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예수의 심장으로 이식했다!
요한복음 3장 1~5절
서론
미국이 세계 최초로 말기 심장병 환자에게 면역 거부반응이 없도록 유전자를 변형한 돼지 심장을 이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메릴랜드 의과대학교 의료진은 지난 7일(2022.1.) 8시간에 걸쳐 57세 남성 데이비드 베넷에게 돼지 심장 이식수술에 성공했고, 수술 받은 지 1주일이 지난 현재 상태는 양호하답니다. 수술을 집도한 바틀리 그리피스 박사는 “(돼지의) 심장이 뛰고 있으며 혈압도 정상적이다. 완전히 그의 심장이 됐다… 매우 흥분된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언론들은 이번 성공이 이식(移植)용 장기 부족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될 것으로 평가합니다. 뉴욕타임즈는 “50만 명 이상의 미국인에게 새 시대를 열어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4만1354명이 장기를 이식받았지만 약 11만 명이 대기 중이며 매년 6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있어 이번 이식 수술 성공에 거는 환자들의 기대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심장이식에 하필이면 왜 돼지일까요? 돼지는 개 이상으로 똑똑하고 원래는 깨끗한 동물로 인간을 많이 닮은꼴입니다. 얼굴이 아니라 피부의 구조나 색이 무척 비슷합니다. 내부 장기도 인간과 흡사해 2012년 <네이처>에는 인간과 개와 돼지가 장기 모양을 결정하는 유전자들이 아주 유사하다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인류와 유전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은 침팬지이지만 특정한 영역에서는 오히려 돼지가 더 닮은꼴이어서 돼지 유전자 지도를 통해 비만, 당뇨, 파킨슨병,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과 동일한 유전변이를 112개나 발견했을 정도입니다. 화장품은 물론 당뇨병 치료제 인슐린도 과거에는 대부분 소나 돼지에서 추출해 왔습니다.
2017년에는 인간의 줄기세포를 돼지의 배아에 주입해 인간과 돼지의 잡종 배아가 만들어졌습니다.(이상은 원종우씨의 글에서 가져왔음) 인간과 돼지의 잡종 배아는 장기이식 용도이지만 자칫 인간복제로 이어지고 기독교입장에서는 성경 윤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은 그런 말을 합니다.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없는 종교는 시각장애인이다”(이런 용어는 강단에서 조심히 사용하세요)
저는 이번 장기이식의 성공 소식을 대하면서 과학에 대한 두려움, 과학이 종교의 신비를 걷어내 버릴 것이라는 우려보다는 과학이 오히려 종교, 특히 성경내용을 많이 증명해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거듭남, 중생이라는 기독교 중심교리입니다.
거듭남에 관한 교리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는 유대인에게 말씀하심으로 최초 등장합니다.
3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당시에는 유대인을 향한 폭탄선언이지요. 율법행위구원에 정면으로 배치되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 언사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다윗과 솔로몬 통일왕국의 재건으로 이루어질 지상왕국입니다. 메시아 왕이 권능으로 로마정부를 전복시키고, 독립된 왕국을 건설하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자격은 철저히 혈통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특히 할례를 받은 이들은 지상천국의 시민이 됩니다. 니고데모를 비롯한 정통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준수했기에 천국 시민의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던 메시야가 혹시 당신이냐 알아보려고 비밀스레 방문했다가 엉뚱한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은 어떤 랍비에게서도 들어본 일이 없고, 그만큼 혁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의미 자체에 생소했기에 4절에서 묻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천국의 시민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부당성과 불가능성을 지적합니다. 거듭남을 한문으로 중생(重生), 영어로는 ‘rebirth’ ‘regeneration’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니고데모는 단어 그대로 이해해서 그런 일이 가능한가? 고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말씀하셨는데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용어 자체가 생소하고 영적으로 이해하기란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두더지에게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의 세계를 이해하라는 것과 같은 주문입니다.
거듭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선한 결심, 행동의 변화, 새사람이 됨… 정도로 압니다. 술꾼이 술을 끊었거나 불량배가 품행이 달라지니 중생했다, 거듭났다…. 이것도 거듭남입니다. 이런 거듭남이 있어야 교회는 활력소를 얻게 되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윤리나 행위 이전으로 그보다 훨씬 더 영적이요 근원적인 것을 뜻합니다.
거듭남은 다시 ‘태어난다.’보다는 ‘위에서 난다’는 의미입니다. 위(上)는 하늘(天)이요 하나님입니다. 아래는 땅이여 사람이요 어머니입니다. 1차출생은 어머니의 자궁(子宮)에서 출발합니다. 자궁에서 생성된 생명은 세상에서나 살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생명은 100년 왔다갔다 유한(有限)합니다. 죄성으로 가득 찬 육신이기에 육신의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2차출생은 ‘위’,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천국에서 살기에 합당한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교회만 오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제한적인 생명이 무제한적으로 생명으로 바뀝니다. 거듭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입증해주는 것이 이식(移植)수술입니다. 심장 기능이 끝나고 있는 데이비드 베넷에게 돼지 심장을 이식해서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거듭남의 교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종교와 과학은 원수가 아니고 우군(友軍)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장기이식이라는 단어자체가 없다면, 실제적으로 장기이식을 해서 죽을 몸이 살아나는 기적들이 없다면 거듭남에 대해 암만 설명해도 이해기 쉽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어 교회를 다녀 새로운 종교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종교적 개심(改心) 정도로, 윤리적인 갱생 정도로 이해할 것입니다. 그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듭남과는 한창 다른 이해입니다. 주님께서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식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자 벌코프 박사도, “거듭남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새로운 영적 생명의 원소를 입식(入植)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생명의 원소는 하늘에서 살 수 있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생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도 없고 가본들 살 수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성품이나 행동이전에 필수적입니다.
얼마나 좋은 거듭남입니까? 니고데모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가?’ 방편을 묻자 주님께서,
5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머니 뱃속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은 같은 말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아니면 스스로의 힘과 도덕과 종교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이식, 입식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때 죽어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과 합작할 수 없습니다. 100% 예수님께서 살려내셨습니다.
거듭나는 일도 그렇습니다. 나를 거듭나게 하실 때 내가 도울 일이 없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5, 6, 8절 ‘성령으로…’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해 놓으신 명단을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을 그에게 이식시킵니다. 이전에 그 사람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진 흠도 없고 티도 없는 영적 심장인가, 그걸 보십니다. 그 다음에 이식을 하십니다. 성령은 심장이식 전문의(專門醫)입니다. 한 번도 실수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고쳐서 우리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영생의 새로운 생명이 이식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제 데이비드 베넷에게는 두 생명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살아난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떨떠름한 것이지요! 사람들이 기쁨, 환희, 즐거움. 열정…을 말할 때는 심장으로 대표합니다. 그러니까 심장은 그 사람의 정서요 감정입니다. 그런 것을 느낄 때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내 심장인가, 돼지 심장인가? 이왕 심장이식수술을 할 거, 사람의 심장이요 그 심장이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의 심장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 말에 어폐(語弊)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어떻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만 우리 조카가 신장이식수술을 했습니다. 신장(腎臟), 즉 콩팥은 두 개로 강낭콩 모양의 기관인데 크기는 주먹만 합니다. 노폐물을 배설하고 체내 항상성을 유지하는 신장은 하나를 떼어내도 살 수 있기에 기증을 받아서 이식합니다. 신장도 쌍방이 맞아야 주는데 내 동생이 아들에게 주려고 했더니 맞지 않고 나 역시 나이가 있어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사자가 줘도 나이가 많은 사람의 신장은 받지 않겠다면 젊은 사람, 그것도 바로 한 살 위인 형의 신장만 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중국 상해에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급거 귀국해서 신장이식수술을 했고 지금은 양쪽이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우리 둘째 아들, 프라이버시가 있어 이름은 밝힐 수 없고 강모명훈 집사라고 당사자 형제들끼리 맞지 않으면 다음 1순위는 형이고 2순위는 자기이고 자기한테까지 내려오는 것은 아닌가, 떨었다나 말았다나…)
데이비드 베넷. 속내가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심장에는 돼지 심장이… 다른 장기들에게는 인간 장기들이…. 의학적으로야 그럴 일이 없겠지만 문학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돼지의 심장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인간과 돼지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삽니다. 돼지우릿간을 보면 돼지는 하루 종일 땅만 파고 삽니다. 하늘도 쳐다볼 수 있는데 꿀꿀~ 땅의 것만 헤집고 다닙니다.
인간은 아닙니다. 헬라어로 인간을 ‘안드로포스’라 합니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 ‘희망을 가진 존재’입니다. 대단한 헬라어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어에 준한다면 사람이라고 누구나 사람이 아닙니다. 위에서 나야 사람입니다. 위를 바라보아야 사람입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된 사람들에게나 있을 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잠간 살다가는 이 땅만 바라보다 하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났던 어머니에게로, 대지(大地)에게로 돌아갑니다. 그게 인생이라면 참 허무하고 어이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두 생명이 살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땅의 생명, 아래에서 난 그 생명은 얼마나 갈는지 모르겠습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몇 년에서 십 수 년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후패하면 세상 사람들은 낙심하며 두려워하지만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영생하는 또 하나의 생명이 이식되어 튼튼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에 육신의 생명이 꺼져버리면 거듭난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들을 하늘나라로 로켓처럼 솟아오르게 할 것입니다.
결론
이번에 돼지 심장 이식남자의 주인공 베넷은 알고 보니 흉악범이었습니다. 술집에서 술 마시다 아내가 에드워드라는 남자의 무릎에 앉았다는 이유로 격분해서 전기충격기로 쓰러트린 뒤, 칼로 복부, 가슴 등을 반복해 찌르고 도주하다 체포되어 6년을 복역하고 석방됐습니다. 에드워드는 하반신이 마비됐고, 평생을 휠체어에서 살다 뇌졸중으로 죽었습니다. 막내 동생은 형을 술집에 데려다줬다는 자책감에 약에 빠져 살다가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기의식 수술이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 피해자 측은 “기회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분노했습니다. 이에 의료진은 “범죄와 의료 서비스는 별개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전형적인 기독교 교리를 봅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이렇게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런 자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새생명을 이식해 주셨습니다. 두 개 중의 하나를 떼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 죄에 오염되지 않는 깨끗한 심장 깨끗한 생명을 나에게 떼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베넷처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공짜로 주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어찌 살아야 합니까? 우리조카는 형의 신장을 이식받아 평생토록 고맙게 여길거라고 했습니다. 형의 희생이 부질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형을 위해 더 좋은 일을 하며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과의 유대가 아주 돈독해졌습니다.
우리도 평생 고맙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희생이 헛수고 되지 않도록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고 더 좋은 일을 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늘 주님과 하나를 이루어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이식(移植)해 주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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