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영!! 혼!! 육!!

인간론

하나님아들 2024. 9. 27. 23:54

    인간론

 

 

 

 

인죄론은 세상과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된다. 성경은 이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실히 깨닫게 될 때에 구원의 서광이 비취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며, 그 존재는 영혼과 육신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타락하게 되고 형벌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 타락의 기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타락의 위험성은 비탄 타락한 원조들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두루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타락한 인간이 노력하고 추구하는 모든 문화와 업적도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길은 예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알려 주고 있다.
 

  신자(성도)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열심이 간혹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신앙 형태를 낳기도 한다. 이것은 아마도 몰아지경의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그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는 인간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본질과 구조를 살표봄으로써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한다.

 

1. 인간의 본질과 구조

 1)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인간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지면 인간의 존재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도덕적 양심이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모든 나라를 선과 질서로 다스림같이 인간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연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상실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형상은 예전과 같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반영하지 못할 만큼 타락되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 형상은 회복되어야 한다. 이 회복은 본질적으로 성령을 중생케 하시는 역사로 가능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이 회복에 합당한 삶을 명령하신다. 그런데 이 회복은 구원의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며 도래할 삶 속에서는 이것이 완성되어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하게 될 것이다.

 

 2) 인간의 구조
 오늘날의 인간 구조에 대한 견해는 몇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는 삼분설로서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헬라의 이원론에 근거한 것으로 물질 세계에 해당하는 육과 비물질 세계의 영으로 구분하고 혼은 그들의 중개자로 제시한다.
 둘째는 이분설로서 이 견해는 삼분설의 성경적 근거(살전5:23; 히4:12)를 비판하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영과 혼의 구분을 교도적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이원론적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셋째는 단일론으로 이것으로 모든 요소가 분리될 수 없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문제는 인간이 죽은 후에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 데 있다. 결국 이 모두를 종합할 때 인간은 육과 영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갖고 있으며, 죽음 이후 육과 영이 분리되는 것은 타락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인 것이다.

 

2. 타락과 형벌

 1) 타락
 타락은 비단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천상에서는 천사의 장(루시퍼)이 그의 동조자와 함께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쫓겨나게 되었다. 바로 그가 사단이며 그를 추종하던 천사들이 귀신들인 것이다. 그리고 사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인간까지 유혹함으로써 하나님을 반역하고 타락하게 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은 언약과 순종으로 그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불순종으로 그 언약을 파괴하였다.
 결국 인간은 아담을 대표로 언약하였기에 그의 타락은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으며,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태아 때부터 죄의 자식으로 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모든 행위, 심지어 선하다고 생각되는 것까지도 죄된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형벌
 인간의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 죽음이란 첫째로 인간의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을 박탈당하고 그의 존전에서 쫒겨난 것을 의미한다. 둘째로 영·육의 유기적 관계가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서 부활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직무가 자연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사역에서 자신의 이기적인 삶과 생계 유지의 수단인 노동으로 변화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땀과 수고를 통해서만 열매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모든 창조계까지 타락시키는 형벌을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의식을 주시어 자신의 죄된 모습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3. 우리의 태도

 1) 인식의 전환
 인식의 전환이란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 깊이 파고든 영·육 이원론적 사상에서 성격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은 영적인 부분을 강조하면서 피조 세계의 물질 부분을 경홀히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보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창조계가 선하심을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하는 것도 기도와 예배처럼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주일만 거룩한 날로 여기기보다는 모든 날을 그리스도 안에서 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성(聖)과 속(俗)의 개념은 성경적으로 정립될 필요가 있으며, 물질적인 개념으로 구분하기보다는 신앙과 윤리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2) 구원과 문화관의 재인식
 구원은 인간의 영혼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전인적(全人的)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강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운동이나 휴식과 같은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복음은 전인에 대해 호소해야 하며 전인을 위한 처방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한 과정인 성화도 역시 동일한 원리 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은 영적인 부분이 육체적인 부분을 정복하거나 억압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중세시대 금욕주의자들이 행하던 비복음적 태도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그 본성 전부가 부패했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선하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타락이 전인(全人)에 해당된 것이라면 구원 또한 전인을 위해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위의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성 개발만 주도하는 태도는 중세의 자연주의 신학에 근거 할 것이다.

 인간 구조와 타락의 영향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복음 전파의 대상과 그것에 대한 실천 방향을 결정하게 한다. 그 복음의 대상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며 인간에 있어서는 영적인 부분은 물론 육적인 부분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도 교회 생활은 물론 사회 생활까지도 포함하게 된다. 결국 우리에게는 전인을 통해 올바른 실천적 삶이 요청되는 것이다.

 

 1. 헬라의 인간론과 죄론

 

 그들의 죄관과 은총관에는 이원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보다는 후대의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더 강조하였으며, 결국 교리상의 논쟁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어느 정도 펠라기우스 사상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죄관은, 특히 초기에는 악의 물질적 필연성을 강조하며 자유의지를 반대하는 데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의 본성 안에 완전한 가능성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범죄 할 수 있었으며 또 실제로 범죄했고, 그는 사단과 죽음의 죄악적 권세아래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아담의 죄가 연대적으로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지만 그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지만 그 영향은 인류와 아담과의 물질적인 면으로만 제한하고 있다. 이것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은 물론이고 고등한 이성적인 면에까지 미치는 원리의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다.

 

2. 칼빈의 죄관

 칼빈(Calvin)은 인간의 원죄는 선의 결핍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적 부패임을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전적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회복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적 부패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의 정욕적인 면에서 찾았으나 칼빈은 이것이 영혼의 모든 부분에 자리잡고 있어 그것을 통해 적극적인 악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의 죄관을 비판하였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영과 육의 구조였는데, 이것이 갈등을 일으키자 하나님은 원의(original justice)를 주셔서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셨다. 그런데 죄로 인간이 원의가 손상을 입게 되었으며, 그 손상으로 선행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다시 덧붙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전적 부패설에서 인간이 육과 영 모두가 부패하였음을 주장하면서,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한 회복을 부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회복을 강조하였다.

3. 칼빈의 신형상 회복
 
 인간이 본질에 대한 칼빈의 사상은 창조된 본성, 타락한 본성, 회복된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일관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이 전인적 측면에서 반영되었던 존재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 타락하였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이 요청되는 존재로 남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 아담이 타락이 인간의 본래적 능력을 상실케 했고, 전인류로 하여금 저주 아래 놓이게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은사는 박탈당하고 자연적 은사는 부패되었으나 타락한 인간에게 짐승과 구별될 수 있는 이성은 잔존한다.
 그러나 그 이성은 심령의 조명 없이는 신형상 회복에 있어서 무능력한 존재이다. 이와 같은 회복은 오직 내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 역사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은 그에게 있어서 양보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이며, 그의 사상의 핵심 부분이다. 즉 신형상 회복은 인간편에서 볼 때는 인간의 책임성이 불가피하게 따라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성경적 인간 분류

 1) 자연인
 자연인이란 중생하지 못한 아담의 자손 전체를 말한다. 즉 예수그리스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하여 개인적으로 중생의 체험을 하지 않았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이 자연인에 속한다. 이들의 특성은 첫째,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멸시한다(고전1:18,23; 고전2:7,8). 둘째,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한다(고전2:9-11,14).
 2) 육적인 사람
 육적인 인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중생은 했으나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초보에 머물러 있는 자를 가리킨다(고전3:1-4). 이들은 서로 자신들의 죄된 성품으로 분열하고 시기와 다툼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구원은 받았지만 삶은 자연인과 별다를 바 없다.
 3) 신령한 사람
 중생한 후에 영의 양식으로 양육함을 받아 영적으로 성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성령의 조명하심에 따라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판단하고(고전2:15, 16),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감추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간다(빌2:6,7).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러한 의문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서 그 해답이 시도되곤 하였는데, 대표적 주장으로 외형적 근사론과 영적 근사론 그리고 도덕적 근사론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를 주장할 수 만은 없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두루 살펴보건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영적 형상을 닮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적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지속할 수 없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의 영적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 성경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동일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장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 개념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중요시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본 장에서는 인간의 본질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형상과 모양
 
 1) 문제 제기
 창1:26은 인간 창조의 독특성을 나타내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일반 창조물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되었지만 인간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주의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는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았는지, 혹은 이 둘의 합성으로 되었는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질 규정에 대해 논쟁이 발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히브리 성경에는 mlx(체렘; 형상)과 twmd(데무트; 모양) 사이에 접속사가 없이 동일하게 쓰여 있지만, 칠십인경(LXX)이나 라틴 벌게이트(Vulgate)역에서는 '∼와 그리고∼'라는 접속사 kai(카이)가 첨가되어 이 둘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2) 잘못된 견해와 비판
 이런 논쟁에 있어서 자연주의적 견해는 칠십인경에 근거하여 형상과 모양을 분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 후 인간의 순종과 헌신에 대한 보상을 '모양'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레나이우스(Irenaeus)나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와 같은 교부들은 '모양'은 하나님이 그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은사로 덧붙여 주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 자체는 이 둘의 본질적 분리를 부정하고 있다. 창1:26은 이 둘을 모두 사용했지만 창1:27과 창5:1에는 형상이란 말만 사용되었다. 그러기에 이 둘은 본질적 차이는 없으나,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2. 하나님의 형상
 
 1) 잘못된 정의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즉 무엇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말인가? 여기에 대해 로마 가톨릭의 자연주의 신학자들은 '외형적 근사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모양이 하나님과 비슷하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이 같은 모습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그림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견해는 '영적 근사론'이다. 이 주장은 모든 다른 피조물들은 영혼을 소유하지 못했으며 죽으면 사라지는 존재이지만,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기에 이것이 하나님과 닮았다는 견해이다. 다음으로는 칸트가 주장한 '도덕적 근사론'을 들 수 있다. 이 주장은 인간은 어떤 잘못을 알았을 때 양심 가책을 느끼게 되는데 이런 도덕성은 인간만이 소유한 것이라고 본다.

 

 2) 우리의 입장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과 닮은 인간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목적을 계획하시고 운행하시는데, 그 운행의 방법은 지혜에 근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당신의 섭리에 맞게 우주를 다스리고 계신다.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이 우주를 다스리심 같이 자기에게 주어진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리고 창1:27에서처럼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고독하게 혼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삼위의 존재로 영화로운 교통을 가지신다(요17:5). 이처럼 인간도 혼자서 존재하지 않고 쌍방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3.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

 1) 형상과 타락의 관계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없으며 구원이 완성될 때 이 형상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는 구절처럼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임을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약3:9에서는 혀로써 사람을 저주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지음 받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gegonta"(게곤타스; 만들어지다)로서 결과가 계속되는 과거 행위의 완료분사 형태를 취하고 있다. 결국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인간은 과거에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지금까지 존재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anqrwpou"(안드로푸스; 사람들)라는 개념은 신자만을 지칭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2) 형상의 회복
 우리는 이상에서 인간은 비록 타락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어 하나님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하기에 회복이 불필요함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회복의 과정이 구원의 완성 과정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엡4:22-24; 골3:9,10). 이와 같은 하나님 형상대로의 회복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동시에 명령적인 요구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엡4:24; 엡5:1).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임과 동시에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이런 과정의 최종 목적은 비록 동일하게 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왜곡되었으며 회복하고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으며, 이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의 윤리적 삶이 요청되는 것이다.

 

 1. 인간의 구조

 1) 삼분설
 인간의 구조를 설명하는 삼분설은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다. 인간의 몸과 영의 관계는 신과 물질 세계의 관계에서 유추되었는데, 신과 물질 세계를 이어주는 존재로서 logo"(로고스)가 있듯이 인간의 육과 영을 연결하는 것으로 혼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삼분설의 견해로 첫 번째 요소는 물질적인 육체로서 인간은 이 물질적인 요소를 다른 동물 및 식물과 더불어 소유하고 있다.
 두 번째 요소는 혼으로서 이성과 감성의 근거로 인간은 이것을 통해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영으로서 인간은 영을 소유함으로 종교성을 띠게 되며, 영의 일들을 분별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성경의 본문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는데 데살로니가전서 5장이나 히브리서 4장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외에도 삼분설 주창자들은 고린도전서에서 인간의 구성 요소와 관련된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데, 고전2:1-3:4에서 바울이 인간을 영·육·혼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근거한다.


 2) 실체적 이분설
 인간의 두 요소, 즉 물질적인 면의 육체와 비물질적인 영이나 혼으로 구성되었다는 견해는 삼분설을 반론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삼분설을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만일 삼분설자들의 주장처럼 살전5:23에서의 kai(카이; 그리고, ∼와)로 연결된 세 단어가 분리된 실체라면, 눅10:27에서의 마음, 목숨, 힘, 뜻 역시도 네 개의 실체로 언급함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리보다는 유기적 설명이 합당하다. 그리고 이분설자들은 영과 혼을 분리하지 않고 교호적(交互的)용례를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서 인간의 죽음이 어떤 곳에서는 영이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고(시31:5; 눅23:46), 또 다른 곳에서는 혼이 떠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창35:18; 왕상17:21). 그러나 이런 이분설자들에게도 비평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도 삼분설자들 같이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의 구분으로 인하여 형이상학(영적인 부분)적인 부분에 우월성을 두고 인간의 육체를 경시하고 있다. 이것 역시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3) 단일론
 단일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서로 분리하지 않고 유기적인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전인격적으로 창조되었다. 그 근거로 창2:7의 생령은 인간의 전체적 국면을 지칭하는 것이지, 어떤 독립적 요소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는 인간의 영혼 혹은 육체에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전 인격과 연루된 것이다(롬2:9). 그러면서 이들은 인간의 분명한 영과 육을 이원론이라는 말 대신에 인간의 이원성(二元性)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단일론, 즉 영육의 통일체로 인간을 보는 견해에는 인간의 죽음과 연관될 때 문제가 제기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이 죽으면 육체가 사라짐과 동시에 영혼도 사라져야 되는데, 그러면 인간의 존재는 아예 사라지고 마는가? 여기에 대해 단일론자들은 인간의 죽음과 재림 때의 부활 사이에 인간은 수면 상태와 같은 무아지경에 존재하게된다는 이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는 말씀과 위배되는 경향이 있다.

 

2. 성경적 관점

 영혼불멸 사상을 강조하는 플라톤적 사고에는 육체나 영혼을 분리하는 것을 당연시하며 그들에게 있어서 육체는 물질적 개념으로 사라지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원론적 사고에서 육체는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서 신속히 제거되어야 할 존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 역시 영혼과 함께 통일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을 맞을 때 영혼은 멸절하지 않고 육체만 사라지게 되는가? 이것은 영혼 불멸을 지지하지 않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개념 조건적 통일체란 말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인간은 영과 육의 유기적 통일체이다. 그러나 인간이 형벌 이후 죽음에 이를 때는 조건적으로 일시적인 현상이 일어난다(고전15장; 고후5:1-10; 빌1:20-24).
그래서 이 형벌이 용서받은 그 날에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사라지고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의 육체오 영혼의 분리는 죄의 형벌로 이루어진 조건적 사실인 것이다.

 

 죄의 기원에 대하여는 고대 이래로 철학과 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곤 하였다. 영지주의나 배화교, 혹은 마니교 등에서도 악의 기원에 대한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곤 하였으나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전능성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성경은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임의대로 사용하면서부터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 자체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악한 존재로부터 파생되는 것보다는 인간 자신의 자의적 행동이 하나님의 명령과 대립되면서부터 발생되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원죄는 자범죄와 고범죄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죄의 권세를 극복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과 형벌을 인간에게만 국한시켜 생각함으로 다른 피조물, 즉 자연과 문화에 대해서는 매우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죄와 형벌의 관계, 타락의 영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부족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죄와 형벌의 올바른 인식과 그것이 끼친 많은 영향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죄 많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삶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죄의 기원

 1) 잘못된 견해
 우리는 가끔 인간의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며, 그 죄를 범하도록 그분은 섭리하셨는지? 그것이 아니라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여기에 대해 유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긍극적 실체는 하나님뿐이며 거기서 유출 과정을 거쳐 최종적인 단계에 머물게 된 것이 죄의 기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아름답고 선한 존재로 묘사하지 악한 것으로 묘사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이원론자들은 말하기를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두 가지 원리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성의 원리요 또 다른 하나는 악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물질 세계는 이 두 원리의 이합 집산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론은 일원론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런데 이 세상에 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선가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이며, 이 죄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2) 성경적 견해
 성경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가 발생하게 된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선과 악을 하나님이 결정하시지 않고 인간 자신이 결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선악을 인간이 결정한다는 것은 아담 자신이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하므로 죄를 구성하는 것이고, 이것이 죄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러면 왜 선악과는 하와가 먼저 따먹었는데 죄의 시작은 아담에게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범죄의 구성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범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행위' 와 '생각'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만족 시켜야 한다. 그런데 하와는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었지만 자신의 행위를 잘 알지 못하고 행했기에 '탈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담은 먼저 '생각'으로 그것이 죄임을 알았고, '행위'로 그 선악과를 먹었다. 결국 아담은 범죄의 성립 요인 두 가지를 성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아담을 우리의 대표로 삼아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2. 인류 생활의 죄

 1) 원죄
 원죄는 죄인으로서 출생하였기에 갖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문제점을 제기할 수 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가? 라는 문제이다. 이것은 아담과의 언약 관계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로 세우시고 언약을 맺으셨다. 결국 아담의 순종은 모든 인류의 순종이고 반대로 불순종 역시 마찬가지이다.

 2) 자범죄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출생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생명과는 상관없는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인생은 중생하여 그 영혼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인간이 이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면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선한 일도 하나님 편에서는 죄를 범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늘 죄를 짓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이때 짓는 것이 바로 자범죄이다.

 

3. 죄의 결과

 1) 인간에 대한 형벌
 사람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설 때만 하나님을 바로 반영하는 신형상을 소유하게 된다. 그런데 타락으로 인해서 부패와 죄 그리고 죽음이 형벌로 주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하며 낙원에서의 추방은 현실적인 장소에서의 추방뿐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의 분리·격리됨을 포함된다. 그리고 그것은 생명나무를 볼 수 없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교리적 해석에 있어서 생명나무는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생명나무로의 금지는 영원한 생명의 상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창조시 인격적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타락 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는 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인간으로 하여금 서로를 성적 이용물로 이용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게 만들었다. 그 죄의 대가로 하나님은 사망을 선포하셨지만 실제로 그 집행을 유예하셨다. 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 그리고 더 큰 영광과 계시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2) 생활의 변화
 인간의 타락은 인간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다스림을 받던 자연에까지 변화를 일으켰다. 그중 하나가 사역 원리의 변화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통치 권리를 부여하셨을 때 그 사역은 고통은 없는 즐거운 사역이었다. 여기서 사역이란 헬라어로 ergon(에르곤)이라 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의 이익이 없음에도 일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생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던 사역이 인간의 타락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해야 하는 노동으로 변화된 것이다. 그리고 땅 역시 가시덤불, 엉겅퀴로 변화되었다. 결국 인간에 의해 자연이 파괴되고 잠식당하게 되었다.

 요즘 한국 사회는 양심이 사라진 사회로 전락하고 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의식(양심)을 주어 자신들의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그런 양심마저도 매몰시키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의식을 일깨워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고 그에 부합한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일깨워야 할 것이다.

 

 1. 타락의 범위

 먼저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 단순한 인간들의 불순종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창조계 전체의 대재난을 의미하는 사건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죄의 영향이 피조 세계 전체에 미치며 그 어느 것도 파괴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어떤 면을 보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좋은 창조물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타락이 피조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좋은 예가 결혼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결혼을 통해 동반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명하셨지만 타락이후 인간은 결혼을 자신들의 이기적인 행복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정칙가 인간의 독재 정치로 변질되고, 모든 문화와 예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를 유발케 하는 자극적 요소로 왜곡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타락으로 인한 불순종의 모습이 모든 창조 세계를 뒤덮고 있다는 증거이다.

 

2. 죄와 창조계

 아담의 범죄가 창조계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선'이 지속될 수 있을가? 이 같은 문제는 죄와 창조계의 관계를 이해함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근거할 때 타락이 창조계에 영향을 미쳤어도 하나님의 선한 의도는 상실되지 않았으며 모든 창조 세계에 이 죄와 선함은 구별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매춘이라는 현상이 인간의 성행위의 선한 의도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며 아무리 독재 정치가 위세를 떨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국가의 모습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죄와 창조계는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 죄는 창조된 구조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도입되었다 이런 죄의 구조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에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죄의 모습은 선한 창조계 속에서 구별되지만 이것은 기생충처럼 창조계에 기생한다. 결국 죄는 창조계의 선한 의도와 방향을 갉아먹고 왜곡시켜 변질된 모습을 산출하게 되는 것이다.

 

3. 펠라기우스의 죄관

 펠라기우스(Pelagius)의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원죄와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의하면 아담의 원상태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중간적인 상태로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치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원래 죄를 갖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죄를 범했고, 그 결과로 자신이 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저지른 죄악의 성질은 유전되지 않으며 더욱이 원죄란 것은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인간과 아담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은 아담을 보지 못한 이전의 사람들이 지은 범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담과 같이 선택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는 자유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어느 때든지 선과 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을 행하도록 말하신 그 사실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증거이다.
 이와 같이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죄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말하기를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해 선을 행할 수 없고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죄를 어떤 적극적 실체가 아닌 어떤 실체의 결핍으로 보았다. 즉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제적인 악이 아니라 선이 부족한 것을 죄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아담과 그의 후손의 유기적 관계를 주장하면서 아담의 부패한 본성이 그의 후손에 전달된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거를 언약에 의한 조상 대표론으로 보지 않고 실재론적으로 보았다. 즉 인간은 자신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의 피 속에 귀착되기에 인간은 아담이 범죄할 때 그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적 부패성을 강조하여 타락 이후에도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대로 존재한다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즉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으며, 이런 모습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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