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의 믿음
(1)
이 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Faith)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대략 두 가지 의미 또는 차원에서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두 가지를 차례대로 다루려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단순히 ‘신념’(Belief)―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간단하지요. 그러나 사람들을 당황시키는 것―적어도 예전에 저를 당황케 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첫 번째 의미의 믿음을 하나의 덕목으로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덕목이 될 수 있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일련의 진술을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이 도덕, 부도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저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어떤 진술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그 증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느냐에 달린 문제임이 분명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그 증거의 충분성을 잘못 판단했다면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다지 명석하지 못하다는 뜻에 불과합니다. 또 증거가 충분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믿으려고 애쓰는 이가 있다면 그저 어리석은 사람으로 간주하면 그만입니다.
글쎄요, 이런 입장 자체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때 제가 몰랐던 것―지금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인간의 정신이 한번 어떤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재고하게 만드는 대단한 이유가 생기지 않는 한 자동적으로 그 믿음을 견지하게 마련’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상 인간의 정신은 이성의 전적인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컨대 제 이성은 마취를 한다고 해서 사람이 질식하는 것은 아니며 잘 훈련된 의사들은 제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절대 수술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한 증거를 통해 완벽하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의사들이 저를 수술대 위에 눕혀 놓고 그 끔찍한 마스크를 씌울 때면, 속에서부터 아주 유치한 공포심이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로 마취되기도 전에 칼을 대지는 않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지요. 다시 말해서 마취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때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제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 있습니다. 정작 제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저의 상상력과 감정입니다. 믿음과 이성이 한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면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가령 어떤 남자가 아주 충분한 증거를 통해, 자기가 아는 예쁜 아가씨가 거짓말쟁이에다가 비밀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이어서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정작 그 아가씨를 만나는 순간, 그의 정신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믿음을 잃으면서 ‘설마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을 털어놓는 어리석음을 다시 범하고 맙니다. 감각과 감정 때문에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수영을 배우고 있는 소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그의 이성은 사람의 몸은 무엇으로 떠받치지 않아도 물에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물에 떠서 수영하는 사람들을 수십 명이나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수영 강사가 잡고 있던 손을 놓은 후, 혼자 물 위에 떠 있어야 할 때에도 계속 이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아니면 순간적으로 믿음을 잃고 겁에 질려 가라앉느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은, 잘 추론해 본 결과 기독교를 믿을 증거의 무게가 충분치 않은데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이성이 일단 그 증거의 무게가 충분하다는 판정을 내렸다고 합시다. 저는 그 후 몇 주 동안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쁜 소식이 들리거나 어려움이 생기거나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때면, 느닷없이 이런저런 감정들이 들고일어나 그의 신념에 일종의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여자를 찾고 싶거나 거짓말을 하고 싶거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들거나 조금만 부정직하면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보이는 순간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즉 기독교가 사실이 아니라면 아주 편했을 상황들이 닥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바람과 욕구들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나 또 한 번 전격적인 공격을 해올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반대되는 새로운 이유들이 등장하는 순간들과는 다릅니다. 그런 순간들에 대해서는 따로 직접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기독교에 반대되는 기분이 드는 순간들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art)입니다.
기분은 이성의 생각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입니다. 저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지금 저는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모든 것이 도무지 사실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 시절에는 기독교가 정말 사실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기분은 여러분의 진정한 자아에 반기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믿음이 필수 덕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분을 ‘어디에서 하차시켜야 하는지’ 모른다면 건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건실한 무신론자도 될 수 없으며, 그 날의 날씨나 소화 상태에 따라 신념이 좌우되는 줏대 없는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습관을 들이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데도 정신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합니다. 사실상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 100명 중 정직한 논쟁을 거쳐 추론한 결과 믿음을 버리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닙니까?
이제 믿음의 두 번째 의미,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이것은 지금껏 제가 다룬 주제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겸손의 주제로 되돌아감으로써 여기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겸손해지는 첫 단계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거기에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해 보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일주일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처음 일주일 동안은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여섯 주 동안 해 보십시오. 그쯤 되면 완전히 원점으로 되돌아갔거나 오히려 그 이하로 추락한 자신의 모습에 부닥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유혹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요즘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유혹에 맞서 싸워 본 사람만이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압니다. 독일군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려면 항복할 것이 아니라 싸워 봐야 합니다.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알려면 누워 있을 것이 아니라 바람을 거슬러 걸어가 봐야 합니다.
고작 5분 만에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은 그 유혹이 한 시간 후에 어떻게 변할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악한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악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악에 굴복하여 그 그늘 아래 삽니다. 그러나 악한 충동과 싸우기 전까지는 결코 그 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유혹에 무릎 꿇지 않았던 유일한 인간이며, 따라서 유혹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간―유일하게 완벽한 현실주의자(realist)―입니다.
자, 그렇다면 봅시다. 우리가 기독교의 덕목들을 진지하게 실천해 보고자 할 때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신 일종의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생각은 깨끗이 털어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일종의 거래로 보는 생각―우리는 우리 편의 계약 사항을 준수할 수 있으며,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께도 하나님 편의 계약 사항 준수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시험이나 거래에 관련된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을 때 처음 생기는 일은 그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한테 기독교는 끝났다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주 단순한 분으로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생각을 산산조각 내는 것은 본래 기독교가 수행하게 되어 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시험에 통과할 점수를 따거나 하나님께 권리 주장을 할 여지가 전혀 없다는 점을 발견하는 이 순간을 기다리십니다.
그럴 때 발견하게 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여러분이 삶의 매순간을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원래 그분의 것을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거나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이 어떤 일과 비슷한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가서 “아빠, 아빠 생일 선물 사게 6펜스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아버지는 돈을 줄 것이고, 그 돈으로 사 올 아이의 선물을 기쁘게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착하고 바른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이 거래를 통해 6펜스의 이익을 얻었다고 생각할 바보는 없습니다.
사람이 이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때에야 하나님은 실제로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 번째 의미의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2)
모든 사람이 주의했으면 하는 사항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그 주의 사항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이 장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은 내용을 다루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냥 건너뛰십시오. 전혀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기독교 밖에 있을 때에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길을 어느 정도 걷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도 아주 많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겉보기와 달리 완전히 실제적인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여정에서 마주치게 되는 특정한 갈림길과 장애물에 대처하는 법을 알려 주는 지침들이므로, 그런 갈림길이나 장애물에 부딪쳐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서적들을 읽을 때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마주친다 해도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부분은 읽지 말고 그냥 넘어가십시오. 아마 몇 년쯤 지나면 그 뜻이 갑자기 이해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오히려 미리 아는 것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장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제 수준에 넘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도달하지 못한 지점인데도 이미 도달한 것처럼 착각했을 수도 있지요. 그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제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본 후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를 부탁할 뿐입니다. 다른 분들도 제 말을 깎아서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옳다고 확신해서 드리는 말이라기보다는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드리는 말로 들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제 저는 두 번째 의미의 믿음,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의 믿음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바로 전에 말했듯이, 이 두 번째 의미로서 믿음의 문제는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가진 피조물이 되느냐―그의 의도에 맞는 피조물이 되느냐, 일정한 방식으로 그와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제가 ‘다른 피조물들과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라는 말을 굳이 덧붙이지 않은 것은, 여기에 그 뜻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바퀴살들이 바퀴 축과 테두리에 제대로 끼워져 있기만 하다면 다른 살과의 간격도 자연히 바르게 조정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만 하면 틀림없이 동료 피조물과도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시험지를 내 주는 시험관이나 일종의 거래 상대로 생각하는 한―하나님과 자신을 서로 간에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관계로 생각하는 한―그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어떤 존재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시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새롭게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정한 신앙 교육을 받는 아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우리는 그나마 받은 것을 다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을 배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발견이란 그렇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발견하는 것, 즉 그것이 사실임을 경험으로 체득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지켜보려고 있는 힘껏 노력해 보는 것(그래서 실패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말로는 뭐라 하든 마음 한 구석에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다음번에는 완전히 선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늘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어떤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노력은 우리를 고향으로 인도해 주지 못합니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 이 일을 하셔야 합니다. 저는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그 지극히 중대한 순간까지만 우리를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을까?”라는 질문은 던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털썩 주저앉아 자기 속을 들여다보면서 그 지점에 얼마나 가까이 왔나 학인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내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와! 지금 내 키가 크고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중에 뒤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이게 바로 키가 자란다는 거로구나’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주 단순한 일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언제 잠이 오나 초조하게 신경 쓰는 사람은 밤새도록 잠 못 들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이런 일은 성 바울이나 존 번연의 경우처럼 꼭 급작스럽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바람에 이 일이 몇 시에 일어났는지, 심지어 어느 해에 일어났는지조차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본질 그 자체이지, 변화가 일어날 때의 느낌이 어떠했느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을 의지하던 상태에서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상태로 변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저도 알지만, 그 문제는 잠깐 내버려 두기로 합시다.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실천하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자기 역시 어떻게 해서든지 살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닮아 가게 해 주신다는 사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부족함을 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표현대로 그는 자신의 ‘아들 됨’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실 것이며, 우리를 그분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 말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제 4부에서 좀더 깊이 다룰 생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것을 거저 주신다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는 모든 것을 거저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기가 지금껏 해 온 모든 일과 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좋은 점만 보시고 나쁜 점은 눈감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유혹을 이기려는 노력을 포기하기 전에는 ―항복하기 전에는―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노력을 포기하는’ 방식과 이유가 합당하려면 그 전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 볼 때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긴다는 것은 노력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을 그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 가기를 바라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희미한 첫 빛줄기를 마음으로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선한 행위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를 두고 자주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저는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무어라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이런 논쟁이 가위의 양날 중 어느 것이 더 필요한가를 따지려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사람은 도덕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 봐야만 항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에 입장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패러디를 만들어 서로를 비난했습니다. 이 두 패러디는 진리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지요. 그 중 한 편의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오로지 중요한 건, 선한 행위이다. 최고로 선한 행위는 사랑이다. 최고의 사랑은 돈을 바치는 것이다. 돈을 바치기에 최고로 좋은 곳은 교회다. 그러니 우리에게 1만 파운드를 내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뒤를 봐 주겠다.” 물론 이 헛소리에 대한 대답은 “그런 동기로 베푸는 선행, 천국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베푸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라 장삿속 투기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는 비난을 받았지요. “오로지 중요한 건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친구여, 마음껏 죄를 짓고 즐겨라. 그래도 그리스도께서는 하등 문제 삼지 않으실 것이다.” 이 헛소리에 대한 대답은 “당신이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주목하는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그리스도를 믿거나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그에 대한 몇몇 이론을 머리로만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놀라운 구절 안에 이 두 가지를 통합함으로써 문제를 마무리 짓습니다. 그 구절의 전반부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만 보면 마치 모든 것이 우리와 우리의 선행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반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구절은 마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므로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모순되게 보이는 구절들이야말로 기독교에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실이 당황스럽긴 해도 전혀 의외로 느껴지진 않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일할 때 정확히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일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의 일인지 칼로 자르듯 철저하게 구분하려 들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처럼 “그는 이 일을 하고, 나는 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금방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분 밖에 계실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설사 하나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 내용을 인간의 언어로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억지로 표현하려다 보니 교파마다 제각기 다른 주장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선행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도 믿음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며, 믿음을 크게 강조하는 교회 또한 선행을 권면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기독교가 처음에는 온통 도덕 얘기만 하고 의무와 규칙과 죄와 덕(德)에 관한 말만 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이 모든 것을 통해 도덕 너머의 것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리라 생각합니다. 농담할 때가 아니라면 이런 것들이 한낱 얘깃거리도 못 되는 나라에 대해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습니다. 거기 사는 사람들은 마치 거울이 빛으로 가득하듯 우리가 선이라고 불러야 할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달리 무어라고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바로 바깥에 있는 단계에 불과합니다. 그 너머 아주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보다 멀리 볼 수 있는 사람이야 물론 많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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