최우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최우선(top priority)이기 때문에 상대상황이 아니라 절대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사람들을 이 절대상황의 범주에서 섭리하신다. "네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에 불리움 받은 주님의 종인 바울 사도의 철저한 소명의식 구조의 표현이다.
제자는 목회사역에 대한 두 가지 신앙의 자세, 즉 수동적 자세와 능동적 자세로 고려되어야 한다. 수동적 자세로, 제자는 그리스도를 닮는 자(an imitator of Christ: 살전 1:6)로서 사람들의 모범(an example of all people: 고전 11:1; 빌 3:17)이 되어야 한다. 특별히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욱 그러해야 되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평신도 사역자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죤 막스웰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모범을 제시하고, 예수께서 소유하신 건전한 자세를 비이기적인 헌신(selflessness), 보장(security)과 복종(submission)등이라고 말했다. 능동적인 자세로서, 제자, 말하자면 훈련사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훌륭한 선생, 훈련사, 지도자(마 28:19-20)가 되어야 하고,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모방자, 위대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의 신분에 있어서 이러한 것들은 기본적인 역할, 가르치는 것(교사 신분: teachership), 훈련하는 것(훈련사 신분: trainership), 그리고 지도하는 것(지도자 신분: leadership)들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제자훈련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신분에 걸맞는 기술들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제자가 되는가? 해리스 리(Harris W. Lee)는 여러 종류의 지도자(제자)가 있다고 본다. 즉 "선천적 지도자"(born leader)와 "후천적 지도자"(learned leader)로 구분한다. 워렌 벤니스(Warren Bennis)는 지도자는 태어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어떤 불가해한 과정을 통하여, 소위 지도력에 있어서 "위인"(Great Man)논리라고 부르는, 그들의 부름에 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월터 헨릭슨(Walter A. Henrichsen)은 제자들이란 다량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제자(지도자)들이란 가르치고(teaching), 훈련하고(training), 지도하는(leading) 과정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들로 만들어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일 을 위하여 훈련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교회 지도자가 만들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의 부르심으로 태어나, 훈련과정을 통하여 부각되는 것임으로 하나님의 보내시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상적인 지도자(제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테드 엥그스트롬(Ted W. Engstrom)은 훌륭한 지도자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알뿐만 아니라, 자기의 특유의 힘을 알고 그룹의 선행을 위하여 자신이 보다도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면, 능력있는 지도자는 그룹의 관리에 있어서 그들의 일(task)뿐만 아니라 그 진행능력(process dynamic)에도 예민하다. 유력한 지도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한다. 즉 훌륭한 제자가 되려고 배우는 훌륭한 지도자,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참된 지도자, 일종의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인 강력한 지도자,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 문제의 인물들을 다룰 수 있는 위대한 지도자, 그리고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궁극적인 지도자 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지도하는, 이와 같은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그리스도의 길로 잘 인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는 지도자들을 재 생산할 수 있는 지도자들을 배출해야 한다. 이상적인 지도자는 바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고 했다(고전 11:1).
제자 직분의 이해
(UNDERSTANDING DISCIPLESHIP)
촬스 밀란더(Charles Milander)는 사람의 제자화 과정을 세 단계로 분류하였다. 첫 단계가 접촉단계(exposure stage)로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영향력있는 신자와 접촉하여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타나는 단계이다. 둘째 단계는 참여단계(commitment stage)로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 드리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제자신분의 단계(discipleship stage)로서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헌신하는 단계이다. 제자의 직분은 목사나 제자의 신분을 가진 지도자를 통해서 받기는 하지만, 본래는 하나님께서 배려하신 것이다. 근본적으로, 제자의 직분은 성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자 직분의 정의
(Definition of Discipleship)
구약성서에서의, "제자"는 선지자로 이해할 수 있고(왕상 19:16; 왕하 2:6), 제사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민 3:10; 시 109:8; 행 1:20). 신약성서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에 언급되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비유해서 부르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좇으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4:19). 한 마디로 말하면, 본회퍼(Bonhoeffer, Dietrich)가 말한대로 제자란 그리스도에게 고착된 것을 의미한다. 참제자의 직분은 제자가 그의 주(master)와 같이 동일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우에서 제자의 직분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주종관계(relationship of Lord-servant: 마 16:16)와 제자에의 위탁관계(commitment to disciples: 마 28:19-20; 행 1:8)이다. 리차드 드 리더(Richard R. De Ridder)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의 인격이 중심이다. 제자의 직분은 내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외적으로는 그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의 권위를 받아드리는 수납(acceptance)을 포함하고 있다....주님과 그의 생활로부터 동떨어진 제자의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제자는 그가 가지고 있거나 맺고 있는 모든 것으로써 주님과 교제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볼 때, 크리스챤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마는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인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는 명령을 받은 사도들과는 구별이 되는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도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은 크리스챤이 되면 누구나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미 언급한대로 피터 와그너(Peter C. Wagner)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따르며 교회의 멤버가 된 사람을 제자라고 정의 했다. 그러나 협의로 말할 때 제자는 12제자를 말하며 광의적으로 점차 확대시켜 70문도, 120문도, 500문도,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에게까지 그 개념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지체의 구조와 기능을 통해 각 직분들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고 말했다(고전 12:12-29).
광의적인 의미로 말할 때에 모든 교인이 다 제자이다. 그러나 협의적으로 말하면 목사의 목회사역을 직접적으로 돕기 위하여 교인들 중에서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이)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누가 성직자이냐 는 질문과 꼭 같은 것이다. 광의로는 신자 모두가 주의 종이다(벧전 2:9). 그러나 협의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아 기름부음 받은 사도나 선지자나 목사와 같은 주의 종들을 말한다(엡 4:11-12; 고전 12:28-29). 이는 누가 주의 종이냐 하는 말과 같은 질문이다. 이 문제가 신학적으로 잘 정립되지 못한 평신도들 중에서 시험들 때에, 가끔 모세에게 항의하다가 징벌을 받은 고라의 무리와 같이 너만 주의 종이냐 하고 항의하는 것을 볼 수 있다(민 16:1-19). 결론적으로, 제자직은 좀더 엄밀한 의미에서 말할 때,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고 사명을 받은 직분을 의미한다.
제자의 길
(The Way of Discipleship)
제자의 길은 쉽지 않다. 애슈리만(Gordon Aeschliman)은 자신의 경험으로 보아, 제자의 길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제자의 길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는 지도도 없다. 그것은 모호하고, 분명치 않고, 경악으로 꽉 차 있다"고 말했다. 사실, 제자의 길은 우선 파악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과연 어느 길이 제자의 길인지? 어느 길이 주님의 원하시는 길인지 정확히 파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첫째로, 지식과 경험으로 얻어진 인간의 선입주견 때문이다. 인간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서 의지적 결정의 단계에 이른다. 하나는 지식을 통하여 행동의 결정을 내리게 되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경험을 통해서 행동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지식과 경험은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얻어지게 되는데, 사실상 인간의 오관은 범죄로 인하여 잘못 되어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전달되는 지식이나 경험들을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실상 위험천만이다. 심지어 중생한 사람까지도 인간의 오관을 통하여 전달되는 지식이나 경험으로 하나님의 뜻인 제자의 길을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도(the way of Cross)이므로 십자가의 도가 중심이 되는 성경말씀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져야 한다.
성경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제자의 길이란, 주님이 가신 길을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이 주님의 말씀에는 몇 가지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 첫째로, 주님이 가시는 길과 사람이 가는 길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역시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과 주님이 가시는 길이 다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당시 제자들이 가는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의 가시는 길을 깨닫고 따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 주님의 가시는 길은 그 방향이 어디며,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은 그 방향이 어디인가? 먼저 제자들이 가고 있는 길을 세상을 향하여 가는 길로서, 당장은 육신이 잠시는 살 수 있는 길이지만 영혼이 영원히 죽는 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가는 길로서, 당장은 육신이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25). 이 길이 곧 주님이 가신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길을 바리새인들은 알 수 없는 길이다(요 8:14). 심지어는 도마와 같은 제자도 알지를 못했다(요14:5).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예수께 물었다(요 13:36). 이 십자가의 길은 신비스러운 길(a mysterious way)이다.
다음으로, 주님의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주님께서 가셔야 할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가셔야 하겠다는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 주님의 이 의지는 하나님께로서 난 의지로서 하나님의 뜻으로 가시려는 의지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길은 주님의 길인 동시에 하나님의 길로서, 세상을 구원하러 가시는 십자가의 길(the way of the Cross)이다. 이 길은 가기가 쉽지 않고, 인간으로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고 하셨다(요 8:21, 22).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그 길을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요 14:26) 그 길을 알 수 있고 갈 수 있다고 하셨다.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4). 그리고 주님께서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요 13:36)고 말씀하셨다. 인간으로는 갈 수 없으나 성령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가신 길을 따라 가려면, 주님과 같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 말씀을 따라 우선 주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자세와 같이 제자로서의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나이다"(눅 9:57; 마 8:19).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외쳤다. 그리고 성령께 의탁하여야 한다. 제자의 직분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는 물론 현대에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성경의 가장 중심이 되는 구절인 마 28:19-20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제자의 직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세대를 통하여 필수 불가결한 직분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특히 현대에 와서 제자의 길을 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희박하다. 그 길은 자기와 세상을 버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라면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다.
제자직의 원리
(Principles of Discipleship)
제자직의 원리는 교회성장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마 28:19-20에서 현재 명령 동사인 "가라"(go)는 원래는 분사구문, 즉 "계속해서 가라"(having gone)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이 동사(go)는 계속적인 의미와 명령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자의 직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발하시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다. 제자직은 지식의 전달(a communication of knowledge)이 아니라, 생명과 영의 교통(a communication of life and spirit)에 있다(요 6:63). 그러므로 제자들은 성경의 지식뿐만 아니라 생명과 영의 교통이 있어야 한다. 후안 깔로스 올티즈(Juan Carlos Ortiz)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직의 관계에 있어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무엇을 아는가를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가르친다. 제자직이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생명과 영의 전달이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영혼을 구한다는 말과 다르다. 바울은 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쳤다." 사실, 제자직(discipleship)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됨의 신분으로(Christ's servantship) 그리스도를 모시는 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직의 표지
(Signs of Faithfulness in Discipleship)
그러면 제자직분에 있어서 신실함의 싸인(sign)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제자에게 있어서 신실함의 싸인은 회중들에게 유효한 소금과 빛이다. 회중들은 신자들이 회중생활을 통하여 믿음을 건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신실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제자들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6-20). 그러면 신실한 제자의 열매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의 열매들이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갈 5:22). 이 모든 열매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며 사는 생활의 결과로 맺어지는 것이다. 미국 연합감리교 감독회는 제자됨에 있어서 신실한 제자의 표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열가지로 정의하였다. (1) 교회의 회중생활에 성실한 참여(faithful participation in the life of a congregation), (2) 매일 성경읽기(daily readings of Scriptures), (3) 기도하는 생활(living a life of prayer), (4) 금식기(fasting), (5) 검소한 생활(living simply), (6) 생명의 은혜의 청지기(stewarding the gifts of life), (7) 타인에 대한 적선행위(doing good to others), (8) 평화와 정의의 옹호(advocating peace and justice), (9) 신앙의 나눔(sharing the faith), (10) 하나님께 영광(giving God the glory)등이다. 이들은 역시 성령의 열매로 집약된다.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반드시 맺어야 할 열매들이다.
제자직의 자격
(Qualifications of Discipleship)
제자직의 자격(qualification)은 무엇인가? 제자직의 자격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면과 자연적인 면이다. 초자연적인 면에서 볼 때에, 제자직은 하나님의 부르심(Divine call)이고, 자연적인 면에서 볼 때에 제자직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롬 1:1; 행 9:15-16). 하나님의 부르심이 제자가 되는 첫번째 조건이다(엡:11-12). 이러한 기초 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로 목회사역을 위하여 그에게 중생시키시고, 필요한 은사를 주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은사까지 포함한다(고전 12:8-11; 12:28-30). 제임스 화잍(James F. White)은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개인에 대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인준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들은 목회사역을 위한 성도들 신앙을 말씀으로 무장시키는데 사용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building the Body of Christ) 사용해야 한다. 훌륭한 제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지체없이 따라야 한다. 그러나 제자연체 사이비 제자(似以非 弟子)는 그리스도 보다 자신의 주도권(initiative)을 행사하려 한다. 그리고 제자연체 하는 사람(would-be disciple)은 예수를 따르기 전에 자기 부친을 장사하려고 한다(마 8:21).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매사에 있어서 하나님께 항상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제자의 자격이 있는 것이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의 자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즉 (1) 하나님을 아는 사람, (2)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3) 기도의 사람, (4) 그리스도의 몸에 위탁된 사람, (5) 주께 순종하는 사람, (6) 정력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으로 보면 무조건 주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사도의 직분과 같이 제자됨의 자격은 사도행전 6장 3절에서와 같이 믿음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하여, 어떤 인간적인 자격요건 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입은 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제자직의 자격으로 청지기(집사)직과 같이 디모데 전서 3장 1절부터 13절까지와 디도서 1장 5절에서 9절까지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제자들)은 주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교훈과 계명을 가르쳐야 한다(신 6:4-9). 주를 뜨겁게 사랑하여 교회에 충성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비롯하여 가정의 모든 일에 다른 사람들 보다 더욱 충실해야 한다(딤전 4:3).
제자직의 위임
(Commitment to Discipleship)
복음서는 우리에게 제자의 길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즉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예수의 십자가를 지운 구레네 시몬의 모습(image)에서 역시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불리움을 받은 제자의 모습(image)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 구레네가 제자의 모습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자의 두 모습을 이해해야 한다. 열두 제자들의 불리움과 구레네 시몬의 불리움을 비교해서 관찰해 보면 차이가 있음에는 틀림이 없다. 우선 열두 제자들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불리움을 받았으나 구레네 시몬은 사역의 종말의 시점에 불리움을 받은 셈이 된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불리움을 받은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평생의 가르치심과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왔지만, 구레네 시몬은 마지막 순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이 된 것이다. 단지 열두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생전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불리움을 받을 때, 자의(自意)로 응했지만, 구레네 시몬은 그리스도의 말기에 타의(他意)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길을 간 사람이다. 그러나 다 같이 그리스도의 증인임에는 틀림없다.
제자의 두 모습 중에서 첫째로, 제자의 적극적인 모습이다. 열두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시 적극적으로 임했다. 열 두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겠다는 제자됨의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이다. 구레네 시몬은 본래 자기는 원치 아니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져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서 바로 앞에 섰던 것이다. 사실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으로 바로 앞에 섰다. 어떤 면에서 제자의 길은 가기 싫어도 가야 하는 길이다. 예수께서도 인간적인 측면에서 마시기 싫으신 십자가의 쓴잔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마셨던 것이다(눅 22:42; 마 26:39, 42). 결론적으로, 제자는 사람에 따라, 혹은 때에 따라 그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자의 적극적인 모습과 소극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양면성에 기인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신인 양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나님의 소명에 대한 두 마음을 보이신 것이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인간적으로는 지고 싶지 않아 억지로 지는 십자가이지만, 순순히 그리고 성실하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그는 주님을 따른 신실한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훌륭하고 사명에 충만한 사람이라도 이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제자의 두 모습이다.
구레네 시몬은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 못하고,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지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제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누가복음 9:23-24에 보면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에 제자의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베드로 사이에 있었던, 성스러운 질의응답인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 17:21)는 말씀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베드로의 제자됨의 선서인 것이다. 이것이 성스럽고 엄숙한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응답하는 제자의 거룩한 선서식(宣誓式)이다.
제자화를 위한 평신도 훈련
(TRAINING THE LAITY FOR DISCIPLESHIP)
이제 제자훈련의 방법론을 다루기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고 변화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쓰임 받는다. 이 점에 대하여 빌리 행크스(Billie Jr. Hank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이 우선 개인 자신들이 변화받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그들은 주님의 손에서 재생되지 않는 한 스스로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역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훈련하고 계신다. 교회성장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어 왔다. "지역 교회에서 제자훈련이 성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유독 제자훈련이란 파라쳐치 그룹들(para-church groups)만이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빌리 행크스(Billie Hanks)는 제자훈련이란 파라쳐치 그룹(교회 밖의 그룹)들에서 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local church)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자훈련은 지역 교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 더욱이 목사들과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이 본교회에서 제자훈련의 배가사역(multiplication ministry)을 위하여 훈련받을 수 있는가?"고 질문하고, 빌리 행크스(Billie Hanks)는 배가전도의 가능성과 일대일 제자훈련 관계의 힘이 역사적으로 지역 교회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결국 제자훈련은 지역 교회에서 시행해야 할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제자훈련"이란 용어가 성경에는 한마디도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그의 사역을 위하여 선택하신 사람들을 훈련시킨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제자를 삼는 것은...전도와 기독교 교육을 포함한 한 과정으로 예수께서 신자들에게 가르치신 지상명령이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에 의하면, 제자훈련이란 사람들을 데려와서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제자훈련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두 단계, 소위 제자되게 함 온전하게 함(discipling-perfecting)으로 간주했다. 제자되게 하는 단계(discipling)는 어떤 사람이나 그룹을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께 위탁하는(commit) 단계이며, 온전하게 하는 단계(perfecting)는 그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여 윤리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피터 와그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의 의미에 있어서 제자훈련의 원래 대상들(raw materials)을 현대의 제자훈련의 대상들과 구별시킨다. 다시 말하면, 제자되게 하는 것(discipling)은 불신자를 상대로 하는 것이고, 온전케 한다는 것(perfecting)은 신자를 상대한다는 뜻이다. 피터 와그너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지상명령에 있어서 원래 대상은 먼저 그리스도에게 그들의 생명을 위탁할 필요가 있는 불신자(unbelievers)들이다. 현대 제자훈련의 본래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의 제자의 계속되는 길을 따라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그리스도인(Christians)이다."라고 말했다.
죤 요더(John H. Yoder)는 "제자가 되는 것"(discipling)을 "온전하게 되는 것"(perfecting)과 대조로 간주했다.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제자화에 대해서 세 가지 카데고리로 분류시켰다. 즉 D1, D2, D3로 구분한다. D1은 원래 의미로 "비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turning of non-Christian to Christ)이다. D2는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불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信仰)으로 돌이키는 것(turning of any individual from non-faith to faith in Christ), 즉 그들의 영적인 신앙생활의 변화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D3는 "기성 그리스도인을 가르치는 것"(teaching an existing Christian)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으로는, 제자가 되는 것(discipling)은 가르침과 훈련을 통하여 제자들로 만드는 것(making disciple)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제자훈련 과정을 통하여 제자를 만드는 데는 두 단계가 필요하다. 즉 전도하는 것과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baptizing them)...그들을 가르치라(teaching them)고 명하셨기 때문이다(마 28:19-20). 첫 단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요 1:12), 둘째 단계를 통하여 신자의 신앙이 성숙해지며 윤리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엡 4:13). 물론, 첫째 단계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즉 거듭나는 것(중생: regeneration)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반면에, 둘째 단계인 성숙(maturity)은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도록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엡 4:13). 이는 제자훈련중 내면인 성숙이라면,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때 이를 외면적인 성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상호 분리될 수없는 관계에 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제자가 되게 하는 것(discipling)은 궁극적(窮極的)인 개인 사역을 위한 최선의 방법중의 하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제자훈련 사역의 철학
(Philosophy of Disciple Making)
제자훈련에 성공하기 위하여는 목사가 무엇보다도 평신도를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는 제자훈련 사역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평신도의 재발견이 성직자보다도 그의 사역에 있어서나 교회관리에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서구에서는 상당히 오래 전에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을 발견하여 교회성장을 위하여 제자훈련과 같은 평신도 사역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에 뒤늦게 눈을 뜬것 같다. 1970년대에 와서 제자훈련이 시도되어 지금은 보편화되어 있지만,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 개발되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제자훈련 신학이 잘 정립되어 있지 못한 것 같다. 성서에 기초한 제자훈련 신학이 정립되고 그 성서적, 신학적 논리에 기초하여 목회 현장(ministry field)에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성장하는 유명한 교회들(growing churchs)을 탐방하여 담임목사들을 만나 보고, 실제 눈으로 보고, 함께 예배하며, 리서취(research)한 저자의 경험으로 몇 가지 결론을 얻게 되었다. 첫째는 가장 근본적인 교회성장 원리는 "목사평신도프로그램" 씨스템(pastor-laity-program)이라는 결론이다. 여기에서 목사는 기관차의 기관(engine)과 같아서 분명하고 절대 확신있는 비젼(clear-cut vision for steering to a direction)을 제시하고 리더쉽을 발휘하여(propelling power) 객차와 같은 평신도 지도자들을 궤도(rail)와 같은 프로그램(program)을 따라 훈련하여 교회를 위하여 분담사역을 하는 것(sharing ministry)과 같다. 특히 성장하는 미국 교회들을 보면 평신도 훈련 씨스템이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자는 근래 미국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교회 중의 하나인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남부 라구나 힐즈(Laguna Hills)로부터 미숀뷰(Mission Viejo)로 새로 이사한, 새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가지 소개할 것이 많지만, 다만 한가지 특유한 광경은 예배당 밖에는 꼭 시장과 같은 광경이기에 무엇인가 돌아보니, 마치 상인들이 장사하는 것과 같이, 수많은 탁자들을 펼쳐 놓고 열심히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상품들(items)이 무엇인가 하고 가서 본즉 수많은 신앙생활 프로그램의 아이템들이었다. 그 교회 목사에게 물어보니까 프로그램 종류가 무려 79가지나 된다고 한다. 저자가 참고로 가지고 온 것만 해도 50여가지가 넘는다. 예배 후에 수많은 교인들이 물건을 사는 것처럼, 남편을 위하여, 아내를 위하여, 자녀들을 위하여, 청소년들을 위하여 마련된 신앙생활 프로그램들을 쇼핑(shopping)하느라고 벅적거리는 광경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실행하기 위하여 교회건물들의 대부분이 클라스룸(classroom)들로 꽉 차 있었다. 물론 담임목사인 맄 워렌(Rick Warren)은 교회성장 세미나 강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목회철학을 물어보니까 다원목회 (multi-ministry)로 선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목회방법은 교육목회(teaching ministry)를 주로 한다는 것이다. 양궁의 타겥(target)과 같이 5중원형의 목회로서, 5중원 중에서 제일 안쪽 첫번째 원(circle)이 목회핵심(core ministry)을 형성하고 있는 핵심멤버(core members)들인데, 그 멤버가 무려 1,000여명이나 된다. 다원중 안쪽으로부터 두번째 원이 사명자 사역(committed growing Christian ministry)으로 약 3,300명, 세번째 원이 본교회 교인(membership)을 위한 회중목회(congregation ministry)로 약 5,000명, 네번째 원인 주일예배 멤버(crowd)가 약 10,000명, 그리고 마지막 다섯번째 원이 교회의 특별행사(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한 공동체목회(community ministry)로 약 30,000명이 된다고 한다. 그 목사의 목회방법은 예배(worship service), 교육과 제자훈련(teaching & discipleship), 내외선교(missions), 그리고 목회사역(caring ministry)등인데 이들 중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것들이 교육과, 제자훈련 사역(teaching & discipleship training)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예배 분위기이다. 요사이 유행된다고나 할까, 소위 축제예배(cerebration worship service)의 예배 스타일이 대부분의 성장하는 미국 교회의 예배형식이다. 꼭 예배순서에 매이지 않는다. 의복착용에도 매이지 않는다.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남방셔츠 바람에, 그리고 찬양과 치유목회(praising and healing ministry)로 유명한 캘리포니아 애나하임(Anaheim, California) 외곽에 소재한 포도원교회(Vineyard Christian Fellowship in Anaheim)의 죤 윔버(John Wimber)목사는 티셔츠 바람에 설교한다. 모든 교인들이 무엇에나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축제분위기 속에서 예배를 드린다. 우렁찬 찬양에 사로잡히고 모두 모두 기쁨과 웃음이 만면하다. 그래서인지 웃으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자는 뜻에서 비롯된 소위 "거룩한 웃음"(holy laughter)을 즐겨하는 지나친 교회들도 있다. 요사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토론토 에어포트 빈야드(Toronto Airport Vineyard)가 바로 그러한 교회로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인 교회이다. 물론 기뻐하며, 춤을 추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성서적으로 보아 바람직하다. 그러나 문화와 관습의 차이로 한국 교회에는 생소하고, 심지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 기도시간이 거의 없다는데 저자는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어쨋든, 미국에서 살펴보면 성장하는 교회들은 생동하고(vitalizing), 움직이고(mobilizing), 약동하고(jumping), 생명운동으로 역사하는 교회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담임목사의 목회철학과 목회방식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목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비젼의 주체성(visionary identity)이 있는 목회철학과 목회방법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소그룹 훈련을 통하여 목사의 목회철학이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오리엔트되고(oriented), 모든 교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목회사역의 텍스트 콘텍스트 관계(text context relationship)이다. 하나님께로 성서적으로 받아 정립한 목사의 목회철학이 목회 현장(ministry field)에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맄 워렌(Rick Warren) 목사는 이 방법에 뛰어난 목회자이다. 그의 설교는 복음의 내용이 약하거나, 그렇다고 무미건조한 성경강해가 아니라, 성경의 논리정연한 강해에 풍부한 유모어 감각을 가미시켜 성경말씀을 교인들의 생활현장으로 안내하기 때문에, 교인들은 예배실에 있으면서 마치 생활현장에 가서 있는 착각을 갖게 한다. 목사 혼자서 독주 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서 주제들을 뽑아서 문제를 만들어 요약한 페이퍼(paper)를 주보에 끼워 전교인들이 함께 강해해 나가는 방법을 사용하여 더불어 생각하고 더불어 생활문제를 성경 속에서 풀어 나가는 교육목회(teaching ministry)를 위주로 하는 설교자이다. 교회 성전에서 생활현장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훈련을 받게 된다. 이것이 교회생활 사회생활 연결스타일(church society life style)이다. 이 두 사회(Society)의 연결고리(linker)의 역할을 목사가 맡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목사는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중매자(Christ-mediator)라고 할 수 있다.
맄 워렌은 성경연구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이라고 말한다. 그의 저서인, 다이나밐 성경 연구방법(Dynamic Bible Study Methods)에서, "성경공부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석이 아니라 적용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성경연구의 다른 어떤 방법들을 배우기 전에 성경을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는가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목회철학의 비젼화
(Visiualization of Ministerial Philosophy)
제자훈련 사역의 출발점은 목사가 비젼을 갖는 것이다. 필립 킹(Phillip King)은 모세(출 3:1-19), 이사야(사6:1-13), 예레미야(렘1:11-19)등과 같은 구약의 선지자들은 비젼을 봄으로써 그들의 사명에 불탔다고 주장했다. 신구약은 물론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실망과 절망으로 낙심해 있을 때에,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의 비젼을 보고 새로운 용기와 사명감에 불타 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비젼의 힘(power of vision)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나라가 혼란과 외적의 위협을 받고 있는 때에 성왕 웃시아가 죽자 낙심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다. 영의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의 광경을 보는 순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며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스랍을 보내어 입술을 지저주심으로 깨끗함을 받게 하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며 재소명을 내리실 때에, 이사야는 선뜻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용기있게 응답할 수 있었다(사 6:5-8). 결국 실망과 낙심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받게 되면 담대한 용기를 얻어 사명에 불타게 된다.
목사 중에 오십 초반, 늦게 목회를 시작하여 교회를 개척한 동역자가 있었다. 지역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일년이 다가도록 15명 정도의 교인들을 섬기며 악전고투하다가 지쳐서 실망하고 교회를 포기하려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젼을 보았다. 비젼의 내용은 매우 간단한 것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새파란 잔디 위에 예수(Jesus)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예수께서 같이 하사 약속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뜻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용기를 내어 확신을 가지고 목회에 임하는 순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갑작스럽게 급성장하는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선지자나 사도들이 이상을 볼 때에 용기와 희망을 얻고 재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목회사역이 비젼에 대한 관계는 배가 키(key)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은 비젼이 없이는 방향을 잡을 수 없고, 그 목표를 가질 수 없다. 목사는 자기 교인들에게 생생한 비젼을 보여주고, 그의 비젼(vision)을 그들에게 동일화시켜야(to identify) 한다. 그 비젼에 따라서 목사는 그의 목회를 그의 평신도들과 나누어 사역할 수 있다. 이것이 목사가 혼자서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과 더불어 하는 분담목회사역(sharing ministry)이다.
목회사역의 구조변환
(Transformation of Ministerial Structure)
그러나 많은 소형교회의 만성적인 주요 병폐는 목사가 자신의 목회가 실패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평신도들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목사는 실제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는 실패할까 주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는 자기의 평신도들을 믿어야 하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각양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고전 12:4-11; 27:31;엡4:7). 제자훈련을 통한 목회사역의 특징은 목사중심 사역(pastor-centered)이 아니라 목회자의 목회사역에 평신도가 참여하는 평신도 중심 사역(laypeople-centered)이다. 홀리스 그린(Hollis L. Green)은 대부분의 지역교회 교인들이 좋지 않은 "울타리 목장"의 멘탈리티(sheepfold mentality)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부분의 지역교회 교인들은 전도사역을 복잡하게 만드는 '능동적 목사 피동적 양의 구조'(active pastor passive sheep structure)를 발전시켜왔다. 개종한 신자들은 주님의 종으로 섬기기 보다는 오히려 섬김을 받도록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는다...이러한 지역 교회의 지배적인 관념(ementality)은 변환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목사는 제자훈련을 위하여 평신도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고 훈련시켜야 한다. 목사가 평신도들을 자기의 제자들로 만들 때, 자신의 목회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목회사역팀, 즉 목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평신도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목사의 목회사역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일에 목사의 목회사역을 도울 수 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주로 (1) 다른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일(evangelizing), (2) 교인들을 잘 돌보는 일(pastoral caring), (3) 교인들을 격려하는 일(motivating), (4) 교회활동들에 참여하는 일(mobilizing), (5) 평신도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making disciples)등이다. 이와 같이 평신도들이 목회사역을 목회자의 독점사역으로 알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훈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목회자를 도와서 훌륭하게 사역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제자훈련의 원리와 방법
(Principles and Methods of Disciple Making)
제자훈련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목사는 그 원리와 방법을 성서적인 기초에 두어야 한다. 주님의 지상명령의 제일의 원리는 "제자를 삼는 것"(making disciples)이다. 이 원리는 창 1:26-28의 하나님의 명령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 명령은 "문화적 명령"(cultural mandate)뿐만 아니라 "복음적 혹은 선교적 명령"(evangelistic or missionary mandate)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을 완성하시고 인간에게 내리신 이 문화적 명령(창1:26-28)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구원, 즉 재창조 사역을 완성하시고 내려주신 선교적 명령(마 28:19-20)과 일맥상통하는 원리이다. 그러므로 창 1:26-28의 하나님의 명령은 마 28:19-20의 복음적 명령과 동떨어진 어떤 문화적 명령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의 명령(evangelistic mandate)은 문화적 명령(cultural mandate)으로부터 유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직접적인 예를 들면, 모세 여호수아(Moses Joshua), 엘리야 엘리사(Elijah Elisha)등의 경우에 잘 나타나 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신 마 28:19-20 말씀에 의하여 명료하게 확인된 셈이다. "제자를 삼으라"(make disciples)는 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의 제일의 원리이다. 그 다음으로 "세례를 주는 것"(baptizing)이 주님의 지상명령의 제이의 원리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teaching and obeying)이 제삼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이 삼중원리(trifold principle of disciple making)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제자훈련의 성경적인 예로 신약에서는 예수 12제자(Jesus Twelves), 바울 디모데(Paul Timothy)등의 패턴을 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훈련을 어떻게 시키셨는가? 첫째, 주님은 어부들(마 4:18-22)로부터 혹은 세리들(마9:9)로부터 제자들의 후보들을 선택하셨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들이나 약자들이나 세상에서 천대받는 자들을 택하신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 의미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만하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이다(고전 1:27-29). 둘째, "나를 좇으라"(마 9:9) 하시며 직접적으로 부르셨다. 셋째,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생활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가르치셨다. 넷째, 예수께서는 그들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 of all nations)고 명하셨다(마 28:19). 주님의 제자훈련 방법은 이와 같이 매우 간단 명료한 것이었다.
제자훈련을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Discipleship Training)
제자훈련에 성공하기 위하여 목사는 준비과정의 첫번째 단계로서 효과적인 계획(plan)을 세워야 한다. 피터 와그너 (C. Peter Wagner)는 "적절한 계획의 수립은 실제사역이 시작될 때에 그 효과를 증폭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만약 계획하는 것에 실패한다면, 실패를 계획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라고 말했다. 계획수립(planning)으로 교회성장 목표(growth goal)를, 단기계획(short-range plan)과 장기계획(long-range plan)등 두 가지로 세울 수 있다. 단기계획은 개인의 성장과 교회성장의 미래의 잠재력(potentiali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에, 장기계획은 교회성장을 위한 지도력(leadership)에 초점을 맞춘다. 교회성장을 위한 효과적인 계획이 수립되면, 목회자는 그 계획을 순서대로(in order) 실천할 수 있는 일정(schedule)을 짜야 한다. 이러한 계획이 없이는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시행하기가 어렵게 된다. 제자훈련은 하나의 체계적인 훈련으로 개발해야 성공할 수 있다.
제자훈련의 목표설정
(Goal Setting for discipleship training)
제자훈련 준비의 첫 단계는 "목표설정"(goal setting)이다. 만일 목회자가 아무런 목표도 설정하지 아니하면, 목회사역의 목표(target)가 없으니까 방향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만약에 목표가 분명하고, 목사가 당장 결정은 아니지만 전도를 위하여 제자훈련의 방향으로 진행시킬 필요가 있다는데 동의한다면, 방법은 조금만 노력하면 거의 쉽게 찾을 수 있다. 목사는 우선 자기가 설정한 목표를 교회 회중들에게 알리고, 다음으로 교인 개개인들을 위한 목표로서의 방법들을 제시해야 한다. 이미 가지고 있는 비젼에 일치하는 목표만이 교회성장의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교회의 제자훈련의 목표에 있어서, 목회자는 두 가지 중요한 국면을 고려하여야 한다. 즉 그들 중의 하나는 교인들 자신의 제자화와 다른 하나는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들의 증식훈련이다.
교인의 제자화 훈련
(Self-disciplinization of the People)
제자훈련 사역의 제1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는(formed in the image of Christ) 것이다(갈 4:19, 골 1:28).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도록 훈련받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1장 28절에 보면,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교회의 사람들을 신앙적으로 성숙하게 하기 위한 말씀이다. 이것을 "영적 형성"(spiritual formation)이라고 부른다. 게리 쿤네(Gary W. Kuhne)는 이 목표를 "생명의 변화"(life transference)라고 불렀다. 이 영적 형성은 영성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을 증식시킬 수 있는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 이 단계는 영적 형성의 제2단계에 속하는 것이다.
제자들의 교인증식 훈련
(Multiplication of the Church Membership)
제자훈련 사역의 제2의 목표는 교회성장을 위하여 많은 제자들을 증식(multiplication)시키는 것이다. 누가 증식시키는 사람 곧 제자삼는 사람이 되는가? 물론, 제1의 목표인 "생명의 변화"의 과정을 통하여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딤후 2:2). 그러면 제자삼는 사람(multiplier)이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러므로 제자삼는 사람은 제3의 영적 번식(third spiritual generation)을 하는데 있어서 영적으로 재생(reproduce)될 사람들의 생명을 재생시키는 임무(the task of reproduction)를 맡은 사람이다. 여기서 한 제자가 교회 멤버들을 증식(multiplication)시키기 위하여 제자를 삼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제자들을 증식시키는 것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길이며, 제자훈련을 통한 방법이 가장 좋은 증식방법이다. 게리 쿤네(Gary W. Kuhne)는 교회멤버의 증식을 네 가지 순서로 분류하고 있는데, 즉 (1) 전도, (2) 좇음, (3) 제자훈련, 그리고 (4) 다른 제자들의 증식 등이다. 그는 이러한 단계를 통하여 교인증식의 6개년 계획을 세워서 단계적으로 이끌어 나갈 것을 권하고 있다. 저자로서는 교회성장의 목표들은 세 가지 분야, 즉 수적 증가, 영적 성숙, 그리고 재정적 증가등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 분야는 구분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교회의 총체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적인 순서로 말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숫적 증가가 선행하는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질적 성장이 선행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보편적인 순서로 말한다면, 특히 한국 교회의 경우에는 대개 양적 성장이 선행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숫적 증가 (Numerical Multiplication)
첫째 분야인 숫적 증가(numerical)는 제자삼기를 증식시킴으로 달성할 수 있다. 첫 단계에서 제자훈련사(목회자)가 한 사람 이상의 제자를 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일 목회자가 첫번째 생산(first production)에서 5명의 제자를 낳는다면, 두번째 생산(second production)에서는 10명의 제자, 그리고 세번째 생산(third production)에서는 20명의 제자들로 급증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 "그 목회자"(목사, the pastor)는 첫번째 생산자(first producer, maker)가 되고, "그 목회자의 제자들"(the pastor's disciplers)은 두번째 생산자들(second maker)이 될 것이며, "그 제자들의 제자들"(the pastor's disciples' disciples)은 세번째 생산자들(third maker)이 된다. 다시 말하면, 그 목회자는 제1세대(first generation)이고, 그 목회자의 제자들은 제2세대(second generation)이고, 그리고 그 목회자의 제자들의 제자들은 제3세대(third generation)의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패턴(pattern)은 디모데 후서 2:1-2에서도 발견되는데, 곧 "바울 디모데 다른 신실한 사람들" 의 패턴으로 이어진다. 성경에서 또 다른 실례들을 볼 수 있는데, 곧 "바울, 실라와 디모데 데살로니가 사람들 마게도니아의 신자들"의 패턴과 "예수 제자들 빌립 에디오피아 내시 아프리카 사람들"의 패턴이다. 이 패턴(pattern)은 숫적 번식(numerical multiplication)의 원리 뿐만 아니라 영적 성숙과 번식(spiritual maturity and multiplication)의 원리에도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영적 성숙 (Spiritual Maturity)
둘째 분야에 해당하는 "영적 성숙"(spiritual maturity)은 가르침(teaching과 훈련(training)으로 달성할 수 있다. 이 영적 성숙은 성경공부(Bible study)와, 하나님께 대한 기도(prayer)와 찬양(praise)등의 영성훈련(spiritual exercises)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딤후 3:14-17, 눅 22:32, 행 8:22, 시 33:1). 이에 대하여 스푸라울(R. C. Sproul)은 "기도란 진정 거룩하기만 하다면, 그에 관한 어느 것이라도 신성케 하는 성화의 비결이다. 만약 우리가 교회의 위대한 성도들의 생애를 살펴본다면, 그들이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바…기도에 게을리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침체를 가져다 주는 가장 주요한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로저 스웬슨(Roger A. Swenson)은 기도를 우선으로 제안하기를 "확실히 기도는 신의를 재건하기 위한 어떠한 시도보다 앞서야 하지만, 우리의 목적에 있어서 분별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고, 그를 관용으로 인도하고, 좀더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탁하는 것이 나쁠 것 하나 없다"고 했다. 영적 성숙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열심히 기도하고 경건생활(敬虔生活)을 지속적으로 성실하게 함으로써 달성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뼈를 깎는 자기훈련이 따르게 마련이다.
재정적 증가 (Financial Increase)
셋째 분야에 해당하는 "재정적 증가"(financial increase)는 교인들의 증가와 영적 성숙을 통하여 달성할 수 있다. 우선, 재정은 교인들이 증가하고, 신앙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자연히 증가하게 되어 있다. 교인들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재정은 증가하게 마련이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더욱이 교인들의 영적 성숙은 재정적인 증가를 가속화시킨다. 그러므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거듭난"(born again) 사람들의 의무로 알게 되고,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충만케 하시므로 헌금관계를 의식하게 된다. 근본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인간의 소유들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한다. 따라서 헌금(offerings)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증진시키고, 인간을 복되게 하는데 사용되어질 수 있다. 헌금의 은혜(grace of giving)는 종종 신앙생활에 놀라운 자극을 준다. 이에 대하여 에드워드 핼스(Edward J. Hales)는 헌금생활(giving life)은 우리의 영적 생활(spiritual life)의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은 교회의 풍요한 재정을 보장해 준다. 그러므로 재정적인 목표는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에 기초하여 책정되어야 한다.
교인들의 제자훈련 참여문제
(Involving the Church Members in Discipleship)
제자훈련의 준비에 있어서 둘째 단계는 "교인들의 관여" (involving members), 즉 방치되어 있는 교인들을 어떻게 포용해서 참여시키느냐 하는 문제이다. 만일 교인들이 교회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목회자가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을 시행할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조차 없게 된다. 제자훈련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왜 평신도들이 교회활동에 관여하지 않는가? 무슨 문제가 있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교회가 성장한다. 저자는 이 문제(issue)를 목회자와 평신도의 측면에서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사역에 있어서의 목회자의 입장
(Pastor's Point of View in Ministry)
첫째로, 목회자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것(problem)은 목회자들 중에는 평신도들의 많은 수가 목회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많은 목회자들이 평신도들을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신도들이 목회에 관하여 목회자들만큼 많이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교회의 목회사역을 위하여 주신 은사들(gifts)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another problem)는 목회자들이 그들의 목회사역에 관여하는 평신도들을 믿어 주지(not trust) 않는다는 사실인데, 그러나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을 믿고 그들을 목회사역에 끌어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평신도들도 역시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제사장이며(royal priests, 벧전 2:9), 교회의 목회사역을 위한 다른 은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28-30). 마렌 윌슨(Marlene Wilson)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유한 제사장직의 신학(theology of the priesthood)에 관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신자들이 이 거룩한 제사장직의 구성요원인 것을 선언하셨고, 구약시대 최초의 전통(the earliest tradition of Old Testament)으로부터, 제사장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소명을 받기도 했으나....제사장직의 99퍼센트는 평신도였음으로 목회사역은 전 제사장의 사역이다"라고 말하였다. 더구나 평신도는 훌륭한 목회자와 지도자의 훈련을 통하여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들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평신도들의 목회사역 참여에 대해서 걱정할 것 없이 과감하게 허용해야 하며, 그 대신 평신도들의 훈련을 철저하게 시킬 수 있는 제자훈련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훈련시키면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평신도의 입장
(Laity's Point of View in Ministry)
둘째로, 평신도의 입장에서, 평신도들 역시 하나님께 받은 은사들을 과소평가 하는 것은 물론, 무관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목회사역에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평신도들은, 목회는 오로지 목회자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들도 이와 같이 목회는 목회자들에게만 속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이러한 고정관념(idee fixe) 또는 선입관념(preconception)은 가능한 한 속히 깨져야 한다. 이러한 선입관념이 존재하는 한 교회는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유진 하베커(Eugene B. Habecker)는 평신도 관여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는데, 즉 첫째, 목회자는 쾌히 목회사역을 위하여 평신도를 자유롭게 활용해야(release) 하고, 둘째, 목회사역의 스탭(pastoral staff)은 평신도를 격려해야 하며, 셋째, 목회사역의 스탭들은 신앙의 성숙을 위하여 평신도에게 교회로의 모임(gathering)과 대외전도를 위한 흩어짐(scattering)에 대한 비젼(vision)을 보여주어야 하고, 넷째, 목회사역의 스탭들은 평신도에 의하여 규정되고(define), 관리되고(managed), 운영되는(operation) 다양한 목회사역에 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는 좀더 광범위하게 평신도를 관여(involve)시켜야 한다고 했다. 평신도들을 관여시키기 위하여 우선, 목회자는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를 짓도록, 아브라함을 택한 백성의 자손(seed)이 되도록, 모세를 나라를 세우고 해방시키도록, 그리고 이스라엘과 열두 사도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신 것과 같이, 자격을 갖춘 제자들을 선택해야 한다.
제자훈련에 참여시키는 방법
(How to Involve the People in the Discipleship Training)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인들을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누차 언급했거니와 목회자가 교회성장에 대한 불타는 소원과 욕망이 있고, 교회성장을 위하여 분명한 비젼을 가지고 그 비젼을 실천하려는 의지와 열심으로 액숀을 취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한 목표(target)를 보여주고 교인들을 감동시켜서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고무시킨 다음에, 첫번째로 제자훈련 지망생을 선발하는 작업으로 들어가야 한다.
제자훈련생의 선발 (Selecting)
평신도 관여(involvement)의 첫 단계는 "선택"(selecting)이다. 사실, 신실한 사람들의 활용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양(quantity)이 아니라 질(quality)이 그의 선택의 표준이었다. 다수의 사람들(the multitude: quantity)을 접촉하던 예수님도 소수의 사람들(a few: quality)과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로 시작하셨으나, 아마 우리는 한 사람 혹은 세 사람 혹은 다섯 사람 혹은 일곱 사람 아니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열두 사람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제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제자들을 선택하는데 조급하지 말아야 하며,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신실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제자선택에 있어서, 목회자는 그들의 본성과 기량(ability)이 아니라 잠재능력(potential)인 은사(talents)와 같은 제자들로서의 자질들에 대하여 무관심해서는 안된다. 물론, 이 자질들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이다. 제자훈련 경험을 통하여 제자의 자격들을 살펴보면, 성별된 신분(consecrated status: Christian)으로, 주님의 종으로서 적절한 성품(appropriate disposition), 즉 온유하고(gentle), 겸손하며(humble), 용기있고(courageous) 선량한 인격(good personality: faithfulness과 또한 적극적인 태도(positive attitude), 교육수준(education)등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 보다도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대한 사명감이 없으면 감당하기 어렵다. 여기다가 헌신의 각오가 있어야 하며, 무엇 보다도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하는 것이다(빌 1:8). 이렇게 제자훈련을 통한 주의 사역에 대한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사명감이 없으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수 없다.
제자훈련 대상자의 부름 (Calling)
평신도의 관여(involvement)의 둘째 단계는, "부름" 즉 "소명"(calling)이다. 제자의 부름, 즉 소명은 교회밖에서, 즉 불신자가 아니라, 교회안에서, 즉 신자들 중에서 하는 것이다. 전도(evangelism)는 세상, 즉 불신자들(unbelievers)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은 이미 믿고 있는 신자들(believers)을 제자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와 같은 "부름"은 제자들(disciples) 뿐만 아니라 제자훈련사들(disciplers)을 위한 소명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에 "빛들"(lights)과 "빛을 주는 사람들"(light-givers)로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부시(Ralph D. Bucy)는 "이 '부름'(calling)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영적, 도덕적 어둠으로부터라고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 9:5)안에서 세상에 비추는 영적 도덕적 빛으로 들어가며, 그의 제자들('너희는 세상에 빛이라' 마 5:14)에서 반사할, 즉 모범을 보여줄 '소명'(calling)이다"라고 했다. 소명의 대상은 모든 신자들이다. 신자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이 부름에 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전 백성들의 은사이며 임무로서,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임무로 특수화된 것이다.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평신도를 부르는데 있어서의 권위와 감동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크리스챤이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사람들을 그의 제자들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 "부름"(calling)의 작업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좋다.
제자훈련 대상자의 참여 (Participation)
평신도 관여(involvement)에 있어서의 셋째 단계는 "참여" (participation)이다. 평신도의 관여 중에서 평신도를 끌어들여 제자훈련 프로그렘에 참여시키는 것을 말한다. 제자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은 지역교회의 예배나 친교, 그리고 선교에 참여함으로 크리스챤의 생활이 고무되는 반면에, 제자훈련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성숙해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들을 헌신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제자훈련의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 그 프로그램에 참여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다. 평신도의 참여는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교회를 성장시킬 목적으로 평신도들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목회자는 그들에게 반듯이 그의 비젼을 보여주고(visualize), 감동시키고(inspire), 자극하며(stimulate), 고무하고(excite), 용기를 주어야(encourage) 한다. 그렇게 함으로 목회자는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동기(motivation)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평신도가 참여하지 않는다.
평신도 관여(involvement)의 넷째 단계는 "세례"(baptizing)이다. 물론, 이것은 오직 안수받은 목사가 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교단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에게 안수받은 목사만이 세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례(baptizing)는 필요한 것이며, 제자를 삼기 위하여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예수께서 명하시기를, "그러므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물론 비세례자(unbaptized people)도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시켜도 좋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마 28:19)과 교회의 질서를 위하여 세례받은 사람(baptized people)만을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하여 비세례자를 꼭 참여시켜야 경우에는, 목사가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그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별도로 가르치고 세례를 받도록 유도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하나의 특례로 취급하여 교회성장을 위한 문호를 조속히, 그리고 활짝 열어놓자는 목회방침이라 하겠다.
제자훈련 대상자의 동화 (Assimilation)
평신도 관여(involvement)에서의 다섯번째 단계는 "동화" (assimilating)이다. 이것은 가르치고 훈련시키기 위한 첫 단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우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면서도, 교회활동에는 관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몸(교회 공동체)에 동화되는 것(assimilation into the Body of Christ)은 자신의 성장과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대한 궁극적인 완성의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에 참석하기(join)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교회활동에 참여 (participate in)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교인들이 그들의 회중에 대한 소속감을 진정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제리 맥킨니(Jerry McKinney)는 시행되고 있는 동화의 과정을 어떻게 측정하고 추적하는가에 대하여 교회들에게 가르쳐 줌으로 제자훈련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는 교인들의 대부분이 그 회중의 지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수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고 제언하였다. 교인들을 교회의 친교모임에 초대하는등 적극적인 접촉(active contact)이 없이는 그들을 동화시키기가 어려운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에 앞서서 그들은 성령으로 영적인 욕구에 만족을 얻어야 하고(행 2:42, 46), 친교의 사랑을 통하여 육적인 필요도 충족되어야 한다(행 2:44, 45).
동화(assimilating)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소속감을 일깨워 주는(cultivate)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교회의 친교모임에 초대해야 한다. 물론, 초대는 교회의 적극적인 멤버가 해야 한다. 멤버들에 대한 직접 "대면접촉"(face-to-face contact)이 보다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안드레(Andrew)가 베드로(Peter)를 직접 만나서 전도했고(요 1:41), 빌립(Philip)이 나다나엘(Nathanael)을 만나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해주었고(요 1:43), 그리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받고, 은혜를 받은 사마리아 여인(Samaritan woman)이 그의 동리 사람들을 직접 접촉하고 예수님을 "와 보라"고 열열히 초대 한 것 등이다(요 4:28, 29). 친교회(fellowsip)에 초대된 후, 그들은 영적인 만족과 뜨거운 사랑으로 친밀해진 다음, 제자로서 배우고 훈련받기 위하여 제자훈련반으로 조직되어 제자훈련에 참여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이러한 동화의 과정이 없으면, 교인들은 단순한 방관자로 남게 된다. 그러므로 동화과정(process of assimilation)은 한 멤버가 그 조직(the body)에 충분히 통합되고(integrated), 다른 사람들에 대한 목회사역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교인의 동화(同化)를 성취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다. 교인이 목회자에게, 그리고 목회자의 비젼이나 목회사역 활동에 완전히 동화되지 아니하면 목회자가 교회를 이끌어 나가기 힘들뿐만 아니라 최악의 경우에는 교회에 어려움이 올 수도 있다.
제자훈련 대상자의 관리 (Management)
평신도 관여(involvement)에 있어서 여섯번째 단계는 "관리"(management)이다. 관리는 목회의 능력을 교인들에게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안토니 수자(Anthony D'Souza)는 관리 전문가는 관리능력(dynamics)을 그룹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이 연결고리는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아무리 그룹들이 잘 조직되어 있다 하더라도 훌륭한 관리기술(managerial skills)이 없으면, 목회를 위한 충분한 파워(power)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관리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인간 관리(people management), 시간 관리(time management), 기관 관리 혹은 조직 관리(institution or organization), 그리고 프로그램 관리(program management)와, 재정관리(finance management) 등을 들 수 있다.
이 교회관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이다. 이것은 프로그램 관리 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프로그램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지, 그 반대(vice versa)로 사람이 프로그램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은 프로그램 중심(program-centered)이 아니라 사람중심(people centered)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사람들이 그들의 문제들을 목회자의 틀(mold)에 강제로 맞추기를 기대하기 보다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사역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제자훈련을 성공시키는 첫번째 키(key)는 전적으로 인간관리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인간관리를 못하게 되면 아무것도 진행할 수가 없게 된다. 다른 관리들은 인간관리 뒤에 따라오게 된다. 인간관리가 모든 것에 앞서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관리(time management)이다. 테리 뮤크(Terry C. Muke)는 효과적인 목회는 시간(time), 창의성(creativity), 인내(patience), 그리고 노력(effort)을 요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제자훈련 경험을 통하여 시간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훈련사(discipler)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시간을 조정(control)하지 못하면, 그가 계획했던 목표에서 빗나가기 쉽다. 예를 들면, 제자훈련 시간 중에 시간을 조절하지 못하고 성경공부 일변도로 나간다면, 기도와 찬양 등 영적인 훈련과 전도와 봉사등 실천적인 훈련을 할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계획된 제자훈련을 계획대로 끌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이 세상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다. 누구에게 더 많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똑같이 주신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는 실제로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질적인 시간으로 활용하여 교회를 위하여 효과적으로 일하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성공은 90퍼센트가 시간관리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사실,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재조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시간은 생명(영혼)이나 다름없으므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시간에 따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안토니 수자(Anthony D'Souza)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재능과 기교와 인격들을 가지고 있지만, 각자 모두가 정확하게 똑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영향력있는 지도자(effective leaders)들은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바울 사도 역시 크리스챤 생활에 있어서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베소 5장 16절에 보면, "세월을 아끼라"(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NIV)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구속하라" (redeeming the time, KJV)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크리스챤의 생활에 있어서 시간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효과적인 시간관리를 위한 기본원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관리중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일(program management)이다. 교회에서 평신도들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프래트니(Winkie Pratney)가 말한 바와 같이 특히 20세기의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제자훈련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제자훈련의 내용과 진행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교육과 훈련의 단계에서 다시 취급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관리들로서 재정관리(finance management), 시설관리(facility management), 조직관리(system management)등의 관리를 생각할 수 있다.
제자훈련반의 조직
(Organization of the Discipleship Training Classes)
제자훈련의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효과있게 운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프로그램은 실패하게 된다. 교회의 조직(organization)은 성직자들의 독재조직(hierarchical system)이 아니다. 이것은 교회활동 중의 일부로서 제자훈련을 위한 기관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기관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대리(agent)격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의 확장을 위하여 충성하고 봉사하는 제자들을 육성하는 하나님의 학교(School of God)로서 거룩한 하나님의 기관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제자훈련반은 세 등급으로 분류시킬 수 있다. 즉 (1) 제자훈련반(a class for making disciples), 제자훈련사반(a class for making disciplers), 그리고 제자훈련사의 교사반(a class for making discipler's teachers)이다. 좀더 쉽게 설명하자면, 첫째, 제자반(disciple class), 둘째, 지도자반(leader class), 셋째, 지도자 교사반(leader's teacher class)이라고 할 수 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는 평신도 지도자들의 교육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 교회들은 그러한 교육가관의 유지보다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교회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제자훈련의 반조직에 대해서 저자는 현대감각에 맞도록, 그리고 사람들에게 제자훈련에 대한 관심과 의욕과 열망을 고취시기 위하여 졸업식을 규모있고 성대하게 할 수 있는 체제로, 첫째, 제자대학(disciple college), 둘째, 제자대학원(disciple graduate school), 그리고 제자신학교(disciple seminary)등으로 조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제자대학은 일반 평신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되, 그래도 수준이 미달되는 평신도들을 위하여 제자대학 예비반(pre-disciple college)을 두는 것이 이상적이다. 이 제자훈련 예비반은 약 6개월간의 학제로 하고, 그리고 제자대학(disciple college)은 일반 평신도와 제자대학원에 진급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약 1년간의 코스로 하는데, 이 코스는 제직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면, 따로 제직훈련 때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 제자대학원(disciple graduate school)은 제자대학반을 지도할 지도자반으로 제자대학을 졸업한 자격있는 유능한, 교사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로 구성하여 철저하게 지도한다. 이 지도자반인 제자대학원은 약 2년 코스로 하되, 안수집사는 물론 안수집사 될 사람이상 의무적으로 참여하게 한다. 그러나 제자대학을 나온 평신도 중에서 지도자가 못되더라도 계속 훈련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참여시킬 수 있다. 제자신학(disciple seminary)은 3년 코스로 장로는 물론 장로될 사람이 거쳐야 할 코스로 목회자의 심방과 목회행정 전반에 걸쳐 교회에서 시행착오가 없게 하기 위한 교회의 전문 교육기관으로 평신도 신학교와 같은 코스로, 기초 조직신학을 비롯하여 교회행정에 이르기까지 목회자의 목회를 돕는데 필요한 지식과 사역경험을 쌓도록 훈련하는 반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교회는 모든 크리스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학원(school house)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신학자는 교회(church)를 가리켜 "평신도 신학교"(lay seminary)와 동일시하였다. 물론, 이러한 기관들은 각 지교회의 사정에 맞춰 당해 목회자의 아이디어(idea)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조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훈련반의 규모(size)는 소그룹 싸이즈(small group size)로 철저히 제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제자훈련은 성경공부반과 그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경공부반에서는 성경지식만 배우거나, 좀더 나가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교인들의 경건생활이나 가정, 사회에서의 크리스챤의 생활을 지도한다고 할찌라도, 제자훈련에서와 같이 강도 높게 하지 못하며, 더욱 전도자나 그룹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제자훈련반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자훈련반은 필히 소급룹으로 구성해야 한다. 톰 라아베(Tom Raabe)는 성장하는 교회에서 어떤 종류의 소그룹 구조(small-group structure)를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다비드 래이(David R. Ray)는 "최근에 '작은 것이 훌륭하다'는 강조에도 불구하고 미국 문화는 성장에 있어서 대형화로 대치되고 있다. 그리고 교회들도 싸이즈에 있어서 이 대형화의 추세를 벗어날 수 없는 형편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실 한국 문화나 한국 교회들 역시 현대에는 대형화 추세로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무리 대형화로 가는 추세라고 할찌라고, 교회내에서 제자훈련은 소그룹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제자훈련의 실제현장
(Practical Fields of Disciple Making Program)
제자훈련의 성공을 위해서 목회자는 평신도에 대한 교육 (teaching), 훈련(training), 그리고 변화(transforming)등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들은 제자훈련의 실제가 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제자훈련을 위하여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제자훈련의 실천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지역교회의 목회자가 제자훈련을 위하여 평신도들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평신도들이 협력하지 않으면 제자훈련을 시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에게 동기를 부여해주고 제자훈련에 참여하여 훈련받은 평신도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 목사가 제자훈련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활성화시키면 교회성장을 위한 파워를 얻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동기부여
(Motivation of Discipleship Training to the Laity)
이제 평신도들이 제자훈련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들은 교회가 크건 작건 관계없이 그들의 평신도들에게 동기를 주고, 그들이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하며,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봉사에 의미있는 길을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데......이것이 내가 '평신도 해방운동'(the laymen's lib movement)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알맞는 표현이다"라고 말했다. 제자들에 대한 동기부여는 성경의 복음서가 증명한다(눅 9:57, 14:25-33). 제자들 앞에서 주님의 확실한 한 약속에 있으니, 그것은 마태복음 4장 18절에서 22절까지의 말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Follow Me,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이다. 그들의 동기는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것은 오순절 이후 변화되었다. 이 후에 인간의 구원, 주님의 부활(復活), 성령의 내주(內住),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같은 위대한 진리들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 된 것 같다.
목회자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먼저 동기를 가져야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계속적인 동기부여는 안으로부터(from within)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먼저 동기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해 줄 수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꼭 필요한 자기 동기부여(self-motivation)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E. 매너(Robert E. Maner)는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주기 전에, 동기를 가져야 한다. 만일 우리가 동기에 취해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동기를 일으킬 수 없게 된다....우리는 동기에 감동되기 전에는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후보(候補) 멤버의 신세를 면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너(Robert E. Maner)는 제자들에게 동기를 주는 아홉 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즉 (1) 무조건적 사랑에 의하여, (2) 제자들을 격려해 줌으로, (3) 제자들에게 위대한 신앙에 대한 도전을 줌으로, (4) 열정을 통하여, (5) 철저한 신앙에 의하여, (6) 제자의 잠재 가능성을 보여줌으로, (7) 실제훈련을 강조함으로, (8)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줌으로, 그리고 (9) 제자들을 성경 속으로 끌고 들어감으로 등이다. 이것들은 제자들에게 동기를 주는데 매우 좋은 방법들이다. 레지날드 맥도노우(Reginald M. McDonough)는 효과적인 동기부여에 대하여 네 가지 중요한 열쇠(key)를 제시했는데, 즉 (1) 제자들에게 안정과(stability), (2) 팀웤과(teamwork), (3) 긍정(affirmation), 그리고 (4) 도전(challenge)등이다. 여하튼 목회자는 교인들 가운데서 제자훈련을 위하여 동기부여의 분위기를 조성할 책임이 있다. 특히, "우리"(we)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안에서 중요한 동기부여의 특징이 된다. 그러므로 동기부여는 교회를 위하여 대단히 중대한 일(business)이다. 동기부여가 없으면 우선 교인들의 바라볼 타켓(target)이 없어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어 결단을 할 수 없고, 교인들을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의 진행과정
(Procedures of the Discipleship Training)
우선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to teach) 훈련하기(to train) 전에 제자훈련의 교육(learning)과 훈련(training)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You, then, who teach others, do you not teach yourself)라고 지적했다(롬 2:21). "가르치는 것"(teaching)과 "훈련하는 것"(training)은 서로 차이가 있다. "가르치는 것"은 이론적 지식을, "훈련하는 것"은 실제적 행위를 제공해 준다. 이 둘은 혼동해서는 안된다. 빌리 행크스(Billie Hanks)는 "지난날 교회 복음주의자들 중에 많은 실수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기술들(skills)을 가르침을 통하여 주입하려고 하는 시도로 부터 훈련을 통하여 서서히 주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사실, 제자훈련 작업은 그들로 하여금 크리스챤 생활에 있어서 성숙하도록 하는데 세 가지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 과정들은 즉 "가르침"(teaching), "훈련함"(training), "변화시킴"(transforming)등이다. 또 가르치는 것은 지식(knowledge)과 원리들(principles)을 취급하고 훈련하는 것은 실제의 기술(skills)을 익힌다. 변화는 이들의 결과로서 확신(conviction)과 전도(perspective)를 포함한 경험이다. 이 세 가지 과정들은 필히 서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배타적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훈련은 교육을 포함하고, 변화의 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목회자가 제자훈련을 통하여 제자들을 만드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들로서 필연적인 것들이다.
교육: 가르침 (Education or Teaching)
교육은 훈련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순서로 볼 때, 첫번째 단계이고, 변화(transforming)의 과정은 그 안에서 일어난다. 제자훈련에 있어서 교육은 아이디어(ideas)와 관념(concepts)의 변화를 요구한다. 전형적으로, 교육의 도구(instrument)로서의 말(words)은 그의 사상(thoughts)을 전달(convey)하는데 사용되는 것이고, 그 외에 그의 의미를 파악할 필요가 별로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설명(illustration)과 비유들(parables)은 같지 않다. 교육은 훈련을 위한 지식화 작업이라면, 훈련은 지식의 원리를 통하여 변화를 낳게 하는 작업이요, 변화는 지식의 원리에 입각한 훈련의 결과(열매)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요소들은 서로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은 무엇을 말하는가
(What is the Teaching)
복음서에서의 가르침(teaching)은 항상 "전도"(preaching)와 "제자삼기"(making disciples)와 구별시켰다. 제자훈련에서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게 교육받는 것이다(마 28:20). 제자훈련사(discipler)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지켜 행하도록 자기의 제자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가르침"(teaching)과 "전도"(preaching)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왜냐하면, 전도(preaching)는 가르침(teaching)의 또 다른 형태(type)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생활(Christian life)을 생생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전도"(preaching)를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에서 가르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세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심령을 변화시켜서 구원에 이르게 하고, 생활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으로 받아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How to Begin the Teaching)
그러면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저자는 이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교육체계(educational system)와 다른 하나는 제자훈련을 위한 성경공부 체계(Bible study system)이다. 성경공부라고 해도 이는 제자훈련을 위한 성경공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반의 규모는 소그룹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한 반(class)에 3명 내지 5명이 적합하다. 이 성경공부는 기존 교회의 성경공부반이 아니라 제자훈련반이기 때문이다. 제자훈련 반에서의 가르침(teaching)은 기존의 단순한 성경공부 반에서의 가르침(teaching)과 많은 차이가 있다. 기존의 성경공부는 단순히 성경지식의 전달(communication)에 불과하지만, 제자훈련에서 성경공부에서는 직접 무릎을 맞대고 개인대 개인의 방식으로 인격이 변화되도록 가르치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12명으로 시작해도 좋으나, 현실적으로 좀 어려울 것 같다.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특별하신 분이시며, 또 훈련기간도 3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셨다. 죤 막스웰(John C. Maxwell)은 "전체 사람으로 시작하지 말라. 한 친구로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가능한 한 작은 규모(small size), 즉 그리스도의 체제(Body of Christ)인 소그룹으로 좀 더 작은 규모인 3명에서부터 5명 정도가 좋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개인교육과 훈련받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의 교육체계
(Educational System)
제자훈련을 위한 교육체계는 효과적으로 세워야 한다. 일반 교육체계나 교회의 기존 교육체계와 같이 관행이나 어떠한 틀, 즉 형식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 더 나가서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어떠한 형식에 매여서 살아 역사하는 산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을 가르쳐서는 안된다.
제자훈련 교재
(Text for Discipleship Training)
제자훈련 교재(text)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지만,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교재가 좋으면 좋을수록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서 더욱 효과적이지만, 그 보다도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교육 (teaching)의 방법(ways)과 기술(skills)이다. 특히 교재는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복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실제 책으로 된 독자적인 교재는 가지고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구약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경험을 내용으로 가르치셨다. 우리는 이미 우리에게 물려주신 성경말씀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내용으로하여 제작되는 교재들을 사용하면 된다. 물론 교리적으로 교재를 만들 수도 있고 신자들의 생활을 교육하기 위한 교재로 만들 수도 있다
제자교육의 내용
(Contents of the Teaching)
그러면 제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knowledge)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personality)과 생활(life)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 관한 그의 교훈은,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teaching)에 있어서 세 가지 내용을 보여주고 있는데, 즉 "지식"(information), "생활"(formation), 그리고 "계시"(revelation)등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구성요소와 그에 대한 욕구로서의 세 가지를 추구하게 되는데, 첫째가 지적인 요소요 둘째가 생활의 정서적 행동의 요소요 마지막이 계시를 필요로 하는 영적인 요소이다. 즉 지식의 요소, 행동의 요소, 영적요소들이다. 이러한 전인격적인 교육을 필요로 하는 것이 제자훈련의 교육이념이 된다. 이는 전인적으로 타락된 인간을 구원하여 회복하고, 구원받아 회복된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게 하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가르침(teaching)은 전인격, 즉 생각(thoughts)과 말(words), 그리고 행동(deeds)등 인격 전반에 걸친 교육에 기초해야 한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단지 경건생활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신자들에게 진지하게 보여주신 본을 따르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선생
(Who to Teach the Disciples)
누가 제자훈련생들을 가르쳐야 하는가? 최초로 목회자가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너희가 그들을 가르쳐라"(마28:20)고 하였다. 본문의 28:20절의 "너희"(you)는 오늘날 목회자들에 해당하는 사도들이다. 그 사도들, 즉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또 그 제자들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완수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라고 매너(Robert E. Maner)는 강조했다.
제자교육의 장소
(Where to Teach the Disciples)
제자훈련은 어디에서 하는 것이 좋은가? 사실, 제자훈련의 장소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예수께서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때로는 성전(temple)에서, 때로는 회당(synagogue)에서, 때로는 누구의 방(house room)에서, 때로는 바닷가(seashore)에서, 산(mountain)에서, 길거리(way)에서, 배(boat)위에서, 고관대작의 집에서, 세리와 창기의 집에서, 잔치집에서, 초상집에서, 무덤에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훈련시키셨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효과적인 때와 장소를 택하는 것도 제자훈련을 위한 지혜라 하겠다. 교회의 시설(church facilities)이나 직장의 사무실(business office), 가정집(family house)등등 아무데나 제한은 없으나 되도록 제자훈련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데 가장 효과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는 장소가 좋다. 물론, 제자들과의 거리나 시간상의 큰 문제가 없는 한 제자훈련생들의 의견도 참작해서 결정할 수 있다. 더욱이 옛날의 가르침의 패턴과 같이 세상(world), 즉 현장(field)이 그들의 클라스룸(class-room)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제자훈련 분위기로 보아 그래도 교회의 시설이나 적합한 가정집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가르치는 방법
(How to Teach the Disciples)
그러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가장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필히 보혜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영감은 크리스챤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고 하셨고, "그러나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고 하셨다. 가르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미 어떤 필요한 은사와 재능을 주셨다(마 23:14-30).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가르치는 은사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혹은 공동체(Body of Christ)에 속한 어떤 지체 혹은 멤버들로 하여금 공동체와 그 멤버들의 건강과 사역에 관련된 지식(information)을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는 어떠한 방법들을 통하여 전달하도록(to communicate) 주신 특별한 능력(ability)이다"라고 말했다. 가르침의 사명과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능(talents)과 지혜(wisdom), 지식(knowledge)과 능력(ability)을 사용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예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성경공부 체계
(Bible Study System)
성경공부(Bible study)는 교회성장을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best way)이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이란 성서적(biblical)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원리들(principles)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훈련을 위하여 성경공부는 어떻게 인도해야 하는가? 이것은 제자훈련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성경지식(biblical knowledge)이나 얻는 공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personality)과 사역(work)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실제적용과 거리가 먼 지식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여망(God's desire)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지식이란 변화와 성장의 결과를 가져와야 한다. 그러므로 이 성경공부는 일반적인 성경공부와 매우 다르다. 단순히 성경을 읽고 쓰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 프로그램은 사람들의 경건하고 실천적인 훈련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공부의 방법은 일방적인 지도자의 해석이나 설교를 듣는 식이 아니라 멤버들이 몸소 참여하여 해석하고 주장도 하고 적용도 하며 비판도 할 수 있는 토론식이 바람직하다. 중세의 카톨맄 교회와는 달리 루터의 개혁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마음껏 연구하여 심령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가져오며, 능력있는 사역자로 훈련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공부해나가야 한다.
성경 읽기와 쓰기
(Reading and Writing)
제자훈련 가운데 성경공부 교실(Bible study class-room)에서 성경읽기(reading)와, 성경말씀을 쓰기(writing), 명상하기(meditating)와, 기도하기(praying), 그리고 찬양하기(praising), 와 친교(fellowship)등은 하나의 자체훈련이 될 수 있는 반면에, 내외로 사람들을 위한 전도(evangelism)와 봉사(services)등과 같은 것은 실제 현장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현장훈련들이 된다. 클라스룸에서 읽기와 쓰기를 통하여 성경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된다. 홍순화 목사는 무엇을 알 것인가.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무엇을 느낄 것인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연구의 목적을 확인하라고 권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성경을 깊이 읽고 쓰는 가운데 얻어지는 지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영육간의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완벽한 사전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읽기와 쓰기는 종교활동의 기본적인 것으로, 성경에 보면 율법사(律法師)와 서기관(書記官)과 같은 전문가들이 있었다.
기도, 명상, 찬양
(Prayer, Meditation, Praise)
개인적인 깊은 신앙의 성장(growth in personal depth)을 위하여 기도와 명상등을 통하여 매일같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encounter)에 의존할 수가 있다. 더욱더 영적인 사역(spiritual ministry)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행해야 한다. 특별히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는 영적 성장의 실제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많은 은사들과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들 통하여 얻어진다. 명상(meditation)은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의 기회를 만들어 준다. 찬양(praise)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적은 물이 펌프 속으로 들어가서 땅속의 깊은 물을 끌어올리는 것과 같이, 찬양은 사람들의 찬양으로 하여금 찬양이 솟구쳐 나오게 한다(As putting a little water into the pump system causes the mechanism to pump the deep waters of the earth, praise causes one's praise to want to come forth). 그 외의 성도들간 관계(relationship)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fellowship in the Christ)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랑과 덕을 기리는 기회가 된다. 사실, 더욱 깊은 의미에서의 관계는 사람들이 서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은혜로운 교제는 물론 인간과의 사랑의 교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인간 사이에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게 된다.
훈련: 실제연습
(Training Practice)
훈련(training)은 실제적인 분야이다. 이것은 목회자가 제자들로 하여금 특수한 기술(skills)을 익히고 실제적으로 목회자가 가르쳐 준 원리들(principles)을 실제로 현장(field)에서 훈련하는 과정(process)이다. 평신도훈련은 목회자에 의해서 주도되지 아니하면 이루어질 수 없다. 훈련은 배운 기술(learned skills)의 변환을 요한다. 훈련(training exercise)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목회자 또는 훈련사(discipler)에게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현장에서 실제로 연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하신 말씀에서, "지키게 하라"는 용어가 "to obey"(NIV)와 "to observe"(KJV)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두 용어는 모두 실제적인 행동(practical action)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보다 행동에 익숙하신 분으로서 제자들은 그가 행하신 행동에 의하여 배웠다"고 죤 윔버(John Wimber)는 말했다.
제자는 가르침(teaching)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안 후에 그 말씀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알고, 그들을 그의 생활현장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제자는 성경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도를 어떻게 하며, 현장에서 어떻게 증거하는가 하는 방법을 그의 제자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제자훈련사(discipler)는 자기 제자가 이런 모든 것들에 익숙하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하디디안(Allen Hadidian)은 척 밀러(Chuck Miller)의 "제자훈련사역 세미나"(Discipling Ministry Seminar)에서 그의 훈련과정(training process)을 채용하여,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였다. 첫 단계는 제자훈련사가 혼자 실제사역을 하고, 둘째 단계는 제자훈련사가 사역을 하며 제자는 그와 함께 있어 지켜보고, 셋째 단계는 그 제자가 사역을 하고, 그 훈련사가 그 제자와 함께 있어 지켜보고, 넷째 단계는, 그 제자가 사역하고 그 훈련사는 그 뒤에 있어서 그 제자들이 스스로 사역을 할 수 있게 하는 훈련과정이다. 조용기 목사는 다른 네 가지 단계의 훈련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지도자훈련 중의 첫 단계는 제자들을 가르치(teaching)는 단계요, 둘째 단계는 제자들에게 동기를 부여(motivation)해주는 단계요, 셋째 단계는 제자들을 인정해 주는 단계(recognition), 그리고 넷째 단계는 제자들을 칭찬해 주는 단계다(praise). 밀러(Chuck Miller)의 훈련과정의 인포메이숀(information)을 구조적 방법(structural method)에서, 조용기 목사의 훈련과정의 원리들는 목회현장에서의 목회경험(field ministry experience)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제자훈련생들을 격려하여 고무시키고, 주안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이 훈련을 철저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므로 훈련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가서 훈련의 내용이요,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제자훈련 과정을 통하여 불타는 사명감과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제자훈련 뿐만 아니라 제자의 사명도 감당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
훈련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How to Train the Disciples)
그러면 제자들의 훈련 프로그램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이것은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 대부분이 이에 대한 예비지식과 그 지식을 통한 자가정립과 확신, 그리고 사전에 충분한 준비없이 시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동료 목회자들에게 들어보면,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교회를 성장시키지 못한 죄(?) 때문에 항상 남몰래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심정인 줄 안다. 목회자들이 가장 크게 받는 스트레스(stress)가 교회의 비성장 콤플렉스(non-growing complex)가 아닌가 생각된다. 차라리 좀 힘이 들고,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하다 하더라도 교회가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는 목회자의 심정은 천하를 얻은 것보다도 더 기쁠 것이다. 특히 소형교회(small church) 목회자들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그 방안을 찾기에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좋다고 하는 세미나(seminars)는 모두 참석해본다. 참석해서 이론적으로나 실제 성공사례(successful case)를 들으며 은혜를 받고 무엇인가 될 것 같아서 교회성장을 위해서 저들과 같이 해보아야 되겠다 하며 대단한 각오를 가지고 흥분된 마음으로 교회로 돌아온다. 그러나 막상 교회에 돌아와서 시작하려고 보면,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할 뿐,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는 고백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누가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 누가 저렇게 하니까 되더라 해서 똑같이 하려고 해보면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훈련의 원리(principle)는 같지만, 방법 즉 전략(strategy)은 목회자와 주어진 상황(context)에 따라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해결방법은 두 가지 중의 하나이다. 첫째는, 자기가 제자훈련 방법을 개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제자훈련에 관한 상당한 연구(study)와 리서취(research), 그리고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둘째로, 다른 사람이 개발해 놓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도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기개발의 수고는 덜 수 있을지라도 남의 것을 가지고 시행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을 이용하려면, 되도록 개발한 사람의 방법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도록 노력하는 열성이 없이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프로그램에 따라 비교적 이해하고 시행하기가 쉬운 것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이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가 어려운 프로그램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그램 자체가 그 프로그램의 세미나를 주의깊게 참석해서 습득해야 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서에서 마지막 장인 제5장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을 자가훈련 할 수 있도록 개발한 것이다. 물론, 이 프로그램도 다른 프로그램과 같이 해당 세미나에 참석해서 훈련을 받는 것이 상책(the best way)이지만, 혼자서도 훈련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제5장의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하나의 모델로서 이 프로그램을 익힌 후에 각기 상황에 맞게 개정하여(revising) 적용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시간조절(time adjustment)이다. 훈련시간의 길이를 어느 정도 할 것인가가 제일 먼저 정해야 할 사항이다. 대개 제자훈련은 일반 성경공부나 교회 그룹활동과 달리 전문적인, 군대훈련과 같은 훈련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소 두 세 시간 이상은 할애해야 한다. 사실,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그 프로그램을 자기의 것으로 완전히 소화할 뿐만 아니라 좀더 자기에게 맞게 개선, 개발해서 사용해야 한다.
훈련사(자도자)의 훈련
(Training forDiscipler)
무엇보다도 먼저 평신도-제자(lay-disciples)를 훈련하기 전에 지도자(leader)즉 제자훈련사(discipler)를 훈련시켜야 한다. 제임스 쿠우즈스(James M. Kouzes)는 배리 포스너(Barry Z. Posner)와 함께 경험한 성공적인 지도자(훈련사)에 맞는 다섯 가지 기본적인 연습(fundamental practices)을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첫째, 훈련과정에 도전했으며(challenge the process), 둘째, 주어진 비젼을 고무시켰고(inspired a shared vision), 셋째,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게 해주었고(enables others to act), 넷째, 그 방법을 설정하였으며(molded the way), 다섯째, 마음을 격려했다(encouraged the heart)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자의 리더쉽(disciple's leadership)이 개발되어야 하는데, 제자들 가운데서 개발될 수 있다. 폴 밀하우스(Paul W. Milhouse)는 "우리가 주님의 사역에 종사하도록 선발된 사람들과 함께 주님의 방법(Master's method)을 연구할 때, 우리가 보통 생래의 지도자들(natural leaders)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 리더쉽이 개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리더쉽(지도력)은 교회의 건강과 성장을 고취시킨다. 제자의 지도력(leadership ability)은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훈련함으로써 개발될 수 있으나, 그것은 영력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지도력은 영력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내주(內住)하고 충만한 성령(the indwelling and filling of the Holy Spirit)의 초자연적 능력(supernatural dynamic)과 동일시되는 희랍어는 "두나미스"( )라는 말이다. 로마서에 보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다(롬 15:13). 제자훈련은 항상 특별한 목표와 프로그램에 직접 부응하게 될 때에 가장 훌륭하게 된다. 죤 핀니(John Finney)는 개발될 수 있는 리더쉽의 잠재력(leadership potential)에 집중했다. 제자 지도자 훈련장(director)은 분명한 교회 훈련계획을 개발해야 한다. 제자 훈련계획(training plan)의 개발에 맞추어 제자로서의 지도력(leadership ability)이 개발되어야 한다. 사실, 제자훈련에 있어서 지도력(leadership)은 대단히 중요하다. 제자훈련의 목적이 교인들의 생활을 교육하는 것만 아니라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훈련이 아니라 교회와 타인들을 위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제자훈련 쎈터
(Discipleship Training Center)
평신도들의 의식개혁이 이루어진 후에 교회에서 자체의 제자훈련 쎈터를 설립하는 것이 좋다. 이 평신도 지도자 훈련 쎈터는 평신도를 훈련시키도록 디자인된 하나의 지역 신학(a local seminary)과 같은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저자는 이 쎈터의 훈련기구를 세 단계로 조직할 것을 권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대학(Disciple College), 제자대학원(Disciple Graduate School), 그리고 제자신학교(Disciple Seminary)등이다. 이 훈련쎈터에서 평신도들이 교회성장을 위한 그들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게 된다. 교회는 단기 사역기관이 아니라 후세들에게 물려줄 하나님의 기관임으로 영원한 계획하에 관리하고 개혁해야 할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튼튼한 반석위에 세워야 한다.
제자의 사명: 변화 (Transforming)
교회에서 제자를 변화시키는 것(transforming)은 목회자(훈련사)가 제자로 하여금 크리스챤으로서의 성장면(his spiritual growth)과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사명감(a sense of mission to others)과 그에 대한 확신과 전망에 대한 비젼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자를 양성(equipping)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과정이다. 이에 대한 이유를 알렌 하디디안(Allen Hadidian)은 말하기를 "아무리 많은 지식(knowledge through teaching)과 기술들(skills through training)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내적으로 변화를 받지(not transformed on the inside) 못하면, 즉 이 특수활동(particular activity)이 필요하다는 확신(conviction)을 얻지 못하면, 그 활동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목회자(훈련사)는 제자들의 가치관의 변화(change of his sense of value)를 추구하고 그의 전 생애에 영향을 미칠 그의 제자로서의 확신을 심어 주며,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에 나가서 생활하며 전도할 때에 한 생명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심장(心腸)을 그들의 속에 넣어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 아울러 나가서 사역중에 낙오되어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능력있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충만함을 받게 해서 보내야 한다.
제자의 파송 (Sending the Disaciples)
제자들이 교육과, 훈련을 받고 무장하여 조직되면, 혼자가 아니라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현장으로 파송을 받는다. 두 사람씩 파송하는 이유는, 첫째로, 리더쉽(leadership)이란 말이 집합명사(collective noun)로서 되어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당시 혼자 불리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그러므로 가서 제자들을 삼으라"(Go therefore, and make disciples)고 해서 한 제자를 보내심이 아님을 알 수 있다(마 28). 19) 세상에 계신 동안에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눅 10:1, 막 11:1).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신 방법이다. 훈련받은 제자들은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역현장으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다. 예수께서 명하시기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 같도다"고 하셨다(눅 10:2, 3).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로 가야 하며(마 10:6), 와서 도와주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에게로 가야 한다(행 16:9). 물론, 이것은 역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성령 하나님(God the Holy Spirit)께서 부르셨다는 뜻이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Whom shall I send?),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And who will go for us?)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Here I am. Send me!) 라고 주의 종 이사야가 대답했다. 이에 주께서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라"(Go and tell this people)고 명령하셨다(사 6:8, 9).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분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 20).
제자훈련 프로그램의 평가
(EVALUATION OF THE DISCIPLESHIP TRAINING PREOGRAM)
지금까지 시행한 제자훈련의 정확한 평가를 위하여 그 결과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이 측정은 본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이러한 측정이 없이는 본 제자훈련을 통한 교회성장율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본 제자훈련 시행의 결과를 측정해야 한다. 제자훈련의 결과는 측정될 수 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며, 그 사람들은 셀 수가 있기 때문에, 증가된 제자들은 측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측정하든지 간에 사실 측정되어져야(measured) 한다.
첫째로, 교회성장을 측정하는 표준(criteria)은 교회의 교인 (membership)의 증가이다. 이것은 교회의 숫적(numerical) 또는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에 대한 측정이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은 전형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교인(members)이 되었는가에 의하여 그것의 성공을 측정한다. 물론, 그것은 교회의 숫적 증가의 방법이 자생적(biological), 전입(transfer), 그리고 개종(conversion)등을 포함한다.
둘째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성장의 측정은 제자훈련생들은 물론, 이들로 인하여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교인들의 크리스도인의 생활(Christian life)에 있어서 신앙의 성숙도(maturity)를 측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의 결과는 측정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교인들의 영적(spiritual) 또는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을 의미한다. 이 질적 성장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을 평가함으로써 측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인들이 각종 예배와 개인기도 기도회, 그리고 각종 교회활동에 얼마나 잘 참석하며 열심히 활동했는가를 측정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헌금생활, 봉사생활과 가정, 사회, 국가등 대사회 봉사활동(對社會 奉仕活動)들을 측정하게 된다. 이들에 대한 종합평가를 통하여 질적 성장이 측정된다.
셋째로, 교회성장의 평가의 표준 중의 하나는 교회헌금(givings)의 증가율이다. 이것은 교회의 재정적 성장(financial growth)을 의미한다. 교회의 헌금통계(the statistical data of the church offerings)와 기부금(donations)등의 자료가 교회의 재정적 성장의 표준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은 숫자로 표시되기 때문에, 매우 명확하게 측정된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제자훈련으로 그 프로그램이 성공하게 되면 틀림없이 교회의 교인수나 재정이 증가하여 양적 성장을 가져다준다.
결과의 평가(evaluation of the results)는 교회가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계획하거나, 재조정하든지, 아니면 다시 계획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지난 프로그램의 평가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게 된다. 평가는 프로그램의 전과정을 통하여 계속되어야 한다. 평가는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본 프로그램에 참여한 모든 멤버들에 의해서 실행되어야 한다. 평가에는 몇 가지 방법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들은 설문지(questionaries), 개인면담(personal interviews), 공청회 자료(public hearings), 교회의서류들(church documentations), 그리고 제자훈련원의 서류들(discipleship training documentations)등을 통하여 평가될 수 있다. 평가(評價)의 내용들은 시행한 프로그램의 스타일과(style), 규모(scale), 활동과(activities), 방법론(methodology), 해결문제와(problems to solve), 미래계획(planning for future)등이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what we are doing)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잘 하고 있는가"(how well we are doing)이다. 사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내용이 아니라 프로그램의 방법론이다. 무슨 내용을 훈련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훈련하느냐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프로그램의 효과를 개선하여 증폭시키기 위해 평가(evaluation)와 피드백(feedback)이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다. 프로그램의 평가는 차기 프로그램 개선은 물론, 제자훈련사와 훈련생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평가결과를 측정해 낼 수 있어서 유용하다.
결 론 (CONCLUSION)
전교인들이 목회사역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 그 교회는 성장의 추세로 도약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교회의 목회사역에는 많은 종류의 활동들이 있지만, 그래도 성경에 가장 완벽하게 제시되어 있고 주님과 제자들이 실행한 활동으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가장 추천할 만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은 물론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과 재정적 성장(financial growth)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효과적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대형교회(large church)에서는 질적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데 효과적이고, 소형교회(small church)에서는 양적 성장을 위한 정예용사를 양성하는데 초점을 맞추면 좋은 프로그램이다. 본서의 제5장 "다이나밐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은 기존 제자훈련의 취약점을 보완하여, 차세대 목회사역(the future ministry)을 주도할 "제3의 물결"(third wave)의 주역들을 위하여 디자인된 다이나믹한 프로그램이다.
제자훈련 프로그램(discipleship training program)은 매우 값진 목회사역 프로그램(a costly ministry program)이다. 빌리 행크스(Billie Hancks Jr.)는 "하나님의 제자화 작업에 씌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그것은 값진 목회사역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제자화 작업은 고가(high price)를 지불할 사람을 요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이 값진 목회사역은 많은 시간의 소요(quantity of time), 인식부족(lack of recognition), 불편(inconvenience), 상처(hurt), 노출의 취약점(vulnerability to exposure), 재생의 약점(weakness reproduced), 터널링(tunneling), 생명(life)등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자훈련의 질적 훈련(quality training)은 "진행의 삼각구조의 방법"(the triangle principal methods)의 균형잡힌 콤비네이숀(combination) 즉 "교육"(teaching)을 통하여 가르칠 수 있는 것과, "훈련"(training)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 그리고 "변화"(transforming)를 통하여 할 수 있는 것, 바로 그것(those)의 콤비네이숀(combination) 의 방법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아이디어(ideas)를 취급하고, 다음은 기술(skills)을 취급하며, 또 하나는 위임(commission)을 취급한다.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께서 제자훈련 사역(discipling ministry)이 확고한 성경적 기초가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실천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있다면, 교회성장을 위하여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지체없이 시행해야 할 것이다. 또 오늘날 목회자는 제자훈련 사역을 성공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고, 실행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운영위원회(steering committee)는 항상 반복해서 목회자와 주요 평신도 지도자들(key lay-leaders)이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제자훈련 사역을 증폭시키도록 훈련받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해야 한다.
제 4 장 한국 교회 성장론(A THEORY OF KOREAN CHURCH GROWTH)
교회성장(Church growth)은 신적인 차원(divine dimension)에서 볼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성취되는 것이며, 인간적인 차원(human dimension)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교회성장 역사에 따른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역사적인 섭리에 부응한 인간의 여건이 잘 조화를 이루어 창조해 낸 것이 교회성장의 작품이다. 한국 교회는 교회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성장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한국 교회 교세가 선교 백주년에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일천여만명을 넘어선 것이다. 이와 같은 교인의 증가율은 인구 증가율의 4배를 능가하는 숫자이다. 이와 같은 교회의 급성장은 근대에 이르러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린 경제의 급성장과 함께 한국 국민이 받은 하나님의 크나 큰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마도 믿음의선진들이 뿌리고 간 믿음의 씨앗의 열매인지도 모른다. 또 믿음의 선진들의 값비싼 순교의 대가로, 고난 후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지도 모른다. 마치 매를 들고난 후에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선물을 주듯이....과거를 돌아 볼 때, 한국 교회의 성장의 요인은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원천적인 요인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으며, 세계 역사 속에서 구속역사의 일환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성장시켜 나가시는 것이다. 이러한 원천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도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크게 성장해 왔다고 믿는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따라 한국 교회는 복음을 잘 받아들여 교회가 급성장 할 수 있는 요소들과, 이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열성적인 민족성에 힘입어 오늘날과 같은 급성장을 이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놀라운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 교회를 오늘에 와서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람들의 견해와 입장에 따라 긍정적인 시각과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비판적인 시각도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한 제언이리라. 좌우간 한국 교회의 성장이 오늘날까지 대단한 호황을 누려 온 것은 사실이다. 앞으로는 어떠할까? 이러한 질문에 접하게 되면, 비판론자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 때 호황을 누렸던 서구 교회들과 같이 세속화로 병들어 쇠퇴하고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가 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하겠는가.
본서의 목적은, 이렇게 급성장한 한국 교회의 과거를 돌아보아 한국 교회의 성장요인들을 분석하고, 현재의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찾아 진단, 재평가하여, 미래를 향한 한국 교회의 성장에 대한 전망을 내다보며, 한국 교회 성장에의 재도전을 위한 전략으로,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려는데 있다. 본서는 대형 교회의 질적 성장은 물론, 특히 한국 교회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소형 교회가 재도전할 수 있는 교회성장 전략에 초점을 맞추었다. 본서의 제5장은 제4장에서 분석한대로, 한국교회 성장문제의 심각성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제로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워크샵으로, 소그룹운동 중에 기존 프로그램과 달리 "제3의 물결"(third wave)을 타고 다이나믹하게 실시되는 새로운 제자훈련 프로그램(discipleship training program)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요인: 과거
(THE FACTORS OF KOREAN CHURCH GROWTH: PAST)
한국 교회 하면 교회사적으로 볼 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에 있어서 20세기의 기적이라고 극찬하리 만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였고,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초대 교회를 연상하리 만치 교회 부흥의 불길이 엄청나게 타올랐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한국 교회를 기하급수로 급성장시킨 이러한 엄청난 힘(dynamic energy)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 교회가 이토록 급성장하게 된 주요 요인들(factors)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한국 교회사적 차원(Korean church-historical dimension)에서, 특히 선교사적 차원(Korean mission-historical dimension)에서 볼 때, 이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원천적 요인: 하나님의 섭리
이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차원에서 교회성장의 요인을 분석해 보려는 시도로서, 우주는 물론 인간 만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진행되듯이, 더욱이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마 16:10)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 속에서 운용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하에 성장해 나간다고 볼 수 있다(마 16:18, 행 2:47, 9:31, 20:28, 엡 5:23, 29, 골 1:8).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섭리하시는 우주와 인간세계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세우신 교회를 구속사적인 섭리로 엮어 나가시는 연속된 사역으로 교회성장 운동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까지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특히 지상의 교회를 철저히 관리하신다.
하나님의 본성적 발의: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과 같이, 또 영광을 받으시기 위하여 타락된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성장시키시는데 대단하신 열심을 쏟고 계신다. 이 열심은 교회를 섭리해 나가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다루어진다.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law of Justice)과 사랑의 법칙(law of love)에 의해서 교회를 섭리하시며 궁극적인 승리(the final triumph)를 이루신다. 한국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이러한 열심히 크게 작용하여 한국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이다.
도날드 맥가브란은 그의 저서에서 교회성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Will of God)이며 그의 열망(desire)하시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성경적 근거로 "찾음과 추수의 신학"(Search theology and A theology of harvest)을 제시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려는 하나님의 열정이 대단하심을 역설하고 있다. 피터 와그너도 그의 저서 당신의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Your Church Can Grow)에서 하나님은 교회가 성장하기를 원하신다고 역설하였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 때가 차매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치밀하게 예정된 구속계획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성서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때가 차매"(when the time had fully come, 갈 4:4)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정확성을 강조하는 문구로서, 하나님께서는 일반사 속에서 구속사적인 경륜을 엮어 나가시는데 있어서 전지전능하신 손길로 정확히 때를 맞추어 섭리해 나가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요 17:1, 마 13:30, 막 1:15, 눅 1:20). 다음에 언급하겠지만 한국도 하나님의 정확하신 구속 계획에 따라 교회가 성장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맥가브란 역시 "때가 차매"라는 용어를 중시하고, 교회의 대부흥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환경을 무시한채 어느 때나 일어난 것이 아니고, 정확한 때, 곧 적절한 시기, 즉 카이로스( )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한 레오나르드(Tuggy A. Leonard)의 말을 인용,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 속에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속사적 과정: 세계사 속에서
기독교신학의 대가 어거스틴(Augustine)의 역사의식을 보면, 실증주의 내지 역사주의 역사관을 확립한 랑케(Leopold Von Ranke)나 헤겔(Hegel)과는 달리, 역사란 신(God)의 섭리에 의해서 발전,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지상의 인간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의식(歷史意識)을 보면, 구속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반사에 관계하며,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하게 된다는 것이다("the City of God," 하나님의 도성 참조). 따라서 교회성장사(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사)도 세계사에 관계하여 전세계를 커버하게 된다(행 1:8, 막 13:10, 딤전 3:16). 하나님께서는 전 우주라는 피조계의 공간을 무대로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작정이라는 경륜 위에 시간을 통하여 역사적 섭리를 빈틈없고, 실수 없이 엮어 나가신다는 사실인 바, 세계속에서 한국 교회의 역사를 엮어 나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성장도 하나님의 이러한 구속사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서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나라라도 독립적으로 섭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와 세계의 섭리에 맞춰서 섭리하신다.
복음전파 운동의 세계적 추세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복음운동(Evangelical movement)행 1:8)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소아시아 지방으로, 소아시아에서 로마를 발판으로 해서 유럽으로, 유럽에서 영국까지, 영국에서 다시 아메리카 대륙 미국을 돌아 현재는 극동의 한국에 상륙하여 강력하게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운동의 계획의 일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극동에서 복음화의 꽃을 피우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힘입어 한국 교회는 불같이 일어나는 영육간의 성장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한국 교회의 주기적 성령운동
한국 교회의 성령운동이 물론 계속해서 이어져 왔지만, 그 강도면에서 볼 때, 주기적으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성령의 바람이 크게 세번에 걸쳐 재현되었다고 본다. 1907년을 기점으로 성령충만의 역사가 첫번째 매우 폭발적이고도 강력하게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1940년대를 기점으로 6.25 사변의 수난의 리액숀으로 두번째로 성령의 불길이 일어났으며, 196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인 변혁과 경제성장의 물결을 타고 세번째의 부흥운동으로 가속화되었다. 다시 말하면, 1907년 전후로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교회 대부흥운동 이후, 8.15 해방을 거쳐 6.25 사변을 계기로 또 한번의 성령운동이 강렬하게 일어났고, 1960년대 이후 이러한 성령운동을 통한 교회 부흥운동이 극대화되었고, 이 성령의 운동은 1970년대에 이르러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 한국 교회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1907년 한국 교회 대부흥운동을 살펴보면, 1903년 화이트(M. C. White), 프랜슨(F. Franson), 하디(R. A. Hardie), 롭(A. F. Robb), 전계은, 정춘수 목사 등을 중심으로 있었던 원산 부흥회가 1904년 평양 사경회와 1906년 평양 연합사경회(R. A. Hardie)로, 다시 1906년 길선주, 박치록 목사 등을 중심으로 평양의 새벽기도회로 이어졌고, 이 새벽기도회가 불이 붙어서, 1907년에 블래이어(W. N. Blair, W. M). 베어드(Baird, G. Lee), 길선주 목사 등이 주도한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이 운동은 신천, 의주, 서울, 광주, 목포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심지어 이 운동은 학원들(평양신학교, 숭실중.대학교, 숭현, 숭덕, 평양여고등)에까지 확산되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해서 신학적인 문제가 되기는 했지만, 1930년대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은 크게 평가된다.
1940년대 이후 8.15 해방과 6.25 사변을 거치면서, 박재봉, 이성봉 목사등을 중심으로 또 한번의 성령의 바람이 일어났고, 이 성령의 바람은 또 한번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에 국가적인 격동기를 지나면서 경제개발의 붐을 타며, 게다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 편승하여, 성령운동의 연속선상에서 한국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갔다. 이 시기에, 신현균, 이준만, 오관석, 김충기, 이만신, 임영재, 최복규 목사 등의 부흥사들이 성령운동을 주도해 갔고, 특히 나운몽 목사의 기도원을 중심으로한 전국순회 전도대회를 통한 성령운동 이후,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 운동(Pentecostal movement)과 은사 운동(charismatic movement)에 미국의 정신계에 돌풍을 몰고 왔던 제임스(William James), 노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그리고 슐러(Robert H. Schuller)등 적극적 사상가들(positive thinkers)의 가능성의 사고철학"(philosophy of possibility thinking)을 도입 가미시킨 운동으로 세계 교회사상 유례없는 대교회로 성장했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의 성장도 역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구속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교회성장이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에 부응하여,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교회성장의 요소를 운운할 수가 있는 것이다. 개교회의 성장부터가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역사하시지 않으면 이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 기인한다고 본다.
부차적 요인: 한국사적 의의
한국교회 역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와 축복에 기인하며, 이에 부응한 하나님의 역사적 요청의 응답으로 교회성장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라 하겠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요청에 한국은 기꺼이 응했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활기 있게 성장해 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계획하신 교회성장 운동에 한국 교회가 열열하게 순종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한국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고 적극적이 관심과 배려가 한국 교회의 열심을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 요인: 선교 이전의 요소
한국의 피선교적 상황은 교회 성장에 있어서 몇 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종교 문화적 바탕이 기독교 신앙을 이식시키기에 양질의 토양(good quality soil)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양질의 토양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변화추세에 맞추어 한국 교회가 무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church growth potential)을 가지고 있었던 이다.
재래종교의 바탕: 유교, 불교, 도교
바울이 헬라의 아덴(Arthen in Greece)에서 지적했듯이 본래부터 생래적으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religiosity)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를 거쳐오면서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의식속에 착색되어 온 재래종교들, 즉 유교, 불교, 도교 등에서 익숙해진 종교성의 바탕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수용(receptivity)과 이식(transplantation)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일부 혼합주의로(syncrytism)로 오염된 신앙의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교 문화적 바탕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초기 선교의 용이한 잇점에 반하여 한국 교회가 이로 인한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영향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도 역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히 지정학적 특수성으로 외우내환의 정치적, 사회적 불안과 시련의 반동(reaction)으로 종교적 구원을 동경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에 접할 때마다 하나님을 찾아 의지하려는 종교적 성향이 높아, 당시 열렬히 전파되고 있던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역시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중의 하나였다.
선진국의 경제적, 문화적 선망
한국은 8.15 해방 이후, 6.25 사변을 거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특히 미국의 적극적인 접촉으로 그들 서구문명의 윤택한 경제생활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선진국인 미국을 비롯한 구라파의 서구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구 문화의 유입과 함께 들어오는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용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서구 문화와 함께 서구 경제를 도입, 경제개발의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한국 교회는 급성장하게 되었다. 사실, 일각에서는 서구 문명의 유입을 사대주의 사상으로 우려하여 경계하는 경향도 있었으나, 서구 문화의 유입이 물론 저질성의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부작용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기독교를 전하는데 좋은 여건을 조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민족적 수난의 반동으로
교회사적으로 볼 때, 기독교회는 역사적 수난의 불안정 속에서 더욱 강인한 신앙을 통하여 한 단계씩 승화시켜 나갔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극한 박해 속에서도 수난에 역동하며 불안과 전쟁 속에서 안정과 평화를 추구해 나가는 놀라운 힘을 과시함을 볼 수 있다. 로마의 박해 속에서 기독교는 전세계로 뻗어 나갔고, 세계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을 계기로 기독교는 더욱 넓게 전 세계로 확장되어 나갔다. 이러한 세계역사속의 기독교와 같이 한국 교회도 일제의 침략에 반동(reacted)하며 굽힐 줄 모르고 성장했고, 6.25 동란이라는 엄청난 민족적 환란속에서도 오히려 폭발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으며, 60-70년대에 들어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격변에 편승하여 놀라운 성장을 계속해 온 것이 사실이다.
주관적 요인: 선교사적 고찰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의하여 선교가 시작된 후 한국 교회는 1902년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있던 중, 1903년 초, 알. 에이. 하디(R. A. Hardie), 엠. 씨. 화이트(M. C. White), 에프. 프랜슨(F. Franson)등과 같은 선교사들을 중심으로한 대각성운동으로 회개역사, 중생의 체험등 성령의 역사가 원산 사경회로부터 시작하여 불길 같이 일어나,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한국 교회 부흥운동이 평양에서 부흥의 불꽃을 피워 북한의 의주, 선천등을 비롯하여 남한에 광주, 서울, 목포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런 부흥운동들이 한국 교회에 있어서 처음으로 일어났던 성령의 역사들이었다.
초기 한국 교회의 선교방법의 주효
한국 교회는 극히 보수적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선교 초창기부터 보수적인 신앙(성서적이며, 더욱이 교회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개혁신앙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즉 성서적 바탕으로 자라왔기 때문에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보수신학의 상징적인 요람이 곧 평양신학이었다. 또 선교사들에 의해 외국에서 도입된 네비우스 방법(Nevius methods)이 한국 교회의 성장에 한 몫을 하였다. 네비우스 방법이란, 자전(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자립(self-support)의 자주정신의 선교적 방법이다.
부흥회를 통한 한국 교회 성장
1900년대 초기, 길선주 목사, 이기풍 목사에서 김익두 목사로 이어졌던 부흥회 운동이 1930년대 이용도 목사, 1950년대에 와서 이성봉 목사, 박재봉 목사 등이 주도한 부흥회로 한국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타올랐고, 1960년대에 들어와서 우후죽순 같이 일어나 춘추전국 시대를 이룬 부흥사들에 의하여 각처에서 열리는 부흥회를 통하여 한국 교회는 각 교회들이 은혜의 불길 속에 휩싸이게 되었고, 수많은 새신자들을 얻어 기하급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기도원 운동을 통한 한국 교회 성장
한국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길선주 목사, 이기풍 목사, 김익두 목사,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에 의해서 이미 산상기도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항상 기도에 힘썼으며, 그 후에 철원수도원, 용문산기도원, 삼각산기도원 등을 시발로 1960년대에 들어와서 기도원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현재에 와서는 전국에 수백개(약 600 여개)의 기도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와같이 기도원 운동은 영적으로 고갈되었던 한국 교회에 엘림과 같은 안식처를 제공해 줌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맘모스 대중집회의 열풍
한국 교회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경제개발의 붐을 타고 세계적인 규모의 맘모스 대중집회를 통하여 한국의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한 민심을 유도하여 기독교의 확장(교회성장)을 시도하였고, 이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놀라운 힘을 과시하였으며, 각 교회들도 이러한 붐을 타고 교회성장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성장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맘모스 대중집회의 대표적인 예로,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1974년의 엑스프로 '74, 1980년의 한민족 대성회, 그리고 1984년의 선교 100주년 기념성회등을 들 수 있다.
군복음화 경찰복음화 운동
한국 교회의 복음화 운동은 군과 경찰등 국가의 직속기관에 까지 확대되어 나아갔다. 특히 기독교회가 처음으로 시도한 군복음화 운동은 제도적으로 이루어진 황금어장을 노린 것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두어 한국 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군에서 전도를 받고 믿어 세례받고 나온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역 교회에 들어가서 훌륭한 일군이 됨으로 교회를 활성화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경찰선교 역시 직접, 간접적으로 한국 교회 성장에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각 경찰서마다 교회 목사들이 경목회를 조직하고 경찰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현재에도 활발하게 활동함으로 교회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각 교단의 교세확장 운동
1970년대에 들어와서 장로교회를 위시하여 각 교단에서 교세확장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장로교 합동측에서 일만 교회 운동을 시도하였고, 이에 뒤따라서 각 교단에서 오천교회 운동, 일천 교회 운동의 슬로우건(slogan)을 내걸고 교세확장 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군소 교단들이 우후죽순(雨後竹筍)으로 일어나 부작용도 없지는 않지만 한국 교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신학교의 다수화 현상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경제성장의 추세에 힘입어 교육에 눈을 돌리게 된 한국적 상황에서, 그리고 교회의 기하급수적 성장의 필요에 따라 교회 지도자들이 요청되는 상황에서 기존 신학교들로서는 각양의 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각처에서 군소 신학교들이 생겨났고, 수많은 신학교들의 탄생은 약간의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지만 특히 양적으로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신학교들에서 신학자들과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전도자들과 목회자들이 배출되어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
초교파. 범교회 운동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온 교회 밖의 운동들(CCC, UBF, IVCF, YFC, SBF, Navigators, YMCA, YWCA, JOY등)의 영향으로 선교적 차원에서의 탈교회화 전도운동과 교회와의 유기적 관계수립으로 교회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파라쳐치들은 당시 침체되어 안일함에 빠져 있던 교회에게 선교와 전도의 동기(motive)를 부여해 주었고, 실제로 교회속에 뛰어들어 선교와 전도활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물론, 간혹 교회제도에 도전하는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이 초교파, 범교회 운동을 통하여 선교와 전도요원들을 양성하여 후에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로 한 몫을 하게 되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의 도입
미국을 위시한 서구 교회들이 쇠퇴해 가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성서를 떠난 메시지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특히 미국 교회들의 예를 보더라도 성서적 복음적인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는 성장하는 반면에, 자유주의 인본적주의에 치우쳐 있는 교회들은 침체되거나 심한 경우에 문을 닫는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지가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내용에 국한되는 한 그 교회는 살아 남을 수가 없다. 미국의 남가주 지역만 보더라도 복음적인 메시지 선포를 위하여 성경강해 설교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는 교회들,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Grace Community Church, The Church on the Way, First Evangelical Free Church of Fullerton, Carlvary Chapel of Costa Mesa, South Coast Community Church, 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등 여러 교회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저자가 이들 성장하는 교회들을 방문하여 담임목사에게 던진 질문 당신의 교회가 성장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구동성으로 첫째로 복음적인 메시지의 선포에 있다는 것이었다. 목사의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소그룹운동인데, 그 중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한국 교회에 도입되어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외국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제자훈련과 같은 소그룹운동으로 교회가 성장하고 정착했는데 한국은 뒤늦게 1970년대 중반 이후에야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헤롤드 엘 피겥(Fickett, Harold L.)은 그의 저서 교회성장의 십대원리(Ten Principles of Church Growth)에서 교회성장의 요인을 (1) 오직 그리스도 중심(Christ centered), (2) 성경 중심(Biblical based), (3) 전도활동(Evangelistic), (4) 중생(重生) 교인의 확보(Regenerated membership), (5) 확실한 지도력(Confidence in the leadership), (6) 재정의 효율적 운용(Scriptually financed), (7) 충분한 직원들의 확보(Adequately staffed), (8) 믿음에 의한 동기부여(Motivated by faith), (9) 봉사활동(service), (10) 균형의 유지(Balanced on emphasis)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피터 와그너(Wagner, Peter C.)는 (1)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 (2) 목사의 믿음, (3) 평신도의 믿음, (4) 목표설정, (5) 적극적인 사고방식이 교회성장의 주요 요소들이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부차적 요소들에 불과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있으며, 다음으로 이 하나님의 열망과 열심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에 따라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하나님의 계획은 예견적이며, 정확하고 치밀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계획을 잘 파악하여 강력하게 추진해 나갈 때에 교회는 성장하게 마련이다. 한국 교회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소원을 성령께서 열렬하게 역사해주셨고, 교회가 잘 순응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기적적인 교회성장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 교회 성장의 현주소: 현재
(THE PRESENT STATE OF KOREAN CHURCH : PRESENT)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여 현하 수십개의 교파와 수백개의 교단과 신학교가 존재하고, 신도수 일천만명을 넘어섰다. 더욱이 뒤늦은 선교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대교회가 대부분 한국에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크리스챤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형화된 슈퍼-메가 쳐치(super-mega church)들이 많다는데에서 한국교회의 성장규모(growth size)와 성장 가능성(growth potential)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로 팍스-아메리카나(pax-Americana)가 된 미국에도 교인 20,000명 넘어가는 교회가 거의 없는 것에 비하면, 수만 내지 수십만의 멤버쉽(교인)을 가지고 있는 한국 교회의 멤버쉽 파워(membership power)는 과히 대단한 것이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매일기도 가이드로서 디자인되고, 표제명이 {세계 변화작전}(Operation World)으로 된 연감 제5판에 보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188개 교단, 37,985개 교회에 11,805,773명의 교인으로 성장했으며, 1992년까지 2,956명의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2000년대의 성장목표로 1992년 현재 전 인구의 27.1%의 기독교인의 수를 2000년대까지 전 인구의 약 50%가 그리스도에게로, 구체적으로 이천만명의 교인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 한 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 적어도 10,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로 볼 때, 한국 교회의 성장은 놀라운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일면으로는 이와 같은 양적 성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와 같은 교회성장에 대한 주관적인 시각적 평가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살펴보고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올바른 교회성장의 지표를 삼고자 한다.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긍정적 평가
한국 교회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체적으로 과거에 비하여 기독교의 차원에서 볼 때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구원받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으며, 국가적인 차원, 즉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차원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가 우선 양적인 면에서 성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교회사를 보면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 이후 초대 교회는 양적으로 급속히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2:41에 보면 오순절날 베드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여 신자가 된 사람이 그날에만 3,000여명이나 되었고(행 2:41),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하더라고 하였다(행 2:47). 초대 교회의 성장을 보더라도 우선 교회가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야 교인들에게 자극이 되어(encouraged) 신앙심이 불일듯 일어나서, 개인적 신앙의 성장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분위기(an integrated growth mood)를 조성할 수 있게 된다는 지론이다. 개척교회나 소형교회에서와 같이 교인수가 적은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본교회의 비성장 콤프렉스(non-growth complex)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심리적인 부담으로 인하여 교회성장의 의욕을 잃게 되고, 그러므로 개인의 신앙마저 자라기커녕 시험들기 쉬우므로 신앙이 약화(depression)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해야 성장의 상승 무드를 타고 교인들이 고무되어 자신의 신앙도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는 의욕과 자신이 생기므로 나가서 마음껏 전도할 수 있으나, 우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디프레스(depression) 상태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나가서 전도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기는커녕 시험에 들어 자신의 신앙마저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둘째로,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해야 계속적인 성장을 위한 성장의 힘(growing power)을 축적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2단계, 3단계의 성장을 위하여 도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축적된 성장의 힘, 즉 인력(men power or people power)과 재력(financial power)의 힘이 있어야 교회성장을 위한 도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힘이 약한 개척교회나 소형교회는 교회성장을 위한 과감한 프로젝트(project)를 수행할 수 없으므로 교회의 급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선 사람이 많아야 인재도 많기 때문에, 교회성장 전략을 위한 강력한 조직(dynamic system for church growth strategy)을 할 수 있고, 재정이 풍부해야 교회성장 전략을 위한 효과적인 프로그램(effective programs for church growth strategy)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질적으로도 성장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외형상으로 볼 때, 양적인 성장이 현저하다 보니까 그에 비하여 질적인 성장이 과소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성숙해 가고 있는 상태이므로, 한국 교회의 성장은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지론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평가할 때에 한국 교회가 우선 양적으로 급성장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와는 달리 이제까지 계속되어 온 성경공부는 물론 1980년대에 들어와서 제자훈련이 유행하여 질적 성장에서도 많은 진전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부정적 평가
한국 교회의 성장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한국 교회를 위한 좀더 바람직한 성장을 기대하는 뜻에서 제언한다고 조심스럽게 전제하고, 교회성장의 비복음적 요소들을 지적한다. 손봉호 박사는 한국 교회 성장의 부정적인 면을 두 가지 주요한 형태(types)로 집약하고 있다. 즉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교인의 수를 증가시켜야 되겠다는 지나친 열성과 대형교회 목회방법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생기는 부정적인 형태라고 분석하고, 현하 한국 교회의 성장의 긍정적인 측면은 우선 접어두고, 부정적인 측면을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촉구하고 있다.
(1)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양적 성장의 문제
첫째로, 신피타고라스 주의(Neo-Pythagoreanism)에의 오염을 지적했다. 이것은 영국의 유명한 경험철학자인 다비드 흄(David Hume)의 질(quality)보다 양(quantity)이나 혹은 수(number)를 더욱 중시하는 가치관의 재현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판단에서 나온 손봉호 박사의 말(his own word)이다. 그는 이러한 신피타고라스 주의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School of World Mission in Pasadena, California)에서 개발, 전파된 교회성장이라고 불리우는 신학적 유사학문(theological pseudo science called church growth)의 소개로 강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 기독교의 신피타고라스 주의가 경쟁과 성공의식의 민족성과 함께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만약에 교인의 수가 증가하지 않고, 헌금이 그들의 야심찬 예산에 달성되지 못하면, 목사는 교회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하도록 만들었고, 대부분의 교인들이 모든 다른 영적인 요소들, 즉 기도, 성경지식, 성숙, 일치된 신앙생활, 사랑 등등이 교인과 헌금의 증가에 의하여 표현된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숫자우상주의는 신피타고라스 주의의 영향이라고 한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다분히 샤만니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Shamanizing Christianity)라는 지적이다. 한국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샤만니즘의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서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심지어 불교와 유교는 물론, 기독교까지도 이 샤만니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샤만니즘의 영향이 비교적 현저하게 나타난 교회가 순복음중앙교회로서 교회성장을 바라는 한국 교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본질적이 아닌 선교 전략상 접촉점(point of contact)으로서 샤만니즘을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다고 부언했다. 이원설 박사도 구복신앙(求福信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샤만니즘이 기독교 안에 유입된 것이 문제라고 하였다.
셋째로, 이러한 샤만니즘 생활방식으로 교역자들의 권위주의를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즉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영향으로 교인들은 이차적 축복이라고 할 수 있는 지상축복에 매달리다 보니 육적 축복과 치유를 위한 샤만(shaman)이 필요했고 목사들이 이 샤만(shaman)노릇을 하기에 이르렀다는 판단이다. 샤만(shaman)의 절대적인 권위가 곧 목사의 권위로 탈바꿈하여 본래의 종교개혁 사상과 위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권위주의에 빠지고 말았다는 결론이다. 서광선 박사도 무속종교와 혼합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원설 박사는 유교의 영향으로 목사의 권위주의가 생겨났고, 재래의 무속종교의 영향으로 기독교가 샤만니즘에 오염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이 한국 교회의 건전한 성장에 장애가 되었다는 지론이다.
(2) 교회가 희생과 사회적 책임에 등한시하는 문제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자교회의 이기주의와, 사회를 위한 희생과 봉사정신이 희박한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복음이란 두 가지 역할, 즉 불신자에 대한 전도사역(witnessing)과 교육 (edification)에 의한 개인과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는 변화의 사역(transforming)이 균형(balance)있게 시행되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나서, 한국 교회는 단지 복음의 전달(the communication of the gospel)에만 강조하고, 문화나 사회의 교육(edification)과 변화(transforming)에 대해서는 등한시한다고 지적하고, 교인증가를 위한 자본주의적 경쟁심으로 남의 교인을 채가는(sheep snatching)식의 소위 양도둑의 방법(sheep stealing)을 사용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3) 교회사역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는 것이 문제
손박사가 위에서 제시 설명한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경쟁의식(capitalistic competition)으로 교회는 자유분방하기 때문에 교회와 교회 사이에 비윤리적인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경쟁심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친 경쟁심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첫째로, 이로 인하여 한국 교회에서 합법적인 이명증서 제도(the letter of membership transfer)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가 사라지므로 교회간의 질서와 윤리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수적 성장에 치우치기 때문에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위험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에 적절한 규범이 없는 것이 무수한 신학교의 난립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신학교가 많이 생기는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무인가 신학교에서 배출되는 목회자의 자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역자들의 질적 저하(質的低下)가 교인들의 신앙교육에 이(利) 보다 해(害)가 더 많다는 것이다. 손봉호 박사는 교회의 급성장이 가져오는 문제점으로, 첫째, 자격을 갖춘 교회 지도자들의 부족현상, 둘째, 성숙되지 못한 기독교의 이미지 문제, 셋째, 교인들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사명의식의 결여등을 들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은 복음전파의 근복적인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오로지 성장만을 추구하는 성장주의(成長主義)로 빗나가 버렸고 기복신앙(祈福信仰)과 권위주의(權威主義), 물량주의(物量主義)에 빠지게 된 것도 바로 이 성장주의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부정적인 시각이다.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객관적 평가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주관적 평가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로 엇갈리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 성장은 양면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하여 긍정적인 면(positive aspects)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부정적인 면(negative aspects)을 지적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 성장에 있어서 부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긍정적인 면이 대단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면에는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긍정적인 면, 교회 성장에 있어서 양적 즉 숫적 성장(quantitative or numerical growth)을 인정한다.
손봉호 박사는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크게 성장한데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숫적 성장은 굉장한 것으로 평가된다.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러한 성장에 대하여 불행하게 생각하거나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오순절 이후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해 갔던 때와 같이 숫적인 성장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아직도 국민의 다수가 믿지 않는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만일 교회가 숫적 증가를 중요한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건강치 못한 교회이다. 한국 내외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가지로 한국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한데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나는 급성장하고 있는 교회를 섬기고 있다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The numerical growth of the Korean churches is phenomenal by any estimation. No conscious Christian could be unhappy or unthankful for such growth. This is because the Bible speaks in a positive sense about numerical growth, as when believers grew in number after Pentecost(Acts 2:47). Quantitative church growth is an indispensable requirement for countries like Korea where the majority of the population is still unevangelized. If a church does not aim at increasing her membership as a major goal, she is not healthy. Like other Christians, both within and outside Korea, I am grateful to God for the numerical strength of the Korean church, and I am proud of serving a church which is also growing rapidl)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못지 않게 한국 교회 성장에 있어서 부정적인 면을 도외시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손봉호 박사의 지론인즉, "근본적인 자아비판과 개혁이 불원간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 교회들이 이미 얻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거나, 한국 기독교가 왜곡되어 우리 모두의 공이 헛되게 될까 매우 염려가 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Unless fundamental self-criticism and reformation take place very soon, I seriously fear that the Korean churches might lose all that they have gained or that Christianity in Korea may be so distorted that all our labors may be lose).
객관적으로 볼 때에, 한국 교회의 성장은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객관적 평가의 기준을 수학적인 표현으로 정립해 놓고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표현하면 좀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객관적인 평가기준을 수학공식(mathematic formula)으로 표시한다면, 교회의 "이상적인 성장"은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과의 관계를 등식(=)으로 나타내야 할 것이다. 고로, "이상적인 교회성장"은 [양적 성장=질적 성장]이라는 수학 공식으로 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양적 성장 우선론자들의 수학 공식은 어떻게 표시될 수 있을까? 물론, 긍정론자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평가는 [양적 성장>질적 성장]이라는 부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질적 성장의 결핍을 들어 양적 성장 우선론자들을 비판하는 한국 교회성장에 대한 부정론자들의 수학공식은 어떻게 표시될 수 있을까? 역시, 부정론자들의 한국 교회에 대한 평가는 [양적 성장<질적 성장]이라는 정반대 부등식으로 성립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전술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볼 때, 이상적인 교회성장의 완전한 등식을 성립시킬 수 있을까? 물론, 성립시킬 수 없다. 그 이유는 지상에서의 인간만사 모두가 완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까지도 지상에서는 완벽한 완성이란 기대할 수 없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completed kingdom of God)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과정(developing process)이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을 동안 모든 것의 완료형(perfect form)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진행형(progressive form),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래진행완료형(progressive future perfect form)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도 완료 진행형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context)에서 살펴 볼 때에, 교회성장은 수학철학의 차원(mathematic-philosophical dimension)에서 간단히 설명하면, 정(+)과 반(-)(plus thesis 과 minus antithesis)의 부등식(inequality)이 선후간에 교호적으로 작용하여 등식(equality)을 성립시키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성서신학적으로나(biblical-theologically), 실천신학적으로(practical-theologically) 보아도, 하나님의 교회성장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교호적(alternative)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교회의 교회성장 역시, 이러한 교호작용이 순환(rotation)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훈련으로 12명의 제자들을 통하여 질적 성장을 이루었고(행 1:12-14), 이들을 통하여 오순절 날에 대거 수천 명에 이르는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행 2:41). 다시 이 양적 성장은 각각 가정 교회(house church)들을 통하여 질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행 2:42-47). 이와 같이 교회성장은 [질적 성장→양적 성장], 또는 [양적 성장→질적 성장], 즉 양적 성장 질적 성장], 또는 [질적 성장 양적 성장]의 패턴(pattern)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때에는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보다 앞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qualitative growth goes after quantitative growth), 또 어떤 때는 양적 성장이 질적 성장보다 앞서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quantitative growth goes after qualitative growth).
근대의 한국 교회의 급성장은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수학공식으로 표시해 보면, [양적 성장>질적 성장]의 패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양적으로 급성장하다 보니까, 이에 따른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며, 질적 성장에 비하여 양적 성장이 대단하다 보니 거기에 따른 부작용(growing pain by side-effects)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부정론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 양적 성장(quantitative growth)이 먼저 일어나게 되고, 또 어떤 경우에 질적 성장(qualitative growth)이 먼저 일어나게 되는가? 그러나 그것은 교회성장 방법(strategy)에 따라 다르다. 양적 성장을 가져오는 전도방법은 대외 전도운동(outside-church evangelisms)이다. 대개 교회별로 전교회적인 대외전도 활동이나, 노회나, 총회, 그리고 교파를 초월한 초교파적인 연합 대전도운동(mass-evangelisms)이나 혹은 부흥성회(revival meetings)등을 통하여 양적인 성장이 일어나게 된다. 반면에 교회 내에서 교회교육(church education)이나, 교회의 그룹활동들(group activities) 특히,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과 같은 소그룹 프로그램들(small group programs)등 대내 교회활동(inside-church activities)을 통하여 질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전자와 같이 양적인 성장을 먼저 이룬 교회로 대표적인 교회가 서울 여의도 순복음 중앙교회이며, 후자와 같이 질적 성장을 먼저 이룬 교회로 대표적인 교회가 서울 강남구 서초동에 있는 사랑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 교회의 교회성장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선, 한국 교회 성장에 대한 평가를 수학공식으로 다시 표시해 보면, [긍정적 평가=양적 성장>질적 성장], [부정적 평가=양적 성장<질적 성장]이다. 사실, 이상적인 교회성장은 등식(=)으로 성립되어 [양적 성장=질적 성장]이 되어야 하지만, 전술한 바와 같이 지상에서는 완벽한 이상적 교회성장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이 최대한도로 균형(balance), 등식(=)을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인 교회성장의 과제이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한국 교회가 외형적, 즉 양적으로 크게 성장을 했다고 자만하거나 무사안일한 교회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양적 성장이 하나님의 축복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온전히 이상적인 성장에는 못미친 상태라는 사실이요, 둘째로, 앞으로 질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병들게 되어 종국에 가서는 쇠퇴하고(declining church)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가 되기 때문이다. 대개 대형교회로 양적 성장을 이룬 경우에 자만하여 소형교회를 무시하거나, 모든 것에 넉넉하다 하여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교인 모두가 함께 빠지기 쉬운 대형교회의 함정(pitfall)이다. 저자가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교회 정문에서 인사를 할 때였다. 한 낯선 교인이 다가 오더니 "저 서울 ××교회에서 왔습니다"라고 인사하는 태도에서 저자는 대형교인의 자만심(?) 같은 느낌(feeling)을 받고 입맛이 씁쓸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대형교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대이기 때문인지, 아마 자신이 큰 교회, 그것도 수도 서울에 있는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둘째로, 한국 교회가 양적으로 치우쳐 성장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든가,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아 비판으로만 일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선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고, 이제 부터라도 질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진지하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이란 양적 성장이 앞서는 경우도 있고, 질적 성장이 앞서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교회성장 그 자체를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높이 평가하는 자세로, 우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세와, 성장을 함께 기뻐하며 좀더 성숙하게 승화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다.
한국 교회 성장의 전망: 미래
(PERSPECTIVES OF KOREAN CHURCH GROWTH: FUTURE)
한국 교회는 그 성격이 어떻든 간에 급속도로, 그리고 크게 성장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볼 때에 양적인 성장은 물론, 질적으로도 많이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기대만큼 질적인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특히, 숫적으로는 세계의 어느 곳을 여행한다 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한국 교회를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물론 숫자 계산에 있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교인수의 계산이 상당히 과장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 내외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과장하면서까지 경쟁에만 급급하게 된다면 하나의 숫자놀음(numbers game)에 빠져들기 쉽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저자가 미국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 한국 교회 목사(부흥사)를 초청해서 부흥성회를 할 때 참석한 일이 있었다. 부흥사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 교인이 8,000여명이라고 소개했다. 얼마 후에 그 교회 모 집사님이 미국에 왔기에 물어 보았더니, 그 집사님 말씀에 모든 교인 전체를 합쳐야 1,500여명 된다고 귀띔해 주었다. 4-5배나 과장한 숫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긍정적으로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과장한 것 6,500여명은 제하고라도 1,500여명이라는 수로 교회를 성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미국 같으면 1,500여명의 교회도 그리 흔치 않은 것을 볼 때, 한국 교회는 참으로 크게 축복 받았다는 생각에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가 계속 성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선교의 주역을 맡을 수 있는 가능성(potential)을 가지고 있어서, 외국인들에게도 역시 자랑할 수 있으니 숫자놀음(numbers game)을 떠나서 가슴 뿌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 선교사나 목사들을 만나면 거침없이 한국 교회의 성장파워(growing power)를 자랑하곤 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들이 한국에 있다고...수천명에서부터 수만 명, 수십만명에 이르기까지 큰 교회들이 즐비하다고. 물론 이러한 숫자들은 세계교회 성장사상 기하학적 숫자라고 할 수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면도 있지만, 이것이 혼자만의 계산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되어, 교회성장 저서들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현재까지는 성장의 열매를 누리고 있지만,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것이 궁금하다. 한번은 저자가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의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Dr. C. Peter Wagner)와 약속을 하고 파사데나에 있는 풀러신학교 세계선교학과(Fuller's School of World Mission)안의 그의 사무실로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저자를 보자마자 한국의 M 박사와 L 박사가 자신의 제자들이라고 말하면서, 말문을 열기가 무섭게 "한국 교회의 성장은 멈췄다"(Korean church growth has stopped)고 잘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가 "멈췄다는 얘기입니까 침체됐다는 얘기입니까?"(You mean stopped or stagnated?)라고 반문하자, 그는 서슴치 않고 "멈췄다"(stopped)고 답변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저자는 그가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자의 감정(feeling)이나 그 말의 뉴앙스(nuance)로 볼 때에, 기분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저자로서는 한국 교회 성장의 미래에 대한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경제학상의 성장개념에 준해 볼 때, "침체됐다"(stagnated)는 말은 현재는 성장이 멈춘 상태로서 미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뉴앙스를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멈췄다"(stopped)라는 말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불투명성의 뉴앙스를 풍기고 있기 때문에, 저자에게 있어서는 "멈췄다"는 말이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었다.
과연 앞으로 한국 교회의 성장가능성(growth possibility)은 불투명한 것인가? 이 문제를 알기 위해서는 현하 한국 교회의 건강 상태를 정밀하게 진단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영육간의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해야 할 것이다. 과연 한국 교회는 건강한가?(Is Korean Church really in health?). 한국 교회의 건강상태는 이대로 좋은가?(Is the health condition of Korean Church satisfied as it is?). 아니면, 한국 교회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인가?(Or is Korean Church out of health?).
첫째로, 한국 교회는 현재로서 아직은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상태이다. 힘이 있는 상태라고 해서 완전 건강 상태라는 뜻은 아니다. 기능이 약화되어 있더라도 이미 축적된 힘을 어느 정도, 어느 기간까지는 발휘할 수 있다. 심지어 병든 상태라도 일시적인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마치 어느 레슬링 선수가 위암으로 병든 상태에서도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과 같이.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엄청난 축복으로 인하여, 특히 숫적으로, 물질적으로 성장된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한국 교회의 건강 상태에 적신호가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산업화로 인한 세속화 바람의 영향 때문이다.
둘째로, 한국 교회는 외형적 비만증에 걸려 있는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질적 성장에 비하여 양적 성장이 지나치게 발육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많은 것을 받아 먹기는 했지만 운동을 하지 않아서, 즉 에너지 발산을 하지 않아서 비만에 걸렸다는 판단이다. 비만은 만병의 원인이 된다. 비만한 사람은 활동도 못하고 그대로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다. 저자는 미국에서 몸무게가 1,600 파운드(720 kg)로 보통 성인 12사람을 합친 것과 같은 비만증 환자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꼼짝하지 못하고 소파에 기대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그가 나면서부터 비만증 환자였는가?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건강관리(health control), 즉 체중관리(weight control)를 잘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도 역시 체중관리에 소홀히 해서 비만증에 걸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피터 와그너 박사의 말을 들어보면, 사회봉사와 선교활동에 에너지 방출을 위한 과감한 투자에 인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사실, 미국의 개혁교단인 CRC(Christian Reform Church in North America)의 경우를 보면 900여 교회밖에 안되는 소교단으로서 교인들의 아낌없는 헌금으로, 총회예산이 대교단의 예산과 맞먹는 액수이며, 이 예산을 선교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나 교단총회 모두가 선교에 집중하고, 이웃을 위하여,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교회의 건강관리를 위하여 열심히 활동(운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 한국 교회는 병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만증은 그 자체가 심각한 상태는 아니지만, 어떤 의미에서 병들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비만증 환자는 오만가지 병을 다 가지고 있다고 어느 의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비만증을 치료하지 않는다면 병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국 교회도 비만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반드시 심각한 환자가 될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는 무슨 병에 걸려들고 있는가? 세속화병(secularization disease)에 걸려들고 있는 상태다. 세속화병이란 어떤 것인가? 육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로와지니까 영적인 신앙생활, 경건생활에서 멀어지고 세속생활에 물들어 가는 상태를 말한다. 야고보 선생은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라(keep yourself from being polluted by the world)고 경고했다. 세속화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선 교회생활, 신앙생활 보다 세상생활로 기울어지게 된다. 영적으로 둔해서 게으르거나, 아니면 세상생활에 바쁘다 보니 교회에 가는 시간, 교회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줄게 된다. 따라서 예배생활, 기도생활, 성경공부, 전도.봉사생활에 등한시하게 되어 영적 기갈 상태에 빠지게 된다. 한국 교회는 외형적(양적) 성장에만 치우쳐 영적으로 병들어 가며 쇠약해지고 있다.
한국 교회는 과거 줄기차게 성장할 때에 비하여 영적으로 모든 것이 둔화된 상태이다. 출석수도 줄어든다. 기도도 약화되었다. 은혜의 잔치, 천국잔치라고 할 수 있는 부흥성회(revival meetings)도 사라져 간다. 전도열도 식어져 가고 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찾을 것 없이 전문가라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병이 들면 기도할 것 없이 병원으로 직행한다. 결국 교회는 할 일이 없어지고, 쇠약해지고, 무력해진다. 이처럼 세속화병이란 교회를 병들게 하는 무서운 병이다. 물론, 모든 개교회(local church)가 다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에 거대한 한국 교회의 성장 물줄기(a mighty river of Korean church)가 약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넷째로, 한국 교회가 세속화로 병들어 가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이는 한 마디로 현대문명의 산업화 현상(industrialization) 때문이다. 5.16 혁명을 기점으로 한국은 경제혁명이 시작되어, 선진국의 산업화를 향하여 경제개발의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경제가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 교회도 이에 발맞춰 급성장하는 커다란 교회성장의 강물줄기(church growth, a mighty river)를 형성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성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산업화가 교회성장의 동반자 노릇만 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교회성장을 둔화시키는 아편을 제공해 주어 교회가 세속화에 마취되어 서서히 잠들어 가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에, 롯이 삼촌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 다닐 때에는 유목민 생활에 좀 고달프기는 했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신앙에 있어서 상승 상태에 있었고, 이에 따라 물질의 축복도 풍성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욕에 끌려 그 당시에는 더욱 문명이 찬란히 빛났고 문화생활의 극치로 하나님의 동산 같았던 소돔성에 들어간 후, 점차 세속화되어 감을 볼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창 13장, 14장, 18장, 19장 참조). 이와같이 인간은 산업화된 문화생활의 은근한 유혹 때문에 세속화병의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세속화 병의 증세는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기분 좋게 신경을 흥분시키고, 그 후에 신경을 마비시켜서 영적 감각을 둔화시키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음성(말씀)을 들을 수 없게 되어서 마침내 사망의 잠에 빠지게 된다(시 13:3, Barna, George의 The Flog in the Kettle을 참조). 이러한 의미에서 세속화병의 증상은 마치 처음에는 기분 좋게 흥분시키다가 나중에는 중독되어, 거기서 빠져 나오기 힘든 마약에 빠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교회도 세속화에 빠지게 되면 회복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결국 교회는 점점 침체되어 가고, 성장이 둔화될 뿐만 아니라 병들어 죽어가게 될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도 이와 같이 심각한 세속화병(secularization disease)에 전염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장래는 어떠한 추세로 갈 것이며,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이것은 현하 한국 교회를 향한 긴요하고 중대한 질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이제부터는 한국 교회가 미래를 향한 "교회성장의 안목"(church growth eyes)을 가지고 대비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 교회는 모든 면에 있어서 개혁되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복음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란 부단히 개혁하고 발전해 나가야 한다. 특히 교회성장을 위하여 개혁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중세 교회와 같은 운명에,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어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세속화되어(secularized) 쇠퇴해가고 죽어가는(dying) 서구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첫째로, 현 한국 교회(Korean Church)는 서구 교회(Western Church)의 전철을 밟아 가고 있다. 서구(Western)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Oriental) 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모든 면에서 오래 전부터 선진화(developed) 되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볼 때, 서구는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그리고 풍부하게 누려 왔다. 그들은 일찍부터 민주화(democratization)로 정치구조나(political system), 사회구조(social system), 그리고 국민생활(national life)이 선진화되었고, 경제가 개발되어 풍요로울 뿐 아니라, 종교적인 면에서 훌륭한 기독교 문화생활(Christian cultural life)을 누려 왔다. 이러한 일련의 선진화의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곧 기독교의 영향이라 하겠다. 좀더 신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라 하겠다. 물론, 한국 교회가 육신적(肉身的)인 축복에 치우쳐 있다고 해서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의 오해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서구 교회들은 어떤 상태인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교회들이 퇴보되었거나, 많은 교회들이 죽어서 없어져 갔다. 다시 말하면,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은 상태이다.
예를 들어, 죤 낙스(John Knox)가 종교개혁을 주창한 영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영국에서 세계적인 대 설교가로서 파워 미니스트리(power ministry)를 구사했던 스펄젼 목사(Rev. Charles H. Spurgeon)가 시무할 당시에는 6,000여명에 이르렀던 메트로폴리탄 교회(Metroplitan Tabernacle)가 오늘날에 와서는 100여명 미만 교회로 퇴보된 사실을 들 수 있다. 통계로 볼 때, 교회 성장율은 1993년에 -1.1% (minus 1.1%)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 심각한 상태라고 전한다.
루터가(Martin Luther)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독일의 경우를 보면, 교세가 강력했던 나라가 이제 와서는 대단히 약화되었으며, 더구나 통독이 되었지만, 동독 국민들 중에 69%이상이 교회에 전혀 관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면 칼빈(John Calvin)이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스위스는 어떠한가? 교회성장율(church growth rate) 2%미만을 기록하고 있지만 역시 인구증가율(population increase) 3.3%를 감안할 때,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minus growth)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의 대표적인 교회가 미국 교회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역시 초창기 청교도 신앙(puritan faith)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오늘날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왕성하여 세계 도처에 선교사들을 파송, 세계복음화의 절대적인 기수가 되었던 미국의 교회는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가? 교회성장율이 0.3%라고는 하지만, 이 숫치는 인구 증가율 0.71%와 소수민족 (minority) 교회의 급성장 등을 감안할 때, 역시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가시적으로, 많은 교회들이 교인들의 심각한 감소로 파산(bankruptcy)선고를 내고 교회문을 닫아 버리는 경우들을 볼 수 있다. 현재 미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중에 85%가 쇠퇴하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만큼 기독교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나라는 없다. 그런데, 미국 교계에서 유명한 바르나 리서취 그룹(Barna Research Group)의 창설자인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그의 리서취 그룹의 통계를 통하여 미국 교회가 1980년과 1990년 사이에 9개의 대 교단들 중에서 남침례회의 교단(Southern Baptist Convention)과 하나님의 성회(Assembly of God)등 2개의 교단을 제외하고 7개 교단이 마이너스 성장으로 완전히 사양길(declined)로 들어섰다고 평가했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미국 대부분의 주류 교단들의 교인들이 사양길에 들어선다는 경고를 발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지난 10여년(1971-1981)동안 미국에 있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America)가 10%, 연합 감리교회(the United Methodist Church)가 10%, 연합 그리스도교회(the United Church of Christ)가 11%, 성공회(the Episcopal Church)가 15%, 그리스도 제자교회(the Disciples of Christ)가 17%, 그리고 연합장로교회(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가 21%가 감소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저자는 미국 어느 식당에서, 가까운 미국 목사(Rev. Bob Emerson, senior pastor of the Westminster Christian Assembly located in the City of Westminster, California)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인즉, 근래에 와서는 교회까지 정부의 사찰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 의회나 행정부에서 그리스챤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재정 문제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재정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했는지 사찰하고, 감사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과거에는 그토록 강력했던 기독교회가 오늘에 와서는 영향력을 잃고, 병들어 죽어 가고 있으니(dying)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 한국 교회는 어떠한가? 한명수 목사는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간 교회 숫자가 5,011개 교회에서 53,869개 교회로 61%나 증가했고, 전체 교인수가 623,072명에서 10,312,813명으로 1,555% 급성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60년대의 교인수가 연평균 41%에서 70년대에 12.5%, 80년대에 4.4%, 90년대에는 0.3%로 급속도로 저하되었다고 분석하고, 한국적 종교개혁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그런데 1995년 현재는 침체상태이며, 더욱 심각하게 보는 사람들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고 주장한다. 하여튼, 교회의 성장이 정체상태(stagnant state)에 있고, 게다가 매년 감소되는 현상(decrease appearance)을 보이는 것도 심각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를 병들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 되는 교회와 교인들 신앙의 세속화의 문제이다. 신학적이며(theological), 이론적인 세속화(theoretical secularization)의 영향은 신학자들이나 일부 크리스챤에게만 영향을 미치지만, 실제적 세속화(practical secularization)는 신학적이며, 이론적인 세속화와는 달리 교회 전반에 걸쳐 파고 들어가기 때문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실제적인 세속화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서구 교회인 미국 교회 역시, 산업화 물결의 영향(impact of the industrialization wave)으로 몰아 닥친 세속화의 한파로 교회들이 냉각되어, 18,9세기에 몇 번에 걸쳐 대각성 운동들(the Great Awakening movements)이 일어났고, 일부에서는 오순절/카리스마 운동(Pentecostal/charismatic movements)이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얼어 죽어 가는 현상을 초래했던 것이다. 산업화 생활 속에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가 힘들다. 산업사회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교회에 갈 시간을 놓치게 되고, 신앙생활의 여유를 얻지 못하여 영혼이 메말라진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예배시간이 조정되고, 예배형태와 방식이 변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산업화의 발걸음에 맞추기 위한 작업이라 하겠다. 피곤하니 새벽기도에 나가지 못하고, 수요예배는 물론, 주일 저녁예배 까지 없어지는 형편이다. 명맥이라도 유지해 보자는 계산으로 저녁예배를 오후예배로 대체한다. 물론 예배시간의 절대 고수를 이야기하는 뜻이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속화로 가는 지름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날 아무 시간에나 한번 교회에 나가서 형식상으로 예배나 드리면 주일을 성수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교회가는 것도 힘들어 집이나 직장에서 텔레비젼 앞에서 예배드린다. 더 나가서 부흥성회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편이며, 설령 부흥성회를 열어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현상, 즉 주일 낮예배의 반정도 참석할 뿐이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속화에 물들고 있다는 심각한 현상이다. 물론, 서구식 생활방식(Western life style)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크리스챤의 생활은 어떠한가? 역시 세속화에 오리엔트 (secularization-oriented)되어 가고 있다. 크리스챤의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향기(the aroma of Christ: 고후 2:15)가 거의 나지 않는다. 모든 상황을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세속화 방식으로 처리해 버린다. 의의 옷을 입고(욥 29:14, 시 132:9) 정의를 하수같이 흘려야 할 크리스챤(암 5:24)이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끄는 생활을 거침없이 하고 있으니(사 5:18), 자신은 물론,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육신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다 보니, 경건생활(devotional life)에서 멀어지고,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 메마르다 못해 병들어 죽어 가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
이러한 상태에 이른 한국 교회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 개혁되지 아니하는 한, 틀림없이 서구 교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사실, 이러한 추세는 비록 종교적, 신앙적 추세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볼 때,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들은 민주화에 있어서 선진국의 뒤를 밟게 마련이다. 요사이 지방 자치제나, 경제구조, 즉 산업화(공업화, 상업화, 금융화 등), 그리고 과학에 있어서 모든 첨단과학의 선진국의 발자취를 먼저 찾아 밟아 나가고 있으며, 이제 와서는 경제의 "제삼의 물결"(third wave)로 등장한 정보화 산업에 혈안이 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선진국의 전철을 밟고 있는 증거들이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모든 분야에 선진국의 뒤를 밟아 나가다 보니 역시 모든 부분에 현대화된 사회 속에서 교회 역시 선진국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 교회와 같이 거대한 서구의 현대문명 앞에서 맥없이 쇠퇴해서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가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한국 교회 역시 앞으로 어떠한 변화가 없는 한, 미국 교회와 같이 죽어가는 교회의 운명을 맞게 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사실, 쇠퇴하는 교회(declining church)!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 생각만 해도 걱정이 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한국 교회는 어떠한 대안(alternatives)을 가지고 있는가? 물론 있다. 우선, 쇠퇴해 가고 죽어 가는 미국 교회들 속에서도, 비온 뒤에 쑥쑥 자라나는 대나무와 같이 급성장하는 교회들(stella growing churches), 황폐한 사막에서 굽힐 줄 모르고 버티어 살아 남는 선인장과 같이 꾸준히 성장을 계속하는 교회들(continually growing churches)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 한국 교회들이 주시해야 할 귀감교회들(model churches)이다.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미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고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다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며, 아직도 수천의 교회가 교회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숫자에 있어서 1990년대에도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둘째로, 쇠퇴해가고, 죽어가는 교회를 살리고,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다루기 전에, 과거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들을 다시 한번 스크린(screen)해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성장요인들을 부활(revival)시키는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안은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구태의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것이든 강력한 방법을 구사하지 않으면 교회성장을 회복시키거나 최소한 세속화되어 죽어 가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과거 한국 교회의 성장요인들 중에서 객관적 요인들은 이미 시대에 걸맞지 않는 구태의연한 것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 주관적 요인들은 어떠한가? 앞의 주관적 방법들 중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Nevius method)의 3자방법(자전, 자치 자립)도 역시, 한국 교회에서 이미 성취된, 시대에 걸맞지 않는 방법으로, 효과적이고 성숙한 방법이 아니다. 부흥회나 기도원 운동을 통한 교회성장 방법도 역시 상당히 성숙한, 그리고 대부분이 개인적, 개교회적 신앙생활 방식(individual, local church faith-life style)으로 성숙해 있고, 더구나 심각한 것은 세속화의 영향으로 인하여, 우선 부흥집회에 "모이게"(gathering) 하는 것부터가 힘들게 되었다. 그러므로, 단순히, 어떠한 대외적으로 기독교의 힘(Christian power)을 과시하기 위하여 맘모스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기독교의 외형적인 위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것은 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순수한 전도운동(Puritan evangelical crusade)을 기대하기
는 어려울 것이다. 그 외의 교회성장 요소들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한 교회성장을 위한 재도약은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한국 교회도 교회성장을 위한 재도약의 방법은 성서와 신학적 기초 하에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방법을 무리 없이 현대화시켜서 시도해야 할 것이다.
셋째, 침체되거나 사양길로 가고 있는 한국 교회를 활성화시켜서, 계속적인 교회성장에로 재 도약하게 하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할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교회들의 목회방법으로 채용해온 있는 "평신도 비활동 구조"(passive sheep structure)를 실제로 과감하게 개혁함(reform)으로써 오로지 "목회자 활동구조"(pastor-active structure)의 잘못된 목회방식(ministry pattern)을 뛰어 넘어, 평신도의 자원(the inexhaustible resources of the laity)을 충분히 활용하는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을 이용하는 목회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평신도는 봉사를 받기만 하고, 피동적으로 따를 뿐, 오직 목회자만이 능동적으로 뛰어야만 된다는, 그래서 교회성장의 책임을 오로지 목회자가 져야 한다는 식의, 비성서적이며, 잘못된 교회활동 구조인 "목회자 활동구조 평신도 비활동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가 평신도들에게는 물론, 목회자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대단히 많은 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잘못된 "평신도 의식구조"(sheepfold mentality)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교인들만 어루만져 주고, 비위를 맞추어 주어야 하므로, 교인을 상전으로만 모셔야 하는 애로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신앙은 물론, 교회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홀리스 엘 그린(Hollis L. Green)은 대부분의 개교회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러한 관념이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특히, 모든 면에 있어서 전문화 되어 있는 현대 교회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 structure)에서"목회자/평신도 공동사역 구조"(pastor/laity-coworker structure)에로 과감하게 전환시켜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을 위하여는 두 가지 내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세 가지 근본적인 교회성장의 요소가 효과적으로 작용해야 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첫째는, 목회자들의 자기개발을 위한 각성이며, 둘째는, 평신도들의 활용이며, 셋째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의 개발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하모니를 이루어 활용될 때에, 교회성장은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철두철미한 사명의식과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의 노력, 그리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통한 "평신도 사역"(lay ministry)만이 현대 교회 성장을 보장할 수 있는 지름길(short-cut)이 될 것이다. 피터 와그너는 "성장하는 교회의 제1의 중요한 싸인(the first vital sign)은 교회성장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목사"요, 두번째로 중요한 싸인(sign)으로는 잘 훈련되어 잘 "동원된 평신도"(well-mobilized laity)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에 대해 요약해서 말하면, 목회자의 강단(preaching)을 강화시키고, 반면에 평신도훈련(laity training)을 통한 소그룹운동(small group movement)을 효과적으로 전개시켜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 성장의 전략과 방법론
(STRATEGY AND METHODOLOGY
FOR THE GROWTH OF KOREAN CHURCH)
피터 와그너는 현대, 특히 1980년대 이후의 기독교회의 복음운동에 관하여, 선교 및 목회적 차원에서 볼 때, "제3의 물결"(the third-wave)의 시대(generation)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회사적으로 살펴볼 때,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이후로, 복음운동(Evangelism movement)이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오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Reformation)을 기점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Protestant church)는 오직 성경말씀 중심의 복음주의(Biblical evangelicalism)를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해 왔다. 19세기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능력의 바람"(new spiritual power storm)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새로운 성령의 역사(new spiritual event)로, 세계를 복음화시키기 위한 제이의 오순절 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순절이라고 해서 원초적인 의미의 오순절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에 따르면, 1900년 초에 성령을 통한 복음운동으로 제1의 물결(first wave)인 "오순절 운동"(Petecostal movement)이 일어났고, 1960년대 부터 "제2의 물결인"(second wave)인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 성황하게 되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 와서는 "제3의 물결"(third wave)인 "복음주의 성령운동"(new Spiritual movement in the evangelicalsm)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고 분석했다. 물론, 그의 교회성장론이 일부에 의하여 타협주의니, 실용주의니 하는 비판도 받고 있는 가운데, 이와 같은 오순절 운동과 은사운동을 복음주의 안으로 도입하려는 시도에는 신학적으로 복음주의자들에 의하여 비판의 소지가 있는 착상이라고 생각되나, 그는 많은 복음주의 내지, 복음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견해에 상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 성경이 특별은사의 종막을 말하지 않았으며, (2) 많은 교회가 이와 같은 특별은사의 부족으로 약화되어 빈혈증에 걸리고 있고, (3) 현대 교회들의 경험으로 보아서, 이러한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제3의 운동을 좋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교리적인, 신학적인 이슈는 접어두고, 순수하게 복음전파운동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자는 의미에서, "제3의 물결 운동"(third wave movement)은 교회성장을 위한 바람직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현대목회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나 목회방법을 가지고는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때 그 시대를 따라 합당하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셨다(히 1:1,2). 우리 한국에서도 1907년을 기점으로 오순절의 성령운동을 통하여 교회부흥운동이 일어나 계속되었고, 1960년대에 와서 은사운동이 성행했으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성 복음주의 교회들도 대부분이 이 영성운동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과거에는 성령운동이나 은사운동은 이단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던 기성교회들이 오늘날에는 이 운동들을 수용하게 되어, 어느 교회에서나 영성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영성운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오순절운동이나 은사운동에 치우쳐서 교인의 신앙이나 교회가 불건전하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하고싶어도 되지 않아서 그대로 힘없는 교회로 남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다행한 것은, 영성운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예 이해하려들지도 않는 전근대적인 아집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거의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교회도 많이 변한것 같다. 좋게 말하면 개혁된 면이라고 볼수 있다. 1960년대 이전에는 통성기도하고 손뼉만 쳐도 이단으로 몰아 부치고, 이로 인하여 성령의 은혜를 말하면, 이단으로 몰려 교회안에서 소외되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현대에는 오히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면, 교회에서 위축되다시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더구나 성령의 은사를 받아가지고 있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에, 현대 교회를 담당한 목회자들은 "제1의 물결"(first wave)만 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성서적, 복음적인 신앙체계가 없이 "성령의 능력만 믿습니다" 해가지고는 현대 목회를 하는데 역부족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믿습니다"는 목회자들 보다도 더 잘하는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 교회를 담당한 목회자들은 "제2의 물결"(second wave)만 타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말씀의 체계와 말씀의 능력이 없이는, 역시 현대 교회를 리드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적은사로 병고치는 능력(healing power) 같은 것은 목회자들 보다도 더 강한 평신도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두 물결을 포용한 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성령의 강한 역사를 통하여 내적으로 외적으로, 영육간에 병든 현대 교회를 치유하고, 양육(follow-up-equipping)시킬 뿐만 아니라, 내일의 비젼은 물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교회 목회자들은 "현대"라는 큰 대양에서 "제3의 파도"(the third wave)를 매우 능숙하게 탈 줄 아는 "서핑선수"(excellent surfer)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목회를 위한 복음의 진수를 효과있게 제공할 수 있는 "말씀의 종"과 영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필요한 "영적 은사"(spiritual gifts)를 구사할 수 있는 "영력있는 종"이 되지 않으면 더구나 차세대 교회를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세대에 한국 교회적 상황에서, 사양길로 쇠퇴하여(decreasing or declining) 죽어가는(dying) 교회를 어떻게 치유하며 살려서, 성장하는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미 결론으로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다른 교단, 다른 교회보다는 자기의 개교회의 문제가 급급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어떻게 자기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How can our church grow?) 하는 것이 최대의 관심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를 평가하다 보니 진단으로 인한 부정적인 면만이 부각된 인상으로 기분좋은 일만은 아니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내일의 한국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유도하기 위하여 좀 냉철할 필요가 있으며, 이러한 객관적인 자가진단을 통하여 희망찬 한국 교회의 내일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란 하나님의 손길에 인도함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만 정신차리고 하나님앞에 성실하기만 하면 내일의 더 큰 성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줄기차게 흘러왔던 한국 교회의 거대한 성장물줄기(Korean Church, the mighty river)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가늘어진 것이 통계상으로도 확실하기 때문,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과 같은 성장의 물줄기를 다시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이에 적절한 처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대다수가 쇠퇴해가고 있는 미국 교회들 가운데서도 줄기차게 성장하는 교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조금만 정신차리고 그 대안을 찾아 처방만 하면 밝은 미래를 보게 될 것이라는 교훈을 준다.
이러한 질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교회성장 연구에 공헌한 사람중에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교회성장의 이론적인 면에 있어서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터 와그너 박사(C. Peter Wagner)로서, 그의 선교 현장(mission field)과 목회 현장(ministry field)의 충분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교회성장의 원리와 전략(principles and strategies for church growth)을 학문적으로 수립했다. 그는 "우리교회가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위의 질문에 대하여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교회도 성장할 수 있다}(Your church can grow)라는 책을 써서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리고 시카고의 시무하던 교회에서 단지 300달라를 받아 가지고 캘리포니아 가든 그로브(Garden Grove)로 와서 지금의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이룩해 놓은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는 실제 개척교회에서 대교회로 성장시킨 경험과 그의 적극적이며 긍정적 사고방식의 목회철학(possibility thingking-philosophical concept of ministry)을 바탕으로, 낙심하고 쳐저있는 목회자들을 위하여 {성공은 결코 끝이 없으며, 실패도 결코 끝이 아니다}(Success is never ending, falure is never final)라는 책자을 통해서 목회자들을 격려하여 용기를 주고, {당신의 교회도 환상적인 미래가 있다}(Your church has a fantastic future)라는 책을 써서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에 대한 안목(church growth eyes)을 가지고 교회성장에 대한 비젼(church growth vision)을 내다보며서 {당신의 교회도 실제적인 가능성이 있다}(Your church has real posobilities!)라는 좋은 책을 통하여 목회자들이 교회성장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로버트 슐러는 손에 가진 것도 하나 없이 오로지 "아이디어"(ideas) 하나만 가지고 교회 개척을 시도했다.
그는 시카고(Chicago)에서 가든 그로브로 이사하는 도중에 자문자답했다. "너는 돈이 필요없지 않느냐. 네가 필요한 것은 아이디어야. 만일 네가 좋은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돈을 얻을 수 있을 거야"(You don't need money, he said. What you need ideas. If you have the right ideas, you will get the money you need).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성령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교회성장의 아이디어"(church growth ideas), 교회성장의 가능성을 꿰뚤러 볼 수 있는 통찰력(church growth insight), 즉 자기교회의 성장을 내다볼 수 있는 교회성장의 안목(church growth eyes)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교회성장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물론 기도하면서 성령을 통하여 얻을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구체적인 아이디어(incarnational ideas)는 이론적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들(studies)과 워크샵을 통한 실습(practice through workshops)에서 얻을 수 있다. 목회자 자신의 자제생활(self-control)과 부단한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이 주제들에 관하여는 저자가 별도로 준비한 목회자 세미나를 위한 {목회자의 자기개발} 프로그램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다만, 한국 교회 교회성장을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1) 목회자의 개혁과(Reformation of pastor), (2) 목회 방법론의 개혁(Reformation of the methodology of ministry)이 근본적인 해결책임을 밝힘과 동시에, 함께 연구하고 실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목회자 자신의 개혁
목회자는 자기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각성하고, 부단히 자기개발(self-development)에 힘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항상 묵상(meditation)하시고, 기도하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막 1:35, 눅 5:16, 6:12, 11:1). 특히, 현대와 같이 목장(pasture: ministry field)이 광대하고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목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가려면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상황에 충분히 대처해나갈 수 있는 인격적 감화력과, 지적 감화력, 그리고 영적 감화력을 얻기 위하여 자기개발에 부단히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 목회자는 시대감각이 있어야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지만, 그 진리의 표현방식(表現方式)과 실천양식(實踐樣式)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하다(히 1:1,2).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원리에 있어서 진리의 유일성(unity of truth in methodology)과 그리고 방법론에 있어서 진리의 다양성(diversity of truth in methodology)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현대적인 의미로 설명하자면, 진리의 문화적인 표현(cultural expression of truth)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표현방식도 지엽적인 것은 문화적 배경(cultural differences)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성경말씀의 근본적인 근간교리(doctrinal basis)는 문화적인 차원을 넘어서 불변성이다. 다만,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문화적인 표현은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시대적, 범세계적 기독교회를 우리나라 기독교의 표현방식의 틀에 잡아넣고, 고루한 아집을 벗어나지 못하는 편협한 사고방식(narrow-mind)을 떨쳐 버리지 못하면 현시대의 세계적인 기독교의 복음운동의 "제3의 파도"(third wave)를 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대에 걸맞지 않는 전근대적인 목회방식 때문에,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시대를 빨리 파악하여 성서적인 기초하에 시대에 걸맞는 목회, 즉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는 목회(마 24:45)로 충실해야 한다.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비성서적이 아닌한, 시대에 걸맞는 목회방법을 남보다 빨리 도입하여 개발해가지고 실천한 목회자들이 교회를 성장시킨 사례를 많이 볼수 있다.
둘째, 목회자는 인간적(유교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목회자는 교회의 교인들을 리드할 수 있는 영적 지도력(spiritual leadership)의 원천인 영적 권위(spritual authority)가 있어야 한다. 이 영적 권위는 위에서 부터 오는 것이고, 그 권위를 잘 관리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목회자의 권위(pastoral authority)를 목회자 자신이 잘 관리하지 못하여 상실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권위(God's authority)와 무관하게 자기가 멋대로 세우려고 하는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로 인하여 교회성장에 지장을 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경우가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본의 아니게 교회성장을 막는 저해요소(church growth barriers)가 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 권위주의로 인하여, 평신도들을 자기의 목회의 세계관 속에 가두어 놓고, 목회에 관한 모든 것을 강요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써비스 받아야 할 메시지(words of God)를 통하여 죄로, 또는 세상에서 상처입고 괴로워하는 양들이 위로받고, 치료받기 보다는 더욱 깊은 상처를 받도록 강요되는 권위주의적, 설교는 물론, 헌금을 비롯한 모든 교회생활에 있어서 자원봉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요하는 식의 권위주의적 목회방식은, 더구나 현대 목회에 걸맞지 않기 때문에 빨리 고쳐야 할 것이다. 이 권위주의의 부작용(side-effect)로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들의 멘탈리티(ministerial memtality)가 왜곡되어 대립과 분쟁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다. 미국과 같은 서구 교회들(Western churches)은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고방식(mentality)이 별로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로 인한 분쟁을 볼 수가 없다. 물론 한국 교회의 권위주의는 유교에서 유입된 것으로서, 수직적인 종속관계(vertical subordinate relationship)를 강조하는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 수직적 종속관계는 올바른 권위를 통하여 수립되는 것이지, 무조건적 강요식의 권위주위로 수립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교회에서, 특히 현대 교회에서 영권(靈權)을 빙자하여 파쇼(facio, facism)식으로 목회를 하게 되면 무리가 일어나며,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머리(brain)로만 하는 목회는 피곤하며, 덕이 없이 하는 목회는 존경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교인들이 따르지 않아 고전하게 된다. 목회는 머리로 하는 것 보다 가슴으로 사랑의 덕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 교회(contemporary church)의 목회자들(ministers)은 공(公)히 영적 감화력(spiritual touch)을 통하여 강단의 권위(authority of pulpit)를 세우고, 또 지적 감화력(intellectual understanding)을 통하여 현대 교인들을 교육, 이해로 유도하며, 인격적 감화력(moral influence of personality)을 통하여 크리스챤 생활에 본이 되고 존경받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감화력을 통하여 초대 교회와 같이 서로서로 아낌없이 바치며(행 2:35, 4:32-35), 함께 사역(co-working)하고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마 25:23) 목회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셋째, 목회자는 유아독존적 독선으로 독주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목회자나 평신도가, 목회는 평신도가 아니라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tality)가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들 머리속에 오리엔트되어(oriented)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사역을 전유물로 착각하여 "목회에 관한한 모든 것은 전문가인 내가 알지 누가 알겠느냐? 그런고로 내가 하는대로 무조건 순종하라"는 식의 독선으로 독주하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독선에 의하여, 독주하게 되면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리(?)는 누릴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게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교회의 모든 짐을 목회자 혼자 져야하기 때문에, 아주 지쳐서 번아웃(burn-out)되어서 장수 목회(long-run ministry)가 불가능하게 되고, 둘째로, 더 많은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셋째로, 그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목회자 혼자서 져야 된다는 심각한 문제를 안게되는 것이다. 모세(Moses)도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문제를 혼자 담당하다가, 지쳐서 번아웃 될뻔 했을 때,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advice)에 따라 십부장(rulers of tens), 오십부장(rulers of fifties), 백부장(rulers of hundreds), 그리고 천부장(rulers of thousands)을 통한 분담목회(sharing ministry)의 방식을 도입하여 백성들을 무리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출 18:18).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목사가 같은 교회에서 장기 목회(long-term ministry)를 하기가 어렵게 되거나, 건강을 해쳐서 일찍 은퇴(retire)하고, 장수 목회(long-run ministry)를 할 수 없게 되는 사례들이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우에 교회의 모든 일의 책임, 더 나가서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책임도 목회자 혼자서 져야 하는 외로운 처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교인들이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는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목회자에게 돌리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들과 함께 뛰지 않고 목회자 혼자 독주했으니,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도 목회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논리이다. 목회자 보고 책임지라는 뜻이다. 물론, 교회성장의 일차적인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다. 왜냐하며 교회성장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의 리더쉽(leasdership)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목회자만의 원-맨쇼(one-man show)의 극장(studio)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와 함께, 함께 사역하고(co-working), 함께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주님께서 직접 마련해주신 반석위의 교회(마 16:18)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된다. 결론적으로, 목회사역은 목회자나 평신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월권하지 않고 각각 자기의 맡은바 직분에 충실할 때 성장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분명히 그어진 구별선을 무질서하게 넘나드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성할 때에 교회는 은혜롭게 성장해나간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의 훌륭한 리더쉽(leadership)과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co-operation)을 요한다는 뜻이다.
목회자의 목회 방법론의 개혁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cke)는 현대 교회의 고민이 바로 "평신도가 없는 설교"(church without laypeople), "교회없는 신학"(theology without church), 그리고 "신학이 없는 교회"(church without theology)라는 위기(crisis)에 직면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여기에서 한 마디로 설교와 더불어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뜻을 알만하다. 목회방식에서 구습을 답습하거나 변화가 없을 때에 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교회와 목회방식이 개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우(Reuel L. Howe)는 삶의 변화는 삶이 부딛치는 형식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진리가 제시되고 삶의 의미들이 만나질 수만 있다면, 교회의 목회형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업기술(technology)의 폭발적인 발전으로 사회와 개개인의 생활이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에, 교회도 예외로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고로 프로테스탄트 교회 개혁자들(Protestant church reformers)은 교회개혁(Reformation)에 있어서 "현재완료진행형"(progressive present perfect form)을 강조한다. "교회는 개혁되었다, 계속해서 개혁되어져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quia reforma).
목회방법의 개혁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다만 (1) 강단의 개혁(preaching), (2) 평신도의 사역(lay ministry), (3) 프로그램의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로 나누어 살펴 보고져 한다. 이 세 가지 면에서 개혁되어야만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먹이라"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마 24:25, 고후 6:2) 강단이 개혁되어야 하며, 주님의 목회방법과 사도들의 전통등 성서적 목회방법인 평신도 사역을 보편화하며, 현대 교회에 있어서는 특히 시대에 걸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해야 한다.
(1) 강단(설교)의 개혁
시대와 사람과 삶의 현장의 변화에 따라 교회에서도 목회자들의 메시지 내용과 전달방법을 현대적인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본질의 변화없이 현대적인 표현과 현대적인 언어로 전달방법을 개발해나가야 한다.
첫째, 강단의 개혁은 먼저 설교내용에서 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론,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말씀을 이탈하거나 복음의 핵심을 잡지 못하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헤메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게 된다. 물론, 그 이유는 설교학(homiletics)의 연구를 무시하거나, 성경, 더 나가서는 신학적 지식(theological understanding)의 빈곤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학적, 설교학적 지식이 풍부하거나, 성경적 기초(biblical basis)가 튼튼하면서 은혜롭게 설교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저자가 말하고져 하는 것은 신학적 지식을 떠나서 순수하게 하나님의 주신 은혜 가운데, 받은 복음을 변질시킴이 없이 쉽게 전하면 된다는 뜻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성경지식 이상으로 전하려 할때, 설교가 비성서적 내지 비복음적인 메시지가 되기 쉬운 것이다. 오히려 성경을 그대로 전하면 염려없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 중에 설교 본문의 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하다 보면, 자기 소리만 늘어놓다 말게 된다. 더 나가서 이상한 소리까지 하게되어 교인들의 신앙사상에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오늘날 성경해석학(hermenutics)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여, 아무 해석법이나 마구 적용하는 경향이 많다. 한 예를 든다면, 성경을 우화적 해석법(allegorical interpretation of the Bible) 일변도로 적용하여 성경구절의 의도나(intention), 그 진의(true meaning)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희한한 동음이의의 신소리(pun)로 교인들을 현혹시키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설교 준비를 위한 성경해석은 설교학적 패턴(homiletical pattern)으로 말하여 설명하자면, 우선 자신이 선택한 성경의 본문(sermon text: Scriptures) 성경해석학(hermenutics)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배경라인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하면, 건전한 조직신학적 뼈대와 성서신학적 체계에 준한 성경해석학의 도구(tools)를 사용하여 성경본문을 정확하게 해석(exegesis or exposition)한 후에, 성령의 능력(spiritual power)을 통하여 삶의 현장에 효과있게 적용함으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어떠한 의미에서, 성경해석학은 조직신학과 성서신학과 같은 체계적인 성경원리에 맞추어 제작된,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연장(tool)이라고 할수 있다. 기계를 분해하거나 조립하기 위하여 종류나 규격이 꼭 맞는 연장을 선택해서 사용해야 되는 것과 같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도 해당 구절을 주석하는데 꼭 맞는 성경해석법의 연장(tool)을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한다. 물론, 성경해석의 가장 우선적인 주도(top priority of initiative)는 성령(the Holy Spirit)께서 하셔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설교 본문을 택하거나, 해석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주석(commentaries)이나 다른 신학적인 서적들(theological books)을 먼저 떠들어서는 안된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설교자(preacher)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엎드려 기도함으로 성령의 영감, 즉 설교의 영감을 받은 후에, 성령의 지혜를 통하여 설교 본문의 해석으로 들어가야 한다.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직접적인 연장은 성경해석학의 방법이므로, 성경해석법 중에 어느 방법, 즉 어떤 연장(tool)을 사용해야 할지를 결정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성경해석이 올바로 된 것인지,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이 확인작업을 하기 위하여, 성서신학과 조직신학의 원리가 필요하고 권위있는 주석들이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으면,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오용하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올바른 성서해석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delivery)해야 할 책임이 목회자들에게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통하여 전달하는 설교의 내용이 철저하게 복음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강단의 개혁은 설교형태의 변화를 통하여 시도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선교 초기에서 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제목설교(topical preaching)를 위주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초기에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설교형식인 제목설교가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대로 이식(移植)되었다. 아마도 당시에는 제목설교가 적절했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조직에 있어서 통일성이 있고, 내용에 있어서 명료해서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교의 통일성과 간결성의 잇점 때문에 제목설교가 한국 교회 선교의 백년사 속에서 주역을 담당해 온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한국 교회의 초기 단계의 상황으로 보아 제목설교가, 많은 잇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교유형들 보다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도 많이 바뀌었거나 기성인들도 많이 발전됐다. 성숙했다는 표현이 좋을런지 모른다. 물론, 급진 신학자들이 말하는 신앙이 아닌 실존적으로 "성숙한 인간"(man of age)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을 받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신앙이 많이 성장했고,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도 많이 발전해서 생활양식(life style)이 달라짐에 따라 이에 부응해서 현대인에게 적절한 영의 양식을, 때를 따라 공급해 줄 사명이 설교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현대인의 식성에 맞도록, 좀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영양가가 풍부한 식단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이다. 효과적인 설교방법을 통하여 복음의 진수성찬을 효과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뜻이다. 홀랜드(Dewitte T. Holand)는 설교는 목사의 직무와 함께 계속될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양적으로 향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반대로 인위적인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변질돨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대부분이 강해설교 형태(expository preaching style)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항상 그렇지만,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 있어서 강해설교가 적절하다고 본다. 제목설교가 간결성과 통일성의 장점도 있지만, 독창성이나 본문을 등한히 취급하는 약점이 있기 때문에, 홍정길 목사는 제목설교가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전하기 쉬우므로 바람직한 설교가 아니라고 부정론을 폈다. 그는 제목설교의 위험성을 전제하고, 제목설교는 근본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한국 교회에 바람직한 설교형태는 본문의 강해설교라고 주장했다. 이성헌 목사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으로서 처음부터, 예수님 이전부터 사용되어 온 설교의 원형이라고 주장했다. 콜러(Charles W. Koller)도 강해설교가 설교의 원형이라고 말했다.
강해설교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나 성경본문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약간의 약점도 없지는 않다. 그 중에 하나가 현장과 연결시키는 적용(application)의 기술이나 배려이다. 성경 본문에만 집중하다 보면, 하나의 주석가로 끝나기 쉬운 약점에 빠지기 쉽다. 목회 현장(ministry field), 삶의 현장(context)을 소홀히 하여, 오늘의 말씀이 아니라 그 당시의 말씀, 나의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끝나기 쉬운 약점이 있다. 강해설교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본서에서는 간단하게 네 가지 방법(four types)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내연형으로 본문의 "집중강해식"(in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는 본문 전체를 한 구절 한 구절씩(one verse by one verse) 세밀하게(in detail) 그리고 집중적으로(intensively) 강해해 나가는 방법이다. 둘째가, 외연형으로 본문의 "확대강해식"(extensive type) 설교방법이다. 이 강해설교 방법은 본문은 물론 본문에 관련된 내용을 전성경(all Scriptures)에까지 확대하여(extensively) 본문의 전달내용을 보강하는 방법이다. 셋째는, 선택형으로 본문의 구절 "선택강해식"(se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본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high-light)을 선택해서 그 부분을 중심테마(central theme)로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넷째는, 숙고형으로 본문의 "반영강해식"(reflective style) 설교방법이다. 이 방법은 마치 보석상이 보석을 다면(多面)으로 깎아서 보석의 여러 면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과 같이 선택된 본문의 여러 면의 의미를 반영시키는 방법으로 다면영상(多面映像, multi-screen)의 효과의 장점들을 최대한도로 이용하는 설교방법이다.
셋째, 강단의 개혁은 설교의 전달방법(delivery method)에 있어서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법을 구사하도록 해야 한다. 화육설교(incarnational preaching)란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을 전제로 한 설교로, 인간의 영혼과 육신생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전인격을 온전히 변화시키는 기적의 메시지(miracle message)로서 인격화된 메시지(personified message)이다. 이 설교 말씀을 통하여 영혼이 거듭나고(born again), 삶의 가치관(a value of human life)이 바뀌고, 육신의 병(physical disease)도 치유되고, 사회(human society)가 변화된다. 이 설교는 설교의 내용과 언어에 멎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육사건"(incarnational event)을 유발시키게 하는 설교방식이다. 본문과 설교내용, 그리고 전달언어 속에만 화육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교인들의 영혼과 생활현장에 "화육사건"으로 생생하게 육박해 와서(has been coming) 부딪히는 (touchable) 설교를 말한다. 영혼을 터치해서(touch) 거듭나게 하고, 생활을 변화시키는 그러한 말씀을 말한다.
요 1:14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거하시매"(the Word became flesh and dwelt among us)라고 하였는데, 이 사건이 곧 화육사건이요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 )가 세상에 말씀되고(spoken) 선포된(preached) 그리스도의 말씀( )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선재의 말씀(pre-existent Logos)을 말하며, 후자는 화육된 말씀(incarnate Logos or God-Man)이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이라는 용어에 대한 두 종류의 헬라어 단어들, 즉 "로고스"( 와 "레마"( )의 어원학적인 용법(etymological use)에 절대적인 해석의 키(key to an interpretation)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용어가 신·구약성경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히브리어에서 "말씀"( )의 어원학적 의미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의 배후에는 두 가지 개념, 즉 지성적 요소(a noetic element)인 "사상" (the thought)과 역학적 요소(a dynamic element)인 "능력"(the power)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용어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학적 이해(theological understanding)와 말씀의 설교학적 적용(homiletical application)에 접근하기 쉬운 면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선 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이 용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론(theory of Trinity)을 정립하는데 용이하다. 다시 말하면, 이 용어를 통하여 말씀으로 선재하신 하나님(Godhead)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incarnate Christ)의 선재형(pre-existential image)으로서, 그 선재하신 하나님과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설교학적인 면에서 볼 때, 선포된 말씀은 "믿음"( )의 상태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말씀"( )은 롬 10:8의 "믿음의 말씀"( )의 뜻과 같다. 흠정역 성경(KJV)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성경 로마서 10장 17절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으로 번역되었으나, 새국제번역 성경(NIV)과 한글 개역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Word of Christ: )으로 번역되어, 오히려 후자의 번역이 신학적, 설교학적 배려(配慮)를 더 한 셈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레도우스(Greathouse, William M.)는 "그리스도의 말씀"(the word of Christ)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는 말보다 더 주의를 끈다고 말했다. 사실상,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that the word has been preached)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믿음의 말씀"(the word of faith)으로 그 말씀이 믿음을 생기게(beget) 하고 자라게도(flourish)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God's revealed word)은 "그리스도"(Christ)로서 곧 "살아있는 말씀"(the living word)이요 "세상에 오신 말씀"(the word came into the world), "역사하는 말씀"(the working word)으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the Divine message), 곧 "선포된 말씀"(the word preached)으로 설교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포"(preaching)가 "역사하는 믿음의 방편"(the means of working faith)이라고 했으니, 그 선포, 즉 "설교"는 필히 "그리스도의 화육사건"(incarnation event of Christ)의 방식을 취해야 하므로, 이는 근본적으로 화육설교 (incarnational preaching)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화육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스데반이나 바울사도와 같이 준비한 설교말씀에 반드시 사로잡혀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화육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마 1:20).
(2) 평신도 사역의 활용
평신도 사역에 관한 내용들은 본서의 각 장, 즉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 그리고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에서 필요에 따라 상세히 언급한 관계로 본장에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사실, 평신도는 목회학상으로 볼 때에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동참해야 하는 빼놓을 수 없는 동반자(companion)요 파트너(partner)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평신도 사역의 중요성
평신도(lay-people)는 목회자와 함께 교회성장의 양대 자이언트(giant)로 쌍벽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서, 저자가 본서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교회성장 프로젝트(project)의 프로그램(program)의 궤도를 따라 함께 달리는 동반자로서, 즉 목회자는 기관차의 기관(engine), 평신도는 객차(passenger train)로 비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둘 다 빼놓을 수 없는 파트너(partner)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반드시 목회자와 평신도가 공존하면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상호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의 구별이 분명하며, 분담사역(sharing ministry)이라 해도, 두 직분 사이에는 직무상의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평신도 사역은 목회자의 목회활동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목회방법이 되어 왔던, 교회의 평신도 사역을 무시하는 "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passive sheep structure)의 좀 잘못된 목회방식(ministry pattern)을 뛰어 넘어서, 목회방법의 과감한 개혁으로, 평신도들의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는 "평신도 사역"(lay-ministry)을 백분 활용하는 목회방법으로 전환시켜야 할 것이다. 목회는 목회자만이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멘탈리티(mentality), 즉 "목회자 활동 평신도 비활동 구조"(active pastor passive sheep structure)로부터 탈피해서 정상적인 "목회자/평신도 공동사역 구조"(pastor/laity coworker structure)로 바꿔야 한다. 목회사역은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은사에 따라, 자기 위치에서 월권하지 않고 자기의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할 때, 부작용도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한다. 그러므로 평신도 사역은 교회성장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목회자로서 평신도사역을 꺼려한다면 지속적인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신도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해서 교회성장에 활용해야 한다.
평신도 지도자 훈련
모세(Moses)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은혜가 충만하다 하더라도, 그 많은 사역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영육간에 피곤에 지쳐서 쓰러질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그의 장인 이드로(Jethro)의 충고대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선출하여 사역을 분담함으로(shared ministry) 일을 힘들이지 않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었다(출 18:14-18). 예수께서도 복음사역을 위하여 맨 처음에 시작하신 것이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훈련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 한 사람이 열 시간동안 해서 피곤해 지칠 일을, 평신도 열 명을 훈련시켜서 하게 되면 힘들이지 않고도 한 시간 내에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평신도 지도자를 훈련시켜야 할 근본적인 이유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를 삼아 그들을 훈련시키라고 마지막으로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9:19-20). 지도자 훈련에 관하여는 소그룹 운동론과 제자 훈련론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
평신도를 훈련했으면 그들을 목회사역에 참여시켜야 한다.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 참여(participation)는 어떠한 의미에서 모든 평신도의 목회활동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들을 통해서 평신도의 사역이 세밀한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첫째로, 평신도 지도자의 목회사역의 영역이 직접적인 평신도의 세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목회자도 평신도와 밀착되어 있지만, 목회자는 목회사역의 중요한 부분들, 예를 들면 설교(preaching)와 교회행정(church administration), 교회의 주요 활동(main activities)등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기 때문에 평신도를 가까이 접하는 일이 아무래도 평신도만 못하나, 평신도 지도자는 항상 평신도와 같은 위치에 있으므로 평신도와 접촉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둘째로, 아무리 가깝다 하더라도 목회자와 평신도간에는 생각(thinking)과 정서적인 간격(emotional gap)이 있지만, 평신도 지도자는 평신도 출신으로 역시 평신도의 위치에 있으므로 같은 입장에서의 평신도와의 접근은 목회자 보다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평신도를 훈련시켜서 목회사역에 과감하게 참여시켜야 한다.
간혹 목회자들 중에는 평신도 목회사역의 직접적인 참여에 따른 부작용(side effects), 즉 목회자를 비판하고 교회에 대한 불만을 조성, 어떤 그룹(peripheral group)을 형성하여, 교회를 분열시키는 위험이 있다고 해서 염려하여 평신도 지도자의 직접적인 목회사역을 꺼리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자세이며 기우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항상 평신도에 대한 부정적인 콤플렉스(complex)에 빠져, 교회성장을 위한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없게 되어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우선 적극적이고 과감한 자세로 이러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하며, 혹시라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철저한 평신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untrained people)들 중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problem maker)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느 교회나 문제아(trouble maker)가 되기 전에 성격이나 신앙의 성장배경에 따라 목회자가 다루기 까다로운 사람 (difficult people)들이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이들을 품에 안아서 다룰 수 있는 아량과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들은 훈련을 통하여 얼마든지 변화되어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도울 수 있는 평신도 내지 평신도 지도자(lay-leader)로 길들여질 수(trained, edified, and oriented people)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천의 하나 만의 하나 전혀 변화가 되지 못하고 마는 구제불능의 사람(impossible people)이 있는데,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교회가 시험에 들거나 병들게 되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안됐지만 속히 수술해야 한다. 물론 수술방법과 수술범위, 수술 후의 치료 등 사전에 세심한 배려를 통하여 후유증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런 수술방법은 극한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서, 함부로 사용하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것은 교회관리론(church management) 가운데 인간관리론(people management)의 분야에서 하게 된다. 부연해서 코멘트 하자면, 목회자가 목회를 위한 연구는 다양하게 전문적으로 해야 하는데, 예를 들자면, 교회관리(church management)중에 인간관리(people management), 시간관리(time management), 재정관리(financial management), 프로그램관리(program management), 건강관리(health care), 행정관리(church administration)등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면 목회사역에 도움이 될 것아다.
(3) 소그룹 프로그램의 개발
교회성장을 위한 교회활동 프로그램의 개발(development of programs)은 목회자의 개발(development of pastor)과 평신도의 개발(development of laity)에 이어 세번째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무리 훌륭한 목회자와 평신도가 있는 교회라 하더라도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프로그램(program)이 없으면, 그 교회는 비활동교회(inactive church)로 잠을 자는 교회(sleeping church), 아니면 죽어가는 교회(dying church)나 마찬가지다. 할 일이 없어서 낮잠이나 자다 보면 무기력하게 되어, 나중에는 병들어 죽어가게 된다. 사람도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단명하며, 적당한 운동(exercises)과, 특히 목적있는 일들(works or activities)을 의욕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체건강(physical health)은 물론 정신건강(mental hygiene)에도 좋기 때문에 장수하게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메리칸-인디언(American-Indian)의 경우, 그들은 미국 정부에서 주는 생활보조비(welfare, food-stamp etc.)를 받아 먹고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단명하다고 한다. 이러한 생물학적 원리(biological principle)는 교회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교회도 바울 사도가 비유한대로 하나의 유기체(organic body)이기 때문이다. 활동하지 않는 교회는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활동 프로그램에는 여러 가지로 다양하다. 오래 전에 한국 교회에 정착된 구역예배 활동을 비롯하여 성경공부반(Bible study class), 제자훈련반(discipleship training class), 각분야별의 그룹 교육훈련, 예를 들면 연령별로 분류해서 노년 그룹(senior group), 장년 그룹(adult group), 청년 그룹(youth group), 청소년 그룹(teenager group), 소년소녀 그룹(boys and girls group), 유년반(children class), 유아반(baby class), 학력별로 분류해서 역시 장년 성경공부반(adult Bible study class), 대학생반(college and university class), 고등학생반(high school class), 중학생반(middle, junior high school class), 국민학생반(elementary school class), 유치반(preschool class), 유아반(baby class), 탁아소(nursery school), 성격별로 분류해서 커풀 그룹(couple group), 씽글 그룹(single group), 직장 그룹(business group),사춘기 그룹(adolescence group), 금연반(non-smoking class), 중독증 교정반(toxicosis treatment class)등, 이 외에도 각 지교회의 적성에 맞게 효과적인 프로그램들을 개발해서 교회활동에 이용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미국 쌔들백 밸리 공동체교회(Saddleback Valley Community Church)에서는 무려 79가지나 되는 소그룹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적용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교회성장을 위하여 어떤 종류이건 간에 소그룹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과거와 같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목회방법으로는 교회를 성장시키기가 어렵다고 본다. 이제는 소그룹 운동을 통하여 평신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서, 교회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지 않으면 세속화 물결에 교인을 떠내려 보내든가 다른 교회에 빼앗기든가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물론, 아무렇게나 시도하다가는 실패로 끝나고 좌절하여 포기하기 쉽다. 사실, 이런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교회에 맞도록 효과적으로 시행하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모 교회에서, 모 목회자가 성공했다고 해서 그대로 시도하다가 실패한 예도 부지기수인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이 나에게, 내 교회에 적용하기에 적합한지 먼저 검토하고 나서 선택해야 한다. 자기의 적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가지고 시도하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이 자기에게 꼭 맞지 않을 경우에도 교회성장을 위하여 교회에서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경우에는 과감하게 시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첫째로, 그 프로그램을 자기의 것이 되도록(identified) 목회자 자신이 먼저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이 없을 때에는 그 프로그램의 전문가를 초청해야 하는데, 이것은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목회자가 그 프로그램에 미칠 정도로 빠져들어야 한다. 둘째로, 처음에 한 두번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면 안된다. 칠전팔기라는 말이 있듯이 성공할 때까지 계속 도전해야 한다. 물론, 그 원인들을 잘 분석하고, 왜 안되는가를 찾아서 반복적으로 처방해서 실시해야 한다.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다.
본서의 제5장은 이러한 판단하에, 교회성장을 위하여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소그룹 활동 중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택하여 실제 워크샵(workshop)을 통한 실습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프로그램이다. 본 프로그램은 기존의 제자훈련의 약점들을 보완하여 개발한 것으로서 지역 교회에서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도록 제작된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전제로 하여, 말씀과 은사를 겸비한 제자들, 즉 평신도 지도자들을 훈련시켜서 교회성장을 위하여 임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design)되었다. 현대의 복음사역의 성공을 위하여 "제3의 파도"(third wave)를 탈 수 있는 목회자들만이 시행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본서는 목회자 스스로가 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유일한 안내서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통하여 목회자 스스로가 자체훈련을 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세미나(seminar)를 통해서 훈련받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된다. 본서를 통하여 자체훈련을 하려면, 먼저 제4장 한국교회 성장론(Korean Church Growth)을 주의 깊게 읽어서 이 프로그램이 한국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의 필연성에 동감한 후에, 제1장 교회 성장론(Church Growth)을 읽어서 교회성장 원리와 전략에 관한 지식을 얻고, 제2장 소그룹 운동론(Small Group Movement)을 통해 소그룹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제3장 제자 훈련론(Discipleship Training)을 읽어서 제자훈련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습득한 다음에, 교회성장을 위한 소그룹운동 중에 제자훈련을 차질 없어 실행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후에, 본서의 제5장 "다이나믹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 워크샵(program workshop)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워크샵을 통하여 목회자 자신이 확신을 얻고 훈련을 한 후에 프로그램 진행을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간다. 준비작업(preparation for the program)과 동시에 특별 작정기도 후에 시행하도록 한다.
제 5장 다이나밐 제자훈련(워크샵)(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본서(本書)의 1, 2, 3장은 교회성장(church growth)과, 소그룹 운동(small group movement), 제자훈련(discipleship training)등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도록 했고, 이 지식들(priciples and strategies)을 바탕으로, 제5장에서 시도하려는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 프로그램(program)을 지역 교회 실천목회에 적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주안에서 충분히 연구하고, 제자훈련을 시도하면 승리하리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절대로 안된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때는, 한때 침체되었던 미국의 사회와 기독교계에 정신적으로 돌풍을 몰고 왔던 미국의 "적극적 사고방식"의 사상가들(positive thinkers)인 로만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박사나,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의 목회성공 철학인 "가능성의 사고"(possibility thinking) 또는 "적극적 사고"(positive thinking)의 철학을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로버트 슐러는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생각과 인격을 통하여 역사하신다고 말한다. 그 보다도 더 주님의 보장된 말씀인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If you can believe, all things are possible to him who believes)는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과감하게 진행할 때에 성공이 보장될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혼자서 시도할 수도 있으나, 처음에는 실패할 수 있는 확율이 많기 때문에, 본 프로그램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해서 훈련받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준비작업에 들어가서 충분한 준비와 기도, 그리고 홍보를 통하여 교인들의 협력을 얻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식을 따르기 위하여 디자인 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훈련 방법을 보면 모든 것에 완벽하다. 물론, 그러므로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 방법이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예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신 방법을 모방했을 뿐, 전적으로 성령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선 자기가 누구이심을, 즉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론을 가르치셨다(마 16:16-17). 아울러 그것을 알게 하시는 이는 이 세상 어느 혈육의 선생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말씀해주셨다.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이론적으로도 가르치지만, 역시 그를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여 훈련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려고 오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속죄론을 가르치셨다(마 20:28).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역시 제자의 길도 십자가의 길이다(마 16:24).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고 증거하시므로 천국론을 가르치셨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천국에 대한 교리를 제자들에게 자세히 가르치셨다(마 13장). 인간은 완전한 죄인임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인죄론과 구원론을 아울러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자기가 하나이심을 증거하심으로 삼위일체 신론을 가르치셨다(요 10:30, 14:9-11). 예수께서는 직접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며(마16:18) 하나님의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선포하심과 동시에 이 교회를 관리하는 종들에게 그 교회를 통하여 성도들을 관리하고(요21:15-17), 또 천국문을 열수 있는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교회론을 확립해주셨다(마 16:18-19). 또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시게 되면,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권능을 주시므로 복음사역에 동역해주실 다른 보혜사 즉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성령론을 가르치셨다(요 14:16-17, 26, 16:8-10). 예수께서는 승천하셨다가 때가 되면 다시 오시는데, 그 전에 세상 끝날에 환란이 있겠고(마 24장), 주님께서 재림하셔서(요 14:1-3, 행 1:11) 세상을 심판하시며, 영원한 하늘나라를 아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 종말론을 선명하게 가르치셨다(마 25장).
이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교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가르치심과 동시에 천국윤리와 세상윤리를 분명히 말씀해주심으로 제자들의 생활윤리를 철저하게 교육시키셨다(마 5장). 성경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소상하게 가르치셨고, 함께 다니시면서 생활속에 파고 들어가셔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도록 훈련시키시기도 하셨다. 또 교회를 어떻게 섬기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윤리와 봉사활동등을 소상히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복음은 어떻게 전하여야 되는지 전도의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다(마 10장). 예를 들면,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전파하라. 병든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귀신을 좇아내라. 갈 때에 전대에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고,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고, 어느 곳에 들어가서 합당한 자를 만나면 거기 유하며 전도하고, 들어가는 곳마다 평안을 빌라. 사람을 삼가라. 뱀같이 지혜롭고 비들기 같이 순결하게 하라는 등 매우 소상하게 전도 방법을 가르쳐서 보내셨다.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훈련에서 성경공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며 훈련하는가? 무엇이 다른가? 물론 같은 내용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다른가? 타이틀 [다이나밐 제자훈련](dynamic discipleship training)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훈련 방법이 "다이나밐"(dynamic)하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첫째로, 일반 제자훈련에서 소홀이 하는 부분인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여 "다이나밐"하게 훈련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선 방법론의 차이다. 물론 일반 제자훈련에서도 앞에서 나열한 내용들을 대부분 가르친다고는 하나, 성령을 통한 실제적인 역사(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훈련하지 못하고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열열하게 생활하며 전도해야 된다고 최종적인 방법론을 가르친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능력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말과 이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훈련 현장인 크라스룸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가지고 생활 현장, 전도사역 현장에 뛰어들게 한다. 강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무리 잘 배워도 이론적인 교리와 윤리적 행위에 멎어지고 만다. 성령의 강한 체험이 없으면, 우선 확신과 자신감이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 속에 뛰어들 용기도, 전도할 자신도 없어서 소극적인 전도행위에 그치게 된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자신있게 나가서 증거하였다. 성령을 받으면, 자신의 죄를 속하시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며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령을 받으면 마음이 뜨거워 가만히 들어 앉아 있을 수 없게 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치욕과 모욕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전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마음(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 골수에 사무쳐서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했다(렘 20:8-9).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크라스룸(class room) 프로그램 중에, 성경연구에 앞서서 훈련생들의 특별한 간증시간(testimony)을 통하여 실감있게 은혜를 나누며(sharing a grace of the Holy Spirit through the testimony), 은혜스러운 분위기에서 마음을 열고 성경연구로 들어가서, 그 말씀을 통하여 자아를 죽이고 성령을 풀어놓아(releasing the Holy Spirit), 성령께서 자기에게 마음껏 역사하시도록 하여 성령충만의 체험을 받도록 유도한다. 성경연구가 단순한 성경공부가 아니라 생활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크라스룸에서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선명하게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말씀의 확신을 나누며, 말씀을 함께 토론하며, 생활에 적용하며, 그 말씀을 붙잡고 강력하게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을 확실히 체험하게 한다.
둘째로, [다이나믹 제자훈련]에서는 각자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성령의 은사(the Spiritual gifts)를 받도록 하는 훈련이다. 물론 은사를 받는 훈련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라도 사용하지 않고 땅속에 묻어두고(마 25:24-30) 가만히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고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에 의존하여 개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의 은사를 개발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기 위하여(행 4:30-31), [다이나믹 제자훈련] 프로그램 중에 "은사개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시간에는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여 확장하기 위하여 각종 은사를 간구하는 강력한 기도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QT 시간 다음, 제자훈련 마지막 시간에 갖는다. 힘과 은사와 능력을 받아 가지고 생활과 전도사역 현장으로 뛰어들게 하기 위함이다. 이 시간은 찬양과 강력한 기도로 은사를 받기 위한 "은사의 시간"이다. "주여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낮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29-31).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물론,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한다. 병고치는 능력, 귀신을 내쫓는 능력,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권능등 갖가지 신령한 은사를 받아야 하는데, 이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방법으로, 복음사역에 필요한 것이며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이런 신령한 은사에만 치우쳐서는 안되고, 앞서 언급한대로 말씀의 능력에 따라 주는 믿음의 표적들로 연결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역사로 복음은 힘있게 전파되어 사단에게 매인 자들을 풀어주고, 병든자들을 치료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게 한다. 이런 사역을 현대의 용어로 "치유사역" 혹은 "치유목회"(healing ministry)라고 한다. 과거의 기성교회들은 이 문제를 무시하고, 심지어 신비주의(mysticism)라고 타부시 해왔지만, 1900년 후반에들어 이들을 인정하게 되었다.
본서 제4장에서도 상세하게 설명하였듯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령의 운동을 교회성장학에서는 "오순절 운동" (Pentecostal movement)이라고 하며, 은사를 통한 치유의 운동를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라고 부른다. 은사의 사역을 포함한 인간을 변화시키시는 역사 전반을 성령의 역사로 지칭하나, 좀더 구체적으로 구별하자면, 오순절 성령의 역사는 주로 심령변화를 위한 역사로 지칭되며, 카리스마 성령의 역사는 치유와 표적의 역사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이 둘은 같은 성령으로 나타나는 역사이다. 모든 은사가 다 같은 성령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고전 12: 4). 피터 와그너(C. Peter Wagner)는 전자를 "제1의 물결"(first wave), 그리고 후자를 "제2의 물결"(second wave)이라고 규정하고, 현대 교회에서 "제3의 물결"(third wave)인 "복음주의 성령운동"(evangelical Spiritual movement)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현대목회는 제1의 물결인 오순절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제2의 물결인 은사운동으로만 일관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고 전과 같이 무미건조하게 말씀 말씀 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건전한 복음주의 운동이 능력있게 전개되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이 제1, 제2의 성령의 사역을 복음주의에서 수용해서 실행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강력한 복음주의 성령운동을 할 수 있는, 제1, 제2의 물결 뿐만 아니라 "제3의 물결" 즉 제3의 파도"(third wave)까지 능숙하게 탈 수 있는 성령의 "서핑선수"(excellent spiritual surfer)가 되어야 현대 목회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의 사역으로서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오순절 운동의 역사와 카리스마적인 은사의 역사를 능력있게 사용하여 각 지교회를 섬기고, 더 나가서 전세계에 복음을 힘있게 전파하는 일꾼들을 양육하려는 것이 [다이나밐 제자훈련]의 의도이다.
제자훈련은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단순히 교리나 생활윤리만 가르치는 훈련이 아니다. 제자들을 직접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훈련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내보내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말씀의 권능, 병고치는 능력, 사탄을 정복하는 능력을 훈련 현장에서 받게 해서 보내셨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전도하고 돌아와서 병자가 낫고, 사단이 굴복하더라고 신나게 보고했다(눅 10:17-18). [다이나밐 제자훈련]에서는 바로 이 점을 중요시하여, 훈련 현장인 크라스룸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고 은사를 강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한 강력한 "은사개발의 시간"을 갖는다. 예수님은 직접 능력과 은사를 주셨지만 우리는 "은사의 시간"에 성령을 통하여 받게 된다. 훈련 현장에서 받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생활과 사역 현장에 뛰어들게 한다. [다이나밐 제자훈련] 스케쥴은 다음과 같다.
다이나밐 제자훈련』스케쥴
목회자의 목회철학과 방법론 확립
본서를 통하여 신학적으로 목회자 자신의 목회철학을 정립하고(제1장, 4장), 또 실천신학적으로 목회 방법론을 정립하고(제2장), 제자훈련의 방법론을 정립한 후에(본서 2장, 3장), 제5장에서 본서의 [다이나밐 제자훈련]을 통하여 자기 교회의 실천목회에 효과있게 적용해야 한다.
[다이나밐 제자훈련]을 위한 제반준비
아래의 [다이나밐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위한 모든 준 비에 대한 설명을 본서의 1장에서 3장까지 내용에서 학문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충분히 연구하고 난 후에 실제 프로그램 준비작업으로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사전준비
(1) 비젼화(visuslization)를 위한 목회자의 특별기도(시 기와 기간은 각자가 결정한다).
1) 특별기도를 통하여 제자훈련에 관한 비젼을 받음. 2) 받은 비젼의 자기 동일화를 위한 기도, 명상, 독경.
3) 비젼의 실천을 위한 기도와 계획을 수립함.
4) 비젼을 실천화하기 위한 구체적 준비에 들어감.
(2) 교회의 비젼의 동일화(identification)를 위한 교인들 에게 홍보와 교육(목회자가 직접 한다).
1) 교회의 중심 멤버들의 비젼동일화 작업.
2) 교회의 제직회원들의 비젼동일화 작업.
3) 전체의 교인들의 비젼동일화 작업.
(3) 교회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프로그램에 교인들이 참여할수 있도록 동기부여(motivation)를 해준다.
1) 교인들의 신앙의 질적향상(개인의 신앙부흥)
2) 교회의 양적, 질적성장에 필요(교회의 부흥)
3) 제자훈련 프로그램의 필요성, 잇점등을 설명
목회자의 제자훈련 실행준비
목회자는 [다이나밐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위하여,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전에 이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미리 철저하게 해서, 본 프로그램 실행시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차질이 생기면 어렵게 된다.
(1) 제자훈련 교재 준비 (Text)
1) [교회성장의 이론과 실제] (참고서)
이 책은 목회자가 사전에 반드시 정독해야 할 책으로,제자훈련에 관하여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기초를 놓기 위하여 쓴 책이다.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하려는 사람은 이 책을 반드시 읽어서 교회성장을 위한 프로그램 시행방법을 잘 알고 난 후에 시도해야 한다.
2) [다이나밐 제자훈련] (교재)
이 다이나밐 제자훈련의 교재는 별도로 편성된 것으로 제자훈련반에서 사용하도록 특수하게 편집한 것이다. 각 코-스별로 되어 있는데, 경우에 따라 제자대학 교재를 제자대학원에서 사용할 수 있으나, 제자신학원에서는 별도로 간략한 교의신학과 평신도 신학 그리고 교회행정에 관하여 쓰여진 교재를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제자대학부 교재
제자대학원 교재
제자신학원 교제
3) [찬송가]및 [복음성가집] (찬송)
복음성가는 보수적이며, 은혜로운 것으로 각 교회에서 자유롭게 준비하면 된다. 이 복음성가는 은사개발의 시간을 위하여 꼭 필요하기 때문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
(2) 제자훈련에 필요한 서류준비 (documents)
1) 제자훈련 입학 안내서 (p. 465)
제자훈련 입학안내서는 제자훈련 가이드 라인으로 제자훈련원 학제인데, 제자훈련반 편성을 비롯하여 졸 업식에 이르기까지 간략하게 기안된 제자훈련에 대한 인포메이숀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필히 교회에서 홍보해서 제자훈련에 참여하기 전 본교회 교인들에게 알린다.
2) 제자훈련원 입학원서 (pp. 466-468)
제자대학부 입학원서 (p. 466)
제자대학원 입학원서 (p. 467)
제자신학원 입학원서 (p. 468)
3) 제자훈련반 출석부 (p. 469)
제자훈련반 출석부는 제자훈련시 훈련생의 출석상황 과 훈련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 출석을 중요 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훈련의 성공실패 가 이 출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4) 제자훈련반 결석계 (p. 470)
제자훈련 결석계는 역시 제자훈련 참석율을 높이고 훈련성과를 분석 측정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훈련생 이 결석할 경우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해당 벌금을 납부 하고 보충훈련을 받은 다음 보충 훈련필증을 훈련사에 게 정식 보고해야 한다 (성적과 평가에 참고함).
5) 제자훈련반 과제물 기록표 (p. 471)
과제내용서는 매 시간마다 내주는 과제의 내용을 기 록하는 것으로 훈련시간 초에 기록한다.
6) 제자훈련반 과제검사서 (pp. 472-473)
과제검사서는 지난 시간의 과제를 검사해서 기록하는 것으로 역시 훈련시간 초에 실시하여 그 결과를 제자훈 련 지도와 프로그램 평가시에 이용한다.
7) 제자훈련반 보충훈련 필증 (p. 475)
보충훈련 필증은 결석시에 별도로 보충훈련을 받은 후, 해당 훈련사에게 증명서를 발급받는 것이다.
8) 제자훈련반 제자삼기 계획서 (p. 476)
제자삼기 계획서는 제자훈련생이 훈련기간 동안 전도 해서 자기의 제자로 삼겠다는 계획서로 졸업 전 까지 한 사람이상 반드시 이행해야할 의무인데, 처음 가능 성이 있는, 또는 의도하는 사람을 3명 정도 점을 찍어놓고 그들을 위한 기도, 사랑의 봉사, 성경공부, 교회인도등 세밀한 작전하에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 이들을 교인이 되게 하는 것은 물론, 제자훈련생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9) 제자훈련 평가서 (pp. 478-487)
이 평가서는 제자훈련 실시의 임상기록을 위한 데이 타(data)로서, 매월 한 번씩 조사하여 제자훈련이 끝난 다음의 훈련결과를 측정하기 위한 측정자료이다. 이 평 가서는 신앙성장의 측정자료로 개인 신앙의 지도와 차기 제자훈련을 교회성장을 위한 전략수립에 사용된다.
예배활동 출석기록서 (p. 478)
기도생활 기록서 (p. 479)
성경공부 기록서 (p. 480)
헌금및 구제생활 기록서 (p. 481)
전도및 봉사생활 기록서 (p. 482)
제자훈련생의 평가설문지 (p. 483)
(3) 제자훈련생 모집
1) 교회의 중직들(장로, 안수집사, 권사, 집사)을 우선으로 한다(비젼화되지 않은 제직들은 강요말것).
2) 평신도들은 선별해서 모집한다(제직을 제외한 평신도들은 연차별로 질서있게 선발하고 무계획적으로 모집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3) 모집방법은 교회에 공개적으로 광고해서 하는 방법과 개인적으로 권유해서 하는 방법이 있다.
4) 모집인원은 계획에 따라 공고해야 함 (모집 인원은 연차별 제자훈련에 적합한 숫자로 제한해야 한다).
5) 한번에 많은 제자를 양육하려다가 실패하기 쉬움 (조급함과 욕심으로 지원자가 많다고 훈련사를 양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이 모집해서는 안된다).
(5) 제자훈련반 조직 (각 특성에 맞게)
1) 처음 시작시는 3개반 이내로 한다(목회자의 반). 처음에는 반드시 목회자가 훈련시켜야 하며, 후에라도 제자대학원인 지도자훈련반 만큼은 목회자가 훈련시켜야 한다. 맨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목회자가 훈련을 담당해야 하며, 담임 목회자에게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부교역자들라도 제자훈련을 맡기면 안된다. 될 수 있는대로 부교역자 들에게 제자훈련을 맡기지 말고, 좀 늦더라도 평신도 위주로 훈련시켜 다음 제자반을 맡겨야 한다.
2) 3개반 A반, B반, C반 중에 특히 한반은 특수반으로 조직해서 모델 케-스(model case)로 삼아야 한다. 이 특수반은 이유 불문하고 철저히 훈련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조직해서, 다른 반은 약간 미흡하더라도, 이 모델반 만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 그 래야 이 모델반을 보고 다음 반들도 열심을 내게 되고 교인들의 선망의 동기가 되어 차기 훈련을 쉽게 끌어나갈 수 있게 된다.
3) 첫해에 3개반만 성공시켜도 다음해는 목회자의 반 을 포함해서 15-20개반으로 늘어날 수 있게 된다. 처음 3개반은 제자대학원에 들어가서 훈련사로 훈련받을 수 있는 자로 선정해서 제자대학부를 졸업한 후, 임시 훈련사로 채용할 수 있도록 계획한다. 제자훈련의 성공여부는 이와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얼마나 확실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훈련시켜서 제자반을 증식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제자훈련사 양성및 제자 배출계획
한반에 5명 정도로 가정해서 5 3 15명이 졸업하게 된다. 졸업생 1명이 1개반을 담당해도 15개반과 목회자의 3개반 포함 18개반이 된다. 그러나 15명 전체가 반을 담당할 형편이 못된다 해도, 능력있는 졸업생 1명이 2개반-3개반을 담당할 수 있으니까, 줄잡아서 15개반 이상을 모집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해는 목회자의 3개반이 훈련사로 또 배출되니까 15명의 훈련사가 또 배출되어 30여명의 훈련사가 되고 제3년째 가서는 45명의 훈련사에 적어도 200여명 이상의 제직과 교인들이 제자훈련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 이후로는 기하급수(누진곱수)로 불어나게 되어 이 제자훈련이 성공한다면, 교인들의 신앙의 질적 성장은 물론, 제자들의 제자삼기 운동을 통하여 교회의 양적증가에 있어서도 새제자들의 증가에 의하여 달성하게 된다. 나중에는 훈련받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다수가 되기 때문에 제자훈련이 용이하게 된다.
첫 제자훈련생 모집요령
첫해에는 될 수 있는한 차기의 훈련사를 만들기 위해서 교사의 은사가 있고, 신앙있는 엘리트들로 엄선해서 입학시키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안정되지 못하고 미숙하기 때문에 차기 훈련을 위해서 필요하다. 몇회의 졸업생이 배출되면 지도자 훈련반인 제자대학원 졸업생들이 졸업하게 되니까 그때에는 훈련사에 대한 염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인턴쉽(inteernship) 훈련
차기 모집할 훈련생들은 지도자반인 제자대학원 졸업생들이 배출될 때까지, 제자대학 줄업생들인 제자대학원생들을 인턴쉽으로 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초창기에는 어쩔수 없으니까 훈련사는 인턴쉽으로 임시 대치해야 한다).
예비훈련사의 훈련
훈련사들은 반드시 목회자의 직접적인 제자훈련을 받은 자만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제자훈련의 훈련사는 목회자의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훈련내용과 사상에 있어서 목회자와 일치하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훈련의 일관성을 잃게 되기 쉽다.
제자훈련에 있어서 오리엔테이숀(orientation)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본 [다이나밐 제자훈련]의 동기와 목적과 성격, 그리고 훈련의 내용과 방식을 철저하게 인식시켜서 훈련에 들어갔을 때에 시행착오가 없게 하기 위한 사전 교육이기 때문이다. 최소 4-6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이 시간에는 훈련생들이 처음 모인 시간이므로 기도하고 인사소개로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훈련사는 제자훈련의 목적과 필요성, 유의할 사항, 그리고 제자훈련원의 학제등에 관하여 설명한다.
제자 훈련생들의 자기소개
자기소개는 본인이 소개하고 싶은 범위내에서 할 수 있으나 최소한 다음과 같이 간단한 개인의 인포메이숀은 주고 받는 것이 좋다. 이 시간은 다음 부터는 생략하게 된다.
(1) 먼저 훈련사(목회자)의 소개를 한다.
저는 ××× 목사로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저 는 ×××에 살고 있으며, 아내 Mrs.×과 자녀로 대학에 다니는 아들 둘이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대학과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신학대학원에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중심으로한 교회성장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본받아 훈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멤버들이 인사를 나눈다. (자기소개 방식으로 한다)
저는 박××이라 합니다. 저는 가정일을 돌보며, 교회에 서는 ××장로교회의 집사로서 여전도회 전도부장직을 맡 고 있습니다. 저의 집은 ××××에 있으며, 가족으로는 남편 박××씨와 자녀로는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하나 있 습니다. 저는 주님의 부르심으로 간절히 기도한 후, 좀더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하고 훈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자훈련에 대한 예비교육
제자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목사는 제자훈련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영적인 전쟁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반드시 성공해야 하며,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한 마음과 충분한 준비를 하고 난 후에 시작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제자훈련에 대한 분명한 비젼과(clear-cut vision)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하차하고 말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목회자 자신이 제자훈련에 오리엔트되지 못하면 자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메다 말게 된다. 그러므로 확신에 찬 비젼의 사람(confident visionary pastor)이 되고, 많은 연구와 세미나, 크리닠 등을 통하여 자신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난 후에 그 방법론을 정립하고 모집된 제자생도들을 교육시켜아 한다.
⊙ 제자훈련의 목적과 필요성에 대한 교육
제자훈련의 기원은 성경에서 나왔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그의 "지상명령"이 제자훈련의 기초가 된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
(1) 제자훈련의 목적
첫째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목적이다.
즉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는 세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표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제자훈련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한신 지상명령을 준행하여 모든 족속으로 하여금 구원받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선교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의 제자화가 목적이다.
제자로 삼은 그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치"라고 했기 때문이다. 제자로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온전할 수 없기 때문에 우선 제자들 자신들의 전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한다. 제자화의 내용은 교육과 훈련으로 나눌 수 있다.
셋째로, 교육받고 훈련받은 대로의 신앙생활과 전도이다.
예수님께서 그의 지상명령을 통하여 주께서 카르치신 모든것을 "지키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훈련받은 후에는 배우고 훈련받은 대로 나가서 전도와 봉사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배운대로 나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뜻이다.
(2) 제자훈련의 필요성
첫째로,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첫마디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의 명령인 모든 사람들을 제자를 삼아 훈련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이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교회를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제자 훈련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교인들의 질적인 성장(영적성숙)을 위해서 제자훈련은 가장 좋은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 꾸준하게, 누적적으로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다. 예수님께서는 3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에, 물론 대중전도를 비롯하여 전도에 많은 힘을 기우리셨지만, 그보다도 제자훈련에 더욱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으셨다. 이는 12명의 소그룹 정예화로 전세계를 정복하시려는 주님의 의지가 숨겨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혼자만의 사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를 이어 두고 두고 그 성사업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하셔서 마지막으로 그의 성업을 완성시키므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를 얻으시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목표로 하며, 그 궁극적 승리를 위하여 제자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 제자훈련의 유의할 사항
제자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꼭 유의해야 할 사항들이 있다. 이 유의사항을 잘 지켜야만 실제 훈련에서 낙오자가 되지않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유의사항을 지켜주기 바란다.
첫째로, [다이나밐 제자훈련]의 특수성을 항상 명심해야 하고 이에 대처해야 한다.
보통 성경공부나 그룹활동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훈련은 철저한 자기 제자화 훈련으로 다이나밐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긴장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논산훈련소에 입대해서 군사훈련을 받는 기분으로 제자훈련에 임해야 한다(딤후 2:3-4).
둘째로, 자기의 훈련사, 즉 자기의 지도자를 철저히 신뢰하고 잘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와 지도자를 위해서 사단이 시험하지못하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야 한다. 훈련 중에는 몇번에 걸쳐 고비가 오기 마련이다. 훈련생들은 도중 하차하지 않도록 믿음으로 모든 고비를 극복하고 승리해야 한다.
셋째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석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어떤 이유로도 용납하지 아니하시고, 심지어 "죽은 부친은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 같이 제자훈련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것이라는 정신으로 결석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 시험으로 결석할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래서 미리 주님께 간곡한 기도로 부탁 해놓아야 한다(눅 22:46, 22:31-32).
넷째로, 그 시간에 주어진 과제는 반드시 해와야 한다.
숙제에는 다음 성경공부를 비롯하여, QT연습, 성경읽기, 실습내용등 훈련사가 지시하는 모든 숙제를 다 해와야 그 날의 훈련에 차질이 없게 된다.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그날 훈련에 지장이 있을뿐 아니라, 그에게 벌칙이 적용된다.
다섯째, [다이나밐 제자훈련]은 자신의 전인적인 훈련과, 제 자로서 다이나밐한 능력을 받아서 복음사명을 다하 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도의 열성과 심도있 는 훈련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 지혜롭고 능력있는 사역자들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훈련중에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대하기 바란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아무것고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제자훈련원의 학제에 대한 설명
제자훈련원 학제는 제자대학, 제자대학원, 제자신학원등 세 기관으로 되어 있다. 첫째로, 먼저 제자대학에 입학해서 1년간 훈련을 받고, 제자대학원에 진학할 사람은 제자대학원으로 가서 제자대학의 훈련사 인턴쉽으로 훈련경험을 쌓게 되고, 진학을 안하는 사람들은 바로 교회로 돌아와서 봉사하게 된다. 그리고 제자대학원 2년 코스를 마친 사람들은 제자신학원에 진학해서 제자대학 훈련사(교사)나 제자대학원의 인턴쉽이 된다. 제자신학원 코스는 3년으로 장로나 장로 후보자들이 교육과 훈련을 받는 곳이다. 제자훈련원의 체제는 아래의 도표와 같고, 화살표들은 각기 그 진로들을 표시한다. 이 학제는 각 교회에서 목회자의 스타일에 맞게 설치해서 하는 것이 무방하다. 다만 본학제는 현대감각을 살리면서 예수님의 제자훈련을 현대화시켜서 디자인 한 것 뿐이다. 제자훈련의 제도와 방식은 각각 문화와 나라의 차이에 따라서 달리 개발해서 시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제자훈련을 위한 체계가 잘되어 정착되게 되면 따로 제직훈련을 할 팔요가 없다. 특히 제직에 관한 훈련을 필요로 한다면 제직훈련을 위한 코스를 제자훈련원에 별도로 설치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제자훈련 각 코스에서 제직훈련을 위한 프로그램을 부가해서 평상 제자훈련시에 제직생활에 관한 교육훈련을 할 수 있다.
제자훈련에서 교육하고 훈련하는 것은 교인들로 하여금 지적인 면과 영적인 면, 그리고 인격교육까지 겸하여 받기 때문에 교회의 제직으로서의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는 셈이 된다. 아래의 도표는 제자훈련 조직표이다.
우선순위에 대한 교육
제자훈련에 있어서 우선순위 교육은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이 우선순위 결정문제가 제자훈련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이 우선순위에 대한 올바른 결단을 강요하셨다(마 8:21-22).
1. 시간의 중요성에 대한 강의 (시간관리)
특히 시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시간관리](time management)의 강의를 통하여 철저히 교육시킨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한 시간의 우선순 위가 절대적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큰 은혜와 축복을 내리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순종해야 한다.
2. 우선순위의 중요성 (최우선순위는?)
자기의 일에 있어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가 성공.실패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우선순위 결정의 지혜가 성공의 열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제자훈련원의 시간관에 대한 교육
제자훈련의 시간관(時間觀)은 한 마디로 말해서 "기회를 잡아라"(catch the opportunity)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누구를 막론하고 몇번의 기회를 주셨다. 세상적으로 결혼의 기회, 출세의 기회, 성공의 기회, 돈벌 기회, 사고를 모면할 기회등등을 주셨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구원의 기회 (고후 6:2, 히 12:17, 계 2:21), 사역의 기회 (눅 21:13, 삼상 10:7, 갈 6:10)등등을 주셨다. 옛 말에 "시간은 금이다"(Time is gold)라는 격언이 있다. 사실 시간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시간은 금쪽같다.
"시간"이라는 말은 헬라어 "카이로스"( )에서 왔는데, 이 "카이로스"는 옛날 희랍의 작은 남신의 이름이었다. 이 남신 "카이로스"의 모습은 양 발에 날개가 달려 있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달아나며, 머리는 앞에만 한줌의 머리채만 있고 머리가 전부 반들 반들 대머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남신 "카이로스"를 잡으려면 앞에서 머리채를 잡아야지 조금만 지체하다가는 신속히 달아나기 때문에 돌아서면 뒤에는 머리가 없고 대머리로 반들 빈들하기 때문에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이 남신의 이름인 "카이로스"( )에서 "시간" (time) 또는 "기회"(opportunity)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시간은 놓치면 금을 주고도 못산다. 베드로는 회개의 기회를 잡아서 구원받았지만,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멸망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삼상 10:7)고 했다. 사울은 사무엘의 말을 듣고 기회를 따라 행함으로 왕이 되었다. 열두 제자들은 기회를 따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 사역들을 할 수 있었다. 바울사도는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기회를 따라 하나님의 큰 종이 되었다. 지금도 여러분을 사도들과 같이 하나님의 성사업에 쓰시려고 부르셨다. 기회를 놓치지 말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따라 시간을 잘 사용해야 성공한다. 시간의 중요성을 알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 성공은 시간관리에 달려있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새 시대 새 역사를 창조하자," "개혁하여 새 시대를 건설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곤 한다. 특히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되풀이되는 것이다. 과연 새 시대 새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말이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느냐? 영웅이 시대를 낳는냐? 하는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말한다. 즉 시대를 잘 탓다는 말이다. 때를 잘 만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좋은 시기를 만나 출세하고 성공하게 되면 때를 잘 만났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영웅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시대에 부응해서 시대의 리듬을 잘 탓기 때문이다. 때를 잘 알아차리고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았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 성공하게 되고 성공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부러움과 존경을 받게 된다. 그러나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시대를 탄 영웅보다는 시대를 만드는 영웅이 더 큰 영웅이다. 시대가 낳은 영웅은 소영웅이지만 시대를 낳는 영웅은 대영웅이다. 시간을 잘 지켜서 이용하는 사람도 성공하지만, 없는 시간을 만들어(창조하여) 이용하는 사람은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
시간이란 창조와 더부러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인생의 성공 실패가 이 시간문제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중요한 시간에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행.불행이 결정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시간 즉 하루 24시간이 주어졌다. 누구는 23시간 주고 누구는 25시간 준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똑 같이 주어진 이 동일한 24시간에 어떻게 관계하느냐, 즉 이 24시간을 누가 더 효과있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성공 실패가 달려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없을 때 시간을 만들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없을 때 시간을 만드는 사람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없다"는 소심한 사람이 되지 말고 과감하게 시간을 창조해 낼줄 아는 대 영웅이 되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시간을 창조하자!" 시간을 창조하는 사람만이 오늘날에도 성공할 수 있으며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믿으로 시간을 창조하여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먼저 기회를 잃지 말아야 한다. 배움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나중에 후회한다. 출세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못내 아쉬워한다. 결혼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평생 고독해한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회개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영원히 후회한다. 은혜받을 기회를 잃어버리면 끝내 아쉬워한다. 구원의 기회를 잃어버리면 쫓겨나 고독해진다.
다음으로 시간의 리듬을 탈줄 알아야 한다. 하루의 일과 (routine), 일주일의 스케쥴(schedule), 한 달의 계획(plan), 일년의 프로젝트(project)등, 시간의 리듬을 탈줄 모르면 성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에, 자동차들의 흐름(stream, rhythm), 즉 교통의 흐름을 탈줄 모르면 사고나거나 교통체증(traffic jam)에 걸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 적극적인 면에서 시간을 만들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을 창조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시간창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믿음으로 시간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시간을 창조할 때에는 그 정도에 따라 크고 작은 이적이 나타나는데, 성경에 보면 시간을 창조해서 대단한 기적을 나타낸 예들이 있다.
첫째가, 여호수아의 경우이다. 여호수아서 10장 12절에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아모리 족속을 칠 때에, 해가 넘어가는고로 적군을 섬멸할 시간이 없어서 여호수아가 해와 달을 공중에 온종일 정지시킨 기적이 나타나 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므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이 때에, 해와 달이 중천에 머물게 되어 적군을 격파하고 승리할 시간을 만든 것이다. 이 사건은 언젠가 미국 NASA의 한 과학자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한다. 즉 온 종일이라 했는데 그것은 24시간을 의미한다.
둘째가, 히스기야 왕의 경우이다. 히스기야 왕이 한번은 죽을병이 들어 하나님께 얼굴을 벽에 대고 눈물로 간구할 때에, 하나님에 의해서 해의 일영표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한 기적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왕하 20:1-11). 이 때 역시 일영표가 10도 물러갔는데, 10도라면, 시간으로 환산해서, 정확히 20분(12시간 60분 10 360 20분)이 된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로 여호수아가 만든 시간 24시간과 히스기야가 만든 시간 20분이 확인된 셈이다. 물론, 이와 같이 직접적으로 시간의 근원을 조작해서 시간을 창조하는 일은 전에도 없었지만,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나님은 이 기적을 보이신 후 못을 박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도와 믿음을 통하여 주어진 여건을 조작해서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시간이 없어서 교회에 못나온다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이는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여건을 조작할 생각이 없다는 뜻도 된다. 응급환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시간이 없어서 병원에 못가겠다는 말이 나올 수 있는가?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닌 이상 인간은 처음부터 시간표를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 왔다. 또한 만들어진 스케쥴도 더 우선적인 일이 생기면 그 시간표를 변경하기도 한다. 제자훈련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교회에 약속한 시간이요 정규적인 스케쥴이다. 이 시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인간으로서 불가항력적인 일이 아닌 이상 변경하거나 파기할 수 없는 최우선순위(top priority)이다.
시간을 만들때, 시간에 매여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일이 생긴다. 시간을 창조할 때 기적이 나타난다. 역으로 말하면, "기적은 시간을 조작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은 뱅이가 일어났다고 생각하자. 이것은 큰 기적이다. 이 기적이 나타나려면 시간이 조작되어야 한다. 즉 앉은 뱅이가 일어나려면 의학적으로는 시간이 걸려서 서서히 펴져야 하는데, 기적은 시간을 무시하고 단숨에 펴버리고 만다. 다시 말하면, 기적은 시간을 무시한다는 뜻이요, 또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은 시간을 끌어 당길 수 있을 정도로 마음대로 시간을 조작한다는 뜻이다.
2. 우선순위 결단의 중요성에 대한 교육
이제는 우선순위의 중요성에 관한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에 들어간다. 이 우선순위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하여 우선순위에 대한 훈련에 들어가기로 한다. 아래의 글을 제자훈련시간 전에 미리 숙독하고, 그 중에서 특히 감동을 받은 부분들을 줄을 그어 준비하라고 한다. 그리고는 크라스룸에서 한 사람씩 돌아가며 감동받은 부분을 가지고 토의한 후에, 훈련사가 요약해서, 핵심의 결론을 내린다.
제자훈련에 들어가기 전, 이와 같은 오리엔테이숀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리엔테이숀은 제자훈련을 마치도록 정신적인 견인차 역할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흐리멍덩한 정신을 가지고는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전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이와 같은 정신교육 훈련을 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우선순위를 결정짓지 못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우선순위는 시간의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순위에 의해서 순간적인 시간의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하면 결단을 내린 우선순위의 시간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제자훈련사는 이 정신훈련 시간을 소중히 여겨서 제자생도들을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시도하는 제자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콘트롤에 실패하면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철저한 시간관리를 할 수 있도록 제자생도들에게 주지시킬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여 실제로 훈련해서 몸에 익숙해져야 한다. 미국 사람들에게서 한 가지 배울점이 있다면, 약속을 철저히 지키며 약속시간을 잘 지킨다는 사실이다. 제자훈련은 교회와의 약속인 동시에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최우선순위는?
당신은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30이나 40시간이었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습니까? 이 여분의 시간은 틀림없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겪는 엄청난 압박감을 덜어 줄 것 같이 생각됩니다. 하지만 30시간이 아니라 40시간의 여유를 준다 하더라고 우리들의 삶에는 끝내지 못한 일들이 계속해서 쌓이게 됩니다. 답장 못한 편지들, 방문해야 될 친구들, 쓰지 못한 글, 그리고 읽어야 할 책들이 우리의 마음을 산란케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면, 항상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곤 합니다. 특히 젊은이들을 볼 때면 더욱 후회감이 엄습해옴을 느낍니다. 왜 내가 젊었을 때에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했던가? 가끔 지식의 한계를 느낄 때면 더 더욱 후회감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는 이것도 현실과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지나간 일임에도 불구하고 과거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에 까지 나에게 엄습해와서 압박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긴급한 것은 현실적인 압박입니다. 지혜와 능력이 부족하여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우선순위에 실패하기 다반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30시간 40시간으로 된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더라도 곧 24시간일 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많아짐에 따라 더욱 더 일손이 요구되는 어머니로부터 진급에 따라 숙제가 많아지는 학생, 교회가 커짐에 따라 일이 많아지는 목사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 예외없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치지 못한 일들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일은 계속 쌓이므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직장과 교회에서는 경험과 기술의 발달로 더욱 더 고된 업무가 부과되고 있습니다. 현대 과학의 덕분에 콤퓨터가 나오고 전화, 팩스, TV등 첨단기구들의 등장으로 우리가 손끝으로 하던 산더미 같이 쌓인 업무들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테이타 뱅크(data bank)를 이용하여 모든 정보를 순식간에 얻습니다. 인터넽과 같은 전세계적인 정보나 프로그램 뱅크를 통하여 집에 앉아서 원하는 것을 즐길 수 있고, 스마트 하우스(smart house)에서 전화우편(phone mail), 전화쇼핑(phone mall)을 하며, 앞으로는 손끝으로 할 일이 적어지고 그냥 말로, 혹은 빔(beam)을 이용하여 업무나 일들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죠지 바르나(George Barna)는 21세기에는 스마트 하우스가 자동적으로 집안의 모든 기능을 해주는데, 예를 들면 불을 켠다든지, 방안에 있는 사람에 따라 실내온도를 자동으로 조절해준다든지, 텔레비죤을 비롯하여 식사준비등 집안의 모든일을 자동적으로 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기 때문에 사람이 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마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갈수록 할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지금보다도 몇배나 머리회전이 빨라야 합니다. 요사이 젊은 세대들이 일하는 것을 보면 전 세대 사람들의 젊었을 때 보다도 훨신 빠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걷잡을새 없이 빨리 돌아가고 있습니다. 요사히 첨단기구들에 의해서 일처리가 수십 수백배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줄지 않고 바쁜 생활은 여전합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을 쓸때에 타이프라이터로 일부를 쳐서 보냈더니 지도교수가 하는 말이 타이프라이터로는 감당해낼 수 없다고 하면서 콤퓨터를 이용해야 한다고 해서 결국 콤퓨터를 구입해서 논문을 마친일이 있습니다. 콤퓨터와 전화, 팩스, 카피머신등 다 구비해놓고 일을 해도 이리갔다 저리갔다 하면서 눈코뜰새 없이 뛰어다녀도 바쁜 것은 여전합니다. 갈수록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할 일이 갈수록 많아지는 반면에 즐거움을 점차 잃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근본적으로 혼동된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우선순위의 문제는 단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된 일 자체가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중요한 일에 몰두하여 장시간 전력을 기울여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결과 좀 지친다해도 성취감과 회열로 말미암아 피로감은 말끔히 해소됩니다. 친구 중에 약한 몸으로 쉴사이 없이 부흥성회를 인도하는 분이 있습니다. 피곤해서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아무리 피곤해도 단상 위에서 복음을 전하는 기쁨으로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는 것입니다. 첩첩이 쌓인 끝마치지 못한 일들에 짓눌려 불안감을 갖게 되는 이유는 보람없는 고된 일 때문입니다. 그 보다 중요한 일을 빠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마음을 불안 초조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이것저것 무작정 들어주다가 자신이 곤궁에 몰려 좌절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았어야 할 일만 했구나."하는 고백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장 밀어닥친 발등의 불을 끄느라고 막상 중요한 일을 놓쳐버리게 됩니다. 우선순위라는 중요한 문제를 생각케 해주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 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막상 중요한 일은 당장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말씀 보는 일, 어느 교우를 방문하기로 한 일, 어느 중요한 책을 세밀히 탐독하는 일등 이러한 중요한 계획들은 얼마든지 뒤로 미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긴급한 일들 즉 시시각각 우리를 압박해 오는 끊임없는 요구들은 즉각적으로 처리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삶의 유형에서 벗어날 길이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생애는 거기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바로 전날 밤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위대한 기도 가운데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었나이다."(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3년간의 사역은 극히 짧아 보였습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베풀어진 잔치에서 주님에 의해 죄사함을 얻고 새 생활을 시작한 창녀가 있었고, 수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는가 하면 열사람의 병자들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건강을 되찾았다면 백사람 정도는 아직도 고침을 받지 못한채 병중에 신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날 밤에 수많은 일들을 남겨 놓고 긴급했던 인간들의 필요를 다 채워주지도 못하였지만 주님께서는 평안을 누리셨으며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주 열심히 일하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리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막 1:32-34). 때로는 병자들을 고치시기 위해 식사를 거르신 적도 있었으며 늦게까지 일하시는 주님을 보고 제자들마저 정신나간 것으로 생각한 경우도 있었습니다(막 3:21). 한 번은 예수님께서 고되게 가르치신 후 배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건너편으로 가실 때에 너무 곤하게 잠든 나머지 심한 광풍조차도 그를 깨울 수 없을 정도로 지치셨던 적도 있었습니다(막 4:37-38). 그렇지만 주님의 삶은 그저 들뜬 가운데 분주하기만한 삶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아셨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한 개인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대화를 나누셨던 적도 있습니다. 주님의 삶은 때에 맞춘 놀라운 균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선순위의 지혜입니다. 주님의 생애에는 적절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내적인 휴식은 분주했던 삶에 여유를 더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버림받은 사람들, 고통과 실망 그리고 적대감과 사망 속에서 신음하는 쓰레기 취급받는 폐인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위대한 자로 변화시킬 수 있는 비밀과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며, 30년 남짓한 짧은 인생을 일단락 짓고 있으나 그는 목표를 "성취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삶의 균형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경탄만 하고 있을 뿐 그와 같은 삶을 가능케 한 이유를 간과해서는 아니되겠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비밀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루종일 땀흘리며 사람들을 위해 수고하신 뒤에 무엇을 하셨는지 마가복음 1장 35절을 통해 살펴봅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예수님의 매력적인 삶과 성공적인 사역의 비밀이 이 말씀에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렸고 그것을 순종할 힘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이 모두 나타나 있는 청사진을 소유하고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날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삶이 긴급한 일들로 인한 당혹에서 벗어나 정작 중요한 우선순위의 일들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도 우선순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로부터 "주여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요 11:3)라는 긴급한 소식을 들었을 때 이것보다 더 긴급한 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요한은 주님의 역설적인 반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요 11:5-6). 무엇이 가장 급한 일이었겠습니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하는 형제 병든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병든 나사로가 아닌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죽음을 그대로 방치해 두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우선순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자유롭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삶의 본과 약속을 통하여 급한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발견할 수 있어서 여유를 갖게 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1-36). "너희가 만일 내 말에 거하면..." 이것이 참 자유함을 얻는 비결입니다. 기도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시야를 갖도록 해 줍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은 효과적인 봉사를 하는 데도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 사업가들은 평가를 위해 따로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많은 판매원들이 금요일 오후를 다가오는 주 동안 이루어질 중요한 활동들을 신중히 계획하는 일에 바침으로 그들의 사업을 혁신시키고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있습니다. 만약 어떤 중역이 너무 바쁜 나머지 조용히 앉아 계획을 세우는 일에 등한시하면 얼마 못 가서 그는 계획 세우는 일에 시간을 투자할 줄 아는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그리스도인이 너무 바빠서 잠시 시간을 내어 영적인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못한다면 그는 중요한 일에 대한 우선순위를 발견할 수 없게 됩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과 기도로 보내는 경건의 시간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흩뜨러진 관계를 정상화시켜 줍니다. 이 시간에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보여주시는 뜻대로 순종할 것을 굳게 결심하도록 하시오. 또한 이런 여유있는 시간에 이미 결심했던 일들을 고려하면서 새롭게 할 일들을 우선순위대로 기록해 보시오. 유능한 지휘관은 언제나 싸움이 시작되기 전 그의 전략을 다 세우고 기본적인 결정들을 이미 다해 놓은 상태에서 전쟁을 치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하여 그의 계획을 수정할 준비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루가 시작되기 전 당신의 영적 전쟁에 대비하여 모든 계획을 수립하도록 하되 일단 유사시나 예기치 않던 사람이 방문하는 경우도 예상하여 대비하시오. 또한 당신은 전화로 요청해 오는 초대에 즉각 응해버리는 유혹을 피해야 합니다.
아무리 당장 생각에 그날 아무 선약이 없다 할지라도 하루나 이틀 정도 여유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기다리며 결정을 내리시오. 전화를 끊고 호소하듯이 간청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사라진 뒤 생각해 보면 놀랍게도 그 일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당신이 긴급한 요청을 받는 첫 순간을 지혜롭게 넘긴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좀 더 나은 입장에서 그 일의 중요성을 헤아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선순위를 알게 됩니다. 날마다 갖는 경건의 시간뿐만 아니라 영적인 계획표를 세우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시간을 떼어놓도록 하시오. 그래서 그 시간에 지난 일을 평가해 보고 주님께서 주시는 교훈들을 기록해 보며 다가올 일주간의 목표를 세우시오. 때로는 한달 간의 목표를 세우고 계획하기 위해 하루를 떼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자주 실패합니다. 바쁘면 바쁠수록 계획하는 시간이 더욱 필요한데도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계획에 의해서 우선순위를 예정할 수 있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매일 주님과 경건의 시간을 보내는 일과 계획을 세우는 일에 적절히 시간을 떼어놓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중요함을 안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시간을 앗아가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도 바로 이러한 시간의 우선순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했던 모든 긴급한 일들이나 그가 하고 싶었던 모든 일들을 다하시지는 않으셨으나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이 최 우선순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때 절대로 좌절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바로 오늘 이 순간 이곳에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렇게 할 때에만 다 끝마치지 못한 일들도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길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 젊은 이스라엘 총리가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으로 보면 그의 생애의 모든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보다 더 오래 살다가 조용히 죽어 갈 것입니다. 그러나 임종의 순간이 올 때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다 끝마쳤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그렇게 할 때에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선순위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셔서 주님의 뜻을 행하여 보다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교회란! 예배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교회성장론 일반 총론 (0) | 2013.01.23 |
---|---|
[스크랩] 교회성장론 일반 총론 (0) | 2013.01.23 |
[스크랩] 이상적인 교회구조는 어떤 것인가? (0) | 2013.01.23 |
[스크랩] 교회개척과 성장에 대한 바른 이해 (0) | 2013.01.23 |
[스크랩] 나의 목회관 (정진수) 출석번호 44 (0) | 2013.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