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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적 설교2

하나님아들 2024. 5. 19. 22:53

복음적 설교2


열번째로, 신약의 다른 모든 부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 안에서 제시되어야 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획득되었고 그 구속자가 파송한 자로, 보혜사로 주어졌어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 승천하면 그 다음 단계로 자동적으로 오는 별도의 구원 과정이 아니에요.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 사역으로 획득했고 그 구속자가 파송하니까 왔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 보혜사로 왔어요. 보혜사가 무엇이냐? 파라클레토스( )예요. 파라클레토스는 글자대로 따지며는 변호사이지요. 변호사, 법정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을 변호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 파라클레토스에요. 그런 뜻으로 요한 1서 2장 1절에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라, 대언자, 변호사, 그것이 보혜사 뜻이에요.
그러나 보혜사는 파송자가 정했어요. 보혜사의 임무는,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고 말함으로 보혜사는 백성들과 함께 있는 존재를 말해요. 그러니까 보혜사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했죠.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눈 앞에 나타나 그의 속죄 사역을 보고하여 속죄 사역을 완성함으로 성령을 파송했어요.
자, 바울에 의하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골고다에서 다 이루어졌어요. 히브리 저자에 의하며는 그것으로 다 끝나지 않았어요. 그것은 골고다에서 드려진 제사가 하나님 얼굴 앞에서 드려져야 했어요. 히 9:24,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타나시고, 속죄 사역을 이룬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몸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타나셔서 자기의 속죄 사역을 보고해요. 속죄 사역의 완성이에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가 완전한 이유는 땅에서 지상에서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에서 드린 것이 아니고 '참 성소에서 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드렸다'는 말 뜻이에요.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그렇게 함으로 속죄 제사를 완성해요. 그러므로 의를 획득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성령 강림은 구속 사역의 연장이에요. 그것이 복음 완성이에요. 그러므로 성령 강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자동적이고 독자적인 과정이 아니에요. 오순절 파는 예수 믿음과 상관없이 자기의 도덕적인 의로 완전히 성화를 이루어 가지고 성령을 청구해요.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요. 또 성령의 활동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에요. 성령의 활동 영역은 별도의 자기 것을 가지고 오는 게 아니에요.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라,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해요. 즉 주 예수의 구속 사역의 증거와 그 적용이 성령의 사역의 전부에요. 성령의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구원을 적용해요. 다른 새로운 구원이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을 때 구원이 초보 구원이고 성령 받아야 세례 받아야 큰 구원이다, 그런 것이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증거고 그 적용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에요.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직임도 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적용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전혀 독자적인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성령이 있기 때문에, 성령이 오셔 가지고 자기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줄 알아요. 그렇지 않아요.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적용이에요. 혹은 그리스도의 거룩을 우리에게 적용함으로 거룩하게 돼요. 성령을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설명하고 강조하면 그것은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영과 다름없는 것이 돼요.
교회에서 언제든지 증거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인간의 자기 목소리, 자기의 내적 다른 자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지 성령의 소리가 아니에요. 제세례파들, 17세기의 퀘이커파들, 18세기의 웨슬레의 부흥 운동도 그런 것이 많았어요. 지금 20세기 오순절 운동 이후에, 오순절 운동에서 은사운동으로, 은사 운동이 지금 뉴에이지와 합쳤어요. 그래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고 우리는 지상의 작은 신들이라, 내가 신이라고 인정하면 병도 없어지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뉴에이지 운동과 똑 같은 것을 교회에서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을 분리하면 성령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 영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그리스도에게서 분리해서 생각하면 복음이 되지 않아요. 성령의 은사를 많이 강조하는 곳에 은혜가 넘질 것 같아도 그렇지 않아요. 그런데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이 없기 때문에 메말라 죽어요. 은사만 강조하는 곳에 영이 메말라 죽어요. 어디 그런데 봉사하는 사람 없어요? 신유만 강조하고, 방언만 강조하면 전부 교회가 분열해요. 성령의 은사이면 왜 분열 하느냐구요. 갈라져 가지고 교회도 나오지 않고 그래요. 성령 없는 인간적인 노력만 강조되면 율법주의가 돼요.
성령을 받기 위해서 조건들이 제시되는데 성령세례 못 받으며는, 방언을 못하며는, 중생하지 못했다고 막 치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이런 말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보통 큰 재앙이 아니에요. 보통 구속이 아니에요. 우리는 뭐 방언에 대해서 여러분들 중에서도 방언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마는 별로 문제가 안돼요. 방언에 대해서 비판할 문제가 안되지마는 다 방언하는데 자기만 방언하지 못해요. '하나님, 어째서 다른 사람은 다 성령 충만함을 주시고 나만 이렇게', 그 고민이 보통 고민이에요?
여러분들 오순절의 책 번역된 것 읽어보세요. 어떤 신념이에요. 신념, 기도하고, 기다리고 10년이 되어도 방언이 오지 않아요. 얼마나 괴로워요. 완전히 율법주의에요. 철저주의자에요. 죄를 배척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완전히 순종하고, 열정적인 성령 신앙 갖고 기다리고, 안수 받고, 그리고 기도하고, 죄를 완전히 없애야 돼요. 성령 받기 전에 완전히 내버려야 돼요. 그래야 성령이 오셔요. 토리(?)가 그렇게 가르쳤어요. 그는 오순절파 신학자에요.
우리는 죄인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마는, 그 이론은 성자(聖者)가 되어야 성령을 영접해요. 죄를 완전히 버려야 돼요. 배척을 하고, 철저히 회개하고, 완전히 순종하고, 그런 것을 다 요구해야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 못 받은 사람은 그것 못했으니까 얼마나 구속이 심한지, 율법주의의 완서판이에요. 성령을 받기 위해서 믿음과 별도의 종교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하며, 그 노력은 은혜의 영역이 아니고 도덕적인 것임으로 그 도덕적인 정도로 성령 받는 양을 결정하죠.
그러니까 오순절 파가 한국 교회에 들어온 하나님의 성회, 또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감독들은 아니지마는 거의 오순절 파가 감독이에요. 왜? 얼마만큼 의의 조건들을 잘 이루느냐가 성령을 받은 양을 결정해요. 곧 그들이 나누어 줍니다. 곧 그 사람 중심은 카리스마적인 사람을 중심해서 교회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감독은 아니지마는 누가 그 권세를 당해요. 그 이 아는 사람이 그러는데, 대통령도 그렇게 할 수 없대요.
또 오순절 파는 성령을 물로 비교하죠. 흘러 흘러 넘치도록 복을 받아야 이것이 성령 세례에요. 이런 엉터리를 교회에서 그냥 깜빡 속아 가지고, 그러므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자가 성령을 대변한대요. 그러면 여기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결정하고 성령이 아니고 인간의 영이 나타나 역사해요. 결국, 성령을 강조하지 않는 데도 그렇지요? 말씀의 권세가 센 곳을, 목사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죠? 하나님 말씀이 자기지, 거기서 잘못해 가지고 살아남을 길이 있어요? 혹시 부산 남부교회인가, 남부 교회에 대해서 아는 분? 백영희 목사가 - 서부 교회에요?- 강단에서 설교하는데 칼 맞아 죽었잖아요. 정신병자가 그랬다지만, 글쎄, 난 정신병자로 보지 않아요. 얼마나 독재가 심했으면 그런 일이 생겼어요.
이 개신교도 두 가지에요. 말씀의 권세가 세도 그렇고, 성령의 양이 많아도 문제고... 이제는 인간적인 노력과 정성이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자리에 이르러요. 그러면 기독교의 틀을 다 벗어나지 않았어요? 기독교는 벌써 율법주의가 돼요.
그러므로 성령의 사역과 은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구하고 주 예수와 분리하면 안돼요. 구원의 은혜에서 성령을 분리하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라 무서운 인간의 계율의 멍에를 지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또,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사람은 또 책임이 없지요. 당신들이 조건을 왜 이행하지 않았느냐? 아직 조건들을 이행하지 않았으니까 못 받아요. 책임은 그 사람에게 다 지어 버리고, 그러니까 자기는 아직 죄를 철저하게 못 버렸고 철저히 회개하지 못했고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고. 또, 토리는 그래도 쉬워요. 그렇게 조건 이행하고 믿음으로 기다리면 성령 받는다는 거예요. 성령 세례를, 그래도 방언이 없어요.
그러니 성령을 강조하면 자유와 해방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내에서 제시될 때에 복음이 되고 은혜가 돼요. 성령만 말해 가지고는 은혜가 없어요. 그래 가지고 교회가 부흥하지도 않아요. 전가화 목사, 무슨 집이오? 믿음의 집, 그것 어떻게 해요? 기도하기 힘드니까 북 치고 장구 치고 찬송가만 열심히 불러대면, 찬송 아무리 부른다고 성령이 임해요? 성령의 사역은 기독론적으로 해석될 때만 구원이 되고 신비주의가 되지 않아요. 성령만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가요. 그것이 교회가 성령에 대한 운동과 성령의 운동과 성령의 논의를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이유에요. 그리스도와 분리해서 못해요. 독자적으로 거기서는 사람의 영을 만나고 인간의 자기 투사를 만나요.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해되어야 해요.
자, 종말에 관한 부분도 기독론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돼요. 성령의 역사의 진행이 완료되면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고 역사의 종말이 오는 게 아니에요. 교회가 그렇게 이해했어요. 개혁신학에서도 바빙크도 그렇게 이해하고, 벌카워도 그렇게 이해하고. 다 역사의 진행되다 때가 되면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그리고 심판하고 종말 세계가 이루어지는 걸로, 그런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역사를 지배하고 구원 적용이 완료되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재림해요.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재하고 자기가 이룩한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는 게 재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심판만 강조했죠.? 그러므로 종말론은 기독론의 연장이에요.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재하고 역사를 종결하기 위해서 와요.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이룩한 구원을 약속으로 받아 가지고 있죠.? 그 약속의 표가 무엇입니까? 예, 성령을 받는 거예요. 그런데, 실재가 구체화됩니다. 부활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는 종말에 관한 부분들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사변과 공포만 조성돼요. 종말에 관한 것이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이 되고 공포가 돼요.
우리 한국 교회는 세대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종말론, 요한계시록의 설교를 많이 했어요. 1975년까지 요한계시록을 한국에서 한국 강단에서 계속, 공식적으로 진행되었어요. 그런데, 백보좌 심판과 심판만 강조됐죠. 거기는 구원이 없어요. 그게 다 무서운 공포뿐이에요. 10월 28일날 공중 휴거를 믿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재림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또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이 좋아서도 그러지만 심판을 기다립니까? 누가 담대하게 떳떳하게 바울이 말한 대로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그 앞에 설 사람이 어디 있어요? 심판 받을 게 무서우니까 아무도 종말을 원하지 않아요. 재림주가 심판주로만 나타나니 얼마나 무서워요? 더 이상 구속주는 없어지게 돼요. 그러므로 종말에 관한 성경 부분들도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기독론의 연장으로 해석해야 돼요. 이때만 심판을 말하고 종말 설교가 복음이 되는 것이지요? 왜? 자기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시니까 그러니까 그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악이 소제되어야지요. 필수적으로 소제돼요. 그래서 심판이 있는 거죠.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오신다고요. 그런데 심판만 늘 말하니까 이렇게 ...... '주님이여 어서 오십시오. 주께서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라고 할 사람이 현대 교회에 없어요.
그 외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성경의 중심도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 해요. 생활의 규범에 관한 성경 본문들도 성경의 중심에서 해석되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열성이 나타나고 율법주의가 되살아나요. 이래라 저래라 그렇기 때문에 계율만 해 가지고 칼빈주의가 사람을 죽인다고 그래요. 남을 심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는 잘못해도...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복음도 생활 영역에 대해서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 삶을 해결합니다. 자연 종교요. 율법주의가 돼요. 이래라, 저래라 계율만 강조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자연 종교이지요. 또 율법 종교이고, 자기가 구원하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도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가능해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보장이고 그 수행자에요.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마는 그리스도인으로 계속 자라고 남는 길도 그리스도가 해요. 이처럼 생활의 법도도 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구성 내에서 또 그 은혜와 결부해서 제시해야만 돼요.

열한번째로, 성경주석은 그리스도를 현시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근본주의 전통에 살기 때문에 글자에만 매이고 성경 전체의 맥락을 보지 못해요. 근본주의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5대 근본 교리,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인 부활, 승천, 인격적인 재림, 그게 기독교의 5대 근본 교리다. 그래서 근본주의이지요. 그리스도의 초자연적인 면을 강조해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을 기록된 대로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 그게 근본주의의 근본이지요. 그러니까 성경의 글자만 보는 거지 문맥을 못 봐요. 성경 주석을 많이 하고, 설교는 글자, 성경 본문에서 했는데, 거기에 그리스도는 하나도 없고 복음은 없기 때문에 말씀은 풀어 놨는데 기쁨도 없고 재미도 없고 힘도 없는 것이지요.
60년 대에 오순절 운동이 성하기 전까지는, 60년 중반까지만 해도 글자는 풀었는데 은혜는 하나도 없어요. 말씀대로, 말씀을 중시해 가지고 말씀을 풀어 놨는데도, 전혀 복음의 은혜는 없는 거예요. 설교를 듣고, 성경 주석을 들었는데도 왜 재미도 없고 기쁨도 없어요. 뭐 하려고 교회 와야 되는지. 자꾸 전도만 하라고 그러고, 자꾸 헌금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오겠어요? 여기에 예수 믿는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데 구역 예배가 옛날에는 구역이 사는 식구들이 금요일 날 모여 가지고 함께 예배하고 말씀을 가르침 받으며 교제하는 게 목적인데, 지금은 모여 가지고 숫자 점검하고 돈만 내는 거지요. 모이면 또 먹을 것 꺼내야지. 말씀을 들으려고 안하니까 아무도 아무도 안오려고 그래요. 두 명은 명 모이죠. 주보에다 두 명씩, 그것은 두 명이 실제로 모여서 두 명 모였어요? 전도사님하고 모집자하고 전화해 가지고 모인 것이 두 명 모인 것이지요.
이런 율법주의, 받은 게 없는데 무엇 때문에 모이느냐고요. 자꾸 돈 헌금 내야죠. 5,000원 짜리, 만원 짜리 다른 사람이 탁 내니까 안 낼 수 없어 내죠? 그런 것 왜 하느냐구요. 천주교에서도 구역예배 합니다. 수녀가 와서 찬송가를 가르치고 성경을 풀어줘요. 우리 나라처럼 주일 저녁 예배 마치고 바로 돌아서서 구역예배하고, 그죠? 토요일 밤까지 구역예배하는 그런 짓은 안해요. 개신교가 어쩌다가 이렇게 율법주의가 되어 버렸어요.
말씀은 없고 주는 것은 없는데 자꾸 내라고만 하니까 모이지 않아요. 안 모이는 것이지요. 목사님이 자꾸 뭐라고 해도 빈 데가 많아요. 거기는 몇 명 모였다는 표시나 하고, 헌금 표시나 하고 자, 그런 글자 풀이 주석으로는 은혜를 가져오지 못하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주석했는데 왜 성령의 역사가 안나타나냐구요. 글자만 풀어 놨으니까 그렇지요. 즉,말씀을 제시해도 하나님 말씀으로써의 감동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하므로 그 주해 목적에 이르지 못해요.
주석을 통한 말씀 선포에 성령이 역사하는 길은 그리스도가 제시되는 데 있어요. 주석은 성경의 중심에 있어서 수행됨으로 그리스도가 제시되어야지요. 그리스도가 제시되도록 주석하며는 성령이 역사해요. 그러니까 뭐 축복을 많이 안 빌어줘도 기쁨이 넘쳐나니까 왜 잠와? 목구멍에 넘어갈 떡도 뽑아다가 목사님 갖다 드리고 집문서 밭문서도 가져와요. 축복의 선사로는 결코 그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앞날을 염려하지 않아도 돼요. 복음만 바로 선포할 수 있으면... 장로님들하고 언제 한 번 식사를 하는데, '목사님들이 정말로 열심히, 그 목사님으로부터 신실하게 먹으면- 말씀을 잘 선포하는 목사님들한테 그런 말을 해요- 정말로 열심히 깊이 연구해 가지고 말씀을 잘 선포해 주면 우리가 왜 집문서 밭문서 안 갖다 주겠느냐?'고. 내가 장로 입에서 듣고 온 말이에요.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며 그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와 연관하고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해요. 그리스도가 본문의 주석에서 제시되면 늘 언제든지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들로 생명에 이르게 해요. 그러므로 기쁨이 일어나니까 얼마나 영광이에요! 그게 목표니까 설교자의 영광이지요. 아무나 설교할 수 있어요? 어쩌다가 평신도가 할 수 있죠.
그리스도는 구원의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 목적이에요. 그의 백성을 구원하되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였고 백성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 구원했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나라를 목표하고 구원 사역을 이루었어요. 그러므로 모든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이루었어요. 그러므로 모든 성경 주석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가 제시되도록 수행되어야 해요. 이렇게 할 때만이 성경 주석이 그 목표에 이르러 유대의 율법주의, 율법 종교가 되지 않고 기독교의 설교가 복음으로 제시가 돼요.
그 전처럼 그렇게 쉽게 설교를 복사를 해 가지고 남의 주석 그냥 갖다 베끼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면 안되고 여러분들이 고민을 많이 하고 투쟁을 많이 해야지요. 이렇게 하면 정치하러 다니는 시간이 없어지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주해하는 일에 전념해야지요. 사도들도 말씀을 전하는 것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무했다면, 우리 작은 전도자들이야 오죽 더해야 되겠어요. 이제부터서는 설교를 바로 지으려고 하지 마시고, 설교를 짓기 전에 이 설교, 이것을 읽어보시고 또 설교를 짓기 전에 이것을 읽어보시고 하면서 반복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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