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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

하나님아들 2024. 7. 12. 20:57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

 

 

성경을 읽지 않은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면 책과 담쌓고 사는 데 성경이라고 특별히 시간을 내어가며 열심히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좋은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삶이 고단하며 미래를 위해 재투자하는 시간이 없다면 중년이후의 장래는 암울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기록해 놓은 성경조차 관심이 없다면 천국의 자리조차 위태로울 것이다. 그렇지만 늙은 개에게는 기술을 가르칠 수 없다는 속담처럼, 이미 굳어져버린 습관을 고치기는 만만치 않다. 새해결심으로 작심하며 굳은 심지로 성경통독을 가족들에게 공표하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동기부여가 유지되지 못하고 꾸준히 읽는 습관이 들지 않았기에 한두 달이 지나 바쁜 일로 며칠 읽지 못하면 이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리곤 한다. 꾸준한 운동을 습관으로 들이지 못하면 비만과 고혈압 등의 성인병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성실하게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이지 못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요원하다. 그러기에 결심과 포기를 반복하기보다 성실한 성경읽기를 방해하는 이유를 찾아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할 일이다.

 

성경이 재미가 없다.

 

꾸준한 성경읽기를 방해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성경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닐까? 재미있는 만화도 한번 읽고 나면 두 번 다시 집어 들지 않는 마당에 성경이라고 별 다를까? 게다가 설교 때에 매년 돌아가며 듣게 되어 십년이 넘게 되면 족집게도사가 되어 설교제목과 본문만 봐도 본론이며 결론을 죄다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판에 유명한 성경인물이며 한 해 동안에도 재탕, 삼탕 하는 성경의 사건들을 모를 턱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재미나 관심을 더해주려고 최근의 TV 드라마처럼 성경의 주인공을 바꾸어 설정하거나 내용을 패러디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다. 필자도 그런 일반적인 이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런 이유로 오랜 평신도 시절에 필자 역시 성경을 꾸준히 읽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언제나 재미있다고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어도 재미없다는 생각은 이제 없다. 무엇 때문일까도 생각해 보았는데 성경을 읽는 관점이 달라져서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에는 생각 없이 읽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고 읽는 게 다르다. 그래서 전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게 되면 기쁨이 솟아나는 경험을 한다. 성경이 재미없어 오랫동안 지속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성경을 읽는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냥 신앙인의 의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하는 목적의식이 분명할수록 성경은 이제 단순한 이야기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보물지도가 되는 셈이다.

 

신앙피로의 후유증

 

금속피로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금속재료에 반복응력이 생길 때 반복횟수가 증가함으로써 금속재료의 강도가 저하되는 현상으로 회전하는 부분의 재료에 많이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좀 어렵게 들리지만 아무리 튼튼한 쇠라도 오래 사용하면 강도가 떨어져서 예전의 강도를 지속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모든 행위에는 피로증상이 있다. 새 직장, 첫 출근, 입학, 결혼, 첫 만남 등은 새롭게 시작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기분이 들것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가고 분위기에 적응이 되면 심드렁해지고 관심이 식어지기 시작한다. 결혼 2년차의 증상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처음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에 대한 기대에 가슴이 뛰고 새롭게 알게 된 이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면 마음이 무뎌져서 형식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매너리즘이 생기는 이유가 된다. 예배가 기다려지는 일도 없어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거나 반짝반짝한 눈으로 성경을 읽는 일도 사라진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야 필수적인 행위니까 그럭저럭 해나갈 수 있겠지만 재미없는 성경읽기는 가장 먼저 포기하는 일중의 하나이다. 사실 교회를 오래 다닌 중견교인조차도 이런 현상은 흔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신앙피로감으로 인한 증상이다. 이런 증세를 치유하는 일은 성경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해주는 동기부여를 지속적으로 갖아야 하지만, 동기를 부여하는 탁월한 성경교사나 교회지도자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택하는 것이 유명한 목사들의 재미있고 감동적인 설교를 유선방송이나 라디오를 통해 듣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행위는 그 당시에는 은혜를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스로 성경을 찾는 일에는 부작용만 유발시킨다. 스스로 성경의 깊은 샘에서 하나님의 뜻을 길어 올리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면 신앙은 정체되거나 퇴보할 뿐이다.

 

성경을 읽기위한 가장 좋은 동기부여는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달려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감격하고 감사하다면 하기 싫거나 어려운 일이라도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또한 성령의 내주하시고 인도하심을 체험하는 삶이 된다면 날마다 깨워주셔서 지속적인 습관을 들게 해주신다. 결국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어 꾸준한 성경읽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성경이 송이 꿀보다도 더 맛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성경을 읽는 시간이 다른 어느 시간보다도 즐겁고 기쁘게 된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스스로에게 동기 부여하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을 읽는 방법을 모른다.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하라고 날마다 다그치지만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방법을 차근차근 가르치지 않는다면 안 좋은 감정이 쌓여 관계만 악화될 뿐이다. 교회조차도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해 잘 가르치지 않기에 이런 현상이 만연한 것은 아닐까? 무슨 프로그램이나 행사에는 열심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성경을 읽는 훈련에 소홀히 한다면 척박한 토양에 심겨진 나무와 같이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성경통독의 열기가 한창 일어 집회에 참여하여 하루 종일 성경을 읽는 행사가 여기저기서 분주했던 적도 있었다. 성경을 노트에 옮겨오면 연말에 시상을 하여 푸짐한 상을 주거나 책으로 제본하여 기념으로 간직하게 하는 교회도 있다. 또 요즘에는 인터넷 붐을 타서 타자로 성경을 쳐서 일 년에 몇 번을 기록하는지 서로 경쟁을 유도하여 많이 쓰게 하려는 사이트도 있다. 이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많이 읽는다면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필사나 타자로 치는 행위가 성경을 꾸준하게 읽는 습관에 그다지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독도 중요하지만 정독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는 목적이 내용을 숙지하기 위해 공부하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꾸준한 습관을 들일 수 없다. 공부가 주는 느낌을 생각해보라. 즐겁고 재미있어서 기꺼이 시간을 들여서 하고 싶은 이는 없을 것이다. 성경읽기가 습관이 되지 않는 이유는 노동과 별 차이 없는 공부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성경은 공부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을 뜻을 찾는 행위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눈은 활자를 읽고 있지만 머릿속에는 생생하게 그려지며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 알아지는 현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읽는 시간이 즐거워지며 기다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늘 의문을 가지고 깨닫기를 소원해야한다. 그래야 성경을 읽을 때 눈에 불을 켜서 보물을 찾듯이 종이가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겠는가? 성경을 읽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는 불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단어 하나, 구절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그 말속에는 무슨 뜻이 숨겨져 있을까 고민하며 상상하며 읽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훈련이 되어야 성경을 읽는 것이 힘들지 않으며 지루하지 않아 습관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을 읽을 때 두 권의 노트를 준비해 놓고 있다. 읽어가면서 감동이 오는 구절이 있다면 노트에 옮겨 적는다. 나중에 다시 읽을 목적이 아니라 노트에 적으면서 천천히 그 뜻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주 중요한 주제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면 또 다른 노트에 정성스럽게 적는다. 그 노트는 삶의 중요한 상황이나 주제에 대한 성경말씀이 조목조목 적혀 있다. 그래서 나중에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적어 내려가고 있다. 물론 성경을 기록하기 전에 주제에 대한 제목을 위에 붙인다. 그래서 언제라도 그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그 노트만 보아도 금방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읽는 버릇을 기른다면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깊게 생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오래지않아 이런 습관을 통하여 분별력과 통찰력을 갖게 되며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에 뜻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다. 물론 성경이 주는 진리를 아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성경을 읽는 즐거움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습관을 붙이다보면 어느새 성경을 읽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는 날이 온다.

 

습관을 들이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집에 가면 재테크에 대한 책이 서가에 한두 권 쯤은 꽂혀있다.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바둑의 묘수풀이 책을 보거나 무협지를 읽다보니 새벽이 밝아왔다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책들은 재미있거나 관심이 지대하기에 굳이 습관을 들일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성경은 마치 홍어를 삭힌 기이한 맛의 홍탁과 같아서 깊은 맛을 모르는 사람은 읽는 시간이 지겨운 노동행위와 다름없다. 지금은 성경의 맛을 알아서 즐겨 읽는 사람도 처음에는 누구나 팍팍한 시간의 연속이었을 게다. 재미없고 지루하기에 즐겨하며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들은 고역의 시간을 오래 참고 견디며 습관을 들였기에 깊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당뇨나 고혈압 등의 성인병이 조선시대의 콜레라나 장티푸스처럼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한 병마가 되어 버린 현대시대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처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느 따뜻한 봄날 아침이면 생각이 나서 자녀들을 불러내어 시도해보기도하고, 몸이 아파 병원에 들렀다가 의사의 위협과 공갈(?)을 들은 날 저녁에 작심하고 헬스클럽 회원권도 끊어보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운동은 온갖 달콤한 유혹을 이기며 시간을 내야하고, 숨이 턱턱 막히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힘이 들기에 오래 지속하기가 힘이 든다. 그 이유는 습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몸의 세포가 전부 물갈이를 하는데 한 3년 걸리므로 습관을 들이는데 그만큼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있다. 성경을 꾸준하게 읽는 습관을 들이는 데도 마찬가지로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이렇듯 중요한 행위이지만 습관을 들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애써 보았는가? 건강에 필요한 운동이나 돈을 모으고 쌓아두는 재테크에 대한 정보는 열심이지만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이는 데는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삶이 고단하고 위태롭다. 탐욕과 두려움을 다스리지 못해 평생 모은 재산을 순식간에 탕진하기도 예사이고 이혼을 당하고 단란한 가정이 깨지는 일도 적지 않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살았기에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 무지하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살을 저미는 고통을 참아가며 이를 악물고라도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그 습관만이 삶을 평안하고 형통한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이다. 세상에는 쉬운 일이 없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것처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습관은 몸에 배기가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삶의 고난과 역경에 난파를 당해 고통과 어둠속에서 평생을 한탄하며 사는 것보다 쉬운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