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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읽고...

하나님아들 2024. 5. 26. 22:40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을 읽고...

 

 글/ 박태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변승우 지음) 이라는 책을 친척의 소개로 우연히 보게 되었다. 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7년여 동안 다녔기에 누구보다도 조용기목사님을 잘 아는데 그분이 토마스 주남 여사의 책을 세 번 정독하고 번역했다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을 약 30여분 만에 스크린은 했지만 책 표지에 쓰여있는 글이 이 책의 신뢰성에 의문이 가게 만들었다. 난 이 책 자체를 결코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책을 쓰는 것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말씀보다도 누가 무슨 일을 한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박영문씨의 천국과 지옥의 체험을 테이프를 통해 들은 적이 있었고 그것을 성경보다 더 신뢰하기도 했었다. 많은 세월이 흘러 그것이 바로 교활한 사단의 궤계임을 알았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고 정확한 복음을 모르고 신비주의에 빠졌었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성경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좀 더 들어가 보면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책 표지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변 목사를 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하였다. 나의 재림 전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고 회개하게 하려고 이 책을 쓰게 하였다. 이 책은 내가 기뻐하는 책이며 내게 매우 중요한 책이다.”  예수님께서 토마스 주남 여사에게 하신 말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나는 이 글을 보며 오늘날 종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표지의 이 글이 과연 성경적인가?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요1:1) 바로 예수님이시다.(요1:14) 우리 앞에 예수님이 형상으로 보이시지 않아서 그렇지 그 말씀이 바로 예수님인 것이다.

 

 성경이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것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바울도 다른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봐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얘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고후12장) 왜 사람들은 표적이나 예언에 관심이 많을까.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을 앞에 두고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실 그들은 표적을 보고도 잘 믿지를 않았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 이야기가 아닌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만큼 크고 놀라운 표적이 어디 있는가.

 

 토마스 주남 여사의 예언과 환상은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그것에 마음을 뺏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책이다. 그리고 그책은 인간세계에 갑부정도가 누리는 것으로 쓰여있다. 영혼의 세계는 화장하거나 대변을 보는 것이 아니고 차를 탈필요도 없다. 영계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글이다. 

 

 성경에서 설명이 부족하여 한 사람을 택해서 성경에도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성경은 완벽하지 못한 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66권의 성경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 놓았다.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류의 환상이나 계시나 예언에 마음을 빼앗긴다. 

관련자료보기=천국은 있다.저자 '토마스주남'은 영(靈)적인 사람이 아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롬1:17) 즉,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위해 하신 의로운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잘 모르기에 교회를 다녀도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와 표적에 자꾸만 시선이 돌아가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 없이 그저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다니는 종교인들만 양산할 뿐이다. 개인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그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것이다.은사도 말씀과 다치되면 않된다.예수님만 높히는 은사가 진짜 은사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 사람들을 말한다. (갈2:2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 책을 보면서 토마스 주남 여사나, 지은이, 그리고 조 목사님 모두가 그 안에서 예수님이 일하신 부분보다 자기들이 일한 “자기 의”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기들의 칭찬으로 가득찬 사람들, 그리고 무엇을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정말 복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같은 한 형제가 이렇게 이들을 매도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겠지만 이 책은 너무나 성경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있다.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들이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성경은 그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기에 이들의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왜 성경을 믿지 못하고 이들의 말은 믿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이들의 말보다도 능력이 없는가? 난 이 책에서 복음을 발견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예수님이 왜 오셔야 했는가. 예수님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코자” 오신 것이다. (마1:21) 그리고 그 오신 목적을 다 이루셨다 (요19:30) 그분의 죽음은 우리 죄 때문이며 그분의 부활은 이제 우리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건인 것이다 (롬4:25) 왜 그 사실은 말하지 않는가? 다 알아서 그런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교회가 열심은 있지만 복음은 없다. 그것이 안타깝다.

 

 예수님은 이미 세상 죄, 즉 우리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끝내셨다. (요19:30) 우리 모든 죄는 예수님께로 이미 넘어가 버렸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된 자라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는 죄도 짓고 불법을 행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울만한, 하나님 앞에 설만한 의인들인 것이다. 죄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도 못하며 죄인이 천국에 갈 수는 없다. 하늘나라는 죄인이 갈 수 없는 나라이다. 죄와 하나님은 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 놓으시고 거룩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닌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수많은 교인들이 이 사실을 믿지 못하기에 자신의 모습만을 보기 때문에 죄인으로 남아있고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가지를 못한다. 즉 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봐 줄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숨고 싶고.. 바로 오늘날 수많은 종교인의 현 주소이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하면 자기가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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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보면서 사단은 교활한 모습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사실에 정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단은 하나님과 비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이다. ((사14:14) 그는 온갖 표적을 행하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결국은 구원을 받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복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단은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것을, 전도하는 것을, 충성, 봉사하는 것을, 헌금하는 것을, 성경 읽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을, 방언하는 것을, 예언하는 것을, 표적 행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을 듣고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을 진절머리 나게 싫어한다. 왜? 바로 자기 소속에서 하나님의 소속으로 벗어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만히 있어도 다 지옥행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먼저 복음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 이라고 했다. 다른 표적을 보고 천국 지옥을 논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아느냐가 가장 중요한 복음의 시작인 것이다. 여러분은 다 아는가?

 

 앞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은 기성교회에서도 이단으로 칭할 만큼 비성경적이어서 문제가 많은 책이다. 사실 성경 하나면 모든 것이 족하다. 하나님은 그 성경 66권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아 놓으셨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이 필요없는 완벽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다른 환상이나 계시를 자신들만이 마지막 선지자로서 특별계시로 받아 기록하였다는 그 자체가 이 책의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성경에 비기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책에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는 복음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그렇다. 정확한 복음을 이해하고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이 영 분별함을 주시기 때문에 금방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럼 이 책 속에서 몇 가지 생각나는 문제점을 한번 살펴보자.

 

 

1. 일단 책 제목이 잘못되었다.

책 제목이 [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 이라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찬은 그리스도가 그 안에 계신 성도(聖徒)들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안에 계신다는 말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며 죄 사함을 받아 거듭났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2:38 에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는 성령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크리스찬은 지옥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아무나 크리스찬이라 부를 수 없다. 따라서 정확한 제목으로 바꾼다면 <지옥에 가는 교인들>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만일 <교인=크리스찬> 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제목을 선정했다면 정말 무지의 극치이다.

 

 

 2. 무엇을 힘써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

 정말 복음을 모르는 자들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지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롬3:20)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키다가 못 지키는 부분은 회개한다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궤변이다. 대부분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중 하나라도 거치면 모든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약2:10)  따라서 법을 지켜 구원을 받아야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지옥에 가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으로 죄를 짓지 않는가. 율법의 기능은 몽학선생의 기능이다.(갈3:24)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끌려 구원을 받게 하는 기능이다. 요한복음 8장 간음한 여자 이야기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구원을 받아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의 인도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갈2:20)

 

 Y교회 다녔을 때 이 책의 번역자인 조 목사님은 신명기28:1-14 설교를 하면서 <복을 받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신명기28:15-68까지는 <그렇게 못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 장은 알고 보니 저주의 장이었다. 그 모든 것을 지킬 수 없는 율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저주의 내용이 복의 내용보다 더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1차적인 생각은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로마서 3장, 갈라디아서 3장,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와 맞물려 율법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6) 고 질문하셨다. 문자적인 내용보다도 행간에 기록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으라는 말이다.

 

 3. 지옥은 강조하지만 복음은 없다.

 당연히 지옥은 존재한다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막9:48) 이 책에서는 지옥의 사실성에 대해 환상을 보고 온 내용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는데 거기까지는 그래도 이해해 주겠다. 그렇다면 그곳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확한 복음을 제시해야 맞다. 그러나 지옥은 강조하면서 복음은 불분명하다. 급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가 계명이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죄까지 다 기억하여 회개해야 한다고 또 주장한다. 만일 기억나지 않는 회개치 못한 죄가 있어 불행하게도 급작스럽게 죽게 된다면 회개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에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그런 염려 때문에 얼마나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겠는가. 항상 불안하며 자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자유케 하셨다. 모든 죄를 도말(塗抹)하신 것이다.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사40:2)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44:22)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10:17-18)

 

 그래서 우리는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 산다면 늘 불안에 떨고 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 마음이 의에 이르러야 한다. 복음을 듣고 내 모든 죄가 이렇게 사해졌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오면 죄로부터 자유함이 온다. 바로 찬송가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로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그리스도의 피가 얼마나 귀중하고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이들은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4. 행함의 믿음을 행위의 믿음으로 잘못 알고 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설명하면서 야고보서의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행함의 믿음을 행위의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행함과 행위는 구분 설명하고는 있지만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행위=열심> 이다. 그런데 이들은 <행함=열심>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야고보서의 행함을 "열심=행위"로 보고 있다. 그래서 뭔가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행위의 신앙에 빠져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가 더하면 더할수록 예수님은 그에게 일하실 수가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자기 의"가 있기 때문이다. 컵에 물이 가득 찼을 때 더 이상 물을 받을 수 없고 컵이 비워져 있어야 물을 받을 수 있듯이,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은혜를 입을 수가 있다.

 

 야고보서의 행함에 대해서 살펴보자. 내 블로그에서 많이도 설명했지만 다시 간단한 예를 다시 들어보겠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불평하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모습을 우리는 창 22장에서 볼 수 있다. 우리 같으면 100세에 어렵게 난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온갖 불평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다. 그렇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이미>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었기 때문이었다. 네 후손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 모래같이 자손을 주겠다는 말씀 말이다. 그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자기가 이삭을 바쳐도 죽지 않을 것을 알았다. 만일 죽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능히 살리실 줄 믿었기에 그 행함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행함의 믿음이다. 행함은 그래서 믿음과 한 식구이다.

 

약2:21-22을 보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것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

 

 이것이 바로 행함의 믿음이다. 만일 이삭이 아브라함의 후사라고 믿었지만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리는데 주저하여 즉 행함에 주저하여 하나님께 불평했다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행함이 없는 믿음이 되고 그래서 그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 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행함의 믿음은 행위의 믿음과는 너무 다르다. 행위의 믿음은 열심을 요구한다. 뭔가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 될 것 같은 마음 말이다. 내 행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이 잘 봐 주셔서 기도를 들어주실 것 같은 생각 말이다. 그건 믿음이 아니다. 자기 열심일 뿐이다. 따라서 행함은 반드시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전제가 되는 것이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기면 담대하게 행함이 있는 것이지 뭘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그 책에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도 그렇게 열심만을 강조하고 그것이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의 구원은 천주교에서 선행을 베풀거나 교회에 열심이 있어야 구원 받는다는 교리이다. 그것을 개혁교회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이다. 선진들이 피를 흘려 개혁한 것을 어찌다시 죄에 구렁텅이로 가려는가.십자가에서 제물되어 피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새생명을 주시기위해 오신 믿지안이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으려 하는가.

 

얼마나 잘못된 믿음인가. 당신은 믿음이 있는가? 열심이 있는가? 아래에 답을 주시길 바란다.

①믿음 후에 행함인가? ② 행함이 있어야 구원인가? 이것은 중요하다. ③ 열심이 믿음인가? 분별해야한다.

 ④비 성경적인 것을 옳다 하지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