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십자가의 도”

하나님아들 2024. 11. 6. 15:33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목차

 

Ⅰ 서론

  1. 문제 제기및 연구목적

  2. 연구 방법

 

Ⅱ. 본론

  1. 십자가의 일반적 이해

   1) 십자가의 역사와 예수의 십자가 처형

     (1) 십자가형의 역사

     (2) 십자가형의 잔인성

     (3) 형벌의 대상과 목적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2) 십자가의 일반적 의미

     (1) 십자가의 중심성

 

  2. 십자가의 도

   1) 갈 2:20과 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의미

   2) 구원파의 오류

   3) 워치만 니의 경험

   4) 십자가의 도의 핵심 단어인 마지막 아담

     (1) 마지막 아담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뜻

   5) 객관적인 죽음과 은총

     (1) 객관적인 죽음

     (2) 객관적인 은총

   6) 주관적인 죽음과 은총

     (1) 주관적인 죽음

     (2) 개인의 죽음

     (3)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사람을 십자가 위에 못박는 것이다

     (4) 주관적인 죽음의 과정

        ① 영적 성장에 대한 성경적 견해

        ② 아브라함의 영적 성장에 대한 예

          a. 아브라함의 성장 과정

          b. 로마서 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흰옷과 인침과 할례와의 관계

      (5) 주관적인 은총

    7) 속죄론적 십자가의 도

    8) 창조론적 십자가의 도

      (1) 마지막 아담과 옛창조

      (2) 부활하신 예수님과 재창조

 

Ⅲ 결론

 

* 참고문헌

 

 

 

 

 

 

 

 

 

 

 

 

 

 

 

 

 

 

 

 

 

 

 

 

 

 

 

 

 

 

 

 

 

Ⅰ 서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십자가의 도는 모든 믿는이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요 바울사도의 핵심적인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다. 특히 워치만 니의 사상을 잘못 이해한 구원파, 왕중생파 등에 의하여 오늘날 많은 피해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

  사도 바울은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또 롬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한다.

  이 말은 바울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때에 같이 죽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15:31에서 "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하였다.

 갈2:20과 롬6:6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였는데 고전15:31에서는 또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 대단히 모순적인 말을 하고 있다

"여러분 자신이 죽은 것이 확실하죠"? "바울 사도가 고백하였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라고 질문하면 죽었다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없는 현실이다.

  어떤 성도는 은혜가 충만하면 자신이 죽었던 것 같은데 그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자신이 죽지 않은 사실이 너무나 확실하게 나타나므로 자신있게 "나는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여러분 십자가에서 죽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하면 죽었다고 고백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고 또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점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십자가의 도는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별로 없는 현실이다.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목사님께서 십자가의 도, 바울 신학의 초점을 확실하게 깨닫고 하시는 말씀이 "지금까지 헛소리를 많이 한 것 같다" 하셨다. 이렇게 귀중한 사실을 모르고 지금까지 강의를 해오고, 목회 하면서 설교를 해 왔다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안타까워하면서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는 큰 기쁨과 감사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1)

 

 이와같이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존폐의 기로에 서 있을 정도로 교회의 세속화가 심각한 실정이다. 양적으로는 부흥이 되었지만 질적으로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인본주의, 기복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 교권주의, 믿음만능주의 등등 부패하고 부조리한 모습들이 많은 교회들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2)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리라”(갈6:14) 에 선포하였다.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였는데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십자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결코 교리가 아니다. 만약 교리라면 5분만 들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이에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무명의 선생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십자가의 참 의미와 그 도를 연구하여 모두가 십자가로 돌아가서 마지막 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기 부인의 삶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자 한다.

 

2. 연구 방법

 

 바울 사도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라는 말씀을 주제로 바울 사도가 말한 십자가의 도의 의미를 성경을 위주로 하여 진행하고자 한다. 십자가에 대한 고찰은 많은 연구와 자료가 있지만 "십자가의 도"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실제로 십자가의 도는 바울사도로 시작하였지만 20세기에와서 중국의 성자 워치만 니가 자기의 경험한 것을 위주로 정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워치만 니의 경험, 그리고 성경의 핵심진리의 저자이신 무명의 선생님의 깨달음을 위주로 하여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십자가의 도의 뜻을 연구하고자 한다.

 

 

 

 

 

 

 

 

 

 

 

 

Ⅱ. 본론

 

1. 십자가의 일반적 이해

 

1) 십자가의 역사와 예수의 십자가 처형

 

  (1) 십자가형의 역사

   십자가형은 주요한 형벌의 한 방법으로서 대략 기원전 6세기에서 서기 4세기까지 지중해 분지 주위에 살고 있던 고대 사람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 형벌의 잔인성 때문에 십자가형은 희생자에 대한 엄격한 처벌로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범죄를 억죄하는 두려운 방법으로서 의도 되었다. 십자가형은 희생자를 말뚝에다 꿰찌르거나 아니면 가죽끈으로 말뚝에다가 매달아 고정시키는 방법으로부터 발전된 형태이다. 꿰찌르는 방법은 극도의 고통을 가져왔으나 빠른 시간 내에 죽음을 가져왔다. 만약 희생자가 단지 말뚝에 매달리기만 했다면 그는 더 오래 동안 고통 받아야 했고 외부에 노출된 상태에서 마침내 지쳐서 죽게 되었다. 또한 그가 충분히 땅에 가까이 매달려 있었다면 행인들과 심지어 야생 동물까지 그에게 고통을 가했다. 십자가형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런 처형방법으로부터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희생자의 펼쳐진 팔들은 대들보에 묶이거나 못을 쳐서 고정되었다. 그런 다음 그 대들보는 곧은 말뚝의 꼭대기에 흠을 파서 놓이거나 새겨진 금에 따라 옆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십자가 형에 대한 최초의 역사기록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기원전 512-485)가 바빌론에 거주하는 3000명의 사람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처형방법은 페르시아인들로부터 다른 민족들, 즉 페키니아인들, 이집트인들, 그리스 식민지인들, 카르타고인들, 그리고 로마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졌다3)

 

(2) 십자가형의 잔인성

  서기 200년경 로마의 법률가 율리우스 파울루스는 십자가형이 로마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세 종류의 사형 방법이 있었는데 십자가형,화형, 교수형이 있었는데 그 중에 십자가형이 가장 잔인한 방법이었다

  십자가형은 그 형벌의 가혹함 때문에 항상 하류 계층에게만 적용이 되었고 상류 계층에게는 보다 인간적인 형벌이 적용되었다. 십자가형은 복수에 대한 원초적인 욕망을 만족시켰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통치자들 그리고 대중들의 사디즘(sadism)적인 잔인성을 만족시켰다.4)

  십자가형은 최소한의 매질을 포함하여, 다른 고문 형태와 함께 사용되었다. 비교적 적은 비용을 들여 공적으로 큰 효과를 얻기 위하여 범죄자들을 수일 동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한 후 죽일 수도 있었다. 십자가형의 잔인성은 다음과 같은 측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중 재판에 따른 범죄자들의 가혹한 처벌이 요구되면 대중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십자가형이 사형의 수단으로 선택되었다. 이 후 십자가형은 처형한 자를 벌거벗겨 눈에 띄는 장소 즉 네거리, 극장 안, 높은 언덕, 그가 범행한 장소등에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전시함으로써 내면적인 차원에서 처형당한 자가 맹수들과 시체를 뜯어먹는 새들의 먹이로 주어졌다는 것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십자가형은 처형당한 자에게 완전한 굴욕을 가져다주었다.5)

 

 (3) 형벌의 대상과 목적

  "십자가형은 정치적, 군사적 범죄에 대한 처형 방법이었으며, 그러한 범죄에 대한 처형 방법으로 계속 실시되었다. 페르시아인들, 카르타고인들 사이에서는 고위 장교들, 지휘관들이 반역하였을 때 십자가형이 부과되었다.

  로마 시대에 와서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았고 노예들과 외국인들에게만 적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부분적으로만 정당하다. 왜냐하면 고대 로마 세계에서는 처형자를 저주받은 나무에 매다는 처벌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은 중대한 범죄와 대역죄를 범하였을 경우 로마인들에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십자가형은 로마가 정복한 민족들의 반항의지를 분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그것은 폭도나 통치하기 어려운 지방을 다스리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로마 당시 반란을 일으킨 식민지 원주민들은 적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도적무리로 간주되었다. 이 때 그들을 처형하는 방법이 십자가에 매달거나 맹수의 먹이로 던져주는 형벌이었다. 당시의 유명한 도적들은 가능한 한 그들이 범행을 저지른 장소에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도적들과 그들과 동일시된 반란을 일으킨 지방 주민들은 지방 총독의 임의의 재판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일반적으로 지방 주민들은 이러한 총독의 강경한 조치를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당시 널리 퍼져 있는 도적무리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적들을 십자가에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것은 도적들의 발흥을 억제하는데 기여하였고, 동시에 피해자들을 만족시켰다. 이 당시 시행되었던 십자가형은 위험한 범죄자들과 폭력배들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자들을 경멸하였다.6)

 

(4) 예수의 십자가 처형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죽음은 사실 그 자체가 실패요 최대의 악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변형되고 진화되었다고 말한다.7)

 역사적으로 예수는 기원전 서기 30-31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정치사에 따라서 볼 때 예수는 옥티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 서기 14)와 티베리우스(서기 14-37) 두 황제가 다스리던 시대에 해당된다. 그리고 유대 왕으로는 헤롯치세(治世)(기원전 37-4)때 출생하였고, 그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기원전4- 서기39)가 베레아와 갈릴래아의 분봉영주로 있는 동안 활동하고 처형되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로마 식민지에서는 강도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는데, 강도들은 "날강도들" 또는 "독립투사" 편에 해당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에 따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외형적으로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는 그 재판 과정에 유대인들이 참여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주의깊게 보아야 할 점은, 유대인들에게는 즉 그 최고회의에는 사형의 권한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국가질서에 위험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에 단죄했다는 사실은 옳은 것으로 추정된다. 유대 당시의 권력층과 로마인들과의 이해관계가 서로 같으므로 예수는 십자가형에 처해진 것이다.

 당시 사형수가 태형을 받은 곳에서부터 성벽 외곽의 처형장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십자가의 총 무게는 약 136kg 이상이었기 때문에 흔히 사형수들은 십자가의 횡목만 지고 갔다. 횡목의 길이는 1.5-1.8m 가량 되었고 그 무게는 34-57kg 가량 나갔는데 횡목은 사형수의 목덜미에 가로질러 놓이고, 양쪽 어깨로 균형이 유지 되었다. 이때 대개는 양팔을 벌려 횡목에 묶었다. 예수 역시 이러한 형태에 따라 횡목을 지고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예수에게 특별히 극형과 극심한 고통을 주기 위하여 관례를 깨고 십자가 형틀 전체를 지고 가게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형수는 죄목을 쓴 판자를 목에 걸고 가기도 했고 제 삼자가 죄목 판자를 앞에 들고 가기도 했다. 예수의 경우 군인들 중 한 명이 그 판자를 운반하여 나중에 십자가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간 길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예수가 너무 지쳐서 십자가 횡목을 지고갈 수 없게 되자 로마 군인들은 구레네 출신 시몬이라는 구경꾼을 징발하여 그 십자가를 대신지게 하였다.8)

 사형장에 도착하면 우선 사형수를 발가벗겼다. 그 다음 죄수가 형장까지 손수 지고 온 횡목에 양 팔을 벌려 팔목을 끈으로 매달거나 대못으로 손목을 단단히 박았다. 로마인들은 못 박는 것을 더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손바닥에 못을 박으면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쉽게 살이 찢어져 손바닥이 십자가에서 떨어진다. 예수 시대 때의 철 대못이 길이가 약 12.7-17.8cm이며 지름은 1cm 정도인 끝이 뾰족한 철 대못이 십자가형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경우 손목과 발목에 못이 박혔음이 확실하다(눅 24:39-40; 요한 20:25)

이와같이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혔다.

 

 

2) 십자가의 일반적 의미

 

  (1) 십자가의 중심성

   갈보리 십자가야 말로 핵심없는 이 시대에 참된 방향과 목표를 제시해 주는 유일한 '구심점'의 역활을 할 뿐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인류 역사를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이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데 있어서 그 모든 면에서 중심축 역활을 한다9).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전에 우주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할 것을 계획하셨다. 창조후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이 죄의 근원인 사탄과 죄에 종속된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실 것을 계획하셨다. 보통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 문제만을 처리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죄의 근원인 사탄도 처리하셨다. 이 사실은 레 16장에 드리는 모형적 속죄제사에서 숫염소 두마리중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 드리고, 한 마리는 산채로 광야에 버려지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산채로 광야에 버려지는 숫염소는 마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제물이다.

 실제적 속죄제사에서 예수님께서는 여호와를 위한 속죄제물로서 어린양이 되셨고 또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받으셨다. 버림을 받으실 때에 우리의 지옥형벌을 면제해주신 것 뿐 아니라 마귀를 만족시키는 제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마귀를 처리하셔야 했는데 그 처리 방법이 십자가인 것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마귀에게 내어 주셨다. 즉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귀에게 고통받으시고 조롱받으신 것이다. 이같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며 예수님의 중심이시다.

 또한 우리의 중심이다. 바울은 롬6:4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바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서 같이 죽었다면 그곳은 사람의 중심인 것이다. 또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안에서 같이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없었다면 다시 새롭게 사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며 예수님의 중심이며 우리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이고 예수님의 중심이라는 뜻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곳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계획하시고 그것을 이루셨다.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그 지혜가 한량이 없으신 분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친히 달리실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또한 예수님의 순종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우리의 구원의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 장소가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완성시키는 장소이었으며,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한 인류의 관점에서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위대한 장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고전 2:2)고 말하였다. 이처럼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중심임을 말하고 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을 인식하는데 있다. 즉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장소가 십자가이고 실제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리고 죄의 근원인 사탄을 처리한 장소가 십자가이다. 그러니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중심이며 또한 모든 인류의 중심인 것이다.

 

 

 

 

 

 

 

 

 

 

 

 

 

 

 

 

 

 

 

 

 

 

 

 

2.십자가의 도

 

1). 갈 2:20과 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의미

  바울은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롬 6:6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뜻인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바울이 말한 "내가" 라는 단어와 "옛 사람" 이라는 단어의 뜻은 동일하다. 즉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옛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옛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옛사람이란 정과 욕에 지배받는 사람을 말한다. 갈5:24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정과 욕에 대하여 갈2:19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라고 육체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정과 욕심은 더 구체적으로 혈육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의 4가지의 정과 식욕, 물욕, 성욕, 명예욕, 수면욕의 5가지 욕을 가리켜 말한다. 이 정욕은 에덴 낙원에서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본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서 주신 것이다. 그러나 정욕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사람만을 위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정욕을 우상처럼 섬기게 된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정욕적인 행복을 더 추구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성경은 정욕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생활을 우상숭배라고 말한 것이다.(골3:5)10)

 이러한 정욕이 타락한 죄성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이 곧 옛사람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고 한 "나"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의 옛사람은 동일한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한 정과 욕심에 이끌리는 사람과 동일한 뜻인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종합해 볼 때에 바울이 십자가에 못박힌 옛사람이란 정욕에 이끌리어 죄를 범하는 사람을 가리켜 말함을 알 수 있다.

 

2). 구원파의 오류

 십자가의 도에 대한 진리를 많이 남용하다가 이단시 되고 있는 종파가 구원파이다. 구원파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한다.

 기존의 성도들이 성령체험을 하고, 방언을 하고, 믿음생활을 하여도 그들은 이러한 것들을 인정치 않고 오직 십자가에서 같이 못박힌 것을 아느냐 그리고 그러한 체험과 깨달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를 따져서 구원의 여부를 결정한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체험이 있습니까? 이것을 확신 하십니까? 라고 질문하면서 그러면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다 사함을 받았다면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이러한 십자가의 도에 대한 체험이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체험을 강조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면 마음속에서 나타나는 죄와 악심 등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도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 믿음이 없다고 하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1)

 박옥수, 권신찬, 왕중생파의

구원파의 핵심교리 10가지 질문서

1. 당신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2. 거듭났습니까?

3.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4.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 하십니까?

5. 선생님은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6. 선생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7.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생활은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8. 구원 받은 것을 확신합니까?

9.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10.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과거 미래의 죄를 다 사하셨으니 이제 다시 회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 객관적인 은총만을 말한다.

복음서에 나오는 사마리아 인 비유를 들면서

강도 당한 사람 - 우리이고    사마리아 인 - 예수님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죄와 마귀 때문에 꼼짝 하지 못하는 우리) 사람에게 사마리아 인으로 오셔서 싸매주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또 다시 오신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그분의 하심을 믿으면 된다 라는 비유의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다. 행함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행하려고 하면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율법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새벽기도를 나가려고 다짐을 하고 새벽에 일어났을 때에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고 나가기 싫어지면 그 마음을 따라서 새벽기도에 안 나가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만약 나가기 싫은것을 억지로 나간다면 그것은 율법적인 생활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어하면 하지 않는다. 자기가 억지로 하지 말고 포기하세요 포기하세요 하나님께 맡기세요 라고 말하면서 행함을 강조하는 믿음은 율법적인 믿음이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천국으로 가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부터 순간순간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점진적으로 성장해야 된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요한일서에서는 믿음의 성장을 어린아이, 청년, 아비의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3장에 어린아이와 신령한 자로 나누고 있는데 옛사람이 남아 있는 자를 어린아이 단계라 하고 신령한자는 곧 아비의 단계에 이른 자를 가리켜 말한다.

  또한 왕중생파도 같은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조건 자기의 노력을 포기하면 영혼속에 내주하신 하나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승리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중국의 성자 워치만 니가 성결은총을 받은 후에 증거했던 사상들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와같이 주장하는 것이다

  워치만 니의 사상은 성장론적으로 광야연단과정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할례와 생명의 내주경험을 한 후 정돈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초신자들에게 지식적으로 가르치니 이들은 고민에 빠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워치만 니는 약 15년이라는 기간 동안을 광야연단과정에서 많은 훈련과 교육을 받고 그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모르고 출애굽하면 바로 영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다고 가르치니 큰 모순과 갈등과 실망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으니 자기의 의지를 드리는 일은 점차 멀어지고 정욕을 좇아 살면서 성령의 충만함과는 거리가 먼 메마른 생활을 하면서 마귀의 밥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구원파 목사님의 집회 동영상을 보았는데 성령의 충만함이란 찾아 볼 수가 없고 여전히 포기하세요. 우리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구원파는 십자가의 도의 일부분을 깨닫고는 그것을 전부인양 주장하므로 많은 피해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광야연단과정을 가면서 중요시 해야할 회개를 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마귀에게 속고 사는것을 모르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다.

 

 

 3). 워치만 니의 경험

  중국의 성자이신 워치만 니는 1903년 중국의 복주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라고 서원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0년에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며 수많은 고서를 읽고 책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비범하고 천재의 소리를 어렸을 적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에게 영향을 미친분은 영국 국교회 선교사 바버여사 였는데 그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바버여사에게 찾아가 많은 조언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20년동안의 투옥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주관적으로 체험하기 위하여서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1972년 감옥에서 사망하였는데 그의 베개밑에서 발견된 유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노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사망하였다.

 워치만 니 성자의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고백한 것을 살펴보면 연단과정을 통과하게 된 워치만 니는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기면 마음과 행실로 범하는 죄 때문에 큰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죄지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혈기나 미움, 질투와 음욕이 생기는 것을 마음속에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는데, 이와 같이 영적 싸움에서 거듭거듭 실패를 하는 가운데 워치만 니는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도 자기를 배신한 사람들을 향해서 나타나는 배신감과 이로 인한 혈기를 내고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것은 어찌 할 수 없이 나타나는 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알게 된 것은 자신은 근본적으로 고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과 아무리 결심하고 노력해도 죄덩어리 자체인 자신을 결코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러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식도 해보고, 유명한 부흥강사를 찾아가 보기도 하였으며, 영적지도자를 만나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영적지도자들을 만나서 상담을 할 때마다 워치만 니에게 로마서 6장 11절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주위에서 권면해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죽은 것으로 여기고 노력하여도 범죄하기 쉬운 기회가 생기면 마음과 행실 가운데 죄가 나타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던 중에  워치만 니는 1927년 어느날 두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옛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매우 큰 감격을 맛보게 되는데, 그 동안은 예수님과 관계없이 옛사람, 즉 자기를 죽이려는 노력을 해왔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말씀을 볼 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워치만 니는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에 고린도전서 1장 30절을 보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된다. 이 말씀을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여기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마지막 아담 되신 그리스도 안에 담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워치만 니는 예수님 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다는 말씀을 보고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같이 죽은 것으로 보시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라는 뜻인 것이다.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활 이후에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다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그 말씀을 볼 때 큰 깨달음이 있었던 것이다. "아 예수님 안에서 죽었구나" 자기가 개인적으로 죽으려 할 때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여전히 화를 내고, 여전히 혈기내고, 여전히 음란하고, 여전히 교만하고 하였는데, 아무리 죽었다고 여길래도 자신안에서 일어나는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느낄수 없었는데, 도리어 죽으려고 하면 할수록 이 죄가 더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었는데,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 즉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죽었을 때에 함께 죽었다는 것을 깨닫고 큰 감동을 느낀 것이다.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때 워치만 니는 폐렴으로 각혈을 하고 아주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엄청난 은혜의 체험을 하며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얼마나 기뻤든지 2층의 침실에서 내려오면서 하녀를 붙잡고 나 워치만 니는 죽었다 라고 고함을 쳤다. 그의 말에 의하면 온 거리에 나가서 이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죽으려고 할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지지 않고 여전히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음욕을 느꼈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큰 기쁨을 느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옛사람이 예수님을 떠나서 따로 죽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워치만 니는 고린도전서 1장 30절의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라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께서 마지막 아담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죽으려고 애를 쓰던 자신, 즉 죄성이 뿌리박힌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뿐만 아니라 인간과 함께 저주받게 된 우주와 만물 그리고 우리의 육체까지도 모두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은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워치만 니의 경험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나는 왜 죽지 않을까 라며 몸부림 치는 자들에게 이러한 깨달음의 은총을 주시게 된다.

 그저 기복신앙이나 주일 잘 지키고 우리 가족 건강히 평안히 살려고 하는 신자들은 이러한 죄 문제에 대하여 깊이 있게 고민하지도 않을 것이니 이러한 십자가의 도를 깨달을 수도 없는 것이다.12)

 

4). 십자가의 도의 핵심 단어인 마지막 아담

 

 (1) 마지막 아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으니"(고전 15:45)마지막 아담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유일하게 고린도 전서에 등장한다. 이 단어가 주는 의미가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핵심이 되는 단어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옛 창조의 종결과 결론을 암시한다. 옛 창조는 한 사람 곧 마지막 아담으로서 끝난다. 옛 창조를 끝낸 이 사람은 부활 안에서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13)

  바울이 말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라는 죽었다는 의미는 곧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마지막 아담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을 말한다.

  위의 성경구절에서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아담이 마귀의 꾀임에 넘어가서 범죄를 하였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죄성이라는 원죄를 유전받게 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여서 모든 인류가 원죄를 가지고 사는 비참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인류 전체의 범죄로 보신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한 사실이 오늘날 인류전체의 범죄와 동일시 하시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다.

  롬 5장 19절에서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같이" 라는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첫 사람 아담의 범죄를 모든 사람의 범죄와 동일시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마지막 아담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뜻하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 하셨다.

  아담의 뜻이 첫 사람이면서 또한 첫 범죄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모든 것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되어서 마지막 아담이 십자가에서 죽을때에 그 죄 즉 인류의 모든 죄도 같이 죽은 것으로 즉 없어진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성경 구절이 곧 고전15장 45절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이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것을 처리하시는 방법으로 마지막 아담을 보내셔서 그 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셨다는 것이다.

  롬 5:15절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로마서 5:18b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고린도후서5:14b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린도후서5:15a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위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에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를 모든 사람의 범죄와 동일시 하시는 것처럼 마지막 아담의 행동을 많은 사람의 행동과 동일시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한 모든 것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셨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뜻

 하나님의 구원은 아주 기묘하다. 그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그분은 실제적으로 우리에게서 역사하지 않으시고 그리스도에게서 역사하셨다. 이제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놓는다는 사실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아담안에 있음을 보아야 하며 그리고 아담에게서 나와서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14)

 예를 들어 어떤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를 바다속에 던지면 그 상자는 바다에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상자이고 그리스도는 바다이다.

 

 

  바울 서신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리스도와 함께등을 자주 언급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라는 것은 곧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실때에 너희도 거기에 있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라는 말의 뜻을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는데 바울 서신의 이 뜻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달리셔서 죽으실 때에 너희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워치만 니가 고민하다가 깨달은 성경 구절이 바로 고전 1:30에 있다.

 "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뜻은 곧 마지막 아담을 뜻하는 것이다. 즉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너희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의 뜻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계획이 곧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인류의 죄, 즉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모두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이란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믿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도 교만한 죄, 포악한 죄, 이웃을 속인죄, 음란한 죄를 품었으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하등 상관없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나는 죽은 것이다.

 마지막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의 뜻을 잘 알아야만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로 해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 고백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물어보면 같이 죽었다고 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마지막 아담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뜻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갈 2:20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라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하신일과 계획하신 일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예수님의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믿음이란 나의 생각과 감정, 의지, 나의 마음의 상태를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하신 일, 또한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하신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발견하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자신있게 고백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 2:20 하반절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 고백이 곧 우리의 고백이어야 한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핵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의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같이 죽으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관점은 모든 죄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담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을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고백하고 있다. 또한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듯이 이것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이다. 워치만 니의 예에서 보듯이 이러한 은혜는 죄에 대하여 고민하는 자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에 대하여 죽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죽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죄에 대하여 절망하고 고민하여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에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워치만 니의 감격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5). 객관적인 죽음과 은총

 

 (1) 객관적인 죽음

 롬 6장은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십자가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말씀 속에는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깊은 의미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언어로 제시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진수가 놀라울 정도로 완전하게, 또한 포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롬 6장이야말로 성도들의 경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복음의 핵심적인 역활을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공의에 대한 보상이지만, 롬 6장은 특별히 죄인이 바라보는 측면에서의 십자가를 보여주고 있다. 즉 죄인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는 죄인이 어떻게 죄와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실제적이고 중요한 진리가 제시되어 있다. 바울은 롬 6장을 통하여 십자가의 진리를 확고하게 세웠다. 바로 그 말씀 안에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 성장과 승리를 가져다 주는 구심점으로서의 십자가의 반석이 놓여 있는 것이다

 

 롬 6:2에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죄인의 관점에서 십자가가 제시되어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가 단순히 죄의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옛 창조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얻게 하는 죽음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롬 6장을 이해하는 데 실제로 어려운 점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경험적인 면이다. 우리가 진실로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우리는 그 실제적인 체험이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15)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다. 바울 개인이 아닌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롬 6:2에 나타난 '죽은' 이라는 단어는 영어 성경의 개역판(RV)은 그 단어의 시제인 완전 과거형을 더 분명히 표현하기 위해 '죽었다' 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의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아포쓰네스코(apothnesko)'로 되어 있다. 헬라어 사전을 보면 이 단어는 '아포(apo)'와 동사 '쓰세스코(thnesko)'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으로 '죽다' '소진하다' '다 죽게 되다'등으로 표현된다.

  롬 6:7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죽은(apothnesko)자가'  또 8절에도 반복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apothnesko)...'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에 대한 표현을 바울은 이렇게 하고 있다

   2절 '죽은 우리' -- 십자가

   3절 '그의 죽으심' -- 십자가

   3절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 십자가

   4절 '죽은 자' -- 십자가

   5절 '그의 죽으심 -- 십자가

 

롬 6:5-8에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십자가

  '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십자가16)

 

위의 말씀들은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롬 6장을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객관적인 죽음과 주관적인 죽음이 잘 나타나 있다. 롬 6장 1절부터 11절까지는 객관적인 죽음을 말하고 12절부터는 주관적인 죽음에 대하여 말한다. 객관적인 죽음이란 곧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으실 때에 우리도 같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2) 객관적인 은총

  객관적인 은총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던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다.

  타락하여 에덴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원죄 즉 마귀의 성질이 들어왔고, 그 원죄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어 수많은 자범죄를 가지게 되었다. 이 원죄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으며, 이 세상은 역사의 흐름을 따라서 살인과 폭력과 전쟁과 음행과 사기 등 온갖 불행한 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죄와 불행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수많은 종교가들과 철학자들이 나타나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중에는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와 유교를 만든 공자 그리고 회교를 만든 마호메트 같은 종교가들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입산수도나 고행, 계율 준수 등 수 많은 방법으로 죄악과 불행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평생을 다 바쳐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종교나 철학으로는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에덴 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곧 모든 자범죄를 용서받고 인간의 심령에 뿌리박힌 원죄 즉 죄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17)

 이러한 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죄에서의 해방을 위한 은총을 주신 것이다.

 즉 객관적인 은총이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예비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객관적인 은총이라 할 지라도 이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6). 주관적인 죽음과 은총

 

 (1) 주관적인 죽음

  주관적인 죽음은 객관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믿음을 가진 모든 성도들, 각자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죄와 싸우는 의지를 드리면서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언급한 구원파의 오류는 객관적인 은총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들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죽음의 은총을 믿되, 개개인 모두가 광야의 연단과정을 통하여서 십자가에서 각 개인의 죄성과 자아의 죽음을 맛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롬 6장에 잘 나타나 있다.

6장 1-11절까지는 객관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12절부터는 주관적인 죽음 즉 죄와 싸우는 삶이 있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롬 6:12-16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게 이르느니라"

 

위의 말씀들은 우리가 죄와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한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에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한다. 더 나아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순종하는 자의 종이 된다고 말씀한다. 위의 사실들을 살펴볼 때에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순종의 삶을 통하여 성도의 믿음은 성장하는 것이다.

 

 (2)개인의 죽음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각자에게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는 말씀의 끝에 여운이 남는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곧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가는 삶이 곧 자기를 죽음에 넘기우는 삶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기우는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곧 주관적인 죽음이며 이 주관적인 죽음은 체험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십자가의 대한 많은 사람의 이해는 바로 고난을 받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는 일종의 고통이지만 이것은 절반의 이해에 불과하다. 십자가의 최종 의의는 고통을 받는것이 아니라 바로 죽음이다. 십자가는 주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게 하였는데 이 고통은 과정에 불과하다. 십자가의 최종 목적은 바로 그분을 제거하고 끝내고 없애는 것이다. 죽음은 바로 한 사람을 끝내고 종결짓는 것이다. 죽음이 십자가의 최종 의의이다. 십자가의 의의는 바로 끝냄이고 종결짓는 것이다. 죄악이 끝날 뿐만 아니라  당신과 나라는 사람이 끝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만약 죽고 끝나지 않았다면 그가 죄악과 세상을 벗어나려 하여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오직 죽은 사람만이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궁극적인 의미는 사람을 죽음의 땅에 두는 것이고 끝내는 것이다.

  진정한 십자가의 길은 고통과 고난을 받는것 뿐 아니라 바로 사람을 끝내는 것이다.18)

 

 (3)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사람을 십자가 위에 못박는 것이다

  대개 사람들의 구원을 받은 후에 다시는 화를 내지 말고 다시는 한담하지 말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셔서 화내지 않고 한담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기도는 응답하실지 몰라도 이러한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화를 내지 않게 해달라고 구하지만 결과적으로 더 크게 화를 내는 체험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돕는데 있지 않고 우리를 십자가 위에 못박아 끝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되게 십자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빛 비춤을 받아 날마다 십자가의 빛 아래에 살면서 일상생활에서 발생되는 많은 일 가운데서 어느 것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이 십자가를 통과하여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보게 된다. 어떤 관점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어떤 관점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알게 된다.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어떤 생각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보게 된다. 어떤 행동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고, 어떤 행동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인식하게 된다. 그가 주의하는 것은 옳고 그르냐가 아니고 좋고 나쁘냐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가이다. 우리가 만약 십자가의 빛을 갖게 된다면 우리의 생활 아에서 어떤 태도나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올 때 우리 안에 정죄하는 느낌이 있게 된다. 결국 어느 날 하나님은 무릇 '나'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하나님과 대적임을 우리에게 보여 줄 것이다

 

 (4) 주관적인 죽음의 과정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객관적인 죽음을 먼저 받아들이고 난 후 주관적인 죽음의 과정을 거쳐서 새 생명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말씀은 좁은 문을 들어가서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을 다 걷고 난 후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 생명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엄청난 착각인 것이다. 즉 구원파처럼 객관적인 십자가의 죽음과 은총만 생각하여 새 생명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을 다 통과한 후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롬6장은 객관적인 죽음과 주관적인 죽음을 말하고 있으며 롬7장은 바울의 십자가를 통과하는 개인적인 죄와의 싸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7:24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라고 탄식하며 절규했던 것이다.

  그가 이 좁고 협착한 길을 다 통과한 후, 즉 광야 연단과정을 다 통과한 후 경험한 것이 곧 생명의 법인 것이다. 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경험은 십자가를 통과한 후에 경험한 것이다

  이 과정은 믿음의 길을 가는 성도 누구에게나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이 과정을 영적인 성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일2:12-14을 보면 믿음의 성장을 아이의 단계, 청년의 단계, 아비의 단계로 나누고 있다. 바울 사도가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한 생명을 받은 것이 곧 아비의 단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① 영적 성장에 대한 성경적 견해

  영적 성장에 대한 이론은 성경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중요한 진리 중의 하나이다. 또한 이 영적 성장론은 무엇보다도 체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질서있게 체계적으로 정돈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영적 성장론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부터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을 완성할 때까지의 500년 역사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영적 성장에 대한 진리를 깨닫게 되면 종교,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성도들을 둘러싸고 있는 생활환경과 모든 사건들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완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의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다윗 그리고 신약시대의 열두 사도, 바울 사도 등이 걸어간 발자취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영적 성장의 궤도에 따라 모든 환경들과 사건들이 진행 되었음을 보여준다.19)

  요한일서 2:12-14에 나온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하였다.

  이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정을 아이들 단계, 청년들 단계, 아비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본문에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라고 했는데, 이 아이들의 단계를 출발하게 될 때 성도들은 과거 불신자로 살때에 범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초보적인 이 단계를 통과하면서 쉽게 범하는 죄와 큰 악습들을 사함받고 정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단계의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적인 믿음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고하였는데, 이 말씀을 볼 때 청년들 단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악령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은사를 많이 체험하는 가운데 자아가 깨어지고 내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비들 단계에서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라는 것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잡거나 꿈이나 환상 같은 것을 통해서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성도들의 영 속에 내주합일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고 한 것이다.

  또한 고린도전서 3:1을 보면 "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고 하였으며, 히브리서 5:13-14을 보면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는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을 신령한 자로,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자를 육신에 속한 자로 구분하였다. 또한 육신에 속한 자들은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연한 식물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고, 장성한 믿음을 가진 신령한 사람이 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며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히브리서 6:1-5에서도 그리스도 도의 초보적 단계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힘쓰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에 완전한 신앙의 경지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서 8:29-30 말씀을 보면 성도들의 영적 성장에 대한 원리가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신 것이다. 아들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완덕에 도달했다는 뜻인데 성도들은 먼저 부르심을 받는 경험을 하고, 다음에는 의로 여김받는 경험을 하게 되며, 그 다음에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경험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되는 경지까지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히 닮은 성도들 즉 완덕의 경지에 도달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더 살지 않고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완덕의 경지는 영혼의 할례 즉 영적 할례를 받은 후에도 점진적으로 성장하여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만큼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가리켜 말한다. 영혼의 할례를 받은 성도들 중에서도 소수의 성도들만이 완덕의 경지까지 성장하게 된다.20)

 

  ② 아브라함의 영적 성장에 대한 예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85세 때에 칭의 곧 의로 여기심을 받았으며, 99세때 의롭다 하심을 받음 곧 영적 할례를 받았고, 175세 때 영화 단계에 도달하여 천국에 들어 갔다.

 

 a. 아브라함의 성장 과정

  아브라함은 75세 때에 상속자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고민과 갈들 속에서 괴로움 가운데 살고 있었으며 늙으신 부친 데라와 함께 우상을 만들던 가업을 버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밖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75세 때 갈대아 우르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 즉 계시를 체험한 것은 모세의 나타남을 경험한 것이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을 거쳐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벧엘에서 제단을 쌓은 것은 10대 기적재앙과정을 거쳐 출애굽 즉 구원받은 경험이었다. 그 후 축복을 약속 받았던 가나안 땅에 여러 해 동안 흉년이 계속 되었고 참고 견디기 어려워서 나중에는 애굽 땅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아내 사래를 바로에게 빼앗겨 큰 절망에 빠질 때까지가 바로 군대의 추격 즉 첫번째 연단과정에 해당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아내를 돌려받고 선물로 금, 은, 패물과 짐승들을 받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 318명의 하인들을 거느릴 정도로 거부가 된 과정은 신광야 축복과정에 해당한다.21)

  아브라함의 두 번째 연단과정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헤어진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말씀을 들으면서 단을 쌓은 것(창13:14-18)이 므리바의 생수 체험이다. 아말렉 군대와의 싸움과정은 가나안 땅의 도시국가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서 소돔성이 멸망하고 조카 롯과 그의 가족 및 모든 하인들이나 재물들을 약탈당하게 되자 아브라함이 318명의 사병들을 이끌고 약탈자들을  추격하여 격파하고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에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드리고 축도를 받은 것이 여호와 닛시 체험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여러 날 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몸의 소생으로 하여금 후사가 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약속과 칭의에 대한 말씀을 주셨는데 이것이 시내산에 하나님의 강림사건 즉 좁은 문을 통과하는 경험이다. 그 후 이스마엘이 출생할 때 가나안 정탐 즉 십자가 언덕을 통과하였다.22)

  아브라함이 가데스 므리바 생수를 체험을 한 때부터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안수 받기 직전까지, 즉 천로역정의 간난산 입구에서부터 미궁에서 전신갑주를 입기 직전까지의 과정에서 시험당한 사건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하갈을 통해서 출생한 이스마엘이 상속자인줄로만 알고 있던 가정이었기 때문에 하갈의 마음은 극도로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횡포를 많이 나타냈을 것이며, 사라의 마음은 여주인이면서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무시당하는 괴로움과 슬픔 가운데서 갈등을 참고 견디는 생활이 많았을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도 사라와 하갈 사이에서 당하는 어려움이 아주 많았을 것이며, 가정이나 이웃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생기는 어려운 일들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 밖에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환난 풍파가 많았을 것이다. 급기야는 상속자인줄로만 알고 있던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아니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남으로써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소유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험풍파가 많은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세 번째 연단과정을 통과하였다.23)

 

  b. 로마서 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흰옷과 인침과 할례와의 관계

  로마서 4장에 보면 오늘날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칭의와 득의 즉 영적할례에 대하여 잘 나타나고 있다.

  로마서 4:9-11을 보면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도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느니라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부르심을 받아 출애굽하는 경험을 하였다. 창세기 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85세가 되었을 때 후사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의로 여겨주신 경험 즉 칭의 경험을 하였다.

 창세기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한 99세가 되었을 때 할례를 받고 약속 받은 후사로 이삭을 잉태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창세기 17:11"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아브라함이 99세 때 할례를 받은 것은 로마서 4:11에 나온 바와 같이 아브라함이 85세 때 믿음으로 인정받은 의 즉 칭의 받은 것을 인친 것이다. 여기서 인침받았다는 말은 도장을 찍음으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할례는 성도들이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경험을 득의(得義)경험이라고도 말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75세 때 구원을 받으면서부터 99세 때까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점점 정결해진 것이다. 즉 광야연단과정을 24년 동안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99세가 되었을 때 비로소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았다는것을 증명해주는 표로 육체의 할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99세 때 할례받은 것은 교회시대의 이긴자들 144,000명과 같이 인침을 받고 이긴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할례 즉 인침받는 경험은 의롭다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것을 상징하므로 아브라함은 99세에 흰옷을 입게 된 것이다. 따라서 흰옷 입는 경험이나 인침받는 경험이나 할례받는 경험은 동일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24)

 

 (5) 주관적인 은총

  출애굽한 성도들은 광야의 여정을 걸어가면서 세상과 마귀와 역경과 싸워가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성도들은 죄를 범할 수 밖에 없다. 사도 바울조차도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몸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 하였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범죄할 환경에서 죄를 범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죄와 싸워야 하나 죄에 질 때가 너무나 많은 실정이다. 성도들이 죄를 범할때마다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혈의 은총을 의지하면서 죄의 사함을 받고 깨끗해지는 것이 주관적인 은총이다.

이 은총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은총으로만 성도의 죄가 사해질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이 어린아이의 신앙일 때에는 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많은 죄를 범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청년의 단계에서부터는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다.

 성도들이 죄를 지을때마다 보혈의 은총이 없다면 아무도 깨끗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도들은 점진적으로 죄와 싸워나가다가 범죄할 때마다 "주여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제가 또 죄를 지었나이다" 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면서 보혈의 은총을 의지할 때에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고, 점진적으로 믿음의 성장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객관적인 죽음과 은총만을 알고 강조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은총만을 강조하다 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당신도 같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이 무슨 회개를 합니까? 당신이 회개를 한다면 아직 죽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강조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의 도의 핵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객관적인 죽음과 은총 그리고 주관적인 은총과 죽음을 동시에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생각은 두 가지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 십자가에 같이 죽었다고 하였는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죽지 않은 자신을 쉽게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인 은총이란 인간의 의지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푸신 은총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실 때에 모든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두가지를 동시에 제시하신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사람은 죽었지만 이 사실을 믿은 개개인들은 이 땅에서 주관적인 죽음을 경험케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은총을 의지하여 자범죄를 해결받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친후에 성도들이 그토록 고민하던 죄의 문제는 위의 아브라함의 예에서 말하였듯이 출애굽하여 칭의를 받고 득의를 받을때에 즉 할례를 받는 행위는 죄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는 뜻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로서든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죄와 싸워야 한다. 그리고 죄를 지을때마다 자기가 지은 죄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보혈은총으로 사함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죄와 싸우는 것이 주관적인 죽음을 체험하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 주관적인 은총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관적인 죽음은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듯이 성도들의 각자의 모든 죄와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이것이 성도들의 주관적인 죽음이다.

  주관적인 은총은 각자가 지은죄를 보혈은총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주관적인 은총인 것이다.

 

7). 속죄론적 십자가의 도

  처음 세상을 창조한 에덴동산은 죄와 불행이 없고 의와 행복과 질서로 충만한 낙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살도록 창조된 인간은 무죄하였고 의로웠으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 생명과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생명과는 따먹으도 선악과는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을 통하여 사단이 유혹을 하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와같이 타락하여 에덴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에게 원죄 즉 마귀의 성질이 들어왔고, 그 원죄로 말미암아 범죄하게 되어 수많은 자범죄를 가지게 되었다. 이 원죄 때문에 인간은 마귀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마귀의 노예가 되었으며, 이 세상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살인과 폭력과 전쟁과 음행과 사기 등 온갖 불행한 일들이 홍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죄와 불행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수많은 종교가들과 철학자들이 나타나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 중에는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와 유교를 만든 공자 그리고 회교를 만든 마호메트 같은 종교가들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입산수도나 고행, 계율준수 등 수많은 방법으로 죄악과 불행에 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평생을 다 바쳐 노력을 하였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종교나 철학으로는 사람들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곧 모든 자범죄를 용서받고 인간의 심령 속에 뿌리박힌 원죄 즉 죄성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해결책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혜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종교들을 자력종교라 하는데 이러한 자력종교들은 죄에 대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죄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책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던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낙원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자력종교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던 죄 문제를 타력종교 즉 은총의 종교인 기독교를 통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속죄하는 제사방법은 구약과 신약에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는 모세를 통하여 가르쳐주신 모형적 속죄하는 제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약시대에 드려진 실제적 속죄하는 제사이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얻게 하셨다. 즉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사실을 믿고 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신 것이다.25)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이 죄의 문제는 앞서서 객관적인 십자가의 도와 주관적인 십자가의 도에서 언급한 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제물로 받으시고 모든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8). 창조론적 십자가의 도

 

 (1) 마지막 아담과 옛창조

  많은 분들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주로 우리의 죄 문제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제물로만 여기지 않으신다. 십자가의 도의 핵심열쇠인 마지막 아담이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속죄제물 뿐만 아니라 첫 아담에게 귀속되었던 온 우주와 만물과 사람의 육체와 성격까지 첫사람 아담이 타락할 때에 모든 것이 다 타락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기신다.

  그러니 아담이 범죄함으로서 아담 자신이 저주를 받은 인생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아담에게 부속시켰던 우주와 만물, 우리가 하늘에 보는 별들이나 태양이나 달등 모든 우주 이런것들까지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모든 만물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던 산천초목들, 모든 세상에 있던 만물들이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성품도 저주를 받게 되었다. 원래 인간의 육체는 죽지 않게 되었는데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죽게 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성품도 마귀가 들어와서 마귀의 성질을 가지게 되도록 저주를 받았고 육체 또한 죄의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저주를 받은 것들을 크게 네가지로 구분 할 수 있는데 우주와 만물과 인간의 성품과 육체로 말이다. 이렇게 4가지로 나누는 것은 창조론적 십자가의 도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피조물들을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셨다. 아담 한 사람에게 완전히 부속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서 아담에게 속한 모든 피조물들도 같이 저주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을 첫째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아담을 모든 우주와 만물과 육체와 성격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이 아담 안에서 창조된 것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는 단어 가운데 모두 포함시키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둘째 아담이라고 하면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둘째 아담이라고 하는 말은 아주 무서운 말이다. 만약에 둘째 아담이라고 하면 그 저주받은 인생이 또 영원히 살게 되면 어떻게 하는가? 그래서 둘째 아담이라고 하면 맞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해야 한다. 성경은 둘째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인터넷이나 많은 서적들에 보면 둘째 아담이라고 사용하는데, 성경은 둘째 사람이라고는 나와 있지만 둘째 아담이라고는 나와 있지 않다. 이것은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한 사도 바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아담이 범죄하니 모든 피조물들도 아담에게 속한 것이므로 부정하게 보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셨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 산천초목이나 태양이나 달이나 집이나 가전제품이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마지막 아담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마지막 아담안에 담겨져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는 핵심인 것이다.

  여기서 이것을 깨닫는 중요한 사실은 타락하여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들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신 분이 누구이신가? 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들과 우주와 만물을 그리고 인간의 육체와 성격등 타락한 것들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신 것은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결정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실 때에 하나님은 같은 죽은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금도 만물이 존재하고 있는데 어떻게 2000년전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그 예수님의 몸에다 담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의문을 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결정하실 때에 우리에게 물어보고 하신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는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나와 나의 지식과 경험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의 몸을 쳐다 볼 때, 단순히 예수님 한 사람의 몸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이 바울 신학의 초점이다. 예수님의 몸을 단순히 죄의 문제만 해결하는 어린양으로서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에는 속죄제물로서의 어린양으로서 보아야 하지만 창조와 관련된 것으로서 첫 아담에게 속한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피조물들이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이 저주를 받게 된 모든 피조물들을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몸은 마지막 아담인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옛날에 죽은 것 같지만 아직도 사실상은 멀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저주받은 만물이 없어져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계획이 완성이 되면 이 땅의 모든 만물들은 사라지는 것이다. (계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그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죄성과 정욕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고 하였다. 지금 못박아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과거시제로 이야기 하였다. 즉 2000년전에 마지막 아담안에 우리의 모든 정과 욕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죄와 못된 정과 욕심을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옛사람인 자신도 거기서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모두를 마지막 아담안에 담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니까 마지막 아담이라는 그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무조건 믿으면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믿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6:6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세례를 받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나 자신을 보면 죽지 않았는데 여전히 살아서 죄를 짓고, 내 마음대로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때론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는데 자신의 상태를 보면 이렇게 고백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것이 곧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것이다.

 

  워치만 니가 깨달은 것이 곧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 동안에는 자기 혼자 죽으려고 그렇게 애를 써도 되지 않던 것이 나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예수님이 죽으실 때에 내가 함께 죽었구나 라고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이 얼마나 폭넓은 몸인지 알 수 있다. 어느 한 개인의 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몸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셨다는 것이다. 아담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을 짊어지신 분, 그래서 마지막 아담이셨던 것이다.

마지막 아담안에서 저 하늘도 죽고 산천초목도 죽고, 우리의 몸도 죽고, 우리의 죄도 죽은 것이다. 창조한 모든 것들이 마지막 아담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26)

 

(2) 부활하신 예수님과 재창조

  그런데 예수님의 몸이 죽음으로서 끝이 났다면 우리는 아무런 희망도 가질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사실상 재창조이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와 같은 몸이 아니라 신령한 부활체인 것이다. 완전무결한 몸으로서 다시는 질병도 없고, 다시는 가시에 찔릴 필요도 없고, 이빨 사이에 무엇이 끼일 필요도 없고, 위장병도 없는 아주 완전한 몸으로 재창조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함이 있고 십자가의 도의 초점이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몸이 부활되심으로 다시 재창조되었다. 그러면 죽으실 때 몽땅 우리의 소유물을 모든 피조물들을 가지고 죽으셨으니까 다시 내 놓으셔야 한다. 즉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으실 때에 그 몸에 담겨져 있던 옛 창조의 우주와 만물과 인간의 육체와 더러운 성질을 다시 내놓으셔야 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로운 우주와 만물과 새로운 육체, 새로운 성품이 있는 것이다.

 

  이 새하늘과 새 땅은 어디에 있는가?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이 새하늘과 새 땅이 어디에 담겨져 있는가? 옛 창조할 때에 첫 아담에게 우주와 만물과 육체와 성품이 첫아담에게 속해 있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하늘과 만물과 새로운 육체와 성품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담겨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기서 천년왕국은 해당이 되는가? 천년왕국은 해당이 되지 않는다. 천년왕국은 임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류구원계획이 완성이 되면 천년왕국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아담안에서 창조된 것이므로 이어져야 하는 것일 뿐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이와같이 엄청난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면 신천지의 새하늘은 완전히 다른 영적인 세계이다. 그리고 새로운 땅인 새로운 만물은 신천지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성도들이 살 집도 있어야 하고 옷도 새로운 옷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새로운 옷에 대하여 흰옷과 세마포 옷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새로운 몸인 부활체의 몸이 있어야 한다. 이 부활체는 교회시대의 이긴자들은 예수님 공중강림하실때에 휴거될 때에 신령체로 부활하면서 휴거되게 되는 것이다.

나머지 성도들은 신천지가 시작 될 때에 부활체를 입게 된다. 이 몸은 우리에게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바로 부활체의 본보기인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인간의 영혼은 불멸로 지어졌다. 그래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첫 아담안에 다 포함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에 이 영혼만은 죽을수 없었다. 그래서 살짝 비켜나게 되었다. 물론 영혼안에 있는 마귀의 성품인 더러운 성품은 같이 죽게 되었다. 이 더러운 성품 즉 죄악성과 정욕의 성품을 원죄라고 한다. 이 원죄는 어떻게 해결되는가? 그것은 성도들의 영적성장과정에서 설명한 바 있다.

 

  영혼에 붙어있는 이 원죄인 죄악성은 성도들이 광야연단과정을 거쳐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었을 때에 즉 하나님의 허락하신 세 차례의 연단과정을 다 마치고 난 후에 죄악성을 뿌리뽑아 주시는 것이다. 영혼에 죄악성이 뿌리뽑히고 새로운 예수님의 성품이 들어올 때에 새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첫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인 생명과를 먹은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류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먼저 광야연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점진적으로 광야 연단과정을 통과하면서 마음과 행실이 정결해 진 후에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7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고 하셨다. 즉 이 땅의 지배자인 마귀와 세상과 역경과 싸워 이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이러한 생명과 즉 예수님이 생명이 내주합일되게 되는 것이다.

  이 새생명안에 담겨져 있는 것이 새 성품인 것이다. 죄를 지을래야 지을수 없는 성품인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란 곧 하나님의 생명, 예수님의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교회는 이 새생명을 다 받은 줄로 착각하기 때문에 휴거를 비롯해서 많은 진리가 왜곡되고 혼란에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서 성령님이 우리안에 들어오셨다. 성령님이 함께 하신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령님과 함께 있다. 그러나 생명 역할은 못하시는 것이다. 언제 생명역활을 하시느냐 하면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치고 영적할례를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생명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친 성도는 성령님이 생명 역할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경험은 로마서 7장과 8장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의 로마서 7장 경험은 광야를 통과하고 있을 때의 경험이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경험을 거친후에 그는 로마서 8:2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니라” 고 하였다. 이 경험이 곧 생명의 경험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를 그렇게 괴롭히던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경험을 한 것이다.

 이와같이 완전히 예수님의 죽음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것을 완전히 없애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한 영원히 완전무결한 것으로서 성도들은 이렇게 큰 복을 받은 것이다. 그 동안 대부분의 성도들은 십자가의 도 하면 속죄제사 드리는 면만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아담으로서 죽으신 예수님의 몸 안에는 창조적인면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지 않고 신천지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천지가 담겨져 있다.

롬 10: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의 주체가 누구이신지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근원이 누구이며 모든 만물을 누구에게로 돌리시는 지를 알 수 가 있다. 모든 만물의 근원과 주체는 바로 예수님인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의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보자.

에베소서 2:1-5 이하를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서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한다. 바로 마지막 아담안에서 죽었던 것들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살리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저주받은 피조물들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여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라고 하였다. 이제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담아놓으신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님 따로 나 따로 생각한 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옛 창조에 관한 것은 마지막 아담안에 모두 다 담으시고 죽이시고 난 후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 새 창조의 모든 것을 담아놓으신 것을 알 수있는 것이다.

  바울서신의 특징인 "그리스도와 함께" 라는 말씀은 이와같이 엄청난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래서 죽음조차도 은혜로 받게 하시려고, 우리가 죽으려고 해도 그렇게 죽지 않는것이, 워치만 니 성자가 그렇게 죽으려고 애를 써도 안되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조차도 은혜로 받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죽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죄에 대한 죽음 뿐만 아니라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을 죽은 것으로 보신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은 지금 해가 떠 있고 달이 있고 별과 우주 만물이 살아 있는데 또한 우리의 옛 성품, 옛 사람도 너무나 생생하게 살아 있?데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안죽어지는데 라면서 믿기지 않는것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서 죽게 하신 것이다.

 

  에베소서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히신바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부활승천하신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하는 바, 우리도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담으셨기 때문에 똑같이 보인 것이다. 이것이 바울신학의 초점인 것이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즉 선물 순수한 은혜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우리가 연단받는 것이 참으로 끔찍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다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2:9-10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여기서 "만드신 바"라고 하였다. 즉 창조하신 바라는 것이다.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옛사람이 아닌 것이다. 죄를 짓고 싶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완전한 새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사람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만물도 완전 무결한 피조물로 다시 만드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만 바울신학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풍성한 기업을 누리도록 소망을 주신 것이다. 2:10b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무죄한 영혼이 되고 하나님의 새성품을 힘입어 영생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재창조 되었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3:1이하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언제 살리심을 받았는가?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에, 그 부활을 떼어놓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위엣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저 하늘에 다 가지고 올라가셨으니까 즉 새로운 하늘과 새 땅과 모든 것들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찾으라 라는 것이다. 거기에 새생명, 새생명안에 담겨진 새로운 성품도 들어 있는 것이다.

  3:3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느니라.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이와 같이 감췄다고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안에 감추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께서 새생명을 감추어 두셨는데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확보해 놓으셨다. 출애굽한 성도라면 그것은 확보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이 생명을 언제 주시는가? 바로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치고 나면 감추었던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만나는 예수님의 생명을 뜻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안에서 감취었던 생명은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치고 나면 얻게 되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 6:4의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바울 신학의 초점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이 죽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주어서 영원한 천국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는 아직 옛사람이 지배하고 있지만 새생명을 주셔서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하시겠다다는 뜻이다.

  고린도 후서 5:17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바로 마지막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의 죄악성과 정욕, 그리고 아담안에서 창조된 모든 것들이 다 죽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서신이 그리스도 안,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라는 말의 뜻이 얼마나 감사하고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행실만을 쳐다보면서 죽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의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거기에 다 담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고 고백하는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우리도 같이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객관적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의 옛사람인 자아는 주관적인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깨어지게 되고 광야 연단과정을 다 마치고 나서 영적인 할례를 받고 난 후에 새 생명이 내주합일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주관적인 죽음의 근원에는 객관적인 죽음을 바탕으로 하여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자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범죄할 때마다 십자가의 보혈은총을 날마다 적용하여 참회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말씀을 지키려는 순수한 의지와 범죄하였을 때에 회개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 것도 성령의 역사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처리하실 뿐 아니라 첫사람아담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다 죽은 것으로 여기신다는 창조론적인 십자가의 도를 깨달아야 진정한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얼마나 고마운가? 우리가 죽었던 곳이 십자가이고 다시 태어난 곳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 십자가는 인류역사의 중심이고 하나님의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던 것이다.

갈라디아서 6:14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참고 문헌

 

 

1) 성경의 핵심진리 강해. 기독교 문서 선교원. 영성출판사. 2010년 9판

2) M. Hengel. <십자가 처형> 김영수 역(서울:대한 기독교 서회. 1982)

3) 이홍근. "데이야르의 진화론적 세계관에서 본 십자가의 개념." <신학과 전망> 68호 (1985)

4) 원용국. <최신 성서고고학>

5) 워치만 니 전집 2집 제 22권. 저자 워치만 니. <한국 복음서원> 3쇄

5) 십자가의 도. 제시 펜 루이스 지음 이 현수 옮김 <두란노> 2010년 61쇄

6) 무명 기독인의 증거. 지은이 공용복.

7) 십자가의 도 <성결 출판사> 지은이 공용복. 2009년 1월 1판

8) 라이프-스타디. <한국복음서원> 고린도전서

9)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한국복음서원> 저자. 위트리스 니 2003년 1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