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람과 주변의 사람들
딤후 4:9~18
한의학에서는 사람의 체질을 네 종류로 나눈다고 합니다. 소음체질 태음체질, 소양체질 태양체질입니다. 네 종류입니다. 요즘이 이것이 세분화되어 8체질로 구분한답니다. 제가 가서 검진을 받아봤는데 제가 목양체질이랍니다.
또 사람의 혈액형도 4종류입니다. A형 B형 AB형 O형,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사람의 혈액형에 따라 기질과 성품을 분류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씨 뿌리는 비유”에도 보면 사람의 마음을 네 종류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똑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품도 다양하고 기질도 다 다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각자 기질과 성품대로 쓰시려고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 주변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이나 생각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대로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옛날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왜죠? 주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누가 선택받은 사람인가요? 알수 없습니다. 다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을 보아 하나님의 사람인줄 믿어야 합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동역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우리 주변에 붙여주시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어떻게 동역해야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혼자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 사도 바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주신 사람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를 바로 알고 동역하기를 축원합니다.
1. 내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가’ 같은 사람입니다. 11절을 보세요.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여기 등장하는 ‘마가’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마가요한입니다. 그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그런데 바나바와 사울의 전도여행팀에 참여하기로 했다가 여행 초반에 여행을 포기하고 되돌아갔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마가는 전도여행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견딜 수 없어서 팀에서 이탈했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해 전도 팀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얼마 후 제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고 팀을 꾸릴 때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다시 데려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절대로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팀이 깨어집니다.
행15:37절을 보세요.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마가” 때문에 바나바와 바울이 대판 싸우고 갈라졌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사람의 기질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잘 권면하고 세우는 스타일인데 바울은 성품이 강직하고 분명해서 남의 허물과 실수를 용납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부요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는 ‘인내’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 마가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에게 단단히 찍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오늘 본문에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된 것일까요? 골치 덩어리였던 마가가 변화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도 유익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도 그를 용서하고 받아 들였고 그를 데려오라 한 것입니다. 또 사도 바울도 변화된 것입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하고 용압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죽”이 우리 유태길 집사님 號(호)입니다. 대나무 어린 묘목입니다. 이것은 심은 지 4년이 되고 아무리 물을 주고 가꾸어도 싹이 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다 5년이 지나면 어느 날 손가락만한 죽숙이 나오는데 갑자기 하루에 30cm 씩 자란다 합니다. 왜 그동안 자라지 않았는가 알아보니 그동안 뿌리를 수백 미터씩 내리느라고 자라지 않다가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에는 쑥쑥 자란답니다. 이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신앙이 자라는지 잘 모르지만 때가 되면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골치 아프던 사람도 변화되어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마가는 바울이 힘들어 할 때 찾아와 동역을 했고 결국 그는 신약성경 마가복음을 기록하는 일에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처음부터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성령이 역사하여 변화되면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가뿐만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도 과거에 누군가에게는 골치 아픈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니 이 정도 된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먼저 주변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주님에게 유익을 주는 동역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나를 버리고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은 사도 바울을 따르던 사람이었습니다.
데마는 교회와 주의 종을 섬기려니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에게는 구원의 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다 바울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세상 것은 다 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갑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일하던 데마 입장에서는 세상 쾌락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고 견디다 중도에 포기하고 간것입니다.
10절을 보세요.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는 누구보다 누굴 더 사랑했나요?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버리고, 사명도 버리고, 향락의 도시인 데살로니가로 간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 도시에 가서 우상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했다고 했는데 뭘 했다는 것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것 다 즐기고,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니 술도 못 마셔, 담배도 못 피워, 주일에 친구들과 놀라가는 것도 안 돼, 그러니 너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쪽을 포기한 것입니다. 어느 쪽입니까? 결국 세상의 재미가 더 좋아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이 제자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셨나요?
마16장 24절에 주님은 이렇게 요구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여기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뭘까요? “내 것, 내 욕심, 내 유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을 따르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양쪽을 다 붙잡으려 하지 마세요. 잡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한쪽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 데마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는 누가 복음을 기록한 ‘누가’와 동등한 수준의 인물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보좌하며 열심히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골로새서 4장에 보면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빌레몬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를 “동역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더 사랑하여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오늘날도 데마와 같은 사람은 많습니다. 정말 열심히 섬겼는데 어느 순간 다 버리고 세상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주님을 섬겼던 사람이고 구원 받았던 사람이라면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영영 마귀에게 잡혀 지옥 갔다면 그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3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주님을 배반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백성이 아닙니다. 왜죠?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믿었으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순간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하고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일시적으로 떠나고 일시적으로 부인할 수 있으나 구원받은 백성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 주변에 데마 같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를 알게 되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우리도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세상 재미에 빠져 있다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주님을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 원수 마귀는 우리가 세상에 빠지도록 갖가지 유혹을 합니다.
이성에 빠져서 넘어지기도 하고, 돈에 빠지고 마약과 술에 빠지고 심지어는 동성애에 빠져서 죄가 죄인 줄도 모르고 살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정신이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자기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빠져 갑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그런 일을 방지하려면 성령과 말씀으로 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3. 내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 주변 사람 중에는 이상하게도 해를 끼치는 악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잘 대해주고 선을 행해도 이상하리만큼 대적자들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14~15절을 보세요. 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15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여기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직업이 구리 세공업자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해롭게 하며 힘들게 한 사람입니다. 데마는 조용히 떠나갔지만, 이 알렉산더는 얼마나 악하게 행동을 했는지 해를 많이 입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디모데에게 너도 그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왜 바울을 괴롭히고 해를 끼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 그도 교회 밖의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주의 일을 한다 하면서, 주의 종을 박해했습니다. “우리말을 심히 대적했다”는 것으로 보아 설교 내용이나 가르치는 것을 가지고 공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대적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주님께 맡깁니다. “주께서 저가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 그의 악행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딤전1:19~20절에 그가 행한 일을 간단히 기록했습니다.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네오, 그리고 알랙산더, 그들은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주님을 모독하지 못하게 사단에게 내어준 사람이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무시하고 주의 종들을 대적하고 원망불평하고 설교를 듣지 않고 공격합니다. 명분은 “교회 정의”입니다. 교회를 바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의롭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대적하고 주의 종을 대적하면 그냥 두지를 않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이런 사단의 세력이 교회를 흔들 때 정말 힘이 듭니다. 그렇다고 대항하여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시니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16절을 보세요.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죠? 17절을 보세요.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힘을 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이 전파되게 하고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4.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질병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고쳐 달라고 기도를 간절히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몸에 있는 질병은 하나님이 안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그는 많은 병자를 고쳤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살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그런데 그 대신 하나님이 그에게 의사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가 누가입니다. 이 누가는 사도바울과 끝까지 동행하며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딤후4:11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는 끝까지 남아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이 곤경에 처하여 옥중에 갇혀 있을 때에 데마는 떠났고 그리스게와 디도는 사역지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오직 누가만은 떠나지 않고, 끝가지 곁에 있었습니다. 왜죠? 그는 의사이기에 연약한 바울을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시험이 들었을 때, 환난을 당할 때, 누가처럼 교회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지켜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좀 어수선하고 복잡한 일이 있게 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골치 아픈 일을 당하는 것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데마도 떠났고 다 떠났지만 누가는 자기 사명이 뭔지를 알고 바울 옆에서 그를 끝까지 섬겼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유명한 성경, 누가 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려울 때 남아서 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믿음과 정절로 그리고 신의를 지키며 자리를 지킬 때, 하나님의 예비해 놓으신 놀라운 복을 받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2015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은 가을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면서 나는 내 주변 사람에게 그리고 주님의 교회와 목회자에게 어떤 사람이었나를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에서나 주의 종들에게 유익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익을 좇기보다 주님의 이익과 영광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네게 주어진 사명과 직분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배신자도 있고 떠나간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닌 늘 함께 했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람이 되려면 때로 주님을 위해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합니다. 때로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낙망하지 말고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 곁에 늘 계셔서 위로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과 잘 협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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