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인 교회구조는 어떤 것인가?
현재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고 많은 변질과 왜곡으로 침륜 되어
가고 있음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크리스챤으로 이 역사와 민족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이다.현실적 요구나 관습이나 전통을 떠나 우리에게 완전한 모범을 보여
주는 초대교회의 모습들을 고찰해 봄으로써 현대교회의 변질된 부분을 개혁하며
왜곡된 부분은 바르게 하고자 함이다.
시대의 필요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원칙이 있고 또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가변적인 원칙이 있다.진리는 하나이나 적용은 여러가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원칙을 고찰한 후에 이로써 가변적인 적용이 따라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따르고자 한다.
속사도시대로부터 서서히 교회는 참 모습에서 이탈했고 중세시대 때의 암흑과 환란
가운데서 위대한 개혁자들의 외침으로 교회가 초대교회처럼 참 모습을 유지하려
했으나 현대교회는 성경말씀으로 교회가 계속 개혁되어 가야 한다는 그들의
가르침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또다시 어두움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세대사람이 교회를 외면하게 될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오히려 우리자신의 욕심과 굳은 마음이 이 세상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 하나님 앞에 설 인생들이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야 하지 않은가.이 글 또한 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때로는 부분적일 수가
있다.그러나 온전함은 다음 세대의 개혁자들에게 맡긴다.
교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어떤 고통과 시련이 있더라도,
역사와 교회 앞에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겨 나가리라.
하나님. 하나님의 존전에서 열린 마음으로 시행착오를 해 나가오니,
우리를 성령의 권능으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소서.....
초대교회는 두가지 직분밖에 없었다. 장로와 감독은 같은 직분의 다른 이름들
이였기에(행20:17,28;딛1:5,7) 장로나 감독 그리고 집사라는 두가지 직분이 신약
성경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신약교회에 존재하는 다른 직분들이 있었다.
에베소서4:11을 참조하면 사도,선지자,복음전하는자,목자,교사라는 직분이 있고
고전12:28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이는 사도,예언자,
교사등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초대교회 시대만 존재했던 임시직과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항존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의 특별한 필요에 따라
주님께서 직접 세우신 사도들이 있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대언하는 역할을 하는 구약적인 의미의 역할을 하며, 예언자는 신약성경에서
그 역할들을 고찰할 수 있다. 사도행전15:32에서는 신자들을 격려하고 믿음을
굳세게 해주는 모습과 사도행전 11:27,28에서는 실제로 장래에 있을 일을
예언한다. 또한 고전14:3,4에서는 예언자는 교회의 덕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한다. 그러나 예언은 은사로써 설명하고
있다.(고전14:1) 항존직은 장로(감독)와 집사가 있다.
집사는 초대교회의 일곱집사(행6:3)와 빌1:1에서는 집사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는 일꾼으로 표현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집사라고 인정하고 있다. 집사들은 속사(俗事)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들을 했지만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다가 순교당했고
빌립은 전도자로서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신자의
근본적인 역할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집사의 임명과정을 살펴보면 열두사도가 집사의 자격을
말하고(행6:2,3) 그 회중들이 뽑아서 사도들 앞에 세우면 사도들은 공적인
표현으로 기도하고 안수를 한다. 사도들의 전권으로 세울 수가 있었지만
회중에게 맡긴 것을 볼 수 있다.
장로의 직분은 구약에서 이어져오는 의미와 신약에서 새로운 의미 부여로 복합적
인 것이 된다. 구약적인 의미란 연장자로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대표하는 역할을
하며 신약적인 의미는 신앙의 경륜을 갖고 양들을 치는 목자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사도요한도 자신이 장로임을 말했고(요한이서1:1) 베드로도 자신이 장로
임을(벧전5:1)말하고 있다. 중요한 시사를 해주는 사도행전 20장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마지막 작별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는데
행20;28에는 그 장로들이 감독자(원어에는 감독과 동일어)로 표현됨을 볼 수 있다.
그 장로들이 하는 일을 양떼인 교회를 치는 일이다.(행20:28) 그리고 그 장로들은
행20:35에서 바울의 모범처럼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딛1:8
에서는 감독의 자격으로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않아야 한다고 한 것을 상고하면
신자로서 세상에서 일하면서 옳지 않는 수단으로 물질을 얻지 말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장로와 감독의 말을 혼용한 이유를 생각하면 '장로'라는 말은 신앙의 경륜,나이 및
지혜를 의미할 때의 표현방법이고 '감독'은 양들을 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과 생활을 돌보는 의미일 때 사용했다. 이 두 용어는 같은 직분에
대한 다른 이름 일뿐 동일한 지위인 것이다. 에베소서4:11의 '목사' 라는 말은
'목자'의 뜻이다. 여기서 '목자'란 단어는 요10:11의 '목자'와 동일어 이다.
실제로 '목사'란 직분이 사도들의 순교 후 2세기 말 3세기 초에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으나 근거가 희박하고 오히려 종교개혁 전후에 카톨릭의 신부직과 유사
한 역할을 하는 직분명으로 개신교의 전임설교자에 주어진 명칭인 것 같다.
(초대교회의 크리스찬들은 그들의 교회를 조직체나 제도적인 SYSTEM으로
보지 않고 유기체로 보았다.즉,성령이 교회를 친히 주관하시므로 교회를
외적으로 조직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초대교회 교인들은 사도들뿐 만
아니라 모든 크리스챤들은 항상 서로 동등한 형제,자매로 생각해왔다.
그 누구도 특별한 지위나 위치를 주장하거나 제시하지 않았다.그런데 대략
1세기 후반부터 시작하여 2세기중반에 걸쳐 교회구성 및 조직에 많은 변화를
겪는데 그 주된 원인을 2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교회의 성장에 따른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며
둘째는 각종 이단들의 등장에 따른 혼란과 사도이후의 최종적인 권위에 대한
기준의 문제였다.
상기의 이후 때문에 성직제도나 교직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여기서
목회자와 평신도의 개념이 정착되기 시작했다.장로라는 직분에 감독(BISHOP)
이라는 직분이 갈려 나와 전문적이고 특별권위를 가진 직분으로 변천되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기구화 제도화되기 시작하여 중세에는 사제 또는 주교 그리고
그들 위에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 교회를 철저히 계급화,제도화로
만들었던 것이다. 개인이 받은 은사대로 성령께서 질서있게,적당하게 하신
교회에서의 역할들이 소수의 성직자들이 하향식 구조와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
그 범주 속으로 교회를 이끌어 갔다.
교회가 이렇게 조직체로 변한 까닭은 성령의 인도하심이나,교회구성원들의
동일한 신념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인 어려움과 실제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이단의 등장 때문 이였다.
교회가 이렇게 카리스마적인 교회에서 기구적인 교회로 바뀌어 간 것이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지만 지금 현대교회에게 많은 시사점과 안타까움을 남긴다.
초대교회직후 교회의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과 좌절을 통하여서 우리 현대
교회는 성경적인 교회로 개혁되기 위하여서는 자기반성과 노력,수고가
따라야 하리라. 그러한 왜곡과 안타까움이 승화되어 진정한 교회로써의
거듭남을 그리며.......)
'목자'란 직분은 베드로전서 5:1~4에서 그 의미를 알 수가 있는데 그것은 양떼에
게 모범을 보이고 기쁜 마음으로 사심없이 양떼를 치는 목자 및 감독으로
표현된다. 즉,베드로의 고백처럼 같은 장로로서 권면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엡4:11의 목자란 말은 장로가 자기의 소속 교회에서 목자의 심정으로
양떼를 감독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또한 논란이 되는 딤전5:17을
살펴보면 잘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로 구분이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자의 장로를 지금의 장로들을
말하고 후자의 장로를 목사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장로는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자의 장로를 목사로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후자의 다스리는 장로란 교무(敎務)장로를 가르친다.
성경은 각 교회에 장로를 세우고 성도를 잘 다스리고 잘 가르치라 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행전 1:15~26에서의 사도를 세우는 장면이다.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사도 한명이 비게 되어 새로이 한명을 세우는 구절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중요사에
으뜸사도인 베드로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그의 전권으로 충분히
선출하거나 사도들끼리 의론하여 임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약 120여명의 회중에게 맡겨
그들이 뽑게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사도베드로는 사도의 자격요건만
말하고 그 모인 회중이 복수로 뽑아 마지막에는 그들이 또한 제비를 뽑아 선출한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일곱집사를 세우는 행6:2~6을 살펴보아도 그 모인
회중이 뽑으면 사도들이 공적인 인정의 표식으로 그들에게 기도하고 안수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꾼의 임명은 베드로나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설교대상인 그 형제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도 하다. 딛1:5을 살펴보면 디도에게 장로들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고 행14:25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장로들을 세우는 장면이 묘사
된다. 즉, 회중들이 장로들을 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는 부득불 사도나 사도의
전권을 위임 받은 자가 장로들을 세웠다. 그러나 장로들을 '임명했다'는 말에서
원문의 참 뜻은 '거수로 선출하다'란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때 한가지 원리를 도출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교회의
직분자나 일꾼을 뽑을 때는 그 교회의 회중이 선출했다는 점이다.특히 장로를
세울 때는 항상 복수(復數)로 선출한 것도 알 수 있다. 신약교회의 장로들은
그 해당 교회의 회중들의 투표로 그 직무에 임명되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직접 부르심에 의해 직분을 맡는 시대도 지났고 개인적인 소명이 직분을
갖게 하는 보증서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대를 위해 이런 원리를 성경에
기록하셨던 같다. 또한 초대교회에서는 직분자를 세우기 위해 행한 유일한
의식은 손을 얹는 장립(將立)식이다. 행6:6,13:3,딤전4:14,5:22을 고찰하면
안수를 행하므로 교회의 직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안수를 행하는 사람이 누군 인가를 살펴보면 딤전4:14에서는 장로들의
모임인 장로회에서 안수를 행했음을 알 수 있고 행13:1~3에서는 복음전도자를
파송하기 위해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공동으로 안수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행6:6의 집사들을 세우는 장면에서도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를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딛1:5에서처럼 디도같이 사도가 자신을 특별하게 다른 사람을 장립할 수
있는 임무나 특권이 주어진자라면 홀로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에는
불가능한 이유는 사도들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딤후1:6을 보면
사도바울이 홀로 디모데에게 안수한 것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의 해석을
몇 가지로 생각해보면 첫째로 사도바울이 특별한 이유로써 개인적으로 안수한
다음 나중에 장로회에서 공식적인 절차로써 다같이 안수를 행했거나
둘째로 사도바울이 포함된 장로들의 모임에서 다같이 안수를 행하였으므로
바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안수를 행한 것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사도들도 장로회에서 장립할 수
있을 때는 홀로 안수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신약교회에서는 직분자의
장립은 장로들이 복수로 모인 장로회에서 행했다는 사실이다.초대교회의 최고
책임자며 최상의 영적권위를 가진 자는 사도도 여타의 다른 직분자도 아니고
세속군주는 더욱 아닌 그리스도 자신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유일한 주인이시다. 다만 직분자는 그리스도께서
위임한 일에 대하여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교회의 일들을
처리할 뿐이다. 어느 특정인에게 교회의 영적인 모든 것을 위임하시지 않으셨다.
베드로 자신도,사도바울도 자신을 최고의 사도로 선포하지 않았고 다만 다른 동료
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교회의 일꾼으로 행동한 것이다.
행15:1이하를 보면 유대출신의 거짓교사로 인하여 안디옥교회는 논쟁에 빠져 홀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모인 일종의 예루살렘
총회에 그 문제를 위임한 것을 볼 수 있다.그 모임의 결정으로 안디옥교회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했고 그 권위에 순복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같이 사도들이 영적권위로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를 소집하여 그 문제를 토론케 하여 다수로 결정하게
된것은 사도가 없는 세대를 위해 모범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되며 둘째 각 교회는
장로회에 어떤 문제를 상정할 수 있는 권리와 장로회는 그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영적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회는 개교회를 관리하고 지배하는 위치가
아니라 문제가 발생된 교회를 도와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임을 성경을 강조한다.우리모두가 제
사장들이며 그리스도의 대사이다. 우리는 자기가 부르심을 받은 그 직업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중보자요 화해자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직분은 역할만 다를 뿐 서로를 주장하거나 지배하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겸손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야 한다.
한 사람이 모든 영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다. 각자가 맡은 직분과 은사받은 대로 그리스도께 충성해야 하며
교회의 몸을 세워야 한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며 같은
한 형제,자매이다. 각 그리스도인은 각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양심의 자유과 신앙의 결단에 따라 교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데 교회의 회중에 의해서 그 직분이 주어진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각 개인을 성숙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며 본질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단체나 어떤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즉,생명력이 있어
성장과 성숙을 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구원에로의 초대와 그분의 사역을 담당키
위한 것으로써의 사명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을 교역자에게 위임
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평신도라고 하여 제한적인 신앙에 안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믿는 자의 무리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만
다를 뿐이지 계급적이고 분리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교회의 구성원은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서로 다른 지체들 일뿐임을 성경은
강조한다. 구약의 광야교회처럼 항상 이동할 준비를 갖추어야 하는 것처럼 교회는
늘 성경으로 개혁과 변화를 감당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 건물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 같이 강조하여 하나님과의 중보를 의미하는 제사장문화를 올바르게
개혁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당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종교개혁자들도 온전히
감당치 못한 미완(未完)의 개혁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진정한
예배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다.이미 신약에서는
장소 즉, 성전이나 교회당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예배의 의미는
사도바울의 말처럼 자기를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인데 그것은 전적인 헌신을
의미한다. 절차와 어떤 순서에 따라 행해지는 어떤 의식이 아니다.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는 진정 자기의 삶 전체를 헌신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날이
주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할찐대 우리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다만 하루를 정하여 성도가 서로
교제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날이면
충분하다.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다만 우리는 청지기일 뿐이다.
십일조는 주님의 것과 내것을 구분하는 의미가 내포될 수 있다. 나의 어떤 것이
주님의 것인가. 모든 것이 아닌가! 본래 헌금의 의미는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나누는 '코이노니아'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생명과 호흡,
그리고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신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 것인가.
오히려 헌금을 드림으로 자기에게 또 다른 이익을 얻고자 하는 보상심리는 없는
것인가. 이런 샤마니즘적인 요소를 없애야 한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쌍한 사람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제도적인 주일성수를 요구하시지 않으신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매 순간 주님을 위한 날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제도적인 주일성수,십일조생활,교회봉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또다른 신앙의 판단이며 중세로 돌아가는 행위이며 물질적인
기독교인 것이다.
초대교회처럼 각자가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삶을 성실히
살아 가야 하는 것이다.우리의 교회는 끊임없는 교육과 이웃에게 나눔이 필요하다
형식적인 기념절기들.신약교회는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신약교회는 자기의 죄에서
죽음과 그리스도안에서 구원과 부활이라는 의미로 침례를 받았다. 관수법이나
살수법이 아닌 온전한 침례를 받았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았다.
믿음이란,구원이란 인격적인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에 신앙을
대리하는 유아세례를 행하지 않았고 자기와 틀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무리를
정죄할 수 없다. 초대교회처럼,성경의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우리의 취향대로 시대의 요구대로 진리가 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후에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최초로 행한 놀라운 사건은
서로 물건을 통용하며 재산을 공동소유했다는 사실이다.이것의 의미는 이제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이세상 사람들이 목적으로 삼고 있고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고 있는 재물, 즉 물질주의를 초월하는 신령한 천국의 시민으로 다른 가치관과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간다는 하나의 분수령적인 사건인 것이다.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이나 세상적인 목표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산상보훈의 말씀처럼.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이며 기쁨은 구원인 것이다.이것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감사하게 살수 있어야 한다. 비록 무화과 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우리에 양과 소가 없을찌라도... 종이 자기 일을 행했다고
사례하는 주인이 있겠는가.(눅17:7~10) 세상적인 복 때문에 교회에 충성 봉사하게
하는 교훈을 그쳐야 한다. 기독교는 행함을 신앙의 판별식으로 삼고 있다.
의식이나 교리에 묻힌 신앙을 죽은 신앙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우리의 신앙은
이웃사랑으로 현현되어야 한다. 지식이나 제한적인 한날(日)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복음은 세상적인 가치관과 방법을 초월하는 정반대의 가치관과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만일 복음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아편에
불과한 것이다. 복음은 모든 절대화되고 신성시된 인간의 교만과 위선을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다. 죄인이 만든 타락된 문명임을 고백해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 높이여 하나님대신에 세상적인 것으로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서구사회가 전해준 복음과 한국적인 문화적 흐름 속에서 왜곡되고 또한
복음이 변질된 부분을 찾아내어 올바르게 고쳐야 한다.
우리 죄인된 인간에게 오신 그리스도를 우리는 부유층과 기득권층적인 교회에
제한시켜 여러가지 형식과 제도로써 종교생활을 강요하고 있다.실제로 산상수훈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큰 모험이며 결단이며 자기부인의 고통이
따르는 법인데 교회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기독교로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일종의 취미나, 종교생활로, 또한 쉬운 제자도를 가르쳐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교회당의 대형화,물질적인
축복선포, 개인이기주의,이 모든 것은 교회가 돈을 섬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경제제일주의가 교회에서도 불변의 법칙으로 통용된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여기서는세상적인 위치,학벌,지연,돈이나 권력으로부터
자유하는 세상과의 유사사회가 아닌 대조사회로써의 공동체인 것이다.
세상에서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고 변화이며 하나님나라의 특징이며 복음의 역할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수단과 방법의 부족으로 제한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일년 예산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는 법칙에 따라 서로의 동등성이 요구되며 복음사역의
기초로써 이러한 동등성이 적용 되는 것이다.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사랑과
희생의 공동체이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필요하다. 주님은 자기의 피로 산 교회를 위해 자기의 주권적으로,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이것은 각 개인의 믿음이나 어떤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사받은 사람이 받지 않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서도 안되는 것이다.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은 이런 은사들이 성령의 열매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소유해야 하는
의무로 규정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치하신다는 가시적인 표현이 되는
것이다. 은사들이 구원의 징표나 구원받는 수단이 아닌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숙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인 것이다.양적인 성장이 교회의 부흥이 아닌 질적인
성숙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이다. 급격한 양적성장은 필히 세속화를 낳고
그런 세속화는 교회의 영적 죽음을 낳는다. 교회의 계급적인 계층들을 없애고
진정한 동질성을 즉,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됨'을 회복해야 한다.
이 사회와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다하도록 사회정의와 기독교문화 정착에도
힘을 기울려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문화명령에 순종하여 자연보호 및
환경오염에 대하여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아울러 여성의 진정한 역할
재 조명이 필요한데 남성의 사고방식이 바꾸어져야 한다. 남성들의 직장에서의
역할과 가치만큼 가사의 일과 고유한 일에 대하여 동등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남여평등이 모든 역할에 있어서의 참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유한
역할들에 대하여 서로간의 인정과 함께함을 배워야 한다.교회는 교회의 임무들
중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세상에게 빼앗겨 버렸다. 이제는 교회가 모든 삶과
사회의 분야에 있어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여야 할 때이다. 신앙의 이기적인
개인주의를 벗어나야 하고 진정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
크리스챤의 삶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깊이 명심해야 한다. 편리주의를 벗어나
좁은 길로 가기를 힘써야 한다. 은사를 받은 대로 자기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주안에서 모두 '하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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