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

여러 견해

하나님아들 2024. 5. 23. 14:11

여러 견해

 

필자의 견해는 학자들의 대표적인 해석법과 다른 독특한 해석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필자 자신이 계시록을 깨닫고 해석함에 있어서 결코 간과(看過)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면을 추가로 정리한 것이다.

 

   (1) 종말적 역사상황과 계시록 해석

종말적 역사상황과 계시록 해석이라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주님이 재림하실 종말의 역사적 상황이 도래(到來)되어야 만이 올바른 계시록 해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계시록 해석은 초기교회나 중세기 교회 때는 시대적 역사상황이 온전한 해석을 할 수 없는 시기였고 계시록의 말씀도 그렇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동방교회에서는 초기에 하나같이 계시록의 정경성(政經性)을 부인했고 종교 개혁가인 루터는 계시록에 대하여 말할 때 기독교가 계시되지 않고, 인증 되지도 않는다고 말하였으며, 성령의 영감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오해를 하였고, 심지어 계시록을 신약 성서로부터 제외시키려고까지 했다.(월리암 바클레이, 월간목회 1977 4월호)

 

그리고 요한 칼빈 같은 경우도 계시록에 대한 주석을 아예 쓰지도 않았다. 만약 초기나 중세기 때에 계시록 말씀이 필요하였다면 종말적 예언의 성취나 종말적 역사성을 배제(排除)한 과거적 해석에 머무르거나 혹은 성도의 삶에 위로와 격려와 소망과 인내 등의 교훈을 주는 지엽적 설교나 해석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시대상황이나 영계상황이 계시록적인 역사적 시점(時點)이나 영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시록 해석이 천차만별(千差萬別)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한 오늘의 역사적 상황이나 영적 상황은 능히 계시록이 해석 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래의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반드시 이르러야 만이 종말에 대한 이상(異像)이나 예언이 성취된다는 뜻을 알려주는 대표적 성경구절이 될 것이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 12:4)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2:3 )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22:10)

 

종말의 역사 섭리서인 예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올 때까지 봉함(간수)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개봉할 때가 분명히 있음을 알려주는데 계시록은 개봉된 책이다. (5:5, 22:10) 어린 양의 죽으심으로 인봉된 책이 개봉되어 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지만 재림의 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 비밀이 사람들의 눈에 는 감추어진 상태로 있다가 때가 차매 주의 종들에게 열어 주시는 것이다.

 

개봉된 말씀이 실제적으로 열려지고 깨달아 질 때가 언제냐 하면 교통의 신속함과 인본적 지식이 급증 할 때라는 것을 말하였으며,(12:4) 21:13, 28 말씀에서는󰡒주의 재림이 올 수밖에 없는 증표적 사건이 나타나는 때를 말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 하거든의 이런 일은 증표적 사건이다) 또 막13:28-29절 에서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시면서 이런 일이 주의 재림의 증표라고 말씀하심과 아울러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 하셨다.

 

그러므로 증표의 사건이 역사 속에(세대) 실현되는 역사적 상황이 전개되기 전까지는 예언의 말씀이 온전히 해석되기 힘들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오늘 이 시대는 주 재림과 세상 끝 날에 대한 징조(증표적 사건)가 주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성취되었고 또 성취되고 있다.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24:4-5)

 거짓 선지자의 미혹(24:11)

 난리와 난리 소문(24:6)

 민족 골육상쟁(24:7)

 처처에 기근과 지진(24:8)

 성도의 환난(24:9)

 사랑이 식어짐(24:12)

 세상 끝이 오기 전에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어짐(24:14)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21:13)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13:28-29)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24:3-14)

 

 

 

   (2) 계시록을 주신 목적중심의 해석

하나님께서 계시록을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 무엇일까?

주님께서 계시록을 결코 속히 될 일, 혹은 반드시 속히 될 일로 말씀하시며,(1:1, 22:6) 당신의 종들에게 주셨는데 주신 이유가 반드시 있다. 그 이유가 바로 계시록을 주신 목적이 된다.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주님의 종들에게 주신 그 이유가 계시록을 주신 목적으로 바로 알지 못하고 목적중심의 해석을 아니 한다면 쓸데없는 논쟁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시록에서 계시록의 최종 수신자가 되는 주님의 종들을 계시록에서는 다양한 표현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일곱 별(1:20), 일곱 교회의 사자, 하나님의 인 맞은 종 14 4,(7:4, 14:1) 굵은 베옷 입은 두 증인,(11:3) 세마포를 입은 예수님의 아내,(19:7-8) 백마 타고 예수를 따르는 군대,(19:14)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종들(20:6)로 말씀하고 있다. 이들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모두가 동일 인물들로서 역사종말에 주님께 쓰임 받는 귀한 종들이다. 이 종들이 하는 일들이 무엇일까?

 

모두가 주 재림 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역사를 이루는 종들로 쓰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7:9-14, 11:3-12) 그러므로 계시록 해석은 종말시대의 구원사역을 분명히 밝혀주는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모든 성경이 다 그러하듯이 계시록도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말씀을 주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구속의 의()가 완성 되었고 재림으로 구원역사는 종결된다.

 

특별히 계시록은 주님 재림 전에 인류의 구속역사를 분명히 보여주는데, 대 환난이라고 하는 전무후무한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소위 세대주의자들의 해석은 교회가 대 환난 전에 휴거되기 때문에 대 환난과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로 오해된 해석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 환난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역사를 말할 수가 있겠는가?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하는 마귀의 술수에 넘어갈까 염려가 된다. (7:25)

 

반면에 또 다른 해석은 대 환난의 시기와 심판의 시기를 구분할 줄 모르는 연고로 말미암아 환난을 심판으로 심판을 환난으로(도 나팔도 대접도 모두 재앙으로 보는 견해) 동일시하면서 혼선을 빚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필연코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심판역사를 분명히 말해주지 못할 것은 자명하다. 역사종말의 대 환난은 전무후무한 환난임이 분명하지만 심판은 아니다. 심판기에는 결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말 그대로 복음의 대적자들과 불신세상을 심판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16장의 일곱 대접은 재앙이며 심판이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대 환난은 결코 심판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한 구원의 역사가 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는 있지만 전 세계 모든 인류는 마지막 대 환난의 시험을 결코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한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 3:10)

 

그 이유는 마지막 대 환난은 하나님의 섭리적인 환난이기 때문이다. 대 환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많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인류의 마지막 구속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섭리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한 섭리이다. 대 환난은 불가피하게 전 세계를 양대 산맥으로 분리시킬 것이다. 환난을 일으키는 짐승의 세력에게 경배하고 그의 통치방법을 따라 짐승의 표를 받는 무리들과 반대로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만을 절대 경배하며, 짐승의 우상경배와 짐승의 표를 절대 거부하는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인 교회이다.(일곱 금 촛대)

 

그리고 교회도 환난을 통하여 불가피하게 둘로 갈라지고 만다. 참된 교회와 바벨교회, 참된 종과 거짓된 종, 알곡과 쭉정이로 갈라진다. 이도 환난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은 불가피하게 영적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대 환난 가운데 두 세력의 충돌로 인하여 짐승은 세상을 짐승의 세상으로(마귀 세상), 하나님의 종들과 참된 촛대 교회는 환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하여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전쟁이며, 복음을 전파하는 강력한 전도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계11장에서는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는 말씀의 성취로 보여주고 있다. 이때에(대 환난) 전 세계에서 구원받는 백성들의 무리가 얼마나 많은지 계7:9절에서는 흰 옷 입은 무리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7:9)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7:14)

 

이와 같이 대 환난에서 수많은 주의 백성들을 짐승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보호가운데로 인도하는 역사가 계시록 곧, “반드시 속히 될 일” “이후에 마땅히 될 일” “결코 속히 될 일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속히 될 일의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주의 종들은 역사종말의 큰 환난 곧, 대 환난 가운데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명이 계시록을 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임을 깨닫고,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맞은 종으로, 굵은 베옷 입은 증인으로 준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그리할 때에 역사종말에 전무후무한 환난이 오지만 전무후무한 복음역사의 증인으로 쓰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11:3-6) 그리고 이 거룩한 종말의 구원사역을 감당한 종들은 그들의 사역이 끝나는 날, 주의 재림을 영접하는 신부된 성도로서 영광의 자리에 이른다.(11:7-12) 곧 이들은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종들로서 영·육간에 구원을 받으며,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주와 함께 천년동안 왕 노릇 하는 복을 받는다.(20:6)

 

계시록 해석은 가장 중요한 대 환난과 주의 재림, 그리고 이때에 이루어질 구원의 역사를 확실히 증거 해야 한다. 무책임한 환난 전 휴거설로 교회로 하여금 환난 날을 대비하지 못하게 하거나 아니면 환난과 재앙과 심판만을 강조하는 일방적인 해석으로만 이어진다면 참 소망과 진정한 복음의 역사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은 전부 가려지고 만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것은 결코 계시록에 대한 온전한 해석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주의 종들이 증인의 삶을 살면서 종말의 구원사역의 실제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3) 그림자와 실상의 해석법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림자와 실상의 해석법이란 계시록 기록 당시의 역사적 사건이(과거 역사적 배경)종말의 예언 성취의 그림자적 혹은 모형적 사건임을 알고 해석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곧 계시록의 해석을 과거 역사적 해석에만 국한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 과거적 해석에 국한된 해석으로 끝나고 만다면 우리들은 계시록을 통하여 과거역사 공부만 할 것이고, 예언의 말씀이면서도 예언 성취의 실제성이나 미래역사의 실제성이 전혀 없는 교훈만 얻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계시록의 계시, 예언, 반드시 속히 될 일(1:1), 결코 속히 될 일(22:6), 이후에 마땅히 될 일(4:1), 장차 될 일(1:19) 등의 미래적이고 예언적인 말씀은 전혀 그 의미가 상실된 문자에 불과 할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예언서임을 잊지 말아야 된다. 그러나 계시록이 계시적 예언서이지만 하나님은 계시록이 기록 될 당시의 역사상황을 전혀 무시하고 말씀을 주신 것은 결코 아니다. 분명코 계시록의 말씀 중에는 계시록이 기록 될 당시의 최대제국인 로마가 등장하고 로마의 정치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사회모습과 그 사회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적 투쟁도 보여 주고 있다. (특별히 계1-3장의 말씀 속에서 요한의 환난과 일곱 교회의 역사적 상황이 모두 로마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여 역사 속에서 성취케 하시는 한 방법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계시록의 예언이 궁극적으로 성취 될 미래역사의 실상으로 세워놓고, 계시록이 기록 될 당시의 시대와 사건과 인물들을 통하여 역사(歷史)를 이루시었고, 오늘의 역사적 시점 속에서 과거를 볼 때 과거역사는 그림자적 역사요 혹은 모형적 사건의 역사로 보게 하시는 방법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마24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에(A.D70)대한 예언에서도 볼 수가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고, 인간종말에 환난과 멸망에 대한 예언을 궁극적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의도이다. 또 구약 다니엘서에 나타난 수리아의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의 예루살렘 박해가 종말적 적그리스도의 그림자가 된 사실에서도 볼 수 있고,(24:15,13) 그 외 구약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변방의 강대국들의 침략적 사건을 그림자로 보여 주면서 종말을 예고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예언한 예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어진다.(7:14, 8:5-8, 9:4-7, 19:1-10, 2:44-45,  7-8)

 

그림자가 있으면 반드시 실상이 있고, 모형이 있으면 실물도 있기 마련이다. 예언서에 있어서 그림자와 실상의 역사를 구분치 못하고 모형과 실물의 역사를 구분치 못하여 그림자적 역사를 실상으로 알고 모형적 역사를 실물역사로 해석하고 만다면 계시록 해석은 자연히 과거적 해석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예언적 재료를 해석함에 있어서 해석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를 고려하여야 된다. 예언은 역사와 달라서 시간적으로는 산재(散在)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한 몫 한 건으로 말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한 예언은 종종 여러 번 성취된다. 예언은 그 형태에 있어서 현재와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언은 미래에 대하여 현실의 재료를 가지고 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은 은유(隱喩)로 기록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종종 시적으로 또는 상징적으로 표현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해석자는 이렇게 기록된 예언을 문자적으로 일종의 현실역사처럼 보지 말 것이다. 만일 그렇게 예언을 잘못 본다면 그것은 예언의 성격을 파괴시킨다. 예언이 현실의 재료를 사용하는 이유는 미래를 말해 보려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약 예언에도 종종 구약의 재료를 사용한 일이 있다. 예언에 있어서 종합적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그 성취가 어떠한 것임을 찾는 것보다 거기 사용된 상징과 이름과 사건과 국명과 인명 같은 것을 연구하여 그 의미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종합적 의미는 보이는 상징들 속에 감춰진 것이고, 상징 그대로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마 24장에 있는 예언을 살펴볼 때에 그 교훈을 예루살렘 멸망과 세계의 최후 종말로 양분(兩分)하여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그 예언의 단일성을 파괴함이 된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은 동시에 세계적 종말에 대한 것을 상징한다. 예언은 인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준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종말관적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현재 생활에 있어서도 종말관적 의식의 실생활 태도를 가지게 하는 것이다(박 윤선  요한 계시록 주석 p34-35)

 

 

   (4) 교훈과 예언적 해석법

요한계시록은 이미 계시록 자체의 증거가 예언서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수많은 주석가나 목회자들이 계시적 예언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의 특성(特性)을 말하지 못하거나 간과(看過)해버리면서 교훈적 설교나 가르침으로 끝내고 만다면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계시록도 얼마든지 우리들의 삶에 적용시키는 교훈적인 말씀을 얻을 수가 있다. 하지만 장래에 대한 예언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예언의 뜻을 반드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한다.

 

본서(계시록)를 크게는 역사의 대원리를, 작게는 개인 신앙생활의 지침서로 보아도 과오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역사는 선악간의 투쟁으로 반복된다. 어느 시대이든 이러한 역사적 원리를 볼 수 있고, 따라서 어느 시대이든지 그리스도는 재림하실 것이며 종말을 예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기에 나열된 환상들이 교회적 및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기준과 교훈이 되어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영적 의의는 어디까지나 응용이지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교훈만을 치중하고, 그 예언적 성격은 폐기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서를 종말적 사실로 해석하면서 그 영적 의의와 교훈을 실생활에 응용하여야 할 것이다(이 상근  신약주해 요한 계시록 p 33)

 

이상근 목사님의 견해가 참으로 옳다고 생각하면서 계시록의 예언적 구조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계시록은 말세에 반드시 속히 될 일, 혹은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이 기록된 예언서이나 실제적으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이 기록된 장은 6장부터이다. 4장은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의 계시를 보여주고 행사하는 계시 본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5장은 예언이 담긴 일곱 인봉의 주권을 가지신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인권(印權)을 인계하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권을 인수하는 장면이 기록된 말씀이다.

 

6장부터 비로서 인봉이 개봉되므로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의 예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3장까지도 예언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1장에도 예언의 성격을 띠는 말씀이 많이 있고, 2 3장도 소 아시아 일곱 교회 신앙의 실상과 약속을 말하지만 그 안에도 예언으로 하신 말씀이 많이 있다. 다만 6장 이후부터는 구조적으로, 체계적으로, 예언의 말씀이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계시로 전개되고 있다는 뜻이다.

 

   (5) 상징(象徵)과 여자적(如字的) 해석법

상징과 여자적 해석법이란, 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이 문자적 계시인지 아니면 상징으로 표현된 계시인지를 분별하여 해석의 원칙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계시록의 계시 내용은 상징으로 표현된 계시도 있고 문자적으로 보아야 될 계시의 말씀도 있다. 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이 기록된 내용이 상징 계시인지 문자적 계시인지 분별하지 못하고 해석한다면 해석의 혼란이 올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계시록에 있는 계시의 내용 가운데서 예를 들어 말한다면 일곱 나팔의 계시내용은 환난의 양상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거의 대부분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대로 일곱 대접의 내용은 대부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할 계시의 말씀이다. 만약에 일곱 나팔과 일곱 대접의 계시형태를 구분치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해석법을 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서로 반대적 해석을 하게 된다면 과연 계시록 해석이 어떻게 될까?

 

한 가지 실 예를 들어 보도록 하겠다.

미래파나 말단파(주로 세대 주의자들)들은 그들의 주장 속에서󰡒교회라는 말은 계시록 속에서 1-3장과 22:16절 외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4장 이후는 교회가 없으므로 교회에 관한 계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또 계4:1 󰡒이리로 올라오라라고 한 말을 교회의 휴거로 보기 때문에 4장 이후부터 19장까지는 교회에 대한 내용이 아니고 모두가 유대인을 향한 말씀으로 그들은 해석하고 있다.

 

또한 성전(11:1)을 글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고 (지금은 성전이 없으나 앞으로 재건될 성전으로 봄) 이스라엘이나 혹은 12지파를(7:4-8) 문자 그대로 유대민족과 지파로 보고, 4-19장까지의 모든 환난도 이미 교회는 휴거되었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고 유대민족이 당하는 환난으로 보며, 두 증인의 전도도 유대인 전도자로 보고 두 증인의 휴거도 유대인 전도자들의 휴거로 보고 있다. 왜 이와 같은 해석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시록 해석을 너무나 문자적 해석에 치우친 나머지 상징으로 가리어진 영적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교회가 4장 이후부터 없는가?

11 3절에 일천 이백 육십일 동안 예언하는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교회가 아닌가? 촛대는󰡒교회󰡓라고 분명히 1:20절에 계시자이신 주님께서 해석을 하시었다. 촛대는 분명히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주님께서 상징으로 말씀하신 것을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또 계19:7-8절을 보면 어린 양의 혼인 기약에 예비 된 자를 그 아내로 표현한 그 아내가 바로 교회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4장부터 교회가 없다는 말은 세대주의 자들이 문자에만 계속 메이는 한 상징으로 표현된 교회를 결코 발견하기가 힘이 들 것이다. 그리고 4 1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도 앞뒤 문맥을 보면 그것이 교회의 휴거가 아니고 사도 요한에게 이후에 마땅히 될 일(역사종말에 이루어질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고 분명히 계시 받는 방편으로 말한 것인데 엉뚱하게도 교회의 휴거로 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스스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사도요한이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교회의 휴거로 보고 있으니, 어떻게 사도요한을 교회로 보고, 휴거로 보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영적으로 해석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을 영적으로 혹은 이상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또 성전이나 이스라엘이라는 문자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보거나 유대민족으로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유대와 이방의 차별을 없애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스스로 파괴하는 행위가 아닌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3:28-2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 ( 3:7)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2:28-29)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2:16-17)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후 6:16)

 

상기 성경 몇 구절을 통해서도󰡒성전이나󰡒이스라엘󰡓이라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을 보게 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영적 이스라엘󰡓이요 󰡒이면적 유대인이요󰡓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성령을 모신 그 심령이 곧 󰡒성전󰡓이라는 것을 밝히 말씀 하신다. 계시의 형태를 잘못 곡해하여(상징과 문자적, 영적인 면과 육적인 면) 계시록 해석을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훼손하거나 하나님의 섭리를 오도(誤導)하는 그 책임은 누가 지겠는가?

 

이상 몇 가지의 실예를 들어 계시록 해석에 있어 상징으로 된 계시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할 계시를 먼저 분별할 줄 아는 것이 계시록 해석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생각해 보았다. 결국 해석보다 더 중요하고 급선무가 되는 것은 계시의 형태를 분별하는 분별력이 될 것이다. 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상징으로 계시 된 이유는 아래와 같다.

 

 허락된 자 외에는 비밀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다.

(13:10-13)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비밀로 감추기 위한 목적이다. (1:8-10, 22:10, 12:4,9)

 어린아이 같이 겸손해야만 계시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11:25)

 재림의 징조가 우리 마음속에 확실해질 때까지는 예언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지 말고 주의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다.(벧후1:19)

 요한처럼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될 때에 상징화 된 계시의 문을 열게 하기 위한 뜻이 있다.(1:9)

 계시록의 상징화는 마치 비밀과 같다. 그리고 이 비밀을 일곱 별의 비밀이라고 주님께서 직접 말씀 하셨다. 그리고 주님은 이 일곱 별을 오른손에 붙잡고 계신다. 그러므로 주의 사자가 주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가 될 때까지는 계시록의 계시는 상징의 비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1:16, 20)

 계시록의 상징계시는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꿀같이 달게 받아먹어야 만이 알게 되는 지식이요 먹고 소화시키는 삶의 십자가의 체험을 통과해야 만이 상징계시를 바로 알게 해주시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된다.(10:8-11, 2:8-10, 3:1-3)

 증인의 심정을 가지고 주님의 생애를 그대로 사는 자에게 상징의 실제화, 역사화(歷史化)를 이루게 하시려는 주님의 뜻이다(11:3-12)

 

   (6) 역사적 시점(時點)을 따른 해석법(예언 성취의 시점)

계시록 해석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해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양한 것은 좋을 수도 있다. 각기 나름대로 하나님께 은혜 받은 귀중한 영적 자산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거나 교훈적인 측면의 설교의 다양성은 확실히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하다. 그러나 계시록은 예언서이기 때문에 예언서의 특징을 간과한 채 과거 역사나 교훈적 설교나 강해에 머무를 수는 없다.예언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예언이 성취되는 역사적 시점(時點)을 바로 아는 것이다.

 

예언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며,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그 예언이 성취되는 시점을 바르게 아는 것도 본문 해석 못지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계시록에 대한 혼란이 해석의 혼란과 더불어 예언 성취의 역사적 시점에 대한 혼란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다.

 

예언 성취의 역사적 시점에 혼란을 주는 문제는 아래와 같다.

 

 계시록 1장서부터 22장까지의 기록된 순서가 계시성취의 역사적 순서로 보는 경우

 일곱 인봉이 개봉되는 시점

 일곱 나팔이 부는 최초 시점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시점

 일곱 인과 일곱 나팔에 계시된 시대

 대 환난과 심판의 시점

 은혜시대가 끝나는 시점

 인 맞은 종들의 수가 차는 시점

 두 증인이 예언을 증거하고 마치는 시점

 용이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 시점

 첫째 화, 둘째 화, 세째 화에 대한 시점

 유브라데 강의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의 시점

 성도의 휴거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시점

 어린 양 예수와 14 4천이 시온산에 서는 시점

 백마 탄 예수와 백마 탄 군대가 심판하는 시점

 

예언 성취의 역사적 시점에 혼란을 주는 제목들을 15개 정도 제시했지만 전부 다는 아니다. 대략 중요한 것을 제시하면서 필자가 깨달은 대로 시점에 대하여 정리하고 싶다. 하지만 각 장의 구조적 체계로 본 개요 단락별 강해에서 언급하고 또 서론의 다른 장에서도 조금씩 그 견해를 밝혔기 때문에 중복성이 될 우려가 많아 몇몇 중요한 것만 그 시점에 대하여 견해를 밝히도록 하겠다.

 

   1) 계시록 1장서부터 22장까지의 기록된 순서가 계시성취의 역사적 순서로 보는 경우

계시록은 다른 어떤 성경보다도 계시사건의 역사적 시점(時點)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계시내용의 많은 부분이 상징으로 기록되어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것이 많기 때문에 깊이 있게 상고하지 않으면 자칫 혼돈에 빠지기 쉽다. 흔히 많은 분들이 계시록을 1장서부터 22장까지의 기록된 순서가 계시성취의 역사적 순서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볼 부분도 있지만 그렇게 보지 못할 부분이 상당히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계6장 사건 다음에 7장 사건이 전개되고, 7장 다음에 8장 사건이 역사적으로 전개된다고 본다면 이는 필자가 보기에는 엄청난 혼란이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9장 다음에 10 11장으로 이어지고, 12장 다음에 13장으로 보는 경우나 14 15장 다음에 16 17장으로 그리고 계속 18 19장으로 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6장은 필자가 이미 증거한 바와 같이 첫째 인에서 여섯째 인까지는 하나님의 전 역사를(십자가부터 재림까지) 한 눈에 보여준 예정 계시이며 목차 계시다.

 

예정 계시이며 목차 계시가 되는 6장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 역사 계획을 다 보여주셨기 때문에 6장 다음에 7장의 사건이 나타나고 성취될 수가 없다. 7장의 사건은 대 환난 날이 오기 전에 14 4천의 인 맞을 종들이 나올 것과 대 환난 중에 구원받은 흰 옷 입은 무리가 나온다는 사건을 보여준 삽경이다. 6장의 마지막 사건은 어린 양의 진노 심판의 장면으로서 이는 역사 최 종말의 사건이다. 어린 양의 심판은 역사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에 그 다음 사건은 없다. 있다면 천 년 왕국이 건설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6장 다음에 7장 사건이 연속적으로 나타나고 성취될 예언의 사건으로 본다면 필자가 말한 혼란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님이 증명될 것이다. 6장 다음에 7(다른 장도 마찬가지다)의 연속으로 본다면 그 이유가 있다.

 

첫째 : 6장의 계시 형태를 분별치 못함이요

둘째 : 6 1-6인이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 곧, 시초부터 시말까지의 역사라는 사실을 인식 못한 탓이요

세째 : 7장의 계시가 6장 다음에 이루어질 사건이 아니라 삽경이요. 설명 계시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6장과 7장만이 아니라 나머지 다른 장들도 마찬가지다. 필자가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든 것으로 끝내고자 한다. 나머지 장들에 대한 역사적 시점문제는 그 장에 들어가서 해결하면 된다.

 

   2) 일곱 인봉이 떼어지는 역사적 시점(時點)

일곱 인봉은 계5:1절 이하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책으로 안팎으로 쓰여진 책이고, 일곱 인으로 봉하여진 책이다. 이 일곱 인으로 봉하여진 책은 반드시 속히 될 일의 모든 비밀이 기록된 책이다. 다시 말해 역사종말에 이루어질 모든 예언이 기록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인봉이 떼어지는 시점을 바르게 아는 것이 계시록의 비밀을 아는 중요한 열쇠와 같은데 여기에 대하여서는 주석가나 강해자마다 견해가 똑같지가 않다. 그러나 계시록의 성경 자체가 여기에 확실한 답을 주고 있다. 5:5절을 보면 사도 요한이 인봉한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합당한자가 보이지 않는 연고로 말미암아 크게 울고 있을 때에 장로 중 하나가 요한에게 답변한 말이 그 답이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5)

 

상기 성구에서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예수님을 말씀하시는데, 이 예수님이 이기었기 때문에 그 일곱 인을 떼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이 이기었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와 사망과 마귀의 권세를 완전히 이기신 승리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일곱 인봉이 떼어진다는 말은 인봉이 떼어지는 시점이 바로 십자가 사건 때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는 말씀이 분명하다.

 

우리들이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것은 일곱 인봉이 떼지는 시점은 십자가의 승리의 때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된다는 사실이다. 결코 칠 년 대 환난 안에 들어와서 일곱 인봉이 떼어진다는 주장은 계시록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그와 같은 말씀은 계시록 어디에도 없다. 계시록 6 1절에서 마지막 절까지를 보면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 떼어지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계5:5절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6장의 인봉의 개봉 시점은 바로 십자가 승리의 때이다.

 

필자가 일곱 인봉 개봉의 시점을 분명히 하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계시록 해석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치 집을 건축하는 건축가가 최초의 기초 말목을 세우는 것같이 중요하며, 넓은 대양을 항해하는 기선이 목적지를 정확히 찾아 가도록 그 역할을 감당하는 나침반이나 방향키와 같이 중요하다. 그리고 일곱 인봉 개봉의 시점이 십자가 승리 때부터라면 사대병마의 출현도 십자가를 기점으로 삼아 출현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흰 말을 위시한 삼대 말은 동시에 출현) 이렇게 주장하면 많은 의문을 제기할 것이라 생각이 되어 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곱 인봉의 개봉 시점을 밝히려는 목적이기 때문에 의문에 대한 답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일곱 인봉의 개봉 시점이 십자가 때부터이기 때문에 일곱 인 봉의 비밀이 이때로부터 열려지기 시작한다.

 일곱 인봉의 개봉 시점이 십자가 때부터이기 때문에 역사종말 의 최초 시점을 어디에서부터 보아야 할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종말(말세)의 시작은 십자가 때부터다.

 일곱 인봉의 개봉 시점이 십자가 때부터이기 때문에 인류구속 사의 비밀이 개봉됨과 아울러 구속의 시행역사가 언제부터 시행 되는 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 때부터이다.

 일곱 인봉의 개봉 시점이 십자가 때부터이기 때문에 구속의 역사를 대적하는 반복음역사도 함께 진행된다. 빛과 어두움은 언제나 같이 역사한다. (흰 말의 출현과 동시에 삼대 말도 동시에 출현한다)

 

 

   3) 일곱 나팔이 부는 역사적 시점(時點)

8장에서 일곱째 인을 뗄 때에 일곱 나팔이 나타나고 있다. 여섯째 인의 사건은 한 마디로 어린 양의 진노 심판의 장면인데(6:12-17) 그 다음 순서인 일곱 째 인을 개봉해 보니 어떤 사건의 장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은 장면만 나오고 있다.

 

여기에서 인을 떼는 시점과 나팔을 부는 시점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이미 여섯째 인까지의 개봉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계획 전체를 다 보여주셨기 때문에(마지막 여섯째 인은 심판) 일곱째 인이 새로운 사건 전개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새로운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인을 떼는 최초의 시점과 나팔을 부는 최초의 시점이 다를 수가 없고 동일하다고 보아야 한다. 동일한 이유는 일곱 인봉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을 보여준 예정 계시와 같기 때문이요 나팔계시는 그 예정 계시가 시행되는 실현 계시와 같기 때문이다.

 

또 다른 면으로는 마치 인봉 계시는 책의 목차와 같고 나팔 계시는 내용 계시와 같다고 보면 된다. 목차는 그 책 전체의 내용을 간단한 제목으로 한 눈에 볼 수 있게끔 구성되었고, 내용은 그 목차대로 세밀하고도 구체적으로 다시 전개하는 것이다.(6, 8장의 개요와 구조론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계시록의 구조가 이와 같기 때문에 인을 떼는 그 시점이 바로 나팔이 부는 시점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시고 계시록의 예언 성취의 시점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들의 견해처럼 칠년 대환난 안에 일곱 인봉이 떼지고 그 다음에 연달아 순서적으로 일곱 나팔의 재앙이 불어오고 그다음 또 연이어 일곱 대접의 재앙이 쏟아진다고 말하고 있으나 보는 것은 자유이겠지만 다시 한 번 더 유의해서 살펴보시기를 바란다.

 

   4)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역사적 시점

일곱 대접은 일곱 나팔 중 일곱째 나팔이 불므로 전개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의 구체적 모습은 계시록 16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내용은 전부다 심판하시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첫째 대접부터 쏟는 그 시기를 말하기 전에 대접 계시의 내용이 심판하시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먼저 분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 16:1)

 

일곱 대접 즉, 일곱째 나팔이 심판이라는 말은 대 환난이 지났다는 뜻이다. 심판이 지났다는 뜻이 아니라 대 환난이 지났다는 뜻이다. (대 환난과 심판을 같이 보면 안 된다) 그리고 대 환난이 지났다는 말은 구속역사가 다 완료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곱째 나팔 곧 일곱 대접 재앙은 언제부터 시행되는가?

 

일곱 대접 즉, 일곱째 나팔은 성경에서 세째 화로 말하고 있다. 일곱째 나팔이 세째 화라면 여섯째 나팔은 둘째 화이며, 다섯째 나팔은 첫째 화가 되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세째 화 곧, 일곱째 나팔의 심판은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둘째 화 다음에 세째 화가 오기 때문에 둘째 화가 끝나는 시점을 알면 세째 화 시점은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둘째 화에 대한 사건 내용은 계시록 9장과 11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9:13절 이하를 보면 유브라데 강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여지게 되므로 세계인구 1/3이 죽는 대 환난이 시작됨을 보게 된다.그리고 이 대 환난의 바람이 전 세계적으로 불면서 이 세상은 짐승의 수정통치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그 기간은 42달이다. 이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짐승들 편에서, 그리고 환난의 역사를 중점으로 본 기간이다. 그리고 둘째 화의 기간 동안에 또 다른 면의 역사 섭리는 짐승정권의 통치 속에서 강력한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들의 복음역사가 있는데 이것을 계시록에서는 1260일을 두 증인이 예언을 하리라고 한 말씀이다.(11:3) 여기서 분별할 것은 많은 분들이 두 증인의 증거기간과 짐승의 통치기간을 달리 보는데(두 증인 전도기간을 전 삼년 반으로, 짐승통치기간을 후 삼년 반으로)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역사는 빛과 어두움의 대립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같은 기간 안에 나타나는 사건이다. 마치 모세 역사가 먼저 있고 애굽 나라의 바로왕의 역사가 다른 시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역사와 아합 왕의 역사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은 기간 안에 역사가 이루어 졌다.

 

이와 같이 마지막 주 재림을 앞두고 마귀 편에서는 짐승을 통하여 이 땅에 대 환난(여섯째 나팔:둘째 화:전 삼년 반)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는 당신의 거룩한 증인들을 준비케 하사(인 맞은 종으로) 짐승의 환난 속에서 강력하게 증인들을 사용하시므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다 이루어 나가신다. 곧 환난 속에서 남은 백성들을 모두 구원시키신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3-14)

 

이 사역이 끝날 즈음에 짐승과의 전쟁 속에서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시체가 되지만 이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고 첫째 부활(휴거)의 영광에 동참하는 섭리의 과정이다.(11:7-12) 그리고 휴거 사건 이후에 세째 화 곧 일곱째 나팔 곧, 일곱 대접의 재앙이 이 땅에 쏟아지기 때문에 짐승의 통치가 끝나는 즈음과 종말의 복음역사가 끝나는 즈음이 자연히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시점이 되고(여섯째 나팔이 끝나고 일곱째 나팔이 부는 시점), 계속하여 후 삼년 반 기간 내내 대접재앙으로 심판을 받는다. (심판이 하루아침에 끝나는 사건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종말의 심판은 보응심판이기 때문에 보응 받는 기간이 있다)

 

일곱 인이나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의 시점(時點)에 대하여 말하면서,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 성취의 사건을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간단한 한 마디의 말로서 그 시점이 설명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많은 설명을 드리면서 그 시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 것이다.

 

   5) 일곱 인, 일곱 나팔의 계시 속에 나타난 세 시대

일곱 인이 떼어지고, 일곱 나팔이 불고, 일곱 대접이 쏟아지는 역사적 시점을 말씀을 드리면서 반드시 분류되어지고 분별할 세 시대가 있다.

 

첫째 : 은혜시대(십자가 때부터 대 환난 전 까지)

둘째 : 대 환난시대(전 삼년 반=둘째 화=여섯째 나팔)

셋째 : 심판시대(후 삼년 반=세째 화=일곱째 나팔 )

 

이렇게 시대를 나눈다고 세대주의자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인위적으로 시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한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보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은혜시대, 대 환난 시대, 심판시대로 나누는 것은 그 시대의 특성이 다른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사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적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곱 인 속에 나타난 세 시대

 

 첫째 인에서 네째 인까지의 사대 병마의 대립은 은혜시대를 보여 주는 계시이다.

은혜시대는 간략하게 정의하면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는 시대로서 대 환난 날이 오기 전까지의 시대로 볼 수가 있다. 대 환난 시대도 십자가의 은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대 환난 시대는 역사 최 종말의 시대로서 주님의 재림을 전·후한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로서 과거 은혜시대와는 너무나 모든 시대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하는 것이다.

 

1-4인 속에 등장한 흰 말과 그 탄 자는 기독교 복음역사를 보여주는 상징계시이며, 흰 말과 대별되는 삼대 말은 기독교 복음역사의 대적이 되는 세력을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사대병마의 대립 속에서 환난을 받았으나 복음을 전파하며 여기까지 왔었고,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까지 사대 병마의 대립이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백마 탄 예수와 성도가 승리한다. (19:11-16)

 

흰 말과 삼대 말의 등장을 대 환난 시대 시초부터 보시는 분들은 1-4인의 계시가 은혜시대를 보여준다는 필자의 주장에 결코 동감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린다. 과연 첫째 인을 개봉 할 때가 언제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예수의 십자가 승리가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인을 뗄 것인가? 예수의 십자가 승리 자체가 인봉 개봉의 시초며, 이로 인하여 은혜시대가 전개되는 것이다.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5:5)

 

 다섯째 인의 순교자 영혼들의 기도는 대 환난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다섯째 인의 내용은 순교 영혼들이 자기들이 흘린 피 값을 갚아 달라는 신원기도(심판독촉)의 내용이지만 그 기도 속에 분명한 시대를 보여주고 있다.

 

첫째: 심판을 독촉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결코 심판기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순교자들은 심판의 날을 바라보고 대 환난기까지 기도한다.

둘째: 어느 때 까지 기도응답을 하지 아니하시려 하나이까? 하는 기도내용은 기도응답의 때가 있는데 그 때는 바로 심판기이다. (여섯째 인의 심판은 순교자들의 기도 응답의 때다)

셋째: 순교자들과 같이 죽임을 받은 형제의 수가 찰 때 까지는 잠시 쉬라는 잠시의 기간은 마지막 순교자들의 숫자가 차는 대 환난의 기간을 말해주고 있다.

잠시라는 기간의 대 환난은 전 삼년 반 곧, 1260일 기간이며, 이때에 순교자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처럼 역사 속에 마지막으로 순교자 형제들의 숫자가 다 채워지는 때다. 순교자들의 기도는 대 환난기가 절정이다. 그 이후의 시기에는 순교자들의 기도가 없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는 기도 응답의 때요 심판기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인의 광경은 심판시대이다.

여섯째 인의 광경이 큰 지진과,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달이 피 같이, 별들이 대풍에 과일이 떨어지듯 떨어지고, 하늘은 종이 축 이 말리는 것처럼 말려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고, 땅의 모든 사람들이 어린양의 진노에서 피하려는 장면의 말씀은 무엇으로 보나 심판의 광경이다(6:12-17) 어린양의 진노 심판은 역사상 제일 마지막 사건이며,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 여기서 성도님들은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여섯째 인으로 세상 역사가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 심판으로 하나님이 계획한 역사의 종장(終章)을 다 보여주셨는데 또 일곱 인을 뒤이어서 일곱 나팔의 재앙이 온다고 해석을 한다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일곱 째 인을 떼므로 나타나는 일곱 나팔은 여섯째 인 다음의 사건이 아니라 일곱 인의 계시에 대한 실현계시 혹은 시행계시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일곱 인 안에는 일곱 나팔도 일곱 대접도 다 들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8:1, 15:1, 7, 16:1)

 

 일곱 나팔 속에 나타난 세 시대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일곱 나팔이 일곱 인의 뒤를 이어가 는 시리즈 역사가 아니라 일곱 인에 대한 실현 계시 및 내용 계시가 되기 때문에 인을 떼는 시점과 나팔 부는 최초의 시점이 다 를 수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말씀을 드린다.그러므로 일곱 인봉 계시나 일곱 나팔 계시에 나타난 시대의 구조도 다를 수가 없다. 일곱 인봉 계시 속에 세 시대가 보이는 것처럼 일곱 나팔 계시 속에도 은혜시대, 대 환난 시대, 심판시대가 있다.

 

첫째: 14 나팔=은혜시대

둘째: 56 나팔=대 환난시대

세째: 7 나팔(일곱 대접)=심판시대

 

계시록 8장의 1-4나팔의 계시를 보면 알겠지만 상징으로 표현된 계시의 말씀이 결코 은혜시대의 현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역사의 전면만 본다면 대 환난시대나 심판의 시대로 보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의 양면성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일곱 나팔 계시도 반드시 역사의 양면이 있다. 그것은 복음역사와 반 복음역사다. 8장의 1-4 나팔 계시를 유심히 살펴보면 분명코 복음의 역사와 반복음의 역사가 보인다.

 

8장의 1-4 나팔 안에 복음 대적세력은 피 섞인 우박과 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 횃불같이 타는 큰 별, 침해자 로 보여주고 있다. (상징으로) 반대로 복음대적 세력을 통하여 환난 받고 핍박받는 자들을 수목, 푸른 풀, 고기, , 강과 물 샘, , , 별로 상징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복음대적 세력을 통하여 환난 받고 핍박받는 이들의 역사가 기독교 고난의 역사가 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고난의 역사는 은혜시대가 되는 지금도 진행 중이며 마지막 대 환난 날까지 계속된다.

 

1-4나팔의 역사는 십자가 이후 지금 현재까지 진행되는 역사다.

1-4이 동시적인 것처럼 1-4나팔도 동시적인 사건이며 반복적인 사건이다.

1-4나팔의 환난을 교회가 지금도 받지만 은혜시대는 계속 진행 중이다.

 

그 다음에 여섯째 나팔은 그 나팔이 불므로 나타나는 사건이 유 브라데 강에 결박한 네 천사가 놓이므로 세상사람 1/3이 죽는 전쟁인데 이것은 1-4나팔과는 분명히 구분이 되는 대 환난 시기가 분명하다.(9:13) 대 환난이 세계적인 전쟁의 바람으로 시작되면서 이 세상은 계13장과 같은 짐승의 통치시대로 돌입한다. 그리고 여섯째 나팔이 대 환난시대로 보는 이유는 여섯째 나팔 다음의 일곱째 나팔은 심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나팔은 일곱째 인과 마찬가지로 일곱 째 나팔 안에 일곱 대접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나팔은 곧 일곱 대접이다. 일곱 대접은 재앙이요 심판이다. (16) 그리고 일곱 째 나팔은 셋째 화가 되며 심판기가 되고, 여섯째 나팔은 둘째 화가 되며 대 환난기다.

 

다섯째 나팔은 첫째 화가 된다. (8:13, 9:12)

다섯째 나팔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두 가지 면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첫째는 은혜시대 말기역사로 보면서 은혜시대에서 대 환난시대로 전환되는 시기의 환난으로 보고 있다. 다섯째 나팔의 환난은 여섯째 나팔과 같은 전 세계적인 환난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인 대 환난의 도화선은 될 수가 있다고 본다. 또 다섯째 나팔을 대 환난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계7:1-3에서 인 맞은 종들의 출현이 전 세계적인 대 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그 수가 채워진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섯째 나팔이 불기 전 다섯째 나팔기간 동안에 인 맞은 종들의 수자가 다 찬다는 뜻이다. 인 맞은 종들의 수가 차게 되면 여섯째 나팔의 대 환난이 이 땅에 오고, 동시에 인 맞은 종들의 복음역사도 진행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 섭리다.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 7:3)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 7:1)

 

7:1-3절에서 땅과 바다와 각종 나무에 피해를 주는 바람은 대 환난의 바람이다. 이 대 환난의 바람을 불지 못하게 천사가 붙잡은 이유는 인 맞은 14 4천의 수가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가 차게 되면 바람을 놓는데 그 바람을 놓는 시점을 계9:13절 이하에 잘 나와 있다. 그 시점은 여섯째 나팔이다. 그러므로 여섯째 나팔은 천사가 바람을 놓으므로 세계 인구 이 죽는 대 환난기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상기와 같은 이유로 여섯째 나팔이 대 환난기가 분명하기 때문에 다섯째 나팔은 환난은 환난이로되 전 세계적인 대 환난이 아니라 은혜시대에서 대 환난시대로 돌입하는 전환기적인 환난의 시대로 보고 있다. 한 가지 덧붙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섯째 나팔을 전환기적인 환난으로 본다면 은혜시대에서 대 환난 시대로 전환기이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 은혜시대로 볼 수도 있고 대 환난 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견해는 다섯째 나팔도 여섯째 나팔과 같이 대 환난기 안의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왜냐하면 1-4 나팔과 뚜렷이 구분되는 환난이 분명하고, 공중의 독수리가 외친 화, , 화 중 첫째 화에 속하기 때문이다.

 

   (7) 본문 해석법

계시록 해석은 계시록 본문 스스로가 해석하는 해석법을 기본적으로 따라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계시록만이 아니고 성경 전체의 동일한 해석원리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특히 계시록 해석에는 이와 같은 방법, 곧 본문 스스로가 해석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예를 들어보면

 

   1)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20)

 

   2) 자칭 유대인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2:9)

 

   3) 일곱 등불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4:5)

 

   4) 일곱 눈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5:6)

 

   5) 두 증인이 순교한 큰 성길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 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 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11:7-8)

 

   6)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

 

   내가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지혜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 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17:7-12)

 

   7) 무저갱의 사자

 

   저희에게 임금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음으로 이름은 아바돈이요 헬라음으로 이름은 아볼루온 이더라(9:11)

 

   8) 큰 용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 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12:9)

 

   9) 음녀가 앉은 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라(17:1,15)

 

   10) 세마포

 

   어린양의 혼인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19:7-8)

 

   11) 첫째부활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 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 하니(그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20:4-6)

 

   12) 둘째 사망 혹은 불 못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 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20:14-15) 계시록 해석은 먼저 본문에서 본문으로 해석하는 본문중심의 해석법이 가장 기본적이다. 이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하기 쉬울 것이다.

 

 

  (8) 짝을 맞추는 해석법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 34:16)

 

짝을 맞추어 해석하되 무조건 짜깁기 식으로 짝을 맞추는 것은 계시록 해석에 절대 금물이다. 특별히 유의하여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

 

   1) 단어의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

같은 단어를 찾아 짝 구절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기본상식 이다.

 

   2) 문맥과 사건에 따라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

같은 단어나 같은 성구라도 같은 뜻이 아닌 경우가 있다. 문맥을 통하여 같은 사건인지 잘 분별해야 한다.

 

 4:1절과 7:9절에는 똑같은󰡒이 일 후에 내가 보니󰡓라는 짝 구절이 있다. 구절은 분명히 똑같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보게 되면 전혀 다른 사건이 전개됨을 알게 된다. 4:1절의 이 일 후에 는 계2-3장의 계시를 본 후를 말함이고, 7:9절의 이 일 후 14 4천에 대한 계시를 본 후를 말함이다.

 

 4:1절과 11:12절에도 똑같은 말씀󰡒이리로 올라오라󰡓 라는 짝 구절이 있다. 역시 동일한 구절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을 보게 되면 전혀 다른 사건임을 알게 된다. 4:1절은 요한에게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보여주기 위하여 올라오라는 말씀이고, 11:12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는 말씀은 두 증인이 그들의 예언 사역을 다 마치고 죽었다가 부활하여 휴거 되는 장면의 말씀이다.(성도들이 들림 받는 장면)

 

 9:13절과 계16:12절에도 똑같은 단어󰡒큰 강 유브라데라는 말씀이 있다. 그러나 이도 역시 앞·뒤 문맥을 보게 되면 비슷한 사건 같으면서도 때가 다른 사건임을 알게 된다. 9:13절의 사건은 유브라데강을 중심한 세계 인구 이 죽는 세계 제3차 전쟁으로 볼 수 있고, 16:12의 전쟁은 인류 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해석가들이 같은 때, 같은 사건, 곧 아마겟돈 전쟁으로 통일된 해석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뒤 문맥을 통하여 사건의 양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같은 때 같은 사건이 아님이 발견 된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아래 3) 번에서 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3) 역사적 시점(時點)이 같은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

필자가 계시록 강해를 성도들에게 하면서 깊이 깨달은 경험은 계시록 해석은 예언된 사건에 대하여 그 역사적 시점을 분별하는 것이 해석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단어나 구절이 같다고 같은 때의 사건으로 보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반대로 표현된 단어나 지명이 다르다고 해서 다른 시대의 사건으로 보아서도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역사적 시점에 대한 문제는 이미 필자의 견해 역사적 시점을 따른 해석법에서 자세하게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또 말씀을 드리면 중복이 될 것 같다. 하지만 몇 가지 예만 들도록 하겠다.

 

 9:13절에 계시된 유브라데 강의 전쟁과 19장에 계시된 아마겟돈 전쟁을 동일하게 보는 경우 유브라데 강의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은 같은 시기의 전쟁으로 볼 수가 없다. 유브라데 강의 전쟁의 시점은 여섯째 나팔이 불므로 진행되는 전쟁이고, 아마겟돈 전쟁은 일곱째 나팔에 속한 여섯째 대접때 나타나는 전쟁이기 때문에 시점과 시기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14:1절에 어린 양과 14만 성도가 시온산에 섰다는 말씀과 슥14:4절에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시온산과 감람산이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동 시대의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모두 주님이 지상에 재림 하실 것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16:16절에 아마겟돈이나 욜3:12절의 여호사밧 골짜기도 지명은 다르나 동 시대의 사건이 분명하다. 아마겟돈도 주님의 재림으로 심판하는 장면의 말씀이고, 여호사밧 골짜기도 세상 열국들을 불러 모아 심판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6장에서 인을 떼는 시점과 계8장에서 나팔을 부는 시점을 전혀 다르게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도 그 시점을 분별하지 못한 탓이다. 인 계시와 나팔 계시는 분명 계시가 다른 것은 사실이다. 다르기 때문에 인을 떼는 시점과 나팔을 부는 시점도 달리 볼 수밖에 없지만 계시 형태가 일곱 인 계시는 예정 계시요 일곱 나팔 계시는 실현 계시 및 시행 계시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자연히 그 최초의 시점은 동일하게 십자가 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5:5, 8:1)

 

인을 떼는 시점이나 나팔을 부는 최초 시점은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부터다. (계시록 강해 8장의 구조론을 참조) 계시록에는 이외에도 역사적 시점을 분별하고, 시점에 맞는 짝을 찾아 해석을 해야 할 곳이 많다.

 

   4) 계시의 형태에 따라서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된다.

계시의 형태에 따라서 짝을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이 말은 짝을 맞추되 상징된 계시는 상징된 계시끼리 짝을 맞추어야 되고, 문자적 계시는 문자적 계시끼리 짝을 맞추어야 정확한 해석이 된다는 뜻이다. 단어는 똑같아도 의미가 다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8:8절의󰡒바다 16:3절의󰡒바다나 바다라는 단어는 똑같다.

그러나 계시형태가 나팔계시와 대접계시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일곱 나팔계시는 그 계시형태가 상징으로 표현된 계시이기 때문에 계8:8절의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라 이 세상을 바다로 상징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일곱 대접계시는 그 계시형태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할 문자적 계시이기 때문에 16:3절의 바다는 실제 바다를 말하고 있다.

 

  8:10 16:4절에󰡒강과 물 샘이 동일하게 나오나 역시 계시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뜻은 전혀 달라진다. 8:10절의 강과 물 샘은 많은 사람이 그 물을 먹고 영적으로 사는 물이기 때문에 이는 말씀의 물이 될 수밖에 없고, 그 물이 흐르고 솟아나는 교회를 말한다. 반면에 계16:4절의 강과 물 근원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마시는 물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16장의 대접 계시는 심판의 장면을 계시로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심판은 영적심판이 아니라 육체가 실제적으로 고통과 재앙을 당하는 심판이다. 그러므로 실제 강과 물 근원이 실제 피가 되는 것이다.

 

 8:12절과 16:8절에도 동일한 가 나오나 이도 역시 계시 형태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해석도 전혀 달라진다. 8:12절의 해는 하늘의 태양이 아니라 햇빛 같은 진리의 말 씀으로 보아야 하고, 반면에 16:8절의 해는 실제 하늘의 태양을 말씀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계시록 안에는 문자적 계시와 상징 계시가 혼재된 것이 많기 때문에 짝을 맞추어 해석할 경우에 계시 형태를 분별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지나친 문자주의만 절대 고집하는 사람들과 지나친 영적 해석법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벌써 계시 형태서부터 제대로 분별이 안 되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하기 힘들게 된다. 무조건 짝을 맞추기 전에 계시 형태를 분별하는 것이 우선과제이다.

 

   5) 구약과 관련된 자료를 짝 구절로 찾아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짝이 없는 것이 없다. 계시록은 계시록 안에서만 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특히 선지서에서 많은 짝 구절이 있다. 단어가 같은 짝 구절도 있고, 단어나 구절 내용의 계시표현이 조금 달라도 같은 짝이 있다.

예를 들면

 

 일곱 금촛대(1:20)=25:31, 4:2-3, 11-14

 인자 같은 이(1:13)=7:13, 10:5-9, 1:5, 26

 사대 병마(6:1-8)=6:1-8

 두 감람나무(11:4)=4:1-6,11-14

 1260(11:3)=42(11:2)=한 때 두 때 반 때(12:14)=7:25, 12:7

 짐승우상(13:15)=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신상(2, 3)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1:7)=7:13, 19:1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5:10)=7:18, 27

 일곱 머리 열 뿔(13:1)=7:7

 새 하늘과 새 땅(21:1)=65:17, 66:22

 

구약과 관련된 짝 구절 열개 정도를 예로 들었다. 전부 다 찾아서 기록하려면 너무 양이 많은 것 같아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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