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설교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서철원교수
교회의 문제는 설교의 문제이다. 교회는 말씀의 선포로 발생되었고, 유지되고 존속되었기 때문이다.개신교회에 있어 설교는 교회의 시작과 마지막이며, 선포가 교회의 성질을 결정하고 교회 활동을 한정짓는다.교회에서의 복음으 바른 선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사람들이 생명의 양식을 받았으므로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을 회복받으며,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 따라서 선포의 내용은 복음이어야 하며, 교회의 선포는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되어야 한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구원에로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임을 전해야 한다. 설교자의 권위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이고, 설교자의 설교는 언제나 그를 설교자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한다.설교자의 특권은 바로 복음으 선포이며, 설교자가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제1부 복음적 설교
첫번째로, 복음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선포로만이 사람이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복음의 선포 외에 어떤 것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해요. 아주 도덕적 관념으로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며, 또 예수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가 결국 도덕이나 종교나 다른 사람되게 하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 되게 하려고 도덕적인 강론 많이 하지요. 아무리 도덕적 강론 많이 해도 그것으로는 사람 못 만들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도덕적인 강론을 하고 실천하려고 해도 도덕 강론으로는 실천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윤리학자들이 대학 강단에서 윤리학을 가르치고 책임을 규명해도 그걸로는 윤리가 도덕이 실제로 실현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물론 생활에서의 그저 한계를 넘지 않는 방식은 주나 다른 도덕은 어려워요. 그러니까 도덕 강론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만이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뿐만 아니라 도덕의 실천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의 선포가 사람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 도덕이나 윤리를 실천하게 합니다.
복음의 선포에 성령님이 역사함으로 사람이 변화되어서 바른 사람이 됩니다. 성령은 받으라 함으로 받는 게 아니고, 복음 선포하면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됨으로 성령이 역사해요. 그래서 예수 믿게 되고 성령이 그들에게 오심으로 오순절 파가 말하는 그런 것들이 다 복음의 선포로 이루어져요. 그래서 바른 성령이 역사함으로 그런 사람들이 되고 변화됩니다. 복음 선포에 성령이 역사함으로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사람이 됨으로 예수 믿고 구원에 이릅니다, 자기 자신이 큰 문제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해방하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해요. 복음의 선포로만이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복음에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므로 우리는 지금 복음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뭐지요? 의에 이르러요. 그런데 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허락 받아요. 계명을 지킴으로 허락을 받는데 그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생존권을 말합니다. 죄인은 생존권이 다 박탈당했어요.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 생존권을 주장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생존권을, 의로 마련하셨어요. 그냥 믿기만 함므로 그 의가 자기 것이 돼요. 그 의가 자기 것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고 영생에 이르러요.
왜 그러냐? 복음의 선포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므로 죄에서 해방되고 죄과(罪過)가 제거되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으로 죄과가 제거되지요. 믿음으로 그 피로 씻어지니까 죄과가 제거 돼요. 죄과라고 하는 것은 죄지은 사람이 죄에 대해 받을 죄에 대한 책임, 죄의 형벌을 죄과가, 죄과가 제거되니까 죄의 책임이 제거되니까 죄가 없어져요. 죄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돼요.죄과가 제거되니까 바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거죠. 율법을 다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죄과가 제거되니까 의인이 되어요. 그래서 이 일이 복음의 선포로 이루어질 믿음이 그러니까 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이룸으로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 의인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화평에 이릅니다. 믿음으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죄인이 믿기 때문에 의인이 되니까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 되지요. 의인이니까 영생에 이를 뿐만 아니라 그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아들로 입양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전부다 복음의 선포로 이루지요. 그러므로 화평에 이르러요. 우리는 이 화평을 잘 모르지마는 하나님과 갈등을 하면 평화가 없어요. 율법으로 평화에 이르지 못해요. 율법으로는 언제든지 갈등을 하니까. 하나님과 갈등을 해요. 왜냐하면 율법을 지켜야겠지마는 지킬 수 없는 것이 율법이에요. 그러니까 율법으로 의에 이를 수가 없어요. 그러나 믿음으로 화평에 이릅니다. 복음의 선포가 바로 이 일을 이루어요. 사람의 노력, 의를 이루려는 종교적인 열성 등이, 참된 자기를 만들려는 자기의 노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복음 선포가 이룹니다.
복음을 선포하면 이와 같이 사람이 믿음에 이르므로 의를 이루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이와 같은 인간적인 노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다 이루어요. 왜냐하면 복음의 선포로 사람들이 의에 이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의는 율법의 종교에만 있고, 또 옛날 로마 교회만 율법화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개신교에도 율법의 인간의 노력에 의한 의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 참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특히 웨슬레가 알미니안 신학을 선택한 이후부터서, 이 감리교 웨슬레 신학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지마는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는 데 언제든지 주도권을 가져요. 그래서 우리는 법정적 칭의에 의해서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죄가 많아도 의인으로 의인의 신분으로 법정적으로 선언 받는데, 이 알미니안 웨슬레 신학에 의하면 인간이 예수 믿어 가지고 성화의 노력을 해서∼, 그 의에 기초해서, 그 의에 근거해서 칭의가 이루어져요. 칭의는 그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고 내가 노력함으로 받아요. 그런데 복음이 선포되면 그와 같은 일이 다 없어져요. 바로 자기 노력과 투쟁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복음의 선포가 이루어 냅니다.
복음만 바로 선포되면 인간의 자기 노력이 다 허사가 되고 자기 노력한 모든 일이 다 끝나요. 왜냐하면 그 선포는 복음의 선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성령이 역사함으로 사람이 변화됩니다. 복음이 그 내용대로만 제시되면 복음이 지시한 목표대로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죄인이 아니라, 아니 죄인된 상태에서 의인된 상태에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서 뭐가 되는고 하니 새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복음이 선포되면 사람이 변화되니까 복음 선포의 기적이 발생해요.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일 큰 문제가 아마도 사람이 변화되는 것일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은 노력을 해도 자기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변화시키지 못해요. 인간의 노력으로는 마지막까지 자기가 변화도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변화되는 기적이 복음 선포로 이루어져요.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권위로서 선포되면 성령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말씀의 뜻이에요. 이 복음 외에 다른 어떤 길로도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러므로 전도자들은 언제든지 복음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두번째로, 복음이 생명의 양식이다.
사람이 사는 양식은 빵이나 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그리스도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이 사는 양식이에요. 내가 예수 믿을 때만 복음이 사람의 양식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는 생명의 양식도 바로 복음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는 양식은... 우리는 그런데 예수를 믿을 때는 복음의 선포가 필요하고, 예수 믿고 일단 교회 들어와 살 때에는 이제 다른 걸로, 도덕적인 강론이나 또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나 또 축복의 다복으로 사는 줄 알아요.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이 사는 양식인데, 칼뱅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양식이라고 하였는데 같은 의미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사람이 사는 양식이에요. 사람이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것은 복음으로 이루어졌어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복음을 통해서이므로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근거가 됐어요. 내 생명의 근거가 바로 복음이라는 거요. 그냥 출생할 때만 복음을 먹고, 출생하고 나서 살 때는 다른 것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생명의 원천이 복음으로만 살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성장과 활동을 위해서 항상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생명의 양식이 바로 복음이에요. 복음을 바로 선포해주지 못하니까 언제든지 축복으로 대신하죠. 여러분이 복음을 선포하면 축복 설교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축복 설교를 하지 않아도 복음을 선포하면 사람의 마음에 생명이 부풀어 올라서 넘치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인에게 출생시 그 출생의 근본이 된 복음을 양식으로 하여서 자라고 또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처음 예수 믿을 때만 복음의 선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었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요. 그러나 복음의 선포가 없으면 그냥 옛사람이 다 자리를 잡고 있어요. 어느새 모르게 이제 옛사람이 다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결할 길이 없어요. 성령 받아 가지고 방언 받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길 길이 있다면 복음을 선포하는 것 외에 아무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 때만 복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이 복음의 선포로만 유지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 예수 믿는 사람에게만 예수 믿으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또 부활과 그의 삶을 선포하고 예수 믿은 사람들은 그렇치 않아도 되는 줄로 알아요. 그렇치 않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는 길은 복음의 선포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욕망이 존재해요. 당위를 말하면 당위대로 살 것 같아도 끝이 욕망이 욕망을 성취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행동 방식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인격도 이루어져요. 그래서 이중인격 방식으로 사람의 인격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나가서 마땅히 해야할 당위를 계속적으로 요구받으면 마음이 굳어져서 무관심하게 되고 그리고 사람이 선행을 하도록 법적인 선행을 하도록 강조 받고, 하도록 촉구 받으면 그리 살 것 같아도 언제든지 다 그러는 것은 아니지마는 다음에 옛날, 옛사람의 본성이 작용해서 바로 해야 될 것을 안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안하도록 늘 핑계를 만들어요. 그리고 나와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사람이 생활방식으로 만들어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되죠.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복음을 받아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새 사람이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요구 받으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결과를 낸다. 그러므로 복음의 능력과 은혜와 결부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요구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 저렇게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을 당연한 걸로 제시하면 그 사람들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속의 은혜로밖에 살 수 없음을 강조할 때만이 삶의 방식이 은혜로 이루어지고 또 그렇게 복음이 선포되면서 복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속과 함께 삶의 방식을 요구할 때만이 실질적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얻어요. 다른 길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구속의 은혜 때문에 하면 안되는 것을 안하도록 촉구되어야 합니다. 그 외에는 할 길이 없어요. 즉 복음으로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크게 오산입니다.
복음의 틀 속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르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과 모든 허물에서 피로 구속되었으므로 그 피 때문에 그 구속 때문에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복음,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길을 제시할 때에 그냥 삶의 길만 제시하면 안되고 언제든지 복음을 말하고 복음의 틀 속에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제시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도 새사람으로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어 가지고 옛 사람이, 그것 옛사람이지요, 예수 믿어 가지고 새사람이 되었어요. 그러면 옛 사람은 시간적으로 과거지사가 되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과 새사람이 함께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이 복음, 그리스도의 구속, 구원을 선포해 나가지 않으면 옛사람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복음의 선포, 복음의 내용의 틀 안에서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 옛사람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할 때만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어요. 자기 본래의 욕망을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경우에도 구속되면 포기해요. 그러니까 그냥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방식과 어떻게 하면 안된다는 옛사람의 방식을 금지하는 말을 해 가지고 목사들이 효과를 얻을 수 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으로 양식이 되고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는 거룩해지는 것이에요. 죄악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거룩해져야 합니다. 그러나 거룩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 자연인의 본성이에요. 그리스도인이 거룩해져야죠.? 거룩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이지요? 쉽게 말하면 죄를 버리는 거예요. 그것이 거룩이에요.
물론 구약에서는 거룩이라고 할 때에 성별해서 분리해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으로 돼요.그 뜻은 지금도 반복할 수 있어요. 그러나 분리, 그런 뜻으로 아니고 죄를 버리는 것이 거룩입니다.
옛사람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그리스도인에게 거룩은 영혼에게 심한 반발과 갈등을 일으켜요. 오히려 십자가가 제시되지 않고서는 왜 거룩해져야 하는가, 당위성과 필요성을 깨달을 수 없게 돼요.십자가의 제시없이 거룩해져야 할 요구나 정당성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전혀 복음의 선포 없이는 삶에 자연인이 남아 있어요. 여러분의 설교의 특성이 그리스도인이 은혜 받았다고 해도 그냥 그리스도인이 된 줄 알면 큰 착각이에요. 만일에 그냥 놔두면 그리스도인의 돌아가는 상태는 비탈길에 수레를 끌고 올라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수레를 끄는 사람이 그 수레의 힘보다 크기 전에는 막 뒤로 밀려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처음 가서 어때요? 교회 가서 인사하고, 헌금하고, 자선도 해요. 그러니까 일반 사회에 가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는 예배하고 나가서는 자연인으로 사니 굉장한 외식가이지요. 이것이 카톨릭의 삶의 방식이에요. 복음의 선포 없이 그리스도인이 자연인의 삶의 방식에 안주하기를 좋아하고 거기서 벗어 나오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선포만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게 해요. 복음의 선포는 사람의 마음에 기쁨을 선포합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므로 기쁨과 함께 평화를 성취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 속에 사는 백성들이에요. 그리스도인들은 평화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그 평화가 세상적 평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화이기 때문에 전쟁 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지니고 평안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예수 믿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직접 오는 평화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화이지만 복음으로 조성된 평화입니다.
복음의 선포가 평화를 만들어내요. 복음의 선포는 죄의 용서이고 바로 하나님과의 화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화평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선포로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임재로 평화를 누리며 살 수가 있어요. 복음의 선포가 이러한 기적을 이루어 냅니다. 복음의 선포가 없이는 이런 기적이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기적도 발생하지 않아요.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기쁨 속에 사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선포로 이 일이 이루어져요. 세상의 즐거움과 다른 기쁨이 성취되고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평화가 복음의 선포로 이루어집니다.
세번째로, 복음은 하나님이 마련을 하셨다.
복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셨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해 오셨어요. 인류 역사는 죄의 속박에서 구원을 마련해온 역사입니다. 그냥 이스라엘에서만 구원이 준비된 것이 아니고 세계 모든 역사가 다 인류의 구원의 하나님이 준비하신 역사에요. 하나님의 경륜에서 인류 구원이 작정되고 인류 역사에서 구원이 이루어지고 조성됐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세상의 구원자가 되시기로 하신 거예요. 이 일이 유대인들이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세월이 소요됐습니다. 왜 구속주가 빨리 오셔도 되는데 늦게 오십니까?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구원자가 되기로 하신 것을 인류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정착시켜서 가나안에 살게 함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깨닫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 백성 삼았으니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했는데, 이렇게 가나안에 갖다 놓고, 이렇게 모든 문명이 자나가고 군사가 지나가고 그런 곳에 놓고 거룩해지라고 그랬어요. 참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는 수도원에 와서 기도원에 와서는 참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살 수 있지마는 세속 속에서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려운데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그렇게 길 변에 세워놓고 거룩해지라, 그것은 그들의 거룩함이 무리함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이스라엘을 그 곳에 놓으시므로 구원의 방식이 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세계 만민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근본 생각은,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참으로 많은 영웅들이 역사에 출현하였고 그들은 자신이 구원자로 자처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역사의 근본이에요. 인간은 인류는 사람이 구원하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이게 모든 공통입니다. 모든 인류는 스스로 자기가 자기를 구원해요.
인간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고 인류를 구원해 내지도 못합니다. 인류 구원은 창조주만이 할 수 있어요. 창조주가 구원자가 되시는 것은 사람의 방식으로입니다. 창조주 자신이 사람이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하신 거예요. 이 일이 불가해한 일이므로 역사가 필요했어요. 모든 인류의 기본 생각은 다 자기가 자신을 구원하고 사람이 인류를 구원해요. 이것이 또 기독교에도 많이 들어와 있어요. 로마교라든지, 감리교 신학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있어서 인간이 주도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의 근본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만이 인류를 구원해내요. 그런데 이 일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인류의 역사가 필요해요. 그러나 하나님만이 구원을 약속하시고 준비하셨어요. 이 준비의 그릇으로 이스라엘을 성별해내고, 그 역사에서 구속주를 예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다윗 왕국을 세워 가지고 전 왕국 동안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는 그런 국민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부차적인 국민으로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국민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구속주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한 그릇으로, 구속주의 출산의 도구로, 모태로, 준비되어 왔어요. 그 외에 다른 목적이 없어요.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산과 구원 사역의 일로 다 끝났어요.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은 디도 장군의 손을 통해서 완전히 다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한 민족적 단위로도 소생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구속주로 오시고 성취하셨습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에 죄값으로 치르고 죽으심으로 죄값을 상실하게 하였어요. 죄의 세력을 망하게 함으로 그는 생명을 도입하고 사망을, 죄의 세력을 망하게 함으로 그는 생명을 도입하고 사망을 폐하였습니다. 죄의 세력을 멸해요. 죄의 값이 사망인데 죄의 세력이 상실돼요. 혹은 궤멸 돼요. 흩어져 멸해버리려 하니까 생명이, 사망이 없어지고 도입 돼요. 이 방식으로 그는 사람의 죄를 제거하고 용서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시켰습니다. 화해하여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시켰어요. 이 회복 때문에 성령을 오순절에 보내셨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된, 하나님의 백성되었다는 표로 받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하고 성령 받는 것하고 동시적이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표, 하나님의 백성이 된 표가 성령을 받은 겁니다. 추후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 믿을 때 예수 믿으므로 받는 거예요. 이 일을 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원이요, 복음의 사역이란 그의 사역과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구원을 이루었으므로 그에게만 생명 있고 그에게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과 함께, 그 구원과 같이 사는 것도 그에게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고 사는 것은 우리 힘을 합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알미니안 신학이지요. 그런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우리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유래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제시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구원받은 자가 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예수만 믿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믿어도 아까도 말했듯이 계속적인 그리스도의 제시 없이는 구원되지 못하고 구원 받은 자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됨으로 복음이 되고 복음이 역사해요.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있으면 복음이 없는 것과 같아요. 선포되면 큰 일을 이룬다. 이처럼 복음이 복음이 되고 구원이 구원이 되는 것은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마련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셨으므로 복음은 복음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냈으면 그 복음이 복음이 되지 못해요. 어떠한 체계도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고 하나님만이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입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복음이지요. 복음을 하나님이 마련하시고 그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해 내시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마련하셨고 또 완전히 구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네번째로, 성경의 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말씀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개인에게도 말씀하시지만 민족에게, 즉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러 올 때 그들은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서도 언제든지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심판과 징계가 왔어요.
이스라엘은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 안해요. 이스라엘의 죄는 말씀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듣지 않을 때는 심판과 징계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베푸사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사 창조주를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셨어요.
그러나 처음 인류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어요. 믿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 말씀을 거부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섬겨야 할 그것을 거부한 거예요. 말씀에 대해 마땅히 순종해야 하나 말씀을 믿지 않음으로 반역이 일어났어요. 하나님은 반역한 인류를 찾아오셨습니다. 말씀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구원의 약속이고 구원의 방식이었습니다. 처음 타락한 인류를 만나셔서 심판을 내리셨어요. 그러나 그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그 심판이 바로 구원의 약속이고 구원의 방식이 됐습니다. 자, 그 구원의 방식은 사탄을 멸하므로, 유혹자를 멸하므로 이루어진다고 했어요. 구원은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 인간 창조의 목적대로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다른 것이 아니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며는 구원받은 다음에는 세상적인 축복을 늘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축복 설교를 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의 사명은 늘상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구원이고,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영생이 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한 민족을 택하시고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아브라함의 자녀이기도 후손이기도 해서 그랬지마는 언약을 체결해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됐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됐지마는 그들이 백성으로 남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만 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존재가 허락되었지만,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 멸망했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됐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고 존재해요. 그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과 심판의 징계를 말하지마는 그것을 넘어서 구원을 말씀했어요. 그러나 선지자들의 핵심의 중심은 모세를 통해 주신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강조하고 가르쳤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 존재가 허락되고 유지되었어요. 듣지 않으면 심판과 멸망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말씀을 믿지 않고 듣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심판과 멸망, 그리고 보존과 구출이 반복되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보존되고 유지되었고, 듣지 않으면 멸망 받고 징계를 받아서 심판에 이르러요. 마지막에는 모든 온 민족이 망한 거지요.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므로 멸망당하고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요구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저항이 가중되었어요. 이미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요구가 반복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이 법대로 사는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조했어요. 자,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율법을 주셨을 때에 이 말씀을, 이 책에 기록된 대로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길이 율법에 달려 있었어요. 다른 길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율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지키면 구원에 이르고, 율법을 듣지 않으면 멸망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은 멸망을 당한 거지요. 인간은 결코 영이 오기 전에는 인간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어요. 지킬 수 없는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졌다고요. 그러면 지킬 것이 요구돼요. 그런데 지켜야 살되 못 지키니까 죽는 길밖에 없는 행위, 멸망이에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셨어요. 율법의 길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되는 것을 말씀하셨어요.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렇게 말했지마는 가장 두드러지게 말한 선지자는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가 멸망을 말하면서도 렘 31:30-34까지 더 이상 율법으로 아니고 영으로, 돌비에 기록해 가지고가 아니고 우리의 심비에 인간의 육체의 힘으로 아니고 영으로 율법이 지켜지고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씀하시고 약속했어요. 이 구원의 약속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셨어요. 그것은 은혜로 구원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면 영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었어요. 이 유명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에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것이 구원입니다. 바로 이 구원을 이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섯번째로, 하나님은 그 구원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복음 선포로 믿음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의 선포 없이는 구원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큰 구원을 아무리 이루었어도 복음의 선포 없이는 구원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구원이 이루어졌어도 복음의 선포 없이는 효과가 없습니다. 복음의 선포가 구원을 실현하여 구원으로 구원 되게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된다고요. 실현되지 않은 구원은 구원일 수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구원 사건만으로는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선포돼야지요.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야 구원이 돼요. 선포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게 하고 구주로 역사하게 해요. 왜? 구주로 제시되니까! 또 구주로 믿어지니까. 구원을 적용하는 성령도 복음의 선포 없이는 일할 수 가 없어요. 성령의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길 원합니까? 오순절 종파처럼 성령을 받아라. 그런 선포로 천하없이 성령을 받지 못해요. 성령 받는 길은 쉬운 길입니다. 아주 쉬운 길이에요. 복음을 선포함으로 성령이 역사 해요. 그러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요. 성령은 독자적으로 일하지 않고 허공에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성령이 일하려고 하면 그냥 허공에서가 아니라, 복음의 선포 없이는 성령도 일하시지 못합니다. 복음의 선포가 성령이 역사하는 시간이고 공간이에요. 선포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선포를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역사를 해요. 개혁 교회가 그렇게 성경을 강조해도 선포된 말씀의 강조를 들어요.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기록되었어요. 신약뿐만 아니라 구약도 다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고 기록되었고,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록됐어요. 구약 책의 예언은 바로 거기에 성립돼요. 전체가 그리스도의 책이에요. 그리스도를 언급하지 않는 그런 성경의 구약의 부분들도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의 예비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전체가 그리스도의 예언으로 지목된 그런 부분과, 특히 이사야서, 예레미야, 스가랴 같은 부분만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가 다,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것 같은 모든 성경들도 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기록되었어요.
그러므로 모든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선포를 통하여 효력을 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선포됨으로 그 본래의 목표에 도달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목표로 하고 성경이 기록되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성경이 그 목표에 도달해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가 설교가 되면 하나님 말씀이 역사를 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에서, 선포된 말씀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에요. 그런데 성경이 얼마나 중요하냐?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를 해야죠.
복음이 선포되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셔서 선포된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고 그리스도인이 되며 그리스도인으로 자라 완전에 이릅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져요. 성령의 역사가 아무리 흥성이 일어나기 원해도 복음의 선포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증거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성령의 기본 목표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될 때 성령이 역사를 해요. 그래서 자기가 오신 목적을 이루어요.
복음의 선포없이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자라지 못하여서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라야 거룩한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그런 선포 없이는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못합니다. 복음의 선포에 성령이 역사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성령이 역사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자랍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롬 8:14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거기에 현재 진행형 수동태를 썼지요. 계속적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해요. 거기에 현재진행형을 썼어요, 수동태. 그러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는 현재형을 썼어요. 계속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돼요. 그 길은 말씀의 선포로만 이루어져요. 말씀은 선포됨으로 말씀으로 역사하고, 복음은 선포됨으로 복음으로 역사합니다. 선포없이, 기록된 말씀대로는 말씀으로 역사하지 못하며 구원 사건 자체만으로는 구원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복음이 선포돼야 해요. 사람들이 성령의 인도도, 자기가 범죄하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모릅니다. 성경을 읽으면 알 것 같아도 결코 그 죄를 생각지 않아요. 성경이 분명히 죄를 죄로 지적하고 있어도, 읽어도 그것을 자기 죄로 깨닫지 못합니다. 언제 깨닫느냐? 말씀에서 팍 쳐야 그때야 깨달아요. 그 선포가 얼마나 중요하냐 말입니다.
여섯번째로, 복음의 선포를 위해서 하나님은 사도들과 전도자들을 세우셨다.
구원은 선포되기 위해서 이루어졌어요. 왜요? 구원이, 구원 사건 자체만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구원이 이루어졌으니까 그 구원이 실현되려면 선포되어야 한다는 거요. 그것이 바로 구원은 믿음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선포 없이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구원을 그렇게도 알리시기를 원했어요. 그리고 구원에 이를 자가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전국에 선포되게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도록 작정했어요.
복음의 선포는 선포자가 없이 복음의 선포가 이루어지는 법이 없어요.그러므로 성령께서 복음의 선포자로 오셨어요. 성령께서는 전도자로 오셨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룩한 구원을 전파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어요. 다른 목적으로 오신 게 아니고 바로 성령은 이 구원을 전도하는 전도자로 오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선포되어야 하므로 성령은 친히 복음의 선포자를 맡으셨어요. 성령이 이 일을 하러 오셨어요. 다른 게 아니고, 성령은 복음을 선포할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복음의 선포가 성령의 임무예요. 성령이 복음 선포를 맡았어요. 성령은 다른 독자적인 자기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오셨어요. 그러기 때문에 "내 것을 가지고 말한다", 내 것이 무엇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성령에게는 내 것이예요. 성령이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들의 입을 빌립니다. 성령님이 그냥 오신 게 아니고 사람들의 입을 빌리지요. 천사가 말씀은 전해도 복음은 선포하지 못했습니다.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했어요. 네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셨다. 그런데 구원 얻을 복음을 천사가 말을 할 수 있는데 고넬료에게 말을 못합니다. 천사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어요. 복음의 선포는 사람에게서 나오도록 작정되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구원이므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복음 전도자들로 사도와 전도자들을 세우셨어요. 사도들은 구원 사건의 목격자들이고 증인이므로 구원을 힘있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냥 들은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가 친히 경험한 구원 사건을 지금 선포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들이 힘이 있어요. 그들이 동참하고 봤고 했던 구원이기 때문에 그들의 선포가 힘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했지요.
그들의 절박한 구원 제시는 큰 권능을 발휘했어요. 그들이 함께 했던 구원이었으므로 그렇게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전도자들은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이 직접 목격자이고 증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지요. 그들에게도 큰 능력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었어요. 그들의 선포가 바로 복음이라고요.
베드로가 선포한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이에요.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구주로 선포됐어요.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구원으로 제시됐어요. 십자가의 죽음은 죄를 속량하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것은 지금은 우리는 당연하고 전파하기 쉬운 내용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초대 교회 사도들이 이 일을 선포할 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지도자들의 저주와 정죄 아래 메시야가 아니라고 정죄되어 죽었어요. 저주 아래 죽었어요. 나무에 달려 죽었지요. 신 21:23절,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 그런데 저주를 받아 정죄를 받은 자로 죽었는데 그가 어떻게 구주이고 그의 죽음이 구원이고 속죄제사냐고요. 지금도 유대교는 마찬가지 입장이에요..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 정죄 받아 저주 아래 죽었기 때문에 메시야일 수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모든 백성들, 그리고 실은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설교의 청중의 대부분은 다 이 민족의 재판에 동참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못박으소서 하고 외쳤던 사람들이에요. 메시야가 아니라고 그렇게 정죄해 가지고 메시야가 아니라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저주받은 자로 죽인 일에 동참하던 자들인데 그렇게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구주로, 하나님의 속죄 제사로 그렇게 선포할 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선포를 했어요. 복음으로 제시됐어요. 그런데 기이한 것은 우리의 구원과 모든 문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된다는 것이에요. 인류의 구원과 모든 문제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해결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복음으로 제시된 거예요. 그것이 도대체 유대인들에게도 이해가 될 수 없지만 헬라인들에게 더더욱 이해될 수 없어요. 희랍인, 헬라인들에게는 지식이 구원의 길이에요. 이 지식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에요. 해탈에 이르는 길이에요. 세상에서 죽음에서 모두 놓여나서 해탈해서 저 신들의 세계로 가는 길인데 그게 아니고 한 사람의 죽음이 죄에서 구원이고 사망의 제거라고 말하니까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어떻게 받을 수 있어요? 더더구나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고 육이 되었다고 말해요. 육이 물론 그 뜻이 사람이란 말이지마는 그 육은 우리가 생각하는 한 인격적인 존재의 뜻이 아니에요. 이 죄의 덩어리로서의 의미가 많이 들어 있어요. 그런 육이 되었다고 선포를 했어요.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그런 복음은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죽음만이 죄의 해결이고 모든 인생 문제들의 해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인류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다른 길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거죠. 하나님과 화해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요.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발생하였어요. 하나님을 반역하여 하나님 백성됨을 거부함으로 죽음과 고통, 질병과 슬픔이 생겨났어요. 하나님을 반역한 것이 바로 타락이죠. 그냥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거부했어요. 그러니까 반역이죠. 하나님을 반역한 거예요.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고통과 질병과 사망이, 인간의 모든 문제가 왔어요. 하나님께로 돌아감으로 그 문제가 해결돼요. 계시록 21:3에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있으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글자대로 하나님이 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인류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눈물을 씻기시매"입니다. 그 다음 말이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곡하는 것이나 애통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고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라" 하나님을 떠남으로 이 모든 문제가 생겼는데 하나님께 돌아감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가 끝나요. 그것이 눈에서 눈물을 씻기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류를 자기에게로 다시 돌이키는 일을 자신이 이루어내셨어요.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이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 선포되고 해석되었어요. 선포만 된 것이 아니고 해석됐지요. 이것을 우리가 복음서를 읽어보면, 특히 마가복음을 읽어보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왜 일어났는지 아무 설명이 없어요. 복음서만 읽고서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무데에도 없어요. 있다면 혹시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군데뿐이라고 할 수 있어요. 십자가의 현장은 왜 이 죽음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어요. 그 설명은 사도들의 해석으로 이루어지지요. 사도들의 해석이, 특히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해석이 바로 복음이 돼요. 또 복음이 복음으로 한정된 것은 사도들의 선포를 통해서예요.
요한복음에 의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다 복음이에요. 구원이에요. 그래도 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어요. 그것이 다 특별계시이지요. 그래도 그 행적 전부가 다 기록된 것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복음이 복음으로 한정된 것은 사도들의 선포에 들어온 것만 복음의 확정되고 제시되었어요. 그러므로 사도들의 선포는 로마 전역으로 확장되었어요. 로마 제국 내에 사는 자들이 모두 다 복음 선포가 이르러야 할 대상이었어요. 로마 제국은 복음이 선포될 길을 제시했어요. 로마 제국이야 길을 잘 닦았지요. 그것은 군대를 행진시키기 위해서 길을 닦았어요. 그리고 로마의 통치를 위해서 길을 닦았는데 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며는 복음이 선포될 길을 지금 로마 제국이 닦고 있었던 거예요. 복음이 선포되게 사회적 구조를 마련했어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게 만들었으므로, 선교할 백성들로 삼고 군대 행진의 루트를 따라 쉽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어요. 바울이 산간 절벽을 넘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없어요, 사도행전에. 있어요? 바다와 강과 동족들과 도적 떼들, 강도의 위험, 바다의 파선, 이런 기록은 있어도 로마의 산을 넘었다는 기록은 없다고요. 왜? 로마의 군대의 도로를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했어요. 그리고 스페인에 가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스페인까지 이미 군사도로가 놓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또 군대 행진 도로를 따라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므로 사람도 쉽게 만날 수 있었어요. 길이 나니까 사람이 살죠. 그러니까 그 도로들이 가는 데마다 언제든지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도시들 간에 도로를 따라 문화의 교류가 활발하였으므로 도로의 진행 따라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쉽게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어요. 도로망의 군대의 행진 도로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다행히도 공연을 희랍어로 상연했어요. 법정적인 공연, 그 공식 언어는 라틴어였어도 모든 로마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희랍어였어요. 희랍어를 이해하는 것은 문화인이죠. 그런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 희랍어를 이해했어요. 바울이 다른 방언으로 복음을 선포한 적이 없어요. 희랍어로 다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의 도로를 따라 희랍어로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 사역은 로마의 군사 도로가 진행되는 범위까지였습니다. 또 군사로가 진행되는 범위까지 희랍어가 통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안으로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기록이 없어요. 군사도로를 따라서 희랍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로마 제국의 모든 주민들을 복음의 선포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실로 무모한 사업이었고 실현불가능한 사업이었어요.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바울은 사도의 특권과 지극한 열성으로 로마 제국 내에 도로가 진행된 대부분의 지역을 복음으로 점령했어요. 그러니까 마게도냐까지 복음을 편만하게 하였으므로 더 이상 여기서는 복음을 전할 길이 없으니까, 내가 여러분들을 보고 스페인으로 가려고 한다,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에게 은혜를 더 풍성하게 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로마서를 쓴 목적이지요. 로마 교회는 자기가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가 전한 복음의 내용을 전함으로 함께 교제하고 그들의 후원으로 스페인과 구라파 북부를 복음을 전하기를 바랬어요. 바울이 지나고 2세기가 되니까 벌써 2세기를 지나서는 복음이 다뉴브강을 넘어가요.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의 대부분이 다 복음으로 점령됐어요. 사도는 교회를 설립하는 특권만 가졌을 뿐 아니라 최초의 복음 선포자가 되었고 복음의 내용을 확정하였어요. 사도의 해석과 제시가 복음의 내용과 본 뜻으로 확정되었어요.
자, 바울이 왜 이렇게 중요하냐?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모든 행적과 사건을 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해석했지요. 그러니까 바울이, 바울의 해석이 복음에 함께 속해요. 사도는 구원 사건을 본래 그 의미대로 파악했고 형성된 형태로 제시했어요. 어떻게 이 복음을 바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형태화하여서 제시하고 해석을 해서 그 본래의 의미대로 복음을 복음으로 확정을 했어요. 사도 외에도 작은 전도자들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세우셨어요. 그래서 사도적 선포가 계속되게 하셨어요. 사도적 선포는 다른 게 아니고 바로 사도들이 했던 선포예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의 선포가 사도적 선포예요. 교회를 사도적 교회라고 하는데 그것은 로마 교황이나 영국 교회처럼 사도권을 베드로가 사도로 위임되어 사도권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가 아니고 사도적 선포를 계속했기 때문에 사도적 교회예요
새 왕의 구원될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이름은 그의 사역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어야 구원에 이르러요. 예수의 이름이 바로 인격과 분리되지 않아요. 그러기 때문에 천하 인간의 구원 얻을 이름은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나니, 사도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에게 선포한 뜻이 예수는 구주라는 이름이므로 그 이름은 바로 구원이 돼요. 예수가 구원이지요. 여호수아의 후기 표기가 예수아이지요. 예수아는 야사, 구원하다라는 동사에서 왔어요. 그것을 희랍어로, 예수아를 옮기면 예수스가 돼요.전도자에게 주어진 선포의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일곱번째로, 전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선포를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자신의 구원이에요. 그가 친히 마련하셨어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마련한 이러한 해결의 방식, 한 사람이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 많은 사람의 죄가 씻겨지며 사망이 제거돼요. 이 영생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돼요. 어찌 한 사람이 많은 인류를 대신해 죽어 그들의 죄를 제거할 수 있는가? 이것은 도저히 안될 일이지요? 한 사람이 죽었는데 어찌 인류가 구원에 이르느냐?
세상의 방식은 도저히 설명이 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어요. 하나님의 지혜가 어리석은 방식을 산출하였어요. 어리석은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선포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었어요. 바울이 뭐라고 그랬어요? 롬 1:16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복음이 부끄럽지 않으면 내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이것은 세상 지혜로는 도저히 안될 일이기 때문에 이게 부끄러움을 가져와요. 그러기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그래서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말을 먼저 썼어요. 왜냐하면 복음은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 어리석은 구원의 방식이기 때문에 이게 부끄러움을 줘요. 이런 이유로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했어요. 부끄러움을 주는 방식이어도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에요. 그러므로 이 복음은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전파해야지요.
불신자들, 특히 복음에 항거하는 자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지식인들에게 자기들이 지식을 가르쳐서 그걸로 사는데, 그 힘으로 사는 지식인들, 대학 교수들에게 '당신 예수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고 부활하셨는데 믿어야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에요.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는 전혀 다른 지혜로 세상을 능히 구원해 내요. 세상의 지혜는 구원이 필요 없고, 혹 필요할지라도 그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생각이에요. 그래서 구원자가 있어도 하나님에게서 구원자가 올 필요가 없어요. 구원이 하나님과 관계될 필요 없어요. 구원은 인간 스스로 마련하여 지성이 해결해요. 지성인들은 특히 그렇게 생각을 하죠. 지식으로 제 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요. 다른 과학으로, 또 뭐로, 다 모든 문제는 인간 스스로 해결하고 지성으로 자기 해답을 마련해요. 그런데 그 길이 아니라고 할 때에 어떻게 일이 해결돼요?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다르지요.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하나님만 인간을 구원할 수 있어요. 그것이 성경과 종교 개혁의 근본 진리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해 내요.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로서 와요. 또 구원의 방식은 지성의 활용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구원이 참 구원이에요. 하나님의 지혜가 마련한 구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의 십자가예요. 그것이 바로 세상에는 미련한 것이지요. 어떻게 저주받아 죽은 자의 죽음이 세상의 구원이냐? 또 부활을 말합니다. 어떻게 그 부활이 구원이 되느냐? 그것이 희랍인들에게, 즉 지성인들에게 구원은 이 해탈하는 것이지요. 이 육체를 벗어나서 신들의 세계로 가요. 그것은 지식으로 돼요, 지식으로. 그런데 육체가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은, 플라톤에 의하며는 이 영혼의 감옥이고 무덤과 같아요. 그래서 이 몸을 빨리 벗어버려야 돼요. 벗어 버려야 이 몸이 신들의 세계에 가서 마음껏 진리를 누리고 살 수가 있는데, 육체가 부활에 이른다니 그런 미련한 것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장난하는 새 소리를 전하는 것이냐? 한 번 더 들어보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 부활 한다는 게 무슨 소리냐?
그것은 바로 세상에는 미련한 것이에요. 그러나 그 미련한 구원의 길이 세상을 구원하고 사람을 갱신시켜요. 사람의 지성을, 사람의 지성을 갱신시켜요. 복음의 이름으로 복음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성을 갱신시키니까 희생이 아니라 새롭게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구원은 죄의 해결로 이루어졌어요. 정치적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현대 사회는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죠. 그것은 독재가 없어져도 마찬가지예요. 언제든지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정치적인 해결은 일시적으로만 타당하고 계속 지속될 수 없어요.
현대 사회는 기술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줄로 믿고 있어요. 과학기술이 발달되면 인간의 질병, 수명의 문제가 해결되고 식량과 생활의 편리함이 이루어지고 자연히 악에서 해방될 줄 굳게 믿고 있어요. 어느 때보다도 우리 한국은 먹는 것이 풍성해지고 선진국들도 먹는 것이 풍성해졌어요. 그런데 갈수록 지구상에 기근이 많지요. 기아가 많고, 우리도 사랑의 쌀을 보내고 그러지요. 과학이 많은 인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통과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어요. 그러나 질병 문제는 그래도 남았어요. 죽음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수년 보다 더 빨리 죽을 확률이 높아졌어요. 식량 생산은 크게 늘었지만 기근을 해소되지 않았어요. 생활의 편리함은 많이 증진되었지만 그로 인해 더욱 복잡함과 대형사고를 크게 증대시켰어요. 전쟁이 많이 억제되었어요. 전면적인 살상과 파멸의 현실적인 가능성이 상존하여 큰 비극을 낳게 하였어요. 우리는 '핵' 그래도 남의 일처럼 보고 있지요? 북한의 핵, 또 러시아에서, 독일에서 핵 원료들을 밀매해 가지고 거기 거래해가고 북한에 팔고 그래도 우리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지마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이에요. 우리 남한에도 핵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알면 잠을 못 자지요.
기술 과학의 발달로 사회문제는 해소되지 않았고 더욱 커지게 되었어요. 범죄는 대 조직이 되어 범죄와 정상적인 삶의 길이 구분이 없어지게 되었어요. 아마 미국이 제일 그런 나라라고 할 것이에요. 미국이 범죄가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어요. 인간은 그대로 인간으로 타락한 인간으로 남아 구원은 없는 상태예요. 하나님이 모든 죄를 해결해요. 사람을 변화시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해결은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이에요. 사망이 아니라 생명이고, 죄악이 아니라 의를 세우며, 미움이 아니라 사랑을 세워요.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해방을 해요. 죄와 사탄과 사망을 제거함으로 이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구원만이 완전한 구원이고 근본적인 해결이에요. 죄의 제거는 죄만의 제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십니다. 죄를 해결하러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시지요? 그것이 성령의 오심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죄의 제거이며 사망의 정복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며 영생이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시고 그 안에 거주하십니다. 성령은 예수로 온 하나님의 임재예요. 성령은 다른 게 아니고 예수로 오는 하나님의 임재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오순절 날 뭐라고 그랬어요? 예수를 받으라고 그래 놓고 이 예수를 때가 찰 때까지 받아들이라고 그랬지요. 예수는 성령으로 온 하나님의 임재예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므로 완전한 구원이요, 완전한 해결이에요. 현세의 문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이르는 완전한 구원이에요. 믿기만 하면 모든 구원이 돼요.
여덟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하나로 선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지만 그가 바로 나라 자체예요.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회복된 백성이에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이냐 그러면 바로 구원된 하나님의 백성을 뜻해요. 하나님의 통치라 그렇게 말하는데 신약 신학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뭐냐 그러며는 답이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회복된 백성, 그리고 그 백성을 섬기는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된 별도의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가 시행했어요. 그 시행이 바로 구원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속량된 백성이므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성립되지 않아요.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 흘림으로 백성을 생산했어요. 백성들에게서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 백성을 삼아 그들에게 거하기 위하여 영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어요. 죄가 제거된 백성들에게 오셔서 거하면 하나님의 통치이고 나라예요. 다른 게 아니고 거하심이요. 더 엄격하게 말하면 구속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 그게 하나님의 나라예요. 이는 성령으로 이루어졌는데, 예, 성령의 오심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이죠. 백성을 회복함, 이 거하심과 다스림이 영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요.
예수 그리스도가 백성을 위해 피 흘리고 피로 그들의 죄를 씻고 자기 백성을 삼아 그들 안에 거주해요. 그리스도가 거주해요. 성령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오심이에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별도가 아니에요.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이나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돼요. 그리스도가 그의 구속으로 천지뿐만 아니라 인류의 모든 영역을 자기 것으로 회복하셨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돼요.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세워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초대 교회 선교사들이, 우리는 구원만 받아서 천국 가고 사회는 불신앙의 영역이고 적대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모든 인류 사회 생활이 다 그리스도 법에 의해 질서 되어지고 진행되게 해야 합니다. 정치, 경제, 문화, 학문, 학교, 가정, 예술, 노동과 군사 영역, 농사가 다 그리스도의 법으로 지어지고 그 법이 준행되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사회 각 영역에 세우면 죄악이 제거, 억제되고 그리스도의 법이 시행돼요.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라, 그렇게 말을 바꿀 수 있어요. 그리스도의 법이 시행되는 곳,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죄의 파괴력과 합쳐지므로 다른 것이 통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구현할 수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세우는 일은 언제든지 죄와 죄의 파괴력과 합쳐지므로 바른 일이 이루어질 수 없어요. 언제든지 거기에는 왜곡과 뒤틀림, 오류와 거짓이 개입하여 바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법이 시행되는 것을 바로 이룰 수가 없어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손에 의해서 세워지고요, 현시되어요.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인류에게서 죄악을 완전히 제거할 때에 구현돼요. 하나님은 만유가 되셔요. 하나님이 만유가 되시는 것은, 고전 15:24-28에 있는 하나님이 만유가 되심을 동양식으로 내가 만물하고 일치되고 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류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만유가 되셔요. 하나님의 충만히 거하심이, 하나님의 뜻하심이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나님이 충만히 거하시는데 죄가 있는 곳에서는 못 거하시니까 구원을 이루셨죠? 그래서 죄를 제거해요. 하나님이 충만히 임재하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예요. 충만한 임재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 정치는 전부다 총부리로 칼로 이루어지지마는 하나님의 나라는 다 하나님의 임재로 이루어져요.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법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요. 교회에서만이 아니고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법이 사회의 법이 되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돼요.그리스도인은 죄악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각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법이 세워지기 위하여 죄악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밖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우리와 상관없는 것처럼 방관하고 있다고요. 그것은 불신세계의 일이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믿음으로 생활에서 실현해야 할 상황이에요. 창조의 탐구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진행되어야 돼요.일반은총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변화되어 그 은혜로 모든 창조 영역을 탐구하여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룩해야지요.
개혁신학에만 일반은총이 있어요. 그리고 일반은총론이 칼뱅에게서 시작되었어도 그것을 교리 화하기는 노력하였다기 보다는 그것이 교회의 개혁, 교회의 개혁신학의 기본 근본 진리가 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가 특별은혜를 그렇게 강조하고 구원이 특별은혜로 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 시민 생활의 성립을 위해서 하나님의 모두에게 주는 일반은총을 강조했어요. 거기서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특별은혜로 이지마는 문화 창조사역은 일반은총으로 한다고 하였어요. 그것이 아브라함 카이퍼가 공격을 많이 받은 이유예요.
그게 아니고 구속의 은혜로 창조를 탐구해서 그리스도의 문화를 이룩하는 일을 해요. 변화된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변화된 의식으로 사고하고 생활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 체계를 이루어가야지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문화지요. 그리스도인의 생활 체계를 가지고 그대로 사는 것, 그것을 지금 우리는 못해서 한국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지 않아요? 믿으면 예수 믿으면 구원만이 아니라 변화된 모든 생활 체계가 개혁되어야 해요. 우리는 예수 믿으면 은혜는 강조되고 삶은 강조되지 않아요. 삶은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같은 거죠.
그러므로 예수 믿음과 구원, 성령으로 사는 삶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강조되고 그 삶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연장과 귀결로 선포되어야지요. 언제든지 칼뱅주의자들은 자기의 구원을 확증하기 위해서 선행하는 일에 힘썼어요. 그래서 선행은 자선 사업의 수준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일으키고 산업을 일으켰어요. 그러니까 칼뱅주의자들이 가는 곳에는 언제든지 학문과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어요. 17세기에 영국이 어두울 때에 횃불 노릇을 함으로써 영국과 화란이 다 개혁신학이 전파된 곳, 그 두 나라에서 산업과 학문이 제일 발달하고 산업도 일어났죠?
우리는 밥만 먹고 세상 부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권 확립을 위해서 살아야죠. 우리는 지금 전부 다 부의 추구, 더 많은 부, 그것뿐이지요. 다른 게 또 있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열매가 없는 것이지요. 교회가 일은 안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을 확립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 바로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의 열매예요. 그것은 바로 성령으로 사는 삶이지요. 우리는 소극적으로 죄악을 피하는 것만 생각하지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사회 각 영역에서 죄악을 깨뜨리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선포는 구속의 귀결을 함께 강조해야 합니다.
아홉번째로, 복음의 준비도 복음으로 제시된다.
구약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역사의 시작부터 약속대로 준비되었습니다. 그 약속과 전개가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 증명되고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의 준비없이 구원은 없어요. 뚝 된 게 아니고, 때가 차매 아무 일도 없다가 구원이 이루어진 게 아니고, 준비된 구원이에요. 우리가 받은 구원은 장구한 역사에서 준비되어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우리 구원의 준비가 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졌어요. 그러므로, 구원의 준비의 역사도 다 복음으로 제시돼요. 구원의 준비의 역사지만, 그것도 복음으로 제시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준비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에로 준비이므로 이 준비도 복음으로 제시됩니다. 구약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준비로서 기록되고 구원의 준비로서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한 국가가 되게 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메시야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메시야가 오지 않으니까 지금도 그들은 메시야 왕국을 기대하는 정통파가 있어요.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이 다 메시야가 되는 걸 하지요.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교회는 메시야적 교육이에요. 최선을 다해서 각 분야에서 일인자가 됨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더 낫게 하려고 하기 위해서 그렇게 유대인들이 교육을 열심히 해요. 우리는 출세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시키지요. 그러니까 천재가 없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교육시키니까 그렇게 천재가 많이 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한 국가가 되게 한 것은 이스라엘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화와 세계 통치가 이스라엘의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출생하여 세계 민족들의 구원을 이룩하는 데 그들의 존재 근거, 의의가 있어요.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존재 목적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 단위로서 존재가 끝났어요.
이스라엘의 역사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진행되고 그를 목표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와 삶이, 삶의 모든 방식이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보면 도움이 돼요. 여러분들이 다 구약을 배우면서 공부하겠지만 우리 지금 갖고 있는 성경은 70인경의 배열을 따라서 말라기가 마지막 책이지마는 회당장들이 편집한 책은 역대기가 마지막 책이에요. 역대기가 역사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문서에 들어가요. 역대기가 마지막 책인데 역대기의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역대기의 끝은 여호야긴을 옥에서 끌어내어 바벨론 왕의 자리에 앉힌 것으로 끝이에요. 역대기뿐만 아니라 소위 선지서에 속하는 열왕기도 마찬가지예요. 열왕기도 끝이 없어요. 결말이 없는 책입니다.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전을 건축하라는 끝나고, 열왕기는 여호야긴을 옥중에서 끌어내어 왕의 자리에 앉히고 모든 왕들보다 위로 높이는 것으로 끝이에요. 끝이 없어요. 역대기가 마지막 책인데, 어떻게 중간에서 끝날 수 있어요? 그렇게 끝나 가지고서는 책이 안되지요. 구약은 완성된 책이 아니에요. 결말에 도달한 책이 아니에요. 그것은 다 그리스도를 목표했기 때문에 성취가 그리스도에게서 신약에서 이루어지니까 끝이 없는, 결말 되지 않는 열린 역사예요.
그러니까 모든 이스라엘의 구약을 그리스도와 연결해서 이해하면 다 복음이에요. 구약에 포함된 구약의 내용들이 일부에서는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보여도 다 그리스도 때문에 기록되었고 마련되었어요. 구약의 목표는 그리스도예요. 그러니까 구약을 그리스도를 빛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해요. 구약은 축복의 교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책이지요. 우리는 축복의 교과서로 생각을 하지요? 이스라엘 민족처럼 원하는 민족이 없는데도 군데군데 있는 축복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인양 생각해서 축복의 교과서로 삼아요. 그건 조용기 목사가 그렇게 크게 성공하기 전부터서도 한국 교회는 다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반으로 조용기 목사가 그렇게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거예요. 축복의 교과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책이에요. 그리스도가, 구약이 말하는 메시야가 바로 이 예수라 하는 그것 때문에 구약이 그리스도의 책이고 교회 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생각하고 이해하면 율법주의 유대교밖에 다른 게 없어요. 율법주의 유대교는 구약을 넘어서서 새로운 목표와 완성이 있는 게 아니라 구약 그 자체, 율법이 구원의 길이고 삶의 전부라고 말하는데, 이게 율법주의 유대교예요.
유대교는 신약을 포기함으로, 예수를 배척함으로 율법주의에 그냥 남았어요.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구약을 보면 율법주의 외에 다른 길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므로 구약의, 특히 제사 제도를 그리스도 제사의 표상으로 제시해야 돼요. 자, 구약을 보면 레위기만이 아니라 출애굽기, 민수기 이런 데에 제사 제도가 아주 길게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부터 시작해요. 그런 것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길게 기록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특별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실 자가 경배를 받으실 경배를 정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지마는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바로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어요. 구약의 구구절절 많은 제사 내용들이 다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리 나타내는 예표로,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제도가 무익하므로 폐지되었다고 가르치고 있어요.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가 완전히 죄를 속량하였고 구약의 피 제사는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유대인들의 잘 못은 무엇이냐? 자기들이 짐승의 피로 드리는 이 제사가 이들의 죄를 속한 줄로 알고 있었어요. 짐승의 피로 드린 제사로 죄가 속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죄가 속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되고 그것을 미리 나타내 보이는 것이 구약의 제사인데 이 구약의 제사로 실제로 자기들의 죄가 속량 된 줄로 믿은 거예요. 그것이 그릇되어 내 죄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가르치는 사전 보임, 예표, 이 방식으로 확실하게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것을 미리 나타내 보여요. 계속 그렇게 가르침으로 바른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거죠. 반복해서 자꾸 한다고 하는 것은 속죄가 이루어지지 안했다는 것을 뜻해요. 히브리서가 가르친 대로, 그러니까 그 제사로는 죄가 속해지지 못해요. 그러므로 참으로 이 제사는 제시하는 원형,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를 지시하기 위한 사전 모형이고 예표예요. 레위기 제사가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의 예표로 바로 이해되고 제시되면 복음이 돼요. 왜? 하나님이 이와 같이 큰 구원을 이루시려고 이렇게 정말 제사를 마련하셨어요.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에 구약의 제사제도가 복음이 돼요. 그리스도의 사전 모형으로 구약의 제사는 그 사명과 직임을 다 수행했어요.
내 제자 하나가 창세기를 교회에서 설교를 했어요. 창세기에 들어 있는 풍성한 복음의 내용을 선포하니까 교인들이 너무 좋아가지고 우리는 이제 복음을 다 이해했다. 그런데, 출애굽기로 가고, 레위기도 한다고 하니까 우리가 창세기의 복음을 배웠는데 또 다른 책으로 갈 필요가 뭐 있느냐고 반대를 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레위기를 강의하면 그리스도의 사전 제사의 모형으로 제시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제사의 준비와 사전 표상으로 제시되면 복음에 들어서요.
그러면 율법은 어쩔 것이냐? 율법은 '이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명령으로 주어졌어요.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 온전해지므로 구원에 이를 줄 믿었어요.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 율법주의자들의 목표였어요. 율법을 잘 지키면 완전히 지키면,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유대교에 의하며는, 율법에 완전히 순종함으로 보상으로 받는 것이 성령이에요. 성령을 받아야 의를 완전히 이루기 때문에 오순절 파와 같이 그렇게 주장하죠.
그런 게 아니고 성경과 개혁 신학에 의하며는 성령은 시작점이지 목표점이 아니지요? 예수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출발해요. 그런데 유대인들, 유대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켜 온전해지므로 의에 이르고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를 줄로 믿었어요. 율법을 지키기 때문에 의에 이르는 것이래요. 그러기 때문에 의에 이르기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율법을 준수한 거예요. 그러나 얼마나 열심히 하기 위해 금령 365조에다가 적극적인 면 283조, 그렇게 해 가지고 그렇게 많은 명령과 금령을 만들어서 시켰어요.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면 할수록 범법만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율법은 언제든지 그래요. 안하려고 하는 것은 하도록 만들고, 해야될 것은 못하게 하는 일이 율법이 타락한 인생에게 역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율법이 선하고 거룩하고, 율법이 의롭고 선하고 거룩해도 내가 죄 있기 때문에 율법이 나를 죄짓게 하는 요인들이라, 율법이 적극적으로 죄를 생산한다고요. 해야 될 것을 못하게 하고요. 그리고 안해야 될 것은 하게 하도록, 그렇게 함으로 죄를 생산해요.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그러면 지킨 게 아니라 사실은 더 많이 범해요. 그런데 한 번 범하면 범법 외에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지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동적으로 범하게 되고 율법을 자동적으로 범해요. 한 번 율법을 범하면 한 번 죄를 지으면 그 죄는 내 안에 습관을 형성해서 제 천성으로 작용을 해요. 그러기 때문에 죄는 자동적으로 짓는 것이죠.
강제로 짓는 게 아니고 필연적으로 짓게 되어요. 죄를 억지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고 필연적으로 죄의 본성이 죄를 자유롭게 짓게 만들어요. 그러기에 지키려고 노력한 만큼 더 범하게 되고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들은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지만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으므로 절망과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어요. 율법을 잘 지키려고 도달한 것이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되었어요. 지키려고 하면 걸려 넘어져요. 그러니까 절망하고 좌절해요.
그와는 정반대로 그러면 지킬 수 없으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못 지키니까, 아예 포기해 버린 거지요. 이럴 때는 율법을 무시하고 악만 행하면 그러면 '율법을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라 지키지 않으면 책에 기록된 대로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까 저주를 받는 길밖에 없어요. 멸망뿐이에요.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었어요. 그 길은 민족적 멸망의 길이라, 결국은 다 사라지고 포로가 되었어요. 유다가 좀 남았지요? 이스라엘은 강대하고 인구가 많았어요. 열 지파이니까 강대한 열 지파가 앗수르에게 멸망했어요.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더 이상 지구상에 남겨놓지 않으려고 작정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을 강대한 앗수르 지역에 흩어버렸어요. 더 이상 지파 연대가 완전히 끊겨 버렸어요.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도 더 이상 이스라엘로 못 남게 하기 위해서 모든 앗수르 지역에 사람들을 다 혼혈을 시켜놔요. 이스라엘의 종자가 남지 않게 했어요. 또 바벨론에 망한 유다는 거의 다 망하고 사로 잡혀간 사람이 몇 만 되지 않아요. 다 망했어요. 그런데, 바벨론은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힛데겔 강변에 다 모여 살게 했어요. 돌아왔을 때 4만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았어요. 고레스의 귀환령으로 458년에 1차 귀환이 이루어졌어요. 그때 좀더 많이 가입을 했겠지요. 그때 인구가 많지 않아요. 다 멸망했어요. 그 많던 인간이 그러나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는 자들이 사력을 다하여 노력하고 노력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고 범법만 더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결과로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멸망뿐이었어요. 두 경우 다 멸망뿐이었어요. 결국은 율법은 자기들이 지킬 수 없고 율법의 완성자가 와서 율법을 온전히 지켜 자기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었어요.
율법은 지킬 수 있어서 주어진 게 아니에요. 절망에서 구원자가 빨리 오도록 독촉하기 위해서 주어졌어요.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독촉했어요. 처음부터 타락한 인류가 율법을 지켜서 의를 이룰 수가 없었어요. 구원은 은혜로 이루어지며 율법의 완성자를 믿는 길밖에 다른 길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예수 믿는 믿음을 독촉하고 빨리 그 믿음이 오도록 독촉하고 절규하게 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율법이 딴 것 한 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의 역사는 멸망의 역사에요. 실패의 반복이죠. 지킬 수가 없어요. 지킬 수가 없는 율법을 받아 가지고 있으니 멸망할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주어졌느냐? 이 믿음의 길을 재촉하는 길뿐이에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만 지킬 수 있었어요. 율법 준수로 의가 성립하지만 인간은 결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었어요.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르게 할 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고 그 율법 준수자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에요. 다른 게 아니지요? 이처럼 율법은 구원의 독촉과 복음의 예비 단계로 주어졌어요. __________가 말한 대로 복음은 하나님의 본래적인 사역이고 율법은 생소한(?) 사역이에요. 그래서 정죄하고 벌주었다가,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율법으로는 구원이 안되니까 구원을 독촉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예비 단계이지요. 이처럼 율법은 복음의 독촉과 구원의 에비 단계로 주어졌어요. 율법 준수는 결코 이루어져야 하지마는 그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에 의해서만 성취됐어요.
이렇게 율법도 복음의 예비 단계로 제시되면 율법 완성자를 지시함으로 복음의 도리 안에 들게 돼요. 이것을 지키라 말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주어진 목적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해요. 그러므로 율법도 복음으로 제시되는 것이지요. 예, 율법의 완성자를 지시함으로 복음의 도리에 들어요. 율법 자체가 복음이라는 말이 아니고 복음의 예비 단계이기 때문에 은혜를 가져와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율법을 말하면 정죄와 저주를 가져오는 무서운 것이 아니고. 지옥의 불을 보게 하는 것처럼, 그런 게 아니고 복음의 예비 단계에요.
그러니까 율법을 말해도 은혜가 넘쳐나는 것이지요.
열번째로, 신약의 다른 모든 부분들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역 안에서 제시되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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