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성경공부!!

1장. 중보기도의 필요성

하나님아들 2024. 3. 7. 09:07

1장. 중보기도의 필요성


어떤 교단은 우리가 중보기도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중보기도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데, 다르게 말해야지 이렇게 말하는 교단도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정확하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중보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중보기도는 그런 의미에서 중보기도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들은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 그러면 분을 내면서 축복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누구에게 복을 빈다는 말이냐? 복을 주세요. 그래야지 그럽니다. 그런데 그 말도 정확하게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하나님 축복해 주세요.’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이 다른 이에게 복을 빌어주세요 이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 복 내려 주세요라는 의미로 그렇게 기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하는 중보기도의 의미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다양한 분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대로 복을 그렇게 이해하는 교단 광고에는 우리가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 이렇게 광고를 냈습니다. 부흥을 위한 기도란 그런 차원에서 이번 중보기도 세미나를 같이 살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중보기도의 필수성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첫 번째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약속과 중보기도, 두 번째는 왜 기도가 필요한가?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1. 이사야 하반부의 약속과 중보기도

하나님의 부흥과 관련해서 성경에 나오는 약속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약속입니다. 이사야 하반부 전체가 회복과 부흥을 위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사야 하반부의 약속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그 약속을 우리 가운데 제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가운데 설 때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약속이 우리 가운데, 이 시대에 실제적으로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사야 하반부의 약속이 아주 중요한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하반부는 말씀드린 대로 전체 주제를 요약하자면 회복과 부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면 세 종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에 대한 회복, 둘째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구속,  셋째는 교회회복과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회복이라는 주제로 다루면서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것을 하나님이 예언하면서 그 속에 나머지 두 가지도 같이 예언하시는 그래서 세 가지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 엉켜있는 것이 이사야 하반부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는데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회복은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해서 하셨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은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 고난의 종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셨고, 그 다음에 교회회복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안에 있는 예언적인 백성을 통해서 하실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예언적인 백성이라는 말은 제가 붙인 말로, 성경에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그들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사야 하반부가 우리에게 참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그 회복과 부흥을 위한 유업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들이 무엇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국 집회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 부분을 못살펴 보았는데, 1년 전 영호남 컨퍼런스를 부산에서 할 때, 첫 시간에 전체적인 윤곽을 쭉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1] 회복과 부흥이 오려면 우리에게 어떠한 요소들이 필요한가?
그것이 이사야 하반부에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예언적인 백성이 되려면 어떠한 요소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그대로 2000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새물결 훈련원에 부흥이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이라는 과목에서 교재로 쓰는 책 중에 하나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쓴 ‘부흥’이라는 책입니다. 영국의 웨일즈 부흥의 100주년을 기념해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시리즈로 설교한 내용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 책을 보면서 이사야 하반부에서 말씀하신 그 요소들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보내실 때마다 그 준비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었던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예언적인 백성이 되기 위해 그 중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뭐냐면 중보기도입니다.

이사야서 6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1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뿔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5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 하반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것을 염두해 두고 쓰여진 겁니다. 나라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불타버리고, 그리고 백성들은 이방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 생활하는, 그래서 그들이 조롱하기를 ‘너희가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의 백성이라며 그런데 이 모양 이 꼴이냐?’ 그러면서 이방인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다 받는 그러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회복시키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무나 놀라운 약속이지요. 그러면서 이러한 회복의 역사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그 일을 위해 하시는 게 뭐냐면 바로 6절과 7절에 나오듯이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6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파수꾼은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파수꾼은 중보기도자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선지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는 자인데, 여기에 나오는 파수꾼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사람들에게 외치는 파수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밤낮으로 상기시키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나오는 파수꾼은 예루살렘을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기까지, 회복시키시기까지, 밤낮으로 부르짖는 중보기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여기에 왜 중보기도자들을 가리켜 파수꾼이라고 했느냐? 그것은 중보기도가 선지자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부음을 부으시는데, 그 성령의 기름부음 중에 대표적인 기름부음이 예언적인 기름부음입니다. 왜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붓느냐면 중보기도의 소명 자체가 선지자적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도와 행하심을 알리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기도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기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들에게 많은 예언적인 기름부음을 부으십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예언적인 꿈과 환상을 보이실 때,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를 어떤 예언자로 세우신 것처럼, 그런데 실제로는 예언자로 세우신 게 아니고 중보기도자로 세우신 겁니다. 기도하라고 하나님이 부르신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시면 중보기도자들을 세워서 그들이 밤낮으로 하나님께 그 약속을 붙잡고 부르짖게 하시겠다. 언제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의 역사가 그대로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게 하시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사야 하반부에 놀라운 회복과 부흥, 특별히 이 시대에 참 소중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데, 그러한 하나님의 유업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아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중보기도입니다. 저는 이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흥으로 임하실 수 있는 교회가 되어지고 또 여러분이 있는 지역과 이 나라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임하시는 통로로 혹은 도구로 쓰임 받는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여러분들이 사모할진데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교회 안에 중보기도가 세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이번 컨퍼런스를 놓고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중보기도의 기름부음을 부으시고 또 하나님의 길을 알리셔서 이번 컨퍼런스가 끝나면 교회마다 그런 중보기도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 개인적으로도 그런 부분을 더 보게 되는 게 제가 한국에 와서 처음 개척한 교회가 하늘빛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교회를 결정적으로 사임하게 된 계기가 뭐였냐면 중보기도였습니다. 그때 한참 교회가 성장하려고 하는 시점이었는데, 중보기도하는 교회로 하나님이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 부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니까 시간이 가면서 수평선이 그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하기 원하시는데 성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제 됐다고, 교회를 그대로 내려놓고 처음부터 새로 다시 시작하라고 하셔서 교회를 사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약 13년 전에 분당에서 지금의 포도나무교회를 다시 개척하게 되었는데, 그 가장 주된 원인 중에 하나가 뭐였냐면 중보기도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회복과 부흥을 보내실 때에 그것을 담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가 중보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예수님의 삶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던 것을 봅니다.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하반부에는 회복과 부흥의 약속이 나오는데 세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것, 둘째는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구속, 셋째는 교회회복과 부흥입니다. 그리고 하반부에 보면 세 종류의 종이 나옵니다. 거기에 종이 때로는 단수이기도 하고, 때로는 복수이기도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그 종의 정체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름) 어떤 때는 성경에 종이 이스라엘이라고 명백하게 나와 있고, 또 어떤 때는 우리가 종의 노래라고 하는 네 구절, 혹은 고난의 종으로 오실 메시야에 관한 노래라고 하는 부분이, 이사야 42장, 49장, 52장 일부, 53장 이렇게 4곳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구절에 보면 종이 때로는 복수이면서 그 둘에도 속하지 않는 종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종들이 누구냐에 대해서 서로 많은 논란도 있지만, 크게 종들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을 봅니다. 첫째는 불충한 종 이스라엘, 둘째는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님, 셋째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로써 예언적인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림, 십자가를 옆으로 ...(그림은 삽입되지 않음)

오른쪽에 불충한 종(이스라엘/실패함)
중앙 정점에 예수님(이스라엘의 완성)
왼쪽에 새 이스라엘(신약의 교회)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로 오셨고, 이스라엘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그게 이사야서만 보더라도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 안에 있는 예언적인 백성,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이리로 다 초청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예언적인 백성이라고 말하느냐면 이사야 하반부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요소들이 있는데, 모두가 다 이 삶으로 초청을 받았는데, 다 거기에 응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자리에 선 자들, 이들이 누구냐면 예언적인 백성입니다. 한편으로는 여러분 모두가 그리로 다 초청받았고, 여러분이 섬기는 모든 교회가 다 그 자리로 초청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그 하나님의 길에 서게 될 때, 하나님이 정확하게 여러분을 통해서 성경에 약속하신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예언적인 백성이라고 말씀드리는데 이렇게 볼 때에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그 유업이 가장 근본적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하면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으로 성취되었고,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을 위한 구속이 이루어짐으로 그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도 보면 중보기도가 필수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오겠지만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중보기도가 필수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누가복음 2장에 나와 있습니다.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다는 말은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또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여기도 보시면 중보기도자에게 성령의 기름부음이 매우 강하게 함께 하십니다. 사실 성령의 은사 중에 중보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성령의 은사 못지않게 성령의 나타나심이 강한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왜냐면 그 소명 자체가 선지자의 소명이기 때문입니다.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시므온이 누구냐면 중보기도자입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고 했습니다. 기름부음입니다. 또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메시야가 오기 전에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메시야를 반드시 보고 세상을 떠나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날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날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수님을 보고 그가 약속하신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 다음에 보십시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여기에 보시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 일어난 사건을 말해줍니다. 아 여러분 이게 있어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때가 찼을 때 왔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갈4:4) 그러니까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무슨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냐면 시므온과 안나와 그 외에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의 구속을 기다리는 중보기도자들을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주야로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안나 같은 경우에는 그가 84세까지 과부였다 할지라도 20세 초반에 혼자되었으니까 60년 이상을 기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일하실 때, 때가 되었을 때,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주야로 하나님께 그 약속을 상기시키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제로 그렇게 일하셨을 때, 그것을 제일 먼저 본 자들이 누구냐면 중보기도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나만 하더라도 선지자라고 그랬는데, 안나도 하나님 말씀을 받아가지고 사람들에게 외치는 그런 의미의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기도하는 것이 그의 하는 일 전체였으니까요. 여기에 보면 이 안나만 해도 중보기도자인데 선지자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중보기도가 선지자의 소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합니다. 저도 거기에 동의하는데, ‘하나님은 이 시대에 중보기도가 자기의 전적인 소명인 자들을 세우신다.’ 예를 들면 제가 목사로써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중보기도를 같이 하는데, 여기에 보시면 안나와 시므온과 같은 경우에는 풀타임 중보기도자입니다. 이들의 주된 소명이 중보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자기들의 가장 주된 소명이 중보기도인, 풀타임 중보기도자들을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어느 때보다 이사야 하반부의 놀라운 약속이 이 시대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그러한 자들을 세워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도 그러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강력하게 부으셔서 여러분의 가장 주된 소명이 풀타임 중보기도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 여기 시므온에게 하셨던 것처럼 강력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민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리시고, 그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기도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그러한 중보기도자들을 많이 세워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많이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가 바로 이러한 중보기도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실제로 우리 가운데, 새물결 선교회만 하더라도 이러한 중보기도자들이 진정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지려면 예를 들면 교회만 하더라도 교회 사이즈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하고 예산도 많이 동원할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만 보더라도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면 누굴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겠어요? 종교지도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이야말로 사람과 재정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고 막강한 사회적인 종교적인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그들을 통해서 일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름도 알려져 있지 않은 소수의 무리들, 그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 계획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리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밤낮으로 하나님께 그 약속을 상기시키시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2000년 기독교 교회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의 부흥이 올 때마다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그리고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핸리 불랙가비 목사님이 쓴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에 보면 부흥에 대한 몇 가지 예들이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몇 가지 복사해 왔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부흥이 임할 때마다 중보기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가 라는 것을 같이 보기 위해서입니다.

“기도의 부름” 115p
두 번째 영적 대각성은 1792년경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영적대각성은 1784년의 기도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노샘프턴션 지역의 지방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매달 첫 월요일을 기도의 날로 제정했습니다. 이런 모임이 타 지역과 교단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합심기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들에 충만히 임하셔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며, 신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애정어린 기억이 고조되어, 땅 끝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것이 이들의 뜨거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실로, 부흥이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 임했습니다. 영적 부흥의 소식이 대서양을 건너 퍼졌고, 1797년쯤에는 영적 부흥의 불길이 미국에서도 일기 시작했습니다. 이 각성은 첫 번째 영적 대각성과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외부의 강사들이 아닌 각 교회의 담임 목회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켐프집회”
1800년에 이르러서는 영적각성의 움직임이 산을 넘어 캔터키와 테네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제임스 맥그레디는 야외집회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후에는 캠프집회라고 알려짐). 거룩하신 하나님의 강한 임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졸도나 신음 그리고 사무치는 아픔 등을 수반한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각 개인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와 구원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 가운데 회심하는 역사가 벌어졌습니다.

“영적부흥과 각성의 결과” 116p
이 영적 각성의 움직임은 영국과 미국은 물론 지구상의 다른 나라들에게까지 확산되면서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수많은 개인의 삶과 지역사회들이 윤리적, 영적으로 놀랍게 변화되어, 그런 엄청난 변화를 목격한 외부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여러 대학들이 불신앙을 버리고 다시 복음을 전파할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은 영적 부흥을 경험하면서 새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로 넘쳤습니다. 두 번째 각성의 전체적인 결과는 아무도 정확히 추정할 수 없었지만, 켄터키 주에서만 10,000명의 침례교인이 새로 늘었습니다(전체 인구 20명에 1명꼴). 감리교회는 1800년과 1803년 사이, 전국적으로 무려 40,000명의 새신자가 생겼습니다. 다른 교단들도 이에 필적하는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읍니다.

“1857-58년의 기도부흥”
이 부흥을 통해서 100만 명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면 뉴욕에서 한 사람의 기도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백만 명이 구원받음” 145p
인간적인 계획이 거의 전무한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 국가적인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의 도화선은 1857년부터 시작된 ‘연합기도회’였습니다. 이 부흥의 여파로 일어난 영적 각성을 통해, 2년이란 짧은 기간에 백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생활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의 수를 전체 인구의 퍼센트로 계산하여 오늘날에 적용해 본다면, 팔백 만 내지 구백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이 됩니다.

“연합기도회”
... 어느 날 그는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제게 무엇을 시키시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꼈습니다. 노동자와 사업가들이 일 주일에 한 번 정오마다 모여,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도록 기도회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1857년 9월 23일, 수요일 정오에 첫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여섯 명이 참석했습니다. 두 번째 모임에는 20명이, 세 번째 모임에는 40명이 참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이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넷째 주부터는 매일 ‘연합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각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참석했습니다.

“영적각성” 146p
영적각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매주 50,000명 정도가 회심했습니다. 일년 안에 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회심했습니다. 오하이오 교구 총회에서 맥킬베인 주교는, 연례 연설을 통해 이렇게 증언 했습니다. “이 영적 부흥과 각성은 그 어떤 자연적인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나 힘으로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저는 희열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 차게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당신도 “주님, 제게 무엇을 시키시렵니까? 라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시대의 영적 부흥을 위해 당신을 통해 하실 일을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 기도가 영적 부흥의 주요 전략입니다. 당신의 교회에도 이런 기도운동이 일어나도록 도우십시오.

“웨일즈의 각성운동”
1904년 웨일즈에서 영적 각성의 봇물이 터졌습니다. (이 웨일즈의 부흥의 여파가 평양까지 감). 그 후 6개월 동안 100,000만 명이 이 영적 대각성을 통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쓰임 받은 사람이 에반 로버츠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무려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영을 부어달라는 기도를 해왔습니다. 웨일즈에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달라고, 그러니까 그는 13세부터 중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26세 때부터 하나님이 그를 들어 쓰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들어 사용하실 때, 1904년 10월 31일 월요일 밤 기도회 후에 17명의 젊은이들이 에반의 메시지를 듣기 위해 남았습니다. 그날 밤 17명 전원이 그의 메시지에 응답했습니다. 참석자가 밤마다 늘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께로 돌아옴에 따라 그 일대에 성령이 충만히 부어졌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이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두 달 만에 70,000명, 5개월 만에 85,000명, 그리고 10월의 첫 기도모임이 있은 지 6개월 후, 100,000명이 넘는 수가 회심했습니다.

이 결단이 그들의 인생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손님이 없어 술집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범죄율이 현저하게 감소했기 때문에 경찰들이 할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래 묵은 빚을 갚았고, 도둑질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을 했으며, 다른 잘못에 대해 속죄를 구했습니다. 심지어는 탄광에서 일하던 노새들이 예수님을 만나 변화된 광부들의 언어를 배우느라 일이 지연되는 역사까지 벌어졌습니다(광부들이 더 이상 욕지거리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20세기 부흥중에 가장 큰 부흥이라고 말하는 헤브레이스 부흥, 그 부흥에 관한 얘기가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책에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 듀엘은 그의 책 ‘기도로 세계를 움직이라’에서 헤브라이스 부흥 뒤에 있었던 중보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섬의 바르바스 마을에 사는 두 여자 노인이 그들의 마을에 부흥을 일으켜 달라고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밤에 기도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밤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기도를 하였다. 몇 달 후 그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몇 명의 경건한 청년들이 그 마을의 반대편에서 부흥을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 밤마다 모이기 시작하였다. 노인들이 계속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명한 던컨 켐벨목사가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바르바스 마을에 올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중략)
  
이에 1949년 12월에 던컨 켐벨은 마침내 일련의 부흥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헤브라이스 열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러 날 밤 집회가 있은 후에 하나님의 무서운 임재가 그 마을에 임하게 되었으며, 이에 죄에 대한 통회 자복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곳으로부터 부흥이 마을에서 마을로 확산되었으며, 전 공동체들이 변화될 때까지 1949년에서 1953년까지 부흥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집에 있다가 갑자기 성령님의 강한 죄의 지적을 받고 고꾸라져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길을 가다가 성령에 감동되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 자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밤에는 많은 이들이 경찰서 밖에서 모여 기도하는 바람에 경찰 간부들이 내무 장관과 던컨 켐벨 목사를 불러야만 했을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술집들이 영업이 안 돼 문을 닫았으며 버스들이 군중들을 집회 장소로 나르기 위해 섬 각지에서 속속 도착하였다고 한다. 때로는 집회가 새벽 2, 3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주일 아침 예배에 신자가 4-5명밖에 참석하지 않던 교회들이 매주 차고 넘쳤다고 한다. 이에 여러 지역에서 기도회가 마을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알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두 할머니를 합심하여 기도하도록 인도하심으로써 부흥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부흥은 하나님께로 부터 옵니다. 그러나 그 부흥을 불당기는 것은 중보기도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있었던 부흥의 역사를 보더라도 중보기도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부흥에 대한 여러 책들을 보시면 중보기도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 책은 한권도 없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부흥과 회복의 약속과 관련해서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중보기도입니다.

2. 왜 기도가 필요한가?  

1]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지난 17차 컨퍼런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주제로 살펴볼 때, 첫 시간에 부분적으로 살펴봤던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동역자로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담을 창조하신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뭐냐면 아담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아담은 사람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어떻게 하셨냐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혹은 대표하여 다스리고 통치할 자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을 창세기 1장 26절, 그 다음에 시편 8편 3-8을 보면 나옵니다.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시편 8편 3-8절입니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기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혹은 대표하여 다스릴 경영자, 청지기, 통치자, 혹은 하나님의 대표자로 삼으셨다는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해 주셨는데, 이 권한을 부여해 주신 것이 얼마나 최종적이었든지 이 세상을 다스릴 권한을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다른 이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제가 큰 회사의 회장인데 이제 한분을 경영자로 초청해서 제가 세운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이  사장은 나로부터 회사를 경영할 그 권리를 부여받아서 나를 대신하고 대표해서 회사를 다스리고 경영합니다. 그런데 이분이 회사를 경영하는데 실적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큰 손해를 끼쳐서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새로운 사람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주려면 내가 줘야 합니까? 이분이 줘야 합니까? 당연히 이 사람에게 사표를 받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줍니다. 왜냐면 이 회사가 내 회사니까요. 이처럼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고 통치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칠 통치자로 경영자로 삼았는데 아담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다른 이에게 넘겨주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넘겨준 것이 아니라 아담이 넘겨 주었습니다. 아담이 누구에게 넘겨 주었냐면 사단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어디를 보면 알 수 있냐면 누가복음 4장 5-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6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사단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준 그 권한을 자기에게 넘겨 줬다고 말했을 때, 예수님이 그것을 전혀 반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권세를 다시 찾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담에게 주어진 권세를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다른 이에게 넘겨주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할 권한을 그만큼 아담에게 최종적으로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온전히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다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는 누구를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한 것을 말하느냐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중보기도만 하더라도 엘리야의 기도가 오늘날 드려야 할 중보기도와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이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하면서 이방신도 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세벨이 참다운 선지자는 다 죽이고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자들만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했겠습니까?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왕상18:22]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4]

물론 하나님은 엘리야가 알지 못하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을 남겨 두셨습니다.[왕상19:18] 그때가 그만큼 영적으로 침체된 시대임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시대에 이제 하나님께서 아합에게 엘리야를 보내서 그 아합의 죄로 인해서 그 땅에는 3년 반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고 난 뒤 3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나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열왕기상 18장 1절에 나옵니다.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여기에 보시면 비를 지면에 내리는 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비를 지면에 내리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했고, 그리고 이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영적 대결을 벌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응답하심으로 이방 선지자 850명을 처단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이 빗소리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듣는 소리가 아니고 엘리야만 들은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비를 보내고 계신 것을 알려주신 겁니다. 자 그럼 보세요. 1절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했고, 또 지금 빗소리가 들립니다. 그럼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했고, 지금 비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다 됐지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비를 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니까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때부터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가서 머리를 무릎사이에 끼우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 자세가 팔레스타인 여자들이 아이를 낳는 자세라고 합니다. 한번 간절히 기도하고 종을 보내면서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너머 지중해를 보라고 합니다. 종이 돌아와서 아무 일도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여섯 번까지 하고 일곱 번째 보냈더니 이번에는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지중해에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야가 이제 되었다고 뛰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손바닥만한 구름이 큰 구름을 이루고 약속했던 비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의 본보기로써 엘리야의 기도를 말합니다. 5장 17-18절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여기에 보시면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의 응답으로 비를 주셨다고 합니까? 엘리야의 기도 응답으로 비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18장 1절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시겠다고 그랬고, 지금 빗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엘리야가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기도하지 않았다면 비가 왔을까요? 안왔을까요? 지금 신약이나 구약이나 전체적으로 볼 때에 우리가 어떻게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느냐면 비가 안왔을 것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비를 보내시는 거고, 그리고 지금 비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셨는데, 그런데도 만약에 엘리야가 기도를 안했더라면 비는 안왔을 거라는 겁니다. 엘리야가 만약에 여섯 번째까지 기도를 했는데도 아무런 징조가 없으니까 아닌가보다 해서 기도하기를 멈추고 하나님이 하시겠지 그러고 그만 뒀더라면 비가 왔을까요? 안왔을까요? 안왔을 거라는 겁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 이 시대와 관련해서도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부흥을 보내시기로 계획하셨다. 지금 부흥을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시기로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신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럴지라도 부흥의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기 원하셔도 부흥이 안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 땅에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왜 기도해야 되는가?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공의로우십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사단에게도 공의로우십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 하고 자신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그랬는데, 그게 뭐냐면 이런 겁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어떤 사람이 노예로 팔려 있으면 그 값을 지불하기 전까지는 자유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노예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인데 자기 스스로 어떻게 값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는 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 값을 주고 그 주인에게서 사서 그를 자유케 해준 것처럼 예수님이 대속물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러 자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이러한 공의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6.25때 북한이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남한은 전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북한이 엄청난 군사력을 앞세워서 쳐들어 왔습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때 우리가 어떻게 했습니까? 미국과 UN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미국이 우리나라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드리는 중보기도 중에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함으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그 발판을 마련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를 한 번 보십시오. 사도행전 7장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무슨 때가 가까운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한 이방나라를 400년 동안 섬길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건지실 거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출애굽기를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바로가 왕이 되고 난 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많은 핍박이 왔습니다. 성경에 보시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랬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개입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밤낮으로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3-25절입니다.
“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여기에 보시면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움직이십니다. 환경을 움직이신 것이 하나님의 주도권이 직접적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것을 허락하셨다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주권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지요.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그들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셔서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출애굽기 3장 7-8절입니다.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여기에 보시면 때가 되었을 때, 환경이 어려워지게 되고, 환경이 어려워진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 백성들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이제 역사하셨습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역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드리는 겁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사야 하반부에 나오는 세 가지 약속에 회복에 대한 약속이 섞여 있다고 그랬는데, 그 첫 번째가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아도 중보기도가 얼마나 필수였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칠십 년 후에 회복시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11절입니다.
“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우리는 오늘날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당연히 이루어지지, 칠십 년 후에 하나님께서 회복시킨다고 했으니까 칠십 년이 지나면 당연히 회복될 것 아니냐. 그래서 우리는 시간만 지나면 될 줄 압니다. 하나님이 칠십 년 후에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까요.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그 다음절 12-14절입니다.
“12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1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여기 보면 아주 중요한 게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칠십 년 후에 저들을 회복시키시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 백성들이 기도하는 것이 요구되고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기도 없이도 그냥 이루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여태까지 본 것만 해도 그렇듯이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실 때가 되었을 때에도 때로는 저들의 환경을 움직이셔서 저들이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2장 37-38절에 보면 똑같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인데 참 중요한 부분들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37 보라 내가 노와 분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내어 이 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이 말은 뭐냐면 하나님이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운행하시며 그들을 앞서가시며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이러한 삶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32장 39-42절을 보십시오.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4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여기 보시면 저는 이런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하시되 하나님이 년도까지 말씀하시고 또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래도 기도해야 될 것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을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한 마음,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따라 행하는 것, 우리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가지고 주님을 찾는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이 약속이 주어질 것을 말합니다.

내일 오전에도 그 부분을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이 아무리 약속하셔서 이 시대에 하나님이 부흥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셔도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가운데 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기도입니다. 이것을 더 명백하게 말해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게 에스겔서 36장입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린 예레미야서에 회복의 약속들과 에스겔 36장은 다 연결된 겁니다. 에스겔이 약간 후이지만 겹치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예레미야가 보는 앞에서 포로로 잡혀갔는데 세 차례에 걸쳐서 잡혀 갑니다. 그 두 번째 잡혀간 것이 서기 전 597년입니다. 최종적으로 망하기 11년 전에, 그때 대규모로 잡혀갑니다. 그때 잡혀간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에스겔입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바벨론에서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것을 예언합니다. 에스겔서 36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회복시키냐면 그들 때문이 아닌 심지어 그들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들로 인하여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이름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35-37절입니다.
“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36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35-36절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37절에서는 그래도 너희가 구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그가 성경을 읽다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칠십 년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복될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게 다니엘서 9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랬더니 다니엘이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21일 동안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1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쭉 보시면 이번 주에 살펴볼 부흥을 위한 중보기도가 여기 나옵니다. 이번 주에 살펴볼 겁니다. 어떻게 그가 기도했는지,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그 기도가 나옵니다. 이렇게 기도하였을 때, 다니엘서 9장 20절 이하에 보면 천사가 21일 만에 그에게 임합니다. 원래 기도응답은 첫날 왔는데 오는 과정에서 영적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임하셔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보이시고 하나님이 그 이상과 예언이 응하여 이루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연대까지 말씀하셔서 약속하신 것이라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되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되 단순히 기도만이 아니라 아까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서야 되고, 한 마음과 한 도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반드시 같이 가야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만큼 기도는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3] 왜 기도가 필요한가?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 중보기도라면 그냥 한 번만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가 안되어서 아직 기도응답 안하신거라면 우리가 한 번 기도하고 기다리면 될 겁니다. 그런데 왜 안나는 84세가 되기까지 혹은 84년까지 기도했냐는 겁니다. 왜 엘리야는 일곱 번씩이나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를 때까지 그렇게 기도했어야 했냐는 겁니다. 왜 다니엘은 하나님의 응답이 그에게 오기까지 21일 동안 기도했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다니엘이 만약에 20일만 기도하고 말았다면 응답 받았을까요? 못받았을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있냐면 기도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을 보아도 하나님 보좌 앞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렸는데 거기 보면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이 있는데 그 향이 뭐냐면 성도들의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리고 8장 3-5절에 보면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시면 성도들의 기도가 쌓여져서 하나님 앞에 올라가고 그릇에 담겨져서 하나님의 심판이 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5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우뢰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되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일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도양이 채워져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이냐?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떤 기도의 양이 채워져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말이냐? 그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럼 그게 뭐냐? 저도 한편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 아직 깊이 잘 모르지만,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중보기도 책에서 더치 쉬츠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저는 개인적으로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절실하게 필요 합니다.

더치 쉬츠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측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이 말은 하나님 능력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한 개인들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 능력의 측정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언을 주시되 믿음의 분량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각자가 믿음의 분량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분량대로 예언하라는 겁니다. 또 창세기 15장 6절에 보면 아모리 사람들의 죄가 아직 관영하지 않아서, 완전히 채워지지 않아서 심판을 유보하십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큰 은혜라는 말이 나오고, 모든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한 예를 들면 마가복음 6장 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그들의 불신으로 인하여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행하시지 않는다. 혹은 행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말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실 수 없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함이라 이렇게 말하면서 어떤 때는 더 큰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에게 함께 하시는 능력이 각기 다릅니다. 또 은혜가 각기 다릅니다. 믿음도 그 분량이 각기 다를 수 있다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271p -“이런 능력의 일정 분량이 어떤 일을 성취하려면 영의 영역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성취하는데 서로 다른 분량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셨을 때 제자들이 가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와서 기뻐하면서 귀신들도 우리에게 복종하더이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세 제자가 변화산에 올라가 계신 동안에 아래서 아홉 명의 제자들에게 어떤 아버지가 귀신들린 자기 아들을 데려왔을 때 못쫓아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자들이 왜 우리들은 못쫓아냈냐고 물었더니 ‘이런 유’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어떤 종류의 귀신의 세력들은 더 큰 믿음이 필요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일을 성취하는데 서로 다른 분량이 요구됩니다. “육신의 영역에서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이루는 데 여러 가지 다른 능력의 수준이 필요한 것처럼 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치 손전등의 불을 켤 때와 건물의 불을 켤 때에 필요한 전력량이 다른 것과 같으며, 건물의 불을 켤 때와 도시 전체의 불을 켤 때에 필요한 전력량이 다른 것과 같다. 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일들을 성취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양의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까지 지속적인 기도가 필수적이라는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책에 보면 자기 아내의 자궁 속에 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 기도했는데, 기도하는 과정에서 그 혹의 통증도 심했었습니다. 하나님이 점점 줄어드는 환상을 보여주시는데 꼭 쥐어짜는 것 같은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에는 혹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초기에는 완전히 식물인간이 되어서 산소 호흡기로 연명하고 있던 한 소녀를 매주 한번씩 1년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소녀가 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1년이 필요했냐는 거고, 왜 한 달의 기도가 필요했냐는 겁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시한다. 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는 기도가 실제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흘러들어갈 때까지 그 일을 이루시도록 집중적인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새물결 선교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글 두 개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는 우리 선교회에 연합하는 부흥교회 자매님이고, 하나는 양산 남교회의 성도 얘기입니다.

부흥교회 이정화 성도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부흥교회 주원엄마예요
“먼저 새물결 모든 식구들께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올2월 중순에 혈액 암(골수 이형성 증후군)판정을 받은 당시 임신8주의 몸으로 유산을 하고 골수이식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단 진단을 받았습니다. 생명주신분이 주님이시고 실수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모든 것을 걸고 붙들기까지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과 갈등이 있었지만 애기를 포기 않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만 바라봤습니다. 그 가운데 로마서4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가운데 서길 원하시는 주님을 만나면서 담대함이 더해졌습니다. 임신상태로는 애기를 낳기는커녕 6개월도 살지 못한다 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9월 중순에 건강한 딸을 자연분만 했고 바닥을 치던 혈액수치도 많이 회복이 되었어요. 정말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분들께 많은 기도와 사랑을 받은 사실에 순간순간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을 가능케 한 나의 주 하나님께 모든 사랑과 감사를 올립니다. 빨리 회복되어 전처럼 새물결 집회에서 만나뵙길 기대하며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양산 남교회 이남희 성도
“5월에 식도암3기 판정 받은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행하심 가운데 완치 되셨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 이건 기적이라고 환자 치료 하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 겪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월7일에 내가 너희 가정의 구원사역을 시작했다고 감동 주시고 그날 아버지 편찮으시다는 전화를 받은 이후 두 번의 목사님과 교회 식구들 심방과 호스피스 병동의 많은 믿는 사람과 병실마다 믿는 자에게 인도하시면서 불신자 이신 어머니 아버지께서 차례대로 예수님 영접하시고 지난 주에 양산 남교회에서 평생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소 예수님의 '예'라는 소리도 듣기 싫어하시는 분이셨고 병원 간병 하는 동안 자꾸 예수님 얘기 한다고 -대부분은 어머니께서 간병 하셨고 가끔 제가 갔을 때-저를 못오게 하시기까지 하시던 굉장하신 분이신데 하나님 은혜로 영과 육을 모두 회복 시키셨습니다. 하나님 알고 사랑하는 이 길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로 저를 초청하시고 그분의 초청에 응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낙심 인색 원망 등 형편없는 나를 인식하고 주님 찾는 것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고등부 이후로 신앙생활 끊긴 남편이 변화하겠나라는 불신을 깨뜨리시고 주님 하실 것이라는 신뢰함을 주시고  남편 신앙을 회복시키시고 관계를 회복시키셨으며 용서를 구하게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고 아버지 편찮으시단 말씀 듣고 하나님께서 초청하셨구나 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특별한 은혜를 베푸셔서 평안과 위로를 더하시는 친절하신 하나님임을 알게 하시면서 늘 기쁘게  예수님을 전하게 하셔서 아버지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 시키셨습니다.
이정표를 보이시면서 늘 친절하게 안내하시고 포근하게 감싸 주시며 늘 ‘내가 있잖아 넌 울지말고 기뻐해’라고 말씀하시며 치유를 베푸시는 능력의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곁에서 기도해 주신 양산 남교회 목사님사모님 교회식구들.. 기도해 주신 수많은 선교회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가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냐면 포도나무교회 성도들이 저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면 제가 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해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2월 달에 영국, 독일, 중국, 필리핀을 연속으로 네 주를 해외 사역을 섬기러 간적이 있었습니다. 토요일에 들어와서 월요일에 나가고, 시차가 엄청 다릅니다. 거기다 필리핀에 갈 때는 네 번째 주인데, 주일 날 하루 종일 교회서 섬기고 그 다음 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나갔습니다. 시차 적응을 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힘든 것을 알면 성도들이 더 기도합니다. 제가 필리핀 가서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면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제가 느끼는 게 제가 영적으로 훨씬 더 건강하고, 하나님께 더 예민하고, 육신적으로도 매우 안정됩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기도 안하면 금방압니다. 여지없습니다. 축 처지고, 지치고, 힘이 들고, 머리는 혼동됩니다.

어떤 목사님이 남미의 집회를 가셨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눈먼 사람 나와서 기도 받으라고 해라’ 그렇게 말씀하셔서 사람들을 초청했더니 아무도 안나오고 장님인 할머니 한분이 나와서 기도해 주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 시간에 또 눈먼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셔서 초청했더니 아무도 안나오고 그 할머니만 또 나오는 겁니다. 안나왔으면 좋을텐데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이나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일곱 번째 그 할머니가 또 나옵니다. 참 쉽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곱 번째 기도했는데, 눈이 떠졌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때서야 그 할머니가 자기가 기도 받으러 나오는데 문어 같은 게 자기의 머리를 감싸고 있더랍니다. 하나님이 환상을 보이신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한번 기도할 때 다리 하나가 딱 잘려 나가더랍니다. 그런데 또 그 다음 시간에 나가서 기도 받으면 또 다리 하나가 딱 잘라지고, 그래서 일곱 번째 기도를 받는데 그 모든 게 잘라지면서 눈이 떠진 겁니다. 그러니까 문어 귀신이 그에게 붙어있었다 그 얘기는 아닙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한 가지가 뭐냐면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기도의 필요성과 절박성이 있는데, 이 시대에 엘리야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리소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진짜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리셔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존재조차도 안받아들입니다. 여러 가지 과학적인 얘기를 대면서, 여러 가지 이런저런 것들을 믿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해서 변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서 64장의 기도처럼, 이런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인데, 엘리야 시대처럼 하나님이 친히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셔서 하나님이신 것을 알려주시는 그게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이키시는 분임을,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것을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데 특별히 기도하되, 하나님 부흥의 손바닥만한 그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머리를 양 무릎사이에 집어넣고 간절히 간구했던 엘리야처럼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렇게 기도해야 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다가오는 하나님 부흥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러 많은 사람들에게 환상으로 마음의 그림으로 여러 가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흥이 임박했다는 사실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시고, 빗소리가 들렸을 때, 그 비가 오기 위해 실제적으로 구름이 떠오르기까지 그 일이 실제적으로 일어나기까지 쉬지 아니하고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던 그 기도는 우리가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기도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도는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때까지 정하셔서 약속하신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붙들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중보기도 컨퍼런스를 통해서 더 기도하는 자리로 회복되어질 뿐만 아니라 기도할 수 있는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